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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자유’와 그 주체들

  • 작성일 2022-12-01
  • 조회수 1,920

[현장비평]



‘경제적 자유’와 그 주체들 :

김수현의 『개미는 왜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투자하는가?』와 장류진의 『달까지 가자』



유인혁




1. 투자자, 혹은 경제적 자유의 주체


마이클 무어의 <식코SICKO>(2007)는 자본주의적 사회의 공포에 대한 가장 재기 넘치는 재현 중 하나다. 이 다큐멘터리는 도입부에서 보험이 없어 다리의 자상을 직접 꿰맨 아담과, 약지와 중지 중 하나만 접합수술을 받을 수 있었던 릭의 사례를 소개했다. 그리고 이 다큐가 릭이나 아담처럼 무보험의 취약층이 아니라 보험이 있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임을, 그러니까 비교적 덜 불안정한 상태의 사람들에게 닥칠 수 있는 재난에 대한 것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못 박았다.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식코>는 특수하지만 아주 일반적인 공포의 현장을 열어젖혔다.
김수현의 『개미는 왜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투자하는가』(이후 『개미는 왜』로 표기)와 장류진의 『달까지 가자』의 장점은 과연 이와 같다. 두 작가는 모두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계층이 아니라 비교적 일반적인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김수현의 『개미는 왜』는 개인 전업투자자들을 위한 임대공유 사무실인 ‘매매방’이라는 공간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다. 이때 인류학적 보고서라는 표현은 직서적(literal)인 것이다. 왜냐면 이 책은 본래 김수현의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석사학위 논문을 수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김수현은 상당한 자본금을 운용하는 40∼50대 남성 개인투자자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한편 장류진의 『달까지 가자』는 마론제과라는 가상의 중견기업에서 근무하는 세 여성 노동자 겸 가상화폐 투자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장편소설이다. 즉 장류진이 꾸준히 관심을 가져 온 20∼30대 화이트칼라 여성 노동자의 삶을 재현한 픽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한국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계급의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이 세상의 가장 끔찍한 밑바닥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어서 쉽게 볼 수 있는 경관을 마주하게 된다.
여기서 두 작가가 더불어 포착하고 있는 공포의 풍경이란, 세대와 젠더를 가로지르는 경제인구들이 모험적이며 심지어 도박적인 성격을 가진 금융투자에 매진하는 현상이다. 『개미는 왜』는 특히 4050 남성들이 ‘멘탈’을 무너뜨리는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모험적인 투자를 계속하는 광경을 그리고 있다. 『달까지 가자』의 세 주인공 역시 가상화폐 이더리움이 급등과 급락을 반복할 때마다 감정의 급전직하를 겪는다. 이들은 몹시 불안정하며 무질서한 시장과 대결하며 심신이 병들었다.
이들은 현재 컴퓨터로, 또한 스마트폰으로 차트를 바라보며 일희일비하는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2022년 현재 대한민국의 가상화폐 투자자 수는 약 587만 명,1) 주식 투자자의 수는 약 1,300만2) 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러한 통계 수치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경제활동인구 대부분은 투자자다. 그러니 김수현과 장류진이 재현하는 인물들은 대한민국 경제 주체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글은 김수현과 장류진이 현재 가장 대중적이며 포괄적인 사회학적 대상을 다루고 있다는 점만 주목한 것이 아니다. 두 저자는 문학(화)비평의 영역에서 심오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것은 상호관련적인 두 가지 차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김수현과 장류진은 우리 시대의 보편적인 서사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서사란 용어는, 주체가 세계를 개연성 있게 이해하는 방식이라는 의미로 사용됐다. 즉 『개미는 왜』와 『달까지 가자』는 현재 다수의 한국인들이 이 사회를 어떻게 경험하고 있으며,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상상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의 경로를 어떠한 원칙에 따라 설정하는지 보여준다.
앞으로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우리 사회가 경제적 자유의 환상을 갖고 있다는 점을 적시하고 있다. 경제적 자유란 특히 2010년대 후반부터 유행한 대중적 경제담론의 용어다. 그것은 대체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경제적 여건을 가리킨다. 즉 개인의 인격을 마모시키거나 정신적 에너지를 소진(burn out)시키는 ‘소외된 노동’을 극복한 상태를 뜻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좋은 삶이라고 부르는 삶 속에 거주하며 그것에 정동적 애착을 가지도록 자극”3) 하는 그러한 긍정주의로 다가온다.
이러한 목표를 딱 잘라 환상이라고 말한 것은, 다만 경제적 자유의 목표가 허황하거나(‘경제적 자유’ 개념의 전도사들은 대개 20억~50억 원의 목표를 제시한다), 소비 자본주의의 욕망과 종종 뒤섞이고, 땀을 신성시하는 노동윤리에 어긋나기 때문은 아니다. 경제적 자유가 환상인 것은, 그것이 기만적인 타협(compromised)이어서 사실상 실현이 불가능한 약속(promise)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자유란 다른 많은 자유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특권이다.4) 경제적 자유에 대한 선망 너머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경제적 부자유 상태에 있다는 맥락이 존재한다. 김수현의 말을 인용하자면, “월급만 ‘따박따박’ 모아서는 더 이상 집도, 결혼도, 자녀 양육도 답이 안 나오는 현실”5) 속에서는, 전 계층의 사람들에게 투자에 대한 압력이 가해진다. 이때 시장은 부자유에서 자유로 이동하려는 사람들이 맞부딪치는 일종의 전장이다. 그러니 경제적 자유에 이르는 길은 필연적으로 가혹한 경쟁과 과감한 도전을 경유해야 한다. 이것은 경제적 자유가 모든 구성원들에게 허락된 꿈이 아니라는 의미다.
다른 한편 김수현과 장류진은 우리 시대의 특징적인 주체상을 적절히 재현하고 있다. 즉 경제적 자유라는 서사의 주요 구성요소로서 행위자의 진면목을 재구성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김수현과 장류진으로부터 발견할 수 있는 두 번째 심오한 문제다.
고위험 투자자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많은 금융 투자자들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무모한 도박쟁이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투자 상품 대부분이 ‘투기성 확률게임’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는 굉장히 오래된 생각이다. 폴 라파르그는 20세기 초에 이미 “주식들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손해를,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익을 가져다주는데 이처럼 손해와 이익을 보는 방식이 어찌나 도박과 흡사한지 실제로 주식 거래는 도박으로 불릴 정도”6) 라고 말한 바 있는 것이다.
그런데 두 작가는 고위험 투자자들을 환상에 빠진 몽상가로 치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긍정적이며 부분적으로는 합리적인 주체로 재현하고 있다. 그들은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목표”7) 인 행복을 실천하기 위해 자아를 다스리는 의지를 중시하는 긍정주의적 성향을 보인다. 이러한 주체들에게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는 강한 정신력(『개미는 왜?』)과 불안을 견딜 줄 아는 인내심(『달까지 가자』)은 무척이나 중요한 덕목이며, 개인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인적 자원(human resource)이다. 투자자들은 심지어 합리적인 주체이기도 하다. 그들이 경제사회적인 열광(fever)에 휩쓸리는 배경에는, 개인에게 주어진 모든 선택지들이 이미 위험한 상황이 전제되어 있다. 예컨대 봉급생활만으로는 노후 대비는커녕 안정적인 삶의 재생산이 어려울 때, 그리고 육체적‧정신적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직업이 얼마 주어지지 않을 때, 모험은 유력한 선택지가 된다. 김수현과 장류진은 비합리적인 실천이 어떤 의미에서는 ‘도구적 합리성’이 되는 아주 특수한 맥락을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두 작가는 우리 시대, 그러니까 금융투자가 일반적인 경제적 삶의 방식이 된 사회의 핵심적인 환상과 공포를 포착하고 있으며, 나아가 그러한 환경 속에서 이루어지는 주체화의 양상을 바르게 재구성하고 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은 지금까지의 어휘에 종속되지 않은 새로운 표상들이다. 지금부터 그 이미지들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1) 윤진호, "국내 가상화폐 투자자 587만명, 127兆 넣었다 105兆 뺐다", 〈조선일보〉 21.05.27. (https://www.chosun.com/economy/stock-finance/2021/05/27/2LP6KKP26ZAAZK2STTZ7M574Z4/) 22.11.10 접속.
2) 박채영, "동학개미 1000만명 시대…지난해 주식 투자자 수 1384만명", 〈경향신문〉 22.03.17.(https://www.khan.co.kr/economy/finance/article/202203172140015) 22.11.10 접속.
3) 로렌 벌렌트, 「잔혹한 낙관주의」, 멜리사 그레그 편, 최성희‧김지영‧박혜정 옮김, 『정동이론』, 갈무리, 2015, 169쪽.
4) 자유는 천부적 ‘권리’나 상태처럼 보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언제나 일종의 특권으로 존재해 왔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지그문트 바우만, 문성원 옮김, 『자유』, 이후, 2002를 참조.
5) 김수현, 『개미는 왜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투자하는가』, 민음사, 2021, 15쪽.
6) 폴 라파르그, 「신앙의 원인들」, 디 노이에 차이트, 24권 1호, 슈투트가르트, 1906, 512쪽; 발터 벤야민, 조형준 옮김, 방법으로서의 유토피아, 새물결, 2008, 146쪽에서 재인용.
7) 에바 일루즈, 이세진 옮김, 『해피크라시 : 행복학과 행복산업은 어떻게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가』, 청미, 2021, 45쪽; 에바 일루즈의 이 책은 신자유주의가 자기재생산을 위해 어떻게 행복에 대한 추구와 긍정주의적 태도를 이용하는지 자세히 밝히고 있다.




