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등단 말고 다른거

  • 작성일 2021-06-01
  • 조회수 3,534

[현장 비평]

《문장웹진》은 다양한 시선을 통해 폭넓은 담론을 펼칠 수 있는 ‘비평의 장’을 마련하고자
2020년 진행되었던 〈본격! 비평〉 코너를 정비하여, 2021년 4월호부터 〈현장 비평〉을 선보인다.
2021년 〈현장 비평〉은 신진 문학평론가 9명이 각자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주제를 정해 매월 1편씩 발표된다.



등단 말고 다른 거



김동진




1. 새로운 시인


2020년 말,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흥미롭게 느낄 만한 소식이 하나 발표되었다. 등단하지 않은 사람이 〈제39회 김수영문학상〉의 수상자로 선정된 것이다. 소위 문단이라고 불리는 영역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등단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등단하면 ‘프로 작가’로 인정받고, 원고청탁을 받으며 문단 활동을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작가라고 소개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글을 쓰는 일이 생산성을 갖는 일이라는 믿음을 갖기 위해서라도,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등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문학을 계속해도 된다는 허가증이자 자격증처럼 인식되고 있었다.
반대로 등단제도와 관련하여 문단 내 권력 편중의 문제는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등단제도를 통과하기 위해 기성 문단의 기류에 맞춰 작품을 쓴다든지, 심사 과정에서 자신의 제자나 동료 문인의 제자라는 이유로 당선자를 뽑는다든지, 영향력 없는 지면에서 등단하면 활동이 힘드니 메이저로 재등단을 해야 한다느니 하는 소리는 여기저기서 심심찮게 들려오는 말이다.1) 어떤 이들은 등단제도의 폐지를 바란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이렇게 등단에 대한 여러 의견이 오가는 중에 비등단자가 문학상을 받았다.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상을 받는, 등단 말고도 문단에 진입하는 새로운 방법이 제시된 것이다. 그것도 기성 등단 시인들도 함께 원고를 투고하는 문학상에서 상(賞)을 받았으니,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흥미롭게 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이번 사건의 주인공인 이기리 시인 말고도, 비등단 시인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은 이전에도 존재했다. 가까운 시기에서 찾는다면, 서호준 시인과 김누누 시인이 있다. 이기리 시인은 《조선일보》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등단’하지 않고 작품 활동을 시작한 서호준․김누누 시인을 보고 힘을 냈다.”2)라고 말했다. 그가 언급한 두 시인은 작년에 출판사 ‘파란’에서 각각 『소규모 팬클럽』과 『착각물』을 냈다. 2020년 한 해에 비등단 시인이 최소한 세 명 탄생한 것이다. 이 이례적인 사건들의 연쇄가 우리에게 어떤 변화의 기미를 감지하게 한다. 문단에 섞이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등단 말고도, 문단에 진입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는 앞서 언급했던 등단제도의 문제로 거론되던 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기성 문단의 시류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지점을 그들의 시에서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시는 언제나 새로워야만 한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언어로 말하고, 익숙한 사물에서도 낯선 것을 찾아내는 것이 시의 기초적인 작동 원리다. 문단 역시 그러해야 한다. 새로운 시를 쓰는 새로운 시인이 언제나 문단에 공급되어야 한다. 등단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등장한 이들과, 등단으로 등장한 이들을 모두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종국(終局)에는 문단 역시 확장되어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방법으로 등장한 이들의 시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글을 읽고 쓰는 사람들의 의무다. 이것이 이기리 시인과 서호준 시인, 김누누 시인의 작품들을 묶어 읽어 보려 하는 이유다.

1) 이러한 시각은 《문장 웹진》 2021년 4월호의 「2021년 기획 연속좌담 ‘등단’ 1차 ‘시선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ebzine.munjang.or.kr/archives/148193
2) 〈등단하진 못했지만, 나는 이기리라〉, 《조선일보》, 2020.12.28. https://www.chosun.com/culture-life/2020/12/28/S3TJCRIHGBFTND55Y5VWJYKVCI



