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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도착(perversion), 그리고 도착(arrival)

  • 작성일 2022-08-02
  • 조회수 2,492

[현장 비평]

《문장웹진》은 다양한 시선을 통해 폭넓은 담론을 펼칠 수 있는 ‘비평의 장’을 마련하고자
2020년 진행되었던 〈본격! 비평〉 코너를 정비하여, 2021년 4월호부터 〈현장 비평〉을 선보인다.
2022년 〈현장 비평〉은 신진 문학평론가 12명이 각자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주제를 정해 매월 1편씩 발표된다.






사랑의 도착(perversion), 그리고 도착(arrival)



전승민






무슨 말인지 알지
무슨 말이냐면
말하자면
다시 말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신호등을 건너면 보라색 별이 있다」 부분




1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2022, 민음사)는 시다. 이게 무슨 생뚱맞은 말이겠느냐 하겠지만, 말 그대로, 이 시집은 ‘시’ 그 자체다. 전통적인 시의 분류인 서정시, 서사시, 극시 등에 대하여 그 중 어디엔가 속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시’라는 말이다. 다르게 말하면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는 오늘의 서사시이기도 하면서 서정시이기도 하면서 극시이기도 하다. 상호배타적일 수 있는 표지들을 동시에 품을 수 있는 이 ‘시’는 분명 새롭다. 단지 새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유쾌하고, 끈적할 만큼 감각적이고, 시간과 공간, 그 사이에 선 두 사람의 관계를 물리학-시적 언어로 제시하는 진지한 사유와 동시에 과학, 문학, 철학이 모두 수렴하고 있는 단 하나의 지점, 바로 사랑으로, 우주 유일의 방식 곧, 최재원의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가 도대체 어떻게 새로운 빛나고 있는지를 보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자 의도라 하겠지만 그것은 평론의 언어로 일방향적인 제시를 통해 성취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독자의 옷깃을 부여잡고 텍스트 세계로 들어가 함께 따라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글은 최재원론(論)으로 작성되고 있는 동시에, 목차와 시의 순서와 쪽수가 정해져 있는 물리적인 한 권의 시집이 하나의 ‘시’로서 어떻게 읽힐 수 있는지 하나의 독해 가능성, 그 운동의 궤적을 추적하는 글이기도 하다. 한국 시 세계에 돌연 날아든 이 낯선 시인의 시집을 읽는 한 가지 방법을 함께 공유할 것이다.
본격적으로 책을 펼쳐들기 전에 몇 가지 염두에 둘 점을 미리 당부한다. 우리는 최재원의 시편들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시집’ 한 권을 읽는 것이다. 시집 전체는 하나의 서사시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를 읽을 때에는 책의 물성이 자아내는 선형성을 고려하며 읽어나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독서의 끝자락에서 다시 시집의 제목으로 회귀할 것이므로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비선형적인 것이다.) ‘선형성’이라는 말에서 눈치 챘을지 모르겠지만 시인은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원자들이 뻥튀기가 되어 파바팝팝 쏟아져서”, p.73)을 두루 이용한다. 이 ‘시’의 비밀을 푸는 중요한 열쇠는 물리학이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이 시집에는 상당히 많은 섹스가 나온다. 그리고 몇몇은 독자들에게 불쾌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염두에 두자. (하지만 나는 같은 이유로 이 시집을 여러분에게 반드시 올 여름, 소개하고 말리라 작정했다.) 덧붙이자면, 섹스는 이 시집을 읽어내는 데에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니 섹스 혹은 섹스로 짐작되는 장면이 나오거든 두 눈을 크게 뜨고 집중해야 한다.
우선, 시집의 비밀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궁극적인 질문으로 시작해보자. 매미는 왜 우는가? 어이없어 하면서 곧장 답을 말하려 하는 입술들이 보인다. 나도 안다. 물론 우리에게 이미 잘 알려진 생태학적 사실이 있지만,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가 제시하는 것은 그 자명한 사실과 더불어, 혹은 그로부터 연유한, 자명하지 않은 숨은 어떤 사실이다. 이 자명하고도 자명하지 않은 비가시적인 사실을 우리는 진실이라 불러도 될 듯하다.
이것은 내가 이 시집을 읽은(관측) 결과다. 당신의 관측 결과는 당연히 나의 것과 다를 것이다. 어쨌든 자, 이제부터 시작이다. 잘 따라오시라.




2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모든 텍스트가 내어놓는 수수께끼일 텐데 나름 독서력이 꽤 있는 독자라면 저 질문은 사실 어떻게 읽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라는 것을 이미 알 테다. 이 질문은 소설보다 사실 시 앞에서 훨씬 더 난해해진다. 소설은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어나가야 한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합의할 기본적인 원칙이 있지만, 시라는 것은 오히려 그런 원칙들로부터 도망가기 바쁜 것들이기 때문이다. 시, 특히 시집을 읽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일단, 반드시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되고, 오히려 그렇게 마구잡이로 읽을 때 발생되는 시적 매력과 아름다움들이 훨씬 더 빛날 때가 많다. 그런데 최재원의 첫 시집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는 시인이 차근차근 쌓아올린 시적 논리의 순서가 있어서, 우선 쪽수의 진행을 절대적으로 존중하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어나가야 한다. 하나의 서사시라고 말한 데에는 이러한 형식적인 선형성이 이 시집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는 비선형을 선언하게 되더라도, ‘비(非)-’와 만나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선형성을 먼저 만나야 한다. 그게 시 읽기에 도움이 된다. 시인은 친절하게도 먼저, ‘시’를 읽는 법을 1부에서 우선 제시한다.


기술1. 시에서 따옴표가 보이지 않아도 독자들은 그것들을 적재적소에서 살려내어 읽어야 한다. 「가장 아름다운 소년」(p.28)의 일부를 보자.


