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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한국 문학, 다시 배워나가는 운동

  • 작성일 2016-12-07
  • 조회수 2,280

[비평in문학]


비평 기획
- 한국 문학에 불만 있다?

2016년 한국 문학은 어느 위치에 자리하고 있을까요. 문학을 둘러싼 최근의 담론들 그리고 2010년대 중반 현재의 한국 사회 문화의 종합적 환경을 고려한다면 한국 문학은 어떻게 생각되고 이야기될 수 있을까요. 그보다 먼저, 현재의 복합 다층적인 사회 문화적 조건과 더불어 한국 문학은 어떤 형태와 어떤 맥락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국 문학에 대한 불만은 기실 개별 텍스트, 즉 어떤 소설, 어떤 시, 어떤 산문, 어떤 글쓰기에 바로 드러나 있는 요소들로만 환원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한국 문학을 구성하는 개별 텍스트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이야기될 수 없는 것도 분명합니다. 한국 문학에 어떤 막연한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개별적인 문학 작품들에 대한 감상과 비평이 먼저 제기되지 않았을 리 없었으리라는 것이 이번 기획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이번 비평 기획은 가급적 구체적이고 실감이 되는 의견을 나누려고 합니다. 솔직해야 하는 만큼 부담스러운 일일 수 있으나, 비평가로서가 아닌, 오랫동안 한국 문학에 애정과 관심을 유지하고 있는 독자로서 한국 문학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상을 다시 한 번 깊이 있게 헤아려 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 문학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려 합니다.




2016 한국 문학, 다시 배워나가는 운동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웹진 ‘비평in문학’ 기획 좌담회



참여 : 강지희, 노태훈, 박인성, 백지은(사회), 서영인, 서희원, 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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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은 : 《문장 웹진》은 올여름에 지면 전체를 재정비하면서 ‘비평in문학’ 코너를 신설했습니다. 포괄적이지만 일관성을 유지할 만한 주제로 매달 새 비평문들이 업데이트되고 있습니다. 이 코너가 만들어지고 이번 주제를 계획할 때, 실은 어떤 새로운 비평적 의제를 생산해야 한다는 야심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이미 한국 문학 전 방면에 걸친 다양한 문제점들이 산적해 있다고 파악했고, 그랬기에 그런 문제적 지점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차분하게 짚어 보자는 취지가 앞섰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구체적인 비평적 실천일 수 있고 그럼으로써 더 명확하고 유효한 의제를 창출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바람으로 몇몇 비평가들과 소통을 시작했고 글을 모았습니다. 현재까지 일곱 편의 글들이 상재되었고 - 앞으로 대여섯 편쯤 추가될 것입니다 - 이번 기획의 취지에 동감해 주신 필자들이 한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각 편의 글로 제출되는 논의를 좀 더 포괄적으로, 풍부하게 보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오늘의 좌담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국정 농단 사태로 나라 전체가 참담한 와중에 문단 내적으로는 성폭력, 권력 등과 관련된 문제들이 수차례 공론화되고 있는 정국이라 문인들은 글 쓰고 글 읽기에 집중은커녕 일상을 지탱하기도 힘들다고 토로합니다. 어수선함 탓을 안 하기는 어려우나 이런 때일수록 다시 점검하고 살펴야 할 것들을 챙겨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2016년은 아마도 한국인들의 멘탈리티를 지탱하는 구조가 지각변동을 일으킨 해로 기억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 요즘은 불과 한 달 전의 판단도 회의하게 되고, 두세 달 전에 썼던 글의 요지도 시절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고 그렇습니다. 의견과 판단을 고정하기도 표명하기도 혼란스럽고 부담스러우실지 모르나, 이미 발표된 글들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촉발된 생각들을 나누는 것으로 일단 시작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코너의 첫 글로, 문학에서 '대중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을 무조건적으로 분리하는 고질적인 습관에 문제를 제기해 주신 서영인 선생님 말씀부터 들어 보겠습니다.



부적절한 용어를 통해서라도 바라봐야 할 것들


서영인 : 사회자 말씀대로 한두 달 전에 쓴 글에 대해서도 확신이 서지 않고 회의가 드는 상황입니다. 일단 그때 썼던 취지를 중심으로 말씀드릴게요. 대중적 텍스트와 순문학 텍스트를 분할하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첫 번째 의도였습니다. 과연 문학 비평이 텍스트를 그렇게 나누어서 보는 것이 옳으냐는 문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석은 항상 고정된 문학성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 두 번째 문제제기였습니다. 제가 ‘정유정’을 중심으로 글을 썼는데, 여러 접근방식이 있을 텐데 우리는 항상 문학성이라는 기준에만 집착을 하는 것 같다, 기왕에 정유정과 같은 독특한 위치의 텍스트가 있다면 기존의 문학성 견지에서 작품의 의미를 따지는 것 이외의 다른 접근을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었지요. 그랬을 때, 이것이 세 번째 문제제기였는데요. 문학성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관련될 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좀 더 적극적으로 읽어내는 것이 비평의 역할이 아닌가 하는 의식으로 이 글을 썼습니다. 예컨대 『종의 기원』을 읽었을 때 정유정의 글은 깊이가 부족하다, 접근이 상투적이다, 라는 비평이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저는 이런 것들이 실제로 현실을 어떻게 끌어들이고 있는지, 그 문학이 놓인 현실을 염두에 두고 그 문학을 어떤 맥락에서 읽어 가야 하는가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예컨대 서두에 한강의 텍스트를 잠시 언급하기도 했는데요. 한강이 <맨부커상>을 탔다는 것 때문에 관심을 받는 것은 굉장히 대중적인 주제인데, 실제로 문예지에서는 수상이 화제가 되자 한강의 작품 자체만을 계속 분석하고 있더라는 거죠. 시대착오적인 것이죠. 왜 이 상을 받은 맥락은 제외하고 작품 분석에만 골몰하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기도 했고.


서희원 : 서영인 선생님께서 대중적 텍스트와 순문학 텍스트라는 용어를, 즉 대중문학과 순문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는데, 먼저, 그게 문학에 대한 적절한 구분법인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이전 식민지 시기 때는 순문학이란 말 대신 내성소설이나 심리소설이라는 용어를 썼고, 또 신변소설, 세태소설, 풍속소설 등의 말로 조금 더 대중적인 소설을 일컫곤 했죠. 이 구분이 애매한 곳이 있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중간문학이라는 표현도 사용하더라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독자들이 표현하는 대중적인 관심에 대한 주목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대중이 가장 의미 있는 시선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 문학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흥미로운 현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분명하겠지요.


백지은 : 네. '문학성', '대중성'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둘을 이원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정확하지도 않고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올 뿐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바로 그 이원적 용법의 문제를 논하는 자리에서도 두 용어가 자꾸 이원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피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문학성'과 '대중성'을 이원화하는 것의 문제점을 인지했다면, 어쨌거나 이 용어들이 사용되지 않을 수 있어야 더 나은 거잖아요. '대중문학', '순문학'이란 용어 역시, 둘을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도 하지만 아예 구분 자체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야 하는 건 아닐까요?


서희원 : 문학성이라고 하면 무얼 문학성이라고 하는지, 대중성이라고 하면 무얼 대중성이라고 해야 하는지 그것 역시 대단히 모호합니다. 예전에 읽은 자료 중에 흥미로운 것이 있었는데요. 1930년대 음반 회사의 기획자들이 매년 연말 좌담을 진행한 것이 있습니다. 1930년대는 음반이 식민지 조선에 파급력 있는 상품으로 처음 등장하던 시기였죠. 그 대담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유행 즉 대중성인데요. 올해는 무엇이 유행했으니 내년에 이런 것이 유행할 것이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데 매년 틀려요. 그러다 몇 년 지나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얘기가 하나도 맞지 않는다고, 대중성이란 정말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거든요. 여기에는 참조할 것이 분명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문학성, 대중성이라고 표현하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기호와 같은 것이라서 제대로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서영인 : 제가 말하고 싶은 부분이 그거였어요. 대중문학, 순문학의 구분이 문제가 아니고 일반적 문학 비평이라고 했을 때 대중적 읽기의 실천이 중요하다는 거거든요. 텍스트의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텍스트 내에서 얘기하는 동안 문학은 특화된 폐쇄적 영역 속에 머무르게 된다는 거죠. 비평가라는 사람이 필요하다면, 여러 존재 방식이 있겠지만, 어떤 텍스트라도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방식으로 텍스트들을 계속해서 읽어 나가면서, 문학이 우리의 삶 옆에 계속 존재한다는 것을 제안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거죠. 정유정의 『28』이라는 작품이 잘 썼다, 아니다, 와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28』이라는 작품이 뛰어난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없겠다 전제는 붙일 수 있겠지만. 그 작품이 2014년에 나왔고 그것이 읽혔을 때 이 작품이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인지, 이것이 그나마 문학을 좀 더 열심히 읽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글쓰기가 아닐까 싶었고요. 한국 문학장 내에서 이런 식의 비평적 기능은 현저히 축소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것이 저의 문제의식이었고. 물론 저 역시 그것을 충분히 실천하진 못했다고 생각하지만 필요를 실천해 보고 싶었던 거죠. 제대로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이 텍스트가 어떤 텍스트인가를 규명하는 것보다는 이 텍스트를 어떻게 읽고 소통할 것인가를 고민해 보자,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백지은 : 앞서 선생님께서 셋으로 나누어 제기해 주신 문제들 중 세 번째에 대한 말씀이네요. 그런데 이것은, 말씀해 주신 문제 중 첫 번째 것, '대중적인 것'은 '문학적인 것'의 바깥에서 생각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지어서 더 이야기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서영인 선생님께서는 “문학의 상투적인 관습을 '대중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읽기가 문학 외부에서 작동하는 읽기인가”라고 질문하시고,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답을 하셨다면, 노태훈 선생님의 글 [순문학이라는 장르 소설]에서는 '대중성' 바깥에 혹은 그것과 별도로 상정되어야 할 '문학성'에 대한 논의가 있습니다.


