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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라는 공동환상

  • 작성일 2022-01-01
  • 조회수 3,277

[현장 비평]

《문장웹진》은 다양한 시선을 통해 폭넓은 담론을 펼칠 수 있는 ‘비평의 장’을 마련하고자
2020년 진행되었던 〈본격! 비평〉 코너를 정비하여, 2021년 4월호부터 〈현장 비평〉을 선보인다.
2022년 〈현장 비평〉은 신진 문학평론가 12명이 각자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주제를 정해 매월 1편씩 발표된다.




일상이라는 공동환상



성현아




1. 이탈이 아닌 연속으로서의 코로나19


단계적 일상 회복, 일명 ‘위드 코로나’ 시행 이후 확진자가 급증하며 정부는 지난달 16일, 사회적 거리두기를 다시 강화하겠다는 방안을 발표했다. 4단계 수준의 방역 대책이 재개되었고 긍정적인 전망이 무색하게 코로나19의 종식은 요원해 보인다. 삶의 방식 자체가 이전과는 판이해진 지금, 문학이 현실을 즉각 반영하거나 단순재현하는 매체는 아니라 할지라도 팬데믹 시대를 등지고 문학을 논하는 일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현실에 접속하려는 문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인 것과 별개로, 현실과 분리된 문학의 자율성을 고집하는 이들에게조차 코로나19는 떼어 두고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비대한 영향력을 지닌 존재가 된 듯하다.
황호덕은 세월호 사건과 문단 내 성폭력 말하기 운동을 거치며 언어의 불능이라는 난관에 봉착했던 문학이 이제 전위로서의 발화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말’과 잔여의 몫을 충실히 감당하기 위해 ‘후위의 자리’를 지켜내려 한다고 분석한다.1) 여성 독자들이 『82년생 김지영』의 ‘김지영’과 마찬가지로 선량한 피해자로 인정받고자 전략적 읽기를 수행한다는 3장의 논의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문학이 “쓰일 수 있는 형식”2) 으로 기능하며 계몽의 역할이 아닌, 현실의 시민들과 ‘함께-있음’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문학의 새로운 몫이 아니겠는가 하는 주장은 온당하다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문학에서 현실을 읽어내고, 현실의 근거를 문학에서 찾아내며 양자의 경계를 허물고 현실에 닥친 시급한 문제들을 짚어 나가는 일은 그 자체로도 문학의 일이 될 수 있다. 변화한 문학의 자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코로나19로 인해 맞이하게 된 위기와 그 극복의 방식에 대해 문학을 경유하여 논의해 보고자 한다.
2019년에 발발한 코로나19로 인해 학교 수업을 비롯한 대부분의 일이 비대면으로 전환되었으며 비대면화하기 어려운 일은 최소한으로 축소되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대면하여 누렸던 일상을 잃었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생애주기는 이젠 지켜지기 어려운 낡은 개념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우연한, 재수 없는, 특수한 재난이 예기치 못한 재앙을 초래했다는 식의 단순한 인과로 지금의 사태를 이해하는 것은 비약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지젝이 요구했듯 핵심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학자들이 수년에 걸쳐 경고했음에도 아무 대비 없이 우리를 파국에 빠지게 만든 시스템은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3) 라는, 애써 외면해 왔던 질문 말이다.
그렇다면 보편생애주기가 과연 ‘보편’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만큼 다수의 것이었는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 ‘정상인’이 절대다수를 포괄하는 범주여야 함에도 유색인, 여성, 장애인, 퀴어, 트랜스젠더, 비지식인 등을 배제하며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남발해 왔던 것처럼 권력을 가진 자들만이 체제의 보호 아래 누릴 수 있는 특권적인 생애주기는 부조리를 문제 삼지 못하도록 ‘보편’의 탈을 쓰고 미연에 저항을 방지해 왔다. 마찬가지로 ‘일상’이라는 허상은 코로나19 이전에도 일상을 누릴 수 없게끔 소외된 이들에게는 과도하게 높은 벽이었으나 그들의 개인 역량과 나태함을 비난하며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 왔다. 우리의 ‘열심’과 별개로 삶은 재난 이전에도 생존의 영역에 가까웠다. 다만 재난을 통해 이를 잘 감싸 주던 포장지가 벗겨진, 차마 직면하기 어려울 만큼 참혹한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민낯을 직시하게 되었을 뿐이다.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라지만, 그 기울기를 감내하며 남들보다 열심히 등반하면, 동등하게 달릴 기회가 주어지리라 믿었던 우리는 애초에 이탈할 경로조차 없었던 것인지 모른다.
이처럼 코로나19는 과거와의 단절, 예측된 미래에서의 갑작스러운 이탈로 보이지만, 실상은 연속적인 흐름에 가깝다. 기존의 문제들을 증폭시켜 마주하게 한 것이지, 우리가 전례 없는 초유의 사태를 갑자기 맞닥뜨리게 된 것은 아니다. 코로나19는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망상 속에 산적해 있던 사회 문제들을 드러나게 했고 기후 위기로 인해 예견된, 코로나바이러스보다 위험도가 훨씬 높은 재난에서 맞게 될 미래의 일상을 끌어와 미리 경험하게 했을 뿐이다. “지금부터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사회적인 시스템”4) 이다.


1) 황호덕, 〈지금 문학이 어디 있는가, 스무고개-문학의 위치, ‘전위’ 문학과 ‘후위’ 문학/비평 사이에 「하이픈」〉,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1년 여름호, 118쪽.
2) 위의 글, 123쪽.
3) 슬라보예 지젝, 「팬데믹 패닉」, 강우성 역, 북하우스, 2020, 20쪽.



