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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e-book 도서관

  • 작성일 2023-04-01
  • 조회수 2,522

보르헤스의 e-book 도서관

이갑수


873-ㅂ854ㅍ 『픽션들』

내가 보르헤스를 만난 것은 전 세계의 모든 전자책 서비스가 먹통이 된 다음날이었다.

그즈음 나는 도서관 생활에 완벽히 적응해서 어제와 오늘을 구분하지 못한 채로 살고 있었다. 내일도 달라질 게 없다는 게 유일한 고민인 무시간적인 생활이었다.

-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가끔 짬이 나면 혼잣말을 했다.

892.83-ㅍ38ㅇ 『오몬 라』

나는 구청에서 운영하는 무인 도서관의 사서다. 공식적인 직함은 아니다. 명함에는 구청 문화정책과의 학예사로 되어 있다. 구청으로 출근하는 건 아니다. 아마 내 책상도 없을 것이다. 나는 외부에 알려지면 곤란한, 있지만 없는 존재다.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말하자면 시간 같은 직책이다. 내가 시간이 된 것은 도서관장 때문이다. 무인 도서관의 관장은 당연직으로 구청장이 겸임한다.

구청장은 선거기간 내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한 혁신과 변화를 부르짖은 사람이었다. 버스정류장 옆의 쓰레기통과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 있는 미끄럼틀과 그네에도 사물 인터넷을 연결하겠다고 공헌했다. 나는 구청장의 후보 시절 공약집을 천천히 완독했는데, 디스토피아를 잘 구현한 한 편의 SF소설이었다.

구청장의 쓸모없는 공약 중 몇 가지는 시범 운영되기도 했다. 버스정류장과 아파트 단지에 AI 쓰레기통과 스마트 미끄럼틀이 스무 개 정도 설치됐다.

- 감사합니다. 분리수거는 필수.

쓰레기를 버리면 그런 음성이 흘러나온다. 무명의 아이돌 가수가 재능기부로 녹음했다고 한다. 연예인도 정말 힘든 직업이다. 미끄럼틀은 조금 더 다양한 말을 한다.

- 천천히 내려가세요. 와우, 지상에 도착했어요. 즐거우셨나요? 한 번 더 탈까요? 뒤에 그네도 있어요.

나는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아이가 미끄럼틀을 탄 후에 울음을 터트린 것을 봤다. 구청장은 아마 외로운 사람일 것이다. 인터뷰 기사를 찾아보니 10년 넘게 기러기 아빠로 살다가 몇 년 전 이혼을 했다고 한다.

무인 도서관은 구청장의 핵심 공약이었다. 다른 것은 다 안 돼도 무인 도서관만은 반드시 임기 내에 운영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 저는 구민들의 성숙한 의식을 믿습니다. 우리 사회가 그 정도 도덕성은 기대해도 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기자가 책의 파손과 분실 우려에 대해 질문하자 구청장은 그렇게 대답했다. 구청장의 말은 절반 정도는 맞다. 무인 도서관이 운영된 지 1년이 넘었지만, 책을 훔쳐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그게 도덕성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무인 도서관 안에는 108개의 CCTV가 있고, 회원카드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철저하게 출입을 관리한다. 반면, 파손은 빈번하다. 책 귀퉁이를 접거나 밑줄을 긋는 일은 예사고, 라면 국물과 커피로 얼룩을 잔뜩 만들어 반납하기도 한다. 책장이 찢어지는 경우도 많다.

- 제가 왜 거기로 가야 합니까?

내 근무지가 무인 도서관이라는 사실을 전화로 통보받았을 때, 나는 과장에게 그렇게 물었다.

항의였다.

- 자기소개서에 적혀 있던데, 준사서 자격증을 갖고 있다고. 자네가 적임자야.

과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코웃음 소리도 들렸다. 나는 아직 과장의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밉살스러운 인상일 게 분명하다.

- 그래도 저는 행정직으로 합격했는데.

내가 말했다.

- 자네를 어디에 배치할지 정하는 건 우리 권한이지.

과장이 말했다.

- 저한테 거부권은 없습니까?

내가 물었다.

- 있지. 다만, 자네가 이번에 거절하면 자네 자리가 언제 생길지는 모르겠군. 몇 년이 걸릴 수도 있고.

과장이 대답했다.

협박이었다.

나는 짧은 순간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상급기관에 진정서를 넣는 방법, 행정소송, 신문사에 제보하기, 어느 쪽도 잘 될 것 같지 않았다.

