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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과 이름과 이름 들

  • 작성일 2021-02-01
  • 조회수 3,243

[특별기획_문학상 리뷰]

특별기획 〈문학상 리뷰〉는 국내에서 시행되고 있는 수많은 문학상 중 주요 문학상의 최근 10년간(2011-2020)의 공개된 자료(수상작, 심사위원 등)를 취합 정리하였으며, 이 자료를 토대로 4명의 평론가가 각각 시와 소설을 다루는 주요 문학상들의 경향에 대한 리뷰를 2021년 2월호와 3월호에 순차적으로 발표합니다.

- 홍성희, 「이름과 이름과 이름 들」
- 김요섭, 「문학상에 대해 말해야 할 것과 문학상이 말해주는 것」
- 노태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문학상 이야기」
- 김정빈, 「문학상 - 비평 기구」





이름과 이름과 이름 들



홍성희




한국의 문학상들을 조사하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작가의 이름을 건 상들이다. 문학상은 다양한 규모의 출판사나 잡지사, 언론사, 문인협회, 예술 관련 사업 재단, 대학, 지방자치단체, 기념사업회 중 하나 혹은 둘 이상의 협력으로 운영된다. 그 가운데 이름이 많이 알려진 문학상은 문예지들의 신인문학상과 출판사나 문화재단의 이름으로 운영되는 작가상, 작품상, 그 외에는 대부분 작가의 이름이 걸린 상이다. 문학사상사의 이상문학상과 더불어 조선일보사가 주관하고 있는 동인문학상, 동리목월기념사업회가 운영하는 동리문학상 등은 소설가의 이름으로 소설 부문에 시상하는 대표적인 상들이다. 문학평론가의 이름을 걸고 있는 팔봉비평문학상이나 김현문학패 등도 있다. 시인을 기념하는 문학상도 무수히 많다. 한 시인의 이름을 건 서로 다른 문학상들이 각각 다른 단체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작가의 이름을 붙인 문학상들은 작가의 생애와 문학적 행보에 대한 평가와 분리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중앙일보사에서 운영하던 미당문학상은 2001년 제정 당시부터 비판을 받았다. 서정주의 이름이 붙은 상을 받는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후보자나 수상자가 수상을 거부하는 일이 있었고, 미당문학상은 2017년을 마지막으로 운영이 중단되었다. 유사한 맥락에서 팔봉비평문학상이나 동인문학상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고, 최근 이육사문학상은 그간의 심사자나 수상자가 미당문학상과 팔봉비평문학상의 수상자, 후보자, 심사자였다는 점에서 이육사의 이름을 건 문학상으로서의 적절성을 지적받기도 했다.
기릴 만한 대상으로 주목되어 온 작가들은 문학사적 권위 혹은 역사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작가의 이름으로 문학상을 제정하고 운영하는 일은 그 이름을 ‘상’의 이름으로 새겨 넣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정치적 효과를 검토하는 일과 무관할 수가 없다. 이때 효과란 서정주의 경우처럼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행적에 대한 용인 혹은 묵인의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고, 한국 문학의 역사가 구성되어 온 맥락에서 권위를 부여받아 온 ‘문학성’을 인정하고 계승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도 하다. 특히 그 이름의 효과가 상을 운영하는 기관의 정체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 문학상이라는 제도는 ‘문학’ 혹은 ‘문학적인 것’에 특정한 모습을 부여하거나 ‘문학’의 경계와 영토를 마련해 가는 지속적인 작업과 분리되기 어려운 방식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학의 역사와 영토를 구성해 온 작가들의 거대한 이름들이 반드시 육중하고 엄중한 무게를 짊어지는 방식으로 기려지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정신 혹은 문학세계를 계승한다는 설명이 따라붙을 때도 작가의 이름은 때로 그저 이름일 뿐이기도 하다. 문학과 역사 교육 시스템 속에서, 출판 시장에서, 언론에서 익숙하게 들어온 이름, 그래서 작품을 읽어 본 적 없이도 어떤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는 이름, 그래서 자동으로 신뢰하게 되는 이름으로서 작가들의 이름은 ‘기념’되고, 활용된다. 이 글이 다루어 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 특정 작가의 이름을 앞에 세우는 문학상들이 기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름의 정치 속에서 이름은 어떤 식으로 기려지는가 하는 부분이다.
작가의 이름으로 시상되는 문학상은 무수히 많지만, 이 글에서는 시인의 이름을 걸고 운영하는 문학상들, 그 가운데 특히 문예지를 발간하는 출판사에서 주관하는 문학상들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한다. 시인을 기념하는 문학상들은 다양한 주체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월탄문학상, 상화시인상, 정지용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편운문학상, 목월문학상, 최인희문학상, 천상병문학상, 박인환상, 지훈상, 구상문학상 등은 해당 시인의 기념사업회 혹은 문학상 운영위원회에서 지역자치단체나 지역 언론, 출판사와 공동 운영하는 문학상이다. 윤동주문학상, 한하운문학상, 노천명문학상 등 문인협회 혹은 시인협회가 주축이 되어 문예지와 공동 운영하는 상들도 있다. 비교적 많이 알려진 문학상으로는 출판사가 운영하는 상들이 있는데, 소월시문학상(문학사상사), 만해문학상(창비), 영랑문학상(순수문학사), 백석문학상(창비), 김수영문학상(민음사), 신동엽문학상(창비), 전봉건문학상(현대시학사) 등이 그러하다. 이들 문학상이 기념사업회나 협회에서 운영하는 문학상들과 차별되는 점은, 해당 출판사에서 발간하는 문예지 및 출판물과의 긴밀한 연관 속에서 문학상 운영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점이 문학상의 이름을 복잡한 맥락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종이 위의 이름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문학상들은 대부분 자사에서 발간하는 문예지에 수상 결과와 수상작, 심사위원 명단과 심사 절차, 심사평, 수상 소감을 발표한다. 