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문학상 이야기

  • 작성일 2021-03-01
  • 조회수 4,117

[특별기획_문학상 리뷰]

특별기획 〈문학상 리뷰〉는 국내에서 시행되고 있는 수많은 문학상 중 주요 문학상의 최근 10년간(2011-2020)의 공개된 자료(수상작, 심사위원 등)를 취합 정리하였으며, 이 자료를 토대로 4명의 평론가가 각각 시와 소설을 다루는 주요 문학상들의 경향에 대한 리뷰를 2021년 2월호와 3월호에 순차적으로 발표합니다.

- 홍성희, 「이름과 이름과 이름 들」
- 김요섭, 「문학상에 대해 말해야 할 것과 문학상이 말해주는 것」
- 노태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문학상 이야기」
- 김정빈, 「문학상 - 비평 기구」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문학상 이야기



노태훈




지난해 큰 파장을 몰고 왔던 〈이상문학상〉 사태는 올해 다시 수상 작품집을 내기 시작하면서 일단락되는 듯하다. 당초 선정작의 ‘저작권’ 문제가 이슈가 되었으므로 “이상문학상 작품집 출간을 위해 작품을 재수록 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출판권과 저작권에 관해 어떠한 침해도 없도록 한다는 내부 시행 규정”1)을 마련하는 것으로, 또 여기에 심사 제도를 보완하고 상금과 고료까지 인상하였으니 말끔하게 봉합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2020년 〈젊은작가상〉의 경우 문제가 되었던 소설이 삭제된 채로 개정판이 나왔고 환불과 교환 절차가 진행되면서 역시 사태가 가라앉는 수순으로 접어들었다.2) 문학상 운영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수상작으로 결정된 작품의, 또 해당 작가의 윤리적 문제가 도화선이었다고 봐야겠지만, 문학상을 받지 않았다면, 문학상의 이름으로 수많은 독자에게 가 닿지 않았다면 사태의 전개는 조금 달랐을지 모른다.
〈김유정문학상〉은 지자체와 기념사업회, 문학촌 등이 뒤얽혀 수상자가 발표되었다가 취소되는 등의 내홍이 있었고, 여전히 갈등은 해결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3) 아마도 한국에는 수십 개의 문학관이 존재할 것이고, 각 지역에서는 문화사업과 지역 홍보의 일환으로 문학 축제, 문학상 등을 지원하고 있다.
한국 문학의 현장에서 문학상은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한국에 수백 개의 문학상이 존재한다는 말은 한국 문학의 규모나 영향력과 비교해 단순히 너무 많다는 정도의 판단으로 끝낼 일이 아니다. 이 괴리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얼마나 많은 인적·물적 자원이 투여되는지, 그에 비해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운영되는 문학상이 얼마나 적은지 깨닫게 되고 그 결과 문학상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진다.4)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현재의 감각과 문학상 수상작, 수상 작가에 대한 괴리는 말할 것도 없다. 기본적으로 문학상은 작품을 읽고 검토하여 ‘심사’하는 행위와 그 수상자에게 영예와 포상을 ‘부여’하는 일을 수반한다. 대체로 1년 단위의 기준을 설정한다고 했을 때, 한 해에 쏟아지는 그 많은 작품들을 검토하고 성과를 논의하려면 얼마나 많은 인력과 노동력, 에너지와 동력이 이 제도에 투입되어야 할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대개의 문학상은 요식 행위나 상부상조의 행태로 운영되고, 놀랍게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문학상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1) 「2021년 제44회 이상문학상 심사 및 선정 경위」, 『제44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2021, 315쪽.
2) 〈『여름, 스피드』와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대한 후속 조치〉, 문학동네 홈페이지 공지사항, 2020.07.21., https://www.munhak.com/bbs/board.php?bo_table=notice&wr_id=179, 확인일: 2021.02.22.
3) 「김유정문학촌, 올해 문학상 수상자 선정 안한다」, 《강원도민일보》, 2020.10.13., http://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1043077, 확인일: 2021.02.22.
4) 최근 크게 이슈가 되었던 표절작의 문학상 수상 사태는 한국의 문학상 운영이 얼마나 처참한 지경에 놓여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의 문학장은 수많은 제도가 복잡하고도 단단하게 얽혀 그 실체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크다. 문학상은 이 제도의 일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뭉뚱그려 논의할 수 없을 만큼 그 성격도 다양하다. 우선 운영 주체로 이를 구분해 보자면, ‘출판사/언론사/지역(문화)단체/문학단체(문예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러나 출판사와 지역단체가 결합한다든지 언론사와 문학단체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서 명확하게 구분되지는 않는다. 여기에 시와 소설, 수필, 시조, 동화, 희곡 등 여러 문학 장르를 염두에 둔다면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조차 가늠이 쉽지 않다.
