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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대화들, 불가능한 현실들

  • 작성일 2020-05-01
  • 조회수 2,115

[문학더하기(+)]

2010 다시-읽기 Re-View
- 《문장웹진》에서 실시한 2010년대 문학 설문 결과에 포함되지 못했지만 우리가 ‘다시’ 읽어봐야 할 작품에 대한 리뷰



불가능한 대화들, 불가능한 현실들

- 배삼식 「먼데서 오는 여자」, 「삼월의 눈」을 중심으로



박혜진




언제나 제외되는 것들이 있다. 제외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동반된다. 수적 열세에 밀려서이기도 하고 기준이라는 최소한의 형식에 어긋나서이기도 할 텐데, 그렇게 제외되는 것들의 존재가 희미해져 갈 때 왜소해지는 것은 작품 자체만이 아니다. 그들이 품고 있는 미학적 세계도 함께 사라진다. 희곡이 각종 문학 집계에서 제외되는 것은 생산되는 작품의 수와 소비하는 독자들의 수, 즉 생산과 소비라는 이중 굴레에 갇혀 그 소수성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텍스트의 불완전함에 기인하는 점이 크다고 하겠다. 무대 공연을 전제로 한 희곡은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기와 무대 공간 등 다양한 요소들과 함께 완성되는 불완전한 텍스트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배우나 무대 등 가변적인 상황들이 변해 가는 와중에도 흔들리지 않고 전달되는 본질을 지닌 작품을 만날 때, 우리는 거기서 시간의 흐름을 넘어설 수 있는 가치, 그러니까 '문학성'을 발굴하고 호명할 필요가 있다. 이때의 호명은 한 작가, 또는 한 작품에 대한 호명이 아니라 한 세계에 대한 호명이다. 더욱이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이 구분되는 와중에 희곡이 지닌 형식의 독창성이 여느 산문들의 그것과 비교해 모자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고,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시대의 '언어'를 고르는 일에 그러한 모자람은 조금 용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희곡은 진술이 부재하는 대화의 공간이다. 대화의 미학이라면 이미 많은 작가들이, 그리고 현재의 작가들이 계속해서 그 새로움의 한계를 갱신하고 있는 영역이기는 하다. 황정은이 『백의 그림자』에서 보여주었던 무제와 은교의 대화는 욕망 없는 말하기가 평행하면서 나란하게 이어지는 와중에 펼쳐지는 '무중력한 소통'으로 그 시대 독자들에게 내재해 있던 무게를 소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흔히 대화라고 하면 교차하며 진행되는 쌍방의 소통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황정은의 어떤 대화는 어긋나는 각도 없이, 그러니까 동일한 각도로도 충분히 가능한 대화의 평행선을 보여준다. 황정은의 평행한 대화와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대화로 김숨의 열린 대화가 있다. 『흐르는 편지』나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등 소위 '증언소설'에서 김숨 작가는 위안부 생존자의 목소리를 화자의 진술에 기대지 않고 그 자체의 소리로 독자들에게 중계한다. 이때의 중계가 뜻하는 것은 편집 없는 생방송이 아니다. 대화의 상대로 독자를 상정하는 이러한 글쓰기는 듣는 사람이 없어서 안착하지 못했던 생존자들의 목소리가 도착할 수 있는 벽이 되어 준다. 벽이 있을 때 이들의 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돌아온 소리가 출발한 소리와 같지 않음은 물론이다.


배삼식의 작품은 대화 안에서 극을 실현한다. 사실 이 말은 정확하지 않다. 배삼식은 대화만으로 극을 실현한다. 대화란 개인이 가진 가장 바깥의 언어가 상대방의 언어를 만나 모종의 관계를 형성하는 사건이다. 말하자면 대화는, 분명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대화를 통해 극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전개된 상황이 소강상태에 이르는 등의 변화는 별로 대수로울 것이 없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대화는 결국 한 개인의 발화인 탓에 다수에게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나 조건이 될 수 없다. 그런 경우도 있기는 하다. 영향력이라는 이름의 권력을 지닌 사람의 말이라면 충분히. 그러나 힘이야말로 이례적인 요소이며, 우리에겐 대체로 힘이 없다. 서민들이 살아가는 풍경을 작품의 소재로 삼는 이 작가에게 외부의 자극 없이 두 사람의 대화만으로 극적인 순간을 포함한 서사를 구성한다는 것은, 역으로 외부 요소가 없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통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뜻한다. 요컨대 배삼식의 작품에서 대화는 드러나는 말과 드러나지 않는 말, 바꿔 말하면 말과 기억, 말과 무의식이 상호작용하는 '뒤집어진 내부 공간'이 된다. 뒤집어진 내부는 안에 속할까 밖에 속할까. 대화(對話)의 기술(技術)이자 기술(奇術)을 이야기하기 위해 2010년대에 쓰이고 공연된 배삼식의 희곡 중 시대의 문제의식과 그것을 드러내는 독창적 형식이 공통으로 발견되는 작품을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2010년대 한국 사회의 의식과 무의식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라면 「먼데서 오는 여자」와 「삼월의 눈」이 있다.


