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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번 시 쓰기가 재밌다는, 그런 친구들

  • 작성일 2016-10-01
  • 조회수 2,918

[비평 in 문학]


비평 기획
- 한국 문학에 불만 있다?

2016년 한국 문학은 어느 위치에 자리하고 있을까요. 문학을 둘러싼 최근의 담론들 그리고 2010년대 중반 현재의 한국 사회 문화의 종합적 환경을 고려한다면 한국 문학은 어떻게 생각되고 이야기될 수 있을까요. 그보다 먼저, 현재의 복합 다층적인 사회 문화적 조건과 더불어 한국 문학은 어떤 형태와 어떤 맥락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국 문학에 대한 불만은 기실 개별 텍스트, 즉 어떤 소설, 어떤 시, 어떤 산문, 어떤 글쓰기에 바로 드러나 있는 요소들로만 환원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한국 문학을 구성하는 개별 텍스트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이야기될 수 없는 것도 분명합니다. 한국 문학에 어떤 막연한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개별적인 문학 작품들에 대한 감상과 비평이 먼저 제기되지 않았을 리 없었으리라는 것이 이번 기획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이번 비평 기획은 가급적 구체적이고 실감이 되는 의견을 나누려고 합니다. 솔직해야 하는 만큼 부담스러운 일일 수 있으나, 비평가로서가 아닌, 오랫동안 한국 문학에 애정과 관심을 유지하고 있는 독자로서 한국 문학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상을 다시 한 번 깊이 있게 헤아려 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 문학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려 합니다.




나는 매번 시 쓰기가 재밌다는, 그런 친구들



박성준 (시인, 문학평론가)



1. 뭣이 중헌디? 뭐이 중허냐고!


지난 9월 18일 이호철 선생이 별세했다. 사인은 뇌종양이었다. 동시대를 호흡해왔던 많은 문인들이 그의 빈소를 찾았고, 황석영, 염무웅 선생 등이 그를 회고하는 기사1)를 접했다. 주요 언론들이 꽤 비중 있는 기사를 다뤘고, SNS 등으로 연동된 몇몇 문인들의 추모 타임라인도 올라왔다. 그러나 나는 체감이 되지 않았다. 60여 년간 남북 분단 상황을 화제로 소설을 써왔던 원로 소설가의 죽음. 당대에 중요시 독서되었고 현재에도 꾸준히 연구되고 있는 그 작품들을 다 논해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괜찮겠다.
인민군 징집, 국군 포로 후 탈출, 귀향, 1.4후퇴, 부산 피난 생활, 판문점 방문, 반유신, 반독재 투쟁, 문인간첩단 사건 연루 등등 그간 작가가 겪어온 삶의 굵직한 사건들만을 나열해보더라도, 한국근현대사와 접촉되는 면적이 말로는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그 역시 나에게 체감이 되고 있는, 나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한국문학사 안에서 ‘이호철’이란 이름과 그의 삶, 『소시민』 , 「판문점」과 같은 작품들 몇몇이 과거 학습을 통해 복기될 뿐이지, ‘분단 문학’이나 ‘남문문제’와 같은 무게감이 실린 단어들에 대해 내겐 어떤 덧붙일 감흥도, 수사도 없었다. 이런 정서가 이제 그리 이상한 말도 아니다. 어쨌든 여기서 나는 분단국가에서 글을 쓰는 작가가 ‘분단’이 전혀 문학적 자산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 비단 나의 특수성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한 소설가 죽음에 대한 애도와는 별개로 그가 남긴 문학에 대한 온도차는 개별 시인·작가마를 수 있다. 물론 여기서의 온도차란, ‘분단 상황’이 한국의 여러 문학적 소산들 중 하나이고, 어떤 작가들에게는 그리 문제시되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이에 대한 가치 판단이나 명확한 준거를 함의한 주장이 기입된 단어 또한 아니다.
이념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 가령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를 서로 독해하고 문학으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대문자 문학’과의 호흡과 효용을 논하는 시기도 아니다. 순수니 참여니 진영논리를 갖추고 교양으로써 (근대)문학을 상정하는 것 또한 오래 전 일이다. 1960년대 4.19와 70년대 유신, 80년대 광주와 90년대 IMF까지. 시인·작가들이 한 시대를 형상화해내고 시대사적 부채감과 그 의무로 인해, 문학이 그러한 현실태에 반응하여 응전력을 띠어야 한다는 요구는 이미 이념 시대의 낡은 부유물처럼 느껴진다. 문학적 효용이 시대마다 접촉했던 방식이 달랐듯이, ‘지금 여기’는 문학은 이념의 시대와 전혀 다른 환경과 조건2) 속에 놓여 있다. (근대)문학이 동시대의 담론을 생산하는 장으로써, 혹은 시대의 내상을 읽어내는 예민한 촉수로써 기능했던 시기가 이미 아닌 것이다. 그러나 등단제도와 주류 문단/출판 구조가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한국문학 장에서, 시는 이런 정서를 내장해야하고 소설은 이런 내용으로 구성해서 써야한다는 전통(억압)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문단 내에서 창작주체로써 느끼는 억압적 요소들에 대한 논의들은 이 글 중반으로 미루고, 문학이 현실에게로 복무를 요구하는 시기가 이미 아니라는 것3). 여기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솔직히 이런 감흥을 느끼게 된 것이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특정 개인이나 세대가 가진 아주 잘못된 정서감도 아닐 텐데, 지금껏 우리는 유독 문학 장 안에서의 이런 종류의 발언은 꺼내기조차 꺼려했다. 무책임하고 맥락 없는 치기 정도로 여겨지거나 세대 간의 격차 정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제는 먼저 문학 일반을 대하는 기성세대의 태도가 아직도 ‘대문자 문학’이라는 것에 함몰되어 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쉽게 말해, 표면상으로는 세대 간 대화가 통하지 않는 문제4)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말해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사안에 대해 부끄러워해야만 한다는 ‘기묘한 모럴’을 묵묵히 용인하고 있었던 것일까. 지난 봄 『문화과학』 에 발표된 오혜진의 글5)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가운데, 굉장히 통쾌한 경험이었다. 이 글은 ‘신경숙 사태’ 이면에 깔려 있는 ‘국문학 수호(신성)주의’를 비판하면서 문학 장 안에서 자정하려고 했던(그러다 더 속내를 들켜버렸던) 문단 권력, 비평 상실, 표절의 범주 등등의 표층적 사안들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는 (주류)문학의 생산자 그룹들과 더 이상 여기에 소비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젊은 독자층의 대립 구도로 쟁점을 탈바꿈시켰다. 오혜진은 여기서 비평의 기능을 전자보다 다분히 후자 편에 서서 기능해야할 때의 도래를 내포함과 동시에, 교양주의의 권위로부터 시작되는 비평의 태도를 지양6)한다. 오혜진의 문제제기를 전부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위 관습적으로 우리가 ‘참여’라 칭한 만한 범주의 진보 그룹들이 여전히 내세우고 있는 계몽·교양주의나 (순)문학의 담장 안에서 바깥을 시선화하는 방식들에 관해서, 나는 문제제기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있다. 진보 문학 생산자 그룹이 설정해놓은 문학의 모듈의 보수성도 문제거니와 그 대척점에 서 있는(대척점이라 교육 당했던) ‘순수-전통주의’, ‘보수-모더니티’ 그룹들이 띠는 폐쇄적 민족주의 혹은 과잉 교조·교양주의가 갖는 보수성도 이 문제에서 이미 혐의를 피하기 힘들다. 스스로 진보의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그 입장 안에서 정체된 딜레마에 빠진 것은 오래된 이야기다. 그러니 기성들은 그 세대가 보유한 사유지를 여전히 경작하는 데 몰두하면서, 진화하지 않는 무늬-진보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독자 혹은 시인·작가들의 관심사가 무엇이고, 어떤 것을 문학적 자산으로 삼고 있는지, 판단 착오와 유예를 거듭해오는 동안 문학 권위주의는 보이지 않는 벽으로 우리들에게 공유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가운데 ‘거대 서사 중심주의’와 ‘앙가주망(engagement)’에 관한 무감 또한 ‘건강한 취향’으로 보장받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지극히 사적 영역에서 문학의 재미를 향유하는 독자-시인·작가군과 매뉴얼화 된 비평과의 부딪힘 내지 외면은 어쩌면 미루어둔 숙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무엇이 중요한 건지, 대체 중요한 것이 있기나 한 것인지, 너는 뭐가 중요한지 되물으면서, 진정 나에게 중요한 것은 또 무엇이었는지 되묻는, 숙의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다.