2. 『왜 개미는』 : 인간의 심리를 극복하기


김수현의 『왜 개미는』은 “2007년 설립된 15년 역사의 로얄매매방”을 배경으로 “국내주식과 해외주식, 선물‧옵션과 같은 파생상품, 채권 등 다양한 상품을 장단기에 걸쳐 매매하는 개인전업투자자”를 분석하고 있다. 이 매매방은 “높은 파티션으로 구분 지어 놓은 사무실인데 흡사 독서실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며, 입실자들은 “15만~30만 원가량의 월세”를 지불하고 그곳을 사용한다. 그들은 같은 공간에 모여 있지만 “자기 돈으로, 자기 판단 하에 매매하는 독립적인 투자자”들이다.8)
김수현은 1994년생의 여성이며, 2019년에 『개미는 왜?』의 저본이 되는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석사 논문을 제출했다. 이러한 약력은 『개미는 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저자 김수현이 수행했던 사회적‧문화적 횡단이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20대 여성 연구자로서 4050 남성들의 하위문화적 공간에 진입했다. 그리하여 “마치 전산 오류로 남고에 혼자 잘못 전학 온 여학생이 된 듯한 기분”9) 을 느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김수현이 중년과 청년, 남성과 여성, 연구 대상과 연구자의 간격과 차이를 언제나 인식하며 글쓰기를 했음을 암시한다. 김수현의 『개미는 왜』는 기본적으로 인류학적인 글쓰기다. 그리고 인류학에서 관찰자의 위치, 혹은 시점의 문제는 문학에서만큼이나 중요하다. 그것은 인류학자가 정보를 운반하는 중립적인 매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류학자는 객관적인 관찰자의 시점을 사용하거나, 참여 관찰을 통해 1인칭을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퍼스펙티브’를 차용하든 관찰자는 진실을 자신할 수 없다. 그/녀는 피관찰자에게 자신의 관념을 투사하거나 혹은 매혹될 수 있고, 더러는 저항에 부닥칠 수도 있다. 그리하여 글쓰기는 언제나 해석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인식하며 수행될 수밖에 없다.
김수현은 두 개의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로얄매매방의 세계에 들어섰다. 그녀는 실제로 주식 경험이 있는 젊은 투자자로서 매매방에 ‘입실’했고, 연구자로서의 위치와 목적 역시 밝혔다. 그리하여 관찰 대상의 세계에 정식으로 등록되면서 한편으로는 바깥의 위치를 확보했다. 이 책에서 더욱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대개 관찰자로서의 정체성이다. 그녀는 사회학과 경제학의 용어들을 사용하며 대상을 해석 및 평가한다. 또한 김수현은 종종 영화 『타짜』의 대사들을 중요하게 인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은유의 기법을 통해 이 책은 노골적인 문학적‧미적 재현이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김수현은 신뢰를 통해서만 끌어낼 수 있는 목소리를 수집하며, 그것을 글쓰기로 옮기는 데 성공한다.


8) 김수현, 앞의 책, 43쪽.
9) 김수현, 위의 책, 44쪽.



나는 예비조사 단계 때 ‘젊은 개인전업투자자’로 스스로를 소개한 이후 입실자와 라포를 형성하며 현지조사를 계획하는 연구자로서의 이중적인 신분을 소개했다. 이에 대해 입실자들은 연구를 위한 것이라 “다행이다”라고 말하며, “솔직히 젊은 사람이 어린 나이부터 투자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업투자에 관해 마냥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들은 적어도 젊은 나이 때에는 직장생활을 해서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배워야 하며,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에 공헌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10)


『개미는 왜?』는 중첩적이며 모순적인 저자의 위치에서만 작성될 수 있는 진귀한 장면들을 보여준다. 위 인용문에서 ‘나’는 연구자라는 두 번째 신분을 소개하며, 오히려 관찰 대상의 호감을 획득했다. 그것은 매매방의 입실자들이 전업투자에 대해 양면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생계를 전업투자에 의지하고 있지만, 청년층의 때 이른 투신에는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젊은 투자입문자 김수현보다 젊은 연구자 김수현을 더욱 환대했다.
이러한 복잡한 라포(rapport)11) 형성 양상은 그만큼이나 복잡한 입실자들의 내면을 방증하고 있다. 그들은 투자자가 되기 위해서 세상의 이치를 깨달을 만큼 충분히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고 믿으며(“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번영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의식 속에는 전업투자라고 하는 경제적 삶의 방식에 대한 일정한 회의감이 드러나 있다.


