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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의 로건

  • 작성일 2023-02-01
  • 조회수 2,543

토요일 아침의 로건

서유미


젤다와의 수업이 끝났다. 두 시간은 컵 안의 음료처럼 사라졌다. 그는 네 개의 컵들을 쟁반에 옮겼다. 그의 머그잔에는 아메리카노가 조금 남아있고 곡물이 들어간 라떼를 마신 젤다의 유리컵에는 긴 티스푼과 침전물과 얼룩이 남았다. 두 개의 물컵은 모두 비었다. 쟁반을 챙기며 그는 수업을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을 노렸다.
수업이 시작됐을 때 젤다는 그를 보고 로건, 모자 쓴 건 처음 봐요, 라고 했다. 아침에 그는 이발할 때가 지나 덥수룩해진 머리에 골프 모자를 썼다. 이발을 못했어요. 그가 대답하자 젤다가 헤어 컷, 하며 표현을 영어로 바꾸어주었다. 그런 뒤에 새로 배울 표현이 정리된 프린트를 건넸고 스마트 패드에서 영화 속 장면을 재생시켰다.
사 년 가까이 수업하는 동안 그는 대체로 그 타이밍에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카페인이 들어가야 머리가 돌아가며 공부할 준비가 되었다. 오전 중에 커피를 마셔야 밤잠에 영향을 받지 않는 나이가 되기도 했다.
영화에는 백발에 가까운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넘긴 남자가 나왔다.1) 남자는 양복 차림으로 카메라 앞에 앉아서 자신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막이 없는 화면을 보며 그는 남자가 하는 말을 절반 정도 알아들었고 여러 번 반복해서 듣는 동안 의미가 좀 더 이해되었다. 은퇴한 남자는 회사에 인턴으로 지원하며 ‘자신의 인생에 어딘가 빈 구석이 있고 그걸 채우고 싶을 따름’ 이라고 했다. 그가 남자의 말을 따라하자 젤다는 긴 티스푼으로 곡물 라떼를 저었다. 라떼를 꿀꺽꿀꺽 마시는 동안에도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갸웃거리는 걸 잊지 않았다. 그가 단어를 빠뜨리고 말하거나 발음이나 억양이 이상할 때는 바로 컵을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았다. 그럴 때 젤다의 입술 양옆에는 곡물 라떼의 흔적이 하얗게 남았다. 입 모양을 잘 보라며 젤다가 입술을 크게 움직여 발음할 때마다 고소한 곡물 냄새가 풍겼다. 라떼를 다 마신 뒤 젤다는 물을 한 잔 마셨는데 그때 입술 옆의 흔적이 지워졌다.
그는 시니어 인턴에 지원한 칠십대 남자의 말 속에서 몇 개의 표현을 새로 배웠다. 남자가 새롭게 시작하는 삶에 대한 궁금증과 상관없이 두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어 두통약이 있는지 확인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로건.
젤다가 슬레이트를 치듯 두 손을 경쾌하게 맞잡았다. 그는 의자에 걸어놓았던 백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테이블 위의 프린트는 두 번 접어 백팩에 넣었고 안경을 벗어 냅킨으로 문질러 닦았다. 한 달 전에 안경을 새로 맞췄는데 두통이 오자 시야가 부옇게 변하는 느낌이 들었다.
젤다는 의자에서 일어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수업하는 동안 자꾸 걷어서 팔꿈치까지 올라간 데님셔츠의 소매를 정리했고 손목에 늘 끼고 다니는 얇은 고무줄로 머리를 묶었다. 바깥쪽 손목에 새긴 나뭇잎 모양의 타투에 고무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침에 카페의 스터디룸에 들어올 때 젤다는 언제나 머리가 덜 마른 상태였고 어깨에 닿지 않는 단발머리는 수업이 끝날 때쯤에야 묶기 좋게 말랐다.
젤다가 머리를 묶는 동안 그는 혈관이 불거지기 시작하는 자신의 손등을 낯설게 쳐다보았고 양쪽 관자놀이를 천천히 눌렀다. 두통은 나아지는 기미가 없이 점점 더 묵직해졌다. 영화 속 남자는 Well, I still have music in me, 라고 했는데 그는 자기 안에 여전히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는 나이 든 남자가 경이롭게 느껴졌다. 남자는 매일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게 정말 좋을 것 같다고 했고 사람들도 만나고 신나고 도전적인 걸 해보고 싶다고 했다. 남자는 그보다 나이가 많지만 건강해보였다.