많은 출판사들이 성격과 대상이 다른 여러 문학상을 동시에 운영하는 만큼 문예지에서 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하는 지면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 가운데 시인의 이름을 건 문학상을 가장 많이 주관하고, 문학상 심사 과정을 공개하는 일에 자사의 계간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출판사로 창비의 예를 살펴볼 수 있다. 창비신인문학상, 창비장편소설상, 대산대학문학상(대산문화재단 공동 주최), 창비청소년문학상, 창비청소년도서상과 더불어 만해문학상, 신동엽문학상, 백석문학상을 운영하고 있는 창비는, 계간 《창작과비평》의 끝에 매 계절 각종 상의 수상작, 심사평, 수상 소감 등을 발표한다. 만해 한용운을 기리는 만해문학상(1973년 제정), 각각 신동엽과 백석을 기리는 신동엽문학상(1982년 제정)1)과 백석문학상(1997년 제정) 세 상의 수상작은 매해 가을호와 겨울호에 발표되어 왔는데, 2015년까지는 가을호에 만해문학상과 신동엽문학상이, 겨울호에 백석문학상이 발표되다가, 2016년부터는 가을호에 신동엽문학상과 더불어 만해문학상의 ‘최종심 대상작’이 발표되고 겨울호에 만해문학상 ‘최종 수상작’과 백석문학상이 발표되는 체제로 변경되었다.
자사의 문예지를 통해 문학상의 심사 과정을 세밀하게 보여주는 출판사 주관 문학상들은 보통 심사가 완료된 이후 수상작 발표와 함께 심사 경위를 밝힌다. 창비 역시도 그런 방식을 따르고 있는데, 유독 만해문학상만 심사 과정을 두 계절에 나누어 단계적으로 발표하는 방식으로 변경한 것은 그래서 눈에 띈다. 만해문학상은 ‘등단 10년 이상 또는 그에 준하는 경력을 가진 이’의 ‘최근 2년간(2016년까지는 최근 3년간. 2017년에 최근 2년간으로 변경) 출간된 한국어로 된 문학적 업적’에 수여하는 상이다. 2016년 창간 50주년을 기해 운영 방식을 개편한 내용의 골자는 상금을 2천만 원에서 3천만 원으로 올리고, 창비 시, 소설 분야 기획위원들이 추천한 작품을 대상으로 서너 명의 심사위원이 바로 본심을 진행하던 방식에서 내외부 심사위원을 위촉하여 예심, 1차 본심, 2차 본심 세 차례의 심사를 거치는 것으로 심사 방식을 변경하는 것, 그리고 예심 및 1차 본심 결과를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최종 2차 본심 결과를 겨울호에 알리는 것이다.2) 이러한 개편은 상금의 크기에서나 수상작 선정 과정의 세분화와 공식화에서나 창비의 문학상 시스템에서 만해문학상이 가지는 무게감이 강화되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 상의 ‘시상’ 행위를 자사에서 운영하는 다른 어떤 상보다 엄정한 문학적 심사숙고의 과정으로 풀어내어 보여주려는 창비의 의지를 드러낸다. 수상작이 선정되지 않은 단계에서 ‘최종심 대상작’과 함께 ‘예심평’을 먼저 공개하는 방식, 가을호와 겨울호 두 계절이라는 시간과 두 제호의 지면만큼의 무게를 ‘심사’ 행위에 부여하는 방식으로 창비는 만해문학상 ‘수상’과 ‘시상’의 가치를 시각화하고 물질화한다.
만해문학상이 《창작과비평》과 맺는 관계는 단지 심사 과정과 결과를 발표하는 지면의 수나 가을호 한 권에서 가을, 겨울호 두 권으로 불어난 책의 무게의 문제만은 아니다. 2016년 상금 인상, 심사 방식 및 심사 절차 공개 방식 개편과 더불어 만해문학상은 ‘특별상’을 새로 제정하여 ‘본상과 다른 장르의 작품’에 수여할 수 있게 하였다. 특별상 수상작이 없었던 2018년을 제외하고 개편 후 지난 네 해 동안 특별상은 평전, 기록물, 사회과학 도서, 문학론집에 돌아갔다. ‘문학적 업적’을 대상으로 ‘문학상’이라는 이름으로 수여되는 상에 ‘비문예’를 별도의 예심 장르로 설정하고, ‘본상과 다른 장르의 작품’이라는 특별상 선정 기준을 명기하여 ‘문예’물에 본상을, ‘비문예’물에 특별상을 주는 이 새로운 방식은, 창비가 추구해 온 방향성을 ‘문학상’이라는 제도 내적 장치로 구현하고 ‘비문예’가 ‘문예’와 마찬가지로 진중한 심사 제도를 거쳐 그 가치를 인정받는 장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발화한다.
그리고 그 발화가 공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지면이자 발화를 구성하는 목소리로서 《창작과비평》은 물질적이고도 상징적인 권력을 가진다. ‘특별상’이 제정된 2016년에는 ‘시 부문’ 세 명, ‘소설 부문’ 세 명의 예심 심사위원들이 ‘비문예물 부문’까지 심사를 맡았지만, 2017년부터는 ‘비문예물’에 두 명의 심사위원이 별도로 위촉되었고, 2019년부터는 심사위원을 위촉하는 대신 ‘창작과비평 상임편집위’에서 ‘비문예물’의 예심을 진행하고 있다. 이렇게 ‘비문예물’ 부문이 ‘심사’의 적법한 절차를 거치고 있다는 것이 《창작과비평》 가을호의 예심 및 1차 본심 ‘심사 경위’에 매년 상세히 명기된다. 예심 심사평에서 ‘비문예물’에 대한 심사평이 독립적으로 작성되고, 겨울호에 발표되는 본심 심사평에서도 ‘특별상’ 심사 과정 공개와 수상작의 가치에 대한 평가는 엄중하게 이루어진다. ‘문예’ 부문과 ‘비문예’ 부문 사이의 균형을 제도적으로 마련하고 그것을 계간지 지면에서 시각적으로 재확인해 주는 방식으로 창비는 《창작과비평》의 정체성을 문학상의 이름으로 《창작과비평》 지면 위에 새긴다. 이때 새겨지는 활자들은 ‘문학상’ 제도 내의 ‘비문예물’ 부문, ‘문예’와 구분되면서 ‘문학’과 구분되지 않는 ‘특별’ 부문의 예심을 진행하는 ‘창작과비평 상임편집위’의 목소리이자, 본심을 담당하는 창작과비평 명예편집인, 편집고문, 비상임편집위원, 편집주간의 목소리3)이다.
문예지는 상의 목적과 선정 과정과 심사평, 그리고 수상자를 공표하는 지면이자, 상의 운영 과정에 참여하는 공정한 운영위원이고, ‘문학상’이라는 이질적 제도를 빌려 발화되는 정신의 근원이자 그 정신을 이질적 제도의 목소리로 발화하는 몸으로 기능한다. 전부 새로울 것 없는 사실이지만 ‘문학상’을 둘러싼 난처함들은 이 새로울 것 없는 환경과 조건에서 비롯된다. ‘상’이라는 이름으로 작가들을 격려하고, 작가의 이름을 알리며, 작품의 가치를 공인하는 작업에 대한 통솔권이 지면을 가지고 있는, 지면을 만들어내고 유통할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시장에 무엇을 내보내고 무엇을 내보내지 않을지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출판 주체들의 손에 오롯이 쥐어져 있다는 점은 출판사가 운영하는 문학상들이 끊임없이 출판권력과 시장에서의 상징권력의 문제에 대한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매 분기 제도의 공고함을 책이라는 물질로 보여주는 문예지 시스템처럼 ‘출판’이라는 제도가 가지는 힘은 책이라는 물질의 무게와 부피와 높이만큼 구체적으로 실재하게 되기 때문이다.

