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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열렸던 시간들을 위해 2

  • 작성일 2023-02-01
  • 조회수 1,331

[비평연재]

2023년 비평연재는 두 명의 평론가가 3회씩 연재하며, ‘시대와 작품을 가로지르는 비평가의 눈’이라는 주제로 보다 확장된 문제의식을 펼쳐 보인다.





미래가 열렸던 시간들을 위해 2




양재훈




‘통합’을 다시 생각하기


문학가동맹의 민족문학론에는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를 주는 대목이 한 가지 더 있다. 그들이 당대에 민족문학을 과제로 내세웠던 이유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이들에게 민족은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혈연 집단이 아니었다. 민족의 기반에 있는 민족체(Nationality)의 존재 여부와 별개로, 그것이 근대적 정치체제로서의 국가를 안 받치는 이념이라는 점이 중요했다. 언어, 혈연, 문화, 지리, 정치, 경제 등의 공통성을 바탕으로 형성되어 있던 중세적 민족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민족에 미달하는 집단이다. 장차 민족으로 발전할 예비적 집단이 존재해 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근대적 국민국가 체제의 바탕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공동체로 거듭나야만 민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족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이제 상식이 되어 있다. 혈통이라든가 장기간 같은 지리적 조건에서 형성된 공통생활문화를 공유하는 운명공동체라는 식의 관점은 민족에 대한 통속적 관념으로 기각된다. 근대적 합리성의 세례를 받은 우리는 합리성의 시련을 견뎌내지 못하는 관념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민족이라는 이념에 달라붙어 있는 그러한 상상적 허구가 현실에서 발휘하는 힘은 결코 약하지 않다. 예컨대 정치인들은 결코 국가/민족 구성원의 분열이나 분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사회 통합을 외친다. 내면에 품은 생각이 무엇이건 간에 그들이 통합을 외칠 수밖에 없는 것은 분열이라는 기표를 통해 유권자의 동의를 얻어내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국가/민족 단위 내에서의 통합을 당연히 달성해야 할 이상적인 상태로 설정하고 있다. 민족은 하나(여야 한)다. 민족의 분열은 극복해야 할 이상 상태다.
국가나 민족과 같은 거대하고 추상적인 관념보다 자기 삶의 구체적 국면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에 훨씬 더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도 올림픽이나 월드컵 시즌을 맞으면 느닷없이 애국자가 되곤 한다. 이때만은 서로를 무한히 적대하는 정치적 대립 따위도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유년 시절 나는 그러한 국제대회들에서 자국 대표선수단을 응원하는 일에 의구심을 품었던 적이 있다. 내가 아홉 살이던 시절에 열린 올림픽에서였는데, 내가 우리나라를 응원하며 우리나라의 승리에 기뻐하고 패배를 안타까워한다면, 다른 나라 사람들도 그러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느 선수단은 이기고 어느 선수단은 지며, 그것이 나 자신의 승부도 아니고 나의 직접적 이해관계와도 무관한데 어째서 누군가의 안타까움을 대가로 기쁨을 얻는 것이 가능한가? 이후 나는 올림픽이나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선수들이 거두는 성적이나 경기 등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국가대표를 응원할 마음이 생긴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으니, 내가 국제 스포츠에서 민족적 교감에 참여한 기간은 매우 짧았던 셈이다. 물론 승패와 무관하게 일종의 축제로서 그것을 즐길 수 있으며, 응원 역시 그러한 즐거움을 구성하는 요소임을 모르던 때의 이야기다. 하지만 저 의구심 자체는 유효하다. 왜 국제 스포츠대회의 응원은 항상 자국 대표를 향하는가? 이 단순한 의문만으로도 그러한 교감을 부르는 자연스러운 감각이 실은 자연화된 감각임이 드러난다.
우리는 민족을 믿지 않지만 우리의 행동은 믿음을 지니고 있다. 지젝은 여러 차례 믿음의 자리는 의식이 아니라 행동임을 역설한 바 있다. 그러한 ‘믿음의 행위’가 그 믿음의 대상이 되는 관념의 실효성을 지속시킨다. 지젝이 든 예는 화폐의 효과다. 우리는 모두 화폐가 물신의 권능을 지닌 특별한 사물이 아니라 단지 특정한 방식으로 주조되거나 인쇄된 금속 또는 종이에 불과함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이 그 자체로 가치를 체현하고 있는 사물인 것처럼 행동한다. 우리가 화폐의 가치를 믿는 듯한 행동을 중단한다면 화폐는 곧장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화폐의 효과를 지속시키는 것은 우리의 행동에 담긴 믿음이다.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우리는 스스로 더 이상 민족을 믿지 않는다고 여기지만 실은 그것을 믿는 것처럼 행동하며, 그러한 무의식적 믿음을 통해 민족의 효력을 지속시키는 데 참여하고 있다. 지난 20-30여 년 동안 민족에 대한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되었음에도 민족이 끈질기게 살아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당장 ‘통일’의 당위성에 대한 관념부터가 그렇다. 분단의 대안이 왜 통일이어야 할까? 더욱 급진적인 분리를 통한 완전한 타국으로서의 각자 인정이나 그를 통한 평화 체제의 수립 같은 것은 불가능할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민족에 대한 믿음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다.
