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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목

  • 작성일 2023-06-01
  • 조회수 2,923

삽목

권여름


   간병 바통을 엄마에게 넘기기로 한 전날 밤,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뜻밖의 소식이었다.
   - 안녕하세요. 어진 쌤 제자 김윤하입니다. 쌤이 전달해 달라는 게 있어 연락드려요.
   어둠 속에서 얼굴로 쏟아지는 휴대폰 불빛에 미간을 찌푸리며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어진 언니의 이름에 쌤, 이라는 단어가 붙는 게 어색했다. 누구를 가르칠 만한 재목이 못 됐다. 그게 무엇이든, 누구에게든.
   김윤하는 병원 로비까지 찾아왔다. 내게 문자를 보낸 바로 다음날 아침이었다. 대학 과잠을 입은 김윤하가 휴대폰을 귀에 댄 채 멀리서부터 꾸벅 인사를 했다. 긴 생머리가 흐트러졌다가 모였다. 어진 언니를 쌤이라 부르는 애는 대체 어떤 애일까. 어젯밤 머릿속에는 가상의 얼굴들이 떠다녔다. 대면한 김윤하는 상상 속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병원 로비를 둘러보던 김윤하는 놀란 표정이었다.
   “여기 사람 진짜 많네요.”
   “아픈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거 나도 여기 와서 알았어요.”
   김윤하는 싱긋 웃더니 어깨에 멘 가방을 무릎에 내려놓고 지퍼를 열었다.
   “어진 쌤이 부탁하신 거…….”
   백팩에서 두어 번 접힌 종이가방이 나왔다. 네모반듯한 게 들어 있는지 부피감이 느껴졌다.
   “어진 쌤이 위안화로 보낸 걸 한국 돈으로 바꾼 거예요.”
   “돈이요?”
   내가 놀라자 핸드폰 화면을 보여줬다. 언니와 김윤하의 대화였다. 날짜를 보니 일주일 전이었다. 삼남매 단톡방에서 언니가 마지막으로 카톡을 확인한 날짜와 일치했다. 그날 이후 문장 옆 숫자 1은 지워지지 않았다.
   - 윤하야, 부탁해. 고마워.
   문장 바로 아래 송금 내역이 보였다.
   - 60,000¥.
   “6만 원이에요.”
   김윤하가 접힌 종이가방을 건넸다. 6만 원이라는 말에 잠깐 어리둥절했다. 김윤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장난기 담긴 미소를 지었다.
   “위안화 6만 원이요.”
   언니가 중국에 있다는 게 실감났다.
   - 나 중국에 왔어.
   언니가 처음 이 문자를 보냈을 때부터 나는 줄곧 의심했다. 아무런 맥락도 없이 중국이라니. 언니는 10년 동안 중국과 관련된 사진 한 장 전송하지 않았다. 중국 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도 물론 없었고. 살아 있는 거 맞음? 내 문자에 간단한 답신만 보낼 뿐이었다. 살아 있지, 당연히.
   언니가 중국에 갔다는 소식을 처음 전했을 때, 아빠 얼굴이 일그러졌다. ‘샹그릴라’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지역을 여행한 후 아빠는 중국이라면 치를 떨었다. 단 한 차례의 경험으로 다신 가지 못할 곳으로 속단했다. TV에 그 근처만 나오면 여행 중 겪었던 일을 말하며 혀를 끌끌 찼다. 해외를 갈 거면 배울 데가 많은 곳으로 갈 것이지. 가도 꼭 저 같은. 아빠는 가끔 그런 말을 하다 입을 꾹 다물었다. 얼마나 많은 대학생에게 편협함과 신경증을 들켰을까. 아빠가 일찍 일이 끊긴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이가방에는 오만 원짜리 두 묶음이 들어 있었다. 얼마쯤 되는 걸까. 가늠하려던 사이 김윤하가 계산기 앱을 열었다.
   “1위안이 팔 때 기준으로 190.12원이니까, 11,407,200원이에요.”
   천만 원이 넘는 돈이었다. 동봉한 흰 봉투 위에는 ‘407,200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잔액은 따로 담은 모양이었다. 그 돈을 본 순간 며칠 새 늘어난 신경질과 우울감이 병원비 탓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외동처럼 간병 독박을 쓰고 있다는 억울함이 잠깐 누그러졌다.

