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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테크놀로지(들)로서의 소설 – 김봉곤식 쓰기, 되기

  • 작성일 2018-12-01
  • 조회수 4,232

[젊은 비평가 특집]



최근 몇 년 간 한국문학의 흐름은 그야말로 숨이 가쁠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사건과 변화가 있었는지 머릿속에서 떠올리기조차 쉽지 않다. 한국문학은 달라져야 했고, 달라지고 있으며, 또 계속해서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해도 더 많은 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고, 수많은 변화의 외침은 지금도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제 막 자리매김한 '젊은' 비평가들에게 한국문학에 관한 자유로운 글을 부탁했다. 이들의 글 속에서 꿈틀대는 변화에 대한 열망과 관습을 비트는 다른 시선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들이 모여 새롭게 만들어갈 한국문학의 풍경을 기대하며 '기획'의 지면을 연다.






퀴어 테크놀로지(들)로서의 소설 - 김봉곤식 쓰기/되기




김건형





성적 실천을 통해 관계 시스템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요?
동성애적 삶의 양식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요? (...)
그것은 제도화된 관계와는 다른 강력한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삶의 방식이 문화와 윤리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이"가 된다는 것은 동성애자의 심리적 특징과 가시적인 가면과의 동일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을 정의하고 개발하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1)


1. 퀴어 인식론이라는 제1원리와 퀴어 트리비얼리즘


상경 후, 내적 갈등을 끝낸 스물네 살 겨울 이후로 나는 단 한 순간도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잊고 산 적이 없었다. 과장이 아니라 내가 바라보는 모든 사물과 사람과 사실과 사정과 사건이 내가 게이라는 걸 지시하거나 게이가 아님이 아님을 지시했으니까. 나는 그 생각에서 벗어나 사고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건 좋았다. 정말 좋았다. 그게 내 기쁨이었다. 매분 매초, 이제껏 나를 가려 왔던-내가 가려 왔던 베일을 벗고 선명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 (「라스트 러브 송」, 132)2)

1) Michel Foucault, "Friendship as a Way of Life", Ethics: Subjectivity and Truth, The New Press, 1998, pp. 157-158.
2) 이 글은 다음 김봉곤의 작품을 읽는다. 『여름, 스피드』, 문학동네, 2018(「컬리지 포크」, 「여름, 스피드」, 「디스코 멜랑콜리아」, 「라스트 러브 송」, 「Auto」); 「조각보 만들기」, 『문학과사회』 2017년 여름호;「시절과 기분」, 『21세기문학』 2018년 봄호; 「신일」, 『릿터』 2018년 2/3월호; 「데이 포 나이트」, 『자음과모음』 2018년 여름호; 「나의 여름 사람에게」, 『현대문학』 2018년 7월호; 「엔드 게임」, 『문학동네』 2018년 가을호. 인용 시 작품명과 면수만 밝힌다.


김봉곤의 '나'들은 세계를 게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자신의 실존과 불가분의 관계라고 선명하게 선언한다. 사랑의 시민권을 인정하고 타자를 포용하라는 '훈계'보다는, 세계와 자신의 관계를 파악하는 인식론과 존재론의 재현에 더 관심을 둔다. 남성에 대한 취향과 사랑을 세밀하게 묘사하며 "눈으로 주워 담은 새 세계의 에너지를 모-든-것에 대한 사랑으로 옮겨가기, 그걸 다시 남자에게 집중시키"는 문장들은 "세상을 여태까지와 다르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강박"이다.(「라스트 러브 송」, 132) '퀴어'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자 '나'의 존재를 자각하는 차원이기 때문이다. 퀴어는 다만 한 가지 난제가 추가된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코기토로 구성되는 것이다. 김봉곤의 '나'들에게 세계에 대한 인식은 남자에 대한 사랑과 불가분하다. 퀴어적 감각으로부터 세계를 인식하고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는 자의식은 서사에 골고루 산포되어 있는, 인물 '나' 자체의 핵심적 구심력이다. "다시 생각해 봐도 나는 남자가······ 너무너무 좋았다!"(「컬리지 포크」, 38) 게이-'나'를 자기 선언하고 그런 자신의 사랑의 실재를 드러낸다. 이를 위해 김봉곤은 이성애자 독자 들으라고 "나의 동성애 중심적 사고를"(「Auto」, 187) 선명하게 구현하는 세계로 초대한다.
'나'는 욕망하는 게이 '나'가 어떤 순간에 발기하는지 적나라하게 기술한다. 이 동성애 중심적 사고는 매우 세속적인 시공간에서 세속적인 층위에서 펼쳐진다. "수많은 게이들과 직장인이 섞여 웃고 떠들고 욕하고 품평하는 그 거리의 사거리에서"(「여름, 스피드」, 73) 세속화된 퀴어의 사랑을, 트리비얼리즘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동성애자 전용 어플과 관계맺음의 양상, 종로3가와 익선동 거리와 같은 퀴어적 도시 공간, 논케, SM, 게이 포르노, 턱수염, 성기의 외양, GMPD나 베이비립 같은 남성 신체에 대한 페티시들은 별다른 설명 없이 인물 '나'의 "나의 동성애 중심적 사고" 속의 일상으로 체현된다. SNS의 1인 글쓰기를 연상시키는 퀴어적 일상성은 그 자체로 전략이다. 서사 전체를 장악한 퀴어의 욕망은 (보편적 이성애와 이형동질이라는) '순정한 연애소설'로만 환원하기 어렵게 만든다. 김봉곤은 남성 간 성애를 에둘러서 말하거나 혹은 부러 과감하지 않는다. 이를 비극이나 인물의 숭고함을 형상화하기 위해 사용하지도 않기에 김봉곤의 퀴어 '나'는 자신을 순진한 희생자로 제한하는 정치적 낭만주의로 비상하지 않는다. 김봉곤에게 퀴어는 재현당하는 대상이 아니라 재현하는 주체,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발화 위치를 갖는다.
여성의 신체를 다양한 이미지를 동원해 자연화하고 예찬함으로써 남성 화자(의 응시)가 존립했던 고질적인 한국 문학의 전통에서, 김봉곤의 세속적인 남성 신체에의 응시는 당혹스러운 것에 속한다. 가부장을 향한 정치적 풍자가 아닌 물리적인 남성 신체에 대한 응시, 자신의 만족스러운 자족적 향유를 위해 추동되는 남성 신체에 대한 욕망은 기성 문학에게 여전히 낯선 것이었다. 김봉곤에 대한 독해들이 대체로 남성 간 성애의 '외설성'을 짚으면서도 추상적으로 우회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 같다. 어떤 점에서 남성의 육체는 비로소 응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는 게 너무나 많지만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남자야. (...) 나는 언제나 그런 남자들을 좋아했고 세상엔 그보다 귀여운 존재는 없었다."(「컬리지 포크」, 46) 수염과 성기, 포피와 정액 같은 남성의 신체에 대한 지극히 게이적 욕망의 개별성을 김봉곤은 특히 후각으로 포착한다. 남자의 개별적 존재를 오롯이 느끼는 순간이나 남성 간 관계맺음의 고유한 방법론이 드러날 때 남자의 냄새가 두드러진다. "유자 냄새 그리고 청결한 남자에게서 나는 기분 좋은 땀 냄새"(「컬리지 포크」, 34)는 강렬한 성적 향유이자 그 남자가 내게 와서 의미화 되는 방식이다. "혁상이 냄새"나 "당신의 고간에서 나던 달고 매운 냄새"는 남자를 기억하고 사랑을 환기하는 개별적 매개다.(「라스트 러브 송」, 149) 김봉곤은 퀴어의 사랑을 세속화시켜 추상적 구도(인 사실은 이성애)로 '승화'시키는 독해를 방해하며, 사랑을 정말로 남자 냄새가 나는 남자들과의 물리적인 욕망과 관계로 돌려준다. 가장 육체적인 영역이며 개별적인 감각인 후각을 통해서 남자를 기억하고 세계를 느낀다.3) 이는 사건보다는 정념에 더 민감하고 풍경과 분위기에 대한 감각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김봉곤 특유의 문체의 일환이기도 하다. 남자와 도시, 유년을 순간적으로 이어버려 시공간을 점유하는 독특한 전략이다. "권태라는 감정은 필연적으로 남자(들)를 떠올리게 하고 동시에 후각적이다. 석유난로가 타오르며 실내를 가득 채우는 냄새, 자동차 배기가스 냄새"(「Auto」, 222)와 같은 유년의 도시 냄새에서 김봉곤은 남자에 대한 욕망을 느낀다. 1980년대의 진해를 완벽하게 상기시키는 쇼와 레트로로 가득한 교토에서 어린 시절 "터미널을 떠올리던 찰나 배기가스가 내 쪽으로 훅 끼쳐들었다. 그리고 그건 명백히 남자 냄새였다."(「컬리지 포크」, 25) 김봉곤 특유의 레트로에 대한 매혹과 유년의 도시에 대한 개별적인 기억만큼이나 이 남자들과의 사랑도 환원할 수 없는 개별적인 감각임을 말하는 방식이다. 도시의 냄새는 남자의 기억이라는 레트로를 자극한다. 공간과 시간을 퀴어링(queering)하면서 '나'는 퀴어적 정동과 향유의 기제를 가지고 도시를 거닌다.

3) "향과 냄새는 제게 굉장히 센슈얼한 영역인 것 같아요. 단어 그대로 관능적이고 육감적이고 감각적이라는 점에서요. 좋은 냄새가 그 사람에 대한 호감으로 나아가기도 나쁜 냄새가 제 음심을 자극하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또한 노스탤지어를 촉발하는 가장 큰 매개가 음악과 더불어 제겐 냄새인 것 같아요. 많이 중요하네요!" 「인터뷰」, 『소설보다:봄-여름 2018』, 문학과지성사, 2018, 48-49면.



