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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아이

  • 작성일 2021-09-01
  • 조회수 4,083

[단편소설]



단 하나의 아이



정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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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어린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한나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한나는 어린이라는 대상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당신도 한때는 아이였다거나 모든 어른의 내면에는 자라지 못한 아이가 웅크리고 있다거나 하는 문장을 들으면 바나나 껍질을 삼키다 만 것 같은 기분이 될 뿐이었다.
노 키즈 존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을 때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있다. 지나치게 소란스러워서 타인에게 방해가 되는 인간이라면 그게 누구든 얼마나 어리든 얼마나 늙었든 자신이 앉아 있는 곳에는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노 피플 존. 한나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세계는 거기에 가까웠다. 그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


케이 파라디소를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한나가 새로 일하게 된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근방에서 가장 큰 곳이었다. 20대 초중반 몇이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었다. 막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하기 전에 사회 경험을 쌓으러 왔다는 남학생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손이 빠르고 성격이 싹싹해서 금세 매장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여기선 네가 에이스야. 알바생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매니저가 농담이랍시고 그런 말을 던질 때 모두 못 들은 척했다. 한나는 그 말에 상처를 받지는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나머지는 쓸모없다는 뜻인가 하는 불안감을 지우기 힘들었다. 레스토랑 바깥의 모든 곳과 마찬가지로 그곳 역시 냉정한 세계였다.
어느 날, 브레이크 타임에 주방 한구석에서 와인 잔의 물기를 닦다가 그와 사담을 나누게 되었다. 그는 다른 지역의 관광전문대를 휴학 중이라고 했다. 한나도 휴학 중이라고만 말했는데 그는 굳이 학교 이름을 물어 왔다. 학교 이름을 들은 그가 놀라는 시늉을 했다.
“와, 한나 씨 공부 잘했네. 그런데 왜 여기서 일하는 거예요?”
느닷없이 훅 밀고 들어오는 사람은 특별히 경계해야 한다고 엄마는 종종 말했다. 목적이 있는 거야. 만만하게 봤거나. 한나는 엄마를 신뢰하지 않았으나 어쩌면 그 말만은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나는 조그맣게 어깨를 으쓱하는 시늉을 했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다니다 만 대학은 4년제였고 행정구역상 서울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보기에 그것이 그 학교가 가진 유일한 장점이었다.
“과외라거나 학원이라거나 그런 데 있지 않아요?”
“그런 자리 구하기가 쉽지도 않고.”
한나는 덤덤하게 말을 잘랐다.
“왜요? 요즘엔 과외 연결해 주는 사이트도 많은데.”
“저 같은 경우는, 뭐랄까, 좀 애매해서 딱히 경쟁력이 없더라고요.”
사실에 가까웠다. 간간이 과외 사이트나 어플리케이션을 훑어보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선뜻 구직자로 등록할 결심은 하게 되지 않았다. 중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수능 영어시험에서 몇 등급을 받았는지 명기해야 하고, 대학에 어떤 전형으로 합격했는지까지 밝혀야 한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그건 자존심이 아니라 자신감과 관련된 문제였다. 그럼에도 한나는 가장 이용자가 많다는 과외 사이트에 등록했고, 그때까지 한 군데서도 연락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가 이해한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긴 나도 여기 오기 전에 비슷한 데 지원했다가 서류 탈락했잖아요. 아 과외업체는 아니고 개인 플레이 튜터 연결해 주는 업체요.”
‘플레이 튜터’라는 단어 조합을 한나는 그전에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게 있어요?”
“몰라요? 놀이 가정교사예요. 일 대 일로 하는, 개인 돌봄 같은 건데 아이하고 같이 있어 주는 거예요. 숙제 봐주고 운동해 주고 책 읽어 줘도 되고.”
시급도 높고 편하다는 말을 하다 말고 그는 얼굴을 확 찡그렸다. 매장에서 일할 때는 한 번도 지은 적 없는 표정이었다.
그가 앞치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눈앞에 들이밀었다. 케이 파라디소 어플의 로고는 진한 초록색의 대문자 ‘K’였다.
“생각 있으면 한번 지원해 봐요. 사범대라면서요. 한나 씨는 인상도 좋으니까.”
한나는 시선을 밑으로 떨구었다. 그가 펼쳐 놓은 핸드폰 화면이 보였다. ‘단 하나의 어린이를 위한 단 하나의 선생님. 고품격 보육서비스.’ 그 문장이 촘촘히 박힌 별들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집에 오는 길, 버스 안에서 케이 파라디소 어플을 다운받았다.
