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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샬

  • 작성일 2023-05-04
  • 조회수 3,225

마샬

민병훈


너는 물에 젖은 곰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 너는 동물원에 가자고 갑작스럽게 말했다. 너는 배를 잡고 크게, 오래 웃는다. 곰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이제 너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곰이 웃겨, 라고 물어 보는 대신 네 바지에 묻은 흙을 닦았다. 너는 눈가에 묻은 눈물을 닦으며 곰에게 손을 흔든다. 너는 동물원이 문을 닫을 때까지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곰을 본다. 너는 평소 그런 식으로 하나의 대상을, 하나의 풍경을, 하나의 장면을 오래 응시하는 습관이 있다. 나는 그사이 매점과 화장실과 흡연구역과 식물관에 다녀왔다. 너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서 눈을 깜빡이고 있다. 곰은 두 마리였다가, 한 마리가 철문을 통해 어딘가로 향하고, 너는 아쉬운 듯 쩝 소리를 내면서, 다시 물웅덩이에 들어가는 곰을 지켜본다. 너는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입으로 소리를 낸다. 나는 네가 어떤 기분일 때 어떤 소리를 내는지 전부 알고 있다.

곰이었다니까.

좀체 흥분하지 않던 네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귀에서 잠시 삐, 이명이 들렸다. 휴대폰을 떼고 앞을 보자, 앞으로 넘어질 듯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의 머리 사이로 잠실대교가 보였다. 언젠가 너는 시에서 대여하는 자전거를 타고 대교를 건넜다가 다리에 쥐가 나서 오도가도 못 하겠다고 전화한 적이 있다. 휴대폰 너머로, 자동차들이 빠르게 지나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너의 몸에 부딪혔다가 흩어지는 소리. 너는 가까운 곳에서 곰이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배달음식.

너는 그때 상반신만 겨우 나갈 수 있을 정도로 문을 열고 봉지에 손을 뻗었다. 옆집 문이 열렸다. 너는 곰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곰은 자기가 음식을 주문한 것처럼, 하얀 봉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너는 종일 밥을 먹지 않았고, 몸이 아픈 건 아니지만 기운이 없었다. 퇴근길에 내게 아무 음식이나 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혹시 곰이 좋아할 만한 음식을 시켰는지 떠올렸다가, 그보다는 곰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네게 놀라 가슴이 뛰었다. 어땠어, 묻자 곰이었지, 너는 말했다.


너는 동물원 폐장을 알리는 방송이 울리자 그제야 자리에서 벗어난다. 너는 뛰다시피 걷는다. 새로 산 운동화 끈이 풀린다. 허리를 숙여 끈을 묶는 동안, 너는 네가 본 그것이 저 곰만큼 크진 않았다고 말한다. 가면을 썼던 건 아닌지, 인형 알바 옷을 입었던 건 아닌지, 나는 묻지 않는다. 네가 등을 두드릴 때, 나는 다른 신발끈도 풀었다가 다시 묶는다. 지하철역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에 오르고, 너는 어깨에 기대 곯아떨어진다. 나는 버스가 운행 노선을 한 바퀴 더 돌 때까지 너를 깨우지 않는다.


수중에 있는 돈은 삼십오만 원. 너는 휴대폰 액정에 은행 어플을 켜고 내게 보여줬다. 이게 다야. 이게 다지만, 첫 인사에 빈손은 싫으니까. 너는 두 달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식상한 표현을 빌리자면, 마침 겨울이었고, 동면에 든 동물처럼, 하루의 반 이상을 침대에서 잠만 잤다. 네가 하던 일은, 네가 아니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공장에서 과자를 포장하는 일이었고, 실제로 반나절도 되지 않은 시간에, 구인란을 본 누군가가 네가 입던 유니폼을 입고 보호안경을 썼다. 너는 일을 그만둘 때, 보호안경을 하나 챙겨서 나왔다.

너는 십만 원만 남기고 싱싱한 연어와 처음 듣는 이름의 풀을 샀다. 왜 십만 원이야? 가스비 올라서. 너는 옆집 문을 두드리기 전 보호안경을 착용했다. 너는 문 앞에서 삼십 분을 서 있었다. 실망한 나머지, 연어를 전부 먹었고, 베란다에 풀을 심었다. 나는 너를 달래 주기 위해 함께 연어를 먹고 화분에 흙을 채웠다.


너는 며칠 뒤 곰과 악수했다.


*


따듯했겠다. 선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했다. 따듯했겠어, 곰털. 그리고 나 이제 선임 아니야. 선임은 부러 내게 거리를 두는 것 같았다. 곰을 보면 무서워해야죠. 뭐, 어때. 그 사람이 안 무섭다면 됐지. 사무실 벽에 걸린 근무표를 보자 선임은 비번인 날이었다. 검은 새떼가 활주로를 날았다. 조류퇴치반이 예전보다 바빠진 건 알고 있었지만, 대기실이 텅 비어 있을 줄은 몰랐다. 너 잘린 거 아니야. 선임은 징계위원회에서 나를 감싸느라 언성을 높이는 바람에 회의가 시작된 후 이른 시간에 쫓겨났다. 나는 매를 본떠서 만든 비행 로봇을 총으로 쏴서 추락시켰다는 이유로, 한 달 정직과 부서 이동 명령 징계를 받았다. 로봇은 인간 대신 새를 쫓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근무 시간을 대체하지 못했다. 로봇의 행동반경에 적응한 새들이, 아니 더 많은 개체들이 다시 활주로에 포진했다. 선임은 내게 고의인지 실수인지 묻지 않았다. 나는 선임의 그런 점이 좋았다.


