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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시

  • 작성일 2022-12-01
  • 조회수 1,370

[단편소설]



죽음의 시



이상실





시를 가슴에 품은 날부터 종기는 ‘마우스 오’가 있는 물류센터의 셔틀버스를 타지 않았다.
여름이었다.
문자가 떴다.
‘출근확정, 신분증 지참, 운동화 착용’
물류센터에서 온 출근안내 문자였다. 종기는 물류센터로 갔다. 출근 접수를 끝내고 라커룸에서 대기하던 종기는 붉은 조끼를 입은 사원을 따라 작업장으로 갔다. 작업장 입구에 검색대가 있었고 건장한 청년이 ‘보안’이라는 완장을 두른 채 검색대 옆에 서 있었다. 종기가 검색대를 통과하려고 하자 삑삑대는 소리와 함께 붉은 빛이 번쩍였다.
“사원님, 휴대폰은 소지하시면 안 됩니다.”
한 발 물러선 종기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보안에게 넘기고 검색대 앞으로 한 발짝 다가갔다. 또 소리가 났고 불빛이 일었다.
“음료수나 색깔 있는 물도 안 됩니다.”
보안의 말이었다.
주머니에서 음료수를 꺼내고 검색대를 통과한 종기는 일행의 꽁무니를 따라갔다. 노란 조끼를 착용한 사원들이 종기를 비롯한 신규 사원들을 중앙으로 안내했다. 중앙에는 붉은 조끼를 걸친 사원들이 모니터를 보며 데스크에 앉아 있거나 광장에 서 있었다. 광장에 있던 사원이 신규 사원들에게 자신을 중심으로 사열종대로 모이라고 지시한 후 인원점검을 했다. 인원점검이 끝나자 피디에이(PDA, 휴대용 개인정보 처리기)를 배포했다. 종기도 피디에이를 손에 쥐었다. 데스크에서 여사원 하나가 신규 사원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사원들이 다가가자 데스크에 부착된 바코드리더기에 원 바코드(사원 바코드)와 피디에이 바코드를 한 사람씩 찍으라고 지시했다. 종기는 목걸이에 달린 원 바코드와 피디에이를 리더기에 댔다.
종기는 일처리가 능숙한 기존 사원과 함께 작업현장을 오가며 교육을 받았다. 삼십 분 정도였다. 사원은 작업 중에 문제가 발생하면 노란 조끼를 걸친 사원이나 중앙데스크에 도움을 요청하라는 말을 끝으로 교육을 끝냈다. 종기는 현장에 투입됐다. 피디에이 메뉴판을 열고 ‘자동배차할당’을 터치했다. 피디에이가 작업지시를 했다.
‘저희 물류센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토트 한 개와 카트를 준비하세요.’
토트를 카트에 올렸다. 토트에 붙은 바코드에 대고 피디에이를 찍었다.
‘C-38번, 3kg밀가루 1개’
종기는 C-38구역으로 이동했고 밀가루를 꺼내 토트에 담았다.
‘D-67번, 24입 밀크 1개’
D-67에서 밀크를 토트에 담았다. 피디에이 지시에 따라 물건을 카트에 담고 나르기를 반복했다. 작업을 시작한 지 오십 분쯤 됐을까. 출고지시가 사라졌다. 휴식을 알리는 화면이 나왔다.
‘건강을 위해 10분간 휴식을 취하세요.’
종기는 하던 일을 멈추고 기둥 옆에 있는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셨다. 화장실도 다녀왔다. 물건이 빈 팔레트에 걸터앉았다. 시계를 보았다. 휴식시간이 남아 있었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소리가 났다. 카트 구르는 소리, 발자국 소리, 레일을 타는 토트 소리, 배차할당마감을 알리는 안내방송, 걸 그룹의 가요…….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눈을 떴다. 노란 조끼를 걸친 사원이었다. 종기에게 이름을 물었고 이러고 있는 이유까지 물었다. 피디에이의 지시에 따라 휴식 중이라고 대답하자 피디에이를 다시 설정하라고 했다. 재설정했다. 긴급할당이 떴다. 종기는 피디에이가 가리키는 구역으로 카트를 밀었다. 이후 휴식을 알리는 문자가 떴지만 무시했다. 달리다가 걷다가 토트에 물건이 넘치면 피디에이가 시키는 대로 레일에 얹거나 지정한 곳에 토트를 배치했다. 다시 빈 토트를 챙겨 물건을 담고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작업을 시작한 지 세 시간쯤 지났을까. 안내방송이 나왔다. 지금 부른 사원은 즉시 중앙으로 오라고 했다. 종기도 불렀다. 종기는 중앙데스크로 갔다. 관리 사원이 말했다.