업체가 추천하는 선생님의 얼굴과 실명, 출신대학명은 떴지만 그 외 다른 개인 정보는 일반 이용자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유료회원으로 가입한 이용자들만 볼 수 있는 것 같았는데, 그 비용이 꽤 높았다. 유료회원으로 가입한 부모가 제 아이의 튜터로 원하는 조건을 제시하면 업체에서 그에 걸맞은 후보 몇 명을 추천하고, 회원은 그중에서 선택하는 시스템인가 보았다. 고용자와 피고용자가 연결되면 업체가 중간에서 계약서를 작성해 주고 수수료를 받았다. 잘은 모르지만 결혼정보회사의 시스템이 이렇지 않을까 한나는 추측해 보았다. 시급이 높다는 말이 떠올랐다. 홈페이지 어디에도 튜터의 시급은 나와 있지 않았다. 구글 검색을 해보았다. 케이 파라디소의 면접을 본 적이 있다는 후기, 케이 파라디소의 면접에 통과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는 질문 들이 여럿 떴다. 인 서울 중위권, 착하고 유순해 보이는 외모의 여학생이 가장 유리하다는 글이 보였다. 명문대? 별로 안 좋아해요. 오래 일할 것처럼 보이는 게 제일 중요해요. 이런 글도 있었다. 심한 염색 안 되고 네일아트, 타투 안 됨. 화려하고 세 보이면 탈락, 성형 티 나면 탈락. 재학생보다 휴학생 우대. 복학 시점은 최대한 뒤로 얘기할 것. 복학 안 할 수도 있다고 하면 더 좋아함. 검색으로 알아낸 케이 파라디소의 시급은 한나가 레스토랑에서 받는 액수의 1.5배였다.
지원서를 내고 며칠 지나지 않아 면접을 보러오라는 연락이 왔다. 알바 시간과 겹치는 바람에 카페에는 집에 급한 일이 생겨 한 시간 늦겠다고 둘러댔다. 케이 파라디소의 본사는 판교의 고층 오피스 건물에 있었다. 천장이 높고 창이 많아서 실내가 무척 환했다. 헤어숍의 대기실과 비슷한 방에 한나 말고도 예닐곱 명이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단정한 셔츠 차림이었다. 아침에 무심코 흰 라운드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나온 것이 후회되었다. 실내에는 은은한 향기가 감돌았다. 교보문고 매장에서 나는 것과 비슷한 향이었다. 우아한 곡선을 가진 청보라색 소파는 쿠션이 딱딱해서 앉아 있으면 저절로 허리가 꼿꼿하게 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등받이에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한나는 이런 곳의 정규직이 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할지 골똘히 생각했다.
면접관은 삼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긴 머리칼을 질끈 묶었고 짙은 다크 서클이 눈가를 뒤덮은 상태였다. 탁자 위에는 그녀가 마신 것으로 보이는 스타벅스 일회용 종이컵이 세 개나 널브러져 있었다. 면접 시간은 짧았다. 지원서의 사진과 실제 얼굴을 대조하는 것이 이 대면 면접의 주목적인지도 몰랐다. 면접관이 한나에게 던진 질문은 한 가지뿐이었다.
“아이들이 한나 씨의 어떤 면을 좋아할까요?”
그것은 예상을 완전히 비껴난 질문이었다. 한나가 예상했던 질문은, 왜 이 일을 하려고 하는가, 정도가 고작이었다. 면접관은 아이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나는 재빨리 깨달았다. 이것은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위치가 확고한 계약이며, 선택은 피고용인의 몫이 아니라는 사실을.
“저는 인내심이 강한 편이라는 얘기를 많이 듣기 때문에.”
한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지만 말을 이어 갈 수밖에 없었다. 항상 변함없이 아이가 필요한 자리에 있을 것이고, 아이가 즐거울 때나 어려울 때나 지켜주고 힘이 되어 줄 거라고 말했다. 평소에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입을 여니 기계처럼 술술 말이 흘러나왔다.
“알겠습니다. 나가 보세요.”
면접관은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후 알리오 올리오 접시를 나르다가 합격 메시지를 받았다. 신원을 증명할 서류와 재학증명서를 조속히 제출하라는 내용이었다. 최종합격자를 대상으로 하는 기본 교육을 받으러 가야 했다. 본사의 회의실에 모인 합격자들 중 여자가 열다섯 명이라면 남자는 다섯 명쯤 되었다. 신입 교육을 맡은 담당자는 지난번의 그 면접관이었다. 자신을 김소라 과장이라고 소개했다. 여전히 많이 피곤해 보였다. 김 과장은 합격 축하 인사 같은 것은 생략한 채 바로 피피티를 켰다. 그날 받은 교육 내용의 많은 것은 한나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몇 가지만은 잊을 수 없다. 아이들의 신체에 직접적으로 접촉하면 안 된다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누군가가 아이와 같이 길을 걸을 때 손을 잡아 줘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가능하면 그런 상황은 만들지 마세요.”
김 과장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학부모의 특별한 사전 요청이 있지 않는 한, 아이와 외출을 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고 했다. 특히 아이와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즉흥적으로 함께 밖에 나가는 일은 즉각적인 계약해지사유에 해당했다.
“아파트 단지 안 됩니다. 단지 내 놀이터 안 됩니다. 아예 그냥 현관문 밖을 나가면 안 된다고 기억하세요. 아셨죠?”
또 하나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거짓말로 본사를 배제한 채 학부모와 튜터가 개인적인 고용 관계를 맺는 상황이었다. 시종일관 엇비슷하던 말투를 구사하던 김 과장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수수료 몇 푼 아끼려는 차원에서 부탁하는 어머니들이 간혹 계십니다. 몰래 일하면 누가 아느냐고 말이죠.”
비밀은 없다고 김 과장은 강조했다.
“무엇보다 회사는 여러분의 안전망입니다. 중간에 회사가 빠지면 자신을 지킬 수가 없게 되는 거예요.”
만약 그런 제안을 해오는 학부모가 있으면 바로 알리라고 했다. 플랫폼이 두려워하는 건 자신이 배제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한나를 스쳐갔다. 교육이 끝난 후, 참석자들 앞에 계약서가 한 장씩 배부되었다. 다들 거기에 서명을 해서 제출했다. 자세히 읽어 볼 시간은 없었다.
곧 케이 파라디소 어플의 새로운 추천 교사 명단에 한나의 이름도 정식 등록되었다. 입술을 다물고 양쪽 입 꼬리를 알아볼락 말락 올리고 있는 자신의 표정이 한나는 우습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다. 여하튼 실물보다 나은 건 분명하다고 믿어야 했다. 사진을 클릭하면 회사가 작성한 짤막한 추천평을 읽을 수 있었다.
‘사범대에 재학 중인 예비 교사 이한나 선생님은 성실하고 인내심이 강한 분입니다. 어떤 상
황에서도 항상 우리 아이 곁을 변함없이 지켜주고 힘이 되어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한나가 하지 않은 말은 결코 아니었다.


