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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가

  • 작성일 2020-01-01
  • 조회수 3,124

[단편소설]



오늘의 시가



이원석




내 경우는 낙지볶음이었어.
선명이 말했다. 혀가 잔뜩 꼬여 있었고 나는 선명이 꼬인 혀를 꿈틀거리며 낙지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는 게 우스워 크게 웃었다. 선명은 언제나처럼 내가 실컷 웃을 수 있게 조용히 기다렸다. 선명이 소주를 한 잔 마시고 다시 잔을 채워 두 잔째를 막 마시려고 할 때 내 웃음이 멈췄다. 선명은 술잔을 다시 테이블에 내려 둔 후 말을 계속 이어 갔다.
그날 내가 혼자 낙지볶음을 먹었거든.
그날이 언젠데?
너 취했어?
아니, 그날 알아. 알지.
그래, 그날. 문을 열기도 전에 비린내가 나던 식당이었어. 들어서자마자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나한테 왔고. 가게 내부에는 수조가 있었고 나는 낙지볶음을 좀 먹을 수 있겠냐고 남자에게 물었어. 남자는 대답을 생략하고 다시 내게 물었어. 볶음은 산 것으로도 하고 냉동한 것으로도 하는데 그중에서 무엇을 먹겠냐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고 나는 고민하느라 대답이 늦었지.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고 저녁시간은 한참 남은 시간이었어. 손님이 한 팀도 없었는데 그런데도 남자는 내게 다시 한 번 물으며 대답을 재촉했어. 산 것과 죽은 것 중에 어떤 것이 좋으냐고. 결국 나는 그 둘이 어떤 차이가 있느냐고 남자에게 물었어. 남자는 별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어. 가격이 다르죠.
그렇겠지. 아무래도 다르지.
근데 나는 그런 걸 물어본 게 아니었거든.
그게 제일 다르고 제일 중요하긴 하니까.
다른 무엇보다도? 이를테면 서로 다른 맛보다도 가격이 더 중요해?
당연히 중요하지. 아닌가?
아니야, 맞아. 산 것이 더 귀한가요? 아무래도 더 비싸죠? 내가 물었고 남자는 그렇다고 말하면서 덧붙였어. 지금 낙지가 철이라고. 낙지는 언제든 먹을 수 있지만 지금의 낙지는 더 특별하고 맛있다고. 어떤 부위는 쫄깃하고 어떤 부위는 씹기도 전에 입안에서 녹아요. 먹다가 남으면 포장까지 해줄게. 그러니 가능하면 산 것으로 드세요. 남자가 웃으면서 말했고 나는 남자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였어. 그럼 산 것으로 주세요. 그렇게 말한 후에 남자가 안내해 준 자리에 가 앉았어. 버너에 불을 붙이고 불판이 달궈지는 동안 테이블을 둘러봤는데 메뉴판이 보였어. 갑자기 궁금해지더라. 도대체 얼말까. 지금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그 대단한 맛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 나는 손을 뻗어 테이블 구석에 놓인 메뉴판을 잡고 펼쳤어. 메뉴판에서도 낙지볶음은 제일 마지막에 있었고 냉동과 생물의 가격이 따로 적혀 있었어. 냉동은 나도 기억이 안 나고. 생물은 얼마였는지 알아?
그렇게 맛있다면 엄청 비쌌을 것 같은데.
아니.
그럼 생각보다 쌌어?
그것도 아니고, 그냥 시가라고 적혀 있었어.
싱겁네.
싱겁다고? 나는 전혀 싱겁지 않았고 아주 비싸거나 너무 싼 것보다 그 시가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어. 그렇게 귀하고 그렇게 부드럽고 그렇게 맛있는데 정확한 가격은 적히지도 않았다니. 얼마나 귀한지 알지도 못하고 얼마나 귀한지가 매일 달라지는, 그렇게 살아 있는 것이 존재한다는 게 너무 충격적이었어. 도대체 뭐가 매일의 가격을 정하는 걸까. 그게 너무 궁금해서 묻고 싶었는데도 차마 묻지 못했어. 아무도 모를 것 같아서.
선명은 거기까지 말한 후 아까 내려 뒀던 잔을 들어 내 앞에 내밀었다. 나는 그것이 내게 술을 권하는 것인지 아니면 건배를 하자는 것인지 생각하느라 망설였고 망설이는 사이에 선명은 몸을 앞으로 숙여 테이블 위에 놓인 내 빈 잔에 술이 가득 찬 자신의 잔을 들이밀었다. 잔과 잔에서는 기분 탓인지 평소보다 더 맑은 소리가 났다. 그것이 가득 찬 선명의 잔 때문인지 텅 빈 내 잔 때문인지는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잠시 메뉴판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었는데 주문을 받았던 남자가 쟁반을 들고 다시 왔어. 기름을 두르고 이것저것을 넣고 볶다가 낙지를, 그때껏 한 번도 본 적 없을 정도로 큰 낙지를 불판 위에 올렸어. 낙지는 불판 위에 떨어지자마자 엄청나게, 정말로 엄청나게 이런 식으로, 팔인지 다리인지 팔이자 다리인지 팔도 다리도 아닌 것인지 알 수 없는 온몸을 꿈틀거리기 시작했어. 남자는 그 낙지가 아주 싱싱하다고, 유난히 힘이 좋고 오래 산다고 말했어. 오래 산다고요?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어. 보통은 불판 위에 닿자마자 오그라들면서 죽는데 이 녀석은 저 위에서도 거의 일 분을 살아 있었잖아요. 남자는 자랑하듯 말했어. 나는 좀 이상했는데 왜냐하면 내가 산 것을 시켰으니까 산 것을 먹게 될 줄 알았거든. 볶아지고 익었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을 먹을 거라고 생각했었어.
