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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 문학의 영토

  • 작성일 2021-11-01
  • 조회수 2,316

[현장 비평]

《문장웹진》은 다양한 시선을 통해 폭넓은 담론을 펼칠 수 있는 ‘비평의 장’을 마련하고자
2020년 진행되었던 〈본격! 비평〉 코너를 정비하여, 2021년 4월호부터 〈현장 비평〉을 선보인다.
2021년 〈현장 비평〉은 신진 문학평론가 9명이 각자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주제를 정해 매월 1편씩 발표된다.




한참
- 문학의 영토



홍성희




예술


이미상의 소설 「티 나지 않는 밤」1) 에는 병원에서 안내데스크 직원으로 일하는 ‘수진’이 나온다. 수진은 같이 사는 애인도 모르게 매일 밤 조금씩 소설을 쓴다. 그의 소설을 읽거나 그가 소설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사람은 네 명이다. 소설의 유일한 독자이자 비평가인 k 출판사 편집자는, 수진이 원고를 보낼 때마다 아포리즘 같은 문장으로 가득한 장문의 편지를 회신으로 보낸다. “새 말이 체화돼 암묵지가 될 때까지 쓰고 또 쓸 것.” 그의 문장들은 수진의 머릿속에 무시로 울리며 수진의 언어를, 행동을 제약하거나 이끈다. 병원장은 수진의 이름에 깃든 평범함, 어떤 기대도 받지 않고 스스로 어떤 기대도 품지 않는 조용함을 이유로 수진을 편애한다. 그러다 수진이 소설을 쓴다는 것, ‘수진답’지 않게 뭔가를 ‘한다’는 것에 그는 분노하고, “상에 올라오려는 고양이 벌하듯이” 수진의 얼굴에 물을 튀긴다. 스스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예술가’이자 ‘영상작업’을 하는 직업 작가라고 말하길 좋아하는 애인은, 수진이 숨겨 둔 원고 뭉치를 찾아내고는 우리가 ‘예술가 커플’인 줄은 몰랐다며 킥킥 웃는다.
수진의 소설 쓰기에 대하여 세 사람이 보여주는 태도는 수진이 자신의 소설 쓰기를 바라보는 복합적인 시선들이기도 하다. 동료 안내데스크 직원 ‘수미’는 수진이 소설을 쓴다는 말에 “멋지다. 그럼 너 소설가야?”라고 말하면서 어떤 조건 없이, 기준 없이 수진의 글쓰기에 이름을 붙인다. 하지만 수진의 글쓰기는 ‘습작생’과 ‘소설가’ 사이, ‘노동’과 ‘비노동’ 사이, ‘예술’과 ‘비예술’ 사이에서 누군가에게는 무언가를 ‘하는’ 일로, 누군가에게는 적어도 아직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로 비추어진다. 쓰기는 자기를 표현하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적극적인 것이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은 채로 숨겨져 있거나 가장 열정적인 독자에게조차 더 널리 읽힐 것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거부될 때, 그리하여 ‘노동’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을 때, 쓰기는 편집자가 편지 끝에 적어 넣는 숫자들처럼 가장 적극적인 방식으로 소극적인 공간에 남겨지기도 한다. 월세 계약이 끝나고 쓰기의 공간이 사라질 때 수진의 글쓰기가 멈추게 되는 것은, 쓰는 일이 ‘하는’ 일이 되는 일에 대한 고민과 그를 둘러싼 시선들 그리고 현실들이 편편이 들러붙어 있는 인과의 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글쓰기를 둘러싼 현실의 문제만은 아니다. 수진은 가장 먼저 애인과, 다음으로 병원장과, 그다음으로 편집장과 관계를 끊어내면서, 노동이기만 하지는 않지만 노동이 아닌 것도 아닌 글쓰기의 현실을 수용해 간다. 그렇게 글쓰기를 중단하게 되기까지 수진의 선택들을 추동하는 것은 그러나 현실이기보다는 ‘쓰기’ 자체에 대한 오랜 마음이다. 수진은 편집자의 아포리즘을 따라 새로운 단어들을 수집하고 매일 몇 문장씩 소설을 쓰면서 모르는 단어가 점점 적어진다는 사실에, 그와 나란히 글이 더 풍요로워질 것이라는 기대에 순전히 기쁨과 즐거움을 느낀다. 그가 애인과 헤어지기로 마음을 먹는 것은 두 번의 반려 통지와도 노동과도 무관한, 노동 이후에 오롯이 만끽하는 자신의 쓰기, 그 시간과 공간, 그 기쁨을 애인이 아는 체하고, 그것에 대해 묻고 판단하고, ‘예술가 커플’이라는 이름을 붙이려 했기 때문이다. 수진에게 쓰기의 시간은 모든 현실과는 분리된, 다른 현실로서 있어야 한다. 다른 현실로서 존중받을 수 있을 때에만 그 가치를 지킬 수 있는 것이 쓰기 아닌 현실의 인물에 의해 함부로 침해당했을 때, 수진은 그를 자신의 모든 현실에서 추방함으로써 쓰기의 현실을 지킨다.

1) 이미상, 「티 나지 않는 밤」, 웹진 《비유》 2018.12.