1) “고인은 한국 분단문학의 개척자이자 거장으로 불렸다. 1974년 ‘문학인 61인 개헌 지지 선언’ 때 고인과 함께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던 황석영 소설가는 저서 ‘한국명단편 101’에서 당시의 이호철을 “좌장이었고 ‘큰 형님’”으로 기억한다. “염무웅의 표현대로는 ‘천진난만’이었고, 한남철의 표현으로는 ‘주책없음’이었다. 방영웅의 표현에 의하면 ‘늘 틀리는 낌새’였으며, 이문구의 표현에 의하면 ‘소심한 인정주의’였고, 내가 보기에는 ‘삐지기 잘하지만 얼른 풀어버리는 호인’이었다.”- 「이호철 소설가 빈소에 문인들 조문 이어져」, 《한국일보》, 2016년 9월 20일 자, 생활면.
2) 문예지들마다 합의된 전망(합의가 되지 않는 전망이기 때문에 더 가치가 있을 것)을 내놓은 것은 아니지만, 최근 『문학과사회』 혁신호와 별책, 『릿터』 등 문예지 개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시대의 담론을 생산하는 지성의 역할을 고수했던 주류 문학 생산자들이 변화하는 창작주체들과 독자들에게 발맞추어 호흡하려는 반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신경숙 사태’를 기점으로 이런 숙고가 이루어졌다는 것에 대해,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한 독자의 입장에서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3) 이와 같은 제반 사태들에 관해 “문학 장 내의 모두가 합의하여 결정하여, 모두가 동시적으로 수행하는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창비와 문학동네가, 젊은 세대와 선배 세대가, 창작자와 독자가 서로 간의 기대를 조율하여 하나의 합의안을 만들어내는 일이 될 수는 없다”(황인찬,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문학의 기대지평의 변화(없음)에 대하여」, 『문예중앙』 , 2015년 가을호, 39면.)는 황인찬의 논의를 참고해보자. 황인찬은 ‘신경숙 사태’에 관한 여러 논의들을 정리하면서, 누가 어떤 위치에서 발언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 주목하는 한편, 이 사안을 대면하는 세대 간의 온도차와 층위의 다양성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굴절된 모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니 달리 말하면, 이렇게 규합할 수 없는 것을 접붙이려고 하는 가운데, 저마다의 위치에서 한국문학을 대면하는 질감(질량감)을 모두 ‘들켜버리고’만 논의가 ‘신경숙 사태’였던 것이다. 이는 ‘강요되지 않음/될 수 없음’의 자율에서부터 출발해야한다는 ‘문학의 모럴’을 배제시킨 채, 사태를 해결, 봉합하려는 입장만을 고수한 결과다.
4) 시단에서는 지난봄부터 기획된 『시인수첩』 권두좌담이 회자가 되고 있다. 각각 좌담 내용을 단출하게 이야기해보자면, 봄호(「한국 현대시의 반성과 전망」, 『시인수첩』 , 2016년 봄호.)는 감태준 사회로 김남조, 오세영, 이건청, 신달자 등 원로시인들이 참여해 “젊은 시인들의 난해시 유행과 시 독자의 감소”를 문제 삼았다. 여름호(「젊은 시인들의 도전과 가능성」, 『시인수첩』 , 2016년 여름호.)에는 이숭원 사회로 신동옥, 박소란, 황인찬 등 젊은 시인들이 참여해, 원로시인이 제기한 난해시와 탈소통 문제에 관한 응답을 주로 다루었다. 그리고 특히 가을호 좌담에서는 허영자, 박상수, 박성준이 참여해 신구 세대의 충돌을 통해 세대 간이 다르게 느끼고 있는 시에 대한 설전이 있었다. 서로 다른 문제의식 속에서 발언된 말이지만, 여기서 필자가 했던 말을 복기해보면, 전통, 문학의 당위성 등의 입장이나 다양성을 대하는 태도 등이 앞서 인용한 황인찬 논의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작금에 합의된 시의 영역을 보다 넓힌 그 몇몇의 시인들은 저마다 각각의 당위성을 마련하고 있었을 겁니다. 물론 당위성이라 부를 만한 명확한 태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어렴풋이 자기만이 아는 어떤 윤리태를 가지고 시를 썼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전혀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시인이 시를 쓰면서 당위는 찾아가는 과정에 놓인 것이지 당위나 명분이 먼저 서고 그곳을 향해 자기 세계를 몰아가는 방식으로 시를 쓰는 시인은 근래에는 많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사태들을 ‘기형’이나 ‘엽기’라고 부르면 그 대척점에는 또 정상의 범주가 존재하겠지요. 앞선 질문에서처럼 ‘혼돈’이나 ‘정리되지 못함’이라 그 당위성을 추궁한다면 이 또한 정리된 어떤 것이 이미 상정된 상태에서 발화된 억압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무엇을 상정해놓고 나면, 정리된 어떤 기준점에서부터 거리를 측정하게 되고, 그 정도에 따라 범주화를 시키고 싶은 욕망이 발동하게 되겠지요. 특히 비평가의 시선들이 더욱 그렇습니다.”(「한국 현대시의 이상향」, 『시인수첩』 , 2016년 가을호, 42-3면, 참고.)
5) 혜진,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 『문화과학』 , 2016년 봄호.
6) 맥락 전부를 동의할 수는 없는 바지만, 소박하게나마 비평이 해야 할 일이란 응당 다음과 같은 진단과 반성에서부터 시작해보는 것이 좋겠다. “한국 문학/비평은 한국문학(장)의 옆과 아래에서 무차별적으로 진격해오는 이와 같은 비평적 의제들을 과연 어느 정도의 무게로 인지하고 있을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독자-대중의 불만이 ‘한국문학의 문호개방’ 혹은 ‘시혜적 하방’과 같은 차원의 요구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차라리 ‘재현장치로서의 한국문학’이 지니는 무능 혹은 기능부전에 대한 강력한 고발이며, 이것이 바로 현재 젊은 독자들이 새로운 학습과 경험을 축적하는 데 필요한 지적‧문화적 자원에서 한국 문학/비평을 기각한 이유다. 새롭게 갱신되는 지식과 정동, 윤리와 정치에 무관심한 ‘이성애자-남성-지식인’들의 문학(사)은 이제 현실에 대한 아무런 생산적 설명도 하지 못하는 구시대적 유물이거나 시대착오적 양식으로 간주되는 것(밑줄 강조: 인용자)이다. 장르문학을 제도문학의 영토 넓히기 차원에서 구색 맞추기 용으로만 배치한다든가, ‘장애인, 성소수자, 투쟁하는 노동자’ 같은, 현실에서 비가시화된 존재들에 대한 관성적 재현과 해석에 도전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지적‧문화적 호기심 충만한 오늘날의 독자들이 왜 구태여 한국 문학/비평을 읽어야 할까. ‘무식할 정도로’ 거의 모든 재현과 해석의 금기에 도전하는 팬픽과 웹툰, 웹드라마 등을 보는 게 훨씬 더 이롭지 않나?” (오혜진, 같은 글, 100면.) 오혜진의 논의처럼 비평은 비평가의 위치, 비평(진영)적 사관이 아닌 ‘문학을 읽는 독자의 자리’, 그곳에서부터 비평이 가진 최초의 역할이 부여되는 것이다. 수호해야할/수호해왔던 한국문학의 수많은 의제들보다도 지극히 일반적 수준에서 비평가 역시 독자의 위치에서 시작해야하는 읽기/쓰기 행위자이다. 한데 지금껏, 과도하게 담론생산자, 시장기획자 등의 그릇된 지성의 입장과 위치에서 90년대 이후 20여 년을 공고히 해왔다. 비평의 반성이란 우선 그것들을 내려놓은 곳에서부터 출발해야한다.