버스 출발하고
비닐에 든 것이 쾅 넘어진다
지팡이 탁 떨어진다


⓵앉으시소 출발합니더 일어나면 안 됩니더 앉으시소

⓷아니이 맨날 카드 안 보여주시잖아예 그래서 오늘 물어봅니다 그거 보여주셔야 됩니더 ⓸예 알겠습니다 앉으셔야 됩니다


아기가 버스라도 깨끗이 반을 갈라 두 동강 낼 듯 운다

―「가장 아름다운 소년」 부분


시를 보면 알겠지만 버스기사의 목소리는 버스 안 상황에 대한 서술과 같은 층위에서 큰따옴표 없이 이루어진다. 버스기사의 목소리가 직접 제시된(⓵) 이후 띄어지는 연(⓶, stanza)은 그냥 연 구분이 아니라 지팡이를 떨군 노인의 목소리가 음소거 된 부분이다. 이어지는 기사의 응답(⓷)을 듣고 우리는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연 구분이 없이 곧장 따라오는 기사의 말(⓸)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다. 단지 띄어쓰기 한 칸뿐이어서, 언뜻 보기에는 기사 외의 누군가의 목소리가 없었을 것 같은 그 한 칸 안에 노인의 주절주절한 대답이 숨어 있으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연필로 따옴표들을 붙여주며 읽으면, 우리는 극시(dramatic verse), 그러니까 인물의 감정과 사건의 서사가 한데 어우러진 한 편의 시를 읽게 된다. 최재원은 따옴표를 쓰지 않는다.


기술2. 최재원의 ‘소리’는 목소리의 발성과 귀로만 듣는 소리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눈으로 읽기에 그쳐서는 안 되고, 아이러니한 표현이지만, 무음으로라도 반드시 그 소리를 ‘재생’해야 한다. 왜냐하면 소리 즉, 파동은 고정된 입자가 아니므로 여기저기로 퍼져나간다. 그 진동, 울림의 목적은 재생(play)에 있다. 수록된 네 번째 시, 「신 선」(p.16)을 보자.


그 속에는 형광 개구리도 있고
하늘색 물잠자리도 있고 풀색 여치도 있고
온갖 젖어 살아 있는 것들이 기어 나온다
젖은 주황색 젖은 연두색 젖은 하늘색 위에
젖은 까만 점과 젖은 줄무늬


젖은 그런 것들이 뭐라고
눈이 시리다
젖은 그런 것들이 뭐라고


그런 것들을 나무껍질 같은 그런 껍데기 속에 기어코 가둬놓고
한밤중에도 그렇게 소리가 되었느냐
그토록 그토록 그토록 그토록


무심코 뱉어 놓은 내장 깊숙이 박힌 너의 젖은 눈
젖은 눈이 마주쳐 발을 헛디디었다
모든 것이 젖은 아스팔트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신 선」 전문1)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에 떨어진 에놀라 게이를 싣고 간 것도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비행기라는 것, 너도 알지?”
그러나 내 욕망은 확실히 사츠케를 거슬리게 한 모양이었다. 나는 사츠케의 말이 내 윤리의식을 겨냥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에놀라 게이를 만든 맨해튼 프로젝트의 일원 중 누구도 그것이 실제 히로시마로 갈 줄은 몰랐다는 것 (중략) 나는 이렇듯 표면이 아닌 이면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우리를 만나게 해준 건 전후 과학기술의 발전이라는 의미에서의 비행기가 아니라, 저들의 과학하는 마음, 그 자체에 가까울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183쪽)


우리는 먼저 ‘그 속’이 어디인지 궁금해진다. 그곳은 개구리, 물잠자리, 여치 등 “온갖 젖어 살아 있는 것들” 뿐만 아니라 점, 줄무늬 같은 기하학적 차원의 표현형도 젖은 채로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나무껍질 같은 그런 껍데기 속에” 누군가가 ‘가둬놓’은 것들이란다. 그런 온갖 젖은 살아 있는 것들을 가두어 놓았으므로 “한밤중에도 그렇게 소리가 [되었]”다고 추측한다. 그 ‘소리’는 “그토록 그토록 그토록 그토록” 하며 울려 퍼진다. 그러니까 이때 ‘그토록’이 가진 기의의 차원은 무쓸모다. ‘그토록’의 네 번 연속은 그 갇혀 있는 젖은 살아있는 것들이 내는 소리를 화자가 채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나무껍질 안에 가두어둔 것의 두 눈을 드디어 목격하고, 독자는 이것이 까만 두 눈의 매미가 나무에 붙어 가열차게 소리를 내고 있는 장면에 관한 시임을 드디어 추론하게 된다. “그토록 그토록 그토록 그토록”은 눈으로 훑고 지나가는 읽기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부분이다. 실제로 입술을 열고 발성하지 않더라도 입 속에서라도 그 소리들을 재생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읽’고, ‘너의 젖은 눈’의 주인공이 바로 매미라는 사실에 도달 할 수 있다.
이처럼 최재원의 시에서 존재자들은 소리 그 자체가 되고, 역으로 소리가 존재자가 되기도 한다. 또한, 마지막 행에서 그 젖은 “모든 것이 (…)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라는 서술이 가능함에서 알 수 있듯 매미가 울어대는 이 세계는 소리(파동)가 물질(입자)이 되는 양자역학의 세계, 즉, 시인의 ‘관측’이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경계를 작동시키는 그런 세계다. 아, 한 가지 작게 덧붙이자면, (이것은 최재원의 시를 읽을 때뿐만 아니라 다른 시들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지만) 기술3. 시를 끝까지 다 읽고 난 후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 본다. ‘신선’이라면 누가 신선인가? 형광 개구리와 풀색 여치와 까만 점과 줄무늬까지 모든 걸 다 ‘소리’로 나무껍질 안에 봉해놓은 매미가 바로 신선일 것이다. 더불어 우리가 시를 처음 읽을 때 알지 못했던 ‘그 속’에 대해서도 판정을 내릴 수 있는데, 그 속은 물리적으로 나무 안이겠지만, 그 물리적 장소가 고정된 위도와 경도를 가진 정점이 아니라 존재(이 세계에서는 파동으로 등치될 수 있는)의 진행적 상태, “그토록 그토록 그토록 그토록”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는 ‘상태’일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하고도 가장 아름다운, 기술4.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더 강력하게 말하는 인유(allusion)의 연상을 읽어내기.


보닛 위에 날개 한쪽
순순히 올려놓고 너는
온 데
⓵간 데

―「모조」 전문


1) 본문에서 밑줄이나 강조, 기울임체, 번호 표시 등의 부가적인 표시는 모두 필자의 것이다.