수진이 누군가에게 소설을 쓴다고 스스로 말할 수 있게 되는 때는 쓰기의 현실이 다른 현실들을 압도하게 될 때이다. 병원장에 대한 반발로 이직을 준비하던 동료 수미가 병원장의 눈앞에 아동예술독서융합놀이치료사 자격증을 들이밀 때 지금까지의 현실을 두고 다른 현실로 나아가겠다는 무언의 선언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수미와 병원장에게 소설을 쓴다고 고백 혹은 공언할 때 수진은 이유 없이 얼굴에 물을 맞는 현실과의 단절을 선언한다. 그 선언으로 또다시 얼굴에 물을 맞지만, 그것은 늘 그랬듯 쓰기의 현실을 상처 입히지는 못하여, 수진은 다음날 출근을 하는 대신 k 출판사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편집자의 숫자의 비밀을 알게 되고, 노동으로 치환되지는 않지만 노동이 아닐 수도 없는 쓰기에 대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으로 산정되지 않는 ‘과로’로서의 쓰기에 대하여 깨닫게 되면서 수진은 물에 젖은 종이박스가 허물어지듯 글쓰기를 중단하게 된다. 이때에 수진이 글쓰기를 멈추는 이유는 쓰기의 현실이 다른 현실이지 않다는 것, 결국 현실 속에 쓰기 역시도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수진은 “한 계절은커녕 첫 자부터 끝 자까지 읽을 삼사십 분도 이기지 못”하는 자신의 소설을, 타인이 투자하는 읽기의 시간을 척도로 쓰기의 가치를 평가받는 세계로부터 구해 낸다. 다른 현실과는 분리된 비밀스러운 현실로서 쓰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쓰기로 현실화되지 않는 한때의 기쁨으로 그는 행해지지 않는 쓰기의 시간을 다치지 않게 보존한다. 그렇게 현실에 의해서 함부로 폄하되지 않도록 쓰기의 세계를 지키는 일은 수진을 글 쓰게 하고, 글 쓰지 않게 한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질문은, 이 소설을 오래 이야기하면서 시작되는 이 글에서 중요한 물음은, 쓰기의 현실을 다른 현실과는 분리된 고유한 시공간으로 설정하는 태도, ‘노동’이나 ‘일상’과는 다른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쓰기의 시공간을 바라보는 시선, 쓰기를 통해서건 쓰지 않기를 통해서건 ‘예술’로서의 쓰기에 대한 감각을 보존하려 하는 마음, 그것을 가로지르고 있는 ‘예술로서의 쓰기’에 대한 욕망의 정체는 무엇인가이다. 글쓰기가 노동 아닌 건 아니지만 끝까지 노동이기만 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노동하는 시간이나 그에 대한 물질적 보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여분, 혹은 그런 수치를 초과하는 초과분으로서 글쓰기의 어떤 부분은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부분을 과장하여 의미화하지 않으려는 수진에게조차 “클라크 켄트의 비밀”로 말해지는 것처럼, 현실의 모든 조건을 초과해 있는 다른 현실로 의미화될 때 글쓰기의 ‘다름’은 자족적으로 그 의미가 부풀려지고, ‘일상’과 ‘평범’의 현실을 대상으로 하여 쉽게 영웅화된다. 이를테면 “아무도 보지 못해 좌절하고 아무도 보지 못해 안도하는” 자신의 마음속 ‘예술’을 말하는 일은 그 자체로, 스스로에게 현실을 초과하는 모종의 ‘아름다움’을 배당하고 그것을 볼 줄 모르는 이들을 ‘일반인’으로 매도하는 일과 다르지 않아지기도 한다. 나아가 그것은 때로, 영웅 서사에서 영웅이 행하는 폭력과 파괴가 더 큰 정의를 위한 것으로 인정되고 긍정되듯, ‘아름다움’의 방법론을 모든 현실을 초월하여 정당화될 수 있는 것, 어떤 지고함을 위한 ‘매개’라는 이름으로 ‘일반인’들의 신체와 삶과 관계를 활용해도 괜찮은 것으로 상정하는 태도로 나아가기도 한다.


“누나가 죽어도 이해를 못 하더라고. 나는 누나의 과거가 궁금한 게 진짜 아니었거든? 인터뷰 딴 건 영화에 별로 쓰지도 않았어. 중요한 건 여정인데. 사랑하는 사람의 과거를 찾아다니며 요동치는 내 마음의 상태랄지 그날의 풍경이랄지, 계절, 냄새, 공기 같은 거. 내가 담고 싶은 건 그거였어. 누나는 그냥 매개였는데 아무리 말해도 이해를 못 하더라고. 암만 애호가래도 누나도 일반인이었으니까. 말해 뭐 해. 찍은 거 다 버렸어. 그 뒤로 내 신세도 쭉.2)


2) 이미상, 「티 나지 않는 밤」, 웹진 《비유》 2018.12.