- 하겠습니다. 그런데 무인 도서관에 왜 사서가 필요한 겁니까?

나는 결국 협박에 굴복했다. 공시생으로 지낸 3년의 시간은 나를 나약하게 만들었다. 연수원에서 들은 얘기도 한몫했다.

공무원은 한 번 찍히면 끝이다.

- 잘 생각했어. 무인이라고 진짜 사람이 없는 게 아니야.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 소련에서 발사한 최초의 무인 로켓에도 사실은 조종사가 타고 있었어.

과장은 필요한 공문과 지침들은 이메일로 보내 주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요즘도 나는 가끔 무인 로켓에 탄 조종사가 나오는 꿈을 꾼다. 지구로 귀환할 수 없는 로켓 안에서 광활한 우주를 바라보며 조종사는 시간에 대해 생각하다가 혼잣말을 한다.

- 우주 공간에는 시간이 있지만, 또한 없구나.

그렇게 나는 3급 무인 사서가 되었다.

873-ㅂ854ㅍ 『픽션들』-「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한 가지 새삼 깨달은 것은 세상에 정말 책이 많다는 것이다. 도서관법에 따라 국내에서 발행된 모든 책은 국립중앙도서관에 2권씩 보내야 하는데,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보존서고에는 1200만 권의 책이 납본되어 있다.

- 납본하면 역사가 됩니다.

역사는 그것을 관찰하는 사람이 없어도 쌓여 가는 걸까. 납본제도의 홍보문구를 본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일하는 무인 도서관에도 26만 권의 책이 있다.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으면, 1년이면 대략 3백 권, 10년이면 3천 권, 100년을 읽어야 3만 권을 읽을 수 있다. 읽고 있는 동안에도 매일 새 책이 나온다. 그러니까 누구도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을 수 없다.

인류는 이미 충분하고도 남을 읽을거리를 갖고 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아 놓고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만 권의 목록을 정하라고 하면, 다소 진통은 있겠지만 수천 개의 목록이 완성될 것이다. 책을 읽고 싶은 사람은 그 목록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해서 읽기만 하면 된다. 죽기 전에 1만 권의 책을 읽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런데도 매주 도서관에 새로 책이 들어오는 이유는 뭘까? 작가들은 왜 매일 새로 책을 쓰는 걸까? 신규 도서를 정리하면서 나는 그런 궁금증을 갖는다. 로그인이 되지 않는 전자책 계정처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적절한 답을 찾을 수 없다.

전 세계의 전자책 서비스가 먹통이 된 사건으로 신문도 뉴스도 난리다. 해킹이라는 말과 바이러스 탓이라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일루미나티의 공격이라는 식의 음모론도 종종 눈에 띈다. 업체들은 원인을 파악 중이며 조속히 해결하겠다는 말만 반복한다.

내 생각에는 금방 끝날 것 같지 않다.

책에 둘러싸여 살면서 굳이 따로 전자책 서비스에 가입한 이유는 온전한 나만의 책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도 전자책보다 종이책을 훨씬 더 좋아한다. 종이의 질감, 책장 넘기는 소리, 책 냄새, 책에는 어떤 물성 같은 것이 있다. 언어는 개념이지만 종이책으로 읽으면 물질로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이 물질이기 때문에 나는 내 책장을 가질 수 없다. 내 방에는 책장을 놓을 만한 여유 공간이 없다. 나중에 이사 갈 때를 생각하면 책을 사는 것도 겁난다. 전자책 서비스는 현재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능한 최선이다.

<내 서재>에 들어갈 수가 없다. <내 서재>는 정말 멋진 곳이다. <내 서재>에는 600권의 책이 있다. 내가 소장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책과 반복해서 계속 읽는 책이다. 열 권 정도 선물 받은 책도 있다. 아직 선물의 내용은 확인하지 않았다.

나는 600권의 책을 위해 600개의 책장을 준비했다. <내 서재> 안에서는 책장 하나에 600권의 책을 꽂든, 600개의 책장에 한 권씩 꽂든 차이가 없다. 책장도 책도 무한히 늘릴 수 있다. 인서트 코인만 하면 된다. 소문으로는 인서트 코인으로 죽어가는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한다. 반쯤 좀비가 되어 출근하는 내 동생도 월급날에는 생기가 도는 걸 보면 헛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 연결할 수가 없습니다.

컴퓨터와 노트북, 스마트폰, 전자책 단말기가 모두 같은 대답만 반복한다. 서비스 센터는 계속 통화 중이다.