그런 게 어디 있냐.
있어야지. 돈을 더 주고 더 귀한 것을 시켰으니까. 돈을 더 준 이유는 그것이 살았다는 이유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러네. 그건 좀 사기 아냐?
사기지. 어차피 죽을,
선명은 그렇게 말한 후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해서 바라봤더니 울고 있었고 나는 선명이 울음을 그치길 기다리다가 내 빈 잔에 술을 따랐다. 한 잔을 마시고 다시 잔을 채워 두 번째 잔을 마시려고 할 때 선명은 울음을 그쳤다. 어딘가 익숙한 광경이었고 나는 그 익숙함을 통해 우리가 이미 서로의 웃음과 울음에 아무런 힘을 보탤 수 없는 사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마시려던 술을 다시 테이블 위에 두자 선명이 말을 이었다.
사기지. 어차피 죽을 건데 살아 있었다고 돈을 더 받았으니까. 그렇게 치면 냉동된 것도 언젠가는 살아 있었을 텐데. 그게 가장 귀하고 중요한 것처럼 말하면서 팔아 놓고 결국은 똑같으니까. 남자는 한동안 불판 위에서 낙지를 볶다가 갑자기 버너의 불을 가장 약하게 줄이고 나한테 그걸 먹으라고 했어. 지금 먹어야 한다고. 너무 익으면 질겨지니까, 질겨지면 돈이 아까우니까 지금 먹어야 한다고. 나는 불판 위에서 조각난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낙지를 봤어. 별로 먹고 싶지 않았어. 야, 자지 마.
자긴 누가 잔다고 그래.
안 취했지?
당연하지. 그런데 있잖아.
응.
왜 갑자기 낙지 얘기를 하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우리가 낙지를 먹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여수에 낙지가 유명한가?
그러게. 이런 얘기를 왜 하고 있냐, 우리가.
선명은 한숨을 쉬며 테이블에 손을 짚어 몸을 일으켰다. 나는 술을 조금 더 마시고 싶었으므로 술잔을 들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선명의 잔에 술이 가득 찬 내 잔을 부딪쳤다. 이상하게도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테이블 위를 아무리 살펴봐도 깨진 것은 없었다. 자세히 보니 언제 마셨는지 선명의 잔은 이미 비어 있었다. 텅 빈 잔과 꽉 찬 잔 중에 깨지는 소리를 낸 것은 무엇일까. 나는 알 수 없었다.
야 너 술 없어.
말을 하며 고개를 들고 앞을 보았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어느새 선명이 멀어지고 있었다. 비틀거리다가 앞뒤로 꿈틀거리는 선명의 모습은 익어 가는 낙지 같았다. 나는 선명을 붙잡기 위해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몇 번을 고꾸라지고 테이블 위에 있던 것들을 모두 쏟은 후에야 겨우 중심을 잡고 설 수 있었다. 일어선 후에는 서둘러 선명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몸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고 선명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내가 눈을 뜬 곳은 숙소의 현관이었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붙잡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센서 등이 켜졌고 눈이 조금 부셨다. 백색의 센서 등은 아마도 몸을 뒤척일 때마다 켜졌을 것이다. 나는 기억을 되짚으며 센서 등이 꺼질 때마다 손을 휘저어 다시 불을 켰다. 중간 중간 기억이 잘려 나가 있었고 술자리의 마지막은 아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선명이 화를 냈고, 내가 쫓아갔고, 갔었나, 삼차를? 기억을 되짚다 보니 소주병이 생각났고 속이 많이 쓰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젯밤에 사라졌던 선명은 여전히 사라진 채 보이지 않았다. 편의점에 갔을까. 우유나 이온음료를 사왔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다시 불이 꺼졌고 나는 불안해졌다. 서울로 돌아간 걸까? 어제 술을 마시며 화가 난 것 같았으므로 그럴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술이 덜 깬 채였고, 이것저것을 따져 생각하기에는 너무 지친 상태였다. 더군다나 방을 대충 살펴본 결과 선명의 짐은 그대로였다. 나는 거의 기다시피 침대 위에 올랐고 눈을 감자마자 다시 잠이 들었다.
그게 이틀째 아침의 일이었고, 선명은 다음날도 연락하거나 돌아오지 않았다.



