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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의 비판

  • 작성일 2017-06-01
  • 조회수 1,405

[비평in문학]



비판의 비판

- 문학비평의 한 가능한 과학성의 의미를 향하여



김대산





일반적으로 비평이란 사실적 근거와 논리적 일관성에 기초한 합리적 비판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합리적 비판은, 많은 경우, 주관적 불만(족)의 객관적 표출로 나타나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비평은 ‘객관적 불평’일 수도 있지 않은가? 혹은 객관성을 내세우는 것이 과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면, 비평은 ‘과학적 불평’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렇다면, 비평은 과학적 객관성으로 위장된 주관적 욕망(항상 억압되어 있고, 항상 불만족스러운 상태 속에 있는 욕망)의 활동으로 나타나지는 않는가? 그렇기에 비평을 추동하는 주된 정동은 질투, 원한, 증오 같은 것이 아닌가? 또한, 그렇기에, 이른바 ‘비판적 지성’이란, 그러한 부정적 정동의 힘에 의하여, 자신의 주관적 욕망과 느낌으로부터 분리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객관성의 효과를 장악하여 지배적 위치를 획득한 권력의지의 가면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비판적 지성에 기초한 과학이기를 원하는 비평의 진리 주장은 진리에의 의지가 아니라 권력에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게 과학적 진리의 문제는 자주 정치적 권력(힘)의 문제로 대체되고 있지는 않은가? 또한, 그렇기에 많은 과학적·정치적 논쟁들/투쟁들은 진리가 이기는 것을 보여주지 않고, 이기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은가?
과학이 추구하는 것은 진리이다. 비평이 과학이고자 한다면(혹은, 비평이, 유희적 지식이건 진지한 지식이건 어쨌건 지식/인식과 관련된 한에서 과학적이어야 한다면), 비평이 추구하는 것 또한 진리일 수밖에 없다. 가령 자연과학이 추구하는 것이 자연의 진리라면, 문학비평이 추구하는 것은 문학의 진리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학비평은 문학의 진리를 추구하는 문학의 과학(혹은 문학학) 같은 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설령 그러한 이름의 과학이 아직 없고, 여전히 없을 것 같다고 하더라도). 물론 여기서 ‘과학’이나 ‘진리’라는 이름의 의미는 어디에서나 일의적으로 사용될 수 없다(가령 니체나 그 이전의 누군가들이 말했던 ‘즐거운 과학’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면, 그때 그 ‘과학’의 의미는 현재 상식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과학’의 의미와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그 존재가 의심될 수도 있는 과학 자체, 진리 자체의 일의적(혹은 본질적) 의미가 감추어져 있거나 다의적 의미 중의 하나가 일의성을 가장하기 때문이다. 가령 과학이란 일반적으로 현재 통용되는 ‘자연과학’이란 이름이 함축하는 과학성만을 의미하는 경향이 있으며, 또한 진리란 지성을 가진 사람(이른바 지성인)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하는 ‘논리학’이 함축하는 진리성만을 의미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과학의 의미가 근대적 의식의 지배권을 장악한 자연과학에 한정되어야 하며, 또 왜 진리의 의미가 사실과 일치하는 판단(혹은 이미 알려진 존재자들의 사태에 상응하는 지식을 재현하는 명제)의 진리, 즉 일상적으로 말해서 ‘맞는 말’ 혹은 ‘옳은 말’에 한정되어야 하는가?
