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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천 시 다이빙

  • 작성일 2020-05-01
  • 조회수 3,396

[단편소설]



우천 시 다이빙



박서영




여럿으로 갈라지는 길목 위에 서서 나는 오랫동안 한 곳을 응시했다. 동그란 구멍이 뚫린 철판 기계 위로 밀가루 반죽이 질퍽하게 뭉쳐 있었다. 말하자면 복병을 만난 셈이었는데, 타코야끼 트럭은 카드를 취급하지 않았고 나는 카드밖에 없었다. 사람이 살면서 몸소 깨닫는 거라곤 휴지를 늘 갖고 다녀야 한다든지 현금을 미리 빼두어야 한다는 식의 준비성뿐이라는 걸 다년간의 실전을 통해 배웠으면서도, 나는 매번 주머니에 삼천 원이 없어서 이런 식으로 걸음을 멈추는 것이다. 타코야끼를 뒤집던 아저씨가 손가락으로 저편을 가리켰다. 주차된 몇 개의 자동차 뒤로 은행 간판이 보였는데 거리가 꽤 멀었다. 나는 아저씨한테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나서 자리를 떠났다. 도로를 건너 몇 개의 블록을 지나 창구 문을 열었다. 현금인출기에 카드를 넣었고 어쩌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되어 타코야끼 트럭으로 돌아가지 않게 되었다.
만 원짜리를 찾다가 예전 남자친구를 만날 수 있는 확률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모든 것을 이분법으로 나누기 좋아하는 인간의 오래된 습관으로 미루어 볼 때 이것은 부정적인 항목에 분류되는 일이며 불운이라는 것이 대개 그러하듯 수학적으로도 낮은 확률에 속한다. 나는 현금 투입구에 손을 넣은 채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백 가지 대처 방식들을 빠르게 정리했다. 한때 내 볼을 꼬집었으며 머리를 정리해 주었던 ― 그리고 내 가장 깊은 곳으로까지 들어왔던 그 손이 지금 내게 만 원을 건네고 있었다.
"혹시 너…… 호야?"
멍청하게도 대처는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응. 나 호야."
"어쩌다 그곳에 갇히게 된 거야?"
"갇힌 게 아냐. 취직한 거야."
"왜?"
"나 수학 전공했잖아."
"아, 하긴."
만 원을 건네받자 현금 투입구의 문이 바로 닫혔다. 씹던 껌을 뱉어내듯 카드가 가볍게 튀어나왔다. 나는 이 상황이 믿어지지가 않아서 멍하게 앞만 보고 있었다. 다시 카드를 넣었다. 화면 위로 서비스를 안내하는 글자가 떴다. 입금을 누르자 현금 투입구가 쩍 하고 열렸다.
"끝난 거 아니었어?"
"만 원 도로 넣으려구."
그러나 나는 만 원을 넣지 않고 한참 동안 호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얘기하면 현금 투입구에서 튀어나온 호의 손을.