김성호 반대로 주식시장이 폭락을 하고, 파생에서 풋(put option)을 산 사람이 돈을 벌어. 굉장히 소수야. 남들은 다 죽어 가는데 그 사람은 돈을 벌었어. 아 기분이야 좋겠지, 남들 다 손해 봤을 때 혼자만 돈 벌었는데 얼마나 그게 짜릿하겠어. 근데 봐. 대다수, 자기 주변의 친척, 형제, 친구 다 망해 가. 근데 자기만 돈을 벌어. 그게 얼마나 기쁠까? 그건 기쁘긴 하겠지만 정말 기쁜 것 같지는 않아. 계속 뭔가 나쁜 일이 생기길 더 바라는 거잖아.12)


박동일 원래 주식을 하다가, 국선(국내 선물)으로 갔다가 해선(해외 선물)으로 가는 게 망가지는 그런 과정이거든요. 근데 (연구자는) 국선은 안 했다니까, 운이 좋은 경우고. 그래도 해선으로는 버는 사람이 없다는 건 통계로 나와 있는 거고.13)


10) 김수현, 앞의 책, 196쪽.
11) 김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상호 신뢰관계. 여기서는 연구자와 연구 대상 사이의 신뢰와 친밀감 정도를 가리키는 용어다.
12) 김수현, 앞의 책, 312∼313쪽.
13) 김수현, 앞의 책, 88쪽.



입실자들은 초심자에게 실용적‧도덕적 조언들을 제공하는 한편, 일종의 자기반성을 수행한다. 우리는 이러한 목소리로부터, 입실자들이 투자 행위를 불안정하며 심지어는 부도덕한 행위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입실자 박성호는 금융투자를 통해 이득을 취한다는 것이 사실 약탈적인 행위임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이는 특히 파생상품과 같은 고위험 분야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여기서 말하는 풋옵션이란 시장 가격과 무관하게 특정 상품을 특정 가격에 매도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그것은 가격이 하락한 자산을 비싸게 파는 것으로, 개념상 매수자에게 손해를 안길 수밖에 없다. 여기서 입실자 박성호는 자신의 경제적 이득을 위해 “대다수, 자기 주변의 친척, 형제, 친구”를 희생시켜야 하는 비정한 구조를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입실자들은 자기 역시 비정한 승부의 패배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박동일의 인터뷰는 많은 투자자들이 주식에서 선물, 다시 해외 선물로 종목을 바꾸며 점점 더 많은 위험을 감수하는 양상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는 실용적 조언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위험을 추구하는 것이 ‘망가지는’ 패턴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며, 인터뷰어 김수현에게도 넌지시 위험을 멀리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용철 내가 원하는 노동의 대가를 주는 직업이 만만치 않더라고요, 주변에. 나도 뭐 직장 다닐 때만 해도 그만큼 가치를 받고 다녔는데, 그만두고 나니까 그만큼 사회에서 밀려 나와서 내 가치를 못 받더라고. 저도 이전에 대기업 다닐 때만 해도 수입이 많았죠. 근데 은퇴하고 나니까 부가가치가 떨어지잖아요. 부동산 하면서 150만 원 받고 일하고. 그것도 하루 종일 토요일까지.14)


윤택수 못 떠나는 건 어쩔 수가 없으니까. 이거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대안이 없어. 지금 우리 나이가 내일모레면 예순에 가까워지는데 뭘 할 수 있겠어. 그렇다고 뭐 장사를 하겠어, 몸으로 때우는 막일을 하겠어, 방법이 없으니까 하는 거지. (중략) 애들이 크니까 학비 부담도 있고, 어쨌든 불가능한 거야. 다른 걸로 만회한다는 게. 결국은 여기서 다시 승부를 봐야 돼.15)


민종학 정년까지 할 수 있었지만, 지하철 3교대 근무가 너무 힘들었어. 몸도 안 좋은데 50대가 되니까 남성 갱년기 장애가 와서 더 이상 교대 근무 못 하겠더라고. 젊을 때야 교대 근무 버티지만 나이 들면 생체리듬을 방해해서 몸이 힘들어서 못 해.16)


14) 김수현, 앞의 책, 151쪽.
15) 김수현, 앞의 책, 153∼154쪽.
16) 김수현, 앞의 책, 156쪽.



그렇다면 왜 이들은 위험성이 큰 데다 내면을 갉아먹기까지 하는 투자를 지속하는가.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물론 ‘대박’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은 보다 현실적인 이유, 즉 다른 할 수 있는 일이 마땅치 않다는 사정과 연계되어 있다. 이용철, 윤택수, 민종학 3인은 각각 대기업 임원, 증권사 직원, 역무원으로 일하다가 은퇴했다.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서 직장인의 삶도 은퇴자의 삶도 힘들긴 매한가지다. 노동이란 특히 노년의 몸이 될수록 버티기 어렵다. 그것은 종종 생체리듬을 망가뜨리는 부자연스러운 삶을 강제한다. 또한 긴 노동일에 비해 박봉이어서 충분한 여가를 갖기 어려움은 물론이거니와, 좋은 삶을 살고 있다는 안녕감을 갖추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업투자는 합리적인 선택지로 다가온다. 우선 전업투자는 지속 가능한 경제활동으로 인식된다. 합리적인 노동일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투자자의 노동시간은 주식시장의 주기에 맞춰져 있어서 폐장 후에는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이것은 “하루 종일 토요일까지” 일해야 하는 노동시장의 여건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또한 투자는 오랫동안 할 수 있다. 그들은 “내일모레면 예순”인 나이에도 경제활동을 그만둘 수 없다. 그들은 가정의 기초적인 재생산은 물론이거니와 “아이들의 학비 부담”, 그리고 노후 대비에 이르기까지 돈을 벌어야 할 이유가 많다. 그러나 육체가 노쇠하고, 과거에 습득한 전문성을 활용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다. 이때 주식투자는 사실상 정년이 없으며, 과로나 자기착취로부터 자유로운 ‘대안’이자 ‘방법’으로 다가온 것이다.