과학 자체, 진리 자체의 일의적 의미, 본질적 의미가 없다면, 현재의 과학과 진리의 의미 또한 유일하게 가능한 의미가 아니며, 다른 가능한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혹은 만일 그러한 일의적 의미가 있음에도 아직 감추어져 있거나 잘 드러나 있지 않다면, 그 의미가 언젠가 온전하게 드러나게 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현재의 과학관과 진리관이 갖는 (파생적, 비-본질적) 의미의 한계 또한 명료하게 드러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어쨌거나, 그러한 일의적 의미가 있건 없건 간에, 현재 과학의 의미는 다의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과학은 항상 자신과 다른 어떤 것에 관한 과학들로 분열되어 있으며, 과학의 과학(즉 과학 자체의 본성을 밝힐 수 있는 과학, 혹은 지식 자체의 본성을 밝힐 수 있는 지식)이 밝힐 수밖에 없는 과학 자체의 의미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가령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구별이 있다면, 이때 ‘과학’은 자연과 인간(혹은 문화)의 구별에 따라 분열되고, 그때 그 과학들의 의미는 다의적이 된다(과학의 객체가 다르게 되고 다양해지면, 과학 자체의 성격과 의미도 다르게 되고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 혹은, 만일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을 구별한다면(가령 딜타이나 가다머의 경우처럼), 그때 서로 다른 두 과학들 사이의 다의성과 이질성을 낳는 것은 자연과 정신의 구별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문제는 이것이다. 그 두 과학이 ‘과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어떤 본질적인 관계성 속에 있는 한에서, 그 둘의 다의성 속에는 어떤 종류의 일의성이 작동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야만 그 둘의 관계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진정한 구별하기는 구별되고 있는 것들의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으며, 어떤 유사성을 통한 공속성 없이 그저 다르기만 한 것들로 분리(분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현재의 자연과학의 모델에 따라 정신과학의 의미를 한정할 수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 자연과학과 전혀 무관한 정신과학의 의미를 찾을 수도 없다. 그 두 과학은 일의적 의미로 일치될 수도 없고, 다의적 의미로 분리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여기서는 일의적인 것과 다의적인 것 사이의 역동적 긴장관계를 표현할 수 있는 유비적인 것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문학비평이 전제할 수 있는 문학의 과학은, 문학이 자연보다는 인간, 문화, 정신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우므로, 자연과학보다는 정신과학 쪽에 가까울 것이지만, 그때의 정신과학의 과학성은, 자연과학과 무관하게 분리되지도 않고, 자연과학에 일치하지도 않으면서, 그것과 유비적 관계성을 갖는 과학성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문학비평의 한 가능한 과학성은 ‘유비analogy의 과학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유비적 과학성의 요청은 자연과 인간, 자연과 문화, 자연과 정신 사이에 이미 유비적 관계성이 작동하고 있다는 직관적 경험(혹은 경험적 직관)에 기초한다. 인간 영혼의 중요한 세 활동, 즉 과학적(지성적)/예술적(감성적)/종교적(의지적) 활동은 모두 여하간 그 발생적 국면에서 어떤 종류의 근본적인 경험에 기초할 수밖에 없으며, 유비의 과학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이때 유비적 관계성에 대한 직관적 경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무리 막연하며 희미하며 순간적이며 심지어 발생하자마자 망각될지라도, 삶속에서 마주칠 수 있는 서로 다른 존재들을 꿰뚫고 있는 전체성, 통일성에 대한 느낌, 어떤 충만한 온전성을 예감케 하는 질적으로 특이한 감성적-인지적 느낌의 경험이다. 