“누구신가요?”
“박종기입니다.”
이름을 확인한 관리 사원은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오므렸다.
“사원님, 유피에이치(UPH, 시간당 피킹)가 꼴찌네요. 일곱 시 오십 분에서 여덟 시 사이에 뭘 하셨습니까? 잠잤나요?”
“아, 그때, 피디에이가 십 분간 쉬라고 해서 물마시고 화장실도 가고 잠시 쉬다가 일했습니다.”
“사원님, 작업 들어가기 전에 교육 받지 않았나요? 자동할당 마감시간이 육 분 남았을 땐데, 쉬고 어딜 다녀와요? 사원님, 앞으로 그러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아시겠습니까?’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종기는 대답 후 돌아서서 출고작업을 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작업장에 들어선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지금 부른 사원은 작업을 중단하고 당장 중앙으로 오라.’는 안내방송이 작업장에 퍼졌다. 총 여섯이었다. 종기도 그중 하나였다. 중앙으로 간 종기는 데스크 앞에 섰다. 직원은 종기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오므리며 종기에게 주의를 줬던 관리 사원이었다. 가까이 가자 그 사원은 앞에 있는 모니터를 종기 쪽으로 돌렸다.
“보세요, 사원님.”
컨베이어에 올린 토트 사진이었다. 사진 속 토트에는 효자손이 삐져나와 있었다.
“보이죠? 이렇게 삐져나와서 컨베이어 센스에 걸리기라도 하면 센스가 고장 나서 작업이 마비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손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교육 안 받았나요? 주의하세요, 사원님.”
교육을 받고 뒤돌아서자 식사 전에 불려왔던 낯익은 사원 몇이 눈에 띄었다. 종기는 퇴근시간까지 상품을 토트에 채우고 카트를 밀고 지정 장소에 배치하기를 반복했다.
다음날도 종기는 같은 층에 배정 받았다. 관리 사원들은 오십 명이 넘는 일용직 사원들을 중앙에 모아 놓고 조회를 했다.
첫째, 현장에서 뛰지 마세요. 부딪치면 사고 납니다.
둘째, 상품 바코드가 찍히지 않거나 파손됐거나 재고가 모자랄 때는 먼저 노란 조끼 입은 사원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중앙으로 오세요.
셋째, 오집(집품 잘못)이나 과집(넘치는 집품)이 없도록 주의하시고 신속히 집품해 주세요.
넷째, 교육한 대로 따르지 않은 사원님은 중앙에 불려 와서 경고를 받을 수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조회가 끝나자 종기는 토트를 카트에 올리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피디에이가 지시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음악이 멈췄다. 방송이 나왔다.
‘지금 부른 사원님은 하던 작업을 멈추고 즉시 중앙으로 오세요.’
종기를 또 불렀다. 중앙으로 갔다. 아홉 명이 모여 있었다. 중앙데스크에 불려 간 사원들은 한 소리씩 듣고 작업장으로 복귀했다. 종기 차례였다.
“사원님은 밑에서 네 번째로 시간당 피킹이 저조합니다. 좀 빠르게 집품해 주세요.”
종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관리 사원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종기는 관리 사원을 노려보았다. 관리 사원은 입술을 오므렸다 펴며 맨 뒤로 가서 다시 차례를 기다리라고 했다. 뒤로 갔다. 차례가 돌아왔을 때 종기는 뒤를 힐끗 보았다. 남자 사원이 서 있었다. 종기는 다시 데스크로 갔다. 입을 열었다.
“저는 발이 아프도록 걷고 땀을 흘리면서 집품했습니다. 제 얼굴 좀 보세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잖아요. 그만큼 열심히 일했는데 저조하다니요?”
관리 사원은 입술을 오므렸다 폈다.
“열심히 일했다는 사람이 잘한 사람 절반에도 못 미칩니까?”
종기가 얼굴을 붉혔다.