*


다수의 서울시민들처럼 한나 역시 이 도시의 모든 주소를 지하철 기준으로 파악했다. 첫 번째로 파견된 집은 3호선 라인이었다. 지하철역에서 5분쯤 걸어야 했다. 18층이었는데, 승강기에서 내리자 마주 보고 있는 두 개의 문 중 어떤 쪽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어린이용 자전거와 유아용 킥보드들이 늘어선 쪽이었다. 문을 열어 준 사람은 푸근한 인상의 장년 여성이었다. 지우의 외할머니였다.
“선생님 오셨다!”
할머니가 소리치자 내복 차림의 두 아이가 거의 동시에 뛰어나왔다. 긴 머리칼을 풀어헤친 여자 아이, 그리고 흥분해서 펄쩍펄쩍 제자리 뛰기를 하는 그보다 한참 작은 남자 아이였다. 한나가 미리 전달받은 바로는, 오늘 그녀의 플레이 메이트는 7세 여아 한 명뿐이었다. 일주일에 세 번씩, 오후 다섯 시부터 일곱 시까지 총 두 시간 동안 지우의 영어 학원 숙제를 도와주고, 같이 그림을 그리거나 종이접기와 슬라임 만들기 등을 하면 된다고 했다. 지우에게 3살이 안 된 동생이 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정작 지우는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한데, 지우의 남동생으로 추정되는 아이가 그녀의 오른쪽 다리에 매미처럼 달라붙었다. 아이와 신체접촉을 하면 안 된다는 교육 내용이 퍼뜩 떠올랐다. 한나는 엉거주춤 움직이지 못했다. 실은, 실내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혼곤해져 버린 참이었다.
집 안은 4인용 식탁과 패브릭소파가 한눈에 들어오는 아담한 공간이었다. 바닥에는 적당히 때 탄 소음방지 매트가 깔려 있고, 식탁 위엔 뚜껑 열린 토마토케첩병과 껍질을 반쯤 까다 만 오렌지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뭐라고 해야 할까, 몇 시간 전에 요리한 생선구이, 타기 직전까지 오래 볶은 양파, 인공적인 라벤더향의 섬유유연제, 그런 것들이 뒤죽박죽 섞인, 생활의 냄새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냄새가 났다. 낯설고 어지러운 냄새였다. 어쩌면 이것이 평범한 가정집의 냄새인지도 모른다. 아닐지도 모른다. 한나는 자신에게는 그 차이를 분간할 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저 녀석이 낯을 하나도 안 가려요. 손님만 오면 강아지처럼 마냥 좋아서.”
할머니의 음성에 왠지 모를 흐뭇함이 묻어났다. 여자 아이는 그새 소파에 양반다리로 달랑 올라앉아 있었다.
“안녕. 네가 지우구나.”
한나는 지우의 동생을 다리에 매단 채 인사했다. 지우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내 선생님이잖아. 네가 왜 뺏어가. 왜 자꾸 뺏어가.”
한나는 구원을 바라는 눈길로 할머니 쪽을 쳐다보았다. 지우 할머니가 쯧 혀를 찼다.
“또 저러네. 남매간에 니 꺼 내 꺼가 어디 있어. 콩 한 알도 사이좋게 나눠 먹는 거지.”
지우의 울음소리가 더욱 격렬해졌다. 한나의 등허리에서 땀이 흘렀다. 그 뒤로 그들은 주어진 시간의 거의 대부분을 추격전으로 보냈다. 지우는 동생으로부터 한나를 독점하기 위해 이 방 저 방으로 도망쳤고, 지우 동생은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지우 할머니는 이 모든 것이 범속한 일상이라는 듯 심드렁히 관망하다가 이내 주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약속된 일곱 시까지 삼십 분쯤 남았을 때 아이들의 저녁식사가 차려졌다. 지우 할머니는 딸과 사위가 퇴근하기 전에 일찌감치 아이들의 저녁을 먹여 둔다고 했다. 한나에게도 함께 먹고 갈 것을 연신 권했다. 한나가 사양해도 개의치 않았다. 선생님이랑 같이 밥을 먹으면 편식쟁이 지우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주장했다. 남의 집에서 밥을 먹을 계획은 전혀 없었고, 기진맥진해서 식욕도 없었지만 그녀는 할 수 없이 식탁에 앉았다. 된장국과 삼치구이, 오이볶음, 멸치볶음. 모두 한나가 싫어하는 반찬이었다.
“저녁 먹고 간다고 어머니께 연락 드려야겠네요.”
지우 할머니가 삼치 한 토막을 한나의 앞접시에 덜어 주면서 말했다. 그 식탁에 앉아 밥 한 공기를 억지로 비우는 사이 한나는 지우의 부모가 서울대를 졸업한 캠퍼스 커플이며 각자 내로라하는 대기업에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아파트가 전세가 아니라 자가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한 달에 백만 원도 넘게 주택담보대출을 갚고 있지만 둘의 연봉이 워낙 높아서 별 무리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한나는 그들의 연봉 액수까지 알게 될까 봐 조마조마했다. 지우 할머니가 알게 된 것도 적지 않았다. 지우 할머니는, 한나가 열두 살 때 부모의 이혼을 겪었으며, 그 후 아빠와 살다가 대학 입학과 동시에 혼자 지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나의 부모가 각자 재혼을 했다는 것까지는 정확하게 알아내지 못했지만 그쯤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는 듯이 굴었다. 장하고 기특하다면서 그녀의 등을 두어 차례 도닥이기도 했다. 신체접촉 불가라는 조항이 튜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일까 한나는 궁금해졌다. 지우 할머니가 멸치볶음과 오이볶음을 싸주겠다고 하는 바람에 거절하느라 애를 먹었다.