그는 수업을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꺼낼까 고민하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젤다는 테이블 위의 스마트 패드와 펜슬, 프린트를 정리해서 가방에 넣었다. 그때마다 손목 위의 나뭇잎 타투가 구겨졌다가 펴졌다. 가방을 다 챙긴 젤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모직으로 된 체크무늬 재킷을 걸쳤다. 실제의 젤다는 작고 말랐는데 수업을 하는 동안에는 그보다 더 큰 어른처럼 느껴졌다. 눈이 마주치자 젤다가 로건, 이제 미국 지사로 발령나도 문제없겠는데요, 하며 웃었다. 그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자 좀 더 자신감을 가져요, 영화 속의 벤은 인턴부터 시작하잖아요, 로건은 미국에 가도 잘할 거예요, 하며 그의 팔을 툭 쳤다. 수업이 끝난 뒤의 젤다는 영어가 아닌 한국말을 썼고 젤다의 한국어는 당연히 완벽했다.
그는 휴대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뒤 젤다, 하고 불렀다. 머릿속이 징하고 울렸다. 젤다가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다가 고개를 들었다. 다음 수업을 위해 서두르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름을 부르고 나면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눈이 마주치자 사 년 가까이 이어온 수업을 그만하겠다는 말을 꺼내는 게 쉽지 않았다. 이렇게 간단하게 얘기할 문제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한쪽 손을 들어 인사했다.
일교차가 심해요. 감기 조심해요.
그가 영어로 말하자 젤다가 로건도요. 한 주 잘 지내고 오늘 배운 표현들 잊지 말아요, 했다.
젤다는 이어폰을 귀에 꽂더니 스터디룸의 문을 밀고 나갔다. 그는 창가에 서서 젤다가 카페 밖으로 나가 사람들 사이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숄더백을 멘 젤다의 어깨는 왼쪽으로 살짝 기울었고 걸을 때마다 하나로 묶은 머리가 경쾌하게 움직였다. 젤다의 머리 위에 놓인 철도로 전철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그는 점퍼 주머니에서 두통약을 꺼내 조금 남은 아메리카노와 함께 삼켰다. 휴대폰을 확인한 뒤 스터디룸의 사용 시간을 연장했다. 점심 때가 되었지만 배도 고프지 않고 입맛도 없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모자를 벗고 눌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발할 때가 지난 머리카락 아래로 단단한 머리통이 만져졌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지만 두통과 시력 저하가 증상인 건 확실했다.
그는 스마트 패드를 꺼내 수업 때 보았던 영화를 찾았다. 젤다는 자막 없이 원어로 여러 번 들은 다음 영어 자막을 확인하라고 했지만 그는 한글 자막의 크기를 키운 다음 이어폰을 꽂았다. 약이 두통에서 그를 잠시 건져낸 덕분에 관자놀이를 누르지 않고도 남자가 공원에서 사람들과 함께 태극권을 하는 마지막 장면까지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걸 보며 그는 집에 가는 길에 헤어컷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카페에서 나와 한강공원 쪽으로 걸어갔다. 빨갛고 노란빛으로 풍성하게 물든 가을의 나무들과 산책하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고 한강공원 쪽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하늘은 높고 파랗고 흰색의 구름 역시 멀리 있는데도 선명했다. 중후하게 단풍이 든 벚나무와 쨍한 노란빛의 은행나무가 함께 어우러진 풍경은 유화보다는 투명도가 높고 수채화라기에는 물기가 적었다. 예년보다 가을이 길게 이어져 그늘막과 돗자리를 펴놓고 늦가을의 토요일 오후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색색의 낙엽처럼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
나는 가을을 좋아해요. 가을이 됐다는 게 느껴져요. 가을을 타나봐요.
수업 시간에 젤다는 계절과 관련된 표현들을 짚어주었다. 젊었을 때 그는 가을을 탄다는 게 뭔지 몰랐다. 오십대가 되니 그게 관용적인 표현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기온이 떨어지고 바람이 불 때마다 삶에서는 무언가가 떨어져 나갔고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빛은 낙엽을 닮아갔다. 그는 강 쪽으로 걸어가 은색으로 반짝이는 강물과 멀리 수상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과 선착장에 정박해있는 오리배들을 보았다. 오리배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가볍게 흔들렸다. 묶고 있는 줄을 풀면 오리배들은 어디로 떠내려갈까. 영어 수업을 그만두게 되면 삶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종업원들이 테이블 위의 접시를 치우는 동안 임원들은 주말 라운딩 약속을 잡았다. 룸의 안쪽 테이블에 앉은 본부장이 추워지기 전에 부지런히 치자고 하자 그 옆에 앉은 다른 임원이 요즘 날씨가 예술이지, 하며 동조했다. 테이블 중앙에 앉은 스티브가 어눌한 발음으로 ‘가을 좋아’ 라고 해서 임원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임원 회의와 회식 자리의 공식적인 언어는 영어지만 외국 사람인 스티브와 이사는 예외였다. 그들이 한국말로 몇 마디하면 분위기가 유쾌해졌다.