노태훈 : 네, 그렇습니다. 저는 우선 문학이라는 장르가 사람들이 그것을 읽고 서로 소통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에는 이제는 많이 축소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유정’의 경우 많이 팔리긴 하지만 그건 좀 특수사례라고 봐야 할 것이고요. 어쨌든 문학을 좋아하고 문학에 기대를 갖고 문학이 잘 되길 바라는 입장에서 목소릴 내자면, 저는 이른바 순문학을 훨씬 더 장르화 시키는 방식이 유효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순문학, 대중문학이라고 나누어서 문학적 가치 평가를 내리는 형태가 아니라 순문학이라는 장르를 확실히 인정하는 것이지요. 제가 현재 얘기할 수 있는 특징은 ‘사유의 깊이’ 정도인데 앞서 언급하신 예전의 내성소설 같은 개념이라고 보아도 일단은 좋습니다. 어쨌든 그런 식의 사유의 깊이를 드러내는 그런 문학을 순문학으로 부르고 그 층위를 대중문학의 스릴러, 추리, 로맨스, 공상과학 등 장르소설과 동등하게 여겨 보자는 것입니다. 예컨대 ‘정유정’을 생각해 보면 『28』의 경우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재난소설이라고 해야 할까요? 『7년의 밤』은 스릴러에 가깝고. 아무튼 개별 텍스트가 어떤 장르에 속하는지를 판단하고 과연 『28』이 재난소설로서 성공적이었는가, 『7년의 밤』은 훌륭한 스릴러인가, 묻는 방식이 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항상 순문학의 기준에서 그냥 좀 재미있고 흥미로운 소설 정도로 치부하는 관행은 좀 무책임하지요. 이런 식으로 판단해 보고 그 연결 기준을 세워 나가는 편이 저로서는 유효해 보이고 마찬가지로 저희가 이른바 순문학이라 일컬었던 장르를 평론할 때에는 이 텍스트가 얼마나 ‘문학적’인가를 당연히 집요하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문학 장르에 종사하는 우리가 끝까지 붙잡고 있어야 할 것은 일종의 문학성이고 소위 텍스트의 깊이가 되지 않을까요? 해서 저는 문제의 틀을 대중, 순문학의 경계를 나눌 것이냐, 넘을 것이냐의 방향이 아니라 장르별 성격을 명확히 하고 그에 따라 개별적으로 접근하는 편이 좋겠다는 의견입니다. 물론 아직은 좀 더 고민해 봐야 할 문제구요. 여러 선생님들의 의견과 크게 다르지는 않은 듯합니다.


박인성 : 저는 상대적으로 대중문학과 순문학이라는 카테고리컬한 구분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소위 최근 장르문학 작가로 스스로를 명명하는 작가들도 그러한 구분에 추호의 의심이 없더군요. 여러 문학잡지에 자기 작품을 게재하거나 평론으로 다루어진 작가들도 있지만 그러한 시도들이 장르 문법에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효한 설명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요. 물론 앞서의 구분이 분리된 문학장에 따라 실재하며, 굳건한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미리부터 자기규정적인 레테르처럼 작동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해당 레테르가 독자 지향적인 파라텍스트paratext가 되어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텍스트에 대한 독해를 미리 결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저 역시 ‘노태훈’ 선생님의 전제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순문학에 대하여 유지되어 온 기존의 문법에 기대어 장르 사이의 명확한 구분을 첨예하게 유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문학성’이라는 것이 그러한 개별성을 확보하는 과정 중에 출현하는 것인지도 말하기 어려우며, ‘순문학’에 대한 기존의 규정에 대하여 구심적으로든 원심적으로든 텍스트가 확보해야 할 다양한 역동성을 위해서라도 앞서의 구분에 대한 지속적인 갱신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강지희 : 결국에는 우리 머릿속에 문학과 관련한 프레임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겠죠. 그런데 마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고 말하는 순간 코끼리에 대한 연상을 멈출 수가 없는 것처럼, 소위 '문학성'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타파하기 위해 말을 꺼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각자의 머릿속에서는 ‘순문학적’인 문학성의 프레임이 활성화되어 버리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네요. 이런 프레임의 재구성은 공적 담론이 변화해야 가능할 텐데, 201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꽤 많은 문학잡지들에서 배명훈, 김이환, 정세랑, 김보영 등 장르문학 작가들을 카테고리화 시키지 않고 함께 지면에 싣고 또 중요하게 논의해 오면서 그 프레임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지 않나 합니다. 물론 아직은 미미한 숫자이고, 그들을 평가하는 관점이 다채롭지는 않다는 한계를 안고 있지만요.



'(순)문학'이라는 소수?


백지은 : '문학성'이 고정된 바가 아니라는 말은 이제는 실로 하나마나한 소리가 되어버렸습니다. 노태훈 선생님의 주장이 특이하게 들린 것은, 문학 일반이 있고 그 하위에 여러 장르문학이 있다는 식으로 카테고리화하는 관습을 바꿔 보자는 입장 때문일 거예요. 대중문화와 불화하는 문학의 어떤 특성을 '순문학성'이라는 컨벤션으로 아예 장르화 하자는 의견으로 들었는데요. 글에서 거론하신 작품들을 참고하자면, 소설이 선명한 서사에 의지하지 않는 성격이나 주제적으로 촉발된 사유의 '깊이' 등을 바로 그 '순문학'이라는 장르의 컨벤션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씀인 듯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통적으로 '문학성'이라고 불려 왔던 어떤 성질과 상통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하위 장르로 축소해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박인성 : 문학성이란 일종의 텅 빈 기표로서 끊임없이 갱신되며 조정되는 것이지만, 최근에는 매우 연성화 된 기대 지평에서만 작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장르화를 통해 이를 구체화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지만, 이러한 구체화는 자기 영역의 재구성이 아니라, 적극적인 내파 전략을 통해 수행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 자신도 장르적 구별을 완전히 무효화하거나 철폐하는 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수단 중 하나는 장르소설과 순문학이라고 구분 가능한 텍스트들을 직접적으로 병렬하거나 교차하는 배치 방식이 있지 않을까 생각 중입니다. SF와 로맨스 작가는 물론이고 르포나 에세이 역시 이러한 병렬화에 요청될 것 같습니다. 그러한 배치를 수행하는 작업이 이를 수행하는 특정 잡지의 목적성, 더 나아가서 미리 설정된 실정성을 향해 가는 방식으로 수행될 위험도 있겠습니다만. 한두 가지 기준에 의해 칼로 두부 자르듯 구분되기 어려운 겹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작가 및 작품의 리스트를 두텁게 확보함으로써 여러 문학 텍스트를 나열해 보는 시도는 한 번쯤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시도를 거쳤을 때 보통 잡지의 지면으로 대변되는 문학의 장소성은 앞서 언급했던 카테고리컬한 분류법보다는 기술적deive 태도를 통해 보다 역동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 스스로도 직접적으로 자극받을 수 있는 인접성이 생겨날 수 있으며, 독자의 독법 역시 여러 차원으로 요청될 것 같구요. 물론 단순히 지면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좌담, 모임, 공동체의 연결성을 확보할 수 있는 다양한 시도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레테르를 붙이는 작가들 역시 아직 상호간의 영역에 대해 모르거나 오해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계를 곧장 해체한다기보다는 경계성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지금의 연성화 된 문학성이라는 것을 긴장시켜 보는 것이죠. 거꾸로 그러한 과정에 ‘문학성’ 자체는 미리 상정되지 않거나, 더욱 의문시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태훈 : 문학이라는 말은 사실 굉장히 포괄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언어를 통해서 예술성을 획득하려는 모든 것들을 문학이라고 했을 때에는 정말 어마어마해지겠죠. 그런데 사실 그동안 순문학 쪽에서는 일종의 장르화가 이미 진행됐는데 그걸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문학이라는 거대한 개념을 다 포괄해서 담론을 형성하려다 보니까 거기에 끼지 못하는, 혹은 끼고 싶지 않은 ‘다른’ 텍스트를 생산하는 주체들이 계속 반발했던 거구요. 순문학이라는 단어에 이미 순수하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만 봐도 그렇지요. 그 이외 것들은 비순수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거니까요. 즉 우리가 사실은 이런 식의 구분을 꽤 오랫동안 명백히 짓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인정을 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박인성 선생님 말씀처럼 사실은 경계를 짓는 게 꼭 좋은 건 아닐 겁니다. 그런데 일단은 우리가 한번 인정을 해보면 꽤 다른 풍경이 펼쳐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명백하게 장르적 관습과 영역을 인정하면 이제 그 경계를 넘는 텍스트들이 더 눈에 들어올 것 같아요. 이를테면 본인이 SF 작가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이른바 순문학에 가까운 SF를 써볼 수 있는 것인데, 지금은 SF 작가들이 그걸 꽤 경계하거든요. 순문학 쪽으로 의도치 않게 포섭되어 버릴까 봐. 장르 간에 미묘한 차이를 조금 더 의식하게 되고 명확하게 내가 경계를 넘어봐야겠다 다짐하게 되지 않을까요? 이 과정에서 새로운 텍스트들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식으로 논의를 진행하면 결국은 또 순문학은 진전이 전혀 없을 것 같아서, 한번 순문학을 견고하게 장르화 시켜 보면 다른 텍스트들을 창조해 낼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은 뭐 어느 장르를 가더라도 순문학이 제일 독자 수가 적잖아요. 서희원 선생님께서 언급하신 김연수 작가가 쓴 글에 보면 독자가 200∼300명 정도. 순문학을 따라 읽는 독자층이 과연 얼마나 될까 생각하면 너무나도 좁은 층인데 말이죠.


