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미래파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아니 무엇이었을 수 있었나 (1)

  • 작성일 2023-11-01
  • 조회수 1,648


미래파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아니 무엇이었을 수 있었나 (1)


송종원


0. 낚였던 비평(가)들


밤마다 나는 어항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어요

들리거든요 금붕어들의 반짝거리는 수다


이리 와,

이리로 와서 우리랑 함 께 뻐금거려보자

우와, 정말로?


나는 주걱으로 죽어라 내 입술을 때리기 시작했어요

밤마다 학의 긴 부리 끝에 한 꿰미로

똥구멍에서 주둥이까지

한 큐에 꿰여버리고 마는 금붕어들


매일 나는 새로 산 금붕어를 삶아 어항 속에 풀어두어요

때때로 플라스틱 금붕어들이 산란하기도 한답니다


-「열쇠魚」 전문1)


   아마도, 자신의 시를 잘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힌트라도 주고 싶었던 것일까. 지금 와서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 시인의 첫 시집을 ‘엽기’ 코드에만 너무 집중해서 읽은 듯도 하다. 제목의 “열쇠魚”는 재치를 부려 숨겨놓았지만 ‘열쇳말’, 말 그대로 키워드를 말한다. 그러니까 시집의 문을 열수 있는 열쇳말이 이 시에는 쓰여 있다. 우선 “어항”은 어장(語場)이기도 하다. 더 좁혀 말하면 시인이 쓰는 시의 장일 수도 있겠다. 시인은 거기서 금붕어들의 수다를 적어놓는다. 금붕어라는 단어 안에 ‘금어(禁語)’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는 것을 보면 금지된 말들을 시 속에 부려놓는 시인의 모습을 생각해볼 수 있다. 알다시피 김민정은 사회적으로 금기시 하는 것들을 자주 시 속에 풀어놓았기 때문이었다. 금붕어에 대한 연상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금붕어를 자조적으로 썼을 때 그것은 망각의 맥락을 지닌다. 살면서 겪어온 것들 중에서 속된 말로 우리가 자꾸 까먹는 것을 시인은 까발린다. 

   시인이 입이 아프도록 까발린 말들은 사실 아픔의 언어고 어떤 죽음과도 연결된 언어였을 것이다.2) 하지만 시인의 어항에 ‘학’이 찾아와 큰 부리로 저 풀어버린 금어들을 한 덩어리로 꿰어 죽음으로 만들어버린다. 학의 학살. 눈치 빠른 이라면 이 학이 그 ‘학(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시를 읽어내기도 전에 지식의 편견으로 시를 대하는 사람들, 그래서 시를 일정한 틀 안에 가둬버리는 이들에 대한 독설이라고 볼만도 하다. 풀어보면 작품의 언어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작품의 평가를 먼저 내린 자들에게 반성하라는 항의가 담겨 있다. 그리고 시인이 지목하는 무리 안에는 당연히 비평가가 들어 있을 것이다. 

   시인은 비평가들의 오해에 자신의 시가 잠식당할까 그에 질세라 산 금붕어들을 구워삶아 어항에 다시 푼다. 때때로 거기에 가짜 금붕어들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저 가짜 금어들은 살아있는 언어를 살려두기 위해 시인이 비평가들에게 던진 일종의 미끼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이 미끼는 미래파를 긍정하는 쪽과 부정하는 쪽 중 어디로 흘러갔을까? 


1. 동물화하는 시로서의 미래파?


   2000년대 한국 시단을 말하며 누군가는 20005년을 기점으로 2000년대의 시단은 둘로 나뉜다는 흥미로운 표현을 던지기도 했다. 시의 언어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 챈 비평이 새로운 경향의 시들에 어떤 입장을 표명할지를 두고 고심했고, 입장에 따른 논쟁의 장이 꽤 활발히 펼쳐졌었다. 이른바 ‘미래파 논쟁’이 그것인데 돌이켜보면 여러 생각이 든다. 성과와는 별개로 그때만큼 활기찬 논쟁의 장이 이후 시단의 현장에 자리했던 순간이 있었는지 먼저 떠올리게 된다. 당시를 비평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던 때로 기억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은 편이다. 한편으로는 그 논쟁이 새로운 시를 말하기 위해 새로운 시의 바깥은 너무 단일하게 처리한 면도 없지 않는 듯하다. 마치 ‘열린 구조로서의 미래파 시’와 ‘닫힌 구조로서의 미래파 아닌 시’들의 구도 같은 것이 생겨났었다는 말이다. 물론 이는 새로운 시를 말하는 목소리들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여러 개의 대상을 두고 하나의 초점이 형성되는 순간 어떨 수 없이 후면으로 사라지는 무언가가 발생하는 효과가 생기므로 그에 대한 나름의 보완책은 당시의 비평이 고민해볼 사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흥미롭게도 이 효과는 미래파 부류의 시가 극복했다고 여기는 가상의 소실점의 기능과 닮았다).  