골프 얘기를 듣던 스티브가 자신은 좀 더 큰 공을 좋아한다면서 테니스 칠 사람 없어요? 볼링 칠 사람은? 하고 물었다. 농담할 때 스티브는 어깨와 팔을 많이 움직였고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몇 사람이 장난스럽게 손을 들자 스티브가 나중에 딴 소리하면 안된다며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스티브가 골프 치는 자리에 빠지는 일은 없었다.
종업원들이 치우는 접시 위의 요리는 절반 이상 남았다. 개인적으로 가져간 음식을 다 먹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오 년 전에 외국계 기업이 회사를 인수한 뒤 스티브가 지사장으로 부임했을 때는 회식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통역해주는 직원이 합석했는데도 짤막하고 의례적인 대화만 몇 마디 주고받은 뒤 다들 먹는 일에 집중했다. 몇 년 사이에 임원들의 영어 실력은 놀라울 정도로 늘었고 회식 자리에서 음식은 더 이상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스티브가 앉은 가운데 테이블을 중심으로 임원들은 친분과 중요도에 따라 룸의 안쪽과 바깥쪽 테이블에 나누어 자리잡았다. 올해 회사의 주력 상품인 목과 허리 견인 치료기기 판매는 내수와 수출 모두 큰 폭의 흑자를 기록했다. 온라인 판매도 늘어서 직원들과 임원들은 연말 성과급의 규모를 기대했다. 여덟 명의 임원들이 회식 자리에서 골프와 주식과 부동산 얘기를 하며 친목을 다지는 모습은 수업 중에 젤다가 보여주던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다. 로건은 바깥쪽 테이블에 앉아 그들이 대화하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차이니즈 레스토랑의 안쪽 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드라마에서 사십대 후반의 스티브는 사교적인 지사장 역할을 맡았고 유연한 리더처럼 보이려고 타이 대신 셔츠에 니트를 입었다. 밝은 벽돌색의 니트는 긴 얼굴과 날카로운 눈매의 스티브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실제로 스티브는 처음 발령받았을 때보다 턱과 배에 둥글게 살이 붙었고 엠자형 탈모도 상당히 진행되어서 캐릭터가 많이 푸근해졌다.
그는 자기 앞에 놓인 빈 그릇들을 모아 종업원에게 건넸다. 두 달 전의 회식 때까지는 그도 꽤 비중있는 조연이었다. 승진과 미국 지사 설립에 관심이 많았고 열심히 배운 영어로 치료기기 홍보의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의료기기 박람회와 채용 박람회의 성과, 내년 봄에 있을 국제 의료기기 박람회에 대한 계획까지 대사의 분량도 제법 많았다. 회의 시간이나 회식 자리에서 그는 사람들의 표정과 대화에 집중했다. 스티브는 그가 만든 온라인 쇼핑몰의 제품 소개와 홍보 영상을 마음에 들어했고 미국 지사 설립에 그가 꼭 필요하다는 얘기를 여러 번 했다. 그게 불과 두 달 전 일이었다.
임원들이 미국 지사 설립과 새로운 부서 발령을 염두에 둔 채 연말과 새해 계획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자기 앞에 놓인 게살 스프를 떠먹었고 오향장육, 꿔바로우, 굴소스 채소볶음, 누룽지탕 같은 요리가 나올 때마다 개인 접시에 옮겨 담아 먹었다. 여러 종류의 딤섬을 맛보면서 스티브가 미식가라는 점에 감사했다. 다른 임원들이 예전의 그처럼 스티브에게 자신이 하는 일과 성취에 대해 얘기하는 동안 그는 대화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테이블 위를 살펴보았다. 그 장면에서 그가 배울 표현은 없었다.