서영인 : 추가로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 건, 선생님은 순문학이 문학을 대표했고 장르를 주변화시켜 왔던 것을 바꿔서 다양한 장르 중 일부로 순문학을 위치시키자는 의견인 것 같아요. 근데 저는 그 과정은, 허희 선생님 어법을 빌리자면 일종의 '정신 승리법'이 아닐까. 우린 이 부분을 잘하니까 저 부분은 안 해도 돼 이런 것과 같은 자기만족적 동아리 만들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깁니다. 저는 아주 예전에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는데 90대 문학장에서 리얼리즘이 일종의 패권주의처럼 취급받던 시절이 있었는데, 문학적 다양성이 주장되고 있는데 리얼리즘은 왜 일종의 다양성 중 하나로 인정되지 못할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거든요. 그건 구도를 바꿔서 평등하게 1/n이 되고자 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반증이라고 보거든요. 기존에 순문학이 제도적으로 권력이라 하든 뭐라 하든지 간에 주류의 위치를 점하면서 가치를 만들어 왔던 시간이 축적한 결과를 해체하거나 재구성할 수 있는 의지가 없다면. 이제 와 위축된 위치를 일부 분화한다는 것도, 일종의 정신 승리이지 않을까, 라는 그런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또 그 구도를 해체하기 위해선 이전의 가치들이 구축해 온 위계들을 깰 수 있을 때 그것이 가능한 것이지 ‘할 수 있는 것만, 주류성을 주장하지 않는 방식으로’ 수호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보거든요. 박인성 선생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끝끝내 문학성을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답도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껏 문학성이라고 주어져 왔던 것에 대해 무엇을 깨고 무엇을 해체할 것인지가 불분명하다면 그것을 섞어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도 결국은 없다는 거죠. 그렇다면 지금의 제도적 여건 하에 이루어지는 일종의 문학의 재편 과정에서 늘어난 독자들 혹은 그것에 대해 호의를 표현하는 문화적 기재들을 기존 문학을 발판으로 하여 끌어들이려는 절충주의밖에 되지 않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질적 지표를 상정할 수 있을까


박인성 : 서영인 선생님께서 중요한 지적을 해주셨는데, 우선 제가 언급한 병렬적 배치에 있어서의 과제가 바로 ‘문학성’에 대한 기존의 관성적 방법론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무엇을 더 중심에 두고 주변에 두어야 하는지에 대해 미리 결정된 태도를 회피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미리 상정된 문학성을 중심에 두고 주변부를 기계부품 갈아 끼우듯 다른 영역에서 빌려오는 절충주의를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비평가 역시 텍스트들에 대하여 친숙함에 따라 멀고 가까움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장르적 경계로 곧장 환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지면이든 별도의 장소에서든 여러 텍스트를 교차・병렬하는 과정과, 문학적 제도에 대해 우리가 형성하던 태도들을 반성하고 해체할 수 있는 논의들은 병행되어야 하겠죠. 비평가들의 역할은 이 지점에서 강조될 수 있는데, 문제는 비평의 관점과 도구가 이미 기존의 문학성에 대한 관성화 된 기대에 오염되어 있다는 점이며, 따라서 비평의 언어 또한 동시에 물음에 부쳐질 필요가 있을 겁니다.


서희원 : 순문학을 하나의 장르라고 지칭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통 장르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소재나 주제의 형상화 방식에 따른 구분입니다. 문단문학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며 순문학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순문학이라고 지칭되는 많은 작품들은 예전부터 장르적인 소재와 주제를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신경숙’이나 ‘전경린’의 많은 작품들은 사실 로맨스에 기반을 두고 있고 홍명희, 조정래, 황석영의 대하소설들 역시 역사 로맨스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편혜영의 많은 작품은 ‘호러’로 분류될 수 있고, 배명훈 같은 작가는 잘 알려진 것처럼 SF를 기반으로 많은 작업들을 해나가고 있지요. 저는 지금 하시는 말씀들이 핵심에는 다가가지 못하고 약간 겉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문제는 더 이상 사람들이 문학을 읽으면서, 소설이라는 문학적 언어의 형식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거나 세계에 대한 표현을 익히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백지은 : 그러면 노태훈 선생님께서 제시해 주신 지점을 통해 장르 구분의 층위 문제나 장르 해체(?) 논의의 피상성을 따져 보는 것이 어떨까요. 노태훈 선생님 글에는 '순문학'이라는 '장르'의 예로 몇몇 작품이 거론되어 있긴 하지만, 만약 그 작품들의 양식적 특수성이나 주제적 공통성 같은 것이 명명되었다면 더 설득력 있었을 것 같아요. 제 생각엔 서희원 선생님의 글 [세목이 사라진 자리]에서 소설의 '세목'이 담당하는 어떤 텍스트성 문제를 높게 사주셨던 바가 지금 이 논의의 구체성을 보충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희원 : 제가 주목했던 세목(detail)은 그것 자체가 독자를 문학에서 멀어지게 하거나, 문학으로 이끄는 절대적인 항목은 아닌 것 같아요. 즉 대중성과 문학성을 구분하는 기표가 아니라는 말이죠. 다만 세목은 문학 작품과 인생을 좀 더 밀접하게 연관시켜서 읽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흔적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문학적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그 의미를 알아낼 수 없는, 그런 의미에서 고독한 단어와 쓸쓸한 삶이 만들어내는 연쇄이지요. 요즘의 독자들은 그것을 찾아 읽기보다는 설명을 통해서 제시되어 있는 것을 선호해요. 저는 김연수 작가의 인터뷰에서 독자의 변화에 대한 대목을 찾아 읽고, 독자가 급증한 이유 중 하나를 ‘세목’의 감소와 설명의 증가로 지적한 것입니다. 실제로 요즘 소설들에서는 묘사를 찾기 어렵습니다. 찾더라도 전형적이거나 잘 알려진 시각적 이미지에 지나치게 기대고 있지요.


백지은 : 네.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요즘의 독자들이 묘사보다 설명을 통한 제시를 선호한다는 것은, '묘사'라는 글쓰기의 역할이 이전보다 많이 축소된 시대적 조건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조건이 그렇다면, 세목에 천착하는 글쓰기는 지양되고 다른 방식의 글쓰기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도 자연스러울 듯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방식 혹은 형태가 더 좋다는 의견으로 들어야 하는 거겠죠?


서희원 : 사실 글의 마지막 장을 완성하지 못했는데요. 거기에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에 대한 분석을 넣으려고 계획했습니다. 일정을 잘 조절하지 못해서 결국 그 부분은 쓰지 못했지만요. ?한국이 싫어서?를 읽어 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이 작품에는 묘사가 거의 없어요. 에피소드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은 그런 형태로 제시되죠. 저는 여기서 요즘 독자들이 좋아하는 가독성이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독성’이란 미덕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그렇다고 난수표 같은 소설을 지지하지도 않습니다. 가독성은 작가가 그려낸 세계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길항하지 않을 때, 혹은 작가가 익숙한 장르적 문법이나 전형적인 문학적 장치를 사용할 때 발생합니다. 저는 세계와 갈등하지 않는 소설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타인의 시선을 통해 읽고 싶은 것은 세계의 멋진 ‘다름’이지 천편일률이 아니거든요.



지표는 작품 내부에만 있는 게 아니고


허 희 : 『한국이 싫어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작품 해설을 쓴 사람으로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웃음) 지금은 장강명 작가가 많이 알려졌지만, 사실 이 소설이 나오기 전에는 문학상을 탄 소설을 여럿 냈음에도 불구하고 인지도가 높은 작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이 싫어서』가 가진 힘이 예상외로 컸어요. 도발적인 제목부터 그렇지만, 이 소설이 현재 한국인들이 가진 문제의식을 예리하게 포착해 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영인 선생님 말씀대로 그것은 작품의 내적 완성도를 떠나서, 작품이 출간되었을 때 어떤 사회적 폭발력을 갖느냐 하는 점과 연결됩니다. 제가 보기에 이 소설의 대중적 장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한국 문학의 유력 독자층인 20~30대 여성이 공감할 수 있는 여성 화자가 친구와 수다 떨듯이 자기 고민을 핍진하게 풀어내 읽는 사람과의 거리를 좁혔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면서 현재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하는 계기도 마련해 준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경장편(중편) 분량의 책 한 권이 독서의 뿌듯함을 안겨 주는 것 같아요. 인터넷에서 이 책에 대한 서평들을 찾아보면, 바로 이 부분과 관련한 독자 반응이 상당히 호의적이에요. 무엇보다 이 책을 독자 자신의 삶과 연관시켜 서술하고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고요.


노태훈 : 약간 좀 궁금한 게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한국이 싫어서』를 읽은 독자들이 "아, 정말 나는 훌륭한 문학을 읽었다"라고 생각할까, 그게 전 의아해요. 지금 그걸 읽은 독자들이 문학에 대한 관념을 어떻게 가지고 있을까. 『한국이 싫어서』를 읽으면 한국 문학이 정말 훌륭하다고 느낄까. 그게 아니라 제 생각에는 그냥 재밌는 이런 것도 있구나, 라고 생각할 것 같고 오히려 독자들이 생각하는 문학, 문학으로서의 텍스트로서는 결국 만족시켜 주지 못한 게 아닌가 싶거든요. 『한국이 싫어서』가 시의적절하긴 하지만 제 느낌으로는 블로그에 아주 잘 쓴 호주 이민기와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강지희 : 사실 방금 이야기하신 부분이 앞에서 계속해서 이야기했던 ‘순문학’과 ‘장르문학’이라는 구별에 대한 문제들과도 연결이 될 수 있는 것 같은데요. 독자들이 과연 문학적인 것으로서 그 책을 감상했는가에 대해서 비평가인 우리가 그런 질문을 의심하듯 던지는 것 자체가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예컨대 독자가 느끼는 문학성이 어디에 있는가는 다 다르겠죠. 지적인 자극일 수도 있고, 섬세한 감정이 묘사되는 데서 오는 기쁨일 수도 있고, 충격적으로 자신이 지니고 있던 고정관념이 깨져 나가는 데서 올 수도 있고요. 지적·미학적·감상적 측면에서 다 다를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상적인 문학성이라는 것을 이미 전제해 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허희 선생님이 적절히 얘기해 주신 것처럼, 시의성이 있는 텍스트가 지니고 있던 엄청난 폭발력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사회 전체가 사실 관계를 중시하는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지만, 실은 매체들을 통해서 너무나 많은 팩트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지금 사람들이 훨씬 갈구하는 것은 기사보다 칼럼에 가까운 명쾌한 주장과 비판인 것 같아요. 구심점이 필요한 거죠. 『한국이 싫어서』 같은 경우, 한국이 살기 힘든 나라가 되어 가고 있는데 이 현상에 대해서 20대 여성을 화자로 내세워서 확실하게 비판적이고 구체적인 의견 표명을 해주었죠. 물론 단순히 시의성에만 기반 한 것은 아니고 작법 자체가 달라지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장강명 작가의 매력은 철저한 취재 방식을 넘어서 사건을 바라보는 명쾌한 비판적 시선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제 이런 식의 대중적 텍스트 그리고 덜 읽히지만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들에 어떤 식으로 접근해 갈 것인가라고 했을 때, 공통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 가능할까 싶어요. 예를 들어 윤이형의 소설을 두고 누가 봐도 이건 SF 소설인데, 자꾸 문단에서 이런저런 말을 돌려 붙인다는 비판을 하기도 하던데요. 그 말에서 저는 굉장히 배타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순문학이든 장르문학이든 누가 내부에서 그 경계를 지키고자 하는 태도를 취했을 때 논의가 협소해질 수밖에 없죠. 윤이형의 동일한 텍스트를 보고 누군가는 SF적인 매력을 읽어낼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정치적으로 읽을 수도 있는 거고, 누군가는 윤리성을 읽어낼 수도 있을 텐데, 그게 하나로 수렴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장이 해체되고 각각의 텍스트와 비평가가 만나는 각개전투의 시대가 열리는 시점이 아닌가 해요. 물론 우리에게 모종의 문학적 공통감각을 확인하고자 하는 열망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걸 자꾸 분산시켜야만 비평이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결국에는 이 모든 것이 비평의 역할에 있다는 서영인 선생님의 말에 저는 많은 공감을 했거든요. 텍스트를 판별하는 데 장르적 구분에 맞춰 읽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정치성, 윤리성, 문학성 등을 가리지 않고 개입시켜 나갈 때 폭발력 있는 비평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에요. 순문학과 장르문학 같은 구분선이야말로 비평이 깨부숴야 할 마지막 장애물이 아닌가 싶어요.


