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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요, 옛날 사람

  • 작성일 2020-04-01
  • 조회수 3,548

[청년예술가 / 단편소설]



사랑해요, 옛날 사람



한정현




나는 70년 전에 죽은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말을 하냐고요? 이해는 합니다. 저도 인간 세상에 속할 무렵에는 누가 어떻게 살았다더라 하는 이야기만 듣고 또 묻고 그랬던 것 같네요. 죽은 사람은 그만 잊어라, 산 사람은 그래도 살아야지. 네, 그 말은 또 언제 하시나 했네요. 하지만 이미 죽은 제 입장에서는 죽음이 곧 삶이기도 하니, 조금만 더 들어주세요. 그러면 지금부터 죽은 이야기 좀 해볼게요.
때는 한국 전쟁이 발발한 직후였어요. 아 저 '때'라는 건 제가 인간 세상에서 사라진 때를 말하는 거랍니다. 사실 정확히 언제 등장했는지는 잘 몰라요. 갓 태어난 저를 누군가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산파 노인 집 앞에 놓고 갔다고 해요. 버려졌다는 말은 좀 이상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그 집 앞으로 간 건 말 그대로 행운이었으니까요. 많은 생명을 귀하게 여겨 보아서일까요. 산파 할머니는 저를 참으로 아껴 주었어요. 산파 일로는 저를 키울 수가 없어서 나중엔 인근 기방에 옷을 지어다 주고 돈을 벌어오기도 했습니다. 그뿐 아니었어요. 저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 병원의 감염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인간 세상 참으로 특이한데요, 그때는 여자가 남자를 만지면 큰일이 난다고 여겼다지요. 기막힌 건 그런 이유 때문에 감염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주로 기녀나 산파와 같은 사람들이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죽어도 되는 사람들인가요? 어쨌거나 할머니는 그 돈으로 나를 학교까지 보냈습니다. 처음 할머니의 목표는 경성제국대학이었어요. 하지만 제가 경성제국대학에 들어가려면 남장을 해야만 할 것 같았지요, 남자들이 여성들과 함께 공부하는 걸 반기지 않는다고 하니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이화학당에 들어갔습니다. 비록 제국대학은 아니어도 그곳엔 좋은 선생들과 선배들이 있었으니까요. 졸업 후에는 간호원이 되었어요. 다 아시겠지만 제중원이라는 의료기관이 있었지요. 그다음엔요? 전장에 있었습니다. 여성들이 어떻게 전장에 있느냐고요? 아이고, 누군가 부상당하면 가장 필요한 존재가 누구겠습니까. 네, 저는 간호원 신분으로 전쟁터에 자원했어요. 이런, 그사이에 서두가 길어졌네요. 대체 제가 이 편지를 왜 쓴 건지, 당신에겐 그게 중요할 텐데요. 그런데 이유를 말하기 전에요, 혹시 당신은 한국 전쟁 당시에 마를린 먼로가 온 걸 아시나요? 오, 당신도 들어 보셨군요. 저는 마를린 먼로를 실제로 봤답니다. 저뿐 아니었어요. 많은 군인들이 마를린 먼로를 보러 그 허허벌판에 몰려들었습니다. 신기한 광경이었지요. 저도 그 틈에 끼어 마를린 먼로를 보았네요. 그이는 참 아름답더군요. 제가 보기엔 군인들도 그이에게 감탄한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이상한 농담을 해대든지요. 그날 공연을 끝까지 다 못 보고 부대로 돌아와 버린 건 못 견딜 만큼 이상한 농담들 때문이었어요, 돈에 미쳐 남의 나라 전쟁터까지 온 여자라는. 하지만 아직도 궁금해요. 그곳에 누군가의 의지가 있긴 했는지 말이에요. 한국 전쟁의 치열함마저도 남이나 북의 것이 전부는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전쟁 중 제가 길을 잃은 것도 마찬가지였어요. 대체 어디서였을까요. 저는 낙오자가 되었어요. '전쟁 중에 간호원 하나를 찾아나서는 건 무리일 거야' 처음에 저는 애써 좋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제가 버려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국가는 너를 지켜줄 것이라고 부대에서 수없이 들었던 말은 뭐였을까, 이런 생각을 하자 나를 키워 준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졌습니다. 전쟁이 오래되면서 연락이 끊겨버린 나의 할머니. 나는 그제야 내가 할머니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할머니는 나를 버린 적이 없었는데, 그사이 할머니는 제게 없는 사람이나 다름없었던 겁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어쩌면 부대에선 제가 이미 죽은 사람일 수 있겠다 싶었지요. 잊혀서 죽어버린 사람. 이런 생각 끝에 저는 지리산에 들어갔습니다. 이제야 저에 대해 좀 눈치 채신 것 같은데요, 네, 저 맞긴 한데요, 그래도 그 신문 접어 두세요. 솔직히 저는 처음엔 대단한 이념이 있어서 그곳에 들어간 것이 아니니까요. 사실 아무려면 어때, 그거였죠. 그러나 끝은 아무려면 어때가 아니었어요. 포탄이 떨어진 곳에 마를린 먼로의 노래가 울려 퍼졌듯이 누구도 살기 어려울 것 같은 그 지리산 속에서도 누군가에 대한 애정은 차오르더라고요. 그곳에서 저는 친구를 사귀었고, 그리고 또 그 친구를 잃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마지막은 죽음 혹은 항복이었으니까요. 그 친구는 일본인 여성이었어요. 믿기 어려우신가요? 그곳에 일본인이 있었다는 것이요. 하지만 그곳엔 일본인,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할 것 없이 모두가 있었답니다. 그 친구는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을 했습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편지와 신문을 읽어 주곤 했어요. 가끔은 자신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답니다. 그래요. 저는 찾고 있습니다, 그 친구를요. 이렇게 죽어서도요.
자, 제 이야기 잘 들으셨나요. 사람들은 흔히 사연 있는 사람들은 누구에게든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아니랍니다. 저도 다 이 순간을 기다린 거예요. 그러니 이야기 들은 값 조금만 부탁드려요. 이 편지를 보신 분들은 주위의 서른 명에게 이 편지를 복사해서 보내주세요. 널리 알려주세요. 그곳에서 그 친구가 불린 이름은 미노리예요. 아름다운 기록이라는 뜻이라더군요. 이 사람을 알고 있나요? 혹시 모르더라도 괜찮아요. 주위의 서른 명에게 복사해 주세요. 그러면 언젠가 미노리에게도 이 편지가 닿지 않을까요?