너는 선임의 그런 점이 자신과 다르다고 말했다. 물에 물을 섞으면, 딱 그 사람이야. 나는 둘의 성격이 비슷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꺼내지 않았다. 너 역시 로봇이 추락한 일에 대해서 나의 의도를 묻는 대신, 쉬는 동안 함께 할일들의 목록을 만들었다. 함께 화분들을 옥상으로 옮겼고, 밀린 영화를 봤으며, 사람이 없는 바다에 매트를 깔고 앉아 수평선으로 멀어지는 화물선을 구경했다. 징계 처분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느낄 새도 없이 한 달이 지났다. 그럼 무슨 일하는 거야? 너는 베란다에서 모래가 묻은 매트를 털며 물었다. 나는 운항을 마친 항공기를 유도하는, 항공법에 명시된 표준항공기유도신호에 맞춰 신호봉과 깃발을 흔드는 일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주차요원 같은 거야? 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 옷걸이를 양손에 들고 몇 가지 수신호를 보여줬고, 너는 먼지가 날린다며 창문을 활짝 열었다.


*


너는 심각한 얼굴로 노트 진열대를 바라보고 있다. 한 권을 빼서 유심히 살폈다가 다시 다른 한 권을 꺼내 오래 비교한 뒤 진열대에 꽂는다. 점원은 계산을 하며 힐긋 우리를 쳐다본다. 점원의 시선을 느낀 너는 내게 다가와 귓속말로, 우릴 도둑으로 보는 것 같아, 말하곤 천천히 노트를 살핀다. 나는 점원이 너를 보지 못하게끔, 너의 등 뒤에 선다. 너는 하루하루 곰을 만나거나 만나지 않아도, 곰에 대한 기록을 일지에 남기기로 했다.

오래 못 만나면?

곰을 생각해야지.

그럼 쓸 수 있다고, 너는 말한다. 나는 네가 오랜만에, 어떤 일에 의욕을 보이는 게 좋아서, 문구점에서 가장 크고 비싼 노트를 산다. 너는 노트를 품에 안고 히죽 웃는다.


네게 규칙적인 일과가 생겼다. 너는 자정 즈음에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옆집 문을 두드린다.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는 곰에게 인사한다. 곰과 함께 느리게, 동네를 산책한다. 사람들은 곰과 너를 바라보지 않는다. 너는 사람들의 반응을 짐짓 모른 체하다가도, 자주 가는 슈퍼 아주머니마저 곰을 없는 존재처럼 대할 때, 약간의 서운함과 배신감을 느낀다. 너는 그런 감정을 일지에 적는다. 곰은 인간의 생활을 구경하기에 바빠서인지, 좀체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선거 유세 트럭에 올라타려다가 네게 제지를 당하고, 기껏해야 너의 종아리 높이와 비슷한 강아지에게 화를 내고, 편의점 창문에 코를 박고 오랜 시간 냄새를 맡는다. 너는 곰에 대한 선입견을 생각한다. 곰처럼 미련하다랄지, 곰이라고 말하면 떠오르던 것들을 머릿속에서 거둔다. 너는 곰과 친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알고리즘의 영향을 받은 곰가죽 제작 영상을 보다가 놀라 휴대폰을 떨어트린다. 검색창에 매일 검색을 한 탓이다. 영상은 자연사박물관 소속의 박제사가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내용으로, 모형화된 곰의 형태에 가죽을 씌우는 영상이었다. 죽은 동물에게 새 생명을 주는 일입니다. 너는 박제사의 말을 곧잘 흉내 냈다.

너는 산책을 마치면 침대에 엎드려 일지를 적는다. 그러다 내가 퇴근할 즈음 다시 집을 나선다. 우리는 역에서 만나 조금 늦은 저녁을 해결하고 집까지 부러 먼 길을 돌아서 걷는다. 너는 걸으면서 손을 잡거나, 멀리 떨어지거나, 멍하니 서서 생각에 빠진다. 우리는 하루를 정리하는 중요한 의식처럼 걷고 집에 돌아간다.

여객기에 곰을 태울 수 있어?

화물칸에.

짐이 아닌데.

사람도 아니지.

너는 언젠가부터 너무 당연해서 대답이 빤한 질문을 종종 던지는데, 너무 당연한 나머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나, 싶은 대화를 즐기는 것 같았다. 너는 곰과 함께 비행기를 탄다면 화물칸이 아닌 이코노미석에 탈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묻는다. 줄 수 없다. 다시 당연한 얘기지만, 내가 하는 일은 승객들을 태운 여객기를 주기장에 접안하는 일이다.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장소에 있도록. 너는 곰과 해외로 여행을 가고 싶다고 일지에 적었다.

