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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의 중량

  • 작성일 2020-03-01
  • 조회수 5,931

[단편소설]



뼈의 중량



편혜영




초인종이 울리자 도진은 먹고 있던 스낵을 내려놓고 텔레비전 볼륨을 줄였다. 불을 끄고 창마다 커튼을 치고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조심했지만 사람 있는 기척은 쉽게 감춰지지 않았다. 긴장해서인지 숨소리가 커졌다. 참으려고 할수록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배고픈 동물의 울음 같았다.
조금 지나자 방문자는 현관문을 두드렸다. 도진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애원이나 부탁이 아니었다. 요구나 경고에 가까웠다. 방문자는 집에 도진이 있는 걸 알았고 자신이 아는 걸 감추려는 마음이 없었다. 도진에게 겁을 주고 싶어 했다.
그들은 도진이 근무하는 은행으로 먼저 왔다. 기합을 주려는 체육 선생처럼 도진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섰다. 비속어를 섞거나 야, 하고 부르기도 했다. 도진에게 받아야 할 게 있고 도진 때문에 손해를 입은 듯 굴었다. 형에 관해 알아내는 과정에서 도진의 신상을 파악한 듯했다. 도진이 형의 행방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게 아니면 형이 잠적하기 전 도진에게 뭔가 넘겼으리라 확신했다.
도진은 어리둥절해하는 동료와 고객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들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진심이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워도 수치스럽고 미안한 마음은 들었다. 고개를 숙이면 신발이 보였다. 도진의 입사를 기념해 몇 해 전 형이 사준 구두였다. 움직임과 운동성에 따라 가죽이 갈라진 신발을 보자 마음이 누그러졌다. 사과를 받으려는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도진의 마음이. 형이 언제나 잘못만 한 것은 아니었다. 가까운 사람에게 마음을 다한 적도 있었다.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뜻대로 안 되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죄책감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는 사과로 충분할 리 없었다. 욕도 먹고 멱살도 잡혔다. 그것으로 끝나면 좋을 텐데, 시작이었다. 멱살을 잡힌 채 형의 행방을 추궁 당했다. 목이 졸렸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목이 메어 컥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 멱살을 쥔 사람이 손의 힘을 조금 풀어 주었다. 숨이 막히고 얼굴이 달아오른 와중에도 마음이 놓였다. 도진에게 분노를 푸는 사람조차 도진이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지점장이 나와 봤다. 그들이 기다렸다는 듯 지점장에게 몰려갔다. 얼마 전 부임한 지점장은 외국인이었다. 그는 방문자들의 말을 다 알아들었지만 못 알아듣는 척했다.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고는 캄 다운, 캄 다운 플리즈 하며 양손을 아래로 내저어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소파에 마주 앉으면 아무리 씩씩대던 사람들도 화를 가라앉혔다. 지점장은 비치된 냉장고에서 캔에 든 혼합 과즙 음료를 꺼내 내밀었다. 방문자가 누구든 계절이 언제든 상관없이 지점장은 냉장 음료를 제공했다. 따뜻한 차는 마시려면 시간이 걸리니까. 재빨리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면 식은 음료가 나았다.
지점장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다가 틈을 봐서 제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들은 통역해 주기를 기다리며 두리번거렸지만 그러는 사람은 없었다. 긴 얘기를 빠르게 마친 지점장이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두 유 언더스탠드 왓 아임 쎄잉?"
사람들은 황망해했지만 어쩐지 아까처럼 화를 내지 못하고 약간 눈치를 봤다.
"경찰이 당신들을 도와줍니다. 우리는 아닙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지점장의 느린 영어를 듣고 나서야 사람들은 투덜거리면서도 도진을 쏘아보고 사무실을 나갔다.
그런 일이 또 한 번 일어나자 지점장이 도진을 방으로 불렀다. 음료수 캔 표면에 맺힌 물이 탁자로 흘러내릴 때까지 잠자코 있다가 지점장이 입을 뗐다.
"네 가족은 좋지 않은 사건을 저질렀어. 유감이야. 하지만 그건 네 가족의 일이야. 네 문제는 아니야. 그렇지?"
도진은 머뭇거렸다. 화를 내야 할지 고마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관함을 인정해 주는 것인지 연루 여부를 확인하려는 건지 알기 어려웠다.
"도진이 열심히 일한 걸 알아. 도진은 책임감이 있어. 실적도 좋아. 하지만 사람들이 찾아오면 잘 모르는 사람은 우리 은행에, 우리 지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거야. 우리는 필요한 조사를 하기로 했어. 네가 잘못이 없다는 게 밝혀져야 해. 감사팀이 너를 조사할 거야."
