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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저들의 계급적 욕망에 연루되리라

  • 작성일 2022-12-01
  • 조회수 2,965

[비평]



기꺼이 저들의 계급적 욕망에 연루되리라

-문학과 계급성 ver. 2022



선우은실




분화하고 충돌하는 신()계급성


문학이 현실의 계급적 문제를 다룬 것은 비단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식민지 시기 카프(KAPF)가 피식민지배국의 현실을 극복하는 동시에 동시대의 미래지향적 흐름에 발맞추려는 노력 속에서 계급 문제를 문학으로 재현하고자 했던 역사를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이후에도 억압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소환하는 문학이 계급차에 기반한 현실을 지속적으로 언급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 ‘문학이 줄곧 계급성에 대해 말해왔다(혹은 그것을 소환해왔다)’고 말할 때 유념해야 할 두 가지 사항이 있다. 하나는 ‘계급(성)’이 생산수단의 소유 혹은 자본 수준에 한정된 채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신흥 부르주아지를 주체로 세우는 혁명 이후의 근대에 이르러, ‘부르주아적 생활 양식’―식문화, 의복, 가정의 창출(‘홈 스위트 홈’), 자유 연애 등―은 기왕의 지배 (문화) 질서의 양식을 상대화하며 새 시대의 보편적 생활 규범으로 자리하게 된다. 이로써 부르주아적 가치는 시민들에 의해 내재화되며 각 개인은 (근대 주체의 그것과 분리되지 않는) 부르주아적 욕망을 실천한다. 그러나 이는 공평한 욕망에의 달성이 아니다. 이 가치는 시대의 ‘보편적 욕망’이지만 모두가 그것에 도달할 수는 없다. 각자가 지닌(혹은 지니지 못한) 여러 형태의 자본의 차이 때문이다. 이 ‘차이’는 부르주아적 가치 체계 아래 계급을 세분화하고 위계를 발생시킨다. 이로써 부르디외가 말했듯 계급은 ‘구별 짓기’로서 구분되고 인식되며, ‘구별’되는 것으로서 계급적 아비투스가 형성된다. 이때 계급화의 요건은 반드시 물질이나 재화만은 아니며, 지식이나 문화 향유의 수준, 예술적 교양, 인맥 등을 포괄한다.1) 따라서 문학이 계급성을 소환한다는 의미는 경제 자본 수준에 따른 계급차 이상을 의미한다.
두 번째 유념할 사항은, 이 첫 번째 내용에 근거한다. 시대적 기율에 따라 계급 분화의 기준이 다양화된다는 통찰을 고려할 때, 계급성은 개인 대 개인 즉 ‘나’와 타자의 범주에 한정되지 않고 좀더 교묘한 개인 내부의 ‘구별 짓기’로 재현된다. 즉 자신이 가진 자본 사이에 계급차가 존재하며 각각의 자본이 충돌함에 따라 통합되지 않은 내부적 ‘구별 짓기’가 일어난다. 가령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 계급이 타자화를 통해 자신을 부르주아적 질서의 중축으로 놓고자 할 때, 그 자본 소유의 수준이란 문화/학력 자본 및 그에 따른 태도(상징자본의 가치를 고양시키려는 행위)에 의해 종합적으로 구현된다. 그런데 이 여러 자본이 한 명의 개인에게 불균질하게 구성될 수 있다. 내부적 계급차에 따른 충돌이 외부화되는 하나의 예시로서 우리는 이른바 ‘속물성’을 목격(또는 경험)한다. 가진 것 많으나 학력이나 교양의 수준이 형편 없는 캐릭터가 있다고 할 때, 그를 등장시키는 서사는 그의 내부적 계급차에 따른 속물성을 주제로 제시한다. 그런데 이 서사에 대한 독서 행위는 재현된 속물성을 통해 독자의 속물성을 투영시키는 일로 이어지기도 한다. 위의 캐릭터를 보며 어떤 독자는 작품이 취하는 태도에 자기를 얹어놓음으로써 (지식과 교양으로 표방되는) 문화자본의 우월성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계급적 가치를 재확인할 수도 있다. 물론, 타자가 지닌 계급적 속성의 일면을 통해 자기 내부의 계급적 조건A를 강화하는 어떤 개인은, 또 다른 타자로부터는 계급적 조건B를 부정당하기도 할 것이며, 이는 문학을 읽는 일로써 경험될 수 있다.
요컨대 개인 내부에 존재하는 수많은 불균질한, 때로 상충하기도 하는 내부적 계급의 요건이 문학으로 재현될 때, 그것은 다만 문학 ‘내부’의 일만이 아니며 그것에 참여하는 독자의 자기 계급성을 확인하고 수행하는 일과도 연관돼있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문학이 계급성을 현시한다는 말은 독자이자 오늘날의 욕망 주체를 직접적으로 참여시킨다는 점에서 좀더 미묘하고 까다로운 의미를 지닌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오늘날 문학을 통해 계급성을 성찰한다는 것은 개인의 내부에 상충하는 욕망을 목격하고 고투하는 모습을 발견한다는 의미에 가까울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다변화된 계급성을 성찰하는 한 방식이다.


1) 이는 부르디외적 개념으로 치자면 문화자본, 학력자본, 사회(관계) 자본의 총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망라해 이 글에서는 ‘상징자본’으로 칭하고자 한다.