2. 부적응의 전략 밖에서, 부적응의 적응 그 자체


창작의 주체가 되는 시인·작가들이 문단에 진입할 때 당면하게 되는 문제는 보다 더 당혹스럽다.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들을 생각하고, 이미 ‘주어진 틀’ 안에서 또 다시 눈치를 곱씹어 봐야한다는 피로감을 감수해야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등단제도가 있는 한국의 문학 장 안에서 그것들은 암묵적 진입 장벽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음 구절들을 살펴보아도 좋을 듯하다.


“젊은 응모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굉장히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진전시키다 보니 왜 이런 생각이 촉발됐을까, 하는 점이 드러나지 않고 숨겨진 경우가 많았다.”


“작품들이 파편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극적이고.”


“언어들이 굉장히 매혹적이고 화려한데, --(중략)-- 왜 그런 생각이 촉발됐는지가 잘 드러나지 않아서인지 집중해서 다시 읽어 보면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의 시가 많았다.”


파편적인데 비약적으로 연결을 잘한다. 상상력이나 시적 호흡이 좋아서 그런 것 같다. 우리 세대만 해도 사유든 감각이든 깊이 들어가는 걸 선호하는데 이 친구들은, 21세기적 특징일 텐데, 휙휙 건너뛴다. 화려하고 다채롭고 넓게 퍼지는 대신 깊게는 안 간다.”


“시는 이래야 한다는 식의 강박관념이 없는 세대다. 시의 규범에서 자유롭다. 그래서 언어를 무서워하지 않고 잘 반죽한다.”


- 중앙신인문학상 예심평 부분,《중앙일보》2016년 9월 8일자 생활면.(밑줄 강조 인용자.)