도진이 납득하지 못한 표정을 짓자 지점장이 도진을 똑바로 쳐다보며 감사가 진행되는 동안 출근하지 말라고 했다. 그동안 푹 쉬며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치료? 도진이 되묻자 지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이 찌긴 했다. 몸이 무거워져서 건사하려면 시간이 걸렸다. 근무 중에도 내내 간식을 먹었고 점심시간보다 일찍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있었다. 허기 때문이지 질병은 아니었다.
"해고예요?"
"이건 단지 절차야. 너는 여신 업무를 진행했잖아? 모든 일을 원칙대로 했다면 아무 문제없어."
지점장이 같은 말을 반복하다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도진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자신이 은행에 불편을 끼친다고 생각하니 미안했지만 지점장에게 의심을 받자 서운하고 약이 올랐다. 그보다는 수치스럽고 형에게 화가 났다. 도진은 음료수 캔을 따서 단숨에 마셨다.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지점장이 그만 나가라는 듯 자기 책상으로 가 앉았다. 도진은 두 번째 음료수 캔을 땄다. 지점장이 다시 다가와 빠른 영어로 길게 화를 냈다.
몇 시간 후 인사 담당자를 대동한 지점장으로부터 해고가 아니라 특별감사이며 그로 인한 어떤 불이익도 없다는 성문 조항을 확인하고 나서야 느릿느릿 소파에서 일어섰다. 형에게 특혜를 준 적 없지만, 그간의 업무에서 해로울 것 없는 실수가 모두 지적될 것이고 그게 빌미가 되어 사직을 권고 받겠지. 알면서도 버텼다. 바보같이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출근을 하지 않자 괴롭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했으나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홀가분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형의 행방을 묻는 사람들이 이제는 도진의 집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피해자들의 지속적인 방문에 지친 동료 누군가 슬쩍 도진의 주소를 일러준 것 같았다.
방문자들은 전화를 걸어왔고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다가 욕설을 퍼부으며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도진이 잠자코 있으면 다른 집 종량제 쓰레기봉투를 문 앞에 풀어 놓았다. 형이 나타날까 싶어 근처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는데, 한밤에도 자신이 보고 있다는 걸 알리려고 불이 꺼지고 커튼이 쳐진 베란다를 향해 뭔가 던지기도 했다. 도진의 집은 3층이었는데도 정확히 창을 맞췄다.
그쯤이었다면 오늘도 꼼짝하지 않았겠지만 노크하듯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데다 도진을 부르는 소리도 달랐다. 여느 때처럼 이름 뒤에 비속어를 붙이거나 대뜸 욕을 퍼붓지 않았다. 집주인, 하고 불렀다.
외시경으로 보니 얇은 패딩 차림의 남자가 옆집과 도진 집 사이 복도에 정중히 서 있었다. 불이 꺼지면 파리를 쫓듯 손을 내저어 센서등을 다시 켜고 잠잠해지면 팔을 뻗어 초인종을 조심스럽게 눌렀다. 재촉하지 않는 게 특이했지만 그 역시 형에게 뭔가 받을 게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 생각에 안으로 들어가려다 현관에 쌓아 둔 재활용품을 건드려 요란한 소리를 냈다. 바깥의 남자가 그 소리를 포착하고는 '안에 계시네요.' 하고 말했다.
문을 열고 도진은 잠시 기다렸다. 남자가 다가와 멱살을 잡거나 물렁한 복부를 향해 주먹을 날릴 시간을 줬다. 남자는 가만히 있었다. 욕을 하거나 달려들지 않았다. 오른손에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후려칠 기미도 없었다. 다행이었다. 남자에게 멱살을 잡혔다면 충격이 컸을 것이다.
긴장했는지 도진의 몸이 떨렸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 뭔가 잡혔다. 손수건이었다. 꺼내서 땀을 닦았다. 파자마 사이로 찬바람이 드는데 머리에서는 땀이 흘렀다.
"오랜만입니다. 김주만이에요. 두 번째 보네요."
모르는 얼굴이었다. 노인처럼 느릿느릿한 말투도 낯설었다. 이름과 두 번째라는 말을 힌트 삼아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남자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보스턴 가방이었는데 샌드백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다.
남자가 읊는 주소를 듣고서야 도진은 그를 알아차렸다. 형 명의로 된 집의 임대인이었다. 형은 3년쯤 전 임대인을 승계 받고 그 집을 샀다. 가진 돈이 충분치 않아 무리한 액수의 대출을 받았다. 도진이 보탰는데 그걸로도 부족했다. 대출 과정에서 시간이 걸렸고 그사이 호가가 올라서였다. 재개발 지구로 묶인다는 소문이 돌면서 당장 허물어도 이상하지 않을 주택 가격이 하루가 멀다 하고 치솟았다. 그래도 살 거냐고 도진이 묻자 그래서 사야 한다고 형이 대답했다.