그러한 경험 속에서는 서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 결코 결합될 수 없이 단절되어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것들, 가장 대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 이를테면 하늘(위)과 땅(아래), 빛(낮)과 어둠(밤), 선과 악 등이 어떤 역설적이고 아이러니한 방식일지라도 어떤 연속성 속에서 이해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혹은, 실재적(현실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또한 전혀 다르기만 한 것은 아닌 것으로 이해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불(열)-물(액체)-공기(기체)-흙(고체)-광물-동물-식물-인간-신-천체(별)-천사-악마-유령-호문쿨루스-요정-귀신-괴물-드래곤-유니콘-불사조-스핑크스-인어-뱀파이어 등등은 본질적인 내적 관계성 속에서 이해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느낌의 경험’이란 자주 개인적 취향, 성격, 기분, 기질 등으로 채색되며, 그렇기에 그 느낌을 불러일으킨 사태의 본성에 대한 객관적인 인지적 기능을 할 수 없으며, 설령 그러한 기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치명적인 인지적 오류를 저지르게 할 수도 있는 주관적(자의적)인 반응에 불과하기에, 그것은 과학의 기초가 될 수 없다고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왜 과학이 오류를 배제해야 하고, 주관성을 배제해야 하는가? 아직 완결되지 않은 형성과정(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고, 거치고 있고, 아마도 계속 거치게 될지도 모를 형성과정) 중에 있는 자기-의식적인 개별적 인간의 인식활동으로 이해될 수 있는 과학에서 오류 없이 도달될 수 있는 진리, 주관성 없이 도달될 수 있는 객관성이 존재할 수 있는가? 오히려 진리추구에서 오류(혹은 비-진리)는 어떤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거나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객관성을 추구하는 과학에서 주관(자기-의식적 개인)은 그저 수동적인 구경꾼에 머무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능동적이고 결정적인 작인의 역할을 하고 있거나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유비의 과학에서는 진리와 비-진리, 객관과 주관의 대립적 구별 또한, 자기-의식적 개인의 내면적 자유를 가능하게 하면서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며 변화하는 본질적인 내적 관계성의 운동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문학비평이 전제할 있는 그러한 유비의 과학에서 진리는 그저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 혹은 무지 속에서 발생 가능한 갖가지 부정적인 오류, 위험, 유혹적 요소들 속에서 새로움의 빛, 미래를 향한 길을 발견/발명하는 자유로운 개인의 창조적 활동이 없다면 결코 드러날 수 없는 생성의 진리, 창작의 진리이다. 그렇기에 자유로운 개인의 내면적 주관성은 객관적 진리가 드러날 수 있는 유일한 자리이며, 치명적인 오류와 유혹의 위기를 가져올 수 있는 비-진리는 창조적 진리, 자유의 가능성을 억압하지 않는 관계적 진리가 태어날 수 있는 필수적 조건이다.
그런데 그렇게 긍정적으로 해석될 수 있을 ‘주관적 오류’의 발생장소는 느낌의 경험 자체에 있지 않다. 느낀 것은 느낀 것이며, 경험한 것은 경험한 것이다. 한 개인의 감성적 주관이 사태 자체와의 마주침을 통해서 겪은 순수한 경험 그 자체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 설령 어떤 동일한 사태 혹은 현상(가령 그것이 하나의 예술작품이든 한 그루의 나무이든 간에)과의 마주침에서 여러 감성적 주관이 서로 다른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경험들 자체는 그 동일한 사태가 보여주는 다양한 질적 특성들에 대한 각자의 고유한 경험일 뿐, 그중의 한 경험만 ‘맞는 경험’이고 다른 경험들은 ‘틀린 경험’일 수 없다. 현상과의 진정한 마주침이라 할 수 있을 모든 감성적 경험은 그 자체가 전체적 진리일 수는 없지만, 반쪽의 진리 혹은 전체적 진리를 향한 잠재적 가능성이며, 여기서 오류 여부를 따지는 것은 부적절하다.