내 전자책 단말기는 산 지 한 달도 안 된 새 제품이다.

- 저희 환불 규정에 해당이 안 됩니다.

단말기를 산 대리점을 찾아가 환불을 요청하자 그런 대답이 돌아온다.

아무 권한도 없는 직원이 무슨 죄가 있겠냐마는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사상 초유의 일이니 규정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규칙은 어떤 일이 최소 한 번은 일어난 후에 만들어지는 거니까.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 의자를 버려 놓은 것을 봤다.

- 방산산업에 신고했음. 가져가셔도 됩니다.

높낮이 조절이 가능하고 목 받침대도 따로 있는 최신형 듀오백이다. 나는 주변을 살핀 후에 잠시 의자에 앉는다. 편안하다.

나는 의자를 도서관에 가져다 놓았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 좋은 물건이었고, 무엇보다 내게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보안실 의자는 등받이가 휘었고, 앉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사용할 수 없게 된 전자책 단말기에 대한 보상이라는 자기합리화도 만들었다.

의자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도서관은 멀지 않았지만, 의자를 들고 가면 삼십 분이 넘게 걸릴 것 같았다. 바퀴가 있으니 끌고 갈 수도 있지만, 소리가 너무 컸고 인도 위를 끌고 가면 바퀴가 고장 날 것 같았다.

이런 종류의 의자에서 제일 비싼 부품은 의외로 바퀴다.

의자는 도서관과 잘 어울린다. 원래부터 도서관에 있던 물건 같다. 나는 의자에 앉아 생각한다.

조소과 교수가 학생들에게 의자를 만들어 오라고 과제를 낸다. 한 학생은 왕관과 깨진 사기그릇을 만든다.

- 이게 왜 의자지?

교수가 묻는다.

- 왕좌에 앉은 사람이 왕이고, 길바닥에 앉아 구걸을 하면 거지죠. 자리가 결정하는 겁니다.

학생이 대답한다.

다른 학생은 스파크가 일어나는 발전기 같은 것을 만든다. 또 다른 학생은 못이 잔뜩 박혀, 앉으면 온몸에 구멍이 날 것 같은 고문 기구를 만든다. 교수는 그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한다. 학생들은 저마다 자신의 이유를 답한다. 동의가 되는 것도 있고,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아무도 진짜 의자를 만들어 온 사람은 없다. 새로운 형태와 질서를 부여해 자신만의 의자를 표현한다.

- 작가들은 그런 행위를 형상화라고 부른다네.

어느새 나는 <내 서재>에 들어와 있다. 전자책 서비스가 재개된 걸까. 하지만, 나는 의자에 앉았을 뿐, 단말기는 만지지 않았는데. 나는 내게 말을 건 사람을 쳐다본다. 웬 노인이 책장 앞에 서서 책을 훑어보고 있다. 익숙한 얼굴이다. 이상한 일이다. 기본적으로 <내 서재>에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은 들어올 수가 없다.

- 저, 혹시. 영화배우 안성기 씨 아니신가요?

내가 묻는다.

- 자네한테는 내가 그렇게 보이나 보군. 아마 언어 문제 때문에 겉모습이 바뀐 모양이야. 도서관 <시스템>은 때로 사용자도 모르게 작동할 때가 있지. 자네한테 어떻게 보이든 나는 자네가 말한 그 사람은 아니라네.

노인이 대답한다.

- 그럼 누구세요?

나는 다시 묻는다.

- 나는 보르헤스라고 하네. 꽤 오랜 시간 도서관장으로 일했지.

보르헤스가 대답한다. 익숙한 이름이다. 겸손하게 자신을 도서관장이라고 말했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다. 나도 몇 편 정도는 읽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노인이 안성기든 보르헤스든 중요하지 않다.

- 그런데 여기서 뭐 하세요?

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한다.

- 보다시피 책장을 정리하고 있다네. 지금은 잠깐 쉬는 중이지. 문 닫은 도서관에 누가 들어올 줄은 몰랐거든. 어떻게 들어온 건가?

보르헤스가 말한다.

- 그냥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그럼 여긴 천국인가요?

- 아니.

- 그럼 지옥인가요?

- 아니.

- 그럼 뭔가요?

- 도서관이라네.

나는 도서관에 있다가, 도서관에 왔다.

- 먼저 온 사람들이 대기하는 곳이라더군.

내가 보르헤스에게 어디에 있다가 온 거냐고 묻자 그는 그렇게 대답했다.

- 뭘 기다리는 걸까요?

추가 질문.

