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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칭 인간

  • 작성일 2021-11-01
  • 조회수 2,986

[단편소설]



비대칭 인간



이은정




선글라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습관이라고 하기엔 인식한 기간이 길지 않고 만성이라고 하기에도 교정될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무의식에 광대뼈 부근을 추켜올리는 움직임은 몸에 배고 있었다. 올리고자 하는 부위가 콧등인지 볼인지 명확하게 모르겠다. 그 어디쯤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려야 선글라스가 콧대에 맞춤하게 내려앉았고 그것은 포화 상태인 나의 예민함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어 결국 선글라스에 집착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습관이라는 것은 어떤 상태를 유지하려는 탄력에 관한 강박 같은 것. 선글라스를 써서 그런 것인지 선글라스를 쓰기 위해 그런 것인지 이제는 그 원인을 찾는 일에까지 집요해졌다. 어쨌든 선글라스와 관련이 있을 것만 같았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지 않을 때는 반복되는 동작을 의식할 만한 실재적 대상이 없으므로 내가 얼굴을 씰룩대는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평소보다 꾀죄죄한 몰골의 수오는 크지도 않은 눈동자를 굴리며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런 수오가 부담스러워 나는 상체를 최대한 뒤로 빼며 두 손으로 양쪽 볼을 감쌌다. 수오는 빨대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 빨아들이면서도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도대체 왜 저러는 것일까. 수오의 시선이 내 얼굴 어디쯤 꽂혀 있는지 알 수 없어 불안하고 불편했다. 그만 쳐다봐. 그제야 무안한 듯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수오는 창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시선은 카페 창에서 굴절되어 내게 닿았다. 수오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 어제오늘 일도 아닌데 오늘따라 치부를 들킨 것만 같았다. 선글라스를 계속 쓰고 있을 걸 그랬다.
북카페를 나오니 밤을 잃은 별들처럼 햇발이 쏟아지고 있었다. 정오 무렵의 그것은 날렵하게 정수리를 찧었다. 나는 당연한 순서인 듯 선글라스를 썼고 쓰자마자 왼쪽 얼굴을 몇 번 찡긋했다. 선글라스가 새로 생긴 습관을 자꾸 의식하게 했지만, 그럼에도 선글라스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야 그것 때문이라는 핑계라도 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선글라스를 벗으면 내가 얼굴을 찡긋한다는 걸 의식하기 힘들었고 의식의 부재는 방종까지 이르기에 십상인지라, 어쩌면 사람들이 틱 장애로 오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선글라스 때문에 더욱 예민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선글라스를 써야 그나마 안정이 되는 이 사소한 아이러니.
햇볕에서 시야가 안정되고 나니 사거리 건너편에 H 백화점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달, 미용실을 나오다가 백화점 입구가 인산인해인 것을 보고 정기 세일 기간임을 알게 되었다. 엄마 몰래 아빠에게 받아온 신용카드가 있었다. 몇 건의 면접을 앞두고 있던 딸에게 아빠가 베푸신 큰 은혜를 손에 쥔 채 백화점으로 향했었다. 정장과 구두를 둘러보다가 결국 선글라스를 사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빠의 은혜와 나의 사치를 엄마에게 들키지 않을 만한 품목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백화점 일층 구찌 매장에서 이 선글라스를 구매했다. 난생처음 산 명품이었다. 저길 가야겠어. 수오가 백화점을 쳐다보며 물었다. 왜? 선글라스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수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찌 매장 직원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당연했다. 이 선글라스를 선택하고 아빠 카드를 건네기까지 족히 한 시간은 망설이며 그를 귀찮게 했었기 때문이다. 선글라스를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부터 명품 선글라스를 샀을 때 그 소비가 나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 이 선글라스가 과연 훌륭한 선택일지에 대해 매장 직원과 오랜 대화를 했었다. 매사에 신중한 성격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는 그저 선택 장애가 심한 경우였다.
직원에게 손에 든 선글라스를 건네며 불편함을 호소했다. 불편함이라기보다는 불량이 아닌지 의문을 내비치며 계속 구시렁댔다. 내 말을 들은 직원은 선글라스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죄송하다는 말부터 했다. 불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런 다음 그는 선글라스를 이리저리 살펴보았고 이내 사나운 짐승에게 재갈 물리듯 내 얼굴에 그것을 가져다 씌웠다. 나는 어떤 심각한 치료를 받으러 온 환자처럼 입을 다물고 고분고분 굴었다. 그는 내 귓등에 걸친 선글라스 다리를 만지작거렸고 몇 번 톡톡 튕겨 보며 코 받침이 내 콧대에 내려앉는 찰나를 유심히 관찰했다. 잠시 후 모든 검사가 끝났다는 듯, 어떤 선고를 내리려는 듯, 편치 않은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고객님. 선글라스는 정상인데요…… 고객님 얼굴에 맞게 다시 세팅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정상’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공포탄에 직격으로 맞은 기분이었다. 그 말인즉슨 내 얼굴을 비정상으로 단정하는 것처럼 들렸고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말자고 애써 외면해 왔던 지점에 이르게 하였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애초에 잘 어울린다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지. 처음부터 제대로 세팅해 주었어야지. 그럼 제 얼굴이 비정상인가요? 직원은 몹시 난처하다는 듯 웃으며 그런 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 게 아니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정상인 선글라스가 정상인 얼굴에서 자꾸 어긋나고 삐뚤어지는 건 무엇의 잘못인가.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아직 원인을 모르는 상황이니 그의 입장도 배려해야 했다. 수오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몇 가닥 남은 싸리비처럼 쓸모없이 옆에 서 있기만 했다.