1) 1982년 제정 당시 이 상은 ‘신동엽창작기금’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고, 2004년부터 2011년까지는 ‘신동엽창작상’으로 운영되었으며, 2012년부터 현재까지는 ‘신동엽문학상’으로 운영되고 있다.
2) 〈제31회 만해문학상 최종심 대상작 발표: 심사경위〉, 《창작과비평》 173호(2016년 가을호), 창비, 582쪽.
3) 《창작과비평》의 명예편집인, 편집고문, 비상임편집위원, 편집주간은 만해문학상, 신동엽문학상, 백석문학상의 본심 위원으로 참여한다.


이름으로 엮인-
책더미 #1


문학상과 출판물 사이의 관계는 조금 더 복잡하고 다채롭다. 창비가 운영하는 만해문학상, 신동엽문학상, 백석문학상은 현재 최근 2년간 출간된 ‘단행본’에 시상되고 있다. 지난 10년간의 자료를 정리해 보면 세 상의 본심 대상이 된 작품들에서 창비가 출판한 단행본의 비율이 높은 것은 아니지만, 수상작 가운데에는 창비 출판물의 비중이 월등히 높다. ‘등단 10년 이하 또는 그에 준하는 경력을 가진 작가의 최근 2년간(2016년까지는 최근 3년간. 2017년에 최근 2년간으로 변경)의 한국어로 된 문학적 업적’에 수여하는 신동엽문학상은 시, 소설, 평론을 대상으로 부문 구분 없이 한 편의 수상작을 선정하다 2012년부터는 세 부문에서 다른 장르의 두 편에 시상하였고 2019년부터는 시, 소설, 평론을 독립된 부문으로 구분하여 각각 시상하고 있는데, 시와 소설 한 작품씩을 공동수상작으로 선정한 2011년을 포함하여 최근 10년의 시, 소설 수상작 스무 편 가운데 열두 편이 창비에서 출판된 작품집이었다. 만해문학상은 본상 외에 특별상이 있었던 해까지 포함하면 최근 10년간 창비에서 출간한 책이 수상하지 못한 해는 2013년, 2018년 두 해뿐이다. 수상작이 없었던 2015년에도 수상자가 이 상의 예심 절차에 참여했고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이라는 점에서 상을 사양했을 뿐 수상작으로 최종 선정된 것은 창비에서 출판된 시집이었다.4) 활동 경력과 무관하게 ‘최근 2년간 출간된 시집’을 대상으로 하는 백석문학상은 최근 10년 가운데 일곱 해에 창비에서 나온 시집을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자사에서 운영하는 문학상을 자사에서 출간한 작품집에 빈번하게 수여하는 것을 출판사가 운영하는 문학상의 하나의 경향으로 읽어낼 수 있다면, 창비의 경우는 문학상과 문예지, 단행본 출판이 얼마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운영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단행본을 출간하고, 그 가운데 몇몇 단행본을 문학상 본심 대상으로 검토하여 수상작으로 선정하며, 그 과정을 문예지를 통해 보여주고, 수상작으로 선정된 단행본의 홍보물에 ‘제○○회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홍보 문구를 더하여 판매하는 구도 속에서, 출판사는 출판물과 문예지가 가지는 문학적 정당성을 문학상의 이름으로 보증하고, 출판물과 문예지라는 물질적 실체와 책더미로 시각화되는 역사성을 통해 문학상의 권위를 뒷받침한다. 이 일련의 상호 교환적 순환 구조를 통해 강조되고 강화되는 것은 문예지, 출판물, 문학상 개별 제도의 상징적 가치이기도 하지만, 그 제도적 물질, 혹은 물질적 제도를 통해 거듭 발화되고 구현되는 출판의 권력이기도 하다.