2. 이기리,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민음사, 2021


글을 시작하며 언급한 사건의 주인공, 이기리 시인의 시집부터 살펴보자.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시에 ‘나’가 등장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는 것이다. 화자가 자신의 체험과 감정, 생각을 진술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시가 대부분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기리 시인의 시에서 그려지는 세계는 화자라는 주체를 거쳐 탄생한다. 서술어의 시제 역시 과거형인 시가 많은데, 이는 이미 완결된 과거의 경험을 화자가 진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다. 물론 화자의 경험이 곧 시인의 경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시인과 화자를 분리하는 것은 시 읽기의 기본이다. 따라서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풀어내고 이해받고 싶었다면 르포나 에세이를 쓰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째서 화자가 자신의 경험담을 진술하는 듯한 방식으로 시를 쓰는 것일까? 그 의도를 따라가다 보면, 이기리 시인의 언어가 보여주는 특징적인 국면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시집을 열고 처음 만나는 3편의 시가 눈에 들어온다. 첫 시 「가넷-탄생석」에는 “아빠”에게 돌을 선물하려는 “아이”와, 돌은 “딱딱하고/깨졌고/더럽”다며 “얼른 그것을/버”리라고 명령하는 아빠가 등장한다. 아이는 어쩔 수 없이 돌을 버리고 가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다음 시 「여름 성경 학교」에는 친구가 나온다. 이름도 몰랐던 그 친구는 화자가 곤란한 상황일 때 사탕을 주며 웃어 주었고, 그 뒤로 둘은 함께 공원에서 자전거를 탈 정도로 친해졌다. 그리고 그 친구의 집에 놀러갔을 때 어떤 “남자 아이가 나와” 화자의 “입을 틀어막고” “소파에 강제로 눕”힌다. “바지가 반쯤 벗겨졌을 때” “다른 방에서” “친구가” 나와 상황이 정리된다. 친구네서 나온 화자는 “산책이나 하다” 집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는 「두 개의 얼굴」이다. “엄마”는 화자를 “부엌으로 불렀”고, 화자는 “의자에 앉”는다. 엄마는 “팔꿈치 한쪽을 식탁에 올리고” “입술에 뽀뽀를 해달라고 말”한다. 화자가 “입술로 입술을 맞대”자 “엄마는 나머지 팔꿈치 한쪽을 식탁에 올리고” 화자의 “볼을 감”싸더니 “혀를 집어넣”는다. “악어처럼” 화자의 입술을 삼키던 엄마는 “혀를 다시 넣고 가방을 챙겨” 주고, “찬송가를 따라 부르”며 “부엌에서 심장을 손질”한다. 이내 장면이 전환되고, “애인이 가로등 아래서” 화자에게 “입을 맞춰 달라고” 말한다. 화자는 “사랑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상 3편의 시가 보여주는 정황은 모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시에서 묘사되는 관계가 어딘가 비틀리고 어그러진, 폭력이 함유된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두 시에서 읽어낼 수 있는 정보에는 차이도 존재한다. 첫 시 「가넷-탄생석」의 화자는 아이와 아버지와 거리를 두고, 둘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을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어미는 현재형 ‘-ㄴ다’가 쓰이고 있다. 그러나 「여름 성경 학교」와 「두 개의 얼굴」의 화자는 모두 사건의 당사자다. 두 시는 모두 과거형 선어말어미 ‘-었’을 사용하는, 체험을 기술한 시이기도 하다. 이 차이는 폭력의 중요한 특성을 보여준다. 폭력의 당사자들은 시간이 지나도 그때의 상황과 감정을 기술할 수 있다. 즉, 폭력의 경험이 내면화되어 주체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네 번째 시 「어린이날」에는 폭력적인 상황을 경험한 주체가 그것을 돌보지 못했을 때 어떤 상황이 발생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어린이날」의 화자는 “동생이 자고 있는 사이” 동생이 좋아하는 “금발의 인형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목을 부러뜨린 적이 있”다고 고백한다. 화자는 “우는 동생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고” “잘못을 빌었”으면서도, “다시 모두가 잠든 사이에” 몰래 동생이 선물 받은 “인형의 얼굴을 바꿔 끼”운다. 화자는 찬탈(簒奪)한 “나의 아름다운 인형”을 “손바닥”에 “올려두고”, “목이 돌아간 줄도 모르고” “꿈도 안 꾸고 잘” 잔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것이 있다면, 화자가 재혼 가정의 아이로 보인다는 점이다. “소풍을 간다고 하면 아저씨가 특별히” “김밥”을 “싸 준”다거나, 동생과 화자로 파악되는 “우리”는 “한 방울의 피도 섞이지 않았”고 “성이 다르다”고 하는 것에서 그것을 읽어낼 수 있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정당하게 결정된 이혼과 재혼이라고 해도, 아이에게는 거대한 불합리와 상실로 인식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모르는 사람과 “같이 살게” 되어도 “변함없는 사랑이 이어질” 거라고 말했던 것처럼 시에서 그려지는 가정의 모습은 분명히 사랑이 넘치는 것으로 보이지만, 아이는 “내어 주는” “발등”에 “발바닥을 포”개고 어른의 춤을 따라갈 뿐이다.
이때 우리는 화자가 우는 동생 앞에서 잘못을 비는 모습에 주목해야 한다. “밥도 알아서 잘 챙겨 먹고 동생도 잘 돌볼게요”라는 말에서 보이듯, 화자는 울고 있는 동생이 아니라 보호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다. 화자는 자신이 보호자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다시 가정이 깨질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지속되는 불안과 공포는 결국 “동생”이라는 엉뚱한 방향으로 배출된다. 화자가 반복적으로 동생의 인형을 망가뜨리거나 빼앗는 이유다. 두려움에 내몰린 화자는 자신의 행동이 몰고 온 결과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동생의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무너질 것 같은 자신을 유지하기에 급급하다. 화자가 내면의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는 이상 이 행위는 반복될 것이다. 폭력에 노출된 주체가 또 다른 폭력을 양산(量産)하는 악순환의 구조가 탄생한다.
시집의 표제작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에는 이러한 폭력의 구조에 저항을 시도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시는 “마침내 친구 뒤통수를 샤프로 찍었다”는 강렬한 사건으로 시작한다. “마침내”는 화자가 사건을 일으키기까지 얼마나 많은 내적 고민이 있었는지 보여주는 부사다. 샤프에 찍힌 친구는 “네 손가락 하나 못 자를 것 같”냐며 화자의 “검지 마디”에 “커터 칼”을 가져다 대었던 친구다. 결국 친구는 “손가락을 자르지 못했”지만, 화자의 “검지에는 칼을 댄 자국이 붉게 남았다”. 자국을 언급한 뒤로 화자는 자신에게 가해졌던 폭력들을 기술한다. 화자는 그것들을 견디다 못해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의 뒤통수를 찍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라는 말이 이상하다. 시에서 나온 “웃음”은 화자의 “불알을 잡고 흔들며 웃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관찰되는 것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결국 시의 제목은, 화자 역시 자신에게 폭력을 저지르던 아이들과 유사한 성향을 갖게 된다는 암시처럼 읽힌다. 이것은 화자가 자신에게 가해지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폭력을 저지르고도, “종례 시간이 끝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폭력에 긴 시간 노출된 사람은 폐쇄적인 성향을 갖게 된다. 「어린이날」의 화자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에게 모든 신경을 기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친구는 화자의 손가락에 칼을 가져다 대면서, 자신이 손가락 하나 못 자를 것 같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는 대답을 기대한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강박적인 자기암시 또는 주문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친구는 어떤 이유에 의해 ‘손가락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자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역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화자에게 폭력을 감행했던 것이다. 화자가 느낄 고통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친구는 폭력을 저질렀다. 화자를 괴롭힌 다른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타자에게 닫힌 존재들이다. “연약한 방”(「번안곡」)처럼 서로에게 닫힌 채 소음을 파동(波動)처럼 뿜어댈 뿐이다.
그래서 화자는 “혼자 시소를” 탄다. 타자가 모두 폭력으로 느껴져서, 그리고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무너지려는 자신이 보여서 더 닫힌 존재가 될까 봐 혼자를 자처한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명당을 찾아라」에서 화자는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에게 “따라오지 마 좀”하고 요구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듣지 않는다. 어렵게 찾은, “바닥엔 검은 땟국물이” 흐르고 “방충망은 찢어져 있고 천장에는 거미줄들이 득실거”리는 “처음 보는 창고”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지낼 수 있”으리라 믿었건만, “거대한 나방”이 따라와 “등에” “앉”는다. 학교 안의 어떤 공간에서도 화자는 혼자일 수 없으며, 그곳을 벗어날 수도 없다. 이는 화자가 사회에 속한 한 명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학교”는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사회를 표상하는 상징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폭력의 세계에서 고립된 존재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혼자인 화자의 “주머니에/쪽지 하나”를 넣어 두는, 화자의 “외투에/항상 자신의 외투를 겹쳐 걸어 두었”던 “너”(「코러스」)나, “미술 시간만 되면 항상” 화자의 “뒷자리에 앉”아 “뻗은 손가락으로 등에” 화자의 “이름을 적”는 장난을 치는 “너”(「정물화를 그리는 동안」)가 있다.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에서 화자를 “끌어안”아 주는 “선생님”이 있는 것처럼, 세계에는 주체에게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접근하는 존재들 역시 있다. 이런 존재들 덕분에 「일시 정지」 같은 시가 나온다.