이러한 난점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의 문학상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문학상의 대상 작품이 출간된 단행본이 ‘아닌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출간된 책에 관해 수여하는 상은 작가의 성취를 치하하고, 그 작품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한다. 이 경우 문학상은 그 숫자가 많다고 해서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도 없다. 설사 그 책이 가장 훌륭한 작품이 아닐지라도 각자의 판단은 당연히 다를 수 있고, 또 그 문학상을 운영하는 주체의 지향이 반영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해당 문학상의 대상작이 책이 아니라 개별 발표작이 된다면 문제는 완전히 달라진다.
나는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범주를 다시 명확히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소위 등단이나 데뷔를 위한 제도, 즉 ‘공모’는 지금 논의하고자 하는 주제가 아니다.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상, 또 장편 공모까지 작가를 문학장으로 편입시키는 제도에 관해서는 그간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등단이 문학의 기점이 될 수 없고, 다양한 방식을 통해 문학이 가능하다는 것을 여러 매체와 창작자들이 보여주고 있으며, 단 하나의 사례지만 신춘문예가 폐지되기도 했고, 기왕의 제도를 지속한다면 공정한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문학상은 기성 작가와 제도에 관한 문제이고,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각자의 호오가 깊이 관여되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특히 해마다 문예지에 발표된 중·단편소설에 수여하는 문학상의 경우 그 주목도와 영향력에 비해 제도 자체에 대한 비평적 검토가 부족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의 순문학장에서 생산되는 단편소설은 1년에 약 400여 편이다. 월간, 격월간, 계간, 반년간 등의 (웹을 포함한) 문예지에 주로 발표되며 대부분 작가의 소설집에 향후 실리게 될 작품들이다. 한국 문학을 순문학이라고 지칭할 때, 소설 분야로 한정한다면 그것은 문예지 단편소설을 정확히 가리킨다. 장편소설은 흔히 말하는 본격문학, 문단문학, 주류문학, 특히 제도권 문학이라는 개념과 들어맞지 않는다. 문예지 단편을 쓰는 작가가 또 그 문예지를 통해 연재하거나 문예지를 발행하는 출판사를 통해 장편소설을 펴내기 때문에 그렇게 묶이는 것뿐이다. 즉 한국의 순문학은 문예지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생산되며 이를 토대로 작가는 단행본 작업을 해나갈 수 있는데, 그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문학상이다. 다시 말해 ‘문예지→문학상→단행본’이 순환하는 구조가 한국 순문학의 제도이며, 주요 출판사들이 각각의 단계에서 결코 손을 놓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5)
조금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어떤 작가가 순문학장에 등장을 했다면 그는 반드시 문예지에 단편소설을 발표해야 한다. 장편 공모로 데뷔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문예지에 단편소설을 발표하지 못하면 순문학장에서 그는 일단 바깥으로 튕겨져 나간다. 스스로가 단편 체질이 아니어서, 혹은 청탁이 없어서 장편에 매진하고, 또 그것이 나름대로 성과를 낸다고 해도 그는 문단의 작가가 되지는 못한다.6)
문예지에 단편소설을 발표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작가들은 유의미한 반응을 얻지 못한다. 대체로 문예지의 독자는 문학장의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고 이것은 곧 그 작품이 일종의 심사 대상이 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한 해가 마무리될 때쯤 드디어 문학상의 장이 열린다. 한 해 동안 발표된 중·단편소설 전부를 대상으로 한다는 그 문학상들에서 호명을 받는다면 그는 단행본 계약을 따낼 가능성이 크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에게 단행본의 기회는 무척 요원해진다.
그렇게 해서 주요 출판사로부터 소설집을 펴내게 된 작가는 다시 문예지로 호출된다. 꾸준히 단편소설을 발표하게 될 가능성이 크고, 어쩌면 장편 연재의 기회도 주어질지 모른다. 그렇게 다시 문학상의 후보가 되고, 수상자로 선정된다면? 그는 이제 확실하게 주목받는 작가가 된다.

5) 물론 이 구조의 앞에는 ‘등단(공모)’의 구조가 있고, 뒤에는 ‘아카데미’와 ‘비평’이 숨어 있다.
6) 나는 이런 작가의 사례를 무수히 알고 있지만 굳이 언급은 하지 않기로 한다.


