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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과 인정, 그리고 감정〉―이미상 소설을 중심으로

  • 작성일 2021-07-01
  • 조회수 2,793

[현장 비평]

《문장웹진》은 다양한 시선을 통해 폭넓은 담론을 펼칠 수 있는 ‘비평의 장’을 마련하고자
2020년 진행되었던 〈본격! 비평〉 코너를 정비하여, 2021년 4월호부터 〈현장 비평〉을 선보인다.
2021년 〈현장 비평〉은 신진 문학평론가 9명이 각자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주제를 정해 매월 1편씩 발표된다.



〈공정과 인정, 그리고 감정〉
― 이미상 소설을 중심으로



박서양




1. 능력주의와 감정의 종속


2021년 현재 한국 사회에서 ‘공정’과 ‘능력주의’ 담론은 한정된 자원의 바람직한 분배를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를 점하고 있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자녀 입시 비리 의혹과 더불어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둘러싼 논란, 공공의대의 설립 반대 사태 등 공정성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여전히 그 합의점을 찾기 어려워 보인다. 입시, 취업, 인사 평가, 임금 및 근로조건의 결정 등 생애 주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이 공정이라는 잣대로 판단되며, 불평등의 심화로 인해 분배의 몫 자체가 줄어든 상황에서 공정성에 대한 높은 민감도는 때로 절차와 형식의 공정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르거나, 차이를 둘러싼 적대심이나 박탈감 등의 태도로 표출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청년 세대는 공정의 가치를 드높이며 능력주의를 철저히 체화하면서도 대안적 사회질서를 상상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집단으로 재현된다.


잘 알려져 있듯 능력주의(Meritocracy)는 영국의 철학자 마이클 영이 이론화한 것으로,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배분하는 보상 시스템을 의미한다. 이는 사회의 분배 질서가 어떠한 개인의 ‘특정’한 자질을 ‘특별’한 능력으로 규정하는 방식을 통해 구조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사회가 특정한 자질에 인정을 부여하는 기준에 따라 어떤 능력은 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어떤 능력은 상대적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능력을 규정하는 잣대는 선험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이 언제나 사회적 필요에 의해 구성되고 선택되는 것임을 뜻한다. 그런데 지금 능력주의를 둘러싼 많은 이야기에서 이와 같은 능력의 발생적 기원은 크게 언급되지 않는 듯하다. 그리고 공정한 경쟁의 질서만을 따지는 맹목적 사고는 사회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지위와 서열의 순서가 능력에 따른 가치의 절대 지표라는 믿음을 재생산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사회의 보상 기준 자체가 능력 그 자체를 판단하고 가늠하는 기준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능력은 누가, 어떠한 기준으로 규정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는 일은 지금의 상황에서 유의미하지 않을까. 이미상1)의 소설 속 인물들 이러한 능력의 규정성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이와 같은 맥락 속에 내재된 모종의 불평등한 구조를 가시화시키고 있다.

1) 본고에서 다룰 이미상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하긴」(『2019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19, 317-345쪽), 「티 나지 않는 밤」(웹진 비유 2018년 12월호, 이하 「밤」), 「살인자들의 무덤」(웹진 비유 2019년 9월호, 이하 「살인자」), 「여자가 지하철 할 때」(《문장웹진》 2020년 9월호, 이하 「지하철」). 앞으로의 인용에서는 작품명과 쪽수만 표기하며, 웹진에 수록된 작품은 작품명만 표기한다.


