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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파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아니 무엇이었을 수 있었나 (2)

  • 작성일 2023-12-01
  • 조회수 1,203

   미래파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아니 무엇이었을 수 있었나 (2)


송종원


   1. 문제는 가족이야


   지난 회차에서 김민정의 시에 쓰인 고통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 두었다.1) 그 이야기를 먼저 꺼내 보자. 『날으는 고슴도치아가씨』에 실린 해설의 가장 뒤에는 이런 문장들이 있다. 


   “지금 내게는 그저 상식적이고 흔한 질문이 떠오른다. 어째서 한 시인의 머릿속에 이토록 끔찍한 이미지들이 미친 듯이 자라고 있는 것일까? 이 여자의 악몽들은 대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창문 밖을 바라보니, 초등학교 아이들이 정문을 나와 마구 거리로 쏟아지고 있다. 햇살이 총총, 가득하다.”2)


   “상식적이고 흔한 질문”이야말로 비평이 던져야 하는 진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비평이 고담준론을 늘어놓을 때 작품과 독자 사이에는 장벽이 생기고 비평가와 작가 사이에 불신이 형성된다. 비평이 자상해지는 순간 독자는 문학 작품 곁으로 다가오고, 작가는 비평가와 협업에 흥미를 느낄지 모른다. 각설하고. 인용에서 질문과 이어지는 서술을 보면 이장욱은 저 질문의 답으로 ‘학교’를 의심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런데 사실 그는 해설 중반에 악몽의 발신처를 한번 짚고 넘어간 적이 있다. 


   “아마도 이 시집에 대해 말하면서 이 시집에 담겨 있는 가족 풍경을 피해 갈 수는 없을 것 같다. 가족들이 모여 있는 공간은 어떤 의미에서, 들끓는 거리와 세상과 내면의 악몽이 발원하는 곳이면서, 그 악몽들이 압축되어 있는 곳이다.”3)


   나 역시 가족을 지목하고 싶다. 모든 가정마다 해골이 하나씩 있다고 했던가. 문제는 김민정이 그린 가족 속의 해골이 어떤 사연을 가졌는지에 있다.    


   담배 피우다 담배 먹은 엄마가 글쎄 날 염통 속에서 건졌다지 뭐예요 아마도 연기가 매콤해서 내가 재채기를 했나 봐요 훌쩍거리는 내 콧소리를 듣고 주먹을 입에 넣어 바람 빠진 럭비공 같은 염통을 턱 하니 뽑아냈다나요 (···중략···) 난 가끔 엄마의 목구멍에 미끄럼틀이 깔려 있는 건 아닐   까 속 깊이 플래시를 비춰 보곤 해요 그러나 심심해지면 미끄럼틀을 타고 미끄러져 보다 엉덩방아를 찧기도 하죠 줄줄이 총살당한 죄인들처럼 고개를 늘어뜨린 바나나나무들이 죽기 전에 참 많은 바나나를 흘려 놓았거든요 만일 엄마가 봤으면 기를 쓰고 다 주웠을 텐데 그럼 나도 다 까먹고 배 터져 죽었을 텐데······ 참, 엄마의 애기집 속에는 아직 한 아이가 살고 있어요 하지만 난 걔를 좋아하지 못해요 바나나 나라에서 바나나씨로 날아온 걔가 내 탯줄까지 쪽쪽 빨아먹고는 십여 센티 장딴지로 혼자 굵어 갔거든요 나가 나가 당장 우리 집에서 짐 빼 그 아인 살색 샤프심처럼 삐쩍 곯은 날 염통까지 단번에 걷어차 버렸어요 (···중략···) 하지만 뽑혀 나간 내 탯줄은 영 찾을 수가 없었어요 코털 한 가닥만 떨구어도 바나나로 때려죽이겠다고 그 아이가 안 보이는 이빨로 날 따라다니면서 자근자근 씹어댔거든요 어떡하죠 미처 주워오지 못한 내 물렁뼈들이 거기 묻혀 있는데 어떡하죠 어긋난 내 팔다리뼈 사이로 콜콜콜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는데 어떡하죠 진공청소기로 빨아내기 전에 엄마가 애기집을 싹 다 부시고 이사 가겠다고 하는데······