이런 의문을 지니고 읽어 보면 문학가동맹의 민족문학론은 충격적인 대목을 보여준다. 그들이 주장하는 민족은 분열을 극복하고 혈통, 지리, 언어, 문화 등의 공통성을 바탕으로 이미 형성되어 있는 기원적 통일을 회복하고자 하는 이념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히려 민족 발생의 계기에 민족체의 분열이 있다고 보았다. 이는 문학가동맹이 사회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결집한 단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적 유물론의 가르침에 따라 역사의 발전이 계급투쟁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여겼고, 중세에서 근대로의 역사 발전을 대표하는 민족국가의 발생 역시 민족체 내부에서 발생한 계급투쟁에 따른 것이라 보았다. 그들에게 민족은 근대적 세계체제를 구획하는 정치체인 민족국가를 구성하는 원리였다. 이는 민족이 중세에서 근대로의 역사 진행을 낳은 이념이며, 근대 이행의 기저에 있는 계급투쟁의 결과물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중세적 신분제를 파괴하고 신분에 의해 나뉘어 있던 민족체의 다양한 구성요소들을 평등한 민주주의적 개인들로 해체・재구성하는 것이 민족이라면, 민족은 신분에 따른 민족체의 내적 분할이 가시화되고 문제시될 때 비로소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민족의 통일은 조화로운 공존이 아니라 분열의 드러남과 투쟁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민족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작동하는 변증법은 처음의 유기적 공동체가 분열되고, 그것이 다시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통합은 최초의 유기적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하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그리하여 민족 형성이 완결된 사회는 유기적인 하나의 공동체 내에서 각자가 제자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러한 유기적 일원성이 파괴된 장소에서 각자가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제자리를 찾아야 하는 공간, 다시 말해 개인이 공동체와 통합되어 있는 사회가 아니라 반대로 모든 구성원이 공동체와 분리된 단독적 개인으로서 사회 구성에 참여해야 하는 근대적 시민사회가 된다. 구성원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 있는 자기 자리를 확보하고 있는 유기적인 중세적 공동체가 파괴된 자리에서,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민족의 공통적 역사라는 관념은 유기적 통합이 불가능해진 사회를 보충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해당 사회를 다시 통합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민족은 한 사회의 분열을 통해 성장하며, 그 사회를 유기적으로 통합하고 있던 원리가 파괴된 자리에서 다시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을 한다. 통합의 기표인 민족은 분열과 비유기성을 조건으로 한다는 역설을 내장하고 있다. 민족은 민족체가 공동운명체라는 외관 아래 은폐하고 있던 내부의 분열을 가시화한다. 요컨대 민족 형성의 제일 원리는 통합이 아니라 분열이다.
민족의 이념은 민족체가 공동운명체라는 외관 아래 은폐하고 있던 내부의 분열에서 싹튼다. 요컨대 민족 형성의 제일 원리는 통합이 아니라 분열이다. 분열된 민족체를 재통합하는 민족의 이념은 각 부분들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을 도모하는 중립적 이념이 아니다. 신분제의 모순이 드러남으로써 분열된 부분들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은 신분적 질서의 지속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통합은 오직 분열과 투쟁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것은 철저히 신분제에 의해 사회체 내의 비주체로 격하되어 있던 피지배계급의 입장에 종속되어 있다. 민족이란 오직 자신들 역시 지배계급과 동등한 지위를 획득하여 사회체 내의 평등한 구성원으로 대우받기를 원하는 피지배계급의 이념일 수 있을 뿐이다. 민족은 분열된 구성요소들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입장만 긍정하는 편파적인 이념이다.
문학가동맹의 민족문학론에는 이러한 전제가 깔려 있다. 그들이 민족을 소수의 진보적 부르주아지와 노동자, 농민, 중간층의 연합을 근거로 사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조건 위에서였다. 민족은 중세의 신분적 질서 속에서 사회체 내의 비주체로 격하되어 있던 피지배계급이 스스로의 존엄을 위해 지배계급에 대항해 투쟁함으로써 형성되는 집단 주체라는 것이 민족에 대한 이들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당대 민족 형성의 준거가 진보적 부르주아, 노동자, 농민, 중간층으로 설정된 것은 말하자면 그것이 일제의 식민 지배를 거쳐 형성된 당대 조선의 피지배층에 해당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임화는 “민족은 폐왕도 아니요, 자본가도 아니요, 지주도 아니요, 어느 외국관서의 속리도 아니”1) 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그가 당대 민족체 내부에서 민족을 형성하기 위한 분할선이 어디에 그어져 있다고 여겼는지 알게 한다. 해방 직후 문학가동맹에게 민족은 폐왕, 자본가, 지주, 외국관서의 속리 등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진보적 부르주아지와 노동자, 농민, 중간층의 연합을 통해 형성되어야 할 집단 주체였다. 문학가동맹이 당대의 과제로 설정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그러한 민족의 형성과 그에 따른 사회의 변혁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민족문학론은 그 변혁을 담당해야 할 주체인 민족의 형성에 기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오랜 역사 속에서의 연속성을 바탕으로 외부와의 차이를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역사적 불연속성과 내부적 분열을 통해 형성되는 민족의 개념은 현재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우리 사회는 심각한 계층, 성별, 세대 및 정치 진영 간 분열과 갈등에 처해 있다. 통합이 과제로 주어져 있지만 문제는 어떤 통합이냐에 있다. 반세기도 전에 문학가동맹이 주장했던 민족 개념은 분열의 극복이 단순한 중재나 반대 진영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 따위와 거리가 멀다는 판단을 담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 중 하나인 분열의 극복이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1) 임화, 「민족문학의 이념과 문학운동의 사상적 통일을 위하여」, 『임화문학전집』5, 소명출판, 2009, 459면.