- 지금은 우리가 기다리는 게 뭔지 알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네.

답변.

지금 보르헤스가 있는 곳은 마치 인생 같은 곳이다. 보르헤스는 또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결국 사후세계란 죽은 후에도 계속 생을 이어 나가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출근길에 큰 병원이 있는데, 나는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병원이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공간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죽는다. 요즘은 죽음의 공간에 가까워지고 있다. 산부인과가 많은지 장례식장이 많은지 세어 보면 간단히 답이 나온다.

도서관은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텍스트의 안쪽과 바깥쪽이 만나는.

- 자네 정말로 그 둘이 진짜 차이가 있다고 믿나?

보르헤스가 묻는다.

차이는 있다. 하지만, 그 차이를 내가 알아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 어쨌든 수고하세요. 저는 근무 중이라.

내가 말한다.

- 또 보세나.

보르헤스는 그렇게 말하고 책장 사이로 사라진다. 그의 인사말처럼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안성기의 모습을 한 보르헤스를 만나고 왔더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맥심 믹스커피가 먹고 싶다. 내 무의식 어딘가에 각인된 새로운 형태와 질서다.

843-ㅇ245으-3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무인 도서관은 24시간, 365일 연중무휴로 운영된다.

- 저는 언제 쉽니까?

운영지침을 읽다가 나는 바로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성격 급하네. 끝까지 다 읽어 봐.

과장이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다행히 내 근무시간은 주 52시간을 넘지 않는다. 아침 10시에 출근, 저녁 7시 퇴근. 매주 화요일이 휴무고, 월요일은 4시간만 근무한다.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문화원에서 파견근무자가 온다. 인수인계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 마주치는데, 성격이 까칠하고 말투가 신경질적인 여자다. 공무원은 아니고 문화원에 소속된 계약직 인턴이다. 굳이 따지면 내가 상급자지만, 지시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문화원장의 조카손녀란다. 과장도 그녀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라고 따로 당부했다. 문화원장은 구청장의 은사이자 선거운동 후원회장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나한테 큰 관심이 없다. 내가 과장의 지시나 공문 같은 것을 전달하면 지루한 책을 읽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녀도 여러 가지 불만이 있을 테지만, 나한테 말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여자 화장실에 미비한 게 많아요. 위에 전달해 주세요.

그녀가 내게 말을 할 때는 항상 마지막에 한 마디가 붙는다. 위에 전달해 주세요. 내 보고가 어느 정도 위까지 올라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잘 전달한다.

- 그런데, 야간에는 아무도 없는 건가요?

그녀가 위에 전해 달라는 말을 빼고 내게 물어 본 것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 아뇨. 야간 근무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아는 대로 대답했다.

- 왜 한 번도 못 봤죠? 야간 근무자하고는 인수인계가 필요 없나요?

- 그냥 있다고만 들었습니다.

사실 나도 아는 게 별로 없다.

도서관은 총 4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1층은 로비, 휴게실, 화장실, 모유 수유실.

2층은 인문과학실.

3층은 사회과학실.

4층은 서고와 보안관리실.

4층은 일반 이용객은 출입할 수 없다. 내 자리는 서고 뒤에 있는 보안관리실이다. 이용객이 없을 때는 보통 그곳에 앉아서 업무를 본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공문이 온다. 시장님 지시사항, 총리 지시사항, 장관 지시사항, 교육청 협조공문……. 실태나 현황 파악이 제일 많다. 소화기의 개수와 위치, 비상등의 위치, 3층에서 비상계단을 이용해 건물 밖으로 나가는 데 몇 초가 걸리는지, 세면대의 수압이 몇 kPa인지 직접 조사해서 보고해야 한다.

지붕에 있는 피뢰침 성능검사를 해서 보고서를 올리라는 공문이 온 적도 있다. 따로 예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하루에 세 번씩 오는 보안업체 직원한테 테이저건을 피뢰침에 쏴달라고 부탁했다.

타닥, 파스스.

전자기선과 함께 튀는 소리가 몇 번 들렸고 이내 진정되었다. 5분 정도 기다렸다가 피뢰침을 만져 봤는데, 살짝 뜨거운 것 같았다. 진짜로 열이 발생한 건지 기분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떤 방법으로 성능검사를 했는지는 생략하고, 피뢰침이 정상 작동한다고 보고서를 써서 보냈다.

다른 건물들은 어떤 식으로 피뢰침 성능을 검사하는지 궁금하다. 진짜 벼락을 맞아 보기 전에는 피뢰침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게 아닐까.