세 개의 테이블 위에는 생화를 꽂은 화병과 촛불이 한 세트씩 놓여있었다. 호리병 모양의 화병 안에는 두 송이의 꽃이 꽂혀있는데 자세히 보니 색이 달랐다. 가장 안쪽 테이블에는 흰색과 분홍색, 스티브가 앉아있는 가운데 테이블은 흰색과 라벤다, 그가 앉은 테이블은 흰색과 노랑이었다. 이 레스토랑에 여러 번 왔는데 테이블 위에 양초와 꽃병이 놓여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화병 안의 꽃들은 장미처럼 여러 겹의 꽃잎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름은 알 수 없었다. 주말 내내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던 듯 바깥쪽 꽃잎이 살짝 시들었다. 작은 원통 유리병 안의 초는 힘있게 타올랐는데 그가 앉아있는 테이블의 초만 불이 약했다.
그는 그런 것들을 사람들의 표정보다 자세히 보았다. 종업원들이 테이블 위에 후식을 세팅하고 사람들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병 안의 초는 계속 타오르고 꽃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시들어갔다.
그가 후식으로 나온 망고 셔벗을 한 숟갈 떠먹었을 때 테이블 위에 놓인 촛불이 조용히 꺼졌다. 그는 불이 붙어있던 심지가 얼마 남지 않은 촛농 속에 잠겨있는 것을 보았다. 재킷 주머니 안에 든 두통약을 만지작거리며 건강검진을 받은 지 한 달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그를 지나쳐갔다.
그는 몇 개의 항목을 추가해서 건강검진을 예약했고 한 달 전에 병원에 갔다. 문진표를 작성하며 운동 시간과 횟수가 부족하고 과음했던 것을 반성했고 혈압과 몸무게의 수치가 크게 변하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시력이 많이 나빠진 건 노화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검진을 마치고 병원 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평소보다 많이 피로하다고 느꼈다. 점심을 먹은 직장인들이 사무실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죽이라도 한 그릇 사 먹으려고 했는데 머리가 묵직하고 눈도 침침했다. 그는 주차장으로 내려가 운전석에 앉아있었다. 저녁 약속을 취소한 뒤 안경을 새로 맞추러 갔다.
며칠 뒤에 사무실에서 목과 허리 견인 치료기기의 상품 리뷰를 읽다가 뇌질환이 의심되니 내원하라는 병원의 연락을 받았다. 그는 마우스를 쥐고 있던 오른손과 바닥을 디디고 있는 발을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뒤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를 보거나 텀블러 안의 차를 마셨고 업무와 관련된 통화를 했다. 그가 전화를 받기 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있기가 힘들어 화장실로 갔다. 거품을 내어 손을 씻었고 거울 속 얼굴을 보며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해보려 애썼다. 의사는 뇌 CT 판독 결과에 대해 말하며 양성 종양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고 그 목소리는 점심을 먹은 식당에서 영수증 드릴까요? 라고 묻던 목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통을 만져보다가 흐르는 물에 얼굴을 씻었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는 것이 두려워 오래오래 문질러 닦았다.
주말에 라운딩 갈 거지? 본부장이 물어서 그는 장모님 생신이라고 말하며 불참 의사를 밝혔다. 그는 회사와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했다. 전문 의료진과 연구진이 개발한 경추와 요추 견인기기의 설명서를 만들고 광고 문구와 홍보 영상의 제작을 의뢰하고 감수하는 것이 적성에 잘 맞았다. 미국에서 지사의 설립을 도우려면 영어 수업의 횟수도 늘리고 생활을 위해 준비해야할 것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테이블 위의 꽃처럼 눈에 띄지 않게 시들어갔다.
망고 셔벗을 먹은 뒤 그는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화병 안의 꽃 두 송이를 찍었다. 장미와 비슷하지만 장미가 아닌 꽃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스티브가 그를 보더니 로건, 방금 뭘 찍은 거야? 하고 물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 꽃, 이름이 궁금해서, 라고 대답했다. 주말 라운딩 멤버를 정하던 사람들이 스티브와 그를 잠시 쳐다보았다. 혹시 이 꽃 이름 아는 사람있어? 그는 테이블을 둘러보며 물었다. 스티브가 어눌한 한국말로 맙소사, 로건. 가을 타나봐,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쳐다보던 사람들이 비로소 웃음을 터뜨렸다.