케이블카는 바닥이 뚫린 것과 뚫리지 않은 것이 있고 뚫리지 않은 것이 조금 더 저렴했다. 처음에는 별 고민 없이 저렴한 것을 타려고 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줄이 너무 길어 당황스러웠다. 대부분의 여행처럼 우리의 여행도 시간에 따라 정해 둔 계획이 있었다. 삼일째의 열한 시 반. 예정대로라면 선명은 꼭대기의 전망대에서 사진을 찍고 있어야 했다. 선명이 계획을 잘 지키지 않는 편이었으므로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가야만 했다. 선명이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그 가정만이 선명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크리스탈 캐빈을 타시면 대기 없이 지금 바로 입장 가능하십니다.
매표소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던 내게 매표소 직원이 말했다.
그러면 그걸로 할게요. 편도로 주세요.
크리스탈 캐빈은 왕복만 탑승 가능하세요. 타고 갔다가 타고 오셔야 해요.
무심하고 무덤덤한 말투여서 딱히 강매를 당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표를 끊고 곧바로 케이블카에 올랐다. 이왕 돈을 더 주고 뚫린 것을 탔으니 아래를 실컷 내려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손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앞뒤와 양옆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한동안 흙과 낮은 나무들만 이어지던 발밑의 풍경이 갑자기 바다로 바뀌었다. 순간적으로 변해버린 풍경 탓에 어지러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해졌다.
어지럽지 않으세요?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잠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등산복을 입은 중년의 부부가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반으로 접힌 눈가의 주름이 너무 선명해 구겨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부부는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 접점을 기준으로 나란히 앉은 부부는 키도 체구도 비슷해 잘 만든 데칼코마니 같았다.
어지럽긴 한데, 괜찮아요.
그렇게 아래만 보면 재밌어요? 앞도 좀 보고.
여자가 말하고
뒤도 좀 돌아보고 그러지 않고.
남자가 이어 말했다.
이걸 봐야죠. 이걸 볼 수 있기 때문에 더 비싼 거니까. 돈을 낸 거니까.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부부는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고 지나온 바다와 지나는 바다, 지나갈 바다에 대해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색이 다르고 흐르는 속도가 다르고 반짝이는 정도가 다르다고. 지나온 바다는 해를 받아 반짝이고 가야 할 바다는 짙은 녹색이라고. 그게 참 좋다고, 아름답다고. 나는 가만히 부부의 말을 듣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다르다니. 어차피 이 바다도 저 바다도 같은 바다일 텐데.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내가 고개를 들었다. 뒤쪽의 바다를 보려 몸을 돌리는 그 순간, 케이블카가 덜컹거렸다.
도착했네요.
남자가 말하고
끝났네요.
여자가 이어 말했다. 나는 결국 뒤쪽의 바다를 돌아보지 못하고 케이블카에서 내렸다. 부부는 흔들리는 케이블카에서 내리는 순간에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케이블카가 흔들리면 부부도 같이 흔들렸다. 그 모습이 아주 위태롭지만 안전해 보였다.
전망대에는 선명이 없었다. 자판기 옆에도, 망원경 앞에도, 산책로와 테라스에도 없었다. 사람이 아주 많았고 케이블카를 같이 탔던 중년의 부부를 한 번 더 마주쳤는데도 선명은 보이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오직 선명만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서웠다. 나는 한 시간 정도 선명을 찾아 헤매다가 다시 케이블카에 탔다. 돌아올 때는 나 혼자였다.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부부의 말이 떠올랐고 나는 자리를 옮겨 앉으며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러나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옆을 봐도 밑을 봐도 바다는 똑같았다. 나는 부부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보려는 사람만 볼 수 있는 것은 어디에나 있었다.
선명은 어디 있을까. 그 생각만 자꾸 들었다. 내가 정말 찾고자 하는 것은 색이나 유속이 다른 바다가 아니라 선명이었으니까. 모든 것이 그대로고 선명이 없을 뿐인데도 여행은 계획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힘겹게 계획을 세웠을까. 어차피 지키지 않거나 지키지 못할 것들을.