시집을 여는 첫 번째 시인 「모조」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마지막 행을 무엇으로 보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너’는 매미가 아니라 그저 날개가 두 쪽 이상인 어떤 물체라고 추론되겠지만, 뒤이어 시편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이 ‘너’가 매미였음을 쉽게 짐작하게 된다. 만약 마지막 행을 ⓵로 하여 이 시가 끝난다고 읽으면, 아마도 독자는 시가 다 끝나지 않았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행이 ⓶라고 간주하고 읽으면, 독자는 시 한 편을 온전하게 읽었다고 느낄 테다. ⓶에는 “없다”라는 말이 투명하게 사라져 있는 부분이고, 실제로 한국어의 자연스러운 구문으로 ‘온 데 간 데 없다’라는 문장이 쉽게 떠오르기(allusion)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없다’는 기의를 ‘없다’라는 말의 기표로 적지 않고 그 ‘없음’을 실제로 없애버렸다는 점이다. 독자가 ⓵에 머무른다면 아쉽겠지만 ⓶의 공백까지 도달했다면 이때 오히려 없어진 ‘없음’은 훨씬 도드라진다. ‘없음’의 소리가 오히려 음소거의 상태에서 스스로, 말없이 체현하는 신비한 순간이다. 투명한 ⓶의 공간에서, 기의를 견인하던 기표의 가시성은 물러나고,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던 기의의 부분이 언어적 부피감으로 부조되며 기표의 비가시성까지도 포함하게 된다. 특히 직접적인 언표로 제시하기 어려운 것들은 위처럼 기표와 기의의 견인관계를 역전시키는 기술을 통해 그려진다. 섹스가 딱 그렇다.2)


*


시인에 따르면, 28쪽부터 펼쳐지는 이 소리풍경(soundscape)들은, 매미가 남긴 말이라고 한다.


몇 번의 소리와
몇 번의 날갯짓이 그 안에
아직 남아 있을
풀 볼륨의 그 녀석을
그서석버서석콰직쿠지지끼약꽥콰지지직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우리의
몸이 뒤바끼고 말았다
저……


여기서부터는 뒤바뀐 그들이 남긴 말

―「FULL VOLUME」 부분


2) 4부의 <구멍을 찾을 수 없는 나사>의 ‘나사’들도 남성 성기(penis)를 은유하는 이미지에서 파생된 기표다. ‘나사’는 영어로 ‘screw’인데 영어에서 “screw you!”는 곧 “fuck you!”와 같은 말이다.




3


최재원이 축조한 시적 논리를 보다 명료하게 파악하기 위해 알아야 할 몇 가지 공리(axiom)들이 있다. 물론 이 공리들은 귀납적으로 발견된 것이며 우리는 이 공리들을 습득해나가는 동시에 그 공리들이 출현한 시편들의 구체적인 읽기를 시도할 것이다.


정리1. ‘비누’는 ‘불결’한 것을 닦아낸다.


‘비누’가 등장하는 대목들을 몇몇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하루에 한 번
가끔 항문에 손을 넣어 씻을 때
오직 그것만 생각한다 주름과 주름 같은 털
손가락 사이의 비누, 최대한 빨리 손을 씻자, 이런 게 영이다

―「이런 게 0이다」 부분 (p.46)


모서리를 까뒤집은 곳의 냄새가 제일 심하다
다 같이 묵던 홀리데이 여관의
계면활성제 과탄산수소 같은 것들의 냄새
태어나면서부터 삭기 시작한다

―「삭는 육각형」 부분 (pp.48-49)


K의 유일한 기쁨은 거품목욕이었다. (…) 거품목욕을 하면 항문이 말랑말랑 해진다. (…) K는 어느 순간부터 애널 섹스를 꿈꾸고 있다. 멀쩡한 보지가 있는데 왜 애널 섹스를 꿈꾸는지 모를 일이다. (…) 거품은 전 주인이 깨진 곳에 붙인 알루미늄 테이프도 (…) 사라지지 않는 물때도, 모조리 덮어 버렸다. 욕조에 락스를 가득 채워놓고 일주일을 기다린들, (…) 이미 일부가 되어버린 곰팡이가 이전으로 돌아갈 리 없다

―「거품목욕」 부분 (pp. 69-70)


‘비누’는 시집에서 비누와 ‘계면활성제’, ‘과탄산수소’, ‘락스’ 그리고 ‘거품목욕’ 등으로 표상된다. 현실에서도 그러하듯 ‘비누’가 닦아내는 것은 더러울 수 있는 신체, 항문, 혹은 모텔방, 욕실의 물때와 곰팡이다. 요컨대 비누는 ‘불결’한 것과 대결한다. 그렇다면 이 ‘불결’한 것의 표상들은 무엇인지가 관건이다. 화자는 대놓고 말한다. “귀에 닿는 너의 숨소리가 불결하게 느껴진다.” (p.56,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 표제작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에서 ‘너’는 ‘나’와 섹스를 하는 상대다. (사정에 대한 강박으로 미루어보건대 ‘남자’다.)
이 시에서 ‘나’의 성별이 무엇인지는 모호하게 다루어지지만3) 사정(ejaculation)에 대한 사정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나’는 여성이고 ‘너’는 남성일 확률이 높다. 이성애 섹스에서 여성 사정(female ejaculation)은 분명 있긴 하지만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고, 여자는 남자가 제발 사정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대부분의 경우 남자의 일방적인 쾌락곡선 뒤로 여성의 쾌락곡선이 별 수 없이 따라간다. (“내가 사정하지 못할 것은 뻔했고, 나는 그가 사정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p.58) 그러니 이 여성 화자가 토로하는 “그를 끌어안고 싶은 마음과 이대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p.58) 그리고 그 끝에서 “나는 자꾸 역겨워진다. 역겨워하는 내가 역겹고 자꾸 구토할 것 같다.”(p.58)는 고백은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나’에게 ‘너’와의 섹스는 불결하다.
이 불결함과 계면활성제가 본격 얽혀있는 대목이 있다. (「소리」, p.132)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가 이성애 섹스의 행위 자체를 말했다면 「소리」는 보다 미시적인 세계로 렌즈를 들이댄다.


3) ‘누나’라는 호칭만으로 성별을 단언할 수는 없다. 게이들이 부르는 ‘언니’라는 호칭이나 부치가 사용하는 ‘형’이라는 말을 떠올려보라. 멀리 갈 것도 없다. 운동권에서 ‘형’이 사용되던 화용을 떠올려보라.


