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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도시와 늪에서 발견한 생성의 감각

  • 작성일 2024-02-01
  • 조회수 823

   지하 도시와 늪에서 발견한 생성의 감각

   : 천선란의 『이끼숲』과 김초엽의 『파견자들』에 관하여


조윤정


   1. 지하 도시의 건설과 세계의 배치


   지하 건축은 고대에서부터 이어져 왔던 방식이다. 고대 도시에서 지하는 포도주 저장소와 같은 곳간, 카타콤(Catacomb)과 같은 무덤이나 도피처로 활용되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지하를 훨씬 다양한 형태로 점유하고 있다. 각종 상업시설과 문화시설이 지하 가로망이나 교통 시스템과 바로 연결됨에 따라 지하와 지상의 경계를 허무는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미래의 지하 공간은 현재의 우리 삶을 확장한, 지상과 다르지 않은 지하의 수준을 넘어설 것이다.  

   지하는 고립의 프레임을 넘어 확장성과 입체성을 창출하는 공간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지하 공간은 하늘 위로 높이 솟은 빌딩들이 줄 수 없는 연결의 감각을 제공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를 공간과 공간의 연결로 바라보게 해준다. 또한, 지상의 영향을 덜 받는 지하 공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환경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환경을 임의대로 조정할 수 있는 밀폐형 미래도시는 기후 위기에 따른 재해를 타개하지 못하는 현 상황에서 떠올릴 수 있는 적극적인 대안이다. 

   천선란과 김초엽의 최근 소설1)에 등장하는 지하 도시는 다시금 지하 공간을 도피처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다만, 두 작가의 소설에서 지하 도시는 고대와는 달리 인류 전체가 지하로 옮겨간 형국이며, 지상은 인간이 살아갈 수 없을 만큼 훼손된 곳으로 나온다. 여기에서 국가별 경계를 염두에 둔 지정학적 차원의 문제는 논의되지 않는다.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은 지구라는 행성 단위로 사유된다. 그 속에서 인간은 철저히 통제당하고 감시당한다. 『이끼숲』에서 하루에 한 알 복용해야 하는 “VA2X”(27)와 이마에 삽입된 “칩”(113)은 생명 정치의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다. 또한, 『파견자들』에서 인간에게 광증을 일으키는 “범람체”에 노출된 인간은 보호소로 위장한 연구소에 격리되거나 “실험체”(273)로 관리된다. 

   오늘날 기후나 면역의 위기는 전 지구적인 것에 대한 상이한 이해들에 다가가는 일을 앞당기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천선란과 김초엽의 소설은 세계라는 관념을 흔들고 인류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행성으로 관심을 돌린다. 행성이라는 개념은 언제나 지정학적일 수밖에 없는 지리적 지도들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이 지도들의 경계선은 정복자의 노획물과 다름없으며 국경은 대개 전쟁이나 식민화를 통해 만들어졌다.2) 소설 속 지하 도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세계의 좌표들을 유예하거나 버림으로써 세계의 구조와 한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전도되고 재설정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구 밖의 다른 행성이 아니라 오로지 지구 내에서 모두가 살아 나가야 할 때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배치’의 문제이다. 배치는 무생물로 존재하는 방식까지를 포함한 삶의 방식을 한데 모으는 것이자 그러한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는 열린 모임이다.3) 질 들뢰즈의 ‘아장스망(agencement)’4)에 기원을 둔 배치는 기존 사물들의 낯선 조합과 우연한 마주침을 의미한다. 차이 나는 본성을 가로질러 그것들 사이에 연결이나 관계를 구성한 배치는 다양체를 낳는다. ‘클론’과 접촉한 인간, ‘범람체’에 전염된 인간이 소설에서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기를 인식하게 되는 것 역시 배치의 구성력과 관련된다. 이처럼 배치는 생성을 이끈다. 