   일주일 전, 입원 당일 배당된 병실은 얄궂게도 특실이었다. 직원이 빨간 색연필로 특실 글자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설명할 때, 나는 창구 앞에 놓인 입원실별 가격표를 재빠르게 훑었다. - 특실 G 1일 66만 원. 건강보험 적용 X.
   입원 전 병실 희망에 다인실 또는 2인실로 체크한 건 무용지물이었다.
   “입원 당일에 나오는 병실 중에 최대한 그 희망에 맞추어 드린다는 거지, 딱 그 병실로 배정되는 건 아니에요. 저희도 어떤 게 비는지 당일에나 압니다. 아, 그리고 특실 중에서는 G가 가장 저렴합니다.”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다. 휴대폰을 열었다. 독박을 쓰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만들었던 삼남매 단톡방에 들어갔다. 아빠의 발병 직후부터 관련 소식을 촘촘하게 전달했다. 엄마가 아직 건강해서 당장은 보호자로서 짐을 나눌 수는 있었다. 하지만 엄마마저 아프게 된다면. 그런 상상을 하자 모골이 송연했다. 감당해야 할 비용도 비용이었고, 시간도 문제였다. 마음의 무게를 셋이 똑같이 짊어지길 원했다. 돈, 시간, 마음. 그게 무엇이든 공평하게 N분의 일. 누구 하나 억울할 일도 미안해할 일도 없이 말이다.
   - 보험은 왜 안 든 거야. 진짜 대책 없지 않아?
   단톡방에 던진 문장 옆 숫자는 한 시간이 지나서야 2에서 1로 바뀌었다. 한참 있다가 덕진 오빠가 한 마디 던졌다.
   - 그래도 미국에 비하면 싼 거지.
   언제부터인가 오빠와 나만 말을 주고받았다. 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어도 문장 옆 숫자는 지워졌다. 읽고는 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이후로 숫자 1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언니가 천만 원을 보내온 것이다. 불쑥 보내온 천만 원이 반가우면서도 의구심이 들었다.

   이만 가보겠다며 일어서는 김윤하의 가방을 잡았다.
   “학생, 혹시 조용한 곳에서 차 한잔할 수 있어요?”
   대형 병원 어디에도 조용한 곳은 없었다. 지하로 내려가 푸드 코트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음식 냄새와 커피 향이 섞였으나 그것도 감지덕지했다.
   “언니가 뭘 가르친 거예요?”
   김윤하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욱 빨았다.
   “병원은 원래 이렇게 더워요?”
   커피가 시원한 모양인지 만족스러운 탄식을 뱉은 뒤 말을 이었다.
   “어진 쌤 되게 유명한데.”
   “선생님이라고 하는데 어떤…….”
   김윤하가 무구한 눈빛으로 되레 내게 물었다.
   “정말 모르시는 거예요?”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언니가 무엇으로 유명해질 수 있을지 헤아려 보았다. 그냥 유명한 것도 아니고 되게 유명할 수 있는 거. 그럴 낌새라도 보였던 것이 있었나. 성적은 늘 꼴등이었다. 운동부나 특수 학급 아이보다 석차가 낮게 나오곤 했다. 차라리 찍으라고 했잖아. 찍으라고! 엄마가 소리를 지른 날도 있었다. 몸도 말도 굼떴고, 뭐든 삐걱댔다.

*

   엄마는 초등학교 교사였고, 아빠는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식당에서 한 대학생이 쑥스러워하며 교수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던 날이 또렷이 기억난다. 그때 엄마는 명망을 얻은 귀부인이나 된 듯 우아한 미소를 띠었다. 비록 정교수는 아니었지만, 아빠가 대학생을 가르친다는 것에 어느 정도 만족했다. 하지만 아빠는 여러 대학을 떠돌았고, 이른 시기에 일이 끊겼다.
   몇 가지 행운이 겹쳐 내가 지도교수 퇴임과 동시에 우리 대학 최연소 교수로 임용이 되었을 때, 아빠는 울먹였다.
   “이제 죽어도 한이 없지, 난.”
   그 말을 한 지 한 달도 못 되었을 때였다. 아빠는 집 마당의 사과나무 앞 팻말을 교체하느라 쪼그렸다가 일어서며 심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네 아버지 있잖아, 무슨 대단한 병일까 봐 겁을 잔뜩 먹었어.”
   엄마는 호들갑 떠는 아빠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던 아빠는 시한부 선고나 받은 사람처럼 우울한 낯빛으로 병원을 찾아다녔다. 온갖 검사 후, 어지럼증의 원인이 청신경종양이란 게 밝혀졌다. 아빠는 종양이라는 단어에 사색이 되었다가 의사가 재빨리 양성이라고 말해 주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귀 안쪽에 난 일종의 사마귀 정도로 생각하세요.”
   의사는 그렇게 말하며 크게 불편하지 않다면 굳이 제거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약간의 위험인자는 될 수 있다고 하자 아빠는 몹시 불안해했다. 의사는 좀 더 지켜보자고 했지만, 걸리적거리는 걸 몸에 둘 수 없다고 팔팔 뛰었다. 몸에 어떤 흠도 없어야 속이 시원한 사람이었다. 몸은 앞으로 없어야 할 게 생기고, 있어야 할 게 없어지는 쪽으로 낡고 삐걱대며 물러질 것이다. 몸 자체가 걸리적거리는 날이 올지도. 아빠가 그걸 견딜 수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벌써 끔찍했다.
   아빠는 청신경종양 국내 명의를 검색하고, 그중 최종 후보 셋을 선정했다. 세 의사의 논문을 찾아 읽고 비교한 뒤 자신의 주치의를 낙점했다. 그렇게 찾아간 주치의 앞에서 논문으로 익힌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다 결국 한소리를 들었다.
   “장재엽 님, 제가 전문가니까요, 예.”
   아빠는 더 이상 대꾸하지 못하고 얌전한 양이 되어 자기 신체를 전문가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처음 설명을 들었을 때는 분명 간단한 수술이었다.
   “어딜 칼로 가르는 수술 아니니까.”
   엄마도 그렇게 말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주치의의 짧은 외래 진료가 끝나고, 다른 의료진과 골방으로 들어가 수술 날짜를 확정하고, 수술 안내 및 주의사항을 들었다. 귓속에 내시경을 넣어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로 3시간 정도 걸릴 것이라고 했다. 드물게 내시경만으로 깨끗이 제거되지 않는 경우가 있고, 그럴 땐 귀 뒤 머리를 찢은 뒤 제거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역시 드물게 수술 직후 환자 상태가 위급해질 수 있는데, 그때는 중환자실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유사시를 위해 면피용으로 안내되는 최악의 상황들에 나는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막상 수술이 시작되고 ‘드물게’ 일어날 수 있다고 안내된 모든 일이 일어났다. 수술은 애초의 예상 시간을 훨씬 초과하여 9시간 만에 끝이 났다. 아빠는 수술 직후 일반 병동이 아닌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수술 시간이 예상보다 3배가 소요되면서 입원 기간과 비용도 덩달아 3배로 늘었다. 수술 후 온갖 줄을 몸에 달고 며칠을 견뎌야 했던 아빠는 몸이 조금 회복되자 자신의 계산이 틀린 것에 몹시 분개했다.