“좀 전에 제가 중앙데스크에 와서 요청한 내용 잘 알고 계시죠? 문제가 발생했는데 주변에 노란 조끼 사원이 보이지 않아서 중앙에 왔습니다. 왜 중앙에 왔는지 잘 아시잖아요? 2kg짜리 설탕 두 포를 집품해야 되는데 둘 중 하나가 터져 있어서 토트에 담아야 할지 말지 고민돼서 왔던 거. 그 설탕 꺼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시나요? 아무리 찾아도 재고는 없고, 주변에 있는 박스를 모두 들어내서 바닥에 깔린 걸 빼내고, 들춰낸 박스를 다시 쌓고 하면서 시간이 걸렸어요. 그랬으니 당연히 시간당 피킹이 저조할 수밖에 없죠. 제가 그러고 있을 때, 어떤 사원은 눈앞에 있는 마스크 백오십 곽을 순식간에 토트에 담고 이동하는 것을 봤어요. 마스크를 집품한 사원은 동작이 빨랐기 때문인가요? 그 사원은 그런 행운 덕분에 시간당 집품량이 평균 이상으로 많아졌겠죠. 그 사원은 이 자리에 불려 나오지 않았을 거구요. 역으로 제가 마스크를 집품하고 마스크를 집품한 사원이 제자리에서 설탕을 집품했다면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까요? 원인을 분석하지 않고 무조건 혼내기로 일관하는 건 옳지 않다고 봅니다. 퇴근 전까지 총량으로 평가한 결과라면 저도 수긍하겠지만…….”
관리 사원이 말을 가로막으며 종기 뒤에 서 있는 사원을 불렀다.
“가까이 오세요. 앞에 있는 사원님과 나란히 서세요. 사원님도 저조합니다. 속도를 높여 주세요.”
종기 옆에 선 사원도 불만을 쏟아냈다. 관리 사원은 몸을 뒤로 틀더니 서랍에서 용지를 꺼냈다.
“사실 확인섭니다. 각자 작성해 주세요. 확인서는 지시사항에 순순히 응하지 않고 토를 달거나 작업량이 현저히 떨어진 사원님들이 작성하게 됩니다. 작성을 거부하시면 사원님들께 불이익이 따를 수 있습니다.”
‘사실 확인서’를 받아든 종기는 인적사항에 이름을 쓰고, 사원이 불러 준 대로 ‘내용’란을 채운 뒤 작업장으로 이동했다.
종기가 저녁식사를 마치고 휴게실로 가던 길이었다. 등 뒤에서 누군가가 종기를 불렀다. 뒤를 돌아보았다. 중앙데스크에서 사실 확인서를 함께 쓴 구윤재 사원이었다. 구윤재 사원은 종기를 그때 처음 보았고 이름까지 외웠다고 했다. 종기도 구윤재를 그때 알았다. 종기는 그와 함께 휴게실로 갔다. 구윤재는 캔 음료 두 개를 자판기에서 뺐고 그중 하나를 종기에게 건넸다. 음료수로 목을 축이고 대화를 나누다 끊기자 구윤재가 휴대폰에서 시 한 편을 불쑥 끄집어냈다. 이곳 물류센터에서 일하다가 그만둔 어느 일용직 사원의 시라고 했다. ‘짐승이 된 노동자여!, 기계에 예속된 일용직이여!’로 시작하는 시는 ‘피안의 길목, 고통, 죽음’ 등 어두운 시구와 시어가 행마다 묻어 있었다. 구윤재는 이 시가 우리를 대변한다고 말한 후 이곳에 대한 썰을 풀었다.