과거의 실패들을 되살리기


더욱 중요한 것은 문학가동맹 민족문학론이 민족을 미해결 과제로서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문학가동맹이 당대 조선의 최우선과제로서 민족을 내세운 것은 그것이 과거로부터 시도되어 왔으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라는 판단에서였다. 이는 이른바 ‘창조론적 유물론’이라는 관점을 통해 조명할 때 그 의미가 드러난다. 창조론적 유물론은 지젝의 용어로, 그가 사적 유물론의 목적론적 해석을 비판하며 제시한 개념이다. 그는 목적론적으로 해석된 사적 유물론을 ‘진화론적 관념론’이라 부르며 자신이 ‘창조론적 유물론’이라 부른 관점과 대조했다.2)
문학가동맹은 당대의 여타 국내외 사회주의 세력들과 마찬가지로 사적 유물론에 따른 객관적 역사발전법칙의 과학성과 필연성을 믿고 있었다. 사적 유물론은 세계의 역사가 생산력의 증대에 따라 생산관계가 진화하는 방식으로 발전한다고 이해한다. 사적 유물론은 이러한 역사발전법칙에 따라 세계가 원시 공산주의 – 고대 노예제 – 중세 봉건제를 거쳐 근대 자본주의로 이행해 왔으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발생하는 모순에 따라 이후 세계의 역사는 사회주의를 거쳐 인류 역사의 최후 단계인 공산주의를 향해 나아갈 것이라고 보았다. 이와 같은 목적론적 관점에서 당대의 사회주의 세력은 당대 조선의 상황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과정에 있는 것으로 파악했으며, 그에 따라 조선 역사를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과도기적 과정으로 설정했다. 이때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주체인 민족은 서구가 이룩한 것과 같은 근대성에 도달하고자 하는 프로그램에 속한 것으로 격하되곤 했다. 문학가동맹을 우경화된 집단으로 평가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측은 문학가동맹의 민족문학론을 사회주의라는 더욱 근본적인 목표를 몰각한 프로그램으로 비판한 바 있다.
목적론적으로 파악된 사적 유물론은 역사 진행의 경로를 단순화하고 획일적인 미래상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오류를 내포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역사는 객관적인 역사적 합법칙성이라는 대타자에 의해 그 성공이 보장된 과정으로 규정되며, 그럼으로써 그러한 과정에 참여하는 주체들은 모두 대타자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의 지위로 격하된다.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논리에서 민족이 당대에 여전히 실현되어야 할 과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사회주의를 성취하기 위한 중간 과정으로서 소홀히 취급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은 역사를 단선적으로 진행하며 발전해 가는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각 발전단계에서 승리한 자들의 입장에서 과거를 바라본다. 그에 따라 그러한 관점에서는 기존의 사회에 저항하던 주체들의 다양한 관점들과 그들에게서 상상되었던 다양한 가능성들은 단선적 역사에 일치하는 경우만 남기고 과거 속으로 사라져 버리게 된다. 민족이라는 과도기적 주체가 그다음 단계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안에서 소홀히 취급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학가동맹의 민족문학론이 민족을 보는 관점은 이러한 목적론적 관점의 오류를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들 역시 사적 유물론이 제시하는 역사 진행의 경로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민족을 내세울 때, 그것은 미래의 사회주의를 예비하는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조선왕조 말기로부터 당대까지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시도되었고 실패를 거듭하며 진전되어 왔던, 그리고 여전히 현재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반드시 실현해 내고 말아야 하는 과제로서 내세웠던 것이다. 