먼저 작가의 데뷔작 「하긴」을 보자. 이 소설의 화자인 ‘나’는 과거 학생운동을 통해 민주화를 경험했던 386 운동권 세대에 속하는 인물이다. 현재 한 언론사에 재직 중인 그는 “번듯한 외국계 인권 단체”에 다니는 아내, 그리고 딸 보미나래와 함께 겉보기엔 정상적인 중산층 가정을 꾸리고 있다. 이를 볼 때 ‘나’는 대학졸업자가 30% 정도에 불과했던 1980년대에 ‘학번’을 달고 졸업해, 경제가 고도로 성장하던 시기에 사회로 진입하여 안정적인 화이트칼라 직종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으며, 현재는 본인의 자녀에게 동일한 지위를 물려주기 위해 골몰하는, 세간에 유통되는 ‘세습 중산층’ 담론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듯 중산층 부모의 전형성을 드러내는 인물 설정과는 달리, 「하긴」의 서사는 딸의 대학 입시를 위한 ‘나’의 투자들이 전부 수포로 돌아가는 실패담으로 귀결된다. 가령, 학습 능력이 부진한 딸 보미나래는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적이 좀체 오르지 않았고, 학생부 종합 전형에 기입할 스펙을 만들기 위해 감행한 미국 유학에서 흑인 아이를 임신한 채 한국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큰 충격을 안긴다. 요컨대, 「하긴」은 교육 사다리를 통해 자녀에게 부와 지위를 성공적으로 물려주는 중산층 부모의 모습을 그린 소설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만일 「하긴」이 배타적 가족주의를 바탕으로 자식에게 계층을 세습하기 위해 골몰하는 386세대의 모습을 비판하기 위한 소설이었다면, 차라리 보미나래가 우여곡절 끝에 입시에 성공하는 모습을 그리는 편이 보다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은 평론가 김녕이 이 작품의 해설에서 “‘나’는 딸 보미나래와 함께 대입이라는 불가피한 괴물의 희생양인 걸까? 과연 이 소설은 다만 우리로 하여금 ‘학종 비판’에 가담케 이끌고 있는 것일까?”2)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작품에는 세습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환원되지 않는 문제적 의미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2) 『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19, 352쪽.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딸은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노래야?’ 물어도 딸은 웃기만 했다. 자작곡은 늘어만 갔고 나는 혹시 딸애가 작곡 영재가 아닐까? 그건 공부머리랑은 또 다른 거니까, 기대를 품었다. 노래의 의미를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직관상적 기억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암기를 위한 노래’를 만들어 본 적이 없다. 아내에게 물으니 아내도 그런 적이 없다고 했다. 약간 얼굴을 붉히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든 우리는 그런 종자가 아니다. 그런 종자. 절기를 외우기 위해 절기에 멜로디를 붙이는 종자, 연표를 외우기 위해 연표의 앞 글자만을 따 괴상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종자, (…) 한마디로 머리가 나쁜 종자.”
(「하긴」, 318쪽)


일찍이 마이클 영은 그의 저서인 『능력주의』라는 책에서 ‘능력’의 정의를 ‘지능’과 ‘노력’의 결합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이렇듯 능력을 구성하는 양자 사이의 결합이 그리 단순하게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이를테면 많은 경우에 지능은 유전적이고 선천적인 영향이 강하게 작용하는 영역으로 여겨지며, 노력은 이렇듯 태생적으로 불평등하게 주어진 지능 혹은 재능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힘과 자원을 투입하는 인위적 개입으로 간주된다. 또한 노력의 가치가 점차 하락하는 시대적 흐름과 맞물려, 지능지수는 개인의 생물학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근거로 활용되는 경향이 있으며, 온라인상에는 높은 지능지수를 갖지 못한 이들에 대한 비하와 멸시가 담긴 표현이 등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제 소위 ‘치맛바람’으로 불리는, 부모가 자녀의 교육에 유별나고 과도하게 개입하는 일은 어딘가 모르게 속물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하루에 네 시간만 자면서 입시 과목 위주로 공부하는 식의 ‘노력’을 강조하는 일 역시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여겨진다. 가령, ‘나’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딸의 모습은 “책상 위에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놓여 있고”(330쪽), “자낙스랑 졸로프트”를(같은 쪽) 먹어 가며 카이스트에 진학한 친구 석형의 딸이 아닌, “사르트르 따위를 읽다가 최연소로 등단해 국공립 예술대학에 들어”간(322쪽) 문의 딸 초롱이다. 이렇듯 능력을 구성하는 요소 사이에도 모종의 위계가 존재하며, 이는 타고난 특별함을 욕망하는 ‘나’의 자의식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보미나래의 재능과 능력이 부족하다고 파악하는 것일까? ‘나’가 딸에게 보내는 확신에 가득 찬 경멸의 시선은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한 인간을 평가하게끔 만드는 능력이라는 잣대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게 만든다. 예컨대 ‘나’가 보미나래를 ‘무능’과 ‘저능’의 단어로 규정할 때 가장 많이 활용하는 근거는 딸의 지능 검사 결과와 학습 능력의 부진이다. ‘나’는 인간을 자연적으로 타고난 지적 능력에 따라 이미 완성된 존재로 인식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지능 지수 혹은 시험 점수가 사람의 모든 능력에 대한 우열로 확장될 수 있다고 바라보는 사고가 전제되어 있다. 하지만 과연 보미나래는 단지 ‘무능’과 ‘저능’이라는 단어만으로 규정될 수 있는 걸까? 그녀가 가족들 몰래 집 밖을 빠져나가 도시의 공공장소들을 돌아다니며 때로 필요한 이에게 임신테스트기를 건네거나, 그저 옆에 가만히 있어주었던 행위들에는 정말 그 어떠한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을 남긴 채로 「하긴」의 세계는 잠시 문을 닫는다.