시간과 여운은 정반대의 성질을 갖고 있어서, 나는 때때로 달력을 볼 때마다 깜짝 놀라곤 한다. 내 인생의 동력은 여전히 그날의 여운에서 나오는데 시간은 벌써 그날에서 이만큼이나 흘렀다고, 빨리 잊어버리라고 재촉하는 식이다. 갈수록 먼 예전의 일이 되어 가는 일생의 하이라이트를 매번 돌려 본다. 어차피 언제 죽어도 그만인데 그냥 그날에 죽을 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앞으로의 내 인생에서, 어쩌면 광명이라고 불러도 마땅한 그런 일이 찾아올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 테니까. 그러나 신용카드를 긁는다거나 먼 곳으로 여행을 가는 의례적인 행복을 위하여 나는 계속 살아갈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진짜로 "이 날을 위해 시를 썼거든요. 더 이상의 목표는 못 찾겠어요. 깨꼬닥!" 하고 눈 감으면, 고조할아버지의 증조할머니가 나타나서 멱살을 잡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놈 새끼. 맨날 술만 처먹고 시름시름 앓기에 기껏 등단시켜 줬더니 죽어버려? 쓰레기만도 못한 놈 같으니라구!"
아무튼 등단의 여운이 오래갔으므로 나는 한 계절을 내내 이불 속에서 보냈다. 등단 연락을 처음 받았던 그날의 놀라움에서 별로 벗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그 기분을 계속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먹고살 수가 있었다. 엄마가 부엌에서 채를 썰다 말고 속이 새까맣게 탄다고 주저앉고 나서야 나는 이불에서 빠져나왔다. 작은 광고대행사에 취업했다. 여러 기업에서 신제품 출시나 이벤트 개최를 앞두고 홍보를 요청해 오면 보도 자료를 써서 신문사에 돌리는 일을 했다. 하루에 열 개 정도의 글을 썼는데 점차 일이 익숙해지면서 마음도 가라앉았다.
정해진 순번대로 딱딱 떨어지는 일과였다. 매일 오전 일곱 시에 일어나 한 시간 동안 씻고 화장을 했다. 6호선을 타고 약수에서 내려 시내버스를 타면 회사였다. 들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빵집에 들러 아침으로 먹을 토스트를 샀다. 오후 여섯 시에 일을 끝낸 뒤 동료 직원들과 함께 대패삼겹살집에 갔다. 2차로는 노래방에 가서 적당히 노래를 불렀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3차로 호프집에 가서 맥주잔을 기울였다. 잔뜩 취한 채로 나와서는 걱정하는 사람들의 손길을 관례처럼 뿌리치고 아슬아슬하게 다리 위를 지났다. 그러고는 저 아득히 밑으로 흘러가는 강을 향해 큰 소리로 화풀이를 했다. 다음날 괜찮으냐고 묻는 회사 사람들에게 머쓱하게 웃어 보이며 자리에 앉으면, 아, 내가 진짜 사회인이 되었구나, 그런 각성이 몰려왔다. 주말에는 헬스장에 가서 두 시간 동안 러닝머신을 뛰었다. 저녁이 되면 친구들을 만나 적당한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바쁘지 않으면 영화를 봤고 카페에 가서 빙수도 나눠 먹었다. 쇼핑을 할 때도 있었지만 마음에 드는 옷이 없어 대부분 빈손으로 돌아왔다. 가끔은 펍에 가서 맥주를 마시며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오는 남자 아이돌 지망생들의 얼굴을 품평했다. 그 모든 것을 마치고 침대에 누우면 오 초 만에 잠이 들었다. 종종 방에 홀로 남았을 때 나는 등단일과 훌쩍 멀어진 달력 날짜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제길, 시 쓸 시간이 도저히 나질 않잖아? 이놈의 회사를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보통 세이브라고 하잖아. 언제 청탁이 들어올지 모르니까 미리미리 써놓는 거."
맞은편에 앉은 유민이 말했다. 창밖으로는 빗방울이 톡톡 소리를 내며 튀었다. 나는 빨대로 크림 프라푸치노를 쪽 빨았다.
"항상 열 편씩 미리 써놓는 게 새해 목표였는데 잘 안 돼. 카페에 한나절 앉아서 고작 두 줄 쓰고 올 때도 많고."
같은 문학 동아리였던 유민은 나보다 일 년 일찍 등단했다. 스물세 살에서 스물네 살로 올라가던 해의 겨울이었다. 인터넷 신문에 박힌 유민의 활짝 웃는 얼굴을 보며 나는 방학 내내 울었던 것 같다. 합평 시간에 언제나 제일 많이 지적당하면서도 매번 새 작품을 써서 교수님께 들고 가던 그 모습은 등단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었다.
"영주 너는 보통 몇 편 정도 미리 써놔?"
솔직히, 미련하다고 생각했었다.
"모르겠는데. 아직 청탁 들어온 적이 없어서."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거잖아."
"나 요즘 바쁜 거 알잖아. 피곤해. 요 근래 다섯 시간 이상 자본 기억이 없다니까?"
나는 입을 크게 벌려서 하품하는 시늉을 했다. 노트북 너머로 유민이 피식 웃었다. 카페 창밖으로는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각자 갈 길을 바쁘게 가고 있었다. 휘핑크림은 달았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는 비 오는 날 일부러 우산 안 쓰고 그랬었는데 말야. 빗속을 막 달리고."
유민은 그렇게 말하고 시럽 한 방울 섞지 않은 아메리카노를 홀짝 들이켰다.


"근데 꼭 시를 써야 하나?"
그대로 남겠다는 유민을 카페에 두고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자문했다. 지금 내 생활은 아무도 찾지 않는 풀숲의 연못처럼 잔잔했다. 큰 환희도 없었지만 그러나 무탈했다. 문학을 청춘의 꿈으로 남겨 두고 지금처럼 매일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꿈이란 건, 바뀔 수도 있는 거였다. 그건 정말 그럴 수 있는 거였다. 감히 누구도 내게 손가락질할 자격은 없었다. 문학으로 구원받아야만 했던 시간이 이제는 지나간 거라면, 그렇다면…… 어둠침침한 빗속 사이로 불을 환하게 켠 타코야끼 트럭이 보였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지갑을 열어 보았다. 현금이 없었다. 근처에 있는 은행에 들어갔다. 우산을 접고 빗물에 젖은 어깨를 손바닥으로 털었다. 현금인출기에 카드를 꽂았다. 예금인출을 눌렀다. 그러자 호의 손이 쑥 튀어나왔다.
"가져가."
호의 손이 만 원을 건넸다. 나는 그새 타코야끼를 잊어버리고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거기 있으면 안 답답해?"
호는 대답이 없었다.
"나라면 답답할 것 같은데."
"답답한데 할 만해."
"거짓말."
나는 현금인출기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그러자 화면의 어느 부분이 저절로 터치가 돼서 결제가 종료됐다. 무성의하게 튀어나온 카드를 다시 집어넣었다. 터치가 인식되지 않는 부분에 엉덩이를 걸쳐 앉았다. 예금인출을 누르자 현금 투입기가 열렸다. 만 원을 쥔 호의 손이 다시 튀어나왔다.
"나 퇴근 얼마 안 남았어. 가져가 주라."
"퇴근은 어떻게 하는데?"
"지하에 벙커가 있어. 거길 통해서 나가."
"나도 벙커 구경 가보고 싶은데."
"보안이 엄격해서 아무나 못 들어와."
"나 시인 됐어."
"그래?"
"그래."
나는 만 원을 건네받았다. 현금 투입기 문이 잽싸게 닫혔다. 자리에서 내려와 엉덩이를 털었다. 밖으로 나갔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타코야끼 트럭은 그새 사라지고 없었다.