   두 작가가 지하 도시를 통해 의도했던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감각은 고립에 반대되는 개방성이다. 즉 그들이 보여준 행성 차원의 기획은 우리를 단일한 자아, 정체성, 경계로 환원하지 않는 탈식민화의 한 형태이다. 『이끼숲』에 나타난 지하 도시의 고용 위기나 산아제한 정책, 『파견자들』에 나타난 파견자의 역할과 범람체의 이동 등은 삶의 ‘불안정성’을 폭로한다. 불안정성은 타자들에게 취약한 상태를 말한다. 작가들은 그 불안정성이 예외적 상황이 아니라 우리 삶의 조건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공동체의 안정적인 구조에 의존할 수 없는 우리는 가변적인 배치로 내던져지고, 이로써 우리와 관계된 타자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재형성된다.6) 불안정성이야말로 협력적 생존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2. 지하와 지상을 연결하는 침투의 감각


   연작소설 『이끼숲』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직업은 다채롭다. 생명공학 연구소인 빅터의 경비원(마르코와 은희), 기계실 정비공(의주), 의사(치유키), 이발사(키머러), 씨앗 저장고의 지킴이(톨가), 통신 기록 관리자(소마), 건설 회사의 굴착 작업자(유오)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소설에서 직업인이 되는 데에는 그다지 장애가 없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이 배치된 그 자리에서 갈등을 시작하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새롭게 바라본다. 그런 면에서 지하와 지상을 오가는 파견자 되기에 대한 열망을 그린 『파견자들』의 직업 세계는 일견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파견자가 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생존 시험은 ‘태린’이란 인물이 무엇이 되기도 전에 마주하는 비인간의 다양성을 통해 사고의 변화를 일으킨다. 두 소설은 존재를 변화시키는 마주침, 즉 ‘오염(contamination)’6)의 창발성을 일깨운다.  

   『이끼숲』에 나오는 다양한 형태의 노동은 지하 도시의 건설과 유지, 시민의 생명 통치 및 관리로 수렴된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산아 제한이 필요했고, 등록되지 않은 채 태어난 아이들은 “‘정체불명’ 혹은 ‘미입력자’ ‘불법 거주자’ ‘비시민’ ‘침입자’ 따위가 되어 체포된다.”(113) 그리고 그들은 의사에 의해 살생된다. VA2X를 복용하지 않거나 나태한 노동자는 “정신재활원”(28)에 잡혀갔다. 통신국에서는 지하 도시의 모든 통신 기록을 “도청하고, 감시하고, 의심”(158)했다. 작업 도중 일어날 수 있는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여 건설 회사와 위원회는 노동자에게 “클론 제작 동의서”(160)에 서명하게 했다. 인간의 식생활과 관련되는 “씨앗”은 저장고에서 관리되었고, “지상과 맞닿은 B1층, 1구역에 있는 온실”(166)은 지하 도시의 주인인 위원장만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미래 도시를 형상화하는 소설에는, 한 무리의 인간들이 나머지 인간들을 지배하려는 숨겨진 시도, 자신이 가한 위해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과 같은 것을 드러내는 탈신비화7)가 작동한다. 

   『파견자들』의 지하 도시 역시 과학 기술에 의해 계획되고 통제되는 생명 정치의 공간이다. 파견자는 지상을 조사하는 사람으로, 지하와 지상을 오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들은 “광증 발현자를 신고하고 격리 수용에 협조하여 미발현자를 보호해야 했다”.(32) 이 도시에서는 광증을 발현시키는 범람체에 노출된 사람들을 격리한다. 광증 발현자는 “감시 기계”(31)에 끌려가고, 그에 저항하거나 도망치면 다음날 더 많은 기계들이 찾아온다. 연구소에서는 범람체가 침투했더라도 “자아 해체 현상”(273)이 발생하지 않은 아이들을 뇌의 범람체 저항성이나 세포와의 상호작용 분석을 위한 실험체로 분류했다. 이로써 그들은 강력한 저항성을 지닌 신인류 만들기 프로젝트에 이용되었다. 광증 발현자나 실험체들은 ‘주체로 간주되지 않는 인구 집단, 즉 인간이 아닌 인간’8)이다. 이처럼 인구 집단의 ‘관리’는 단순히 규제적 권력이 일군의 주체를 생산하는 과정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탈주체화 과정을 뜻하기도 한다. 