­- 당신의 행운으로부터, 2020. 3.1




"곧 봄이니까요."
루오는 늘 그렇게 말하면서 연하장을 만든다고 했다. 봄과 연하장이 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한다면, 그것은 나와 루오가 사는 이 집의 시간 규칙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 규칙에 대해 말하기 전에 루오에 대해 잠깐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는 나의 동거인으로 도쿄 인근의 후추시라는 곳에서 태어나 사십 년을 그곳에서 산 일본인이다. 십 년 전부터는 서울에 살고 있는 외국인이기도 하다.
이십 년 전 루오는 본인이 이십 년 후 한국에서 살 것이라곤 생각도 못 하던, 졸업이 조금 늦어진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다만 루오에게 특이점이 생겼다면 학부 마지막 학기에 미국인 교수로부터 들은 조선으로의 남창관광에 관한 수업이었다. 당시 루오는 한국보다 조선이 친밀한 일본인이었다. 루오는 할머니인 하나코에게 키워졌는데 하나코의 가장 친한 친구가 전라도 남원이 고향인 재일조선인 춘자였던 것이다. 춘자 씨는 일본어도 하나코에게 배웠다. 하나코를 만나기 전 춘자 씨는 일본어로 말만 할 수 있었다. 춘자 씨는 어느 날 하나코에게 죽기 전 누군가에게라도 꼭 편지를 한번 써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춘자 씨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 적이 없겠구나. 어떻게 친구를 가르치겠냐며 망설이던 하나코였지만 이야기를 듣고 보니 문득 그런 안타까움이 들었다. 하나코에게 배운 일본어로 춘자 씨가 한국어 편지를 쓰게 되었을 때였다. 춘자 씨가 그것을 얼마나 신나했던지 그만 모두가 있는 앞에서 큰 소리로 편지를 낭독하고야 말았었다. 춘자 씨는 몹시 부끄러워했지만 하나코는 물론이고 루오 또한 그런 춘자 씨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지기만 했다. 그런 춘자 씨가 있었기에 루오에게는 역시 한국보다는 조선이었다. 그러나 그 수업으로부터 루오는 처음으로 조선이 아닌 한국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어서, 그 수업은 루오에게 한 나라에 대한 인식뿐 아니라 자신에 대한 깨달음도 함께 가져다주었다. 조선에 대한 제국의 다양한 성적 대상화와 이를 이용한 통치 방식에 대해 수업하던 교수를 보며 루오는 자신이 그 교수에게 성적 긴장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 미국인 교수는 연구년으로 잠시 방문한 것이었기에 그 수업 이후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루오에게는 두 가지가 오롯이 남겨졌다. 한국과 정체성. 루오는 대학에 남아 한국과 일본의 50~60년대 퀴어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를 시작한 이후 십 년이 흐르는 동안, 루오는 몇 명의 남성과 연애와 동거를 하고 헤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하나코와 춘자 씨가 늙었고 아팠고 죽었다. 참 이상했다. 루오는 자신의 많은 시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없어지자 문득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거인들의 존재는 뭐였을까. 그런 생각까지 들자 모든 것이 한없이 낯설게 느껴졌다. 마침 공부를 본격 시작해 보자 싶었던 시기이기도 했었다. 루오는 그렇게 한국 대학의 연구소에 지원하게 되었다. 루오는 나와도 그곳에서 만났다. 루오가 동아시아 전쟁사 강의를 했던 대학원. 나에게는 석사 마지막 강의였고 타 전공이어서 청강한 수업이기도 했었다. 그런가 하면 루오도 그저 배정된 것이라서 실제 전공과는 조금 다른 분야에 대한 강의를 한 것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수업 이후에 내가 동아시아 전쟁사를 마스터한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학부 시절 그 수업이 루오의 인생에 다른 것을 남겼듯이 나에게 그 수업도 많은 것을 남겼다. 물론 그 수업은 전쟁사가 아닌 나의 현생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때 만난 루오가 오 년 후 나의 동거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산 지난 오 년 동안 루오는 늘 나에게 존댓말을 했다. 루오의 나이를 정확히는 모르지만 전입신고 할 때를 떠올려 보면 그는 이제 오십 즈음이 되었고 나는 아직 마흔이 되지 않았다. 나이로 무언가를 대결하자는 건 아니지만 처음엔 이런 구도가 좀 불편했다. 왜냐면 나는 언제부터인가 루오에게 존대를 하지 않고 있었고 앞으로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새해란 자고로 구정부터지."
그러니까 이렇게 존대를 하지 않은 대사는 분명 나의 것이었다. 날짜로 보자면 어느 해 12월 31일 즈음, 나도 모르게 저런 말을 중얼거렸다. 사실 해는 정확하지 않아도 저 대사만큼은 진심이기도 했다. 시간이 카스텔라도 아니고 자르면 단면이 생기고 단절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12월 31일이라고, 혹은 1월 1일이라고 갑작스레 새 기분이 나야 하는 것이 어쩐지 늘 부담스러웠다. 사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연말이란 모임 때문에 가장 어수선한 달이었다. 정산해야할 서류도 많고 그저 하루 쉬는 것뿐이니까 뭔가 새로운 한 해라는 느낌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내 직업 자체가 그랬다. 지난해부터는 전환 신청을 내어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되었지만 원래는 현장에서 하는 여행 가이드 일을 오래 했었다. 여행 가이드는 연말과 연초가 정말 바쁜 직업이었다.
"그러니까 케이국의 새해 일정은 두 번째 설날부터인 것이다, 분명히."
루오는 루오대로 나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는 그것이 일종의 선언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게다가 루오는 내 입에서 국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조금은 긴장했다. 그건 어쩌면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거의 반사적인 거였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장난스레 흘린 케이국이라는 단어조차도 흘려듣지 않는 것이 나뿐 아니라 한 나라의 문화를 존중하는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음, 그래요. 1월 1일보다는 역시."
가요대제전을 보던 내가 고개만 돌려 맥주 한 캔을 들고 서 있는 루오를 올려봤을 때였다. 루오는 무언가 큰 결심을 한 사람마냥 아랫입술을 조금 깨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눈으로는 가요대제전 중간에 방영되는 타종 행사를 보고 있었다. 뭐가? 나는 루오가 건넨 맥주를 받아들며 물었다. 루오는 매해 연말이 되면 가요대제전 방영 도중에 타종 행사를 내보내는 한국 방송들을 신기한 듯 말하곤 했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때도 역시 루오가 그것에 신경을 쏟나 싶었다.
"우리의 새해는 2월의 마지막 날로 하는 것이죠. 어쩌면 늦은 겨울 말입니다."
내가 그런 루오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사이 내 뒤에서는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텔레비전 속에선 그러거나 말거나 새해가 밝은 거였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폭죽이 터지든 종이 울리든 그렇게 우리의 새해는 조정되었고 루오의 말대로 계절은 늦겨울이 되었다. 늦은 겨울이 되어서야 시작하는 새해, 우리의 새해. 나와 루오가 사는 집의 시간은 그렇게 설정되었다.
비록 시간의 흐름은 바꾸었지만 각자의 습관이란 반드시 시간과 함께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날짜는 바뀌었을지언정 나와 루오, 각각의 신년 맞이는 변하지 않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특별할 것 없음, 이었고 루오로 말할 것 같으면 있었다. 바로 연하장.
루오는 아주 어릴 때부터 직접 연하장을 만들어 보냈다고 했다. 십이간지 중 그해 동물에 해당하는 모양을 고무판에 새긴 뒤 종이에 찍어 연하장을 만드는 것. 루오는 이것을 할머니인 하나코에게 배웠다고 했다. 나는 루오의 할머니를 뵌 적이 없었다. 내가 루오를 만나기 한참 전에 돌아가셨으니까. 그래서 처음엔 무슨 의미를 따로 부여했는지 깊게 생각하거나 묻지 않고 그것이 정말 좋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 그것은 정말 근사했다. 루오는 그것에 매우 정성을 들였다. 우선 그림을 그린 후 프린트로 그것을 확인했고 그 모양을 본떠서 판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고 난 후에 그걸 다시 밋밋한 엽서에 하나씩 도장으로 찍어내어 연하장을 만들고 편지를 써서 발송한다. 연하장의 내용에 상관없이 누구든 이런 정성을 받으면 새해든 연말이든, 늦겨울이든 새봄이든 기분이 좋을 것이며 마음에 차지 않는 사람이라도 상대를 좋게 보지 않을 수 없을 거였다. 물론 이 생각은 지난 시간 동안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루오의 연하장을 열기 전, 까지라는 전제를 달게 되었다. 왜냐하면 루오가 보내는 연하장 뒤편에 덧붙여진 내용은 바로 저것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자신이 70년 전에 죽은 사람이라는 소개로 시작되는 행운의 편지 말이다.
"그래서, 올해도 저 내용을 쓸 거야? 늦겨울, 아니 새해가 되었잖아."
사실 새해 그거 뭐가 중요하냐고 고개를 저었던 내 입장에서 할 말이 아니긴 했다. 게다가 같이 살기 시작한 이후에는 저 행운의 편지를 왜 붙이게 된 건지도 대충은 알게 되었다. 연하장 만드는 법을 하나코에게 배운 것이라면 저 행운의 편지는 춘자 씨에게서 가져온 것이었다. 물론 편지 내용 자체를 춘자 씨가 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건 확실하지 않았다. 춘자 씨가 그런 내용을 썼단 말이야? 차마 이런 걸 물어보진 못했으니까. 다만 춘자 씨가 낭독했던 편지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니 혹시나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고소당할지도 몰라, 자꾸 저런 걸 보내면."
"설마요."
"요즘은 바쁜 시대잖아. 기억하는 일에 누가 저렇게 골몰을 하겠어. 게다가 정성이 너무 가득 들어갔어."
"어, 정성이 들어간 게 가장 큰 문제일까요?"
"어쩐지 더 으스스하다고 느끼면 어떻게 해? 이렇게나 공을 들여 장난을 치다니! 아이들 장난은 아니로군, 하면서?"
"하지만 정말 누군가가 찾아올 수도 있잖아요."
글쎄, 춘자 씨가 나 행운의 편지 안 썼단 말이야, 나는 진지한 편지를 썼단 말이에요! 하며 찾아올 순 있겠지만. 마지막 말은 하지 않았다, 춘자 씨가 온다면 되레 루오가 굉장히 좋아할 것만 같아서, 나도 그건 좀 좋을 것 같아서. 더불어 춘자 씨가 온다면 하나코도 같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루오의 가족이 언제나 궁금했으니까. 어쨌거나 그들은 올 일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저 과장되게 고개를 좌우로 저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루오가 만들어 놓은 연하장을 차곡차곡 봉투에 넣고 우표까지 잘 붙여 두었다. 조금 번진 잉크 자국에 호호 입김을 불어 흔적까지 지워 가며 말이다.
"참. 오늘은 오후 출발인가요?"
우표를 붙여 밀봉해 놓은 연하장을 챙기며 루오가 물었고 나는 루오의 뒷모습에 얼굴이 있는 것도 아닌데 소리 내어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뭔가 온 것 같았다.
오후에 출발한다던 동생 호은이가 보낸 문자인가 핸드폰을 열어 보았는데 배송 출발을 알리는 문자였다. 잠시 시간을 확인했다. 이 시간도 우리 집만의 법칙을 적용하면 좋은데. 곧장 고개를 한 번 젓고는 수령 장소를 선택했다.
내가 구매한 것은 암막커튼이었다.
주택청약에 대출까지 얻어 서울 근교의 이 아파트에 입주한 것이 겨우 2년 전이었다. 주변으로는 논밭이고 마트에 가려면 배차 간격이 이십 분인 시내버스를 한참이나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창이 얇아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잠을 이루기 어려웠던 다세대 주택에 비하면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다만 겨울이 되면 조금만 보일러를 꺼도 성에가 끼었다. 그때마다 창을 닦다 보니 딛고 올라서는 의자까지 다이소에서 구매하게 된 지경이었다. 성에가 끼지 않으려면 보일러를 은은하게 켜두어야 했다. 그러면 가스비는 한 달 관리비를 넘어섰다. 결국 이리저리 성에 없애는 법을 검색해 보다가 방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팁을 얻었고 관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찾은 방법이 바로 암막커튼이었다. 배송 출발 문자일 뿐인데도 나는 암막커튼 이후의 삶을 생각하니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생각해 보면 요즘 물가에 몇 만 원을 쓰는 건 참 쉬웠다. 그러면서도 암막커튼 같은 살림살이는 유독 오래 고민하곤 했다. 물론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이런 살림살이는 사고 나면 속이 그저 시원할 뿐이었다. 어쩌면 살림이야말로 재능인지라 내겐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것이 없어서 그러는 건지도 모르겠다.
"오늘 드디어 빛을 가리는 커튼이 오는 건가요?"
나는 한자 사용자였던 루오가 한국어로 말할 때 무슨 말이든 한번 번역해서 나온 것이라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에 비해 나는 한자를 써서 말을 줄이고.
"응. 빛이 없어야 따뜻해지다니……."
"그런데 올해는 전쟁사 책은 주문하지 않나요?"
나는 루오처럼 새해가 되자마자 연하장을 쓴다거나 행운의 편지를 쓴다거나 하는 특별한 습관은 없었다. 다만 내게도 좋아하는 것은 있었다. 나는 전쟁사에 관련한 책들을 사 모으는 게 취미였다. 이런 책들은 대개 무겁기도 하고 오프라인 서점에는 재고가 없는 경우도 많아서 보통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하곤 했다. 반드시 새해에만 사야 하는 건 아니라서 올해는 기간을 건너뛰고 있었는데 루오는 내가 늘 하던 행동을 하지 않으니 의아했던 모양이다. 나는 나대로 루오가 내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게 조금 많이 좋아서 괜히 요즘엔 군인이 아닌 군대의 여성들이 쓴 일기라든가 구술록이라든가 이런 쪽에 관심이 더 간다는 둥 여러 말들을 길게 늘어놓았다. 그냥 아니, 라고 하면 될 텐데 좋아하는 사람의 경우엔 말이 점점 길어진다. 루오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테이블 위를 마저 치우며 적당한 간격으로 질문을 해왔다. 군인이 아닌 군대의 여성이요?
"아, 응. 간호원이나 통역원들이나. 생각보다 많았을 거야."
이번엔 아마 루오가 내 등 뒤에 대고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우리는 취향도 식성도 성격도 비슷한 것이 조금도 없었다. 적어도 표면에 드러나는 건 그랬다. 가령 루오는 고기를 좋아했고 나는 야채를 좋아했다. 루오는 인디밴드의 음악을 즐겨 들었는데 나는 주로 케이팝을 들었다. 루오는 여행을 좋아했지만 나는 여행이라면 질색이었다. 하지만 다른 것에 대해 오래 생각하진 않았다. 다른 식으로 루오와 나는 꽤나 합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합이 맞지 않으면 오히려 같이 살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매해 새해가 시작될 무렵 이렇게 하루 날을 잡아 할머니 집에 가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새해 첫날에 보는 건 복잡하니 우리끼리 편한 날을 그냥 잡아 보자, 해서 만든 날. 딱히 날짜가 떠오르지 않자 할머니는 갑자기 오늘 날짜를 이야기했다. 무슨 날인데? 내 말에 할머니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 내 딸 생일. 엄마가 예수나 석가모니도 아닌데, 심지어 새해 인사를 하는 날 모두 모여 이 날을 기념하다니. 어쨌거나 그날 이후 우리는 엄마 없는 엄마의 탄신일을 성대하게 축하하고 있었다. 그저 다 같이 맛있는 걸 먹고 새해 덕담을 나누고 돌아가는, 그러니까 다른 가족들이 명절에 모여 하는 걸 우리는 엄마 생일에 했다. 덕분에 아예 잊고 살았을 엄마에 대한 기억을 꺼내 놓을 수 있었으니 나쁘진 않았는데 아무래도 석연찮은 건 많았다. 엄마 생일 가을이면 어쩌려고? 하루는 호은이 할머니에게 그렇게 묻기도 했는데 할머니는 그럼 새해가 가을에 시작되고 좋지 뭐, 하고 말았었다. 재밌는 건 루오였는데 그야말로 본 적도 없는 내 엄마의 생일을 매해 국가공휴일처럼 열심히 축하하는 중이었다. 이쯤 되면 내가 루오와 왜 합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지 알 것이다.


