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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아나키스트, 그리고 ‘이후의 시(詩)’

  • 작성일 2022-11-01
  • 조회수 2,141

[현장 비평]

《문장웹진》은 다양한 시선을 통해 폭넓은 담론을 펼칠 수 있는 ‘비평의 장’을 마련하고자
2020년 진행되었던 〈본격! 비평〉 코너를 정비하여, 2021년 4월호부터 〈현장 비평〉을 선보인다.
2022년 〈현장 비평〉은 신진 문학평론가 12명이 각자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주제를 정해 매월 1편씩 발표된다.






슬픔의 아나키스트, 그리고 ‘이후의 시(詩)’

- 김중일의 『가슴에서 사슴까지』1)



하혁진




바다와 바닥의 불화


오늘은 3,122번째 4월 16일이다. 이것은 문학적 수사가 아니다. 삶의 시계가 그날에 멈춘 사람들이 있으므로. 한 단원고등학교 희생 학생의 누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빨리 4월 18일이 되면 좋겠는데 4월 16일에서 시간이 안 간다.”라고.2) 애타게 기다렸던 금요일 이후로도 445번의 금요일이 왔다가 갔지만 간절히 기도했던 금요일은 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오늘은 3,122번째 4월 16일이다. 단언컨대 이것은 문학적 수사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날 이후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은 그들을 돌아오게 할 수 있는가.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불가능하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건’ 앞에서 ‘이후’의 언어는 무능하고 무력하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모든 슬픔은 당신이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라고. ‘트라우마란 소화되지 못한 기억의 파편들로서 이것이 사건을 겪은 이의 정신 속에 흡수되고 언어화되어야만 치유가 가능해진다.’라고. 전자는 덴마크의 소설가 이자크 디네센의 말이고, 후자는 미국의 평론가 캐시 캐루스의 말이다. 그들은 다시금 문학의 역할을 호출한다.


한국의 시인 진은영은 그 호출에 이렇게 응답한다. “예술의 언어를 사용해 수없이 많은 다른 방식으로 잃어버린 사람을 다시 부르고 되찾을 수 있다.”라고. “그렇게 부르며 기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에게 가장 어울리는 새 얼굴과 아름다운 몸을 준다.”라고. 죽은 사람은 돌아올 수 없지만 “여러 가지 말로 표현된 슬픔 속에서 우리는 사라진 사람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3) 그러니까 문학의 소명 중 하나는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수없이 많은 목소리들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일이다.4) 물론 그것 역시 불가능에 가깝다. 나의 경우만 해도 그날에 관해서는 단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 내가 겪은 그날, 예컨대 광화문 광장에서 천막 농성을 하던 유가족분들을 만나 직접 만든 도시락을 나눠 먹은 일, 추운 겨울 그들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었던 일에 대해서는 어렴풋하게나마 쓸 수 있었지만, 그 품의 주인인 유가족의 마음에 대해서는 결코 쓸 수 없었다. 하물며 바닷속에 가라앉은 목소리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재현의 불가능성’, 그것은 문학이 가장 오랫동안 끌어안고 있는 질문이자 아마도 영원히 끌어안아야 할 질문일 것이다. 이에 대해 김언은 “후쿠시마 원전 폭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 그리고 세월호 침몰”과 같은 “굵직한 사태 앞에서 나는 왜 추모시나 애도시 혹은 비판시를 쓰지 못하는가.”라고 물은 뒤, “일련의 저 사태들이 아무래도 나의 ‘바닥’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답한다.5) 그의 말에 따르면 진정한 의미의 추모시, 애도시, 비판시는 타인의 고통과 슬픔, 사회의 부조리와 부정의를 인식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것들이 쓰는 이의 바닥에 닿을 때 비로소 탄생한다. 그렇다면 ‘바닥’이라는 “가장 먼 타자를 움직여 주변의 타자가 겪는 불행과 비극을 마치 자기가 겪는 것처럼 말하게 하는 것”이 가능할까. “오히려 적절하게 거리를 두고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추모시나 애도시의 조건” 아닐까.6) 요컨대 기존의 언어와 문법을 파괴하는 일련의 사태와 시인 사이의 알맞은 거리는 얼마만큼일까. 얼마만큼이어야 그날의 바다와 시인의 바닥은 불화하지 않을 수 있을까.


1) 이 글은 김중일의 네 번째 시집 『가슴에서 사슴까지』(창비, 2018)를 주요 텍스트로 삼는다. 이하 이 시집에 수록된 작품을 인용할 경우 작품명만 표기한다.
2) 정혜신, 진은영,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창비, 2015, 66쪽.
3) 정혜신, 진은영, 같은 책, 203쪽.
4) 진은영은 ‘소명(Vocation)’의 어원이 ‘목소리(Voice)’임을 지적한다. 정혜신, 진은영, 같은 책, 132쪽.
5) 김언, 『시는 이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난다, 2019, 253쪽.
6) 김언, 같은 책, 257쪽.