여기에서 초점이 되는 것은 민족이라는 당대의 역사적 과제 자체이며,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 역시 미래를 향한 역사가 아니라 반복해서 실패해 왔던 과거의 시도들이었다. 말하자면 이들의 민족문학론은 대타자에 의해 보장된 성공이 아니라 과거의 실패를 향한 동일시에 따른 것이었다. 이들의 민족문학론이 바라보는 민족이란, 실패를 반복하며 조금씩 더 나은 실패를 향해 나아 온 역사라는 전제 위에서 파악된 과제였던 셈이다.
실패를 반복하며 조금씩 더 나은 실패를 향한 역사라는 관점과, 그 가운데 부과된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는 지젝이 ‘충동의 윤리’라 부른 것을 떠올리게 한다. 특정한 대상을 향한 마음의 작용인 욕망과 달리 충동은 대상이 부재하는 빈자리를 향한다. 때문에 충동의 윤리는 대상을 획득하는 데 실패한 자리에서만, 그 실패의 불가피성을 온전히 수긍하는 주체에게서만 활성화될 수 있다. 욕망이 우연적으로 선택되어 근본적 결여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대상을 겨냥한다면, 이를 통해 은폐되는 근본적 결여, 대상이 치워진 뒤에 남는 텅 빈 자리 자체가 충동의 대상이다. 충동이 욕망과 가장 확연히 구분되는 점은 그 수동성(Passivity)에 있다. 빈자리를 채울 대상을 향해 움직임으로써 적극적으로(Active) 저 근본적 결여라는 사태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이 욕망이라면, 충동의 주체는 이 견디기 힘든 빈자리 자체의 인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것에 끌려 다니는 것이다. 충동의 주체는 결여를 채울 대상이 궁극적으로 부재함을 확인시키는 사건에 매여 있다. 충동은 이런 트라우마를 안겨 주는 사건, 곧 ‘사물(Thing)로서의 원인(Cause)’,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오는 실재에 충실하도록 하며, 그에 대한 흩어지고 왜곡된 기억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주체를 붙드는 힘이다. 욕망의 주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행동한다면 충동의 주체는 달리 어쩔 도리가 없어 행위한다.3)
충동의 윤리는, 주체를 실패 앞에 무기력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그 실패로부터 동력을 얻어내며 행위하게 한다. 충동의 행위는 무언가를 표나게 바꾸려는 적극성을 띠지 않기 때문에 무기력과 쉽사리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그것이 흩어지고 왜곡되는 기억들을 되살려내는 데 목적을 두기 때문이다. 무기력의 주체가 저 괴로운 기억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충동의 주체는 그것이 흩어져 잊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그 안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충동의 거점이 되는 실패는 주체를 주저앉히거나 다른 것을 향해 떠나게 하는 끝이 아니라 언제나 거기서부터 무언가가 다시 시작되는 회귀의 지점, 주체가 거기 머물러 있게 하는 원지점이자 그럼으로써 저 기억이 결코 끝나지 않게 하는 무엇이다.
문학가동맹이 민족을 역사가 당대에 안겨 준 부채로 파악했던 것은 그들이 주장한 민족문학론이 충동의 윤리에 따른 것임을 알려준다. 그들은 사회주의라는 역사의 최종국면을 향해 적극적으로(active) 전략을 세우고 그에 따라 당대의 과도기적 과제로서 민족을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조선의 역사가 당대에 안겨 준 부채를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민족을 내세운 수동적(passive) 주체였다고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적극적인 욕망의 주체라기보다는 수동적인 충동의 주체였다.


