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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계’를 말하기 전에 질문할 것들

  • 작성일 2023-05-04
  • 조회수 2,341

‘생태계’를 말하기 전에 질문할 것들

김미정


 스스로의 글을 언급하는 것이 면구스럽기는 하지만, 한 부지런한 지인으로부터 「시장에서 생태계로」(졸고, 《문장 웹진》, 2023년 4월호)에 대한 짧은 감상을 들었다. 지인의 감상의 요지는 그런 것이었다. “시장 모델을 생태계 모델로 대체해 생각해 보려는 아이디어는 이해되었다. 그런데 ‘(자본주의 시장) 바깥이 있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 글이 시장 시스템의 공고함을 결정론적으로 다시 확인하는 것과는 어떻게 다른가. 한편, 현실의 다양한 문제 앞에서 ‘생태계’라는 말을 낭만적인 뉘앙스로부터 어떻게 구출할 수 있을까.”

 쓰는 입장에서도 이해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번 2회 차 글에서 계획한 내용이 이 감상, 의견에 대한 느슨한 응답이 될 수도 있을 듯하여 잠시 언급해 둔다. 즉, 지인의 감상은 거칠지만 이렇게 바꿔도 취지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첫째, 왜 시장으로부터 출발하는가. 시장 모델과 문학(쓰기/읽기)은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둘째, 이 글에서 말하려는 생태계란 무엇인가.


 1. 왜 시장에서 출발하는가


 2010년대 초 이래로 ‘지구의 멸망보다 자본주의의 멸망을 상상하기 어려워진 시대’(프레드릭 제임슨, 슬라보예 지젝)에 대한 체감을 반복적으로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세기말의 이른바 세계화(globalization)의 연장선상의 일이며, 당시 외부소멸 테제들(세계화, 대항 세계화 측 모두)1)이 각기 다른 심정으로 예상했을 내용일 것이다. 저 인식은, 수용자와 창작자의 관계가 상품의 구매자와 판매자(소비자와 생산자) 등으로 치환되거나, 예술·문학장이 노동력 시장과 다를 바 없어졌다는 식의 상황만 지시하지 않는다. 우리 사고와 신체의 디테일을 위화감 없이 디자인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문제를 저 말로부터 환기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2)

 물론 이것은 세기말 세기 초에 갑자기 문학·예술이 시장의 산물이 되었다거나, 근대 이래로 문학·예술이 자본주의를 모태로 출발했음을 간과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근대문학·예술이 자본주의 시장 내의 환금성을 지닌 상품의 일종이었다는 사실은, 2000년대 이래 한국 문학계의 ‘제도 연구’가 내내 골몰해 온 바였다. 오늘날 문학·예술이 근대 자본주의 조건과 불가분이었음은 2000년대 이래로 연구장을 넘어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체감되었다. 또한 이러한 문제의식을 통해, 이른바 작가론이나 작가연구야말로 지극히 근대적인 문학, 예술의 방법이라는 사실도 환기되었다. 작가론, 작가연구 속의 작품은 작가 개인의 삶과 사유와 감성체계로 통용된다. 그런데 일찍이 마르셀 뒤샹이나 앤디 워홀 같은 이들의 잘 알려진 퍼포먼스가 단적으로 보여주었듯, 작품의 성취에 개재된 작가(이름)의 신화는 시장의 브랜드네임과 호환되는 구조를 이미 갖고 있었다.

 한편 유의할 것은 ‘문학·예술이 이렇게 근대 자본주의를 모태로 삼고 있다’는 말은 ‘문학·예술이 근대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환원된다’는 식의 말과 전혀 다른 의미와 효과를 지닌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전자와 후자의 말 사이에는 시스템 속 존재나 사건의 자율성에 대한 선명한 인식 차이가 있다. ‘문학·예술이 근대 자본주의를 모태로 삼고 있다’는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세계관과 결합할 여지가 있다. 그런데 ‘문학·예술이 근대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환원된다’는 식의 말에는 결정론적 사고가 반영되어 있다. 이미 ‘환원’이라는 말이 그런 것이다.