   어진 언니도 엄마 아빠의 틀린 계산 같은 걸까. 학습 부진아가 태어날 확률을 엄마 아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산부인과에서 아이가 바뀐 이야기가 티브이에 나올 때마다 오묘한 표정으로 언니를 바라보기도 했다.
   “어진이는 정말 제 엄마 아빠를 빼다 박았어, 그렇지 않아?”
   명절이나 가족 모임 때, 친척들은 한 번도 빠짐없이 그런 식의 말을 했다. 나는 친척 어른들이 몹시 집요하다고 느꼈다. 언니가 엄마 아빠의 자식이 맞는다는 걸 어떻게든 확인시켜 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 같았다.
   언니는 어릴 때 제법 기발한 말을 많이 해서 엄마와 아빠를 기쁘게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공상하느라 학습을 놓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게 영재 아이들의 특성이기도 한 것 같아서 설렜다고 엄마는 말하곤 했다.
   그런 자신감은 엄마와 아빠 모두 영리함으로 동네에서 이름을 날린 어린 시절에 기인했다. 엄마는 고입 만점의 지역 명문 여고 수석 입학생이었고, 아빠는 산골 마을에서 서울까지 영재 테스트를 받으러 가기도 했다. 둘은 초등 교사와 시간 강사의 삶이 어릴 적 명망에 비해 초라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아침 방송에 단골 패널로 나오는 여성 학자를 보며 엄마는 자신보다 한참 빠지던 애였다는 걸 밝히기 위해 애를 썼다. 비슷한 상황에서 아빠는 말없이 채널을 돌렸다.
   내가 뭐 노벨상 타라던? 엄마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 세계적이고 위대한 트로피를 바란 게 아니란 건 진심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바라는 건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의 소박하고 잔잔한 명성이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쉬운 건 아니었다. 오빠와 내가 그 기대를 어느 정도 충족했다면, 언니는 우리의 평균을 지나치게 갉아 먹었다.
   그런 언니를 쌤이라고 부르는 여대생이 커피 속 얼음을 얌전히 씹어 삼키는 걸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 쌤 덕분에.”
   김윤하는 앉은 채로 휙 돌아, 대학 이름이 영문으로 써진 등을 보여주었다. 고졸에서 학력이 멈춘 언니가 무슨 수로 이 아이를 명문대에 보낸 걸까. 김윤하가 뜻밖의 말을 전했다.
   “어진 쌤 별명이 자소서의 여왕이잖아요.”
   “자소서?”
   “자기소개서요. 자소설이라고도 해요. 열심히 지어내기도 하는 거라.”
   김윤하가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해외에서 특례입학을 준비하는 아이들도 자기소개서가 입시의 필수 서류 중 하나였다. 혼자 쓰는 애들도 있지만 드물다고 했다. 학교나 부모 또는 사교육을 통해 완벽에 가까운 자기소개서를 만드는 게 고3의 일 중 하나라고 김윤하가 말했다.
   언니가 글을 잘 썼나? 어릴 때 백일장에서 시를 써서 상을 받아 온 적은 있었다. 하지만 집에서는 그걸 별로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는 언니의 운문 부문 우수상보다 내가 받아온 논술대회 장려상을 더 높이 평가했다.
   “어진아, 다음엔 산문을 써. 줄글 말이야, 긴 글. 시 이런 거 말고.”
   훗날 언니는 부모에게 아주 긴 글을 남겼다. 엄마와 아빠는 그 긴 글을 보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나 이제 새끼 둘이야. 하나 없어.”
   엄마는 그렇게까지 말했다. 어진 언니가 가출하며 남긴 A4 여섯 장짜리 편지 서두는 이러했다.