2. 적의 수준이 나의 수준이다


「하긴」이 계급 재배치의 시기에 중산층 부모가 갖는 지위 하락에 대한 두려움을 보여주는 텍스트라면, 「살인자」는 그와 같은 하강과 추락에 대한 불안감이 의도적으로 제거된 작품으로 읽힌다. 이 텍스트는 소설 안에 ‘살인자들의 무덤’이라는 동일한 제목의 또 다른 소설을 품고 있는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 내부 소설을 이끌어 가는 화자는 세간을 충격에 빠뜨린 희대의 살인마들이 죽은 뒤에 묻히게 될 공동묘지라는 흥미로운 장소를 상상해 낸다. 유영철과 정남규, 존 레논을 암살한 마크 채프먼 등이 잠들어 있는 그곳은 표를 구입한 뒤 들어가야 될 만큼 상업화된 관광지로 변모된 이후다. 이 공동묘지는 여성과 남성, 피살자의 사회적 지위 등 몇 가지 위계질서에 따라 공간적으로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이를테면, 태아의 죽음과 영아의 죽음, 원한 감정으로 인한 살인과 ‘묻지마’ 살인,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된 사건과 그렇지 못한 사건들 사이에 존재하는 가치평가의 관계가 무덤의 위치를 결정하는 식이다. 즉, 이곳에서 자신이 묻히게 될 위치는 생전에 그에게 부여된 관심과 인정, 분노와 동경 등의 감정들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표지인 것이다. “더 높고, 더 귀하고, 더 아름다운 묫자리를 지향”하고자 하는 인물의 의지는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이 같은 지위와 인정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심의 발현이며, 이때 발생하는 서사 공간의 이동은 상승 의지를 가진 정위(定位)적 주체의 적극적인 위치 만들기 행위로 볼 수 있다.


정신분석적 인간학에 따르면, 사람은 상징계에 진입하기 위해 자신의 욕망의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결여의 존재이고, 언어와 문화의 질서에 포획되면서 존재의 분열을 받아들여야 하는 신경증을 앓는 주체다. 이와 같은 상징화 과정은 주체가 문화적 영역이 정해 놓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법을 배우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정은 능력주의라는 성과 보상 시스템에 속해 있는 구성원에게도 경험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령, 능력주의 체제에서 사람은 타고난 자질을 계발하여 실제적 삶으로 실현해야 하는 의무를 부과 받으며, 이 과정에서 스스로의 능력을 변형하고 조율하며 제도화시켜야 한다. 주체는 전능한 자신에 대한 환상과 유아기적 나르시시즘 상태에서 벗어나 상징 질서에서 허용된 자유만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연령, 계층, 젠더, 장애, 질병, 시대적 상황 등 복잡한 요인들이 그가 현실적으로 능력을 통해 자아를 실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범위를 제한한다. 요컨대 사람이 자신에게 갖는 소망의 내용과 그가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이 될 수 있는가의 현실적 문제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하며, 이는 삶에 있어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실존적 조건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이러한 간극이 사회적 차별이나 소외의 결과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사회구조적으로 존재하는 기회의 불평등이 된다.