조각 같은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물처럼 물컹물컹한 올챙이
쏟아지는 올챙이 떼
내장이 소용돌이치며 조신하게 노를 젓는다
물살이 센 곳에서는 꼬리가 펄럭인다
(…)
눈을 마주치면 그와 나 사이에 놓인
로 된 모양
if (surface_tension > weight)
올챙이가 쏟아진다
(…)
하수구 구멍 속으로,
배로 싱크를 기어,
(…)
숨 쉬는 내장 물방울 끈적이는 삶
시크리션

―「소리」 부분


섹스 중에 떠오르는 ‘올챙이’의 이미지, 그리고 ‘펄럭이는 꼬리’가 연상시키는 것은 정자(sperm)뿐이다. 앞의 시에서 사정을 ‘사정’이라는 기표로 적어 넣었다면 이 시에서 그것은 역동적인 장면으로 묘사된다. 이 ‘끈적이는 삶’이 받아드는 단어는 ‘시크리션’(secretion, 분비물)이지 익스크리션(배설, excretion)이 아니므로 더더욱 정액(semen)에 가까워진다. 만약 독자들을 당혹케 단 하나의 행이 있다면 아마도 높은 확률로 영어와 부등식으로 이루어진 저 행일 텐데,


if (surface_tension > weight)


이 조건문은 표면장력에 관한 것으로 약간의 과학 지식이 필요하다. 아주 거칠게 말해 표면장력은 액체의 표면에서 당겨지는 힘(tension)이다. 가령, 물은 표면장력이 큰 액체인데, 물 분자는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강해서 서로 잘 모이고, 그래서 물과 공기가 닿는 표면에서는 공기 분자와 접하고 있는 물 분자는 물 안쪽으로 더욱 강하게 모이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렇게 경계를 형성하는 물 분자들은 공기와의 접촉을 최소화 하려고 몸을 둥글게 말아 구형(sphere)을 만든다. 이때 이 물 표면을 평형상태로 유지하는 힘이 표면 장력이 된다. 흥미롭게도, 물의 표면장력은 계면활성제, 다시 말해 ‘비누’에 의해 약해지고(그래서 옷의 찌든 때가 비누칠 후 헹구는 과정으로 빠지는 것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계면활성제의 분자 구조다.


올챙이 사진



‘올챙이’―그러니까 동그란 머리(물을 좋아하는 부분)와 막대(기름을 좋아하는 부분)는 정자의 구조와 똑닮았다. 부인하기 어렵다. 다시 「소리」의 인용부분으로 돌아가 보면, ‘그’와 ‘나’ 사이에는 ‘물’이 놓여있고 그 다음 제시되는 조건문을 이제 풀어보면, 그 물의 표면장력이 계속 유지된다는, 다시 말해 ‘그’와 ‘나’는 섞이지 않는 상태라는 뜻이다. 그러다가 곧장 이어지는 “올챙이가 쏟아진다”는 그 평형 상태가 깨지고 섞이게 됨을 보여준다. ‘나’의 몸 안으로 ‘올챙이’가 들어오는 역동적인 운동은 파동의 변화(“숨을 곳 없는 소리의 공격/귀를 감아도 배 속에서 들려오는 간섭과 섭동4)” p.135)로 부연된다. (“삐등삐등 울부짖는다 소리 하나 없이 고막을 찢는다” p.134)
비누(계면활성제)가 정자의 구조로 상호치환되는 것은 「호주머니 속에 굴러다니는 것들」(p.104)에서도 마찬가지다. 호주머니 속에는 “흐른 시간/녹은 초콜릿/짝이 맞지 않는 손들”과 함께 “고이 접은 자지들”이 대놓고 있다. 네 종류의 물건이 들어 있는 셈이지만 사실 앞의 세 개는 마지막의 ‘자지’의 유표(marking)를 은폐하기 위해 심겨진 연막이다. 주머니에 곰팡이5)라도 피면 큰일이므로 화자는 “웬만해서는 썩지 않는 것들만 넣으려고 한다”면서 “수분은 최대한 말려서/주로 기름기 있는 것들만/엄선해서 넣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게다가 주머니 안의 것들을 “상온에서 녹”기 때문에 “범벅의 열이 나는 그것을 깡깡 언 시간과 함께 내 호주머니에 넣어 주었”다고도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이 상황을 시각화해보면 저 분자구조에서 동그란 것을 떼어낸 후 열이 나는 막대를 그대로 얼려서 주머니에 넣은 셈이다. 고환 없이(여성에게 쾌락을 주는 신체부위가 아니라는 점에서) 발기한 상태의 성기(penis), 그러니까 1연에서 말한 그대로 정직하게, “고이 접은 자지”를 주머니에 넣어 다니는 화자인 것이다.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에서 ‘그’가 사정하지 않기를 바라던 ‘나’의 소망을 떠올려 보자.)
한편, ‘불결’한 것과 그것을 씻는 ‘비누’의 분자가 거의 비슷한 꼴이라는 점은 꽤 아이러니하다.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에서 여성 화자가 이성애 섹스에 대해 보이는 반응, 거부하고 싶고 불결하다고도 느끼지만, 그러니까 정자의 기호가 비누의 기호와 계속해서 연접하고 스스로가 계속해서 역겨워지는 아이러니 속에서도 성적 욕망을 부정할 수 없는 ‘나’의 현실도 동형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거품목욕’으로 ‘항문’을 씻는 K가 마주하는 아이러니는 조금 다른 종류의 것인데, 그는 자기도 모르게 ‘멀쩡한 보지’를 놔두고 ‘애널 섹스’를 욕망하는 자신을 감지한다. 독자는 비누는 정자의 분자 구조와 거의 동형 구조를 가진다는 것을 안 후에 이 시를 읽게 되므로 (표제작이 「거품목욕」보다 앞쪽에 실려 있다.) 거품과 말랑해진 항문을 두고 우리는 비누거품 대신 ‘정자’의 기호를 대입하게 된다. 이때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정자와 항문 입구, 그러니까 남성 성기와 항문―퀴어한 섹스다. 이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섹스의 구체적인 행위 그 자체이지 행위주체들의 정체성은 하등 중요하지 않다. 자기혐오 속에서도 섹스를 거부할 수 없는 ‘나’도, 비누거품 속에 앉아 애널 섹스에서 오는 오르가즘을 상상하는, 보지를 가진 ‘나’도 모두 퀴어한 욕망의 정동을 보여준다. 이 시집에 나오는 섹스들은 모두 행위 당사자의 정체성과 무관하게 퀴어하다.