너는 단기 알바로 돈을 벌던 시기 이전에, 여행사에 오래 근무한 적이 있다. 아마도 네 인생에서 가장 오래 직장을 다녔던 시기로, 긴 시간 의욕과 끈기를 갖고 그 일을 좋아했다. 너는 동아시아 나라들의 여행 계획을 수립해 패키지 상품을 만들었으며, 영어를 비롯해 중국어와 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가끔 관광객들이 회사 사이트에 리뷰를 남기면, 새벽까지 일해도 어떤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보람. 너는 이 단어를 꺼내면서 놀랐는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너는 집에 있는 시간보다 사무실에, 여객기에, 해외에 있는 시간이 많았고 사전답사를 갈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자원했다. 내게 연락 없이 잠들었다가 다음날 사과하는 날이 많았다. 나는 괜찮았다. 그보다는 몸이 상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었고, 네게 말하자 자신은 일을 해야 건강해지는 체질이라고 답했다. 너는 여행사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가장 늦게 퇴직했다. 네 자리만큼은 남을 거라고, 코로나의 영향으로 인한 수익 감소 분석표를 보며 사장은 말했다. 사장은 모니터에서 눈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너를 바라보지 않고 말했다. 너는 사장의 볼에 새로 생긴 황갈색 기미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


곰을 마주치면 바닥에 엎드리래. 주기장에 찾아온 선임이 말했다. 선임은 새로운 부서로 이동한 내가 적응은 잘하고 있는지 걱정돼서, 라고 연락했지만 그보단 곰이 궁금한 것 같았다. 북극곰은 사람을 찢는다며. 선임은 전원이 꺼진 야광봉을 만지작거리다가 책상 아래로 떨어트렸다. 곧 여객기가 주기장으로 들어올 시간이었다. 곰도 인간이 무섭지 않을까요. 선임은 다른 장비들에도 손을 대다가 내가 가로막자 토라진 것처럼 보였다.

난 그런 게 무서워. 네가 추락시킨 이상한 로봇 같은 거. 선임은 주기장 밖으로 향했다. 유도로의 불빛들이 반짝였다. 그리고 저것도. 선임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주기장 입구 상단에 설치된 노란 박스 전광판에서 숫자와 도형들이 깜빡였다.

VDGS(Visual Docking Guidance System). 사각주기유도시스템. 최첨단 자동 시스템으로, 여객기가 공항에 진입할 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안내한다. 시스템은 여객기가 탑승구에 들어오면 자동으로 항공기를 인식하고 기종별로 다른 항공기의 좌우편차와 접현 시간 등 항공기 주기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계산한다. 다양한 운항정보도 표출돼 지상 인력과의 협업 체계가 강화될 거라고, 공항 본부는 설명했다. 국산화 개발에 성공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시범 공항으로 우리 공항이 선정됐다. 또 여럿 옷 벗겠다. 선임은 혀를 끌끌 차며 자전거에 올랐다. 선임이 떠나자마자 멀리서 여객기가 주기장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A233, 43, 42M. 항공기 기종과 게이트번호, 잔여거리가 표시됐다. ON BLOCK 19:32. 탑승구 도킹을 완료한 여객기의 엔진이 꺼지며 운행이 종료됐다.

나는 가방에서 새 노트를 꺼내 너에게 건넨다. 다 쓴 줄 어떻게 알았어? 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 가방에서 다른 물건도 꺼낸다. 게임? 몇 년 전 아소보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비행 시뮬레이터 게임을 회사로 주문했다. 비행사로부터 직접 입수한 기체의 데이터로 시뮬레이션을 제작해 실제 항공기 운용법과 유사하게 재현됐다고 익히 들었다. 최근 업데이트에 내가 일하는 공항이 추가됐다는 소식도 들었다. 너는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게임기의 전원을 켠다. 안 그래도 부탁하려고 했는데, 라고 말하자 너는 게임 패드를 손에 쥐고 어깨를 으쓱 올린다.

나는 네게 게임에서 실행할 특정 상황을 설명한다. 너는 오사카 간사이공항에서 이륙을 준비한다. 기내에 안내방송을 하는 것처럼, 영어로 중얼거리다가, 이륙을 안정적으로 마침과 동시에 한숨을 내쉰다. 게임 패드가 길게 진동한다. 너는 바다 위를 날고 있다.

오늘 곰은 만났어?

너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가로젓는다.

골목으로 들어갔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안 나오는 거야. 먼저 왔어.

너는 구부정하게 몸을 말고 모니터를 바라본다. 난기류를 만나자 입술을 꾹 다문다. 이제 항공기는 활주로에 진입하고, 너는 착륙과 동시에 마치 좌석에 앉은 것처럼 몸을 좌우로 흔든다.

봤지, 부드럽게 착륙.

너는 이제 항공기를 주기장으로 진입시킨다.

내가 일하는 곳이야.

실제 공항과 너무 똑같은 나머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자, 너는 이제 뭘 하면 좋은지 알려달라고 말한다. 선임이 말한 자동 시스템마저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다. 나는 네게 주기장 입구에 설치된 전광판을 보면서 항공기를 탑승구까지 이동시킬 수 있는지 묻는다. 너는 간단하게, 단 한 번의 지연도 없이, 패드를 조작해 항공기를 접안시킨다. 쉽고 완벽하게. 너는 패드를 내려놓는다. 그러곤 묻는다.

근데 왜 너처럼 일하는 사람은 안 보여?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근무복을 세탁기에 넣는다.


나도 곰을 볼래. 아침에 일어나 말하자, 너는 토스트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가 멈추고 나를 빤히 바라본다. 나는 머쓱한 기분이 들어 네가 대답할 새도 없이 식기를 정리한다. 같이 보는 건 곤란해. 왜라고 묻는 대신 나는 오늘 쉬는 날이라고, 네가 곰을 만나러 가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럼 신호를 줄게. 너는 챙이 긴 모자를 쓰고 집을 나선다. 네가 나가고 한 시간 뒤, 네가 걸을 법한 길을 걷는다. 우리가 주로 걸었던 골목과 언덕을 하릴없이 오가며 연락이 오길 기다린다. 마스크를 벗은 사람들이 지하철역을 오르내린다. 주머니에서 휴대폰 진동이 울리고, 철물점, 네가 보낸 문자를 보고 발걸음을 옮긴다. 설레지도, 무섭지도 않다.