이러한 기회 불평등 구조를 고려할 때 「살인자」 속 인물의 과잉 긍정적 태도는 문제적인 성격을 띤다. 그는 오로지 더 높은 곳만을 바라보는 상승 지향적 존재이며, 동시에 성취가 실패할 가능성을 셈하지 않는 현실감 없이 부풀려진 자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제약받지 않는 긍정성은 ‘나의 입지와 위치는 내 자신이 만든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면서 사회적 위치를 개인화시킨다. 달리 말해 그에게는 인간이 자신의 재능과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높이 오르고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낙관적 사고가 전제되어 있는데, 이때 사회적 계층 이동의 문제는 단순한 직선적 좌표 위에서 이루어지는 상승과 하강으로써의 위치 변환 과정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소설은 이내 이러한 낙관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기회 불평등 요소들을 드러내며 현실적 좌표의 축을 복합적인 것으로 만든다. 예컨대 아래의 인용문에는 부유층을 살해함으로써 자본주의와 빈부격차에 대한 증오적 메시지를 사회에 던지고자 했던, 그러나 바로 그 계급적 격차로 인해 발생한 모종의 무지 때문에 자신들의 과업을 달성하는 것에 실패하는 ‘JJ파’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JJ파의 본래 이름은 마스칸. 야망이란 뜻의 희랍어. 그들은 야망 찼고, 정신도 무장했다 ― 칼 한 자루, 물 한 병, 지리산에서의 일주일―. 근데 부자를 몰랐다. 부자의 눈빛, 부자의 패브릭, 부자의 거주지 지리를 몰랐다. 그리하여 엉뚱한 사람들만 죽이고 다녔다. 부자인 줄 알고 잡으면 부자가 아니었다.”(「살인자」)


조지프 피시킨에 따르면,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세상이나 기회와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선호나 소망, 능력을 발전시킨다”.3) 이러한 관점에서 도시는 단순히 공간을 이루는 물질적 토대가 아닌 거주자들이 서로간의 유대와 교류를 통해 구축하는 사회적 네트워크 자체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게 특정 지역으로의 이주는 지위 상승과 같은 목표를 이루기 위한 지리적 전략이 된다. 어떠한 동네는 학군과 주택 가격에 따라 계급 상승의 욕망을 가진 이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곳이 되고, 비슷한 곳에서 사는 이들은 활발한 네트워크의 형성을 통해 서로의 소망을 자극한다. 여기서 실제로 중요한 것은 그들이 단지 같은 곳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지리적 동질성이 부여하는 상호작용의 내용과 질적인 측면이라 할 수 있다. 인용문에서 JJ파가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 역시 그들의 목표 집단이었던 이들과의 교류 부재로 인해 현실적으로 목표에 도달하는 방식 자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으로 그려진다. 계층에 따른 지리적 분리는 타인과 접촉하고 대면하는 빈도를 결정지으면서 한 사회의 기회 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3) 『병목사회』, 조지프 피시킨 저, 유강은 역, 문예출판사, 2016, 14쪽.


이렇듯 ‘JJ파’의 예시가 기회 불평등 구조에 있어 계층에 따른 지리적 분리가 만들어내는 상호작용의 부재 문제를 다룬다면, 「살인자」의 후반부에는 젠더와 안전의 문제가 결정적으로 다루어진다. ‘살인자들의 무덤’이라는 상상적 공간에서의 이야기를 다루었던 내부 소설이 끝나고 서사를 이끌어가는 화자가 극적으로 바뀌게 되면서 소설은 성차에 따라 다르게 주어지는 안전의 격차를 문제화한다. 앞서 살핀 내부 소설에서 살인의 모티프가 인정 투쟁과 계층 이동을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적 장치에 가까웠다면, 외부 소설에서 죽음과 피살의 문제는 젠더와 안전의 영역과 겹쳐지며 매우 실제적인 감각을 주는 사건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환과 더불어 소설은 기회의 불평등 구조에 안전의 문제라는 또 하나의 축을 겹쳐 놓는다. 누스바움은 인간이 자신의 역량을 실현하는 문제는 그의 안전과 안위를 보장하는 일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고 말한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역량이 상실되지 않을 권리, 오늘 자신이 가진 능력을 내일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필요한 것이다.4) 이와 같은 통찰은 위험과 불안의 불평등 역시 기회의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안전에 대한 문제의식은 「지하철」에서 조금 더 첨예하게 서사화된다.