토요일 아침, 그는 알람 소리에 눈을 떴고 평소와 같은 시간에 일어났다. 후드 집업을 걸치고 지하철역 근처의 플라워샵에 가서 미리 부탁해놓은 꽃다발을 찾았다. 이틀 전 퇴근길에 꽃집에 들렀을 때 꽃집 주인은 그가 찍은 사진을 보더니 리시안셔스네요, 하며 연한 분홍색의 꽃 한 단을 꺼내 보여주었다. 레스토랑의 테이블에 있던 꽃보다 더 건강해보였다. 주인이 리시안셔스는 자른 상태에서 더 피지 않는 꽃이라며 수명이 긴 게 장점이라고 했다. 그는 얇고 부드러운 꽃잎을 보다가 꽃다발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토요일 아침의 지하철에는 고단한 표정의 사람들이 띄엄띄엄 앉아있었다. 그는 꽃다발이 든 쇼핑백을 발치에 놓은 뒤 자리에 앉아 딸이 어버이날 선물해준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젤다는 영어책 읽어주는 오디오북을 속도에 맞게 조절해서 듣거나 발음이 정확하고 가사가 단순한 올드 팝을 듣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했지만 병원에 다녀온 뒤로 그는 이동할 때 피아노나 기타 연주곡을 반복해서 들었다.
카페까지 걸어가는 동안 한 주 전에 보았던 풍경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졌다. 지난주 토요일에서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은 듯했고 따뜻한 기온이 이어져 가을이 계속될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들은 색색의 나뭇잎들을 풍성하게 매단 채 그로서는 짐작할 수 없는 순서에 맞춰 천천히 낙엽을 떨어뜨렸다. 나무들이 앙상해질 거라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는 쇼핑백 안에 든 꽃다발을 본 뒤 카페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평소처럼 뜨거운 아메리카노와 젤다에게 줄 곡물 라떼를 주문했다. 토요일 아침 수업 때 빈 속으로 오는 젤다는 포만감이 드는 음료를 찾다가 곡물 라떼를 마시기 시작했다. 음료를 주문하면서 그가 몇 번 빵을 권했지만 수업에 방해가 된다며 거절했다. 그는 카드를 단말기에 꽂기 전에 케이크를 진열해놓은 쇼케이스를 쳐다보았다. 마지막 수업이라 케이크를 추가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얼그레이 쉬폰 케이크와 치즈 케이즈, 초코 케이크를 눈으로 훑었다.
스터디룸에 들어가자 젤다는 거울을 보며 젖은 머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꽃다발이 든 쇼핑백을 의자 옆에 세워둔 뒤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발했네요. 로건.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젤다는 포크를 집으며 가끔은 케이크도 괜찮지요, 했다. 그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 젤다는 포크로 케이크를 잘라 먹으며 지난 주말에 친구들과 나눈 대화를 전해주었다. 젤다의 말이 빠르게 이어지면 그는 여전히 그 안에서 단어를 캐내고 의미를 해석하는 일이 어려웠다. 그래도 길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고 헤매는 와중에도 희미하게 나 있는 길을 따라가며 의미에 다가갔다.
난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해. 난 여전히 뭔가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난 미래에 이런 비전을 가지고 있어. 난 아직도 고민 중이야. 은퇴 후에 넌 어떻게 살고 싶니.
젤다가 천천히 다시 말해주었고 응용할 수 있는 단어와 표현도 알려주었다.
친구들과 종종 이런 얘기를 나누어요. 로건도 친구들과 이런 대화를 하나요?
젤다가 눈썹을 위로 올렸다가 내렸다. 그는 며칠 전의 회식 자리를 잠시 떠올렸고 젤다와 대화를 나눈 친구들이 몇 살일까, 생각해보았다. 그는 나이가 많지만 완전히 늙은 것은 아니었다. 뭔가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떤 결정을 내릴 수는 있었다. 그런 기회마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젤다에게 수업을 그만둔다고 말해야한다는 생각은 한 달 동안 일어난 일을 아내에게 어떻게 전해야 하나, 로 이어졌고 쇼핑백 안의 꽃다발로 돌아왔다. 월요일의 회식 이후 그는 꽃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검색창을 여러 번 열었고 그때마다 젤다에게 수업을 그만둔다고 전화할까 고민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그는 많은 것들을 정리하고 그만두어야했다.
젤다가 로건? 하고 불렀다. 그가 멍하게 쳐다보자 테이블 위에 두 손을 모은 채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어요. 젤다는 흘러내린 니트를 팔 위로 걷어 올리며 혼자서 질문과 대답을 소화했다. 그럴 때의 젤다는 단호하고 추진력있는 선생이었다. 베이지색의 니트 소매는 어느새 팔꿈치 위까지 올라가서 주름이 잔뜩 생겼는데 손목의 나뭇잎은 빳빳하게 펴져있었다.