너는 동물원에 가기 전날, 잠이 덜 깬 채로 물었다. 어디서 왔을까. 얼마 전에 얼룩말도 동물원에서 탈출했잖아. 너는 잠에 취해 말할 때 손을 떠는 습관이 있다. 나는 손을 잡고, 우리보다 먼저 여기 살았을 수도 있지, 새로 이사를 왔거나, 라고 대답했다. 나 얼마나 집에만 있었지? 세 달. 사람들은 그전부터 계속 안 만났고. 사람이 갈수록 싫어. 너는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처음부터 그 단어를 잃어버린 것처럼, 사람을 사람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래도 일지는 사람들한테 보여줄 거야, 인터넷으로.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안 보여주잖아. 너도 내가 올리면 봐. 나는 그 일지를 너만 간직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철물점에서 너를 기다린다.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와 가게를 막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나는 문에서 비켜선다. 철물점 유리에 비친 햇빛이 눈부시다. 멀리서, 너는 곰과 함께 오고 있다. 형체가 확연히 보일 즈음, 너는 제자리에 서서 곰과 대화를 나눈다. 곰은 불현듯 골목으로 사라지고, 홀로 남은 네가 손을 흔든다. 곰을 더 가까이에서 확인하고 싶었지만, 울상이 된 네 표정을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너는 나를 지나쳐 철물점으로 들어가 물건을 고른다. 싱크대 거름망 망가졌어. 새로 사자. 너는 곰에 관한 별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


어느 날 너는 중국의 한 소도시에서 우연히 길을 잃었다. 가늠할 수 없는 여러 위험에 노출된 너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해 하반기 여행 패키지 상품 개설을 위해 사전답사를 가야 했고, 동료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혼자 짐을 꾸렸다. 중국이 국경을 봉쇄하기 직전이었다. 한동안 관광은 물론 입국도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업계는 전망했지만 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너는 스스로를 방치했다. 여행 중에 맞닥뜨릴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국수 트럭을 끌던 노인이 너를 위아래로 훑었다. 지역 전통 의상을 입은 아이들은 네게 사진을 찍자고 다가왔다. 너는 거절했다. 너는 정신을 차리고 현지 코디네이터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카키색 야상점퍼에 턱을 묻은 남자가 전봇대에 서서 네게 손짓했다. 그는 함께 시장에 갈 거라고 말했다. 지역 시장은 여행 코스 중에서도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장소로 꼽혔다. 너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고, 외국에서 그런 마음이 생긴 건 처음이라 너도 모르는 사이 걷는 속도가 느려졌다. 앞서 걷던 남자는 시계를 가리키며 재촉했다. 너는 이미 그때 미래의 어떤 장면을 감지했는지도 모른다.

시장으로 들어서자 상인들의 호객 행위로 귀가 아팠다. 누군가는 네 팔을 잡아끌었고, 누군가는 손에 물건을 쥐어 주기도 했다. 남자는 몇 마디 말로 그들을 물러서게 했다. 너는 시장 내부를 살피며 사진을 찍고 메모했다. 시장 안으로 들어갈수록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는 옆길로 너를 안내했다. 시장의 중심 구역과는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곤충과 병아리, 지네가 막대기에 꽂혀 있었다. 모두 지친 얼굴로 각자의 일을 하느라 너와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너는 더 깊숙이, 깊숙이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는 넓이의 골목을 지나다가, 그는 네게, 이 너머부터는 최대한 여기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는 편이 좋을 거라고 조언했다. 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골목 모퉁이를 돌자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너는 갑작스럽게 밝아진 사위에 눈이 아파 손바닥으로 차양을 만들었다. 철장마다 동물들이 보였다.

너는 문득 주변이 소름끼칠 정도로 조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물들이 울음소리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주사를 사용했을 거라고 남자는 설명했다. 너는 그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 미쳤냐고, 왜 이런 곳에 데려오느냐고 말했다. 다른 여행사에서는 반응이 좋았다고, 그는 대답했다. 패키지 상품의 비공식적인 일정. 동물원 혹은 다큐멘터리에서나 본 듯한 동물들이 철장 안에 있었다. 사슴의 뿔, 코끼리 상아, 박쥐 날개, 정체 모를 가죽과 털 더미가 길에 널브러져 있었다. 너는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왔던 길을 돌아가기보단 공터를 지나가기 위해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다 문이 열린, 커다란 우리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반쯤 끊긴 쇠사슬도 보였다. 너는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남자에게 물었다. 상인 중 누군가가 새끼 곰에게 고무호스를 삽입해 쓸개즙을 빼내려 시도했고, 고통에 울부짖는 울음소리를 들은 어미 곰이 우리를 부수고 뛰쳐나왔다. 새끼 곰에게 설치된 쇠사슬을 끊어내고 도망가려 했지만 다른 사육사들에게 포위됐다. 어미 곰은 새끼를 품에 안은 뒤 목을 졸라 질식시켰고, 자신은 스스로 벽에 머리를 부딪쳐 목숨을 끊었다. 어미 곰은 평생 이 우리에서 쓸개즙을 빼앗기며 살았다. 너는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고, 그때 자동차가 지나갔다. 너는 그에게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만 하곤 시장을 빠져나왔다. 그는 너를 잡지 않았다. 너는 곧장 호텔로 들어가 비행 출발 시간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


