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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의 무대와 배역들 - 장류진, 최은영, 강화길의 소설

  • 작성일 2019-03-01
  • 조회수 2,400

[문학 리뷰(소설)]




모멸의 무대와 배역들
- 장류진, 최은영, 강화길의 소설




김요섭





이기호의 단편 「최미진은 어디로」는 모멸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의 서술자이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기호'는 온라인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그의 책을 떨이로 내놓은 판매자를 만나기 위해서 직거래를 신청한다. 판매자인 '제임스 셔터내려'가 덧붙인 설명("이기호/병맛 소설, 갈수록 더 한심해지는, 꼴에 저자 사인본"1))에 느낀 모욕감 때문이다. 직거래에서 '제임스 셔터내려'는 이기호를 알아보고, 그 앞에서 고개 숙인 채 변명과 사과를 늘어놓다가 도망치듯 떠난다. 그 밤, 술에 취한 '제임스 셔터내려'가 이기호에게 전화한다.

1) 이기호, 「최미진은 어디로」,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오빠 강민호』, 문학동네, 2018, 10쪽.


씨발,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가 왜 책을 파는지…… 내가 당신이 쓴 글씨를 얼마나 오랫동안 바라봤는지…… 우리 미진이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모르면서 그냥 그런 거잖아요…… 그런데 씨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내가 죄송하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하고 사는데…… 꼭 그 말을 들으려고…… 꼭 그 말을 들으려고 그렇게……2)

2) 이기호, 위의 책, 31쪽.


왜 그가 책을 팔게 되었는지, 저자에게 사인을 받은 원래 책의 주인인 최미진이 누구인지, 그가 어떤 삶을 견디고 사는지 작가는 알 수 없다. 작가가 알 수 있는 것은 "모욕을 당할까 봐 모욕을 먼저 느끼며 모욕을 되돌려주는 삶"3)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모욕감이 다른 이에 대한 모욕으로 이어지는, 이 마음의 연쇄는 그 과정이 시작점이 어디에 있는지('최미진은 어디로') 알 수 없다. 그들이 느낀 모욕감은 그 출발점이 분명하지 않다. "죄송하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하고 사는" 삶을 나에게 가한 이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김찬호는 이런 모욕의 감정을 모멸감으로 규정한다. 모욕과 경멸이 혼재된 모멸감은 이를 가한 주체가 분명하지 않고, 때로는 어떤 상황 속에서 느끼기도 한다.4) 「최미진은 어디로」에서 인물의 일상을 채우는 모멸감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이 모멸감의 기원에는 일상의 상처들이 덧나고 흉터가 지는 과정을 따라갈 때 닿을 수 있다. 지난 계절의 소설들에는 모멸감이 삶의 무대에서 어떻게 연출되는가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여럿 있었다. 강화길, 장류진, 최은영의 단편들5)은 각자의 방식으로 모멸의 삶을 조망한다.
장류진의 「잘 살겠습니다」는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는 입사 동기인 '나'와 '빛나 언니', 두 인물의 갈등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이 갈등의 구도가 '나'와 빛나 언니가 대립하기보다는 대비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입사한 뒤 뛰어난 스펙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일하기를 원했던 핵심 부서에 배치 받지 못한다. 그런 그를 더 우울하게 하는 것은 같은 경영지원부로 빛나 언니가 배치되었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은 같은 여대를 나온 입사 동기지만 '나'는 빛나 언니가 자기보다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1학년 때부터 대기업 취업을 목표로 삼고 대외 활동과 스펙 쌓기에 열을 올려 화려한 이력을 가진" 나와 "그 흔한 단기 인턴 경력조차 없"(105)는 빛나 언니였지만 같은 부서에 배치되어 2년간 함께 근무한다. 전략기획팀으로 자리를 옮기기 위해서 "너 잘한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110)라는 말을 들으면서 유난스럽게 일했던 '나'와 달리 빛나 언니는 기본적인 부동산 상식조차 없어서 부동산 사기를 당하고 세 살 어린 '나'에게 조언을 구하면서도 먼저 커피값을 계산하겠다고 나서지 않을 만큼 사회성이 부족해 "머릿속이 궁금한" 사람이었다. 서로 부서가 갈린 뒤에 연락하지 않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빛나 언니가 '나'의 결혼 소식을 듣고는 밥을 먹고 청첩장을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몇 년간 연락조차 없던 그가 왜 만나자고 했는가에 대한 의문은 빛나 언니가 결혼 준비에 대해서 알려달라고 부탁하면서 풀린다.
소설에서 유능한 '나'와 어딘가 부족하고 사회적 상식이 부족한 빛나 언니의 대비가 반복되면서 갈등이 누적되어 간다. 빛나 언니에 대한 '나'의 감정은 정작 결혼식에는 참석하지도 않고, 축의금을 대신할 선물을 골라서 알려달라며 결정을 자신에게 미루고, 결혼식 청첩장을 직접 전해 주지도 않는 모습을 보면서 폭발한다. 그는 빛나 언니가 축의금을 대신해 산 밥값에서 자신이 청첩장을 전해 줄 때 산 밥값을 제한 가격의 결혼 선물을 주기로 한다. 그는 돈이 아까워서 빛나 언니에게 그렇게 신경을 쓰느냐는 남편의 말에 세상의 원리를 알려주기 위함이라고 답한다.