연하장을 만드느라 시간이 부족해서 점심은 가는 길에 있는 이케아 매장에서 먹기로 했다. 세상에 별것 아닌 음식은 없지만 이케아에서 먹는 점심 플레이트의 경우로 보자면 반드시 먹고 싶다 하는 음식은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엔 기분을 내려고 먹는 음식들이 있다. 이케아에서 먹는 플레이트가 그런 류였다. 다른 베이커리에서 보기 힘든 박력분의 달콤한 시나몬 롤과 팔팔 끓여 혀가 데일 듯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있자면 묘하게도 다음에 또 와야지 그런 마음이 들곤 했다. 다행히 루오도 이케아에서 먹는 점심 플레이트를 싫어하지 않았다. 사실 이케아는 그저 창고형 매장일 뿐이었다. 한창 여행 가이드 일을 했을 때 독일에 있는 이케아 매장에 가본 적이 있었다. 아주 진심으로 그저, 창고형 가구 매장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가면 또 느낌이 달랐다. 무언가 이국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다. 독일에서도 느끼지 못한 이케아의 이국적임이라니, 언젠가 루오와 그런 이야기를 해보기도 했지만 왜 그런 느낌을 받는 건지 답을 찾진 못했다. 다만 루오와의 그 토론은 내 기억을 조금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이국적이라고 하니 함께 살기 직전 루오와 갔었던 도쿄 여행이 연상되었던 것이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지 않은 건 사실 여행 가이드로 일하기 전부터였다. 심지어 대학원 시절에는 공모전에 당선되어 받은 유럽 여행권을 친구에게 반 가격으로 넘기기도 했다. 그나마 돈을 받은 건 그렇게 하는 게 불법이니까 그냥 주겠다는 내 말에 친구가 펄쩍 뛰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때 내 결정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말이 14일의 자유여행이지, 그러려면 나 대신 아르바이트를 딱 14일만 해줄 수 있는 사람을 구해야 했다. 고작 14일 가는 여행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아르바이트 말고도 더 있었다. 집세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니 눈치 챘겠지만, 내가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건 다른 누구 때문도 아니고 그냥 나 때문이었다. 나는 그런 것을 감내하면서 일상과 바꿀 여행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다. 물론 가기 전에는 어느 정도 설렘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여행을 가면 늘 비슷했다. 낮에 몇몇 관광지를 보고 그림 메뉴가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아홉 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편의점 군것질거리를 사 가지고 들어와 호텔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일정. 나는 루오를 만나기 전, 그것이 출장이든 여행이든 거의 늘 혼자 다녔다. 밤에는 위험하니까 거의 돌아다니지 못했다. 결국 내게 여행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누군가와 며칠 동안 대화하지 못하는 그런 시간들 정도였던 것이다. 나는 특별한 것을 보지 않아도 오히려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게 더 좋았다. 가령 이케아 점심 플레이트가 왜 좋은가? 그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전개할 수 있는 것 말이다. 루오와 함께했던 도쿄를 내가 특별히 이국적이라는 단어와 연결 지어 생각하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만약 여행의 의미가 일상과 다른 '이국적 느낌'을 기대함, 이라는 것이 있다면 말이다. 내가 여행이라고 기억하는 여행은 저게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니까.
루오의 집은 도쿄 인근의 후추시라는 곳이었다. 처음 그 지명을 들었을 때, 나는 후추라는 단어가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여행 가이드라고 해도 일본 쪽 파트가 아니었던 나는 일본어를 하나도 몰랐다. 오히려 학부 전공이 영어였기 때문에 영어를 곧잘 한다면 모를까. 그런 나에게 후추는 그저 한국어로 된 요리 재료 후추에 불과했던 것이다. 정말 일본어를 배워야겠어, 나도 모르게 그런 중얼거림이 저절로 나왔다. 뭘 모르는 채로 원래 아는 것과 내심 비교하여 나도 모르게 웃어버리게 되는 것, 자꾸만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스스로도 별로라서 그런 결심을 이전보다 더 단단히 했다. 정작 루오는 그것이 익숙해 보였다.
"한국에 와서 고향이 어디요? 라는 질문을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루오는 그럴 때마다 후추시입니다, 하고 대답했고 그러면 또 어김없이 웃음을 조금 참거나 되묻는 사람들을 수두룩하게 보게 된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있자니 더욱 미안해졌다. 하지만 루오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나 자신만의 후추를 유지하는 것도 좋겠다는 거였다. 그래도 나는 일본어를 조금씩 배워 오고 있다. 몇 년째 제자리걸음인지라 말하지 못할 뿐이지만, 미래 어느 날엔 루오와 일본어로 대화를 해야지 하는 소망 하나쯤을 가지면서 말이다.