그는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 채 커피를 마셨다. 젤다가 로건,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요? 하고 묻더니 영화의 한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제야 긴 티스푼으로 우유와 곡물이 분리된 곡물 라떼를 저었다. 그는 커피를 마시며 지난주에 젤다의 칭찬을 받았을 때 수업을 끝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했다.
로건, 오늘은 좀 일찍 마무리할까요.
젤다가 니트의 소매를 정리하며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린 뒤 두통이 밀려오기 시작하는 이마를 짚었다.
한 주 쉬고 그 다음 주에 만나요. 프린트도 그때 다시 살펴보고요.
젤다가 패드와 펜슬과 프린트를 가방에 챙기며 일어섰다. 그는 엉거주춤 따라 일어났다.
개인적인 일이 좀 있어서요.
그는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젤다는 수업을 쉬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며 슬쩍 웃었지만 고무줄로 머리를 묶는 동안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다. 체크무늬 재킷을 걸치고 가방을 메는 모습에서는 침울함마저 느껴졌다. 그가 어떤 얘기를 꺼낼 겨를도 없이 젤다는 스터디룸의 문을 열고 나갔다. 그는 잠시 서 있다가 자리에 앉았다. 의자 옆에 세워두었던 쇼핑백을 내려다보았다. 수업을 시작하던 해 준비했던 스승의 날 선물도 젤다에게 주지 못했다. 출장지에서 아내와 딸의 선물을 사면서 같이 고른 건데 젤다가 부담스럽다며 거절했다.
나중에, 수업 때문에 좋은 일이 생기면 그때 받을게요.
그는 여러 가지 향의 핸드크림이 들어있는 선물 세트를 생일을 맞은 팀원에게 주었다. 젊은 직원들이 한동안 그를 센스있는 팀장님이라고 불렀다.
젤다가 말한 나중이 오기까지 이 년이 걸렸다. 토요일 아침마다 그는 젤다와 비즈니스 영어 공부를 했고 회의 때 스티브가 말한 부분을 녹음해서 발음과 억양과 말버릇을 익혔다. 그런데도 회의실과 회식 장소에 가면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처럼 앉아있었다. 언어를 익히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라고 젤다가 위로했지만 어쩌다 들리는 단어 몇 개로 내용을 짐작하며 버티는 게 곤혹스러웠다.
수업을 한지 일 년 반쯤 되었을 때 스티브가 하는 얘기의 어절과 문장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었다. 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와 젤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제 좀 들리기 시작합니다. 선생님. 듣는 것이 나아지자 통역 직원에게 의존하는 일이 줄었고 스티브가 ‘로건’ 을 부르는 일도 늘어났다. 반 년 뒤에 그는 승진자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확인했다. 수업이 끝난 뒤 스터디룸에서 준비한 선물을 건넸을 때 젤다는 승진 축하해요, 하며 박수를 쳤다. 쇼핑백 안에 든 스마트 패드의 박스를 확인하더니 와우, 연봉도 많이 올랐군요, 하며 활짝 웃었다. 부담스러워할까봐 걱정했는데 패드를 꺼낸 젤다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젤다는 그가 선물한 패드를 수업 시간에 영화를 보여줄 때 사용했다. 그때로부터 이 년이 흘렀고 그동안 젤다가 패드 뒷면에 붙이는 스티커도 늘어났다.
휴대폰의 일정 알림이 울렸다. 장모님 생신 모임.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모임 장소까지 가려면 그만 일어나야했다. 예약해놓은 한정식집에 모이면 가족들은 미국 지사 발령에 대해 얘기할 것이다. 아내는 머리가 복잡하고 귀찮다고 하면서도 딸을 위해서는 움직이는 게 낫겠지, 좋은 기회겠지, 하며 웃을 것이다. 그는 의자에 걸어두었던 후드 집업을 걸치고 일어나서 창 너머의 하늘과 길게 이어지는 철도, 그 위로 지나가는 전철을 보았다. 멀리서 바라볼 때 전철의 움직임은 다른 시공간의 일처럼 낯설고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며 그는 늦가을의 풍경이, 풍부한 색채로 잎을 떨구는 늦가을의 나무가 앙상해진 겨울나무보다 더 쓸쓸하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는 리시안셔스 꽃다발이 든 쇼핑백을 집에 들고 갔다. 머리 여기저기에 둥근 롤을 말고 있던 아내가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았다.
엄마 주려고 샀어?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음부터는 화분을 사. 꽃다발은 시들어서 아까워.