   - 「회상의 회상 - 나는 안 닮고 나를 닮은 검은 나나들2」 부분


   “염통”은 단지 속된 뉘앙스를 만들기 위해 사용된 어휘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을 상징하는 심장이기도 하면서 염려가 가득 찬 통이라는 의미를 품는다(그래서 엄마는 계속 담배를 피워대고 있다). 엄마는 나를 심장처럼 아꼈으며 동시에 나는 엄마가 염려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엄마는 “담배 먹고”(담(膽)을 배(倍)로 먹어, 담대하게) 나를 낳았다. 그렇다면 엄마의 염려는 무엇이었을까. 다음은 답을 위해 이어 보는 질문들. 엄마는 왜 바나나에 집착했을까(사실은 엄마의 집착을 강요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엄마의 자궁 안에 남아 있는 아이는 누구일까(엄마는 아직 그 아이를 낳지 못했다). 엄마가 애기집을 부시고(자궁을 적출하고) 이사를 간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이혼 협박?).

   엄마를 옥죄던 염려는 바나나를 통해 암시되어 있지만 태어날 아이의 성별에 대한 걱정이다. ‘바나나’, ‘거북이’, ‘두꺼비’(떡두꺼비 같은 사내아이의 그 두꺼비), ‘개새끼’······. 다 같이 이 시집의 언어들이 조롱하고 총살시키고 죽어 나가게 했던 것들이다. 김민정의 시가 욕설과 은어 그리고 성적인 소재와 이미지를 거침없이 써내는 면은 여러 사람들이 흥미로워했지만, 그것들은 말 그대로 흥미를 끌기 위한 선정성과는 거리가 멀며, 여러 평자가 진단한 것처럼 아이의 천진한 시선과도 거리가 있다. 의외로 그것들의 목표는 명확하다. 증언과 폭로가 그것이다! 이 시인은 특정 성별에 대한 집착과 선호, 그에 작동하는 남성 중심적 가족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를 유지하기 위한 엽기적인 작태와 그로 인해 발생한 피해자들에 대해 목격한 사실을 진술하고 기록해 두는 일에 열중이다. 


   가장 뻔한 이야기, 그것은 우리들 누구나의 이야기. 내가 슬픈 건, 언젠가 내가 족집게였을 때 미처 다 안 뽑혀버린 이야기. 엄마는 그때 또 나를 낳고 있었지


   - 「陰毛 한 터럭 속에 세상 모든 陰謀가 다 숨어 있듯이 –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의 ‘단추’를 위하여」


   내가 ‘족집게’였는데 왜 내가 뽑는 게 아니라 안 뽑힌다는 서술이 동반되는 것일까. 간단하다. 이 시는 ‘나’를 뽑아내려고 했지만 내가 안 뽑힌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앞에 인용한 시에서 그려진 ‘미끄럼틀’과 ‘엉덩방아’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도대체 왜 나를 뽑아내려 했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족집게’라는 말에 다 숨어 있다. 그것을 뒤집어 읽어 보자. ‘게(계)집족’, 내가 계집족이었기에 나는 뽑혀질 뻔했는데, 엄마는 나를 낳았다. 시인은 이 탄생 서사에서 한국 사회가 모의해 놓은 음모를 읽는다. 그 시절 모두가 다 알고 있던 누구나의 이야기라는 말이 참혹하다. 그리고 그 참상이 여전히 진행 중인 이 사회이기도 하다. 세상의 음모는 여성은 태어나기도 전에 죽임을 요구당하는 존재라는 사실에 있다. 이제 이 시집에 들어 있는 악몽의 기원이 어디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가. 기원을 확인하고 나니 이 시집을 둘러싸고 제출되었던 20년 가까이 된 비평의 언어들(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영향력이 있는)이 그동안 시와 얼마나 분리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회상의 회상 - 나를 안 닮고 나를 닮은 검은 나나들2」를 읽으며 한 평론가는 이렇게 적었다. 