서희원 : 제가 『한국이 싫어서』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것이 최근의 한국 독자들이 요구하는 변화의 어떤 지점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문학성이 떨어진다고 말한 것은 아니구요. 저는 비평가이지만 마치 국가대표 같은 어떤 자부심이나 의무감을 가지고 있진 않습니다. 또한 어떤 섹터나 에콜에 묶여 무언가를 교조적으로 지지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제가 대표하는 세계가 있다면 그것은 제가 읽었던, 살아왔던 세계, 그중에서도 제게 의미를 주고 즐거움을 주었던, 이제는 소멸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지나간 어떤 것입니다. 어떤 비평가 중에는 변화하는 유행에 맞춰 가며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분도 계시지만 저의 관심은 지나간 것, 사라지고 있는 것에 있습니다. 제가 빠른 유행의 속도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그 흐름을 최대한 늦추고, 지연시키고, 그것을 순환하게 하는 것입니다.


박인성 : 두 분 이야기는 제가 듣기엔 그렇게 충돌되지 않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비평가가 서 있는 좌표와 그것들 사이에 교차되는 지점들, 비평가의 자의식이 탄생하는 지점은 아주 예민한 당파성에 연결이 된다, 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를테면 큰 공감이나 가치를 지향하지 않아도 지금 이 시점에서 오히려 자신의 당파성을 볼모로 할 때 더 의미 있는 비평이 나올 수 있겠다는 입장에 기본적으로 동감을 하구요. 그리고 그것이 ‘서희원’ 선생님 말씀처럼 나는 과거의 독자일 수도 있겠다, 라는 일종의 시대착오에 대한 인식을 하나의 입장으로 구성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겠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독서의 방법론이라고 하는 것도 동시대 텍스트에 대하여 시의성을 반드시 좇아 읽어야 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오히려 여러 시대성을 경유하는 상이한 독법을 적용하듯, 비평적 언어가 당파성을 통해 스스로의 메타적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비평의 중요성은 텍스트에 대하여 공감대를 폭넓게 형성해 주거나 보다 상위의 관점을 제공해 주는 해석적 언어라기보다도, 비평가 자신의 첨예한 입장을 감당하면서 텍스트와 직접적으로 교차하는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마 앞서 ‘강지희’ 선생님이 말씀하신 방법의 비평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고요.



그것과 만나(려)는 비평의 자세 혹은 입장은


허 희 : 한국 문학의 영향력이 감소하는 현재 상황에서, 한국 문단 문학 자체를 장르화하거나 혹은 여타 장르를 끌어안는 방식으로 한국 문학의 외연을 넓혀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잖아요. 그러면 과연 우리가 그걸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스스로 질문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서영인 선생님께서는 대중 문학의 대표자로 정유정 작가를 꼽는데 사실은 보다 더 대중적으로 인지도 있는 작가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소재원’이라는 작가는 영화 <터널>의 원작자로 유명합니다. 이외에도 이미 많은 소설을 출간했지요. 문학평론가들은 이 작가를 잘 모르는데 일군의 독자들은 그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시점에서 한국 문학 비평이 가장 넓게 포괄할 수 있는 소설가의 범위는 딱 정유정 작가까지인 거예요. 만약 누군가가 한국 (문단) 문학평론가가 소재원 작가가 쓴 ?나는 텐프로였다?까지 포함시켜 비평을 쓸 수 있느냐 묻는다면, 저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당혹스러워하지 않을까요? 이른바 주요 문예지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문학평론가가 지극히 한정된 텍스트들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반면, 독자들은 훨씬 더 다양한 텍스트를 읽고 있습니다.


강지희 : 어느 정도 동감을 하면서 들었는데요. 저는 이것 역시 우리 안에 ‘비평이란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강한 생각에서 나오는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사실 우리는 특정한 방식으로 비평을 쓰길 요구받고 훈련해 왔죠. 그러니까 최대한 섬세하게 텍스트가 말하고자 하는 결을 읽어내는 방식으로 대부분 비평을 해왔다는 거예요. 그런데 과연 지금 그런 비평 방식이 유효한지 질문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말씀하신 대로 텍스트만 따라가게 되면 대중적으로 읽히고 있는 작품들 같은 경우,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게 노출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다양한 접근이 어려워지거든요. 텍스트를 잘 좇아 읽는 걸로는 모두가 이해한 이야기를 진부하게 반복하는 이상이 나오기가 어렵죠. 하지만 텍스트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른 자신만의 문제의식과 키워드를 갖고 이 작품을 관통해 나가면, 좀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특히나 작품과 동시대 사회의 연결점을 찾아가는 일이 요긴할 것 같아요. 예컨대 아까 말이 나왔던 정유정의 『28』 같은 텍스트에서도 재난소설로서가 아니라, 충분히 제대로 애도되지 못하고 억압되었던 정치가 회귀하는 지점에 주목할 수도 있겠고요. 지금 전 세계를 짓누르는 보수성에 대해서 그 답을 문학 안에서 통시적으로 찾아 나간다면, 1930년대 미국의 하드보일드 소설에서 시작해 지금 한국의 누아르 영화들까지 훑어볼 수도 있겠죠. 우리가 해외 소설에 대한 비평들을 지양해 온 편인데, 여력이 된다면 해외 소설뿐 아니라 라이트노벨과 웹툰 같은 영역에까지 적극적으로 접근해 볼 필요성을 느껴요. 기존의 비평 방식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놓쳤던 텍스트가 많은 것 같습니다. 비평의 대상으로서 텍스트의 적합성을 엄밀하게 따져 왔던 우리의 기준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서영인 : 좀 덧붙이자면, 저는 작년의 ‘신경숙’ 사태 이후로 한국 문학에 대한 회의가 좀 생겼어요. 어떤 계기나 사건이 생각을 전환하는 계기가 될 때가 있잖아요. 아무튼 문학잡지들을 읽으면서 거기에 실리는 비평적 글쓰기가 굉장히 획일화되어 있다는 것을 본 거예요. 그래서 왜 평론가들이 글에 접근하는 방식 자체가 다 비슷할까, 라는 생각을 한 거죠. 서두에 약간의 사회적 이슈라든가 이론들을 이야기하고 2, 3, 4장은 작품들을 하나씩 얘기하고 마지막엔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마무리되는 글들. 그렇게 되면 그 글들은 결국 2, 3, 4장에서의 세목과 1장과 4장 사이의 비약과 공백을 통과해 버리지 않는가 하는 자기반성이죠. 문단 제도에 대한 비판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사실은 우리 글쓰기는 그런 문단의 패턴에 굉장히 잘 적응한 결과가 아닐지 싶기도 하고요. 비평을 하면서 다른 작가들에 대해 어떤 글을 논평할 때에는 새로운 쇄신 같은 것들을 늘 찾아내는 사람들이 사실은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새로움이라는 것들에 대해선 별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작품을 읽는 방법 역시 소위 기존 문단의 틀 안에서 진행되어 온 것은 아닌가.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겠지만, 점검과 반성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기존의 글쓰기 방식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문학 계간지들이 계속 발간된다면 그 안에서는 놀라울 쇄신이 별로 이뤄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제도 내에서는 그 작가들 대상으로 그런 글쓰기들만 이뤄질 거고요. 그러나 어떻게 다르게 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거죠. 여러 문학적 사건들이 계속 터져 나오는 상황에서 그런 사건들이 나에겐 직접적으로 어떻게 연루되고 나의 글쓰기는 어떤 방식으로 여기에 대응할 것인지와 연관된다고 생각합니다.


백지은 : 비평적 자세 혹은 비평적 글쓰기에 대한 비평가 자신들의 모색이 이론적으로 실질적으로 얼마나 긴박한지 느껴집니다. (마침 '비평in문학' 코너는 다음 기획으로 당대의 비평적 글쓰기에 대한 비평가 자신의 이념을 비평문 자체로 실천하는 시도를 모아 볼 계획입니다.) 살짝 정리하면서 질문을 덧붙이겠습니다. "나에게 즐거움과 의미를 주는 어떤 것"에 대한 주석으로서의 비평, 이른바 '애호가'로서의 비평에 대해 말씀해 주셨고, 텍스트가 어떤 대상인가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사회에 혹은 독자에게) 무엇을 하는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따져 봐야 하는 비평에 대해서도 얘기해 주셨습니다. 어느 쪽이든 실상 문학 비평 대상이 되는 영역은 지나치게 좁다는 지적도 해주셨고요. 그렇다면 현재 문학 비평가들은 여전히 폭넓은 대중적 관심사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능력 부족 혹은 의무방기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일까요.