여행 계획을 짜던 날, 우리는 이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특히 이별의 시기에 대해 중점적으로 대화했는데, 언제쯤 헤어지는 게 좋을지, 서서히 거리를 두다가 아주 남이 되어버리는 건지, 아니면 그냥 단번에 남이 되어버리는 게 좋을지 등의 정답이 없는 문제였다. 정답 없는 대부분의 문제가 그러하듯 우리의 의견은 자꾸만 부딪혔고 이런 이야기를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즈음 결론 없이 대화가 끝났다. 그런 후에 우리는 곧바로 이 여행을 대비해 계획을 짰다. 우리가 짰다기보다는 선명이 주로 의견을 내면 내가 동의하는 방식이었다. 때문에 앞선 논쟁과는 다르게 대화가 길어질 이유가 없었다. 사실 선명이 짠 일정은 비용이나 체력 같은 상태적인 요소를 배제한 채 오로지 효율적인 동선만 생각한 것이었다. 별로 믿음직스럽지 못했고 변수가 너무 많아 계획대로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앞선 선명과의 대화에 너무 지쳐 있었고 계획이라는 건 애초에 그대로 지켜내기 힘든 것이므로, 그때 가서 적당한 것으로 대체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남은 소주를 잔에 따를 때쯤 딱 맞춰 선명의 일정이 완성됐고,
드디어 가네.
선명은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아직도 믿을 수 없지만 웃어버렸다, 정말로. 해맑게 웃으며 내게 잔을 내밀어 건배하려는 모습을 보자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선명이 아프고, 아프기 때문에 우리가 헤어지고, 그 방식에 대해 나눴던 그 모든 말들이 허무하고 의미 없고, 그런 주제에 아주 중요해져 버린 말장난처럼 느껴졌다.
선명은 많이 아팠다고 했다. 정확한 병명을 말해 주지는 않았고 차마 묻지도 못했지만 얼마 살지 못한다는 말은 선명에게 직접 들었다. 나는 선명이 많이 아프다는 말에 온몸이 쥐어 짜이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지만 얼마 살지 못한다는 말은 믿지 못했고 믿지 않았다. 선명은 종종 말을 과장하거나 일을 키우곤 했다. 그것은 의도된 것일 때도 있었고 선명 자신도 모르게 발동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선명의 말을 절대적으로 불신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저렇게 웃고, 저렇게 술을 마시면서, 담배를 피우면서, 얼마 살지 못한다니. 내가 아닌 그 누구라도 그런 말을 쉽게 믿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쉽지만 우리는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다.
선명의 메시지였다. 나는 전날 회식 때 술을 많이 마시고 아주 깊은 잠을 자다가 선명이 메시지를 보내고 꼬박 열두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메시지를 잘못 읽었다. 우리 헤어지자, 이렇게 읽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장을 보냈다. 알겠어. 그런 후에는 씻고 두유에 시리얼을 말아서 조금 먹다가 신문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신문을 읽었는데 한 면도 다 읽지 못했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고 자꾸만 억울한 마음이 생겼다. 이 상태라면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명의 메시지를 다시 확인해 보니 그건 아주 이상한 말이었다. 헤어지자 혹은 헤어져, 아니면 하다못해 헤어질까 정도의 술어만 됐어도 그러려니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좋을 것 같다니.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은 마치 헤어짐 외에도 몇 가지 선택지가 있다는 말처럼 느껴졌다. 혹은 극단적으로 비약한다면 헤어지는 게 좋아서 오랫동안 기다려 온 사람의 말 같기도 했다.
우리는 아주 오랜 세월, 날보다는 해로 시간을 세는 게 훨씬 자연스러운 세월을 함께 보냈다. 사귀자는 말이나 뉘앙스 없이 사귀었고 선명이 독립을 위해 보증금을 모으던 일 년쯤을 같이 살기도 했다. 언제나 생각이 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를 생각해야 한다면, 누군가가 보고 싶어진다면, 내게 그것은 선명이 아니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단 한 줄의 문장 때문에 그 모든 세월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아쉽기는 또 뭐가 아쉽다는 말인가. 한 글자 한 글자가 내게는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표현이었다. 애초에 글자라니, 이런 말을 텍스트로 접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말없이 멀어지는 건 생각해 본 적 있었고 어쩌면 썩 우리답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런 식의 이별은 정말 짐작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결국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선명에게 보내기 위한 장문의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시간 정도 메시지의 작성과 교정교열을 거듭하다 보니 화가 많이 가라앉아 버렸다. 냉정을 되찾은 상태로 다시 읽은 내 메시지는 너무 구질구질하고 절실해 보였다. 절박하구나, 많이 초조한가 보다, 누가 봐도 이런 생각이 들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장문의 메시지를 미련 없이 지우고 대신에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왜?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선명은 답장을 보냈고 그 답장을 읽자마자 나는 울면서 웃어버렸다.
아무래도 지금 만나자.
환장할 노릇이었다. 너무 좋았고, 답답했고,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려 내가 먼저 선명에게 아쉽지만 우리는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다. 그런 이상한 문장들과 텍스트로 통보된 이별 같은 것들은 그때 선명이 아주 많이 울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서야 납득이 갔다. 아주 많이, 아주 오래 울었어.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끝난 것 같았어.
선명의 화법은 늘 그런 식이었다. 의견을 말하기보다는 정답을 말하는 식. 원인이 아니라 결과를 말하는 화법. 분명하지만 미묘한 단어들을 선명은 주로 사랑했다. 그날도 선명은 어딘가 아프다는 말은 하면서도 어디가 아픈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나는 여행 계획을 짜며 한껏 들뜬 선명의 몸 이곳저곳을 눈으로 훑어보았다. 어디를 봐도 나나 다른 사람들, 심지어는 평소의 선명과도 달라 보이지 않았다. 선명은 그날 술을 마셨고 울었고 웃었다. 그러고는 나에게 아무래도 지금 당장은 헤어지지 않는 편이 더 좋겠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선명의 그 말에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다. 그날은 그랬다.