백화점에 온 김에 지하 푸드 코트에서 점심을 먹고 가자는 수오의 제안이 썩 내키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밥 생각이 전혀 없었다. 우리가 물론 점심을 함께 먹기 위해 만났지만 약속했다고 꼭 점심을 먹어야 하는 계획적인 사이는 아니었다. 눈치 없는 수오는 진심으로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매운 음식 어때?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서서 물었다. 내 얼굴이 비정상이야? 수오가 잠시 내 얼굴을 살펴보았다. 앞뒤 없는 질문에도 대체로 대답을 잘해 주던 수오였다. 누구보다 내 성격을 잘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수오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들여다본 후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완벽한 사람은 없어.
내 질문은 그게 아니잖아.
얼굴이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걸 말하는 거야. 봐봐. 난 오른쪽 눈썹만 사선이야. 멀리서 보면 비행하던 새가 방향을 트는 것 같잖아.
수오는 자신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쓸어 올리며 양쪽 눈썹을 씰룩쌜룩했다. 정말 오른쪽 눈썹만 사선으로 쭉 뻗었고 왼쪽 눈썹은 한 번도 비상하지 못한 채 파닥거리는 새의 날개처럼 보였다. 심지어 참숯으로 그려 놓은 것같이 도드라진 눈썹인데도 여태껏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 오늘 보니, 매일 만나는 남자친구의 얼굴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려는 원심력이 느껴졌다. 수오의 눈썹은 왜 저 모양이 되었을까. 길 잃은 갈매기가 이름 없는 부둣가에서 맴도는 것 같아 왠지 애잔하기까지 했다. 수오의 삐딱한 눈썹을 보니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우리는 H 백화점 지하 일층 푸드 코트에서 낙지볶음밥을 주문했다. 수오가 수저를 세팅하고 컵에 물을 따르는 동안 나는 계속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들여다보며 내 얼굴에서 비정상인 부분을 찾고 있었다. 낙지볶음밥을 양손에 든, 아직 어려 보이는 여자 종업원의 눈이 최근에 쌍꺼풀 수술을 한 듯 어색하게 부어 있었다. 나는 여자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고 내 시선을 의식한 여자 종업원은 낙지볶음밥을 다소 거칠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미간에 힘을 주었다.
성형외과에 가볼까?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넌 내가 예쁘다고 생각해?
……응.
넌 내가 못생겼다고 생각할 때도 있지?
……그런 적은 없어.
이런 질문에는 일 초도 망설이지 말고 순식간에 대답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거늘, 끝내 한 템포 늦게 대답한 수오는 반숙 달걀을 터트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 온 수오는 과묵한 편이었지만 사실상 별다른 생각이 없는 사람 같았다.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병에 걸렸는지도 모른다. 자기 검열이 심하고 매사 예민한 나와는 반대로 수오는 대단히 긍정적이었다. 긍정적인 사람이 내뿜는 여유 같은 것이 그렇지 못한 타인에게는 성의 없는 태도로 보이기도 하는데, 수오가 딱 그런 스타일이다. 긍정은 긍정, 부정도 역설적으로 긍정, 애매한 것도 어떻게든 긍정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긍정 애호가. 사철 빛이 들지 않는 구석 모퉁이에는 아무리 긍정을 처발라도 곰팡이가 핀다는 것을, 긍정이 늘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수오는 아직 모를지도 모른다. 긍정이 진실을 감추기 위한 가면이 되거나 불안한 현실을 회피하려는 도구로 타락할 때, 그것이 때론 위험한 현실을 가져오기도 한다는 것 또한.
수오는 낙지볶음밥을 입에 넣고 쩝쩝 소리를 내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백화점을 나와 바로 옆 건물 S 성형외과에 들어갔다.
상담하러 왔는데요.
어디를 보시려고요?
그게…… 쌍꺼풀?
내가 만난 사람은 의사가 아니었다. 상담실장이었다. 의사와 비슷하게 흰 가운을 입고 있었으나 가슴에 매달린 작은 명찰은 그녀를 이름 앞에 상담실장이라 소개했다. 그녀는 기다란 철삿줄로 내 눈두덩을 패 일시적인 쌍꺼풀 라인을 만들었다. 커다란 손거울을 내 얼굴 앞에 들이대며 마음에 드는지 물어보았다. 내가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그녀는 기가 막히게 예뻐질 거라고 확언했다. 나는 어색하게 커진 눈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갓 낳은 송아지처럼 크고 동그란 눈매가 그녀의 확신에 신뢰를 주었지만, 나는 무엇보다 눈이 커지면 얼굴이 정상적으로 보일까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이 그녀는 속사포처럼 수술 과정과 비용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녀의 길고 지루한 설명을 귓전으로 모두 듣고 나서야 물었다. 담당 의사와 상담하고 싶은데요?