트럭이 가드레일을 박기 직전에 화면이 멈춘다
그런 다음 운전자와 옆에 앉아 있던 아내가
물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소식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리면
몸이 사라졌다는 착각이 든다


(중략)


눈부신 태양 속에서
잠자리의 날개를 잡았더니
날아가기를 포기한 모습으로 붙들려 있다


그래도 놓아주어야 하는 것은, 그냥 놓아주자
그곳에서 안전하기를
뒤에서 바라봐 주자


나는 이 장면을 영원히 간직하거나
지워 버릴 수도 있지만
다시 눈을 뜨고 끝까지 다 보기로 한다

- 「일시 정지」 부분


“트럭이 가드레일을 박기 직전에 화면이 멈”추는 것은 “운전자와 옆에 앉아 있던 아내가” 죽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 화면이 일시 정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고 직전 화면을 멈춘다고 해서, 사람이 죽은 사고가 없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려 “몸이 사라졌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정말 몸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화자 역시 잘 알고 있다. 이를 알기에, 화자는 “영원히 간직하거나/지워 버릴 수도 있”는 “장면을” “다시 눈을 뜨고 끝까지 다 보기로” 결심한다. 여기에 이르는 과정에는 “잠자리”가 “날아가기를 포기한 모습으로 붙들려 있”더라도, “놓아주어야 하는 것은, 그냥 놓아주자”는 마음이, “그곳에서 안전하기를/뒤에서 바라봐 주자”는 마음이 있다. 이는 ‘거리두기’의 한 형태다.
최근의 SNS는 필터링 기능을 제공한다. 특정 단어나 태그가 붙은 게시글이 보이지 않도록 걸러 주는 기능이다. 사용자들은 괴로웠던 과거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들을, 트리거(Trigger)라고 부르는 것들을 보지 않을 수 있다. 자신과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만 친구로 등록하고 반응을 보이면 자신을 괴롭게 만드는 것들과 떨어진 채 살 수 있다. 하지만 오프라인의 삶은 그렇지 않다. 삶이 그렇게 생겨먹었다. 사회 속 개인은 언제나 불합리한 폭력에 노출될 것이고, 언제고 마음의 상처를 후벼 파는 것들과 마주 보고 살아야 할 것이다. 가정에서든 학교에서든 폭력이 발생할 가능성 자체를 줄이도록 사회적 차원의 노력이 절실하다. 그러나 지금 당장, 이미 상처 입어 주저앉은 사람들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 역시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하는 문제다.
폭력과 상처로 가득한 이 시대에 이기리 시인은 우리에게 그 방법 중 하나를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다. 이기리 시인이 지속적으로 ‘나’를 등장시키는 이유다. 시의 화자는 자신의 체험을 고백하듯 진술한다. 마치 잊어버리고 싶은 장면을 “다시 눈을 뜨고 끝까지 다 보기로” 한 것처럼, 고통스러운 기억을 끄집어내 진술하는 것이다. 진술은 사고를 객관화 하는 방법이다. 무언가를 기술하면서 우리는 그것과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을 기술한다면, 그것은 자신에 대한 메타적 접근이 될 것이다. 시인은 감정에 먹혀들지 않고 거리를 유지한 채 시를 쓴다. 떠올리기만 해도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점점 “아프지 않은 모양이 된다”(「충분한 안녕」). “살면서 조금씩 다르게 구겨지는 법”을 알아야 “모습을 잃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누나에게」)다. 구겨지지 않는 방법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고립을 자처한다면, 폭력의 연쇄가 끊이지 않을 것을 아는 시인은 우리에게 자신의 상처를 오히려 직시하라고 말한다. 그 과정을 거치고 시인은 다음과 같이 적는다.