내가 이 얘기했나. 나 공군 비행단에 있을 때, 미군이랑 같은 활주로를 썼거든. 걔네 훈련 때마다 매번 부대가 달라서 본토, 하와이, 오키나와에서 전투기가 사방팔방 날아오는 거야. 근데 재밌는 게 수직꼬리날개마다 부대 마크라고 해야 하나, 부대를 상징하는 동물이 꼭 그려져 있었어. 비행단에서는 조종사가 이륙 준비를 마치면 유도원이 마지막으로 신호 보내는 거 알지? 그 신호가 떨어져야 출발하잖아. 거기선 꼭 그 동물을 흉내 내서 신호를 보내더라니까. 늑대가 그려져 있으면 이렇게, 두 손을 늑대 앞발처럼 들어. 그럼 조종사가 잘 다녀오겠다고 경례를 보내. 독수리는 날갯짓을 하고. 악어도 봤어. 꿀벌도 봤다. 난 그게 너무 웃기는 거야. 웃기지?

어디서 웃어야 돼요?

곰은 없더라고.

못 본 거 아니에요? 부대가 그렇게 많은데.

네 얘기 듣고 검색까지 해봤다는 거 아니야. 없어.

그게 왜 생각났어요?

선임은 조류퇴치반 초소로 나를 불러내더니 싱거운 소리만 해댔다. 폭염이 지속되면 활주로의 지면 온도가 상승해 새들도 보이지 않았다. 선임은 다른 날보다 평온한 얼굴로 내게 인사했다.

부모님이 시골에서 과수원하시죠?

대추.

그럼 산이 아니려나.

곰 볼까 봐?

내려와요?

멧돼지는 봤대.

무전기에서 근무 교대를 알리는 방송이 송신됐다. 선임은 뒤로 넘어져라 기지개를 켰다.

근데 왜 안 물어 봐요?

뭘?

그 로봇이요. 내가 총으로 진짜 맞췄는지.

아니라며.

그렇게 말하라면서요. 징계위원회 들어가기 전에.

새 한 마리도 못 맞추는데 니가 그걸 무슨 수로.

그동안은 안 맞춘 거죠. 기계나 로봇이나 지긋지긋해요, 이제.

선임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네가 일하는 보직을 왜 마샬러(Marshaller)라고 하는지 알아?

초소 밖에서, 우리를 사무실까지 데려다줄 트럭이 경적을 울렸다.

사각을 정확하게 보라고.

나는 선임을 따라 트럭에 올랐다.


하필 에어컨이 고장 나서. 너는 베란다 가까이 대자로 드러누워 손으로 부채질을 한다. 아직 봄인데 이렇게 더워도 돼? 고장 원인을 찾으려고 에어컨을 분해했다. 이 정도는 껌 아냐? 껌이 아니다. 내가 못 본 곳이 있나. 원상복구가 힘들 정도로 나사를 풀었더니 손가락에 힘이 빠진다. 나는 네 옆에 눕는다. 너는 땀에 젖은 나의 볼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수박이 먹고 싶다고 말한다. 이 밤에 수박을 어디서. 너는 우물쭈물한다. 왜. 옆집에 가서 말하면 줄 거야. 수박을, 그러니까 자정이 넘은 시간에, 초인종을 누르고, 대답이 없으면 노크를 두어 번 똑똑, 똑똑똑, 그렇게 나온 곰에게 수박을 달라고 말하라는 거지. 그 집 냉장고가 크대. 아까 같이 시장에 갔다가 거기 맡겼어. 걱정 말고 다녀와. 내가 뭘 걱정하는 줄 알고, 곰이 앞발을 살짝만 휘둘러도 사람이 멀리 날아간다던데, 내가 수박을 걱정하는 걸로 보이는 걸까. 잠든 곰을 깨우는 위험천만한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자, 더위에 지쳐 수박을 먹지 못하는 자신을 보라고, 너는 말한다. 나는 곧바로 티셔츠를 챙겨 입고, 마치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처럼 한동안 현관에 서 있는데, 너는 몸을 돌려 베란다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이 시간에 곰과 첫 만남을 갖다니, 설렘과 긴장감으로 머리가 어지럽다. 어지러운 머리를 진정시키고, 초인종을 누른다. 침이 넘어간다. 너는 이 일을 일지에 적을까, 내가 곰을 만나면 나를 일지에 등장시킬까. 왜 다른 일도 아닌 일지를 쓴다고 했을까. 다시 초인종을 누른다. 반응이 없다. 나는 문을 두드린다. 뭔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문에 가까워지고 있다. 네게 도움을 요청할까. 어떤 도움을? 손잡이가 돌아간다. 갑작스럽게 요의가 느껴진다. 문이 살짝 열린다. 어느 정도냐면, 수박이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수박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문이 열린 뒤 한동안 나도, 저쪽의 무언가도, 움직이지 않는다. 곧 툭, 하는 소리와 수박이 굴러온다. 내 발치까지. 데굴데굴, 수박은 슬리퍼를 신은 엄지발가락에 닿고 멈춘다. 문이 닫히기 전, 몸을 기울여 안을 살핀다. 현관 불이 꺼져 분명하진 않지만, 털북숭이 손이 레버를 당기는 걸 본 것 같다.