김성호 내가 이 사업을 했을 때 실패할 확률도 있지만,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합리적일까? 비합리적일까? 예를 들어서, 요즘 편의점을 그렇게 많이 흔하게 하는데. 편의점 한다고 하면 주위에서, 그거 너무 많이 생겼고, 금방 망하는데, 너 그거 돈도 못 벌어. 인건비도 안 나와. 근데, 그 많은 사람들은 하잖아. 그럼 그 사람들은 비합리적일까? 마찬가지로 아이돌 되고 싶어 하는 친구들도 요즘 많은데, 몇 만 대 일의 확률을 뚫고 하는데. 그럼 그거 도전하는 친구들은 다 비합리적인 걸까?17)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마주하는 세계가 본질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이다. 김성호 씨는 세상 모든 것은 위험이며, 그렇기에 모든 종류의 일은 도전이라는 사상을 내면화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세상만사는 ‘실패할 확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에서 그 확률은 아주 높다. 많은 은퇴자들이 편의점이나 요식업 창업에 뛰어들었는데, 아주 소수만이 수익을 내며 영업을 지속한다. 한편 많은 청년층은 구직난에 시달리고 있는데, 연예계 역시 “몇 만 대 일의 확률”을 두고 경쟁하는 청‧소년들로 포화상태다. 요컨대 세상은 일반적으로 불안정하며, 위험으로 가득하다. 그러한 세상에서의 생존은 위험감수(risk-taking)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개미들의 고위험 투자는 역설적으로 합리적인 행위가 된다. 만약 세상만사가 위험이어서 “도전과 경쟁은 어떤 선택을 하든 존재하는 상수(常數)”18) 라면, 모험은 비합리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물론 이러한 언설은 자기합리화의 성격을 가진 것이다. 편의점 창업의 리스크와 금융 파생 상품의 리스크는 같지 아니하며, 거기에는 확연한 정도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통찰력이 존재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에 따르면 현대적 삶의 양상이 복잡해지고 미래가 점점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될 때, 그리하여 “‘불확실성’이 영구적인 것이 되고 그런 식으로 보이게 되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차라리 하나의 게임으로 여겨지게 된다”.19) 우리는 미래가 진보할 것이라는 믿음을 대체로 갖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내년이나 10년 뒤의 주식시장은 물론이거니와 실물경제, 그리고 특히 나의 상태가 나아질 것인지 그렇지 못할 것인지는 그야말로 불확실하다. 한 사람의 은퇴자가 자신의 자산을 부동산에 투자해야 하는지, 금융시장에 투자해야 하는지, 아니면 재교육을 통해 취업하거나 아니면 새로이 창업해야 하는지, 대체 어떻게 해야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할 수 있는지는 전적으로 미지수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내가 내린 선택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는, 지극히 냉정한 개인주의적 사태뿐이다. 그 누구도 잘못된 선택의 결과를 대신 책임지거나, 혹은 부조할 수 없다. 만약 세상의 진면목이 이렇듯 불안정하며 또한 무질서한 것이라면, 그 안에서 유일한 정답을 찾아낼 확률은 그야말로 희박한 것이다. 그러니 고위험 투자는 적어도 다른 위험한 선택지만큼은 합리적인 것이 된다.
물론 이것은 비합리성의 세계에 대하여 비합리적인 논리로 대응하는 것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더욱 심오한 국면은, 투자자들이 무질서한 세계와 대결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합리적인 주체로서 계발하고 단련시키고자 노력한다는 사실이다. 사실, 바로 이 부분이야말로 김수현의 책이 펼쳐내고 있는 우리 시대 주체의 진경(珍景)이다.


박동일 (투자) 기법은 10%고 90%가 심법(心法)이에요. 심법이라는 건 기법을 실제로 실행하기 위해서 내 마음을 다스리는 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법도 그대로 못 하는 거예요. 실행이 안 돼요. 나도 요새 하도 안 되어 가지고 이렇게 ‘절대 원칙’이라고 만들어 둬요.20)


17) 김수현, 앞의 책, 295∼296쪽.
18) 김수현, 앞의 책, 295쪽.
19) 지그문트 바우만, 이일수 옮김, 『액체현대』, 필로소픽, 2022, 275쪽.
20) 김수현, 앞의 책, 289쪽.


         

   그림 1 매매원칙 십계명


위 인용문에서 박동일 씨가 강조하는 것은 바로 ‘정신수양’의 영역이다. 그는 성공한 투자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간적인 약점으로서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믿는다. 그림 121) 은 이러한 심법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주고 있다. ‘① 급한 마음이면 진입 금지’, ‘③ 상황 못 보게 되면 진입 금지’ 등의 ‘계명’은 평정심 유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급박한 상황 변화에 영향을 받아 비이성적인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기 위한 원칙이다. 또한 ‘② 많이 간 상태에서는 추격 금지’, ‘⑥ 욕심 내면 지옥이다’, ‘⑦ 먹튀했으면 끝~’과 같은 항목은 수익에 대한 욕망을 경계하려는 원칙이다. 이는 한 종목에서 목표한 수익을 보면, 상승의 여지가 남아 있어도 멈출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때 투자란 모순적이게도 돈에 대한 욕망을 적절히 절제해야 하는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 ‘④ 손절 필수다’, ‘⑤ 손절하면 푹 쉬고 제정신으로’는 손해에 대한 심리적 대응 기제를 보여준다. 손절이란 손해를 감수하며 상품을 매도하는 행위를 말한다. 김수현에 따르면 모든 투자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바로 손절이다. 인간은 손해를 회피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어서, “손절매가 성공적인 투자를 위해 필수적임을 알면서도 실천하기 힘든 인간의 심리”22) 가 언제나 작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계명으로부터 재구성되는 인간의 모습, 더 정확히 말해 투자자들이 성취하고자 하는 자아의 모습이란, 바로 합리적 주체다. 그는 과욕을 부리지 않으며, 회복 탄력성을 갖추었다. 그는 무엇보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서, 인간 본연의 심리에서 기인하는 비합리적 충동을 갖지 아니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상적인 근대적 주체, 더 자세히 말해 합리적인 계몽적 주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 시대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 이때 불확실한 세계를 ‘심법’의 도움으로 돌파하려는 인간은, 그야말로 내면의 힘을 동원하여 “미래를 길들이고 마구를 얹어서 식민화하려는 근대적 야심을 품고, 혼돈을 질서로, 우연성을 예측 가능한(따라서 통제 가능한) 사건”23)으로 만들려는 주체로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자기 자신을 합리적인 존재로 다스림으로써, 불확실하며 그렇기에 비합리적인 외부세계(주식시장)를 정복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경제적 자유에 이르는 길’은 그야말로 환상이다. 이것은 다만 ‘성투’하여 경제적 자유에 도달할 확률이 낮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물론 그러한 확률은 낮다. 김수현에 따르면 “지난 13년간 약 2,000건이 넘는 입실 상담이 있었고, 로얄매매방을 거쳐 간 개인투자자는 대략 200명 정도”다.24) 한때 로얄매매방은 32명의 입실자로 성황을 이뤘으나, 2019년 현재는 6명 정도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퇴실자들은 대부분 큰 수익을 얻어서가 아니라 상황을 버티지 못하고 나갔다. 여기에는 10번 중 7번을 성공하더라도 3번 정도 실패하면 큰 손해를 보게 되는 주식시장의 구조적 문제가 존재한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으로는 내부 자연(정신)을 다스려서 외부 자연(시장)의 무질서를 돌파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개념상 초인이다. 김수현은 가장 간단하며 실용적인 계명들, 즉 ‘심법’을 지키지 못해 손해를 거듭하는 개미들의 이야기를 무궁무진하게 털어놓는다. 즉 경험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주식시장에서 “심리가 만드는 필패의 구조”25)다.
아이작 뉴턴은 남해주식회사에 대한 투자가 실패로 끝난 뒤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나는 천체의 움직임은 계측할 수 있었지만, 인간의 광기만큼은 전혀 알 수 없었다.(I can calculate the motion of heavenly body, but not the madness of human)” 정말로 뉴턴이 이러한 말을 했는지, 어디에 기록을 남겼는지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경험적 진실이 담겨 있다. 그것은 시장이 불확실하며 무질서하고, 아무리 명철한 사람이라도 그 안에서 결코 자신의 합리성을 끝까지 관철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투자를 통해 경제적 자유에 이르는 길은,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환상이다.