침묵하는 주체


한편 이광호는 “살아남은 자가 살아남지 못한 자들에 대해” 쓸 때, “언어의 가능성은 두 가지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하나는 완전한 침묵 속에서 사는 것”이고 “또 다른 가능성은 침묵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말들을 발굴하는 것”이다.7) 주의해야 할 것은 침묵이 단순히 말하지 않고 쓰지 않음으로써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침묵은 ‘언어의 없음’이 아니라 ‘침묵의 있음’이라는 점에서, 언어의 무능과 무력을 견뎌야 한다는 점에서, 실어의 고통을 버텨야 한다는 점에서 능동적인 행위다. 다시 말해 침묵은 언어의 부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존재로서 현존한다. 따라서 사건 이후 침묵하는 문학적 주체 역시 수동적 주체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문학적 주체가 침묵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말들을 발굴하는 작업은 “사건과 증언 사이의 분열, 기억과 언어 사이의 배반”을 능동적으로 감당하는 일이다. 그렇게 살아남은 자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는 윤리와 정확하게 기록할 수 없다는 절망 사이에서 말들을 찾아 나선”다.8)


또한 이광호는 “진정한 의미에서 윤리적인 주체는, 비판의 주체인 자신을 그 비판의 가장 가혹한 대상에 위치시킨다.”라고 말하며, 따라서 “주체성이 궁극적으로는 부끄러움이며, 주체화와 탈주체화의 공존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부끄러움의 주체”를 “문학적인 경험의 잠재성”과 연결한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죽은 자 – 타자’의 환원 불가능한 목소리”에 응답하는 과정은 “‘나’라는 자아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주체의 자리를 뒤흔드는 경험”인데, 문학적 주체는 애초에 “자기 자신의 확실성”을 가지고 고백하고 증언하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말할 수 없는 자”라는 의미로서의 “진정한 증인”이 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요컨대 “‘나’라는 확실하고 일관된 주체의 진정성의 발화를 넘어선다는 맥락”에서 “문학적 글쓰기”는 “부끄러움의 경험”, 즉 ‘윤리적인 경험’이라는 것이다.9) 이때 문학적 주체는 부끄러움의 주체, 윤리적인 주체와 동일선상에 놓이며, 죽은 자 – 타자의 환원 불가능한 목소리에 응답하는 애도 작업 역시 문학이 해야 하는 일을 넘어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일말의 가능성을 내비친다.


7) 이광호, 〈남은 자의 침묵 – 세월호 이후에도 문학은 가능한가?〉, 계간 문학과사회 2014년 겨울호.
8) 이광호, 같은 글.
9) 이광호, 같은 글.



이처럼 사건 이후의 문학은 가능성과 불가능성, 바다와 바닥, 당위와 윤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문학을 둘러싼 담론들 역시 양가적인 반응을 포함한다. 먼저 정원옥은 “4·16 이후 애도 담론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은 주로 작가와 인문학자”라고 말하며, “이들은 애도가 불가능한 조건 속에서 애도의 가능성을 열기 위한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울증적 주체”라고 덧붙인다.10) “무기력과 자학의 언어들을 쏟아냄으로써 4·16이 야기한 충격과 고통은 재현될 수 없는 것임을 토로”하고 있다는 것이다.11) 이때 진동의 추는 불가능성 쪽으로 기울어진다. 한편 박윤영은 “사회·정치적 영역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들이 정작 그곳에서 해결되지 못한 채, 거듭 표류하다 문학 장내로 틈입해 들어올 때, 역설적으로 그 사회의 부조리가 드러”난다고 말하며, “문인들의 자발적 참여와 연대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윤리적 차원에 국한될 수 없는 그 무엇을 담지”한다고 덧붙인다. “그것은 작가적 정체성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슬픔과 분노, 절망, 안타까움 등 ‘정동의 문제’와 관련된다.”는 것이다.12) 이때 진동의 추는 다시 한 번 가능성 쪽으로 기울어지며 팽팽한 균형을 유지한다.


그런가 하면 서영인은 “세월호 이후 우리 사회는 우울과 절망과 슬픔과 분노가 뒤범벅되어 집단 우울증을 앓고 있다.”라고 말하는 동시에 “그러나 이 뒤범벅된 감정의 고통들에 가장 예민하고 치열하게 다가가야 하는 것이 문학인 것도 분명하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문학은 가장 가까이서 함께 아파하는 세월호의 동승자이며, 그러므로 끝까지 남아 가장 오래 기억하는 증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3) 서영인은 구체적인 이유를 들지는 않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문인들이 참여한 책들이 많이 나온 것은 사실이다.14) 요컨대 가능성과 불가능성, 바다와 바닥, 당위와 윤리 사이를 끊임없이 진동했던 추의 운동은 단순한 반복 운동이 아니라 수많은 언어를 생산하는 운동이었던 것이다. 김형중 역시 “달리 생각해 보면, 기성 언어의 문법 자체가 파괴되었다는 무력감 이면에서 엄청나게 많은 말들이 생산되고 있다는 이 모순적인 상황이야말로 세월호의 ‘사건성’을 입증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라고 말하며, 이러한 현상에 주목한다.15) 실어(失語)인 동시에 다변(多辯)인 모순이 가능했던 것이야말로 세월호 참사가 우리 모두에게 남긴 거대한 사건성의 증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월호의 사건성이란 무엇인가.


10) 정원옥, 〈4·16 이후, ‘애도의 정치’의 새로운 양상들 : 누가 죽은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가〉, 계간 황해문화 2016년 겨울호.
11) 정원옥, 〈4·16과 애도 담론 :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윤리적 과제〉, 계간 자음과모음 2014년 겨울호.
12) 박윤영, 〈세월호 사건과 촛불혁명, 그리고 문학의 참여 : 슬픔이 사라지지는 않아도 – 혁명과 애도의 시〉, 계간 실천문학 2017년 가을호.
13) 서영인, 〈세월호 이후, 작가가 보는 한국 사회〉, 계간 실천문학 2014년 가을호.
14) 『눈먼 자들의 국가』(문학동네, 2014), 『금요일엔 돌아오렴』(창비, 2015),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현실문화, 2015),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예옥, 2015),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실천문학, 2014), 『엄마, 나야.』(난다, 2015) 등이 대표적인 예다.
15) 김형중, 〈문학과 증언 : 세월호 이후의 한국문학〉, 감성연구 12권 12호.