"거기도 슈퍼 있으니까요."
루오가 여행 전 내게 했던 말들은 저 정도였다. 굳이 무언가를 맞추고 조절하고 일상을 흔드는 일을 할 필요 없이 조금 다른 곳에서 그대로 이어 가라는 듯한 루오의 말. 그 말이 도리어 나를 일상에서 무리 없이 잡아당겨 옆으로 조금 비켜서게 해주었다.
물론 예기치 못한 일은 언제나 일어나니까 그해 여행에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있긴 했었다. 그냥 잘 걸어가던 내가 발목을 삐끗거렸고 여행 중이라 많이 걸을 수밖에 없는 사정 속에서 발목은 나아지지 않고 점점 부어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발목을 삐끗한 날 호텔에서 루오는 부어오른 내 발목을 가만히 보더니 자기 무릎에 내 다리를 얹게 했다. 그런 구도로 있으니까 루오의 얼굴을 빤히 보게 될 수밖에 없었는데 루오의 얼굴에 가는 주름이 있었다. 당시엔 내가 루오를 알게 된 지 사 년 정도 흐른 후였는데 문득 루오의 얼굴을 그렇게 자세히 본 건 정말 얼마 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루오, 네 얼굴에 주름이 생겼구나?" 이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대신 "루오, 네 얼굴은 네 얼굴이구나." 이게 더 맞을 것만 같았다. 내가 이렇게 내적으로 루오의 얼굴 타령을 하는 사이에도 루오는 앞서보다 더욱 잠잠한 표정이 되어 가고 있었다.
"새해니까 말이죠."
루오가 그 말을 하자 나는 좀 긴장했다. 루오와 무엇이라도 같이하고 싶었던 나는 이미 그때부터 루오의 연하장에 가담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때는 우리만의 시간 법칙이 존재하지 않아서 늦겨울에 연하장을 만든 게 아니었다. 새해였다. 하지만 루오, 여기는 고무판화도 없는데 설마 그 행운의 편지를 보내려는 건 아니겠지? 이렇게 말하면 정말 그게 현실이 될까 봐 그저 잠자코 있는데 루오가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신사에 가보기로 해요."
그때까지 내게 일본이란 그저 뉴스 속에 있는 나라였다. 신사라니, 일본 정치인들이 가는 그 신사 말인가. 하지만 루오 말로는 일본엔 신사가 굉장히 많고 거기서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도 있다 한다. 그래? 그렇다면야, 했었는데.
"야스쿠니 신사를 말한 거였어?"
루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전쟁사 좋아하잖아요. 그래, 우리가 어디서 만났니. 우리 사이에 그건 당연하다 싶을 정도의 사실이긴 했다. 석사 논문을 쓰지도 않고 취직을 한 까닭에 다른 사람들은 내가 그 주제를 좋아하는지조차 몰랐지만. 신기한 건 여행 가이드로 일하게 된 뒤 전쟁사가 더욱 좋아졌다는 것이다. 가이드로 가게 된 곳들은 대부분 전쟁의 주체가 되어 고급 문화재들을 가지고 있는 나라였다. 물론 어마한 문화재나 건물을 보고 감탄했다는 게 아니었다. 화려한 건물들 사이에서 공식적인 기록에는 끼지도 못한 누군가 서 있을 것 같은 기미, 다양한 구술 기록이나 전쟁사를 읽고 나서야 알게 된 존재들의 낌새. 그러니까, 여행에 흥미가 없는 내가 일터에 흥미를 갖게 되는 순간은 오히려 그곳을 전쟁사로 읽었을 때였다. 나는 월급을 받으면 두꺼운 전쟁사 책을 사 모았다. 루오와 친해진 계기도 생각해 보면 전쟁사였다. 한동안 루오는 수업이 끝난 이후에도 내가 메일을 보내면 정성스레 목록까지 작성해서 책을 권해 주었고 전쟁사에 관한 주제로 대화를 걸어 주기도 했다. 물론 어느 순간부터 루오와는 전쟁사 이야기가 아닌 현생 이야기를 하느라 오랜 시간을 같이했지만. 하지만 아무리 내가 전쟁사를 좋아한다고 한들 국가에 관련한 이야기만 하면 긴장을 하는 루오가 아무 이유 없이 그곳에 날 데리고 갔을 리가 없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루오는 야스쿠니 신사 안에 있는 전쟁박물관에서 나에게 제국의 식민 통치 역사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전쟁은 서양으로부터 아시아를 보호한다는 일본의 야욕이었고 지금까지도 그 의도는 너무나 확고하기 때문에 조금의 반성도 없다는 거였다. 그 증거는 물론 눈앞에 다 있었다. 거기까지 말하더니, 별안간 이런 건 이미 다 아실 테니, 하고는 그제야 나를 그곳에 데려간 이유를 말해 주었다. 루오는 나에게 일본의 그런 꼴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거였다.
"그런 꼴에 대한 나나 씨의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나나 씨라면."
하지만 그 이유에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루오는 내게 무언가를 대면시켜 주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왜 나의 반응이 궁금할까 오로지 그런 생각만이 들어서 나는 그저 걸음을 좀 빨리하면서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생각했다. 그러다 찾은 게 고향이었다. 맞다. 그런데 대체 고향은 왜 묻는 거지? 이번엔 나야말로 그 생각에 빠져들었다. 왜냐면 나도 고향에 관해서 많이 들었으니까. 더불어 내 고향에 대해 말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하기도 하고 좀 다르기도 했다.
"거기, 80년에 너는 몇 살이었지?"
태어난 적도 없다. 이 문장은 좀 이상하다.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면 엄마는? 엄마는 일단 서울 출신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 그렇다면 그 일은 전혀 모르나? 그건 좀 사정이 복잡했던 것 같다. 엄마는 그즈음 내 생물학적 아버지를 만나고 있었고 그는 막 입대했다. 문제는 거기서 발생했다. 생물학적 아버지의 고향이 광주였던 것이다. 훗날 엄마가 할머니에게 말한 사정은 이러했다. 생물학적 아버지는 굉장히 자연스럽게 최전방으로 배치되었는데 부대 배치를 받고 며칠 후 갑자기 손발톱을 잘라 부모님과 소중한 사람에게 편지로 보내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리고 한밤중에 어디론가 다 같이 이동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너무 익숙한 곳이었다. 하지만 끝까지 믿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는 커다란 강당에서 거적에 덮여 있는 사람들을 감시하는 일을 했다. 거적에 덮여 죽은 사람을 감시하다니, 그는 정말 믿지 않았다고 했다. 왜냐면 그 거적들 안에 있는 얼굴들은 대부분 자신이 아는 얼굴이었다. 그는 자신이 믿지 않는데 어째서 눈물이 나는지 그것 또한 믿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엄마대로 생물학적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혼돈에 빠졌다. 전쟁이 난 걸까, 텔레비전에서 본 것처럼 광주에 간첩들이 침투한 건가. 별의별 생각 속에 그 일들은 그러나 엄마에게는 멀어져 갔다. 다만 엄마에겐 다른 것들이 남았다.
그의 편지를 받았을 때 사실 엄마는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황당하게도 자신이 슬프지 않았다는 사실이 슬퍼서 조금 경악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이 경악스러움은 엄마가 그 편지를 받고 슬프지 않은 게 아니라 그 슬픔이 단지 나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 닿았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아버지를 따라 광주에 갔을 때 보았던 아버지의 여자 동기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지. 뭔가를 깨달았다는 건 그때야말로 어리둥절함의 시작이구나, 라는 것."
아직도 나는 엄마가 그때 무슨 말을 한 건지 모르겠다. 다만 엄마가 아버지와 이혼을 한 뒤 사랑하는 사람과 미국으로 떠났을 땐 나도 조금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긴 했었다. 하지만 또 나이가 들수록 그런 마음도 들었다. 엄마는 돈을 벌지 않았던 아빠 대신에 우리를 위해 전력으로 일했다. 그러면서도 학부모 노릇도 열심히 했다. 엄마는 그야말로 텔레비전에나 나오는 좋은 엄마였다. 그런 엄마가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했다고 해서 어리둥절할 필요가 있었을까. 오히려 엄마가 떠난다고 했을 때 동네에서, 주변에서 갑자기 엄마를 나쁜 년으로 몰아붙였던 그 사실이 더 어리둥절해야만 했던 건 아니었을까. 엄마는 그때 갑자기 사람들 기억 속에서 없는 사람이 되었다. 엄마의 다정함을 칭찬하던 이웃들이, 평생 자신이 본 것을 증언하지 않으면 사람으로서 떳떳하지 못할 거라며 텔레비전 뉴스에 자발적으로 출연했던 엄마의 씩씩함을 칭찬하던 친구들이 어느 순간 모두 엄마를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운 듯 굴었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가 좋아서 자식까지 버리고 간 미친 사람, 그러니 이 세상에 있어선 안 되는 경악스러운 사람. 엄마는 그렇게 모두에게서 죽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주마다 차이가 있긴 해도 미국은 부분적으로나마 동성혼이 가능한 나라였다. 아마 엄마는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일 수 있는 곳으로 떠났을 것이다. 사람이 떠난다는 건 확실히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니까. 적어도 이 부분에서 내가 어리둥절할 건 별로 없었던 게 분명했다.
그런데 우리가 매해 자신의 생일을 국가공휴일마냥 성대하게 보낸다는 걸 엄마는 알까.
오히려 이런 것이 엄마가 말한 어리둥절함이었을까. 나는 언제 만날지 모르는 엄마를 생각하며 그런 말을 중얼거리곤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걷다 보니 야스쿠니 신사의 정문 앞쯤에 도달했고 매해 특별한 행사를 한다는 극장에서는 대학생들이 일본 전통극을 연습하고 있었다. 무슨 내용이지? 여태 가파른 내리막을 걷는 사람마냥 종종걸음 하던 것과 달리 내가 동영상 촬영까지 하며 유심히 보자 루오가 자신도 저걸 실제 연습하는 건 처음 본다며 신기해했다.
학생들은 몇 번이나 하나의 동작을 반복하고 서로 반듯하게 절까지 해가며 마무리를 짓더니 저들끼리는 몹시 친한 모양으로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루오의 말에 따르면 그 극의 내용은 전쟁 중 헤어진 수동무들이 50년 만에 재회하는 이야기라고 했다. "서로를 기억해 주는 사람들끼리 만나니 얼마나 반갑겠어요." 수동무라 하면 대한 제국 후기 대동아 전쟁 시기가 배경인가 싶어서 나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일본어로 이뤄지는 연극 연습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이내 걸음을 옮기려던 차에 이걸 해보고 가요, 하는 루오의 말에 다시 멈춰 섰다. 100엔을 넣고 신년 운세를 뽑는 것이었다. 하지만 잔돈이 나오는 게 싫어서 줄곧 카드만 쓰던 참이었고 그러니 내게 잔돈이랄 게 없었다. 내가 머뭇대자 주위까지 두리번거리며 그냥 뽑아 봐도 됩니다 하는 루오의 말에 손을 쑥 집어넣었는데 막상 뽑고 나니 루오가 다시 이렇게 중얼거리는 거였다. "음. 이제 이 운세는 몰래 뽑은 값을 하게 될 거예요." 덕담치곤 괴상했는데 나온 운세도 역시나 만만찮았다.
어두운 길을 걷고 있으면 늦게나마 달빛이 들 것이니 기다려라.
그때는 일본어를 하나도 몰랐기 때문에 루오가 진심으로 그것을 읽어 준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내가 다시 고개를 갸웃하자 루오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더니 어라, 하였다. "에, 연애와 여행운이 같은 걸요?"
그러니까 내 연애와 여행은 어두운 가운데 그것을 따라 걷고 있으면 된다는 것이었는데, 어떻게 보자면 굳이 환한 낮을 두고 달빛이 드는 밤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렇게 부정적이 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나는 직업이 여행 아닌가.
루오는 웃음을 참는 얼굴이 되더니 이 소원을 이루고 싶다면 저기 매달아 두면 된다고 말하며 가리켰다. 그러더니 조금 찝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손에서 운세를 가져가 본인이 직접 매달았다. 혹시나 매듭이 풀릴까 걱정하는 사람처럼 몇 번이나 단단히 묶였는지 확인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결국 루오와 살게 되었으니 그 소원은 이뤄진 걸까. 그럼, 내 인생의 밤길에 든 빛은 루오란 말인가?