삼십 분을 기다려 의사를 만났다. 상당히 귀찮아하는 느낌을 받은 것은 상담실장이 설명한 게 전부일 거라고 말한 그의 첫마디 때문이었다. 눈두덩에 살이 많아 매몰은 힘들고 절개를 해야 한다는 것도, 안검하수 때문에 눈이 작아 보이니까 트임을 하는 게 좋겠다는 것도, 그의 첫마디처럼 상담실장이 한 말과 같았다. 붕어빵처럼 똑같은 두 사람의 의견은 마치 지금까지 쌍꺼풀 수술을 하지 않은 내 얼굴을 비정상으로 정의하는 것처럼 들렸다. 제 얼굴이 비정상인가요? 나는 바퀴가 다섯 개 달린 가죽 의자를 책상 앞으로 끌고 갔던 의사에게 물었고 쌍꺼풀과 전혀 상관없는 질문에 의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내 턱에 시선을 꽂았다. 그가 다시 내 앞으로 미끄러져 왔다. 양손으로 내 턱을 잡고 꾹꾹 눌러 보다가 옆으로 두어 번 틀어 보았다.
네. 안면 비대칭이네요. 그렇게 심각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보톡스로 해결될 부분은 아니고요.
쌍꺼풀은 무의미한가요?
안면 비대칭은 쌍꺼풀로 해결할 수 없죠. 눈이 커지면 시선이 분산되면서 덜 그렇게 보일 수는 있겠지만요.
그렇군요……. 그런데, 원인이 뭐죠?
의사는 드디어 이맛살을 조금 찌푸렸다.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듯, 이 여자는 이것저것 상담만 하러 온 뜨내기라는 걸 안다는 듯, 그래서 더는 친절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음, 그건, 부정교합이 있다면 타고났을 수도 있고요. 그게 아니라면 어떤 외상이나 생활습관이 원인일 수도 있고요. 원인이야 뭐, 알 수가 없죠. 의사는 말이 끝나자마자 뒤에 서 있던 간호사에게 턱짓을 했고 이어 두 손을 모으고 대기 중이던 간호사가 다가와 말했다. 안면 비대칭 수술과 관련해서 실장님과 상담하실게요. 나는 수오에게 그냥 가자고 말했고 수오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따라나섰다. 병원 입구 쪽으로 향하다가 상담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상담실장과 눈이 마주쳤다. 매뉴얼대로 줄줄이 내뱉던 그녀의 왼쪽 입술이 왼쪽에 난 덧니 때문에 조금 치솟았던 기억이 났다. 비뚤어진 입술로 기가 막히게 예뻐질 거라고 확신했던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을까.
근데 왜 쌍꺼풀 하러 왔댔어?
얼굴이 정상이 아니라서 왔다고 할 수는 없잖아.
…….
근데, 안면 비대칭이라니. 장애 같고 그렇네.
장애 맞을걸?
듣고 보니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단어에 수긍이 가는 순간 나도 모르게 몹시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신체 혹은 정신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상태가 장애라면 안면 비대칭이 신체적 장애라고 정의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발발한 습관과 그것을 의식하며 괴로워하는 건 정신적 장애가 분명하지 싶었다.
나는 건물을 빠져나와서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고 다짜고짜 물었다. 내가 태어날 때 정상이었냐고. 혹시 얼굴이 이상하지 않았냐고. 솔직히 말해 달라고. 파김치를 담던 중이었다고 말한 엄마는 그딴 거 물어보러 전화했냐며 짜증을 내었다. 이어 엄마는 말했다. 자신은 나를 아주 건강하고 예쁘게 낳아 줬는데 만약 뭔가 잘못되었다면 그건 다 내 탓이라고. 누구 탓일까 곰곰 생각하며 걷는데, 그 와중에도 나는 왼쪽 얼굴을 자꾸 들어 올렸고 왼쪽 눈은 덩달아 찡긋, 윙크하는 꼴이 되었다. 행위 자체는 큰 문제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그때마다 그 행동을 의식하는 내가 신경 쓰였다. 나는 걸리적거리는 선글라스를 벗어 머리에 씌웠다. 자외선이 얼굴에 난입하자 눈코입이 아수라장이 됐다. 햇살에 현기증이 훅 일었는데, 그때 마침 지나가던 남자와 어깨를 부딪치고 말았다.
구찌 선글라스가 달궈진 아스팔트 위로 떨어졌다. 수오가 별일 아닌 듯 선글라스를 주워들었다. 깨지지는 않았다며 선글라스를 건네는 수오를 쳐다보았다. 어깨를 부딪치고 지나간 사람을 쳐다보지는 않았는데 선글라스를 주워주는 수오는 한참 쳐다보았다. 깨지지는 않았다니. 전 남자친구였으면 달려가서 따졌거나 싸움이라도 났을 법한 상황이었다. 나는 계속 수오를 쳐다보며 헤어진 남자친구를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전 남자친구와 헤어지던 날, 그가 내 얼굴에 주먹을 날렸던 기억이. 물론 내가 먼저 치긴 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비대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원인은 전 남자친구일까.
화 풀고 집으로 오라는 문자를 받았다. 마지막 학기 기말고사가 끝난 주말 오후였다. 나는 며칠 전 남자친구의 행동에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지만, 그가 문자를 먼저 보냈고 그의 문자가 어느 정도 사과와 화해의 뉘앙스를 풍겼으므로 그가 좋아하는 맥주와 양념치킨을 사 들고 그의 원룸으로 향했다.