서희원 : 저는 가끔 작가들 사이에서 술을 마시거나 얘기를 들을 때, 너는 비평가니깐 우리들의 글은 의무적으로 다 읽었겠지, 라는 암묵적인 강요를 느낄 때가 있어요. 물론 부지런한 비평가라면 최대한 읽으려고 노력하겠지만, 근데 그럴 순 없잖아요. 대부분 그런 상태에서 원고청탁을 받고 글을 쓴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그다음에 발생하는데 아까 서영인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스타일’의 문제가 그것이죠. 저 역시도 비평 스타일이 너무 천편일률적이고 여기에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분명히 동의합니다. 노드롭 프라이가 말한 아나토미의 글쓰기 스타일을 가진 산문 픽션에 비평도 속한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도 그 실행에서 계속 머뭇거리고 있는 것 같아요. 비평을 누가 읽겠어, 라는 체념도 있는 것 같구요.


백지은 : 제가 여쭙고 싶었던 건, 말하자면 '비평가'를 일종의 '직업'처럼 생각한다면 딜레마로 느낄 것 같은 입장에 관해서였어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겠다'는 소박함 혹은 겸손함에 대해 '그릇되었다'고 비난할 수는 없지만, 혹시 '비평가'를 일종의 직업처럼 생각하여 할당된 의무 같은 게 있다고 상정할 수도 있지 않을지, 또는 비평가는 아무래도 그런 식의 '직업'처럼 여겨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실지 등등, 비평하시는 분들의 생각을 들어 보고 싶었던 거예요.


박인성 : 저도 자연스럽게 반성이 되는데, 무작위 대상에 대한 청탁을 받더라도 대상을 고려하는 와중에 이미 어떤 책들은 제 시야에 보이지 않게끔 정리가 되어버리거나, 상대적으로 근거리에 있는 작가들 라인업을 구성해 온 것 같습니다. 일종의 블러blur 효과가 자연스럽게 발생해 버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기존 비평의 형식적 ‘관성’일 수도 있고 개별적인 ‘취향’일 수도 있지만, 어느 쪽도 정당화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비평적 태도로 환원하여 말하자면, 텍스트 전체를 아우르려 하는 기존의 비평가적 입장이나, 그러한 전체성을 포기하더라도 특정한 자기 영역에 집중하고자 하는 전문가적 입장이나 비슷한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텍스트에 대한 자기 해석을 특권화 하는 메타적 지점을 확보하려 하니까요. 만약 지금 시기에 ‘직업’으로서의 비평가를 자처하고자 한다면 이미 알고 있다고 상정되는 영역을 특권화 하는 것보다, 오히려 자신이 모르는 영역에 위험성을 감수하고 나아가는 과감함에 강조점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허 희 : 문학 비평이 다루는 (대중적) 텍스트의 범위를 우리가 확장해서 봐야 한다고 했을 때, 이것이 공론으로 그치지 않으려면 문학 매체의 실질적 변화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한국의 문예지가 주요 문학 출판사가 아닌 생소한 출판사에서 나온 책까지 다룰 수 있는 너른 안목을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한국 문학의 지형도는 아주 크게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보기에 지금은 많은 문예지가 편리한 혹은 안이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듯합니다. 한정된 문학장 안에만 시야를 두면 되니까, 몇몇 특정 작가만 주목하면 되니까, 신춘문예나 주요 문예지의 신인들만 관심을 기울이고 거기에서 가능성 있다고 판단되는 작가들을 선별하면 되니까, 하는 인식이 암묵적으로 깔려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독자들의 관심은 그런 좁은 범주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한국) 문학평론가’라는 타이틀을 단 사람이 협소한 문학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면, 과연 그는 평론가 앞에 붙여진 ‘(한국) 문학’이라는 명명을 제대로 감당해 내고 있는 것일까요?


서영인 : 기존 글쓰기에 대한 얘길 했던 이유는 1/n로서 겸손해질 수 없는 환경과 제도를 누리며 살아왔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 문학 비평의 입지가요. 그리고 우리의 의도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포괄할 수 없는 문화적 대상들을, 우리가 그 제도를 누리는 사이에, 거기에 말뚝을 박는 일들을 계속해서 해왔다는 생각. 아까 ‘노태훈’ 선생님이 순문학도 하나의 장르로, 라고 얘기했을 때, 그렇게 됐을 땐 정신 승리 내지는 직무유기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씀드렸던 게, 저는 제가 그 제도 속에서 우리가 살아왔던 시간과 경험들에 대해 더 사유해야 할 의무? 너무 무거운가요? 그런 것들이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과연 이런 비평적 글쓰기로 우리가 무엇을 하려는 걸까, 하는 기존의 제도에 대한 해체의 의지? 질문? 이런 것들이 항상 동반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백지은 : 제도의 권력으로 틀 지워진 문학을 누려 온 일원으로서, 라는 말씀에 공감하면서, 이 땅에서 태어나 살면서 언어 문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자동적으로 새겨진 어떤 것들이 제도권의 안과 밖으로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는다는 답답함이 새삼 느껴집니다. 문학 제도는 문학 자신의 외부가 아니라 문학 자신의 일부이므로 제도에 대한 순응도 비판도 전적으로 일방적일 수는 없다는 점 때문에도, 비평가의 입장은 언제나 불편함과 함께 있는 게 당연한 것이겠지요.



문학과 함께 세상에서 말하기/글쓰기


백지은 : 지금 우리는, 문학 비평이 문학 자신의 체계화나 이론 정립을 목적으로 하는 메타적 글쓰기에 한정될 때의 답답함이랄까, 무용성 혹은 효과 없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종다양한 문학 텍스트들 중 너무 적은 일부만 문학 비평의 관심이 된다는 측면에서 비평의 한정성을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문학 텍스트에 대한 메타성을 끝내 저버리지 않으려는 측면, 즉 비평의 메타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평(문)을 한(/쓴)다는 것, 또는 읽고 쓰는 일이라는 것이 '문학'이라는 영역에 복무하고자 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은 앞에서 문학적인 것과 대중적인 것의 이원성 불가 문제를 언급하면서도 나왔던 것일 텐데요. 《문장 웹진》에 가장 최근 업데이트된 허희 선생님의 [더럽고 흉악한 문학(적 삶)]이란 글에서, 한국 문학이 놓인 이 사회, 이 현실의 병폐들,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그것들 안에서 글을 쓰고 읽는 일에 대하여 적실하게 논의가 된 것 같습니다.


허 희 : 원래는 제가 블로그에 썼던 단상에서 출발한 글입니다. ‘한국 문학에 불만 있다?’라는 기획 하에 원고를 쓰면서, 지금 공론화된 문학계 사건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간 우리가 가졌던 문학에 대한 관념이 어쩌면 나이브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작가가 좋은 작품을 발표하고, 비평가가 열심히 그것을 찾아 읽고 장점을 위주로 빛나게 평한다면, 한국 문학은 발전할 것이라는 단순한 인식 말이지요. 저는 그렇게 된 원인 중 하나로, 2008년 재점화 된 문학과 정치 담론이 예상보다 너무 간단하게 ‘감각적인 것의 분배’로 매듭지어진 데 있지 않나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제와 돌이켜볼 때 문학장에 속한 사람들이 랑시에르 철학에 너무 쉽게 기울었던 것 같아요. 문학과 정치 테제는 외부(정치적 상황)를 향한 발언임과 동시에 내부(문학장)로 침투하는 운동이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불거진 일련의 문제는 문학을 통한 ‘감각적인 것의 분배’를 문인들 스스로가 부인한 결과처럼 보여요.


강지희 : 허희 선생님의 글이 화제가 되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지금 우리가 상당히 비극적이고 절박한 사태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해요. 평론가로서 발언하기도 쉽지 않고요. 그간 예술의 자율성에 대해 어느 정도 공통된 전제가 있는 상태에서 비평가들이 미학적으로 작품을 평가하는 방향으로 개입을 해왔잖아요. 벤야민 말대로 비평은 ‘적정거리’의 문제이기에, 하나의 관점을 취하는 것이 여전히 가능한 세계가 비평의 터전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이런 비평적인 언사들이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로 치부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문학의 자율성 개념이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이죠. 구체적인 조치들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나왔어요. 이에 대해서 한 출판사는 제기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점검하는 좌담을 가질 예정이라고 밝혔다가 큰 반발에 부딪치기도 했죠. 지금은 이 문제를 담론화 시키기에 앞서 문학을 한다는 이들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성에 대한 공통감각을 확인해야 될 필요성이 너무 절박한 거예요. 그리고 발화하는 목소리들이 다양해져야 하고요. 그동안에 지면을 통해 충분히 말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억압되어 왔던 목소리들이 더 많이 드러나야 할 시점이죠.


백지은 : 허희 선생님 글의 결론 부분에 '문학을 한다는 건 자기가 지향하는 문학적 삶을 위한 노력이다.'라고 쓰신 것이 생각나는데, '내가 읽고 쓰는 노력이 곧 내가 지향하는 삶을 위한 것'이라고 할 때, 내가 지향하는 삶에 대한 욕구가 내가 읽고 쓰는 노력에 영향을 끼치는 건 당연하잖아요. '더럽고 추악한' 것들을 미워하고 없애려는 욕구는 내가 지향하는 삶을 위한 것이고, 거기에 '읽고 쓰는 일'이 자연스럽게 작용하지요. 저는 이것이 문학의 혹은 예술의 '자율성'을 배반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주변의 모든 것을 배제한 상태의 단독성이 자율성인 게 아니라, 쉽게 말하자면 타율성을 상상해서 그와는 반대되는 양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자율성 같은 것이라면, 작가와 작품의 관계 혹은 작가의 도덕성과 작품의 질적 성취 문제 등을 논의하는 데에는 오히려 예술의 자율성 개념을 통해야지만 문제를 피상적으로 해결하고 마는 우를 피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강지희 : 맞아요. ‘자율성’을 좁은 개념에서 사고하는 것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재해석할 필요성이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저는 ‘#문단_내_성폭력’ 운동이 시작되던 초기에, 저 역시 문제가 된 작가들로부터 진정성 있는 반성의 목소리를 듣길 원하면서도 절판처럼 작가들에게 창작활동의 제약이 가해지는 여러 요구들에 있어서는 불편을 느꼈어요. 개인적으로 혹은 조직적으로 불매운동이 있을 수 있고, 또 있어야만 하지만, 출판사라는 시스템이 창작에 제약을 가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제가 우려하는 방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자정작용이 일어나고 있어요. 문단 안에서 자체적으로 ‘페미라이터’가 발족되었고, <문학출판계 성폭력·위계 폭력 재발을 막기 위한 작가 서약>이 제안되었죠. 지금은 검찰 송치된 모 시인의 강제추행의 기소를 탄원하는 탄원서를 받고 있는 중이에요. 문단 안에서 발생하는 비가시적 권력 관계의 남용을 효과적으로 제약하는 데 앞으로도 더 많은 운동과 참여가 가능할 것 같아요. 익명으로 자유롭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SNS 덕분에 이 문제가 수면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면, 이제 그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인프라가 구축되고 있는 거죠.