   “처음부터 김민정의 시는 유머를 도드라지게 내세운다. (···중략···) 이 시의 이야기는 진지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같은 의미에서 끔찍한 것이 아니다. 이 시는 특별한 놀이의 소산이다.”4)


   이 시의 사건이 가진 내용을 보면 당연히 놀이로만 읽을 수 없으며, 이야기의 어조가 명랑하다고 하여 진지하고 끔찍한 것을 다루고 있지 않는 것도 아니다. 사건의 내용에 둔감했던 비평은 이 시집의 언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잘못된 진단으로 나아간다. 


   “그녀는 무서운 사건과 비통한 감정을 이야기한 게 아니다. 그녀는 다만 어떤 사건과 감정을 ‘이상하게’ 겪었을 뿐이다.”5)


   중요한 것은 이상하게 겪는 방식이 아니라 그 사건이 어떤 것인지를,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어떤 문제들을 짚고 있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이상하게 김민정의 시를 읽을 때 비평가들은 김민정 시의 언어가 지시하는 사건은 보지 않고, 지시하는 손가락의 모양새나 거기에 얹힌 장신구만을 본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오기도 한다. 


   “그녀의 시에 등장하는 무수히 많은 동물들은 ‘나’의 분신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적대적 타자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서정적 동일화의 세계와 무관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타자는 타자다’라는 단호한 선언이 머쓱해질 만큼 자유로워 보이는 세계이기도 하다. 그들은 “나는 안 닮고 나를 닮은” 복합적 존재들이다. (···중략···) 인용된 시에서 ‘고등어 부인’과 ‘나’의 관계가 또한 그렇다. 이 존재들과 ‘나’의 아웅다웅이 그녀의 시를 이끌어 간다. (···중략···) ‘나’와 타자는 동일하지 않지만 권위적 중심이 없기 때문에 서로 평등하게 아웅다웅할 수 있다.”6)


   핵심은 아웅다웅의 형식에 있지 않다. 역시나 중요한 것은 아웅다웅하는 내용에 있다. 시(「고등어 부인의 윙크」)가 길어 전문 인용은 피한 채 시의 대강을 설명해 보려 한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 보니 밤의 푸른 냉장고는 고장이 났고 나는 거기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가 이 시의 도입부이다. 아는 이는 알겠지만 여기에는 산울림의 노래 ‘어머니와 고등어’가 부분 인용되어 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 보니”가 그것인데, 시는 인용을 여기서 그치지만 인용되지 않는 부분의 가사가 시가 전개해 놓은 꿈을 만든다. 시의 본문은 노래 가사에서 촉발된 꿈의 장면들이다. 그래서 노랫말을 조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 보니/ 한 귀퉁이에 고등어가 소금에 절여져 있네/ 어머니 코고는 소리 조그맣게 들리네/ 어머니는 고등어를 구워 주려 하셨나 보다/ 소금에 절여 놓고 편안하게 주무시는구나7)


   이 노랫말이 시 속 화자의 낮잠 속에서 변형되어 꿈이 될 때 그 꿈은 저 노랫말이 촉발한 시인의 ‘갑갑증’의 소산이기도 하다. 아마도 시인은 노랫말에서 고등어가 아니라 어머니가 소금에 절여져 있는 모습을 읽었을 것이고(돌봄노동으로 인해), 여기서 발동한 갑갑증이 커져 시에 기름에 튀겨지고, 이빨에 뜯기는 어머니의 자리를 더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노래하는 아들은 자신이 부르는 대상의 진실을 전혀 몰라보고 있는 셈이다. 자기 멋대로 자위하듯 어머니가 편안하게 주무시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그 증거이다. 어머니를 노래하지만 그녀의 욕망은 이 노래 가사에 끼어들 틈이 없다. 