‘미적’ 현실과 그것의 매개로 활용되는 현실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그 경중을 다르게 인식하는 위의 서술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일반인’에 대한 ‘예술가’의 우월의식, ‘평범’한 현실에 대한 ‘미적’ 현실의 우위에 대한 전적인 긍정이다. 그러나 그 우월의식, 우위의 감각을 주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상 ‘예술’과 ‘아름다움’의 실제적 의미나 힘에 대한 자신이 아니다. 외려 ‘나’, 수진의 애인이 자신의 영화를 ‘예술’로 기억하고 자신을 ‘일반인’이 아닌 ‘예술가’로 언술하는 동력은, ‘법’의 현실, 혹은 ‘사회’의 현실, 혹은 ‘사람’의 현실이 자신에게 가하는 제약에 대한 반발과 멸시이고, 여하한 현실들 안에서 처하게 된 ‘신세’로부터 ‘미적’ 현실을 분리해 내 그것에 매달리려는 자기구원의 태도이다. 쓰기 혹은 만들기의 욕구는 그 자체로 ‘예술’에 대한 욕구이지 않다. 창작 욕구가 “내가 지금은 여기서 이러고 있지만 밤만 돼봐라” 같은 ‘반전’의 맥락을 갖게 될 때, 그렇게 현실에 복수하는 다른 현실로서 창작이 의미화될 때 쓰기 혹은 만들기는 ‘예술’의 이름을 욕망하게 된다. 그 분리가 어떤 현실에 대한 경멸 혹은 어떤 현실 속 자신에 대한 모멸, 그리하여 다른 현실에 대한 찬미의 단계로 나아갈 때, 쓰기 혹은 만들기는 쓰는 일 혹은 만드는 일로서의 의미를 잃고 이미 항상 ‘예술’로서 ‘예술’을 행하는 것, 그러므로 그 자체로 어떤 현실보다도 크게 말해질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예술’이라는 권능을 붙잡아 ‘예술가’라는 영웅으로 생의 의미를 재정립하는 자기 서사에는 그래서 ‘클라크 켄트의 비밀’은 있지만 ‘클라크 켄트’는 없다. ‘예술가’ 정체성에 중요한 것은 비루한 현실 위에 지고한 예술이 있다는 ‘비밀’의 감각이지 복수의 현실을 감당하는 자의 고뇌와 시련은 아니며, ‘예술가’ 정체성을 사는 일은 ‘비밀’의 ‘신비로움’을 보전하는 일이지 자신의 다름을 타인들의 다름을 향해 열어내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의 이름으로 창작 행위와 창작자를 영웅시하는 서사는 자신을 둘러싼 현실과 스스로 주조한 다른 현실 사이에서 ‘비밀’이 되는 일에 취한, 수진의 애인 같은 한 ‘예술가’ 개인의 것만은 아니다. 소설에서 수진은 ‘예술’을 ‘일상’보다 ‘높은’ 것으로 두려는 마음이 모종의 ‘자격지심’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비밀스러운 투쟁’으로 여기고, 편집자는 노동으로 인정받지 않는 노동시간을 정확히 측정하고 기록하여 ‘아무도 모르게 저항’하면서도 기실은 타인의 글에 대하여 ‘폭력적인 비평’을 전개하는 ‘표현의 자유’를 누린 후 그 편지의 끝에 비평의 시간을 ‘미스터리한 인장’처럼 새겨 넣는다. 방식과 방향은 다르지만 쓰고 만드는 인물들은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한 저항의 방법이자 저항의 장소로 ‘예술’을 의미화하고, 그것에 매달려 타인이 가하는 모멸을, 자기 안에서 피어오르는 무력을 견딘다. 쓰고 만드는 일이 그 자체로 예술이 되고 그 자체로 저항이 되며 그 자체로 쓰고 만드는 자를, 쓰고 만드는 자의 현실 바깥의 현실을 지탱하는 서사적 원리가 되는 그러한 양상은, 주지하듯 ‘문학’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어 온 맥락과 긴밀히 닿아 있다.


어디에도 쓰일 수 없어야 진정으로 아름답다. 쓸모 있는 모든 것은 욕망의 표현이라 추하며, 인간의 욕망은 그 비루하고 나약한 본성처럼 비열하고 역겹다.


테오필 고티에란 자가 쓴 글을 읽으며 나는 전율했다. ‘가장 어렵고 가장 지적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한 말에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들의 글 옆에는 누군가의 메모가 적혀 있었다. 무쓸모의 쓸모. 그 문구가 번개처럼 내 심장에 박혔다. 무쓸모의 쓸모. 나는 말장난을 해보았다. 단어를 곱씹으며 내 이름을 스스로 지었다. 무쓸모의 쓸모, 무모? 무쓸모의 쓸모. 모모! 모모가 된 나는 ‘쓸쓸’이란 단어를 오래 머금었다. 무쓸모의 쓸모. 쓸쓸한 존재, 그것이 나로구나. 시인지 노래인지 알 수 없는 운문이 절로 흘러나왔다.3)


3) 김멜라, 「저녁놀」, 《문학과사회》 2021년 가을호, 2021.09, 178쪽..