신춘문예나 신인상 심사평에 있어서, “강박관념 없는 세대의 등장”이라는 말이 이제는 전혀 낯설지가 않다. 심사자들의 역량을 의심하거나 문학 제도권의 굴절된 문화들을 비꼬려 드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제도 안에서 제도 바깥을 바라보는 방식은 새롭게 유입되는 신인들의 작품을 카테고리화 하는 잣대로 작용될 소지가 많으며, 이미 그래왔다. 특히 비평의 역할을 논할 때에도 소설과는 상이하게 이미 대다수의 독자층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던 시 장르의 경우, 창작 주체들이 스스로 읽고 논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고 관심을 갖는 하위문화 정도로 남아 있게 된 것 또한 오래된 일이다. “젊은 독자를 잃은 한국 문학/비평은 장르화된 방식으로만 겨우 존재하면서 영원히 ‘그들’만의 은어 혹은 방언으로 남을 것이”7)라는 어두운 전망이 이미 8.90년대 이후 한국시를 거쳐 갔다. 서사 장르와 달리 시 장르는 자본의 결탁이라 할 만한 시장논리가 애초에 적용된 바 없었던 탓에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개별 시인들의 숙고와 생존의 과정이 일찍이 수행되었다.
미디어에 노출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자생적으로 독자에게 부흥을 이룩한 시집8)들은 드물다. 가령 그런 시집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재래적 한국시에 빚진 부분들, 그러니까 시란 어려운 것, 향유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기인한, 다소 쉽고 충만하게 서정적인 시/시인들이 그곳에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대중적 작품을 문학적 성과를 두고 논하는 일은 어쩌면 “오늘날의 독자가 바보가 아니라는 증거는 어디 있습니까?”라는 김종호의 결론”9)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 장르가 가지고 있는 어떤 특질들, 범박하게 말해, ‘내적 자율을 담보로 세계와 대면하는 파토스의 언어’라든가, ‘세계에 대한 부적응의 문법과 그 문화권자의 언어’, ‘개별적 혁명들로 세계를 세속화하려는 다분히 사적인 전략’ 등을 갖추고 있는 몇몇 시인들을 상기해보자. 이들의 시는 지극히 개성화, 다양화 전략을 통해서 그 생존을 도모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시의 경우는 방언, 혹은 은어로 남게 되는 것이 전혀 작금에 말하고 있는 문학의 위기를 반증하는 결론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부적응의 전략’이 ‘개별의 모럴’을 보장하면서, 밑줄로 강조 인용한 부분들과 같은 특징을 더 부각시킨다. 그러니 시는 쉽사리 소통이 될 수 없는, 아니 꼭 소통이 되어야만 하는 필요조건을 갖지 않는다.


7) 오혜진, 같은 글, 105면.
8) ‘신경숙 사태’로 문단 내부에서 논쟁과 자정의 목소리가 뜨거웠을 때, 그와 예외적으로 더 많은 종수의 시집이 출판되고 TVN <비밀독서단>을 통해 소개된 박준, 심보선, 황인찬 등의 시집이 대중들에서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또 최근 MBC <마이리틀텔레비전>에서 박준이 출연한 것을 또한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김동원은 황병승, 김경주, 이제니, 송승언, 황인찬의 시를 난해하지만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시로 논하면서, 종국에 그 결론을 “이유는 없다”라고 내놓고 있다.(김동원, 「그들은 왜 매력적인가」, 『포지션』 , 2016년 봄호, 45면 참조)
9) 오혜진, 같은 글, 113면.


오히려 2000년대 이후 시는 ‘부적응을 세속화하는 장르’라고 부를 만할 것이다. 2000년대의 시가 가지고 있던 담론구성체들을 상기해보자. 한국문학사 전체와 전면적 대결을 취하던 공격적 면모를 띠는 것은 물론이고 부적응 그 자체를 징후적으로 받아들였던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니 각각의 ‘시적 기형’들을 통해 다양한 목소리를 창출해낼 수 있던 시기10)였다. 물론 이 세대의 등장을 엄숙주의나 교양주의가 완전히 배제된 세대라고 판단하기는 힘들 것이다. 황병승이 퀴어, 하위문화, 주체의 다성화 전략을 사용한 것이나 김행숙의 비성년, 감각적 분유의 언어감과 특정 감각의 소거와 융기를 기반으로 하는 기관화주의는 그 내용·형식상, 그간의 한국시 가지고 있던 정언윤리를 모두 비껴나가는 문법을 지향하고 있었지만, 그런 면모 때문이라도 2000년대 시가 가진 부정의 정신은 그 부정의 대척점으로 한국시의 역사주의적 채무를 두고 있는 셈이다. 즉 2000년대에서 상정했던 당대의 미래지향(해체)이란, 부적응을 통해 다양성을 획득하고 ‘앙가주망’에 반하는 세속화 운동11)이다. 그런 가운데 2010년대의 시는 부적응을 ‘응전의 도구’로 삼지 않는다는 데에서 더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 논의 중심에는 주체 퇴조, 무기력, 포기의 내재화와 같은 맥락12)들이 있고, 단지 이렇게 하나로 귀결될 수 없는, 다양한 비평적 호소로 두꺼워진 ‘없는 세대론의 세대론’이 있다.