누구나 텔레비전의 케이블 채널 사이에서 방황할 때가 있다. 어두운 방구석에 애벌레처럼 누운 채로 리모컨을 누르다 보면 걸어서 세계 속으로라든지 동물의 왕국,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코스모스 재방송 따위에 멈추게 된다. 드넓은 아프리카, 우주, 수명을 백 살까지 꽉 채워 산다 하더라도 평생 가볼 일이 없을 것 같은 그 미지의 세계…… 블랙홀 중 하나라는 백조자리X1을 보며 나는 깊은 몽상에 빠졌다. 하찮은 먼지 입자처럼 그곳에 빨려 들어가 아주 사라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즈음 나는 무언가를 삼키는 행위가 그토록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스물네 살이었다. 남자와 제대로 만난 적도 없었고 뭔가를 집요하게 수집하는 취미도 없었다. 조용한 일상에 우울은 예고 없이 밀려왔다. 유민의 갑작스러운 등단이 이유였다. 친한 친구의 성공은 순수하게 기쁜 것도, 앞으로 나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자극제도 아니었다. 내 발목을 붙잡고 깊은 늪으로 빠뜨려버리는 귀신에 불과했다. 잘 봐. 이게 너의 한계야. 너는 문학적 재능이 전혀 없어. 귀신의 말이 들릴 때마다 나는 산책을 했다. 동네 사거리에 여러 병원이 입주해 있는 빌딩이 있었는데 그곳 사층의 정신과 앞에서 서성이다가 소득 없이 돌아서곤 했다. 대로변에 서서 지나가는 차들을 노려보았다. 뭔가가 배 깊은 곳에서 울컥울컥 차올라 목젖을 건드렸다. 쿵쿵. 쿵. 망치 같은 것이 가슴을 세게 후려쳤다.
"성당에 가보는 게 어때?"
유민이 말했다. 등단하고 세 달이 조금 지난 유민은 내 앞에서만 티를 안 냈을 뿐이지 가는 곳마다 마음껏 자랑하고 축하받았다. 그 소란한 잔치 속에서 나는 구석으로 밀려 있었다. 그동안 내가 읽고 썼던 많은 글은 다 뭐였을까. 얘는 내가 자기 때문에 이 지경이 된 줄은 꿈에도 모르는 거다.
"지나가다가 봤거든? 상처받은 예비 교우들을 영원한 행복으로 초대합니다, 라고 적혀 있는 현수막을 말야. 그걸 보자마자 딱 네 생각이 났었어."
"거기가 영원한 행복이 아니면 어쩔 건데?"
"나는 장담 못 해. 근데 그 성당은 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자신감에 차 있는걸. 타인에 대해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곳은 정말 흔치 않아."
무작정 성당에 갔다. 초입에는 정말로 영원한 행복이라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나는 내 모습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애써 걸음걸이를 똑바로 했다. 이곳에서 행복이라든지 평화 같은 것을 모조리 가져올 작정이었다. 걱정이 없는 상태라는 것을 다시 내 것으로 하고 싶었다. 건물에 들어갔다. 위층에서 악기 연주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성가를 불렀다. 음절 사이사이로 웃음소리가 왁자지껄하게 섞여 들렸다. 나는 계단을 올라 미사당 문을 열었다. 내 또래로 보이는 사람들이 악기를 둘러싸고 있었다.
단 한 번의 목격만으로도 모든 것이 파악되는 순간이 있다. 천리안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미사당에 발을 들이던 그 순간 그들의 혈관과 세포 조직과 장기가 모조리 내게 투시되었다. 그것은 모두 제병과 포도주로 빚어져 있었다. 억 겹의 시간 동안 쌓인 퇴적물이 굳어서 형성된 단단한 지층처럼, 그들은 오랜 세대에 걸쳐 선대들이 쌓아 놓은 신앙을 딛고 선 하나의 겨레였던 것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두꺼운 친의가 그들 앞에 자갈처럼 깔려 있었다. 그 위를 걸을수록 발이 아파서 나는 이따금 멈춰 섰다. 그 순간만큼은 나를 꽁꽁 묶어 두고 놓아 주질 않던 우울도 고통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새로 오신 분이세요?"
물론 그들은 나를 환영했다. 자갈이란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깔린 것이었으니까.
"네. 새로 왔어요."
"아 네, 예비신자?"
"네."
무리에서 키 큰 남자 하나가 나와서 내게 인사했다. 그는 내 앞에 서서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그를 따라 곡선으로 휜 계단을 내려갔다. 들어간 곳은 사무실이었다. 사무처장이라는 남자가 내게 종이를 건넸다. 나는 기본적인 인적 사항을 하나씩 써내려갔다. 사무처장은 어디 학교를 다니며 어쩌다 이 성당에 찾아왔는지 연달아 물었다. 즉흥적으로 대답해 주기엔 사연이 너무 길었다. 어디서부터 답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는데 옆에 서 있던 그가 너무 꼬치꼬치 캐묻는 거 아니냐고 핀잔을 줬다. 사무처장이 넉살 좋게 웃었고 시곗바늘은 미사 시간에 가까워졌다. 우리는 나란히 사무실에서 나와 문을 닫았다.
"그쪽은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계단을 오르면서 내가 물었다. 머리를 자른 지 얼마 안 된 모양인지 그의 목덜미에는 바리깡이 지나간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호라고 해요. 청년회장이구요."
호. 나는 이름을 살살 발음해 보았다. 미사당에 들어가고 나서는 입을 꼭 다물어버렸다.