나는 타인을 사랑하고 믿으려는 맹목적 태도를 바꾸지 못했습니다. 나를 맘껏 부려먹기를. 누군가 조금이라도 더 성장하고 행복할 수 있다면, 웃을 수 있다면. 나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겁니까.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나의 웃음이 당신의 웃음이고 나의 기쁨이 당신의 기쁨이라면. 나의 말이 당신의 심장을 몇 번 더 뛰게 할 수 있다면. 나, 더 살아도 되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기를 바랍니다. 나의 글이 당신의 글이 되지 못하더라도.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어려운 순간이 와도. 나는 당신을 끝까지 믿겠습니다. 당신은 부디 먼 곳에서도 잘 지내고 있기를. 우리, 또 닿을 날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만. 이만 줄입니다.

- 「더 좋은 모습으로 만나겠습니다」 부분


그에게는 타자를 “사랑하고 믿으려는 맹목적인 태도”가 있다. 자기방어를 위해 폐쇄적인 주체가 되어 가던 이들에게 없던 태도다. 그는 자신이 무너지더라도 누군가 “더 성장하고 행복할 수 있다면, 웃을 수 있다면” “불행한 삶”이 아닐 거라고 말한다.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에서 지구를 벗어나고 싶었다던 그는, 자신이 “더 살아도”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개인적인 진술들로 이루어진 이기리 시인의 시집이 이 시대에 필요한 이유가 그것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쓰는 글이 상처 입은 주체를 구원하고 타자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지점이 발견된다. 나와 타자가 “닿을 날”이 오는 것이다.



3. 서호준, 『소규모 팬클럽』, 파란, 2020


위태로운 자아를 보호하는 동시에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 자신의 실존적 세계를 반추(反芻)했던 것이 이기리 시인의 시도였다면, 서호준 시인은 오히려 현실 바깥으로 활보하며 세계와 새로운 관계를 설립하려 했던 것에 가깝다. 시인은 시집을 여는 첫 시 「재정립」의 첫 연 첫 행에서 “관계가 깨질 것”이라고 말하면서, “단서가 있”다고, 그것을 “오래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밝힌다. 이 의미심장한 예고처럼 서호준 시인은 시와 세계의 관계를 재정립하려고 시도한다. 「광휘의 특이점」은 온라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s)〉의 캐릭터 ‘럭스(Lux)’의 스토리가 들어 있고, 「환희의 곳간에서」는 모바일 게임 〈해리 포터 : 호그와트 미스테리(Harry Potter : Hogwarts Mystery)〉의 스크립트()가 섞여 있다. 「스크립트」는 아예 게임의 스크립트를 번역 프로그램으로 번역한 듯한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0년대 들어 주로 참조되던 작품들이 영화나 그림 등이었던 것과 달리, 서호준 시인은 비디오 게임(전자오락)을 시로 끌어들이고 있다.
직접적으로 게임이 언급되는 것 외에도 게임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발견할 수 있는 요소들 역시 보인다. 각종 게임에 몬스터로 등장하는 「고블린」과 「리치」, 모험이 이루어지는 배경으로 자주 사용되는 “던전”(「던전이 있던 자리」), 온라인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rld of Warcraft)〉에 등장했던 대사 ‘혼돈, 파괴, 망각’이 변용된 유행어 「혼돈, 파괴, 망가」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게임과 인터넷 문화에 익숙한 사람의 입장에서, 시에서 이런 요소들이 발견되는 것 자체가 재미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이 단순히 흥미를 끌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에 차용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게임의 특성이 시인의 정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게임은 완결되기 위해 반드시 이용자의 개입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다른 장르의 작품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감상자가 한눈을 팔아도 영화는 계속 진행된다. 만화나 소설 같은 것들은 직접 책장을 넘겨줘야 하지만, 서사를 끌어가는 것은 작품의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감상자와 분리되어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게임은 다르다. 게임은 사용자의 조작에 따라 캐릭터가 이동하며, 조작 실력에 따라 진행이 가능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는 게임의 세부 장르를 불문하고 공통되는 특성이다. 반대로 말하면, 모든 종류의 게임은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형태로든 무언가의 체험을 제공한다. 물론 그 체험은 가상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현실과 똑 닮은 세계이든, 고블린이나 리치가 등장하는 환상적인 세계이든, 게임은 가상의 세계에 사용자가 조작 가능한 요소를 던져 놓고 체험을 제공한다. 이것이 게임의 가장 큰 특성이자 위력이다. 게임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사용자들은 게임을 하면서 그 세계 안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다. 즉, 사용자들은 게임을 하는 순간 다른 세계의 다른 존재가 된다.
게임의 이러한 특성은 곧 ‘게임판타지(Game Fantasy)’라는 장르를 만들어냈다. 게임판타지 소설 속 주인공은 보통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가 플레이하는 자신의 게임 캐릭터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자로 성장하고, 거대한 악의 세력에 맞서 세계를 구하는 영웅이 된다. 부와 권력이 따라오는 것은 물론이다. 그 과정에서 현실의 삶 역시 게임의 영향을 받아 점점 개선된다. 결국 마지막에 소설의 주인공은 어떤 형태로든 성공한 사람이 된다. 이것이 게임판타지 소설의 주요 문법이다. 당연히 이는 독자들의 욕망을 충실하게 반영한다. 암담한 현실에 처한 독자들의 좌초된 욕망이 실현되는 세계가 게임이라는 매개를 통해 소설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호준 시인의 시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다.