 21세기에 본격적으로 탈신비화한 자율성 테제를 돌이켜본다면, 그것이 본래 오류여서가 아니라, 구조와 시스템의 문제와 무관하다는 착시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문제적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자율성 테제를 탈신비화하는 논의 역시 어떤 착시에 대한 우려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실제 ‘제도 연구’ 속의 문학은 종종 시스템이나 제도로 ‘환원’되는 대상에 불과할 때가 많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3) 2000년대 이래의 한국 문학 연구의 탈신비화 작업은 어쩌면 후자의 측면을 과잉되게 강조한 측면도 있다. 그러한 인식과 지금 2023년 시장과 문학의 상황 인식이 무관치는 않다고 생각되는 것도 아예 틀리지는 않으리라는 말이다.

 지나온 시간의 사정이 이러하니, 문학·예술이 시스템, 제도의 산물인 동시에 그 조건으로부터 옴짝달싹 못하는 무의지적인 것, 혹은 기계적 인과의 산출물만은 아니라는 관점을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자율성 테제와 자율성 테제 비판 측 모두로 다시 수렴될지 모를 안이함을 피하기 위한 의도이기도 하다.

 반복건대, 근대 이래의 문학과 자본주의 시장에 대해서라면 무수한 논의들이 선행해 왔고, 이 글 역시 그러한 논의의 자장에 놓여 있다. 하지만 지금 문제의식은 그 제도나 시스템의 공고함을 확인하는 데 있지 않다. 20세기 말 이래로 공고해진 ‘바깥 없음’의 상황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결정론’으로 환원되는 것은 유의하고 싶다. 영어단어 radical이 함의하듯, 근본적인 것은 급진적이기에 질문이 근본적일수록 수행을 지닌다. 그렇기에 지금 더 생각하고 싶은 것은 근대 자본주의 시장 속 문학을 상존시켜 온 전제들이다. 단적으로 ‘개체(개인)’의 사유와 그 계열어들 – 가령, 주체, 능동성, 정체성 등 – 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 생태계를 말하기 전에 질문하고 싶다. 그렇지 않고 생태계라는 말과 그 문제의식은 그저 자연과 인간, 개인과 공동체식의 익숙한 도식의 관계론이나 낭만적 충동으로 가득 찬 안전한 (혹은 의외로 쾌적한) 말로 수렴되기 쉽기 때문이다.


 2. 누가·무엇이 쓰는가


 근대 자본주의 시장의 존재들은 자유의지를 가진 능동적 행위자로서의 주체로 간주되곤 했다. 물론 오늘날 마케팅 전략이나 넛지(nugde) 개념 등이 상징하는 행동경제학 분야에서는, 인간이 감정이나 충동에 휩싸이기 쉽고, 그다지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은 오류 가능성의 존재임을 상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근대 초 경제학에서의 인간 이해와는 거리가 멀다. 이를테면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가격) 메커니즘이 상징하듯, 근대 자유주의 경제학에서 상정한 인간이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였다. 인간의 이기적 선택들조차 합목적적 선(善)으로 귀결된다는 애덤 스미스의 자신감도 여기에서 기인했다. 이것이 이른바 근대적 사유의 철학적 출발을 예고한 데카르트의 코기토 명제나 혹은 근대 예술사의 획기적 발명이었던 원근법 등과 같은 선상에 놓인 일임은 더 말할 나위 없다.
 관련하여 (인도유럽어족의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근대 이래의 언어학에서 추방된 중동태(中動態, middle voice)의 존재 및 그것을 대체한 능동/수동의 도식을 떠올려 보아도 좋다. 한국어에는 없는 문법요소지만 능동태/수동태의 이항대립적 태(態, voice)의 구도가 중동/능동의 구도와 그 의미를 대체했다고 일본의 한 철학자는 규명한다.4) 실제 우리는 늘 수동적인 인간이 아니라 능동적 인간이 되기를 권장 받아 왔고, 일상적 언어의 사용에도 이런 가치관계는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수동보다 능동적 행위성의 우위를 통해 주체, 주체성의 의미가 확보되어 오기도 했다. 그러하니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서의 인간 개인이 기본값이 된 상황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즉, 어떤 사건의 과정이나 동적(動的) 행위성보다는 그것의 원인이나 결과 혹은 책임 소지를 명료하게 가리는 사유가 점차 중요하게 여겨진 근대의 사정이 이 언어학에 반영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와 이 세계는 정말 그러한 명료한 구획 속에 존재하는가. 가령 최근의 피해/가해, 선/악 등의 익숙한 이분법들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분위기는, 의도된 것은 아닐지라도 바로 이러한 역사성을 질문하고 있는 셈 아닌가. 이것을 쓰기/읽기의 문제에 한정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본다. 대부분 작가의 작품에서 비슷하게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여겨지지만, 언젠가 한 작가의 자전적 소설(조해진, 「문래」, 『단순한 진심』, 문학과지성사, 2020)을 읽으며 ‘쓴다’는 행위의 주어를 통상적 이해와 좀 다르게 생각해 본 일이 있다.