2. 퀴어 테크놀로지(들)의 경합


이는 단순히 한국 문학의 신선함, 다양성의 쿼터 확보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퀴어의 오르가슴으로 충만한 자족적 향유의 일상이야말로 필연적으로 사랑의 규범과 주체의 양상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나'의 쓰기를 더 문제적으로 만든다. 섹스를 재현하는 것은 욕망의 경제를, 주체의 생성 과정을 드러낸다. 이는 다시 그 주체 '나'를 둘러싼 규범과 수행을 재현해서 퀴어 주체의 성적 실천이 만드는 관계의 물리학을 드러낸다.
'나'의 동성애는 외려 이성애적 섹스-젠더 시스템의 지배를 체감케 한다. 산책 중 자 전거 무리가 지나가면 서로의 몸을 떼어내거나 모텔에서 남자 두 명이라 거절당하지 않을지 걱정하는 순간들은 데이트 내내 반복된다.(「디스코 멜랑콜리아」) 일상의 사소한 자기 검열과 순간적인 균열들이 불쑥 불쑥 난입해 오고 있다. 사랑을 드러내는 순간, 규율의 내재적 응시가 날카롭게 난입한다. 남성 간의 접촉, 관계맺음의 정도와 강도를 특정하는 행동강령을 퀴어 개인은 내면화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이렇게 현실에서 만난 건 처음이야"(「컬리지 포크」, 36)라고 말해야 하는 퀴어의 연애 실천은 항상적인 질투와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모교의 퀴어 포럼에 "큰 용기를 내어 찾아왔"(「라스트 러브 송」, 142)다는 상시적인 불안 앞에서 사랑은 규범에 맞설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물론 이는 김봉곤의 인물을 결정짓는 날카로운 사건으로 비화하진 않는다. '나'들은 이미 규범의 폭력적 감시를 전제로 일상 속 사랑을 꾸리는 작은 기술들을 창안해 간다. "이반들의 통행 및 음란행위 금지"라는 명령을 지극히 의식하면서 "무시하고 보란 듯이 키스하고 아랫도리를 비비"(「여름, 스피드」, 79)며 공중의 시선을 의식해 신체접촉을 하(지 않)는 것은 데이트의 강렬도를 결정하는 '밀당'에 가깝게 작동한다. '나'가 한적한 공원이나 식탁 아래에서 몰래 손을 잡을 때, 거리에서 에하라와 어깨동무로 비밀스러운 접촉을 할 때, 남성의 신체 접촉과 남성 간의 관계맺음을 특정하게 규율하는 이성애 섹스-젠더 시스템은 퀴어 연인들을 강력하게 지배하는 동시에 다시 일정 정도 전복되고 있기도 하다. 김봉곤의 연애 소설은 이성애 신체 규율이 퀴어의 미시적 일상을 지배하는 동시에 퀴어들이 그것을 참조하고 불응하며 다른 연애 규범을 스스로 만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절과 기분」은 이러한 연애 규범(들)의 중층적 작동을 특히 문제 삼는다. 현재 해준을 사랑하고 있는 '나'는 게이라는 사실을 알아봐 달라는 '떼'를 쓴 소설을 출간한 후 대학 시절 여자 친구 혜인의 연락을 받는다. 이를 계기로 '나'는 혜인과의 관계에서 거리를 두는 과정이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을 기억한다. 그런 점에서 혜인의 전화는 퀴어의 삶 자체를 되돌아보게 하는 호출이다. 퀴어의 자기 정체화 과정은 이성애 연애 대본의 자연스러운 강제력으로부터의 길항과 경합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니 감정이 격해지면 공적으로 울고 손잡고 키스할 수 있고, 공공연히 기차역에서 작별 키스를 요구할 수 있는 혜인과의 재회는 해준에게 큰 위협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일상 속에서 사랑스러운 행동을 해도 '나'는 규범의 시선을 차단하고 자동차 내부로 밀어 넣고서야 해준과 키스할 수 있다.(56) 가시화 되어서는 안 되는 키스와 오히려 가시화로 공증을 요구하는 키스가 경합할 때, 해준은 "눈을 감아도 떠도 이곳이 허공같이 느껴진다"(57)고, 언제든지 추락해 버릴 것 같은 "고소공포증"(56)을 토로한다. 혜인을 만나러 가는 '나'를 만류하는 해준에게는 강력한 이성애 대본의 포섭력에 대한 생득적인 불안과 질투가 가득하다.


"내일 안 가면 안 돼?" / "그럴 일 아니래도."
쓸쓸한 목소리로도 통하지 않자 해준은 장난스럽게 말해 왔다.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말자 응? 그는 자신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내가 갈 것을 알았다. 알면서도 그러는 걸 나도 알기에. (...)
해준을 위로해 보라. / 때때로 나는 부드러운 명령형으로 생각한다. 그에게 맞추어 보라. 해준의 기분을 바꾸어 보라. 해준을 사랑해 보라. 해준을 사랑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어떤 의무처럼 느껴질 때, 적당한 압박감에 짓눌리고 무거워지는 내 마음이 좋았다. 하지 말라는 사람 천지에 나라도 내게 명령하겠다. 내게 내리는 그 괴이한 말투가 웃기기도 했고, 그럴 때면 해준이 더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효과가 분명 있었으니까.
해준의 불안과 칭얼거림 앞에서 나는 도리 없이 가장 원초적인 방법을 택했다. 어쩌면 그건 시작이면서 끝이지 않을까? 나는 장난을, 장난스러운 페팅을, 에로틱한 전희로 바꾸는 작업에 들어갔다. (「시절과 기분」, 57)


'나' 역시 이성애자(로 저절로 간주되던) 시절로의 회항이 해준에게 큰 상처가 된다는 점을 실은 잘 알고 있다. 이성애적 연애 대본과 재회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강력한 힘을 가진 그것으로 동화되지 않고 맞서기 위해서 '나'는 일부러 자신에게 명령하면서 해준과 '나'에게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관계와 연애의 규범을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퀴어의 연애는 "하지 말라는 사람 천지"인 금지 명령으로서만 재현될 뿐이므로, 나 혼자라도 사랑을 의무처럼 자발적 명령으로 만들 때 비로소 "적당한 압박감에 짓눌리고 무거워지는 내 마음이 좋"다는 아이러니한 기분이 생겨난다. 해준을 사랑하라는 규범은 부재하므로, 퀴어의 연애는 '자기 명령문'으로 스스로 그것을 만들어 간다. "하지 말라는 사람 천지에 나라도 내게 명령"할 때 생성되는 특유의 기분, 사랑의 느낌이라는 효과가 생겨난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연애가 과연 진정한 사랑이었나를 거듭 확인하는 김봉곤 특유의 회상과 복기에 대한 강박적인 태도는, 자신이 아니면 그것을 사랑으로 확정할 규범이 확실치 않은 탓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지금 사랑 중에 있다고 보증하는 것이라곤 자신에 대한 부드러운 명령문만 있기 때문이다. 이성애 연애 모델과 젠더 규범에서 탈각하면 손쉽게 평등한 유토피아적 사랑으로 고양된다고만 보기 어려운 두려움과 질투가 드러난다.4)
이 자기 명령문은 동시에 김봉곤이 재현하는 '나'의 사랑들이 이성애 중심적 가족주의 연애 모델과 주체규범이 상정하는 섹스-젠더 시스템의 외부에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퀴어들은 이성애 섹스-젠더 시스템을 지극히 의식하고 자신의 존재와 위상이 그것과의 지속적 불화를 딛고 서 있음을 알게 된다. 정상 규범의 섹스-젠더 시스템과 대결하면서 자신을 구성해 내야 한다. 김봉곤의 '나' 역시 규범 외부에서, 다른 방식으로 '나'를 구성하는 상시적 과정에 있다. 그럴 때 김봉곤이 퀴어의 연애(들)를 반복 재현하면서 만들어 가는, 퀴어 주체 고유의 자기 재현/실천의 테크놀로지가 생성된다.
'퀴어 이론(Queer theory)'을 명명한 테레사 드 로레티스는 생물학적 성차로부터 젠더가 비롯된다는 본질주의를 부정하고, 복합적인 정치 기술로서 권력 담론이 일상 속 '젠더 테크놀로지'로 작동하면서 개별적 신체에 젠더를 기입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5) 성 담론이 근대의 테크놀로지라는 푸코를 경유해 언어의 재현, 미디어, 학교, 가족, 법정 등이 만들어내는 일상 속 젠더 테크놀로지가 개인들에게 젠더 규범을 내면화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배적 담론이 강요하는 대문자 여성(Woman)의 표상과 불화하면서 소문자 여성들(women)은 자신의 삶을 기존의 젠더 규범과 다른 방식으로 창안해 간다. 이로부터 출발하는 페미니즘과 같은 급진적 이론과 여성 영화 같은 미학적 실천 역시 새로운 젠더 테크놀로지가 되어 젠더 시스템을 변화시킬 수 있다. 소문자 여성들이 기존의 젠더 테크놀로지 자체를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서 말하는 메타적 인식으로부터 새로운 젠더 테크놀로지가 산출된다면, 사태는 퀴어에게도 마찬가지지 않을까?
젠더 규범/재현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젠더 테크놀로지'는 이성애적 양성 체계 속 자기 인식을 중심으로 한다. '젠더'라는 남녀 양성 체계가 자동적/암묵적으로 담보하는 이성애와 거리를 둔 실천들을 우리는 '섹슈얼리티'로 읽는다. 섹슈얼리티는 (성애로 축소해서 이해할 때조차) 관계와 사랑에 대한 자기 인식과 실천에 해당한다. 만남의 방식을 규정하고 사랑의 서열을 만드는 이 테크놀로지는 일상 속에서 정상적 관계맺음(시스젠더(cisgender): 이성애 혼인)과 '비정상적'인 퀴어들의 범주를 주조해 낸다. 섹슈얼리티, 관계맺음, 섹스, 사랑들을 서열화 하는 이 테크놀로지는 어떤 것들을 퀴어(괴물!)로 명명하면서 비로소 작동한다. 그렇다면 섹슈얼리티와 관계맺음에 대해 작동하는 '퀴어 테크놀로지'를 제안해 볼 수 있지 않을까?6)
이 관계맺음의 테크놀로지는 특히 사랑의 영역(과 사랑하는 자신을 읽는 방법)에서 작동한다. 퀴어 테크놀로지는 쉽게 규범적 사랑(의 하위 호환)으로 환원되곤 하는 퀴어들의 성애와 사랑이, 실제로는 교묘하게 서열화 되고 있고 분화되어 있음을 읽게 해줄 것이다. 특히 김봉곤 특유의 사랑의 양상과 퀴어 남성 화자를 읽을 때 '젠더'라는 논리만으로는, 이성애 남성과의 차이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7) 김봉곤의 '나'가 만나고 사랑하는 장면들을 '젠더'가 같다는 이유로 이성애 남성 화자의 사랑과 정말 같게 읽을 수 있을까? 「시절과 기분」에서 해준의 두려움은 단순한 첫사랑에 대한 질투가 아니라 퀴어의 기분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나'는 '자발적인 명령문'이라는 사랑의 테크놀로지를 스스로 만들어냈다. 이 역시 퀴어 테크놀로지다.