2. 격리할 ‘자가(自家)’ 없음 : 기울어진 운동장의 바깥에서 제자리 뛰기


코로나19가 가속한 탈세계화로 인해 정책 면에서는 국가 단위로 결집하게 되었으며, 방역수칙은 가정 단위로 떠넘겨졌다. 이때 핵심이 되는 것은 ‘자가 격리’, 즉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한 자신의 ‘집’에서 격리하라는 권고였다. 문제는 격리할 수 있는 집이 주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팬데믹 상황이니 집에 머무르라는 정부의 요구는 상식적인 수준의 것이겠으나, 그로 인해 당연히 있어야 할 의식주 중 하나이자 인간의 기본 요건에 해당할 주거가 전혀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비상식적인 사회 구조가 여실히 드러나게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내 집 마련’은 판타지 장르에 가깝다. 최근 발표된 KB국민은행 리브부동산 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위소득 가구가 평균 수준의 주택을 사는 데 월급 전부를 저축하면 18년 6개월이 걸린다고 한다.5) 월급 전부를 저축할 수 없으니 적어도 30년은 넘게 걸린다는 뜻이 되고 MZ세대는 5~60대가 되어서야 자가를 마련할 수 있다. 이 또한 중위소득 가구의 이야기이며, 하위 20%에 속하는 1분위 소득 가구가 5분위인 상위 20% 주택을 사려면 106년 동안 월급 전부를 저축해야 한다. 이는 죽을 때까지 집을 살 수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기이한 구조 속에서 상대적으로 비축한 자금이 적을 수밖에 없는 청년들은 높은 월세에 허덕이게 된다. 이는 청년기에 통과의례처럼 제시되어 있는 대입, 취업, 결혼 등을 어렵게 한다. 대학을 다니고, 졸업하여 직업을 갖고, 결혼하는 삶은 평범한 삶으로 치부되지만, 주거 공간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코로나19로 인해 기존에도 적었던 일자리마저 잃어 가는 청년 세대에게는 영혼을 갈아 넣어도 누릴 수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
손원평 소설의 「타인의 집」6) 속 주인공인 ‘시연’은 이러한 청년들의 사정을 대표한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 이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시연은 전세로 세 들어 사는 ‘쾌조씨’가 다시 월세로 세를 주는 방에 거주하는 “세입자의 세입자”(157쪽) 신세다. 이 집을 구하게 될 당시 시연은 신혼집을 마련할 수 없어 애인과 결별했고, (구체적인 설명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코로나19가 발발하며 인력감축을 시도했을 것으로 보이는 회사에서 잘렸으며, 월세 인상에 못 이겨 원래 살던 집에서 쫓겨난 상태였다. 결혼의 경우부터 이야기해 보자면, 원래도 결혼제도가 이성애자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열려 있다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경제적으로 결혼이 가능한 청년들은 많지 않다. 결혼식에 드는 비용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신혼집을 마련하는 일은 청년과는 먼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늘 아래 어느 집도 우리의 예산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149쪽)다고 말하는 시연은 자신들이 머물 곳이 한 칸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남자친구와 갈등하다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4) 슬라보예 지젝·이택광,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 비전CNF, 2020, 81쪽.
5) 《서울경제신문》, 2021.9.3.(https://www.sedaily.com/NewsView/22RBM3PSMO)
6) 손원평, 「타인의 집」, 창비, 2021.


그러나 시연은 자신에게 할당된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사분의 일 남짓한 공간에 대단히 만족하며, 자신이 비로소 엄연한 집에 살게 되었다고 감격하기까지 한다. 방음이 전혀 되지 않아 공동 생활자들의 소음을 견뎌야 하지만, 이전에는 친구 집에 얹혀살거나, 좁은 고시텔에서 생활해야 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곳을 나은 환경으로 느끼는 것이다. 합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세 들어 사는 방이 시연에게는 비교적 가장 안락한 주거환경을 제공한다는 사실은 주거정책과 실제 거주 사이의 골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가늠하게 한다. 소설 속에서 시연은 ‘부동산 계급 구조의 최하위’7) 에 속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지만 그녀의 모습은 전혀 낯설지 않다. 오히려 청년 대다수가 처한 현실에 가깝다.


— 이 집 사느라 정말 고생했어요. 대출을 너무 많이 받아야 해서 처음엔 반대했거든요. 지금 생각해도 정말 모험이었죠. 와이프가 고집부리지 않았다면 못 했을 겁니다. 그래도 천만다행이에요. 이 집으로 모은 종잣돈에 대출 일으켜서 이번에 새 아파트에 입주하거든요. 한 번도 여기 살아 본 적은 없지만 생각날 때마다 이쪽을 향해서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고갤 숙일 겁니다.(「타인의 집」, 166-167쪽)


더불어 상대적으로 나은 위치에 있는 시연의 집주인인 쾌조씨와 쾌조씨에게 전세를 주고 있는 실질적인 집주인도 모두 대출에 의존해야만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점은 한국의 주거 문제가 특정 계층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닌 모두의 일임을 상기시킨다. 그렇다면 보편·일반·평범과 같은 단어들은, 동성애자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권리를 갖는 이성애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일반’이라는 은어를 사용하듯, 인간의 기본조건들을 비교적 제약 없이 누릴 수 있는 기득권자들을 지칭하는 말이 되어버린 것일지 모른다. 보편의 생애, 일반적인 일상, 평범한 삶은 극소수의 부유한 이들에게만 열려 있다. 상위 1%가 보유한 주택 수가 1인당 평균 일곱 채로 증가했다는 조사 결과가 이를 증명한다.8) 주거와 같은 삶의 기본조건이 시장에 맡겨져 있으므로 다수의 기본권은 위협받으며9) 이는 팬데믹 상황에서 최소한의 안전수칙을 지키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머물 공간이 절실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복지는 한정적이며, 그 제한적인 정책마저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음을 LH(한국토지주택공사) 직원들의 부당투기 사태가 확인시켜 주었다.
더군다나 현재 부동산 정책은 빈곤에 등급을 매긴 후 더 빈곤한 이들에게 주거 공간을 제공하지만, 주거환경의 질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저 어떤 공간이든 간에 공급하면 그만이라는 듯이 그 수량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여기서 다시 새로운 질문이 파생된다. 과연 공간의 공급만으로 충분한가 하는 것이다. 그 공급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공급량만을 재분배의 지표로 삼는다면, ‘생존’을 삶의 질과 관계없이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상태, 즉 단순히 먹고 살아 숨 쉬는 상태로 간주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은 좁은 의미에서의 생존은 ‘인권’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좁은 공간은 인간을 좀먹는다. 사방의 벽들이 가운데를 향해 달려드는 듯한 방 안에서 느껴지는 옥죄는 고립감은 중력보다 무겁게 나를 바닥으로 끌어당기곤 했다. 대화의 기능을 상실한 입은 무언가를 먹으려 할 때만 제구실을 했고 그건 나 스스로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했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허기의 냄새가 내 인생의 냄새 같았다.(「타인의 집」, 148쪽)