 이 소설은 개인 주체로도, 또는 그 반대항으로 여겨지는 집합적 주체로 어느 쪽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상황을 연상시켰다. 소설은, “최초의 감각”이 무엇이었는지 질문 받은 주인공이 그 장면을 떠올리는 상황에서 시작한다. ‘최초의 감각’이란 비로소 외부 표상이 의식에 형성되는 최초의 시기뿐 아니라,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개체로서의 몸이 자각된 순간을 의미할 것이다. 이때 주인공이 떠올린 “최초의 감각”은 “밖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였고 “밖에서 문을 잠근 사람은 나의 어머니”였다. 이것이 곧 타자 및 외부 세계와 ‘나’를 식별할 수 있게 된 최초의 순간에 대한 비유임은 분명하다.
이후 소설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는 한국의 이른바 산업화·도시화 시기에 서울에 상경하여 공단 주위에 정착한 주인공 부모님과 관련된 것이다. 이 주인공이 기억한 ‘최초의 감각’으로서 “문을 잠그는 소리”는 일면 ‘나’와 타자의 구획과 식별의 순간을 암시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부모라는 존재의 신체와 연결되고, 한국 현대사 속 필부들의 부대낌과 굴곡과 연결되는 역설을 품은 것이었다. 주인공은 그것을 한사코 떠올리고 싶지 않아 했으나 그것은 훗날 “나의 문장[文]이 그곳에서 왔다[來]고……” 시작하게 할 어떤 이야기의 기원이기도 하다. 요컨대 쓰는 행위의 능동성, 주체라고 여겨지는 것은 본래적, 비율적으로 늘 다른 힘들 혹은 타자들과 섞여 있고 어떤 특이성의 계기를 경유하여 작동하기 시작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식별 불가능한 모호함의 지대와 그 존재론은 종종 간과되고, 결절점으로서의 작가 개인만 전경화 되어 왔다.

 무언가를 쓰는 ‘오롯한’ 자아, 진공상태의 ‘나’란 어쩌면 신기루다. ‘나’는 선험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개체(individual)’라기보다 생물학적, 관념적으로 웅성거리는 혼합된 식별 불가능의 지대에서 분화하고 다시 무언가와 결합하고 또 다른 방식으로 분화하며 계속 이행하는 식의 존재다. 그러하니 지금의 이야기는 개인으로서의 작가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그러한 개인으로 자각하는 과정과 메커니즘을 섬세하게 떠올려 보자는 이야기에 가깝다. 작가 개인이란 오늘날 제도적·법적 자명함 속에서 명료하게 인지되지만, 실제 그러한 명료함은 종종 결정적인 무언가를 망각시킨다. ‘쓴다’는 행위의 결정적 모먼트는 작가 개인의 신체에 있다 해도, 그것이 곧 선험적이고 능동적인 주체의 역량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 쓰는 신체는 고유한 개성의 소유자라기보다, 헤아릴 수 없는 마주침의 연속의 와중에 잠시 식별 가능해진 시점의 고유성, 특이성(singularity)이라고 지칭하는 편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반복건대 ‘마주침’은 나와 너라는 개체보다 앞서 있다. 가청, 가시, 가촉 범위 내에서 확인되지 않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간과되지만, 실제 나의 신체는 지각된/지각되지 못한 모든 마주침을 경유한다. 그렇다면 어쩌면 글이란 곧 의식·무의식적 마주침들의 수행적 결과다. 즉, 그 지속적 마주침의 과정에서 나의 신체를 매개하여 말과 글과 세계가 만들어진다. 저작권 등으로 상징되는 소유의 제도적·법적 형식은 이런 존재론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한다. 오늘날 자주 목도되는 분란이나 스캔들 역시 근본적으로는 오늘날 쓰기의 법적·제도적 자명함이 역사적 산물임을 상기시키는 사례다. 무언가 자명했던 것이 갑자기 문제적으로 이야기될 때란, 늘 그 자명함을 성립시켜 온 전제가 흔들릴 때다.5)