서영인 : 뻔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남성 중심적이거나 어른 중심적인 문화가 한국 사회에 계속 있어 왔다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매우 희박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그런 일상적 문제의식들이 문학적인 문제의식으로 충분히 침투했는가도 생각해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학과 삶을 분리시키는 경향도 함께 생각해 보자면, 이번에 문제가 된 작가들의 경우에도 그 작품에서 드러난 가부장성과 여성 혐오, 폄하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했던 평론을 별로 읽은 기억이 없어요. 없지 않았지만 그 문제가 의제화 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 행위란 결국 작품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지 않을까. 작품과 작가를 동일시할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생각을 해요. 어떤 일상적 태도와 삶의 원칙 같은 것을 한사코 작품과 분리해 왔던 것도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얘기했다시피 텍스트의 결을 따라 읽다 보면 그 내부의 합리성 속에서 이야기를 납득하기 때문에 문제에 대한 접근이 한정되죠. 제가 비평이라는 것이 텍스트 바깥으로 자꾸만 나올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도 이와 연관이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우리가 우리 삶에서 불편해하는 혹은 불쾌하게 느끼는 수많은 정치적 장면들을 우리가 작품에 계속해서 개입시켜 왔던가 하는 질문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문학 특정의 정치성이라는 것은 일상의 민주주의, 인권, 사회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감각들을 문학적 언어로 굉장히 세밀하고 치밀하게 침투시켜야 하는 문제였을 텐데 그게 제대로 안 된 것이 이런 식으로 드러난다고 봅니다. ‘허희’ 선생님 말씀처럼 문학과 정치의 문제를 문학만의 문제로 굉장히 안전하게 해소해 버렸다고 볼 수도 있겠죠. 예컨대 ‘진은영’ 씨의 질문을 우리의 현실 속에 다시 던졌을 때, ‘감각의 재분배’라는 문제를 문학 밖에서도 같이 물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려운 문제이긴 합니다만. 더 많이, 최선을 다해 그랬어야 했다는 생각들을 합니다. 최근 일련의 사태들을 보면서요. 그래서 문학이라는 것이 그렇게 약자에 대해 폭력을 휘두르고 추악한 짓을 해도 좋을 면죄부가 된다면 저는 문학은 없어지는 게 낫겠다, 라는 생각도 했거든요. 문학을 없애자는 결론이 아니라, 문학에 대해 첨예하게 정치적인 적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지향하는 삶을 위한 쓰기와 읽기라면


박인성 : 저 역시 숙고하는 과정인데 개인적 입장에 한정하여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저 자신도 텍스트 중심주의를 통한 문학 읽기를 오랫동안 훈련받아 왔고 그러한 틀 안에서 텍스트를 접해 온 셈입니다. 따라서 보통 ‘문학’은 곧 텍스트에 한정된 것이었고 비평적 평가를 하는 경우에도 텍스트 혹은 내포 작가에 대해 평가를 하지, 실제 작가의 인간적 존재에 대해 크게 고민한 바가 없었거든요. 그러한 자기 자신의 비평적 관점에 대해 반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 최근 일련의 사건들이었고. 다소 기계적으로 텍스트로부터 사람을 소외시켜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소 추상적이지만 작품과 사람 사이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작동하고 있는 미학적 태도를 통해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감각적인 것의 분할과 정치성의 문제는 미학 안의 불편함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의 관점이기도 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눈에 보이는 매력적인 정합성에 구애받게 되면 분명 완결성의 장막 아래 불편한 것들을 보지 않고 눈을 감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온전히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 텍스트와 작가 사이의 매끄러운 분열을 강조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러한 분열성을 포괄하는 거친 연결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텍스트가 작가의 의식 혹은 무의식을 직접 반영하지는 않죠. 오히려 둘 사이의 연결성을 강조해야 하는 지점은 텍스트와 작가가 직접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영역에서 형식적으로 공유하는 지점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텍스트와 작가가 일치하지 않음에도, 세계를 재현하는 감각적 태도의 핵심은 분명 공유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과 작품 사이에 균형 잡힌 타협점은 없으며, 어느 쪽에서 드러나는 증상적 표현물도 다른 쪽에 전이 가능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저도 남성 문인으로서 수행해 온 행위가 저의 비평적 행위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파편적으로나마 경험을 통해 자각하는 편이고요. 실제로 주변의 친한 지인의 직접적인 비판에 직면한 적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나라는 한 인간에 대한 자기규정을 형성하는 미학적 정합성을 넘어서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불편함의 영역이 곧 저가 비평 행위 내부에서도 완전히 극복되지 않고 남아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희원 : “예술가는 범죄자와 미치광이의 형제다.” 토마스 만이 ?파우스트 박사?에서 쓴 말인데 이 말은 아직도 유효한 것 같아요. 많은 독자들은 자신들의 윤리적·사회적 감각으로 계산할 수 없는 문학적 형상들을 통해 삶의 진실들을 다수 발견해 왔죠. 윤리가 문학의 위계와 존재를 결정하는 단 하나의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하면 문학이 가진 저항의 힘은 거의 사라질 수밖에 없어요. 물론 작중인물이 아니라 작가의 문제로 포커스를 옮겨가면 이 문제는 복잡해질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어느 정도는 독자의 자율성을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요. 출판사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한다면, 어느 순간에는 국가도 그 역할을 할 수 있겠죠. 마치 전자발찌를 어떤 사람의 발목에 채우는 것처럼 어떤 텍스트에 출판 및 판매 금지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동안 우리가 지지했던 창작과 출판, 독서의 자율성이라는 개념과 충돌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노태훈 : 그런 생각도 들더라구요. 어쨌든 비평 활동을 하는 비평가로서는 작품을 읽고 작품에 대해 말을 할 수밖에 없잖아요. 작품 속에 이를테면 여성 혐오라든가 범죄라든가 이런 것들이 노출되고 있을 때 그걸 어떻게든 작품 속에서 이해해 보려 한 게 아닌가. 이걸 사실은 작가들을 붙잡고 물었어야 했는데, 왜 이렇게 썼는지를 질문을 던져 보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때에는 객관적으로 접근을 많이 했어야 했는데 그걸 그냥 삭제하고 의미 없는 지점이라 지레짐작하고 넘어가 버린 적이 많았던 것 같아요. 물론 작가를 직접 붙잡고 작품에 관해 묻는다는 의미는 아니고 비평적으로 서사의 문법 속에서 그러한 것들을 물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자기반성을 좀 하자면 결국은 비평이라는 게 비판을 해야 하는 작품이나 작가에 대해 그러한 입장을 끝까지 견지할 필요가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청탁을 받아 쓰는 글은 작품을 해설하는 측면이 크고 아무래도 지지하는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러다 보니 결국은 비판이라는 지점으로 돌아오는 거 같아요. 좀 더 고민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앞으로는 적극적으로 따져 물어야겠다는 생각을 또 합니다. 예를 들면 최근에 제가 남성 작가의 판타지가 드러난 작품들을 꽤 많이 읽었는데 지금 문단에 드러난 문제들도 습작생과 유명 작가들의 관계 속에 일어나는 폭력적인 일들인데 실제 그런 것을 소설로 써놓은 게 있어요. 처음 읽었을 때 이걸 왜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위 뮤즈로서의 여성을 상정해 놓고 남성-작가 판타지를 써내려간 소설인 것 같은데 지금 이 소설을 쓴 이유가 뭘까 하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소설의 의미에 대해 사실은 집요하게 한 번 물었어야 했는데, 이게 뭐야 하고 넘어가 버리는 식의 독법이 많지 않았나 반성하게 되더라구요.


서영인 : 담론이라는 건 항상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아까 서희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자정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진행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다음 국면에서는 훨씬 생산적인 방식으로 진행될 수 있게 하는 것도 비평이 나아지는 방식이랄까, 혹은 비평이 좀 더 쓸 만해지는 방식 중 하나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페미니즘의 문제가 나왔을 때, 저 역시 작품을 젠더적으로 열심히 읽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문제들이 나왔을 때 그런 부분들에 대해선 이야기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 그리고 담론이라는 것이 그렇듯, 영원하게 객관적으로 훌륭한 문학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방식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읽기들을 재발견할 수 있진 않을까 싶습니다.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지금은 다소 폭로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면도 있기는 하지만, 그런 폭로들이 어떤 식으로 다시 자정이 되고 그것이 새로운 문학의 읽기의 한 방법으로 혹은 자의식들로 진행되고 있는가, 혹은 될 수 있을까 하는 것들 역시 저는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봅니다.