   - 고경희 씨와 장재엽 씨에게.
   매일 밤, 밥통이 나를 따라다닙니다.

   아빠는 엄마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법은 없었다. 가끔 어진 언니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짧게 내뱉곤 했다. 머리통에 밥만 들었나. 이 말을 할 때 아빠의 샌님 같고 온순해 보이는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는데, 나는 그게 늘 섬뜩했다.
   아빠가 언니에게 처음 ‘밥통’이라고 부른 날을 기억한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언니가 4학년 때였다.
   “우리 어진이가 있잖아, 좌향좌 우향우를 그렇게 헷갈려 하더라고.”
   당시 언니와 나는 엄마가 교사로 있는 학교에 다녔다. 엄마는 동료이자 언니의 담임이던 선생이 가볍게 한 말에 얼굴을 붉혔다. 엄마는 그날, 단소를 들고 마당에서 언니와 마주섰다.
   마당 한쪽에는 사과나무가 자랐다. 붉던 꽃망울은 어찌 된 일인지 만개하면 하얀 꽃잎으로 변했는데 나는 그게 늘 신기했다. 엄마가 언니를 세워 두고 좌향좌 우향우 훈련에 돌입한 것은 사과꽃 봉오리들이 벌어져 초저녁 공기 속에 하얗게 부서지던 날이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온 집 안에 울렸다. 나는 방 안에 선 채로 그 소리를 빠짐없이 들었다.
   좌향좌.
   우향우.
   우향우.
   좌향좌.
   아니, 좌가 왼쪽이라고, 왼쪽. 왼 좌, 왼 좌!
   시간이 얼마간 흘렀다. 제법 안착을 한 모양이었을까. 엄마 목소리의 날이 조금 무뎌지는 것 같더니 곧장 난도가 올라갔다.
   좌.
   우.
   좌.
   좌.
   좌.
   우.
   우.
   툭하면 툭 나오게. 몸을 툭 치기만 하면 자동으로 툭, 몸이 내뱉을 수 있도록. 뭐든 그렇게 하라고 했다. 하지만 언니는 결국 좌향좌 우향우를 툭 치면 툭 나오게 익히지 못했다.
   희한하게도 김윤하를 만나면서 내내 그때가 떠올랐다. 좌, 우, 좌, 우……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응? 뭐 하는 짓이냐고. 엄마의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단소가 계단에 나뒹굴었다. 마당의 소란에 현관문이 열렸다. 거실에서 듣다 못한 아빠가 밖으로 나간 것이다.
   “저 밥통 같은 게.”
   목소리에 분노와 멸시가 붙어 있었다. 우지끈, 하고 무언가가 거칠게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사과나무 가지일 터였다. 나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귀를 막았다.
   “나 있잖아, 그때 반 포기했어.”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

   김윤하가 학교에 가야 한다고 일어섰다. 궁금한 게 더 생겨났지만, 더는 붙잡을 수 없었다.
   “저, 혹시 어진 쌤에 대해 더 알고 싶은 게 있으시면…….”
   한인 커뮤니티 카페를 알려줬다. 거기에 어진 언니의 흔적이 있다고 했다. 폐쇄적인 카페라 베이징에 살지 않으면 가입이 힘들었다. 복사해서 쓰세요. 윤하가 카페에 가입할 때 필요한 실제 주소를 문자로 보내 주었다. 가입을 위한 세 가지 퀴즈가 나와 캡처해서 보내자 신속하게 답신이 왔다. 거기에 더해 어진의 정보를 찾기에 좋은 검색어까지 발송해 주었다. #자소서의 여왕, #자소서, #어진 쌤, #장어진 선생님. #장라오시. #세 줄 자소서.

   - 상해맘이 장라오시 소개해 달라고 합니다. 알려줘야 할지 고민이네요.
   - 애가 세 줄 자소서 때문에 어제 만나고 왔는데, 그 쌤 거의 접신이라고.
   - 스펙 없어서 걱정인데, 아이가 다녀오더니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해서 안심이네요.
   - 북경맘한테만 전번 알려드려요, 쪽지에 지역 인증해 주세요.