김멜라의 근작은 두 여성이 함께 꾸리는 사랑과 삶의 서사 속에서 구매되었지만 사용되지 않고 까맣게 잊히는 딜도의 이야기를 다룬다. 인용된 부분은 결국 버려질 것들을 모아 놓은 상자 안에 들어가게 된 딜도가 함께 상자에 담긴 책들을 읽으며 자신의 영웅 서사를 구축해 가는 광경을 보여준다. ‘무쓸모의 쓸모’라는 낯설지 않은 말로 자신의 위대함을 의미화하고 스스로 이름을 부여하는 딜도는, 마침내 “시인지 노래인지 알 수 없는” 문학적 목소리를 획득하게 된다. 그에게 말하는/쓰는 일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위대함의 맥락 속에 있고, 아무에게 들리지 않아도 그 위대함은 그 자체로 위대하다. 그렇게 스스로 비극적 영웅으로 등극하는 딜도의 언어는, 자신을 차별화하고 차등화하는 서사가 어떻게 모멸감으로부터 시작되어 모멸감을 망각하듯 모멸의 방향을 돌리는 방식으로 형성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그러한 방식이 반복되어 온 ‘책’의 역사를, 혹은 ‘문학’의 역사를 명징하게 들추어낸다. ‘쓸모’의 현실에 대한 집착을 자신의 이름에까지 새기며 ‘쓸쓸’한 고립을 낭만화하는 딜도의 자리에 문학을, ‘예술’로서의 쓰기를 넣어도 어색하지 않은 것은, 쓰기를 둘러싸고 있는 오래된 욕망이 어떤 것인지를 가늠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결말은 흥미롭다. 당찬 선언에도 불구하고 ‘모모’는 버려지기 직전 본래의 ‘쓸모’에 따라 사용될 위기에 처하고, 그 ‘쓸모’의 직전에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된다. ‘모모’라는 이름의 맥락은 그렇게 허망하게 지워지고, 대신 딜도의 몸에는 흰 바탕에 눈이 점만 한 과일들이 그려진다. ‘변신’한 채로 다른 ‘쓸모’를 갖게 된 그것은 ‘무쓸모의 쓸모’가 아니라 그저 ‘쓸모’의 맥락을 얻게 된 듯 보인다. 그러나 이제는 서랍장 위에 놓여 연인이 지어 줄 새 이름을 기다리면서 그것이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려 하는 새로운 배경에는, ‘표표’라는 이름의 검은 표범 인형과 ‘파파야’라는 이름을 가진 대파가 있다. ‘표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지만 연인의 사랑을 받고, ‘파파야’는 파 값이 올라 직접 재배하여 먹으려는 목적으로 들여온 것이지만 ‘돈 주고 사 먹는’ 파들과는 차별화되어, 식재료라는 쓸모로부터 벗어나 있는 반려식물이 된다. ‘모모’였던 것이 거울 속에서 바라보는 것은 그렇게 여전히 ‘무쓸모’의 세계이다. ‘무쓸모의 무쓸모’로 표현될 수 있을 이 새로운 전망 속에서 ‘모모’였던 그것은 다시금 ‘쓸모’로 점철된 세계로부터 분리된 ‘무쓸모’의 세계를 상상하고, ‘무쓸모’를 ‘쓸모’보다 가치 있는 것, 적어도 ‘쓰레기’를 양산하지 않는 더 나은 세계의 동력으로 상정한다. 그 안에 스스로 위치하고자 할 때 ‘모모’였던 그것은, 혹은 문학은, 여전히 영웅이기를, 점만 한 눈을 가진 과일들이 그려진 안마기 딜도라는 신비로운 ‘클라크 켄트’이기를 꿈꾼다.
그렇게 문학이라는 세계에 대한, 혹은 문학적 쓰기에 대한 오랜 믿음이 문제시되고 재검토되는 맥락에서도 문학은 여전히 ‘쓸모’나 노동시간으로 치환되지 않는 무엇을 간직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중이다. 제반 현실은 언제나 아주 구체적인 삶들을 경멸하는 방식으로 구축되고, 그 복판에서 차별적 공간을 구성하려는 문학의 욕망은, 그러한 시스템을 향해 시선을 던질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혹은 현실 너머의 현실을 꿈꾸고자 하는 처절하고 다정한 마음의 한 모습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분리가 순전히 긍정되고 존중되기만 할 수는 없는 이유는, 분리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다른 현실에 대한 바람, 그것을 꿈꾸어도 된다는 믿음, 그 꿈이 머물 수 있는 공간만이 아니라 시선의 위계, 우월감, 모종의 영웅 심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심리에 깃들어 있는 것은 추악하거나 건조하기만 한 현실에 온전히 적응하지 못하는 예외적 인물로서의 자의식과, 현실의 법칙들을 초월한 어떤 너머의 지평을 보는 예외적 시선에 대한 의식, 현실의 편편을 ‘매개’로 그 너머의 지평을 직접 표현하고 구현해 내고자 하는 예외적 의지와, 그것을 해낼 수 있는 예외적 능력에 대한 믿음과 같은 것들이어서, ‘무쓸모’의 분리는 수평적으로 이루어지는 동시에 수직적으로도 이루어지게 된다. ‘예외’가 됨으로써 ‘우위’가 되는 ‘예술’로서라면 문학이라는 이름의 쓰기는 현실이 따라올 수 없는 어떤 높이에 스스로 위치하려 할 것이고, 모든 것을 초월하는 무엇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믿게 될 것이다. 그러한 믿음의 언술이 ‘예술’이라는 개념 안에 깃든 ‘아름다움’의 이름으로 행해질 때, 문학에 의해서 보여지거나 말해지거나 경험되는 ‘아름다움’이란 영웅적인 것이 아닐 수 있을까.