모든 경험은 그것이 경험인 이상, 전부 ‘맞는 경험’이며, 그 속에는 그 경험이 관계하고 있는 사태 자체, 현상 자체의 실재적인 질적 본성이 내재한다. 그리고 유비의 과학이 기초하는 느낌의 경험, 혹은 감성적 경험이 그러한 특징을 갖는다면, 여기에서 중요한 귀결이 뒤따른다. 실재는 현상과 분리되어 불가지적인 무엇으로 배후에 끝까지 남아 있는 어떤 X가 아니라, 현상과의 본질적 관계성 속에서 감성적 주관에 알려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느낌의 경험을 통하여, 실재는 현상 속에서 자신을 알려 올 수 있다. 도대체 왜 실재와 현상을 분리하면서 불가지적인 물자체를 가정하는가? 근대의 자연과학의 방법에서 영향 받은 ‘비판의 방법’을 통해 바로 그 자연과학을 인식론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했던 칸트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알려질 수 없는 현상 배후의 실재(혹은 물자체)를 가정하는 이유는 아마도 감성적 주관의 경험이란 믿을 수 없이 불안정하고 부정확하고 우연적인 경험이기에 결코 실재일 수 없는 현상의 경험일 뿐이라고 단정해 버린 비판적 지성의 성급하고 독단적인 판단 때문일 수 있다. 그렇기에 비판적 지성(혹은 자연과학적 지성)은 유동적이고 관계적인 느낌의 경험(항상 구체적인 관계의 맥락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경험)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보여주는 미묘하고 구체적인 실재적 성질들을 무시하면서, 귀납적 일반화를 목표로, 그러한 질적 느낌들을 지성의 고립되고 고정된 도식적 형식에 들어맞는 측정 가능하고 계산 가능한 양적이고 추상적인 감각자료들로 환원시켜 버리는 경향성을 갖는다. 문학비평의 한 가능한 과학인 유비의 과학은 그렇게 구체적인 질적 느낌을 추상적인 양적 감각자료로 환원하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며, 따라서 귀납적 일반화를 일차적 목표로 하지도 않을 것이며, 혹은 귀납적 일반화에 기초한 연역적 증명이 일차적으로 중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가령 ‘모든 사람은 죽는다’ 혹은 ‘모든 지상의 존재는 무게를 지니며 중력의 영향을 받는다’ 혹은 ‘서로 다른 두 존재가 동시에 동일한 공간을 점유할 수 없다’ 혹은 ‘처녀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이다’ 혹은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등등의 명제적 판단의 진리나 ‘질량보존의 법칙’ 혹은 ‘적자생존의 법칙’ 혹은 ‘변증법적 역사발전의 법칙’ 같은 것은, 그것이 수적이고 양적인 메마른 지성적인 감각자료로 추상된 수많은 개별적 사례들에 기초한 귀납적 일반화를 통해 도출된 것인 한에서, 문학비평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진리가 아니며, 심지어 그 판단의 진리성마저 충분히 적극적으로 의심될 수 있으며, 따라서 거기서부터 문학의 진리를 연역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대전제로 기능할 수도 없는데, 만일 그것이 상식이나 합리적 판단에 반하는 일이라면, 문학비평이나 문학은 그러한 것들에 반할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비판적 지성이 행하는 실재와 현상의 분리는 실재와 상징의 분리와도 맥을 같이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비판적 지성은 상징하는 것과 상징되는 것(이것이 실재이든 존재이든 의미이든)을 분리시키는 경향성을 갖는다. 그렇기에, 가령 ‘언어는 상징이다’라고 말하면, 그때 언어는 상징되는 의미(혹은 의미-존재)와 분리된 상징하는 것으로만 파악된다(또한 실재와 상징의 분리를 전제하기에, 상징은 상징되는 것과의 본질적인 관계성을 잃어버리고 계속 상징하는 것들 사이에서만 이동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렇게 근대철학의 인식론에서 사유와 존재가 분리되듯이, 언어와 존재(또한 언어와 사유)가 분리된다. 하지만 구체적인 관계성에 기초한 직관적(감성적-인지적) 경험의 시원적 발생에서 언어, 사유, 존재가 구별될 수는 있지만 분리될 수는 없는 공속성을 보여준다면, 그러한 분리를 가정하는 것은 시원적이고 발생적인 사건의 경험을 망각하면서 그 경험과 분리된 비판적 지성의 오류일 수 있다. 그렇기에 ‘주관적 오류’의 진원지는 그러한 사건의 경험에서 분리된 비판적 지성일 수 있다. 비판적 지성은 왜 그렇게 무엇이든 분리시키려는 경향성을 가지며, 자신 또한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되려고 하는가? 도대체 비판적 지성의 정체란 무엇인가? ‘비판’이란 어떤 성질의 것인가?