4) 오혜진은 레즈비언의 성애를 평등하고 민주적인 유토피아로 가정하는 상상력이 퀴어에 대한 낭만화이고 실은 타자화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오혜진, 「비평의 백래시와 새로운 '페미니스트 서사'의 도래」, 『21세기문학』 2018년 여름호) 영화 <아가씨>는 남성 제국주의 시대에 달로 향하는 환상적 항해에서 내리지 못하고 끝맺는 낭만주의적 재현이었다. 퀴어 에로티시즘이 퀴어의 정동과 퀴어의 위상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지 않을 때의 함정을 보여준다.
5) Teresa de Lauretis, "The Technology of Gender", Technologies of Gender, Macillan Press, 1987.
6) 이 글은 젠더의 파생물로서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관점에서 벗어나, 퀴어는 젠더뿐만 아닌 성의 계층화 테크놀로지의 작동 아래 있다는 루빈의 접근법을 덧대어 읽는다. 젠더 억압 이론만으로는 성 억압과 성애 욕망을 설명하지 못한다.(게일 루빈, 「성을 사유하기」, 『일탈』, 현실문화, 2015, 348-350면) 이 글이 제안하는 퀴어 테크놀로지는 실은 (작가론이므로) 남성 동성애자 중심으로 서술되었다. '관계'만으로 모든 퀴어를 포괄할 수 없음을 충분히 짚지 못했다는 한계도 당연히 매우 크다.
7) 마찬가지로 「그 여름」(최은영)을 레즈비언의 사랑이 "젠더적 같음이 계급적 다름을 초월하는 사건"이라고 읽을 때 '레즈비언 섹슈얼리티'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젠더의 축만으로 온전히 사랑의 양태를 담긴 어렵다.(이은지, 「사랑이라는 역설」,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17, 272면)


굳이 국립국어원에서 '이성 간의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사랑으로 정의하더라도 우리의 사랑은 존재한다. 나 역시 도저히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그것을 하고 있으며, 나와 나의 남자 친구는 이 세계에서 여전히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이런 군색한 상태로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사랑처럼 사랑을, 사랑이라는 단어를 그 어떤 속박에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시작이어야 하지 않을까? 사랑이 언제나 재발명 되어야 하듯, 사랑에 대한 정의도 재발명, 재정의 될 필요가 있다. (「Auto」, 188)


이성애 섹슈얼리티와 관계 규범을 강요하면서 '퀴어(를 배제하는) 테크놀로지'가 작동될 때, 보편 규범의 구성적 외부로서 정상성을 보증하는 반례인 '비정상' 퀴어가 재현/생산된다. 이러한 대문자 퀴어의 표상을 지극히 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실존하는 퀴어 개인들의 일상은 상시적 전장에 있다. 그 전장에서 퀴어들은 특정한 자기 재현(드러냄과 감춤의 전략들)과 사랑에 대한 테크놀로지를 연마하게 된다. 퀴어(를 배제하는) 테크놀로지를 의식/재현하면서, 그것과 불화하는 구체적인 실천들은 새로운 퀴어 테크놀로지를 "재발명, 재정의"하는 출발점인 것이다. 물론 김봉곤에게 그 기술은 글쓰기와 문예다. 김봉곤이 퀴어의 사랑과 퀴어의 자기쓰기가 밀접하다고 그토록 반복하는 선언이 여기에서 연원(淵源)한다. "글 읽기/쓰기와 남자, 절대로 끊을 수 없는 것."(226) 퀴어의 사랑과 그 재현을 병행, 반복, 변주하는 그의 작업은 기존 규범의 퀴어 테크놀로지를 전유해 새로운 '퀴어(를 해방시키는) 테크놀로지'를 쓰는 작업이다. "더 이상 'Films=영화'는 아니듯, 그리하여 언젠가는 퀴어가 퀴어가 아니게끔."(188)



3. 사랑의 테크놀로지, 김봉곤식 대화들


강력한 이성애적 연애 규범의 복위 앞에 불안해하는 해준을 위로해 주는 유일한 방법은, "도리 없이 가장 원초적인 방법"인 "에로틱한 전희"로 "그건 시작이면서 끝이"다. "그 어떤 말로는 그를 달랠 수 없다."(58) 그렇기에 게이 친구들도 이성애 연애 경험에 대해서 원초적인 거부 반응을 보인다. "으이구 진짜 존나 흑역사다. 너처럼 남자 밝히는 년이? 서긴 섰냐?"(60)8) 이는 애정 어린 장난이면서도 동시에 필사적인 말이다. 남자를 좋아하는 정욕을 확인하면서 자신을 확립해 온 지난한 '역사'를, 다시 위협하는 이 재회 사건은 일련의 불안과 공포를 준다. 이성애 섹스-젠더 시스템의 강력한 포섭력을 벗어나는 것은 가장 원초적인 정욕(lust)의 영역 때문/덕분이다.9) 김봉곤이 적나라한 게이의 섹스와 남자에 대한 욕망을 세속화시켜 뜨거운 열기와 기분으로 쓰는 장면들은 그래서 중요하다. 단순히 우리 시대 퀴어 재현의 첨단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퀴어의 구체적인 정욕이 퀴어의 시절을, 퀴어의 속도를, 퀴어의 사랑과 글쓰기를, 퀴어의 존재론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규범 외부에 있음에 대한 퀴어 '나'의 자기 인식이 생성/유지되는 순간의 역학을 보여준다. 보편 규범이 그토록 가리고 부인하고 삭제함에도 끊임없이 퀴어들이 새로이 '탄생'하는 것은, 신체와 정욕의 영역이 계속해서 규범을 뚫고 밀려들어오기 때문이 아닐까. 정욕의 영역은 규범 밖 '나'의 위치를 끊임없이 환기하며, 다시 그 정욕을 특정하게 수행하면서 규범 외부에 설 존재론을 모색한다. 정욕에 관한 퀴어 테크놀로지들이 이토록 김봉곤의 과업인 이유다. 기성 문단의 퀴어 서사/독해가 성애를 추상적으로 생략하고 영원불멸한 사랑으로 상징화 하던 것에 비해, 김봉곤의 연애소설은 섹스와 성적 끌림의 장면을 피하지 않고 집중적으로 반복한다.

8) 이 대목을 게이 "공동체성을 공유하는 집단 내에서의 혐오"가 "조롱거리"로 삼는다는 타당한 지적으로만 읽을 때, '발기'라는 정욕의 영역을 거듭 확인함으로써만 규범과 다른 자기를 자각/유지하는 어떤 필사적 불안/노력이 간과될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성 정체성 형성 전후의 자신의 조각을 재회하는 여로/기분은 퀴어에게만 가능한 서사이기도 하다. 성적 지향과 무관하게 개별적인 존재(란 것이 과연 있다면 그)는 보편(적 이성애)으로의 환원과 얼마나 거리를 확보할 수 있을까? "자연스러운 동질함의 느낌"을 만드는, 차이 없는 "현저한 유사성"의 총량 증가로 "전체적인 혐오를 감소"하자는 기대는 '보편' 독자가 감정 이입하기 쉽게 써달라는 요구일까? 그렇게 찾아낸 유사성은 누구를 위한 연대감일까.(김녕, 「선명(鮮明)에서 창연(蒼然)으로-혐오에 응수하는 최근 퀴어 텍스트들에 대한 스케치」, 『실천문학』 2018년 여름호, 173-174면, 179-180면) 한편 '퀴어 서사'라는 명명에 국한되지 않고 보편성과 화해('퀴어 서사 이상이다!')해야 한다는 근래의 비평적 호명들은 실은, 퀴어 서사를 역으로 단일화하고 압축하는 것은 아닐까? 퀴어 서사로 '균일'하게 보지 말자는 우려야말로 퀴어 서사 내부의 결들을 '덜' 보기 위함이 아닐까? (퀴어 서사의 특징들은 벌써 충분히 독파된 것일까?) 퀴어 서사들 내부의 인물들, 형식들, 장르들을 더 풍부하게 독해하고 명명해야 한다.
9) 게일 루빈이 욕정(lust)과 젠더를 구분하고 근원적 사회적 과정/제도로부터 탈각하면서 욕정이라는 정동의 영역은 섹슈얼리티 장치가 된다.(게일 루빈, 앞의 책, 349면) 이성애 중심적 젠더 규범이 훈육하는 성욕의 모델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퀴어라고 자각하는 가장 큰 원동력은, 자신의 신체로 밀려오는 이 비규범적 욕정일 것이다.