아름다움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아는 그 문학성 말고, 기존의 예술적 성취를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전유하고 확장하는 아름다움을 더 알고자 한다. 그리하여 더 넓고 다양한 쾌락과 휴식의 장으로 모두를 초대할 것이다. 그것에 연루되고 그것으로부터 전이되어 세계를 더 풍부하게 설명하고, 선행하는 다른 싸움과 더 열심히 연대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잘하는 것을 더 잘하게 될 것이다. 더 재미있고 즐거운 언어로.4)


4) 김건형, 「우리는 어디서든 길을 열지, 집게 손의 나라에서도」, 《문학동네》 2021년 가을호, 2021.09, 9쪽.



기존의 문학 담론장에서 통용되어 온 미학적 틀이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배제해 온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문학장은 ‘새로운 아름다움’ 혹은 ‘다른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으로 배제되어 온 것을 끌어안아 왔다. 최근 발행된 문예지의 머리글로 쓰인 위의 글은, ‘페미니즘 예술’을 미학적으로 미달한 윤리적 정언으로 언명하려는 비평 논리의 끈질김을 지적하면서, ‘말하지 않아도 아는 그 문학성’이나 ‘기존의 예술적 성취’와는 구분되는 무엇으로서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반복하여 사용한다. 이 글에서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권력의지’를 재생산하지 않는 문학, ‘더 나아간’ 문학의 미학을 약속하는 예지의 언어이자, 그 전망이 이미 미래완료형으로 실현되어 있음을 선언하는 판정의 언어이다. ‘아름다움’의 미래는 낙관적이고, 그 말이 쓰이는 현재에 낙관은 이미 실현되고 있는 중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조건은 단순하지 않다. ‘기존의 예술적 성취’를 ‘계승’하면서 동시에 비판적으로 ‘전유’하고 적극적으로 ‘확장’하는 작업 자체가 ‘아름다움’으로 기술될 때, 그것은 세상을 풍부하게 설명해 내는 성실함과, 선행하는 싸움과 연대하고자 하는 책임감, 그것이 ‘미학’이 아닌 ‘윤리’나 ‘도덕’으로 배척되지 않도록 쾌락, 휴식, 재미, 즐거움이기를 멈추지 않으려는 긴장을 동시에 짊어지고 있다. 기존의 ‘문학성’이 요구해 온 것들을 해냄으로써 새로운 ‘아름다움’이 문학이라는 ‘미학’의 미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고, 동시에 ‘새로움’의 방식으로 ‘미학’의 내부를 발전시켜 가야 한다. 게다가 ‘아름다움’의 방법론은 그 모든 것을 이미 ‘잘하고’ 있어야 하고, 앞으로 ‘더 잘하게’ 되어야만 한다. 점점 더 잘하고 싶은 마음, 점점 더 잘하려는 의지, 보다 더 잘하겠다는 다짐이 똘똘 뭉쳐 있는 이 ‘아름다움’의 세계에서, ‘더 잘’의 비교 대상이 되는 것은 문학의 역사 전체, 문학적 미학의 역사 전체이다. ‘아름다움’은 ‘문학성’과 구분되는 미학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가르쳐 온 미학의 조건들을 ‘더 잘’ 해내는 방식으로 구분을 꽤하는 것이고, 달라지고자 하는 욕구만큼이나 보전하고자 하는 욕구가 작지 않은 것이며, 그런 점에서 ‘문학성’ 담론의 사유 구도를 어느 정도 ‘계승’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아름다움’이라는 정체성의 측면에서 그렇다.
일례로 이런 문장들은 가만히 곱씹게 된다. “만약 ‘우리 시대’와 ‘사랑’처럼 이항대립이 아닌 것들도 늘 불화하고 대립하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퀴어가 직면한 실존적 불안이라면, 이 말이 참으로 속 편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바로 그렇기에 지금 우리 시대의 순전한 사랑 이야기는 퀴어 서사로만 가능한 건 아닌지 생각해 본다. 시대와 친화하는 사랑이란 어딘지 모르게 수상해 보이니까.”5) 이소의 글은 오래된 형식과 새로운 형식을 구분하여 정치적, 미학적 가치를 변별하는 시선보다 하나의 텍스트 안에서 어떤 형식들이 어떻게 교차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시선에 무게를 둘 때 더 생산적인 논의들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훌륭함’이나 ‘우월성’과 같은 가치 판단에 의한 위계화가 실상은 효과적인 논의를 방해한다는 이 글의 요지는, 텍스트에서 ‘아름다움’이 아니라 ‘전략’을 읽어내는 방법론이 가지는 가능성을 정리하면서 문학을 ‘미학’의 문제에 묶어 두는 방식에 거리를 둔다. 하지만 퀴어 소설에서 ‘개방/폐쇄’라는 패턴을 읽어내고 그 전략을 통해 소설이 나아가는 방향을 독해하는 맥락에서 덧붙은 위의 문장들은, ‘다름’에 ‘아름다움’을, 혹은 ‘아름다움’이라는 역할을 배당하는 언술로 읽히기도 한다. ‘시대와 불화하는 사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퀴어 서사’야말로 ‘순전한 사랑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사유의 연결은, ‘퀴어 서사’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퀴어 서사’를 ‘아름다움’으로 치환시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퀴어 서사의 미학을 규정하는 것은 필자의 의도가 아니고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배치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속 편한 소리’는 아니었을 어떤 문장들은 ‘사랑 이야기’에 ‘순전함’과 ‘순전하지 않음’을 변별적으로 배당하고, 그러한 방식으로 특정 서사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욕망, 혹은 ‘아름다움’으로 ‘타자’를 발견하고자 하는 문학장의 욕망을 담고 있기도 하다.