“붉은 조끼 걸치고 중앙데스크에서 일용직 사원을 혼낼 때마다 입을 오므리는 관리 사원 알죠? 사실 확인서 쓰라고 했던 사원. 그 사원 별명이 ‘마우스 오’예요. 입술을 둥그렇게 오므리고 모으는 버릇이 있어서 붙인 별명인데 악명 높기로 유명하죠. 다른 층에서도 다그치지만 마우스 오는 신입이든 기존이든 구분 없이 실수하면 적개심을 품고 윽박질러요. 그러니까 작업 장소 배정받을 때 마우스 오가 있는 층에 배정 받으면 사원들이 “으!” 하면서 탄성을 지르죠. 재수 꽝이라고. 종기 사원님이 사실 확인서를 쓰기 전에 마스크와 터진 설탕으로 작업량을 비교하면서 문제제기를 하던데 적절한 논리예요. 어떤 사원한테 마스크가 항상 걸려든 것도 아니고 터진 설탕이 항상 걸리진 않지만 어쨌든 선택된 사원에게는 말이 없고 다른 사원이 혜택을 누리도록 희생한 사원은 벌을 받는 불공평. 집품이 상승한 자는 더 상승하고 하강한 자는 상대적으로 걷잡을 수 없이 곤두박질을 치죠. 그런데도 누구 하나 그런 현상을 말하지 않아요. 모두 입을 다물고 있지. 지금 주위를 보세요. 눈을 감거나 고개를 숙이고 있잖아요. 일에 지쳐버렸거나, 부당한 것을 지적해서 얻을 게 없다는 심리가 작용한 탓이겠죠. 작업장에 발을 딛는 순간 일용직은 신체포기각서에 서명한 거나 다름없어요. 사물함 자물쇠가 인간의 존엄까지 넣고 잠가버린 거죠. 자물쇠가 열릴 때까지 기계를 작동하고 작동하는 기계의 노예가 되는, 기계의 노예들, 인간의 노예들, 또한 중앙에 철저하게 감시당하는 죄수나 다름없죠. 일용직 사원들은 보일 뿐이고, 보이지 않은 중앙은 일용직 사원들을 볼 수 있는, 그야말로 원형 감옥 ‘파놉티콘’이랄까…….”
구윤재가 말을 멈추고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식사 종료 십 분 전이었다. 종기와 구윤재는 벽시계를 보며 일어섰다. 그들은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이틀이 지난 후 종기는 식당에서 구윤재를 만났다. 함께 식사를 했다. 휴게실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탄산음료를 꺼내 마시며 잠깐 동안 대화를 했다. 연락처도 주고받았다. 다음날도 그를 만났다.


“쪄죽겠다. 종기야! 오늘 같은 날 물류센터는 가지 마라.”
“그럼, 우리 횟집에서 배달하면 안 돼요?”
종기 엄마가 명령했고 종기가 물었다. 종기 엄마는 몇 푼 아끼자고 배달하다 사고라도 나면 어떡하느냐며 배달은 배달 업체에 맡기겠다고 했다. 한여름이라 배달 주문도 뚝 끊겨 식구대로 마주 보며 하품만 해댈 수 없는 노릇이고 속만 상할 거라며 종기 엄마는 종기가 가게에 나오는 걸 한사코 반대했다. 가게를 정리하는 것도 끌고 가는 것도 걱정이라고 했다. 폐업비 걱정에 월세 걱정까지. 걱정거리만 가득한 집안사정 때문에 대학생인 종기는 등록금 걱정이라도 덜고자 짬짬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전단지를 돌렸고 커피전문점에서 서빙도 했다. 편의점 알바도 했지만 그런 자리도 녹록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물류센터에 출근했다. 오후 여섯 시부터 다음날 새벽 네 시까지 근무하는 ‘오후 조출조’였다. 종기 엄마가 ‘쪄죽겠다’며 물류센터는 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종기는 오늘도 나가서 몇 푼 더 모을 작정이었다.