   지하 도시의 안전은 내부 구성원의 관리뿐 아니라 지상 공간을 적대시하는 방향에서 유지된다. 지상의 위험성이 부각될수록 지하 도시는 인간이 지켜내야 하는 마지막 영토가 된다. 『이끼숲』에서 지상은 미지의 공간이며, 『파견자들』에서 지상은 탐사의 대상이다. 이 때문에 인간은 지하에 무기한 감금 상태에 놓이거나, 지상의 범람체를 파괴하여 새 기지를 건설할 방법에 골몰한다. 이것은 오로지 인간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다. 인간이 도모하는 구원의 편향성은 이들이 지하 생활을 하지만 땅속 동물과 마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들은 땅속 동물의 다양성으로부터 소외된 채 살아간다. 인간은 지하 도시를 건설하지만 땅속의 작은 동물을 감지할 만큼 예민하지 못하고, 지하수의 흐름과 같은 축축함을 차단한 채 기묘한 생태적 은둔 상태를 유지한다.9)

   지하 도시에서 감지되지 못했던 것에는 인간의 목소리도 있다. 『이끼숲』에 수록된 「우주늪」에는 “배관 통로”(110)를 통해서만 이동할 수 있는 ‘의조’가 등장한다. 사전에 등록되지 않은 상태로 태어난 의조는 다른 사람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 시스템에 기록되지 않아 ‘없는 존재’로 살아가는 의조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할 수 있는 예민한 감각을 요구한다. 지하 도시에서 배관 통로로만 이동하는 ‘인간이 아닌 인간’이 지하 도시로 불어오는 “이전에 없던 바람의 흐름”을 감지하는 것처럼 말이다. 소설 속 의조의 목소리는 보이지 않을 만큼 취약한 존재들과 그들에 대한 우리의 몰이해를 함께 가시화한다. 

   인간이 지상에 발을 딛는 순간, 지구를 구성하는 미세한 ‘비인간들’도 모습을 드러낸다. 『이끼숲』에서 “지상 탐사대”(155)가 되고 싶어 했던 유오는 지상에서 내려온 나무뿌리에라도 가닿고 싶은 마음으로 건설 회사 굴착 작업자로 일하다 건물 붕괴 사고로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유오는 ‘클론’의 형상으로나마 지상의 숲을 보게 된다. 그의 친구들이 유오의 클론을 훔쳐냈기 때문이다. 유오의 클론과 유오를 사랑했던 소마는 지상에 도달하기 위해 연구소에 침투했다. 그들이 지상에 끝끝내 도착하여 숲을 보았다는 점에서 유오의 친구들은, 지상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학습시켰던 지하 도시의 사상을 내파하는 자들이기도 하다. 

   지하와 지상을 연결하는 침투의 감각은 인간이 아닌 다른 개체와의 협력을 통해서도 실현된다. 『파견자들』에서 ‘태린’과 ‘선오’는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도 ‘날벌레의 비행이 일으킨 공기의 흐름과 작은 소리의 의미’(347)를 감지하며 신호를 주고받는다. 환기구를 통해 밀려든 날벌레들이 일으키는 진동 신호는 지상의 늪인들이 지하 도시를 향해 전달하는 위기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태린과 선오가 날벌레의 움직임으로 일어난 분자들의 부딪힘과 확산을 감지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범람체에 노출되었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태린은 자기 안의 범람체에 ‘쏠’이라는 이름을 붙여 대화를 나누고, 태린과 쏠은 서로를 길들인다. 이처럼 인간이 인간을 넘어서는 세계와 맞물리는 지점인 횡단-신체성(trans-corporeality)으로 자기의 신체성을 상상하는 방식은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이 궁극적으로 ‘환경’과 분리될 수 없음을 잘 보여준다.10)