비판이란 근대성과 함께 떠오른 개별적 자기-의식의 자유로운 사유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비판은 근대적인 지성이 사유하는 방법이며, 비판적 지성의 분리시키려는 경향성은 바로 자신이 추구하는 비판의 방법 자체에 기인한다. 왜냐하면 비판의 방법이란 바로 분리에 기초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비판적 지성의 작동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세계와 나, 혹은 객관과 주관의 분리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때 그 둘을 결합시키고 있었던 것이 상호관계성에 기초한 감성적 경험이라면, 그러한 분리는 또한 지성이 감성적 경험과 분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분리란 비판적 지성이 어떤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혹은 바라보기 싫은 어떤 것을 무시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행하는 거리두기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판적 지성의 그러한 의식적 거리두기는 과학 이전의 자연적 차원에서의 무의식적인 분리의 사건이 이미 발생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세계와 나, 객관과 주관, 자연과 인간, 감성적 경험과 지성적 사유 사이에는 이미 다시 건널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어두운 망각의 심연이 놓여 있으며, 그렇기에 비판적 지성이 행하는 실재와 현상, 혹은 실재와 상징의 분리는 비판적 지성 자신이 처해 있는 상태에 대한 자기성찰로부터 뒤따르는 필연적 귀결이며, 자신이 세계 자체나 자연 자체의 존재와 분리되었기에 그에 대해 무지하다는 자기고백이다. 결국 모든 비판은 그러한 자기-비판으로 귀결되며, 긍정적으로 이해된 비판의 방법이란 자기-의식적 개인의 내면을 향한 자기-인식의 길이다. 그렇지만 진정한 자기-인식이 세계, 자연, 타자들과의 구체적인 관계성에 대한 인식 없이는 가능할 수 없다면, 그렇기에 비판적 지성의 밖을 향하여 나가야 한다면, 그리고 비판의 방법이 그러한 자기 내면의 반성에 머물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는다면, 비판의 방법은 거기서 머물지 않고 극복되어야 하는 방법이다. 물론 그러한 극복의 가능성은 비판적 지성 자체를 단순히 부정하거나 포기하는 일에서 발견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판적 지성은 명료한 자기-의식에 기초한 자유로운 개별적 사유를 가능하게 해주는 능력이며,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어떤 우주론적 차원에서 펼쳐지는 비극적인 역사의 지난한 분리(분열)의 과정을 통해 획득된 개인적 자유의 가능성을 잃어버린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또한 비판적 지성이 인간의 과학적 활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필수적 능력이라면, 그것은 문학비평이 전제할 수 있는 한 가능한 과학인 유비의 과학을 위해서도 포기될 수 없다. 결국 문학비평에서 비판적 지성이 갖는 방법적 한계의 극복은 그것이 처해 있는 의식상태의 변형/변신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의식의 변형은 의식의 대상이 변형되면 의식 자체도 변형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의식의 객체와 주체의 상호의존적 관계성). 의식의 객체이건 주체이건, 고정되고 고립되고 정지된 고체적 실체들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요구되는 의식의 사유는 의식의 대상들을 상호 침투시키면서 물처럼 흐르게 하는 사유, 서로 분리된 고정된 형태들에 연속성을 부여하며 결합시키면서 변형시키는 사유이다. 이때 유비적 통일성 속에서 나타나는 의식의 대상들은 상징적 연관을 창출하는 자유로운 사유의 활동을 통해 구체적인 관계성에 기초한 이행의 운동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과학적 목표는 추상적·평균적 일반성이 아니라 구체적 보편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즉 구체적인 개별적 사례들을 지성적 도식에 맞추어 가공할 수 있는 감각자료로 간주하여 귀납적으로 추상된 일반성, 혹은 개별성과 분리된 보편성이 아니라, 개별성 속의 보편성, 보편성 속의 개별성에 도달하려는 노력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구체적 보편성의 요구가 또한 어떤 실재적인 원형적 존재를 요구하는 일이라면, 여기서 중요한 탐구의 대상은 원형적 이미지, 원형적 상징, 원형적 현상이다. 