이 과정을 주도하는 문학상이 바로 아래와 같다.(가나다순)


① 김승옥문학상
② 김유정문학상
③ 문지문학상
④ 이상문학상
⑤ 이효석문학상
⑥ 젊은작가상
⑦ 현대문학상


여기에 지금은 사라진 〈황순원문학상〉, 수도권 외 지역 작가를 대상으로 한 대구의 〈현진건문학상〉, 주요 문예지로부터 추천을 받아 수상작을 선정하는 울산의 〈오영수문학상〉 등을 포함할 수 있고, 별도의 ‘상’을 수여하지는 않지만 앤솔로지 형태의 단행본을 펴내는 『올해의 문제소설』,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등도 고려한다면 열 개 남짓의 규모라 할 수 있겠다. 어쨌든 2021년을 기준으로 그것이 어떤 형태든 한 해 동안 문예지에 발표된 단편소설을 대상으로, ‘문학상’의 이름을 부여하는 제도는 위의 7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출판사가 시행의 주체가 되는 〈김승옥문학상〉, 〈문지문학상〉, 〈이상문학상〉, 〈젊은작가상〉, 〈현대문학상〉과 지역 문학단체가 주체가 되는 〈김유정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김승옥문학상〉이 순천시의 지원을 받고 있고, 〈이효석문학상〉은 《매일경제》 신문사가 공동 주최하고 있으며, 〈김유정문학상〉은 출판사 은행나무에서 수상 작품집을 발간하고 있으므로 앞서 언급했듯 명확하게 구분되지는 않는다. 이 문학상들은 등단 연도나 대상 작품의 범위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1년간 문예지에 발표된 단편소설을 대상으로 삼는다. 앞서 언급한 400여 편의 소설들이다. 심사는 어떻게 진행될까.
위의 문학상 중 검토한 작품의 대상과 수를 그나마 언급하는 쪽이 문학동네가 주관하는 〈젊은작가상〉과 〈김승옥문학상〉이다. 〈젊은작가상〉은 문예지를 통해 한 해 동안 계간 리뷰가 운영되고 이를 바탕으로 예·본심을 진행하며 〈김승옥문학상〉은 대상작(2020년의 경우 총 25개 문예지의 147편)을 심사위원들이 블라인드로 읽는다고 고지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문학상도 예심 리스트를 공개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한국SF어워드’는 검토 대상이 되는 모든 작품의 리스트를 공개하고, 누락된 작품에 대해서는 제보를 받기도 하는데,7) 순문학에서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나마 문학동네 주관의 두 문학상은 검토 대상의 범위를 밝히고 있지만 나머지 문학상은 심사 과정을 거의 알 수가 없다. 나는 심사위원들이 어떻게 작품을 배분하여 읽는지, 어디까지 검토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선정하게 되는지 파악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대체로 심사위원들이 자기가 읽은 범위에서 추천작을 선정하고 본심 리스트를 만들어 독회를 하는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가령 이상문학상은 문학 관계자들에게 추천을 받는다고 고지하고 있지만 자신들이 가진 메일 리스트에 추천 양식을 송부해 회신을 받는 구조다. 이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응답은 어떻게 정리되는지 당연히 알 수 없다. 결국 이렇게 되면 심사위원이나 해당 관계자가 읽은 작품이 리스트로 올라갈 가능성이 크고 매우 심각한 문제를 낳기도 한다.8)
아주 많은 경험을 한 것은 아니지만 여러 차례 심사에 참여한 개인적인 기억을 떠올려 보면 심사 과정 자체는 공정한 편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작품 외적인 어떤 요소가 심사에 일부 영향을 끼치기도 하지만 추천된 작품들에 대해 자유롭게 논의를 나누고, 합의를 도출해 내는 과정은 무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심 과정, 검토 대상 작품, 선정 절차 등 아주 기초적인 수준의 정보가 공개되지 않은 채 ‘심사평’으로 갈음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문학상의 운영 주체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고려가 필요하다. 문예지를 발간하고, 단행본을 펴내는 출판사가 문학상을 운영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임에 분명하다. 최근에는 출판사에 근무하는 창작자가 늘어나고 있으므로, 소위 ‘제척’의 문제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자사 문예지에 실린 작품은 문학상의 대상작에서 제외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들고, 오로지 한국의 순문학만이 이런 기형적인 형태의 문학상들을 운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본의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은 “공익재단법인 일본 문학진흥회”에서 운영하고, 노벨문학상이나 부커상, 공쿠르상, 퓰리처상 등도 당연히 작품의 게재, 출판과 관계가 없는 단체에서 운영한다.9) 아마도 한국의 문학 출판사들은 운영의 실무와 진행을 담당할 뿐, 문학상 심사의 주체는 ‘심사위원’들에게 위임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즉 문학상을 외주나 하청의 형태로 인식하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채 가장 훌륭한 작품을 독자에게 소개한다는 명분을 강조하는 것이다.

7) SF어워드 홈페이지 https://sfaward.kr/ 참조.
8) 잘 알려져 있듯 최근 이상문학상의 수상작은 《문학사상》에 게재된 작품들이다. 후보작을 포함하면 그 수는 더 커지는데, 이것은 폐쇄적이고 자의적인 운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추천된 작품의 범위가 좁을 가능성도 크다.
9) 도코 고지 외, 송태욱 역, 『문학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현암사, 2017, 각 챕터 참조.