   만약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항상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면, 지구상의 생명체에게 중요한 일은 개별자의 자립성이 아니라 다른 존재와의 협력과 그에 따른 변형을 통해 일어난다.11) 태린은 ‘범람체와 분리될 수 없는 오염된’(385) 자기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범람체에 분자 무기를 주입하여 범람체들의 연결망을 파괴하고 지상을 탈환하려는 지하 도시의 계획을 무산시킨다. 이처럼 강력한 윤리적·정치적 가능성은 인간 신체성과 인간을 넘어서는 자연 사이의 접촉 지대에서 부상한다.12) 태린은 지상 탈환 프로젝트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프로젝트의 중심에 있던 파견자이자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이제프’를 잃는다. 태린의 저항과 상실은 지하와 지상을 오가는 파견자가 마주침의 역사 안에서 항상 “지상에 대한 매료와 증오를 동시에 품는”(158) 불온한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일러준다. 그리고 그가 상실의 경험 이후 선택한 삶이 지상에 “경계 지역”(414)을 만들어 관리하고 조율하는 일이라는 점은, 감시와 정복으로 점철되었던 파견자의 역할을 넘어선 것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3. 닫힌 세계 안의 열린 늪


   천선란과 김초엽의 소설은 지하 도시뿐 아니라 ‘늪’에 관한 상상력을 공유한다. 두 작가가 보여주는 서로 다른 이미지의 늪은 우리가 기존에 늪에 대해 지니고 있던 감각을 전도시킨다. ‘늪에 빠진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늪은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나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이끼숲』에 수록된 「우주늪」에서 늪은 ‘그들이 쫓아오지 못할 곳’(110), 즉 도피처이다. 그리고 『파견자들』에서 늪은 ‘분해와 부패의 과정이 일어나 또 다른 존재가 탄생하는 용액’(234)이다. 

   「우주늪」의 지하 도시에서 숨어 살아야 하는 ‘의조’는 자신을 쫓는 ‘그들’을 피해 엉금엉금 기어 도망 다닐 수 있는 ‘배관 통로’를 ‘늪지대’라 일컫는다. 의조는 어린 시절 자주 불렀던 <악어 떼>라는 동요에 대한 기억을 빌려 자기를 악어에 비유하고, 도망자의 삶을 희화화한다. 배관 통로를 이용해 도망 다니는 의조의 처지는 ‘나를 쫓아오는 사람이 매번 바뀌는 놀이’로 변형된다. 엄마와 함께 동요를 부르며 이불 위로 기어 올라갔던 의조는 그때도 지금도 악어의 천적, 즉 악어를 죽이려 했던 존재로부터 도망쳐 배관 통로로 숨어들어야 한다. 

   그러나 먼지와 더위로 가득 찬 데다 자신을 어디로 떨어뜨릴지 알 수 없는 배관 통로는 의조에게 치유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의조는 자신이 통로에 붙여 놓은 위험 문구 아래 누군가 “고마워요”(132)라고 감사 인사를 써둔 것을 확인한다. 의조가 자신을 위해 마련한 이정표였으나, 그것을 통해 그는 “나와 같은 누군가가, 이 좁은 통로를 기어가는 누군가가, 세상의 늪에 빠져버린 누군가가 또 있구나”(132) 하는 사실을 알고 “첫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해야 할일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바로 ‘고마워요 씨를 만나’는 것이다. 그의 바람은 존재를 인정하는 일이자 타자를 받아들이는 일과 같다.

   연작소설 『이끼숲』이 이끼로 뒤덮인 지상과 그 지상의 끝에 형성된 숲을 목격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이 발견하지 못한 숱한 개체가 탄생과 멸종을 반복했고, 식물의 사체에서 또 다른 개체가 근본 없이 생겨나는 동안 이끼는 가장 낮은 곳에, 다른 식물이 자랄 수 없는 축축한 틈 곳곳에 머물고 있다.”(163) 유오는 ‘환경에 적응해 어떤 개체보다 끈질기게 살아남은’ 이끼에 주목하며, 연구소의 꼭대기 층인 돔에 가면 이끼를 제일 먼저 만져 보고 싶다고 말했다. 소마는 사고로 죽은 유오의 소원을 유오의 클론을 통해서나마 이뤄 준다. 