2) 진화론적 관념론(evolutionary idealism)과 창조론적 유물론(creationist materialism)에 대해서는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수련 옮김), 새물결, 2013.
3) 충동의 윤리에 대해서는 슬라보예 지젝, 박정수 옮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인간사랑, 2004, 509–514쪽 참조.


현재 우리는 문학가동맹이 민족문학론을 내세우던 것과는 다른 역사적 조건 위에 있다. 특히 민족이라는 말이 내장할 수 있는 가능성의 범위가 매우 축소되어 있는 상태다. 우리는 남북 분단으로 인해 각각 남과 북에 들어선 독재 체제를 떠받치는 방향으로 민족 개념이 굳어져 온 상황 아래 놓여 있다. 그 과정에서 민족이 중세적 질서 속에서 고통 받던 피지배 신분의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그 잔재를 안고 일제를 거치며 굴절된 역사 속에서 형성된 기득권층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봉합의 기표로 전유되어 왔다. 지금 상황에서 문학가동맹의 민족문학론을 다시 가져오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그러나 그 내용의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이 소용을 다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해방 직후 문학가동맹과 같은 제3의 민족 개념이 현재의 그것에 패배함으로써 우리는 여전히 중세적 잔재의 청산과 일제 잔재의 청산 등 문학가동맹이 선명한 구호로 내걸어 왔던 과제조차 해결할 기회를 잃어버린 바 있고, 그 영향은 여전히 우리에게 미치고 있다.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분열과 갈등이 또 한 번 기득권을 위한 봉합으로 귀결되는 것은 곤란하다. 한국 근대사의 흐름 속에서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을 돌아볼 필요, 그리고 그 가운데 시도되었던 다양한 가능성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문학가동맹의 민족문학론은 그러한 가능성 중 하나로 남아 있다.
문학가동맹의 민족문학론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그것이 내장하고 있는 충동의 윤리에 있다. 과거에 시도되었으나 여전히 해결을 보지 못한 문제들을 다시 끄집어내어 현재 속에 되살려내는 일은, 단지 영웅적 실패를 찬양하는 것과는 다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그 실패한 시도들을 통해 개방되었던 가능성, 이후의 역사 과정 속에서 은폐되었으나 결코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 온 가능성을 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앞의 연재에서 말했던 것과 같은, 미래가 열렸던 시간 속에서 개방된 가능성과 그에 따라 문화 속에 남아 지속됨으로써 우리의 삶을 바꾸어내는 느리지만 분명한 움직임이 바로 그것일 터이다. 문학가동맹의 민족문학론만 해도 그렇다. 그것은 분명 이후의 연속적 역사 속에서는 사라져 버렸지만, 4월 혁명과 6・10 민주항쟁 등의 사건을 통해 불연속적 역사 가운데 끊임없이 되살아나며 다시 돌아보아야 할 이론적 준거로서 부활해 왔다. 아마도 2016년의 촛불 역시 그러한 사건들의 목록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미래가 닫힌 듯 보이는 현재 한국 사회의 상황 속에서 미래가 열렸던 과거의 시간을 돌아보고 그를 통해 변화되어 지속되고 있는 현실을 찾아내는 것이 이 연재의 목표다. 이를 위해 그러한 태도의 준거가 될 수 있는 문학가동맹의 민족문학론을 돌아보았다. 너무 길어진 감이 있지만 이는 이 연재의 목표가 문학가동맹의 민족문학론이 보여주었던 가능성을 이론적 준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 말한 것과 같은 내 글쓰기의 습관과도 연관이 있다.
지금부터 검토해야 할 것들이 많다. 한 차례 남은 연재분으로 다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연재를 통해 못 다할 것들은 긴 호흡을 갖고 앞으로의 글들을 통해 조금씩 해나가 볼 참이다. 우선 다음 연재분에서는 지금 우리 문학이 1980년대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시작해 볼까 한다. 그것이 그럭저럭 가까우면서도 충분한 거리를 두고 있어 정리하기에 수월한, 열린 미래를 보던 시대였던 듯하기 때문이다. 지면과 시간이 허락한다면 2016년 이후 문학의 변화에 대해서도 살펴볼 참이다.











작가소개 / 양재훈

201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대표평론 「새해가 오게 하려면」, 「반박귀진의 하수들과 철없는 바틀비들」 등.


《문장웹진 2023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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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

  • 관리자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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