이것을 하나하나 읽어 볼 사람은 여기 적힌 사람들밖에 없을 것이다 블랙 머쉬룸 치콘타 상떼…… 뭐가 빠진 하나


마왕은 불타지 않는다 구워지고 식을 것이다. 마왕의 장례식장에 갔다 이계의 함에 쌓인 영혼들 한꺼번에 쏟아 낸 상주의 마룻바닥에서 누워도 누운 것 같지 않고 말해도 말한 것 같지 않네


나오니 세상이 달라졌는데 내가 알던 세상은 연일 축제 중입니까
◎ 자동 항로 폐쇄
△ 현상 수배 전단지 회수
□ 묵인한다
그러면 나는 나의 대륙으로 서둘러 떠납시다


다시. 이것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비밀 상점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고 거기서 밤새 술 마시고 쏟았지 흔들리는 배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요
다시. 거꾸로 자라는 나무 이야기를 해 드릴까 수억 년이 지나면 이 행성도 꼬치가 된답디다 당신은 용사였군요 연금을 수령하러 오셨습니까?
적의 이름, 적의 습성, 처참한 몰골, 적의 유언, 비가 온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다시. 고딕 건축가들은 거기서 몇 걸음 더 나아갔다. 그들은 기둥만을 고려하여 벽을 세웠다. 이 경우 지붕을 지탱한다는 벽의 의무는 사라진다. 나는 아래로 뚫린 창에 무심코 머리를 집어넣다가 여기서 더 떨어질 바닥이 있는지


괴롭군요
그러게요


젊은이들이 중얼거리고 늙은이들은 얼버무리지 야심가의 의수와 이체된 힘


⚫ 돔형 아치를 지탱하려면 육중한 벽이 필요하다. (중략) 그들은 먼저 기둥만을 고려한 뒤에 벽을 세웠다. 마치 오늘날 마천루를 세울 때 철골을 먼저 조립한 뒤 그 위에 벽을 덮는 것과 같다. 이 경우 벽은 지붕을 지탱한다는 본래의 기능이 사라진다. 그래서 맨 위층부터 벽을 쌓으면서 아래로 내려올 수도 있다. 고딕 건축가들의 목적이 달성되자 벽은 ‘창문을 끼우는 곳’으로 기능이 축소되었다. 외관상으로는 여전히 벽처럼 보이지만 실은 창틀에 불과해진 것이다.: 헨드릭 빌렘 반 룬, 『반 룬의 예술사』.

- 「최선과 최후」 전문


첫 연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시의 정황을 보니, 아마도 그들은 “마왕의 장례식장”에 방문한 조문객들일 것이다. 그런데 정작 화자는 “용사”인 것처럼 그려진다. 용사가 마왕의 장례식에 방문했다는 게 잘 이해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게임에서 용사가 되는 마지막 미션으로 마왕 토벌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마왕을 죽인 게 화자라는 이야기가 될 텐데, 그는 어째서 자신이 죽인 마왕의 장례식에 방문한 것인가? 더구나 마왕 정도 되는 인물의 장례식에 참석한 조문객의 이름을,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만이 읽으리라는 것도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의문은 3연에 이르면 자연히 해결된다. 3연은 게임 중간에 캐릭터의 행동을 결정해야 하는 화면을 그대로 텍스트화시킨 것이다. 선택지는 게임 속 인물이 아니라 사용자에게만 보이는 것이므로, 화자는 게임 속 인물이 아니라 그것을 플레이하는 사용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화자의 캐릭터가 용사임에도 숙적인 마왕의 장례식에 있었던 것은, 화자가 게임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탐험 가능한 맵의 구석구석을 탐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궁금증은 곧 4연으로 이어진다. 4연의 발화들은 아마도 사용자가 게임 속 캐릭터에게 말을 걸었을 때 나온 말들을 적은 것으로 보인다. 행 앞에 붙는 “다시”가, 화자가 여러 번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도 게임의 다양한 요소를 체험하고자 하는 의도가 드러나는 행동이다. 그런데 그중 이상한 것이 하나 끼어 있다. 시편 끝에 달린 주석에서 보이듯, “고딕 건축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은 『반 룬의 예술사』에서 인용된 문장이다. 시와 게임과 책의 언어가 하나의 지면 위에 섞여 있다.
중요한 것은 다중의 발화가 섞이며 만들어내는 특성이다. 마왕을 잡고 평화를 얻었으니 화자가 “알던 세상은 연일 축제 중”일 것이다. 그런데 “용사”가 “연금을 수령”한다는 부분에서 무언가 이질감이 느껴진다. 게임 속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을 텐데 “연금”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가 끼어들기 때문이다. 이질감은 『반 룬의 예술사』가 인용되는 부분에서 절정을 이룬다. 다른 부분이 구어체로 적혀 있는 것과는 달리, 이 부분은 명확히 문어적인 말투로 기술되어 있다. 이어지는 “젊은이들”의 “괴롭군요”와 “그러게요”에서, 그리고 책에서 옮겨진 내용에서 우리는 시인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서 ‘헬조선’이라느니 ‘노오력’이라느니 사회를 비관하는 말들이 유행처럼 번지는 것은,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이 좀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고용은 불안정하고, 취업의 문은 좁아지는 상황에서 기성세대들은 젊은이들에게 더 노력을 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젊은 사람들이 느끼기에 지금은 기성세대가 취업을 준비하던 때와 사회가 달라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돔형 아치”를 세우던 시기에서 “고딕 건축가”들에게 건축 스타일의 주도권이 넘어갔던 것과 비슷하다. “기둥”이 지붕을 지탱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순간, “벽은 지붕을 지탱한다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창문을 끼우는 곳”이 된다.
이는 「역사물리학」에서 그려졌던 장면과 결부되며 사회적인 의미를 생산한다. “역사물리학을 공부하겠다고” 찾아온 학생은, “어떻게” “문을 열 수 있는지” 묻는다. 화자는 “손을 흔”드는 것만으로 문을 열 수 있으면서도, “어떤 원리로 여는 것을 선호하느냐”는 애매한 질문으로 대답할 뿐, 어떠한 구체적인 방법도 말해 주지 않는다. 학생은 결국 어떻게든 문에 들어가기 위해 “입술을 문 채 스프린트를 반복”하지만 결국 “문은 불타올라 곧바로 전소되었다”. “학생은 잿빛 표정으로” 화자를 “노려보”지만 그는 “모니터에 내려앉은 학생의 파편을 털어내고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장면은 젊은 세대들이 말하는 ‘사다리 걷어차기’를 떠올리게 만든다. 기성세대는 산업화 시기에 쉽게 일자리를 얻고 부를 축적했으면서, 지금 젊은 세대들이 자신들과 같은 재산을 축적하지 못하도록 기회를 빼앗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젊은이들”은 괴롭다고 “중얼거리”는 중에 “늙은이들은 얼버무”린다는 화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시인이 왜 게임 안에 “연금” 같은 현실적 문제들을 삽입하는지, 그리고 어떤 지점에서 외부의 텍스트를 끌고 들어오는지 알 수 있다. 모든 특징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자아의 욕망과 현실의 괴리가 존재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게임은 사용자에게 체험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를 제공하며, 게임판타지라는 장르를 탄생시킬 만큼 그 어떤 장르보다 현실성이 강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것은 사용자가 체험하는 세계가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낼 뿐이다. 게임판타지 소설에서야 게임이 현실에도 영향을 줄 만큼 영향력 있는 매체로 그려지겠지만,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설사 영향을 준다고 하더라도 저명한 프로게이머 같은 한정된 인원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게임에서 펼쳐지는 세계는 결국 허구이며, 사용자는 언젠가 현실로 다시 돌아와야만 한다. “무슨 얘기를 해도 결국엔 돈 버는 얘기를 하게 되”(「마르코 마르코스」)는 것처럼. 그렇다면 차라리 게임을 하는 시간에 공부를 하거나 자기 계발을 하는 편이 훨씬 생산적일 것이다.
그러나 게임을 하는 사람은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시장 역시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게임은 재미있기 때문이다. 게임과 현실의 경계를 분명히만 할 수 있다면, 게임 안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행위도 용인될 수 있다. 오토바이를 타고 고속도로를 역주행해도, 로봇에 탑승하고 도시를 때려 부숴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에 가까운 체험을 제공하지만, 현실이 될 수 없다는 한계는 동시에 현실을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것이 게임의 가치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시대에 시는 왜 읽히고 있으며, 시에는 무슨 재미가 있는 것인가? 서호준 시인이 게임을 시 안으로 자꾸 끌어들이는 것도, 그리고 그를 통해 오히려 현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시에서 게임과 유사한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에서 펼쳐지는 세계 역시 현실이 아니다. 시인과 화자는 구별되는 존재다. 서호준 시인의 시 세계에 등장하는 화자는 서호준 시인이 아니다. 그가 구사하는 언어는 자기 고백이 아니며, 그가 펼쳐내는 세계도 그가 겪은 체험이 아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현실을 향한 강한 침투력을 갖는다. 비현실적이라서 현실적인 문제를 부각시킬 수 있다. 시가 이 시대에 가질 수 있는 확장성이다.