4) 『역량의 창조』, 마사 누스바움, 한상연 역, 돌베개, 2014, 174쪽.


3. 적의 수준은 나의 수준일까?


「살인자」가 ‘적의 수준이 나의 수준이다’라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라면, 「지하철」은 이러한 구호를 비틀어 ‘적의 수준은 나의 수준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수진이 고작 20분 동안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일이 사건의 전부인 간단한 구조의 이야기다. 여느 때처럼 조용한 지하철에서, 수진은 앞좌석에 앉은 남자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불안감을 느낀다. 문제적인 것은 객실의 구체적인 상황과 그녀에게 불안감을 안기는 남자에 대한 설명이 생략된 채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가 일촉즉발의 상황 앞에 놓인 위태로운 인물인지, 아니면 의심과 불안으로 인해 매사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신경증 환자인지에 대해서 독자는 확신에 찬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이러한 서술로 인해 오히려 분명해지는 것은 수진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다른 이의 시선에 대처할 수 없는 상태로 지하철을 타고 있다는 점이다. 수진의 일방적인 시선 속에서 남자는 두려움과 불신, 적대감의 원천으로 형상화되며 이는 그가 아직 ‘정상적인’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임을 드러낸다.


그러나 남자가 시민으로서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경계선 바깥에 위치한 인물이라면, 수진역시 그와 같은 시민적 인정의 영역에 불안정하게 통합되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은 불안감, 안전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그러한 자신의 판단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어 혼란스러운 상태이며, 순간 자신이 모든 사람을 의심하는 이가 된 것만 같은 자기회의감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요컨대, 그녀에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행위는 이 모든 감정들을 자신의 내면에서 홀로 감수해야 하는 정서적 비용을 지불하는 일이다. 이렇듯 「지하철」은 여성-무산자-주변부 도시민이라는 삶의 조건과 일상적 감정 지출의 경제 사이에 놓여 있는 불균등한 분배 구조를 가시화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악화되기만 하던 수진의 고립감과 불안감은 ‘뜨개질 여자’가 등장하게 되면서 극적인 전환을 맞는다. 수진이 경계하던 남자 옆에 새로 탄 여자가 태연하게 앉으며 객실의 분위기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비록 수진은 이 여자를 “미끼 여자”(41쪽)라고 규정하고, 위험한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하는 둔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남자의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뜨개질을 하는 행위로 인해 수진의 긴장감은 확연히 누그러지는 양상을 보인다. “누가 내 머리 위에 꿀을 부었지? 달콤한 꿀 같은 안도감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흘러내린다.”(41쪽) 이때 여기서 뜨개질 하는 여자의 이미지는 「하긴」의 보미나래와 연결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정말로 보미나래와 수진은 아주 우연히 지하철에서 조우한 것은 아니었을까? 두 텍스트를 이와 같이 교차해서 읽을 때, 보미나래의 아버지가 “종종 뜨개질감을 들고 종점에서부터 종점까지 버스를 타는 것 외엔 별다른 일탈도 않는 착한 딸.”(321쪽)이라고 언급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긴 그녀의 행동에는 무언가 다른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게 되는 것 같다.


사회전염 사건이란 생각과 감정과 행동이 전염되면서 타인이 우리 삶에 영향을 주는 사건을 말한다.5) 신체적이고 관계적인 정동은 동시에 전염적(contagious)이다. 신경과학에서는 두뇌의 거울 뉴런 때문에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느낌과 기분을 공유할 수 있고 타인을 모방하는 성향을 갖는다고 본다. 예컨대 수진이 자신의 자리를 옮기지 않고 끝까지 남자의 근처에 앉아있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보미나래 덕분이다. 보미나래는 그저 그곳에 아무렇지 않게 앉아있는 행위만으로 객실의 긴장감을 감소시키고, 동시에 남자에게는 자리의 일시적 점유자로서의 체면과 인정을 부여한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의 체면과 관련하여 그들이 어떠한 감정을 얼마만큼 느끼는지를 배분하고 규정하는 것이다.

