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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

  • 작성일 2021-10-01
  • 조회수 2,210

[단편소설]



블랙홀



우승미




*


내가 죽은 걸까.
미주는 소파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몸을 보며 중얼거렸다.


집안일을 마치고 소파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손에 힘이 빠지면서 책이 툭 떨어졌다. 깜박 잠이 드는가 싶었는데,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온몸이 떨렸다. 몸 전체가 심장이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감각은 생생하고 의식도 또렷한데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두려움이 밀려왔다. 잠에서 깨고 싶었다. 간신히 몸을 움직여 소파에서 굴러 떨어졌다.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통증은 없었지만 떨어졌을 때 바닥에 닿는 느낌이 너무나 뚜렷했기 때문이었다.
미주는 고개를 젖히고 입을 약간 벌리고 있었다. 잠을 자는 것처럼 보였다. 벌린 입으로 마지막 숨이 빠져나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배의 움직임 같은 생명의 미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3자의 시선으로 보는 자신의 모습은 낯설고 불쾌했다. 누워 있는 자신의 입술 앞에 손가락을 댔다. 가벼운 날숨이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미주는 짧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꿈을 꾸는 걸까. 그런데 왜 모든 감각이 이렇게 선명하지? 의식은 왜 이렇게 또렷하지? 꿈을 꾸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니라면 뭘까?
누군가 등 뒤에서 미주를 안았다.
“괜찮아. 두려워하지 마.”
자신의 목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곧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늘 그리웠던 목소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목소리.
“희주니?”
미주는 돌아섰다. 눈앞에 자신과 꼭 닮은 얼굴이 있었다. 10년 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처럼 얼굴빛이 창백했다. 미주는 희주를 꼭 안았다.
희주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희주의 오른쪽 눈 밑에 있는 작고 까만 점을 엄지로 쓸어 보다가 가볍게 풉, 웃었다. 그 점은 미주의 얼굴과 유일하게 다른 부분이었다. 점이 없었다면 누구도 미주와 희주를 구별하지 못했을 것이다. 희주가 말라서 각질이 하얗게 일어난 입술 끝을 당기며 웃었다.
“너는 나야. 나는 너고.”
방 안의 모든 사물이 소용돌이치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희주의 모습은 위로 당겨진 것처럼 길쭉하게 늘어나다가 점점 작아졌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있었다. 희미하게 빛이 어른거렸다. 일렁이던 주변 사물이 안정화되어 또렷해졌을 때 미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곳은 보육원 민들레방이었다.
미주는 선생님 가방에서 콤팩트를 꺼내 희주의 눈 밑에 퍼프를 두드렸다. 까만 점이 사라졌다. 희주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울지 마. 다 지워지겠다.”
미주는 사인펜으로 자신의 눈 밑에 점을 찍었다.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때? 감쪽같지? 아무도 우리가 바뀐 걸 눈치 채지 못할 거야.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뒤돌아보지 말고 이 지옥을 빠져나가. 너는 나야. 나는 너고. 우린 꼭 다시 만날 거야.”