일주일이 지나 다시 성당을 찾았을 때였다. 수녀님은 오래전에 순교한 성인의 이름을 딴 건물로 나를 데려갔다. 그곳에는 청년회장 자격으로 호가 앉아 있었다. 수녀님은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반년간 예비자 교리라는 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반년씩이나요? 내가 되물었다. 호가 별거 아니라고 끼어들었다. 수녀님도 그렇다고 거들면서 교리 책을 건넸다. 이건 공짜라고 말하는데 무슨 선심 쓰듯이 말하기에 괜히 반항심이 들었다. 중간에 제가 교리 수업을 그만두겠다고 하면 어떡하구요? 이건 드려야 하나요? 수녀님은 본인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책은 그대로 가져가도 괜찮다고 했다. 이어 수업 방식을 설명한 뒤 오늘은 오리엔테이션이라며 이만 가도 된다고 했다. 나는 호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와 본당 안으로 들어갔다.
미사 시작까지 약 이십 분이 남아 있었다. 입구 바로 옆 고해실에는 고해 중임을 알리는 불이 붉게 켜져 있었다. 나란히 배열된 장의자 위로 사람들이 앉아서 묵주를 만지거나 오늘미사 책을 살폈다. 미사포를 쓴 여자가 교탁의 마이크를 확인했다. 그 옆에는 밴드 악기가 배치돼 있었다. 저녁 일곱 시 미사는 매일 밴드 음악으로 막을 열었다. 실은 이 시간의 미사가 청년 미사여서 그렇다는 걸, 오전 미사는 오르간으로 막을 연다는 걸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미사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사람들이 성가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년회가 키보드와 기타를 연주했다. 사람들이 노래를 불렀다. 나는 처음 듣는 노래였으므로 입을 움직일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가 능숙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누군가는 아예 눈을 감고 가사를 줄줄 읊었다. 이후로도 해설이 몇 쪽, 몇 쪽, 하고 페이지 수를 가르쳐주면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같은 가사와 같은 음절을 제창했다. 나는 그들이 다양한 종류의 성가를 꿰뚫고 있으므로 소외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감각으로 알 수 있는 거였다. 감각이라는 건…… 그런 거였다.
미사가 끝났다. 떠나는 사람들로 공간이 어수선해졌다. 청년회는 악기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복잡하게 꼬인 전깃줄을 풀거나 보면대를 창고에 집어넣었다. 나는 그 사람들이 내게 일을 맡기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그러나 공간이 말끔하게 정리되도록 내게 말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떠날 채비까지 마치고 나서야 누군가 내게 인사했다.
"저번에 새로 오신 분이죠? 저희 지금 뒤풀이 갈 건데 시간 괜찮으세요?"
괜찮다고 대답하기가 무섭게 그는 나를 무리 속으로 이끌었다. 굽이진 골목 몇 개를 지나 외관이 조금 촌스러운 호프집에 도착했다. 매주 주일이면 미사를 끝내고 이곳에 들르는 게 관행인 모양인지 주인이 아는 척을 했다. 청년회 총무라는 남자가 맥주와 프라이드치킨을 주문했다. 주목, 외치면서 손뼉을 쳤다. 이목이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그는 나를 가리키면서 새로 온 예비신자라고 했다. 사람들이 나란히 손뼉을 쳤다.
"예비신자님 소개 좀 해주세요."
나는 눈동자를 한 곳에 두지 못하고 이 얼굴 저 얼굴을 다 훑어보면서 말했다.
"김영주라고 합니다. A대 국문과이구요. 잘 부탁드려요."
사방에서 손뼉을 쳤다. 이어 순서대로 자기소개를 했다. 이름 뒤에 도미니꼬라든지 카타리나 같은 세례명이 따라왔다. 어느 누구는 본인이 하는 가게를 언급하면서 놀러 오면 서비스를 많이 주겠다고 말했다. 별로 웃기지도 않는 말에서 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뻘쭘하게 손뼉만 쳤다. 한 바퀴 돌아 호의 차례가 되었다.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던 호는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내 이름 알죠? 나랑은 몇 번 봤으니까."
아,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서 제대로 소개하라며 야유했다. 호는 맥주를 들이켰다. 급하게 삼킨 모양인지 고개를 돌려 기침을 했다.
"세례명은 가브리엘이구요. 앞으로 자주 볼 거예요. 잘 부탁해요."
온통 낯선 인물들 사이에서 그나마 눈에 익은 얼굴이 주는 유대란. 다시 테이블은 어수선해졌다. 나는 두 손으로 맥주를 들었다. 천천히 들이켜는 동안 유리잔 너머의 호와 눈이 마주쳤다. 호가 웃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너무나 안심이 되어서 그만 울고 싶었다.


유리 벽 너머로 자동차와 사람들이 바쁘게 교차하고 있었다. 오늘은 왜 온 거야? 호가, 정확히 말하면 현금 투입구 안에 있는 호가 말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턱을 긁으면서 요새 고민이 많다고 중얼거렸다. 호는 대답이 없었다. 예전부터 그랬다. 모르던 것도 아니니 서운할 이유도 없다.
"요즘에 시가 잘 안 써져. 도대체 무슨 내용으로 시를 써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지."
"나는 그런 거 잘 몰라. 알잖아."
"알아. 그냥 소재 같은 거 아무거나 말해 봐. 오늘은 그거 얻으려구 온 거야."
말을 마치자마자 카드가 자동으로 빠져나왔다. 카드를 다시 꽂았다. 그러자 현금 투입구가 열리고 호의 손이 튀어나왔다. 모르겠어. 호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다섯 손가락을 펴보였다. 오래전 양손을 펼치고 어깨를 으쓱하던 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행동이 바보 같다고 자주 생각했었고 그렇게 말도 했었다. 정작 호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지만.
"나와 헤어진 동안 있었던 특별한 사건 같은 것 좀 얘기해 달란 말야."
"참 나. 그럴 거면 나한테 돈을 줘."
"그건 싫은데."
나는 현금인출기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칸막이에 발을 붙이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나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처음 만났을 때?"
"응."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한 나에게 호는 무슨 거대한 산 같았다. 거대한 산이라니. 등단을 했는데 떠오르는 비유가 고작 이 정도다. 아무튼 호는 그때 이미 몇 번의 연애를 거친 뒤였다. 그중 한 번은 지독한 열병처럼 앓았다고 했다. 나는 섹스를 하면서 호가 열병처럼 사랑했다는 그 여자의 이름을 실수로 부를까 봐 떨곤 했다. 먼 훗날 그녀와 운명처럼 재회해서는 당신을 잊기 위해 가치 없는 여자들과 무의미한 연애를 반복했노라고 이야기하는 악몽도 꾸었다. 불신에 사로잡힌 연애는 어떤 노동 같았고 산재보험처럼 이별 후의 대처를 머릿속에 정리해 두어야 했다. 이별 노래 따위를 미리미리 선곡하는 식으로 말이다. 고약한 시간이었다.
"혼자서 성당을 찾아온 게 당차다고 생각했었지."
종종 호를 버렸다는 그 여자를 생각했다. 내가 이만큼이나 사랑하는 호를 그녀는 무슨 이유로 사랑하지 않는다며 버린 것일까. 그녀는 호의 인생에 기념비로 남았고 나는 그것을 오랫동안 부러워했다. 호의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사랑으로서 그녀와는 다른 의미로 기념비가 되고 싶었다. 그때는 그랬다.
"귀엽기도 했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어린 여자애는 이제 여러 번 사포질돼서 무뎌졌다. 나는 귀엽지 않았다. 그저 슬프지 않기 위하여 뭐라도 했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않되 한편으로는 행복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을 찾아야만 했다. 그중 하나가 종교였다. 우울하지 않기 위하여 약을 먹는 편보다는 성당에 다니는 편이 정상으로 보일 테니까. 그러나 그 거대한 공동체에 자연스럽게 합류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다짐과 용기가 필요했다. 정해진 규범을 지키겠다는 선서와 사제를 믿고 나의 모든 죄를 고백하겠다는 각오. 신에게 의지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는 것이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
"그래."