백지은 : 어떤 담화의 읽기와 동시에 쓰기에도 해당되는 말씀들을 해주시는데, 가령 어떤 서사적 재현이 단순한 현실의 모방이나 또는 창작자의 판타지를 모사한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을 읽는 이들은 그것을 재현이라고 볼 수도 있고 그로부터 (탈)승화의 경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소설에 범죄자가 나온다고 무조건 처벌해야 한다고 여기진 않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문학이라는 글쓰기는 문학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세상 혹은 삶 혹은 판타지를 재현하거나 탈승화 하는 작업이 아닌 것 같아요. 세상, 삶, 판타지 같은 게 먼저 있어서 그것을 거울처럼 재현하는 게 문학작품이라고 생각할 순 없어요. 경험적으론 오히려 문학작품이라는 어떤 재현/표상들을 세상, 삶, 판타지가 따라간다고 느낀 적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요컨대 텍스트(들)의 재현이 달라지면 현실도 변해요.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만요. 또, 재현을 읽는 눈이 달라져야 현실도, 현실을 보는 눈도 달라지겠지요. 그러니깐 문학이 현실을 바꾸는 건 결국 현실을 바꾸기를 주장하는 말로써 되는 게 아니라, 문학을, 문학적 재현을 바꿔서 세상을 바꾸는 거잖아요. 그러니 가령, 현실은 여전히 가부장제의 억압에 허덕이는 여성들이 더 다수라 해도 그렇지 않은 여성의 삶을 재현하는 편이 문학이 현실에 더 깊이 개입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할 순 없을까요. '내가 지향하는 삶의 모습'을 재현하려는 의지 혹은 그런 재현을 보고 싶은 마음은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의 첫걸음이 아닐까요?



지금 요청하는/받은 페미니즘


박인성 : 현재 가장 첨예한 문제는 일련의 현상들을 더욱 정확하게 적대로서 구성하고, 각자의 입장에서 해석적 개입을 수행하는 데 있다고 생각해요. 같은 동종업계의 문인이라고 해서 곧장 연대하거나 동료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첨예한 적대 지점 속에서 어떠한 공통감각을 공유할 수 있는지를 끈질기게 묻는 것 말이죠. 우선은 그동안 억눌린 목소리, 따라서 이제는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종류의 목소리들이 다양하게 폭로되어 나오는 시간이 필요한 거고. 그러한 날선 목소리들을 제대로 받아내야 하는 것도 비평적 역할이라고 강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텍스트의 재현에 대해서도 앞서 이야기가 나왔지만, 저는 무엇을 재현하느냐도 문제이지만 재현 방식 자체의 타당함을 질문하는 과정이 비평 안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수행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최근작인 『82년생 김지영』처럼 소설적 재현의 수법들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배제된 소설은 현실 속에서 여성의 삶에 가해지는 부조리를 보다 직접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소설보다 소설 같은 삶’을 직접 표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재현보다도 직접적인 ‘지금-여기’의 실제 세계에 대한 환기를 수행하는 셈인데요. 이러한 소설을 읽는 데 있어서 비평의 특권적인 자리란 찾기 어려우며, 어디까지나 작품에 대한 제한적이지만 치밀한 관점, 그러한 관점에 동반되는 감각적 차원, 이슈, 키워드와 맥락들을 다양하게 경유함으로써 해석적 역동성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최근 일련의 적대를 재현하는 텍스트, 그리고 그러한 텍스트에 내포된 읽기와 쓰기의 문제는 작가 단독으로 수행되는 것이라기보다 그 실천의 측면에서 다중적이며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는 것 같아요. 따라서 현실 층위의 맥락을 고려하면서 쓰기와 읽기의 다양한 실천들을 포괄해야 제대로 읽히는 측면들이 있는 셈이죠.


허 희 : 만약 페미니즘 진영에서 미러링이라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면 사람들 ― 특히 자신은 여성을 억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이 이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미러링의 한계에 대한 지적도 나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야기한 가장 큰 효과는 ‘나는 평범하다’고 여기는 남자들을 논쟁의 장으로 끌어낸 것이 아닌가 싶어요. 이제는 변화의 계기를 유효하게 파급시켜 나가야겠지요. 문학에서도 할 일이 많습니다. 가령 ?종의 기원?에서 주인공 유진이 희생자로 삼는 대상은 밤길에 혼자 걷는 여성인데 원래 여성은 힘이 약하니까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개연성 자체를 왜 문학은 의심하지 않는 것일까요? 저는 이제라도 그런 점을 비평적으로 따져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그냥 무디게 넘어가는 부분이 많을수록 한국 문학에서 비평의 의미도 점점 상실되겠지요.


백지은 : 두 분 다 지금 한국 사회의 상황이나 현재 페미니즘의 국면을 볼 때, 여성들의 불편과 적대를 드러내는 편이 더 긴박한 요청이라는 말씀이네요. 물론 그것은 문학을 읽는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창작자들의 현실 인식 면에서도 필요하다고 보시는 것 같고요.


허 희 : 네. 작품으로 예를 들면, 《문장 웹진》 2016년 8월에 발표한 정세랑 작가의 단편소설 「웨딩드레스 44」도 거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 남성 작가는 거의 생각도 못 했던, 남성 독자는 거의 생각도 안 했던 ‘불편함’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것을 조명하고 해명하려는 노력이 문학의 중심부 안으로 들어올 때, 문인을 포함한 문학(장)도 조금씩 바뀌어 갈 수 있지 않을까요.


강지희 : 저는 한편으로 지금 나온 얘기들이 이전에도 문학장 안에서 충실하게 수행되고 있지 않았나 싶어요. 굉장히 많은 여성 평론가들이 1990년에 윤대녕 소설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추상화된 여성 캐릭터에 대해, 또 2000년대에는 김훈 소설에 나오는 여성들이 여전히 창녀 아니면 성녀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않는 답답함을 이야기해 왔고, 박민규의 특정 소설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가부장주의도 비판에서 예외가 아니었어요. 몇몇 작가로 범박하게 예를 들기는 했지만, 이런 여성주의에 입각한 비평 작업들이 적지 않았죠. 오히려 문제는 문학 비평사에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우리는 문학사를 작품들로만이 아니라 비평들로도 다시 회고하잖아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어쩌면 우리가 페미니즘 비평들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누락시켜 버렸던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어요. 우리 안에 문학을 여성주의적으로 바라보는 프리즘을 어느 순간부터 놓친 거죠. 그런 시각이 잘 보이지 않게 된 것이 2000년대 중반부터가 아니었나 싶어요. 1990년대만 해도 중요하고 긴요하게 자리 잡고 있던 페미니즘이라는 학문이 아카데미에서 밀려나면서, 문학장 속에서도 이런 시각이 갖는 지분이 줄어들었어요. 그사이 여성 소설가의 비중이 남성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아진 것도 비평가들이 굳이 페미니즘적 비평 방식을 고수하지 않는 데 영향을 미쳤을 거고요. 하지만 우리가 지금 이런 여성 혐오 문제를 처음 자각하고 시작하는 작업이 아니라는 걸, 여기에 이미 많은 역사와 전통을 쌓아 왔음을 인식하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그리고 이걸 복원해 가야죠. 타 문화 장르들과 비교했을 때 문학장에서 상대적으로 여성에 대한 재현이 온건한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거기에는 페미니즘 비평이 제 몫을 해온 바가 있다고 생각해요.


박인성 : 최근에 페미니즘 이슈들에 부응하고자 했을 때, 거기에 작동하는 여러 현상 가운데 부분적으로나마 리셋 증후군에 대한 문제적인 지점도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현재 논의되는 측면의 강조를 위해서 과거와의 단절을 구성하기 위하여 세대론을 통해서 선을 긋고, 적대적인 포지셔닝을 수행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이겠죠. 물론 그러한 과정을 지적으로 논리화하며 실천적으로 수행하는 과감성이 필요한데 말씀하신 부분처럼 다소의 의도적 비약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전선의 선명함을 통해 눈앞에 놓인 적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강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이미 지나갔음에도 여전히 우리 시대와 공존하는 과거의 폐허를 정확하게 환기하려는 작업은 병행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를 단절적으로 구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행 작업들의 역사적 지층을 섬세히 복원하려는 시도가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요. 그렇기에 문학사를 다시 쓰는 과정 역시 한국 문학사를 일종의 여혐 문학사로 다시 쓰는 것만이 정답은 아닐 겁니다. 오히려 한국 문학사 안에서 제대로 복원되지 못하고 어딘가에 묻혀 있거나, 이미 언급되었음에도 지금은 소외된 부분의 목소리들을 복원하는 작업들에는 보다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봐요. 비평가의 과업 역시 기존의 관점을 달리하여 역사 자체를 재기술하는 역사가로서의 태도가 아니라, 여전히 보이지 않는 지층 내부의 유물을 발굴하는 고고학자의 역할도 강조해야 한다고 봅니다. 어떤 종류의 논리적 구성을 통해서 유의미한 것들을 시대성의 형태로 추출하려는 시도들은 계속 있어 온 데 반해서, 오히려 시대성의 전면에 포괄하기 어려운 다양한 목소리들은 여전히 강조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오히려 시대착오적인 방법론들을 계속해서 대입시켜 나가면서 나아갈 필요가 있는 셈이죠.


허 희 : ?릿터? 2호(2016년 10/11월)에서 ‘페미니즘’을 특집으로 다뤘는데 본인을 "시니어 페미니스트"라고 표현하는 김현미 선생님이 이런 이야기를 썼습니다. "일견 보복을 통한 조롱으로 시작했던 메갈리아 페미니즘 운동은 거리의 시위로, 다양한 조직 운동으로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고요. 기존 페미니즘 연구자―활동가가 느끼는 현재의 페미니즘은 예전과는 분명 다르다는 것입니다. 김현미 선생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페미니즘의 어젠다는 이제 단일하지도 않고, 동시에 집단적 역량을 구성해 낼 만큼 동질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지도 않다." 저는 이 말에 동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롭게 써나가야 할 페미니즘 문학(비평)은 과거와 ‘단속(斷續)’하는 지점들을 아주 정밀하게 포착해야 할 것 같아요.


강지희 : 음, 지금 뭔가 제 발언이 다소 거칠게 요약이 되고 또 오해되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저는 우리가 어떤 문학 비평이 새로 시도되어야 하는가의 고민 속에서 그간 페미니즘 비평의 역사와 전통이 있어 왔다는 말씀을 드린 거죠. 그런데 지금 말씀을 꺼내신 부분은 여성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사회현상과 페미니즘이라는 학문이 어떻게 만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인 것 같아요. 예컨대 지난여름 이화여대에서 기존의 운동권과는 다른 새로운 투쟁 방식들을 보여주었을 때, 그것이 기존 방식과 다르면서도 역동성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현실에서 효력을 발휘했잖아요. 이런 현상들은 아카데미 안의 페미니즘으로 다 읽어낼 수 없는 새로운 문제였던 거죠. 당연히 페미니즘이라는 학문은 이런 새로운 세대가 만들어내는 현상들과 더불어 계속 갱신되어야 해요. 제 말은 전통을 고수하자는 것이 아니었고, 우리에게 지속해 온 투쟁의 역사가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앞으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데도 큰 힘이 될 거라는 뜻이었습니다.