그와 나 모두 올이었기에 한 번씩 주고받으며 섹스를 했다. 해본 중에 최고였다. 그의 작품을 읽어 보진 못했지만, 이쪽 방면으로 훨씬 뛰어난 건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예의상, 먼저 가도 괜찮겠냐고 물어보는 그 익숙한 문형이 좀 웃기고 귀여워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정한 그가 웃는 나를 보며 괴롭히듯 내 몸 위로 자신의 몸을 던져 꾹 비벼 눌렀다. 나도 모르게 더 세게, 라고 말하고 말았다. 그래 이거, 나는 남자가 나를 터져 나갈 듯, 질식할 듯 짓누를 때 가장 좋았다. (...) 포피를 살짝 깨물어 짓이겨 보고는 그게 마침표라도 되는 듯 고개를 들어 그의 옆에 누웠다. 다시 생각해 봐도 나는 남자가······ 너무너무 좋았다! 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팔베개를 해주었다. 나는 지금보다 그가 훨씬 좋아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컬리지 포크」, 37-38)


이러한 다정하고 안온한 섹스의 장면은, 향유의 개별적 규범을 성실하게 합의하고 창안하면서 상대의 신체에서 열락을 느끼고 이를 되돌려주는 과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준다.10) 규율 자체를 성실하게 합의해 가는 대화의 방식으로 사랑을 구축하는 것이다. 김봉곤이 보여주는 퀴어적 정동과 그 관계맺음이 이성애 규범과 달라 놀랍다는 독해는 그간 자동화된 남성의 젠더 권력이 사랑에서 일방적 쾌감만을 산출해 왔음을 역으로 발견하기도 한다.11) "작가에 따라 독법이 달라지듯, 섹스 역시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게 당연한"(41) 김봉곤의 연애소설 속 남성 화자는 자신의 기쁨과 상대의 기쁨을 모두 응시하고 드러낸다. 특히 상대방이 "나의 씨씨sissy함에 적어도 웃음으로 반응한다면, 아주 못난 게이일 확률은 낮아 마음이 놓인다."(「디스코 멜랑콜리아」, 102)거나 "남자다운 게이를 찾는 사람치고 별 볼일 있는 사람이 있었던지? 그런 다움이 있기는 한 것인지"(「나의 여름 사람에게」, 37) 생각하는 대목은 규범적 젠더 시스템을 인식하고 거리를 둘 수 있는 남자인지의 확인이 이 협상의 중요한 참조점임을 보여준다. 이런 대화를 통해서 섹스-젠더 시스템과 퀴어 테크놀로지에 대한 메타적 인식 위에 '나'의 사랑이 생성된다.
절정의 순간에(도 배려하기 위한) 상대의 익숙한 문형/사투리가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김봉곤 특유의 장면은, 그런 대화로 "찝찝함이나 불쾌감과 후회가 없는 섹스"(「라스트 러브 송」, 145)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런 기쁨과 사랑의 테크놀로지는 퀴어가 스스로를 인식하게 하는 정동으로 이어진다. 도리 없이 남자가 좋다는 특정한 기분, 남자와의 관계가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정동을 재인식하고 이에 대한 '나'의 자족적인 만족감과 향유로 쾌감보다 더 중층적인 법열에 이른다. '나'는 남자를 너무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기분을 통한 자기 인식, 행복한 자기 형성의 기쁨이 이렇게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건 에로틱함이나 흥분을 넘어 어떻게 표현할 길 없는 순수한 기쁨을 내게 안겨 주었다."(「나의 여름 사람에게」, 49)
이를 통해 이 퀴어적 정욕이 가볍게 고양되는 유토피아적 사랑도, 해소하면 될 부박한 성욕도 아님을 보여준다. 김봉곤은 정욕이 주체 형성의 차이를 결정짓는 어떤 근본적인 정동임을 강조한다. 물론 퀴어가 '된다'는 것은 커밍아웃이라는 스위치나 빨간 알약으로 단박에 단단한 주체가 완성되는 의미가 아니다. 그 이후에도 부단히 스스로 자족적인 규범을, 퀴어 테크놀로지를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나'의 정욕이 다른 남자의 정욕과 어떤 방식으로 조응하고 어떤 방식으로 결합하고 어떤 화학 반응을 일으킬지 반복, 확인해 가야 한다.
그러니 김봉곤의 남성 신체에 대한 욕망은 언제나 관계성을 고민한다. 퀴어의 정동만으로 손쉽게 순정한 연애 서사가 완성되지는 않는 탓이다. 퀴어의 연애가 마냥 호혜로운 유토피아가 아님을 인물들은 모두 알고 있다.

10) 이런 퀴어적 기쁨(Queer Pleasure)은 타인을 향한 열림이면서, 이성애 규범이 금지하는 접촉을 통해서 신체를 재형성한다. 이렇게 재형성된 퀴어의 쾌락은 강제적 이성애 대본이 신체를 형성하는 사회적 형식과 공간에도 영향을 다시 미쳐, 타자와 공존하는 다른 삶의 방식의 가능성을 만든다. (Sara Ahmed, "Queer Feelings", The Cultural Politics of Emotion,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4, p. 165)
11) 「컬리지 포크」가 "둘 다 게이이니 젠더 권력상의 위아래도 없"다는 황현경의 독해는 유의할 만하다. "더구나 둘 다 '올'이라지"라는 근거(?)는 (이성애 규범에 익숙한 독법에서 삽입 섹스가 젠더와 거의 등치되는 중요한 표지물임을 환기하는 동시에) 김봉곤의 새로운 관계맺음이 퀴어의 정동에서 기인함을 읽게 해준다. (물론 '올'의 균등한 '삽입' 때문이 아니라) 섹스/정동의 영역에서부터 규범을 매번 협상하고 논의하는 과정 자체가 이성애 규범에서 대부분 생략되는 일방적 섹스-젠더 시스템인 데 비해서, 김봉곤의 연애소설에서는 그 자체가 사랑을 생성하는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성애적 관습법 외부에서 "연애를 하려면 상대방과 매번 새롭게 협상할 수밖에 없"어 퀴어의 연애가 신선하다는 심진경의 중요한 지적도 김봉곤이 만드는 새로운 사랑의 역학을 짚게 한다. 하지만 퀴어의 연애와 그 협상이 민주적 '결단'을 계기 삼는 것은 아니다. 필연적으로 외부의 불안정한 위상으로 인한 정동이며, 이성애 대본과의 필사적인 경쟁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기실 김봉곤 소설 안에는 협상의 지반으로 이미 기능하는 기존의 퀴어 내부의 규칙들, 테크놀로지의 역학들이 있고 이를 바탕으로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완전한 공백의 출발로 전망하기 어렵기도 하다. 황현경, 「사랑밖에 난 몰라-김봉곤, 『여름, 스피드』」, 『기획회의』(468), 2018.07.20; 「좌담-미투 시대에 페미니즘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자음과모음』 2018년 여름호, 332면.


클로짓 게이의 가슴 아프고 뻔한 스트레이트 사랑, 용기 내어 나갔던 술 번개에서 만나서는 그 후로 이용만 당했던 남자, 정신을 차려 괜찮은 사람들이 있을 거라 예상하고 나간 독서 모임과 미술 강좌에서 만난 개새끼들. (「여름 스피드」, 83)


협소한 마켓에 우리를 전시하고, 잠시 동물이 되었다가, 내 몸 전체가 성기가 되어버린 듯, 성기만 있는 듯 섹스를 하고,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정액을 삼키기도 하고, 그러고는 살짝 인간이 되었다가, 상대가 동물이 되는 것은 용서할 수 있고, 동물이 되는 것만큼은 용서할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이를 감수하고 또 다른 사랑을, 나를 인정해 줄 사람을 찾아 세이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절대 그만두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에 벌써 피로감이 몰려온다. (「Auto」, 215)