거기에 무슨 인과가 있다는 듯 매수 직후 일대 가격이 보합세를 유지하더니 곧 강경한 부동산 정책이 발표되었다. 행운은 허둥지둥 멀어졌다. 허탈하거나 분해야 하는데 애당초 제 집이라는 느낌이 없어서인지 도진은 손해를 실감하지 못했다. 형은 아니었다. 나중에 밝혀진 대로 손해를 만회하려 허튼짓을 벌였다. 어쩌다가 형에게 돈이 삶의 원천이 되었는지, 돈 때문에 통제력을 상실했는지 생각하다 보면 그 집이 떠올랐다.
남자는 도진을 형으로 착각했는지 다시 한 번 꾸벅 인사했다. 도진은 엉겁결에 고개를 숙였다. 안부를 나눠 본 적 없고 집주인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아는 사이이긴 하니까. 그러고는 남자가 들어오도록 몸을 비켜 줬다. 누군가 찾아올지도 모르니 집 안으로 들이는 편이 나았다. 주만은 바닥에 흐트러진 재활용품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어두컴컴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아무래도 계약을 일찍 끝내려고 난데없이 찾아온 것 같았다. 보증금을 돌려받아야 할 일이 생긴 거겠지. 그런 일은 수시로 생기니까. 그 집의 상태를 고려하면 충분히 가능한 추측이었다.
집주인이 아닌 걸 언제 털어놓을지 가늠하느라 마땅히 더 나눠야 할 인사를 놓쳤다. 집에는 별 문제가 없는지 하는 것 말이다. 그런 문답을 거치고 나서야 연락 없이 밤중에 불쑥 찾아온 이유가 뭔지 물을 수 있었다. 어색한 나머지 악수라도 청할까 싶었지만 주만의 오른손에 파스가 붙은 게 눈에 띄었다.
"일하다가 삐었어요. 이게 뭐라고 며칠 놀게 되네요. 택배를 하고 있는데 수레를 써도 꽤 무겁거든요."
주만이 오른손을 주무르며 말했다.
주인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리러 찾아갔을 때, 세입자인 주만은 현관 밖에서 형을 맞았다. 처음으로 제 집을 가져 본 형은 내부를 봤으면 했지만 주만은 속도 모르고 문을 닫아버렸다. 문틈으로 잠깐 안을 들여다본 형은 현관에 아무렇게나 쌓인 물건들을 보고 기분이 상했다. 세상에는 별의별 세입자가 다 있다고 들었다. 임대 기간 동안 집을 쓰레기장이나 다름없이 만들어 놓는다는 세입자에 대해서도 들었다. 주만이 그런 사람일 것 같다고 형이 착잡해했다.
마땅치 않던 첫인상과 달리 세입자로서 주만은 무난했다. 잔 고장을 트집 잡는 법이 없었다. 집 문제로 연락하는 일이 한 번도 없다가 기한이 되자 재계약을 하겠다고 먼저 연락을 줬다.
"전화를 왜 이렇게 안 받으세요?"
주만이 물었다. 도진은 대답 대신 소파에 올려놓은 먹을거리들을 대충 치워 주만이 앉을 자리를 만들어줬다. 형의 휴대전화는 중지되었다. 도진 역시 휴대전화를 꺼놓고 지냈다. 처음에는 부재중 전화나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이제는 그마저 하지 않았다. 형 명의로 된 집 전화는 아예 해지해 버렸다.
주만이 잠자코 전화기를 꺼내 사진을 보여주었다. 물기에 젖은 타일 사진과 욕실 전체가 찍힌 사진이었다. 도진은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것 말고 딱히 할일이 없어서였는데 그러는 동안 조금 느긋해졌다. 물기 있는 욕실 사진이라면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 사진이나 보여주는 걸 보니 적어도 때 이르게 보증금을 돌려달라고 온 건 아닌 듯했다.
주만이 사진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처음에는 타일에 물방울이 맺히는 정도였는데 이내 얇은 막처럼 번들거리며 물이 고이더라고 했다. 주만은 당연히 집주인에게 연락했다. 수리에 돈이 드는 일이니 알려야 했다. 그래야 주인이 비용을 지불할 테니까. 주인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물이 계속 고여 할 수 없이 전문가를 불렀다. 인터넷을 검색할 필요도 없이 신발장 문 안쪽에 광고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열쇠, 누수, 인테리어 업체 광고였다. 주만이 그 전화번호를 써먹은 것은 처음이지만 아마도 이전 세입자에게는 보수와 관련한 전문가 번호가 종종 필요했던 것 같았다. 그러기에 충분히 낡은 집이었다.