다음날 일찍 케이 파라디소의 김 과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제 지우의 집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이미 레스토랑을 그만둬 버린 후였으므로 한나는 당황했고 이내 화가 났다. 이유를 물었지만 알려줄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회사에서는 한나의 실책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이렇게 조언할 수는 있다고 했다.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되도록 오픈하지 않기를 권한다고.
“업무 중이니까요.”
한나는 무기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는 새로운 집을 소개해 주었다. 첫날은 시범 삼아 일단 한번 만나 보는 것으로 하고, 서로 괜찮으면 계약을 지속하는 것으로 하자고 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이번 집은 7호선에서 가까웠다. 지상에 차가 다니지 못하도록 설계된 대단지였다. 보이지 않는 것은 차뿐만이 아니었다. 걸어 다니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지하철역에서 아파트 정문 입구까지 가는 것보다, 정문 입구에서 아이의 집을 찾아가는 길이 더 멀고 어려웠다. 가까스로 찾는 동의 공동출입문 앞에 도착했을 때 마침 택배배달원이 밖으로 나왔다. 자동문이 열린 사이 한나는 재빨리 안쪽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작은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다시 상세주소를 확인했다. 11층이 맞았다.
초인종을 눌러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약속 시간 3분 전이었다. 다시 한 번, 이번엔 좀 더 힘껏 벨을 눌렀다. 몇 분이 흘렀을까, 달칵 출입문이 잠금 해제 되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손잡이를 잡아당겨 보았다. 문이 열렸다. 현관의 신발 벗는 공간이 휑했다. 중문이 열렸다.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보브 단발에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머, 너무 젊은 쌤이 오셨네!”
높고 활기찬 목소리였다. 여자는 박수 치듯이 자신의 두 손뼉을 한 번 마주쳤다. 하여튼 당신을 환영한다는 뜻인 것 같기는 했다. 그 뒤에 있는 여자 아이를 보았다. 첫눈에 조그맣다는 생각이 드는 아이였다. 사실 한나는 초등학교 3학년인 다른 여자 아이가 평균적으로 얼마큼 큰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나중에 안 것이지만 하유의 키는 별로 작은 편이 아니었다. 몸의 뼈대가 가늘고 살집이 없는 데다 두상이 작아서 그렇게 느껴졌을 뿐이다.
“안녕하세요!”
아이도 엄마 못지않게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
한나 역시 비슷한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하유의 집은 지우의 집과 비슷한 구조였다. 지우네와 달리 가구라고는 검정색 가죽소파와 흰 테이블뿐이어서 한결 넓어 보였다. 지우의 집에서 났던 생활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케이 파라디소 사무실보다 짙고 강렬한 향기가 실내 공기를 뒤덮고 있었다. 한나가 손을 씻고 나오자 아이 엄마가 커다란 가방을 멘 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나가 봐야 한다고 했다.
“너 오늘 뭐지, 수학인가?”
아이가 턱을 까닥했다.
“네 시쯤 셔틀이 오거든요.”
그때 차를 태워 주고 나서 바로 퇴근하면 된다고 했다.
“네 시 아니고 세 시 사십팔 분.”
아이가 정정했다.
“얘가 저보다 더 잘 알아요. 어디서 타는지도 얘가 알고요.”
한나는 그저 네네, 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문이 닫히고 나서 아이에게 집 안에 또 누가 있는지 물었다.
“아뇨. 우리 둘밖에 없어요.”
아까보다 차분해진 음성이었다. 처음 간 집에 처음 만난 아이와 단둘이 남겨졌다. 한나는 갑자기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저분은 도대체 자신을 어떻게 믿고 집과 아이를 다 맡기고 나가버린 걸까. 이 아파트 건물 전체를 짊어진 것처럼 어깨가 무거웠다. 초등학교 3학년, 여아, 오전 열 시부터 오후 네 시까지, 라는 것 말고 한나에게 미리 고지된 다른 정보는 없었다.
“이제 뭘 할까?”
아이가 눈을 두 번 깜빡거렸다. 수학 학원 숙제가 남아서 지금부터 해야 된다고 했다. 한나가 봐주겠다고 하자 다시 눈을 깜빡였다.
“괜찮아요. 저 혼자 해야지 누가 도와주면 안 되는 거라서.”
난감했다. 자신이 왜 여기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곤란한 처지를 짐작했는지 아이가 말했다.
“그냥 여기 계시면 돼요.”