영상 콘텐츠에서의 계급성 재현의 예


이런 시점에서 문학은 ‘계급성’을 어떤 식으로 성찰할 수 있을까? 계급을 초월하려는 인물을 통해 시대의 기율을 보여준다거나 계급에 저항함으로써 마치 계급 자체를 초월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재현하는 것은, 앞선 다변화된 계급성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인 데다 이미 낡은 방식처럼 느껴진다. 계급에 대한 욕망은 더는 전형적 악함(부르주아적 욕망의 추구)과 선함(부르주아적 욕망에 대한 저항)으로 도식화되지 않는다. 또한 다양하고 모순되고 부딪는 계급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과연 그런 재현을 통해 계급성이 복잡하고 다면적이라는 사실 이외에 ‘무엇을’ 전달받을 수 있단 말인가? 또한 그런 욕망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오늘날의 욕망의 규율에 맞게) 재규격화하는 일은 더욱 교묘하고 세련된 형태로 삶에 스며들어 있는 바, 약간 다른 접근이 필요할 것 같다.
관련해 대중 콘텐츠에서 이러한 계급성에 대한 욕망이 어떤 식으로 재현되고 투영되는지 비교해 살피기로 한다. 최근 ‘신도시 아재들’이라는 유튜브 콘텐츠가 여러모로 화제다. 일단은 으레 현실에 있을 법한(어쩌면 그렇게 상상되는 것일 수도 있을) 30~40대를 몇 가지 유형화 한 코미디 드라마로서 그렇다. 여기서 주요 인물은 이 서사를 전개하는 카메라를 포함해 크게 다섯 가지 모습으로 등장한다. 먼저 카메라맨이자, 이 콘텐츠를 위해서라면 다소 무례하게 여겨질 법한 질문도 마다하지 않는 MZ세대의 대표자 민수(그런데 실제로 민수의 촬영에 의해 이 시리즈가 계속 촬영되는 것이므로 현실과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장치적 특수성을 수행한다), 한 신도시에 전세로 살며 코로나 시기 경제적 부침을 몸소 겪는 자영업자 부부A, 다른 신도시에 자가로 살며 IT 계열 대기업에 종사하는 억대 연봉의 맞벌이 부부B, 온갖 사업을 말아먹고도 계속 사업가로 살고있는 남자와 그런 남자와 이혼하고 필라테스 강사로 일하는 여자가 등장한다.
이러한 인물군의 분류 및 연출에 꽤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웃기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또는 그 ‘웃기다’는 표현이 궁극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다른 데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현실에서 볼 법한 사람들을 코미디적 요소를 넣어 재현하는 것은 어째서 웃음을 유발하며 이 웃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는 두 가지 차원에서 해석된다. 하나는 전시되는 내면의 차원, 다른 하나는 그것에 투영된 욕망의 실현(또는 좌절)의 차원이다. 전자의 경우 실제 삶에서 외형적으로 관찰 가능한 인간 군집의 복장이나 제스처, 그러한 군집이 자주 발견되는 지역의 특징 등을 통해 그들의 계급성이나 계급적 욕망을 추측하면서도 그 내면만큼은 전면적으로 외면화되지 않았음에 기인한다. 이 콘텐츠에서는 외형만으로 추측해야 했던 내면의 욕망들이 그대로 드러난다. 재현되고 연출된 ‘그들의 삶’과 세속성은 ‘만들어진’ ‘코미디 프로’라는 형식을 경유해 위압감 없이 또 숨김없이 가시화된다. 이때 외형에 감춰져 추측되기만 했던 것의 내면이 보이는 것만큼 부유하거나 숭고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함으로써 추측된 권위는 사라지며, 이로써 보는 이들은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그래서 그들의 희화화는 분명하게도 ‘전형하되는 인물군’에 대한 혐오를 배태하며(이는 얼마간 연출자의 의도와는 별개일 수 있다), 그 ‘전형성’에 대한 열망과 좌절(실현 불가능)에 대한 자조와 거리 두기 속에서 그들의 모습은 더욱 극적인 듯이 느껴진다. 이때 콘텐츠로 재현되는 현실의 외부자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는 웃음 지을 수 있다.
후자의 경우(콘텐츠에 투영된 시청자 욕망의 실현(또는 좌절))도 전자에 대한 설명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보는 이의 웃음은, ‘내 주변에도 저런 사람이 있지’ 또는 ‘특정 공간에 가보면 실제로 저럴 것 같은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지’하는 말 속에서 자신을 외부화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는 하지만 철저하게 외부화될 수 없으므로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의식적으로 ‘-되기’를 욕망하거나 거부하는 것과는 별개의 지점에서, ‘저런 사람’을 어떤 식으로든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저들이 형상화 하는 것이 자신의 지인으로 존재하든 또는 그저 지나가는 사람으로 목격되든지 간에, ‘저러한 삶’이란 우리 사회에서 전형화할 수 있을 만큼 제안(또는 장려)되고 보편적으로 갈구되는 정형으로서 인식된다. 그러니 얼마간은, 저러한 삶을 언젠가는 더 나은 방식으로 취할 수 있으리라는(또는 그럴 수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메시지를 내면화한 욕망 또는 저러한 삶은 이렇듯 ‘존재하는 듯하지만 이렇게 희극적인 방식으로야 언급될 수 있는 다소간 희귀한 것’(그러나 현실적으로 성취할 가능성에 준한 판단일 것이다)으로서 부정되는 욕망을 아우른다.
이렇듯 길항하고 뒤섞이는 욕망의 형태는 일차적으로 콘텐츠의 내용 자체에 녹아 있기도 하다. MZ세대 민수, 부부A, 부부B, 사업가 남자, 필라테스 강사 여자는 각각 서로의 욕망 속에서 타자화되고 또 서로를 타자화한다. 그들은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삶을 존중하며 뒤섞여 사는 듯 보이지만(일면 실제로 그렇기도 하겠지만) 특정 상황에서 그들이 각자 소유 또는 연출하기에 실패했다고 생각되는 사회적인 상징들이 저마다 다름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위계가 미세하게 조정되는 모습들이 발견된다. (예컨대 부부B가 세컨드 카로 볼보 SUV를 살지, 국내 경차를 살지 고민하는 장면에서 부부A는 은근하게 국내 경차가 좋다고 주장하는 장면이 그렇다.) 이들은 타인의 삶을 욕망하면서 그러한 사실을 부정하는 것으로 현재 자신의 삶을 정당화한다. 달리 말하면 사람들이 전형화(이상화)할 만큼의 경제적 수준과 재산 수준, 가족 관계, 복식이나 생활 양식 등을 돌아보면서 이만한 삶이면 괜찮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의 삶을 욕망함으로써 자신의 현재를 부정(당)한다. 마찬가지로, 같은 이유로 타인의 삶을 지향하고 있음을 부정함으로써 현재를 긍정한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서사적 재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다. 부부B가 나오는 에피소드 중 하나에 댓글로 갑론을박이 펼쳐진 적이 있다. 시작은 대강 이랬다. 만인이 원하고 성취해 마땅하다고 여기는 삶의 조건을 지닌 부부B를 보면서,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을 살면서도 육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나름대로 고민하거나 또는 돌봄의 문제로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전에 비해 훨씬 적은 벌이를 선택해야만 했던 여성 지인이 떠오른다고 누군가 댓글을 달았다. 이에 여러 반응이 이어졌는데, 이 에피소드의 내용이나 이 댓글이 말하려는 것과 얼마나 ‘관련되어 있는가’는 별로 중요해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문해력의 탓만은 아닐 것이다. 저마다 연출되고 재현된 특정 장면에 투영하는 현실의 모습이 다르며, 그에 대한 반응까지를 포함하여 각자의 계급적 욕망이 투영되는 장(場)으로서 이 콘텐츠가 기능하고 있음이 목격되고 있음이 중요한 사실이다.
만인이 원하는 삶의 양식(그러나 개인적 능력에 기대어 실현할 수 있음을 여전히 주워섬기는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다시 말해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어야 하고 그럴 수 있음을 끊임없이 추동하는 것으로서 그들의 생활 양식을 드러내는 한 에피소드를 보고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의 현실적 가상으로서 즐길 뿐만 아니라, 자기 삶을 직접 투영하고 자기가 관찰하는 삶 또는 그렇게 해석하는 삶까지도 투영함으로써 자신과 타인의 욕망을 대입시키고 있다. 물론 이는 유튜브 영상 콘텐츠의 매체적 특성에 의해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진입 장벽이 낮은 플랫폼을 통해 배우를 통해 직접적 보여주기의 방식을 취하는 영상 콘텐츠 앞에서, 재현의 사실감은 물론이거니와 보는 이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자기를 투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미디어의 재현이 있는 한, 현실의 한 면들을 꼬집어 내어놓음으로써 자기 삶을 투영하게끔 하는 문학의 재현은 어떤 점에서 다르고 또 의미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계급의 재현, 예술가 계급이 폭로하는 계급성: 김애란 「홈 파티」