전문가는 보자마자 파이프의 문제라고 했다. 흔히 벌어지는 일이라면서. 파이프 공사를 하려면 타일을 새로 깔아야 할 테니 이참에 그간 화장실에서 불편했던 것을 죄다 바꾸라고 했다. 주만이 결정할 일이 아니어서 주인과 상의하고자 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최소한의 공사를 시작했다.
화장실 공사가 끝나 한숨 돌린 다음날 거실 바닥으로 많은 양의 물이 흘러나왔다. 바닥에 놓여 있던 방석, 옷가지, 리모컨 같은 것이 젖었다. 작동되지 않는 리모컨의 물기를 마른걸레로 닦아내다가 주만은 불현듯 어떤 장면을 떠올렸다. 화장실 공사 중 누군가 쿵쿵거리며 바닥으로 망치를 내리치던 모습. 그 때문에 파이프에 문제가 생겼으리라 생각하고 전문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시 방문한 전문가는 이곳저곳에 탐지기를 갖다 대더니 누수점이 한두 곳이 아니라고 했다. 마루 전체를 뜯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바닥에 까는 동 파이프가 낡으면 누수가 생기곤 하는데, 정품을 사용하지 않고 동 함량이 미달인 제품을 써서 생기는 문제였다. 그렇기는 해도 거실의 문제일 뿐, 수리를 마친 화장실과는 상관없다는 뜻이어서 집주인에게 청구할 수리 비용이 훌쩍 늘었다.
공사를 시작한 지 세 시간쯤 지나 전문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전문가는 용건을 말하지 않고 주만에게 그저 집으로 오라고 했다.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짐작하게 하는 목소리로. 집으로 가는 동안 주만은 얼마 있지 않은 살림이 불어난 물에 둥둥 떠 있는 장면을 상상했다. 왠지 꺼림칙해서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여전히 꺼져 있었다. 열린 현관문으로 공사 중인 인부들이 오가는 걸 보고 나서야 안도했다. 적어도 물이 마구 넘쳐흐르지는 않았다.
전문가는 주만이 숨 돌리기를 기다렸다가 흰 천을 천천히 펼쳤다. 천이 눈에 익어 자세히 보니 부엌에서 행주로 쓰는 면포였다. 유난히 하얘 보였다. 위에 놓인 누렇고 딱딱한 물체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다.
"이게 뭡니까?"
주만이 묻자 전문가가 면포를 가까이 들이댔다. 주만은 그게 뭔지 보자마자 알았다. 뼈였다. 뼈인 줄 알지만 그걸 보여줘서 어쩌라는 것일까. 전문가는 알아서 생각하라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뼈는 누랬다. 흰 천 위에 있어서 그렇게 보였다. 주만이 뭔가 묻은 부분을 쳐다보자 전문가가 장갑 낀 손으로 문질렀다. 가루가 떨어졌다. 뼛가루는 아니고 시멘트였다.
인부들이 점심으로 치킨을 시켜 먹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남의 집에서 공사를 하다 말고 별걸 다 먹는다 여겼고 가정집 보수 공사는 이런 식의 비용 청구가 당연한 걸까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비용은 집주인이 대는지 자신이 대는지 잠시 계산했고 당연히 주인 부담이라고 결론 내렸다. 연락이 안 닿는 주인에게 화가 나서 한 푼도 빼놓지 않고 공사 비용을 다 받아내리라 다짐했다.
"웬 뼈냐고요."
주만이 재촉하듯 물었다.
"웬 뼈인지는 집주인이 아셔야죠."
전문가가 느긋이 대꾸했다.
"왜요?"
주만이 뼈를 만지려고 하자 전문가가 냉큼 뒤로 물러섰다.
"이게 다 증거잖아요."
"증거요?"
"이건 동물 뼙니다."
"당연히 뼈가 있으니 동물이지요."
"사연 있는 뼈라는 거죠."
전문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닭 말고 다른 동물을 떠올렸지만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이게 크기는 작아도……."
전문가가 뜸을 들였다. 불확실해서가 아니라 충격에 대비할 시간을 주려는 것 같았다.
"사람 뼙니다. 단단한 걸 보니 그래요."
"그걸 왜 가지고 다닙니까?"
인상을 쓴 주만과 달리 전문가는 피식 웃었다.
"가지고 다니기는요. 저기서 나왔습니다."
전문가가 파헤쳐진 마룻바닥을 가리켰다. 파이프를 교체하기 위해 접착식 합판을 떼어내고 시멘트와 흙, 자갈 따위를 퍼내다가 눈 밝은 인부가 그것을 찾아냈다.