여기서의 이미지, 상징, 현상은 실재적 원형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원형적 나무와 개별적 나무들은 서로 분리된 것으로 파악될 수 없으며, 문학을 포함한 예술은 개별적인 방식으로 원형적인 나무 자체와 관련된 어떤 특수한 원형적 상징이나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하며, 비평은 그것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쉽지 않은 활동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비판적 지성의 의식 속에 놓여 있는 잠재적 변형의 능력이 활성화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의식의 지향성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비판적 지성은 일정한 지향성을 보여주는 감정과 의지를 가지며, 비록 외부와의 구체적인 감성적 경험에서는 분리되었을지라도, 여전히 자신의 외부를 향해 있는 경험과 결합되어 있다(어떤 것과의 분리는 다른 것과의 결합이며, 어떤 것과의 결합은 다른 것과의 분리이다). 그러한 경험이란 바로 자신의 논리적 일관성에 근거를 제공하고 자신의 감정을 자극하고 자신의 의지적 행위의 동기를 부여할 사실적 감각자료에 매달려 있는 경험이다. 의식의 지향성이 감각자료의 성격을 갖는 의식의 대상을 향해 있는 한에서, 그리고 그와 함께 변할 수 없이 고정된 과거의 사실성을 향해 있는 한에서, 의식의 변형은 불가능하며, 그것은 현재를 과거로 후퇴시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의식의 변형을 중요시하는 문학비평에서 문학작품의 경험은 사실적 감각자료의 경험으로 특징지어질 수 없다. 오히려 문학비평 혹은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감각경험이 아니라 기억, 혹은 상기의 경험이다(고대 그리스의 신화적 사유에서 문학을 포함한 예술의 어머니는 바로 기억이었다). 기억은 현재를 과거로 후퇴시키는 일이 아니라, 과거를 현재로 전진시키는 일이다. 감각과 기억은 시간의식의 방향성이 다르며, 또한 그 둘은 질적으로 다른 능력이다. 그렇기에 기억은 감각의 이차적 재현이나 복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비록 비판적 지성이 머물고 있는 의식의 차원에서 자각되지 않는 무의식적인 것일지라도, 자신이 아닌 것과의 공감적 관계를 통해서 스스로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존재의 활동이 없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창조적 활동의 산물이다. 한 개인의 창조적 활동의 출발점은 감각이 아니라 (무의식적) 기억이다. 다시 말하자면, 비판적 지성에게 익숙한 감각자료와 결합되어 있는 기억이 아니라, 감각자료와 분리된 기억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감각될 수 없는 것, 혹은 감각되지 않은 것, 혹은 망각된 것을 상기하고자 하는 기억이다. 여기서, 기억은 상상으로 변형되며, 과거가 현재를 넘어 미래로 도약하며, 미래가 현재로 온다. 상상이란 예술적 측면에서 보자면 스스로 만들어내야만 비로소 감각할 수 있는 것을 창조하는 일이며, 과학적 측면에서 보자면 스스로 만들어내야만 비로소 인식할 수 있는 것을 창조하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비판적 지성의 변형은 감각 경험과 결합된 사실적 의식(즉 일상적 의식, 자연적 의식)에서 자신을 방법적으로 분리시켜 기억의 경험과 결합된 상상적 의식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일이며, 문학비평의 한 가능한 과학성의 의미 또한 그러한 방향전환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 같다.












김대산


작가소개 / 김대산

1974년 출생. 2006년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으로 등단. 평론집 <달팽이 사냥>(2011)이 있음.