   시에 그려진 꿈은 자위하는 아들과 고등어의 이미지를 뒤섞어 고등어 부인의 자위를 등장시킨다(프로이트가 말한 꿈의 전치,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이 시의 마지막에는 꿈밖 현실이 그려지는데, 거기에는 아들의 자위 흔적처럼 보이는 음모(陰毛)를 비질하여 쓰레받기에 담는 엄마의 모습이 나온다). 고등어 부인이 자위를 하며 ‘너도 하고 싶은 거지?’라고 화자에게 답을 강요할 때, 이 질문은 ‘너도 얼른 고등어(고등어 재워 두는 자애로운 어머니)가 되고 싶지?’라는 물음에 가깝다. 누구의 질문인가. 이것은 명확히 남성의 것이다. 여기에 여성을 증언하는 시인이 답한다. “아니 씨발, 아니, 아이라잖아”. 언제나 그렇듯이 남자들은 여자의 부정(no)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 시의 화자는 그에 맞서 강렬히 저항하는 중이다. 

   이런 내용이 그려져 있는데도 그 내용을 들어 보지 않고 단지 아웅다웅하는 형식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김민정의 시는 언어의 질감이 아니라 언어의 내용을 더 중요히 다뤄야 했다. 당연히 형식보다 우위에 있는 내용을 말하려는 바가 아니다. 내용 없는 형식의 위험에 대한 말이다. 

   조금 뜬금없는 말 같지만, 『날으는 고슴도치아가씨』를 비평하기 위해 꼭 인용을 해야 한다면 ‘추의 미학’이나 ‘정신분석’ 같은 정보들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법조항들을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국민은 혼인과 출산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식하여야 한다(제8조 제1항)

   가족 구성원 모두는 가족해체를 예방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제9조 제1항)8)


   2005년 1월에 시행된 건강가정기본법의 조항들이다. 미래파가 출현한 시점과 비슷하게 등장한 이 법안은 여전히 가족이라는 구성체를 상당히 강조하고 있다. 이 조항들은 우리에게 명령하고 압박한다. 법이 말한다. ‘가족이 유지돼야 건강한 사회이다’, ‘혼인과 출산이 중요하다’, ‘가족을 해체하는 각종 상상은 위험하다’ 등등. 국민이란 말을 걸고 압박을 가하는 이 법에는 누구의 욕망이 작동하는가. 혼인과 출산의 주체인 여성의 욕망은 저 말이 설파하는 자리에 들어 있는가. 사실 우리의 진심은 저 법의 언어에 비추어 볼 때 비-국민의 자리에 위치하지 않는가. 질문에 질문을 더하면 우리는 어떤 한 느낌에 도달한다. 엽기적인 법! 김민정의 『날으는 고슴도치아가씨』로 엽기를 말하고자 했을 때 우리는 엽기적인 수사들이 아니라, 엽기적인 법과 가족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풍경을 더 이야기했어야 했다. 



   2. 퀴어라는 가면, 비평(批評)이 타지로 몰아낸 언어들


   한국의 가족은 한국 시단에 실로 많은 시를 제공했다. 여기 김민정과 더불어 가족의 구속력이 강하게 작동하는 모습을 그린 미래파 시인이 또 한 명 있다. 황병승이라고 말하면 어떤 반응이 펼쳐질지 궁금하다.9) 이 시인에게 ‘가족’은 의외로 상당히 과소하게 말해진 주제이다. ‘퀴어’라는 명칭으로 더 자주 말해지고 평가되었기 때문일 텐데, 우선 퀴어라는 호명을 불러 온 시 한 편을 먼저 읽자.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

   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뒤로 걸을까 봐요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항문이 도무지 혐오스럽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입술을 뜯어버리고