앞선 질문에 어떠한 재현이 더 우월한지로 답하는 것은 무용하다. 질문을 다음과 같이 비틀어보겠다. 쉽고 명료하게 삶을 보여주고 투영할 수 있게 하는 콘텐츠와 대별되는 문학적 재현은 무엇을 혹은 어디를 향해 있는가. 즉 ‘문학의 재현이 지향하는 방향은 어디인가’를 묻는다. 물론 이는 문학이 다른 대중 콘텐츠에 비해 심오한 성찰을 하고 있다는 문학적 위계를 위시하는 결말로 향할 위험이 없지 않다. 결론부터 말해, 앞서 예로 든 콘텐츠의 계급 재현의 양상과 그것을 에둘러 벌어지는 반응 자체가 하나의 해석 가능한 ‘현상’으로서 재현되고 있다면, 문학의 경우 어떤 현상을 ‘해석한 재현’으로서 자리하고 있기에 건져 올릴 수 있는 성찰의 지점이 있다고 주장할 것이기에 그렇다. 어떤 것에 대한 해석적 관점과 그에 따른 비평적 태도가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문학의 재현을 이해할 때, 그것을 바라보면서 ‘문학이 실현할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을 발굴해내는 것 혹은 그러한 믿음의 수행을 가능케 하리란 욕망은 문학적인 것의 우월성을 어느 정도 딛고 선 위에서야 ‘의의’로서 자리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뒤섞이고 부딪는 욕망을 단순히 ‘현상’ 그 자체로 의미화하여 내버려두지 않고 그것에 어떤 적극적 조작(操作)을 가하는 것으로서 그 방향들을 조정해나갈 수 있음을 염두에 둘 때, ‘욕망(있음)’ 자체가 억압적 구조를 지탱하는 데 재배치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계급과 욕망과 관련해 눈여겨 볼만한 최근의 작품은 단연 김애란의 「홈 파티」2) 다. 이 소설은 그야말로 현대판 계급의 구조를 보여준다. 연극 배우 이연은 후배 성민의 초청으로 한 모임에 게스트로 참석하게 된다. 그 모임은 성민이 모 대학에서 최고지도자 코스를 밟을 때 알게 된 사회 중상류층 인맥으로 구성돼 있다. 명상센터 소장 ‘서’, 성형외과 의사 ‘박’, 법률회사 변호사 ‘김’, 그리고 이번 모임의 호스트이자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오대표’는 비슷한 경제적 토대 위에서 저마다 다른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지닌 상징 권력은 각각 정신적 여유, 외모, 사회 질서, 교양으로 바꿔말할 수 있고, 이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구별 짓기’로서 욕망되는 삶의 요소를 대변한다. 다들 아등바등 사는 세상에서 정신적 고요를 유지하거나 외모를 가꿀 만한 시간적·금전적 여력이 있으며, 사회 질서에 복무하고 존경받는 계층. 오대표의 남편이 부산 “지검”(110)에 있으며 자녀가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르면, 교양을 곧 자본으로 환수시킬 수 있는 계급은 질서를 통제하는 다른 지배 계급과 교착됨으로써 계급을 유지한다는, 계급간 유착성을 보여준다. 현대 사회에서의 계급적 풍요를 드러내는 홈 파티 일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있다는 것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상징적 장면이다.
이 모임에 이연과 성민은 어떤 연유로 낄 수 있는가. 좀 가난하지만 청년 예술가로서의 패기를 갖춘 성민은 이 모임에서 딱 그가 욕망하는 만큼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성민은 최근의 투자붐에 대해 “사실 해방 이래 한 번도 돈을 욕망하지 않은 적 없으면서, 겉으로는 노동과 근면을 미덕인 양 가르쳐온 사회가 갑자기 저더러 문맹이라니 억울하고 서운한 마음”이 든다면서 “실존을 부정당한 것 같”(119)다고 읊조린다. 이런 성민의 말은, 투자할 만큼의 여유 자본이 있고 이런 사교장에 낄 만큼의 교양이 있는 이가 세상이 이런 식으로 굴러간다는 것에 결국은 순응하고 타협한다면 이 사교장의 다른 사람처럼 출세할 수도 있을 거란 희망을 부여하는, 자타의 욕망 한복판에 그가 서 있음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런 성민의 말은 이 자체로 계급성에 대한 성찰로 번역되지 않고 계급성의 재생산에 바쳐진다. 성민이 맡은 역할의 구체적인 내용은 성민이 욕망하는 것에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민이 원하고 되려는 존재로서 ‘그들’은 그들의 계급을 욕망하는 이들에게 하나의 배역을 정해줌으로써 자기 계급의 권력을 재확인할 뿐이다. 예술적으로나 자본의 수준에서 완전히 빈곤하지 않은 이로부터 자기 계급에 대한 욕망을 재현시킴으로써 그것이 ‘재현’될지언정 ‘성취’되지 못한다는 교훈을 보여주는 것. 그 모든 연출이 가능한 자기의 계급성을 확인하고 확인시킴으로써 한쪽의 욕망을 거세하는 일이, 성민이 함께 하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런 성민을 바라보며 이연은 이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깨닫는다. 젊고 치기 어린 청년 성민이 실패하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그가 갈구하는 것이 아직도 끝내 버리지 못하는 선(善)으로서의 “실존”의 반대편에 있는 것임을 넌지시 알아채며 갈등하는 비극의 ‘근대 소설적(novle) 주인공’을 연기하기를 요구받고 있음을 이연은 본다. 그런 안에서 관찰자로 자신을 설정했던 이연은 한 순간의 발언으로 자신이 결코 이 욕망의 연극의 바깥에 서 있을 수 없는 입장임을 알게 된다.