10) 앞서 인용한 좌담에서 박상수는 한국시의 미래에 대한 전망과 기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사실 시라는 장르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걱정이 있습니다. 완전한 마이너장르로 전락해서 시인들끼리 쓰고 돌려 읽고 끝난다면 너무 외로운 것 같아요. - (중략) -일단 시의 품이 더 넓어지고 다양한 시들이 계속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①한국시의 전통과 대결하는 시, 언어로 돌파하는 시, 사회적 상상력을 품는 시, 전위의 시, 대중의 사랑을 받는 시(밑줄 강조 : 인용자) 등등 다채로운 카테고리 안에서 호명될 수 있는 더 다양한 시들이 많았으면 합니다. - (중략) - ②시인들끼리 재밌게 많이 놀았으면 좋겠습니다. ‘뭐야 이 사람들 재미있어 보이잖아? 나도 함께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게끔 말이지요.”(권두좌담, 이숭원 외, 「한국 현대시의 이상향」, 『시인수첩』 , 2016년 가을호, 48-9면) 범박하게 말하면, 밑줄로 강조한 ①의 경우가 한국문학이 그간 지향해온 카데고리들이었다면, ②의 경우는 특히 2010년대 시인들이 갖는 시적 자율성, 문학적 자율성의 면모라 할 수 있다.
11) 여기에 있어서 다음 글을 참고해보는 것이 좋겠다. 2000년대 시의 전복 전략이 어떻게 정치성과 조우하고 있는지, 진은영의 논의(「감각적인 것의 분배: 2000년대 시에 대하여」, 『창작과비평』 , 2008년 가을호.)를 정리하면서 이찬이 언급한 부분이다. “삶과 정치가 실험이 되지않는 한 문학은 실험이 될 수 없다.” -(중략)- 문학이 그 내부에서의 실험과 전복을 넘어서 어떻게 “새로운 삶의 형식”을 실제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있다. 그러니까 진은영은 우리들의 실제적인 ‘삶’과 ‘정치’ 그 자체가 변환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필수불가결한 전제로 삼았다고 할 수 있겠다. 만일 그럴 수 없다면 “문학은 필연적으로” “기만의 상황에 빠진다”고 그는 매우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의 부제가 “2000년대의 시에 대하여”인 까닭 또한 바로 이 자리에서 발원한 것임에 틀림없다. 결국 그는 ‘미래파’라는 말로 명명되었던 동료 시인들의 시에 무엇이 빠져 있으며, 그래서 또 어떤 것이 요청되어야만 하는지 암시하려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이찬, 「2000년대 한국문학 비평의 첨예한 성좌들 - “미래파”와 “정치시”를 중심으로」, 『실천문학』 , 2010년 여름호, 356-7면.)
12) 2010년대 시의 미적 특징을 탐독한 논의들은 다음과 같다.
기혁, 「새로운 이후를 위하여―‘포스트’미래파를 위한 ‘미래파’적 제언」, 『현대문학』 , 2016년 6월호.
박상수, 「기대가 사라져버린 세대의 무기력과 희미한 전능감에 관하여」, 『문학동네』 , 2015년 여름호.
박성준(졸고), 「마이너스 벡터의 시와 줄어든 주체들」, 『문학과사회』 , 2015년 가을호; 「마이너스 벡터의 시와 줄어든 주체들2」, 『문학선』 , 2015년 가을호.
양경언, 「이제 되었다니, 그럴 리가」, 『문학과 사회』 , 2015년 겨울호; 양경언 「누구에게 이것을 바칠까?」, 『실천문학』 , 2013년 여름호.
이재원, 「‘나’라는 이름으로 자라난다는 것」, 『시작』 2013년 여름호; 「‘나’에게서 ‘나’에게로 걸어가는 동안」 『문학과사회』 2014년 봄호.
장은정, 「지켜내는 반복―2010년대 시를 향한 하나의 각도」 『현대문학』 , 2016년 3월호.
함돈균, 「‘최소-인간the minimum human: 모멘트moment’의 탄생」, 『문학과사회』 , 2011년 가을호; 「‘최소-인간(the minimum human)’, 전위인가 복고인가」, 『현대시』 , 2012년 여름호.



3. (부)적응을 적응 그 자체


이에 대한 논의를 또 다시 덧붙이는 것보다는, 근래에 출간된 앤솔러지 산문집(이하 『시 쓰기』 )13)에서 송승언의 Q&A를 옮겨보는 것이 2010년대 시를 대면하는 시인과 독자의 입장을 규명하는데 더 실감나는 사료가 되겠다.


① Q. 습작하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점은? 어떻게 극복했는가?
“별로 힘들지 않았다. 일단 등단 전의 시 쓰기, 그것을 습작이라고 불러야하는지 의문이다. 그말은 등단 전에 쓰는 것들은 그저 등단을 위한 연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인가? 시나 소설, 혹은 여타 다른 장르의 글을 쓰는 모든 이들이 꼭 등단을 위해서 글을 쓰는 건 아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중략)- 그저 시를 쓰고 읽는 게 즐거웠기에 계속했을 뿐이다. 재미 활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나 할까.”

- 송승언, 「나는 매번 시 쓰기가 재미있다」 부분, 『시 쓰기』 , 서랍의 날씨, 2016년, 173면.


② Q 시가 오는 순간은?
“시는 과연 오는 것인가? 시인이 무당인가? 신이 오는 것처럼 시가 오나? 가만히 있으면 잠이 온다./ 마감이 다가오면 시를 써야 한다. 시를 쓰기 위해 시를 쓰러 간다.”

- 송승언, 같은 글, 174면.


③ Q 왜 쓰는가? 어떻게 쓰는가?
“우선 시를 쓰는 게 퍽 재미있는 일이니까 쓴다. 쓰는 게 재미가 없다면 쓰지 않았을 것 같다. 그 밖에 이유가 있다면, 생각이라는 피를 뽑아내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 머릿속에서만 맴돌고 있는 생각은 마치 고여 있는 죽은피처럼 느껴져서 그대로 두면 어쩐지 견디기가 힘들다.”

- 송승언, 같은 글, 175면


④ Q 세계란 무엇인가?
“우와, 이 거대한 질문은 뭘까? 객관 세계가 뭔지를 물어보는 것일까? 그에 관해서라면 나보다는 국어사전이 더 잘 알고 있을 것 같다. -(중략)- 어쨌든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할 뿐인 내게 세계가 무엇인지 정의할 능력이 있을까? 우리의 세계는 사람이 인지할 수 있는 영역 바깥에 있다. 그만큼 거대하다. 그래서 세계를 따로 만드는 게 아닐까? 적은 용량의 뇌와 짧은 생으로 파악하기엔 세계란 너무 거대하니까 파악하기 쉬울 만한 미니어처로…….”

- 송승언, 같은 글, 177-8면.


⑤ Q 독자란 무엇인가?
“책을 읽는 사람. -(중략)- 시인이 문학 장을 무대로 삼는 퍼포머와 같은 성향이 있다는 점”

- 송승언, 같은 글, 179면.(순번: 인용자)