4) 〈제30회 만해문학상 최종심 대상작 발표: 심사경위〉, 〈간곡하게 상을 사양하며〉, 《창작과비평》 169호(2015년 가을호), 창비, 611-615쪽.


책더미 #2


문학상과 출판물 사이의 관계가 더욱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수상 작품집을 발간하는 문학상의 경우이다. 문학사상사는 이상문학상과 더불어 소월시문학상을 운영해 왔다. 1986년 제정된 소월시문학상은 1년 동안 정기 간행물에 발표된 시를 대상으로 수상작을 선정해 왔는데, 2014년 운영을 중단하였다가 2019년 1년 동안 출간된 신작 시집을 대상으로 수상하는 것으로 개편하여 운영을 재개하였다. 상의 운영 주체인 문학사상사는 소월시문학상 대상 및 우수작상 수상작을 2011년까지 매해 『소월시문학상 작품집』으로 엮어 출판하였고, 대상 수상 시인의 자선 대표작을 함께 수록하였다. 2012년부터 두 해 동안은 우수작상을 별도로 선정하지 않으면서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대신 대상 수상 시인의 시로 ‘수상 시인 시선집’을 출판했는데, 2012년에는 수상 시인의 수상작과 기발표된 자선 대표작을 엮었고, 2013년에는 수상작, 자선 대표 시와 더불어 신작 시를 함께 엮었다. 기출간 된 시집을 대상으로 운영을 재개한 2019년 수상작에 대해서도 ‘수상 시인 시선집’을 발간했는데, 수상작이 이미 출판된 시집인 만큼 새로 출판하는 ‘수상 시인 시선집’에는 수상 시인의 신작 시 및 산문이 수상 소감, 심사평 등 ‘수상’ 관련 내용과 함께 엮였다.
2019년 개편된 소월시문학상 운영 규정이 아직 문학사상사 웹페이지5)나 월간 《문학사상》에 공지되지 않고 있는 데다 2020년 수상작이 발표되지 않아, 개편 이후까지 아울러 소월시문학상 관련 단행본 발간 경향을 상세히 논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출판사의 문학상 운영과 출판 시장에서의 권력 불균형 문제 등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드러내 보여준 이상문학상 사태와 관련하여, 문학사상사가 소월시문학상을 운영하고 수상작 혹은 수상 시인의 작품을 시집으로 출판해 온 궤적을 정리해 보는 일은 문학상 ‘시상’과 ‘수상’을 매개로 출판 시장이 운영되어 온 방식을 들여다보는 작업에서 유의미한 참조점이 되어 준다.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참고해 보면 2013년부터 변화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문학사상사가 웹페이지에 공개하고 있는 소월시문학상의 ‘대상’ 상금은 1천 3백만 원이고, 2012년부터는 발표되지 않은 ‘우수작상’은 상금이 1백만 원이다. “대상의 상금 비율이 높은 까닭”은 수상작에 대한 “매절 원고료”를 포함하여 “서명의 표제작 독점 사용권과 3년간에 한해서 주관사가 독점 발행권을 갖게 되는 본 규정에 의한 제한적인 저작재산권 양수대금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수작상의 경우 “작품집에 수록하는 매절 원고료만이 상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상금 비율이 낮다고 설명되어 있다. ‘상금’에 ‘매절 원고료’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수상’을 받아들이고 ‘상금’을 수령하는 것이 곧 ‘문학상 수상 작품집’ 혹은 ‘수상 시인 시선집’ 출판과 그 출판물에 작품을 수록하는 것에 동의할 뿐 아니라, 창작물에 대한 권리의 일부를 ‘수상작’이라는 이름으로, ‘시상자’인 출판사에 ‘매절’의 형태로 양도하는 것에도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됨을 의미한다.