뼈는 작았다. 크기 때문에 조류의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닐 수도 있었다. 사람에게도 작은 뼈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뼈가 왜 저기서 나와요?"
"그거야 경찰이 알아내겠죠."
"다시 좀 봅시다."
"자꾸 봐서 뭐 하게요."
투덜대면서도 전문가는 행주를 펼쳤다. 주만은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뼈를 봤다. 틀린 말이지만 맞는 말이기도 했다. 음식을 통해 돼지나 닭, 소의 뼈 일부를 보긴 했어도 발굴된 사람 뼈는 처음이었다. 뼈가 발견된 위치에 흥미가 생겼지만 적당한 화제는 아니라고 생각해 입을 다물었다.
"마루를 뜯은 건 처음인가요?"
전문가가 물었다.
"3년 만에 처음이죠."
"이전에는요?"
주만이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었다. 지은 지 40년도 넘은 집이었다. 기둥 말고 죄다 몇 번씩은 고치며 살았을 것이다. 전문가는 더 말했다. 주만이 하려다 만 얘기였다. 가느다랗고 작은 뼈가 사람 사는 집의 마루 아래 파묻혀 있는 게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서.
주만은 다행히 도진에게 그 얘기를 다 전하지는 않았다. 대신 다른 사진을 보여줬다. 마룻바닥을 온통 파헤쳐 놓은 사진. 흙탕물이 고인 부분도 있고 파이프가 드러난 부분도 있었다.
"집이 아주 망가졌네."
도진이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대출을 망설이는 사이 집값이 더 올랐을 때도, 재개발이 무산되었을 때도 실감이 안 났는데, 엉망으로 훼손된 내부를 보니 이제야 마음이 쓰렸다.
"원래 멀쩡한 집은 아니었죠."
"원룸 건물로 개조할 예정이었어요."
주만의 말에 도진이 항의하듯 대꾸했다. 형이 잠깐 그런 말을 한 적 있어도 실행될 리 만무한 계획이었다. 그럼에도 형은 종종 세상에 없는 그 건물을 떠벌렸다. 상상만으로 은근히 배짱이 생겨서 상상을 멈출 용기가 나지 않는 것 같았다.
"집에서 뼈가 나왔다니까요."
답답하다는 듯 주만이 지적했다.
"누구 뼈예요?"
"그거야 경찰이 조사하겠죠. 문제는 공사가 중단된 겁니다. 마루가 이렇게 엉망이 된 채로요. 알겠지만 그 집은 마루를 통하지 않으면 다니기 힘들어요."
도진이 맞장구치려다 입을 다물었다. 매수 당시 대지 면적만 고려하고 도면으로 본 게 전부여서 집의 구조나 내부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좁고 오래된 집들이 다 그렇듯 불편하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일단 집을 보고 어째야 할지 생각해 봅시다."
주만이 그렇게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느긋하게 소파에 기댔다. 눈치가 없었다. 도진이 일어서서 노골적으로 벽에 붙은 시계를 봤는데도 잠자코 있었다. 도진을 따라 시계를 보긴 했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내일 몇 시쯤 가면 될까요?"
약속을 정하면 일어설까 싶어서 도진이 물었다.
"글쎄요. 주말이니까 한 열 시쯤 가보죠."
의미를 헤아리느라 도진이 입을 다물었다. '가보죠'라는 말이 맘에 걸렸다. 만나자거나 보자고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주만이 소파에 기댔던 허리를 폈다. 드디어 일어날 건가 싶었는데 주만이 도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저는 그동안 어디서 지낼까요."
그걸 왜 묻는지 되물으려는데 주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공사를 하려면 시간이 걸려요."
"간단한 공사예요. 누수잖아요. 물이 새는 거요. 물은 어디서나 새는데 하필이면 마루에서 새는 거지요. 집이 무너진 것도 아닌데요. 날이 밝으면 전문가를 찾아서 당장 파이프를 교체할 수 있어요."
주만이 고개를 저었다.
"뼈가 나왔잖아요. 마루 밑에서요. 뼈가 나온 이상 맘대로 파이프를 교체하고 시멘트를 덮어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집은 누수 때문에 마루를 공사 중인 집이 아니에요. 증거를 품은 현장이잖아요. 범죄 가능성이 있는 현장이요. 뼈가 나왔다는 신고가 들어갔으니 경찰이 조사하게 될 겁니다. 마루 밑에 감춰진 걸 더 찾아낼 수도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다른 전문가에게 공사를 맡겨 함부로 덮어버릴 수는 없죠."