4. 김누누, 『착각물』, 파란, 2020


김누누 시인의 시들은 그 코드를 아는 사람들이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제목인 『착각물』부터 그러하다. ‘착각물’이란 주로 특정 경향이 있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분류할 때 사용하는 장르 개념이다. 주인공의 행동을 주변 인물들이 오해하면서 내용이 전개되는 것이 특징인데, 작품이 진행될수록 주인공의 이미지는 실제 모습에서 점점 멀어진다. 가령 주인공이 본래 모범생이라면, 갖가지 오해가 쌓이며 주변 인물들은 주인공을 불량학생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팬들은 이러한 문법을 지닌 작품을 ‘착각물’이라고 부르며 다른 작품들과 분류한다.
제목이 의미하는 것처럼, 시집 곳곳에서 착각의 결과물이 발견된다. 김누누 시인은 시집 날개의 약력에 “2014년까지 김보섭으로 활동하다가” “2014년부터 김누누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적어 두었고, 판권지의 저자 역시 ‘김누누’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뒤 시인의 말에서 바로 “이 시집은 김보섭 개인의 의견이며 본 출판사와는 무관합니다.”라고 밝힌다. 시인이 ‘시를 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 ‘김보섭’인지 ‘김누누’인지 명확히 분별되지 않는다. 다른 시집 같으면 그냥 넘어갔을 문제겠지만, 시집의 제목이 『착각물』이기 때문에 이 정체성의 혼재는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어떤 주체가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착각’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곧 무언가를 착각이라고 판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상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는 전제를 숨기고 있다. 대상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야만, 우리는 누군가 그 대상에 대해 내린 판단을 착각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대상의 본질이 도대체 무엇인가? 칸트식으로 얘기하면, ‘물자체’가 무엇인가? 이 질문은 ‘김누누’라는 시인을 대상으로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2014년을 기점으로 필명을 정하면서, 현실의 주체 김보섭은 시를 쓰는 가상의 주체 김누누를 설정했다. 마치 시인과 화자의 구별처럼, 실제로는 하나인 ‘김보섭’에게 시를 쓰는 자아 ‘김누누’가 있다. 순서를 따라서 그의 본질은 김보섭이며, 김누누는 그저 시를 쓸 때 등장하는 다른 하나의 인격에 불과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가? 이는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다. ‘김보섭’은 시인이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정체성에 붙은 이름이지만, 타자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반대로 ‘김누누’는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지만, 그것은 시인이 직접 자신을 규정하기 위해 내세운 기표(記表/Signifiant)다. 두 가지 모두 시인의 일면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는 김보섭인 동시에 김누누다. 이는 착각물 장르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놓인 상태와 일치한다. 작품을 보는 감상자의 시선에서 착각물의 주인공은 두 가지 면모를 갖는다. 하나는 독자들에게만 제공되는, 작가가 캐릭터의 본질로 내놓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작품 속 주변 인물들이 인식하는 주인공의 모습이다. 이 중첩의 상태를 김누누 시인은 작품을 통해 다른 대상에게도 덧씌운다.