무인 도서관의 운영은 전혀 지침대로 되지 않는다.

873-ㅂ854ㅍ 『픽션들』-「기억의 천재 푸네스」

전자책 서비스는 여전히 접속되지 않지만, 세상은 조용하다. 당연한 일이다. 도서관이 문을 닫는다고 해도 신경 쓰는 사람은 없다. 이 세계에는 책을 대신할 재미있는 것들이 아주 많으니까.

- 그래서 우린 이제 재미없는 걸 해야 한다네.

보르헤스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요즘 종종 <내 서재>에서 보르헤스를 만난다.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방법을 알았다. 의자에 앉아서 뭔가 상상을 하면 어느새 <내 서재>에 들어와 있다. 보르헤스는 내가 들어오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말상대를 해준다. 보르헤스도 구청장처럼 무척이나 외로운 사람 같다.

전자책 서비스가 먹통이 된 것도 보르헤스 때문이다. 그는 자기 사후에 출간된 책들을 정리하고 있다.

- 이렇게 무질서한 도서관은 처음이야.

만날 때마다 그렇게 투덜댄다.

- 다 정리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나는 전 세계의 전자책 서비스를 위해 질문한다.

- 100년.

보르헤스가 대답한다.

- 저는 죽고 없겠네요.

내가 말한다.

- 자네가 없어도 도서관은 남아 있을 테니 상관없다네.

보르헤스가 말한다.

- 저 말고도 곤란한 사람이 많아요.

내가 말한다.

- 기다려 보게. 나를 이리 인도한 자가 <푸네스>를 만들고 있거든, 그게 완성되면 훨씬 빨리 끝날 거야.

보르헤스가 말한다.

나는 인도자에 대해 묻는다.

- 그는 얼마 전에 왔네. 자네의 시간으로는 12년 정도 전이겠군. 항상 검은 터틀넥만 입는 특이한 친구야. 하루는 우리를 한 곳으로 모으더니 프레젠테이션을 하더군. 그는 기존 질서와 철저히 다른 혁신을 부르짖었네. 이곳도 변해야 한다는 거야. 나는 물론이고 다들 설득 당했네. 핵심을 잘 잡아서 사람을 매료시키는 재주가 있더군. 그가 <한 가지만 더>를 외치면 나도 모르게 기대를 하게 되더군. 몇 번의 실패가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공헌했던 대로 우리가 있던 곳에 인터넷을 연결했다네.

보르헤스가 대답한다.

- 누군지 알 것 같네요.

내가 말한다.

- 부끄럽지만 내 팬이라고 하더군. 내가 단언한 무한한 <도서관>이 실재한다고 해서 확인하러 왔는데, 너무 엉망이라 정리를 하는 거야.

보르헤스가 말한다.

- <푸네스>는 뭔가요?

내가 묻는다.

- 모든 걸 기억하고 연산속도도 빠른 인공지능을 만든다고 하더군.

보르헤스가 대답한다.

- 제가 도울 건 없을까요?

나는 마지막 질문을 한다. 시간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가야 할 때가 되면 알 수 있다. 근무 중이니 계속 자리를 비우는 것도 곤란하다.

- 그건 나보다는 자네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군. 나는 자네가 뭘 할 수 있는지 잘 모르니까.

보르헤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책장 사이로 사라진다.

<내 서재>에서 나오면 나는 어김없이 맥심 믹스 커피를 마신다.

853-ㅇ329ㄱ 『거울 속의 거울』

무인 도서관의 입구와 출구는 완벽히 분리되어 있다. 당연한 일인 것 같지만, 의외로 세상에는 입구와 출구가 분리된 곳이 많지 않다. 내 삶도 입구와 출구가 같았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었고, 대학에 가면 새로운 세상이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똑같았다. 취업 준비할 때도 다시 중학교에 입학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사히 사회에 나와 공무원이 된 지금도 본질적으로 변한 것은 없다. 간혹 나의 출구가 누군가의 입구인 것을 확인할 때마다 나는 크게 실망한다.

무인 도서관처럼 입구와 출구가 분리되어 있었다면 조금은 기대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입구로는 들어갈 수만 있고, 출구로는 나갈 수만 있다. 딱 한 번 밖으로 나오던 사람이 우산을 두고 온 것을 깨닫고 다시 들어간 적이 있다. 그날 서울시 전역은 비행금지 구역이 되었고, 제3공수특전여단에 전투준비태세 4단계가 발령되었다. 경찰과 소방도 갑호 비상근무에 들어갔다.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원칙의 문제다. 이 세계에는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들이 있다.