소월시문학상은 대상의 경우 ‘매절 원고료’에 ‘서명의 표제작 독점 사용권’과 ‘독점 발행권’ 등 ‘저작재산권 양수대금’이 ‘수상’의 조건으로 겹겹이 덧붙여져 있고, ‘수상작’만이 아니라 자선 대표작, 2013년의 경우 신작 시까지 함께 엮어 ‘수상작 작품집’ 또는 ‘수상 시인 시선집’으로 발간된 만큼, 그리고 가장 최근인 2019년에는 ‘수상작’으로 선정된 기출판 시집과는 별개로, 그러나 소월시문학상의 ‘수상 소감’, ‘심사평’ 등을 실은 채로 ‘수상 시인 시선집’이 새로 출판된 만큼, 각종 ‘저작재산권 양수대금’의 문제는 무척 복잡했을 것이다. ‘수상’과 관련된 출판물의 형태와 내용이 변화될 때마다 계약의 세목 역시 변화가 필요했을 텐데, 우수작상을 시상하지 않는다는 결정이나 상금의 액수가 변경되었다는 내용이 충분히 공지되지 않은 것처럼 “대상의 상금 비율이 높은 까닭” 안에 어떤 것들이 포함되고 배제되어 왔는지를 정확하게 확인할 자료는 찾기 어렵다. 그만큼 어떤 문학상은 어둠 속에서, 말해지는 것과 말해지지 않는 것 사이의 불투명을 무기이자 방패로 삼아 운영되기도 한다.
문제는 문학상 운영 주체가 수상작을 작품집으로 출판하여 이윤을 내는, 문학상과 출판 시장 사이의 긴밀한 관계 자체라기보다는, ‘문학상 수상작’, ‘문학상 수상 시인’과 같은 이름으로 작가와 작품을 작품집의 콘텐츠로 소비할 때 그것이 문학상 수상의 측면에서나 단행본 발간의 측면에서나 ‘작가에게도 이득’인 것이니 어떤 절차와 조건의 ‘계약’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태도일 것이다. 일종의 ‘관행’으로 굳어져 있던 이 특정한 태도는 문학상 수상 작품집 혹은 수상 시인 시선집과 같은 단행본의 출판이 실제로 출판사에게 얼마큼의 이익을 안겨 주는지, 여러 층위의 ‘저작재산권 양도’라는 ‘수상 조건’이 작가에게 실제로 얼마큼의 손해를 야기하는지와 같은 실리적인 측면에 국한되어 논의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작가의 이름을 ‘수상자’라는 이름으로 활자화하고 그의 작품을 ‘수상작’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할 수 있는 ‘시상자’이자 ‘출판자’가 가지고 있는 ‘활자’의 권력을 시상자와 수상자 모두 알고 있다는 점, 그래서 ‘격려’와 ‘거래’의 이름으로 불공정한 상황에 놓이게 될 때 작가들이 ‘수상자’나 계약서상의 ‘갑’ 혹은 ‘을’로서가 아니라 저작권자로서,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권리를 가진 자로서 목소리를 내는 일을 어렵게 느끼거나 정당한 요구를 하는 것이 이유가 되어 또 다른 부당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을 우려하게 된다는 점이, ‘문학상’을 둘러싼, 혹은 ‘문학’을 이루고 있는 ‘관행’으로서의 태도, 권력 문제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출판과 직결되는 문학상 운영 제도에서 출판사는 문학상 시상 주체로서의 상징권력과 출판 주체로서의 자본권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그 가능하지만 필연적이지 않은 조건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온 경향의 배경에는 종이책에, 문예지에, 웹상에 포진해 있는 ‘문학상’의 이름과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축적되어 온 ‘책’의 더미가 있다. 나무위키의 ‘이상문학상’ 항목에는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의 책 디자인이 자꾸 바뀌어서 이 단행본을 수집하는 이들을 곤란하게 한다는 내용이 있다.6) 매년 발간되는 문학상 수상 작품집은 서가에 나란히 꽂히는 질서정연한 책의 형태로, 책의 크기나 디자인이 조금만 변경되어도 수집가들에게 불편함을 주는 시각적 역사의 축적물로, ‘공인된’ 문학의 역사를 구성한다. 바로 그 역사와 책의 질서가 욕망의 대상이 되고 그 때문에 권력의 도구가 될 때, 한 편 한 편 가볍지 않은 무게로 쓰인 문학과 그것을 엮어내는 책으로서의 문학 사이, 전면화 되는 이름과 감추어지는 이름 사이의 긴장은 마땅한 것이 아니라 애를 써 지켜야만 하는 것으로, 존중되는 것이 아니라 보호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5) http://www.munsa.co.kr/menu1/menu1_3_1.html
6) ‘이상문학상’, 나무위키(페이지 최종 수정일: 2021.01.10. 검색일: 2021.01.17.)
https://namu.wiki/w/%EC%9D%B4%EC%83%81%EB%AC%B8%ED%95%99%EC%83%81