■ 우리가 과연 애도할 수 있을까
2010년대에 기억해야 할 단 하나의 사건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세월호라고 말하겠다. 세월호로 표상되는 참사를 기억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를 테고 그 안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문제의식도 다 같을 수는 없다. 그런데 역사는 반복된다. 세월호라는 사건의 반복을 말하는 게 아니다. 거대한 슬픔 앞에서 사회가 보이는 행동이 반복된다는 말이다. 크게 다를 것도 없는 말이긴 하다. 사건을 반복하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이런 인간 행동의 반복일 테니. 「먼데서 오는 여자」는 2·18 대구지하철 화재참사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피해자의 부모가 극의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시종일관 두 사람의 대화로 이어지는 가운데 두 사람의 대화가 어딘가 묘하게 어긋나 있다는 느낌을 받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남편은 현재에 있지만 아내는 과거에 있다. 때로는 두 사람이 연애하던 시절로 가 있고, 때로는 두 사람이 만나기 훨씬 이전의 시절로 가 있다. 여자의 기억과 함께 이야기는 6·25전쟁, 청계천 봉제공장, 베트남과 중동을 오가며 한국사의 한 장면들을 일별한다. 어쩌면 여자는 치매를 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자는 이곳에 있지 않고 자꾸만 먼데로 가려고 한다. 먼 시간 속 먼 장소. 여기가 아닌 다른 곳.


여자의 의식이 이곳에 자리 잡지 못하는 이유는 두 사람이 겪은 고통의 실체와 함께 서서히 드러난다. 두 사람에게는 민영이란 이름의 딸이 있고, 딸은 지하철 화재참사 때 목숨을 잃었다. 192명이 사망하고 151명이 부상을 입었던 17년 전 그 사건. 그러나 여자의 기억이 자꾸만 먼데를 떠도는 것은 딸을 잃은 상실감 때문만은 아니다. 부부가 앉아 있는 곳은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이고, 도대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시민안전테마파크'라는 이름은 우리 사회가 화재참사로 희생된 피해자를 애도하고 기억하는 방식의 일면이다. 사건 현장과 관계없는 곳에 지어진 이 테마파크는 "대구 지하철 참사를 교훈 삼아 재난에 대처하는 능력을 높이고 안전 수칙을 알리기 위해" 세워졌다고 하나, 매끈하고 번듯한 이름 이면에는 유가족들의 아픔을 외면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 흔적의 역사는 이렇다. 시민안전테마파크는 참사로 희생된 사람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원이다. 하지만 추모 시설은 혐오시설이라는 이유로 주민들이 공원 안에 추모관이나 위령탑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며 추모 공원 진행도 갈 길을 잃는다. 대구시에서 내놓은 타협안은 유족들과 이면 합의를 하고 대외적으로는 안전을 위한 테마파크를 세우기로 한 것이었으나 유족들에게 말한 것들, 그러니까 추모 묘역을 만들고 위령탑을 세우고 수목장을 만드는 일 등은 실현되지 않았다. 유족들은 시가 눈감아 주기로 한 채 서른두 명의 유골을 새벽에 이 공원에 묻는다. 마치 도둑처럼 새벽에 전세 버스를 타고 숨어들어 이미 파놓은 구덩이에 서른두 명의 유골을 묻고 갔다. 그러나 이후 누군가의 고발로 이것이 법정 다툼으로까지 번지면서 유족들은 졸지에 암매장꾼이 된다. 2년이 넘는 법적 공방 끝에 유가족들은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유족들이 추모하기 위해 사투한 11년 동안의 고통은 한국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2014년 가을에 초연된 이 작품을 본 관객들이 2014년 4월에 목도한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어쩌면 이 작품은 세월호에 대한 자신만의 응답일지도 모른다.


기억은 다른 존재가 대화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통어다. 동일하게 기억하기 때문이 아니다. 기억은 한 사람 안에서도 불협화음을 이루는 불완전 그 자체다. 그 불완전함에 기억의 쓸모가 있다. 내 안에 있지만 내 것만이 아닌 기억은 한 사람의 것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기억하기 위해 투쟁을 불사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나의 소멸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대화를 이어 갈 수 있는 최소한의 공통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와 남자는 서로 다른 시간대에 있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시차는 둘의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두 사람의 대화는 오직 '기억'을 매개로만 가능하다.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존재가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기억을 통해야만 가능하다는 듯이. 기억을 매개로 진행되는 이들의 대화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대화라기보다는 서로를 보호하기 위한 대화다. 남자는 여자가 이곳으로 오지 않고 저곳들에 머물 수 있도록 여자의 기억을 자극하지 않고 여자가 기억하는 대로 그 길을 따라가며 대화한다. 기억을 테마로 하는 작품들 가운데 「먼데서 오는 여자」의 기억이 돋보이는 지점은 두 개의 망각을 대비시킨다는 것이다. 여자는 잊어야 살 수 있기에 망각으로 도피했고, 사회는 잊어버리는 것 자체가 목표이기에 도피하기 위해 망각했다. 두 개의 망각은 다르다. 잊어야 사는 여자는 끝내 잊지 못한다. 잊어버리는 것이 목표인 세상만큼 잊지 못한다. 의도된 망각 앞에서 불가피한 망각은 백전백패인 것이다. 딸의 생일을 맞아 공원을 찾은 남자와 여자. 여자의 기억이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헤매는 게 남자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다행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의 머릿속에 그날의 기억이 또렷해지기 시작한다.