21) 이 그림은 김수현, 「개인투자자는 왜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투자를 하는가? : 서울 매매방 개인 전업투자자의 꿈과 금융시장 간파」,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9, 143쪽에서 가져왔다. 단행본에는 위 계명들을 옮겨 적은 이미지가 사용됐다.
22) 김수현, 앞의 책, 79쪽.
23) 지그문트 바우만, 앞의 책, 274쪽.
24) 김수현, 앞의 책, 206쪽.
25) 김수현, 앞의 책, 84쪽.




3. 『달까지 가자』 : 이성의 목소리를 무시할 용기


장류진의 『달까지 가자』는 2017년 1월부터 2018년 5월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1인칭 서술자 다해는 2017년 5월부터 2018년 1월까지 가상화폐 이더리움에 투자했다. 그 기간 동안 이더리움은 개당 약 9만 원에서 200만 원으로 상승했다. 『달까지 가자』는 이렇게 천공의 달에 닿을 만큼 치솟았던 실제 가상화폐의 열광(fever)을 배경으로 한다.
『달까지 가자』는 여러모로 『개미는 왜』와 다르다. 『개미는 왜』가 4050 남성 주식투자자를 다루고 있다면, 『달까지 가자』는 2030 여성들의 가상화폐 투자를 다루고 있다. 무엇보다 『개미는 왜』가 논픽션인 데 반해 『달까지 가자』는 픽션이다. 그러나 두 글쓰기는 모두 투자열에 대한 섬세한 통찰력을 보여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저자의 특수한 관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달까지 가자』에서 저자 장류진의 위치는 중요하다. 장류진을 수식하는 상업적인 캐치프레이즈는 다름 아닌 ‘하이퍼리얼리즘’이다. 여기서 하이퍼리얼리즘은 엄밀한 비평용어로서 사용되지는 않았다. 이른바 극사실주의가 과장된 현실적 효과를 구현함으로써 오히려 작품의 허구적 성격을 강조하는 기법이라면, 장류진의 하이퍼리얼리즘이란 “직장인 공감백배”26) 를 이끌어내는 특유의 핍진성을 지칭한다. 이때 장류진이 실제 IT 기업의 여성 화이트칼라 노동자였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사람들은 장류진 글쓰기의 현장감이 노동의 실제 경험으로부터 유래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전문화된 작가와 그 생산물로서의 문학에 대해 우리가 품고 있는 어떤 불만을 반영하는 것이다. 문예창작이 대학에서 제도화된 이후, 예술이 현실을 재현한다는 명제는 더욱 의심스러운 일이 되었다. 요컨대 대학에서 ‘양성’된 전문적 창작자는 어떠한 사회로 진출하며, 어떻게 현실에 맞닥뜨릴까. 그들이 재현하는 현대사회의 구조나 정동은 얼마나 진실 된 것일까. 물론 우리는 여러 이론을 통해 작가가 실제 체험을 말하는 것만이 ‘리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점의 문제는 우리를 괴롭힌다. 전문가로서의 작가는 얼마나 타자들을 온당하게 재현할 수 있는가. 그들은 대상을 섣불리 낭만화하거나 ‘엘리트주의’적인 시각에서 평가절하 하는 일 없이, 불편부당하게 재현할 수 있는가. 이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작가에 대해 품어 온 의심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말해 보자면, 장류진은 내부자이자 또한 외부자인 특수한 위치에 있다. 그녀는 전문적인 창작 교육을 통해 재현의 여러 기법을 익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 직장인으로서 자기 목소리의 진정성을 주장할 수 있다. 바로 이 중의적인 관점이야말로 그녀의 소설이 ‘직장인 공감백배’의 효과를 마련하는 지점일 것이다.
이러한 중첩성에 따라 만들어진 가장 직접적인 결과 중 하나는, 얼마간 환상충족적인 데가 있는 결말이다. 『달까지 가자』의 인물들은 투자에 성공하여 부를 획득했다. 장류진은 최초 “누가 (나에게) 3억 주는 소설”을 써보고 싶었으며, 그것을 “다해와 친구들에게 3억씩 나눠주는 이야기”로 바꿨다고 말한다.27) 요컨대 『달까지 가자』는 세속적 욕망에 대한 징벌을 서사화한 소설이 아니다.
한영인은 이 소설의 해설에서 장류진의 이더리움이 박태원의 황금광(「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1934), 채만식의 미두(『탁류』, 1939)를 거쳐 박완서의 부동산(「낙토의 아이들」, 1978)으로 이어지는 투기의 ‘면면한 계보’를 계승했다고 말했다. 다만 이들 소설에서 투기꾼들의 말로가 대개 경제적‧도덕적 파산에 이르는 데 반해 장류진은 투자자들을 ‘무해함’과 ‘무구함’으로 치장하며, 그들에게 세속적 욕망을 충족시킬 기회를 제공했다고 정리했다. 그러한 결말의 효과는 “제자리걸음이나마 겨우 면할 뿐 훌쩍 날아오르는 상승과 도약을 꿈꿀 수 없는 청년들”에게 “자신의 좌절된 상승욕구를 (…) 대리 충족”하게 만드는 것이다.28) 양윤의 역시 『달까지 가자』를 ‘판타스마’의 이야기라고 압축하며, “젊은 세대의 희망과 좌절을 다룬 ‘실재’에 대한 소설”이기보다는 “절망에 빠진 세대의 ‘환영’을 다룬 소설”이 되었다고 평가했다.29)
내가 보기에 이러한 비평적 반응은 정당한 것이지만, 간과한 부분이 있다. 바로 장류진 소설의 ‘환상’, 혹은 ‘대리 충족’의 엄밀한 내용들이다. 대중적인 서사가 세계와 치열하게 대결하기보다, 그것을 견딜 만한 환상을 제공한다는 해석적 도식은 오래된 것이다. 여기서 환상의 형태가 결코 단순하지 않고 복잡 미묘한 욕망들을 매개한다는 점은 종종 무시된다. 장류진은 세 주인공에게 각각 2억 4000만 원, 3억 2000만 원, 33억의 성공을 안겨 주었다. 그녀들은 가상화폐에 투자한 대부분의 청년들 중 극소수만이 거머쥐었던 환희를 맛봤다. 그러나 여기서 충족되고 있는 욕망은 단순히 불로소득의 통계만이 아니다.