   이끼는 왕성한 초록의 기운을 뽐내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는 식물이다. 하지만 이끼는 비가 오면 세포 안에 저장한 양의 5~10배나 되는 물을 표면에 잡아들여 기나긴 건기를 이겨낸다. 복잡하고 정교한 세포의 구조는 물을 저장할 뿐 아니라 오염 물질을 맞아들여 세포에 필요한 화학 물질을 보충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한다.13) 이렇게 이끼는 환경에 적응하여 그 어떤 개체보다 끈질기게 살아남아 숲을 살린다. 외부의 것을 몸속에 받아들여 다스리는 법을 5억 년 동안 진화시킨 것이다.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하는 이끼의 오랜 생존은, 생태의 흐름에 정면으로 대결하는 방식이 아니라 내 안의 강한 인력으로 타자를 맞아들이는 방식의 위대함을 일깨운다.

   이끼가 보여주는 환대와 뒤얽힘은 김초엽의 소설에서 ‘범람체들의 진동을 느끼고 이해하는 늪인들’(233)의 생존 방식과 유사하다. 늪은 인간과 비파괴적으로 결합하는 법을 아는 범람체가 사는 곳이다. 늪에서 ‘범람체들은 복잡한 연결망을 이루고 하나의 집단 신경망처럼 작동’(229)한다. 범람체는 인간의 외관만이 아니라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바꾼다. 늪인은 범람화된 생명체이기에 ‘순수한 개체도 아니고, 순수한 인간도 아니다’.(227) 늪인은 비록 원래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져 버렸지만 죽지 않는다. 그들은 ‘범람체와 하나의 신체를 공유하며, 범람화되어 살아남아’(219) 범람체와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마주침과 환경에 따라 모양을 바꾸며 죽지 않는 존재가 된 늪인의 생존 방식은 ‘불확정성’의 의미를 드러낸다. 다시 말해 그들은 우리가 인간의 삶에 대해 확정된 형태와 나이 듦을 당연한 현상이라고 상정해 온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지하 도시의 파견 본부는 늪인과 범람체를 파괴하려 하지만, 태린은 이를 저지하고 범람체에 노출된 이들을 “경계 지역”으로 모아 관리하는 일을 맡는다. 태린은 이미 범람체에 노출되었기에 늪 안에 들어가 범람체와 소통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범람체의 연결망이라는 체계로 잇는다. 늪인들은 태린이 경계 지역을 만드는 일을 도와준다. 경계 지역에서 범람체들은 인간의 자아를 침범하지 않는 법을 습득하고, 범람화된 이들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전이(轉移)자로 칭했다”.(416) 태린은 범람체와 전이자들 사이의 조율을 맡는다. 태린, 늪인, 전이자들의 삶은 단일한 자아 개념을 해체한다. ‘자아는 어떻게든 분리될 수 없고 불변하며, 초월적이고 고유하다는 데카르트적 이상’14)을 의심함으로써 그들은 공존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내가 오직 나로 이루어져 있다는 환상을 버리고, “불균형과 불완전함이 삶의 원리임을 받아들이는” 태도(419)는 늪의 생태와 맞닿아 있다. 늪은 땅의 속성과 물의 속성이 만나 탄생한 제3의 영역이다. 지구 표면적에서 이 습지가 차지하는 비율이 약 6퍼센트에 달한다.15) 늪은 생명체에 제일 중요한 물을 저장하고, 온갖 오염 물질을 받아들여 정화한다. 게다가 질소를 생명체들이 이용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하여 조절한다. 늪은 10만 종에 달하는 생물 다양성을 갖춰 많은 생물의 연결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파도나 해일 등 역동적인 해양 환경에 맞춰 진화해서 금방 재생된다.16) 이러한 늪의 작용은, 존재하는 방식들이 모여 개방적으로 얽혀 있는 배치의 생성력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인간이 이끼의 생존 방식을 선망하고, 인간과 범람체가 소통하는 소설은 의인화의 함정을 비껴나 있다. 우리가 세상을 의인화하면, 비인간을 이해할 때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 그렇다고 비인간을 ‘그것’으로 쓰면 대상을 객관화함으로써 또 다른 함정에 빠진다.17) 두 작가는 비인간에 대한 이해를 위해 인간과 비인간이 접촉하고 학습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런 맥락에서 두 작가의 소설은, 우리가 침투 가능하며 경계 지어지지 않은 신체의 취약성을 인식하고, 타자와 지구에 대한 자신의 ‘상호의존성과 상호 엮임’18)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이해하기를 촉구한다. 그와 같은 연대의 방식이야말로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감각이자, 세계의 한계들을 변화시키는 힘이기 때문이다. “구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278)는 천선란의 바람, “인간이 외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지구를 낯선 행성으로 바꾸어 보자”(430)는 김초엽의 생각은 우리 안에 인간과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느끼는 존재가 있음을 상상하게 이끈다. 그들의 글쓰기는 공동의 세계를 추구하는 삶 속에 또 다른 형태의 자유가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그 자유에 대한 열망 덕분에 소설을 읽은 우리 역시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다양한 삶의 가능성과 마주치게 되었다. 