백지은 : 제가 정리해 볼게요. 가령 올해 『채식주의자』가 재조명되자 한 남성 평론가가 "이 작품을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읽어 보면 좋을 텐데, 난 그런 걸 본 적이 없다."라고 말씀하셔서 크게 놀란 적이 있습니다. 강지희 선생님 말씀은 이와 관련 있는 듯해요. 그동안 실은 끊임없이 있어 왔던 여성학자, 여성 독자들의 목소리, 혹은 페미니즘에 입각한 수많은 의견과 주장들이 이토록 안 들렸던 거구나, 하는 한탄의 깨달음도 요즘의 이 페미니즘 물결 속에서 새삼 분명해졌어요. 페미니즘의 역사에 비추어 이 시대의 페미니즘은 확실히 이전과 다른 환경, 다른 문제에 대한 인식으로 불거진 것이 맞을 것입니다. 현재는 동반자로서의 남녀가 서로 이해하고 동료가 되는 결론을 먼저 전제하기보다는 현 단계에서 돌출될 수밖에 없는 갈등과 적대에 눈감지 않으려는 의지를 더 존중하려 한다는 점에서 새롭게 실천되는 페미니즘의 국면으로 보입니다.


강지희 : 말씀하신 대로 빠른 이해와 통합이 아닌, 적대를 직시하려는 의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조금 더 덧붙이자면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생물학적 성별에 밀착한 논의방식을 의식적으로 조금씩 틀어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제를 좀 더 복잡하게 볼 필요가 있어요. 예컨대 정말 어려운 것은 내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여성 혐오에 대해 인식하고 벗어나는 것이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식에서도 단순히 남성과 여성의 비율을 똑같이 맞추는 식으로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다른 분야나 조직과는 다르게 문학장 안에서 젠더가 작동하는 방식은 훨씬 민감한 것 같아요.


박인성 : 남성들이 불편함에 놓여 있는 이 상황들에 대해 그걸 어떻게 해소하려고 하는지, 한 가지 태도를 언급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저는 주로 남성 사이트 눈팅을 많이 하는데, 최근 지속적인 피로감의 토로와 함께 한 가지 신경증적 태도가 형성되어 있음을 확인합니다. 바로 내부적인 긴장이 형성되는 적대의 지점들을 자꾸 다변화함으로써 연성화 시키려는 경향이죠. 이를테면 왜 현 상황에서 남녀의 문제만을 강조하여 따지고 드느냐. 국가 전체가 헬조선이고, 시국이 우선하며, 여전히 본질적으로 계급이 문제인데…… 왜 하필 남녀 문제가 우선하는지를 질문하는 방식으로 첨예한 적대를 다른 모든 적대의 보편화로 연성화 하려는 태도입니다. 따라서 적대의 우선순위에 대한 상징적 질서를 보다 즉각적이며 실재적인 갈등으로 환원하는 전략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마찬가지로 문학장 내부에서도 보다 미분화된 갈등을 구체화하는 시도들 역시 기존의 문학 텍스트와 그것을 위한 공식 지면만이 아니라 즉각적인 발언의 장에서 실시간으로 수행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더욱 중요한 발화의 현장성은 트위터를 비롯한 비공식의 지면이며, 광범위한 대자보의 공간일 수도 있는 셈이죠.


백지은 : 페미니즘의 현재적 국면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만 문학적 재현에 대해서든 문단 내 성폭력, 권력 등의 문제에 대해서든 보다 예리하게 인식하고 정당하게 행동할 수 있다는 말씀들을 해주셨습니다. 좀 더 실질적으로 필요한 이야기들이 더 나와야 할 터인데, 아쉽게도 오늘의 이야기는 이쯤에서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좌담은 2016년 현재 한국 문학의 상황 중 일부에 해당할 좁고 얕은 이야기들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이 시대 문학의 가치와 효용성의 상관관계, 거기에 개입하는 비평가의 입장, 바로 지금 여기의 문학(적 삶)을 적실하게 드러내는 페미니즘의 현황 등에 대해 문학 비평가로서 의견을 표명하신 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눈앞이 환해지는 결론을 제시할 수는 없는 논의들이었지만, 여러 말씀들을 함께 나누는 동안 현재 한국 문학에 대한 어떤 실망들이 조금 희미해지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선생님들 모두께 이 대화를 마무리하는 말씀을 듣는 것으로 좌담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끝내며: 다시 배워나가는 운동이 되기를


강지희 : 저에게는 작년부터 있어 온 여러 사태들이 문학을 둘러싼 프레임이 재구성되는 과정처럼 보여요. 언젠가부터 사람들에게 한국 문학장이 도덕적인 순수성과 진정성은 있지만 관념적인 성향을 가진 답답한 곳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아 왔던 것 같아요. 특히나 비평들에서 실천이 수반되지 않는 과잉된 정치적인 수사를 읽어 왔던 것 같고요. 이제 우리의 가장 깊은 신념을 제대로 표현하는 법을 새롭게 배워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말했던 것처럼 문학성이라는 개념, 자율성이라는 개념들도 다시 재구성되어야 하겠죠. 문학장 안에서 기득권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면 내려놓아야 되겠고요. 보수화되어 가는 세계 속에서 문학이 지키고자 하는 것들, 당장에는 비실용적으로 보이더라도 절차적 합리성과 인간성 같은 가치들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라기에 이 변화의 운동들에 함께하고 싶습니다.


서영인 : 대안도 없으면서 불만만 토로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여러분들 말씀을 들으면서 각자 자기 방식으로 지금의 문학에 대한 어떤 쇄신을 고민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제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들도 많아서 반성했고요. 비평이 좀 더 세속적이고, 일상적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생각이나 주장에 그치지 않고 비평적 글쓰기의 방식으로 전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요즘 제가 하는 생각입니다. 《문장 웹진》의 좋은 기획을 통해 더 많은 이야기와 쓰기의 방법들이 제안되기를 바랍니다.


허 희 : ‘한국 문학에 불만 있다?’라는 특집 기획의 필자로 참여하면서, 새삼 한국 문학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이번 좌담을 통해서는 그런 여러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었고요. 앞으로는 제가 쓴 글과 한 말에 대한 ‘실천적 책임’을 다해야겠지요. 그렇게 하도록 애쓰겠습니다.


노태훈 : 오늘 여러 선생님들의 말씀을 듣고 보니 좀 더 저의 의견을 정리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우선 들었고요. 곱씹어 볼 만한 지점이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간단히 마무리를 하자면, 저는 우리가 문학적이라거나 문학성에 관해 말할 때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한번 역설적으로 순문학의 게토화를 통해 고민해 보자는 것이었고요. 결국 문학의 문제는 텍스트의 질적 차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오늘 제기된 여러 문제 중 문학장의 작동 방식은 충분히 개선 가능하다고 봐요. 특히 페미니즘의 바람을 타고 불거져 나오는 문단의 갖은 차별적·폭력적 문제들은 제도를 정비하고 규율을 만들고 지속적으로 자정 노력을 해나간다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서희원 : 오늘 좌담을 통해 여러 가지 생각들을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최근 시국과 문단 내의 일 때문에 ‘문학’에 대한 사유가 거의 정지 상태였습니다. 무엇이 세계인지, 세계관이란 무엇인지, 문학의 의미는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운 상태였습니다. 오늘 대화를 통해 생각할 것들을 많이 얻었습니다.


박인성 : 오늘 좌담에서 저 같은 경우, 할 말을 미리 준비해 왔다기보다는 굉장히 무방비한 상태에서 참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발언 자체가 무책임해 보일 수도 있지만, 거꾸로 말하자면 어떤 방식으로도 최근 문학장 내부에서 온전히 자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거리감을 통해서 특정 이슈에 대하여 발언을 수행할 수 있는 특권적인 지점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서서 제가 계속 강조해 온 것처럼, 오히려 비평가들 역시 보다 맨몸으로 위험에 노출된 채로 비척거리면서 나아갈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물론 보다 섬세하고 구체적인 논의를 수행하기 위해서 공식화된 지면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실제로 만나서 입장의 차이를 확인하고 토론 형식으로 구체화해 보는 과정은 점점 더 중요해질 겁니다. 지금까지 느슨하게 존재해 온 동료 의식, 더 신랄하게 말하자면 한없이 얄팍했던 동업자 의식으로부터 탈피해 서로의 사이에 놓인 구체적인 차이를 확인하고, 더 나아가서는 극복되지 않는 불화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장소가 다양하게 확보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지금까지는 불화라고 부를 수조차 없던 일련의 문학에 대한 입장들 사이의 안정된 구도와 타협적인 태도들 사이를 더욱 긴장시킬 수 있도록, 다소 편협하게 자기주장을 고집하는 목소리도 커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편협함을 무시하거나 응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여러 형식의 편협함과 교차시켜 보는 것이며 문학이 놓인 장소를 역동적으로 재구성해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아마도 비평가로서의 제 작업의 방향도 앞으로 점차 그러한 자유로운 방향성을 가지게 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제 개인적인 ‘덕질’을 포괄하는 하이브리드한 작업에 대한 의지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잘 될지 모르겠지만요.(웃음)


백지은 : 머릿속도 마음속도 어지러운 계절이라 비평적 논의가 정갈하게 이루어지기 어려울까 걱정했는데, 역시 우리는 모여서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몸에 맞는 사람들인 모양입니다. 긴 시간 따분한 기색 하나 없이 집중해 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의 이야기들이, 어떤 사안의 핵심을 명중해서 바로 밝은 미래를 약속할 길에 이르게 하는 역할은 못 하겠지만, 계속해서 읽고 쓰는 길에 있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에 사소하지만은 않은 보탬이 되리라 기대합니다.




《문장웹진 2016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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