희주가 민들레방 아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양부모의 차에 올랐다.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훌쩍거렸다. 미주는 울지 않았다. 미주는 웃었다. 잘 가.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없더라도 절대로 돌아오지 마.
민들레방 강민주 선생은 아이들이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는 걸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미친 여자, 라는 말 이외에 그 여자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미주는 매일 사인펜으로 눈 밑에 점을 찍었다. 하지만 강민주 선생은 희주가 아니라는 걸 곧 알아챘다. 그 여자가 바늘로 손톱 밑을 찔렀을 때 비명을 지르며 손을 뺐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는 미주의 뺨을 때리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미주는 당장이라도 희주를 다시 데려올까 봐 두려움에 떨었다. 그 여자는 희주를 다시 데려오지 않았다. 대신 미주가 희주처럼 비명을 지르지 않고, 손을 빼지 않을 때까지 바늘로 손톱 밑을 찌르고 또 찔렀다.
그 여자가 미주의 손을 꼭 쥐었다. 검지 손톱 밑으로 바늘이 들어왔다. 피가 손톱 가장자리를 따라 흐르며 ㄷ자 모양의 붉은 선을 만들었다. 고통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미주의 눈을 들여다보는 그 여자의 눈알이었다. 미주의 눈을 들여다보는, 개구리알처럼 축축하고 반들반들한 눈알. 그 여자는 바늘이 손톱 밑의 살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을 주의 깊게 보다가 미주의 눈을 말끄러미 봤다. 어때? 아프니? 아니면 즐겁니? 고통이 극한에 이르면 쾌락이 된단다. 그렇지 않니? 그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런 순간이 다시 온다면 그 여자에게서 바늘을 빼앗아 그 눈을 찔러버리겠다고 다짐했다. 다시 올 리 없던 그 순간이 다시 왔는데, 미주는 그럴 수 없었다. 작고 여린 손을, 몸속을 꿰뚫는 고통을, 그저 내맡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미주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잘했다. 눈물이 참 예쁘구나.”
그 여자가 손으로 미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름 끼치는 그 손길을 떨쳐버리고 싶었지만 미주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뭐야? 그 웃음은? 왜 그렇게 웃는 거지?”
그 여자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의 그 눈, 그 반들반들한 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미 알고 있지. 지금 이 순간이 당신에게는 현재겠지만 나에게는 과거니까. 당신에게 일어날 미래의 일도 나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만18세가 되어 보육원을 떠나기 전에 미주는 그 여자의 서랍에서 희주가 보낸 편지들을 발견했다. 봉투도 뜯어지지 않은 채 편지들은 쓰레기처럼 그 여자의 책상 서랍 한구석에 버려져 있었다.
“너희들은 악마야! 너희들은 절대 만나서는 안 돼!”
그 여자가 소리쳤다. 미주는 그 여자의 뺨을 때렸다. 한 번이 어려웠다. 막상 손이 나가자 멈춰지지 않았다. 그 여자의 눈과 귀와 코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걸 보면서도 손을 멈출 수 없었다. 미주의 손끝을 파고들었던 수백 개의 바늘이 그 여자를 향해 꽂히고 있었다.
보육원을 나간 첫날밤은 유치장에서 보냈다. 그리고 소년원에서 6개월을 살았다. 미주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 여자는 왼쪽 눈알을 잃었다. 그 여자는 어느 겨울 거리에서 쓸쓸히 죽어갈 때까지 눈의 빈 구멍을 감추기 위해 쓴 선글라스를 벗지 못했다.