마지막 기대를 걸었던 워그레이몬마저 여지없이 나동그라졌을 때 쉬라몬은 그만 울고 말았다 필살기가 고작 물고기 행진이라는 게 너무 억울해서


석아! 진화시켜 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쉬라몬? 석이는 오늘 공무원 시험 보러 갔잖아! 여기는 나랑 태일이 그리고 쉬라몬 너뿐이라고!
그러게 집에 있으라 했잖아 쉬라몬!
내가 도움이 안 돼서 그래?
아니 쉬라몬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오늘은 석이 형도 없고 저 녀석은 아주 흉포한 디지몬이니까
위험하니까 위험하니까 그렇지


쉬라몬의 필살기는 작은 물고기들을 소환해 조종하는 ‘물고기 행진!’이다
쉬라몬은 쿠가몬과의 전투에서 다른 동료 디지몬이 필살기를 쓸 때 혼자 몸을 던져 백 태클을 걸었다


다시 한 번 가자 워그레이몬!
진화가 풀렸던 아구몬이 다시 워그레이몬으로 초특급진화했다
진화할 때마다 이름이 바뀌면 그건 이름이 없는 것과 다름없는 것 아닐까?

- 「물고기 행진」 부분


90년대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디지몬을 모를 수 없을 것이다. 2000년 한국에서 방영된 〈디지몬 어드벤처〉는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쉬라몬”과 “워그레이몬”, “아구몬”, “쿠가몬”은 모두 그 작품에서 나온 디지몬들이다. 디지몬 시리즈의 핵심은 “진화”다. 처음엔 사람 머리만 했던 디지몬이, 진화를 거듭하면서 점점 거대하고 강력해진다. 〈디지몬 어드벤처〉는 사고로 디지털 세계에 떨어진 아이들이 파트너 디지몬을 만나 역경을 극복하며 이루는 성장에 초점을 맞춘 애니메이션이다. 작품 속에서 ‘진화’는 아이들과 디지몬의 교감과 용기, 우정 등이 한 단계 성장했음을 말해 주는 지표로 기능한다. “아구몬”은 “워그레이몬”으로 진화하는 주연 디지몬인데, 다른 디지몬들보다 분량도 더 많고 더 빠르게 가장 강한 단계까지 올라간 개체다. 반면 “쉬라몬”은 조연으로 등장한 디지몬으로, 분량도 상대적으로 적고 작품 외적으로도 크게 주목받은 적이 없다. 따라서 쉬라몬보다는 워그레이몬이 더 인기가 많고, 피규어나 프라모델 등의 상품화 역시 워그레이몬이 압도적으로 많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시인은 철저히 “쉬라몬”의 입장에서 애니메이션의 장면을 변용함으로써 시청자들이 기존에 인지하지 못했던 부분을 드러낸다. 쉬라몬은 “너무 억울”하다. “작은 물고기들을 소환해 조종하는”, 살상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기술이 “필살기”로 설정된 것도, 자신을 진화시켜 줄 파트너 “석이”가 없는 것도 쉬라몬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석이가 “공무원 시험”을 보러 간 것은 원작 만화에는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러한 변용은, 꼭 ‘어른의 사정’이라고 말하는 것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하나의 작품에는 어쨌든 이야기의 중심이 될 주인공이 필요하고, 서사를 보조할 주변 인물이 필요하다. 그리고 주인공 캐릭터는 언제나 더 멋있어야 하고, 다른 인물보다 더 활약해야 한다. 그래야 확실한 세일즈 포인트(Sales Point)를 만들 수 있고 상품으로서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이러한 어른들의 사정으로 쉬라몬은 활약하지 못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쉬라몬은 태생적으로 불합리를 끌어안고 있는 존재다.
이 지점에 이르러, 화자는 아주 재미있는 질문을 하나 내놓는다. “진화할 때마다 이름이 바뀌면 그건 이름이 없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디지몬 어드벤처>가 역설했던 “진화”의 가치를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질문이다. 제작자들에 의해 진화는 이미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진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진화의 의미가 반전되는 순간 독자들은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지금껏 <디지몬 어드벤처>를 착각했던 것이 아닌지 물음을 던지게 된다. <디지몬 어드벤처>가 착각물의 주인공처럼 서로 다른 의미가 중첩되어 있는 상태에 돌입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시인은 시집 속 여러 시들을 연결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참이라 생각된다면」에 등장하는 “레몬맨” “영재”는 이후 「새크리파이스」에도 등장한다. 「새크리파이스」에 나오는 춤추는 사람들이나 사람들이 실종되는 숲 같은 것은 「아포칼립스 직전」, 「사전에 이야기한 대로」, 「함께 추는 춤」, 「아포칼립투스」에도 나온 것들이다. 그러나 연결되는 시들을 이어 붙여도 이야기의 결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작법은 다른 매체에서는 이미 사용되는 방법이다. 대표적으로 마블 시리즈가 그렇다. 마블(Marvel Entertainment, Marvel Studios)에서 만드는 만화와 영화는, 하나의 세계를 산하 작품들이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아이언맨과 헐크, 캡틴 아메리카와 토르가 동시에 등장하는 〈어벤져스(Avengers)〉 같은 작품이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마블사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는 끊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세계관을 만들어 두고, 이야기를 계속 확장해 나간다. 이야기가 완결되는 지점은 있지만, 그것이 마블이 창조한 세계의 완결은 아니다. 같은 세계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 무한히 증식하고 확장하는 것이 마블 작품의 특징이다.
김누누 시인의 시는, 그와 마찬가지로 완결을 설정하지 않는다는 특성을 지닌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시인이 종국에는 작품들이 생산한 의미를 없던 것으로 되돌린다는 점이다. 「더 스페이스 유니버스 사이클론 코스모스」라는 제목은 마블 영화에서 작품에 붙이는 방식과 비슷하게 만들어졌다. 실제로 시는 “읽기도 힘든/외국어 문장”으로 만들어진 무언가를 “외국어에 능통한 친구의 도움을 받아” “한국어로 변환할 수 있었”다면서 그럴듯한 설정을 만든다. “Koit”같은 인공어나 “코스믹 사이클론”과 “우주 처형 집행자”를 등장시키고, “제3우주”의 역사를 기술하는 등 꽤나 그럴듯한 세계를 창조한다. 그러나 곧바로 “처음부터 외국어로 쓴 것도 아니고” 화자가 “한국어로 쓴” 것인데 “왜 너의 시라고 하지 않고 내가 외국어로 된 남의 시를 번역해 준 것처럼 말하”느냐는 친구의 질문이 이어진다. 심지어 “친구”는 “처음부터 있지도 않은 친구”라는 것이 폭로된다.
무화(無化) 시도는 시 한 편에서 끝나지 않는다. 『착각물』은 해설이 없으며, 시집의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는 “죄송합니다,//다시 할게요”라는 말이 적혀 있다. 시인은 다른 이야기를 끌어들이며 그 의미를 뒤집어 놓고서, 그것을 없던 일로 만들며 부정한다. 마지막까지 그 무엇도 확정되거나 완결되지 않는다. 독자들은 분명히 시집을 끝까지 읽었음에도 아무것도 읽지 않은 듯한 착각에 빠진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착각만 반복될 뿐이다. 독자가 열심히 추출한 시의 의미 역시 착각이 된다. 시집을 읽고 남기는 이 글 역시 『착각물』의 착각이 될 것이고, 이러한 글들이 모이면 『착각물』을 둘러싼 그럴듯한 착각물 하나가 완성될 것이다.
이것은 무의미로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대상의 본질을 알 수 없다는 뚜렷한 사실을 알게 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세계를 가두면 가둔 만큼 지배할 수 있”(「니블스는 시은의 눈」)지만, 그것은 세계의 전부가 아니다. 『착각물』은 대상을 구속하는 모든 의미들을 해체하고, 본질 개념의 허위성을 폭로하기 위한 알레고리(Allegory)다. 따라서 시집 끝에서 도달하는 무의미는 오히려 유효한 의미다. 자신의 존재와 인식을 의심하는 일이 세계의 새로움을 끌어내는 첫 번째 단계이기 때문이다.