2) 김애란, 「홈 파티」, 『2022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2. 이하 「홈 파티」에 대한 인용은 쪽수만 표기.



막상 입을 열어놓고서도 사람들의 집중이 부담돼 이연은 좀 주저했다. 작은 실수 하나만으로도 연기자가 세간에 어떻게 이야깃거리로 남고, 추문이 되는지 알고 있어서였다. 동시에 이연은 다른 건 몰라도 이게 주정이 되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 살면서 어떤 긴장은 이겨내야만 하고, 어떤 연기는 꼭 끝까지 무사히 마친 뒤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걸, 그건 세상의 어떤 인정이나 사랑과 상관없는, 가식이나 예의와도 무관한, 말 그대로 실존의 영역임을 알았다. 처음 여기 왔을 때만 해도 ‘임원’ 연기를 위해 ‘최대한 저 사람들처럼 생각하자, 저 사람들 입장에서 느끼고, 즐기자’ 다짐했는데,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 되는 게 있어서였다.
―그게 꼭 그 아이들이 철없거나 허영심이 세거나 금융 문맹이어서가 아니라요, 제 생각에는…… 밥은 남이 안 보는 데서 혼자 먹거나 거를 수 있지만 옷은 그럴 수가 없으니까, 그나마 그게 가장 잘 가릴 수 있는 가난이라 여겨 그런 것 같아요, 가방으로. (120)


고아원에서 독립하는 아이들이 자립정착금으로 받는 500만원으로 명품 가방을 사는 것을 안타까우면서도 한심하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그들의 말을 이연은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 그러나 이연이 그들과는 ‘다른’ 자기의 계급성을 노출하고 말리란 막연한 우려 속에서도 그녀는 이 ‘대사’를 하는 자신의 계급성을 연기하는 쪽을 택한다. 이 시점에서 어떻게 해도 기울어지지 않는 듯한 기득권 욕망의 우세는, ‘숭고한 예술가’의 성찰에 의해 흐름이 잠깐 바뀌는 듯 느껴진다. 그러나 이후 이연이 실수로 값비싼 찻잔을 깨뜨리면서 상황은 곧장 그들의 통제 아래 놓인다. 한껏 우아하고 자비롭고 여유로운 호스트를 연기하는 ‘오대표’가 이연에게는 이번 자리 내내 “‘걱정’과 ‘근황’”만을 물어왔듯 그 역할을 다시 수행할 기회가 넘어가고 만 것이다. 고가의 잔을 깨고 당황하는 이연의 모습은 그들에게 많은 것을 상징한다. 세상의 계급성을 간파하는 듯이 말했지만 이연 역시 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계급적 현실 앞에서 패배하고 말리란, 어떤 ‘실수’ 앞에서 초라해질 수밖에 없으리란 결말이 코앞이고, 그것은 이 사교 모임이란 연극의 클라이막스가 될 법하다.
그러나 이연은 “‘작가로서 당신이 누군가에게 뭔가 주고 싶다면 그에게서 먼저 그걸 빼앗으라’는 법칙”(123)을 떠올리며, 그것을 역으로 수행한다. 그들이 이연을 바쳐 재현하려는 그들의 욕망으로부터 무언가를 빼앗김으로써 그것을 다시 돌려받는 일이다. 이는 그녀가 그들의 욕망 재현의 연극 바깥의 역할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다름 아닌 그들에 의해 주어진 역할이 아니라 그들과 동화된 역할을 연기하기 즉 그들을 흉내냄으로써 폭로된다. 이연은 자신을 우려하며 오늘 홈 파티가 어땠냐고 묻는 오대표에게 답한다. “너무너무 좋았어요, 정말.”(123)이라고.
이것이 최근의 소설이 ‘계급성’을 성찰하는 일이라 할 때, 이제 문학은 계급의 허상을 폭로하는 일에 있어, 뚜렷하게 옳고 그른 대비를 그대로 통과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더는 그런 방식으로는 고발되지 못하는 혹은 ‘고발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미묘한 욕망의 층위를 차라리 전면화한다. 이는 “홈 파티라는 새로운 연극 무대에서 오대표에 의해 자신의 불쾌와 도발까지도 어떻게 소비되는지를 정확히 목도”한 이연이 “마리가 아니라 보이체크가 되길 선택”[희곡 「보이체크」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 ‘보이체크’는 상류 계급인 군인, 의사 등에 의해 유린되며, 그의 가난에 못이겨 군대장과 연애를 하는 연인 ‘메리’에게 배반당했다고 여기는데, 연극의 마지막에 자신을 착취한 그 누구도 아닌 마리를 죽인다. 이 희곡에서 ‘마리’는 상류층의 존속 욕망의 발치에 마치 자발적으로 자기를 던지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는, 이중적으로 착취당하는 하위 계층을 의미한다.-인용자]했으며, 마지막에 ‘모든 게 좋았다’고 말함으로써 “정확하게 자신의 적인 오대표를 찌르는 데 성공”함으로써 “21세기 신(新) 보이체크를 탄생시켰다”(136)]는 강지희의 해설에 잘 요약되어 있다.
다만 ‘신 보이체크’가 더는 프롤레타리아 그 자체가 아니라 속물성의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숭고한 예술가’ 혹은 ‘차세대 상류 계층을 꿈꾸는 청년’으로 드러난다는 점을 좀더 숙고해보기로 하자. 이 소설에서 계급성이 ‘예술가Vs자본가 및 상징 질서’의 대결 구도로 나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자본에 대한 예술의 승리로서 계급성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은 계급의 재배치에 차라리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말하자면 이연은 계급을 간파하고 그것을 극복해냈다기 보다는 ‘연기’에 성공한 것이고, 그가 이 모임에서 자기가 차후 맡을 배역의 실질적 정보를 얻고자 “‘저들 입장에서 느끼고 즐기며 저 사람들이 되어보자’”고 다짐했던 것을 성공적으로 실현한 셈이 된다. 이 성공은 곧 계급 전복의 실패일 수밖에 없는데, 정말로 ‘그들이 되는 것’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면 이 모든 것이 ‘연기’, 즉 그들이 ‘가난하고 숭고한 예술가’로서 배정한 그녀가 자신의 역할을 착실히 수행함으로써 그들의 계급성을 유린했다(또는 압도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전복이기도 하다.
이런 방식의 계급성의 재현은, 계급에 대한 욕망 그 자체의 불가능성을 재현한 것에 가깝다. 높은 계급성에 대한 욕망은 흉내냄으로서 온전히 성취할 수 없지만 흉내내기로서 도달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도달의 순간은 자신의 계급 상승에 대한 욕망이 성취되는 것으로 찾아오지 않고, 숭배되는 계급의 욕망(그들의 시선에서 철저히 배정된 역할에 충실하는 것)의 통제가 이 흉내내기에 의해 실패할 때에야 순간적으로 도래한다. 그러니 김애란의 소설이 보여주는 예술의 승리란, 실질적으로는 어떤 면에서는 현대판 ‘보이체크’의 승리가 아니다. 원본 희곡에서의 보이체크가 극복 불가능한 계급 사회의 하단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때로 치자면 중상계급이었을 예술가 계급이 신흥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둔갑하여 자본주의의 본격화 앞에서 그의 욕망 자체를 자본주의적 구조에 자발적으로 바치고야 마는, 즉 자신에게 부여되고(때로는 그 사실조차 잊은 채 자발적 복종하는) 자본가 계급 미만에게 강권되는 ‘거세된 욕망에의 규율’을 깨뜨리는 이야기다. 이런 약간 다른 계급성이 곧장 하위 계급과 상위 계급을 동시에 연기함으로써 그 자리를 박탈하고 취하는 것이 김애란의 서사가 성찰하는 모순되고 (도달)불가능한 계급성이다.