   이 글이 주로 문제 삼는 것은 미래파로 일컬어졌던 시들에 대한 의미화의 실패와 가치 평가의 부족함이다. 이 문제는 미래파를 옹호한 진영에 섰던 글들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 문제를 작품과 먼저 거론하기에 앞서 우선 글 하나를 경유해 가자. 미래파 옹호와 부정의 논쟁이 어느 정도 지난 뒤 제출된 「실재에의 열정에 대한 열정: 미래파의 시와 시학」은 이 글과 유사하게 작품과 비평 사이의 어긋남을 지적한다. 물론 구체적인 내용은 상당히 다르다. 이 글이 ‘미래파’ 작품을 둘러 싼 과소 의미화된 지점을 다룬다면, 저 글은 비평의 과잉 의미화를 이야기한다. 저 글의 주제는 ‘동물’적 시의 주체와 ‘지식인’의 강박에 사로잡힌 비평 담론의 낙차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지금에 와서 보면 미래파 부류의 시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위치에서 쓰인 가장 문제적인 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의 동물화는 시작의 실천이 문학이라는 규범적 거대서사와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더 이상 시인은 ‘혁명가’나 ‘선동자’ 혹은 ‘견자’나 ‘각자(覺者)’가 아니다. 시인은 오타쿠-동물이다. 그는 자신의 시가 여하한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이념적 효과를 발휘할지 그렇지 않을지에 대하여 무관심하다”3)


   새로운 경향의 작품들을 설명할 때 작가군의 특징을 해명하는 방식은 유효한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방법이 메시지에 대한 이해를 차지해두고 메신져를 공격적으로 그려 보임으로써 메시지를 오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미래파적인 시를 쓰는 주체들을 ‘오타쿠’적이고 아즈마 히로키의 개념을 빌어 ‘동물’적이라고 묘사하는 일이 작품의 실질과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뒤에 올 작품 분석으로 충분히 해명가능하다. 미래파 시인들은 결코 역사와 진리에 무관심한 순수 놀이를 즐겼다고 보기 어렵다. 약간 다른 말이지만 한국시의 ‘엄숙주의’는 때때로 한국시의 문제적 측면으로 지목되었다. 그런데 미래파의 시들을 다시 보면서 그것이 꼭 부정적 측면으로 작동했던 것만은 아닌 듯도 하다. 시인의 언어는 얼핏 가벼워 보이지만 시인의 시는 진지한 물음을 가지고 있었다. 작품으로 확인하자. 

 

2. 문제는 경제야


 1028개 마루에 동시에 울려 퍼진다. 우리는 곧 停電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후로 이 마이크와 당신들의 스피커에 전류는 끊깁니다. 지금 당신이 딩동, 


 소리를 들었다면 맨 마지막 초인종입니다. 603호의 어둠 속으로 한 남자가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실루엣은 바야흐로 덩어리입니다.


 많은 여자들이 울었고, 더 많은 남자들이 울었고, 아이들이 보챘습니다. 가령, 1104호 여자애의 드라이기에서 더 이상 뜨거운 바람은 나오지 않고, 여자애는 젖은 머리칼을 그냥 베개에 쏟아버렸습니다. 그렇게 누군가 눈감아버리고.