*


“그 여자? 사실 그 여자 우리 엄마 아니야.”
서윤의 목소리였다. 서윤은 급식실에서 말라비틀어진 치킨 조각을 젓가락으로 집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우체국 앞에서 네가 그분 팔짱을 끼고 걸어가던데? 단발머리에 굉장히 날씬하시던데 너네 엄마 아니었어?”
집에도 몇 번 왔던 딸아이의 친구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윤주였나? 유주였나?
“날씬하긴 뭘. 볼품없이 말라비틀어진 거지. 그 여자는 먼 친척인데, 나를 돌봐주고 있는 거야. 우리 집에 말 못 할 사정이 좀 있거든.”
친구가 서윤이의 손을 잡았다. 힘들겠지만 내가 힘이 되어 줄게, 같은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손이었다. 착한 아이를 친구로 두었구나, 미주는 중얼거렸다.
“사실 내 진짜 엄마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여배우야.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를 갖게 돼서 어쩔 수 없이 친척에게 맡긴 거야. 사랑보다는 연예계 생활을 선택한 거지.”
“어머, 진짜? 누군데?”
“그걸 밝힐 순 없지. 엄마의 앞길을 막긴 싫으니까.”
“혹시 배우 최선영 아냐?”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헐~ 대~~~박! 어쩐지. 내가 전에도 말했었잖아. 너 최선영, 아니, 최선영 씨 닮았다고. 자주 만나니?”
“자주는 아니고 가끔. 항상 바쁘니까.”
“오태환이랑도 친하겠네. 지금 드라마 같이 찍고 있잖아. 혹시 싸인 같은 거 부탁해도 될까?”
“다음에 촬영장 놀러 가면 내가 부탁해 볼게. 내가 엄마 조카인 줄 알지만 좀 귀여워해 주고 그랬거든.”
“와, 너, 진짜 부럽다. 사진도 같이 찍을 거야? 다음에 촬영장 갈 때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
미주는 서윤이 옆에 앉아 조잘조잘 잘도 거짓말을 해대는 서윤을 보고 있었다. 엄마를 그 여자라고 부르다니. 충분히 충격을 받을 만한 말인데도, 미주는 그런 서윤이 마냥 귀엽다고만 생각됐다. 딸아이의 말에 어떤 악의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일까. 아무리 부정해도 넌 어쩔 수 없는 내 딸이야. 거울을 보렴. 눈과 코와 이마가 누굴 꼭 빼닮았는지. 거짓말을 잘하는 그 예쁜 입술도.
만약 내가 죽은 거라면 넌 어찌 될까. 가엾구나, 내 딸. 끝까지 네 옆에서 널 지켜주고 싶었는데. 미주가 딸의 뺨을 어루만졌다.
서윤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어? 서윤아, 왜 그래?”
“모르겠어. 갑자기 가슴이 아파.”
가슴에서 슬픈 느낌이 차올라. 서윤이가 마음속으로 하는 말이 미주에게 들렸다.
엄마가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고작 친구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우쭐한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엄마를 부정했다고 자책하지 마. 엄마가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도 엄마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네가 엄마처럼 보육원으로 보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거야. 네 곁에는 널 아끼고 사랑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고, 자상한 아빠가 있으니까. 엄마가 널 나 자신보다 더 사랑했다는 걸 기억해 줘.