무엇을 해도 되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니. 이토록 이상한 알바는 처음이었다. 그건 한나의 상상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열아홉 살 이후 그녀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해왔다. 원칙은 하나였다. 무노동 무임금. 하유가 숙제를 마치는 동안 한나는 아이 방과 거실을 일없이 오가며 시간을 때웠다. 책꽂이의 책들의 키를 맞춰 정렬해 보았지만 고작 10분이 흘렀을 따름이다. 숙제를 한다던 아이는 어느새 휴대폰 화면에 눈을 박고 있었다. 누군가와 바쁘게 메시지를 주고받는 듯했다. 알림음이 연신 울렸다. 아이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미소 짓기도 하고 찌푸리기도 하고 키득거리기도 했다. 시간이 한참 흘러도 그대로였다.
“친구야?”
아이가 손가락 움직임을 멈추고 한나를 바라보았다.
“네.”
“그래도 지금은 숙제를 하기로 했으니까 폰은 이따 하는 게 어떨까?”
입 밖에 내고 나니 굉장한 꼰대가 된 것 같았다.
“나쁜 거 하는 거 아닌데.”
“응?”
“전 공신폰이라서요. 유튜브도 카톡도 안 된다고요. 문자만 되니까 나쁜 거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이는 휴대폰을 엎어 놓고 다시 연필을 잡았다. 수학 숙제는 열두 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다. 아이는 태블릿pc를 꺼내더니 음식배달 어플에 들어가 능숙하게 주문했다. 쌀국수가 도착하자 왼쪽 부엌 장 아랫간에 면기가 있다고 말했다.
“그냥 먹어도 되는데, 환경호르몬 때문에, 엄마가.”
괜히 번거롭게 만들어 미안하다는 투였다. 아니라고 한나는 손사래를 쳤다. 할일이 생겨서 다행이었다. 쌀국수 국물이 무척 뜨거워서 어른의 손이 필요할 것도 같았다. 그들은 각자의 국수를 먹었다. 특별히 할 말이 없었으므로 한나는 조하유라는 이름이 독특하고 예쁘다고 칭찬했다. 하유가 반문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또릿또릿한 눈망울이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했다.
“음, 좋다는 의미도 느껴지고, 또 리듬감이 있잖아, 어쩐지.”
하유가 눈을 두 번 깜빡이지도 않고 말했다.
“난 아닌데.”
“응?”
“한숨소리잖아요. 하유…….”
그것은 정말로 힘들 때 뱉어내는 깊은 한숨소리처럼 들렸다.
“엄마가 많이 해요. 하유야, 하유…… 좀.”
“음, 자기 이름에 만족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걸. 사실 나도 내 이름이 별로야.”
“이름이 뭔데요?”
“이한나.”
아이가 젓가락에 국수 가락을 돌돌 감았다 풀었다 하다가 불쑥 말했다.
“근데요, 내 베프도 이 씨예요.”
“그래?”
“네. 그리고요. 저도 원래 이 씨였어요.”
“응?”
“원래 내 이름은 이하유라고요.”
하유의 고백을 듣고서 한나의 머릿속에 즉각적으로 어떤 추측 하나가 떠올랐다. 상투적이고 통속적인 내용이었다. 그 추측이 맞을 수도 있고 맞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상관없었다. 한나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현대사회의 가정은 알고 보면 모두가 저마다 복잡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이건 사실 비밀인데요. 아빠가 이 씨였대요, 원래.”
부자연스러운 이야기일수록 자연스러운 척 대응하는 게 좋을 것이다. 한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국물에 빠진 숙주 한 가닥을 건져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요. 이건 진짜 진짜 비밀인데요. 바뀌었어요.”
한나는 숙주 한 가닥을 삼켰다. 아빠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건지, 아빠가 성을 바꿨다는 건지 불확실하고 모호했다. 어제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알지도 못했던 소녀와 단둘이 마주 앉아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불확실하고 모호했다. 한나는 화제를 바꾸고 싶었다.
“그런데 하유는 어떤 아이돌 좋아해?”
아이가 한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적이 흘렀다.
“안 좋아하는데요?”
끝맺음은 명백히 물음표였다. 마침표나 말줄임표였다면 한나의 마음이 조금 나았을 것이다. 한나가 점심 먹은 것을 치우는 내내 하유는 소파에 엎드려서 휴대폰을 했다. 아까 그 친구와 문자메시지를 하는 것 같았다. 하유는 간간이 환하게 웃었고, 이마를 살짝 찌푸리다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쿡쿡거렸다.
셔틀버스가 도착하는 곳은 아파트 단지 서문이었다. 천천히 가도 10분이면 충분하다고 하유가 말했기 때문에 그들은 3시 35분에 집을 나섰다. 아이와 함께 절대로 외출하지 말라던 교육 내용을 한나는 퍼뜩 떠올렸다. 한나와 하유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떨어져 걸었다. 하유는 열심히 걸었다. 밖에서 보니 조그맣고 야무지고 반들반들한 아이였다. 언젠가 한나가 어렸을 때 저녁의 강가에서 본 적 있는 차돌멩이 같았다. 3시 47분에서 48분으로 바뀌자마자 저 멀리서 노란색 셔틀버스가 다가왔다. 버스에 오르면서 하유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라고 인사했다. 언제 또 보게 될지 몰라서 한나도 응, 안녕, 이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3시 48분에 헤어졌다. 인사 결정권은 한나에게도 하유에게도 없었다.