물류센터에 출근했다. 작업장에 들어서자 후덥지근했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낮에 근무했던 사원들이 퇴근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기가 무섭게 땀 냄새를 풍기며 탈출하듯 작업장을 빠져나갔다. 종기는 집품 작업을 시작했다. 카트에 토트를 올리고 걷다가 달리며 상품을 토트에 담았다. 땀이 온몸에서 솟구쳤다. 이마에서 흐른 땀이 목덜미와 가슴팍에서 삐져나온 땀과 만나 배꼽 아래까지 또르르 굴러 내리거나 등줄기를 타고 흘러 아랫도리를 적셨다. 종기는 기둥에 걸린 선풍기 바람을 쐤다. 턱에 걸린 땀방울이 선풍기 바람에 흩날렸다. 목이 말랐다. 정수기가 있는 곳은 아득한 저편 기둥이었다. 종기는 정수기 쪽으로 몇 걸음 옮기다 멈추고, 피디에이가 시키는 대로 중앙데스크 쪽으로 카트를 굴리다 정수기와 맞닥뜨렸다. 중앙데스크 쪽으로 곁눈질을 하며 물을 마셨다. 마우스 오가 노려보는 것 같았다. 종기는 상품진열대로 재빨리 몸을 숨기며 피킹을 이어 갔다. 박스를 개봉할 때마다 열기가 쏟아져 나왔다. 물건에 바코드를 찍고 있을 때 구윤재가 카트를 밀고 왔다. 턱에 걸린 땀을 훔치며 다가오더니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사탕 하나를 꺼내 종기에게 건넸다. 당 떨어지면 어지럽다며 미리 먹어 두라고 했다. 종기는 사탕을 입에 넣었다. 구윤재는 뛰어다니며 상품을 토트에 채웠다. 종기보다 동작이 빨랐다. 중앙에서는 더 이상 구윤재를 부를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종기 입에서 사탕이 녹아 사라질 무렵 중앙에서 종기를 불렀다. 구윤재도 불렀다. 둘뿐이었다. 중앙데스크로 갔다. 마우스 오가 입을 오므리다 벌리기를 반복했다.
“박종기 사원님! 사원님 토트에 있어야 할 화장품 샘플 세 개가 왜 구윤재 사원님 토트에 있는 거죠?”
마우스 오가 구윤재에게 고개를 돌렸다.
“구윤재 사원님, 누구 잘못인가요?”
구윤재는 눈을 멀뚱거렸다. 종기가 말했다.
“제 잘못입니다. 아까 B구역 쪽에서 피킹하다가 카트가 가까이 있어서 구윤재 사원님 카트를 내 카트로 착각했습니다.”
마우스 오가 말했다.
“구윤재 사원님도 잘못이 있어요. 피킹 안 한 물건이 토트에 들어 있으면 재고를 파악했어야죠?”
구윤재는 주의하겠다고 말했다. 고개를 돌린 마우스 오가 종기를 한동안 쏘아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불이익이 따를 수 있다고 말한 후 양쪽에 대고 턱짓을 했다. 카트를 끌고 다시 작업에 돌입했다.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렀다. ‘하늘은 벌써 까맣고…… 어떻게 벌써 열두 시네…….’ 작업장으로 향했다. 중앙에서는 십 분이 멀다 하고 집품을 재촉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사원님들, 지금 받은 할당량은 해당시간 마감 건입니다. 좀 더 속도를 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집품을 가장 많이 한 사원에게는 포상금을 지급합니다…….’
새벽 한 시가 지난 시각이었다. 작업장에 흐르던 음악이 멈추더니 ‘구윤재 사원은 중앙으로 오라.’는 방송이 나왔다. 다시 음악이 흘렀다. ‘내 마음은 덤더럼 덤덤…….’ 음악 한 곡이 끝나자 구윤재를 또 불렀다. 중앙으로 즉시 오라고 했다. 다시 음악이 나왔다. ‘심장이 훅 내려앉게 달콤해…….’ 또 한 곡이 끝나자 “구윤재 사원님, 구윤재 사원님은 당장 중앙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윤재 사원님……다시 한 번……지금 당장 오시기 바랍니다.” 격앙된 목소리였다. 중앙은 사원들을 향해 피킹을 재촉한 후 음악을 내보냈다. ‘넌 광야를 떠돌고 있어, 아야야야야야이…….’ 구윤재가 중앙으로 간 걸까. 그를 부르는 소리는 더 이상 없었다. 새벽 세 시였다. 종기는 또 중앙에 불려갔다. 하위 열 명에 속했기 때문이다. 동공을 넓히고 입술을 둥그렇게 모은 마우스 오가 종기에 대한 시간당 동선을 따졌다.
“사원님, 두 시 전후 십오 분간 피킹한 흔적이 없어요. 어디서 뭘 하셨습니까?”
“아, 그때 배치 장소에 토트 내리고 화장실 다녀왔습니다. 2층 화장실이 막혔는지 금줄이 쳐 있고 출입금지 팻말이 뻘겋게 나붙어서 아래층 화장실에 갔다 오느라고…….”