생각해 보니 그럴 것 같았다. 뼈의 정체가 밝혀질 때까지, 누구의 뼈이고 어떤 경로로 거기에 묻혔는지 경찰이 알아낼 때까지 공사를 재개하기 곤란했다. 경찰은 뼈에 대해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여길 것이다.
"여관비라도 주셔야 할 거 같아요. 이건 근본적으로는 집 문제니까요."
뼈가 나오고 주만은 이틀간 찜질방에서 묵었다. 바닥은 뜨겁고 공기는 더웠지만 한길에 누운 듯해 기분이 영 별로였다. 처음에는 여태 이런 처지인 자신에게 화가 났고 조금 지나자 염치없이 그런 집을 세놓고도 연락이 안 닿는 집주인에게 화가 났다.
"얼마나요?"
주만이 금액을 말했다. 터무니없는 액수였다. 도진이 수리 비용을 내줄 의무가 없다고 생각하는 줄도 모르고 주만이 근거를 댔다. 마루 공사가 재개될 때까지 대략 열흘간의 숙박비에 이미 지불한 화장실 수리비, 선금으로 지불한 마루 공사 대금이 포함된 액수였다.
일단 주만을 내보내는 게 중요했으므로 도진이 알겠다고 하려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계속 울렸다. 늦은 시간이지만 개의치 않고 초인종을 울릴 정도로 화가 난 사람이니 문을 열어 줘서 좋을 게 없었다. 도진은 잠자코 있었다. 주만이 딱하다는 표정으로 불 밝힌 거실 등을 가리켰다. 사람이 없는 척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어쩔 수 없이 도진이 현관 쪽으로 나갔다. 주만이 막아서더니 자신이 나가 보겠다고 했다. 말릴 새도 없이 주만은 페트병을 찌그러져라 밟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도진은 베란다에 몸을 숨겼다. 여러 사람의 무례한 목소리가 불분명하게 뒤섞였다.
잠잠해지기까지 오래 걸렸다. 바깥이 조용해진 후에도 도진은 잠시 베란다에 있다가 나왔다. 주만은 진이 빠진 듯 소파에 앉아 있었다.
"뭐라고 했어요?"
"이사 가라고 하길래 그러겠다고 했어요."
"이사요? 누구 맘대로요? 누구였는데요?"
"옆집이래요. 아랫집이라고도 하고 윗집이라고도 하고 1703호라고도 했어요. 저한테 삿대질한 사람은 주민 대표고요."
이웃들이 몰려온 건 처음이었다.
"범죄자랑은 살 수 없대요. 시끄럽고 무섭다고요. 날마다 사람들이 찾아와 소리를 지르고 돌을 던지는 걸 보니 둘 중 하나래요. 사기꾼 아니면 성 범죄자요. 당장 떠나지 않으면 조치를 취하겠대요. 그래서 이사 가겠다고 했죠."
"이사 가긴요. 아직 전세 기간도 남았어요."
"전세예요?"
"네."
"나랑 똑같네요."
"나는 그 집이 있잖아요."
"집에서 사는 게 불편해진 건 똑같은 것 같은데요."
"그 집은 수리하면 되고요."
"사기꾼하고 성 범죄자 중 어떤 거예요?"
"형이에요."
"네?"
"내가 아니라 형이라고요. 사실 그 집의 주인도 형이고요."
"이제 와서 본인이 아니라니……. 그럼 집주인은 어디 갔어요?"
"저도 몰라요."
주만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형을 찾아봤는데 행방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얻기 힘들었다.
"경찰에게 전화가 와서 알았어요. 피해자들이 몰려와서 형이 한 짓을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됐고요."
"나도 그랬어요."
"뭐가요?"
기묘한 친밀감이 느껴지는 게 거슬려서 도진이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택배가 분실되면 고객들이 나만 잡거든요. 회사에서도 나한테 책임지라고 하고요. 내가 이제껏 몇 번이나 물어준 줄 알아요?"
"저는 물어줄 수도 없어요. 액수가 너무 커요."
"며칠 전에는 너무 화가 나서 고객하고 싸웠잖아요. 뺨을 때리려는 걸 얼른 이 팔로 막았어요."
주만이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뺨을 맞는 것보다는 팔을 삐는 게 낫잖아요."
"찾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흔적도 없어요."
"아니에요,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요샌 잃어버린 택배도 다 찾아요."
"택배 말고요. 형이요."
"사람도 마찬가지라고요. 시간이 걸리긴 해도 찾을 수 있죠."
"연락이 전혀 없는데요?"
"일이 생기면 연락이 올 거예요. 나한테도 그랬거든요. 잘렸다고 바로 연락이 왔어요."