*


맛있었어?
뭐가?
그거.
너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자꾸 묻지 마.
말해 줘. 맛있었어?
어. 맛있었어.
산 것이 더?
무척이나.
선명이 사라지기 전날 우리는 숙소에 돌아와 자기 전에 이런 대화를 나눴던 것 같다. 아니, 나눴다. 그때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선명의 말과 목소리, 표정까지도 내게는 선명하다.


*


이게 뭐야.
선명은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거북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북선은 광장 한복판에서 입을 아주 살짝 벌린 채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때 거대한 위험으로부터 나라를 구했다던 그 배는 바다가 아니라 땅 위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등 뒤에서 휴대폰 카메라의 촬영음이 들렸고 거북선을 찍은 것이겠지만 나는 괜히 우리가 사진에 나왔을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주변을 둘러보니 광장에는 사람이 많았다. 서로 꼭 붙어 팔짱을 끼고 걷는 연인들도 있었고 누가 누구를 쫓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뒤섞여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그저 안다는 이유로 서로를 붙잡고 쫓거나 쫓기는 일을 하는 게 가능한가, 이런 날씨에?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광장을 둘러보다가 선명을 바라봤을 때 선명은 손날을 이마에 붙여 손차양을 만들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시선은 여전히 거북선을 향한 채였다. 사람들은 끝없이 줄을 서 거북선 안으로 들어갔고 그보다 조금 적은 사람들이 거북선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한참을 가만히 서서 거북선을 바라봤고, 바라보던 선명이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왜 그래?
이상해서.
보고 싶어 하지 않았어? 거북선.
이런 곳인 줄 몰랐어.
뭐가 어때서?
선명은 대답하지 않고 거북선 옆에 놓인 벤치로 다가가 앉았다. 앉은 후에는 오른손으로 명치 부분을 비스듬하게 쓸어내리며 숨을 조금 거칠게 마시고 뱉었다. 일 분 정도 후에는 호흡이 안정적으로 변했고 내게 연거푸 사과를 했다. 선명이 너무 진심으로 미안해했기 때문에 사실 아무렇지 않았지만 함부로 괜찮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잠시 거북선을 올려보다가 선명에게 다가갔다. 땀에 젖은 선명의 정수리를 오른쪽 검지로 쿡 찔렀고 선명은 나를 올려다봤다.
걷자. 저기 나무가 모여 있는 곳까지만 걸으면 그늘이야.
선명이 오른쪽 눈꺼풀을 조금 떨며 몸을 일으켰고 우리는 그늘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거북선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사람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바다 쪽으로 인접한 광장의 둘레에는 길게 울타리가 둘러져 있었고 나는 선명의 기분을 풀어 주고 싶어서 아무 말이나 했다. 저것은 조금 이상하다. 여수는 바다가 유명한 도시고 바다 때문에 오는 사람들이 아주 많을 텐데 바다를 막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막말로 막을 수야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멀지 않느냐고. 냄새마저 희미해질 정도로 먼 곳에 서서 바다를 보러 온 사람이 어떻게 실망하지 않겠느냐고.
왜 저렇게 했을까?
사실은 전혀 궁금하지 않았지만 나는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끝말을 올려 선명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 순간 선명의 걸음이 갑자기 멈췄다. 나는 뒤쪽에서 선명이 멈춘 줄도 모르고 한동안 계속 걸었다.
안전하라고.
선명은 내가 제법 많은 걸음을 걷고 난 후에야 대답했다. 선명이 조금 오래 멈춰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빨리 걷지 않았는데도 거리가 제법 벌어져 있었다. 그 거리 때문에 나는 선명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래서 완전과 간절, 안정 같은 단어들 중에서 선명의 단어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고르기 위해 제자리에 멈춰서야만 했다. 내가 걸음을 멈추자 선명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말했다.
더 안전하라고. 그게 가장 중요하니까 가능한 한 최대로 그러라고. 잘 모르고 보러 왔겠지만 바다라는 게 생각보다 더 위험하니까 멀어지라고. 안전하고 괜찮으라고.
말을 마친 선명의 걷는 속도가 다시 빨라졌고 나는 선명이 나를 지나쳐 앞서 나간 후에도 한동안 멈춰 선명의 말에 대해 생각했다. 덕분에 몇 분쯤 더 걸어 그늘을 발견하고 그보다 아주 조금 더 멀리 있는 소녀상을 발견할 때까지, 선명은 계속 내 앞을 걸었다. 나는 선명의 뒷모습을 바라봐야만 했다. 좀처럼 따라잡을 수 없었고 선명은 어째서인지 알 수 없지만 억지로 평소보다 걸음을 더 빠르게 걸었다. 당연하게도 뒤통수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나는 멀어지는 선명의 뒷모습이 너무 위태롭다고 생각했다.