 또 당신들은 기어이 촛불을 들고 서서 유령처럼 서로를 확인하고, 동시에 깜짝 놀라고, 


 동시에 전원이 확, 켜지고,


- 「관리사무소」 전문4)


   이 시를 읽을 때 가장 난감한 지점은 3연에 등장한 울음에 대한 해명일 것이다. 상황으로 볼 때 천호가 넘는 대단지 아파트에 정전이 찾아온 것 같은데, 왜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울기 시작한 것일까. 이 장면을 눈앞에 펼쳐지는 실제의 장면으로 읽기에는 어렵다. 그렇지만 어떤 심리적 풍경으로 읽을 때 말은 달라진다. 사실 심리적 풍경과 실제의 장면 사이에 구분을 흐려놓는 방식은 시의 오랜 방법이다. 우선 정전은 ‘정전(停戰)’이기도 하다. 정전(停電)과 함께 어떤 전쟁이 잠시 중단되었다. 갑작스럽게 무슨 전쟁이야기인가 싶겠지만, 1028개의 마루가 암시하는 대단지 아파트에 거주하는 대다수의 삶은 한국에서 사실 전쟁을 치르고 있다. 아파트 대출금을 갚기 위해 많은 것을 저당 잡힌 삶은 전쟁이라 불릴 만하지 않은가. 가계의 경제주체는 대출금과 생활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터에서 전쟁을 치르는 중이고, 돌봄 주체는 육아의 현장에서 독박육아를 하며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김행숙의 시에 ‘돌봄 노동’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잠시 다룬 적이 있다5)). 이러한 삶의 양식이 우리를 마치 돈버는 기계로 만들며,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게 돈버는 기계가 되기 위해서 청년들을 요즘말로 ‘존버’해야 되는 어린 기계가 된다. 그러니까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기계 번호 603호나 1104호일 수 있다. 3연의 울음은 이 기계들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고통과 슬픔의 폭발인 셈이다. 시는 한발 더 나아가 우리가 이미 삶의 저편으로 넘어가 버린 유령과 같은 존재가 아닌지도 탐문한다. 전쟁 속에 우리는 이미 몇 번의 커다란 심리적 죽음을 경험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는 멀쩡히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가 멀쩡하지 않다. 마치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는 세계처럼! 

   ‘미래파’를 가장 적극적으로 읽어내며 여러 독자들에게 그 시에 다가갈 길을 마련한 한 평자는 이 시를 분석하며 “우리 삶에는 이런 급작스런 단절과 어이없는 복구가 또 얼마나 많은가?”6)라고 읽었다. 그런데 이때 급작스러운 단절의 배경을, 그러니까 평범한 일상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삶의 조건들을, 경제적 상황에 대한 불안감 같은 것을 더 드러내 읽어내는 시도가 충분했었는지는 반문하게 된다. 아쉽지만 당시의 비평은 단절의 상황을 충분히 역사화하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이 시집에는 저 경제적 조건 내지 사회적 조건이 형성한 남자들의 ‘악몽’이 자주 보인다. 

   시집 『사춘기』는 그간 아이들과 여자들의 세계에 초점을 두고 읽힌 면이 있는데, 이 시집에는 사실 남자들의 세계도 꽤 만날 수 있다. 시집에서 남자들은 악몽을 꾸는 중이고 발작을 일으키는 모습으로 자주 나온다. 이들을 통해 시인은 무엇을 보여주려 했을까. 당겨 말하자면 김행숙은 사회적·역사적·이념적 효과를 의식하지 않고 시를 썼을지 모르지만 시인이 시로 적어낸 구체적인 고통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자리를 밝혀주고 있었다. 


 악몽에 눌린 남자를 악몽 바깥에서 흔든다. 요람을 흔들 듯이


 아가야, 무서워하지 마. 내가 너무 무서워지잖니. 그런데

 여기는 정말 남자의 바깥일까? 나는 왜 인간들의 악몽에 자주 불려다니는 걸까?

 어, 어, 어, 그가 門을 연다. 저 이빨 가득한 통로가 나는 무섭다.

 나는 그를 꿈 없이 재워주고 싶다. 남자의 바깥에서

 나는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미끄러지는 것이다. 눌려 있는 이 남자의 표면은 푸른빛 으스스 도는 빙판이다. 나는 다시 엉덩방아를 찧는 것이다. 

 빙판 밑에 그가 키우는 사나운 물고기들은 진화하지 않는다. 나는 단순히 그의 먹이그물 內를 구경하는 자인가, 아귀인가? 귀신은

 강 건너에 있지 않다. 악몽에 눌린 남자의 水深을 나는 아직도 모르는 것이다. 피를 본 물고기는 내게도 덤빈다.