계급적 욕망의 재편, 거세된 욕망까지 욕망하기: 성해나 「소돔의 친밀한 혈육들」과 성혜령 「버섯 농장」


김애란과 비교할 때, 성해나의 「소돔의 친밀한 혈육들 성해나, 「소돔의 친밀한 혈육들」, 3) (이하 「소돔」)과 성혜령의 「버섯 농장」 성혜령, 「버섯 농장」,4)의 서사 속 인물들은 우선 계급적으로도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김애란의 소설에서 등장한 두 인물이 사회생활 경력이 어느 정도 있고 으레 상위 계급이 ‘교양’의 측면에서 어느 정도 상징자본의 권력을 ‘허용’받는 입장에 놓인 이들이라면, 성해나와 성혜령 서사의 인물은 그보다 더 노골적으로 계급차를 경험하는 이들이다. 먼저 「소돔」을 본다. 「홈 파티」에서 계급차가 교양을 위시하여 소프트한 방식의 연극에 동원되는 것으로 드러났다면, 「소돔」은 그보다는 훨씬 노골적이다. ‘나’는 친구 ‘오수’로부터 그의 “조부의 상수연”(175)을 촬영해주기를 요청받는다. “가족들만 모이는 소규모의 홈 파티”(176)라고 소개받았던 상수연 자리는, ‘나’에게는 가문의 행사라고 해도 좋을 만큼 화려하고 엄숙하다. 오수의 집안은 ‘나’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수준의 재력가로 이번 상수연을 맞아 조부는 자신이 오랫동안 지니고 있었던 도검을 감별받기로 했고, 결국 ‘나’가 찍어야 하는 것은 이 집안의 뿌리와 명예를 상징하는 그 도검의 가치를 공언받는 장면이다. 본격적인 식사 자리가 있기 전 카메라를 든 ‘나’를 향해 “저건 뭐냐”(182)고 묻는 조부의 모습이나, 자신의 과거를 짐짓 과시하며 열변하는 조부 앞에서 그의 말을 주워섬기며 조아리는 그의 가족들의 모습은 이 집안에서의 철저한 위계를 보여준다. 이 안에서의 계급성은 자본의 소유 수준에 더해 혈연과 역사로 재생산되어온 가문을 기준으로 재배치된다.
이러한 재현 자체는 재벌이나 문벌 가문에 대한 기왕의 상상력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비혈연 외부인들을 통해 오로지 현대인의 욕망을 컨트롤할 수 있는 자격으로서의 상징 권력 계층의 교묘하고 ‘교양있는’ 결탁을 보여주는 김애란의 소설에 비하면, 일면 지나치게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핵심은 이 모습 자체가 아니라, 이것을 지켜보는 ‘나’의 변모에 있음에 유의하여 이 소설에서 전개되는 두 번의 클라이막스를 보기로 하자.
첫 번째 클라이막스는 오수의 집에서 벌어진 도검 판별 사건을 수습하는 장면이다. 오수의 당숙이 데려온 도검 감별사는 이들 가문의 명예롭고 정의로운 역사, 그리고 그 오랜 시간성이 담보하는 그들 가문의 정숙성과 대물림되는 유구한 계급성이 전부 거짓된 것임을 폭로한다. 감별사를 무시하면서도 이 검의 가치를 제대로 판별해보라고 부추기는 조부에게 감별사는 이 검이 황실의 검은 맞으나, 고종이 하사한 것이 아닌 “총독이…… 친일을 한 관리들에게 뇌사한 검”(198)이라고 말한다. 오수의 조부는 역정을 냈고 언뜻 이런 방식으로 자본가 계급의 역사가 지닌 불명예와 허실이 폭로되는 듯하나, 상황은 오수의 부친에 의해 곧장 역전된다. 오수의 부친은 “자신의 아버지가 자본금 삼만원으로 세운 상회를 자신과 사촌들이 탄탄한 기업으로 확장해나간 것, 교외에 있던 사옥을 각고의 노력 끝에 강남으로 이전시킨 것에 대해 당당히 이야기”하면서 “그건 온전히 우리의 성과”(201)라고 선조의 역사와 선을 긋는다. 그의 말로 인해 감별사는 순식간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취급되고 오수는 ‘나’에게 그 장면을 삭제해달라고 속삭이며 홈 파티는 순조롭게 막을 내린다.
만약 여기에서 소설이 종결되었다면 위계로 점철된 혈연 중심의 가문의 영속성이 허위와 날조에 가까운 것이며 마찬가지로 계급성 또한 그런 방식으로 조작적인 것에 가깝다는 말로, 이 소설의 주제는 정리될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소설이 재현하고자 한 것은 그다음 클라이막스에 있다. 세습적 계급성과 그에 엮여있는 이들의 헛된 역사성에 대한 욕망이 폭로되고 그것이 ‘나’와 같은 이에게마저 망신스럽게 느껴질 만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 목격자가 진실을 보았다는 것만으로 욕망으로부터 탈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계급적 욕망의 재생산 문제는 좀더 복잡하다. 그것은 추후 회사생활을 하는 ‘나’의 모습에 의해 잘 드러난다,
상수연을 마치고 수년간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어느 회사의 인사 담당자로 일하고 있다. 회사에서 노사협의회가 열리고 사측과 노조가 강하게 부딪치고 있는 상황에 ‘나’는 놓여있다. 그는 계급적으로 자신의 위치가 노조에 있는 사원들과 다르지 않음을 심정적으로 이해하고 또 그들을 지지하고 싶은 마음을 완전히 물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연히 기사에서 한 건설사의 오너가 된 오수를 보며 그가 차장과 나누는 대화는 자못 상징적이다.


