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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TO DELAT에서 옥인 콜렉티브까지

  • 작성일 2018-04-01
  • 조회수 2,086

[비평in문학]




<새로운 시대, 문학의 키워드>

‘여성, 노동’같은 전통적인 주제에서 시작해 ‘문체, 주체’와 같은 비평 키워드나 ‘번역, 상호텍스트성’같은 문학적 키워드, ‘환상, 무의식’같은 인접학문 그리고 ‘빅데이터, 가상현실’같은 미래용어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문학의 키워드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비평in문학]의 새로운 비평 기획입니다.




광장, 거리, 미술관과 인터넷.
그 어디에서든 존재하는 예술가들의 실천



이수정





최근 우리 사회의 주요한 현안으로 대두된 ‘미투(me too)’ 운동과 관련해서 대표적 가해자로 지목된 예술가들이 여러 분야의 사람이 함께 작품을 만드는 것이 보편적인 연극이나 영화에서 먼저 터져 나왔다. 영화나 연극 모두 한 사람의 힘으로 작품을 완성할 수 없고, 여러 사람이 함께 오랜 시간 협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미술이나 문학의 창작자에 대해서는 ‘고독한 창작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홀로 작업실에서 작업하는 창작의 고통에 대면한 고독한 미술가의 이미지는 사실 미학사에서 낭만주의 시대 이후에 등장했다. 가난과 싸우고, 가족과 친구와도 떨어져 내면에 침잠하여 창작 혼을 불태우는 예술가의 이미지는 반 고흐와 이중섭 등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어 왔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현대 미술에서는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이 함께 모여 창조적인 에너지를 발산해 온 예술운동이 종종 등장한다. 다다(dada), 바우하우스(bauhaus), 발레 뤼스(Ballet Russe), 플럭서스(Fluxus), E. A. T(Experiment in Art and Technology) 등 미술가, 시인, 음악가, 건축가, 무용가, 심지어 엔지니어가 새로운 예술실험에 도전해 왔다. 이 예술운동들은 특정한 시기에 취리히, 바이마르, 뉴욕 등 특정 지역에 모여든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음악과 무용, 영상과 퍼포먼스, 미디어 테크놀로지 등 다양한 분야 간의 교류와 실험은 동시대 미술에서도 꾸준히 확산되고 있다. 특히 국제 비엔날레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인터넷과 네트워크의 확산으로 정보교류와 소통이 용이해지면서 특정한 국가나 도시 내에서 이루어지던 예술운동은 이제 지역의 경계를 넘어 유연하게 연대하고 교류하는 콜렉티브의 실천으로 확장되고 있다.