《문장웹진 2017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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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속 부동산과 젠더 정치학 전지니(한경국립대 교수) * 이 글에는 종결되지 않은 웹툰과 올해 공연된 연극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투기와 여성 이 글은 한국의 부동산 현실, 그중에서도 전세 사기로 집약되는 부동산 범죄를 다룬 웹툰과 연극을 겹쳐 보려 한다. 이를 통해 동시대 대중문화 텍스트 안에서 자산 증식에 대한 소시민적 욕망이 어떻게 젠더화되어 형상화되는지를 살피고, 여성을 범죄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배치하는 작품 속 시도가 갖는 양면성에 대해 조망한다. 논의할 작품은 표제에 부동산을 내세워 비슷한 시기 독자, 그리고 관객과 만난 (유기 글/그림, 2024.1.13.~연재 중), (김수정 작/연출, 2023.10.14.~22.(초연), 2024.6.1.~9(재연)) 등 두 편이다. 부동산과 여성을 관련지어 논의하는 경우는 본격적인 강남 개발 이후인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부동산 가격 상승과 서민의 박탈감, 중산층 진입의 욕망 등의 문제는 박완서의 강남 아파트를 산 교수 부인의 이야기인 「낙토의 아이들」(1978)에서부터 시작해 재개발을 둘러싼 부녀회의 욕망을 다룬 웹툰 (스토리 매미/작화 희세, 2019.05.05.~2020.09.27.)까지 꾸준히 반복되었다. 염두에 둘 점은 (유하 작/연출, 2015), (연상호 작/연출, 2018)의 경우처럼 대중문화 속에서 개발·재개발의 역학관계를 다룰 때는 남성 인물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이지만, 개발의 수혜를 입고자 하는 소시민의 욕망을 다룰 때 그 중심에는 여성이 자리한다는 점이다. 관련하여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불안한 경제상황 속에서 반복되었던 투기는 여성의 것으로 전유되는 일이 빈번했다. 전쟁 이후 사회 혼란의 주범으로 간주되었던 ‘사설계’를 주도하는 부인들이나 1970년대 후반부터 매체에 오르내린 부동산 투기의 주범 ‘복부인’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은 근현대사 속 뿌리 깊은 여성 혐오와 직결되어 있다. 정치·사회적 불안으로 발생한 투기 심리를 여성의 전유물로 간주하며 문제의 핵심을 피해 가고 비판의 대상을 국가와 체제가 아닌 여성으로 지목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여성이 투기에 몰두하는 이유를 심리학적,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기사도 있었다. 한 언론은 “복부인의 욕구 단계는 생리 욕구와 안전 욕구의 원시적인 단계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며 여성이 상대적으로 안전 욕구가 강하고 사회 진출이 부진한 것을 복부인이 생기는 이유로 분석하기도 했다.1) 이 와중에 투기를 여성의 것으로 지정하는 데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1984년 한 신문 독자는 신문 기고를 통해 ‘복부인’은 여성 천시 단어로 공공매체에서 이 같은 유행어를 쓰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 그는 “이는 여성 학대의 사회적 악습에서 오는 콤플렉스를 여성의 사회 유린이라는 감정으로 희석시키려는 ‘투사’ 심리요, 또한 일종의

  • 관리자
  • 2024-10-01
휴먼들의 소화불량, 비인간-사물의 매혹

휴먼들의 소화불량, 비인간-사물의 매혹 황녹록 밖에선 바퀴벌레의 신음소리 아버지가 숨겨 둔 약을 먹은 것입니다 어머니 내 책상 위에 아버지가 피운 모기향 좀 치우세요 시집 위에 몸 약한 날벌레들 다 떨어지잖아 동생 문 열고 들어옵니다 나는 문밖으로 재빨리 나가려고······ 동생이 소리 질렀습니다 여기 또 있어 진은영, 중1) 오래된 사물, 거슬리는 존재감 이제 우리는 반려인, 반려동물, 반려식물, 반려미생물, 반려사물 등 반려종의 경계를 구분 짓지 않기로 한다. 반려종이란 서로의 밥을 나누고 몸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관계를 뜻하는 말로 어떤 물질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반려들은 나눔의 상호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못지않게 서로를 위태롭게 하고, 서로 먹다가 소화불량이 되기도 하고, 때로 죽고 죽이는 유해성의 성분도 가지고 있다.2) 그리하여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반려가 된다는 것은 결코 무구할 수 없는 관계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비인간 반려들의 낯선 이물감으로 시작되는 관계맺음은 애초에 구역감과 체기(滯氣)를 동반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관계맺음은 일상 속에서 예기치 못한 만남으로 강제될 테고, 그로부터 서로를 향한 진지한 응시의 요구가 시작된다. 그 응시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물음과 응답의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새로운 관계맺음에 대하여 ‘영원한 동반자’라는 환상을 기대하거나, 우정 어린 돌봄으로 윤리적 책임을 지우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존재들의 있음을 감각하고 그 감각에 감응하는 관계로서 반려를 말하려는 것이다. 