소녀상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그늘을 찾아 한동안 걷다 보니 멀리 소녀상이 보였다. 우리는 여수에 소녀상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 상태였다. 물론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급하게 검색을 하고 일정을 짠 탓도 있었겠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녀상 주변에는 볕을 피해 그늘에 앉아 햄버거를 먹는 두어 명의 노인과 울타리에 기대어 바다를 바라보는 아이 한 명밖에 없었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면 평소에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았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소녀상의 목에는 노란 목도리가 감겨 있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지난겨울에 감아 둔 것 같았다. 올해 들어 가장 무덥다는 폭염 속에서도 목도리는 이상하다거나 어색한 느낌을 주지 않았다. 우리는 소녀상의 얼굴이 겨우 보이는 거리에 멀찍이 섰다. 둘 중 누구도 그 이상 소녀상 앞으로 다가서려 하지 않았다. 제법 먼 거리인데도 광장 저편 거북선 쪽에서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이상하게도 바다로부터의 거리는 같은데 저기서는 맡을 수 없었던 바다 냄새가 이곳에서는 났다. 갈매기 깃털이 햇볕에 타는 냄새, 물결이 물결을 밀어내는 소리 같은 것들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모든 감각이 훨씬 더 예민해지는 것 같았다. 저 광장과 이 광장이 전혀 다른 세계 같았고 조금 전과는 달리 바다와 광장을 구분 짓는 울타리가 아주 적절한 위치에 아주 적절한 거리로 둘러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좋다.
나는 선명에게 말했다. 선명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응, 여기가 좋다. 시원하고.
조용하고.
우리는 그늘에 앉아 연신 이곳이 좋다는 말을 주고받으며 정면을 응시했다. 정면에는 바다도 있었고 간간이 유람선도 떠다녔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것들에 시선을 주지 않고 소녀상만 응시했다. 바다나 유람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아마 선명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는 소녀상을 바라보며 선명이 했던 말을 다시 곰곰이 생각해 봤다. 안전. 완전도 간절도 안정도 아닌 안전. 선명은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소녀상은 덩그러니 광장의 한구석에 앉아 저쪽 광장을, 살아 움직이며 서로를 스치고 무엇인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누군가를 쫓고 있는 무수한 인파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약하게 불었다. 누구도 눈을 마주쳐 주지 않는 곳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는 소녀상의 노란 목도리가 조금 펄럭였다. 바로 그 순간, 그 뻥 뚫린 광장의 한쪽 끝이 내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굳건한 요새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소녀상 앞에 선명이 없었다.
아니다.
소녀상 앞에도 선명이 없었다. 여객 터미널과 선어시장, 이순신광장과 거북선 일대를 모두 돌아다녀도 없던 선명이 거기에도 없었다. 나는 소녀상 주변을 빙 돌며 근처에 세워진 시비(詩碑)와 시비에 새겨진 시들을 바라보았다. 바다의 색이 자꾸만 바뀌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어떻게 이곳에도 없을 수가 있을까.
너무 이상했다. 그렇게 안전해 보이던 곳이, 포근했던 그늘과 맑았던 침묵과 적당했던 울타리가 여전한데도 더 이상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왜 다를까. 그때와 지금은 무엇이 다를까. 그냥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을 뿐인데. 아니면 선명이 없을 뿐인데. 광장 저 반대편에서부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광장의 중심에 놓인 거북선과 광장의 한쪽 끝에 놓인 소녀상에 대해 생각했다.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천천히 걸어 가장 가까운 그늘로 가 앉았다. 태양이 무너지듯 기울고 있었고 그늘이 점점 넓어지는 게 눈에 보였다. 그늘은 소녀상 옆에 놓인 빈 의자를 거의 덮을 만큼 거대해졌다. 여기에 있을 줄 알았는데. 좋아했었으니까. 어디로 가야 할까. 이제는 정말 알 수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울고 있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조금 놀라 돌아보았다.
머리 좀 묶어 줄 수 있어? 너무 더워서 그래.
돌아본 곳에는 색이 다른 바다처럼 그 아이가 있었다.