3) 성해나, 「소돔의 친밀한 혈육들」, 『빛을 걷으면 빛』, 문학동네, 2022. 이하 「소돔」에 대한 인용은 쪽수만 표기.
4) 성혜령, 「버섯 농장」, 『에픽#8』, 2022. 이하 「버섯 농장」에 대한 인용은 쪽수만 표기.



화물 기사가 변상해야 할 삼억 정도의 피해액을 사측이 전부 책임지기로 했으며, 이 결정으로 인해 그룹 이미지 상승은 물론 재벌가 자제를 바라보는 부정적 시선도 누그러졌다고 누차 강조되어 있었다.
저런 재벌들한테 삼억은 뭐 껌값이겠지? 우리는 그 돈 때문에 싸우고 있는데. 대학 때는 어땠어? 친했어?
차장의 물음에 나는 열없이 미소를 지었다. 미적지근한 반응이 궁금증을 유발했는지 차장을 더 집요히 물어왔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대학생 때도 그랬나?
(...)
대학 때도 괜찮은 친구였어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좋은 평가를 받는……
(...)
차장의 말대로 저들 중에는 내 동기도 끼어 있었다. 입사 초부터 함께 어울려 다녔고 종종 술도 한 잔씩 했으며 와이프들끼리도 안면이 있는. 그렇지만.
울상을 짓는 차장에게 나는 말했다.
어쩔 수 없죠. 규정대로 할 수밖에.
캔커피 통에 담뱃재를 턴 뒤, 차장을 등지고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그편이 더 경제적이잖아요. 마지막에 하려던 말은 끝까지 침묵한 채로. (206~207)