그는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내가 책상 위에 치킨을 올려놓고 침대맡에 엉덩이를 걸칠 때까지 그는 말이 없었다. 일상적인 행동이었지만 그날은 일상적이면 안 되는 날이었다. 그렇게 흐지부지 넘어가는 건 아니다 싶었다. 적어도 그가 빌미를 제공했고 내가 화가 날 법한 상황이었다면 더욱 그랬다. 왼손으로 머리통을 괴고 누운 그의 오른손은 엉덩이 반쪽 사이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강호동과 이수근이 옥신각신하는 장면을 보며 키득대는 그가 얄미웠다. 그를 쳐다보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그가 발뒤꿈치로 내 등을 툭툭 치며 장난을 걸었다. 나는 하지 말라고 단호한 어조로 말하며 그의 발을 뿌리쳤다. 그는 다시 발가락으로 내 머리카락을 꼬아 잡아당겼다. 나는 신경질을 내며 그의 발을 뿌리쳤는데, 그 과정에서 내 손톱이 그의 정강이를 할퀴고 말았다.
그가 텔레비전 리모컨을 집어 던졌다. 리모컨이 텔레비전 서랍장 위에 떨어지면서 쌓여 있던 물건들이 바닥으로 한꺼번에 쏟아졌다. 뜯지도 않은 검은색 팬티스타킹과 고급 망사스타킹이 각각 비닐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리고 며칠 전 백일 기념일에 그가 억지로 내게 입히려 했던 빨간색 팬티스타킹이 흐물흐물 반쯤 미끄러졌다. 그걸 보자 다시 화가 치솟은 나는 떨어진 스타킹을 들어 그의 얼굴에 패대기치며 말했다. 변태 새끼! 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가다가 그가 반성하는 기미도 붙잡을 생각도 없는 것에 또 화가 났다. 나는 돌아가서 누워 있는 그의 머리통을 가방으로 내려쳤다. 반사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킨 그가 내 왼쪽 얼굴을 세게 내려쳐 나는 냉장고 앞까지 미끄러졌다. 나는 일어나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얼굴을 향해 몇 차례 가방을 휘둘렀다. 그때 그의 주먹이 내 왼쪽 광대뼈 쪽으로 날아들었다.
그와 나 누구도 먼저 사과하지 않았고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날 내 왼쪽 얼굴은 파랗게 멍이 들고 심하게 부어올랐다. 생각해 보니, 그날 밤부터 턱이 잘 움직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 내 왼쪽 얼굴에 어떤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의 탓이고 그걸 증명할 수 있다면…… 아니다. 폭력을 먼저 쓴 건 내 쪽이었다. 그걸 걸고넘어지면 할 말이 없지 않은가. 심지어 그 사건의 과정을 헤집다 보면 연인 간 은밀한 사생활을 공개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의 탓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고 정말 그의 잘못으로 내 얼굴에 문제가 생긴 거라면 그 상황을 만든 내 탓이기도 했다. 애초에 그런 자식과 연애를 시작한 것이 원죄라면 할 말이 없다.

수오가 공원 벤치에 앉았다. 나도 옆에 앉았다. 수오는 나른하다며 내 다리를 베고 벌러덩 드러누웠다. 잠시 후 자세를 바꾸며 오른쪽으로 돌아누웠다. 수오는 항상 오른쪽으로 누워 자는 버릇이 있었다. 왼쪽으로 자다가도 어느새 오른쪽으로 돌아누워 있다고 했다. 정말 그랬다. 그래서 수오가 좋았다. 나는 왼쪽을, 수오는 오른쪽을,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이지만 누우면 언제나 마주 보게 되었다. 자다가 설핏 눈을 뜨면 수오는 어벙하면서도 천사 같은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잠결에 어쩌다가 눈이 마주치면 킥킥 웃음이 났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자다가 시선이 마주쳤다는 단순한 상황에 우린 잠꼬대처럼 함께 웃곤 했다.
수오야.
응?
넌 왜 오른쪽으로 자?
글쎄. 왜 그렇게 됐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넌? 언제부터 왼쪽으로 자는데?
수오는 내가 왼쪽으로만 자는 이유를 묻지 않고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물었다.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수오의 화법이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진 기억의 발화점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전래동화에서 으레 ‘옛날 옛적에’라고 두루뭉술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나의 기준에도 옛날 옛적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은데, 글쎄,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왼쪽으로 잔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 때. 내 기억의 시작……. 설마, 바퀴벌레?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지 며칠 안 되어 아빠가 사업을 말아먹는 바람에 우리 가족은 좁아터진 연립주택으로 이사했어. 손바닥만 한 방이 두 칸이었는데, 엄마와 아빠가 한방을 쓰고 나는 동생과 한방을 썼어. 싱글침대 하나와 낡은 책상 하나, 주니어 옷장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방. 나는 하나밖에 없는 동생에게 하나밖에 없는 침대를 양보했어. 그게 옳다고 생각했거든. 지금 생각해도 그건 잘한 것 같아. 나는 침대 아래 이불을 깔고 자야 했어. 침대와 방문 사이, 요를 반 접어야 방문이 열리는 좁은 공간에서 반으로 접은 이불을 깔고 잠을 잤어.