2018년의 퀴어의 연애에는 이미 축적되어 작동하고 있는 내부적 퀴어 테크놀로지가 있다. 퀴어 전용 어플이나 술 모임, 데이트 규칙이 이미 패턴임을, "우리의 문법"(「여름, 스피드」, 69)임을 '나'도 잘 알고 있다.12) 영우가 만난 '개새끼'들은 익명성에 기대 책임을 다하지 않는 불성실한 남자들이었다. 소문자 퀴어 '나'는 이미 작동하고 있는 익명성의 퀴어 테크놀로지를 정면으로 인식하고 불화하고 있다. '협소한 마켓'의 '전시'로 구동하는 이 퀴어 테크놀로지의 내부적 폭력성에 맞서고 다시 그것과 협상하는 일은 피로한 일이다. 가시화에 대한 두려움과 그로 인한 익명성이 관계맺음의 준거기에 「나의 여름 사람에게」처럼 이름을 교환하면서 경계를 푸는 단계는 이 관계의 질을 결정한다. 「라스트 러브 송」의 '나'는 "당신은 좆같은 새끼가 빌어먹도록 흘러넘치는 이 바닥과 이 세계의 물음표 남자가 아니었다"(138)는, 그래도 그가 내겐 진실했다는 안도감을 확인하고서야 애도할 수 있다. 애도에 앞서 그의 진정성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취약함, 그로 인해 형을 불신했다는 '나'의 죄책감을 합리화하고 또 고백하면서 연인의 죽음 앞으로 나아간다. 타인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한껏 빨아들이기란 불가능하리란 걸"(152) 알기에, 「디스코 멜랑콜리아」도 만남이 비극적 살인일 수 있다거나, "등쳐먹고 잠수 타는 그렇고 그런 이 바닥의 뻔한 병신"(102)일 거라 부러 상상한다. 아무것도 서로를 보장하지 않는 맨바닥에서부터 사랑하기. 관계마다 협상을 처음부터 성실하게 논의(해야만)하는 것은 외려 여기에서 비롯한다. 그럼에도 퀴어 세이렌은 욕망과 사랑을 절대 그만두지 못하는 퀴어의 정동이라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나'는 굴하지 않고 새로운 만남과 관계맺음의 퀴어 테크놀로지를 시험하고 찾아내려 한다.
그럴 때 연애의 회상과 복기는 김봉곤 특유의 사랑의 실험으로 반복, 변주된다. 김봉곤은 특정한 시간(여름과 밤), 공간(학교나 도시 레트로)에서 곧바로 과거의 남자, 헤어진 남자를 회상하곤 한다. 실패한 사랑 혹은 지나간 사랑의 섹스나 대화의 구체적인 장면을 계속해서 복기하는 것은, '나'를 퀴어로 정립하게 하는 정동들을 복원하여 되짚고 점검하기 위함이다. 현재의 관계를 계기로 과거의 남자를 늘 병치하면서, '나'는 지난 테크놀로지를 새삼 정견(正見)한다. 그로써 지금의 관계와 사랑에 관한 퀴어 테크놀로지는 좀 더 갱신된다. 가령 「데이 포 나이트」는 "첫눈에 반해버렸고, 그 명쾌함에 더는 고민할 것도 없이 나는 내가 게이라는 걸 순순히 인정해 버리고 말았다. 괴로워할 새도 없는 깔끔한 한판승"(109) 이후에 본격적인 사랑에 관한 테크놀로지의 정련이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단순히 서툰 섹스의 기법 문제가 아니라 폭력과의 거리감을 익히는 것이다. 종인 선배와의 정욕의 경험은 거절의 두려움과 사랑받는 매혹 사이에서 진동하면서 사랑과 폭력의 차이를 자각하게 한다. "끔찍한 기시감"(108)으로 이를 회상하며 '나'는 자기 파괴적인 사랑을 거부하고 종인 선배를 "혹여라도 이해하기 위해, 애써 또 하나의 필터를 만들어 내게 덧씌우고 싶지 않았다"는 결심에 이른다. "너무 아름다웠지만 내 눈을 가리던" '나'를 무조건 수용하지 않고 단절한다.(124)
김봉곤식 연애소설은 망한 연애의 테크놀로지들을 복기하거나 혹은 이에 대한 대화로 새로운 관계의 규칙을 협상한다. 새로운 퀴어 테크놀로지를 형성하게 해서 자기 인식을 갱신하려 하는 것이다. 「여름, 스피드」도 과거의 남자 영우와 재회한다. 이 재회의 형식과 내용은 흥미롭게도 영우와 '나'의 '망한 연애'의 테크놀로지들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복기"(69)하는 산책과 대화다. 익선동 골목의 금지 간판을 의식하며 무시하는 데이트, 폴로를 먹는 키스 신호, 회색 베이지색 브리프가 상대의 판타지임을 공유하는 사소한 대화를 상기한다. 관계맺음의 테크놀로지에 대한 대화가 두 사람의 데이트의 내용이고, 그로 인해 '나'는 영우에 대한 여정(餘情)을 다시 알려고 한다.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면서, 과거 '나'의 테크놀로지를 반추하고 현재와 비교 병치하는 김봉곤 특유의 서사 구조다. 이는 실연과 사랑의 경험들을 상기하고 기억하고 쓰면서, 자기 역사의 사초(史草)를 적층해 가는 과정에 가까워진다. 특히 퀴어의 삶에서 차이와 반복을 종합하는 역사 서술은 필수적이다.13)
그래서 '나'는 지금의 사랑인 "창일을 만나기 위해 그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나의 여름 사람에게」, 54)

12) 강지희는 이를 관계의 패턴도 사랑으로 인정한다고 짚었고, 인아영은 그 기시감과 패턴을 변주하는 목표가 퀴어의 '자기 긍정'이라고 적확하게 의미화 하였다.(「좌담-미투 시대에 페미니즘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자음과 모음』 2018년 여름호, 340면; 인아영, 「퀴어-되기를 위한 주제와 변주-김봉곤론」,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8년 가을호)
13) 김봉곤 서사에서 '나'들은 현재의 퀴어성과 밀접한 과거를 선택적으로 소환하는데, 이는 소문자 퀴어의 삶 자체의 역사화 원리와 근접하지 않을까. 다수의 퀴어에게 자신이 언제부터 비이성애 규범적 정욕을 가졌는지 그 기원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할 수 있다. 언제나 미확정적이고 유동적이지만, 그래서 더욱 현재의 자신을 위해 새로 기술되고 새로 발굴해야만 한다. 중학교의 반장? 대학의 선배? 그중에서 무엇이 나의 사랑이었고 나의 감정이었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 과거는 필연적으로 '나'의 정체성사(史)를 쓰는 사관에게 달려 있다. 그 믿음직스럽지 못한 사관의 현재 기분에 의해서 결정되는 과거의 시절은 무수한 세초(洗草)와 정정을 반복한다. 퀴어의 '시절과 기분'은 현재의 사관(史觀/史官)에 의해 상시적으로 작동한다.


좋아하는 연예인, 이상형인 남자들의 이야기를 나누다 점점 더 술이 들어간 우리는 지난 연애들을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그도 나도 정말로 망한 연애도 있었고, 연애라고 착각한 것도 있었고, 짝사랑에 불과한 것도 있었다. 그는 형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 왔으며 조금은 관성처럼 자신의 역할을 사랑받는 쪽에, 나아가 안기는 쪽에 위치시키는 듯했다. 나는 연상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동갑이랑 연애할 때가 제일 좋았고, 섹스는 나이 불문 잘하는 사람이 좋았고, 연하를 사귄 적은 없다고 말했다.
분위기를 띄우고 좀 더 마음을 열어 가까워지려는 수다이자 수작이었기도 했지만, 우리는 이것이 서로의 연애관을 확인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역시나 제일 재미있는 건 번개를 당했거나 먹버를 당한 에피소드였고, 마지막 연인을 그리는 순간에는 원치 않았지만 침울해지는 순간이 찾아오고 말았다. (「나의 여름 사람에게」, 40)


남자에 대한 정욕과 취향에서부터 관계맺음의 방식에 대한 자신의 기대와 상대와의 차이에 대해서 대화하면서 "서로의 연애관을 확인하는 작업"은 사랑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사전 작업처럼 보인다. 이를 통해서 "나는 그의 말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버리고 말았다."(41) 창일은 연상이 아닌 남자('나')를 만나는 것을 주저하고 고민한다고 자신의 감정에 대해 '나'와 끊임없이 대화한다. 연상과 연하, 사랑을 주고 안기는 방향에 대한 이 대화를 통해서 사랑에 빠진다.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대화로 사랑하는 것이다. (반대로 「디스코 멜랑콜리아」는 나이와 몸의 취향과 연애 테크놀로지에 대한 협상이 종내 결렬되고 말았다.) 그 과정은 관계와 사랑에 대한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함께 창안하는 과정이다. 결국 기존의 관계맺음에서 벗어난 새로운 도전을 결심하는 창일 역시 '나'와의 이 성실한 협상에 힘입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당신을 실-감하고 싶다"(60)는 결말은 당신을 함부로 단정하지 않고 대화하여 '나'를 갱신할 것이라는 어떤 사랑의 예비적 태도에 도달한다.