책더미 #3


문예지에 발표된 작품이나 출간된 단행본을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대신 미출간 원고를 공모의 형식으로 모집하여 수상작을 단행본으로 출판하는 방식으로 출판 시장과 관계를 맺는 문학상들도 있다. 출판사가 시장에서 가지는 영향력이 전면화 되고 또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방식의 문학상인 만큼, 이러한 문학상은 출판사의 이름이나 자사 문예지의 이름, 혹은 오랜 역사를 가진 특정 이름을 걸고 수상작을 선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출판사나 문예지의 이름 대신 시인의 이름으로 공모 형식을 취하고 있는 문학상으로는 민음사에서 운영하는 김수영문학상이 있다. 1981년 제정된 김수영문학상은 한 해 동안 발간된 시집을 대상으로 시상하다, 2006년부터 신인 및 등단 10년 이내 시인의 시 50편 이상의 원고를 공모하여 수상작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제도로 변경하여 운영되고 있다.
문예지에 발표된 작품들과 기간 내에 발간된 단행본들이 자동으로 예심과 본심의 대상으로 호출되는 문학상들과 달리 작가가 미리 상의 규정과 수상 조건을 확인하여 지원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모 형태의 문학상에서는 ‘수상’에 대한 동의가 출판에 대한 동의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출판에 대한 동의가 ‘수상’에 대한 동의보다 먼저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공모 형식 문학상 가운데 ‘상금’이 ‘선인세’로 처리되는 경우가 다수인 것은 ‘시상자’와 ‘수상자’가 출판이라는 목적에 상호 동의하고 있다는 감각이 ‘공모’의 형태로 전제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민음사는 김수영문학상 운영 방식을 개편한 2006년 제25회 김수영문학상 작품 모집 공고7)에서 ‘상금’은 1천만 원이라고 안내하면서, “당선작은 《세계의문학》 겨울호와 동시에 단행본으로 출간합니다. 단행본 출간 후 판매 부수에 대한 인세가 상금을 상회할 경우 초과분에 대해 인세를 드립니다.”라고 공지를 하여 ‘상금’이 곧 ‘선인세’임을 분명히 했다. 지난해 민음사 공식 블로그에 올라온 제39회 김수영문학상 응모 공지에도 “상금(선인세): 1,000만 원”8)이라는 문구가 간명하게 기재되어 있다.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는 것이 상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 책이 팔리는 만큼의 인세를 미리 받는 것일 뿐이라는 점을 인지한 후에 민음사 김수영문학상 담당자 앞으로 원고를 보낼 수 있으므로, 거래 관계 자체는 공정하게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선인세로 상금이 지급된다는 점에 동의하면서 거래가 시작된다고 해서 그것이 가지는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공모 형식으로 운영되는 계간 《자음과모음》 단편 신인문학상의 ‘상금’이 당선작을 포함하여 발간될 단행본의 ‘선인세’로 지급될 때 ‘수상’에 대한 ‘상금’과 수상작을 단행본으로 엮기 전 계간 《자음과모음》에 싣는 것에 대한 원고료가 고려되지 않는다는 점이 논의되었고, 시정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당시 자음과모음이 발표한 입장문9)에서 “좋은 장편소설을 선정해 책으로 출간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경장편소설상과 청소년문학상의 경우 “상금보다는 선인세 개념에 가”까우므로, 단편 신인문학상의 상금을 선인세가 아닌 상금으로 전환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전환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 견지되었다. 당선작을 ‘민음의 시’ 시리즈로 출간하는 김수영문학상 역시도 상금을 선인세로 지급하는 규정을 고수하고 있는데, 자음과모음의 “상금보다는 선인세 개념에 가”깝다는 표현이 내포하고 있는 모호함을 민음사는 “상금(선인세): 1,000만 원”이라는 괄호 표기로 처리하고 있다. 김수영문학상 역시 당선작으로 선정된 50여 편의 시 가운데 일부를 2015년까지 계간 《세계의문학》에, 2016년부터 격월간 《Littor》에 발표하는 것에 대한 원고료를 ‘공모 요강’에 명기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무엇이 포함되고 무엇이 포함되지 않는가는 그렇게 잘 드러나지 않고, ‘상금’이라는 말은 그렇게 계속 사용된다. 매년 말 김수영문학상 수상작이 발표되는 《Littor》 지면에는 “수상 시인에게는 상금 1천만 원이 수여되며, 시상식은 연말에 진행될 예정이다.”10)라는 말이 덧붙여지곤 한다.
‘상금’이라는 말 뒤에 ‘선인세’라는 말을 괄호 표기하는 방식은 김수영문학상 수상작이 시집으로 나와서 발생하는 인세가 1천만 원을 넘기는 일이 흔하지 않다는 ‘현실적인’ 사정으로 뒷받침되기도 한다.11)
수상자에게 지급된 1천만 원에서 실제로 출판사가 시집 판매로 벌어들이는 인세를 제한 나머지는 수상자에게 ‘증여’한, 말 그대로의 ‘상금’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상자 입장에서라면 그런 인식은 조금 이상하다. 시집이 덜 팔릴수록 더 많은 상금을 받은 것이고, 시집이 많이 팔릴수록 상금은 더 적게 받은 게 되기 때문이다. 시집이 많이 팔리는 것은 좋은 일이니 지급받은 1천만 원의 어느 부분이 선인세이고 얼마만큼이 상금이든 무관하다, 라고 말할 수는 없다. 금액이 얼마가 되었든 선인세가 아닌 ‘상금’이 매해 수상자들에게 동등하게 지급되고 인세는 인세로 처리되는 것이 ‘시상’하는 쪽에서나 ‘수상’하는 쪽에서나 더 명료하고 정당한 일이라는 점은, 어떤 ‘현실적인’ 이유로도 반박되지 않는다. 가장 ‘현실적인’ 것은 시상과 수상, 창작과 출판이라는 거래 관계에서 지켜야 할 선을 정확히 합의하고 그 선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공모 형식의 상에서 ‘선인세’가 문제가 될 때 반복하여 지적되듯 이것은 그저 이름의 문제일 수도 있다. 출판 원고 ‘공모제’인 것에 ‘문학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출판물에 대한 ‘선인세’에 ‘상금’이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는 일 말이다. 솔직하게 사실을 지칭하는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현실적인’ 어려움이 해결될 수 있음에도 많은 문학상들은 어떤 표현법을 동원해서라도 ‘상금’이라는 말을 수호한다. ‘문학상’이라는 말 대신 제도의 성격 그대로 ‘문학 공모’라고 하지 않는 이유나, ‘상금’이라는 말 대신 투명하게 ‘선인세’라는 말만 명기하는 것을 꺼리는 이유는 ‘상’이라는 제도의 상징성이 전면화 되어야만 시상자와 수상자 사이에 거래되는 ‘명예’라는 효과가 가장 극대화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상금과 선인세를 구분하여 상금의 규모를 줄이더라도 인세를 분명하게 인세로서 지급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려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회사의 문예지와 문학상과 출판물이 긴밀하게 관계되어 있는 가운데 심사 절차가 엄정하고 공정한 심사숙고의 과정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보여주려 노력하는 일이나, ‘수상’의 이름으로 작가의 작품에 대한 권리를 출판사가 독점하려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름의 명예를 위해 무언가는 일부러 말해지지 않고,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채로 이름을 인정하며, 이름의 역사에 참여하기도 한다.