엄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건 사실 할머니에게 전해 들은 엄마의 어리둥절함에 대한 의미부여 때문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 또한 한동안은 엄마를 아예 없는 사람처럼 잊고 지냈다. 엄마가 미워서가 아니었다. 언제나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바쁘기도 했지만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즐겁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물론, 그것이 그저 연극의 배역을 해낸 것 같은 흉내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은 것도 엄마를 다시 기억하고 난 다음이었다. 어쨌거나 내가 엄마에 대해 생각하게 된 건 루오의 등장 때문이었다. 나는 루오를 만나기 전까지 내가 무성애자라고 생각했다. 물론 무성애자라고 해서 연애를 하지 않거나 못 하는 게 전혀 아니다. 그러므로 나도 늘 연애 상대가 있었다. 하지만 늘 문제는 섹스에 있었다. 무언가 사귀는 사이라면 섹스를 요구하는 게 당연하다 여기는, 게다가 헤테로 커플 사이에서의 조금은 비대칭적인 섹스가 요구되기도 하는 한국에서 내게 연애는 어쩌면 정말로 여행 같은 존재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가이드 일을 하며 늘 비행기를 타고 이국의 풍경을 보고 있지만 사실 내게는 그것이 그저 일에 불과했던 것처럼 나는 늘 연애를 하고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그 연애에 대해 온전한 마음이 갔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더불어 내가 루오를 처음 만났을 때 루오는 게이였으며 같이 살던 애인도 있었다. 나도 처음부터 루오를 사랑한다 생각했던 게 아니라서 심지어 그 애인과의 궁합을 내가 타로카드로 봐주기도 했다. 저 여행을 함께할 때도 루오는 게이였다. 그리고 지금은. 사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모른다, 이건 나를 위한 대답이다. 그럼 나는 정말 루오를 사랑하고? 응. 하지만 다시 응? 이것도 된다. 루오를 너무 좋아하지만, 사랑이라면. 서로 합이 잘 맞아 우당탕 소리 없는 조용한 생활, 여행을 함께 가도 일상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나는 루오를 사랑하는 건지 이런 날서지 않음을 소중히 여기는 건지 모를 때가 있다. 그래서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은 조금 편리하다. 나와 살고 난 이후 루오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러므로 나는 확실히 무서워서 묻지 않았다. 다만 그제야 오래 미뤄 두었던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라면 이 마음 알지, 이런 마음에 엄마를 소환했다. 그리고 그걸 자주 물었던 것 같다. 루오는 나를 사랑할까? 우리는……? 더불어 절대 대답을 하지 못할 엄마라는 걸 알기에 더 자주 물었던 것 같다.