4. 커서의 글쓰기, 퀴어 댄디의 선물 상자


김봉곤이 사랑을 계속해서 다시 보는 것은 이 반복 속에서 '나' 자신의 퀴어 테크놀로지를 변주하고 갱신하려는 고집스러운 태도이기도 하다. 김봉곤의 '나'들이 봉별기의 끝 장면마다 항상 다짐하는 것은 하나다. "내가 너랑 사랑하거나 망하면 글이라도 쓴다."(「디스코 멜랑콜리아」, 190) '나'는 헤어진 테드에 대한 글을 쓰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소설로 나와 버려서 독자는 읽고 있다. 「오토」, 「컬리지 포크」, 「엔드 게임」 연작은 한 남자(형섭)에 대한 "젖떼기와 애도 그 모두에 실패"(「컬리지 포크」, 17)하고 그 일지를 다시 쓰는 결말을 반복한다. '나'들은 하나같이 사랑을 상실하고, 다시 상실에 대해서 쓴다. 헤어진 테드, 에하라, 형섭, 영우에 대한 글을 쓰는 결말들. 실연한 '나' 자신을 바라보며 소설(영화)을 쓰는 결말들. 이는 사랑의 보고서라고 할 법한 어떤 태도를 상정하게 한다. 존재 증명이라는 점에서 사랑과 글쓰기는 같은 지위로 보인다. 김봉곤의 연애소설은 '나'의 퀴어 테크놀로지들을 실험하고 그 차이와 반복을 기록한다. 그 속에서 '나'는 현재의 사랑과 과거의 사랑을 동시에 복기하고,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대할 때 '나'의 감정과 기분을 '응시'한다.
이럴 때 글쓰기는 '나'의 관계의 패착에 대한 내성적 성찰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또한 인물 '나'를 다시 쓰는 소설가 '나'의 자기 재현이기도 하다. 성찰하고 형성 중임을 쓰는 결말들은 글쓰기 도중의 자기 형성 자체를 다시 재현의 대상으로 바꾼다. '나'의 실패와 허망함은 도달한 결론이 아니라 다시 출발점이 된다. 흔들리며 형성 중인 '나', 마저도 고백하는 김봉곤의 모험에 독자들이 같이 흔들리게 된다. 반짝이는 김봉곤의 커서가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여전히 보이기 때문이다. 김봉곤이 결말마다 흔들리며 느끼는 '기분'은 어떤 특정한 반성도 결단도 윤리도 아닌, 그 분화 이전의 기묘한 상태다. 이를 김봉곤은 "글을 쓰고 싶은 기분"이라고 한다.14) 글을 쓰고 싶은 기분은 다시 '내' 감정을 재현하는 소설을 쓰는 결심으로 이어진다. "나는 그것을 알아야겠다. 내가 무엇을 정말 쓰고 싶었는지를,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의 형태를" 꼭 알고자 다시 소설 쓰기를 결심한다.(「엔드 게임」, 87) 이 소설을 쓰며 '나'를 다시 보고 싶은 '기분'에 도달하(게 만드)는 것이 김봉곤 서사의 목표가 아닐까.
그런 자기 재현을 쓰고 싶은 기분에 도달하기 위해 김봉곤은 독특한 시제를 만들어냈다. 결말 장면들에서 소설가 화자들은, 지금 독자가 읽고 있는 문장을 쓰고 있음을, '커서'가 깜빡이는 중임을 소설에 각인한다. 그러면서 사랑을 기억하며(과거) 그것이 해당 작품이 될 것임을(미래) 지금 쓴다는 흥미로운 시제를 사용한다. 소설 본래의 '서사적 과거시제'는 순간적으로 '서사적 미래시제'가 된다.

14) 김봉곤은 '기분'을 통해 '감정'을 재현하는 구도라고 이를 구분하고 있다. "그렇다면 글을 쓰고 싶은 기분, 이 되어 그때의 감정을 되살리려 글을 써본다, 가 될 수도 있겠어요." 「인터뷰」, 앞의 책, 47면.


(실연 후-인용자) 사일이 지나 월요일이 되었고,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고작 사일이 지났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사일이 지났기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아직은 쓸 수 없어-이제는 써야 해, 사이의 어디쯤에서. 더 멀리 달아나기 전에-아니, 조금은 놓여난 후에, 어딘가 사이쯤에서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시작했다. (「오토」, 184)


나는 소설을 쓸 것이다. 소설을 쓰던 중 그와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다, 여전히 형섭을 사랑했었다는 사실에 나는 경악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에하라 선생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도 깨달을 것이다. 사랑한다고 끝내 말하지 못한 것을 나는 아쉬워한다. 글을 쓰던 어느 날, 형섭이 쿠마를 내게 안겨 주고 떠났을 때 눈물을 쏟게 될 것이다. 한동안 나는 쓰지 못한다. 그리고 다시 쓰기 시작했을 때, 당신의 사진을 보았던 날 내가 느낀 감정은 분노를 가장한 흥분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 「컬리지 포크」. 가을이 시작되기 전 당신은 내 소설에 pass or fail로 답신해 올 것이다. (「컬리지 포크」, 49)


하지만 휘갈기듯 바로 앞의 챕터를 쓰다, 나는 그와 헤어지고 처음으로 그에게 이별을 선고받았을 때처럼, 그가 내 연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 그 시간은 오직 글을 쓸 때에야 비로소 열린다는 사실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부당함을 느낀다. 모니터 하얀 화면 위, 그리고 핸드폰의 액정 속 혹은 하얀 종이 위 오직 글자로만 존재하는 그는, 당연한 말이지만 터무니없이 옹색하다. (...) 그리하여 나는 그것을 알아야겠다. 내가 무엇을 정말 쓰고 싶었는지를,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의 형태를, 그와 나의 눈물의 이유를 나를 무너뜨린 마음의 정체를, 되찾을 풍경과 열린 시간 속의 그의 모습을 나는 꼭 알아야겠다. (「엔드 게임」, 86-87)


소설을 쓰려고 책상에 앉는 현재의 '내'가, 지나간 과거의 감정을, 앞으로 쓸 미래의 시간에 사랑했었다고 깨닫고 경악하게 될 것이라는 문장들은 기묘하다. 「컬리지 포크」를 다 읽은 독자에게, 그것을 지금 '나'는 쓰는 중이라고 '커서'를 드러내는 이런 시제는 김봉곤이 일찍부터 고민하던 전략으로 보인다.15) 지금까지 독자가 읽은 실연의 과정을, 곧이어 화자가 소설로 쓰겠다는 결심을 하는 장면에서 이 시제의 교묘한 장난은 오토픽션의 한 표지가 된다. 일반적으로 투명해지는 서술자의 상황과 위치를 역으로 부각하는 원동력이다. 이를 통해 사건을 겪은 '나'만큼이나 소설을 쓰는 '나'를 독자 앞으로 드러내서, 쓰는 '나'의 감정과 기분이라는, 자기 형성이 '진행 중'임을 강조한다. 그러면 소설은 그 자기 형성의 결과물, 정기 결산보고서가 된다. 화자 '나' 역시 "바로 앞의 챕터를 쓰다"가 읽었고, "글을 쓸 때에야 비로소 열린" 감정이 충분하지 않아서, 나는 다시 나의 감정과 마음의 정체를 꼭 알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나'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 쓰고 있음, 쓸 것임을 강조한다.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김봉곤 특유의 커서를 드러내는 시제는 '나'에 대한 앎의 열망이다.16) 이런 자기에 대한 앎의 열망은 더없는 자기 배려의 태도다. 자신에게 필요한 진실을 재활성화하기 위해 자기라는 대상에 대해 쓰는 것은 대표적인 자기 배려의 테크놀로지기도 하다.17)

15) "모든 것이 시간의 문제로, 내가 몰두해야 할 것은 시제, 새로운 시제를 생각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시제를 만들어내거나, 아오리스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면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그것-밝힐 수 없는-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Auto」, 231면.
16) 윤경희는 예술학도의 교양소설로 김봉곤을 독해하면서 "미적 학습에 운용하는 금욕적 자기 훈육인"인 화자가 게이로서의 삶을 재조형 해야 하고 "자기 이미지를 형성하고 재현하는 방도를 발굴"해야 함을 적확하게 짚었다. 그럴 때 문학은 "소수자가 자기의 다른 삶과 사랑을 바깥을 향해 말할 수 있도록 장려한다."(윤경희, 「긴 여름이 끝날 즈음」, 『문학동네』 2018 가을호, 95-97면) 그런 점에서 인아영도 "글쓰기를 통해 퀴어로서의 '나'를 의미화 하는 과정"을 퀴어의 "진정한 나 되기"라는 성장 서사로 독해했다.(인아영, 앞의 글, 169면) 이러한 '자기 배려'의 독해에 힘입어 이 글은 퀴어적 주체가 김봉곤 특유의 쓰기 양식과 만나는 지점을 모색하려 한다.
17) 미셸 푸코 외, 「자기의 테크놀로지」, 『자기의 테크놀로지』, 이희원 역, 동문선, 1997, 51면.


그러니까 나는 너에게 이 계절을 주고 싶다, 날씨를 주고 싶어, 그건 내가 아는 최고의 선물이고
당신과 나 사이 가로놓인 마이크 쥔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 속에 나도 간절히, 너에 대한 글은 쓰고 싶지 않다고, 제발 너에 대한 글을 쓰게 하지 말아 달라고, 끊임없이 밀려드는 버스 뒤에서 너는 보였다가 사라졌다 다시 보이고, (...) 그런 나를 내가 보는데, 그건 다시를 다시 하는 사람의 모습이었고, 당분간 병이 들 사람의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그건 어제 오늘 본 것 중에 가장 아름다웠지, 그리고 그런 내가 정말이지 오랜만에 싫지 않았다. (「디스코 멜랑콜리아」, 120-121)


에하라 선생님의 책 위로 가후와 바르트의 책을 포갰다.
나는 지난 몇 달간의 기억을 되살리며 글을 쓸 것이다. 이제 와서 그들처럼 쓸 수 없었지만, 그들만큼 아름답고 싶었다. 하지만 드러내지 않고서는 왜 배길 수 없는 것인지. 무언의 안온함을 왜 견딜 수 없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컬리지 포크」, 49)