“사방의 벽들이 가운데를 향해 달려드는 듯한” 좁은 방이 주는 고립감은 서울의 평균적인 원룸 및 고시원의 크기를 생각하면 쉬이 공감할 수 있다. 그러한 공간에서 시연이 느꼈던 정서적 고통에 관한 서술은 살아 있을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 분배되었다는 것만으로 주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각인시킨다. 낸시 프레이저는 사회 부정의의 두 차원을 이야기하며 이를 포괄할 수 있는 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10) 그가 이야기하는 사회 부정의의 두 차원은 ‘사회경제적 부정의’와 ‘문화적 혹은 상징적 부정의’로 나뉜다. 이 둘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음에도 그가 이를 분리하여 각각을 환기하려 하는 이유는, 부정의를 극복하는 방법에 있어서 하나의 차원에만 몰두하며 양자가 모두 고려되지 못하는 경향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사회경제적 부정의의 경우 착취, 경제적 주변화, 박탈을 들 수 있으며, 문화적 부정의의 경우 문화적 지배, 불인정, 경시를 사례로 꼽을 수 있다.11) 전자는 계급 정치, 후자는 정체성 정치와 연결되며 각각의 극복 방식은 ‘재분배’와 ‘인정’이라는 상이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두 방식은 부정의를 해소하고자 한다는 데서는 동일하지만 서로를 방해하고 부정하기도 하며 딜레마를 창출한다. 이 관점에서 들여다보자면, 주거 문제의 경우 사회경제적 부정의, 그중에서도 “박탈(생활을 위해 필요한 적절한 물질적 수준을 거부당하는 것)”12) 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를 극복하려는 방안이 ‘분배’의 차원에 집중되고, 이 과정에서 문화적인 요소들은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주거 공간이란 물론 없는 이들에게 나누어지고 제공되어야 할 경제적인 요소이지만, 이때 그 공간이 과연 ‘살 만한’ 공간인지도 충분히 논의되어야 한다. 그저 주어진 몫이 없는 자들에게 그 몫을 나누어주는, 표면적인 재분배만 수행하는 것은 정의의 두 축을 고려하지 못한 불충분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주거 공간을 마련하지 못한 이들에 대한 문화적 차별은 그 뿌리가 깊다. 자본주의가 스스로 포장하고 선전한 대로라면, 열심히 일한 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얻어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하겠으나, 성실히 노동했음에도 ‘내 집’을 마련할 수 없는 이들이 대다수다. 그런데도 주거 문제에 있어 문화적 정의는 번번이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주거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이들의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정당한 욕구는 ‘욕심’으로 치부된다. 더불어 이들은 ‘게으름’, ‘능력 부족’ 등의 오명을 쓰고서 비가시화된다.


7) 전기화, 「소음과 하모니」, 손원평, 「타인의 집」 해설, 2021, 창비, 250쪽.
8) 전강수, 〈부동산공화국을 넘어 땀이 대우받는 세상으로 가는 길〉, 《창작과비평》 2021년 여름호, 268쪽에서 참조.
9) 백영경, 「탈성장 전환의 요구와 돌봄이라는 화두」, 황정아 외 9인, 「코로나 팬데믹과 한국의 길」, 창비, 2021, 57쪽.
10) 낸시 프레이저·악셀 호네트, 「분배냐, 인정이냐?」, 김원식·문성훈 역, 사월의 책, 2014, 54쪽.


마지막 방문자는 이십대로 보이는 남자였는데 지방에 있는 부모님을 대신해 왔다며 영상통화로 집의 내부를 꼼꼼히 비췄다. 부모에게 집의 상태를 보고하는 그의 폰 각도가 바뀔 때마다 우리는 빛을 비춘 바퀴벌레처럼 이쪽 벽에 붙었다가 저쪽 벽으로 달아났다가 해야 했다.(「타인의 집」, 166쪽)


이는 집을 내놓게 되었다는 사실을 실거주자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집주인의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사전 동의도 없이 들이닥친 부동산 중개업자와 집을 보러온 사람들에게 정식 세입자 쾌조씨를 비롯한 실거주자인 “우리”는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비치지 않는다. 집을 보러온 “남자”가 “부모에게 집의 상태를 보고”하기 위해 휴대폰 각도를 바꿀 때마다, 구태여 비칠 필요 없는 이들이 카메라에 잡히지 않으려 달아나는 광경은 언제나 은폐되는 이들의 처지에 대한 전체적인 비유로 기능한다. 이들은 “바퀴벌레”와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 놓이지 않으면 불쾌감만 유발할 뿐인 존재로 그려진다. 이로써 주거 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이들에게 몫을 나누어주려는 허울뿐인 정책은 오랫동안 무시 받아 온 무주택자에 관한 인식적 측면은 개선하지 않는/못하는 미봉책임이 분명해진다.
코로나바이러스가 계급과 인종, 성별 등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모두가 공평한 불행에 처한 것으로 팬데믹 상황을 인식하게 했지만, 위험에 노출되는 데도 계급에 따른 우선순위가 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우리가 복불복, 우연, 불운이라는 인식에 기대어 꽤나 평등한 세상이라는 망상에 빠져 있을 때도, 위험으로부터 격리될 자신만의 공간조차 없는 사람들 혹은 그런 공간에서 계속 살기 위해 밖으로 나와 노동에 임해야 하는 사람들은 경로의 바깥에서 “몸을 아등바등 갈아 넣어 얻어낸 힘겨운 제자리걸음”(159쪽)을 반복하고 있다. 아무리 성실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다해도, 어떤 때는 그 이상을 해내도, 경쟁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이들은 달리기에 참여할 수 없다. 이들은 기본적인 인권도 보장받지 못하며 미래를 그려 볼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유념해야 할 점은 이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소외된 이들이나 극빈층이 아닌 한국 사회의 절대다수라는 점이다.