최근 막을 내린 강원비엔날레 <악의 사전>에서 관객의 눈길을 끈 대표작 중에는 슈토 델라티(Chto Delat), 돈 팔로 더 윈드(Don't Follow the Wind)와 같은 예술가 집단, 소위 ‘콜렉티브’의 활약이 돋보인다. 먼저 슈토 델라티(https://chtodelat.org/)는 2003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스부르크, 모스크바, 니츠닌 노브고로트 등지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비평가, 철학자, 작가가 모여서 결성한 아티스트 콜렉티브이다. 콜렉티브의 이름인 ‘슈토 델라티’는 레닌의 책 『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 1902)』의 러시아어 제목이다. 이들은 정치적 이론, 예술, 그리고 행동주의(activism)를 연결시키겠다는 목적을 위해 활동한다. 올가 에고로바, 니콜라이 올레이니코프, 나탈리아 페르쉬나, 드미트리 빌렌스키 4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슈토 델라티’라는 이름으로 러시아 내부는 물론이고 국제적인 예술가 및 연구자들과 함께 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이들은 러시아어와 영어로 다양한 이슈를 다룬 신문을 발행하여, 러시아 지식인 문화를 재정치화했다. 폭넓은 관객층에 소구하는 전시, 사회적 포럼 등 특정한 이벤트에 맞춰 신문을 발간하고 무료로 배포해 왔다. 《Petestroika Songspiel: Victory over the Coup》(2008)은 1991년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민주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희망에 가득 찬 승리의 순간 이후의 이야기이다. 고대 비극처럼 음악극으로 구성된 영상 속에서 쿠데타 세력을 상대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다섯 명의 혁명 영웅 — 민주주의자, 비즈니스맨, 혁명가, 독립주의자, 페미니스트의 행동과 비전을 보여준다. 열기에 들뜬 민주주의자는 시장의 자유를 요구하는 비즈니스맨의 손을 잡고 자유를 찬양하지만, 자본주의가 러시아를 스웨덴처럼 만들어줄 것이라는 비즈니스맨의 청사진에 칠레의 민주주의를 수십 년간 억압했던 독재자 피노체트가 지배한 칠레처럼 될 수 있다며 반박하는 혁명주의자의 주장에 그의 편을 들며 비즈니스맨과는 대립각을 세운다. 과하리만큼 진지하고 격정적으로 비전을 제시하지만, 순간 새로운 세력과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이들의 모습은 전혀 영웅다워 보이지 않는다. 진지한 표정으로 노래하는 코러스는 이들이 바라는 건 결국 ‘돈과 권력’이라고 지적한다. 여성의 인권과 여성적인 세계관으로 타인을 돌보자는 페미니스트에 대해 혁명가와 비즈니스맨은 야유를 퍼붓고, 그들 중 누군가는 인간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말을 비웃는다. 유대인으로 고통 받아 왔다고 항의하는 이 옆에서 누군가는 러시아는 러시아 정교의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힘겹게 성취한 민주주의의 공간 앞에서 뜨겁게 연대했던 과거의 영웅들은 서로 선을 긋고 이권을 다툰다. 러시아 사회에 대한 이야기로 현대사에 대한 주석이면서 비판과 위트를 담은 이 작품은 시학과 정치학이 구분되지 않았던 그리스 비극의 형식을 빌려서 다큐멘터리와 허구 사이 그 어딘가에 있는 진실을 다룬다. 블랙 유머와 위트로 가득 찬 슈토 델라티의 이 작품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스부르크에서 페레스트로이카와 그 이후를 겪었던 그들의 삶과 맞닿아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발표한《Museum-Songspiel》은 미술관을 관리하는 작품 관리원이 거리 미술을 전시하는 전시실에 쓰러져 있는 이주 난민들을 발견하면서 당황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난민들은 마치 동물원의 동물들처럼 거대한 유리벽 뒤로 격리되는데, 미술관은 그들이 강제 추방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관장은 이 난감한 상황에 난민들을 자신들이 의도적으로 숨긴 게 아니라 퍼포먼스를 위한 연기자로 고용한 것이라고 답하면서 진정된다. 현대 미술과 미술관, 사회와 미술관 사이의 여러 상황을 엮은 이 작품 속에서 사회와 연관을 맺는 예술이 자국 이기주의를 취하는 정부의 강력한 통제 하에 놓일 때 어떻게 작동하는가 생각하게 만든다.
슈토 델라티가 러시아의 창작 집단이라면, 돈 팔로 더 윈드는 일본의 침↑폼(Chim↑pom), 겐지 구보타, 이탈리아의 에바&프랑코 마테스, 미국의 제이슨 웨이트 등 다양한 국적을 가진 작가와 큐레이터로 구성된 콜렉티브이다. 이들은 3월 11일 후쿠시마 원전 폭발 이후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의 금지구역 내에서 2015년에 작품을 설치하고, 봉쇄 해제 이후 개방한다는 전시를 열었다. 당시의 전시명 ‘Don't Follow the Wind’에서 팀명을 따온 후,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2017과 강원비엔날레 등 국제 전시에 참여하고 있다. 돈 팔로 더 윈드는 민간인 출입 통제 구역 곳곳을 360도로 촬영한 VR 작품을 후쿠시마 출신의 가족들이 생활 도구로 만든 헬멧을 쓰고 감상할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역사를 몸으로 쓰다》전, 부산시립미술관 《안녕 없는 생활들, 모험들》, 2016 부산비엔날레 《한중일 아방가르드》전 등 여러 전시에 참여해 온 침↑폼도 아이다 마코토의 스튜디오 주변에서 모인 엘리, 류타, 마사타카, 모토무, 토시노리, 야스타카 6인으로 구성된 그룹으로 일본 사회와 문화의 다양한 이슈를 블랙 유머를 담은 전복적 시선으로 표현해 온 창작 집단이다. 