인용한 부분들을 계열화 해보면, 2010년대 시인들은 ①제도권 시 장르에 대한 체감을 최소한으로 두고 있으며 “그저 시를 쓰고 읽는” 행위에 즐거움을 느낀다. 이들에게 시는 “재미 활동의 연장선상”의 글쓰기 활동이며, 시를 신성화하거나 시를 통해 교양을 함양하는 등의 어떤 교조주의도 내재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②창작의 동기 역시, ‘오는 것’이 아니라 ‘마감을 맞추기 위한 것’이다. 즉, 현실적이고 생활적이며 또 지극히 실천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현실, 생활, 실천은 앙가주망의 그것이 아니다. 창작자가 겪고 있는 지극히 사적 영역에 속하는 ‘현장’이다. 이 현장 속에는 ‘시마’, ‘뮤즈’와 같은 낭만적 기제들은 물론이거니와 재현이나 담론과 같은 정치성의 내장조차 굳이 허용할 필요가 없다. 그 또한 개별 주체들의 선택의 몫이지 ‘오래된 강요’가 아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무당인가? 신이 오는 것처럼 시가 오나?”라며, 왜 자신이 적응하고 있는 제 언어의 일반학을 부적응으로 두는지 재차 반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③“재미”와 더불어 “생각이라는 피를 뽑아내고 싶”은 표현의 욕망만을 가중할 수도 있다. 텅 비어있음으로 무엇이 더 필요로 하는 것(가령 진은영의 경우에서처럼)이 아니라, 그렇게 비어 있다는 것과 반드시 조우해야할 문학적 모럴이 요청되는 것 또한 아닌, 이 세대는 비어 있음 그 자체를 지향하거나 그대로 둔다. 그러니 이를 ‘부적응의 적응 그 자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④이들에게 ‘세계’를 질문하는 것은, 먼저 “우와, 이 거대한 질문은 뭘까?”라는 반문을 늘어놓게 하는 우문이며, “어쨌든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할 뿐인 내게 세계가 무엇인지 정의할 능력이 있을까?”와 같이, 문학 일반에서 세계보다 자아가 큰 상황을 설정하는 준거조차 무의미하도록 되돌려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⑤독자조차 ‘읽는 사람’, ‘구경꾼’에 지나지 않으며, 시인은 “문학 장을 무대로 삼는 퍼포머” 정도의 지위와 입장에서 제 언어에 복무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렇게 정리가 가능할 것도 같다. 작금의 시인14)은 더 이상 시대의 책무와 내상에 복무하는 교양적 선생이 아니며, 문학 장 안에서 질서화 된 것들을 응전하는 운동하는 주체도 아닌, 그저 읽기 쓰기를 생활화하고 또 그 생활을 예민하게 느끼는, 그러는 중에 반성(“자기혐오”)과 재미, 표현 욕망을 즐기는 ‘잘 적응한 부적응적 주체’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창작 주체의 출현이 기이한가? 아니면 치기 어린가? 또는 어린 생각인가? 한데 ‘K문학/비평을 외면하는 독자들’(오혜진)이 유독 이렇게 부채감을 주지도 부채감을 받지도 않는 시적 주체들에게 매니악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또 무엇인가. 스스로 자율을 창출하고 그 스스로가 자율에 함몰되지만, 그런 토포필리아에 있어서 어떠한 자기 권위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주체(시인/독자)들에게, 한국 시문학의 미래를 맡겨 봐야하지 않을까.


13) 김승일 외, 『나는 매번 시 쓰기가 재미있다』 , 서랍의 날씨, 2016년.
14) 물론 인용한 송승언의 발언이 2010년대의 젊은 시를 모두 통칭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 쓰기』 에서는 12명의 젊은 시인들의 창작 제언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그 12명의 시인조차도 2010년대를 대표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4. 마냥 좋아서 그렇게


애초 이 글은 한국 (시)문학이 처한 위기 혹은 ‘막연한 불만’(?)들에 대해 시인(비평가)으로써, 개별 작품을 두루 살피며 반문하기에 대한 요청에서부터 시작했다. 한데 너무 많은 시인들의 목소리가 다녀간 나머지, 이미 시집이 출간되었거나 활발하게 논의가 되고 난 시와 시인들에 대한 언급은 뒤로 미루기로 하자. 대신에 내가 재밌어하고 좋아하는, 임솔아의 시를 읽는 방식에 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그렇게 슬퍼? 광복 70주년 기념 프로그램에서 숭례문이 불타고 있었다.


로션을 바르는 것처럼 그는 콧물을 손바닥으로 문지른다.


우리나라 국보 1호인데 가슴이 미어진다며 운다.


나는 키즈 과학체험을 보며 운다. 소의 배에 구멍을 뚫고 아이들에게


손을 넣게 한다. 소야. 커다란 눈을 껌뻑이는 소야.


아이들이 배에서 꺼낸 곤죽이 된 음식물을 허연 침을 뚝뚝 흘리면서 핥는 소야.


나는 콧물을 풀고 눈물을 닦으며 티브이를 본다.


지금은 긴급속보에서 카트만두가 무너지고 있다.


사망자가 팔백 명이라더니 내가 이 시를 쓰는 동안 사천 명으로 늘었다.


왜 울지 않아? 우리나라 이야기가 아니라서 그는 눈물은 안 난다고 한다.


티브이에서 본 비극을 모아 나는 지금 시를 방영한다.


뛰어난 인류를 상상한 독재자가 학살을 만든 다큐를 보았고


머리채를 잡힌 여자가 중심가를 질질 끌려가며 죽어갔고


수백의 사람들이 구경만 했다는 뉴스를 감자칩을 먹으며 메모했다.


잔재 아래에서 울음소리가 올라온다. 이름이 뭐예요? 대답하세요. 구조대 올 거예요.


말을 해요. 그래야 살 수 있어요. 나는 티브이에게 말을 시킨다.


깜박깜박 졸음에 빠지는 티브이를 깨운다.


나는 티브이 속으로 들어간다. 차벽 너머의 그를 만난다.


우리는 마주보고 있다. 이곳은 마주보는 것을 대치 중이라 한다.


이 차벽 너머에서 그가 등을 돌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등을 돌려야만 같은 티브이를 볼 수 있다. 나는 뒤를 돌아본다.


-임솔아, 「티브이」 전문,『창작과비평』, 2015년 여름호.