마우스 오는 좀 더 속도를 높여야 한다고 말하며 하던 작업을 이어 가라고 했다. 새벽 네 시가 되자 중앙에서 퇴근을 알리는 방송을 했다. 사원들은 원 바코드를 찍기 위해 중앙데스크를 바라보며 차례를 기다렸다. 종기는 구윤재를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보이지 않았다. 바코드를 찍고 검색대를 빠져나간 종기는 사물함을 열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구윤재에게 전화를 했다. 받지 않았다. 문자도 보냈다. 반응이 없었다. 건물 밖으로 나갔다.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걸었다. 걷다가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좌우를 보았다. 앞서 걷는 사원들을 보았다. 구윤재가 매번 탔던 셔틀버스에 올랐다. 두리번거리다 내렸다. 출입문에서 기다렸다. 구윤재는 보이지 않았다. 종기는 집으로 가는 셔틀버스를 탔다. 모습을 감춘 구윤재가 어제 휴게실에서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과 인과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제 했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그때 시 한 편을 화면에 띄우고 그랬다.
‘이 시는 지금 여기와 너무 닮은 현장을 노래하죠. 내가 너무 진지한가요? 그럼 이만 접고 다른 얘기하죠. 좀 전에 여기가 직장이냐고 물었죠? 구직 중이에요. 올해 대학 졸업해서 입사 면접 몇 군데 봤는데 미끄러지고 몇 군데는 결과를 기다리고 있어요. 기다리는 동안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될 것 같아서 여길 왔죠. 넉 달짼데. 일주일에 두 번 오다가 세 번도 오다가 이젠 네다섯 번 와요. 집에 손 내밀기도 그렇고 해서. 아, 그만 일어서야겠네요. 식사시간 끝나 가요. 오 분 전까지는 중앙데스크 앞에 있어야 하는데. 늦겠어요. 뜁시다!’
구윤재를 만나면 물을 말이 많을 것 같았다.
‘면접 봤다는 직장에서 연락 왔나요? 이쪽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얽히는 게 싫고. 그래서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씹고…….’


물류센터 휴게실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문자가 와 있었다. 발신자는 구윤재였다.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문자를 보냈다.
‘오늘 출근하셨는지요?’
보낸 후 답장을 기다리다 엄마에게 온 카톡을 열었다.
‘아들아, 열대야다. 작업장은 5도가 더 높고, 일을 하면 또 5도나 더 오른다며? 숨 막히겠다. 그냥 조퇴하고 와.’
카톡을 닫고 휴게실을 두리번거렸다. 구윤재는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어디에도 없었다. 셔틀버스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 속에도, 원 바코드를 받아들고 현관 출입구를 통과할 때도, 3층까지 오른 엘리베이터에서도, 작업장의 검색대를 통과할 때도, 중앙에서 바코드를 찍을 때도, 조회할 때도, 작업장에서도, 위·아래층으로 작업지원 갔을 때도, 식당에서도, 복도에서도. 이곳에 구윤재가 존재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종기는 눈을 감았다. 속삭이는 소리가 미미하게 들렸다. 일용직 여사원들의 대화였다.
“열 시간 동안 쉬는 시간은 저녁 먹는 한 시간뿐……” “마우스 오는 중앙에서 시간마다 콜이야…… 사원마다 매일 한두 번씩 부르는 건 기본이고.” “맞아.” “……싫으면 뛰어다녀야 하는데…… 그러다가…… 피킹하다가 화장실에서…… 그 시간대 재촉이 심했잖아.”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 “나도 오늘 그런 증상이 좀…… 남의 일이 아니네.” “조회 때는 누가 이랬다저랬다 그런 말도 없고…….”
대화가 멈췄다. 종기는 눈을 떴다.
‘피킹하다가 화장실에서?’
대화 중이던 사원들이 뛰어 나갔다. 종기도 뛰었다.


카톡이 와 있었다.
‘오늘은 물류센터 가지 마라. 날씨가 장난 아니다.’
종기 엄마가 보낸 카톡이었다.
‘아뇨. 방학인데 바짝 벌어야죠.’
종기가 카톡을 보내자 댓글이 바로 달렸다.
‘새벽 여섯 시에 퇴근해서 씻고 어쩌고 일곱 시에 잠든 걸 봤다. 물류센터에 나간 날부터 자면서 끙끙 앓고, 악몽을 꾸는지 소리도 지르고. 오늘 같은 날은 큰일 나겠다. 나가지 마라.’