"난 그렇다고 생각해."
대답은 이렇듯 항상 엉뚱한 곳에서 먼저 온다. "남의 사랑을 잘도 안다, 할머니는." 내가 그러면 할머니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지만 표정만큼은 확고했다. 절대 모를 일이 없다는 그 표정, 다른 사람이라면 싫었을 텐데 할머니는 그저 좀 얄밉고 말 뿐이었다. 할머니는 자신이 매력적이고 그 매력적인 모습 때문에 자신감이 충만하다는 걸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할머니의 그 자신감의 기원은 꽤 오래전이었다. 주목 받는 일에 익숙한 사람, 할머니는 한국 전쟁 도중과 직후에 변사로 일한 경력이 있었다. 그러니까 영화나 연극이나, 심지어 텔레비전 뉴스 이런 것에 소리가 없던 시절 그 소리를 대신 내주던 사람 말이다. 이화학당 음악과를 졸업한 할머니는 원래 미국으로 유학 가고 싶어서 영어를 배울까 하고 미군이 있다던 전선에 통역으로 자원을 했다. 전선에는 심각한 상황이 대부분이었지만 휴식이 필요한 상황도 있었다. 상황에 밀려 시작하긴 했어도 할머니는 변사 일을 꽤 좋아했다고 한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치열한 전쟁터였을지라도 누군가는 사랑을 했고 학교에 갔고 아이를 낳았고 그 틈새에 들어가면 좀 더 많은 것들이 있었다. 그것은 그 상황이 좋았다는 것과도 별개의 문제였다. 그러니까 그저, 세상에 아름다운 소리라는 게 굳이 학교에서 배우는 음악뿐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이라고,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문제는 그런 기억과는 별개로 어쨌거나 그곳은 충격적일 정도의 큰 소리가 예측 불가능하게 울리는 전장이기도 했다. 그런 곳에 오래 있었더니 할머니는 결국에 이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남들에게 소리를 전달해 주던 할머니가 정작 본인은 소리를 잃어 갔다. 이명 때문인지 언제부터인가는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저 볼 수 있는 것, 이 필요한 것일까. 할머니가 최근 가장 좋아하는 건 레슬링 경기를 보는 거였다. 할머니 집에 갈 때마다 나는 할머니와 과일을 먹으며 잠시간 레슬링 경기를 보았다. 문제는 할머니의 추임새에서 오는 의문의 탄생이었다.
"속이 다 시원하네, 남자 놈들 서로 더 때리고 때려라."
할머니는 저렇게 남자들을 싫어하면서 왜 남자를 쉬지 않고 만났을까. 연애왕. 하지만 연애왕 이전에 레슬링 마니아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므로 할머니의 그런 점이 나와 루오에게 문제될 만한 것은 없었다. 다만 할머니의 파트너들은 좀 달랐던 것 같다. 매력적인 할머니는 언제나 연애 없이 못 사는 사람처럼 늘 파트너가 있었다. 어차피 싱글이니 할머니가 파트너를 만드는 것까지는 상관없었는데 하필 그 파트너들이 하나같이 벌이가 없었다는 건 좀 문제였다. 할머니는 그 파트너들을 위해 늘 일을 했다. 할머니는 은퇴 이후까지 파트너들을 위해 산후 돌보미 일을 하기도 했고 가사도우미로 출근하기도 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좋으냐고 물으면 할머니는 그저 '이야기 값'이라고 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대가. 할머니는 파트너가 바뀔 때마다 나와 꼭 식사를 하는 자리를 마련하곤 했는데, 나는 나대로 대체 할머니가 무슨 대단한 이야기를 하기에 그렇게 많은 값을 지불하는지 궁금해서 나가곤 했다. 식사 장소는 맥도날드일 때도 있었고 보리굴비집일 때도 있었는데 아무리 집중해 봐도 내 귀에는 그저 어제 마트 간 이야기, 그제 문화센터에서 줌바 댄스 수업 들은 이야기, 턴 하다가 허리 다칠 뻔한 이야기, 마당에 심은 튤립. 이런 게 전부였다. 별 이야기 안 하던데? 언제 한번은 밥을 먹고 난 후에 내가 그렇게 말했더니 할머니가 눈에 보이게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말했다. 거 봐, 이러니까 내가 연애를 한다니까. 그게 안 중요하면 대체 뭐가 중요하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렇다면 꼭 남자와의 연애일 필욘 없었다. 게다가 이야기 값을 지불하는 건 좋은데 문제는 수입이었다. 직업이 다양하다는 것이 꼭 수입 상승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내 연애운이 여행운과 같다면 할머니의 연애운은 금전운과 동일할 거였다. 다만 내 여행운과 같은 연애운이 달빛을 기다려야 하는 바람에 길게 지속되는 것과 달리 할머니의 연애운은 금전운처럼 짧고 여러 개로 조각났다. 다행인 건 직업이 바뀔 때마다 할머니는 특유의 매력으로 새로운 사람을 잘 사귀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할머니의 바로 직전 파트너는 조금 달랐다. 일단 할머니의 연애 기간을 셈해 봤을 때 꽤 오래 만난 사람이기도 했고 여태까지와 달리 마지막이 조금 스산하기도 했다. 할머니의 전 파트너에게 새로운 파트너가 생긴 것이었다. 물론 할머니를 속이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그 과정에서 할머니가 어지간히 속을 끓였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건 역시나 모두 지나고 난 뒤에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남의 사랑은 잘도 알더라?"
내가 남의 사랑 운운하는 것에 작은 악의가 있다는 걸 할머니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말하는 남의 사랑은 엄마의 사랑을 반대해서 생물학적 아버지와 결혼까지 시켰던 할머니의 지난날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나 또한 엄마를 이해한 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겨우 그런 식으로나마 할머니를 원망한 것이었다. "그런 너는 일부러 니네 엄마 기억 안 나는 척하잖아? 죽은 사람도 나오는 이야기라고 전쟁사는 책까지 사서 읽으면서." 평소 내가 할머니를 비난하면 절대 멈추지 않고 그렇게 받아치곤 했었다. 그런데 저 당시에는 저런 내 말에도 할머니가 맥없이 고개만 끄덕였으니 그 낙담은 알고도 남았다.