4) 섭동(pertubation)은 천체의 평형 상태가 다른 천체의 인력에 의해 교란되는 현상을 말한다.
5) 곰팡이는 정자가 포자화된 것의 이미지로 시편들에서 드러난다. 가령, “아무것도 자랄 수 없던 내 몸에/그래도 곰팡이는 피는구나”(「배양」, p.91)




4


정리2. ‘촛불’과 ‘촛농’의 관계는 ‘불결’한 것의 상태변화다.


‘케이크’가 나오는 시가 두 편 있다. 케이크에는 항상 타고 있는 초가 꽂혀 있으니 그 케이크는 생일케이크다. 두 시는 서로의 독해를 상호 보완하는데, 특히 먼저 제시되는 「저녁시소」가 나중에 나오는 「그녀가 가져온 케이크에 촛농이 흘러넘치도록 나는 사족을 다한다」를 읽는 데에 필요한 정보들을 제공해준다.
우선, ‘케이크’란 무엇인가? 그건 ‘몸’이다. (“촛불 주위엔 작은 따뜻한 물빛보라/그중에서 제일 영원한 것은 케이크겠지/그건 내 몸이었다 네 몸이었다 했지”, 「저녁시소」, p.42) 촛불은 켜졌다 꺼질 수 있으므로 그걸 지지하고 있는 케이크가 ‘몸’인 것이다. 그렇다면 촛불은? 촛불의 생김새를 떠올려 보라, 우리는 앞선 정보들과의 연관 속에서 그 유사성을 쉽게 포착할 수 있다. ‘비누’와 ‘정자’의 분자구조와 ‘촛불’은 또한 몹시 닮았다. 이때 타오르고 있는 ‘촛불’은 초의 상태를 고체에서 액체로, 그 후 필연적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촛농’은 역으로 액체가 다시 고체로 굳는 변화를 담지한다. 비누와 정자의 분자구조와 더불어 고체와 액체 사이의 상태변화가 가능한 지점은 사정(ejaculation) 뿐이다. 그래서 타오르는 초에서 녹아내리는 ‘촛농’은 사정 후 정액이 굳어가는 이미지와 자연스럽게 연동된다. 이제 시 제목의 나머지 부분 “흘러넘치도록 나는 사족을 다한다”에서 ‘사족’은 ‘사정’과 겹쳐지기에 전혀 무리가 없다. (시인은 언어든 사물이든 그것의 드러난 기표의 연쇄로 놀이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 본격 시 읽기로 넘어가 보자. 「그녀가 가져온 케이크에 촛농이 흘러넘치도록 나는 사족을 다한다」는 수록된 시들 중에서도 읽기에 좀 더 복잡하다. 앞서 우리가 배운 기술 네 가지 모두를 동원해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의 상황은 과거의 ‘사족’과 그를 지나온 현재에 가까운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그 구분들의 명확한 표지가 없으므로, 순서대로 시를 읽어가는 수행 과정에서 찾아내야 한다. 이때 과거의 ‘사족’은 ‘사정’(affair)으로, 2연과 4-5연, 그리고 7-8연이 해당한다. (1연과 3연은 서술-관찰자가 현재 시점에서 독자에게 상황을 알려주는 지문이다.) 그리고 관찰되지 않는 서술자 ‘나’가 현재에, 마치 무대 위의 배우처럼 독자에게 발화하는 부분은 9-10연(방백)과 6연(독백)에 해당한다. 가장 현재의 시점에 가까우면서 화자가 독자에 관한 의식 없이 발화하고 있는 6연을 먼저 보면, ‘나’는 “너와 시를 쓰고 싶어”(p.111)하고 ‘나의 첫 누나’를 추억하고 싶어 한다. ‘첫 누나’는 “아가페적인 사랑을 처음 내게 베푼 누나”로 ‘나’가 DVD방에서 처음으로 섹스한 상대다.


아가페적인 사랑을 처음 내게 베푼 누나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막 신입 사원이 되어
고등학생인 내게, 나이키 신발을 사 줬다
DVD방에서,
(…)
내 바지 속에 손을 넣었다 이런거 해 봤어?
토할 것 같았지만 참았다 눈을 떠 보니
나는 아파트 안의 놀이터
녹은 촛농 속에 있다
촛농 위에서 누나가 묻는다