제로 그라운드와 아나키스트


사건성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트라우마(외상적 사건)의 개념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다. 김형중은 “우리로 하여금 ‘감당할 수 없는 이것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라고 집요하게 묻는 언어와 이성의 크레바스, 거기가 바로 트라우마의 처소”라고 말하며,16) 트라우마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입장, 즉 프로이트와 바디우의 해석을 비교하여 소개한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두 사람을 가르는 기준은 상실한 대상의 ‘대체 가능성’이다. 프로이트는 주체가 리비도를 흘려보내던 대상이 떠났을 때 상실의 결과로 고통을 느낀다고 말하며, 따라서 주체는 애도 작업을 통해 기존의 대상으로부터 리비도를 철회하고 새로운 대상에게 리비도를 흘려보낸다고 덧붙인다. 프로이트에게 애도 작업이란 상실을 극복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형중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맹골수도발 외상 체험만 떠올려 봐도 사실상 이런 일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해 보이지도 않는다.”며 프로이트의 주장을 반박한다.17) 요컨대 트라우마가 생기기 이전의 세계와 이후의 세계는 같을 수 없다는 것, 같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트라우마를 바디우적인 의미의 ‘사건’ 개념으로, 다시 말해 대체할 수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상실 경험으로 이해한다. 이때 애도 작업 역시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항구적인 것이 되며, 상처나 상실도 마찬가지로 회복되거나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 된다.18)


만약 트라우마가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면, 문학은 애도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재료인 언어의 품으로 상처와 상실을 끌어안아야 한다. 실어인 동시에 다변인 모순이 발생한 이유다. 물론 우리가 경험한 참사와 재난은 절대적이고 불가역적인 사건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전부 말해질 수 없다. 애도가 침묵하는 주체를 수반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침묵이 길어진다고 해서 애도가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떠나간 이들의 이름을 불러 주는 일부터, 남겨진 이들의 슬픔을 위로하는 일,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일까지. 애도는 산 자의 몫이므로 다시금 언어의 영역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다. 애도는 상실의 충격으로 발생한 ‘실재’의 구멍을 의미화 요소, 즉 ‘상징’으로 메워 줄 것을 요구한다는 라캉의 문장처럼, ‘너도 말하라 / 가장 마지막 사람으로서 말하라 / 너의 말을 하라’고 명령하는 첼란의 시구처럼, 침묵의 시간 뒤에는 언제나 언어의 시간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언어를 가지지 못한 존재의 발화 불가능성에 자리를 내주는 고도로 자기성찰적인 언어, 무의미가 됨으로써 오히려 충만한 증언을 가능하게 하는 공백의 언어, 증언의 불가능성을 지시함으로써 역으로 증언에 성공하는 역설의 언어”, 다시 말해 “작가에게 증인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하는 그런 언어는 어떻게 가능할까.19)


다시 김형중이다. 그는 “시란 뮤즈가 관할하는 일이지만, 만약 어떤 사건이 진정 트라우마라는 말의 엄밀한 의미에 합당한 성질의 것이라면 거기에 뮤즈는 찾아들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뮤즈의 도움 없이 발화된 고통의 언어는 비명이거나 증상일 뿐”이라고 덧붙인다.20) 그의 말처럼 우리는 그날 이후 많은 것을 잃었다. 작게는 단어부터 크게는 문법까지. 우리는 세월호 이전의 언어와 이후의 언어가 같을 수 없음을, 같아서는 안 됨을 안다. 시 역시 마찬가지다. 재현이 불가능한 슬픔 앞에서 비유와 상징은 무능하고 무력했다. 요컨대 ‘이후의 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문법이 파괴되었단 말은 역으로 다양한 말들, 말 이전의 말들이 발화 가능하게 되었다는 의미”라고 말하며, 그런 점에서 “팽목항은 한국의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와 같다.”고 덧붙인다. 그에 따르면 그라운드 제로는 “모든 근거들의 폐허, 그래서 그로부터 더 처참한 폭력과 무질서가 새로 시작할 수도 있고, 반대로 완전히 다른 법과 다른 공동체가 등장할 수도 있는 장소”인데, “아무런 근거도 없는 폐허에 세워진 ‘하나의 장소’가 바로 팽목항”이었다는 것이다.21)