나는 임솔아의 시가 좋다. 나는 그와 잘 모르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시가 마냥 좋아서, 지면에서 그의 시를 만나면 일단 반갑다. 아직 첫 시집이 발간된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 동안 임솔아의 시를 여러 지면을 통해 지지해왔다. 나는 임솔아의 시에서 “미래에 대해 생각할 기회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 분위기 속에서 -(중략)- 몸부림치며 온몸으로 육성을 쏟아낸15)”다라든가, “관찰자 수준에서 경험자 수준으로 제 몸을 되돌려 다시금 묘한 고통들을 자아16)”내는 어떤 처연함들을 느낀다. 그의 시는 다소 명확한 현실태를 제공하며, 먼저 그 현실에서의 기형성을 발견하는 관찰자였다가 이곳에 자신이 왜 놓여있게 되는 것인지 끊임없는 자기 물음을 통해 제 기억 깊숙한 곳에 숨겨둔 말을 유통한다. 이때 그의 언어는 대다수 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감각체이지만, 기형적 현실태들과 조우하면서 나와 세계 사이에 또 다시 기이한 벡터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미 ‘육성’이나 ‘고통’, ‘몸부림’이라고도 했거니와 세태를 껴안으며 발성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시대(세대)의 모럴’를 견인하는 면모까지 있다 할만하다. 물론 여기서의 견인이란, 시적 주체 그 자신만을 먼저 견인하는 정동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서 구속이 없고, 시편마다 능동적 생활 체험 전시하는 경우가 있어서 현장성이 농후하며, 질문을 매번 남긴다는 점에서 ‘다 씌지 않은 시’를 지향한다.
인용한 시도 그렇다. 「티브이」는 임솔아가 시를 쓰는 이유를 스스로 되묻는 듯한 메타시이다. 물론 형태상 이 시는 다섯 가지 정황들이 동시에 대치·교차되며 우리에게 주어진 각각 다른 ‘삶의 채널’들을 형상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나”와 “그”가 TV를 보고 있는 정황에서 ① TV를 보는 “그”가 “광복 70주년 기념 프로그램”과 “긴급속보”를 보며 각각 다른 강도로 슬픔을 인지하는 장면과 ② 소에게 끔찍한 짓을 행하는 것을 ‘교육적 체험’ 쯤이라 여기는 “과학체험”을 보여 울고 있는 나의 모습이 대치된다. 그리고 ③“티브이에서 본 비극을 모아” 시를 쓰고 있는 나의 시간들과 ④티브이에서 상영되는 비극들 속에서 진행되는 시간들이 제시되고, ⑤다른 공간과 시각을 점유하고 있는 “나”와 “그”가 접촉하는 순간의 장면들로 이 시는 종결된다.
①과 ②의 대치는 동시대의 살아가는 두 개의 시각(채널)을 상징한다. 불타는 숭례문에 슬픔을 느끼면서 “카드만두”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우리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이유로 전혀 감흥을 못 느끼는 “그”라는 존재는 그릇된 상징질서의 작용으로 인해 ‘시민 이하’의 정동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나대로 “소의 배에 구멍을 뚫고 아이들에게//손을 넣게” 하는 교육 콘텐츠를 보면서, 나의 울음을 겪는다. 여기서 두 시각이 접촉되는 순간을 가만히 살펴보자. “그렇게 슬퍼?” “왜 울지 않아?”라고 “그”에게 묻는 “나”의 질문이 등장한다. 다시 말해 이 질문들은 ⑤의 상황을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TV 속으로 들어가 서로 같은 채널을 보고 느끼기 위해 “그”의 등을 또 다른 폭력을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뒤돌아보며, “그”를 향해 나란히 앉아보는 것. 임솔아는 “나”와 “그”가 연대하고 접촉하는 순간을 따뜻한 전언으로 수사한다. 즉 폭력을 쉽게 용인하는 이 세계에 대한 아주 소박한 전망인 것이다. 이런 소박한 마무리는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기 TV 앞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 어쨌든 울고 있는 상태라는 것에도 주목해보자. 우리는 서로 다른 채널을 보면서, 각자가 처해 있는 현실에서 스스로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지만, 어쨌든 우리 모두는 ‘울고 있다’는 슬픔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때문에 임솔아는 이렇게 각자의 입장을 교차되는 사회의 면면들을 가로질 수 있는 ‘시의 가능성’이라 믿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의 비윤리적 감흥을 공격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④에서 진행되는 독재자의 학살(폭력)과 위험에 처한 여자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 군중들의 무감은 “그”의 다르게 발전된 얼굴일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잔재 아래에서 울음소리가 올라온다”는 구절을 주목해보자. 모든 울음은 가장 낮은 곳에 있다는 판단이 다소 비약적일 수도 있겠으나 ③의 시간들, 즉 나 자신이 시를 쓰는 시간과 나의 바깥에서 진행되는 비극들의 시간(④)을 병치시키며, 자신의 시가 나의 혹은 우리의 비극을 써내려갈 수 없는 이유를 반증한다. 그러나 이런 형상화 방식을 2000년대식 정치담론이나 그 이전의 역사주의적 시각, 앙가주망의 작용 요소라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낯선 지점 모럴을 우리는 또 무엇이라 불러야겠는가. 나는 여기서 우리 시의 다음을 보고 싶은 믿음이 있다.
가령 메타시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이 시는 결코 시 쓰기의 신성함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시는 우선 질문하는 것. 시적 주체뿐만이 아니라 타인조차도 억압하지 않는 것. 그리고 우선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소박한 마음, “뉴스를 감자칩을 먹으며 메모했다”고 하는 재미와 가벼움. 그러나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세계의 불편한 심층부를 자극하는, 지극히 인간에 대한 언어적 화학반응들인 것이다. 특히나 “사망자가 팔백 명이라더니 내가 이 시를 쓰는 동안 사천 명으로 늘었다.”는 구절에서처럼 우리는 시를 통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시적 주체/ 시인은 모두 알고 있다. 이렇게 많은 전망과 자기 모럴을 내세운 듯한 시가 어딘지 자꾸 미완으로 보이고, 다음 시, 또 그 다음 시를 불러 올 수밖에 없는 이유도 아마 그런 무력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력함은 하강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 배에서 꺼낸 “음식물을 허연 침을 뚝뚝 흘리면서 핥는 소”의 참혹한 모습처럼 그래도 우리는 쓰고 있다고, 살고 있다고. 더 큰 목소리로 상승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니 내가 읽은 임솔아는 늘 반갑고, 임솔아가 쏟아내는 그 다음 시의 정동들이 더 궁금할 수밖에 없다.


15) 박성준(졸고), 「마이너스 벡터의 시와 줄어드는 주체들」, 『문학과사회』 , 2015년 가을호, 557면.
16) 박성준(졸고), 「이상한 나라에서 결코 또, 이상한 비전에 관한 소고」, 『시로 여는 세상』 , 2016년 가을호, 257면.