그렇게 글을 쓰는 기분은 아름다움의 경지에 도달한다. 테드를 만난 이후로 "어제 오늘 본 것 중에 가장 아름다웠"는데, '나'의 사랑에 대한 글을 쓰는 '나'는 사랑을 하던 때보다 아름답기 때문이다. 아름다워진 "내가 오랜만에 싫지 않았다". 에하라와 함께 나가이 가후를 읽고 교토의 강가를 걷던 퀴어적 야행(夜行)의 기억을 쓰는 '나'는 아름다워진다. '나'의 기억을 되살리며 "그를 축성할 방법"(「엔드 게임」, 86)인 소설은 '나' 자신을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소설을 쓰기로 결심할 때, '나'는 스스로를 아름답게 만들고 긍정할 수 있다. 소설 쓰기는 자기 자신을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드는 행위인 것이다. '나'에 대해서 쓸 때, 그리고 그것을 다시 스스로 응시하고 그 응시함을 다시 소설로 재현할 때, (그것이 김봉곤식 서사의 큰 얼개인데) '나'는 아름다워지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럴 때 '나'의 신체와 정욕과 비밀과 실연과 향수와 사랑은 아름다워진다. 자기 스스로를 예술적 과업으로 다시 응시하고 자신에 대한 미학적 재현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그럴 때의 '나'는 댄디(dandy)가 된다. 푸코에게 댄디는 표면적 패션의 의미가 아니라, 미학적 자기 배려와 자기 재현의 태도를 통해 자신을 만들어 가는 주체다. 스스로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를 형성하는 태도, 자신의 신체와 행위, 느낌과 정열, 생각과 감정의 방식, 즉 실존과 맺는 관계를 자발적으로 예술작품처럼 만드는 (에토스의) 태도다.18) 주어진 세계의 속박에서 단호히 벗어난 주체 자신을 선언하려는 댄디의 자기 재현과 창출은, 특히 예술과 문예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김봉곤의 '나'는 자신의 사랑과 감정을 지극히 미학적으로 재현하고 응시하는 소설가 댄디가 된다. 게다가 내포 작가 김봉곤이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닮은 소설가 화자를 창출하는 오토픽션의 구도 역시 자신을 예술작품으로 제시하는 댄디의 구도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회상하면서 '내'가 쓰는 사랑과 감정들은 풍부해진다. "나는 이게 내 배역이란 생각"(「여름, 스피드」, 91)으로 "마침 기다린 사람처럼 처량함을 연출해 한탄하고 비통에 빠진 나를 감상"(「라스트 러브 송」, 139)하는 태도로 자기의 미학적 관조에 도달한다.
이런 '나'를 쓴 소설을 선물로 주고 싶다고 반복하는 김봉곤식 결말의 증여는 의미심장하다. '나'는 헤어진 "너에 대한 글"을 "최고의 선물"로 만들어줄 것이다. '나'는 소설 속 사랑의 상대와 함께한 시간인 계절과 "날씨를 주고 싶어" 하는데 "그건 내가 아는 최고의 선물이"다. '나'보다 더 아름다운 '나'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와 함께 보낸 계절을 의미화 해서 다시 돌려주는 것이다. "그와 함께했던 봄과 여름이 쏟아져 들어왔다."(51)는 「컬리지 포크」의 마지막 문장은 이 소설 자체를 단순히 에하라에게 제출할 과제가 아니라 아름다운 선물, "그때 하지 못한 답례"(50)로 만든다. 형섭에게도 혜인에게도 소설은 다시 되돌아갈 것이다. 그것은 너로 인해 촉발된 너에 대한 "내" 감정이기에 실은 '나'를 주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데 '소설 주기'를 쓰는 '나'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서는 왜 배길 수 없는" 충동에 힘입는 것도 고백한다.(49)

18) 푸코는 현대성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 속에서 자신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세련되게 만들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태도'라고 제시했다. 보들레르의 댄디적 태도를 그 예로 든다. Michel Foucault, "What is Enlightenment?" Ethics: Subjectivity and Truth, The New Press, 1998, p. 309, p. 312.


뜯어도 뜯어도 새로운 지요가미 포장지로 둘러싸인 선물 상자. 내게는 바르트가 쓴 글의 대부분이 자신의 존재, 동성애자인 자신의 존재 증명을 뒷받침하는 작업으로 보였다. 자신을 알아봐 달라는 상냥하고 끝없는 시그널, 중심 없음, 푼크툼의 설명 불가해함, 비인칭과 영도, 코드와 환상. 내겐 이 모든 것이 바르트 자신의 퀴어니스를 지적-감정적으로 증명해 건네는 선물 상자였다. (「컬리지 포크」, 32)


소설을 "최고의 선물"로 줄 때, 자신을 드러내야만 하는 충동의 결과인 이유를 바르트를 유비해 드러내고 있다. 바르트의 글이 "선물 상자"인 것 역시 "자신의 존재 증명"을 주기 때문이다. 자전적 퀴어성을 담은 "글까지 아름다운 사람"(32)인 바르트가 그러하듯이, 화자는 "자신의 퀴어니스를 지적-감정적으로 증명해 건네는 선물 상자"로서의 소설을 쓴다. 자신의 존재를 지적-감정적으로 포장하고 창출해서 "결정적인 아름다움"(32)으로 만들어내는 글쓰기를, 바르트도 화자도 하고 있다. 이 순간 소설가 댄디의 자기 쓰기는 퀴어 댄디의 방법론이 된다. "알아봐 달라는 상냥하고 끝없는" 존재 증명을 "그렇게 읽는 건 당연"하다.(32) "게이란 사실을 (...) 제발 좀 알아달라고 봐달라고 온갖 떼를 다 써놨는데 모를 수가" 없는 선물 상자로서의 소설이기에. (「시절과 기분」, 55)
'나'는 비밀과 증명을 직조하며 자기 재현의 결단을 반복하는 퀴어 되기를 써 보인다. 범박한 세계에 대한 단절과 이후의 자기 삶을 창안하는 과정이 필수적인 퀴어 되기의 단계다. "상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촌스러운 내 옷들과 함께 내 말투를 버"리며 새로운 자신을 창출하는 과정으로 상경이 인식된다. 대도시로의 공간적 전환은 많은 퀴어 서사에서 커밍아웃 서사와 병행, 유비된다. 폐쇄적인 지역사회의 노출에 비해 대도시의 익명성이 제공하는 자유와 대도시 하위문화로 존재하는 기존의 퀴어 공동체가 제공하는 퀴어 테크놀로지가 있기 때문이다. "고향을 떠난 것이 결정적인 변곡점"인 것은 이런 탓이다. "내가 없어지는 쪽을 택했다. 내가 선명해지는 동시에 내가 사라지는 기분은 아주 근사했다." (「시절과 기분」, 74-75) 이렇게 퀴어로서의 자기를 응시하고 만드는 '나'는 댄디의 모습과 겹쳐진다. 항상적으로 자신의 실존을 형성하고 있는 중임을 자각하고, 특정한 삶의 테크놀로지들을 만들어 가(야만 하)는 퀴어의 삶은 댄디적 수행으로 가득하다. 이성애 규범에 길항하는 "동성애자인 자신의 존재 증명을 뒷받침하는 작업"을 지적으로 감정적으로 창출하고 이를 다시 아름다운 것으로 응시하는 이 순환 속에서, 김봉곤의 '나' 쓰기라는 테크놀로지는 퀴어적 삶의 한 양식(mode)이다. 퀴어 댄디는 "알아봐 달라는 상냥하고 끝없는 시그널"을 담은 선물 상자가 된다.
다른 "그 누구의 글도 나를 위로하지 못했다." "오로지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이, 쓸 수 있다는 사실만이, 하얀 화면에 쌓여 가는 글만이, 정말이지 아주 조금 나를 위로해 주었다."(「Auto」, 218) '나'에 대한 '나'의 응시와 쓰기가 실존을 위로해 준다. 내 스스로 승인할 수 있는 나를 찾아내고, 그런 나에 대해서 쓰는 것. 김봉곤이 상실 이후 '나'들에게 글쓰기를 거세게 몰아붙여 묻는 것은 이 생경한 가능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동성애)의 유효한 가치를 대타자에게 증명 받는 인정투쟁이라는 존재방식만을 타진하던 기성 문학을 넘어선다. 자기 응시를 통해 자기를 창출하는 퀴어 댄디의 존재론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5. '퀴어-픽션'에서 '오토-퀴어'로


일종의 문학적 자기 선언인 「Auto」에서 '나'는 "정도의 차이일 뿐, 때로는 모든 글이 나에겐 오토픽션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며 "명백하게 나이지만 나는 나와 관계없다, 는 아슬아슬하고 은밀한 줄타기"(「Auto」, 226-227)로서의 글쓰기를 즐긴다. 그러니 "현실과 글쓰기, 현실과 환상, 현실과 자신의 소설이 뒤섞여 직조되는 소설은 언제든 유효"(「컬리지 포크」, 155)하다는 에하라의 문학 수업은, 김봉곤 읽기에 대한 수업처럼 보인다. 김봉곤의 '나'들은 다분히 생활인 김봉곤의 언저리에 있다. 예술학교 출신이거나, 영화 전공을 오가는 소설가 화자들은 봉감독, 곤씨로 불리는 상경한 경상도 해안 도시 출신의 30대 남자다. 선호하는 남자 스타일과 체형도 공유한다. 이런 화자 '나'들의 일관성은 오토픽션의 표지가 된다. '나'들은 "글읽기/쓰기와 남자, 절대 끊을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기에 "언제나 문학과 남자로 수렴되고 마는 나의 편협함에서 생기는" "오토픽션을 쓸 때의 부끄러움"(225)을 딛고 서 있다. 지독하게 반복되는 '나'와 김봉곤의 거리는 범상치 않다. 독자들은 반복적인 정보를 겹쳐 가며 내포 저자의 상을 추정하고, 내포 저자를 특유의 단일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의 실체로 해독하기 위해 접근해 가기 때문이다.19) 특히 유사한 특성(퀴어성)을 전면화 하는 화자 '나'를 반복하며 소설을 변주할 때, 이는 내포 작가의 그 특성을 지속적으로 유비하고 환기시키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내포 작가 김봉곤이라는 표지를 유지하는 한, '나'의 자기 재현 전략은 퀴어 작가의 '오토'라는 '실재'를 노출하(려는 태도를 통해 실은 실재를 '환기'하)는 전략이 된다.20) 그때, '나'는 무엇인가 스스로 된다, 고 쓴다.