3) 이기호, 위의 책, 33쪽.
4) 김찬호, 『모멸감』, 문학과지성사, 2014, 67쪽.
5) 이 글에서 다루는 작품은 다음과 같다. 강화길, 「오물자의 출현」, 《릿터》 15호, 민음사, 2018, 장류진, 「잘 살겠습니다」, 《현대문학》 12월호, 현대문학, 2018, 최은영, 「일 년」, 《창작과비평》 겨울호, 창비, 2018. 이후 인용할 때는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한다.


"빛나 언니에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5만 원을 내야 5만 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 2천 원을 내면 만 2천 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 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중략) 디즈니 공주님 같은 찰랑찰랑 긴 머리로 대가 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 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을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 그걸 빛나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이러는 거라고, 나는."(116~117)


세상물정 모르는 빛나 언니에게 느끼는 그의 답답함과 불만의 토로는 세상의 원리에 대한 자신의 불안을 내보이는 것으로 이어진다. "대가 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 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을 잡아 깎아내"리는 세상에서 버텨내기 위해 흠잡을 데 없는 사회생활을 유지해 온 '나'의 불안이 빛나 언니의 무신경함에 대한 불만으로 투영된다. 그는 세상이 "만 2천 원을 내면 만 2천 원짜리 축하를 받는" 기계적 균형이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말하지만, 실상 주요 부서들은 남자 동기들을 우선으로 배정하고, 몇 년의 노력 끝에 옮겨온 부서에서 함께 일하는 동기였던 남편보다 천 30만 원의 연봉이 더 적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차별을 견디어야 하는 곳이다. 입사 초에 회사 전체공지 메일로 부서이동 문의를 해서 '전체회신녀'라는 조롱거리가 된 빛나 언니는 마찬가지로 그 계정으로 이메일을 쓰는 중이던 그에게 자신이 설 수도 있던 모멸의 자리를 떠올리게 한다.
장류진은 상사의 변덕 때문에 카드 포인트로 월급을 지급받는 굴욕을 감내하는 직장인의 삶을 그린 등단작 「일의 기쁨과 슬픔」에 이어서 직장생활의 불안과 모멸의 구도를 세밀하게 그린다. 소설에서 전면화 된 갈등은 빛나 언니에 대한 '나'의 불만이지만, 이면에는 일상의 은밀한 차별 속에서 자기 목표를 향해 숨 가쁘게 달려온 여성이 느끼는 구조화 된 모멸의 위협이 있다. 위태로운 삶을 강요하는 세상의 원리를 끝내 알지 못하고 만 2천 원짜리 선물을 소중히 받는 빛나 언니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마음으로 응원해 주기로 한다. "수군거림의 주인공이 빛나 언니가 아니라 내가 될 수도 있었"(107)던 세상을 그들이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장류진의 「잘 살겠습니다」가 언제든 서로의 상황이 뒤바뀔 수 있는 직장 동기들의 관계를 보여준다면 최은영의 「일 년」은 인턴과 정규직 사원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경계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 간다. 갑작스럽게 수술을 받게 된 지수는 병원에서 어머니의 병간호를 하던 다희와 다시 만나게 된다. 그들은 몇 년 전 같은 회사에서 3년 차 정규직 사원과 1년 계약 인턴으로 함께 일한 적이 있다. 