11) 낸시 프레이저, 「재분배에서 인정으로?-‘포스트사회주의’ 시대 정의와 딜레마」, 낸시 프레이저 외 11인,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문현아·박건·이현재 역, 그린비, 2016, 28-29쪽.
12) 위의 글, 28쪽.


3. 앓는 여성들 : 무증상으로 간주되는 돌봄 노동으로 인한 통증


그렇다면 결혼하여 슬하에 자녀를 두었으며 가족이 함께 사는 집이 있어 보편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듯 보이는 이들의 상황은 어떨까? 집이 있고 가정을 꾸릴 수 있고,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젠더에 따른 위계는 확연하다. 그럼에도 코로나19 이후 여성과 남성이 경험하는 피해의 정도가 다르다는 점은 비교적 주목받지 못했다. 최은미의 소설 「여기 우리 마주」13) 는 코로나19에 직격탄을 맞게 된, 유급 노동과 무임금 가사노동을 동시에 수행하는 기혼 여성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서술자인 ‘나리’는 9년간 홈 공방을 운영하다 2020년 2월에 독립적인 공간인 ‘새경프라자’에서 공방을 열게 된다. 그러나 감염병 위기 경보가 격상되며 예약되어 있던 클래스가 취소되고 동호회로의 출강 또한 무기한 연기되며 준비해 두었던 캔들 재료값만 빚으로 잔뜩 떠안게 된다. 나리는 집에서는 집안일과 육아를 혼자 책임져야 하고 공방에 나가서는 공방 일과 더불어 딸 ‘은채’를 가정용 CCTV로 살피는 일,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보내오는 설문에 응하는 일 등을 도맡아 해야 한다. 소설 속에서 은채의 학교 수업이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되고 초등학생인 은채가 집에 멍하니 머무는 시간이 늘어난 광경을 볼 수 있듯, 재난으로 인해 학교는 비대면으로 전환되었고 어린이집과 같은 보육시설의 운영이 중단됐다. 인간이 타인의 돌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재확인했지만 폭증한 돌봄의 수요를 책임지는 일은 가족, 그중에서도 여성 구성원에게 떠맡겨졌다. 공방과 집에서 이중으로 돌봄 노동을 수행하는 나리는 아이가 집에 ‘그냥 있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움을 느끼며 엄마로서 돌봄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반대로 아이와 있을 때는 아이와 둘이 고립되어 있음에 외로움을 느끼며, 당연히 분담되었어야 할 가사노동을 남편과 나누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데 에너지를 뺏기고 행복한 아이를 키워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린다. 이처럼 고군분투하면서도 나리는 자신이 감내하고 있는 주부로서의 노동을 자격증 클래스에서는 철저히 숨긴다.


원데이 클래스나 취미반에서는 절대 풀지 않는 것을 정교하게 펼칠 수 있는 판이 열리면, 나는 나의 무언가를 가리기 시작한다. 수미는 알고 있었을까. 누구누구의 맘도 아닌, 무슨무슨 샘도 아닌, 딱 떨어지는 ‘선생님’이 되어야 할 때, ‘지도사’라는 정식 호칭으로 서 있어야 할 때, 내가 나의 무엇을 보이지 않게 하는지. ‘선생님’으로 생존하기 위해 내가 얼마나 깨끗하고 멀쩡하게, 주부로서의 노동만을 선별해서 지워버리는지. 하지만 ‘선생님’인 그 순간에도 내가 알아서 감춰버린 그 노동에 얼마나 실시간으로 잠식당하고 있는지. 어떻게 얼굴이 지워진 채로 다른 여자에게 다른 여자가 되어 가는지. 나로 서 있기 위한 최소한의 힘을 기르기 위해 어떻게 또다시, 계속 다시, 매일 다시, 내 노동을 지우고, 지운 것에 먹히고, 먹혀 가는 채로 지우면서, 편하게 사는 여자들 중 하나가 되는지. 왜 나는 나의 어떤 부분을 지워야만 내 실력을 신뢰받을 수 있다고 믿게 되었는지.(「여기 우리 마주」, 73-74쪽)


돌봄과 같은 가사노동은 비생산적인 일로 여겨져 오랜 시간 평가절하 되어 왔으며 낮은 사회적 지위와 결부되어 왔기 때문이다.14) 돌봄, 즉 생산을 생산하는 노동이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보다 낮은 위계를 갖고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노동 가치가 시장의 원리에 따라 매겨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지배하는 ‘정치적인 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15) 이러한 사정으로 비주류 집단에 할애되어 왔던 돌봄 노동은 그 기여도와 관계없이 부당하게 저평가되어 왔다. 그리하여 가사노동에 잠식되어 가면서도 여성들은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거나, 이를 드러내고 인정받기를 꺼린다. 특히 나리가 외부에서 경제 활동을 하는 여성으로 살아남고, 전문적인 “선생님”으로 승인받기 위해 주부로서의 면모를 비가시화해야 한다는 점은 돌봄 노동과 관련해서는 여성을 착취하면서도 이를 통해 다시 여성들을 낙인찍어 왔던 시스템의 잔혹한 모순을 생각하게 한다. 그런 나리에 반해 남편은 아이 양육을 아내에게 일임한 채 부녀관계에 대해 고민하기는커녕 “엄마와 갈등을 겪다 서로를 이해하는 내용의 아동소설”(62쪽)을 사온다. 경제 활동을 하기 위해 나리가 거실에 구비해 둔 캔들을 지적하며 집에 와도 쉬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이에 나리는 그저 “남편 쉬는 기분 들게 해주기”(54쪽)를 자신의 할일 리스트에 추가할 뿐이다.


13) 최은미, 「눈으로 만든 사람」, 문학동네, 2021.
14) 더 케어 컬렉티브, 「돌봄선언」, 정소영 역, 니케북스, 2021, 14쪽.
15) 채효정, 「누가 이 세계를 돌보는가」, 미류 외 9인, 「마스크가 답하지 못한 질문들」, 창비, 2021, 189쪽.