어느 날 가려워서 자다가 깼는데 바퀴벌레가 내 손등을 간질이고 있는 거야. 화들짝 놀라서 손을 탈탈 털자 바퀴벌레는 침대 아래로 유유히 기어 들어갔어. 온갖 박스와 잡동사니, 똘똘 뭉친 먼지로 가득한 어두운 침대 아래 그곳이 바퀴벌레의 아지트였던 거야. 심지어 바퀴벌레라고 하기엔 황당하게 크고 새까매서 텔레비전 어디선가 본 박쥐 같았어. 그날부터 나는 반으로 접은 요를 펼쳐서 접었던 반을 침대 쪽으로 세우고 자기 시작했어. 침대 아래를 차단할 수 있는 방편이었거든. 침대가 누운 몸의 오른쪽에 있었으므로, 나는 등을 침대맡에 기대야 했고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잘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 일부러 의식한 잠버릇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아. 다만 침대 아래 시커먼 공터에서 무언가 기어 나올까 봐 등으로 입구를 막고 긴장하며 잠을 잔 것은 분명해.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왼쪽으로 누워야 잠이 들어. 그게 시작이었나 봐. 내 잠버릇은 정말 바퀴벌레 때문인가?
수오는 잠들어 있었다. 이런 데서도 충분히 잠들 수 있는 녀석이었다. 수오의 두개골이 내 왼쪽 허벅지 쪽으로 쏠려서 근육을 쿡쿡 찔렀다. 만약 수오가 매일 내 왼쪽 허벅지를 베고 잔다면 허벅지도 비대칭이 될지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다리는 독립적 존재인지 아닌지 궁금해졌다. 각각 따로 생존 가능한 독립적인 존재. 얼굴은 왜 독립적이지 못한 걸까. 왼발은 앞으로 오른발은 뒤로 동시에 뻗을 수 있고, 오른손으로 머리를 때리면서 동시에 왼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을 수도 있잖은가. 어째서 얼굴은 울면 다 같이 울고 웃으면 다 같이 웃는, 그토록 사회주의적이란 말인가. 그게 문제라면 조물주 탓인가. 조물주는 사회주의자였을까? 눈도 코도 턱도 함께 비틀려 버린, 참으로 단합이 잘 되는 얼굴. 나는 얼굴만큼 비틀린 마음으로 수호를 내려다보았다. 수오의 눈썹은 도약을 포기하고 편안하게 잠든 아기 타조의 날개 같았다. 내가 허벅지를 약간 꿈틀거리자 수오가 자세를 바꾸었다.
문득 맞물리는 게 떠올랐다. 의사가 원인일 수도 있다고 한 말 중에 ‘생활습관’이라는 것. 왼쪽으로만 자면 왼쪽 얼굴이 짓눌릴 수밖에 없는데, 그게 십 년이 넘었으니 비대칭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내가 유추하고도 제법 설득력 있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건 엄마 말처럼 내 탓일지도 모른다. 내가 만든 습관이니까. 아니다. 그건 엄마 탓일지도 모른다. 어린 딸의 잠자리를 제대로 봐주지 않은, 바르게 자는 습관을 제대로 들이게 양육하지 못한. 아니다. 그건 아빠 탓일지도 모른다. 엄마가 나를 제대로 양육하지 못하게 사업이 망했고, 내가 똑바로 누워 잘 수 없을 만큼 좁은 집으로 이사 간. 아니다. 어쩌면 이건 나라 탓일 수도 있겠다. 굴지의 대기업과 영세 중소기업이 공존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그래서 아빠를 망하게 만든 불공정한 자본주의의 룰. 그것을 바로잡지 못한 나라도 한몫했겠지.
왜 그렇게 심각해?
수오가 고양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모르겠어. 그냥 좀 억울해.
얼굴이 비대칭이라서?
그 사실보다는 내가 그걸 인식하게 된 게 화가 나.
자꾸 생각하지 마. 누구나 어디 한 군데는 비대칭이야. 하다못해 심보가 그런 경우도 있어. 대신 넌 착하잖아.
칭찬인 듯 칭찬 같지 않은 수오의 말은 위로가 되지 못했다. 이미 인식이라는 작용이 시작된 이상 그 안에 갇히는 건 시간문제였고 그 말은 이제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었다. 증명사진을 찍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했기에 먼지처럼 자유로운 상태였다.
이력서에 넣을 증명사진이 필요해서 학교 앞 사진관에 갔었다. 사진관 아저씨는 자꾸만 내게 왼쪽 어깨를 올리라고 말했다. 더더더. 자 좋아요. 왼쪽 조금 더 올리고. 스톱. 그렇지. 아저씨는 컴퓨터로 사진 보정을 하면서 왼쪽 입 꼬리가 많이 내려갔네, 하고 혼잣말을 했다. 네? 놀란 내가 컴퓨터 앞으로 다가서자 아저씨는 내 입 주변을 모공까지 드러나도록 확대한 채 왼쪽 입 꼬리에 마우스를 갖다 대며 말했다. 왼쪽, 왼쪽만 울고 있어. 사진관 아저씨의 화려한 마우스 클릭에 내 왼쪽 입술은 거짓말처럼 미소를 찾았고, 왼쪽 턱과 광대는 오른쪽에 맞춰 조금씩 조금씩 위로 치솟았다. 쌍꺼풀도 오른쪽만 있네? 그건 나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마저도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만큼 작은 속쌍꺼풀. 사진관 아저씨가 만들어낸 증명사진 속 내 얼굴은 실제와는 다르게 적절한 대칭을 이루었고 어색하게나마 웃고 있었다. 어쨌든 줄곧 왼쪽만 울고 있었을 내 얼굴을 그날 처음 보았다.