16) 김형중,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 트라우마와 문학〉, 계간 문학과사회 2014년 가을호.
17) 김형중, 같은 글.
18) 이에 대해서는 정혜신 역시 비슷한 입장을 보인다. 정혜신은 “죽은 사람을 마음에 품는” 것을 “일종의 병적 증상으로 이해”하는 것에 대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종내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죽음에 대한 서양 정신의학의 정석에 대해 저는 요즘 깊이 회의합니다.”라고 말한다. 정혜신, 진은영, 같은 책, 215-216쪽.
19) 김형중, 같은 글.
20) 김형중, 같은 글.
21) 김형중, 〈문학과 증언 : 세월호 이후의 한국문학〉, 감성연구 12권 12호.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상태, 즉 기존의 질서가 와해된 상황을 이상적 상태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무질서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모든 것이 끝났다는 공포 속에서 어떤 것도 시작할 수 있다는 용기를 발견하고 발명하는 이들이다. 대표적인 예가 ‘아나키스트’다. ‘아나키즘’은 정부나 통치의 부재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단어로, 제도화된 정치, 권력, 권위를 부정하는 사상 및 운동을 의미한다. 흔히 권력의 부재는 질서의 부재로 이어져 아나키즘을 혼란과 혼돈의 동의어로 이해하곤 하는데, 레베카 솔닛은 아나키스트를 “협력과 협상, 상호부조를 통해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다고 믿는 이상주의자들”이라고 정의한다.22). 그에 따르면 아나키스트들은 ‘관료주의’와 ‘엘리트주의’의 반대편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솔닛은 바로 이 가능성에 집중한다. 그는 “파괴 속에서 구원이 찾아오는 것은 흔한 일”이라고 말하며, “중요한 것은 재난의 파괴적 힘, 말하자면 기존 질서를 뒤집고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능력”이라고 덧붙인다.23) 질서가 무너진 상황에서 발생하는 즉각적인 연대와 희망이 일종의 ‘언더그라운드 유토피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경험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경험이라는 점에서,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연루되는 경험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슬픔의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과 연결되는 경험이다.24)


기존의 질서를 끊임없이 배반하며 나아가는 언어라는 점에서 시 역시 아나키즘적인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거대한 상실의 고통과 슬픔을 재현할 어떠한 언어도 부재한다는 점에서 세월호 이후의 시는, 팽목항이라는 그라운드 제로에서부터 다시 시작(始作)되고 시작(詩作)되는 시는, 더욱더 아나키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궁극적 권한과 완전한 정답을 갖고 있지 않은 순간, 바로 이런 순간이야말로 아나키즘적 이상에 가까운 순간이며, 각각의 구성원들이 스스로의 창조성을 발휘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재난과 참사라는 거대한 사건이 초래한 “‘과도적 성격(liminality)’”이 “‘일시적 자율공간(temporary autonomous zone)’”을 만드는 것이다.25) 따라서 이어지는 글에서는 재현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쓸 수 없음으로 쓰고자 했던, 기존의 언어와 질서가 파괴된 상황에서 새로운 언어와 질서를 발견하고 발명하고자 했던 ‘슬픔의 아나키스트’, 그들의 시도 가운데 하나로 김중일의 시를 함께 읽어 보고자 한다. 그는 “마치 상처투성이 유일한 생존자처럼 / 반파된 책상에서 비틀대며 투명한 몸을 일으”키고 “가장 마지막 문장만으로 시를” 쓴다.(「투명한 문장」)


22) 레베카 솔닛, 『이 폐허를 응시하라』, 펜타그램, 2012, 140쪽.
23) 레베카 솔닛, 같은 책, 14-32쪽.
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난이 우리를 해방시킨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스스로 선택했거나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재난이 불시에 덮쳤을 때 남는 것은 상실과 고통뿐이므로”라는 문장을 덧붙이는 솔닛의 세심함을 나 역시 각주로 인용한다. ‘사건’이 남긴 고통과 슬픔을 재현하는 예술은 이러한 긴장을 놓칠 때, 반드시 그리고 처참히 실패한다. 레베카 솔닛, 같은 책, 181쪽.
25) 레베카 솔닛, 같은 책, 255-256쪽.



가슴과 사슴, 애도의 주체와 대상


김중일에게 슬픔은 난데없이 찾아오는 무엇이다. “저녁에 나가 보니 문 앞에 고양이가 쓰러져 있”는 식이다. 그는 “급작스레 고양이의 장례를 치르”는 동시에 “곧 꺼질 걸 뻔히 알면서도 문 앞에다 양초 한 자루를 밝”혀 둔다.(「어깨에서 봄까지」) 예고 없이 찾아든 슬픔 앞에 위태로운 애도를 표하는 것이다. 또한 김중일에게 슬픔은 생면부지의 무엇이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이 떠나간 사람들에게” “잘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식이다. 그는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내 손을 잡아 주어서 고맙”다고, “그 손을 잡아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한다.(「오늘도 사과」) 요컨대 그는 자신을 찾아온 낯선 슬픔에 대해 이유 모를 책임과 부채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가 감당하고 있는 슬픔의 크기가 얼마나 거대한가 하니 “아무리 백까지 백 번을 헤아려도 잠이 오지 않”을 만큼이다. 그는 “폐에 바닷물이 찬 사슴. 바다가 된 사슴. 자식 잃은 사슴”이 커질 때마다 함께 커지는 가슴을 불안해하며, 가슴(주체)과 사슴(슬픔)의 거리를 “사슴 한 마리 사슴 두 마리 사슴 세 마리……” 가만히 헤아려 본다.(「가슴에서 사슴까지」)


이 계절에 일어난 참혹한 사건으로 사슴은 태어났다. 누군가는 죽고, 사슴은 태어났다. 나는 죽은 이의 가슴을 사슴이라고 부른다.
사슴은 태어나자마자 눈 뜨고, 일어섰으며, 매일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려 한다. 나는 그 여정을 가슴에서 사슴까지, 라고 한다.
무너진 내 가슴에서 태어난 사슴 한 마리가 자란다. 내 가슴은 사슴 따라 점점 커진다. 계속 커진다.
어느 날 가슴이 터지고 불타면 내 사슴을 어쩌나.
한순간 구름처럼 하얀 재가 된 내 사슴을 어쩌나.
사슴 한 마리 사슴 두 마리 사슴 세 마리…… 아무리 백까지 백 번을 헤아려도 잠이 오지 않는다.
- 「가슴에서 사슴까지」 부분