*


“여보, 여기, 이거 간 좀 봐줘요.”
어머님이 손으로 김치를 돌돌 말아 아버님 앞에 들이밀었다.
“싫어. 좀 전에 이 닦았어.”
“흥, 이 닦았다는 양반이 커피는.”
“안 봐도 간 딱 맞아. 누가 담근 건데.”
미주는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있는 아버님 앞에 앉았다. 두 분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언제나 웃음이 났다.
“무슨 김치를 그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해?”
“재훈이가 신 김치를 싫어하잖아요. 며늘애한테 매일 겉절이 버무리라고 하면 그것도 시집살이니까. 난 그런 시어미 되기 싫어요.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8개월 된 서윤이를 안고 인사를 드리러 이 집에 처음 왔을 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몇 번이나 멈춰 서곤 했다. 남편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반겨 주실 거야. 조금 차가워 보이는 면이 있어도 마음은 따뜻한 분들이니까.”
현관에 들어서서 먼지 한 톨 없이 반짝반짝한 대리석 바닥을 딛는 순간, 미주는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고작 현관 바닥 하나에도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깨끗하고 우아한 기품이 깃들어 있었다. 어머님은 그 바닥을 맨발로 밟으며 달려 나와 미주를 안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정말 미안하다.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지금이라도 이렇게 와주어서 고맙고 또 고맙다.”
뜻밖의 환대에 미주는 오히려 당황했다. 넘어오는 신물을 삼키는 듯한 표정으로 말없이 서 있는 아버님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 후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요란스럽게 치른 결혼식이 끝나고, 피로연장에서 어머님은 서윤이를 안고서 누가 누구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친지와 지인들에게 미주를 일일이 인사시켰다.
“재훈이가 이런 보석 같은 아이를 숨겨 두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밖에서 아이를 낳아와 어쩔 수 없이 시키는 결혼이라고 사람들이 수군거릴까 봐 일부러 그러시는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듣기에 좋았다. 보석 같은 아이라니.
미주를 대하는 어머님의 태도는 그 후로도 한결같았다. 서윤이가 어릴 때는 애 보느라 집에만 있으면 지친다며 바깥바람이라도 쐬고 오라고 서윤이를 봐주었다. 김치며 반찬 같은 것을 살뜰하게 챙겨 주었고, 부족한 것이 없는지 살펴 주었다.
“어머니, 제가 하면 되는걸요. 매번 이렇게 챙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넌 참 별소릴 다 한다. 엄마니까 챙겨 주지. 넌 엄마가 없잖니. 친정엄마 보내고 마음이 시리겠지. 내가 어떻게 해도 친정엄마 같을 수야 없겠지만, 엄마처럼 편하게 생각해. 나도 널 딸처럼 여기고 있으니까.”
서윤이가 크고 난 후엔 함께 영화도 보고, 서로 팔짱 끼고 백화점에 다녔다. 어머님은 미주에게 옷을 사주고, 화장품을 사주고, 가방을 사주었다. 미주가 민망해하면 정색을 했다.
“난 네가 예쁜 옷 입고, 맛난 거 먹고, 좋은 거 발랐으면 좋겠어. 넌 보석 같은 아이니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미주가 고맙다고 말할 때마다 어머님은 미안하다고 대답했다. 고맙다는 말의 대답은 무엇이어야 했을까. 그래, 아니다, 괜찮다, 네가 좋아하니 나도 기쁘구나, 그런 정도의 말이면 충분하지 않았을까.
어머님이 김치통을 보라색 보자기에 곱게 싸서 싱크대 위에 올려놓았다. 차 한 잔을 들고 와 식탁에 앉았다. 어머님은 머그를 쓰지 않았다. 차 한 잔을 마셔도 꼭 찻잔 받침을 사용했다. 어머님이 찻물로 입술을 축였다. 찻잔 손잡이를 잡은 손가락과 후루룩 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을 적시는 정도로만 마시는 그 모든 동작에 여대 출신다운 기품이 묻어났다.
“며늘애가 다 좋은데, 애가 미련한 데가 있어요.”
“어허, 또 또.”
“재훈이가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살면 마음을 잡을 줄 알았어요. 며늘애랑 사이도 좋아 보이고 서윤이도 제 자식이라고 귀여워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어보면 뭐, 그렇죠, 그러는 거예요. 뭐 그렇다는 건 어떻다는 걸까. 그런 말을 할 때면 웃고 있지만 쓸쓸해 보여. 허공 어디쯤 떠 있는 것 같아. 재훈이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여자가 좀 여우같은 면이 있어야 하는데, 애가 좀 둔해서.”
“둔하고 미련한 구석이 있으니 여태껏 눈치 채지 못하는 거지. 재훈이가 그 애 데리고 왔을 때 당신 입에 거품 물고 쓰러지면서 뭐라 했소. 다른 거 안 바란다고, 남들처럼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살면 된다고 하지 않았소. 여기서 더 바라면 죄짓는 거야. 서윤이 같은 보물단지 안겨 주고, 재훈이 남들처럼 살게 해줬는데, 사람이 미안한 줄 알아야지.”
“그러게요. 부모 욕심이 끝이 없네.”
내 사회적 위신, 체면 같은 거 생각하다가 아들 인생 그르친 것 같아서 그러지. 다 부질없는 것들인데. 어머님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말이 들렸다. 미주는 어머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토닥토닥 두드렸다. 어머님이 깜짝 놀라며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 바람에 잔이 흔들리며 찻물이 잔 받침 위로 쏟아졌다.
“왜 그래?”
아버님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갑자기 가슴이 쿵 내려앉네.”
미주는 어머님이 진정될 때까지 몇 번이고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렸다.
인생의 결과는 누구의 탓도 아니에요. 그 길을 택한 건 결국 자기 자신이니까요. 사람의 마음은 자기 자신을 향해 있어요. 자신을 위하고, 자신을 아끼고, 자신을 사랑하죠. 그래서 자신이 했던 모든 잘못된 선택을 정당화시키려 하죠. 타인을 탓하는 건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 편하기 때문이에요. 자기 탓이라는 걸 인정하는 건 너무 쓰라리니까요. 재훈 씨에게도 저에게도 미안해하지 마세요. 제가 자신을 위해 재훈 씨를 선택했던 것처럼 재훈 씨도 그랬을 거예요.