쉬엄쉬엄 요령껏 하겠다고 엄마를 설득한 종기는 출근시간이 다가오자 물류센터로 가는 셔틀버스에 올랐다. 목적지까지 이십 분가량 남았을 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이름이 떴다. 구윤재였다. 전화를 받았다. 여자였다. 구윤재 엄마라고 했다. 박종기 사원이냐고 물었다. 회사 동료인지, 윤재를 잘 아는지 물었다. 지난번 문자를 받았는데 이제야 연락드려서 미안하다는 말도 했다. 한동안 한숨 쉬는 소리만 이어졌다. 구윤재 대신 전화하면서 한숨이라니. 구윤재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윤재 엄마는 “윤재가, 우리 윤재가, 그제 새벽 두 시쯤에 내 아들 윤재가, 그쪽 물류센터 2층 화장실 바닥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져서…….” 더듬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던 구윤재 엄마는 윤재가 죽었다고 했다. 빈소도 없이 병원 냉동고에서 차가운 시신으로 누워 있다고 말했다. 회사가 산업재해로 인정하지도 않고 여러 가지로 불리한 상황이라며, 그날 윤재에 대한 동선을 아는 만큼만 증언해 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물류센터에 도착한 종기는 2층 작업장 검색대를 통과했고 작업장에 들어섰다. 중앙에는 여전히 마우스 오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관리 사원들은 일용직 사원들의 머릿수를 셌다. 조회를 했고 작업지시를 했다. 종기는 토트를 카트에 올리고 피디에이가 지시하는 구역으로 카트를 밀었다. 새벽 한 시가 지난 시각이었다. 여느 때처럼 작업장에 내보내던 음악을 중단하고 사원들을 불렀다. 집품이 저조한 하위 열 명이었다. 호명한 사원은 하던 작업을 멈추고 즉시 중앙에 모이라고 했다. 종기도 카트를 세워 두고 중앙으로 갔다. 마우스 오가 집품량을 끌어올리라고 재촉했다. 사원들은 저마다 “예!”라고 했다. 외마디 소리는 종기 차례에서 멈추고 말았다. 마우스 오가 입술을 오므리다 입을 벌렸다.
“사원님은 시간당 집품량이 평균보다 한참 떨어집니다. 좀 더 속도를 높여 주세요.”
종기가 거친 숨을 내쉬며 대거리를 했다.
“어느 구역으로 가서 어떤 품목을 얼마나 피킹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까? 찾는 품목이 눈앞에 있었는지 구석에 깔렸는지 파악이 가능한가요? A구역을 피킹한 후 B구역으로 이동할 때 걸리는 시간을 측정할 수도 있는지요? 그것을 무시하고 ‘주어진 시간에 1·2점짜리처럼 쉬운 문제 다섯 개 푼 사람은 합격시키고 난이도 높은 3점짜리까지 섞인 문제 네 개 푼 사람은 불합격시킨 격이나 다름없는 그 엉터리 계산법의 문제점과 불공정한 룰을 개선할 생각은 없습니까?”
마우스 오는 입술을 모았다 폈다.
“사원님하고 실랑이 벌일 생각 없으니까 작업 들어가세요.”
“이틀 전에 여기 화장실에서 사원 한 명이 죽었죠? 지금 중앙데스크에 앉아서 일용직 사원들을 혼내고 닦달하는 관리 사원들은 그 죽음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세요?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 놓고 모니터 앞에 앉아서, 우리들에게, 선풍기 바람도 제대로 못 쐬고 땀에 쩐 일용직 사원들에게, 격려는커녕 하루에도 두세 번씩 불러대고 혼내면서 무한경쟁으로 내몰았죠? 일용직은 죽든 살든 하루 빡세게 부려먹다가 죽으면 나 몰라라 해도 되는 하찮은 존재인가요?”
마우스 오가 소리쳤다.
“작업하세요! 경고하겠는데 계속 그런 식이면 강퇴시키고 취업제한조치 내릴 겁니다.”
종기는 중앙데스크를 벗어났다.