주목해야 할 것은 주체가 걱정하는 것이 가슴이 아니라 사슴이라는 점이다. ‘나’는 “어느 날 가슴이 터지고 불타면” 홀로 남게 되는 사슴, 즉 ‘나의 가슴’이 아니라 “죽은 이의 가슴”인 사슴을 걱정하느라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하긴 애초에 가슴부터 사슴까지의 여정은 ‘나’가 슬픔을 데려가는 여정이 아니라, 슬픔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는 여정이다. 주체는 거대한 슬픔이라는 대상 앞에서 무능하고 무력하다. 그런데 의문이 드는바, 도대체 얼마나 “참혹한 사건”이 그 “계절에 일어”났기에 이토록 거대한 “사슴은 태어났”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알 수 있다. 아마도 계절은 봄이었을 것이고, 장소는 바다였을 것이다. 그 봄의 바다를 고통스럽게 목격했던 이들이 이 시를 읽고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희생자들이 위선(緯線)과 경선(經線)을 싹 다 걷어” 떠난 이후 “정전된 지구”에 혼자 남게 된 ‘나’는,(「끝내 버려진 지구에 나 혼자 누운 꿈」) 대상에게 주체의 자리를 양보한 채로 “아이들이 두고 간 소금가마니 같은 시간을, 당나귀처럼” 지고 가며 철저한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마중 왔던 아이들」) 뿐만 아니라 김중일의 경우 여기에 하나의 죽음이 더 겹쳐진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죽음이다.


「둥근 노래만이 입술을 들어올리네」의 화자는 “고인들은 살아서 미처 다 못 울고 간 / 제 울음을 사람들에게 내맡”긴다고, “그 울음을 마저 다 울며 사느라 사람들은 / 정작 제 울음은 또 다음 사람에게 물려”준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눈물은 한 세대에서 끝나지 않고 대에서 대를 거듭하며 상속되는데, ‘나’의 경우 “아버지의 울음을 대신 울고 있”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주체에게는 대상이 남긴 “상속을 거절할 권리가 없”다. 「반생」의 화자 역시 “내가 평생을 다 살아도 절반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죽기 직전 생일케이크 위의 촛불처럼 훅, 나를 불어 껐”고, 그 순간 “암전”과 함께 “나의 반생(半生)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상실, 그리고 그것이 초래한 눈물과 슬픔이 ‘나’에게 상속되어 ‘나’의 반생을 산다. 이때 ‘그’와 ‘나’의 관계는 앞서 살펴본 ‘사슴’과 ‘가슴’의 관계와 정확히 겹쳐진다. 요컨대 대상이 주체의 생을 “대신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의 “흐물거리는” 몸과 “돌멩이 같은” 마음은 각각 대상의 “유언”과 “유품”이 되는 데 바쳐진다. 이처럼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역전된다는 의미로서의 반생은 트라우마, 즉 대체할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거대한 상실로 주체의 “반쪽이 무너지는 순간 시작”된다. 주체의 내면이 “가장 깊숙이 무너지”는 외상적 사건의 “반대편에서” 반생은 “생생히 일어서는” 것이다. 트라우마는 주체의 시간을 “정확히 반으로 쪼”갠다.


강, 창, 폭설 그리고 공중


문제는 ‘나’의 생과 시간을 절반씩 나눠 가진 주체와 대상 사이에 “흐르는 강물처럼 빈자리가 흐른다”는 사실이다. 생(生)과 사(死)라는 절대적이고 불가역적인 경계를 사이에 두고 ‘나’와 ‘너’는 불화한다. 강 건너의 ‘너’는 “물수제비 뜬 / 돌멩이들”을 던지고, “수면을 튕기며 날아온 / 불면의 돌멩이들”은 ‘나’의 “비좁은 몸속 기슭 / 오장육부로 고스란히 다 모여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나’는 ‘너’를 직접 만날 수는 없다.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은 “앞서 자리한 빈자리”처럼 이미 주어진 것이고, 그렇기에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인 ‘너’는 영영 만나지 못할 사람인 것이다. 아무리 눈물을 상속한다 한들, 슬픔을 나눠 산다 한들 “네 머리카락이 내 머리에서 자라는 날”은 오지 않는다.(「흐르는 빈자리」) 다시 말해 ‘나’와 ‘너’ 사이에는 “녹지도 깨지지도 않는 창문”이 있다. 창문은 나의 슬픔을 너에게 말할 수 없게 하고, 너의 슬픔을 내가 들을 수 없게 하며, 끝내 서로의 슬픔을 외롭고 고독하게 한다. “창문은 아무런 소리도 통과시키지 않는 확성기”, “내 몸 안으로만 울음을 키우는 확성기”인 것이다. 심지어 창문은 “지구만 한 파도로 떠밀어도, 무쇠 의자로 내리쳐도, 이마로 들이받고, 두 주먹으로 내질러도” 깨지지 않을 만큼 견고하다.