 3. 누가·무엇이 읽는가


 이어서 앞선 이야기의 연장선상에서 읽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오늘날 독자는 문학의 또 다른 주체로 강력히 부상했으나 읽기의 행위성, 독자의 존재론은 별로 주목의 대상은 아닌 것 같다. 과거 독자에 대한 사유는 근대적 인구의 셈법과 닮아 있는 것이 많았다. 대형 서점마다 베스트셀러 목록을 작성할 때 활용되는 독자는 구매자 개인의 연령·젠더·지역 등의 요인에 따라 분류되고 통합되고 계산된 통계 속에서 일종의 덩어리(population)로 취급되곤 했다. 지금도 출판계에서는 베스트셀러 목록과 경향을 파악, 분석하는 데 근대적 인구의 셈법과 유사한 구조를 활용한다.

 그런데 과거 익명의 집합으로 측량된 독자는 지금, 자기표현 미디어가 편재한 세계에서 직접적 목소리를 발화하는(듯한) 구체적 존재로 육박해 왔다. 직접표현의 가시화는 분명 전위-대중, 전문가-집단이 지니는 수직적 의사결정 구조를 명백히 변화시켰고, 또한 어떤 여론이나 분위기의 결정적 단추(trigger) 역할을 분명히 해내고 있다. 하지만 이 존재는 독자 모두를 의미한다기보다 독자 전체의 어떤 일부분의 특질을 과잉되게 대표한다. 자기표현 미디어의 편재성이 근대적 대표(representation) 메커니즘을 흔들리게 만들었다는 진단은 유효하다. 하지만 그러한 직접 표현이 대표=표상되지 않는 외부를 늘 남기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 지워져서는 안 된다. 근대의 대의제는 다른 방식으로 변주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독자는 달라진 통치술과 좀 더 복잡한 셈법의 대상이 되고 있다. 가령, 많은 이가 체감하듯 다양한 OTT 구독 서비스의 알고리즘 속에서 우리는 온전한 개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를 설명할 근대적 준거의 요소들, 이를테면 젠더·연령·지역·인종·언어 등 정체성의 요인은 여전히 수집과 분석의 대상이다. 그것이 빅데이터로 수렴되고 다시 그것에 기반하여 나들에게 다양한 마케팅의 형태로 돌아오는 메커니즘에는, 개인도 아니고 개인들의 총합인 집단도 아닌 방식의 측량법이 개재해 있다. 실제 2010년대 이래 인터넷 기술과 공진화한 세계 속에서 우리는 개인이 아닌 분인·분할자(dividual)의 아이디어를 통해 설명되곤 한다.6) 독자에 대한 이 새로운 셈법의 메커니즘이나 그 의미를 분석하는 일은 다른 지면이 필요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오늘날 시장 시스템 속에서 독자라는 존재가 이미 능동적·주체적 개인으로서 읽는 이라는 가정으로 온전히 수렴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방금 언급했듯 이미 이 세계의 시스템은, 발 빠르게 근대적인 사고법의 전제를 넘어서 새롭게 도래한 상황을 존재와 사건에 대해서도 전유, 활용해 오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문화예술계의 독서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개체적 경험(작가나 작품과 마주치는 개인의 경험)에 초점이 맞춰질 때가 많다. 예컨대 일종의 대안적 문학교육에서조차 ‘나만의 관점에서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강조되어 왔다. ‘나만의 관점에서 나의 느낌과 감정에 충실하게 작품을 읽는다’는 의미는 부정하기 쉽지 않은 중요한 덕목이다. 창작의 층위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언젠가부터 사소하다고 폄하된 나의 ‘느낌’들이 서사의 동력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근대문학의 배경에 놓여 있던 민족, 국가, 정상성, 메이저리티 등의 일종의 ‘보편’에 대한 공감, 혹은 해석노동과 단절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앞서 잠시 시대의 변화를 일별했듯, 자기표현 미디어의 편재와 대표되지 않는 이들의 가시화가 지니는 정치적 정당함과 연결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러한 ‘나만의 〇〇에서’라는 구조는 문학·예술 작품으로부터의 감각, 감정, 경험 등을 사유화(私有化)하는 메커니즘과 잘 분리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나만의 〇〇’이라는 익숙한 말들을 통해 권장되는 감상의 방법은, 내밀하고 사적인(private) 경험을 강조하기보다 관점, 감정, 느낌 등이 개인적 소유의 대상이라는 착시를 정당화하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앞서 근대적 ‘나’, 근대적 개인의 쓰기가 불가능한 것에 상응하는 읽기(독서)에 대한 이해 아닐까. 강조컨대 이것은 분명, 무엇을 향한/위한 공감인지 질문하지 않아 온, 즉 그 토대에 대한 질문 없이 권장되어 온 공감의 메커니즘을 반성하는 의미를 지녔다. 또한 대표를 전체로 치환하는 세계의 폭력으로부터 구별되고자 하는 의지와도 관련이 깊다. 하지만 이 ‘나만의 관점’, ‘나만의 감정’, ‘나만의 느낌’ 같은 말들에 개재해 있을 21세기적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논리를 아예 보이지 않는 것으로 할 수 있을까.