   아껴 줘요, 하며 뻐끔뻐금 항문으로 말할까 봐요


   부끄러워요 저처럼 부끄러운 동물을

   호주머니 속에 서랍 깊숙이

   당신도 잔뜩 가지고 있지요


   부끄러운 게 싫어서 부끄러울 때마다

   당신은 엽서를 썼다 지웠다

   손목을 끊었다 붙였다


   백 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도 됐다가 고모할머니도 됐다가······


   부끄러워요? 악수해요


   당신의 손은 당신이 찢어버린 첫 페이지 속에 있어요 


   - 「커밍 아웃」 전문


   생각해 보면 시집의 제목에 쓰인 “여장남자”라는 표현, 그리고 저 시의 제목 “커밍아웃” 등 이 시인의 첫 시집은 노골적으로 퀴어적 성격을 드러냈다. ‘커밍아웃’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색할 정도로의 노출이었던 셈이다. 결과적으로 『여장남자 시코쿠』가 퀴어의 언어를 매개로 ‘퀴어적인 미학’을 형성했다는 평가는 부정하지 않지만, 퀴어에 집중되던 시들이 정말 퀴어를 그린 것인지에 대한 검토는 필요하다. 시가 커밍아웃한 내용에 의외의 것이 있다. 신기하게도 시의 목소리가 어렵게 꺼내 놓고 있다는 것을 도드라지게 가시화했는데도 비평가들은 그것을 몰라보았다.  

   “나의 진짜는 뒤통수인가 봐요”는 사람들이 나의 면전이 아니라 나의 뒤통수에서 수군거린다는 의미에 가깝다. 또한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에요”는 속된 말로 사람들이 ‘나를 구리게 여긴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시에 그려진 ‘나’는 사람들이 거리를 두는 존재이며 선정적인 호기심과 더불어 차별의 눈초리 속에서 말해지는 존재이다. 유년을 그리는 시편을 보면 시의 주체가 아주 어렸던 시절부터 세상으로부터 그런 시선을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가령, 「여장남자 시코쿠」에 그려진 아이 화자의 필통에는 누군가 ‘똥’이라고 적어 놓은 주홍글씨가 있었다(이 주홍글씨가 아이만을 지시하는 것일까). 황병승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쥐’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쥐방울만 했던 어린 시절부터 사회는 이 아이에게 불결함과 께름칙한 놀람의 이미지를 부여했고 아이는 늘 그로부터 숨거나 달아나고 싶어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저 시가 말하는 부끄러움은 이러한 정황 속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저 부끄러움은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인식한 종류의 것이 아니라 태생의 것에 가깝다. 이것을 퀴어의 감정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고 온당할까.     

   질문을 좀 더 이어 보자. 이 시에는 화자가 노골적으로 말하다 말을 멈춘 지점이 있다 앞서 커밍아웃을 또렷하게 가시화했다는 언급이 지시하는 대목도 여기다. 저 말줄임표를 동반한 구절을 보라. 쥐처럼 도망치고 싶은 화자가 손목을 끊어내는 결단을 할 때 그는 왜 “백 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와 “고모할머니”가 되는 것일까. 그리고 시의 주체는 왜 여기서 말을 끊었을까. 그의 ‘가계(家系)’에 반복되어 온 일이라는 연상이 죽은 조상을 불러 왔을 것이다. 그리고 가계의 속성을 끊고 싶은 마음이 말을 끊어버렸다. 어쩌면 이 가계의 이야기가 시인이 진짜 커밍아웃하고 싶은 것이고 시집의 첫 페이지에서 찢어버린 장면이었을지도 모른다. 