육아와 일을 병행한다는 점에서 나리와 같은 처지인 ‘수미’는 학원 운영자들이 어떻게든 오래 잡아 두고 싶어 하는 ‘여자 기사님’이다. 여자 기사들은 차량 운전에 대한 보수만 받고 차량에 탑승하는 아이들 관리까지 도맡아하기 때문에 승하차 도우미를 따로 고용할 비용을 아낀다는 것이 그 이유다. 여성 노동자는 돌봄의 역할을 지워도 되는 인력으로 취급받는다는 점이 잘 드러난다. 수미는 딸 ‘서하’를 양육하며 나리가 그랬듯 딸의 슬픔에 과도한 죄책감을 느낀다. 삭감된 남편의 월급을 걱정하며 일과 양육을 병행해야 하는 이 여성들은 아프다. 강도와 증상은 조금씩 다를지언정 불면, 소화불량, 흉통 등의 신체 증상들을 겪으며 발열 없이 계속 아프다. 이들은 코로나 시국이라는 공통의 재난 상황에도 처해 있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가중되는 돌봄의 노동까지 수행하며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특수한 재난 또한 겪어낸다. 이처럼 돌봄을 떠안은 워킹맘들의 고통은 사회에서는 무증상으로 분류되므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한 사람의 신체 안에서 삭일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하게 되고, 종내에는 분노로 터져 나오게 된다. “가눌 길 없는 분노”(83쪽)는 방향을 잃고서 가장 가깝고, 약하고, 사랑하는 것을 겨누게 된다. 수미에게서 떨어져 나온 불덩이 같은 화는 수미 자신이 가장 극진히 보살피던 딸 서하에게로 향하게 된다.
돌봄 노동은 평가절하 받는 노동이기에 그 어려움은 잘 고려되지 않은 채로 이를 제대로 수행했는지에 대한 외부와 내부의 검열이 늘 따라다닌다. 그로 인해 바깥에서는 비난받고, 안으로는 불안해지며 돌봄 노동을 수행하는 이들은 극도로 예민하고 격앙된 상태에 놓이게 된다. 로지카 파커는 어머니들이 자녀에 대해 혼란스럽고 상충하는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 돌봄의 양면성이며 이를 인지하는 것 자체가 돌봄 실천과 돌봄 역량의 불가분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이야기한다.16) 이 지적은 여성에게만 돌봄의 의무가 지워진 기이한 사회 구조 속에서는 돌봄 실천에서 오는 부정적인 정서를 해소하기 어렵다는 점에 주목하게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돌봄의 역량을 가진 전(全) 구성원들에게 돌봄 노동이 안배되어야만 한다. 이는 단순히 가사를 도와주고 거들어 주겠다는 남성들의 시혜적인 친절 정도로 해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돌봄의 문제를 사회 전체의 문제로 인지하고 적절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협력적 공공의 개입”17) 이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공평하고 효율적이며, 사각지대에 놓인 돌봄 대상자들을 포기하지 않는 돌봄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소설의 결말에서 드러났던 가정 내의 아동학대와 같은 끔찍한 일들이 벌어질 위험이 커진다. 코로나19로 인해 아동학대 신고 의무자들이 아이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는 상황 속에서 정부는 유연근무제 및 가족 돌봄 휴가지원 정책을 시행했지만, 이는 돌봄의 책임을 가족에게만 지우는 경향을 강화했을 뿐 아니라 가정에서 학대받는 아이들의 경우 피해자를 학대의 현장으로 내모는 꼴이 되어버렸다.18) 돌봄이 여성의 희생에만 기대고 있는 지금의 시스템에서는 돌봄 공급자인 청장년층의 여성뿐 아니라 수요자들 또한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다. 코로나19로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는 이들이, 절대적으로 돌봄을 필요로 하는, 생애주기의 첫 부분과 마지막에 해당하는 아동과 노년 세대라는 점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생애주기라는 허상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16) Rozsika Paker, 「Torn in Two: The Experience of Maternal Ambivalence」, Virage, 1995.(더 케어 컬렉티브, 앞의 책, 59쪽에서 재인용)
17) 김현미, 〈두 달여 ‘멈춤’에 심화된 성차별〉, 《한국일보》, 2020.5.6.(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2005051186026985)
18) 백영경, 앞의 글, 50쪽.