―「케이크에 촛농이」 부분


‘나’가 호칭 ‘누나’를 발화했으니 ‘나’는 남자 고등학생일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런데 이 추론은 반례에 의해 무너질 수도 있는데, 앞서 말했듯 ‘누나’나 ‘언니’, ‘형’이라는 호칭 자체가 발화자와 청자의 섹스와 젠더를 완벽하게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확실한 사실은 ‘나’는 고등학생이고, ‘나이키 신발’을 선물 받았다는 것인데 나이키 운동화는 여자든 남자든 모두가 착용할 수 있으므로 추론을 강화하기에 부족하다. 조금 더 강력한 대목으로는 ‘누나’가 ‘나’의 바지 속에 손을 넣는 장면인데 그 바지 안에서 일어난 일이 handjob(손으로 남성 성기를 자극하기)인지 fingering(손가락으로 여성 성기를 자극하기)인지는 우리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일단, 이 ‘아가페적 사랑’은 ‘나’와 ‘누나’의 성별정체성과 무관하게 미성년과 성년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금기시되며, 퀴어하다. 이 퀴어한 에너지는 금기시 되는 리비도의 충전과 함께 상승하는데 그 금기가 바로 과거의 ‘사족’으로부터 온다.
1연에서, ‘나’는 ‘나’를 사랑한 중학생 소녀(A)에 의해 처음으로 ‘몸’(케이크)을 갖게 된다. (이 세계에서 몸은 사랑을 통해서 형성된다.) 그런데 소녀가 내게 준 편지는 섹스를 그저 운동(exercise)으로 여겨도 될 만큼 유혹적인 말들로 가득했고, “그래서 무서웠고 나는 촛불을 모조리 [끈]”다. 그가 준 ‘몸’(케이크)에 붙은 불을 ‘나’의 숨으로 연소시키는 것은 어쩌면 ‘사랑’하는 행위의 은유로 읽을 수도 있을 테다. 분명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느낀 것 같다. 어린 ‘나’는 엄마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4연의 1행에서 우리는 기술1.을 적용해야 한다. 6연은 전체가 따옴표 안에 들어간다.) 소녀는 사라진다. A가 사라진 것이 ‘나의 엄마’ 때문인지 ‘개네 엄마’ 때문인지 알 수 없는데 이유는 2연에서 찾을 수 있다. 2연의 마지막 단어인 ‘보내던’이 수식하는 것이 1연의 ‘나’일 수도, 혹은 3연의 ‘그’(소녀)일 수도, 동시에 둘 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들은 중학생들의 강력한 대타자다.)
놀이터에서 ‘촛불’을 불어 끄는 행위는 입술을 내미는 행위로 구체화된다. ‘나’와 A는 놀이터에서 키스한다. (“촛불을 간신히 불어 끈 나의 입술에/같은 모양으로 만든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p.111) 그런데 이 사랑의 행위는 설렘이나 행복이 아니라 두려움과 무서움의 정동 속에서 태어난다. (“이미 빛은 저물었지만/누가 보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은 없었고/덜컥 겁이 났다 겁이 난 이상/아무도 보지 않았더라도 누가 본 것과 다름 없었다”, p.111) 감시당하고 처벌 대상이 되는 사랑은 퀴어하다. 그러니, 나이키 신발을 선물 받고 ‘누나’의 손이 제 바지 속에 있는 ‘나’가 만약 여성과 남성 둘 중 하나의 젠더를 가진다면, 아마도 ‘나’는 여고생일 거라는 추론이 강화된다. 학업을 이유로 여중생과 남중생의 키스는 금기시될 수도 있겠지만, 익명의 누군가의 시선을 감시의 시선으로 느끼고 두려워할 정도는 아니다. 이성애와 동성애가 ‘놀이터’에서 느끼는 시선의 압력과 강도는 아주 많이 다를 테다. 누군가에게 목격 당했다는 그 자체로 죄의식을 가지려면 연애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존재 그 자체가 금기시 되어야 한다.
7연과 8연은 기술1.이 또 한 번 적용되는 부분인데, 7연의 목소리(아마도 ‘나’의 것)와 8연의 목소리(아마도 ‘엄마’의 것)는 서로 다르다. 아마도 중학생 딸(‘나’)이 여자 아이와 입을 맞췄다는 사실을 들은 엄마는 ‘나’를 추궁했을 테고, 나는 그건 ‘아가페적 사랑’이었다고 항변하지만 엄마에게 먹힐 리가 없다. (“그만 좀 울어 뭘 잘했다고 울어” p.112) 시 「케이크에 촛농이」에서 ‘시 쓰기’의 행위는 그러므로 말 그대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섹스와 다름없음을 우리는 이제 안다. (“나의 첫 누나를 추억하고/뭔지 알지?”) 요컨대, 미성년의 사랑, 여자가 여자에게 입 맞추는 사랑을 아무리 감시하고 금기시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억압되지 않는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면, (기술3.) ‘나’는 현재형으로 여전히 “촛농이 흘러넘치도록 나는 사족을 다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더불어, 사족(redundancy)은 사정(affair)과 사정(ejaculation)으로 분화되고 한데 뒤섞여 있는 양자적 상태6)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자적인 상태는 ‘놀이터’에서 실상 더 잘 드러난다. 「저녁시소」를 보자.


어둠 전에 저녁이 내린 놀이터에서
(…)
소년이었다 소녀였다 한다
쪽지 속엔 너의 빼곡한 입술 볼에 와 닿았다 떨어진다
(…)
촛불도 꺼지고 우리는 연기처럼 사라져
우리는 아직도 태어나는 중인데
소녀였다 소년이었다

―「저녁시소」 부분


앞에서 우리 본 사랑이 퀴어했다면, 그것은 소녀(성) 혹은 여성(성)을 해체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의 자연스러운 현재적 수긍을 통해 그것을 소년(성) 그리고 남성(성)과 함께 양손에 오롯이 들고 그 정체성들을 차라리 ‘시소’처럼 운동시켰기 때문이다. 요컨대 규범성을 해체하는 논바이너리(non-binary)의 퀴어함7)이라기보다 오히려 양성성(bisexuality)의 퀴어함에 가깝다. 최재원의 세계에서 퀴어의 분자구조는 해체되지 않고 단단히 결합되어 있다. 오히려 상식적으로는 동시적 공존이 불가능해보이는 정체성의 가치들이 현재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양자역학적으로 퀴어하다. ‘비누’와 ‘불결’(정자)한의 분자 구조가 남성 성기(‘촛불’)와 외형적으로 유사했지만 소년이 소녀가 되고, 소녀가 소년이 된다면 이 ‘촛불’의 쾌락, 촛농이 소녀와 여성의 것이 되는 것도 당연히 가능하다. 최재원의 시 세계가 발생시키는 퀴어함은 몹시, 양자적인 퀴어함이다. ‘비누’와 ‘불결’의 분자구조가 동형인 아이러니가 가능한 것도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6) 양자적 상황에서는 상호배타적인 가치들이 동시에 공존할 수 있다.
7) 해설을 쓴 소유정 역시 「저녁시소」에서 퀴어한 가치를 읽어냈는데 “소년이었다 소녀였다”하는 부분을 “이분법적인 성별의 굴레에 갇히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나’를 단 하나의 존재로 규정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귀속을 거부한다.”(p.217)며 이를 “탈신체의 욕망”(p.219)과 연결해 젠더퀴어와 안드로진으로 읽어냈다. 고전역학의 세계에서는 ‘소녀’와 ‘소년’이 동시적으로 성립 불가능한 가치지만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두 가지 모두가 공존하는 것은 가능하며, 꼭 하나의 상태로 고정될 필요는 없어진다.




5


그러므로, 가장 아름다운 소년은 소녀다.


*


물론, 여기에도 고전역학의 세계는 있다. 「자수」를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나’의 젠더 정체성은 오직 하나만 할당될 수 있다.