   북향이 남향이 된 집에서

   죽은 아빠가 한나절 여기저기 흙칠을 하다 떠나간 집에서

   향 피우는 냄새에 자꾸만 헛구역질이 치미는 집에서

   아가는 없고 아가의 울음소리만 가득한 집에서

   할머니는 곤지곤지 잼잼 혼자 놀았다


   - 「존재의 세 가지 얼룩말」 부분


   이 집의 형상은 시적으로 연출된 것이라기보다 아주 사실적인 풍경으로 읽을 만하다.10) 향 피우는 냄새가 가득하고, 죽음과 삶이 자주 자리를 바꾸고(북향이 남향이 되고), 할머니가 아기도 없는데 (혹시 연지곤지를 찍고?) 아기랑 노는 모습으로 변신하기도 하는 집은 어디일까. 머릿속에 특정 공간이 떠오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아직도 감이 안 온다면 이런 문장은 또 어떤가.


   당신을 묘사할 수 없습니다 일에 미친 여자는 매일 아침 나를 칼 위에 낳고 춤에 미친 남자는 밤마다 칼을 흔듭니다 무서워서 매일 저녁 입이 돌아가는데.

   아무것도 발음할 수 없습니다. 

   - 「니노셋게르미타바샤 제르니고코티카」 부분


   묘사가 어렵고 무서운 존재들을 마주하며, 칼 위를 걷거나 칼춤을 추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누굴까. 그렇다. 무당이라고 불리는 ‘샤먼’의 모습을 떠올릴 만하다. “이쪽은 춤추고 저쪽은 눈물바다”라고 쓰인 구절에서 춤추는 쪽에 있는 사람들 역시 그들이다. 그러고 보면 샤먼의 문화에서는 박수무당처럼 ‘여장남자’라는 형식도 낯설지 않다.11) 나는 황병승이 처음 내딛은 시의 자리가 저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추측한다. 그리고 그 자리는 시인이 탈출을 감행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 시집 안의 주인공은 자신을 옥죄는 자신의 기원, 그 가계로부터 벗어나려 하고 그것과의 연을 잘라내려 한다. 그래서 이 시집에는 자주 ‘컷’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꼬리를 자르는 도마뱀이 나오고, 가족과 불화하는 내가 나온다. 그리고 탈출의 형식은 또 있다. 


   쥐, 계단을 뛰어오른다······ 그저 놀랍다!


   - 「서랍」 부분


   계단을 뛰어오른다는 말은 존재를 변환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벽을 마주한 존재가 도약을 통해 불연속적인 길을 다시 잇는다. 여기 두 개의 놀람이 있다. “쥐”(불결하고 피하고 싶은 것)를 본 사람들의 놀람과 ‘쥐’가 다른 존재로 변환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시선의 놀람이 그것인데, 전자가 일반적인 사람의 반응이라면 후자는 시인의 것이리라. 자신의 존재에 여러 가지 가면을 씌워 자신의 기원을 지우고, 또한 그 가면을 쓰는 과정에서 자신과 동류의 존재들을 확인하며 이 사회가 ‘똥’처럼 여기는 존재들과 악수를 나눈다. 그러니까 다음과 같은 해석과 평가는 어딘가 애매하다. ‘통어하는 중심이 없다’는 말과, ‘권위적인 중심이 없다’는 말은 미래파를 옹호하는 글들에 너무 자주 등장하는 클리셰에 가깝고 작품의 실질과도 차이가 있다. 


   “확실히 황병승의 시에는 황병승이 없다. 그는 그 자신의 주치의가 되기도 하며, 뒤통수와 항문이 되기도 하고, 자궁 달린 남자, 도마뱀······ 등등이 되기도 한다. 고유명을 부여받아 온 캐릭터화 된 존재들도 산발적으로 출현한다. 이 캐릭터들을 통어하는 중심은 없다. 그렇다면 황병승은 ‘이 무수한 존재들은 모두 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의 시는 어린아이의 역할 바꾸기 놀이 같은 것에 가까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어딘가 절박하다.”12)