   언니의 명성이 베이징을 넘어 상하이까지 퍼진 모양이었다. 특례입학 시즌일 때는 상하이나 칭다오 교민에게 어진 쌤을 소개해 줘야 하나, 마느냐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했다. 같은 교민이고 자식 키우는 사람들이 그러면 못 쓴다는 쓴소리에 네 자식도 고3 되어 보라고 맞받아치는 댓글도 있었다. 언니에 대한 이야기에서 단연 눈길을 끈 건 그것이었다. 세 줄 자소서.

*

   보호자 한 명만 들어갈 수 있어서 병동 입구에서 엄마를 만났다. 종이가방을 열어 보더니 엄마가 깜짝 놀랐다. 어진 언니가 보낸 거야. 이 말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수로?”
   엄마는 순간 울컥하더니 웅얼거렸다.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더니, 굽은 나무가.”
   나도 모르게 피식했다. 가족 곁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언니가 천만 원에 선산을 지키는 굽은 나무가 되었다. 교사 시절 엄마는 집에만 오면 학급 평균을 깎아 먹는 아이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잘근잘근 씹느라 바빴다. ‘고경희가 맡은 반은 무조건 1등.’ 이 전근대적이고도 소박한 명망에 엄마는 진심이었다. 평균을 깎아 먹는 소위 문제 덩어리 몇을 거론할 때마다 언니를 바라보며 슬픈 눈빛으로 말했다.
   “학급은 일 년에 한 번 바뀌기라도 하지.”
   언니는 대학 입시에도 실패했다. 언니가 대학을 못 간 것도 순전히 평균 때문이었다.
   학생 한 명이 아쉬운 학교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언니는 대학에 가고 싶다고 울기까지 했는데, 엄마 아빠가 반대했다. 오빠가 이룩한, 그리고 조만간 내가 이룩할 명성에 평균을 깎아 먹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말도 안 되는 후미진 곳의 대학에 가는 것보다 재수를 하는 게 평균을 덜 깎아 먹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언니는 떠돌기 시작했다. 오빠에 이어 나까지 명성이 드높은 대학에 가고, 부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석사와 박사 과정을 밟는 동안 언니는 멀어졌다. 부모의 편협한 혐오의 말을 듣고 자란 탓에 나는 여행지로도 그곳이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언니는 보란 듯 중국으로 날아가 10년을 넘게 지냈다. 문득 대학에 가고 싶다고 울었던 언니가 무슨 과를 지망했는지 궁금했다. 떠올리려 애썼지만,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

   - 언니, 이거 무슨 돈이야. 돈 보내고 왜 말이 없어?
   대화창의 숫자는 그대로였다. 사라지지 않는 숫자 ‘1’을 보자 짜증이 밀려왔고 뭔가 불안했다. 얼마 안 가 김윤하에게서 연락이 왔다.
   “저, 혹시 어진 쌤한테 연락 왔나요?”
   “학생한테도 연락이 없는 거죠. 중국에서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뭐 일이라면 일인데……. 그거 때문에 쌤이 사라졌을까요? 아닐 거 같은데…….”
   “일이 있기는 했던 거예요?”
   “자소서가 사라진대요.”
   김윤하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교수회의에서 입학처 직원이 나와 입시 전반에 관한 연수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들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났다. 내년부터 대학 입시에서 자기소개서가 사라진다. 국내 입시는 물론 해외 특례 입시에서도 더 이상 자기소개서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기소개서가 의심받은 게 최근 한두 해만의 일은 아니었으니 당연한 수순이라고 모두 입을 모았다.
   “어진 쌤이 그렇게 충격을 받은 모습, 진짜 처음이었어요.”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자기소개서를 쓰는 것밖에 없는 것처럼 절망했다고 김윤하가 말했다. 자기소개서가 입시에서 사라졌다고 해도, 취업이나 여러 상황에서 분명 필요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언니가 그렇게 충격을 받고 흔들렸다는 게 의아했다.
   “다른 건 재미없고 의미도 없대요. 오직 열아홉 살의 자기소개서만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 어진 쌤이 좀 엉뚱한 면이 있잖아요.”
   알지 않느냐는 투로 김윤하가 말했을 때 나는 언니를 떠올렸다. 언니는 엉뚱했던가.
   “어진 쌤이 이상하고 무섭다는 애들도 있었어요. 특이하다는 거죠. 전 그 점이 좋아요, 저 어진 쌤 팬이잖아요.”
   팬이라니. 언니가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라는 게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어떻게 팬이 된 거예요? 내 질문에 김윤하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쌤이 가르친 애 중에 제가 유일하게 대학에 떨어졌잖아요.”
   좋은 기억은 아니었을 텐데, 특별한 훈장이나 되는 것처럼 말했다. 나와 첫 만남에서 등을 돌려 보여준 그 대학은 재수로 들어간 것이었다. 대다수가 특례입학으로 한국 대학에 들어가서 떨어지는 아이가 오히려 드물다고 했다. 상대적인 박탈감 때문에 김윤하의 상심이 더 컸는데 놀라운 건 본인보다 어진 언니가 더 힘들어했다는 것이었다. 자기소개서가 당락에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믿는 사람은 사실 얼마 없다는 게 김윤하의 설명이었다.
   “공부밖에 한 게 없어서 쓸 말이 없습니다, 라고 자소서에 한 줄 쓴 남자애가 있었거든요. 걔가 하도 떠들고 다녀서 우리 다 알고 있었어요. 근데 걔 덜컥 합격한 거 있죠.”
   그 사건 이후로 김윤하의 학교에서는 입학사정관들이 자기소개서를 읽지도 않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공식적으로 배점이 부여된 서류이니 최선을 다해 준비는 하지만 떨어졌다고 해서 자기소개서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도 언니는 자소서가 당락을 결정한 것처럼 실의에 빠졌다.
   “되게 감동이었죠. 학교 쌤부터 학원, 과외 쌤 모두 내가 떨어진 게 자기 탓이 아니라는 걸 밝히느라 정신없었거든요.”
   언니는 다음 해 입시 때까지 보수를 받지 않고 윤하의 자기소개서 첨삭을 도왔다. 나는 줄곧 궁금했던 걸 물었다.
   “카페에서 세 줄짜리 자소서란 말이 있던데, 그건 뭐예요?”
   “어진 쌤이 세 줄짜리 자소서로 유명했어요. 정확히 말하면 세 줄로 시작하는 자소서. 애들이 세 줄만 써 가면 여섯 장을 만들어 줬어요. 음…… 저도.”
   “편하게 말하면 대필, 그런 건가요?”
   “모르는 사람에겐 그렇게 들릴 수도 있는데요. 뭐랄까, 어진 쌤이 써주셨지만 제가 쓴 것 같기도 해서 대필이라고 하기엔 좀…….”
   김윤하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쌤이 분명히 말했어요. 모두 내 안에 있던 거라고.”
   김윤하는 대필이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자세히 상황을 설명했다.