*


“너랑 똑같이 생긴 사람 봤어.”
미주는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쓸었다. 나무의 결이 또렷하게 보일 때까지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했다. 소용돌이치며 빙글빙글 돌던 주위의 모습이 속도를 잃고,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여 먼 곳에 이르기까지 점차 사물들이 자리를 잡아 갔다.
정희의 카페였다. 미주는 복사기를 만드는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같이 근무했던 정희는 결혼하면서 회사를 그만두고 카페를 차렸다. 주변의 회사원들이 주로 테이크아웃을 하는 작은 카페였다. 미주는 이따금 퇴근 후에 들러 문 닫은 카페에서 정희와 맥주를 마시곤 했다.
“처음 봤을 때 이 시간에 웬일이야? 했다니까. 그냥 닮은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똑같이 생겼어. 다른 점이 있다면 좀 단정한 느낌? 아무래도 정장 입고 화장도 하고 그랬으니까. 그리고 밝아 보였어. 넌 좀 다크한 면이 있잖아. 그 사람은 귀여움 받으며 자란 사람 특유의 천진함이랄까, 그런 면이 보였던 것 같아. 도플갱어 뭐 그런 걸까?”
“요즘에도 와?”
“응. 내 친구랑 굉장히 닮았다고 하니까 처음엔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어. 한동안 안 보이더니 요즘은 또 자주 보이네. 너 혹시 어릴 때 헤어진, 너도 모르고 있던 쌍둥이 자매 있는 거 아냐? CCTV 한번 볼래? 점심 시간대라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소년원을 나와서 곧장 보육원으로 갔다. 그 여자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편지를 달라고 했다. 다 태워버렸다고 했다. 그랬을 거라고 짐작했다. 희주를 만날 수 없는 것, 그것이 미주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다는 걸 알았을 테니까. 미주가 다가가자 그 여자가 움찔 뒤로 물러났다. 공이 날아올 때 눈을 감는 것처럼 무의식적인 반사였다. 미주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커다란 바늘이 되었다고 직감했다. 미주를 만나는 것이 그 여자에게는 공포였다. 그래서 이따금 그 여자를 찾아갔다.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걸로 충분했다. 굳어버린 그 여자 앞에 서서 선글라스에 두 사람으로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봤다.
“선글라스가 참 예쁘네요. 기억을 잘 더듬어 봐요. 다음에 만날 때는 주소의 한 글자라도 기억해 내야 할 거예요.”
아이는 자란다. 어른은 늙는다. 아이가 자라 자신에게 폭력을 되돌려줄 수 있다는 걸 미리 깨달을 수 있다면 아이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폭력을 가하는 순간에는 어떤 자각도 할 수 없을 테니까. 사람은 자신이 어떤 말을 하는지, 어떤 행동을 하는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폭력을 행사한다. 그들에겐 미래가 없다. 그들에겐 시간이 없다. 자신마저 삼켜버리는 감정과 욕망의 소용돌이만 있을 뿐.


희주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보육원에서는 희주의 입양 기록을 보여주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아이. 너이면서 곧 나인 아이. 바뀐 성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어쩌면 이름마저 바뀌었을 수도 있었다. 입양된 곳이 서울이라는 것 말고는 어떤 실마리도 없었다. 미주는 서울을 벗어나지 않았다. 쉬는 날에는 신촌이나 대학로 같은 곳에서 마냥 걸었다. 영화처럼 어느 거리에서 문득 마주치지 않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장 기대했던 것은 SNS였다. 성이 바뀌고, 이름이 바뀌고, 사는 곳이 바뀌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얼굴. 희주는 미주와 똑같은 얼굴로 살아가고 있을 테니까.


미주는 연차를 내서 점심시간에 정희네 카페에 갔다. 3일을 연속으로 휴가를 내자 반장이 쏘아붙였다. 일하기 싫으면 그만둬. 여러 사람 피해 주지 말고. 미주는 사표를 냈다.
카페에서 희주와 마주쳤다. 희주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대로 얼어버린 것 같았다. 짧은 정적의 시간. 미주는 깨달았다. 미주에게 희주를 찾는 일은 어려웠지만, 희주에게 미주를 찾는 일은 쉬웠다. 보육원에 연락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미주는 연락처가 바뀔 때마다, 주소가 바뀔 때마다, 근무지가 바뀔 때마다 보육원 원장님께 연락했다. 전화 한 통이면 희주는 미주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미주가 된 희주는 그 전화 한 통을 하지 않았다.
미주는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은 메모지를 희주의 손에 쥐어 줬다.
“언제든 마음이 내킬 때 연락해.”