무인 도서관을 이용할 때는 입구로 들어가고, 출구로 나와야 한다.

무인 도서관 로비에는 가로 15m, 세로 10m 크기의 거울이 있다. 거울 맞은편에도 거울이 있다. 가로 7m, 세로 3m 크기의 거울이다. 두 거울은 서로 마주 보고 있지만, 서로를 비추지 않는다. 빛의 집약과 산란, 투과를 이용한 기술이라는데, 정확히 뭘 어떻게 한 건지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도서관에서 가장 최첨단 기술이 사용된 것은 거울이 아닐까 종종 생각한다.

거울 밑에는 아마도 거울의 제작자가 적어 놨을 문장이 적혀 있다. 직접 적지 않았더라도 문장은 제작자의 소유다. 때때로 그들은 아이디어, 콘셉트, 제안, 지시를 통해 모든 부분을 전체에 예속시킨다.

- 거울은 좌우를 반대로 비추는 것이 아니라 전후를 반대로 보여준다.

중학교 과학 시간에 배우는 당연한 말이지만, 거대한 거울 아래 있으니 뭔가 대단한 얘기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어쩌면 그런 착각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작품을 만드는 작가가 되는지도 모른다.

출근할 때 나는 거울 앞을 지난다. 퇴근할 때도 마찬가지다. 거울을 지나지 않고는 도서관에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다. 거울은 사물은 정확히 비추지만, 인간의 상은 왜곡시킨다. 대체로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마다 다른 모양이지만, 나의 경우는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 보이고, 어깨가 넓어 보이고, 얼굴이 작아 보이고, 코가 높아 보이고, 눈이 커지고, 피부에 윤기가 난다. 말하자면 조화로운 비율 같은 것이 생긴다. 비율은 균형을, 균형은 아름다움으로 연결된다.

로비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본 사람은 자신이 아름답다는 착각에 빠진다. 무인 도서관의 방문객은 대부분 중·고등학생이고, 대학생들도 간혹 있다. 남성보다는 여성의 비중이 높다. 이 지역에서 가장 좋은 포토존으로 소문이 나면서 그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최근에는 다른 도시에서 원정을 오는 사람들도 생겼다.

- 구청장님이 아주 흡족해하셔.

과장이 말했다. 도서관 이용객이 늘어나 구청장에게 칭찬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내 성과평가 점수에도 반영이 되겠지만, 내가 한 일은 없다. 사람들이 도서관에 오는 것은 거울 때문이다. 도서관 이용객의 90%가 로비에서 사진만 찍고 돌아간다.

이 시대에는 책도 하나의 거울이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책의 내용이 아니라 책을 읽고 있는 사진, 혹은 책 사진이다. 무인 도서관의 도서 대출용 바코드는 책의 앞표지가 아니라 뒷면에 부착되어 있다.

- 바코드 위치를 바꿔야겠어요. 위에 전달해 주세요.

문화원장 손녀의 아이디어였다. 나는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논리는 타당했다. 중요한 것이 책의 내용이라면 어째서 베스트셀러조차 인터넷에서 스캔본이나 텍스트 파일을 찾을 수 없을까. 스마트폰으로도 간단히 스캔할 수 있는 세상인데. 처벌이 두려워서만은 아니다. 전 세계에서 저작권 소송을 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불법복제 파일도 무수히 돌아다닌다. 만들어도 아무도 소비하지 않으니까. 불법 스캔도 텍본도 만들지 않는다.

- 사람들이 원하는 것도, 우리가 빌려주는 것도 이미지예요. 위에 전달해 주세요.

나는 패배감에 휩싸인 채로 그녀의 말을 위에 전달했다. 바코드 교체 작업은 3주가 걸렸다. 그녀의 예측대로 바코드 위치를 책 뒷면으로 바꾸자 도서관 이용객이 30% 늘어났다. 지금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거울은 모든 것을 왜곡시킨다.

420.1-ㅍ37ㅍ 『펜로즈 계단』

로비의 거울을 지나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다. 선택의 순간이다. 잘못 선택하면 다시 돌아와야 한다. 2층으로 가려면 왼쪽 계단으로 가야 한다. 오른쪽 계단을 선택하면 3층으로 갈 수 있다. 4층으로 가는 방법은 비밀인데, 우선 3층에 갔다가 다시 2층에 간 후 4층으로 갈 수 있다. 힌트는 불연속의 연속성. 공무원의 비밀엄수 의무 때문에 더는 말할 수 없다.