 아가야, 무서워하지 마. 내가 너무 무서워지잖니. 그런데

 무서우니 싸운다. 전쟁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게 해준다. 전쟁은 꿈을 없애는 방법의 하나다. 

 쩍쩍 그가 갈라진다. 그는 악몽 바깥으로 나가려고 한다. 그런데


 바깥은 정말 악몽 바깥일까? 나는 약간 우울해진 물고기들과 조금 더 악몽 內에서 흘러다니기로 한다. 그가 머리를 흔든다. 


-「귀신 이야기 4」 전문7)


   앞선 시에서 우는 남자의 모습과 이 시의 악몽에 잠긴 남자는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니다. (악몽은 이 남자의 愁心에서 비롯된 것이다. 수심에 잠긴 남자의 형상에서 이 시의 여러연상들-‘水深’, ‘(먹이)그물’, ‘물고기’-이 왔을 것이다) 앞선 시의 울음의 근원에는 이 시 속 남자의 악몽들에 새겨진 고통이 가담하고 있다. 이 시의 남자도 울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가령 그의 내부에 살아 있는 “물고기”는 ‘(눈)물을 흘리는 육체’에 가깝다. 

  이 시도 앞의 시처럼 전쟁 중인 세계를 그린다. 남자는 그곳의 전사(戰士)이다. 이 남자가 참여한 전쟁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물어뜯는 이빨과 먹이그물의 이미지가 약간의 암시를 준다. 게다가 빙판은 무엇인가. 미끄러지면 큰일이 나는 곳이 아닌가. 한국 성인 남자들의 세계에서 미끄러진다는 표현이 암시하는 바는 의외로 한정되어 있고 그 만큼 분명할지도 모른다. 가령 진급누락 같은 것! 남자의 표면이 빙판인 이유는 그가 서 있는 세계가 얼어붙은 추운 세계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진급에서 미끄러지면 영원히 도태되는 세계만큼 차가운 생존의 장이 또 있을까. 이런 이미지들은 종합할 때 이 남자의 꿈은 생존경쟁에 처한 사람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 

   2000년대를 접어들면서 우리사회에 공공연하게 떠돌던 구호 ‘무한경쟁’ 그리고 그 경쟁의 장과 연동된 ‘각자도생’의 삶, 그리고 신자유주의라는 경제논리의 흔적이 이 시에서 발견된다고 말하면 과장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김행숙의 시가 어떤 깨달음과는 거리를 두고 미시적인 관찰과 느낌에 헌신한다고 말해지곤 했지만8), 그 말은 절반만 맞다. 시인의 느낌과 관찰 속에는 현실세계에 대한 직관이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직관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현장에 대한 고민들을 엄연히 품고 있었다. 


3. 은은하게 비판적이고 알고 보면 풍자적이기도 한 ‘나’


1999년 여름 나는 생애에서 가장 훌륭한 생각이 떠오른다


나무를 가꾸는 방식으로 구름을 가질 수 있다면······


그래 여름 나는 생애에서 가장 훌륭한 생각이 떠오른다


구름의 형상과 구름의 습기는 무관한 것인가

구름이 몰로 가는 것은 나의 상상력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고 스스로를 다시 선택할 때

구름은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


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아름다운 방향과

치어 죽은 고양이와 새들의 영혼이 추스르는

조각난 뼈와 살점들


골목에서 담장 위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웃고 있는 구름


1999년 그 여름의 습도는 전부 형상을 가졌지만

사라진 동물들의 꼬리에서 다음 해가 이어졌다


나의 한결같이 생애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생각에 매달린다


전쟁은 분명하지 않으며

매번 다시 죽기 위해


구름은 구름의 뒤를 물고

치어 죽은 동물들은 더욱 납작하게 엎드리는 것이다


- 「그해 여름」 전문9)


   ‘미래파’를 의심하는 시선은 ‘미래파’의 시적주체를 어떤 커다란 공동체의 연결감을 상실한 채 세대론적이고 하위문화적 성격을 공유하는 자들끼리의 군집처럼 평가하기도 했다. 후에 ‘미래파’에 호의적인 시선을 보여준 글10)에서도 이들은 귀족주의를 매개로 취향의 공동체를 형성했다고 의미화 되기도 했다. ‘취향의 공동체’라는 표현은 묘하다. 당시의 평자가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소위 미래파가 만든 공동체가 협소하다는 평가를 에둘러 했다는 인상을 준다.   