너는 태연하게, 식탁에 도마와 칼을 준비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 봤어? 나는 수박을 건넨다. 베란다 커튼이 바람에 휘날린다. 어이없지. 왜 곧이곧대로 믿어? 믿는 게 아니다. 네가 사실이라면, 그것은 사실이다. 너는 수박을 먹다 말고 방으로 들어가 일지를 꺼내 온다. 나는 일지를 편다.


X월 XX일 토요일


밤새 사이렌이 울린다. 근처에서 불이라도 난 걸까. 네게 전화를 했는데 통화 중이야. 소방차 혹은 응급차? 열두 대까지 셈을 하고 그만뒀다. 모레 면접을 보기로 했다. 여행사에서 일할 때 협력 업체였던 회사에 자리가 생겼다. 돈도 다 떨어져 가고. 다시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제 외국어도 예전만큼 할 수 없어. 오후에는 외국인이 길을 물었는데 파파고로 알려줬다. 그 사람 외국인이 많이 사는 지역으로 간댔지. 방금 또 사이렌이 울렸다. 아침까지 근무라고 네게서 문자가 왔다. 나와는 다르게, 꾸준하고 성실하게 일을 하는 너를 보면 뭐랄까, 빤한 말이지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직 기간에만 한 달 쉬었지. 그마저도 나를 챙기느라 제대로 쉬지 못했다. 다시 일자리가 생기면 여행을 가자고 말할게.


X월 XX일 일요일


빨리 전화를 받았으면 좋겠다. 당연히 직장에 있을 걸 알아. 거짓말을 하진 않을 테니까. 그런 적도 없으니까. 세상이 하루아침에 달라져 있어. 믿기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고 말할 수도 없을 만큼, 그런 표현이 빈약하고 초라하다고 느껴질 만큼, 끔찍한 일이 생겼어. 너는 알까. 근무 중간마다 여객기의 착륙을 기다리며 대기실에서 TV를 본다고는 들었는데. 봤다면 전화했겠지. 네가 담당한 여객기는 공항에 잘 도착했을까. 네가 있는 곳에 가기 위해 옷을 입었다가, 신발을 신었다가,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방금 지도앱으로 거리와 시간을 계산했다.

다행히 중간에 네게서 연락이 왔다. 공항철도로 환승할 즈음이었어. 부재중 전화와 문자를 보고 놀랐다고. 너는 나를 달래기 위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택시를 타고 오고 있다고 말했지.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물 세 컵을 연달아 마셨다. TV를 켜고 뉴스를 보는데 상단에 표시된 사람들의 숫자가 처음 보는 기호 같았어. 주변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혹시 거기 가진 않았는지, 집이 근처라고 들었는데 괜찮니. 베란다 창문을 닫고 TV를 껐다. 어서 네가 문을 열었으면.


X월 XX일 화요일


창밖을 보기가 힘들다. 너는 대기실에서 쓰는 암막 커튼을 수소문해 집에 달아 줬다.


X월 XX일 금요일


오후에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집을 나섰다. 현실이 나를 속이는 것 같아. 나만 속는 장난 같아. 슈퍼에 들러 물을 계산하는데 아주머니가 지금까지 어디 있었냐고 물었어. 한동안 안 보여서 걱정했대. 이렇게 보니까 반갑다고, 방울토마토를 세 알 줬어. 가방을 안 챙겨서 손에 쥐고 지하철을 탔어. 예전엔 별 생각 없이 역에 내렸는데, 문에 선 사람들끼리 알게 모르게 같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불경을 외는 스님들이 개찰구를 통과하고, 출구에서 하얀 꽃을 나눠줬다. 포스트잇에 쓴 편지들이 벽과 바닥에 가득했는데, 어느 순간, 손에서 뭔가가 흐르고 있었다. 힘을 너무 준 탓인지, 토마토가 터져서 신발을 적시고 있었어.

집으로 오는 길은 걸어서 왔어. 동네에서 멀리 산책을 나오면 항상 지나던 길이었지. 그럼에도 길을 잃어서 처음 보는 아파트 단지에 들어갔다. 방수천을 두른 커다란 나무가 보였어. 가까이 가서 보니까 사람보다 큰 곰인형도 함께 놓여 있었다. 한마당축제가 취소됐다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곧 아래로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어.


일지를 덮고, 나는 네게 말한다.

옆집에 새로 이사왔구나. 수박 마저 먹자.