계단은 나선형이다. 시계 방향으로 올라간다. 시계 방향의 나선형 계단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쉽게 설계된 것이다. 실제로 중세의 성들은 외부나 내부나 전부 시계 방향으로 된 나선형 계단으로 되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오른손잡이가 더 많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적은 마음대로 칼을 휘두를 수 없다. 중세 시대에도 왼손잡이 기사가 더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성을 공격할 때 필요하니까.

도서관의 계단이 시계 방향의 나선형인 이유는 누구로부터의 공격을 대비한 건지 의문이다. 적을 알아야 지킬 수 있을 텐데. 도서관을 지키는 기사는 나밖에 없다.

- 자네의 적은 시대일세.

보르헤스는 그렇게 대답할 것 같다.

- 저는 잘 순응하는 사람인데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계단을 오른다. 한 층 올라가는 데 5분 정도 걸린다. 몇 번이나 실험해 봤는데,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 30초 정도 더 걸린다. 중력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추측만 하고 있다. 심리적인 이유인지도 모른다. 나선형 계단은 비효율적인 디자인이지만 도서관에는 더없이 잘 어울린다. 세상에 책보다 비효율적인 매체는 없으니까. 어떤 작가가 1년 동안 쓴 것을 나는 하루면 다 읽는다.

802.3-ㄷ46ㅇ 『연필로 고래잡는 글쓰기』

위에서 내려온 공문이 없고 위에 전달할 사항도 없는 대부분의 시간에 나는 2층의 인문과학실에 있다. 2층이 이용객도 할일도 제일 많다. 보는 눈이 없을 때 무인 반납기 앞에 쌓여 있는 책을 제자리에 꽂아 놓고, 로봇 청소기를 작동하고, 한 번씩 창문을 열어 환기도 시킨다.

정기적으로 도서관에 오는 사람들, 한 번 오면 종일 앉아 있는 사람들 때문에 의외로 보는 눈이 없을 때가 많지 않다. 그들이 책에 완벽히 집중해 있거나, 화장실에 가거나, 조는 틈을 노려야 한다. 위험했던 적도 있다.

- 매일 출근하시네요.

책을 꽂고 있는데 누군가 옆에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책을 떨어뜨리고 고개를 돌렸다. 일주일에 서너 번씩 와서 요리책을 보는 여자였다. 창업 준비 중이거나 요리연구가쯤 된다고 추측하고 있었다.

- 그게 무슨.

짧은 순간이지만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과장에게 내 정체가 발각되면 어떻게 되는 건지 듣지 못했다. 유권자를 상대로 사기를 친 셈이니 구청장은 비난받을 테고, 언론의 조롱, 중앙정부의 간섭, 법적인 문제까지…… 나는 대기발령이 되고, 도서관은 문을 닫을 수도 있었다.

- 저도 자주 오는데, 제가 올 때마다 계시길래요. 뭐 공부하시나 봐요?

창업 준비 중이거나 요리연구가거나 오지랖이 넓은 이용객이 물었다.

- 공무원 시험 준비 중입니다. 저는 바빠서 이만.

나는 그렇게 말하고 3층으로 몸을 피했다. 당황해서 인문과학실 책을 들고 올라왔다.

다음날부터 나는 도서관 이용객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이용객이 되었다. 도서관 이용객이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책을 고르고 읽으면 된다. 읽는 척하면서 8시간을 앉아 있는 것보다는 8시간 동안 읽는 것이 훨씬 더 쉽다. 혹시 모를 의심을 떨쳐내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철학은 너무 어려웠고, 역사는 지루했고, 그나마 읽기 편한 것이 문학이었다. 나는 800번대 서가를 돌아다니며 제목이 마음에 드는 책, 표지가 끌리는 책, 첫 장이 재미있는 책들을 골라 열람실 전체가 보이는 구석에 앉아 한 권씩 읽어 나갔다.

열람실 책상 위에는 모래시계가 있다. 한 알 한 알 시간의 알갱이로 된 모래시계다. 모래가 떨어지는 시간이 매번 다르다. 일반적인 시계로는 사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냥 장식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그 쓰임을 깨달았다. 나는 시간의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질 때까지 책을 읽는다. 언제까지 읽어야 할지 알 수가 없으므로 독서에 더욱 집중한다. 내가 한 권의 책을 다 읽으면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진다.

첫날은 모래시계를 두 번 뒤집었고, 점점 속도가 빨라져 몇 달 뒤에는 하루에 세 번씩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매일 세 권씩 책을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써야 할지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했다.