*


한나는 채용되었다. 여름방학 한시 채용이었다. 일주일에 다섯 번, 오전 열 시부터 오후 서너 시 무렵까지 하유가 숙제하는 것을 지켜보고, 점심을 함께 먹고, 학원 버스가 오는 곳까지 에스코트해 주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노동 강도가 매우 약한 데다 급여가 상당히 높고, 안정된 근무환경에 양질의 점심식사가 제공되는, 드문 직장이었다.
“자기 아이를 잠시라도 혼자 두지 않으려는 부모님들이 꽤 계세요.”
그 집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한나를 향해, 케이 파라디소의 김 과장이 그렇게 말했다.
“그냥 아이 곁에 있어 주는 게 한나 씨의 일입니다.”
하유는 사실 처음부터 엄마가 한나의 사진을 보고서 점찍었다고 말해 주었다.
“순해 보인다고요.”
순해 보인다는 표현은 갓난아기 아니면 동물에게 쓰는 게 아닌가. 한나는 잠시 의아했다. 매일 다를 바 없는 하루들이 반복되었다. 하유 엄마와 한나가 현관 앞에서 바통터치를 하는 것도 매일 다를 바 없었다. 하유는 보통 오전에는 학원 숙제를 했다. 숙제가 끝나고 나면 그들은 배달 어플을 이용해 돈가스, 김밥, 짜장면, 주먹밥과 우동 같은 메뉴를 번갈아가며 주문해 먹었다. 밥을 먹고 나서 학원에 가기 전까지는 자유 시간이었다. 하유는 오후 내내 친구 태리와 문자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천체현미경으로 우주를 보는 과학자처럼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하유는 무척 진지하고 행복해 보였다. 하유가 한나에게 하는 이야기의 대부분도 태리에 관한 것이었다.
“이태리. 이름 웃기죠? 그래도 태리는 자기 이름이 좋대요. 사람들이 한번 들으면 절대 안 까먹잖아요. 아, 태리는 영어 이름도 태리예요.”
방학이라 많이 만나지 못해 섭섭하겠다고 말하자 하유는 어른스럽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서로 학원 땜에.”
그리고 덧붙였다.
“그리고요. 어차피 지금은 미국 갔어요.”
태리는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하와이에 갔다고 했다. 태리의 할아버지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부자인데, 미국 전역에 여러 채의 저택이 있어 날씨와 기분에 따라 골라서 거주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하와이 집은 삼층인데요. 집에서 일 미터? 아니 십 미터인가, 아무튼 집에서 진짜 조금만 가면 바로 바다예요. 모래사장이 진짜 넓고요. 태리네 가족만 쓸 수 있는 전용 바다예요. 그리고 방이 일곱 개래요. 근데요. 화장실이 몇 갠 줄 알아요?”
“몰라.”
“여덟 개요. 일곱 개는 방 안에 있고요. 한 개는 손님 꺼요.”
하유의 목소리는 무척 진지했다.
“이번 여름에는 사촌들이 하와이에 다 모여서 논대요. 사촌이 다 모이면 애들만 열두 명이래요. 대단하죠? 방이 모자란대요. 일곱 개인데도.”
“그래, 대단하네.”
“그죠? 어제는요, 서핑을 하러 갔는데요. 비치에서 돌고래를 봤대요. 돌고래한테 먹이를 줬는데요.”
신나서 종알거리는 하유의 입 모양은 작은 새와 비슷했다. 입을 다물고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 같았다. 하유 엄마는 한나에게 따로 연락을 해오지는 않았다. 낮에 한 번씩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잘 있는지 체크하는 눈치였다. 엄마는 바쁘다고, 아주 많이 바쁘다고 하유가 말했다. 엄마 직업은 디자이너라고 했는데 어떤 업종의 디자이너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아빠에 대해서는 그나마도 언급하지 않았다. 첫날의 대화 이후, 한나는 하유의 아빠라는 존재에게 미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어느 날 점심에 집에 갑자기 들른 남자와 딱 마주쳤다. 그가 카드키로 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에, 마침 그날의 점심 메뉴인 햄버거를 입 안 가득 우물거리던 한나는 깜짝 놀랐다. 하유는 아빠를 흘끗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먹던 것을 계속 먹었다. 자연스러운 무관심의 태도였다. 적어도 도둑은 아니구나, 한나는 안도했고 한편으론 본의 아니게 주인 없는 집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던 데서 기인하는 민망함을 느꼈다.
“아 선생님이시구나.”
뭔가를 놓고 가서 잠시 들렀다면서 남자는 다소 과장되게 인사했다.
“힘드시죠? 지밖에 아무것도 모르는 애라서. 선생님이 세상을 좀 많이 알려주십시오.”
‘지밖에’는 한나의 귀에 ‘지바깨’로 들렸다.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히질 않아서 한참을 고민한 끝에 ‘자기밖에’라는 의미임을 깨달았다. 그녀가, 아닙니다, 라고 말하기 전에 남자는 나가버렸다. 남자는 이 씨일까, 조 씨일까. 하유와 닮았는지 좀 더 유심히 볼 걸 그랬다고 한나는 후회했다. 손으로 빵 부스러기를 떼어내던 하유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바이얼런스.”
“응?”
“바이얼런스.”
아까보다 살짝 더 큰 음성이었다. violence? 영어 학원을 다니기는 했지만 하유가 정확한 뜻을 알기에는 어려운 단어였다.
“지금 혹시 아버지 얘기 하는 거야?”
하유는 떼어낸 빵 부스러기를 손톱으로 꾹꾹 눌렀다.
“이건 진짜 비밀인데요, 아빠는 사람 죽는 걸 본 적 있대요. 진짜예요.”
한나는 자신이 한 마디만 거든다면 하유의 이야기가 뒤로 이어지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때마침 위층에서 무언가 무겁고 둔탁한 것을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렸고 한나는 어머 이게 무슨 소리야, 라고 외치며 천장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윗집에서 가끔가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큰 개가 있는데 아마도 높은 의자에서 힘껏 뛰어내리는 게 아닐까 싶다고 하유가 말했다.
“걔는요, 진짜 엄청나게, 엄청, 엄청, 엄청나게 커요. 라브래브 리트리버예요.”
한나는 그 개의 종류가 래브라도 레트리버라고 정정해 주지 않았다. 아직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였다. 부정확하고 미숙하게 말하는 것이 당연했다. 한나는 햄버거를 감싸고 있던 종이를 착착 접었다. 하유는 이내 휴대폰을 감싸 쥐고 문자의 세계에 몰두했다. 그들에게 이미 익숙한 오후였다.