5. 새로운 시인


이상 3권의 시집들을 나름의 방법으로 정리했다. 물론 여기에 시집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의의를 적어 두었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겠지만, 그중 일부 정도는 있다고 믿는다. 3권의 시집 모두 나름의 장점을 갖고 있었고, 시대에 필요한 성찰과 가능성을 담고 있었다. 이기리 시인은 자신의 세계에 깊이 투신하면서도 타자와 연대 혹은 교류의 가능성을 잊지 않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서로 폐쇄적이고 극단적인 사람들이 늘어나고, 대립과 갈등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시대다. 이해받기를 바랄 뿐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그러나 이기리 시인은 자신을 존립시킴과 동시에 타자를 이해하고, 이타심을 발휘할 수 있는 제반 조건을 탐구하고 나름의 결론을 내놓았다. 그가 전해 주는 개인적인 체험담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어 줄 수 있는 이유다.
서호준 시인은 시가 지닌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다른 매체의 작품을 끌고 들어와 시와 세계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도 있겠다. 우리의 생활에 이미 깊이 침투한 게임을 시에서 이용하면서도, 자칫 비현실적인 환상으로 치부될 수 있는 가상의 세계를 지극히 현실적인 것으로 전환시키는 전략이 돋보였다. 시가 포용할 수 있는 소재를 넓혔다고 말하고 싶다. 시는 대상이 그 무엇이라도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서호준 시인은 증명했다.
김누누 시인 역시 젊은 세대들이 접한 타 장르 작품들을 시 안에 적절히 녹여내며 자신의 문제의식을 펴낸 것 같다. 착각물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시도된 방법들이 흥미롭다. 그 끝에서 우리의 일반상식이 뒤집히고, 시의 대상이 된 것의 새로운 의미가 발굴된다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이것이 시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정작 그것들이 이전의 시에서는 발견되지 않던 새로운 것들이라고 단언할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억지로 새로운 것을 찾자면, 아마도 개인적인 체험의 발화가 거시적 의미를 내포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게임과 만화 같은 시 외의 소재들이 다양한 국면에서 차용되며 시가 새로움을 시추할 수 있는 영역이 확장됐다는 정도가 아닐까. 어쩌면 그들의 시에서 드러나는 새로움을 하나의 테마로 묶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 시대에 등장한 새로움이, 모두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는 것이 더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이러한 결론에 이른 것은 시를 읽을 때 동원한 시각이 투박했던 탓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들이 시인으로 불리기에 아무런 모자람이 없다는 것은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다른 말로 하면, 기존에 ‘시인’이라는 말이 가리키던 범주가 너무 좁았다는 것이다. 등단하지 않은 시인이 기존의 관점에서도 흥미롭고 유의미한 작품을 썼다는 것은, 그 자체로 기존의 등단제도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또한 이는 지금까지 우리가 시라고 불러 왔던 것들이 너무 협소했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제도 바깥을 상상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등단제도의 바깥을 기대하게 만드는 이 기분 좋은 사태가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사태의 주인공이 계속 글을 써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많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어찌 되었든 시인은 작품을 발표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시인들이 좋은 시를 계속 써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야만 우리는 새로운 시와 새로운 시인들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면서, 글을 닫는다.












김동진
작가소개 / 김동진

2020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문장웹진 2021년 6월호》


추천 콘텐츠

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

  • 관리자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