1) 천선란과 김초엽의 소설 본문을 인용할 때에는 괄호 안에 다음 소설책의 쪽수를 표시하기로 한다. 천선란, 『이끼숲』, 자이언트북스, 2023; 김초엽, 『파견자들』, 퍼블리온, 2023.
2) 주디스 버틀러, 김응산 역,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창비, 2023, 17-18면.
3) 애나 로웬하웁트 칭, 노고운 역, 『세계 끝의 버섯』, 현실문화, 2023, 56-58면. 애나 칭은 질 들뢰즈의 아장스망(agencement)을 번역한 ‘배치’의 개념을 ‘어떤 규모에서도 하나의 장소에 모이게 하는 것’, ‘상호작용하는 구조를 가정하지 않고 존재하는 방식이 모인 것’이란 뜻으로 썼다.
4)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역, 『천 개의 고원』, 새물결, 2003, 12면.
5) 애나 로웬하웁트 칭, 앞의 책, 51면.
6) 위의 책, 63면.
7) 제인 베넷, 문성재 역, 『생동하는 물질: 사물에 대한 정치생태학』, 현실문화, 2020, 23면.
8) 주디스 버틀러, 윤조원 역, 『위태로운 삶』, 필로소픽, 2018, 120면.
9)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 노승역 역, 『숲에서 우주를 보다』, 에이도스, 2014, 325-326면.
10) 스테이시 앨러이모, 윤준·김종갑 역, 『말, 살, 흙』, 그린비, 2018, 18면.
11) 애나 로웬하웁트 칭, 앞의 책, 66면.
12) 스테이시 앨러이모, 앞의 책, 같은 면.
13)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 앞의 책, 64~67면.
14) 아닐 세스, 장혜인 역, 『내가 된다는 것: 데이터, 사이보그,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의식을 탐험하다』, 흐름출판, 2022, 59~60면.
15) 김산하, 『습지주의자: 반쯤 잠긴 무대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사이언스북스, 2019, 50면.
16) 위의 책, 269~272면.
17) 멀린 셸드레이크, 김은영 역,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 아날로그, 2021, 83~84면.
18) 주디스 버틀러, 앞의 책, 2023, 20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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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386세대와 패배하지 못한 혁명들의 시차 임세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 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내일은 미스 김의 보지 냄새 맡아야지 밤섬해적단, 〈386 Sucks〉, 《서울불바다》, 2010. 1. 중단된 혁명 이제는 진부한 제재처럼 감각되는 ‘후일담’의 환멸과 자조 이후 한국 문학에서의 386세대 재현은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성’의 풍광들을 펼쳐 보인다. 이른바 ‘포스트-진정성 체제’1)에서의 속물들의 세계상은 기실 그 문제적 주체로 호명되었던 386세대뿐만 아니라, 386세대에 의해 다시 지목당한 ‘20대 개새끼론’의 대상이었던 ‘88만원 세대’에게도 벗어내기 힘든 혐의였다.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20대 빈곤의 원인이 세대 간 착취에 있다는 통찰 가운데 던져진 “토플책을 덮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2)라는 조언을 (귓등으로) ‘학습’했던 새 세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이었고, 어디로 향하였는가. 타 세대에 의한 명명 대신 “나는 씨발 존나 멋진 이십대 청춘”3)이라며 타락한 386의 ‘흘러간 청춘’을 조소하던 20대는 어느덧 MZ세대의 선봉으로 싸잡아 묶여진 채 40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민주화’라는 ‘명분’ 위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모두 쟁취한 것처럼 조롱되는 386세대에 대한 냉소는 오늘날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4)을 따르겠다는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비대위원장의 취임사로 구현되며 동세대 정치인들의 반발과 분노를 유발하기도 했다.5)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386세대가 이룩한 ‘민주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오염되고 폄훼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민주화 시키다’라는 표현은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강제로 억압하다’는 조소의 뜻을 지닌 채 활용되었다. 입으로는 ‘케케묵은’ 투쟁의 추억을 타령하며 실제 삶에서는 동지를 배신하고 돈과 섹스의 욕망을 좇는 운동권 세대를 저격한 〈386 Sucks〉의 면면은 새로울 것도 없는 386의 전형(stereotype)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 오래된 냉소의 역학 속에서 눈