며칠 후, 한나가 출근했을 때 집에 아이 혼자 있었다. 무덥고 건조한 날이었다. 아이는 에어컨을 18도에 맞춰 둔 채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엄마 아빠는 일찍 나갔다고 말했다. 아침을 먹지 않았다고 해서 한나가 냉장고를 열고 우유를 한 컵 따라 주었다. 시리얼이나 식빵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직접 따라 마실 수 있는데.”
하유가 말했다. 그들은 아일랜드 식탁에 나란히 앉았다. 흰색 식탁 상판에 땅콩 껍질이 점점이 흩어져 붙어 있었다. 한나는 손가락 끝으로 그것들을 하나씩 떼어냈다. 아이는 우유를 두 모금쯤 마시고 나서 사실 엄마 아빠가 어젯밤 들어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왜?”
“몰라요. 바쁘대요.”
하유는 주방 너머 쪽창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하늘이 맑았다.
“그럼 밤에 너 혼자 잤단 말이야?”
하유가 아랫입술로 윗입술을 핥았다. 윗입술에 묻어 있던 우유가 말끔히 닦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눈가에 눈물 자국으로 추정되는 얼룩이 남아 있는 것도 같았다. 인간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다양했다. 이제 자주 그러지는 않지만, 한나도 아직 혼자 울 때가 있었다.
“문 잠그고요. 태리랑 얘기하면서 잤어요.”
나한테라도 연락하지 그랬어, 한나의 중얼거림을 듣고서 하유가 대답했다.
“쌤은 낮에 오시는 쌤이잖아요.”
“그래도 밤에 올 수도 있어.”
“괜찮아요. 저는 괜찮았어요.”
하유는 눈을 두 번 깜빡였다.
“조용해서요. 저는 조용하기만 하면 안 무서워요. 쌤.”
조용하기만 하면, 이라는 말을 입안에서 굴려 보다가 하유가 처음으로 자신을 쌤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체접촉을 금지하는 케이 파라디소의 조항이 아니었다면 하유를 안아 주었을까? 많이 무서웠겠지만 이젠 아침이 되었다고, 너를 혼자 두지 않기 위해 내가 왔다고, 시간은 앞으로 흐르는 법이라고 아이의 연약한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해 주었을까? 하유가 탁자 위에 놓고 간, 텅 빈 컵을 바라보며 한나는 누군지 모를 존재에게 질문했다.