   시 속의 변환이 절박하게 이루어진다는 부분을 잘 읽어냈지만 통어하는 중심이 없다는 말은 과장이다. 무수한 연기를 하며 모두가 나인 것처럼 말하는 정황의 밑바닥에 절박하게 가계와 분리되려는 시적 주체의 모습이 보인다. 확실히 황병승의 시가 보여준 연기는 가족 안에서 발병한 무엇이다. 이 시인은 가족을 앓으면서 시를 쓴다.13) 이 출발점이 가족 바깥에서 유사 가족들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광장에는 자신이 겪는 정체성의 고통과 유사하게 사람들로부터 죄도 없이 쥐처럼 취급받는 존재들과 쥐처럼 이 광장의 답답함으로부터 줄행랑치고 싶은 존재들이 있다. 가령 퀴어(게이, 드래그 퀸, 트랜스젠더, 크로스드레스들), 세븐틴들, 언더그라운드에 소속된 음악가들, 범죄자들, 그리고 성애를 탐닉하는 다양한 육체들. 모두가 이 사회에서 “타지(他地)”로 추방된 사람들이다. 이 시집은 그들의 삶이 모여든 장소이며, 그들과의 심리적 친밀감이 밑바탕에 흐르는 시들의 집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 집은 사국(死國)14)에 있다. 

   문제는 타지로 추방된 존재들을 이야기하는 시집을 다루면서 이를 타지로 추방시킨 비평의 언어가 있다는 점이다. 왜 이 시집을 이야기하는 비평들은 이 시집의 첫자리에 놓인 가족의 풍경을 읽지 않고 바로 퀴어 미학을 이야기하는 쪽으로 달려갔을까? 타인의 가족에 관해서는 엄숙해지는 게 불문율일까. 모던한 문학에 전통적인 문화를 들이댄다는 것이 불경해 보여서일까. 비합리적인 무속 문화에 대한 청산주의일까. 작품보다는 이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비평이라는 식의 판단이 무의식중에 작동하는 것일까. (3부에 계속)


1) 이 글에서 다루는 김민정의 시들은 모두 『날으는 고슴도치아가씨』(열림원, 2005)에 수록된 작품이다.
2) 이장욱, 「그 여자의 악몽」, 『날으는 고슴도치아가씨』, 열림원, 2005, 171쪽.
3) 이장욱, 위의 글, 162쪽.
4) 권혁웅, 「미래파」, 『미래파』, 문학과지성사, 2005, 162쪽.
5) 권혁웅, 위의 책, 161쪽.
6) 신형철, 「문제는 서정이 아니다」,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196쪽.
7) 산울림의 노래 「어머니와 고등어」의 일부이다.
8) 김지혜, 『가족각본』, 창비, 2023, 187쪽 재인용.
9) 이 글에서 다루는 황병승의 작품은 모두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중앙, 2005)에 실린 것들이다.
10) 시에는 꿈의 장면으로 그리고 있는데, 시의 제목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에서 차용했다고 적어 놓은 것을 보면, 시인이 사실을 꿈처럼 그린 것을 두고 거짓말이라고 이실직고하는 것처럼 읽을 만하다.
11)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 곳곳에서 무속과 관련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똥색 혹은 쥐색」이란 시에 쓰인 다음과 같은 직접적인 구절들을 보라. “불- 무당집, 죽은 할머니가 지저분한 손으로 자꾸만 권하는 약과”, “구름- 불거진 문장(문장), 한판 굿을 마치고 벗어던진 겹버선”. 이외에도 다양한 흔적들이 있다. 가령 그의 시에 등장하는 왕이나 여왕은 샤먼들이 모시는 ‘신’일 가능성이 있으며, 또한 시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인 칼과 거울과 방울(고양이로 대치된)은 샤먼들이 지니는 주요 무구와도 유사하다. 또 「앵무새」는 신의 말을 전하는 샤먼의 정체성을 앵무새에 비유해 쓴 작품으로 보인다.
12) 신형철, 앞의 책, 191쪽.
13) 「주치의 h 」, 「리타의 습관」, 「노 벌즈」 계열의 시들을 보라.
14) ‘시코쿠’를 한역하되 음으로만 읽으면 ‘사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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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

  • 관리자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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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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