차라리 오른쪽을 내리는 노력을 하는 게 어때? 어차피 나이 들수록 살은 처지는데, 그게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표정이 너무 어두워.
꼭 밝을 필요가 있어? 미소가 늘 정답은 아냐.
수오는 모른다. 미소가 정답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내 무표정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화가 났냐고 물었는지를. 웃는 얼굴이 예뻐 보이지 않는 여자의 절망을 수오는 모른다. 지금까지 왼쪽만 울고 있는 표정으로 사람들과 마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십대 취준생 여자의 끔찍함을 알 턱이 없다. 사람들은 가끔 눈치 채기도 했을까? 알아챘어도 내 앞에서 말하기는 그랬겠지. 어쩌면 모두가 나보다 먼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사진 찍으러 갔던 날 사진관 아저씨를 통해 내 얼굴이 비틀린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인식의 시작은 비로소 일상을 망가트리기 시작했고 그간 면접에서 떨어진 이유도 비대칭 얼굴 때문이라는 억지 결론에 도달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원인. 그걸 알아야 해결 방향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내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리자 수오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우리, 타로 보러 갈까? 막막할 때는 제법 괜찮은 방법이었다. 아니, 나쁠 건 없었다.

십여 분 걸으니 일이 평짜리 타로 가게가 즐비한 골목이 나왔다. 우리는 개량한복을 입은 중년의 여자가 질펀하게 하품을 하고 있는 타로 가게 안을 기웃거렸다. 입구에 붙어 있는 마그네틱 간판에는 내림굿을 받았다고 쓰여 있었다. 그 특이한 이력으로 방송에도 나왔었는지 방송 화면을 캡처한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우리를 발견한 여자는 이내 들어오라며 손짓을 했다. 비즈 커튼을 젖히자 드림캐처에서 맑은 소리가 났다. 영화에서 봤던 곳과는 다르게 크리스털 볼이나 빈티지하고 신비한 소품 하나 없었다. 그저 하얀 보가 깔린 네모난 테이블 옆에 낡고 아담한 파티션이 전부였고 파티션 너머에는 좁은 싱크대와 오래되어 변색한 냉장고가 보였다. 싱크대 위에는 삶은 고구마 두 개와 벗긴 고구마 껍질이 담긴 쟁반이 있었다. 생각보다 지극히 친숙하고 인간적인 곳. 뭐 보시게? 재빠르게 카드를 정렬하기 시작한 마스터가 물었다. 수오가 내 쪽 의자를 꺼내 주었다. 제 문제의 원인을 알고 싶어서요. 그녀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번엔 점쟁이 같았다.
미래가 아니라 원인을 알고 싶다?
미래보다 쉽지 않을까요?
어디 한번 해봅시다.
나는 아주 신중하게 겹겹이 늘어놓은 카드 중에 가장 아래 갇힌 카드를 뽑아냈다. 불결하게도, 내가 뽑은 카드는 모두 잔인해 보이거나 어두운 그림들이었다. 마스터는 내가 뽑은 카드를 유심히 바라본 뒤 다시 내 얼굴을 구석까지 쳐다보고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입술을 씰룩거렸다. 무당이 타로를 시작한 건지, 마스터가 무당이 된 건지, 이 미스터리하고 신뢰감 없는 여자 앞에 앉아 있는 게 한심하게 느껴질 즈음.
문제가 뭔지 모르지만 방향이 틀렸어.
방향이 틀렸다니요?
해결하려는 방향 말이야. 지금 아가씨가 짐작하고 있는 것들. 생각이 너무 많은데 다 틀렸어. 고정관념을 버리라는 거지.
애매하군요.
문제 자체가 애매한 게 아니고?
그건 그럴듯한 말이었다. 나는 다시 시키는 대로 세 장의 카드를 뽑았다. 이번에는 손가락 하나로 대충 끄집어냈다.
자꾸 도망치고 있네? 숨고 싶거나 숨기고 싶은 게 있지?
아닌데요? 저는 해결하고 싶은 건데요?
해결하려면 대면해야지.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숨거나 숨기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원인을 찾아내려는 쪽인데 순 엉터리였다. 점쟁이든 타로 마스터든 어느 쪽도 믿음은 가지 않았고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나도 모르는 해결책을 누가 찾아 줄 거라 믿었을까. 타로 값 이만 원은 수오의 지갑에서 나왔다. 수오와 나는 타로 가게를 나와 말없이 걸었다. 일렬로 늘어선 자그마한 타로 가게나 간혹 박혀 있는 점집이나 점술적 의미는 전혀 없어 보였다. 날은 점점 어두워졌지만 나는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다.