   세 줄짜리 자소서를 의뢰한 학생들은 세 줄을 써 가야 했다. 언니가 요구한 세 줄은 얼핏 쉬운 것 같지만 꽤 어려웠다. 재수생이 된 김윤하는 세 줄로 끝나지 않고 언니 집에 일주일에 서너 번은 들러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했다.
   김윤하는 자기소개서의 문항 중 ‘해외학교 재학 경험 중 힘들었던 점을 쓰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쓰시오.’에 대한 글을 가장 어렵게 작성했다. 학교에서 구한 모범답안이 있기는 했다. 학생들의 서사 흐름이 비슷했다. 문화나 언어 차이로 어려움을 겪고, 어떤 계기를 통해 용기를 내어 그것을 극복하고자 노력하며 성공했다. 대략 이런 서사였다. 하지만 언니는 그런 빤한 게 아니라 진심으로 힘들었던 기억을 끄집어내라고 주문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어진 쌤이랑 이야기하다 보니 희한하게 정말 떠오르더라고요. 힘들었던 그 순간의 장면이나 감각이 말이에요.”
   베이징에 있는 캐나다계 국제학교를 처음 입학했을 때 김윤하는 낯선 언어를 말하는 아이들과 선생님이 무서워서 온종일 화장실에 앉아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언니는 김윤하에게 물었다. 화장실에서 어떤 냄새가 났니. 그 질문을 듣자마자 김윤하는 불현듯 화장실을 휘감던 장미 향 방향제 냄새를 맡았다. 눈물을 닦기 위해 뜯은 화장지에서 떨어진 먼지에 사레들린 기억. 쓰라렸던 목구멍. 변기에 앉아 화장실 벽에 기대었을 때, 왼쪽 이마에 닿던 플라스틱 문의 서늘함. 그것에 대해 세 줄을 쓰자 언니는 김윤하에게 이렇게 말했다.

   - 다 됐다. 몇 페이지가 나오든 모두 네 안에 있던 거야.