*


“아이고, 아주 장대비가 내리네.”
수많은 책상과 의자, 수많은 사람, 책상 위에 두 개씩 놓여 있는 모니터, 모니터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빨갛고 파란 막대들, 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대형 LCD화면, 화면 위에 쉴 새 없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글자와 숫자들. 모든 것은 다 제자리에 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미주는 증권사 사무실 안을 몇 번이나 돌고 나서야 재훈의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어이없게도 맨 처음 도착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재훈은 미간을 찌푸린 채 모니터를 응시했다. 옆자리 직원이 재훈의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개미들 곡소리가 구슬프구나.”
모니터 안에는 파란 막대가 위에서 아래로 길게 그려지고 있었다.
지겨워.
재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훈이 마음속으로 하는 말이었다.
누군가의 계좌가 파랗게 멍들었겠지. 1분 만에 사라진 돈이…… 3천억. 1분 동안 생긴 장대음봉 하나의 값이 3천억 원이다. 앞으로 저 크기의 반만 한 음봉이 두 개 더 생길 것이다. 우상향하며 차곡차곡 쌓아올려지던 양봉을 보며 누군가는 점심 메뉴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은 좀 비싼 걸 먹어도 되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웃었을 것이다. 모니터 위로 쏟아져 내리는 장대음봉을 보며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멍해져서 매도 버튼을 눌러야 한다는 것도 잊었겠지. 차트의 바닥을 확인하고서야 3일 후에 결제해야 하는 미수대금을 떠올리곤 머릿속이 까맣게 어두워지겠지.
재훈은 명함 한 장을 들고 물끄러미 보다가 책상 위에 팽개치듯 내려놓고는 다시 집어 들었다. 이름도 상호도 없이 전화번호만 찍혀 있는 이상한 명함이었다.
모든 게 허구야. 누군가를 웃게 하고 누군가를 죽게 만드는 돈이란 것도 결국 계좌에 찍혀 있는 숫자일 뿐, 실체가 없다. 지겨워. 언제까지 가짜들의 연극판에서 연기를 해야 하는 걸까.
시계가 11시 30분을 가리키자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밥 먹으러 가자고.”
옆자리 남자가 말했다.
“난 오늘 약속이 있어.”
재훈이 대답했다. 재훈은 명함 속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갈까 하는데. 10분 정도 후에.”
재훈이 휴대전화와 양복 재킷을 챙겼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줄어드는 숫자판을 응시하며 조급한 듯 발끝을 까딱거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재훈이 달리기 시작했다. 계주의 마지막 주자처럼 전속력으로 달렸다. 넥타이가 어깨 뒤로 넘어가 펄럭거렸다. 사람들과 부딪쳐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재훈은 돌아보지 않고 계속 달렸다. 땀이 그의 몸 전체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미주로서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재훈 씨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손. 매끈한 손가락. 거스러미 하나 없는 짧고 깨끗한 손톱. 손톱 아래에 투명하게 비치는 선홍빛 살.”


남편으로서 재훈은 완벽에 가까웠다. 저녁 식사 후 아이와 함께하는 가족 산책, 일요일마다 준비해 주는 브런치, 미주에게 넘겨준 월급통장, 계절마다 떠나는 해외여행, 일주일에 세 번 서윤이를 가르치는 중국어 수업, 늦은 밤 함께 나누는 맥주 한 잔, 때때로 자정을 넘기는 긴 대화, 심야의 자동차 극장. 완벽한 남편이 되기 위한 매뉴얼을 꼼꼼히 살펴본 사람 같았다. 재훈은 여느 남편들이 해주지 않는 수많은 것들을 해주었지만, 여느 남편들이 다 하는 한 가지를 하지 않았다. 잠자리. 미주에게 재훈은 남편이라기보다는 친구에 가까웠다. 친구로서 재훈은 완벽했다.