■ 사라진 세계와의 대화
「먼데서 오는 여자」가 잃어버린 딸을 애도하기 위한 지난한 과정에서 발생한 고통을 망각으로 대응하는 작품이라면 「삼월의 눈」은 죽음 이후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노인의 못다 한 애도에 대한 이야기다. 「먼데서 오는 여자」가 그러한 것처럼 이 작품도 노부부가 대청마루에 앉아 두런두런 대화하는 장면으로 시작해 대화하는 장면이 계속된다. 시작하자마자 두 사람의 대화는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진다. 이발소에 다녀온 남자가 머리카락은 자르지도 못한 채 돌아오기에 왜 그냥 오냐고 하자 이발소가 없어졌단다. 없어지는 것들이 많아지는 이 동네는 서울의 삼청동쯤으로 예상되는 도심 한복판이다. 부부는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동네의 오래된 한옥에 살고 있다. 부동산에서는 수시로 찾아와 집을 팔라고 하고, 오랜 시간 정을 쌓아 왔던 것들은 이제 하나같이 요즘 유행하는 가게로 바뀌었거나 철거되고 있다. 주변 환경이 다 바뀌고 있을 때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이방인이 되는 기분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갑자기 이 세계의 이방인이 된 노인, 할아버지는 시종일관 멍한 눈이다. 멍한 할아버지와 달리 할머니의 말소리에만 생기가 돈다.


「삼월의 눈」은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는 작품이지만 사실은 한 사람의 혼잣말과 그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지금은 없는 사람이다. 죽은 자와 대화하는 이유는 죽은 사람에 대한 깊은 그리움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의 삶이 산 자들의 이곳보다 죽은 자들의 그곳과 더 가깝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더 가까운 쪽이 죽음의 세계이기 때문일까. 「먼데서 오는 여자」가 시작되자마자 부부의 대화에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삼월의 눈」에서는 작품이 끝날 때쯤이 되어서야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환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내가 속한 세계의 이방인이 된다는 것이다. 세상은 이제 봄인데 아직 봄으로 건너오지 못한 겨울의 때 아닌 등장처럼 '삼월의 눈'에는 시차가 담겨 있다. 봄이 된 줄 모르고 눈을 내리는 겨울 같은 존재. 어떤 사람, 어떤 생각과도 교환되지 못하고 고립되고 마는 할아버지는 극이 진행되어 갈수록 그 자신이 너무 늦게까지 남아 있는 시대착오적 존재처럼 느낀다. 노부부의 대화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 그리고 곧 사라질 세계가 나누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대화다.


앞서 살펴본 두 작품의 대화는 함께 있으나 다른 곳에 존재하고 다른 곳에 있으나 함께한다고 생각하는 두 사람의 불가능한 대화를 재현한다. 「먼데서 오는 여자」에서 남자와 여자는 기억하는 일을 방해하는 사회에 상처받은 아내가 망각으로 도피한 후 상처로 가득한 현재보다 상처 없는 과거에 머물 수 있도록 현재에서 멀어지는 대화를 한다. 그러나 과거의 한 시절에도 상처는 있었고, 상처의 결을 따라가다 결국은 현재에 이르고 만다. 결국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다. 먼 곳에서 헤매다 끝내 돌아오는 여자의 기억은 역으로 기억을 방해하는 일, 잊게 만드는 일의 불가능성을 암시한다. 「삼월의 눈」에서는 변해 가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고 우두커니 남아 있는 자신의 모습에 공허를 느끼는 할아버지가 죽어 사라진 할머니와 대화하며 이곳에서 느끼지 못하는 소속감을 느끼는 찰나의 순간들이 포착된다. 이들의 '불가능한' 대화들은 현실의 불가능한 꿈이 잠깐 동안 가능해지는, 어쩌면 유일하게 가능해지는 순간의 재현은 아닐까.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대화의 파동이 꿈쩍도 하지 않는 현실의 한계와 부딪치는 모습이 마치 처연하다. 그 처연함은 2010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실감의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박혜진

작가소개 / 박혜진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어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저서로 〈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 가고〉(공저)가 있다. 현재 출판사에서 문학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문장웹진 2020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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