   자기소개서를 감성적인 수필처럼 쓰는 건 금기였다. 자소설이라는 자조적인 말이 있긴 했지만, 소설처럼 쓰면 더더욱 안 되었다. 자소서는 객관적인 증거를 들이밀며 자신이 우수한 학생임을 입증하는 논리적인 글이었다. 언니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나 지극히 문학적인 한 줄. 감성적인 장면, 감각적인 한 줄은 꼭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걸 자소서에 넣는 순간 믿을 거라고 했어요. 이 이야기가 진짜라는 걸.”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단 세 줄로 남의 이야기를 여섯 장이나 쓸 수 있었을까. 나의 질문에 윤하가 목소리를 낮췄다.
   “밥통이 써준대요.”
   “밥통?”
   밥통이라는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기 안에 밥통이 있는데, 그 밥통이 말을 해준대요. 커다란 입을 딸그락딸그락 움직이면서 문장을 불러 준대요. 진짜 귀엽지 않아요?”
   “학생한테 밥통 이야기를 했어요?”
   “제가 왜 중국에 왔느냐고 물은 적이 있거든요. 밥통을 떼어내려고 중국까지 온 거라던데요? 그런데 밥통이 따라왔대요. 자꾸만 자기를 괴롭혔대요. 어느 날은 옥상엘 올라갔대요. 너무 괴로워서 뛰어내리려고 올라간 건데, 거기서 글쎄 밥통을 받아들였대요. 밥통을 받아들이다니. 어떻게 받아들였느냐고 물어 봤죠. 나는 밥통이다 하고 외치니까, 밥통이 자기 입속으로 들어와 버렸대요. 그렇게 밥통이 사라졌다는 거예요. 진짜 뭔가 대단하지 않아요? 쌤이 그 말을 다 하고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나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아무 말 없이 어깨만 슬쩍 올렸다 내렸다.
   “진작 꿀꺽 삼킬걸.”
   이때 언니의 표정은 어땠을까. 진작 꿀꺽 삼킬걸. 나는 이 말을 괜히 입안에서 굴려 보다 삼켰다.
   김윤하의 목소리에 언니를 좋아하는 마음이 뚝뚝 흘렀다. 언니의 팬이 맞는 거 같았다. 언니 이야기를 할 때마다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금세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김윤하는 내게 알 수 없는 걸 물었다.
   “근데 쌤은 정말 어디로 간 거예요? 쌤 보고 싶은데.”

*

   - 저 이번에 중간고사 끝나면 집에 가요.
   김윤하에게 문자가 온 건 긴 통화 이후 한 달이 지나서였다. 여전히 ‘1’은 지워지지 않았다. 김윤하의 본가는 아직도 베이징에 있다고 했다.
   - 어진 쌤 집에 가보려고요.
   - 다녀와서 소식 전해 줄 수 있나요?
   - 당연하죠.
   일주일 뒤, 김윤하가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짐만 두고 바로 언니 집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했다. 연락을 준 건 고맙지만 어쩐지 조금 두려웠다. 어쩌자고 생중계야. 속으로만 그렇게 말했다.
   언니네 집 앞까지 가는 동안 흔들리는 화면 속에서 이국의 말들이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왔다. 행인의 전화소리, 아이들의 밝고 높은 목소리들이 섞여 평화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여기예요, 쌤 집.”
   화려한 외관과 달리 아파트 복도는 어두웠고, 지저분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김윤하가 현관문 앞에 섰다. 초인종을 눌러도 응답이 없었다.
   “잠깐만요.”
   윤하가 카메라를 문 앞 화분에 비췄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는지 화면이 까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 김윤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와, 진짜 있네.”
   화분 바닥에 숨겨져 있던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열었다. 작은 거실에 방 하나를 갖춘 원룸형 아파트였다. 내부는 분위기가 우리나라와 달라 좀 생경했다. 벽이나 바닥 마감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허술해 보였다. 살림은 단출했고, 흐트러진 물건 하나 없이 말끔했다. 거실을 지나 방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임시 숙소처럼 간결해 보이던 거실과 달리, 벽에 뭔가가 달려 어수선해 보였다.
   “벽에 걸려 있는 게 뭐죠?”
    “아, 이거요.”
   김윤하가 카메라를 벽에 가까이 댔다. 티셔츠와 점퍼, 모자 같은 것들이었다.
   “우리 학교 것도 사왔는데, 정작 어진 쌤이 안 계시네요. 잠시만요.”
   김윤하가 옷걸이 하나를 집더니 입고 있던 과잠을 벗어 벽에 걸었다.
   “합격한 애들이 샘한테 선물해 준 거예요. 쌤이 이 선물을 가장 좋아해서.”
   부적 같은 거야. 트로피들이기도 하고. 어진 언니가 그렇게 말하곤 했다며 윤하가 웃었다.
   “와, 근데 많긴 많아요. 오랜만에 보니 장관인데요? 제가 보여드릴게요.”
   김윤하가 카메라를 들고 천천히 뒷걸음을 쳤다. 카메라는 흔들리며 피사체에서 점점 멀어졌고, 천천히 벽면 전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벽에 빈틈없이 온갖 대학의 과잠과 과티, 대학 이니셜이 새겨진 캡모자, 에코백이 걸려 있었다.
   그걸 보는데 언니가 만들어 놓았던 마당의 작은 구멍이 떠올랐다. 좌향좌, 우향우를 훈련하던 그날 엄마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반 포기했다고 선언하던 그 저녁에 만들어진 것.
   “기집애가 갑자기 빙글빙글 뒤꿈치로 땅을 파면서 돌기 시작하는 거야.”
   아침에 마당에 나가는데, 엄마가 이모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당은 간밤에 내린 이슬비로 촉촉했다. 전날 밤 언니가 뒤꿈치로 만들어 놓은 작은 구덩이가 보였다. 그것은 접시꽃 같기도 했고, 불시착한 외계의 접시가 왔다 간 흔적 같기도 했다. 그 근처에 사과나무 가지가 뒹굴고 있었다. 거칠게 찢어진 단면에 하얀 속살이 보였다. 나뭇가지에 달려 있던 하얀 꽃잎이 짓이겨진 채로 땅에 떨어져 있었다.
   전날 밤 언니는 시무룩해져 방으로 들어왔다.
   “아팠어?”
   “응.”
   “맞았어?”
   “아니, 나뭇가지로 땅을 치던데?”
   “근데 아팠어?”
   밥통 같은 게. 아빠는 애지중지하던 사과나무를 꺾어 애꿎은 땅바닥을 쳐댔다. 나무를 심은 건 아빠였다. 많은 나무 중 사과나무를 선택한 건 순전히 사과꽃의 꽃말이 좋아서였다. 나무 푯말을 직접 만들어 꽃말을 크게 적었다. prestigious. 두꺼운 매직으로 한껏 멋을 부린 서체였다. 종종 엄마와 아빠는 그것을 한참 흐뭇하게 바라보곤 했다. 어느 날 나는 영어로 써진 꽃말을 손바닥에 적었다. 아빠가 자주 영단어의 뜻을 퀴즈로 내어 오빠와 나를 경쟁시켰기 때문이었다. 방으로 들어가 교학사 영어 사전을 펼쳤다. prestigious. (고어) 1. 명망, 명성. 2. 요술, 기만, 속이는.
   한쪽 팔이 꺾인 사과나무에 물방울이 맺혀 있던 게 기억났다. 사과꽃이 만개하면 온 집 안에 사과 향이 가득하다고 말하던 부모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코를 갖다 대도 사과꽃에서 이렇다 할 향이 나지 않았다. 신선한 식물이 내뿜는 특유의 그 투명한 냄새. 그게 다였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아침, 처참한 흔적 앞에서 달큼한 사과 향이 났다.