   시의 화자가 말하는 ‘생애에서 가장 훌륭한 생각’이란 무엇일까. 게다가 이 생각을 ‘내’가 떠올렸다는 발언은 어딘지 나르시시즘적 뉘앙스를 풍겨 생각의 내용을 짐작하는데 난감한 느낌을 더한다.(이근화 시에 나르시시즘은 약간 오해된 지점이 있다. 이는 다음 회 글에서 좀더 이야기할 예정이다.) “구름”은 구름처럼 피어오른 상상력과 인접해 있다.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는 일은 시와 관련한 하이데거의 말을 연상시킨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아름다운 방향이란 구절에서 손가락은 당연히 무엇인가를 쓰는 중의 손가락을 말할 것이리라. 상상력-존재의 근원- 손가락으로 이어지는 연상의 흐름은 글쓰기와 시쓰기를 호출한다. 그중에서도 시, 그러니까 이 시의 화자가 말하는 ‘가장 훌륭한 생각’이란 아마도 시 쓰기를 결심했던 일로 보인다. 시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복잡하다. 보통의 사람들은 그것을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여기며 부정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기도 하고 동시에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는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는 일이라고 설명하며 위상을 한껏 올려놓기도 했다. 시인은 그것 중 어느 것이 옳다고 손을 들어주고 있지 않다. 그 둘 모두 시를 쓰는 자리에 현실적으로 침투하는 힘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결심을 ‘가장 위대한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근거도 거기 있다. 시인이 철학자의 발언은 믿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 현실 속에 시가 지니는 복잡다단한 위상을 알고서도 그것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자부심이 깔려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손가락이 향하는 아름다운 방향 쪽에는 어떤 죽음들이 있다. “치어죽은 고양이와 새들의 영혼”이 그것이다. 이 죽음은 실제로 인간보다 약한 힘을 지닌 고양이와 새들의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양이와 새의 영혼이 누군가의 것을 추스르고 있다.  인간에게는 외면된 죽음의 뉘앙스가 느껴진다. 잘 알려지지 않은 죽음을 연약한 존재들이 추스르는 중일까(뒤에 이어지는 시들과 연관해서 읽자면 열악한 환경 속의 공장노동자의 죽음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런데 이 죽음의 자리에 가닿는 상상력은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다. “웃는 구름”, 어딘가 기이한 풍경이다. 아마도 이는 현실에서 지위가 낮은 존재들의 죽음과 관련한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는 형상들에 대한 반성적 표현일지도 모른다. 미적 행위를 하는 글 쓰는 손가락들이 잘 담아내지 못하는 슬픔에 대한 반성이 ‘우는 구름’이 아니라 ‘웃는 구름’을 자리하게 했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도 시는 구름이 죽음 내지 슬픔과 완벽히 어긋나 있지 않다는 감각을 전한다. 아무래도 그것은 구름이 끝까지 그 자리에 이웃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의 후반부에 돌연 등장한 듯 보이는 전쟁은 저 생명들과 관련한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글쓰기가 처참한 현실과 마주하며 느끼는 윤리적 고투를 암시하는 듯도 하다.

   이근화의 시에는 이렇듯 아름다움의 범주로 분류되며 위대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해체하는 감각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해체의 과정에 사회의 편향된 의식을 투영한다. 한 사회가 아름답다고 대상화하는 것들이 누구에게는 전혀 아름다울 수 없는 것이며, 또 한 사회가 위대하다고 평가하는 것들이 어떤 현실에서는 위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식의 사고와 이근화의 시는 가깝게 있다. 이는 이근화의 시가 은은하게 비판적이고 직접적이지 않게 풍자적인 구석이 있다는 뜻이며, 이 시인의 시는 ‘나’를 말할 때도 나의 특별함을 말한다기보다 사회를 말하기 위해 ‘나’를 걸어두고 이야기하는 쪽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기계들의 무의식 속에는 음악이 흐른다