7) 제25회 김수영문학상 작품 모집 광고, 《세계의문학》 120호(2006년 여름호), 민음사.
8) https://blog.naver.com/minumworld/222049675256
9) https://twitter.com/jamobook/status/1223128078873792513?s=21
10) <2018 제37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작 발표>, 《Littor》 15호(2018년 12월/2019년 1월호), 민음사, 216쪽; 〈2019 제38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작 발표〉, 《Littor》 21호(2019년 12월/2020년 1월호), 민음사, 241쪽.
11) https://webzine.munjang.or.kr/archives/146198


이름과 이름과 이름 들


문학상 운영 역시 자본의 논리를 따른다. 그러나 여전히, 문학상은 명예를 축적하는 제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이라는 이름이 필요하고, ‘상금’이라는 명목과 그에 걸맞은 금액의 숫자가 표시되어야 하며, 심사 절차의 공정성이 전시되고 ‘시상’이라는 행위의 무게와 묵직한 역사가 물질로써 가시화되어야 한다. 그렇게 제도의 상징적 가치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데에 충실한 이유로 어쩌면 문학상이라는 제도는 제스처와 내실 사이의 간극을 봉합하려는 미성숙한 방어기제가 되어 왔는지도 모른다. ‘상’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제도를 만들어 가는 일이 아니라 어떤 제도를 그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일에 몰두하는 복수의 ‘문학상’ 제도-들에서, 지금 이곳의 문학을 만들어 가는 작가들과 작품들보다 해를 거듭하며 축적되는 ‘상’의 이름과 그 이름을 글자로 새겨내는 각종 출판물들의 더미가 더 중요해져 버린 것은 아닐까. 문학은 문학상의 역사가 되기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닌데 문학상은 문학을 자꾸만 어떤 명예의 역사를 구성하는 데에 동원하고 소비해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문학상’이라는 말 앞에 붙는 시인들의 이름 역시도 어쩌면 비어 있는 이름으로, 혹은 이름만 남은 이름으로 그런 일에 다만 활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시인의 이름을 앞세운 문학상들은 대부분 상을 설명하는 문구에 시인 혹은 시인의 문학적 성과를 기리기 위해 제정 및 운영되는 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나 운영 단체의 성격에 따라 ‘기리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전통적 서정에 바탕을 둔 빼어난 시어로 한국 현대시를 한 단계 발전시킨 시인 정지용의 문학적 성과와 문학사적 위치를 기리기 위해"12) 1989년 시와시학사에서 제정한 정지용문학상은 현재 옥천군, 옥천문화원이 주최하고 지용회가 주관하고 있다. 정지용 시인의 출생지인 옥천의 지역 사업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만큼 정지용문학상은 시인의 생가를 복원하고, 시비를 세우고, 정지용문학관을 운영하고, 매년 5월 ‘지용제’라는 축제를 열고, ‘정지용 캐릭터’를 무료 배포하는 등 시인을 지역의 상징으로 세우는 옥천군의 문화 사업의 일환으로 운영된다. 정지용문학상 수상작은 옥천군청 홈페이지와 블로그를 통해 발표되고, 옥천군청의 웹사이트에 수상작이 아카이빙 되며, 시상식은 지용제 행사의 일부로 진행된다. “그의 모더니즘 시의 문학적 위업을 기리기 위해”13) 2000년 계간 《시현실》이 제정하여 운영해 온 박인환문학상은 2019년 계간 《시현실》, 강원 인제군, 인제군문화재단, 경향신문, 박인환시인기념사업회추진위원회가 공동 운영 업무 협약을 맺은 이후 21회 수상자를 내지 않았고, 2020년 강원 인제군, 인제군문화재단, 경향신문, 박인환시인기념사업회추진위원회가 박인환상을 제정하여 시 부문, 문학 논문 부문, 영화평론 부문에서 각각 제1회 수상자를 선정했다. 제1회 박인환상은 인제군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박인환문학관에서 원고를 접수하고, 당선작을 인제군문화재단 홈페이지에 발표하였으며, 시상식은 박인환문학축제의 일부로 진행했다.