 특히 오늘날 소설 읽기는 감정·정서적 보상체계를 갖는다고 여겨지는 경향도 강하다. 개인적 경험과 관련된 것이지만, 비평이 ‘가성비 좋은 콘텐츠’라는 의외의 이유로 설득력을 갖는 분위기도 이와 무관치는 않을 것이었다. 이는 무언가의 읽기(보기)에 있어서 개인적 효용을 필요로 하는 시대의 분위기 - 예컨대 무한한 정보의 홍수와 선별의 어려움, 즉효성 있는 경험을 부추기는 시대의 속도감 - 및 그것을 요구하는 독자의 대두와 무관치 않다. 이때의 감정·정서란 이를테면 ‘이 작품은 나에게 어떤 느낌을 자아낸다. 나는 누구누구에게 공감된다’ 식의 이야기 구조를 지니곤 하는데, 이러한 효용의 강조는 나/타자의 명료한 구별 도식 속에서 의외로 타자의 이물감을 차단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논리로도 구사된다.

 노파심에서지만, 이런 이야기가 다시 ‘공감’ 행위, 메커니즘을 소환하는 이야기가 아님은 강조해 둔다. 근대문학을 성립시키고 그 윤리적 정당성을 보증해 온 ‘공감’ 개념이야말로 개인이라는 단위를 전제로 한 메커니즘을 지녀 왔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그러한 개인의 신화가 기이하게 지속되고 강화되는 중인지 모른다. 그러하니 가령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1990년대의 구호가 2010년대 중반 이후 다시 널리 연호된 것은 이런 의미에서 꽤 흥미로운 검토 대상이라고 여겨진다.

 영미권의 문학평론가이자 연구자인 그린월드는 신자유주의 담론이 문학의 주제뿐 아니라 형식적 메커니즘에 스며드는 방식을 주목하면서, 이를테면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가 아니라 ‘누가 어떤 것을 어떻게 느끼는지’ 알려주는 소설이 예찬된 2010년대 영미소설의 경향성을 지적한다.7) 그녀가 말한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는 단번에 ‘큰 이야기’의 몰락과 그 시대착오성을 말해 온 한국 문학·문화예술계의 상황을 떠오르게 한다. 이 과정에서 ‘사소하고 작은 이야기’와 이른바 ‘큰 이야기’가 배타적 선택지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강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사소하고 작은 이야기’가 인식, 감정, 느낌 등을 소유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는 감각(사유화의 감각)과 어떻게 구별되고 어떻게 닮아 있는지는 좀 더 생각할 것이 있다.

 이때, 나만의 관점, 감정, 느낌 등이 이른바 스스로가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 정체성과 긴밀히 연동되어 있음도 참고로 언급해 둔다. 정체성은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속성들을 개념화한 말이다. 정체성은, 근대의 정치철학과 자본주의의 양식이 내면화한 이른바 소유적 개인주의에 근거하는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다.8) 정체성이 소유격(‘~의’)이라는 문장구조에 의해 서술되는 관습을 잠시 떠올려도 좋다. 정체성의 지표들(여성, 장애, 계급, 인종, 연령, 지역 등)은 존재의 특질 및 타자들과의 차이를 명시화한다. 이것은 마치 개인이라는 말의 의미나 용법과도 같이 근대 이전 세계와 구별되는 존재론의 특질을 지시하는 개념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근대의 통치술에 의해 내내 전유되어 온 개념이기도 하다. 가령 우리는 각종 정체성의 지표로 환원되지 않는 ‘나’임을 강력하게 주장할 때조차 법적·제도적으로는 그러한 지표들에 구속되어 있고, 각자 소유했다고 간주되는 정체성들의 역학에 따라 이 세계에 위치하기를 강요받는다. 그러하니 나만의 〇〇 혹은 정체성, 개인 등은 현실 속에서 부정될 수 없는 전략적 파이팅에 필요한 개념 도구다.