그렇게 할게, 라고 말하고 그는 아내에게 어떤 옷을 입을까, 물어보았다.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끈 뒤 장모님은 딸과 사위, 아들과 며느리, 손자 손녀들 사이에 앉아 젓가락질을 열심히 했다. 고기를 집어 막내딸의 밥 위에 얹어주고 생선살을 바른 접시를 손자와 손녀 앞에 놓아주었다. 빈 접시는 옆으로 빼둔 뒤 종업원이 오면 채워달라고 요령있게 부탁했다. 엄마도 좀 드셔, 하면서도 장모님의 손길을 거부하는 사람은 없었다. 밥을 먹으며 그는 장모님이 테이블 위를 부지런히 살피고 양손으로 식사를 진두지휘하는 걸 바라보았다. 칠순이 넘었지만 장모님은 혈압약을 먹고 당을 조심하는 것 외에는 따로 지병이 없고 가끔 무릎이 쑤신다며 침을 맞으러 다녔지만 건강한 편이었다. 장모님이 그의 접시에 전복구이를 놓아주며 미국 가기 전에 송별회도 해야지, 했다. 김서방 자리 잡으면 나도 꼭 불러, 하면서 웃었다. 나이 오십에 미국 발령이라니. 가족들은 그와 아내에게 운이 좋다고, 딸에게도 가서 많이 배우고 오라며 덕담을 건넸다. 아직 시기는 정해지지 않았대요. 아내는 그렇게 말하며 가만히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가족들 사이에 앉아있는 아내,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아내를 거울처럼 바라보았다. 나도 영어 공부를 해야된다고? 못 살아, 머리 다 굳었는데, 하며 투덜거리는 입술 양옆에는 팔자 주름이 자리잡았고 알이 큰 진주 반지를 낀 손등에는 혈관이 불거졌다. 그는 요리 접시 위의 전복구이를 집어 장모님의 접시와 아내의 밥 위에 하나씩 올려놓았다.


다시 토요일 아침이 되었을 때 그는 알람 소리 없이 눈을 떴다. 모처럼 아무 일정도 계획도 없는 토요일이었다. 좀 더 자려고 뒤척이다 일어나 겉옷을 챙겨 입었다.
그는 평소처럼 지하철을 탔고 이어폰을 꽂은 채 음악을 들으며 역들을 지나갔다. 토요일 아침의 지하철 안 풍경은 비슷했고 그는 버릇처럼 늘 하차하던 역에서 내렸다. 몇 주째 이어지는 가을 날씨에 감탄하며 한강공원 쪽으로 걸어갔고 자전거를 대여하는 곳과 돗자리를 대여하는 곳 앞에 한참 서 있었다.
그는 늘 예약하던 카페의 스터디룸이 비어있는 걸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토요일마다 앉던 의자에 앉았다. 4인용 룸과 테이블은 의자만 네 개일 뿐 늘 2인용 같다고 생각했는데 테이블이 넓고 휑했다. 그는 자리에 앉아 맞은편의 빈 테이블과 의자를 보며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처음 수업하던 날 이 테이블에 마주 앉았을 때 젤다는 그에게 영어 이름을 정하자고 했다. 같이 수업할 때 쓸 거예요. 회사에서도 직급이나 본명이 아니라 영어 이름으로 부르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그는 이름을 고르지 못했다. 스티브는 그를 씅허라고 부를 때마다 얼굴 근육을 묘하게 일그러뜨렸다. 젤다가 제시하는 이름들 중에서 뜻이 너무 거창하거나 배우를 연상시키는 것을 제외하자 몇 개 남지 않았다. 그는 작은 골짜기라는 의미의 로건이 마음에 들었다. 그 뒤로 김성호는 토요일 아침마다 로건이 되었고, 평일의 회사에서도 로건으로 불리게 되었다.