4. 새로운 야만 : 인간 아닌 노인


그렇다면 이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했을 때 맞게 될 노년기를 살펴보도록 하자. 손원평의 소설 「아리아드네 정원」19) 은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104쪽)하게 된 미래사회에서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유닛’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유닛은 최상위인 A부터 최하위인 F등급까지 나뉘어 있으며 주인공인 ‘민아’는 결혼하지 않은 1인 가구의 노인으로 D등급인 ‘아리아드네 정원’에 거주하고 있다. 이 공간은 언뜻 보기에는 노인의 복지를 위해 마련된 공간처럼 보이지만, 난민 차별, 노인 혐오와 같은 “한국 사회의 면면들이 증폭되어 반영된 공간”20) 이다. 민아의 말동무를 해주는 복지 파트너 ‘유리’와 ‘아인’은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에서 펼친 이민자 수용 정책으로 한국에서 태어난 국민이지만, 본국의 언어와 문화가 남아 있는 타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박해받는다. 이들은 기본적인 의료 서비스나 대출과 같은 복지를 누리지 못하며 계급의 변방에 자리하고 있다. 이민자가 아님에도 처치 곤란의 노인이 된 민아 또한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름만 정원일 뿐 기본적인 생필품도 부족하게 제공되는 유닛에서 생활하는 민아는 이 공간을 지옥처럼 느낀다. 그럼에도 거리로 나가 노숙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 슬럼가에서 폭력의 표적이 되는 대상이 주로 여자 노인이기 때문이다. 민아는 청년인 유리와 아인에게 “후대를 위해 쓰여야 될 세금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버려지고 있”(131쪽)다는 모욕적인 말을 들으며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젊은 세대에게 노인은 후대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세금을 축내는, 사라져야 할 혐오 대상에 불과하다.
이러한 노인 세대를 향한 반감은 지금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긴급하게 시행되는 조치들을 연상시킨다. 코로나 환자들을 격리할 병동의 수가 부족해지자 노인을 향한 복지와 의료 서비스들이 가장 먼저 중단되었다. 지젝은 약탈, 살인과 같은 생존주의적 폭력이 난무하는 공공연한 야만보다 인간의 온정적인 시각을 아예 배제하지 않지만, 전문가의 견해로 정당성을 얻게 되는 “가차 없는 생존주의적 조치들”21) 을 더욱 경계한다. 그는 코로나19로 인류 전체가 파멸하지 않기 위해서 노인을 비롯한 약자들의 치료를 축소해야 한다는 적자생존의 논리를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라며 인권을 위해 인권을 희생하는 모순적인 조치들은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얼마나 착실하게 경제의 논리를 따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사회에서 청년들이 유리와 아인이 그랬듯, 노인 세대에 반감을 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청년 세대가 떠안게 된 사회는 이미 손댈 수 없이 부패한 상태의 사회였으므로 그 박탈감과 분노는 위를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정확히는 노인 자체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오래 명맥을 이어 온, 절대다수가 배제되고 소외되는 구조에 대한 반감일 것이다. 노인과 마찬가지로 사각지대에 놓여 충분한 돌봄을 받지 못한 아동들이 그대로 청년이 되고, 이들이 다시 정상 가족의 구성에 필연적으로 실패하며 노인이 된다. 우리가 아는 일상은 그저 가용성 휴리스틱에 의해 조작된 이미지일 뿐이다. 가용성 휴리스틱이란 심리학적 용어로, 머릿속에 떠올리기 쉬운 사례에 근거하여 그러한 사례가 일어날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하게 되는 인지적 경향을 뜻한다. 더 많이 언론에 노출되고, 홍보된 일상의 모습으로 인해 우리가 편향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가정이 자가를 마련했고 노후를 잘 준비한 기혼, 유자녀의 가정일 뿐, 절대다수는 일상의 바깥에서 생존 그 자체에 분투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제 삶뿐만 아니라 죽음까지 계급이 매겨진다. 소설의 배경인 가까운 미래사회에서는 죽음의 방식이 다채롭게 진화한 상태다. 최상위 계층의 경우 죽은 이후에도 데이터화된 뇌의 정보를 저장하여 새로운 육체에서 영생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 이 세계의 가장 보편적인 죽음은 지금의 ‘안락사’와 유사한 방식인 ‘MO’이다. ‘MO’에는 일정 이상의 금액이나 가족의 동의가 요구되기 때문에 1인 가구는 강력한 규제를 받는다. “치밀하게 기획된 살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줄”(121쪽) 가족이 없는 1인 가구는 정상 가족에서 벗어난 비정상의 형태로 치부되며 죽음에 이를 때까지 유닛에 수용되어 “육체의 소멸을 하루하루 목도”(122쪽)해야 한다. 이러한 규제는 인권 보호를 명분으로 하지만, 그 이면에는 국가의 경제를 떠받치는 큰 축인 유닛을 운영하여 체제를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앞서 결혼과 육아가 이에 대한 개인적 기호의 문제를 떠나서 자유로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라는 점을 확인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개개인의 의사보다 체제를 우선시하는 숱한 제도적 승인들이 차별에 복무하고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지금과 그다지 멀지 않은 미래임을 고려한다면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으나 동성결혼이 법적으로 승인되었을 것 같지 않다. ‘나’와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가 동성일 경우 ‘나의 죽음’과 같은 중대한 문제에 개입할 권한이 전혀 없다는 점은 현 시스템의 병폐를 비추는 거울로 기능한다.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은 민아는 “늦기 전에 결혼을 했더라면, 큰 빚을 감당하고 악착같이 중심지의 집을 일찍 사두었다면”(107쪽) 하는 사적인 회한에 시달린다. 1인 가구가 되고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비용을 마련하지 못한 것이 모두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라는 듯이 말이다. 한병철은 푸코가 진단했던 규율사회가 21세기에 이르러 ‘성과사회’로 변모했다고 주장한다.22) 이러한 사회에서는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강조되어 개인의 열정이나 동력이 어떤 일이든 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과장하므로 낙오자를 생성하게 된다. 민아뿐 아니라 낮은 등급의 유닛에 머무르게 된 노인들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 노력하지 않았던 게으름 등을 자책한다. 그러나 1인 가구조차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처럼 성실한 노동을 통해 노후를 보장하거나, 존엄성을 지키는 길은 이들에게 열려 있지 않았다. 이는 소설 속에 국한되는 미래가 아니다. 손원평의 「아리아드네 정원」은 오히려 지난한 현실에 반해 결말이 있다는 점에서 더욱 미화된 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19) 손원평, 「타인의 집」, 창비, 2021.
20) 전기화, 앞의 글, 257쪽.
21) 슬라보예 지젝, 「팬데믹 패닉」, 강우성 역, 북하우스, 2020, 109쪽.