그러나 한자리에서 이십몇 년을 장사한 사람답게 주인아저씨는, 아이고, 어떻게 저렇게 대견한 아들을 두셨어요? 하며 아첨하는 사람을 능숙하고 완벽하게 연기했다. 엄마는 도둑 딸이 아니라 대견한 아들로 둔갑한 나를, 내가 있었던 자리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자수」 부분



샤프심을 훔쳐놓고 제 발로 가서 정직하게 자수하는 ‘나’는 주인아저씨에게 ‘대견한’ 아이고 대견한과 연관 관계(genetic linkage)에 있는 ‘아들’이라는 가치를 자동으로 부여받는다. ‘나’의 생김새나 목소리 그런 것에 의한 판별이 아니라, ‘정직’과 ‘거짓’이라는 윤리적인 위계의 이항 대립 구도 속에서 ‘정직’이라는 가치와 결탁해 있는 남성성의 기표를 함께 수여받은 것이다. 실제로인 ‘딸’인 내가 ‘아들’로 ‘둔갑’했음에도 이는 전혀 퀴어한 변화가 아니다. 오히려 ‘정직’을 남성적 기표로 강력히 부착하고 ‘거짓’과 ‘여성’을 접착시키는 전통적인 여성혐오의 기호화 과정이다. 이를 ‘흐뭇하게’ 은폐하고 ‘자수’하지 않는 ‘엄마’는 고전역학의 기본 원리다. 사물의 위치와 속도를 알면 그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명확한 인과율의 세계. 물질의 입자성과 파동성 모두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관측’으로 물질을 명징한 사물로 모두 고정시켜버리는 힘, 경계와 모호한 가능태를 품고 살아가는 퀴어한 양자적 세계를 밀어내는 힘 말이다.
어쨌든, 이 세계는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세계가 함께 있고, 비-퀴어와 퀴어가 한데 섞여 살아가는 세상이다. 고전역학의 유년을 지나, 녹아내리는 촛불처럼 두 가지 양태가 뒤섞인 불안한 양자 상태의 성장기를 지나, 지금-여기, 그리고 시집의 문을 열었던 매미가 가열차게 우는 여름이 지나간다. 「너는 상」을 보자.


상 너머8) 움직이는 그림자로서의 너
그림자 없는 주인으로서의 너
터럭이 나무 위로 삐죽삐죽 대고 있다.
이제 마지막 레몬색 늦여름
은행나무 여린 꼭대기 가지에
앉아 보려고 한 가지에서 허우적 다른 가지에서 허우적 은행에게는 너무 무거워 발을 자꾸만 헛디디고 긴 날개를 왼쪽으로 펼쳤다 고개를 내렸다 대각선으로 쳐들었다 딛고 섰다 날갯짓을 한다
(…)
허옇고 대중없이 가깝고 먼 하늘에
새들이 움직일 때만 직선의 삼각형 두 쌍이 퍼뜩,
(…)
직선으로 솟아올랐다, 비선형으로 다른
면을 탈 때, 먼 대각선으로 헤엄칠 때,
짧은 머리와 긴 꼬리와 삼각형 두 개,
상에서 나온다, 문득
불쑥 은행 레몬 속에서

―「너는 상」 부분


그 어떤 상(image)의 맺힘도 또는 상상도 아닌 이 실재하는 매미는 짧은 머리와 긴 꼬리, 그리고 그 양쪽으로 삼각형 두 개를 날개로 삼는다. 짧은 머리와 긴 꼬리는 ‘비누’, ‘불결’한 것 그리고 ‘촛불’의 기표다. 그것은 혐오와 욕망이 동시에 뒤얽혀 있는 퀴어한 사랑의 분자구조다. 그것을 달고 매미는 양쪽에 두 삼각형을 단다. 삼각형시간이다.9) 양자적 세계를 구성하는 시간의 한 단면이다. (“한 번의 반짝임에 달 하나가 있는 걸까”10), 「은색 그물인 달」, p.166) 퀴어의 리비도와 부착한 매미의 두 날개―시간의 비행은 이제 어디로 향하는가. 날개의 직선은 그냥 직선이 아니다. 삼각형의 세 꼭짓점은 각각 이 지구의 중심, 그리고 ‘나’와 ‘너’이며 도형의 빗변―‘나’와 ‘너’를 잇는 직선은 다만 우리가 함께 딛고 있는 세계를 연결한 곡선의 유클리드적인 표현이다.11) 이제 마지막으로 당도한 시, 「그대여」를 봐야 할 때가 왔다. 시집의 마지막 시, 시집이라는 서사적 물성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우주, 우리는 그 우주의 끝을 향해 점점 내달린다.12) 달려가고는 있지만 이 운동은 벗어나는 탈주가 아니라 오히려 ‘너’를 포섭하는 운동이다. 매미는 그 자체로 ‘너’를 품은 ‘나’가 된다. “비선형으로 다른 면을 [타]”(p.199)는 이 비행은 시인의 말대로 “궤적만이 의미를 가진다.”(「말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p.188) (“위치는 그대로지만 일은 직선거리 두 배 이상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p.188) 이 경로의 궤적, 곡선이 최단경로-직선인 이유는 지구가 자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건 다시 말해 ‘내’가 ‘너’에게 이르기 위한 길은 오직 단 하나 뿐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다시 말하자면 그건, ‘내’가 ‘너’에게 이르기 위한 길이라면 그 길은 가장 빠른 길일 것이리라는 말이다. 여름 내내 연인을 찾아 울던 매미는 뒤바뀌었던 몸(「FULL VOLUME」)을 다시 내어주며, 인간의 소리(파동)를 빌린다. 양자적 세계에서 다시, 고전역학의 세계다. 시 내부의 시공간과 그를 읽고 있는 독자가 처한 시공간의 좌표는 ‘지금-여기’로 고정된다.