19) 오토픽션은 흔히 부분적/전체적으로 자전적인 픽션으로 정의되는데 김봉곤의 경우 인물=화자의 동일성은 확실하지만 작가=화자, 작가=인물의 동일성은 절반 정도만 확보될 것 같다. 김봉곤은 단일한 화자 '나'의 지배적인 목소리로(단일성), 화자-작가의 유사한 특징을 반복하면서(정체성), 화자와 작가가 같은 가치-퀴어성을 공유하여(신뢰성) 화자 '나'와 작가를 연결하는 표지를 제공한다. 김봉곤의 오토픽션은 화자, 인물, 작가의 유사성을 '퀴어'와 '소설가'에서 찾는다. 인물은 조금씩 작품마다 다르지만, 내포 작가는 거의 동일해 보이는 일관성을 유지한다. 물론 직접적인 지시는 감추기 때문에, 실제 김봉곤의 구체적 행적 확인보다는 특유의 정념과 분위기를 갖춘 내포 작가의 자의식을 추정하게 된다.(H. 포터 애벗, 『서사학강의』, 우찬제 외 역, 문학과지성사, 2013, 167면; 수잔 랜서, 「보는 이의 '나'」, 『서술이론1』, 최라영 역, 소명출판, 2015)
20) "나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이러한 글쓰기를 지향하는 이유는 결국 제 정체성과 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숨기거나 거짓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오히려 불필요하다고 느낄 정도로 실재를 들이밀고 노출시키고 싶습니다. 등단작에서 그런 성향이 가장 강했고요." 「인터뷰」, 앞의 책, 51-52면.


오토픽션의 곤란함은 부끄러움과 그리 멀지 않다. 더 좋은 질료로 더 나은 가공을 할 수 있음에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어야 하는 피로함, 혹은 질료를 가공할 수 없다면 더 좋은 질료를 가져야 한다는 강박. 그러니까 지금 내가 살아가는 시간 속의 무언가가, 내가, 기억될/할 만한 글의 질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의 곤란함이다. 다시 말해 쓰일 수 있을 '나'가 있어야 한다는 것. (「Auto」, 226)


그렇기에 내포 작가이자 화자이자 인물인 '나'는 자신의 글쓰기와 동시에 "내가, 기억될/할 만한 글의 질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의 곤란함"을 인지한다. 글쓰기의 재료가 될 만한 '나'라는 대상을 창출한다는 이 의식은 사소설적인 기행보다는 자신의 '되기'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스스로를 좀 더 나은 자아로 만들어 가는 '오토-퀴어' 되기로 나아감을 의미한다.21) "산문과 나 역시 그 어떤 인과와 당위도 없지만, 나는 또 한 번 서로가 서로를 보증한다는, 해주기를, 착란에 가까운 기원에 기대어버린다."(232) 이는 '산문'으로 스스로를 보증하고 창출하는 '오토-퀴어'라는 새로운 문학적 주체를 생산한다.
이를 통해 '나'는 발화 위치를 고민한다. 고통의 재현이 유행하던 것을 보며 '나'는 "세월호 속 인물을 1인칭 시점으로" 혹은 "안산 단원고 학생의 1인칭 시점으로" 쓴다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염오감을 토로한다. 세월호 에어포켓 속 인물을 1인칭으로 쓰라는, 타인의 고통을 '참칭'하는 글쓰기를 과제로 내주는 창작과 교수가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이런 끔찍한 상황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비명을 지르는 방법이 있"다고 '글쓰기의 테크닉'을 이야기하자 '나'는 그가 "맛이 갔다고 생각했다".(192-193) 고통 받는 몸에 그대로 작가의 입이 겹쳐진다는 기성문학의 이 믿음이 폭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보편타당한 감정이입이 전능한 방법론임을 설파하는 오만함 앞에서, '나'는 자신의 언어를, 발화하는 위치를 의심하지 않는 문학을 배교한다. 고통을 온전히 재현할 자격을 가진 작가의 위치에 대한, 그 대상/고통을 온전히 이해하는 언어라는 윤리적 기대들이 실은 폭력과의 공모라는 의혹이다. 이는 타자에 대한 무지를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문학적 자아에 대한 '나'의 불신을 보여준다. 타자를 대신해서 말할 수 있다는 재현에 대한 믿음을 이제 김봉곤은 거부한다고 선언한다. "타인의 고통을 제 것으로 삼아 내 목소리인 척 말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조각보 만들기」, 221) 고통을 말하는 저 말이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가가 말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일찍부터 선언한 것이다.
그래서 창작수업 교수가 요구하는 미니멀리즘, 그러니까 규범적인 "글쓰기의 기본인 행동하기, 보여주기, 외화(外化)"(193)를 오만이며 강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사건('픽션')을 보여주기보다는 말하는 자신('오토')의 '쓰고 싶은 기분'을 쓴다. "그것은 어쩌면 Auto를 위한 변명일지도, 나만의 엄격이었는지도 모르겠다."(248) '나'에게 오토는 그러한 최소한의 윤리를 따르는 유일한 서사 전략인 것처럼 보인다. 자신과 글쓰기 사이의 "거리감의 상실이 언젠가 나를 완전히 소진시키고 말 것이란 두려움 속에서도 그것을 멈출 수 없"다며 개별적인 정념과 감정을 절제하지 않고, 자신의 나약함과 두려움을 기꺼이 드러내는 글을 쓴다. "이 글을 쓰며 내가 행동한 일이라고는 그에 대해 생각하고, 기억하고, 떠올리고 그것을 잇는 것이 거의 다였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는 진짜였다."(「Auto」, 217) 세속적인 퀴어 '나'의 사랑, 이를 향한 '나'의 진짜 정념을 드러내는 것이 진짜 글쓰기이고, 그럴 때만이 '나'는 진정한 '내'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퀴어-오토픽션의 전략이다.
이러한 '오토-퀴어'의 산출은 『여름, 스피드』 혹은 등단작 「Auto」로 추정되는 퀴어 소설이 등장해 '오토'를 보증하는 근작들에서 더 강렬해진다. 그 퀴어 소설을 쓴 화자가 등장하는 순간 내포 작가 김봉곤과의 거리는 더없이 근접한 것으로 환기된다. 그리고 화자 '나'는 쓰기를 통해서 소설 속 인물을 다시 재회하면서, 자신의 과거와 그의 관계를 돌아보고 응답한다. '형섭'에 대한 소설을 쓰다가 그에 대한 재현의 종결을 지연시키고 그와 나의 감정의 정체를 다시 알려고 하는 「엔드 게임」, 화자와 작가를 뒤섞어 쓰는 소설가가 '신일'에 대해 첫 소설을 썼고 군 시절 정체화 할 용기가 없어 외면했던 '신일'에게 죄책감을 사후에 고백하는 「신일」이 그러하다. 「시절과 기분」은 정체성의 형성기에 혜인에 대한 감정을 내몰았다는 염려를 돌아본다. 혜인과 헤어진 이후 그녀를 지워내면서 정체화 했다는 점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를 성실히 응대하기 위해 자신의 책에 "미안하고"라고 쓰는 "진심"의 전사(前史)를 살펴보는 것이다.(76) 퀴어-오토의 책에 '나'를 담아 혜인에게 건네며 기다린다. "읽고 이야기해. 이번엔 내가 기다릴게."(77) 스스로 퀴어-오토 '나'의 지난 문학적 작업 자체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 성찰하고, 그 관계를 곱씹어 보며 그 이후의 '나'를 또다시 쓰는 무한한 과업이다. 이는 자신을 정체화 하는 과정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 과정에서 자신이 초래한 한계와 과오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퀴어 서사의 새로운 결이다. 퀴어를 사회적 비극에 처한 타자로 재현하는 '퀴어-픽션'이 아니라 역으로 자신의 윤리적 취약함마저 고백하고 책임지는 '퀴어-오토'다.
그래서 김봉곤-'나'들에게 삶은 글쓰기와 동의어다. "재미있게도 그 모든 가능한 미래에 영화와 문학이 없는 순간은 없다. 끔찍하고 행복하다."(「Auto」, 209) 끔찍하고 행복한 퀴어의 오토픽션. 자신의 삶 그 자체로서의 쓰기/되기. 퀴어-오토가 되는 세이렌의 숙명: "쓰일 수 없는 내가 있었지만, 정확하게 그것에 대해 써야 했다."(250) 그것이 퀴어 픽션에서 탈주한 김봉곤이 '퀴어-오토'에 고집스레 거는 가능성이다. 종내 '나'는 독자, 당신에게 '나'를 내민다.

21) 작품 속에서 추정되는 내포 작가의 상은 훌륭하게 '보이려는 것'이 아닌 훌륭하게 '되려는' 작가의 열망이기도 하다.(웨인 부스, 「암시된 저자의 부활」, 『서술이론1』, 최라영 역, 소명출판, 2015, 162면)


당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지금을 나는 모른다, 는 사실은 나를 고통스럽게도 하지만, 어쩌면 이 문장은 또 매끄럽게 이어져 있고, 매끄럽게 읽히고, 우 리 는 가 끔 이 어 져 있 기도 하고, 당신은 이어 주었고, 나도 다시금 힘을 내어 잇기를 계속한다. 나의 글쓰기만큼 내밀한 사랑을 당신이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나의 사랑만큼 내밀한 글쓰기를 당신이 이해해 줄 수 있을까? (...) 당신과 내가 이어져 있음을, 이어져 있었음을, 그 환희의 순간을 나는 잊지 못하고 글을 쓴다. 그를 쓴다. (「Auto」, 212)












작가소개 / 김건형

문학평론가. 2018년 문학동네 신인상(「2018, 퀴어전사-前史·戰史·戰士」)으로 등단. blog.naver.com/konovel


《문장웹진 201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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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

  • 관리자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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