그래도 이사는 빨리 가고 싶다. 이번에 전셋집을 구하면 비로소 월세와 이자를 내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기 시작할 것이다. 6년차. 이제야 버는 돈이 조금씩이나마 쌓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동안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내 떡두꺼비 같은 3억 2천이 그걸 막아 줬다.
사실 회사에 다니는 게 예전처럼 싫지만은 않다. 어쩐지 묘하고도 얄궂은 일이다. 그래, 그러면 일단…… 일단은…… 나는 계속 그 단어만을 중얼거리면서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반듯하고 단정한 필체로 이렇게 적어 내려갔다.
일단은, 계속 다니자.30)


26) 이는 『달까지 가자』의 띠지에 새겨져 있는 문구다. “월급만으로는 부족해! 우리에겐 일확천금이 필요하다!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의 첫 장편 직장인 공감백배 하이퍼리얼리즘 소설”
27) 장류진, 「작가의 말」, 『달까지 가자』, 창비, 2021, 361쪽.
28) 한영인, 「아폴로 프로젝트, AGAIN!」, 『달까지 가자』, 창비 2021, 354쪽.
29) 양윤의, 「투케와 판타스마」, 『문학과사회』 2021년 여름호, 258쪽.
30) 장류진, 앞의 책, 347쪽.



『달까지 가자』는 1인칭 서술자 다해가 회사에 계속 다니기로 결심하며 막을 내린다. 이러한 선택에는 대체로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우선 3억 2000만 원이라는 돈은 은퇴를 결심하기에는 작은 액수다. 그녀는 그 돈으로 “겨울엔 너무 춥고 여름엔 너무 덥고, 기어이 에어컨마저 고장 나버린 나의 1.2룸”을 벗어나 “거실과 부엌 분리. 환기 잘 되는 구조”의 전세 아파트를 알아보았다. 다해는 “출퇴근 40분 이내”와 같은 경제적 이유 말고도, “근처에 공원” 등 여가나 재생산과 관련된 조건들을 고려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다해는 이제야 건강한 삶에 대한 추구를 시작했을 따름이다. 그녀는 아직 지속적인 생활수준 향상을 낙관하기 어려운 상태다. 이러한 정황은 다해가 수익을 현실화한 2018년 5월경이, 대한민국의 부동산 열풍이 본격화되던 시점이라는 경제적 맥락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다해가 원하는 것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다해는 노동을 건강한 삶 속으로 통합시키고 싶다. 이것은 독자들이 ‘대리 충족’하는 것이 결코 ‘일확천금’과 ‘이른 은퇴’와 같은 허황한 목표만이 아니라는 점을 의미한다. 다해가 3억 2000만 원의 수입을 통해 획득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일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이다. 다해는 회사의 장점을 재발견한다. 그녀는 “주말의 회사는 평일만큼 기운을 축내는 공간은 아니라는 것을. 어떤 면에서는 충전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는 회사가 “냉난방이나 공기질의 측면에서 여러모로 더 쾌적”해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바퀴 달린 의자 위에 양반다리를 척 올리고 앉아 있으면 묘한 쾌감”마저 생겼다고 말한다. 짐작컨대 다해는 “‘3억 2000이 생긴 이후의 삶’에 대한 계획”을 짜는 과정에서 회사의 압박을 견딜 기운을 얻었다. 그녀는 회사에 모든 미래를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마치 분산투자의 묘용과 같은 효과를 획득한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회사가 경제적 기능만을 가진 공간이 아니라는 점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다해와 은상, 지송이 친밀해진 것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하루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내고 있었고, 그래서 내게 벌어지는 일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회사 일’”이며,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웃기는 일도, 화나는 일도, 통쾌한 일도, 기가 막힌 일”도 함께 겪었기 때문이다. 이 사회적 공간은 결코 돈벌이만의 장소로 축소되지 않는다. 그곳은 우리가 사회적 인정을 위해 노력하는 곳이며, 따라서 자아의 안녕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장소다. 다해는 그러한 직장을 보다 견딜 만한 곳으로, 또한 가능하다면 쾌락을 생산하는 장소로 바꾸고 싶었다.
이러한 양상은 경제적 자유라는 환상이 단순히 거금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는 점을 암시한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경제적 자유가 비현실적인 경제적 목표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대중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20억에서 50억 원 사이의 순자산, 혹은 월 1,000만 원의 불로소득과 동의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대중적 이데올로기가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무엇보다 건강한 삶의 모델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자유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상태를 약속한다. 그것은 일과 나를 절연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끈끈한 관계로 만든다.


지송이는 웨이린 때문에 타이베이를 들락거리면서, 하루 세 잔은 기본으로 마실 정도로 흑당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고 했다. 웨이린이랑 헤어져도 흑당 밀크티 때문에 대만을 가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라는 거였다. 흑당은 밀크티뿐만 아니라 커피에 넣어도 맛있고 젤리로 먹어도 맛있더라고. 어디다 넣어도 맛있고 어디다 붙여도 잘 붙을 거라고 했다.31)


은상 언니는 자꾸만 내게 집을 사라고 한다. (...) 요즘 자기도 집을 사기 위해 공부하는 중이라고 했는데, 들어 보니 그게 앉아서 하는 공부가 아니었다. 매일같이 이곳저곳을 다니며 발품을 판다고 했다. 부동산에 들러 마치 당장 이 동네에 이사 올 것처럼 행세하면서 매물로 나와 있는 집을 보여 달라고 한다는 거였다. 그렇게 온갖 동네의 부동산을 다 돌아보면서 주변의 분위기나 인프라 등 요모조모를 열심히 저울질하며 따져 보고 있다고 했다.32)