  • 관리자
  • 2024-07-01
오염, 오류, 오독

오염, 오류, 오독 - 소설이 수행하는 ‘다시’ 황유지 마들렌을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차 한 모금이 어우러진 달콤한 환기 속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마르셀에게 행복을 준다. 그러나 발벡의 호텔방에서 신발을 벗으려다 문득, 할머니가 신을 벗겨 주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지 않는다. 죽은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 그것은 “고통스러운 소멸”을 확인시킬 뿐이다.1)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과거를 부르는 일이 각기 다른 정서를 환기함에 대한 예시로 내밀어지며 ‘기억’에 착종되는 다양한 감정이 주체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소멸의 확인도 그렇지만 미완, 불완전, 불만족인 채로 내버려둔 사건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그건 엄연히 그 일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라 모종의 감정적 자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 이런 ‘다시’는 레트로로 나타난다. Retrospect, ‘추억’에 뿌리를 둔 이 말은 패션, 음악, 영상부터 먹거리, 금융상품에 이르기까지 그 반경을 확대하며 과거로 우리의 기억을 끌고 간다. 과거의 소환은 이 사회에 대한 일종의 환각제이자 자본주의라는 무한한 기계적 힘에 대한 제동, 그 중단의 본능적 발현이다. 이런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고대인들에게 노스탤지어란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된다. 그러니까 레트로는 돌아갈 수 없는(가본 적도 없는) 시절을 향한 자본주의적 환각제이다. 프루스트의 위대한 주제가 사물들을 처음 경험할 때의 무능력이라 파악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은 진정한 경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다른 것을 의도하는 동안, ‘눈가’를 통해 온다면서 그 가능성을 글쓰기에서 찾는다. 기어이 돈을 주고라도 사겠다는 환각성 추억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글쓰기는 상실한 것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정신 작업이랄 수 있다. At the corner of eye, 거기가 바로 진정한 경험이 되돌아오는 자리로 가장 의도적인 두 번째 경험, 글쓰기는 그 형식이 된다. 2) 글쓰기는 행해짐과 동시에 복수의 행위자를 탄생시킨다. 쓰는 자와 읽는 자,3) 이는 시차(時差)와 함께 탄생하며 텍스트가 현실과 맞닿은(혹은 결별한) 그 부위에 필연적으로 틈을 만든다. 대체로 모든 문제는 이 ‘틈’에서 태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틈은 이미 분리, 분절된 것으로 존재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메우든 결코 원본의 형태를 완벽히 구현할 수 없다. 원본처럼 복원한 것조차 복사본일 따름이라 틈은 그 자체 오류가 되는 것이다(가령 원본이 틀린 것이라 할 때도 제대로 수정된 본은 오류가 된다. 틀린 원본에 대해 기어이 맞추어진 진실

  • 관리자
  • 2024-07-01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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