정지용문학상과 박인환문학상은 출판사에서 처음 제정하였지만 지역자치단체와 기념사업회가 운영하게 되면서 문학상 자체의 상징성보다는 시인을 기리는 다양한 문화 사업의 일부로서의 기능이 강화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수상 작품의 가치를 발견하고 작가를 격려하는 의미가 사라지지는 않지만, 문학관과 문학축제를 운영하는 맥락과 겹쳐져 있는 것으로서 문학상은 시인의 이름을 하나의 상징물로 만드는 일에 더 무게를 싣는다. 시인의 형상이 분명해질수록 지역과 단체의 정체성도 분명해질 수 있으므로, 상을 운영하는 주체는 ‘문학상’이라는 제도의 명예나 ‘시상’의 권위보다는 지역의 테두리 내에서 건축물, 이미지, 문화행사 등 유무형의 방식으로 시인의 형상을 구체화하는 데에 집중한다.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문학상들이 시인을 ‘기리는’ 방식은 이와는 다르다. 출판사는 문학관을 만들거나 해마다 문학축제를 운영하지 않는 대신 시인의 전집과 시선집을 발간하지만, 시인의 이름이 무거운 대명사가 되는 것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출판 사업은 한 사람을 기리고 기념하고 복원하는 일에 몰두하는 종류의 사업이 아니고, 출판 시스템의 한 부분으로서 문학상 역시도 특정 시인의 이름과 그 문학적 업적이 가지는 역사적·문학사적 상징성을 복원하고 재생산하는 일에 일차적인 목적을 두지는 않는다. 시인의 이름으로 문학상을 운영하는 출판사들은 그 이름을 상의 정체성으로 삼으면서도, 다른 정체성을 세우는 일에 이름을 활용한다. 이미 역사적·문학사적 상징이 되어 있는 시인의 이름을 빌려 특정한 ‘역사성’을 선점하고 그 위에 새로운 ‘역사’를 세우기 위해서, 그렇게 거대한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무엇을 구축하기 위한 초석으로서 활용하기 위해서 문학상의 이름에는 시인의 이름이 유용한 접두어처럼 붙는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업적을 기념하고 그 문학정신을 계승하여 민족문학의 발전에 이바지하고자”,14) “우리 현대 시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백석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는”15)과 같이 해석의 폭이 넓은 표현들이나 “시대의 거부로 이어진 자유와 치열한 양심의 시인 김수영을 기리기 위하여”,16) “향토성 짙은 서정으로 한국 시의 영역을 넓힌 김소월의 시 정신을 기리기 위해”17)와 같이 구체적인 키워드를 활용하고 있는 표현들은 공통적으로 ‘기리는’ 일에 관해 말하고 있지만, 이들 문학상들에게 중요한 것은 시인의 이름으로 환기되는 상징 가치를 문학상에, 문학상의 시상자인 출판사에, 문학상 심사 과정과 결과를 발표하는 문예지에, 그리고 문학상을 수상하는 단행본들과 상의 이름을 걸고 출판되는 출판물들에 연결시키는 것, 세밀한 설명이 없을 때 더 강력하게 작용되는 이름의 상징성을 독점적으로 점유하고 있다는 것을 크고 작은 활자와 종이와 책으로 재차 확인하면서 그 활자의 묶음을 생산하고 유통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견고히 하는 일일 것이다. 오래 쌓여 온 ‘문학사적’ 명예 위에 ‘출판사적(出版史的)’ 명예를 덧쌓아 가는 문학상이라는 제도가 문학을 읽고 쓰는 이름들을 불러들이고 활자화하여 더 많은 이들에게 다가가게 하는 장치가 된다는 점, 문학이 고립된 글자들이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 다니며 새로운 글자들을 불러내는 활자로 살아 있게 한다는 점, 그리고 문학사와 출판 시장의 바깥에서 쓰기를 계속하는 이들에게 격려와 힘이 되어 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긍정될 수 있으려면, 문학이라는 커다란 이름으로 엮이는 역사의 이름과 시장의 이름과 창작의 이름 사이에서 어떤 균형이 이루어져야 할까. 마땅히 균형이라 믿었던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기울어진 것들과 가려진 것들이 자꾸 드러날 때에, ‘문학’의 이름으로 수여(受與/授與)하는 상은 무엇을 다시 묻고 무엇을 들추어 무엇이 되어 가야 할까.

12) 옥천군청 블로그 https://blog.naver.com/yourokcheon/221543819682
13) http://www.ymbook.co.kr/?page=5
14) https://www.changbi.com/prize-contest-home/manhae-prize-for-literature
15) https://www.changbi.com/prize-contest-home/baeksok-prize-for-literature
16) http://minumsa.minumsa.com/award/%EA%B9%80%EC%88%98%EC%98%81-%EB%AC%B8%ED%95%99%EC%83%81/
17) http://www.munsa.co.kr/menu1/menu1_3_1.html











홍성희
작가소개 / 홍성희

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비평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장웹진 2021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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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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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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