이러한 경제적 자유의 이상은 정다해의 동지인 지송과 은상에게서 더욱 역력하게 드러난다. 지송은 약 2억여 원의 수익을 바탕으로 대만에서 ‘흑당’을 수입하는 사업을 계획했다. 지송이 흑당의 사업성을 낙관하는 이유는 그녀 스스로가 흑당의 “열렬한 팬”이기 때문이다. 지송은 『달까지 가자』에서 가장 충동적이며 감정적인 인물로 그려졌다. 그녀는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불리한 경제적 여건을 가지고 있지만, 해외여행을 즐기고 이제 막 소년티를 벗은 대만의 대학생과 결혼을 꿈꾸는 몽상가다. 그러나 지송은 대만에서 자기 취향에 맞는 ‘아이템’을 발굴했으며, 이를 통해 사업을 벌인다는 청사진을 그릴 수 있었다.
한편 은상은 돈 버는 것 자체에 관심과 애정을 쏟는 인물이다. 그녀는 “차분하고, 이성적이고, 냉철하며 감정 기복”도 없어서, 오직 돈과 관련해서만 “컨트롤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인식하는 인간으로 묘사됐다. 그녀는 33억이라는 수익을 얻자 성수동에 ‘꼬마빌딩’을 구입하는 한편, 여유자금으로는 다른 부동산 투자를 모색하는 소자본가가 되었다. 이러한 은상의 ‘부동산 공부’에는 다만 돈을 번다는 목적성만이 아니라 어떠한 ‘기쁨’과 ‘열정’이 충만하다. 여기서 우리는 막스 베버가 말한 자본주의 정신의 업그레이드 버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은상은 “자기 목적으로 전제된 자본증식에 대한 관심을 개인의 의무로 여기는 사고방식”33) 에 행복과 쾌락을 더한 자본가다.
지송과 은상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돈을 번다’는, 소외되지 않은 노동의 모델을 예시하고 있다. 요컨대 경제적 자유란 다만 부와 화려한 상품만이 아니라 인간의 고등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이상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가치체계 안에는 이기적 동기만이 아니라 집단적이며 공동체적인 안녕의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 다해는 가상화폐로 수익을 낸 다음, “엄마한테 처음으로 용돈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액수의 돈”을 드리거나, 엄마의 병원비를 보조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다해는 “경영방식에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다는 회사의 제품” 대신 “유기농 목장의 우유”를 마시며, “나 자신이 비로소 건전한 시민이 되었다는 충만한 기분”34) 을 느끼기도 했다. 여기서 다해가 획득하고 있는 것은 바로 사회적 인정과 소속감이다. 요컨대 다해와 그녀의 “떡두꺼비 같은 3억 2000만 원”이 대표하는 것은 다만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만이 아니다. 그것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포함하고 있다.


문제는 7월부터 8월까지 승승장구로 오르던 그래프가 9월부터 계속 하락세라는 거였다. (중략) 소위 말하는 떡락이었다.
지송이는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격이 내려가는 족족, 월급을 헐어 조금씩 소액으로 추가 매수에 들어갔다. 지송이가 좌절할 것을 우려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코인 판에서 이 정도의 가격 하락은 더 사서 쟁여 둘 수 있는 기회일 뿐이라고 은상 언니가 가르쳤기 때문이다.(중략)
지송이는 겉으로는 오를 거라고, 더 오를 거라고, 장군님들만 믿고 간다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매일같이 손가락 끝을 물어뜯었고, 어느 날은 열 손가락 끝에 모두 피딱지가 잡혀 있었다.35)


한편 『달까지 가자』는 이러한 긍정적인 이상을 성취하기 위한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용기다. 위 인용문은 가장 마지막에 이더리움 투자에 뛰어든 지송의 불안을 다루고 있다. 그녀는 높은 가격에 이더리움을 매수했으며, 따라서 경제적으로도 심정적으로도 가장 취약했다. 은상과 다해의 경우 현시점에서 매도해도 일정한 수익을 확보할 수 있으나, 지송의 경우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하락장에서 추가 매수를 하고, 단톡방에서 ‘가즈아!’ ‘존버만이 살길이다’ 같은 외침을 반복했다. 그러나 아마 그녀 또한 “그 말이 그저 주술적 주문일 뿐이라는 것을, 외치는 그 순간에도 모르지”36) 않았을 것이다. 지송의 “열 손가락 끝에 모두 피딱지”가 맺힌 것은 그녀의 심신이 모두 훼손되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심리는 은상, 다해, 지송 3인이 공유하는 것이다. 그녀들은 모두 “말로는 달까지 갈 거라고 하면서 이러다 결국 쫄딱 망해버리면 어떡하지, 매일 걱정하면서 떨”37) 었다. 이러한 불안은 이더리움의 가격이 하락할 때보다 상승하고 있을 때 강화됐다.


느닷없이 이렇게 오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게 대체 뭘까? 하는 의문이 좀체 가시질 않았다. 무릇 가격이란, 수요와 공급 그리고 그로 인한 상품의 가치가 반영된 것이라는 전제 아래서는 이런 폭등에 그런 이유들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규제 리스크가 해결된 것인지, 아니면 암호화폐에 대한 새로운 검증이 이루어진 것인지 궁금했다. 틈틈이 기사를 찾아봤다. 가상화폐시장이 전에 없이 급격히 상승하고 있다는 소식뿐, 그에 대한 면밀한 분석기사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38)


31) 장류진, 앞의 책, 321쪽.
32) 장류진, 앞의 책, 343쪽.
33) 막스 베버, 박성수 옮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문예출판사, 2016, 75쪽.
34) 장류진, 앞의 책, 165쪽.
35) 장류진, 앞의 책, 242∼243쪽.
36) 장류진, 앞의 책, 262쪽.
37) 장류진, 앞의 책, 329쪽.
38) 장류진, 앞의 책, 262쪽.



『달까지 가자』의 클라이맥스는 이더리움의 가격이 천정부지 치솟는 과정과 중첩된다. 이 상승장은 행복감이 아니라 불안을 키웠다. 이 ‘역대급 떡상’이 도무지 비현실적이며 심지어 비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상승장 직전에 정부는 가상화폐에 대한 규제 대책을 발의했으며, 이것은 커다란 ‘리스크’가 되었다. 그러나 이더리움은 전에 없이 폭등을 계속했다. 그래서 삼인방은 이러한 상승이 이더리움의 가치가 인정받은 것이기보다는, 일종의 광기의 결과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더리움의 가격이 오르면 오를수록 그 거품이 언제 꺼질지 몰라 불안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당장 위험한 투자를 중단하고, 가상화폐를 현물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은상, 다해, 지송은 이 혼돈을 정면으로 돌파했다. 그들은 광기에 함께 휩쓸렸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이성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그에 뒤따르는 불안을 감당해야 했다. 그것은 “사납게 너울지는 파도 위에서 뗏목 하나에 의지해 휩쓸리”39)는 경험과 같은 것이었다.
이때 용기를 갖는다는 것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자기에게 있다는 확신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명백히 잘못된 선택을 했음에도 흔들림 없이 자기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심리적 능력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즈아!’나 ‘존버만이 살길이다’와 같은 구호들은 “주술적 주문” 이상이다. 이들이 자기최면적인 환상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자기를 극복하는 주체의 모습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들은 냉철한 현실인식이나 합리적인 이성 따위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 모든 목소리들이 ‘안 될 거야’라고 외치기 때문이다.