*


활주로에 사고가 생겼다. 항공관제사의 통신을 오인한 기장이 무려 두 시간 동안 활주로에 여객기를 정차했다. 승객들은 공항의 사정으로 이륙이 지연된 줄 알았고, 이제 곧 출발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시트에 몸을 기댄 채로 창밖을 바라봤다. 이륙 직전의 여객기는 기내의 모든 등을 끄고 엔진을 공회전시키고 있었다. 저물어 가는 햇빛이 승객들의 얼굴을 비췄다가 사라졌다. 착륙을 마친 뒤 주기장으로 향할 여객기들이 차례차례 활주로로 들어섰고, 공항 설립 이래 열 대가 넘는 여객기가 활주로에 정차한 적은 처음이었다. 홀로 정차한 여객기가 이상하다고 판단한 관제탑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대테러기동대에 사실을 알렸다. 나는 멀리서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관제사가 자신의 실수를 고백하고 다시 상황이 돌아올 때까지, 의아한 건 기내에 있는 그 누구도 소동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륙을 포기하고 주기장으로 들어선 여객기는 VDGS와도 제대로 교신하지 못했다. 자동시스템마저 본인에게 할당한 여객기를 분간하지 못했다. 결국 대기실에서 시간을 때우던 인력이 전부 동원돼 여객기를 주기장에 접안시켰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지면을 밟은 기장은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신호봉을 보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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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일러두기 조경란 모른다고도 잘 안다고도 말할 수 없는 사람이 재서에게 생겼다. 미용은 평소에 충동적으로 물건을 사는 편은 아니지만 며칠 전에는 검은색 복면을 주문했다고 말했다. 손님이 텔레비전을 틀어 달라고 해서 채널을 돌리다가 여자 주인공이 눈과 입만 빼고 얼굴을 다 가리는 복면을 쓰곤 인질처럼 잡고 있던 아이들을 어떤 단체에서 구출해 내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게 멋있어 보이기도 한 데다 주인공이 쓴 검정 니트 복면이 그 순간 못 견디게 갖고 싶었다고. 재서는 그 말을 하는 미용을 처음 보는 눈으로 봤다. 성인 여성 평균 키에서도 한참 모자라고 목소리도 작고 앳되며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수줍어하는 마흔아홉 살의 미용. 그녀와 검은색 복면은 아무래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숨 쉬는 데 편하고 시야도 가리지 않는데요. 미용은 에코백에서 검은색 복면을 꺼내더니 무릎에 올려놓고 반듯하게 폈다. 방한용 안면 마스크인가 본데 구멍 세 개가 뚫린 조금 긴 털모자 같았고 재서의 눈에도 영화에서 도둑들이 쓰는 것과 엇비슷해 보였다. 이걸 쓰고 다니실 건 아니겠지요? 재서는 자신이 잘 모르는 지점의 미용에게 물었다. 사람 일은 모르죠. 미용은 소리 없이 웃었다. 소리 없이 움직이고 소리 없이 먹고 마시고 심지어 노래할 때도 미용은 그래 보였다. 그래서 다른 가게 사장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도 의식하고 있지 않다간 미용의 존재를 까맣게 잊기 십상이었다. 그게 미용의 남다른 점이라면 점인데 얼마 전부터인가 재서에게는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 되었다. 재서는 인쇄․복사를 전문으로 하는 ‘대학사’의 오래되고 쿠션이 푹 꺼진 소파에 미용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 가게였고 지금은 재서가 꾸려 가고 있는데 밖에서 보면 ‘♜대학사 COPY’라는, 한때는 눈에 띄었고 쓸모가 있었으나 최근엔 눈여겨보는 사람이 드문 간판이 무겁게 걸려 있을 것이다. 한 차례 장맛비가 지나가 후텁지근한 6월 셋째 주 토요일 오후였다. 미용의 가게는 토요일이 휴무, 대학사의 휴무는 내일이다. 재서가 오른쪽 팔에 반 깁스를 하지 않았다면 미용이 쉬는 날 여기 오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미용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제일 먼저 왔다가 정작 고맙다는 말도 못 듣고 돌아가는 사람. 미용이 이 동네에 처음 나타날 때부터 재서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그런 사람과는 더 거리를 두고 싶어서 재서는 미용을 더는 눈여겨보지 않았다. 도와주러 왔다는 말 대신에 미용은 정 사장님이 우리 집 단골이시니까요, 라고 얼버무렸다. 재서의 아버지가 미용의 우엉 전문 반찬가게의 조림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다. 재서는 평소보다 풀이 죽어 있는 상태였다. 나흘 전 밤중에 장롱 한 짝이 방바닥으로 쓰러지면서 재서의 뒤로 쓰러졌다. 무슨 소리가 들려 순간적으로 피하긴 했는데 장롱 모서리가 오른팔 팔꿈치를 스치듯 쳤다. 아버지 말대로 만약 장롱이 머리로 무너졌다면. 집에서도 죽을 수 있다는 상상은 한