커피를 다 마셨지만 젤다는 당연히 오지 않았다. 그는 머그컵을 반납한 뒤 카페 밖으로 나가 한강 쪽으로 걸어갔다. 수업이 없는 토요일은 오랜만이었다. 그는 벤치에 앉아 강물과 그 위로 지나가는 전철과 날아가는 새를 보았다. 계절은 바뀌었는데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가지 않고 오리배처럼 정박해있었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그의 옆을 지나 차례로 멀어졌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나무들이 남은 잎을 하나둘 천천히 떨구었다. 돗자리를 펴고 그늘막을 치고 앉아있는 사람들 사이로 갈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젤다가 지나갔다. 묶지 않은 머리는 덜 마른 상태였고 걸을 때마다 숄더백을 멘 어깨가 왼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젤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골똘한 표정이었고 한강 쪽으로 걸어오다가 방향을 바꾸어 카페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손을 들어 젤다를 부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어폰을 꽂은 젤다가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다음 토요일 아침에 그는 머리가 묵직하고 시야가 침침해서 한참동안 침대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빈 속에 두통약을 먹었고 수업을 그만둔다는 얘기를 꼭 해야한다고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한 주 전에 입었던 후드 짚업이 얇게 느껴질 정도로 밖의 공기가 찼다. 전날 퇴근할 때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서늘함이었다. 아침 거리에는 겨울옷을 입은 사람들이 걸어 다녔다.
수업을 하며 그는 거의 집중하지 못했다. 젤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두통약을 한 알 더 먹었고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얼굴을 씻고 왔다. 영어를 제대로 쓰고 싶다거나 좋은 위치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떠나가는 걸 느꼈다.
수업이 평소보다 조금 일찍 끝나서 특별한 일이 없다면 다음 학생을 만나기 전까지 젤다에게는 사십 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그가 알기로 젤다는 그 시간 동안 이동한 뒤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면서 다음 수업 준비를 했다. 그는 젤다의 여유를 침범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는 물을 마시는 젤다에게 할 말이 있다고 말했다.
얘기해요, 로건.
이제 영어 공부를 그만하려고 해요.
그의 말이 끝나자 젤다가 머리를 묶으려고 올렸던 손을 내렸다. 그녀는 테이블 위로 두 손을 모은 채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판에 박힌 단어나 관용구로 문장을 만들 때 자주 취하던 동작이었다.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었군요.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 로건.
젤다가 뒷말을 잇지 못한 채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손목 위의 나뭇잎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그도 테이블 맞은편에서 팔을 벌려 두 사람은 고개를 엇갈린 채 서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젤다가 단어와 문장을 천천히 발음한 뒤 그의 대답을 차분하게 기다리던 순간과 억양과 악센트를 교정해주고 그가 잘 따라하면 칭찬해주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젤다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그가 한국말로 인사하자 젤다가 맙소사.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하며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미국에 가는 거군요. 그는 그 말에 대해 답하지 못한 채 테이블의 모서리를 쳐다보았다.
좋은 일이니까 축하해야겠지요.
젤다는 같이 공부했던 토요일이 즐거웠다고 했고 그는 끌고 가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했다. 그는 성실한 편이었지만 언어를 익히는데 재능이 없는 학생이었다.
가서 건강히 지내요.
젤다가 일어나서 의자에 걸어두었던 트렌치코트를 입었다. 짙은 낙엽 색깔이었고 가을이면 젤다가 자주 입던 옷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시간을 확인한 젤다가 출국하기 전에 식사 한 번 해요,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이 더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충분히 전한 것 같기도 했다. 가방을 멘 젤다가 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손목 위의 나뭇잎만이 시간이 지나도 낙엽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스터디룸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수업 내용을 정리한 프린트가 놓여있었다. 물컵은 비었고 두 사람의 음료를 담았던 잔에는 다른 색의 얼룩이 남았다. 수업이 끝나면 언제나 젤다가 먼저 나갔고 그는 테이블에 잠시 앉아있었다. 젤다와의 수업이 끝날 때마다 반복된 일이었다. 그는 프린트를 여러 번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창 너머 보이는 철로 위로 전철이 천천히 지나갔다. 토요일에 그가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들면 언제나 그 철로를 볼 수 있었다. 수업을 하는 동안 그 장면들은 늘 다음 토요일로 이어졌지만 이제 그는 토요일에 로건으로 지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앞으로 토요일 오전을 어떻게 보내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쟁반을 들자 4인용 테이블이 텅 비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스터디룸을 한 번 둘러보았다. 수업은 끝났지만 그에게는 몇 개의 장면들이 남아있었다.
카페 밖으로 나온 뒤 그는 잠시 문 앞에 서 있었다.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그의 옆을 지나 자전거 도로로 나아갔다. 그는 헬멧과 선글라스를 쓴 사람들의 옆 모습과 군더더기 없고 날렵한 뒷모습을 보았다. 무언가 그의 옆으로 계속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고 자신이 무엇을 선택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자 비로소 마음이 아팠다.


1) 소설에 등장하는 영화는 전부 영화 <인턴>의 내용과 대사를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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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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