김초엽의 소설 『지구 끝 온실』3)은 SF적 상상력을 통해 인간 지수와 사이보그 레이첼, 레이첼과 희귀식물 모스바나, 그리고 모스바나와 이희수의 혼종적 관계맺음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종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들의 반려-되기는 멸망해 가는 지구 끝에서 찾아내는 희망의 메시지로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나아가 구원의 식물(푸른빛)이자 악마(생태계의 위협적인)의 식물인 ‘세발갈고리덩굴’의 이중적 존재감은 반려들의 관계로부터 인류의 재건과 구원의 (불)가능성에 대한 적극적인 타진으로 읽어 볼 수도 있다. 꽤 오래전 카프카는 그의 단편에서 규정할 수 없는 것들, 식별 불가능한 반려들의 존재감을 감지한 바 있다. 카프카의 작은 존재들은 경직된 습관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실험과 그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발생된 감염의 산물이다. 카프카의 비인간-사물들은 서로를 반려종으로 여기기에는 아직 미심쩍고 불안한 상태로 존재한다. 오드라데크(Odradek)4)는 낡은 실타래 조각처럼 묘사할 수 없는 형태를 띠고,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듯한 웃음소리를 낸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가장(家長)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오드라데크가 계속 살아 있는 것이 근심스럽다고 고백한다. 또 있다. 반은

  • 관리자
  • 2024-10-01
한일 문화의 초국적 접점과 ‘마주침’의 서사학

한일 문화의 초국적 접점과 ‘마주침’의 서사학 : 동시대 한국 소설 속 ‘일본’이라는 물음 정창훈 올해 상반기 일본 방송가는 ‘한일 로맨스’로 뜨거웠다. 한국인 배우 채종협(작중 윤태오 역)과 일본인 배우 니카이도 후미(모토미야 유리 역)가 공동 주연을 맡은 드라마 가 그것이다.1) 이 드라마는 채종협을 단숨에 한류 톱스타로 만들며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여러 OTT 플랫폼이나 케이블 TV채널을 통해 방영되며 화제가 되고 있다. 나 역시 이 드라마를 매회 빠짐없이 챙겨보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이 두 인물의 연인 관계에 시련이나 위기를 가져오는 여러 갈등의 요인들이 있었으나, 그 가운데서 국가적, 역사적 문제와 연관되는 요인을 끝내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신선했다. 국적(내셔널리티)과 언어, 생활관습의 차이는 둘 사이의 장벽이 되기는커녕 상대에 대한 관심을 극적으로 심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가족이나 주변인들도 이 둘이 한국인,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둘 사이를 반대하진 않는다. 이것은 종래의 한일 서사물에서 양국 인물의 연애사를 그려 온 방식과는 차별화되는 것인데, 이를 통해 ‘이례적인’ 해피엔딩의 결말이 주어진다. ‘한일 로맨스’ 자체가 이례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른 아시아 이웃들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한일 양국 인물의 만남을 그린 서사적 재현이 여러 차례 반복되어 온 점, 나아가 오늘날 그 재현의 양상이 현저히 다양화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하는 현상이다.2) 물론 나쁘게 말하자면 이 드라마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정치적, 역사적 이슈를 정교하게 회피함으로써 구축된 가상의 이야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이웃이 서로를 감각하는 방식에 새로운 무언가가 ‘첨가’되고 있음을 예시하는 것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소설은 이러한 변화에 한 발 앞서 민감하게 대응해 온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껄끄러운 문제를 공유한 ‘오랜 이웃’과의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는 시도가 동시대 소설 속에서 계승되어 온 점, 이 글은 거기에 새삼스레 주목하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이 가져온 의미를 통시적 관점에서 살펴보기 위해, 잠시 과거로 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현해탄 서사’ 이후, 한일을 넘나드는 월경의 서사 근대 이래 한일 관계에서 ‘현해탄’은 상징적 의미를 지녀 왔다. 특히 식민지-제국 체제의 해체 이후 그것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바닷길(대한해협)’이라는 외시적 의미만이 아니라 역사적, 정치적 문제 등으로 인한 한국과 일본의 ‘가깝고도 먼 관계’(심리적 거리감, 국가적 입장의 차이 등)를 가리키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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