지수는 간척지에 풍력발전기 건설을 감독하는 업무를 맡았고, 다희가 그의 보조로 함께 일한다. 두 사람은 출장 때 지수의 차를 함께 타던 것을 계기로 출퇴근길에 카풀을 하면서 가까워진다. 지수는 동갑내기인 다희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회사 사람들에게 애써서 최선을 다하려 했던 자신의 모습을, 그 뒤의 낙담"(155)으로 회사의 인간관계에 지쳐 있던 지수는 회사 사람들을 대하는 다희의 모습이 "솔직하지만 아직 미숙하여 경솔한"(157) 태도라고 걱정한다. 다희를 걱정하면서도 지수는 한편으로 그를 경계한다. 함께 가는 차 안에서 다희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느꼈던 상처를 털어놓을 때 "직장 동료로서의 선을 넘었다고 생각"(159)하는 지수는 그를 향해 열려 있으면서도 그들 사이의 경계를 반복해서 떠올린다. 지수의 경계심은 솔직한 다희의 모습에 마음을 열어 가면서 가라앉지만, 불현듯 다시 떠오르며 둘의 사이를 무너뜨린다. 다희를 제외한 모든 관계의 조건이 지수를 낙담하게 한 상황에서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수 씨 같은 신입은 억울할 거야. 고졸 특채들이랑 같이 신입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들어왔으니.
그는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겉으로는 같은 입사 동기지만, 다 형식적인 거고, 우린 걔네 후배로 생각 안 해. 그러니까 걱정 마요."(167)


지수가 신입이었을 때 대학 동문인 김 상무는 회사 안의 노골적인 차별을 말하면서, 지수가 차별하는 이들 쪽에 서 있음을 암시한다. 지수는 김 상무의 말에, "차별하는 사람의 입장에 설 수 있게 한 그의 말에 위로를 느꼈"(168)다. 지수에 대한 다른 이들의 은밀한 따돌림은 그를 차별한 것이 아니라, 차별받는 위치에 선 이들의 경계심이다. 그 경계를 알고 있기에, "자신과 김 상무를 두고 어떤 태도로 이야기했을지 어림"하면서도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면서"(165) 체념한다. 차별하는 이들의 내부에 '어린 여자'인 지수를 위한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그도 알게 되면서 거리를 두려고 하지만, 이미 자라난 경계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선배, 인턴이었던 적 없죠."(170)라는 다희의 말은 차별의 경계가 그들 사이에서도 때때로 돌출된다는 불길한 신호였다. 자신을 보호하는 게 습관이 된 경계심 때문에 지수는 다른 이들 앞에서 다희와의 관계가 별 사이 아니라고 말하고, 이를 들은 다희는 자신의 마음을 닫는다. 층층이 나뉘어 있는 관계의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에 뒤따른 낙담을, 지수가 다희에게 반복한 것이다. 때로 그렇게 경계 안으로 숨어버리려는 겁먹은 마음이, 누군가를 경계 밖으로 밀어내는 모멸의 순간이 되기도 한다.
「일 년」은 최근 최은영의 작품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경향, 위태로운 차별의 조건에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려는 태도가 서로를 상처 입히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작품이 전작들과 구분되는 것은 차별의 내부자로 위태롭게 남은 지수의 시선을 통해, '진짜 우리'일 수 없는 이가 왜 그 경계선 밖으로 쉽게 나갈 수 없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지수의 시선은 그의 전작인 「몫」에서 남성 중심적 대학 사회의 불완전한 내부자로 행동하던 '정윤'의 위태로운 내면 풍경을 엿보게 해주는 것인지 모른다. 이해와 연대의 희망이 사라지고, 지친 마음들만 남겨진 이야기는 구조화 된 차별이 생활에 얼마나 밀착한 감각으로 계속 반복되는지 짚어 준다.