그런데 어떻게 해도 깨지지 않을 것 같던 창문은 의외로 “촛불” 같은 작은 힘에 의해 녹는다. 창문은 “입김을 불고 죽은 이의 이름을 향년의 햇수만큼 쓰면” 녹는다.(「창문에서 죽다」) 위태로운 애도의 표현이었던 촛불이, 영영 만날 수 없는 이름을 부르는 언어가 단단하게 얼어붙은 경계를 깨뜨리고 다시금 주체와 대상을 연결할 가능성을 여는 것이다. 물론 창밖의 세계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다. 창밖에서 ‘너’와 ‘나’의 소통을 가로막는 것은 “기습 폭설”이다. 폭설은 “사월 망자의 미역국을” 뜨고 있을 때, “아버지 영정에 절을” 하고 있을 때, 기습적으로 들이닥친다. 요컨대 폭설은 주체를 둘러싼 사회적 죽음과 개인적 죽음, 양자 모두의 애도를 방해하는 요소인 것이다. 폭설은 주체로 하여금 애도의 시간, “그 의지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애도의 주체인 ‘나’와 애도의 대상인 ‘너’ 사이에는 애도를 방해하는 ‘폭설’이 끼게 되고, “나와 폭설과 너는 그렇게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이 중 “어느 하나를 배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애도의 트라이앵글이다.(「기습 폭설」) 그런데 주지했듯 애도는 항구적인 것이며, 상처나 상실 역시 회복되거나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면, 주체는 “그 폭설을 뚫지 않고는 그날로부터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지상에 있어야 할 수백 명의 체온이 부족해서 / 여태 녹지 않은 그 계절의 눈송이들 사이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그날의 눈송이와 오늘의 눈송이 사이」)


아이러니한 것은 「기습 폭설」의 화자가 “다시는 사철 폭설 밖으로 헤어 나올 생각을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시를 맺는다는 점이다. 어째서 그는 폭설 안에 있기를 선택한 것일까. 그것은 ‘나’가 제 몫의 애도를 감당하지 않는다면 “모르는 나를 대신해 내 몫의 울음까지 다 채워야 하는 / 누군가”가 생긴다는 사실을 아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울지도 않았는데” “소매가 다 젖었”던 기억, “눈길을 걷지도 않았는데” “바짓단이 다 젖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알 수 있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상실,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고통과 슬픔. 이미 태어나 버린 그것들은 절대로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따라서 ‘나’는 제 몫의 애도를 감당하고자, 폭설 안에 머무르고자, 애도의 트라이앵글을 지키고자 한다. “홑청 같은 공중이 펑펑 터지”는 것을 끌어안고자 한다. 그렇다면 시집 곳곳에서 발견되는 ‘공중’의 의미는 무엇일까. 김중일에게 공중이란 죽음과 함께 발생하는 공백이자 공허이다. 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실로 발생하는 ‘실재’의 ‘구멍’이 곧 공중인 것이다. 예컨대 “잠든 사이 지구상에서 또 몇 명이나 떠났을까” 세어 보는 행위는 “공중에 구멍이 뚫”린 개수를 세어 보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애도 일기」) 그리고 그렇게 발생한 공백과 공허를 메우지 못하면 “세상은 매일 매 순간 무너지려 한다”. 죽음이 만든 구멍으로, “공중의 틈새”로 자꾸 쏟아지려 한다.


세상은 매일 매 순간 무너지려 한다.


세상 모든 새들은
잿빛 댐처럼 우주를 가둔 하늘을 틀어막고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잿빛 댐처럼 지구를 가둔 땅을 틀어막고 있다.


- 「매일 무너지려는 세상」 부분


그래서일까. 공중의 틈새로 무너져 내리는 세상을 막기 위해 죽음의 구멍을 틀어막는 존재들이 있다. 예컨대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 그 순간 한순간에 세상이 무너질까 봐 / 그 자리에 곧바로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는 “엄마들”이 있다. 그들은 자식의 죽음이라는 공백과 공허 사이로 고통과 슬픔이 “폭발해 터져 나오려는 / 그 순간 그 자리를 틀어막듯 주저앉는다”(시인은 여기에 세월호 유가족의 ‘삼보일배’ 장면을 겹쳐 둔다. “세 걸음마다 한 번씩 / 눈 밑까지 금세 차오른 기억을 비우려 절하는 사람”,(「흐르는 빈자리」) “국도변에는 / 바닷속에 동생을 묻고 생긴 극심한 갈증으로 / 세 걸음마다 한 번씩 엎드려 물 마셔야 하는 / 어린 고라니가 있습니다”.(「비를 흠씬 얻어맞다가 보았다」) 그런데, 그렇다면, “엄마들 가슴 한가운데 난 구멍”은 또 어떡해야 할까. 그 구멍 역시 “당장 막지 않으면 금세 금 가고 갈라져 댐이 툭 터지듯 / 한순간 무너져 내릴 텐데, 세상이 엄마로 다 잠길 텐데” 말이다.(「매일 무너지려는 세상」) 요컨대 죽음은 그 자체로 구멍이 되기도 하지만, 남겨진 이들의 가슴에도 커다란 구멍을 남기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온몸에 뒤덮인 사월의 공중”을 외롭게 감당하던 엄마들은, “자식 없이도 엄마라는 이름은 남아” “털실뭉치 같은 눈사람을 풀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기왕이면 물에도 젖지 않는 스웨터를 짜”던 엄마들은, 어느새 “털실처럼 눈물이 줄줄 풀”려 “점점 작아”진다.(「일어서다, 그리고 가다」)