개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교리실은 시멘트 냄새로 꽉 차 있었다. 대여섯 명 되는 예비신자들은 둥근 테이블을 감싼 채 앉아 있었고 그 가운데에서 수녀님이 꼿꼿한 자세로 교리 책을 읽어 나갔다. 테이블 밑에 가지런히 모으고 있던 내 발 위로 이질적인 촉감이 느껴졌다. 나는 책에 꽂혀 있던 시선을 위로 들어올렸다. 맞은편의 호와 눈이 마주쳤다. 호가 입 동굴을 보이며 웃었다. 나도 똑같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가 다시 책을 봤다. 수녀님이 읽고 있는 구절을 찾아 눈알을 굴렸다. 그러는 동안 테이블 밑에서 호는 계속 내 발을 건드렸다. 그 자극은 발목을 지나 천천히 종아리로 올라왔다. 맨다리에 치마를 입고 있었기 때문인지 감각은 지나치게 선명했고, 호의 발이 무릎에서 발목까지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순간 내 입에선 헉 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수녀님의 강독이 멈추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나는 들고 있던 책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뭐예요? 수녀님이 물었고 나는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로 대답했다. 갑자기 딸꾹질이 올라와서요. 수녀님이 물이라도 갖다 줄까요? 묻기에 그 정도는 아니라고 변명하면서 책을 밑으로 내렸다. 얼굴의 모든 세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수녀님이 다시 교리 책을 읽었고 예비신자들은 원래대로 강독에 집중했다. 설핏 치켜뜬 시야에 웃음을 참는 듯 입에 힘이 잔뜩 들어간 호가 보였다. 나는 손으로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삐졌어?"
호는 나를 성당 뒤편의 쓰레기장으로 끌고 왔다. 등 뒤로는 미사를 준비하며 떠들고 움직이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분리수거함을 발로 툭툭 쳤다. 대답해 봐. 입을 다문 내 앞으로 호가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깜짝이야. 내가 고개를 내빼자 호가 내 양볼을 붙잡고 코를 부딪쳐 왔다. 나는 호의 손을 밑으로 내리면서 딴 곳을 쳐다보았다.
"그냥 조금 놀랐을 뿐이야."
"화난 건 아니지?"
"아니야."
"그러면 좀 웃어 주라."
호가 내 머리통을 감싸 왔다. 나는 얼굴을 호의 목덜미에 묻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호가 나를 감싸던 팔을 거두고 고개를 꺾었다. 입술을 짧게 맞추고 떨어졌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음이 흘렀다. 그때 근방에서 양동이 같은 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호의 뒤편에서 청년회의 누군가가 수도꼭지를 돌려 양동이에 물을 받고 있었다. 그 옆으로 대걸레를 든 사람이 나타났고 호는 내게서 떨어졌다. 갑자기 옆에 있던 청소도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형! 거기 계셨네요? 저 멀리서 한 남자가 해맑게 웃으며 소리쳐 왔다. 응. 뭐 버릴 게 있어서 왔다가. 호는 손을 탈탈 털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어. 다른 분도 계셨네요. 남자가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우연히 만났어. 호가 그렇게 대꾸하면서 팔을 걷어붙이고 양동이를 함께 들었다.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양동이의 물이 넘칠 듯이 출렁거렸다. 셋은 자기들만 아는 이야기로 웃으면서 건물로 들어갔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어디 갈 곳도 마땅히 없었다. 미사 시작 직전까지 쓰레기장에서 뒷짐을 지고 서성거렸다.