점심시간이 지난 시각이었다. 종기는 물류센터 앞 시내버스 정류장에 내렸다. 맞은편 공터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공터로 갔다. 문화예술단체의 깃발이 펄럭였고 대여섯 명은 “구윤재의 죽음은 산업재해다!”라는 현수막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른바 ‘구윤재 산재 인정 촉구를 위한 노동제’였다. 취재진이 몰려왔고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구윤재 엄마는 인터뷰를 했다. 구윤재 엄마가 인터뷰를 끝내고 종기와 눈이 마주치자 종기에게 다가왔고 종기를 껴안았다. 구윤재 엄마와의 만남은 두 번째였다. 구윤재가 목숨을 잃은 지 나흘째 되는 날 종기는 구윤재 엄마를 만났다. 죽기 전에 구윤재와 나눴던 대화, 작업장에서 겪은 일, 구윤재가 숨을 거두었을 시간의 작업장 상황을 증언했다. 며칠 후 구윤재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아들을 기리고 아들 죽음에 대한 산재 인정을 촉구하는 노동제에 참여해 달라고 했다. 그날이 오늘이었다.
사회자가 모두 발언을 한 뒤 취재진을 향해 소리쳤다. “물류센터 창밖으로 소리가 흘러나옵니다. 들리나요? 들어 보세요. …… ‘마감 건입니다. 좀 더 속도를 높여 주시고 지금 부른 사원은 중앙으로 오세요.’ 들으셨죠?” 사회자는 구윤재 엄마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구윤재 엄마는 구윤재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한 후 풀썩 주저앉았다. 고개를 늘어뜨리며 오열했다. 종기가 사회자에게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구윤재 사원은 이곳 물류센터에서 일했던 어느 일용직 노동자의 시를 내게 보였습니다. ……구윤재 사원이 숨을 거둔 날은 오늘처럼 더웠습니다. 숨이 막힐 것 같았습니다. 중앙에서는 걸 그룹의 음악을 내보내며 십 분이 멀다 하고 집품량을 늘리라고 재촉했습니다. 시간당 작업량이 저조하면 중앙에서 꾸짖었습니다. 그날 그 시각 중앙은 구윤재 사원을 끊임없이 부르며 데스크로 오라는 방송을 했습니다. 어느 순간 중앙은 더 이상 그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다시 사원들을 향해 ‘빠른 피킹!’만 외쳐대며 집품을 재촉했습니다. 구윤재 사원이 숨을 거두기 전날도 훗날도 중앙은 집품 속도만 높이라는…….”
행위예술가는 퍼포먼스로, 국악인은 창으로 짓밟힌 노동자를 그렸다. 가수는 노동가요를 부르며, 시인은 시를 낭독하며 구윤재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랐다. 낭독이 끝나자 종기가 단상에 섰다. 휴대폰에서 시를 검색하고 낭독했다.
‘짐승이 된 노동자여!, 기계에 예속된 일용직이여!……’
구윤재가 휴게실에서 종기에게 보여준 어느 일용직 노동자의 시였다. 종기는 이어서 어느 시인의 시를 낭독했다.
‘죽음아 죽음들아
홀로 죽어간 죽음들아

죽음을 살려내야 한다.

그래야 삶이 제대로 죽을 수 있다.’

구윤재를 위한 노동제가 끝나 갈 무렵 오후조출조의 사원들을 태운 셔틀버스가 정문 앞에 속속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린 사원들은 집회 현장을 힐끗거리거나 물끄러미 바라보다 잰걸음으로 물류센터로 들어갔다. 마지막 셔틀버스에 탄 사원들이 내릴 무렵 노동제가 끝났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구윤재 사원의 죽음은 일용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사원의 과로사입니다. 산업재햅니다. 여러분, 구호를 외쳐 주세요!’
참석자들은 깃발을 높이 들었고 현수막을 움켜쥐었다. 종기는 물류센터를 응시하며 구호를 외쳤다.
‘일용직도 사원이다, 휴식시간 보장하라!
노동력 착취는 살인행위다, 근로환경 개선하고 산업재해 인정하라!’
물류센터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난 영원히 널 이 기억에서 만나 포에버 영, 우우~ 포에버 위 영……’
종기는 물류센터 2층을 바라보다 죽음의 시를 가슴에 품고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상실
작가소개 / 이상실

1964년 전남 완도군 생일도 출생. 2005년 《문학과 의식》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월운리 사람들』, 『콜트스트링의 겨울』, 장편소설 『미행의 그늘』이 있음. leessil21@hanmail.net

《문장웹진 202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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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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