5) 이소, 「새롭지도 훌륭하지도 않게―형식주의자의 페미니즘」, 《문학동네》 2021년 가을호, 2021.09, 98쪽.


‘퀴어/장애/여성’이 겹쳐진 인물을 다루고 있는 김멜라의 「나뭇잎이 마르고」에 대한 독해에서도 미학적 시선은 중요한 지점으로 남아 있다. “이토록 아름답고 선한, 결국 성스럽게 느껴지는 타자의 형상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6) 라는 조연정의 문장은, 올바른 재현의 문제도, 정치성과 대비되는 미학성의 문제도 아닌 ‘아름다움’의 감각 자체를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져 준다. 그는 ‘체’라는 인물을 이해하고 그가 그려지는 방식을 독해하는 데에 소설의 앞부분에 등장한 예수의 형상을 활용한다. ‘박해자의 이미지’가 강조될 때 ‘체’에게서 읽히는 것은, 부당하게 미움 받으면서도 사랑을 실천하려는 ‘선한 의지’와 ‘시혜의 권리’이다. 그것을 자기 안에 뿌리내리게 하고 실천하는 내내 ‘체’가 들여다보아야 했을 ‘제 마음속 무늬’가 어떤 것이었을지 매만지는 사유를 경유하여, 그의 글은 ‘체’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성스러움’으로 연결해 낸다. 그렇게 박해자의 형상에서 시작된 독해는 박해자의 형상으로 마무리된다. 이때 박해자의 형상이란 이미 예수의 형상이어서, 그와 겹쳐지는 ‘체’의 모습은 아름답고 선하고 성스러운 것으로 읽히지 않을 수 있는 여지가 이미 없다. 이를테면 사람들을 향해, 세상을 향해 사랑을 주기를 멈추지 않는 ‘체’의 모습이 무조건적인 ‘시혜’, 보답을 바라는 것이나 거래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닌 성스러운 선의로 해석되는 맥락에서, 학교 모델로 선정되었다며 홍보물에 사진이 실릴 것이라고 통보하는 교직원에게 ‘체’가 “옹사오 영예고 옹짜오 우여억을 행악하이 마고 제애오 온을 지울해어!”7) 라고 소리치는 목소리는 묵음이 된다. ‘다름’을 포용하고 존중하는 ‘아름다운’ 학교의 이미지를 위해 장애를 가진 몸을 동원하려는 그 의도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공짜로 부려먹’으려는 태도에 대하여 ‘정당하게 돈을 지불하라’고 말하는 ‘체’의 발화에는,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면서 항상 먼저 카드를 내밀어 모든 비용을 결제할 때 그 자신에게 ‘아름다운 관계’란 어떤 방식으로 유지되는 것이었는가 하는 문제가 가만히 깃들어 있다. 그렇다면 “이토록 아름답고 선한, 결국 성스럽게 느껴지는 타자의 형상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라는 물음은 이런 질문으로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 나아갈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 이유 없이 박해받는 존재가 박해를 사랑의 맥락으로 바꿔내기 위해 박해의 메커니즘을 활용하는 때에, ‘체’에게서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을 ‘성스러움’의 이미지로 연결하는 시선은 어떤 행동과 어떤 태도를 가진 어떤 존재를 ‘아름다움’으로 보고 있는가. 그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언명하는 제도로서 문학은 스스로 어떤 ‘아름다움’의 제도이기를 꿈꾸는가.
최근 발표한 글에서 심진경은 ‘여성적 글쓰기’라는 미학적 전략이 어떻게 ‘규칙화’되어 왔는가를 세심하게 검토하면서, ‘미학화’라는 것이 “권위, 권력, 위계 등과 같은 지극히 세속적인 비미학적 힘과 연계”8) 되는 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한다. 기실 여성을 ‘다른 미학’으로 발견하고자 하는 욕망이 오래도록 여성에게 부과되어 온 특정한 ‘아름다움’의 틀을 재생산하기도 했고, 이미 있는 미학적 구도 안에서 여성을 ‘남성’과 대비되는 자리에 단순 배치하여 ‘다름’의 다양한 가능성을 제한하고 축소하기도 했다는 것은 이미 꾸준히 논의되어 온 지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글에서 그 지점이 다시 정리되고 있는 것은, 기존의 ‘문학성’ 담론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전망을 말할 때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것처럼, 특정한 서사나 이미지를 ‘아름다움’으로 발견하는 시선이 소수자를 재현하는 맥락에서 더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것처럼, 여전히 같은 ‘미학’의 문제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는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이기도 해서, 결국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여겨 왔는가 하는 ‘미학화된 시선’의 문제와 무관할 수 없다. 그 시선의 ‘바깥’으로 쉬이 나아갈 수 없는 이상 ‘다른 아름다움’들은 질서에 익숙한 형태의 ‘아름다움’만으로 독해되고 이야기될 것이며, 그런 점에서 ‘미학’에 대한 욕망은 가장 ‘아름다운’ 이름으로 오래된 ‘아름다움’의 역사를 계속 이어 갈 가능성에 항상 발 담그고 있다.
그러므로 심진경의 글은, 지금 문학에서 중요해져야 하는 것은 어떠한 재현이 올바른가 올바르지 않은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미학적 틀을 통과하여 그 모든 재현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물으면서 재현의 미학적 체계 자체를 근본적으로 검토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모색해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가능성이 어떻게 열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전망은 선명하지 않지만, 문학에 대한 여러 논의들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 결국은 여전히 공유되고 있는 미학화된 시선이라는 지적은, 같은 지면의 머리글에서 ‘우리’라고 호명되기도 한 ‘문학’에 질문을 던진다. 잘하는 것을 더 잘하려는 ‘우리’가 어떤 아름다움의 복판으로 ‘모두를 초대’할 때, 초대장을 발부하는 자가 구성하는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우리’와 ‘모두’가 이미 분리되어 있는 언술에서 ‘우리’에 포함되어 있는 자들은 누구이고 ‘모두’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우리’라는 대명사의 본질은 무엇인가.