5. 대전환 선언


주지하다시피 코로나 시대에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오직 불확실성”23) 뿐이다. 이전보다 더욱 불확실해진 삶 속에서도 우리는 무한히 달리도록 주문받는다. 그러나 그 끝에 결승선이 없는 지난한 어둠의 내달리기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긍정적인 감정을 상실하게 할 뿐이다. “남아 있는 희망도 없이 긴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건 절망보다 더한 고통”24) 이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극소수의 부유층만이 ‘노멀(Normal)’이라는 이름으로 일상을 누려 왔다는 사실은 재난으로 인해 더욱 선명해졌다. 경로를 벗어난 적이 없지만, 경로 안에 있은 적 없는 대다수 사람들은 “꽃길을 걸으려면 꽃길 안에 있어야 한다”25) 는 잔혹한 현실을 통각으로 경험하게 됐다. 결국 코로나19는 새로운 문제점을 불러왔다기보다 무한 성장을 선망하는 자본주의가 개인의 삶과 정신까지 깊숙이 침투해 버린 시대의 병환을 극대화하여 마주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자본주의’를 기본 체제로 유지하는 상태에서 가장 먼 미래까지 달아나 보는 김초엽의 소설을 참조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팬데믹’을 주제로 한 앤솔로지에 발표되었던 그의 소설 「최후의 라이오니」26) 는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시간상으로 먼 미래의 이야기다. 주인공이 속한 은하계의 종족 중 하나인 ‘로몬’은 보편의 인류종과 달리 태생적으로 죽음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결여된 복제인간이다. 이들은 멸망한 행성에서 건질 만한 자원과 정보를 회수하는 일을 담당하는 일종의 ‘유품정리사’다. 그러나 주인공인 ‘나’는 성격적 결함을 갖고 태어나 공포에 민감하고 멸망의 현장에서는 멸망이 들이닥치는 상상을 하게 되는 인물이다. ‘나’는 시스템이 처음으로 단독 의뢰한 임무를 수행하여 자신 또한 여타의 로몬들처럼 강인하다는 점을 증명하고자 멸망한 행성 ‘3420ED’로 떠난다. 그곳에서 마주한 소수의 기계들 중 시스템 오퍼레이터인 ‘셀’은 ‘나’를 ‘라이오니’라는 인간으로 착각한다. 이 행성이 멸망하기 전, 3420ED의 거주민들은 자신들의 복제를 생산하고 이에 기억과 자의식을 전송하여 노화하지 않고 삶을 이어 나가던 불멸인이었다. 인접 문명들이 복제 기술의 윤리를 문제 삼자 불멸인들은 소행성에 은폐 보호막을 씌우고 외부와 교류를 끊어버린다. 신체를 교체하기 위해 생산된 복제들에게서 “자의식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이어”(37쪽)지지만, 이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이와 같은 무정함에서 최소한의 윤리를 점검해 줄 인물 혹은 장치가 부재하는, 이기주의와 결탁한 극단적 자본주의 사회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복제인들의 자의식은 불멸인의 영생을 위해 제거되고, 그들의 신체는 불멸인이 누리는 젊음을 위해 소모될 뿐이다. 이러한 상태가 수백 년간 지속되지만, 고립된 도시에서 불멸인들은 “모든 것이 완벽하고 순조”(37쪽)롭다고 느낀다. 선별된 소수의 인원만이 영생을 누리고 나머지 삶은 도구로 쓰이는 이 사회가 도래하지 않을 가상의 디스토피아로만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이 섬뜩함을 자아낸다. 현재에도, 문화적으로 배제된 이들은 ‘복제인’과 같이 인격을 부여받지 못하므로, 눈에 보이지만 비가시화되어 누구도 인지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22) 한병철, 「피로사회」, 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2012, 23쪽.
23) 김명자, 「팬데믹과 문명」, 까치, 2020, 302쪽.
24) 손원평, 「아리아드네 정원」, 「타인의 집」, 창비, 2021, 124쪽.
25) 손원평, 「타인의 집」, 위의 책, 145쪽.
26) 김초엽 외 5인, 「팬데믹 : 여섯 개의 세계」(문학과지성사, 2020)에 발표되었던 소설로 이후 김초엽, 「방금 떠나온 세계」(한겨레출판, 2021)에 수록된다. 이 글에서는 「방금 떠나온 세계」를 기준으로 쪽수를 기록한다.


수백 년간 번영했던 이 도시는 ‘감염병 D’가 발생하며 오랫동안 부재해 왔던 ‘죽음’이 다시 도입되자 혼란에 빠지게 되고, 이를 틈타 복제들은 기계들의 도움을 받아 도망친다. 이후 해방된 복제들은 다른 도시로 떠난 반면, 복제 과정에서 결함이 발생한 복제인 라이오니는 자신의 탈출을 도왔으나 보호 장치가 없어 행성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기계들과 함께 행성에 남기로 한다. 라이오니는 기계들에게도 소멸에 대한 공포가 있음을 이해하는 유일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결말부에서 ‘나’가 라이오니의 복제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기계들의 감정에 공감하는 ‘나’는 셀과 함께 최후를 맞이하고자 행성에 남는다. 이는 자본주의가 유지된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김초엽의 다른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27) 의 서사와 매우 유사하다. 그의 두 소설에서 독자들이 확인하게 되는 것은, 새로운 시대에 맞추어 생겨난 가치나 신념이 아니라 여전히 자본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첨단의 기술로도 끊어낼 수 없는 사랑과 연대와 같은 가치다. 이는 상품 가치와는 거리가 멀기에 경시되기도 하지만, 인류가 끝끝내 잃거나 잊어서는 안 될 본질적 가치라 할 수 있겠다. 그러한 가치가 외면 받는 미래사회에서 자멸을 무릅쓰고서라도 이를 지켜내려는 중심인물의 고투는, 뒤집어 생각해 보자면 결국 그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자멸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강경석은 「최후의 라이오니」 속 ‘나’의 계급적 위치가 ‘선량한 소(小)자본가’에 해당한다는 점을 짚어내며 그런 ‘나’가 자신의 선량함의 원천인 성격적 결함을 결함으로 인지하지 않게 되는 소설의 결말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문명의 위기를 자본의 도덕화를 통해 완화 또는 저지하려는 몽상”28) 처럼 느껴진다며 비판하기도 한다. 이 또한 적절한 지적이겠으나,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의 소수자들(멸망한 행성의 기계인 셀과 로몬 중 결함을 지닌 ‘나’)의 연대나 혹은 가치를 지켜내기 위한 신념의 고집이 죽음(물론 ‘나’의 경우 극적으로 구출되지만 ‘나’가 궁극적으로 선택한 일은 행성에 남아 셀과 함께 죽음을 맞는 일이다)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일은 반대로 자본주의라는 체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메시지를 창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긍정적인 평가도 해볼 수 있다.


임무 결과를 보고하러 갔을 때, 시스템은 나의 주형에서 성격적 취약함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 당분간 같은 주형의 복제를 중단할 것이며, 추후 이 주형에서 또 다른 로몬 아이들이 태어나게 될지는 결정된 바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시스템에 삿대질을 했다.
“나를 이용한 거야? 이미 태어난 나는 어쩌고?”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태어나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나에게 주어진 이 태생적 결함이, 사실은 결함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최후의 라이오니」, 53쪽)


27)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 2019.
28) 강경석, 〈진실의 습격-민주주의와 문학 그리고 자본주의〉, 《창작과비평》 2021년 겨울호, 64쪽.