"그녀는 다희의 삶에서 비켜나 있었고, 다희 또한 그녀에게 그랬다."(178)


강화길의 「오물자의 출현」은 앞서의 두 작품과는 이질적이다. 소설은 스캔들을 몰고 다니던 여배우 김미진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죽음을 해석하는 여러 텍스트들이 교차하는 방식으로 직조된다. 작가지망생이었던 김미진의 공모작인 소설 『지옥』을 중심으로 그의 죽음을 분석하는 이마리의 『김미진 전기:지옥에서의 삶』과 김미진의 죽음을 알코올중독과 가난한 가정의 상처로 설명하려는 김지우의 책이 해석의 경합을 벌인다. 여기에 그 둘의 해석을 뒤집는 김미진의 유고작인 자전소설 『천국』이 등장하고, 그 모든 이야기를 다시 쓰게 할 수도 있는 김미진의 일기를 묶은 『오물자의 출현』이 출간된다. 김미진의 삶과 죽음을 설명하기 위한 텍스트의 경합이 가장 치열해지는 장소는 그의 남편이었던 이진오와 김미진의 관계다.
이진오는 김미진을 스타로 만들었던 데이트 프로, 「진실을 말해 봐」에 함께 출연했던 배우다. 일반인과 연예인의 데이트 프로였던 「진실을 말해 봐」에 작가지망생 참가자로 출연한 김미진에게 이진오는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지만, 김미진은 한 번의 데이트 후 이진오를 거절한다. "아, 글쎄요? 재미가 없네요."(5)라는 김미진의 반응은 평범한 여성과 순수한 스타의 사랑을 보고 싶어 한 대중의 기대를 저버린다. 이후 배우로 데뷔한 김미진은 연예계 활동보다는 결혼 전까지 17번의 스캔들로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된다. 그러던 김미진이 갑작스럽게 결혼을 발표했을 때 그 상대는 그가 차갑게 거부한 이진오였다. 이들의 결혼은 끝내 사랑을 쟁취한 순수한 스타, 이진오의 이야기로 화제가 된다. 하지만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주민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은 이진오와 김미진의 집에서 부서진 가구의 잔해 옆에 쓰러진 김미진을 발견한다. 정황은 폭행을 의심하게 하나 가벼운 다툼 뒤에 김미진이 바닥에 누워 잠든 것이라는 이진오의 진술에 김미진이 모두 동의하면서 이 사건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이내 김미진은 이혼을 발표한다. 그리고 이혼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김미진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김미진의 죽음에 대해 분석하는 여러 텍스트들은 경찰이 목격한 김미진과 이진오의 집에서, 그들의 결혼생활이 죽음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를 설명하려 한다. 이마리는 "끔찍한 가족에게서 탈출했다고 생각했으나, 그보다 더 지독한 덫에 걸리는 운명에 대한 이야기"(7)인 김미진의 소설 『지옥』의 내용을 토대로, 둘 사이의 관계를 김미진의 불행한 개인사의 연장으로 풀어 간다. 그는 김미진을 공포에 떠는 피해자로, 이진오를 폭력적 가해자로 나누어 놓는다. 반면 김지우는 김미진이 자기 내면의 억압된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알코올중독으로 무너진 것이라 주장한다. 이진오의 잘못은 불안한 상태였던 김미진에게 술을 권한 것 정도라는 것이다. 대중의 열광적 호응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두 책의 쟁점은 이진오를 가해자라 말할 수 있는가로 나뉜다. 이 해석적 경합의 구도는 역설적으로 김미진의 내면이 무기력하고 황폐한 무언가라고 인식하는 데는 합의한다. 여기에 김미진의 유고 소설 『천국』이 출간되며 사건에 대한 해석이 전복된다.
『천국』은 이진오가 "여자의 죄책감을 자극해서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관계를 유지"(16)하는 자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이마리가 주장한 가해자의 모습에 근접한 듯하지만, 감정의 폭력에 노출된 김미진이 오히려 그와의 관계에 대한 욕망을 가감 없이 진술하며 무력한 희생자의 상에서 이탈하는 지점을 만든다. 소설은 『천국』에 대해 서술하는 장에서야 경찰이 그들의 집에 출동하기 전, 감정의 폭력과 욕망 사이에서 이진오가 수집한 가구를 부수는 김미진의 모습을 포착한다. 김미진의 내면은 이진오의 정서적 학대로 혼란하지만 이마리와 김지우가 그린 능동성을 잃은 황폐한 마음이 아니다. 사건에 대한 해석의 무게는 이제 "봐라. 이것이 인간이다.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모습이다!"(19)라는 김미진의 마음속의 어떤 역동으로 옮겨간다. 그런데 또 김미진의 일기가 발견된다.
강화길의 단편 「오물자의 출현」을 읽을 때 주목할 것은 서술자가 그 글을 "『오물자의 출현』 광고를 위해 작성된 서평"(1)이라 밝히며 시작한다는 점이다. 김미진에 대한 복수의 텍스트들이 교차하며 만들어진 해석의 경합은 이제 『오물자의 출현』에 의해 전복될 것이다. 그러나 『오물자의 출현』이 대체 어떤 내용인지 서술자는 말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텍스트의 등장에 의해 김미진의 삶에 대한 기술이 바뀔 것이라는 사실이지 확정된 진실에 대한 규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서술자는 소설 중반부에 돌출적으로 한 가지 사실을 단언한다.