"얻어맞고도 잘린 거예요?"
"나도 때렸어요. 욕만 할 수도 있고 참을 수도 있었지만, 상대가 하는 대로 했어요."
"빈방이 하나 있어요. 찜질방이 싫으면 오늘은 거기서 자도 괜찮아요."
도진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사기꾼 방이에요."
"잠이야 어디서건 자면 그만이죠."
주만이 샌드백처럼 커다란 가방을 도진이 가리키는 방에 두고 도로 나왔다. 출출하다고 했다. 도진이 어쩌라는 거냐고 쳐다보자 "내 전세 보증금은 남아 있어요?" 하고 물었다. 도진이 잠자코 일어나 라면 물을 올렸다.
"형은 이제 집주인이 아니에요."
라면을 끓여 주고 나서 도진이 불쑥 털어놓았다.
"그 집, 경매로 넘어갔어요."
형 명의로 된 것이 아직 남아 있다면 곧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될 것이다. 형의 의사와 상관없이 피해자들이 그렇게 했다. 주만이 주먹을 날릴지도 모르므로 도진은 잠자코 기다렸다. 주만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다가 복잡해졌다고 중얼거리고는 라면을 먹었다.
"다음엔 집주인을 잘 보고 세 드세요."
"집주인이 좋으면 뭐 해요. 내 집도 아닌데."
갑자기 대뜸 현관문을 발로 차는 소리가 들렸다.
"보통 한밤에도 이럽니까?"
"어두울수록 더 화가 나잖아요."
"이웃들일까요?"
"집에 누가 있으니까 형이 온 줄 알고 저러는 것 같아요."
바깥이 이내 조용해졌다. 돌아갔나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작은 방이었다. 큼지막한 구멍이 뚫려 있고 창틀에 남은 유리 조각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흔들렸다. 뚫린 구멍으로 찬바람이 불어왔다.
"그래도 사람이 없는 방에 던졌네요."
주만이 추운지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아쉬운 대로 두꺼운 종이라도 좀 붙여 둡시다."
도진이 달력을 뜯어 붙이려는데 창틀에서 덜렁거리던 유리 조각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고 주만이 말했다.
"여기서 자라는 거죠? 밤새 바람이 들고 추울 텐데, 그러면 정말 한길 같잖아요. 이럴 바엔 찜질방이 낫죠. 거긴 깨진 유리창은 없어요."
주만은 천천히 라면 국물까지 다 먹고 가방을 멨다. 잠깐의 공모 때문이었는지 그가 간다니 서운한 생각이 들어서 도진은 잠자코 있었다. 주만이 현관을 나서다가 도진을 돌아보며 같이 갈 거냐고 물었다. 도진은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면서 피해자들을 피해 충동적으로 주만을 따라나섰다.
찜질방으로 가려나 했는데 주만은 비슷하게 생긴 다세대 주택이 모여 있는 골목 앞에서 택시를 세웠다. 길이 좁아 걸어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주만의 집이 있는 동네였다. 그 집이라고 따뜻할 것 같지 않지만 딱히 갈 데도 없어 도진은 묵묵히 따라갔다. 중개인에게 소개받아 처음 형과 함께 집을 보러 왔을 때가 기억났다. 좁은 골목의 어느 집 담벼락에 붉은 글씨로 기대지 마시오라고 쓰여 있었다. 노후로 인한 붕괴를 염려한 경고문이었다. 오면서 보니 그렇게 낙서된 담벼락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무너진 걸까.
"여긴 빈집이에요."
주만이 앞장서 걷다가 굳게 닫힌 대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휴대전화의 플래시 기능을 켜고 확인해 보니 시멘트 기둥 사이에 놓인 대문에 구청장 명의로 공가 관리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주의문이 무색하게 대문에 달린 자물쇠가 열려 있었다.
집은 사진으로 본 것보다 처참했다. 마루는 홍수로 범람한 개천 같았다. 고인 물에서 비릿한 냄새가 나는 게 정화조나 시궁창처럼 보이기도 했다. 누런 파이프는 흙탕물 아래 교각처럼 떠 있었는데, 일부가 수몰되어 더 낡아 보였다. 며칠째 보일러를 돌리지 않아서인지 냉기가 가득했고 마루의 짐을 몰아넣은 방이나 주방은 창고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뼈가 나왔어요."
도진은 주만을 따라 파헤쳐진 바닥을 보았다. 뼈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이 나왔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동물의 내장처럼 가지런히 늘어선 파이프에 굳은 흙과 시멘트 덩어리가 지방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주만이 사진을 보여줬다. 도진은 그걸 보고 형을 연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천 위에 놓인 작고 가느다란 뼈일 뿐으로,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아무 의미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도망 다니다 죽는 건 별로죠."