*


얼마 살지 못한다는 선명의 말을 믿기 시작한 것은 여행 계획을 짰던 그 다음날이었다. 전날 필름이 끊길 정도로 과음을 했는데도 왜인지 이른 아침에 눈이 떠졌던 날. 일어나 보니 선명의 집이었고 내가 누운 침대 위에서 선명이 아직도 누워 있었다. 목이 말랐다. 부엌에 가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났는데 발바닥에 무언가 축축함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숙여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피라기에는 너무 묽고 피가 아니라기에는 너무 붉은 액체가 바닥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다. 피에 물을 탄 것 같기도 했고 물에 피를 탄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깜짝 놀라 선명을 돌아보았다. 선명의 손발이 조금 그을린 것처럼 검었다. 나는 큰 소리로 선명의 이름을 불렀다. 선명은 눈을 뜬 채 천천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애초에 자고 있지 않았던 것 같았다.
너 진짜야?
선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선명에게서 멀어지며 다시 한 번 물었다.
진짜 죽어?
선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동도 없이 나를 노려봤다. 선명의 침대는 너무 낡아서 모양이 좀처럼 복원되지 않았다. 내가 누웠던 그 모습, 그 넓이와 부피 그대로 선명의 옆이 텅 비어 있었다. 나는 계속 뒷걸음질 쳤다. 걸음마다 발바닥이 젖어들었다.
다르잖아. 어제랑 오늘이 너무, 하루 만에, 그래도 돼?
암막커튼이 쳐진 까닭에 방 안은 어두웠다. 그런데도 나를 노려보는 선명의 눈빛만은 선명하게 보였다. 선명은 한참 동안이나 나를 노려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말라붙었던 입술이 갈라지는 소리가 내게도 들릴 정도로 크게 났다.
왜. 그게 뭐가 이상한데?
왜냐고? 뭐가 이상하냐고? 몰라서 물어?
원래 그런 거야. 날마다 다르다고.
너 지금 그게…….
살아 있는 건 원래 다 그래.
내가 선명에게서 듣고 싶었던 것은 그런 말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더 중요하게, 더 먼저 듣고 싶은 말들이 아주 많았다. 가지 말라고, 옆에 있어 달라고 선명이 말했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혹은 어디가 어떻게 아프다고, 그러니 자신을 좀 도와달라고 말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더 달라질 것이 거기에 남아 있었을까. 그러나 선명은 그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뒷걸음질 치며 팔을 뒤로 뻗어 문고리를 잡았다.
문고리를 돌리고. 문이 열리고. 방을 나서며. 문을 닫았다. 좁아지는 문 사이로 선명이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나는 현관에 서서 신발을 신고 한동안 가만히 닫힌 방문을 바라보았다. 방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발바닥이 가려웠다.
그날, 집에 가서 속을 게워내고 선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명은 좀처럼 전화를 받지 않았지만 나는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선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명은 밤이 다 지날 때에서야 전화를 받았다. 나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밀어 넣으며 선명에게 말했다. 정말 미안하지만 너의 곁에 사는 것이 내게는 위험하게 느껴진다고. 우리 이제 그만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거기까지 말한 후에는 참지 못하고 선명의 이름을 울면서 불렀다. 선명은 신음에 가까운 호흡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처음에는 선명이 아주 화가 난 줄 알았다. 그것이 매운 낙지볶음 때문이었다는 것은 나중에야 선명에게 전해 들었다. 그날은 선명이 혼자 낙지볶음을 먹었던 바로 그날이기도 했다.
가는 날 보자.
뭐?
가는 날 보자고, 여수.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버린 것처럼 기겁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정해 뒀던 여행 일자가 점점 더 다가올수록 나는 오래 고민했고 결국 선명과 함께 여수에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것이 그날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선명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는 아직도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지금에 와 내게 중요하고 선명한 것은 이런 것이다. 그날 내가 혼자 낙지볶음을 먹었거든. 맛있었어. 무척이나.
나는 여전히 그 말을 믿지 않는다.


*


아이는 선명과 내가 처음 소녀상을 봤던 날에도 우리 앞에 나타나 똑같이 말했다.
머리 좀 묶어 줄 수 있어? 너무 더워서 그래.
우리는 슬슬 광장을 벗어나 돌게장 정식을 먹으러 갈 참이었다. 더군다나 아이의 모습이 너무 기괴하고 낯설었다. 전체적으로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본인의 옷이 아니었고 사이즈가 맞지 않아 밑단이 발가락 위까지 전부 덮은 채였다. 발이 보이지 않아서 더 이상했다. 왼손에는 낡은 옷을 입은 인형이 들려 있었고 오른손에는 방울끈이 들려 있었는데 인형을 든 쪽 소매에는 프릴이 없었고 방울끈을 든 쪽에는 소매에 하얀 프릴이 달려 있었다. 뚱뚱하고 어린 펭귄 캐릭터가 그려진 방울끈은 대칭이 잘 맞지 않았다. 선명과 나는 눈이 마주쳤고 나는 거절의 표시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선명은 이미 아이가 건넨 방울끈을 받아 든 채 몸을 일으킨 상태였다. 나는 선명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무 덥다잖아. 잠깐이면 돼. 잠깐만.
선명은 그렇게 말하며 아이의 손을 잡았다. 아이는 팔을 뻗어 소녀상 앞을 가리켰다. 폭염이었고 소녀상 앞에는 그늘이 없었다. 너무 덥지 않을까? 선명이 물었고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저곳이 좋다고, 저곳만 좋다고 말했다. 선명은 낄낄거리며 아이를 따라 소녀상 앞에 앉았다. 그 후로 한 시간 동안 소녀상 앞에서 인형의 머리를 묶는 아이의 머리를 선명이 묶어 줬다. 선명의 이마가 땀으로 번들거렸다. 신기하게도 아이는 땀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선명과 아이는 너무 많은 것이 달랐고 그중 무엇 때문에 흘리는 땀의 양이 다른지는 좀처럼 알 수 없었다. 나이이거나 체력이거나, 어쩌면 둘 모두이거나 둘 다 아닐 수도 있었다. 나는 가까운 그늘에 가만히 앉아 두 사람을 바라봤다. 아이가 인형의 머리를, 선명이 아이의 머리를 여섯 번 정도 풀었다가 다시 묶는 것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로 돌아왔다. 선명은 해가 진 후에야 숙소로 와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집에 데려다주고 왔어.
아니, 대체 왜?
집에 뭐가 있다고, 내가 꼭 봐야 한다고 그래서.
있기는 뭐가? 애가 그냥 하는 말이잖아, 그런 건.
내 물음에 선명은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선명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에게는 비록 엉성하나마 계획이 있었고 그 아이는 전혀 모르는 아이였다. 그렇게 고대했으면서, 이 여행을 기다렸으면서 알지도 못하는 아이 때문에 하루를 거의 모두 날려버리다니. 그러나 차마 선명에게 화를 더 낼 수는 없었다. 도저히 그럴 수 없을 만큼 선명은 지쳐 보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저 너무 염치가 없고 무례하기 짝이 없다고, 선명에게 그 아이를 욕했다.