할머니 집에 가니 이제 막 불려 놓았는지 깨끗한 물에 담긴 미역이 마루에 올려 있었다. 부엌 쪽에선 미역국에 넣을 고기를 볶은 냄새가 은은했다. 할머니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전화를 해보니 은근한 진동이 근처에서 느껴졌다. 루오가 어느새 마루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들고 와 내밀었다. 일부러 두고 나갔구나. 할머니는 종종 핸드폰을 두고 가곤 했다. 처음엔 기억력 문제인가 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나도 혼자 좀 있어 보자." 연애 방해 금지 모드, 그냥 나는 이렇게 알아들었다.
돌아보니 루오는 할머니네 강아지인 똑순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똑순이는 할머니의 전 파트너가 가져다준 강아지였다. 곧 안락사 될 운명이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처음엔 똑순이를 키우려 하지 않았다. 곧 죽을 날이 올 거라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노인이니까 실질적으로도 다른 이들보다 죽음은 훨씬 근거리에 있었다. 자신의 손길이 갑자기 닿을 수 없을 때 홀로 살아가기 힘든 생명체를 만드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똑순이는 할머니의 전 파트너와 함께 살았다. 하지만 전 파트너의 새로운 파트너는 강아지털 알러지가 있었다. 똑순이는 다시 혼자가 될 순간에 처했다. 그런가 하면 할머니도 전 파트너의 결별 선언으로 인해 다시 홀로가 될 예정이었다.
"이별 선물이었네." 이런 내 말에도 할머니는 다시 며칠을 버텼다. 할머니가 똑순이를 키우겠다고 한 건 똑순이가 버려진 이유를 듣고서였다. 똑순이는 절반은 진돗개의 유전자를, 절반은 어떤 종인지 모를 개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리고 그런 할머니였으니까 나는 할머니가 똑순이를 데리고 왔을 때도 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름은 왜 똑순이지? 특히 루오가 저 발음을 어려워했다. 사실 나에게도 똑순이는 좀 힘을 줘야 하는 발음이었다. 하지만 할머니에겐 나름 이유가 있었다. 아직 똑순이에게 이름이 없던 어느 날, 할머니는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통을 쥐고 앞장섰고 마당에서 무언가를 고르듯 풀을 잡아 뜯으며 놀던 똑순이가 자연스레 뒤를 따랐다. 늘 있는 일이니까 별로 의식할 것도 없었는데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면서 할머니는 문득 똑순이가 나를 따라왔었지? 하는 생각을 했다. 왜냐면 똑순이는 언제나 할머니를 따라다녔으므로. 그런데 그날은 너무나 조용했다. 할머니는 이윽고 똑순이가 바닥에서 소리도 못 내고 기침을 하는 걸 보았다. 떨어진 음식물 쓰레기 중 무언가를 집어 먹은 모양이었다. 곧장 똑순이를 안아들었지만 할머니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읍내에 있는 동물병원까지 가려면 버스를 타야 했고 버스가 아니면 택시라도 타야 했지만 밤중이었다. 할머니는 내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때 나는 수영장에 있었다. 결국 할머니는 그날 루오가 부른 택시로 똑순이와 병원에 갈 수 있었다.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똑순이가 삼킨 음식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래서 똑순이가 되었다. 할머니는 똑순이가 똑똑해져야 한다고 했다. 누가 주는 대로 받아먹거나 따라가는 강아지가 되지 않아야 된다는 걸 강조했다. 이래도 좋아 저래도 좋아 이런 건 모두 어느 정도 인지가 가능한 상태에서 해야 좋은 것이지, 누군가의 조정과 압력에 의해 자신도 모르는 그런 상태를 유순함으로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그렇기 위해선 이름을 붙여 주고 그 이름에만 반응하도록 소중하게 대접해 주고 자주 불러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순이야? 똑순이? 그냥 순이라는 이름이 좋아서? 생물학적으로 뭐든 간에."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똑순이가 생물학적으로 유전학적으로 뭐든 간에 어쨌거나 똑똑한 강아지 똑순이면 된다는 것. 실제 똑순이는 그 뒤로 할머니가 준 음식만 먹었다. 내 생각엔 똑순이가 목에 음식이 걸려 숨을 쉬지 못했던 그때의 일을 학습한 것 같았지만 할머니는 한사코 자기가 지어 준 이름의 결과라고 자랑스러워했으니까 그것도 그러려니 싶었다. 내가 그때의 이야기를 하면 루오는 골똘한 표정이 되어서 역시 똑순이가 구조돼서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할머니와 단둘이 택시를 타고 돌아오던 길에서였다. 할머니는 불쑥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만큼 갑작스러운 대화를 시도했다.
"저 애에겐 일상이랄 게 없었어, 그래서 저 애가 여행이라면 질색을 해."
루오는 잠시 망설였다. 저 애라면 똑순이인가 나나 씨인가. 그러나 곧 여행을 싫어한다는 것이 따라왔고 그래서 나나 씨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그때까지 루오와 나에 대해 반대도 찬성도 하지 않았다. 루오와 내가 같이 살겠다고 할머니 집에 찾아와 처음 인사를 한 날도 할머니는 인스턴트 라멘을 만들어 놓고 우리를 기다렸다. 지나고 나니 일본 음식을 내야 한다는 생각에 라멘을 구했으리라고 짐작했지만 그때는 나도 긴장 상태였는지 마냥 기분이 가라앉았었다. 게다가 밥을 먹은 지 얼마 안 됐는데 날이 어두워진다며 빨리 일어서 미리 예약해 둔 근처 호텔에 가서 쉬라고 성화였다. 루오가 어떤 사람인지 물어봐 줬으면 했는데 도리어 할머니 자신이 불편을 못 견디는 사람처럼 구는 게 어색하고 이상했다. 루오가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여자를 사랑한다는 딸을 아직도 원망하는 걸까, 그래서 이번엔 손녀가 게이랑 살겠다고 한 것이 분한 걸까.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골머리를 썩었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그런 말을 했구나. 다시 살가워진 지금에도 몰랐던 일들이었다. 바람에 따라 처마 끝에서 돌아가는 풍경을 보던 루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닦달하지 않으니까 좋네. 사람에게 설명을 요구할 거는 따로 있거든. 그 사람이 왜 그 사람이냐고 묻는 건 별로고."
할머니가 루오를 반대하지 않은 이유는 저렇게 짤막했다고 한다. 그에 비해 그날 할머니가 나에 대해 한 이야기는 두서없이 길었다고 한다. 내가 4살 때부터 노래를 한번 불러 주면 잊지도 않고 다 따라 외웠다는 이야기, 그래서 일찌감치 예고를 보내려고 했지만 아이엠에프가 터져 더 이상 음악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 그랬더니 책을 읽기 시작해서 국문과를 보내려 했다는 이야기, 그러나 나 스스로가 국문과는 취직이 안 된다고 영어과를 갔다는 이야기, 그런 애가 처음으로 고집 부려 간 것이 대학원이었는데 돈 때문인지 중간에 그만두고 갑자기 학부 전공을 살려 여행 가이드로 취직했다는 이야기까지. 그런저런 나에 대한 이야기를 쉬지도 않고 내내 말했다고 한다. 마치 나에 대해 지금보다 더 많이 알아달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더니 내릴 때가 되자 마치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하는 듯한 말투로 나나 엄마가 사랑을 찾아서 좀 빨리 나나 곁에서 독립했어, 라고 덧붙였다. 루오가 고개를 갸웃하자, 나나 엄마는 그저 독립을 한 건데 사람들이 나나 엄마를 나나의 일상에서 지워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사람 중엔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말도.
"그니까 나나한테서 일상을 빼앗아 간 사람은 걔 엄마가 아니라 우리였지, 나였어. 나나나 애 엄마나 가장 갖고 싶었던 게 그거였을 텐데."