이제는 빗소리를 들으면 철판 위에서 탁탁, 튀어 오르는 새우가 그려질 지경이다. 등단을 했는데 떠오르는 연상이 고작 이 정도다. 나는 모니터의 브라우저 창들을 보며 기지개를 켰다. 창밖으로는 비가 내렸다. 오늘은 금요일이었고 다들 빨리 퇴근해서 밤이 늦도록 사무실에는 나 혼자였다. 목을 옆으로 꺾자 오래된 기계처럼 우지끈 소리가 났다. 신발장 옆의 우산꽂이는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면서 유튜브를 켰다. 추천 목록에 뜨는 동영상 몇 개를 보았다. 빗줄기는 내내 그대로였다.
결국 택시를 불렀다. 기사가 요새 날씨 너무 변덕이라면서 말을 걸어왔다. 그러게요. 내가 대답했다. 와이퍼가 부채꼴 모양으로 왔다 갔다 했다. 앞 유리가 흐려졌다가 선명해지길 반복했다. 기사가 라디오를 틀었다. 정각을 알리는 음악이 들렸다. 아나운서가 일기예보를 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창문에 동그라미 같은 것을 그렸다. 무릎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엄마에게서 언제 오냐는 문자가 와 있었다. 택시 탔으니까 일찍 도착할 것 같아. 그렇게 답장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 창문의 동그라미를 지웠다. 손등이 물로 흥건해졌다. 창밖으로 은행이 보였다. 셔터를 내린 창구 옆에 불 켜진 현금인출기 건물이 있었다. 아저씨, 저기 은행 앞에 세워 주세요. 내 말에 택시가 유턴했다.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카드를 넣고 안내 화면을 누르자 현금 투입구가 열렸다. 호의 손이 튀어나왔다. 오늘은 또 뭔데? 호가 말했다. 손가락은 어딘지 축 늘어져 있었는데 나는 그것만으로도 호의 표정을 그릴 수가 있었다. 몇 년 전 굳이 성당에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간 데이트에서 피곤하다고 말하던 얼굴처럼. 먼 훗날 호와의 연애를 재연 드라마로 만들게 된다면 대부분의 장면은 모텔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섹스를 하고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은 뒤 텔레비전을 보다가 또 섹스를 한다. 여러 번의 정사를 끝내고 호가 땀에 젖은 얼굴로 말한다. 너는 다른 여자애들이랑 달라서 좋아. 성격도 좋고, 나랑 코드도 잘 맞고, 생리한다고 빼지도 않고……. 모처럼 밖에 나가면 호는 피곤하단 말만 반복하다가 어느 카페로 들어가자고 한다. 커피 두 잔을 시켜 놓은 채 우리는 앉아 있다. 호는 계속 하품을 하고 나는 그 앞에서 할 말이 없어 고개를 숙이고만 있다. 연애가 다 이런가? 내 고민이 비눗방울처럼 부풀 때쯤 호가 내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고민은 허무하게 팡, 터져버린다. 그제야 내겐 합리화할 힘이 생긴다. 나는 특별해. 그냥 여자애들이랑은 달라. 호가 막 사귀는 게 아냐. 그러나 그 모든 건 지금에 와 완전히 뒤집힌다. 세상에 추억이 되는 상처 같은 건 없었다.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


옷 사러 왔어. 호에게서 문자가 왔다. 언젠가 나와 간 옷가게에서 호는 지루한 얼굴이었으므로 나는 문자를 보고 의아했다. 옷은 왜? 답장하고 나서 데이터를 껐다. 교수님이 칠판에 시험 범위를 적었고 나는 공책에 받아 적었다. 수업이 다 끝나고 강의실은 어수선해졌다. 밖으로 나와 학생회관으로 가면서 데이터를 켰다. 답장은 와 있지 않았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교양 수업까지 마치도록 핸드폰은 내내 그 상태였다. 밤이 돼서야 답장이 왔는데 내일 약속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무슨 약속이냐고 나는 물었고 답장은 또 없었다. 며칠 전에도 답장이 없기에 전화를 연달아 했다가 지친다는 소리를 들었던 터라 전화조차 걸 수 없었다. 세상에는, 정말이지 이런 연애도 있는 거였다. 그리고 직감이랄까, 내 머릿속에는 호가 낮에 산 새 옷을 입고 다른 여자와 만나 데이트를 하는 장면이 그려졌다. 나는 새벽 동이 트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답장은 정오에 받았다.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다 끝날 무렵에야 호가 전화를 받았다. 응. 단 한 음절인데도 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어제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되기에 걱정돼서 전화해 봤어. 내가 말했다. 호는 길게 하품을 했다. 일이 있었어. 호의 피곤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얘가 나한테 질렸다고 확신했다. 더 자라고 하자 호는 곧장 전화를 끊었다. 통화하는 동안 얼마나 씹은 건지 손톱이 빨갛게 질려 있었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주일이 가까워지자 수녀님은 나를 불렀다. 이번 주만 지나면 교리 수업도 끝난다면서 세례명 책을 펼쳐 보였다. 생각해 본 이름 있느냐고 물어 왔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며칠 전 통화를 기점으로 호와 연락이 드문드문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산다기보다는 버티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만나자고 아침에 문자를 보내면 밤에 답장이 와서 약속 한 번 잡지 못했다. 수녀님이 손뼉을 크게 쳤고 나는 그제야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생각해 본 이름 있느냐고요. 나는 아, 하고 입을 벌리고 있다가 가, 가브리엘이요, 했다. 가브리엘은 호의 세례명이었다.
"대천사요? 그건 남자들 쓰는 이름인데…… 가브리엘라 어때요? 가브리엘 여성형이에요."
남자 이름? 내가 되묻자 수녀님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우리 청년회장님 이름이 가브리엘이잖아요. 이야기는 오늘 먹은 점심 메뉴를 말하듯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넘어갔다. 가브리엘 형제님, 어려서부터 복사도 빼지 않고 하시고 참 좋으신 분이지요. 영주 씨가 가브리엘라로 정했다고 하면 좋아할 거예요. 평소에 잘 챙겨 주었잖아요. 저한테도 신경 많이 써달라고 당부했었는걸요. 그치요, 영주 씨?
"영주 씨, 울어요?"
나는 손등으로 눈가를 닦았다. 뭐라고 대답하고 싶은데 목구멍이 막혀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연애는 나의 하루를 좁은 지관통 안에 쑤셔 넣고 멋대로 흔들어대고 있었다. 세상이 어지럽게 움직여서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수녀님이 내게 휴지를 뽑아 건넸다. 죄송합니다. 겨우 한마디 한 뒤 휴지로 눈물을 닦았다. 수녀님은 무슨 일 있었느냐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양옆으로 젓기만 했다. 몇 장의 휴지를 더 쓰고 수녀님이 갖다 준 물을 삼키고 나서야 눈물이 그쳤다.
"수녀님."
"네."
"여기 영원한 행복이라면서요. 저 그래서 온 건데. 저도 세례 받으면 행복해질 수 있어요? 저, 행복하고 싶어요. 아픈 거 이젠 지쳤어요."
"그럼요. 주님 품에서 행복해질 수 있어요."
나는 가브리엘라로 하겠다고 못을 박았다. 가브리엘이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래도 호와 비슷한 세례명이 내게 안심을 주었다. 호가 나에게 정이 떨어졌다는 것이 기정사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결국에는 뒤편에 나만의 희망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나와 헤어지고 나서도 나를 떠올릴 수 있도록. 누군가 가브리엘의 여성형이 뭐더라? 물으면, 아는 척하기 좋아하는 호가 가브리엘라요, 대답하며 내 세례명을 발음하기를 바랐다.