‘나’는 기사를 보고 과거 상수연을 다시 떠올리며 오너가 된 오수에 대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밖에서 시위를 하는 노조 사이에 있을 자기 동기의 모습을 잠깐 떠올린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것은 ‘오수가 훌륭한 오너’라 말하는 것이며, 사측의 편에 서서 ‘어쩔 수 없다’며 그들을 연민하는 위치에 서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선택이 단순히 세속적이라거나 오수와 같은 최상위 계급을 바라보면서 그것에 도달하기를 욕망하는 일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그가 이런 판단을 내리기까지 계급 모순의 한 단면을 노골적으로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갈등하거나 망설이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애당초 오수의 ‘계급’에 해당하는 것이 단순한 자본력이 아니라 혈통을 강조하는 ‘가문의 역사’인 이상 오수 쪽 ‘계급’은 노력해서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나’가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이는 오수로 대변되는 계급에 의해 ‘노력해도 여기에 도달할 수 없음’을 선고받음으로써 계급 상승의 욕망 자체를 거세당한 이가 그 거세된 욕망 자체를 내재화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는 그저 욕망으로부터 탈각된 것이 아니라, ‘거세되는 욕망’이라는 계급성을 욕망하는 것이다. 철저히 계급 상승의 불가능에 복무함으로써.
다시 첫 번째 클라이맥스의 끝 부분으로 돌아가보자. 오수의 요청 이후 ‘나’는 다디단 케이크를 베어물었고, 이후 오수가 요구한대로 영상을 깔끔하게 편집해 보냈다. 그런 ‘나’는 이제 사회에서 만연한 계급적 모순과 억압을 지켜보며, 계급 권력이 일면 허위적인 방식으로 구성되고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자기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쪽에 서지 않는다. 그가 주워섬기는 것은 계급 상승에 대한 욕망조차 아닌, “더 경제적”인 것을 추구하는 일일 뿐이며, 이것이 ‘거세당한 욕망’을 욕망하는 신(新) 계급성의 정체다.
‘거세당한 욕망’을 욕망하는 차원에서 볼 때, 「버섯 농장」의 결말이 「소돔」과는 아주 다르다는 점에서 다소 충격적이고 또 징후적으로 읽힌다. 우선 「버섯 농장」에서 재현되는 계급의 모습이 여타의 작품에 비해 복잡하다는 것을 짚으며 이야기를 시작해본다. 「버섯 농장」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진화는 명문 고등학교를 나와 대학에 가 10여 년 간 근무하고 있으나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졸업 후 꾸준히 일을 해왔음에도 대학 때부터 살아온 방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 오피스텔을 떠날 만큼 여유가 생기지도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명의를 도용당하기까지 한다. 그녀에게 삶은 노력하고 노동하는 만큼의 값을 지불하지 않는 불평등한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날 다른 상징자본이 진화에겐 없다는 것까지가 그녀가 처한 불합리한 현실이다. 한편 진화의 고등학교 동창 기진은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인물로 교통 사고로 부모를 잃었다. 언뜻 불행해보이는 그의 삶은 꼭 그렇게 해석되지는 않는다. 한평생 일을 했음에도 가난에서 벗어날 길 없는 진화가 보기에, 그는 부모가 남긴 유산을 관리하며 최소한의 노동만으로도 부족함 없이 살 수 있는 계급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명문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서로의 부모를 원망하면서 비밀스러운 우정을 키워왔음을 떠올릴 때, 기진 부모의 죽음을 기점으로 그 둘이 여전히 친구의 사이를 유지하면서도 묘하게 서로에 대한 부채감과 변화된 현실로부터의 격차를 느꼈음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그들이 처음 “24시간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서 명문대 진학률이 높기로 유명한 학교”(254)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그들은 아직 경제 주체가 아니었던 데다 ‘명문대 진학’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수행하는 공간 안에 그들이 담겨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은 (탈계급적인 것이 아니라) 같은 욕망을 공유하는 비슷한 계급처럼 서로를 여길 수 있었다. 그러나 상징 권력의 성취를 향한 욕망의 실천은, 신자유주의가 주입하는 것처럼 그런 욕망을 수긍한 바탕 위에서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실행되지 않는다. 진화와 기진의 부모가 지닌 경제적 수준의 차이는 궁극적으로 상징자본이 큰 의미에서는 ‘자본’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것을 재확인시켜줄 따름이다. 기진 부모의 죽음 이후 진화가 기진에게 뭔가를 부탁하기를 꺼리지 않고 그것을 순순히 들어주는 기진의 어떤 태도를 혐오함을 숨기지 않는 것은, 청소년 시절 부모가 자녀에게 권력을 일방적으로 행사하는 것을 혐오하는 것과 같이 권력을 더 많이 지닌 자가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자를 연민하는 듯이 그 요청에 따라주는 행동마저도 바로 그 권력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주요 인물들 사이에 이렇듯 차이 나고 극복 불가능한 계급성이 가로놓여있음이 지금까지 살핀 여타의 작품들과 대별되는 독특한 지점이기도 하나 이 소설의 복잡성은 그것에만 있지 않다. 인물들이 가진 저마다 다른 계급 관련 정보는 소설의 앞머리나 중간에 부분적으로 제공될 뿐이다. 이 소설의 중심 사건은 따로 있다. 진화는 예전에 전 남자친구의 지인을 소개받아 휴대폰을 바꾼 적이 있는데, 그 지인이 진화의 명의를 도용해 대출을 받은 사실을 알게 된다. 뜬금없이 갚아야 할 돈이 있다고 연락을 받은 진화는 신고를 해보지만, 어쨌든 명의자가 진화이므로 한시바삐 돈을 갚아 이자를 줄이는 게 우선은 최선이라는 답변을 들었을 뿐이다. 진화는 전 남친을 통해 그 지인의 연락처를 알아내지만 연락이 닿은 상대는 그 지인의 아버지되는 남자다. 아들의 과오를 질책하면서도 자신이 요양 병원에 있는 모친을 모시느라 바쁘다는 남자를 찾아가기로 결심한 진화는 기진에게 운전을 부탁한다. 그들은 한 요양 병원에서 남자를 만났으나 과거 노조위원장도 하며 성실하게 살며 차곡차곡 재산을 쌓아왔다는 남자가 병든 노모를 모시느라 재산도 아내도 잃고 산다는 한탄만을 듣게 된다. 요컨대 자기 아들이 빚진 돈을 진화에게 줄 수 없다는 뜻인데, 기진이 이 상황을 돌아보며 “이제 됐”냐고 묻는 데 비해 진화는 “되긴 뭐가 돼”냐며 “기진을 혐오하는 듯한 얼굴로”(259) 바라보는 데서 조차 이들의 계급성은 두드러진다.
이 주요 서사에서 인상적인 것 중 하나는 서로 다른 계급성을 인지하는 두 인물이 한쌍으로 묶여 부모 세대로 대변되는 남자와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대립으로 하여금 ‘진화Vs기진’ 이외의 계급적 재현이 끼어든다. 진화/기진의 부모 세대로 대변되는 남자가 그들이 열심히 노력하기만 한다면 부모의 재산에 손벌리지 않고도 ‘출세’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그들 자식 세대는 부모의 경제력과 계급에 기대지 않고는 출세할 수 없음에도 그 욕망만큼은 대물림받는다. 이는 ‘계급 욕망’의 또다른 이름인 ‘출세 신화에 대한 믿음’을 궁극적으로 실천하는 여부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욕망하는 계급에 끝내 도달했다가 몰락한 것이 남자라는 인물이라면, 애당초 그런 욕망의 실현이 자기 능력에 달려있지 않음을 서로 다른 삶의 조건을 통해 뼈저리게 깨닫는 이들이 진화/기진이기 때문이다. 진화와 기진의 약간 다른 이 계급성은 그 남자에게 막연한 적대감을 가지게 하면서도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하는채로 공모한다는 점에서 특이점을 지닌다.
남자의 뒤를 몰래 밟은 진화와 기진은 그가 한 허름한 비닐하우스에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다. 금세 남자에게 발각된 진화와 기진은 언뜻 남자와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하는 듯 보인다. 진화와 기진이 남자가 숨겨놓은 재산이나 있을까 해서 남자의 차를 뒤쫓아왔다는 것도 더는 숨길 수 없어지고, 돈이 한 푼도 없다면서 고급 승용차를 모는 남자가 다 스러져가는 버섯 농장 비닐하우스에서 산다는 사실도 이미 다 드러난 현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진화와 기진이 공통으로 남자에게 가지는 적대감은, 사실은 그들이 위치한 계급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의 혐오를 드러낸다.
비닐하우스에서 남자의 푸념이나 들으며 진화가 사온 참외를 나눠먹다가 잠깐 화장실에 간 기진은 한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화장실에서 기진은 아침에 보려던 고양이 영상을 봤다. 유튜버는 동물병원에서 기다리는 동안 카메라를 향해 상처가 아문 자리를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면서 목에 이렇게 깊은 상처를 낸 것은 살인미수라고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살인은 아니지. 기진은 중얼거렸다. 혹시 유튜버가 이 고양이한테 상처를 내고 구조해서 유튜버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잠깐 생각했다. (...) 기진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집에 가면 이번에는 꼭 유기묘 보호소에 가서 가장 가까운 날 안락사가 예정되어 있는 아이를 데려오자. 기진은 생각했다. 이번에는 꼭. (264)