6) 조연정, 「김멜라 「나뭇잎이 마르고」 심사평」, 『소설 보다: 봄 2021』, 문학과지성사, 2021.03,
http://moonji.com/monthlynovel/27690/
7) 김멜라, 「나뭇잎이 마르고」, 『소설 보다: 봄 2021』, 문학과지성사, 2021.03, 29쪽.
8) 심진경, 「이것은 페미니즘이 아닌 것이 아니다」, 《문학동네》 2021년 가을호, 2021.09, 106쪽.


더 많은 대상을 아름다운 모습으로 발견하려는 마음은 아름다움의 영역으로서의 문학을 보존하려는 마음과 멀리 있지 않을 것이다. 또 아름다움의 영토이고자 하는 욕망은 아름답지 않은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있고자 하는 욕망, 아름다움의 이름으로 우월하고자 하는 욕망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모든 욕구가 영웅이 되고자 하는 욕구인 것은 아니지만, 오래된 아름다움의 제도로서, ‘무쓸모의 쓸모’라는 서사를 발전시켜 온 역사로서, ‘예술’로서의 문학에 대한 욕망은 ‘영웅’인 문학에 대한 욕망과 촘촘하게 얽혀 있다. 스스로를 영웅으로 만드는, 그것도 ‘슈퍼맨’인 영웅이 아니라 ‘클라크 켄트’인 영웅으로 인식하는 위치에서 문학을 읽는 것, 그 위치에서 문학을 말하는 발화의 방법은, 문학은 어떤 자극 속에서도 예외의 자리를 점유하는 문학이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선언으로서 이어져 왔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스스로 예외가 되어 문학은, 아름다움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고립시켜 온 것은 아닌가. ‘모모’에 ‘쓸쓸’이 묵음처럼 붙어 있듯 말이다.
‘쓸모’에 결박되지 않는 문학처럼 ‘아름다움’에 결박되지 않는 문학을 상상할 수는 없을까. 아름다움의 문제를 아름다움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에서 한 발짝 거리를 두면 문학은 문학이 아닌 것이 되어버릴까. 언제나 그렇듯 무언가를 문제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쉽지만 그것 아닌 다른 것을 말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어쩌면 다른 것을 말할 수 있다고 낙관하는 일이 너무 쉽게 이루어지지 않도록 비관을 비관인 채로 견디는 일이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 일에는 문학이 하나의 ‘태도’라는 것, 단 하나의 정언명령만이 문학의 정체성을 구성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는 긴장이 필요할 것이다. 한 문예지로부터 ‘모든 몸은 아름답다’라는 언어에 언어를 더해 주기를 요청받은 김초엽은 ‘모든 사이보그는 아름답다’라는 취지의 캠페인 모델이 되어 달라는 제안을 받는 장애인 사이보그 리지의 이야기로 응답한다. 소설 「#Cyborg_positive」9) 를 통해 ‘아름다움’이라는 ‘태도’를 다른 것으로 바꾸어 보고 싶었다는 김초엽의 서술은, 문학의 장 안에서 통용되는 ‘미학’과 관련하여 무게감 있게 읽힌다.


작년 봄, 짧은 소설을 하나 의뢰받았다. ‘바디 포지티브’, 즉 자기 몸 긍정하기 운동이 주제였다. 바디 포지티브는 주로 해외 패션업계에서 이끄는 캠페인으로 시작되었는데, 아주 마른 체형의 모델이나 글래머러스한 연예인을 미의 획일적인 기준으로 삼는 대신 다양한 몸의 아름다움을 긍정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바디 포지티브가 여성에 대한 또 다른 억압으로 작용하거나 패션업계의 마케팅 문구로만 활용된다는 비판도 이어졌다. ‘모든 여성은 아름답다’는 말은 결국 여성에게 아름다움의 가치를 요구하는 것이고, 이러한 요구는 다양한 몸을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후에 ‘자기 몸 긍정’ 대신 ‘자기 몸 중립body neutrality’이 더 나은 방향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모든 몸의 아름다움을 찾는 대신 우리 몸이 굳이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자는 것이고, 자신의 몸에 굳이 찬사를 보내는 대신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자는 것이다.