그 이상한 연애가 가끔 추억의 얼굴을 하고 나를 웃음 짓게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가슴에 돌기처럼 자리 잡은 상처가 주파를 보내온다. 나 여기 있어, 잊어버리면 안 돼, 라고 말하는 식이다. 그러면 나는 너무 아파서 몸을 가누지 못한다. 세상에는 네트워크 장치가 너무 많고 그래서 나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호의 근황을 보고 들었다. 호를 생각할 때 살인마가 되었다. 호가 죽어버리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괴로웠고 괴로워서 살았다. 호보다 잘사는 것이 내 인생의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왜 내 앞에서는 매번 피곤하다고만 했었지? 세상에서 가장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이따금 테이블에 껌처럼 붙어서, 푸념을 반복하다가 내 손을 만지며 웃었잖아. 지치고 어려운데 겨우 만나 주는 사람을 열연하면서."
현금 투입구 속 호의 손은 미동이 없었다.
헤어진 직후에 내가 가진 장점을 종이에 나열했던 적이 있다. 좋은 학교에 다닌다, 집안 형편이 나쁘지 않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정확히 한 시간 뒤 호의 새 여자친구 사진을 보는 순간 물거품이 되었다. 그녀는 나보다 훨씬 예쁘고 어렸다. 그것은 내게 폭력이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저편의 누군가를 벼랑까지 몰아세웠다는 사실을 그녀는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다.
"왜 걔는 숨기지 않았어? 나랑 연애하는 건 창피하고 걔랑 연애하는 건 자랑스러웠어?"
호와 나의 관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밀이었다. 호는 성당에 아는 얼굴이 몇인데 소문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모두에게 잘해 주는 청년회장으로서 본분을 다했다. 어른들에게도 예의 바르고, 남부럽지 않은 대학에 다니고, 누가 데려갈지 궁금한 반듯한 청년. 나는 그곳에서 예비신자로서의 본분만 다하면 됐다. 어디를 가도 자연스럽게 합류할 수 없는 이방인. 말을 걸면 대답은 하지만 굳이 먼저 나서서 입을 열지는 않는 사람. 몇 세대를 거쳐 모태 신앙으로 결부된 청년회는 나를 향해 언젠가 중간에 잠적할 애라고 수군거릴 게 분명했다. 그건 감각으로 알 수 있는 거였다. 감각이라는 건…… 그런 거였다.
"왜 너는 나의 말에 단 한 번도 귀를 기울인 적이 없지? 나, 사실 너무 힘들었어. 너도 알잖아? 내가 성당에 갔던 이유는 지독한 우울 때문인걸. 근데 넌 나에게 그걸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지. 왜? 너는 매일 피곤하니까. 힘드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시를 쓰는지, 그런 건 궁금해 하지도 않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옷을 벗고 몸을 섞을 때만 내 얼굴을 보잖아. 언젠가 나에 대해 고백했을 때 네가 했던 대답. 몰라. 몰라. 뭘 모르는데? 넌 뭘 그렇게 아무것도 몰라?"
"영주야."
"내 이름 부르지 마! 그냥 죽어버려. 고통스럽게. 살려달라고 빌면서. 제발."
"미안해, 영주야."
나는 눈물로 채워진 수영장에 얼굴만 빼꼼 내밀고 둥둥 떠 있었다. 원래부터 없던 사람이었다. 나만 아는 연애를 했다.