5) 『감정은 어떻게 전염되는가』, 리 대니얼 크라비츠, 조영학 역, 동아시아, 2019, 10쪽.


주디스 버틀러에 따르면, “우리 각자는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신체―욕망과 물리적 취약성의 부지로서의, 단언적이면서 동시에 노출된 공공성의 부지로서의―의 사회적 취약성에 의해 정치적으로 구성된다.”6) 이때 객실에 앉아 있는 인물들의 신체는 복잡한 상호작용을 이루는 역동적인 장소이며, 사회적 인정관계를 만들어내는 매개체이자 생산체로 등장한다. 예컨대 수진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일은 남자에게 사회적 인정과 체면을 부여하는 행위이지만, 동시에 그와 같은 행위를 통해 그녀 자신이 환대자라는 시민적 구성원으로서의 인정을 부여받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이때 수진은 상실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취약성을 지닌 몸이자, 타인의 예측 불가능성을 자신의 시민적 조건으로 구성하는 상호성의 주체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6) 『위태로운 삶』, 주디스 버틀러, 윤조원 역, 필로소픽, 2018, 49쪽. 관련된 논의로는 이 책의 2장을 참고할 수 있다.


요컨대 「지하철」이라는 작품은 공공장소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그러나 개인의 내면 바깥으로 좀체 돌출되지 않는 미묘한 순간의 실재성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간파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때 흥미로운 지점은 수진이 스스로를 ‘환대 계급’에 속한 ‘존재 노동자’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진에게 ‘환대’는 존재론적 소모를 야기하는 상호작용 행위이자, 자신의 몸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생산하는 노동 행위로 인식되며, 그녀가 환대를 수행하는 이유는 오로지 자신이 처한 계급적 조건 때문이다. 이와 같은 파격적인 인식에는 어쩐지 섬뜩하게 느껴지는 구석마저 존재하는 것 같다. 그래서 처음 「지하철」을 읽었을 때 이 부분은, 견고한 등가 교환의 원리에 갇혀 일상의 모든 가치들이 상품화되는 위태로운 징후를 드러내는 것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이는 김미정이 지적한 대로 이 소설이 “발화위치의 정치학에 대한 문제의식을 서사화했지만, 그것을 통해 어떤 세계를 다시 상상할 수 있을지”7)의 문제까지 나아가지 않는 듯하게 보이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7) 「환대는 멸균실에서 나오지 않는다」, 김미정, 《문학3》 2021년 1호.


그러나 수진의 이러한 명명 행위는 읽는 이에게 어떠한 질문들을 던지게끔 만든다. 예컨대 수진이 자신의 행위를 노동으로 정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의 노동권에 대한 요구는 과연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 이 ‘존재 노동’이라는 명명 자체는 어떤 정체성과 윤리적 규범에 도전하고 있는 것일까? 비록 이 글에서 완전한 해답을 내리기는 어렵겠지만, 이 경우엔 이렇듯 짧은 순간에 대한 관찰과 포착 자체가 현실을 달리 사유하게 하는 개입이자, 손쉽게 휘발되곤 하는 찰나적 경험을 인식하고 명명하는 상징화 과정이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징적 실천을 통해 세계의 질서에는 다시 어떠한 변화가 만들어지는지를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수진에게 “새 말을 기입하는 건 새 세계를 들여오는 일”(「밤」) 그 자체였다는 사실을 되짚을 필요가 있다.


4. 영혼의 세 번째 부분


“우리가 사람들을 지능과 교육, 직업과 권력만이 아니라 친절함과 용기, 상상력과 감수성, 공감과 아량에 따라서도 평가한다면, 계급이 존재할 수 없으리라. 어느 누가 아버지로서 훌륭한 자질을 갖춘 경비원보다 과학자가 우월하며, 장미 재배하는 데 비상한 솜씨를 지닌 트럭 운전사보다 상 받는 일에 비상한 기술이 있는 공무원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8)

8) 『능력주의』, 마이클 영 저, 유강은 역, 2020, 이매진, 268쪽.