(중략)


말하자면 나는 ‘사이보그 중립’의 개념을 생각해 보고 싶었다. 현재 장애인 사이보그들의 삶은 장애의 낙인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지만, 한편으로 사이보그 기술은 인간의 향상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아마도 기술이 지금보다 많이 발전한다면 사이보그를 패션의 아이콘이나 멋진 이미지로 장식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사이보그는 언제나 멸시와 우월 사이에 있는 위태롭고 불안정한 존재다. 그렇다면 트랜스휴먼의 최전선에 서 있는 아이콘이 아닌, 마주치는 사람마다 인상을 찌푸리는 소외된 기계 인간도 아닌, 단지 인간이 가진 하나의 중립적 특성으로서 ‘사이보그성’을 상상할 수 있을까. ‘사이보그 중립’에는 몸의 위계를 줄 세우고 적합한 몸만을 세계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정상성 규범에 저항하는 일이 전제된다.10)

9) 김초엽, 「#Cyborg_positive」, 《릿터》 2019년 6, 7월호, 민음사, 2019.06, 13-14쪽.
10) 김초엽, 「장애의 미래를 상상하기」, 김초엽․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출판사, 2021, 280-281쪽.


「#Cyborg_positive」는 ‘아름다움’의 제안에 대하여 리지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를 보여주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은 채로 마무리된다. 갈무리 없이 멈추어 서는 이 소설의 마침표에서 문학은 같이 걸음을 멈추어 설 수도 있을 것이다. ‘중립’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를 따져 물으면서,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하게, ‘중립’이라는 것이 말해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어째서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포지티브’ 대신 뭉툭하고 지지부진한 ‘중립’에서 머무는 시간이 필요한지를 따져 물으면서 말이다. 선명하게 움켜쥐어지지 않는 ‘중립’이라는 말은 어쩌면 여세실의 시에서 그려지는 한 새벽의 문 닫은 서울대공원 앞 같은 시공간인지도 모른다. 한낮에야 입구이고 출구일 테지만, 밤도 아침도 아닌 새벽 입구도 출구도 아닌 그저 어떤 경계 앞인 지점에서 ‘다르게 말해 보’려는 마음으로, ‘다르게 말해 보’는 일을 고민하는 곳, 그곳이 ‘중립’이라는 말의 장소이고 ‘중립’이라는 말이 함부로 내다보지 않는 어떤 시공간이지 않을까.


과천역에 내렸다 우리 서울대공원에 가려고 한 거다
동물원은 닫혀 있었다


철창 위로 올라가면
어둠 속에서 빛이 떠오르는 걸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짐승의 눈인지
깨진 알일지 한참을 바라보았다


철창 밖의 동물원 슬픔도 없는 식물원


우리를 열면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사랑이라는 말을


다른 언어로 말해 보려고 했다
나 다른 게 될 수 있을까


밀알 하나가 굴러와, 구린내를 풍기며 굴러와, 나를 가로질러 굴러와


나는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태어난 것 같아
우리 모두 비슷한 줄무늬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가 울면 다른 하나가 따라 울고


사방에서 울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깃털이 날렸다
아름답다고 말하고 나면 사라지는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언제나 네 손가락은 축축하고


약속이니까
잘하자 꼭 하자


같아 보이는 웃음이어도
몇 번이고
다르게 말해 볼 수 있는 뒷모습이었다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우리 친구가 되자
그렇게 말하는 순간 친구를 할 수 없게 되니까


첫차를 기다리며
땀을 흘렸다
커다랗게 입을 벌렸다 다다르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고 했다11)



모두 비슷한 줄무늬를 가지고 있는 곳에서도 사방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하나로 들리지 않는다. 서로 다른 것들이 ‘섞여’ 있다는 감각이 분명한 곳에서는, 멀리서 엇비슷하게 보이는 무늬의 흐름이 아니라, 제각각의 무늬를 이루고 있었을 깃털이 하나씩 날린다. “아름답다고 말하고 나면 사라지는” 것은 그 개개의 깃털들일 것이고, ‘나’이기도, 모든 ‘나’들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깃털들 날리는 이곳에서 ‘아름답다’고 말하는 대신 그것을 다르게 말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이라는 말을 다른 언어로 말하듯,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은 그 마음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마음을 덜어낸 다른 언어를 찾아 다르게 말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다른 언어로 말하면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낙관할 수 없겠지만, 그렇게 낙관하지 않겠지만, 낙천적인 미래에 대한 기대 없이도 다르게 말해 보는 일은 가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그런 언어는 도착하지 않았지만, 그 언어에 다다르기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몇 번이고, 말을 시작해보는 것이다.

11) 여세실, 「공통감각」, 《현대문학》 2021년 6월호, 현대문학, 2021.05.














홍성희
작가소개 / 홍성희

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비평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장웹진 202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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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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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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