  • 최고관리자
  • 2023-05-04
꽃섬

꽃섬 김재영 1. 섬의 동쪽 끝. 연홍이 보기에 그해에는 모든 바람이 그리로 부는 듯했다. 빠른 속도로 제주행이 결정되었다. 살고 있던 강변의 아파트는 세를 내놓자마자 임차인을 만났고, 당장 생활비를 벌 일감도 생겼다. 일감이라야 출판사로부터 의뢰받은 번역이지만, 장소에 매이지 않고 어디서든 일할 수 있기에 그녀에겐 적격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오래되었지만 아직은 쓸 만한 바닷가 이층집을 싸게 얻을 수 있었다. 집 뒤에는 널찍한 채마밭과 허름한 별채도 달려 있었다. 연홍은 주변 사람들에게 큰소리쳤다. “걱정 마. 낮에는 밭일을 하고 밤에는 번역을 해서 먹고살 거야.” 마침내 마주한 바다 앞에서 연홍은 무한한 자유를 느꼈다. 넘실대는 푸른 바다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죽어 있는 심장마저도 다시 뛰게 할 것 같았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지켜보며 출퇴근을 반복하던 도시의 일상과는 사뭇 달랐다. 허망한 세월처럼 한 번 흘러가면 다시 오지 않는 강물과 달리 바다는 갯벌을 드러내며 멀리 물러났다가도 밤새 돌아와 아침이면 어미가 새끼를 핥듯이 해변을 적셨다. 파도가 희고 부드러운 거품으로 모래알을 적시는 동안 보말이며 조개, 다시마 같은 숱한 갯것들이 새 생명을 얻듯이 그녀도 바다와 함께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없이 잇닿은 그리움인 양 쉼 없이 일렁이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연홍은 깊은 잠을 잤다. 그래서인지 오래된 어지럼증도 하루가 다르게 차도를 보였다. 때때로 차를 몰고 중산간의 곶자왈 숲에 가거나 이름 난 관광지에 들르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마을 뒤쪽 기생화산인 오름에 오르거나 근처 철새도래지를 둘러보며 지냈다. 수많은 겨울철새들이 날아와 습지 일대를 가득 채웠다. 어떤 새들은 무리를 이루고, 어떤 새들은 외로이 어디론지 날아갔다. 하루는 온몸이 새까맣고 이마가 흰 새가 연홍의 눈에 띄었다. 움직일 때마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대는 동작이 웃음을 자아냈다. ‘어째서 저리 좌우를 살피는 걸까?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습성인가? 아니면 천적을 자주 살펴야 할 만큼 불안한 걸까?’ 일순 자기 자신이 철새처럼 여겨졌다. 남편과 이혼하고 자식에게까지 외면당한 채 외로이 이곳까지 날아온 나그네새……. 연홍은 어두운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좌우로 머리를 흔들어댔다. 찰칵찰칵. 어디선가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웬 사내가 갈대숲에 숨어 카메라 앵글을 이쪽으로 들이대고 있었다. “뭐예요? 당장 치우세요!” “쉿! 잠깐만. 조용히 좀 해.” “이자가 정말. 어디서 반말이에요?” “아, 글쎄 조용히 좀 하라니깐. 에이, 참. 글렀군, 글렀어.” 사내가 허공에 시선을 던진 채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뭐 싼 놈이 큰소리친다더니…….” “그쪽 때문에 중요한 장면을 놓쳤잖아요

  • 최고관리자
  • 2023-05-04
이응 이응

이응 이응 김멜라 할머니와 나는 그 나무를 잘생긴 나무라고 불렀다. 우리는 나뭇잎 모양이나 열매를 보며 나무의 진짜 이름을 알려고 애쓰지 않았다. 이름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을까. 어떤 이름이든 나무 스스로 지은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그 나무는 회색 수피가 매끄러웠고 잔가지 없이 하나로 곧게 뻗은 기둥 끝에 우산 살처럼 둥글게 휜 나뭇가지가 느긋하게 자라 있었다. 보리차차는 꼭 그 나무 밑동에 대고 오줌을 쌌다. 보리차차가 나무를 돌며 꼼꼼하게 냄새를 맡았기에 우리는 그 곁에 서서 나무의 잘생긴 풍모를 봤다. 시간이 흐른 뒤 나 혼자 그 공원에 갔을 때 나무는 잎을 다 떨군 채 잿빛 기둥으로 쉬고 있었다. 갈색 깃털의 새가 악보의 음표처럼 나뭇가지를 오르내렸다. 나는 근처의 흙이나 돌멩이에 보리차차의 흔적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잘생긴 나무와 그 나무가 뿌리 내린 땅, 할머니와 내가 보리차차를 앞세우며 걷던 공원의 오솔길, 그 풍경 어딘가에 보리차차의 오줌이 스며든 자국이 남아 있을 것 같았다. 똥은 없겠지. 똥은 늘 우리가 배변 봉투에 싸서 가져갔으니까. 하지만 고불거리는 털 오라기나 콧방울에서 나오는 숨, 담홍색 젤리 같은 혓바닥에서 떨어진 침방울, 높고 빠르게 짖는 소리······ 그게 무엇이든 보리차차의 일부가 산의 한 부분이 되어 여전히 내 곁에 머무는 것 같았다. 부르면 의심 없이 달려오는 보리차차. 나는 땅에 떨어진 솔방울을 밟아 으스러뜨렸다. 잘생긴 나무가 있는 산의 저지대에서 클럽하우스가 있는 중턱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올라갔다. 내구성이 좀 더 강한 신발을 신어야 했다고 후회한 건 검은 바위가 솟아 있는 비탈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길이 나지 않은 오르막에 낙엽과 마른 솔잎, 잔가지들이 우부룩하게 쌓여 있었다. 땅 위로 튀어나온 나무뿌리에 걸려 나는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가장자리에 살얼음이 맺힌 진창에 발을 잘못 디뎌 흰색 스니커즈가 발등 부근까지 진흙투성이가 되었고 바람결에 따라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다. 이번에도 내가 쏜 화살을 찾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잃어버린 화살을 찾으려면 같은 방향으로 한 번 더 활을 쏴야 했다. 할머니는 오래 고민할 것도 없다고 했다. “그 짓이 맞나 틀리나 긴가민가할 땐 똑같은 짓을 한 번 더 해봐.” 그때 할머니는 부엌 바닥에 앉아 오미자를 우려낸 물을 유리병에 담고 있었다. 나는 벽에 기대어 주둥이가 좁은 유리병에 빨갛고 맑은 오미자물이 채워지는 걸 바라봤다. 할머니는 병 밖으로 흐른 오미자물을 행주로 닦아내다가 손가락에 묻은 액체를 슙 하고 빨았다. “더럽게.” “얼레?” 할머니는 보란 듯이 한 번 더 자기 검지에 키스했다. 슙. 그러자 무슨 일인가 하고 보리차차가 할머니에게 다가와 콧등을 들이밀었다. 나를 보며 타각, 할머니를 보며 타각. 어서 둘 중 한 명이 자기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라는 듯 타각

  • 최고관리자
  • 202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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