에바&프랑코 마테스 역시 1994년 이후 0100101110101101.org라는 이름으로 인터넷 이후의 사회에서 대두되는 정치적 이슈를 다룬 넷 아트 운동을 선두해 온 예술가 듀오이다. 이들 가상공간인 세컨드라이프(www.secondlife.org) 내에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 울레이(Ulay)의 퍼포먼스, 발리 엑스포트(Valie Export), 크리스 버든(Chris Burden) 등의 유명 퍼포먼스를 아바타로 재연하는 ‘Synthetic Performances’ 등으로 알려져 있다. 돈 팔로 더 윈드라는 콜렉티브는 각자의 위치에서 사회정치적 주제를 다뤄 온 다양한 콜렉티브로 구성된 것이다. 현실 사회를 반영한 가상공간을 다뤄 온 에바&프랑코 마테스와 일본 사회의 정치적 현안, 특히 후쿠시마 원전 이후의 일본 사회를 다뤄 온 침↑폼과 큐레이터, 작가가 각자의 전문성과 경험을 동원하여 새로운 작품을 만든 것이다. 최적의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연대하여 팀을 구성한 것이다.
우리 미술계의 대표적 콜렉티브로는 ‘옥인 콜렉티브’(http://okin.cc)를 들 수 있다. 회화를 전공한 이정민과 사진을 전공한 김화용, 그리고 개념적인 설치 및 영상 작업을 진행하는 진시우 세 명의 작가는 2009년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옥인 콜렉티브’를 만들게 되었다. 이들은 옥인동에 위치한 옥인아파트에 살고 있던 김화용 작가를 통해 아파트가 철거되고, 주민들의 이주가 시작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근대 도시 개발로 시작된 아파트라는 주거공간의 특성, 이주 과정에서 나타나는 생존권의 문제, 공권력의 개입 등 다양한 상황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다. 먼저 옥인아파트 옥상에서 공연과 영화상영회, 볼링 대회를 하는 ‘옥인동 바캉스’를 개최하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에 옥인 라디오를 통해 주제에 맞는 게스트를 초청하고 방송을 진행한다. 방송의 주제와 소재도 다양하다. 대형 연예기획사와 팬덤, 자립음악생산조합과 두리반에서의 철거 투쟁, 미대 졸업생들의 실험 등 폭넓은 이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을 기획하고, 팟캐스트를 통해서 공유한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는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 속의 한 장면을 낭독하게 하는데, 그 인터뷰 전후에서 경제 불황의 스페인 사회의 탈출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목소리를 비롯하여, 스페인 사회에 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 이후에는 재난 대비가 부족한 사회 상황에 주목하여, 재난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한 노하우를 알려주는 기체조의 매뉴얼을 「작전명-까맣고 뜨거운 것을 위하여」라는 영상으로 제작했다. 제주도에서는 오래된 음악 감상 카페의 이야기를 추적하고, 광주에서는 광주 항쟁의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찾는다.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이 극한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타자와의 연대를 통해 새로운 시간성을 창출하고 몸짓과 놀이가 만나는 순간이 결합된 ‘상황들’을 창출하고자 했던 것처럼, 옥인 콜렉티브도 내외부의 타자와의 유연한 연대를 통해 그들과 공동체 내에 특별한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그들의 실천 속에서 예술과 놀이, 예술과 정치, 예술과 일상, 일상과 정치가 서로 만나고 교차된다. 세 명의 작가가 ‘옥인 콜렉티브’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꽤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세 작가 모두 개별 활동도 멈추지 않는다. ‘따로 또 같이’를 실천해 나가고 있다.
사회란 것도 사실 구성원들이 개인으로서 정체성과 독립성을 유지하되, 또한 필요한 경우 연대하고 협력할 수 있을 때 잘 유지될 수 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억압한다면 균형이 깨어질 것이다. 동시대 미술에서 점점 더 확장되고 있는 콜렉티브들의 활동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으면서 공감하는 동료들과 함께 더 큰 목소리를 내기 위한 전략이자 실천이다. 예술이 정치나 사회와 가까우면 순수하지 못하다고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정치와 이어져 있듯, 동시대 예술가들은 적극적으로 우리가 대면한 위기와 재난, 불행에 대해 주목하고 있기에 국적과 장르를 넘어선 유무형의 콜렉티브는 계속 확장 중이다.












작가소개 / 이수정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큐레이터. 미학을 전공했으며, 새로운 테크놀로지로 인해 변해가는 사회 속에서 변하지 않는 인간과 예술의 의미에 관심을 두고 있다. 주로 사회 속에서 개인의 관계를 다룬 전시를 기획해왔으며, 대표전시로 <윌리엄 켄트리지-주변적 고찰>, <크지슈토프 보디츠코: 기구, 기념비, 프로젝션> 등이 있다.


《문장웹진 2018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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