경험상 할머니가 오기엔 빠듯한 시간이어서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호은이었다. 호은은 광주 근처 소도시로 혼자 내려가 산 지 꽤 오래였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난 후였으니까 이미 몇 년이 지났다. 흔히 사람들은 공무원이 할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지만 부서 나름인 것 같았다. 호은은 부군수 비서실에 근무했는데 부군수가 휴가를 내지 않으면 휴가를 갈 수 없었다. 게다가 부군수는 당연히 주기적으로 바뀌었으므로 어떤 사람이 오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런 삶도 반복되니 일상이 되는 모양이었다. 경험이 쌓인 후에는 가방을 잽싸게 꾸릴 수 있을 만한 가까운 곳 아니고는 어딘가로 떠날 엄두를 내지 않는 것 같았다. 올해는 호은이 그나마 예측 가능한 부군수를 만난 모양이었다. 예상 도착 시간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게 다 송가인 덕분이야."
똑순이를 가운데 두고 마당의 둔턱에 걸터앉아 있던 나와 루오는 그 말에 동시에 호은을 올려보았다. 호은이 그런 우리에게 핫핑크 수건을 두 장 꺼내 보였다. 특정 정당에 가입이라도 한 거니? "잘 알고 있네, 물론 난 그들과 관련이 없지만 이 핫핑크라면 그들과도 관련 있겠지." 그것이 바로 송가인 광주전남 팬클럽 굿즈라는 말에 똑순이가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앞발로 땅을 조금 팠다. 나는 호은이 조금 우쭐한 기세로 수건을 내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재밌기도 했지만 우선 호은의 사정이 좀 궁금했다. 왜냐면 호은은 지난 15년간 신화 팬클럽 회원이었고 지금도 집에 신화 20주년 굿즈가 배달되고 있었다. 그러니 그 유명한 송가인이라도 호은이 굿즈를 챙길 이유가 무엇인가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나의 부사수께서 송가인 광주전남 팬클럽 임원이시라는 거지."
어쩐지, 정답은 호은의 일터에 있었다. 호은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가방을 좀 더 벌리고 있었다. 이번엔 머그컵이 나왔다. 루오는 이미 호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아끼지 않으며 수건과 머그컵을 차곡차곡 받아 두고 있었다. 이거 아주 면이 좋은데요? 그러니까, 요지는 그러했다. 부사수가 송가인 팬클럽 회원이 되면서부터 회식이나 초과근무 등이 전부 사라졌다는 거다. 첫 시작은 성탄절 즈음이었다. 오늘이 송탄절이군, 이라는 중얼거림으로 나타난 부사수는 호은이 고개를 갸웃하자 잠깐 망설이더니 그럼 이제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날이 송가인 탄신일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송탄절? 호은과 나의 차이는 바로 이것이었다. 20년 팬클럽 경험자 호은은 단번에 그것이 부사수의 덕질 공개라는 것을 눈치 챘다. 호은은 되묻지 않았다. 침착하게 컴퓨터를 켜고 송가인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을 뿐이다.
"부사수는 오늘 송가인 생가에 옷장 넣으러 가셨을 거야. 주말이니까."
그런데 니네 부사수 여자 아니야? 나는 말해 놓고도 스스로가 또 별로라고 생각했다. 역시나 호은은 내 말에 그게 뭐 어때 표정이 되었다.
"부사수 여자지, 송가인이 그렇게 이쁘대."
호은의 부사수는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일 중독자처럼 야근을 했다. 그의 남편은 부사수가 바깥으로 돈다고 이혼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부사수 개인으로는 그 시기 지방 여성 공무원으로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케이스가 되었고 퇴직은 부군수로 하게 되었다. 퇴직을 앞두고 나서야 주변에 좋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중 가장 좋은 것이 바로 송가인이었던 것이다. 세상엔 여러 세계가 존재하고 그 세계는 그 당시의 환경이나 사람에 의해 자주 바뀔 수 있었다. 특히나 호은처럼 사수의 세계가 바뀌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다. 이전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랬다. 인구가 줄어드는 지방 군의 신혼부부 대책을 세웠던 이전 부사수 때 호은은 굿즈 대신 신혼부부 우대 팸플릿 같은 걸 들고 다녔다.
"루오, 언니와 결혼해서 한국인의 권리를 누려 보는 거야, 어때?"
그때 호은은 때만 되면 저 말을 하곤 했다. 루오는 게이이고 호은도 그걸 잘 알았다. 정체성이 무슨 취향의 문제도 아닌데, 대체 저게 무슨 헛소리인가 싶어서 나는 차마 대꾸도 못 했는데 호은은 멈추지 않았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인 루오와 여성인 내가 같이 살면 당연히 헤테로의 결합이라는 확신을 하는 한국에서 결혼을 하고 자기네 군처럼 인구 부족 지역에 편입을 하면 나와 루오는 온갖 혜택 1순위라는 거였다. "언니, 암막커튼 같은 걸로 빛을 가릴 필요도 없는 아주 튼튼한 주택 제공이라고. 루오, 이제 아주 그냥 커튼을 확확 젖히고 살아도 돼!" 그럴 바에야 동반자 법을 통과시켜 나와 루오가 지금 이곳에서도 혜택을 받게 해주면 되는 거 아닌가, 이런 말이 올라왔지만 하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지금은 송가인 굿즈를 가방에 넣고 다니고 있으니 확실히 호은의 세계가 또 다르게 변하긴 한 모양이었다. 가만히 듣던 루오가 송가인 참 소중하네요 역시 누구랑 함께인가는 중요하고요, 이렇게 덧붙였다. 문득 그런 루오를 보던 내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래, 루오랑 함께여서였겠지, 이케아도 후추시도."
그러나 호은은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똑순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할머니는 어디에 있어? 가만 보자, 이 집에서 할머니 마음속의 애정 서열은 똑순이와 루오가 동급이니까…… 역시 루오가 찾아보는 게 좋겠네."
할머니는 똑순이가 생긴 뒤 본격적인 연애는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시간을 때우는 사람은 있어 보이긴 해도 말이다. 역시 연애를 반드시 남자랑 할 필욘 없었던 거야, 똑순이가 할머니 보험이었어. 호은의 말에 나와 루오가 서로를 보며 웃었을 때였다.
"누군가 오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누군가 오고 있는가? 호은의 발밑에서 앞발로 땅을 파던 똑순이가 어느새 대문을 향해 벌떡 일어나 꼬리를 세우고 있었다. 똑순이는 할머니의 말대로 똑똑한 개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할머니가 등장할 때만 짖거나 꼬리를 흔들며 온몸으로 환영했으니까. 역시나, 대문을 넘는 할머니의 손에는 케이크 상자가 들려 있었다. 아무 의미 없다고 말하면서 매해 이 날이면 할머니가 꼭 준비하는 게 바로 엄마의 생일 케이크였다. 루오가 생일 케이크를 받아들었을 때였다. "이런 편지가 왔는데." 할머니가 편지 한 장을 들고 눈을 가늘게 뜨더니 호은에게 넘겨주었다.
"미노리?"
호은이 읽어 내려가는 편지에 루오와 내가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서울에서 이사를 자주 다니느라 연하장 주소를 늘 할머니 집으로 해놨던 것이다. 내가 루오에게 뭔가 말하려던 찰나였다. 똑순이가 대문을 향해 달려가며 짖기 시작했다. 문득 대문이 열려 있다는 걸 깨달은 내가 놀라 똑순이를 잡기 위해 달려갔을 때였다. 그곳엔 익숙한 동물 판화가 찍힌 연하장을 든 작은 노인이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작은 키에 어깨선이 조금은 여리다 싶었는데 옷은 또 남자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사이 똑순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노인에게 반가움을 표하고 있었다.
"70년 만에 인사드립니다."
똑순이와 달리 나는 이 작은 노인의 등장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내가 그저 머뭇거리자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노인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나입니다, 유하나."
노인의 말에 나는 마치 뒤에서 누가 밀치기라도 한 것처럼 퍼뜩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하나라면, 오늘 생일인 사람,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죽었던 사람. 엄마 이름이었다.
"기억하는 사람에겐 반드시 찾아옵니다, 아무리 옛날 사람도."
할머니, 루오, 호은아. 여기에 엄마가 왔나 봐. 엄마는 어디엔가 늘 있었구나, 나는 울지 않으려 애쓰며 마당 쪽에 대고 중얼거렸다. 아, 이거야말로 행운의 편지를 받아버렸네요. 그곳에선 루오가 결국 돌아온 행운이라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고, 그런 루오를 보며 할머니와 호은이 깔깔대고 있었다. 그러다 나를 보곤 손짓했다. 이제 정말 새해 첫 식사를 하자며, 그렇게 오래 집을 비운 사람의 생일을 기억하자며, 이루지 못할 계획이라도 함께 이야기하고 웃어 보자며. 다시 대문 쪽을 보니 작은 노인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발치의 똑순이만이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안아든 똑순이가 내 눈물을 핥는 것을 느끼며 대문을 닫으려 했을 때였다. 대문 앞에 동물 판화의 엽서가 떨어져 있었다. 나는 그저 똑순이를 안아들고 대문을 열어 둔 채 그대로 돌아 들어갔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누군가 그렇게 오고가는 기척이 쉼 없이 들렸다.
그렇게 새해였다.
우리만의 새로운 시작.


















한정현

작가소개 / 한정현

장편소설 『줄리아나도쿄』, 43회 오늘의작가상 수상.


《문장웹진 202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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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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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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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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