이것은 상당히 큰 문제인데, 심사위원이 거의 고정되거나 출판사와 가까운 관계의 작가·평론가들로 채워지기 일쑤고 이 경우 일종의 편향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출판사나 문예지가 운영하는 문학상이라면 그러한 편향이 당연하고 그 색깔을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이를테면 등단 7-10년 이하의 젊은 작가를 대상으로 문학상을 운영했던 〈젊은작가상〉과 〈문지문학상〉은 그 후보작 리스트가 확연히 다른데, 그것은 오히려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문제는 이 문학상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보편적 기준의 감식안을 드러내려고 한다는 점이다. ‘에콜’이나 ‘학교’의 시대는 지났다고 하지만 자신들의 관점을 변별적으로 내보이려고 하기보다 경쟁하듯 작가를 선점하려 들 때 문학상은 출판 권력을 위해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저작권과 출판권, 인세의 문제도 여기에 결부되어 있다. 족히 10개의 문학상이 존재하고, 그 작품들은 다시 수상 작품집으로 만들어져야 하므로 심사 과정에서 이것이 고려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문학상을 이미 받은 작품, 작가가 이미 표제작으로 소설집에 실은 작품 등은 암묵적으로 후보작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크다. 문학상의 결과가 책으로 발간되고, 이것이 다시 출판사에 수익을 가져다주는 구조 속에서 엄정한 심사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당연히 낮아진다. 여기에 더해 대부분의 문학상이 그 상금을 수상 작품집의 선인세로 작가에게 지급한다는 문제가 있다. 작품은 이미 문예지에 발표되었으므로 재수록료 정도의 부담만이 있고, 상금은 선인세로 처리하며, 문학상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할 수 있으니 출판사가 이를 포기할 이유가 없다.


결론적으로 현재 운영되는 문학상들은 운영의 공정성과 합리성에 대해 당연히 고민을 해야겠지만 이 문학상들이 사실상 공적 기능의 수행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상의 공공성을 제고하고 제도적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할 곳은 문학단체와 국가 기관이다. 친일문학상에 대해서만 목소리를 높일 것이 아니라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문학상 운영, 윤리적·법적 비위에 대해 주시해야 할 것이고, 새로운 제도적 기반을 만들기 위해 정책적·재정적 지원도 필요하다.
두 가지 대안 정도가 떠오른다. 첫째는 새로운 문학상을 만드는 것. 나는 한국 문학의 독자들의 펀딩을 받아 운영기금을 만들고 충분한 시간과 보상을 통해 작품을 선별하여 순수하게 상금과 영예를 수여하는 이상적인 문학상을 그려 보기도 했지만10) 불가능에 가까울 듯하고, 문학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문학상을 제정해 보는 것이 하나의 시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히 젊은 창작자, 비평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지원 사업 중 하나로 발표되는 작품을 읽고 검토하는 일을 부여한다면 긍정적인 효과가 있지 않을까. 물론 대규모의 예산과 인원이 투입되어 기존에 운영되던 문학상의 범위나 한계를 뛰어넘어야 의미가 있을 것이다.
조금 더 현실적인 대안은 문학상 아카이빙이다. 현재 문예연감이나 문예지 아카이브는 양이 지나치게 방대하고 실효성도 떨어져 활용도가 낮은 편이다. 해마다 시행되는 문학상의 결과를 수집하여 효과적인 방식으로 정리한다면 기초 자료로 활용도가 높을 뿐 아니라 정보 공개 차원에서도 일종의 모니터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해당 아카이빙 서식에 문학상을 운영하는 주체가 반드시 공개해야 할 여러 카테고리들을 배치해 둔다면 공정하고 투명한 문학상 운영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나는 지난 10년간의 문학상 내역을 정리하면서 여러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비판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어떤 작품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토대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수상작이 되지는 못했지만 거의 모든 문학상에 후보작으로 오른 작품, 역시 수상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10년간 가장 많은 작품을 문학상의 후보작으로 올린 작가, 후보작으로 언급된 것이 드물지만 수상작으로 선정된 작품 등 여러 얘깃거리가 눈에 띄었다. 아낌없이 축하를 전하면서도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해 격의 없는 토론을 벌일 수 있는 문학상이 언젠가 생겨나기를 바란다.

10) 백희나 작가가 수상한 스웨덴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문학상(ALMA)이 여기에 가장 가까웠다.











노태훈
작가소개 / 노태훈

문학평론가. 2013년부터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계간 《자음과모음》 편집위원.


《문장웹진 2021년 03월호》


추천 콘텐츠

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

  • 관리자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