우리는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건물 하나를 지날 때마다 쇼윈도에 우리의 모습이 비쳤다. 수오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나는 그런 수오를 포함해서 상점 유리에 반사된 우리를 바라보았다. 보이는 것보다 분명 더 가까이에 있을 우리의 모습이었다. 실제보다 두 배쯤 먼 거리. 그 거리에서 바라본 내 얼굴은 아주 평범했다. 어두워서 그럴까, 멀어서 그럴까. 사진관 아저씨는 분명 왼쪽 얼굴만 울고 있다고 말했고 성형외과 의사는 내 얼굴이 안면 비대칭이라고 했고 멀쩡한 선글라스는 자꾸 비뚤어졌는데. 넌 어떻게 생각해? 내 문제에 관해 생각이란 건 하는 거야? 내가 물었을 때, 수오는 마치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꾸물대지 않고 대답했다. 사진관 아저씨는 컴퓨터로 내 얼굴을 지나치게 확대했기 때문이고, 성형외과 의사는 눈에 불을 켜고 고칠 곳만 찾는 사람이라 그런 거고, 멀쩡한 명품 선글라스는 서양인 이목구비에 맞게 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야! 걸음을 우뚝 멈추고 내가 소리치자 수오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만지작거리던 핸드폰을 슬며시 바지 주머니에 밀어 넣은 수오는 무언가 잘못한 사람처럼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수오의 한쪽 눈썹이 비행을 시도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거야?
뭘?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하고 있었으면서 왜 이제야 말하는 거냐고!
아, 그냥 방금 생각난 거야. 그런데 그게, 답이야?
답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일리 있는 말처럼 들렸다. 근본적으로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 같은 말.
나는 쇼윈도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수오도 함께 쳐다보았다. 내 비대칭 얼굴이나 수호의 짝짝이 눈썹은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거리. 그게 문제였을까. 너무 가까운 게 문제였을까. 전 남자친구의 행동이나 어릴 적부터 왼쪽으로 자는 습관 따위는 내 비대칭 얼굴과 관련 없는 걸까. 왼쪽으로 잠자는 습관이 들게 만든 엄마나 아빠 혹은 이 나라 경제 구조의 잘못도 없는 걸까. 선글라스는 진짜 정상인 걸까. 혹시 내 얼굴은 비대칭이 아닌 걸까. 거리만, 지금 쇼윈도에 비친 거리 정도만 유지한다면 나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지만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겠고 적당한 거리가 어느 만큼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내게서 거리를 유지한다는 게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도.
우리는 무의식 상태처럼 말없이 걸었다. 즐비한 쇼윈도 속의 우리도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나란히 걷고 있었다. 내가 먼저 쳐다보기 전에는 결코 나를 먼저 쳐다보는 법이 없는 또 다른 내가 신경 쓰였다. 나만 신경 쓰는 것 같아 불쾌감마저 일었다. 유리가 없는 곳으로 가야겠다. 그렇지만 유리가 없는 곳은 거의 없다. 핸드폰 액정에도, 지하철 창에도, 냄새 나는 화장실에도, 유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나는 존재했다. 섣불리 다가오지 않고 선을 넘지 않을 만큼의 거리 안에, 어디서나, 어딜 가든 내가 있었다. 어느 상점 앞에서 가뭇없이 내가 사라졌고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왜? 수오가 한 발 앞서 나갔다가 되돌아오며 물었다.
내가 사라졌어.
응?
유리에 비치던 내가 사라졌다고.
수오가 쇼윈도를 쳐다보았다.
안이 너무 밝아서 그럴걸?
작은 보세 옷가게는 화려한 조명으로 싸구려 옷들을 빛나게 하고 있었다. 거리뿐만 아니라 빛의 양까지 조절해야 하는 걸까. 이러다가 광속까지 계산해야 하는 건 아닐까.


나는 비대칭이기 이전의 나를 찾고 싶었다. 비대칭이었어도 비대칭인지 몰랐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돌아갈 수 없다면 바로잡아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게 진짜 나인지 알 수 없다는 거였다. 비대칭이기 이전의 내가 진짜 나인지, 비대칭이었어도 비대칭인지 몰랐던 내가 진짜 나인지, 모든 것을 인지하고 강박에 사로잡힌 지금이 진짜 나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을 것 같았다. 거리가 주는 불안함. 어둠이 주는 안도. 비대칭이란 단어는 어느새 더 불편한 상황 속으로 침잠했다. 안은 어둡고 밖은 밝은 곳을 찾고 싶었지만, 도시에서 그런 곳을 찾기란 힘들었다.
가게 앞에 멈춘 우리를 보고 옷가게 점원인지 주인인지 모를 여자가 나와 환하게 웃었다. 들어와서 구경하라고, 예쁜 옷 많다고, 보는 것과 입는 것은 다르다고, 여자가 말했다. 나는 여자에게 눈인사를 하고 다시 걸었다. 수오도 말없이 따라 걸었고 좀 전에 사라졌던 나도 따라 걷고 있었다. 넷이서, 가끔은 둘이서 일정한 속도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함께 걸었다. 머리 위에 올라앉은 선글라스는 어둠 속에서 얌전했다. 나는 왼쪽 눈을 찡긋하며 왼쪽 얼굴을 추켜올리지도 않았고 누가 쳐다볼까 봐 신경 쓰지도 않았다.