이는 일면 기진이 진화에게 혐오를 사가면서까지 베푸는 그의 호의에 대한 아이러니컬한 해설처럼 보인다. 구조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고양이를 일부러 위기에 빠뜨렸을지도 모른다는 심상하고 서늘한 기진의 추측은, 그가 진화가 처한 곤란을 직접 목격하되 그것의 주모자가 아닌 자신이 책임질 필요 없는 그 곤란에서 진화를 위로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사람으로 연출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에 겹쳐 읽힌다. 그런데 기진이 딱히 의식적이지 않은 상태로 그의 ‘좋은 사람’으로서의 위치를 연출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진화가 처한 곤란을 영영 이해할 필요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진화의 혐오 어린 질책에 반박하지 않는 것 또한 어떤 면에서는 그런 식으로는 역전되지 않을 그들 사이의 계급적 격차를 그가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그렇다면 기진이 진화와 공모하는 듯 보이는 남자에 대한 혐오감은, 기실 진화의 처지를 헤아림으로써 이입된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계급성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남자에게 느끼는 역겨움 같은 것에 차라리 가까워 보인다.
이렇듯 부모로 위시되는 세습적 자본,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상징자본에 대한 믿음을 공유한 세대의 욕망, 그 욕망의 세대적 격차 등이 이 소설이 보여주는 복잡한 계급 욕망에 대한 한 재현의 방식일 때, 그것은 끝내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가.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종합하자면, 자신의 탓이 아닌 아들의 과오일 뿐이라는 남자가 지닌 계급성이나 기진이 선천적으로 지닌 계급성을 진화는 끝내 혐오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 두 남성이 모두 진화에게는 혐오의 대상이 되지만 그녀에게는 근본적으로 그들을 혐오할 만한 자본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진화를 이런 폐쇄된 결말에 손쉽게 이르게 하지 않는다.
화장실에 다녀온 기진은 남자가 불현듯 죽어 있음을 발견하고, 옆쪽에 위치한 미니 골프대에서 좀 놀고 있었다며 골프채를 들고 들어서는 진화를 본다.


진화는 기진을 보지 않고 남자를 줄곧 보고 있었다. 진화가 골프채를 들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폼을 잡고 남자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 스윙이 크지도 않았는데 푹, 하고 무언가 꺼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났다. 피는 튀기지 않았다. 한번, 쳐보고 싶었어. 진화가 말했다.
(...)
경찰은 부모님의 시체를 찌그러진 자동차 안에서 꺼낼 때 어쩔 수 없이 약간의 훼손이 생겼다고 했다. (...) 진화는 기진과 함께 두개골이 패이고 눈이 꺼진 부모님의 시신을 같이 봤다. 그런 장면을 같이 보게 되어서 오늘 진화가 이렇게 된 것이 아닌가. 기진은 생각했다. 기진은 처음부터 진화에게 시체 안치소까지 따라올 필요가 없다고 말해야 했다. 그때 진화는 기진에게 있어서 모든 것을 나누어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런 게 있을 리 없다는 걸 일찍 알았어야 했다.
(...)
묻어야 될 것 같아. 진화가 남자를 훌쩍 건너서 다가왔다. 우리가 왜? 우리가 죽인 것도 아닌데. 기진이 말했다. 멍청하게 굴지 마. 이미 우리는 시체를 훼손한 거야. 진화가 말했다. 우리가 아니라 네가 한 거지. 기진이 말했다. 진화는 잠시 말없이 기진을 쳐다봤다. 내가 억울한 빚이 생겼다고 말했을 때 너는 단 한 번도 나를 도와주겠다는 말을 안 했어. 너 어딘가 잘못된 거 아냐? (255~266)


기진이 입장한 뒤 남자가 죽었고 진화가 골프채를 들고 들어선다. 겉으로 봐선 훼손의 흔적이 없어 돌연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후 진화가 시체를 놓고 심상하게 구는 것을 보면 어쩐지 진화의 의도가 개입된 죽음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정이야 어찌됐든 기진은 이제 자기가 행사할 수 있는 권력―진화를 ‘도와주는’ 입장으로 동행함으로써 진화와 결코 동일해지지 않는 자기의 계급에 그녀의 불행을 활용하는 것―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좋으나 싫으나 그는 이 사체에 연루된 사람으로 진화와 함께 묶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과 연루되어 있음에도 자기의 책임이 아니라던 지난 시대의 수혜자인 남자가 어떤 연유로든 사망하여 그 계급성을 더는 옹호할 수 없게 된 것과 같고도 다르게 말이다. 이 상황에 이르러 자기 계급에 대한 욕망을 진화를 통해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해졌고, 곧바로 진화와 동일시된다는 점에서 기진의 욕망은 제한된다. 이제 남자와 기진으로 표상되는 계급성은 더는 진화와 같은 계급이 욕망함으로써 도달하고자 하는 것에 위치하지 않는다. 욕망하는 것 자체를 거세당한 인물로서의 진화가, 그 사실로 괴로워하거나 갈등하거나 발버둥치는 게 아니라, 필요하다면 ‘(상징적) 죽음’을 통해서라도 그들 모두를 자기와 같은 위치로 끌어내리는 것. 이것이 성혜령의 소설에서 재현되는 계급 욕망의 실현 양상이다.


*



이 소설의 결말을 어떤 방식으로 의미화하면 좋을지에 대해 망설여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타의 소설과 비교했을 때 다름 아닌 청년 인물을 통해 세대와 계급 모두를 죽음으로 벌하고 심상하고 순순히 자기를 연루시킴으로써 이들 모두가 하나의 자장 안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일로부터, 결코 극복될 수 없는 전망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욕망을 부정하거나 계급을 동경하거나 계급 자체로부터의 탈피를 도모하지 않는 청년은 더 나이들어 어떤 식으로든 다른 미래를 구축할 것인가? 또는 받아들여나갈 것인가? 둘 모두 아니라면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얼마나 더 냉정하게 자기의 것으로 끌어들일 것인가를 묻는 편이 옳을까? 아직은 알 수 없다. 하나 한 가지, 오늘날 문학이 재현하는 계급성이 ‘계급 자체가 문제적’이라거나 ‘계급 구도 안에서의 어떤 욕망이 옹호/부정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음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적극적인 해석과 전망의 제안으로서 기꺼이 저들의 계급적 욕망에 연루되는 이들의 태도를 여기서 일단락하기 보다는 앞으로 어디를 어떻게 향할 것인가를 지켜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현상 너머의 문학적 판단이 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유인혁
작가소개 /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201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작품활동 시작
2021년 대산창작기금 수혜


《문장웹진 202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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