5. 그리고 나의 그런 친구들


끝으로 원고를 쓰면서, 이런 시인들이 나를 지나갔음을 밝혀야겠다. ‘대답이 부재하는 질문에 끊임없이 왜? 라는 발생의 형식을 부여하는, 이 시대의 퍼포먼스 시인’17) 김승일, ‘묵시록적인 세계관을 간명하고도 아프게 담아냄’18)과 동시에 진정 조선 마음이 그런 것이라면 나도 그 조선에 가서 살고 싶은 김현, ‘재현 될 수 없을 재현하려고 끝내 쓰는 먼저 쓴 유서’19) 박준, ‘재현을 숙명으로 삼는 언어는 세계의 전체성을 끝내 파악하지 못하는 도구임을 알기에 더 율동, 음악, 재생에 복무’20)할 수밖에 없는 박희수, “현재에 함몰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현재에 속박된 고통을 증거하면서, 시가 응당 있어야 할 자리를 한정해왔던 우리”21)시에 충격을 선사했던 정동-연주자 백은선, ‘나를 잃어버리기로 작정한 독거 청년의 면모’22)를 드러내는 서윤후, ‘타자들, 다른 모나들과 언제나 시시각각 결합하면 또 변용23)되곤 하는 (공동)슬픔-(개별)감각 변주자 안희연, ‘끝끝내 잘 죽지 않는 기분의 시대를 살아가는 시적 주체를 고수’24)하는 유계영, ‘룸펜(Lumpen) 오타쿠의 삶을 살고 있는 섬약한 주체 우성이’25)는 꼭 그날처럼 만두 먹고 싶었을 거라고 믿게 만드는 이우성, ‘이질적 접촉을 통해 비정합적 돌출과 현시의 틈들을 전시’26)하는 임승유, ‘내부에서부터 삐걱대는 언어들로 수리될 수 없는 결함의 집’27)을 보여주는 최정진, ‘은폐와 드러내기로 이질적 운동성(=음악)을 통해 없는 곳에서 뚜렷한 공명의 질감을 선사’28)하는 황유원, ‘작금의 회의적인 세계를 문학 매뉴얼화(=동물화)로 파악하는 시니시즘’29)을 구축하고 있는 황인찬이 그들이다.
이들을 수사하거나 비평하는 잣대를 병렬적으로 인용한 바와 같이, 지금 시단은 다양한 층위에서 개별화된 정동과 활력들로 풍성하다. 그리고 여기서 시 비평의 기능이나 역할 또한 점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적어도) 2010년의 비평은 어떤 담론을 선점하거나 공동화하려고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화된 정동들을 각자 어떻게 읽고 어떤 곳에서 감흥하는지 서로 다른 비평의 장소와 틈입할 수 있는 감각 지점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과정화하는 가운데 시의 다양성만큼 비평의 다양성마저도 억압 없이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획득할 것이다. 다시 말해, 비평은 저마다의 분유된 시각 안에서 보이지 않는 공동적 징후를 가지고, 그것들을 와해한 가운데 연대되고 있는 셈이다. 나의 경우도 그렇다. 시인/비평가로써, 내가 쓰는 비평이 끝끝내 내가 읽은 시의 서간문이 되기를 희망하며, 제1독자의 자리에 ‘나’와 ‘대상 시인’을 설정하면서(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내 시각에 동의해주는 것을 기대하면서, 또 꼭 그렇지 않더라도 굳이 실망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면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들을 지켜보고 참여하는 시/비평 창작 주체자의 자리에서 무언가 논하고 있다는 것이 나는 충분히 즐겁고 재밌다. 나의 (현재와 미래의) 동료들의 재미까지 재밌게 여겨보겠다는 마음 이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나는 한국시가 재밌다. 현재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17) 양경언, 「퍼포먼스 김승일 - 오늘의 김승일을 생각함」, 『현대시학』 , 2015년 5월호, 191-201면 참조.
18) 김언, 「① 미당문학상 예심위원들의 릴레이 심사평」,《중앙일보》, 2016년 8월 15일자, 문화면 참조.
19) 박성준(졸고), 「다 부르지 못한 이름들」, 『현대시』 , 2015년 1월호, 152-6면 참조.
20) 조강석, 「“음악이 생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문학동네』 , 2016년 가을호, 133-150면 참조.
21) 양경언, 「나는 거기에 있지 않다」, 『실천문학』 , 2015년 봄호, 59-60면.
22) 이재훈, 「숨어 있는 잠재성과 열린 가능성의 유희적 결말」, 『포지션』 , 2016년 가을호, 14-8면 참조.
23) 이성혁, 「여행자, 시인, 어떤 모나드」,『현대시학』 , 2016년 3월호, 161-170면 참조.
24) 장은정, 「뒤섞인 채로」, 『현대시』 , 2016년 1월, 112-133면 참조.
25) 박성준(졸고), 「마이너스 벡터의 시와 줄어든 주체들2」, 『문학선』 , 2015년 가을호, 44-6면 참고.
26) 김태선, 「사건의 감각, 언어의 행위」, 『현대시학』 , 2016년 2월호, 232-8면 참조.
27) 장은영, 「도래하는 시」, 『시로여는세상』 , 2015년 겨울호, 191-9면 참조.
28) 박성준(졸고), 「감당할 수 없는 나는」, 『문학들』 , 2016년 봄호, 307-312면 참조.
29) 장이지, 「공위시대의 불안과 그 시적 대응들-변곡점 위의 시인들」, 『포지션』 , 2016년 가을호, 44면 참조.









박성준 시인
작가소개 / 박성준 (시인, 문학평론가)

- 1986년 서울 출생. 2009년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에 시 「돼지표 본드」외 3편, 201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평론 「모글리 신드롬-가능성이라 불리는 아이들」로 등단. 시집 『몰아 쓴 일기』, 『잘 모르는 사이』가 있다.


《문장웹진 2016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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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

  • 관리자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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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름좋아

    시가 좋아 시를 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시를 좋다 나쁘다가 아닌 그 시가 내가 말을 걸기 때문에 나와 공감을 형성할 수 있는 시이기 때문에 나도 말할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티브는 우리옆에서 계속 세상의 일들을 보여주고 우리는 재난사건에 대해 슬퍼 할 사이없이 밀려오는 피로를 어찌할 것인가? 세상은 바삐 돌아가고 공감하며 같이 가야 하는데 나라와 소속과 이해관계에 따라 마음이 가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건 아닌가 생각한다. 집안일이야, 남의 일에 간섭하지마!, 네집안이나 단속 잘 해! 제일 제미있는 일이 불장난이다라는 말처럼 인간의 속성을 너무 고귀하게 만들어 기대치를 높인 결과 인간에 대한 실망만 더 가중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하며 임솔아님의 (티브)라는 시를 읽었다.

    • 2017-04-01 17:35:46
    여름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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