저녁 먹고 갈까? 술 한 잔도 괜찮고. 몇 발 앞서 걷던 수오는 마치 불특정 다수에게 말하듯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나는 수오의 옥탑방을 떠올렸다. 수오의 옥탑방에서 잠들고 싶어졌다. 우린 애틋하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편안해했고 나는 수오를 신뢰했다. 무엇보다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뭔가 잘못됐다면 모든 게 내 탓이라고 말했던, 파김치를 담그며 화를 냈던 엄마가 떠올랐다. 마침 수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생겼고 수오가 내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여 우리는 수오의 옥탑방으로 향했다. 사층 건물 꼭대기. 나는 수오의 냄새가 밴 싱글 매트리스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치킨? 피자? 휴대폰을 손에 든 수오가 물었다. 피자.
수오는 앱을 열어 피자를 주문했다. 그사이 나는 샤워를 했고 수오는 청소를 했다. 내가 나올 때까지 수오는 도착한 피자 박스를 개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커다란 피자 박스는 네 면이 끈으로 묶여 있었다. 매듭을 풀어 끈을 해체하는 수오를 보며 물었다. 박스 테이프 같은 거 있어? 사올 걸 그랬나? 수오는 갈색 모직 정리함을 열고 황금색 박스 테이프를 꺼내왔다. 자취방을 옮길 때 사용했던 것 같았다. 쓰다 남은 거라 양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부족할 것 같기도 했다. 내가 피자를 씹으며 얼마 남지 않은 박스 테이프를 한참 동안 쳐다보고 있자, 수오는 콜라를 들이켠 후 다시 뭔가 찾기 시작했다. 겹겹이 쌓아 놓은 상자들을 풀어헤치더니 제멋대로 돌돌 말린 주황색 노끈과 플라스틱 줄넘기를 높이 들며 말했다. 이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우리는 황금색 박스 테이프와 주황색 노끈과 플라스틱 줄넘기를 바라보며 피자를 먹었다. 밤은 제대로 깊어 가고 있었고 온종일 걸어 다녀서인지 몹시 피로했다. 머리도 복잡했다. 초라하고 지저분한 수오의 옥탑방은 불면증에 시달리던 사람도 노곤하게 만드는 특별함이 있었다. 내가 먼저 손을 털자 수오는 남은 피자를 정리한 후 불을 껐다. 조그마한 창으로 도시의 불빛들이 새어 들어왔다. 건물 지하에 있는 노래방에서 올라오는 노랫소리도 들렸다. 이따금 자동차 경적이 울렸고 오토바이가 지나갔고 고양이 울음소리가 났다. 긴장을 풀어 주는 도시의 적당한 소음들.
나는 매트리스 안쪽 벽에 등을 대고 오른쪽을 향해 누웠다. 원래는 수오가 자는 자리였고 수오의 방향이었다. 수오는 내 허리 밑에 주황색 노끈을 밀어 넣고 몇 번 느슨하게 감았다. 감긴 노끈 사이로 몸을 넣어 내 쪽을 보고 누운 수오는 자신의 허리와 내 허리를 밀착시켜 노끈을 묶은 후 노끈이 더 단단하게 버티도록 위에 박스 테이프를 감아 밀착시켰다. 수오와 나는 한몸처럼 되었다.
수오야, 네 눈썹에도 붙이는 게 어때?
나는 괜찮아.
그런데 수오야.
응.
네 눈썹은 머리카락이 되고 싶은가 봐.
수오는 눈썹을 씰룩거렸다. 웃기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옆으로 누운 수오의 눈썹은 슬퍼 보였다. 그래서 나는 머리카락이 되지 못한 수오의 눈썹을 쓰다듬어 주었고 내 손이 닿자 수오는 눈을 감았다. 오른쪽으로 눕는 것이 아무래도 어색한 내가 몸을 계속 비틀자 수오는 한데 묶인 내 몸을 꼭 안아 주며 말했다. 너는 그냥 너의 모든 것이야. 수오가 요즘 책이라도 읽는 모양이다. 제법 근사한 말처럼 들렸지만, 나는 수오가 평소처럼 입을 다물어 주길 바랐다.
얼마나 오랜 세월 왼쪽으로만 누워 잤던지 오른쪽으로 누워 있는 것 자체가 너무 불편하고 답답해서 고문당하는 것만 같았다. 둘 다 쉽게 잠들 수 있는 방향도 자세도 아니었다. 나는 수오 너머 나무 의자 쪽으로 팔을 쭉 뻗어 더듬었다. 사진을 찍고 싶었다. 휴대폰? 이번엔 수오가 가까스로 팔을 뻗었다. 무엇을 당겼는지 의자에 걸쳐 놓았던 줄넘기가 따라오려다가 의자가 쿵 넘어지고 말았다. 깜짝 놀라서 일어나려는데 그럴 수 없는 상태였고, 그 때문에 넘어진 의자 아래에 무엇이 박혔는지 나는 보지 못했다. 괜찮아. 고칠 수 있을 거야. 명품이니까. 수오가 하는 말이 뜬금없다고 생각하면서 몸을 비틀었다. 사진은 됐고, 자꾸만 돌아눕고 싶었다.












이은정
작가소개 / 이은정

쓰는 일에 진심인 전업 작가. 소설집 『완벽하게 헤어지는 방법』.


《문장웹진 202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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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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