"그런데 말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김미진의 죽음은 미디어 탓이 아니다. 절대 아니다."(10)


김미진의 죽음과 미디어 사이의 관계를 부정하는 이 서술은 해석의 경합들이 본격화되는 사건에 앞서 등장한다. 서술자의 기술과는 반대로 김미진의 죽음과 미디어의 관계를 밀착해서 인식하도록 이끄는 장치인 셈이다. 강화길은 『오물자의 출현』의 내용에 대해서는 함구함으로써, 해석의 경합이 진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가 다루는 하나의 유희로써 김미진의 삶을 포획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족이나 이진오, 상처 입은 김미진의 내면이 그의 삶에 모멸을 가하는 것이 아니다. 미디어의 유희로 전락했을 때, 모멸의 감정이 그에게 누적되어 간다. 미디어가 새로운 해석들의 경합을 계속 만들어낼 때, 장난감인 '오물자'(인형)로 전락한 김미진이 출현한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다. 대체 김미진이 뭐길래? 뭐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기에? 수많은 인간, 연예인 작가, 딸, 누나, 연인, 아내, 여자, 오물자 그것들 중 하나에 불과한 그녀가 대체 무엇이길래?
글쎄. 굳이 대답을 해보자면, 가십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은 가십에 불과한 법이니까. 알면 됐고, 모르면 또 됐고, 뭐 그런 거 아니겠나."(23)













작가소개 / 김요섭

문학평론가


《문장웹진 2019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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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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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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