강철을 자르는 강철의 속도와

강철을 다듬는 강철의 리듬에 맞추어 

나의 발은 아름답다


유리를 가르는 돌의 단단함과

유리를 다듬는 돌의 유연함과

조금씩 흘러내리는 창문들 풍경들

안구는 유리처럼 갈라질 것인가

폭발할 것인가


무의식의 자율성은 아름답다

길거리에서 벽과의 대면 식사

오후와 오후의 클래식

나는 거리를 지나는 불특정 다수로서

고개는 조금 수그린다

어떤 스텝을 밟을 것인가


모든 기계의 무의식 속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불꽃들

나는 유리를 불러

유리 공장으로 간다

용광로 속에 발을 담근다

나의 가장 아름다운 구두를 위해

나의 자정을 위해


흘러내리는 강철 같은 바늘들

바퀴들 불특정 다수의

아름다운 귓바퀴와 숨결들

기계들의 무의식 속에

들어 있는 소문들 창문들

풍경이 건널 수 없는, 


기계들의 무의식 속에는 영혼이

강물처럼 흐른다


-「뮤직박스」11)


   ‘무의식’이란 개념은 미래파의 시를 읽어내는 과정에서 자주 호출되었다. 시적 자아와 시적 주체를 구분하는 이론적 토대에 활용되었던 것도 정신분석의 자아와 주체의 구분 담론과 상당부분 겹친다. 그러나 그것이 적절했는지는 다시 검토가 필요한 순간에 접어 들었는지도 모른다. 무의식을 동반하는 설명들이 정신분석의 담론을 이끌고 와 시에 대한 색다른 방식의 설명을 해냈지만 그것이 한편으로 작품의 사회적이고 역사적 맥락들을 덜 고민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은 점이 없지 않다. 또한 굳이 그 개념들을 사용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상황에서 무리하게 적용하여 개념에 속박되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한 평론가는 이 시의 “무의식의 자율성은 아름답다”라는 구절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서 평가했지만12), 이 구절에서 무의식은 단순히 ‘의식하지 않음’ 정도의 의미로 보인다. 그러니까 의식하지 않았을 때 아름답다고 여기는 착각이 있다는 식의 진술로 읽을 만하다. 가령, 유리공장과 유리구두 사이를 차단하는 장벽을 의식하지 않을 때 우리는 상품의 생산과정에 깃든 폭력과 문제를 몰라본 채 그것의 아름다움에 쉽게 도취된다. 

   유리를 다듬는 시간의 굉음과 열기는 아름다운 유리구두라는 상품이 거리에 전시되는 사이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것이 된다. 상품을 향유하는 거리에서 공장은 보이지 않는 풍경이다. 의식을 가졌을 리 없는 기계들은 반복된 작동 속에 어떤 리듬 같은 것을 만들어내지만 그 리듬의 음악은 공장 노동자의 몸과 영혼의 갈아버린다. 이 시의 음악은 아름다움의 대상이 아니라 비인간적이라는 의미에서 기계적인 것이고, 어두운 상자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의 주체는 아름다운 환각을 의심하고 그것이 발생한 물적 조건 자체를 건드려보고 있다. 어쩌면 노동의 자리와 무관한 고고한 아름다움 같은 것은 이 시가 갈아버리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2부에서 계속)

1) 김민정,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열림원, 2005, 19쪽
2)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회차(미래파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아니 무엇이었을 수 있었나 2)로 넘기려한다.
3) 김홍중·심보선, 「실재에의 열정에 대한 열정: 미래파의 시와 시학」, 《문화와 사회》 2008 봄/여름호, 129쪽.
4) 김행숙, 『사춘기』, 문학과 지성사, 2003, 118쪽.
5) 송종원, 「돌봄은 어떻게 문학이 되는가?」, 《창비》. 2022 여름호.
6) 권혁웅, 『미래파』, 문학과 지성사, 2005, 26쪽.
7) 김행숙, 앞의 책, 65-66쪽
8) 『사춘기』에 실린 이장욱의 해설에서 쓰인 표현이다. 앞의 책, 126쪽.
9) 이근화, 『칸트의 동물원』, 민음사, 2006, 84-85쪽.
10) 박상수, 「귀족예절론-감정의 귀족주의자에 대하여」, 『귀족예절론』, 문예중앙, 2012
11) 이근화, 같은 책, 92-93 쪽.
12) 신형철을 몰락의 에티카에서 저 구절을 문자 그대로 읽으며 이근화의 시가 감각의 카오스를 그려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신형철, 「시적인 것들의 분광(分光), 코스모스에서 카오스까지」,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265쪽.)


추천 콘텐츠

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

  • 관리자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