8) 제목 “너는 상”과 1연을 같이 붙여보면 “너는 상상 너머 움직이는”으로 시작하는 새로운 문장을 얻는다. 그럴 경우 ‘너’(매미)는 ‘상상 너머에서 움직이는’이라는, 상상(계)을 초월한 실재계에서 살아가는 ‘너’라는 의미를 획득한다. 반면, 제목과 첫 연을 붙여 읽지 않을 경우, ‘상 너머에서 움직이는’ 그러니까 ‘상(image)’―실제(계)에서 빛 등에 의해 생성된 이미지로서의 ‘너’(매미)를 뜻하게 된다. 두 가지 의미 모두 역시, 동시적으로 성립가능하다. 최재원의 세계에서 매미는 온 몸을 진동시키며 내는 소리로서 자기 실존을 입증한 존재다. 매미는 화자의 상상도, 어딘가에 맺힌 부가적인 이미지도 아닌 확실하게 실재하는 것이다.
9) 「삭는 육각형」(p.48)에서 화자는 “시간을 보았다/그것은 육각형이었다/세 개의 기둥에 64개의 시간을 옮겼다”라고 서술한다. 4의 3제곱인 64(=4×4×4)를 3개의 기둥에 담았으니, 시간의 단면, 이차원 도형으로서의 모습은 각 꼭짓점의 값을 4로 갖는 삼각형일 것이다. “64개의 시간”, “64개의 땅이 둘로 갈라졌을 때/나는 양쪽에 발을 딛고 있었다”는 화자는 “한쪽 땅에는 온갖 것들이 자라고/다른 쪽 땅에는 다른 온갖 것들이 자라고 있었다”고 진술하며, 양자적 세계의 면모를 기록한다.
10) 양자적 세계에서 관측 이전의 세계의 상태는 알 수 없음에 대하여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물었다. “만일 내가 달을 보지 않으면 달은 거기에 없는 것일까?”
11) 측지선(geodesic)은 지구(sphere-earth) 위의 두 지점을 잇는 가장 짧은 경로로, 휘어진 (시)공간에 대하여 사람은 직선으로 느끼며, ‘최소작용의 원리’에 의해 그 경로(입자)의 궤적(곡선)은 길이가 최소화 되는 방향으로 생긴다.
12) 「그대여」가 시집의 가장 마지막에 배치된 이유는, 시를 읽는다는 것은 곧 독자가 시의 세계를 ‘관측’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짐작해 본다. 서사의 종결, (임시적이더라도) 끝이라는 좌표의 고정은 독자의 읽기-수행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 ‘관측’의 결과는, 영원히 사랑하는 두 사람의 운동이다.


널 뭐라고 부를까


너는 소녀였니
너는 어린아이였니
우린 한 번이라도 애였니
나는 소녀였니
나의 어린 그대여
아직 오지 않은
널 뭐라고 부를까

―「그대여」 부분


소녀이면서 소년이었던 ‘어린 그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지금-여기’는 고전역학의 세계의 좌표이기 때문이다. ‘나’의 관측에 의해 ‘너’는 유일한 입자로 정해질 테지만 “아직 오지 않은 [너]”는 관측 이전의 세계에 있다. ‘나’는 ‘너’에 대해 계속해서 말한다.


너는 놀이터에 떨어진 케이크
너는 찢어진 편지
너는 나의 찢어진 입술
너는 나의 찢어진 기집애
나는 매일 여기로 돌아와

―「그대여」 부분


‘놀이터’는 양자적인 퀴어함, 리비도로 충만했던 장소이며 ‘너’는 그곳에 영원히 정지해 있는 ‘몸’(“떨어진 케이크”)이다. 섹스보다도 관능적이던 ‘편지’와 ‘촛불’을 끈 후 맞댄 ‘입술’이자 ‘기집애’인 ‘너’는 “찢어진” 상태다. 과거의 ‘놀이터’에 ‘너’는 고정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여기로 돌아와”야만 한다. ‘엄마’의 금기와 ‘아빠’의 차단(“아빠는 나에게 걸려 온 장우혁 닮은 사람의 전화를 끊었다”, 「가장 아름다운 소년」, p.30)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만 하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랑은 그 억압 위로 비상하며 날아오른다. 억압의 힘은 좌표 고정이 불가능한 양자-퀴어의 세계에서는 무용하다. 양자의 세계에서 유효한 유형력은 단 하나, ‘나’의 관측이다. ‘네’가 나의 시선 속에서 그 ‘놀이터’에 영원히 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구름 뒤에 발가락이 시려
아름다운 너를 안고 기다려
케이크에 꽂힌 초
다시 깜빡거리기를 우리 이제
웃음을 지어 보낼게


너는 달리다 말고 돌아와
(…)
그 길의 끝에 내가 다른 몸으로
너를 안아 줄게


알 수 있어 아직도
떨어지는 너를
한 아름
(…)
다른 너랑 나를 상상해

―「그대여」 부분


사랑이 감시당하거나 금지당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를 알게 된 ‘나’는 이전과 다르다. 그래서 그는 차가운 구름(전자구름, electron cloud) 뒤에서 “달리다 말고 [내게로] 돌아[오는]” 예전과 다른 ‘너’를 안고 기다릴 수 있다.(“나랑 놀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너도 듣지 않을 거야”, p.209) ‘나’는 ‘우리’―‘나’와 ‘네’가 결코 예전과 같을 수 없다는 기쁜 진실을 안다. 이제는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했던 거야”, p.209) 그리고 계속해서 낙하하는 ‘너’, 다르게 말하면 지구 위를 계속해서 달리는 ‘너’를 내가 안아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시집은 끝없이 낙하하는 ‘너’와 그를 안으러 달려가는 ‘나’의 상태에서 그렇게 마무리 된다. (pp.210-211) 이것이야 말로 가장 영원에 가까운 사랑 고백이 아닐까? 굳어버린 ‘촛농’을 되살려 ‘다시 깜빡거리는 촛불’로 만들고 그 ‘사랑’을 함께 행위하기 위해 ‘너’를 기다린다, 이제는 사랑했었다고, 그러니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나’의 상태로. 더는 ‘곰팡이’와 ‘올챙이’를 ‘비누’칠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랑, ‘너’와 ‘나’ 모두 ‘엄마’의 말을 듣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는 세계에서, “델타를 영으로 보내”(「본드」, p.137)는 사랑. “그 순간만이 존재하는/가장 배타적이며 완전하게 포괄적이고/규칙적인”(「이런 게 0이다」, p.46) 그러나 전자구름이 흘러 다니고 계속해서 낙하하는 ‘너’와 그를 위해 무한히 달려가는 ‘나’가 운동하는 양자적 세계의 사랑 말이다.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는 말한다. 어떤 진실은, 미리 주어지거나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당신이 진실이라고 말할 때, 비로소 진실이 되는 진실이 있다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드디어 파동으로 발화할 수 있을 때 생겨나는 세계의 진실이다.














전승민
작가소개 / 전승민

제19회 〈대산대학문학상〉과 202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으로 등단하며 비평 활동을 시작.


《문장웹진 2022년 8월호》


전승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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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

  • 관리자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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