「밤」에서 수진은 동료 수미와 함께 한 개인 병원의 안내데스크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병원 원장에게는 두 사람의 얼굴에 습관적으로 물을 뿌리는 고약한 악취미가 있는데, 이는 수진과 수미에게 상당한 모멸의 경험으로 다가온다. 그는 수진이 ‘자기 주제’를 좀 알았으면 하고 생각하는 인물이며, 수미가 한때 자신의 부모로부터 장래에 대한 기대감을 한 몸에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다. 그가 가하는 모욕이란 병원 원장과 안내 데스크 직원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근거로 삼아 수진과 수미를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고, 그녀들의 미래 가능성을 일방적으로 재단하는 일이다. 한 사람의 현재적 위치가 그의 미래상까지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은 원장에게 별다른 고려사항이 되지 못한다. 그에게는 오로지 직업적 위계서열에서 오는 우월감을 만끽하는 일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하긴」에서 보미나래의 아버지가 사회의 위계적 질서를 통해 인간성을 강력하게 구분하던 태도와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은 듯 보인다.


모욕에는 미래를 향한 자기실현적 성격이 내장되어 있다. 심리학에서 자기실현적 예언은 어떠한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 예측하는 행위만으로 그러한 기대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일을 뜻한다. 인간은 앞날에 대한 꿈과 계획,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지금을 살아가는, 미래에 근거해 현재에 존재하는 자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미래를 향하도록 하는 에너지의 원천은 바로 자신에 대한 현재적 판단이다. 이때 모욕은 한 개인에게 부정적인 자아상을 부여함으로써 자기 관계에 훼손을 일으킨다. 모멸 당한 사람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동시에 그것을 부정하는 자기 자신과도 싸워야만 한다. 이것은 모멸적인 낙인이 주체에게 은밀하게 부과하는, 그림자처럼 드러나지 않는 스스로와의 경합 과정이다. 감정적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은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매순간 실존적 투쟁을 벌이는데, 이는 한 사람이 가진 감정적 에너지를 낭비시키며 역량의 실현 가능성을 저해하는 정서적 불리함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특히 능력주의 사회에서 감정은 그것이 보상하는 사적 소유와 공적 지위에 종속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 시스템은 구조적으로 약자에게 더 많은 감정 낭비를 부과함으로써 그 사람의 계층 이동성을 제한하고 불평등을 고착화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성공하지 못한 자들에 대한 모멸적 편견은 자기영속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사회적 무시와 억압으로 인해 차별받는 주체는 곧 자신의 훼손당한 존재적 지위를 회복하기 위하여 인정 투쟁에 나서게 된다. 인정받지 못하는 상태는 도덕적인 분노를 불러일으키며 이는 폭동이나 봉기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한 투쟁의 형태로 분출되는 것이다. 예컨대 「밤」에서 수진은 수미와 원장에게 자신이 퇴근 후에 소설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게 되고, 그런 수진에게 원장은 “취해 살지 말어”라고 말하며 그녀의 얼굴에 물을 뿌린다. 돌이킬 수 없는 모욕적 상황을 경험한 뒤 수진은 더는 회사에 출근하지 않게 된다. 이는 물론 자신에게 부당하게 가해지는 존재론적 왜곡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그녀의 저항이다. 그러나 수진을 모멸감에 노출시키는 조건들이 매우 다층적인 사회 구조와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그녀가 감행하는 인정 투쟁의 양상 역시 단지 회사를 그만 두는 정도의 일원적인 것으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다시「지하철」로 돌아가 보자.