재훈은 오피스텔 벨을 눌렀다. 문을 쿵쿵 두드렸다. 밭은 숨을 몰아쉬며 기침처럼 짧은 욕설을 내뱉었다. 오피스텔 문이 열렸다. 재훈은 거칠게 문을 젖히며 들어갔다.
“매니저 형한테 얘기 들었죠? 비용은 20만 원. 시간은 30분.”
“이수민. 이러려고 날 떠났어? 이런 꼴로 살려고?”
“비용은, 선불로 주셔야 해요.”
“너, 내가,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기나 해?”
재훈이 소리를 질렀다. 울고 있었다.
“씹 하러 왔으면 씹이나 해. 전 손님과 대화는 하지 않아요.”
“너 나한테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니?”
재훈이 지갑을 꺼냈다. 돈을 꺼내 바닥에 집어 던졌다. 재훈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미주는 재훈을 따라가지 않았다. 우두커니 서서 수민을 봤다. 미주는 수민을 알고 있었다. 미주가 알던 수민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지만.
재훈과 결혼을 하고, 거의 모든 주말을 수민과 함께 보냈다. 맛있는 재료를 사다가 요리하고, 술을 마시고, 설거지 내기 보드게임을 했다. 안방 침대에 나란히 누워 서윤이에게 책을 읽어 주고, 걸음마를 시키고, 서윤이가 ‘엄마’라는 첫말을 내뱉는 순간 함께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보고, 비 오는 어느 오후에는 거실에 누워 각자의 책을 읽었다. 모든 순간이 자연스러웠다. 미주는 수민과 함께하는 시간이 좋았다. 수민은 주변의 사람과 공간에 생기를 더하는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은 봄의 왈츠처럼 행복했다.
수민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끝 라인을 코발트블루로 염색한 은색의 긴 머리칼이 커튼처럼 그의 얼굴을 덮었다.
“하, 씨발. 인생 좆같네.”
미주는 수민 옆에 나란히 앉아 그의 야윈 어깨를 안아 주었다. 선뜩한 기운을 느낀 것처럼 그의 어깨가 흔들리더니 이내 들썩였다. 숨어서 우는 아이처럼 손가락 사이로 울음이 새어 나왔다.
벨이 울렸다.
수민이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문 앞에는 재훈이 서 있었다. 재훈이 현관으로 들어서며 수민을 안았다.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재훈은 물 같은 남자였다. 청렬하게 고여 있는 물. 그런 사람의 어디에 저런 격정이 숨어 있었던 걸까. 두 사람의 남은 장면은 차마 볼 수 없어 그 장면에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눈물의 키스’라는 제목을 붙여 주고 오피스텔을 나섰다.


*


재훈이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집에 왔다. 서윤이는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저녁은?”
“먹고 왔어. 미리 연락 못 해서 미안해.”
서윤이는 의자 아래로 늘어뜨린 다리를 흔들거리며 닭강정 하나를 입에 넣고 있었다.
“안타깝다. 오늘 저녁 엄청 맛있거든요. 할머니가 반찬 갖다 주셨어. 전복 조림이랑 닭강정이랑 아빠가 좋아하는 겉절이김치. 닭강정은 역시 할머니표가 최고야. 오늘 급식에 치킨이 나왔는데 도저히 못 먹겠더라고. 닭을 튀기는 게 아니라 말리나 봐. 종이 씹는 것 같아서 도저히 못 먹겠더라.”
서윤이는 조잘조잘, 닭강정을 먹으면서 온갖 표정과 손짓을 띄우며, 조잘조잘 쉴 새 없이 이야기했다.
“많이 먹어, 우리 딸.”
재훈이 서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재훈의 얼굴에 웃음이 물결처럼 번졌다.
미주는 재킷을 걸어 두려고 옷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괜찮아. 내가 할게.”
“좀 피곤해 보이네.”
“응. 괜찮아.”
미주는 재훈의 어깨를 털어 주며 재훈의 어깨에 붙어 있는 은색 실을 떼어냈다.
“그럼, 푹 쉬어.”
“고마워. 항상.”