 하지만 잠재적 층위에서 늘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또 다른 현실이 있음을 기억하는 것은 늘 필요하다. 즉, 어떤 존재를 정체성의 개념(표상)으로 인지할 때, 가령 (비유컨대) 나노초(秒) 단위로 변화하고 있을 존재나 세계의 ‘포착할 수 없는 순간’들은 잘 의식되지 않는다. 주체가 사건에 선행해 있다고 믿게 된다. 하지만 몸들은 서 있는 자리(위치)와 공기에 따라 늘 유동하고 있다. 또한 세계는 내가 가졌다고 여겨지는 속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존재는 정체성으로 구획된 채 이 세계와 함수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감히 말해 보자면, 서 있는 자리 자체가 관계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어떤 특이성의 계기들을 경유하여 그때마다 형상을 갖추게 된다. 이렇게 존재의 자명성보다도 그 존재의 윤곽을 만드는 사건들, 행위성에 주목한다면 이제까지의 쓰기/읽기와 다르게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생기지 않을까. 또한 문학 역시 다른 방식으로 보탤 이야기가 생기지 않을까.

 생태계를 말하기 전에 거쳐야 할 최소한의 질문은 이렇게 대략 경유한 셈이지만 갈 길은 먼 것 같다. 다음 마지막 회 차에서는 이 글의 도입부에 언급한 두 번째 질문, 즉 생태계란 무엇이고 생태계 속의 문학이란 어떤 것일지 생각해 보려 한다.


1) 당시 대항 세계화 운동 측 역시 공유하고 있던 것은 자본주의 바깥 없음에 대한 인식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등의 ‘제국론’ 역시 이 조건(외부 소멸)을 재전유하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당시 전통적 좌파 진영(담론)으로부터 이것이 자본주의 ’바깥’에 대한 기획을 포기하는 것이거나, 세계화 측과 결과적으로 합치되지 않느냐는 강한 비판을 받았던 정황도 잠시 적어 둔다.

2) 그럼에도 가령 2010년대 이래 문화예술계의 예술노동 의제화도 시장과 문학·예술의 공고해진 결속 관계 속의 관련자들 나름의 분투였던 셈이니, 문학·예술의 ‘바깥 없음’의 조건은 단지 비관을 넘어 트릭스터(trickster)적 상상력에 대한 과제를 남기고 있음을 다시 덧붙여 둔다.

3) 아카데미즘에서의 이러한 연구는 결과적으로 근대문학·예술을 ‘자율성’ 테제로부터 적극적으로 탈신비화, 세속화한 셈이었다. 다른 지면이 필요한 이야기지만, 한국 문학 연구장에서의 이른바 ‘제도’ 연구는 근대문학·예술의 조건과 맥락을 상세히 규명했고 한국에서의 문학을 둘러싼 패러다임 자체를 변화시켰다. 그런데 그 문제의식 자체가 어쩌면 ‘바깥 없음’이라는 당시의 세계화 인식과 접속한 측면, 결과적으로 그것의 역사적 알리바이를 확인시키는 일과 접속했을지 모를 측면, 그리고 자율성 테제의 과잉 혹은 신화화에 대한 강력한 저항 충동이 냉소(주의)의 문제에 대해서는 방치한 셈이 되지 않았나 등의 문제는 분명 돌이켜 짚어 볼 것이 있다.

4) 고쿠분 고이치로, 박성관 옮김, 『중동태의 세계』, 동아시아, 2019. 이 논의는 2010년대 각 언어권 아카데미즘에서 활성화한 정동 논의와 공명하며, 특히 스피노자의 정동 논의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다.(저자가 스피노자 전공자이기도 하다)

5) 예컨대 문화연구자·정동연구자인 로렌스 그로스버그는 푸코의 말을 빌려 이렇게 이야기한다. “당신은 현실들이 사라져 가고 있을 때만, 그것들이 죽어가고 있을 때만 그 현실들을 묘사할 수 있게 됩니다. 예컨대, 갑자기 당신이 ‘주체’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주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 멜리사 그레그 외, 최성희 외 옮김, 『정동이론』, 갈무리, 2015, 505쪽.