그리스어에는 투모스(thumos)라는 단어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 투모스를 인간의 영혼을 구성하는 세 번째 부분으로 소개한다. ‘용기, 기개, 용맹함’과 같은 뜻으로 변역되는 이 말은 사람이 인정을 추구하고 존엄을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이 비롯되는 곳을 가리킨다. 고대에 이와 같은 투모스는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가는 전사 혹은 군인들만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다. 자신의 신체적 안녕을 포기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공동체 안에서 가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이 동등하게 존중받아야함을 표방하는 현대에 와서 이러한 투모스의 개념은 개인의 자부심 혹은 인간 존엄성을 다루는 문제가 되었다. 다시 텍스트로 돌아오면, 수진에게 지하철은 불안감과 공포를 경험하는 억압적인 공간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수진은 자신의 내면적인 갈등을 딛고 불확실성의 상대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표시한다. 이러한 수진의 행위는 이러한 전사의 모습과 어딘지 겹쳐지는 측면이 있다. 수진으로 하여금 위험을 감수하도록 이끄는 심적 요인이 그녀의 자부심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수진의 내면에는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인 코나투스(conatus)와 타자에게 기꺼이 자신을 내맡기는 투모스가 기이한 공생 관계를 이룬다. 그리고 이러한 역설이 발생하는 지점에서 그녀는 자신의 억압적 실존 조건을 긍정적 감정을 산출하는 심리적 기제로 변형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본고에서 이미상의 소설을 통해 검토한 기회 불평등적 요인으로는 한 사람의 자질이 능력으로 호명되지 못하는 비규정성의 문제, 계층에 따른 지리적 분리가 야기하는 상호작용의 부재와 관련한 문제, 능력의 계발 자체를 위협하는 안전에 관한 문제, 구성원에게 부정적 감정을 부과하는 구조의 문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중층적 요인들이 수진에게 제한된 기회와 사소한 좌절들을 안겨준다. 그녀에게 지하철은 이와 같은 복합성이 응축되어 있는 공간이다. 우선 수진에게 그곳은 자신에게 모욕감을 주는 상사가 있는 직장으로 출근하기 위한 교통수단이자, 일상적으로 낯선 이방인과 접촉하게 되는 공공장소이며, 그곳에서 수행하는 ‘지하철 하는’ 행위에 대한 감각은 아주 어렴풋하게만 인지되어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이러한 측면에서 수진에게 지하철은 그녀 자신이 소외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살폈듯, 수진은 그 공간 안에서 자신을 스쳐가는 짧은 순간에 대한 느낌을 포착해 그러한 찰나에 ‘존재 노동’이라는 적극적인 이름 붙이기를 실천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이제껏 그녀를 둘러싼 억압적 실존 조건을 전유하며 그로부터 창출되는 환대적 몸짓을 노동과 능력의 범주로 호명하기 위한 전략이 된다. 자신에게 불안과 공포와 같은 부정적 감정을 부여하는 구조적 요인들을 사회적 관계와 자부심을 창출하는 원천으로 호명하면서 자신을 소외시키는 조건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적 해석의 전복을 통해 수진은 자존감과 자부심을 바탕으로 한 긍정적 자기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수진은 그녀가 소유할 수 있는 심리적 자원의 질을 스스로 결정하면서 자신에게 부정적 감정을 부과하는 구조로써의 능력주의 질서와 적극적으로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다.


끝으로, 수진의 이러한 명명 행위는 미규정된 상태로 존재하는 가치들의 실재성을 드러내면서 새로운 인정 투쟁의 계기를 마련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이제껏 충분히 인식되지 못했던ㅡ예컨대 보미나래의 공공화장실에서 “옆에 옅게” 있어주는 능력 같은ㅡ 자질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언하면서 그것들이 적절히 의미화되어야 할 필요성을 구성한다. 능력의 발현은 개개인이 가진 특성에 올바른 인정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한 사회의 기회 구조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가치의 중요성을 결정하는 사회적 권위들이 다양성을 가질 때, 비규정성으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음을「하긴」의 마지막 장면은 결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간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능력의 원천을 다원화하는 일은 어쩌면 유한한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의 문제에 맞서 그것의 부정의를 지적하고 정면으로 돌파하는 방식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방식은 한 인간을 협소하고 폐쇄적인 기준에 맞춰 서열화하는 배치의 권력으로부터 해방을 도모하는 자기규정적인 실천이 되기에는 충분하다. 지금 우리의 앞에 기존의 질서 안에 포함된 능력의 범위를 확장시키면서, 한 인간이 무엇이 될 수 있고 또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질문하는 소설이 도착해 있다. 이러한 질문에 우리는 어떠한 응답을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고민은 아마 남겨진 자들의 몫일 것이다. ■












박서양
작가소개 / 박서양

문학평론을 씁니다.


《문장웹진 2021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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