너무 아름답지 않니? 조잘조잘 귀여운 아이와 친절한 남편, 반찬을 경비실에 맡기고 가는 배려 넘치는 시어머니. 너무 완벽하지 않니?
은색 실을 빛에 비추었다. 끝부분이 코발트블루로 염색되어 있었다. 미주는 은색 실을 검지에 돌돌 감았다.
너는 갑작스럽게 내게 왔지. 커다란 여행 가방을 들고서. 너의 배는 감출 수 없을 정도로 볼록하게 나와 있었어.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어. 식사를 마치고 나란히 누워 곰팡이로 얼룩진 벽지를 보며 사과 한 조각을 씹어 먹었지. 종일 서서 일하느라 부은 내 다리를 너는 부드럽게 마사지했어. 너는 회사에서 어울렸던 두 동료에 대해 말했어. 그들과 어디에 갔는지, 그들과 무엇을 했는지, 그들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세 사람이 함께한 그 시간은 봄의 왈츠 같았다고 너는 말했어. 너는 사랑했지. 너는 동경했지. 주위에 생기를 불어넣는 남자와 결코 상처받은 적 없는 깨끗한 손을 가진 남자를.
묻지 않았어. 왜 양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지. 네가 너의 일부처럼 여기는 소중한 두 남자는 왜 너를 찾지 않는지. 그런 것은 상관없었어. 너와 함께 보냈던 그 1년이 내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으니까.


어느 저녁, 손바닥만 한 창이 노을빛으로 물든 그 아름다운 저녁에 나는 너에게 그 여자가 어떻게 죽었는지 이야기해 주었지. 몹시 추운 겨울밤이었어. 뺨을 스치는 바람이 너무 차가워서 오히려 청량하게 느껴졌지. 그 여자는 잘 움직이지 않는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달려갔어. 돌멩이 하나 없는 아스팔트 바닥에 자빠지고 다시 일어나 뒤를 흘끔거리며 달리고 또 달렸지. 나는 천천히 걷고 있었는데도 금세 그 여자를 따라잡을 수 있었어.
“기억났어요? 주소의 한 글자.”
그 여자는 차가운 바닥에 누워 하얗게 입김을 쏟아내고 있었어. 추하게 주름진 입술을 달싹였지만 어떤 말도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어. 나는 허리를 숙이고 그 여자를 내려다봤어. 선글라스에 두 개가 된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지.
“참 예쁘네요.”
선글라스를 벗겨서 내가 꼈어. 어둠이 더 짙어졌지. 눈알이 있었던 자리는 움푹 꺼진 채 검은 구멍이 되어 있었어.
“고통이 극한에 이르면 쾌락이 된답니다. 어땠나요? 즐거웠나요?”


퇴근해서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원룸의 1층 계단을 밟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어. 아기 울음소리가 1층까지 들렸지. 4층까지 단숨에 뛰어 올라갔어. 넌 바닥에 누워 있었어. 토사물이 네 입가에 말라붙어 있었어. 서윤이는 네 가슴을 풀어헤치고 나오지 않는 젖을 빠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어.
조금만 더 견딜 수는 없었니?
조금만 더 버틸 수는 없었어?
우리 셋, 조금 더, 조금 더, 행복할 수도 있었는데.
나도 알아. 너에게 나는 검은 구멍 같은 것이었겠지.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도망치려 해도 거대한 중력으로 끌어당기는, 빛마저 삼켜버리고, 시간마저 되돌려 버리는, 결국 자신을 파괴해 버리는 검은 심연.


똑똑똑. 볼펜 끝으로 너의 사망신고서를 두드렸어. 마침내 이름 칸에 최희주, 버려진 너의 이름을 적었어. 8개월 된 서윤이를 안고 네가 사랑했던 그 남자, 재훈을 찾아갔지. 그는 사라진 눈 밑의 점에 대해서 묻지 않았어. 그런 게 있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어. 그들에게 너는 페이크 카드였지. 사회적 안전핀. 그들은 트라이앵글의 꼭짓점에 누구를 세워 놓아도 상관없었을 거야.


미주는 쓰레기통 페달을 밟았다. 엄지로 은색 실을 도르르 말아 검은 구멍 속으로 던져 넣었다. 그것은 꿈이었을까. 현실이었을까. 미주는 검은 구멍을 향해 속삭였다. 너는 나야. 나는 너고. 심연의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미주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너는 내가 아니고, 나는 네가 아니지. 지겹다. 거짓으로 얼룩진 이 연극판을 끝내고 싶지만, 아직은 아니다. 은색 실은 가볍게 허공을 날아오르다 검은 구멍 속으로 가라앉았다.











우승미
작가소개 / 우승미

200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빛이 스며든 자리」가 당선되었고, 장편소설 『날아라, 잡상인』으로 제33회 오늘의작가상을 받았다.


《문장웹진 202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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