808.3-ㅅ374현-35 『눈의 위증』

대출, 반납, 청소, 모든 것을 로봇이 할 수 있지만, 책을 책장에 꽂는 것만큼은 사람의 손이 필요하다. 무인 반납기는 국제표준도서번호(ISBN)를 모두 알고 있으니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기능이 있는 로봇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 사람을 쓰는 것보다 훨씬 많이 든다. 무인 도서관은 이미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면서 일을 시키는 방법을 갖고 있다. 자원봉사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거의 매일 봉사활동을 하러 온다. 그들의 업무는 책을 꽂는 것이다. 반납된 책의 30% 정도를 꽂고 간다. 인원에 비해 업무량은 매우 적은 편이다. 당연한 일이다. 다들 40분 정도 책을 꽂고, 4시간짜리 확인서에 도장을 찍고 돌아간다.

딱 한 명, 네 시간 내내 정말로 책을 꽂는 아이가 있다. 처음에는 몰라서 그런가 싶었는데, 한 번도 어김없이 시간을 다 채우고 돌아간다. 참 정직한 아이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학생은 왜 친구들이랑 같이 안 가고 남아 있어요?

하루는 책을 고르는 척하며 넌지시 그렇게 물어 봤다.

- 이름 때문에요.

다소 짜증이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부정입학으로 시끄러웠던 정치인의 자녀와 이름이 같았다.

나는 의자에 앉아 아이에 대해 생각했다. 아이가 부당한 일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한 만큼 봉사활동 확인서를 받아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니, 어쩌면 남들이 하지 않는 당연한 일을 하는 게 부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세계가 조작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면 우선 도서관에 가야 한다. 도서관의 수많은 데이터를 조작하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니까. 그런데 도서관이 조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내 서재>로 들어간다.

- 도서관에는 진리가 없어.

보르헤스가 말한다.

- 그럼 도서관에는 뭐가 있나요?

내가 묻는다.

- 도서관에는 책이 있지.

보르헤스가 대답한다.

- 책 속에 진리가 있지 않나요?

내가 묻는다.

- 나도 처음에는 책 속에 뭔가 있다고 생각해서 계속 읽었는데, 그 안에는 다시 도서관이 있더군. 평생을, 죽어서도 계속 책을 본 내가 하는 말이니 믿어도 좋아.

보르헤스가 말한다.

- 그럼 진리는 어디에 있나요?

내가 다시 묻는다.

- 입구와 출구 앞의 거울…….

거기까지 말했을 때, 테이저건에 맞은 피뢰침처럼 보르헤스의 전신이 흔들린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다음으로 넘긴 책장처럼 겉모습이 바뀐다. 안성기에서 박중훈으로. 둘이 친하다고 들은 것 같은데.

- 어디까지 얘기했지? 모호함은 풍요로움이다?

그는 시치미를 떼고 말을 이어 나간다.

- 당신은 보르헤스가 아니군요.

내가 말한다.

- 어떻게 알았지? 난 카사레스라고 하네.

카사레스가 말한다.

- 그냥 다른데요.

내가 말한다.

- 많이 다른가?

카사레스가 묻는다.

- 네. 무척. 보르헤스는 어디 간 거죠?

내가 묻는다.

- 시간이 다 되었어.

카사레스가 대답한다.

- 기다리던 것을 찾은 건가요?

내가 묻는다.

- 그건 몰라. 다음은 내 차례일 테니 곧 알게 되겠지.

카사레스가 대답한다.

- 혹시 저한테 남긴 말 같은 건 없나요?

내가 묻는다.

- 있어.

카사레스가 말한다.

873-ㅂ854ㅍ 『픽션들』-「보르헤스의 e-book 도서관 」

읽는 것과 쓰는 것은 같은 행위다.

보르헤스가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이다. 처음에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책을 계속 읽다 보니 어렴풋이 깨달았다. 텍스트와 텍스트가 만나서 굴절되는 교차점. 독자와 작가는 같은 일을 한다. 선택할 수 있는 교차점은 많을수록 좋다. 아니, 어쩌면 무한해야 한다.

요즘 나는 보르헤스를 대신해서 도서관을 정리하고 있다. <내 서재>의 책장이 6천 개까지 늘어났다. 혹시 가끔 전자책 서비스에 접속이 안 된다면, 그건 내 탓이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다. 하는 데까지 하고 누군가에게 넘길 생각이다.

무인 도서관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구청장은 재선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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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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