공감 능력과 상상력이 “결함”으로 인해 소거되지 않았고 그 덕에 자본으로 환원되지 않는 가치에 주목할 수 있었던 ‘나’는 3420ED에서 겪은 일로 인해 자신의 성격을 결함으로 인지하지 않게 되고, 공포와 불안을 완화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나’와 같은 (라이오니의 것이기도 한) 주형의 복제는 중단되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필요한 감정을 지닌 복제인간은 더는 태어나지 않게 된다. 복제인간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류를 뜻하는 라이오니가 ‘나’를 끝으로 더는 재생산되지 않을 것이므로 ‘최후의 라이오니’라는 제목이 의미하듯 3420ED에 남아 준 ‘나=라이오니’의 연대가 더 이어지지 않을 ‘마지막’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소설 속에서 연대를 가능하게 했던 공감 능력은 희망적인 대안이 아닌 일찌감치 소거되었어야 하는 방해 요소로 남게 되며, 마음가짐이 바뀌게 된 ‘나’ 또한 시스템을 변화시킬 가능성을 품은 개인이 아닌, 시스템이 부여하는 역할을 좀 더 잘 수행하게 된 부품일 뿐이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유지되는 한, 연대는 단편적인 일화로 남을 뿐 아무런 균열도 일으키지 못하며 지속 불가능하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그러므로 연대해야 한다는 외침 또한 소리 없는 아우성이 되고, 목소리를 내는 소수가 기진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다소 절망적인 전망에 힘이 실린다. 우리는 김초엽의 소설에서 미래사회의 비극을 확인하며, 이것이 실현되지 않도록 현 체제를 바꾸어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돌봄과 연대 그리고 정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우리는 자본주의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자본주의가 지금 생존해 있는 인류 중 그 누구보다 오래 끈질기게 살아온 체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바깥을 상상하는 일이 어렵고 생경하기만 하다. 어떠한 변화를 꾀해야 하는지 이미 알지만, 그런 이유에서 자본주의 아닌 무엇을 논하는 일이 너무도 큰 위험으로 여겨져 왔는지도 모르겠다. 낸시 프레이저는 현재의 위기가 “‘발전적’(developmnetal) 위기인지 혹은 ‘획기적’(epochal) 위기”29) 인지를 고려하는 것에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획기적 위기란 자본주의 자체의 위기로 시스템이 비자본주의적이거나 포스트자본주의적인 형태로 교체되어야만 극복할 수 있는 위기를 뜻한다. 반면에 발전적 위기는 큰 틀인 자본주의는 그대로 유지하며 시스템이 구성하는 경계를 근본적으로 극복하기보다는 이를 재조정하는 것만으로도 일단락되는 위기다. 그는 이제까지의 모든 일반적 위기는 그것이 획기적 위기로 비칠 때도, 시스템이 스스로 변형하는 능력을 과소평가했기에 일어난 오해일 뿐, 모두 발전적 위기로 드러났다고 본다. 그러나 이번 위기의 경우 생태적 측면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최종적인 극복이라는 해결책이 요구되는, 무언가 다른 진정한 획기적 위기”30) 일지 모른다고 예측한다. 그는 이 위기가 ‘전 지구적인 민주적 생태사회주의’와 같이 긍정적인 사회를 구축하는 것으로 극복될 수도 있으나, ‘전 지구적인 권위주의체제’ 등의 부정적인 극단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따라서 지금은 가능한 시나리오를 예측하기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다가가기 위해 투쟁하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고 그는 역설한다.


29) 낸시 프레이저·마르띤 모스께라 대담, 〈‘식인 자본주의’의 부상〉, 《창작과비평》 2021년 겨울호, 374쪽.
30) 위의 글, 375쪽.


오래도록 사회를 굴려 온 병든 시스템은 어지간해서는 멈춰지지도, 고쳐지지도 않는다. 코로나19 이후의 뉴노멀(New Normal)은 위기이자 제대로 된 전환을 가능하게 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기존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회복에만 주안점을 둔다면, 지속되어 왔던 차별과 배제를 방식만 약간 변주하여 계승하는 꼴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의 시효가 끝나 감을 감각하고, 새로운 체제를 상상하며, 이 변화를 긍정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 힘써야 할 때다. 이 획기적 위기에 제대로 된 전환으로 응답하자는 말이다.
앞에서 다룬 소설들은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못하고 있다. 무한한 질문의 연쇄는 지금의 사회를 투명하게 반영하고 산적한 문제들을 가시화한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지만 질문하기만 하는 소설의 무책임은 우리에게 와서 무기력으로 변환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들은 ‘써먹을’ 수 있도록 쓰여 있다. 작가 개인이 제시하는 협소한 대안에 함몰되지도, 낭만적인 희망으로 결론 나지도 않은 소설들은 현실에 대입될 때 현실과의 오차를 드러내 보이며 이를 숙고하게 하기도 하고, 현실과 연결되어 독자가 현실을 고증할 수 있도록 하며, 무수한 틈을 품고서 토론의 장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열려 있다. 그렇다면 읽은 우리는 틀릴지 모르는 답이라도 계속해서 던져야 한다. 그 이유는 오답을 생성해 내는 우리가 언젠가 답을 찾으리라는 희망적인 에너지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아무것도 결정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는 미결정성의 문제는 확률의 논리로 풀어 갈 수 있다. 옳은 길로 가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고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대답들이 모이면 적어도 그럴 수 있는 확률은 높일 수 있다.
아마티아 센은 각자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31) 를 갖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실질적인 정의라고 말한다. 생애주기별로 보편적으로 행해지는 의례가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지 않더라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앞선 소설들에서 확인했듯, 시기별로 돌봄이 필요한 이들에게 돌봄이 제공되도록 하되, 돌봄을 특정 집단이 희생적으로 떠안게 하는 시스템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코로나 시국에서 우리는 상호의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취약한 존재임을 거듭 확인했다. 이제는 돌봄을 삶의 중심에 놓고, 우선시하며, 공동체와 지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종류의 돌봄에 대해 공동 책임을 지는 보편적 돌봄의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32) 그러기 위해 체제 내에서의 변주가 아니라 체제를 부수고 나가는 낯설고 어려운 상상과 논의를 감내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복과 재건이 아닌 제대로 무너지고 새로운 방식으로 삶의 문법을 다시금 구축하려는 전환에로의 의지일 것이다.


31) 아마티아 센, 「자유로서의 발전」, 김원기 역, 갈라파고스, 2013, 132쪽.
32) 더 케어 컬렉티브, 앞의 책, 55쪽.














작가소개 / 성현아

2021년 《경향신문》,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문장웹진 2022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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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

  • 관리자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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