“왜 또 이렇게 쓸데없이 못되게 굴어? 요즘 일 안 하니까 기운이 넘쳐? 여기서 계약 안 할 거면 그냥 나가자.”
언니가 투정하듯 말했다.
“저 사람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했단 말이야.”
“무슨 말?”
“나한테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말. 너한테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말. 난 그 말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
역시, 그것 때문이었구나. 은상 언니가 목소리를 낮춘 채 이어 말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말을 정말로 싫어한다고. 그렇게 사람을 아래로 보면서 하는 말이 어디 있느냐고.40)


위 인용문은 은상이 33억의 수익을 실현한 뒤 고급 자동차를 구매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은상은 “우리 여성분 타실 거면 C클래스면 충분하시죠”라고 말하는 딜러에게 일부러 못되게 굴었다. 그것은 “너한테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말”이 자신의 한계를 짐작하는 언동이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한계를 수용하고 지족(知足)할 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상과, 다해, 지송에게 지족의 삶이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한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들로 집안에 빚이 있고, 아직 다 못 갚았으며, 집값이 싸고 인기 없는 동네에 살고, 주거 형태가 월세이고 5평, 6평, 9평 원룸에 살고 있다는 공통 정보”41) 에 아주 오랫동안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원룸에서 1.2룸으로 이사하는 ‘사치’를 위해, 보증금 2,000만 원과 15만 원가량 더욱 비싼 월세, 대출이자를 포함하여 월 35만 원의 비용을 의식해야 하는 삶을 말한다. 그것은 또한 잘생긴 얼굴의 이국 청년과 사랑에 빠진 지송에게, “가족 하나 정도는 건사할 만한 안정적인 남자”42) 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가슴’이 아니라 ‘머리’가 시키는 대로 반려자를 선택하는 것이다. 참고 견디다 보면 언젠가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낙관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현재도 만족스럽지 못한 연봉을 받고 있는데,(“월급이 이 정도로 짜디짤 줄은 생각지도 못했고…….”) 연봉 인상률은 체감 물가 상승률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그러니 그들은 점진적으로 가난해질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용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더 정확히 말해 이성의 목소리를 무시한다는 것은 어떠한 실천인가. 그것은 주체의 한계를 설정하는 합리적이며 또한 도덕적인 담론에 대한 저항이다. 다해와 은상, 지송은 위험한 투자에 투신했다. 그것은 명백히 비합리적인 행위였다. 그래서 다해와 지송은 오랫동안 이더리움에 대해 회의했고, 심지어 친애(親愛)에 기초해 그 투자를 말리고자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지속하는 것 역시 결코 안전하지 않다. 그것은 삼인방이 오랫동안 냉난방이나 배수, 환기 등에 문제가 있는 ‘5평, 6평, 9평’의 원룸에서 오랫동안 살아야 한다는 것, 직장에서의 차별이나 폭력적인 상하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견뎌야 한다는 것, 그러면서도 별다른 사회적 안전장치 없이 서울에서 홀로 버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용기를 낸다는 것은 느리지만 확실한 멸망 대신 신속하며 불안정한 성공을 선택하는 행위다.
정리하자면 『달까지 가자』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은 경제적 자유의 환상과,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주체의 도덕적이며 실용적인 지침이다. 『달까지 가자』가 ‘직장인 공감백배’인 소설이라면, 그것은 다만 사람들이 “월급만으로 부족해! 우리에겐 일확천금이 필요하다!”와 같은 문구로 요약되는 허황한 부를 꿈꾸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경제적 여유를 통해 일을 견딜 만한 것, 나아가 사랑할 수 있는 것으로 전환하고 싶다. 또한 돈을 벌어 단순히 이기적인 욕망들을 채우고 싶은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관대한 인간이 되어 사심 없이 증여하고 싶다는 욕망 또한 있다. 이러한 주체는 기본적으로 인본주의적이며 긍정주의적인 인간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성을 획득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경제적 자유에 이르기 위해서, 주체는 불안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그는 맹목적인 용기를 가지고 자기 자신의 이성적인 목소리를 무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합리성과 결탁한 비관주의에 굴복하지 않고, 근거 없이도 당당히 낙관할 수 있어야 한다.
당연하지만, 이러한 긍정주의적인 환상은 위험한 것이다. 『달까지 가자』의 세 주인공은 큰 수익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인생이라는 긴 레이스의 초반에 진입했을 뿐이고, 같은 방식으로 다음번에도 성공을 거둘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아마도 김수현이라면 이 세 사람의 성공을 ‘초심자의 행운’이라고 진단했을지도 모른다. 즉 투자 성공에 의해 만들어진 자기확신이 일종의 ‘투자원칙’이 되어, 다른 성격과 맥락을 가진 사태에서 치명적인 오판이나 실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넌지시 경고할 것 같다. 작품은 이미 그러한 징조들로 가득하다. 은상은 잘못된 배우자 선택 때문에 어떠한 경제적‧정신적 대가를 치러야 할지 알 수 없다. 지송의 흑당 사업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왕카스테라 프랜차이즈와 유사한 결과를 맞을 수도 있다. 이들은 여전히 일곱 번 성공해도 세 번 실패하면 결국 몰락하게 되는, 아주 불리한 경기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이 가졌던 용기는 아마 다음 게임에서는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다.


39) 장류진, 앞의 책, 298쪽.
40) 장류진, 앞의 책, 308∼309쪽.
41) 장류진, 앞의 책, 105쪽.
42) 장류진, 앞의 책, 235쪽.




4. 대안 서사는 가능한가?


지금까지 김수현의 『개미는 왜?』와 장류진의 『달까지 가자』를 차례대로 살펴보았다. 이 두 글쓰기는 인류학과 문학, 논픽션과 픽션의 자리에서 우리 시대의 특징적인 서사와 주체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다. 이에 따르면 사람들은 경제적 자유의 약속에 매혹됐고, 환상을 추구하기 위해 독특한 주체성을 발달시켰다.
두 글쓰기가 풍부하게 암시하는 것처럼 경제적 자유는 환상이다. 다만 무척이나 매혹적인 환상이다. 경제적 자유는 쾌락이 아니라 건강한 삶에 대한 약속이다. 그것은 노년에도 당당히 가족을 부양하고, 노동일과 여가의 밸런스를 조절 가능하고, 자기 일을 좋아하고, 더러는 쾌락에 탐닉할 수도 있는 주체의 모습을 약속한다.
문제는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단지 거짓의식이라는 데 있지 않다. 진정한 문제는 사람들에게 대안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적어도 경제적 자유의 서사는 행복한 삶 속에 거주하는 주체의 이미지를 제공한다. 종종 현명한 자들은 이러한 이미지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발은 그다지 효과가 없다. 앞서 살펴봤던 것처럼, 사람들은 환상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목적에 맞춰 의식을 변형시키는 일종의 ‘이중사고’를 수행한다. 이들에게 환상의 진위 여부는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다. 긍정적 삶을 향한 길은 좁은 만큼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안적인 삶을 상상하는 것은 정말이지 어렵다. 그것은 경제적 자유보다 더 가능성 있고, 도덕적이며, 심지어 더 매혹적인 모델을 제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경제적 구조나 사회적 합의, 문화적 상상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김수현과 장류진이 한 일은 지금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서사가 얼마나 강력하며 심지어 영리한지 알려준 것이다. 그들은 이데올로기의 환상이 우리 시대 가장 건강한 가치들과 어떻게 화학적으로 결합하고 있는지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달까지 가자』와 『개미는 왜』는 이렇듯 새로운 서사의 예언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현재 우리 삶의 위치에 대한 가장 정확한 약도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는 아마 거기서부터 대안을 향한 경로를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유인혁
작가소개 / 유인혁

문학연구자.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문장웹진 202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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