세례 당일에는 비가 내렸다. 수녀님이 양팔에 미사포 여러 개를 끼고 왔다. 마음에 드는 거 하나를 골라 보라고 했다. 내가 쉽사리 고르지 못하자 수녀님은 장미 문양이 가장 촘촘하게 새겨진 것 하나를 골라 내 머리에 씌웠다. 세례를 축하해 주기 위해 모인 신자들이 잘 어울린다고 입을 모았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전날 호에게 차였고 한숨도 자지 못한 상태였다. 가브리엘 청년회장과 사귄 사이라고 떠들고 다닐 만큼 간땡이가 크지도 못했으므로 가질 수 있는 건 분노뿐이었다.
수녀님은 미사포 쓴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더니 등을 두들겨 줬다. 행복해질 거예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 잠시 뒤 신부님이 입당했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비롯한 예비신자들이 모두 신부님 앞에 섰다.
"하느님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신앙을 청합니다."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손을 가지런히 모은 사람들 너머로 스테인드글라스가 펼쳐져 있었다. 알록달록한 성모 마리아 문양 위로 빗물이 미끄러졌다. 꼭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앞에 대야가 놓였다. 그 안의 물이 미세하게 출렁거렸다. 신부님이 십자가를 물에 담갔다. 성수가 되었다. 옆에서 다른 예비신자들이 차례대로 이마에 성수를 묻히기 시작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앞으로 한 발자국 걸어갔다. 물 표면에 내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물결에 따라 눈이나 코가 찌그러졌다가 다시 펴지길 반복했다. 문득 좀 전에 수녀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행복해질 거예요. 이곳은 영원한 행복이었다. 세례를 받으면 나는 가브리엘라가 된다. 고개를 치켜들었다. 신부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모두 나를 응시했다. 언제 세수하나 재고 있었다.
"……행복해지지 않을래요."
나는 미사포를 벗어던졌다. 뒤돌아 복도를 가로질렀다. 문을 열자 순식간에 우천이 펼쳐졌다. 성당 마당을 가로질러 길가로 나아갔다. 머리카락이 빗물에 젖어 무거웠다. 눈을 크게 감았다 떴다. 물이 흘렀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알 수 없었다. 입을 크게 벌렸다. 혀 밑 가득 빗물이 찼다. 숨이 가빠졌다. 운동화가 빗물을 먹고 토해 내기를 반복했다. 팬티까지 축축해졌다. 계속 달렸다. 멈출 수가 없었다. 목적지는 없었다. 웃었다. 그리고 울었다.

스물다섯에 들어서던 해 나는 등단했다. 담당자는 당장 내일까지 당선 소감을 써서 보내 달라고 했다. 나는 하얀 모니터 위에 깜빡이는 커서를 쳐다보았다. 엄마는 부모부터 적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다. 엄마랑 아빠는 제일 마지막에 적을 거예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천천히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간헐적으로 눈꺼풀이 떨렸고 나는 눈을 감았다. 오랫동안 그러고 앉아 있었다.
「……너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너 때문에 울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야. 고마워. 나를 한때 그토록 죽고 싶게 만들어줘서. 내게 상처 줘서.」


모두 퇴근한 사무실에 혼자 남아 창문으로 옅게 부딪치는 빗방울을 쳐다보았다. 밖으로는 여전히 비가 오는 가운데 가습기를 내내 켜두고 있어 온몸이 무거웠다. 마지막으로 쓴 보도 자료를 송부한 뒤 옷을 챙겨 입었다. 미리 챙겨온 장대 우산을 펼치고 밖으로 나갔다. 집 근처에 다다라 편의점에 들렀다. 여러 개의 캔맥주와 육포를 샀다. 한 손으로는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봉지를 든 채 나왔다. 어깨가 무거웠다. 천천히 은행으로 향했다. 우산을 털고 현금 투입기 앞에 섰다. 화면을 터치하자 현금 투입구가 열렸다. 아주 까맣고 다부진 손이 튀어나왔다. 마디마다 털이 많았고 손톱 끝도 깨져 있었다. 호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누구세요?"
내가 묻자 약간 황당하다는 투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직원입니다."
"전에 근무하시던 분은 어디 가셨죠?"
"어떤 분 말씀하시는 거죠?"
"김호 씨요."
아아, 김호 씨. 손이 아래위로 흔들렸다.
"그분은 다른 지점으로 전근 가셨어요."
"전근이라니요? 갑자기 왜…… 어디로 갔죠?"
"그건 회사 기밀이라서요. 함부로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시간이 다 지나서 투입구가 닫혔다. 나는 다시 화면을 터치해 현금 투입구를 열었다. 그 새까맣고 다부진 손이 재차 드러났다.
"어느 지점으로 갔는지만 알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고객님."
다시 현금 투입구가 닫혔다. 나는 처음으로 돌아간 화면 앞에서 가만히 있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빗방울은 어느새 두꺼워져서 쏟아지듯이 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날씨 때문인가. 현금인출기는 계속해서 웅웅거렸다. 이곳과 바깥이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은행 문을 열었다. 귀마개를 뺀 것처럼 빗소리가 선명해졌다. 살짝 발을 내밀자 그 위로 빗방울이 뾰족하게 달려들었다. 거리의 네온사인이 비에 가려져 흐물거렸다. 물비린내가 둥둥 떠다녔다.
왜일까?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뛰고 있었다. 장대 우산은 없었고 캔맥주가 들어 있던 봉지도 사라진 채였다. 물을 먹은 옷 이 몸에 찝찝하게 달라붙었다. 얼굴 위로 미끄러지는 빗방울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네온사인만큼이나 흐물거리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모두 나를 향하고 있었다. 몇 년 전 성당에서 뛰쳐나왔던 그때처럼. 이끼가 가득 낀 습지, 그곳에서 자생하는 풀처럼. 그렇다고 내가 연꽃은 아니고…… 너무 슬펐고 그래서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습기를 먹은 빗방울이 따뜻하게 몸을 가득 채워 주고 있었다.


그날 나는 시를 썼다.


















박서영

작가소개 / 박서영

1996년 출생. 2017년 단편소설 「윈드밀」로 제16회 대산대학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문장웹진 202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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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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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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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손한빈

    오늘도 어김없이 마음 한 켠에 빈 공책이 펴져 있는 당신에게 위로와 응원을, 소중한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2022-03-14 21:57:42
    손한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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