6) 펠릭스 가타리, 질 들뢰즈 등의 1980년대 후반 텍스트에서 언급된 dividual 개념을 통해 빅데이터 마이닝 등의 현재 기술 비평에 접근하는 논의가 많음을 잠시 환기해 둔다.

7) Rachel Greenwald Smith, Affect and American Literature in the Age of Neoliberalis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5, p. 11.

8) 근대 정치철학적 개념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본주의 소유의 문제가 결합하는 양상에 대한 아이디어는 크로포드 맥퍼슨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 홉스에서 로크까지』(이유동 옮김, 인간사랑 1991) 및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어셈블리: 21세기 새로운 민주주의 질서에 대한 제언』(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에서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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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형식(2)

상실의 형식 (2) 김요섭 1 '이쪽'과 '저쪽'은 유동적인 구분이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따라, 그리고 먼저 지시하고 싶은 방향에 따라 이쪽과 저쪽의 위치는 언제든 달라지고, 또 서로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이쪽과 저쪽의 나눔은 언제나 잠정적이자 사적인 기준일 수밖에 없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실제 일어난 현실의 상황과는 다르게. 한국전쟁이 끝나던 해에 태어난 나의 아버지는 사라진 친척들에 대해서 아주 드물게 이야기하셨다. 할아버지의 형제들, 증조할아버지의 가족들, 아버지가 고향의 먼 친척들과 만나서 나누던 이야기 속에 잠깐 언급되었지만 만난 적 없는 그들. 집안의 그 웃어른들을 만날 수 없을지라도, 그 자손인 먼 친척들이야 어디서 만난 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들도 본 적이 없었다. 친척들과의 만남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이가 빠진 톱니처럼 그 관계들 사이에 비어 있는 틈들을 어릴 때부터 알게 모르게 조금씩 의식했던 것 같다. 그들은 대체 어디로 갔는지 하고 말이다. 아버지도 그들에 대해서는 어른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만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 역시 그들을 만난 적이 없으니 말이다. 사라진 친척들에 대한 아버지의 이야기는 아주 짧았다. 그 불쌍한 사람들, 그 불행한 땅에 대해서 그저 '이쪽'과 '저쪽' 모두가 그들을 괴롭혔고 그래서 사라진 이들보다 남은 이가 훨씬 적었다고. 그 사라진 이들의 이름이나 나이, 다른 사연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듣지 못했다. 하필 그들이 살았던 그 불행한 땅은 '이쪽'과 '저쪽'이 반복해서 점령했었다. 톱질할 때 날이 위로 아래로 계속 움직이는 것처럼, 전선이 올라갔다 내려가길 반복했다고 해서 생존자들이 '톱질전쟁'1)이라고 불렀던 그 전쟁의 톱날은 아버지의 고향을 파괴했다. '이쪽'에서 온 군인들이 '저쪽' 사람들이라며 죽이고, '저쪽'에서 온 군인들은 '이쪽' 사람들이라며 죽이는 폭력이 반복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이쪽도 저쪽도 아닌 계속 같은 자리에 있었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전쟁의 톱날 아래 놓였던 이들은 이쪽과 저쪽 그 어느 편 모두에 연루되어 있었다. 그들의 가족과 가까운 이들, 그리고 그 자신은 혼란스러운 시대에 어떤 정치적 입장과도 연결될 수 있었고, 그래서 그들의 정치적 정체성은 이쪽과 저쪽 모두를 만족시킬 수도 또 적대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두 권력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도, 또 살해당할 수도 있었다. 이쪽을 만족시키는 행동은 저쪽의 공격을, 그리고 저쪽을 만족시키는 행동은 이쪽의 공격을 정당화하는 근거였다.2) 이쪽과 저쪽, 남과 북의 두 국가가 모두 자신들의 시각에서 그들의 이름을 불렀고 이제는 모두 잊어버렸다. 사라진 사람들은 그저 이쪽도 저쪽도 아니었던 이들, 그렇게 잊힌 이름들이자 내가 결코 만날 수 없는 이들이다. 이쪽과 저쪽도 아닌 이들이 기억될 자리는 오랜 시간 이쪽에도 저쪽에도 없었다. 기억된다 해도 저쪽에 의해 살해당한 이쪽의 사람들과 이쪽에 의해 살해당한 저쪽의 사람들로 그 기억이 조각조각 나뉘어 있을 뿐이다. 사라진 그들의 이름을 한자리에

  • 최고관리자
  • 202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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