도진이 말했다. 형에 관한 나쁜 상상을 참기 힘들었다.
"그건 그래요."
"죽고 나서 몰래 묻히는 것도 별로고요."
"정말 별로죠."
"경찰은 언제 오나요?"
"시간이 걸리겠죠."
"경찰이라고 해서 보자마자 사람의 뼈인 줄 알기는 어려울 테니까요. 과학적으로 조사를 하겠죠. 전문 기관에 분석도 맡기고요."
"국과수 같은 데요."
"거긴 분석할 게 잔뜩 쌓여 있겠죠."
"그게 다 끝날 때까지 집을 이렇게 둬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도 여기는 창문에 돌을 던지는 이웃은 없잖아요. 쓰레기를 버려두는 사람도 없고, 화가 나서 한밤중에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요."
도진이 말을 이었다.
"당장 경찰이 올 게 아니라면 우리가 해봐요."
"뭘요?"
"뼈가 더 있는지 알아보자고요. 파봅시다."
"경찰에게 지적 받지 않을까요?"
"돕자고 한 일인데요."
"연장이 있어요."
주만이 방에서 가정용 무선 드릴을 가져왔다.
"그걸 쓰면 시끄러워서 옆집이 항의할 텐데요."
도진이 말했다.
"아무도 안 살아요. 그런데 이걸 쓰다 집이 더 엉망이 되면 어쩌죠?"
"이미 엉망인데요, 뭘."
"하긴, 그래도 우리 집이니까요."
주만이 말했고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뜻밖에 안도감이 들었다. 뼈에는 의미가 없지만 그로 인해 뭔가 달라진 기분이었다.
"뭐가 나올까요?"
"아무것도 안 나와야죠."
도진이 그릇을 가지고 바닥으로 내려가 흙탕물을 퍼냈다. 그런 다음 손으로 살살 흙을 헤쳤다. 주만이 따라 했다. 시멘트가 굳은 부분은 드릴을 썼다. 시끄럽고 오래 걸렸다. 주저앉아 있자니 다리가 아프고 바지가 젖었지만 두 사람 다 꼼짝하지 않았다.
"재작년이었나. 그때는 공사장에서 일했는데요. 지반 공사를 하는데 백골이 발견됐어요."
주만이 말했다.
"놀랐겠네요."
"안 놀랐어요. 나는 못 봤거든요. 공사가 중지된다고 해서 백골이 나온 줄 알게 됐어요."
"누구였어요?"
"신원불명이래요."
"다행이네요."
뭐가 다행인지 모르면서 도진이 말했다.
"누군지 아는 것보다 모르는 편이 낫긴 하죠."
기진맥진해진 도진이 주저앉았고 주만이 따라 앉았다. 몸이 축축하게 젖었다. 도진은 엉망이 된 집을 잠자코 둘러보았다. 한 번도 살아 본 적 없는 집인데 더는 낯설지 않다는 게 이상했다. 자기 손으로 바닥을 파본 집이 처음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뼈가 어떻게 생겼던가요."
도진이 물었다.
"뼈처럼 생겼어요. 길쭉하고 작지만 관절도 있고요."
"아무래도 닭뼈 같아서요."
"닭이면 좋죠."
"흙속에는 별의별 게 다 섞여 있잖아요."
"닭이면 마루를 덮어도 되는 것 아닐까요?"
"우린 전문가도 아닌데요. 엉망이 될 거예요."
"이미 엉망이라면서요."
주만이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머지않아 헐값에 팔릴 집이었다. 그러고 나면 곧 헐리겠지. 재개발을 기다리며 골목의 다른 집처럼 공가로 남게 되거나. 그 생각이 용기를 줬다. 거실 한쪽에 전문가가 두고 간 시멘트 포대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도진이 일어서서 시멘트를 가져왔다. 주만이 팔목을 주무르며 따라 일어섰다. 잘 되지는 않겠지만, 가품 동 파이프에서는 여전히 물이 새겠지만 애써 볼 작정이었다. 마루를 단단하게 회복하는 일이 어쩐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긴박한 일로 여겨졌다.
도진이 시멘트를 개려는데 파이프 연결 부위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더니 물이 조금 새어 나왔다. 주만이 바닥으로 내려가 파이프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편혜영

작가소개 / 편혜영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아오이가든』, 『사육장 쪽으로』, 『저녁의 구애』, 『밤이 지나간다』, 『소년이로』와 장편소설 『재와 빨강』, 『서쪽 숲에 갔다』, 『선의 법칙』, 『홀The Hole』, 『죽은 자로 하여금』이 있다.


《문장웹진 202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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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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