   언니 집을 샅샅이 뒤진 김윤하는 한숨을 푹 쉬더니 다그치듯 내게 말했다.
   “어디로 가신 건지 아예 감이 없으신 거예요?”
   “그러게. 어디로 갔을까.”
   윤하는 아무 말 없이 언니 방 여기저기를 비추었다. 그리고 책상 앞에서 멈추며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포스트잇이었다.
   “어진 쌤, 여행 간 것 같아요!”
   히스로->개트윅이라고 써진 포스트잇을 비추며 목소리를 높였다. 히스로 공항과 개트윅 공항을 말하는 것이고, 아이슬란드로 여행을 떠난 모양이라는 거였다.
    “그쵸, 맞는 거 같죠?”
   여행이 끝나고 곧 돌아올 거라 믿는 눈치였다.
   “아, 완전 다행.”
   애틋하게 기다리는 누군가가 언니에게도 있구나. 김윤하가 반가워하는 게 언니를 쌤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새삼스러웠다.
   어쩐지 언니가 그곳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돌아올 거라고 안심하는 김윤하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예의 그러게, 하고 말았다. 언니가, 우리의 밥통이 사라진 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언니는 정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

   아빠의 퇴원이 결정되고, 미리 좀 가서 집을 치워 달라는 엄마의 부탁으로 본가에 왔다. 이렇게 좁았나.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서며 중얼거렸다. 마당에서 위용이 있는 건 사과나무뿐이었다. 균형이 맞지 않은 수형이었지만 연둣빛 이파리들이 풍성했다. 어젯밤부터 비가 내리더니 아침 내내 분무기로 분사되는 듯 입자가 고운 안개비가 내렸다. 나무는 물기를 촉촉이 머금었다. 나뭇가지의 한 마디가 끝나고 다시 다음 마디가 시작되는 경계. 그 마디마디에는 여지없이 구슬 같은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차양 덕에 젖지 않은 현관 계단에 털썩 주저앉아 그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문득 사과 향이 났다.
   나도 돌고 있었는데.
   금세 휘발된 사과 향기를 맡아 보려고 킁킁대며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날 저녁 마당에서 방까지 울리는 엄마의 목소리에 따라 방에서 홀로 좌향좌와 우향우를 했다. 언제 불려 나가도 언니처럼 허둥대지 않기 위해. 평균을 더는 낮추지 않기 위해. 저 밥통 같은 게. 그런 수모의 말로 베이지 않기 위해 늘 대비했다. 어쩐 일인지 그런 이야기를 언니에게 하고 싶었다. 이제 와서, 왜. 그날 아침처럼 또 혼자 웅얼거렸다.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대화창을 열었다. 언니 살아 있어? 문장 옆 숫자 ‘1’은 여전했다. 미확인을 알리는 숫자 ‘1’이 어느 땅에 삽목 되어 꼿꼿이 서 있는 나뭇가지 같았다. 언니의 간결한 답신 같기도 했다. 살아 있지, 당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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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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