사이를 잇는 투명한 문장


시인은 그들과 함께 보다 적극적인 애도의 주체가 되고자 한다. “지구만 한 중력을 안간힘을 다해 들어올리며” 눈을 뜨는 이들, “눈꺼풀을 들어올리고 똑똑히 봤어도 / 잘못 본 것 같은 일들”에 의해 희생된 이들, 그렇기 때문에 “중력을 거슬러야 눈 감을 수 있는 이들”을 떠올리며, 시인은 “질끈 두 눈을 감듯, 두 눈을 뜬다”. 대면해야 하는 진실을 외면하게 하는 중력과 맞서는 것이 시인의 루틴인 것이다. 시인은 마침내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공중을 끌어안으며 / 처음으로 소리 내어 말한다”.(「루틴」) 하지만 시인의 노트는 “시가 못 된 투명한 전생의 문장들이 백지에 빼곡”할 뿐 “술술 밤새도록 쓰고 또 써도 백지다”. 폭설을 뚫고 중력을 거슬러 공중을 껴안은 시인은 무엇이라도 쓰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이곳의 언어로 그곳의 언어를, 산 자의 언어로 죽은 자의 언어를 번역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시인은 “시간의 가장 막다른 절벽”에 다다른다. 그곳에서 시인은 “기꺼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다. 그리고 “몇 겁의 시간을 그 자리에 걸려 있었을 공중을 껴입”는다.(「투명한 문장」) 언어로 공중을 메우고자 했던 시인은 아예 공중을 껴입어 버리는 것이다. 다시 “그 손을 잡아 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라고 고백했던 「오늘도 사과」로 돌아가 보자면, 시인은 “내 머리를 모자처럼, 몸을 셔츠처럼, 다리를 바지처럼, 발을 구두처럼 공중에 벗어 놓”는 것이다. 주체를 공중에 벗어 놓자 기적처럼 침묵의 시간이 끝나고 언어의 시간이 돌아온다.


(줄곧 울먹이면서, 얼마나 달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달리고 달리다가 나는 결국 시간의 가장 막다른 절벽까지 오게 되었다.
기꺼이 나는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난생처음 높이를 느끼게 되었다.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순간, 나는 몇 겁의 시간을 그 자리에 걸려 있었을 공중을 껴입었다.


그 옷은 태아가 겨우 입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질식할 것 같았다.
몸을 줄이려고 몸 안의 울음을 다급히 쏟아내었다.
그리고 신생아처럼 작아진 몸에 연기처럼 흩어질 듯 엷은 살갗을 입었다.


줄곧 울면서, 수십 년을 달리다가 또다시 절벽 앞에 다다랐다.
절벽에서 절벽으로 이어진 외나무다리를 덜덜 떨며 건넜다.
수년 전 돌아간 아버지와 얼마 전 돌아온 딸이 내 양팔에 물동이처럼 매달려 있다.
나는 평균대 위를 걷듯 두 팔을 벌리고 건넜다.
절벽과 절벽 사이를 점점 투명해지는 다리로 건넜다.)


모든 사이를 잇는 투명한 문장.
해와 달, 밤과 낮, 공기와 공기, 바람과 바람, 비와 비, 지평선과 수평선, 오늘과 내일, 자정과 정오, 저녁과 새벽, 잎과 잎, 손과 손 등을 잇는 문장.


시간의 시작 이후 매 순간과 순간을 이어 온 무수한 문장들 중에
소멸을 앞둔 마지막 순간의 문장만을 우리는 읽고 있다.
시간여행을 마친 우주선처럼 잔뜩 녹이 슨 문장.
획 위에 까맣게 시간의 먼지가 쌓인 문장, 그래서 눈에 식별되는 문장.


시인은 가장 마지막 문장만으로 시를 쓸 수 있다.
- 「투명한 문장」 부분


살펴봤듯 시인은 거대한 상실로 발생한 실재의 구멍, 즉 공중의 틈새를 언어로 메우고자 했다. 쓰고 또 써도 백지인 노트 위에 쓰고 또 쓰고자 했다. 주체의 자리를 가슴이 아니라 사슴에게 양보하며, 애도를 방해하는 강과 창과 폭설을 거스르며, 공중에 자신을 바치고자 했다. 그런데 “막다른 절벽에서” 뛰어내려 “공중을 껴입”은 시인은 이후로도 “줄곧 울면서, 수십 년을 달리다가 또다시 절벽 앞에 다다”르고 만다. 그러나 시인은 이번에는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대신 “절벽에서 절벽으로 이어진 외나무다리를 덜덜 떨며 건”너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런 그의 양팔에는 “수년 전 돌아간 아버지와 얼마 전 돌아온 딸이” “물동이처럼 매달려 있다”. 요컨대 그는 절벽과 절벽 사이를, 앞선 슬픔과 뒤따를 슬픔 사이를, 생과 사 사이를 이으며 “평균대 위를 걷듯” 아슬아슬하게 건너고 있는 것이다. 이을 수 없는 것을 이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시인의 다리는 “점점 투명해”지고, 마침내 시인은 투명해진 몸으로, “모든 사이를 잇는 투명한 문장”으로, 쓸 수 없음에 대해 쓴다. 공백과 침묵으로 쓴다. 무(無)로 쓴다. 요컨대 우리가 읽고 있는 시인의 문장은 “소멸을 앞둔 마지막 순간의 문장”, “시간여행을 마친 우주선처럼 잔뜩 녹이 슨 문장”, “획 위에 까맣게 시간의 먼지가 쌓인 문장”, “그래서 눈에 식별되는 문장”, 즉 애도의 불가능성과 싸운 시간 끝에 남은 “마지막 문장”인 것이다.