*


계약 만료가 며칠 안 남은 시점, 한나의 퇴근길에 케이 파라디소로부터 연락이 왔다. 마지막 근무일을 재확인하는 메시지였다. 한나는 내심 하유가 개학을 한 후에도 자신의 고용이 이어지리라고 확신해 왔다. 하교하는 아이를 학교 앞에서 집으로 데리고 오는 역할을 누군가는 해야 할 터였다. 하유의 친구 태리와 셋이 함께 걸어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유가 원한다면 말이다. 아이에게 간단한 간식을 먹이고 숙제를 점검하여 학원 셔틀버스에 태워 보내는 것까지가 한나의 업무일 것이다. 근무시간이 줄어들고 따라서 급여도 줄어들겠지만 그 정도는 받아들일 의향이 있었다.
일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한나는 하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한 시간 후에 콜 백이 왔다. 하유 엄마는 여전히 밝고 활기찬 목소리였다.
“쌤, 무슨 일 있으세요? 하유 학원 잘 갔죠?”
한나는 자신이 계속해서 하유를 돌볼 수 있다고 말했다. 2학기에 복학할 예정이 없고 다른 알바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시간은 충분하다고 말했다. 부족한 부분이 있었으면 노력하겠다고 했다. 하유 엄마는 그런 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2학기에 하유의 스케줄이 변동되었을 뿐이라고, 하교시간에 맞춰 학교 앞으로 셔틀을 보내주는 체육관에 다니게 되었다고 했다. 체육관 수업이 끝난 후엔 셔틀이 다른 학원으로 데려다줄 예정이라고 했다.
“그런데요, 어머니, 하유가 혼자 있는 것보단 누가 계속 곁에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 말을 듣자 하유 엄마의 태도가 방어적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여럿이 같이 있을 수 있는 학원을 보내려는 거예요. 공부가 목적이 아니라.”
“그보다는요.”
한나는 목을 좀 축이고 싶었다.
“진짜 친구가 필요한 것 같아요.”
“선생님.”
하유 엄마가 당혹스러울 정도로 진지하게 그녀를 불렀다.
“모르고 하는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워낙 어렸을 때부터 기질적으로 친구 관계를 힘들어했던 아이예요. 지금 나이에는 병적인 거라기보다는 심심하고 상상력이 풍부해서 그럴 수 있으니까 가능한 여러 가지 활동을 만들어 주라고요, 심리치료사가.”
전화가 툭 끊겼다. 엄마도 알고 있었구나, 그렇구나, 한나는 천천히 생각했다. 하유와 태리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 창은 언제나, 보낸 메시지와 받은 메시지가 연달아 똑같은 내용으로 찍혀 있었다.
- 거긴 밤이야?
- 거긴 밤이야?
- 응. 여긴 밤이야.
- 응. 여긴 밤이야.
- 별 많아?
- 별 많아?
- 아니. 오늘은 별로 없어.
- 아니. 오늘은 별로 없어.
- 여기는 아예 없는데.
- 여기는 아예 없는데.
정확히 두 번씩 겹쳐진 채 펼쳐진 문장들. 외롭지 않은 문장들. 반으로 쪼개면 비로소 하나가 될 문장들이었다.


하유와 마지막 인사는 하지 못했다. 하유의 엄마가 케이 파라디소를 통해 내일부터는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통보했다. 개학 전에 갑작스런 가족 여행 계획이 잡혔다는 전언이었다. 급여는 약속한 날짜까지 쳐서 이미 회사 계좌에 입금되었다고 했다. 약간의 수수료를 제외한 금액이 한나의 통장에 들어왔다. 다음날 오후 3시 47분에 맞춰 하유의 아파트 서문 쪽으로 가보았다. 하유가 처음 보는 중년 여성의 배웅을 받으며 셔틀버스에 오르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하유의 거짓말 습관은 모방학습의 결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가, 한나는 금방 그 생각을 지웠다. 속이 상해서 그냥 한번 해본 생각일 뿐이었다. 새 돌보미는 체구가 작고 길지 않은 머리칼을 하나로 단단하게 묶은 아주머니였다. 좋은 분이면 좋겠다고 한나는 바랐다. 한나는 스물세 살이었고, 어른이었다. 차오르는 감정을 참을 수 있었다.


*


그 다음 달부터 한나는 베이커리 카페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손님이 쟁반에 담아온 빵 하나하나의 가격을 계산하고, 한 개씩 폴리백에 담아 주는 일이 주요 업무였다. 매장 안에서 파는 모든 빵의 가격을 외워야 했고 내내 서서 일해야 했지만 그전에 해왔던 일들에 비해 특별히 힘든 것은 아니었다. 케이 파라디소에서 몇 번 연락이 왔다. 저학년 아이의 하교 도우미 제안이 왔을 때는 잠깐 마음이 흔들렸으나 결국 하지 않기로 했다.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았다. 설명해도 이해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기에.
학습지와 참고서를 발행하는 유명한 교육 출판 기업이 케이 파라디소를 인수했다는 소식을 일 년 뒤 뉴스에서 보았다. 유아동 보육 관련 스타트업 중 가장 유망하고 미래가 촉망되는 곳으로 판단되어 함께하게 되었다는 관계자의 코멘트도 실려 있었다. 한나는 오래간만에 케이 파라디소의 어플리케이션에 들어가 보았다. 인증 오류라는 메시지 창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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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는 오른쪽 엄지를 지그시 눌러 어플을 삭제했다. 초록색 ‘K’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존재하지 않아도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단 하나의 아이에 대해 한나는 끝내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정이현
작가소개 / 정이현

200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상냥한 폭력의 시대』,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 『사랑의 기초-연인들』, 『안녕, 내 모든 것』, 중편소설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 짧은소설 『말하자면 좋은 사람』 등을 출간했다. 이효석문학상·현대문학상·오늘의젊은예술가상 등을 수상했다.


《문장웹진 2021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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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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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서울

    안녕하세요, 좋은 소설 정말 잘 읽었습니다. 다만, 본문에 이름 오류가 있는 것 같아서 수정 요청 드리려구요. 한나(하유)는 오후 내내 친구 태리와 문자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천체현미경으로 우주를 보는 과학자처럼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하유는 무척 진지하고 행복해 보였다. 한나(하유)가 하유(한나)에게 하는 이야기의 대부분도 태리에 관한 것이었다. 서로 이름이 바뀌어서 적힌 것 같은데 괄호처럼 수정해야 맞는 것 같습니다.

    • 2021-09-09 10:04:10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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