이처럼 산 자들의 세계에 남겨진 “봉분”, “세상에서 가장 높은 / 망루”이자 “둥지”인 공중 위에 오른 시인이 있기 때문에,(「너의 나라의 나」) 공백이자 공허였던 공중에는 비로소 “먼지”가 쌓이게 된다. 절대로 메워질 수 없을 것 같던 무가 가까스로 유가 되는 순간이다. “공중을 깊이 찌른 듯 서 있는 망루 위에 사는 사람들”, 그러니까 공중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애도를 표하는 사람들, 그들의 얼굴 위에는 “자고 일어나면” “먼지가 떨어져 있다”. 땅과 하늘 사이에 놓인 공중을 지키는 이들의 눈썹이야말로 “먼지가 공중이라는 시간 위에 쌓이는 단 하나의 경우”인 것이다.(「먼지가 쌓이는 공중」) 따라서 가슴과 사슴의 관계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는, 애도의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뒤섞이며 함께하는 관계가 된다. “내 몸”이 “그의 유언”이었던 것처럼, “그” 역시 “내가 미리 남긴 유언”일 수 있는 것이다.(「반생」) 다시 말해 “죽은 사람들이 산 사람들을 기억하여 / 죽은 사람들이 산 사람들을 위해 내내 기도하는 계절”도 있다는 것이다. “산 사람들이” 차가운 광장에 모여 “죽은 사람들의 입술인 촛불에 입맞춤하고 있”을 때마다 “죽은 사람들” 역시 “산 사람들을 기억하여” 그들의 “파랗게 언 얼굴을 밤늦도록 호호 불어 녹이고 있”다는 것이다.(「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기억하여」) 그리하여 불가능한 애도를 계속하는 주체는, 투명한 언어로 생과 사 사이를 잇는 시인은, “죽은 사람 산 사람 다 같이 살아가는 이 시집 속을 한 걸음도 나가지 않기로 한다.(「나무는 나뭇잎이 꾸는 꿈, 나는 네가 꾸는 꿈」)


만말(Mahnmal)로서의 시


2002년 활동을 시작해 올해로 등단 20년차가 된 김중일의 여섯 번째 시집 『만약 우리의 시 속에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문학과지성사, 2022)이 올봄에 나왔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만약 우리의 시 속에 아침이 오지 않는다’고 해도 끝없이 이어지는 밤과 밤을 견디며 애도의 작업을 계속할 듯하다. 그는 이번 시집을 통해 “나무 관 속에 망자가 들어가”면서 시작되는, “마치 새로운 건전지를 끼워 넣은 듯” “전혀 다른 리듬으로 작동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해서 쓴다.(「시인의 말」) 예컨대 앞서 살펴본 글에서 중력을 거스르며 눈을 뜨겠다고 말했던 시인은, 이번에는 “오늘도 본 참혹한 장면들이 눈 밖으로 새어 나가 흩어지고 잊힐까 봐 밤이 오도록 꼭 눈 감고 있다”고 말한다.(「내 시인의 감은 눈」) 어느덧 목격의 시간이 가고 기억의 시간이 왔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의 시 속에는 여전히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호흡’하며 ‘반생’을 나눠 살고 있다. “오래전 수백 명의 들숨과 날숨을 삼킨 바다” 앞에 앉은 시인은 “한동안 밀려오는 파도에 맞춰 숨을 들이쉬고, 밀려가는 파도에 따라 숨을 내쉬”고 있다. 그렇게 “나의 숨은 더 이상 나만의 숨이 아니게 되”며, 산 자와 죽은 자는 “이렇게라도 서로의 몸에 서로의 숨을 채워 넣”을 수 있게 된다.(「바다와의 호흡」) 요컨대 이 시집의 발문을 쓴 박소란의 문장을 빌리자면, 김중일은 “산 자와 죽은 자를 함께 일으키는 방향”으로, “삶은 죽음을 위로하고, 죽음은 삶을 보살피는” 방향으로 애도의 시를 계속 쓰고 있는 것이다.(「발문 : 지독한 사랑의 술법」) 이렇게 ‘이후의 시’는 이후의 이후에도 계속된다.


마지막으로 ‘만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독일어에는 긍정적인 의미의 기념물을 뜻하는 ‘뎅크말(Denkmal)’이 있고, 부정적인 의미의 기념물을 뜻하는 ‘만말(Mahnmal)’이 있다. 만말의 대표적인 예로 독일의 조각가 군터 뎀닝이 주도해서 만든 ‘걸림돌’이라는 이름의 경고물이 있다. ‘걸림돌’은 나치 범죄에 희생당한 유대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념물로서, 거기에는 희생자의 이름, 태어난 해, 사망한 해, 끌려간 장소 등이 적혀 있다. 독일인들이 망각의 본능과 맞서 싸우는 방식이 이와 같다. 그들은 현재의 시간 속에 과거를 끼워 넣고 끊임없이 걸려 넘어진다. 그것을 불편으로 생각하지 않거나, 마땅히 감수해야 할 불편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기억은 행복한 추억뿐만 아니라 뼈아픈 반성과 성찰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고통과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을 외면하는 것은, 그 사건으로 희생된 이들을 위해, 혹은 그의 가족들을 위해, 나아가 우리 모두를 위해, 최후까지 맞서 싸워야 할 적이다. 어느 해의 4월 16일이었다. 나는 광화문 광장에서 피케팅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다짐이 적혀 있던 것 같은데, 어느새 피켓에는 ‘잊지 않았습니다’라는 고백이 적혀 있었다. 그 한 음절의 차이 때문에 흘러간 시간을 아프게 실감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언제고 다시 돌아오는 기억, 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304개의 ‘만말’, 304개의 걸림돌이 필요하다. 그날 이후 우리의 일상은 계속해서 무언가에 걸려 넘어져야 한다. ‘만말’로서의 시들 역시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오늘은 3,122번째 4월 16일이다. 이것은 문학적 수사가 아니다.














하혁진
작가소개 / 하혁진

문학평론가.


《문장웹진 2022년 11월호》


하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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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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