그 아이였다. 그때와 똑같은 기괴한 옷을 입고 똑같은 말을 걸어오는 아이를 나는 이번에는 밀어낼 수 없었다. 선명이 이곳에 왔었다면 이 아이와 다시 만났을지도 몰랐다. 아이는 선명을 찾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나는 아이가 건넨 방울끈을 받아 들고 아이의 손을 잡았다. 아이는 이번에도 소녀상 앞을 가리키며 저곳으로 가자고 말했다. 아이와 나는 그곳으로 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선명이 나로 바뀌었을 뿐 똑같은 구조였다.
이름이 뭐야?
아이는 고개를 휙 돌려 나를 잠시 바라볼 뿐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혹시라도 아이가 내 모든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작정은 아닐지 불안해졌다.
나 혹시 기억해?
어제 봤어.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대칭이 맞지 않는 방울끈으로 아이의 머리를 뒤로 대충 묶었다. 내가 손을 멈추자 아이도 잠시 손을 멈춰 묶인 머리를 몇 번 만져 보더니 끈을 다시 풀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한 번 아이의 머리를 묶으며 물었다.
그럼 그 언니도 기억나? 어제 나랑 같이 있던…….
착한 언니.
그래, 그 언니. 혹시 오늘 본 적 있어?
있어. 봤어.
나도 모르게 아이의 머리를 당기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이는 작게 고함을 지르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아이에게 빠르게 사과를 한 후 심호흡을 했다. 한껏 들이마신 숨에 소금기가 섞였는지 목구멍이 따가웠다.
어디로 갔어?
우리 집에 있어.
나는 아이의 말을 듣고 손을 멈췄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믿기지 않는다고 해서 딱히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아이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해 봐야만 했다. 나는 아이의 어깨를 잡고 아이를 돌려 앉혔다. 아이는 순순히 돌아앉았다.
집이 어디야? 내가 그 언니를 꼭 찾아야 하거든.
찾아서 뭐 할 건데?
얘기를 해보려고. 얘기를 좀. 집이 어디야?
알아서 뭐 하게?
같이 좀 가자. 어제 그 언니는 데려갔잖아.
아이는 말없이 손을 뒤로 뻗어 자신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묶다 만 머리에서 방울끈이 쉽게 풀려 나왔다. 아이는 다시 한 번 그 방울끈을 내게 건넸다. 나는 울고 싶었다.
잘 묶어 주면 데려갈 수도 있어.
그렇게 말한 후에 아이는 다시 돌아앉았다. 해가 거의 저물어 가고 있었고 나는 천천히 아이의 머리를 다시 묶기 시작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한 손놀림이었다.
우리 집은 병원이야. 언니는 아프다며. 그래서 우리 집에 오라고 그랬어. 언니는 착하고 머리도 잘 묶으니까. 우리 집에 오면 병이 나을 거라고. 그러니 오라고. 그랬더니 왔어. 오늘 아침에. 내 머리도 묶어 주고 비비 머리도 묶어 주고. 비비는 얘야. 지금은 치료를 받고 있을 거야. 어쩌면 다 나았을지도 몰라. 아니면 더 아파졌거나.
아이는 그렇게 말하며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온 신경을 손에 집중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나는 아이의 머리에서 손을 떼어냈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오히려 아까보다 묶인 모양이 더 형편없었다. 아이가 손을 뒤로 뻗어 머리카락을 만져 보는 동안 나는 거북선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됐어. 가자.
아이는 천진하게 웃으며 검은 원피스 이곳저곳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후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 정도면 됐다니. 나는 다소 의아했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일어나 아이의 손을 잡았다. 광장을 벗어나 길로, 길 아닌 곳으로, 계단으로, 비탈길로 한참을 걸었다. 오르막 다음에 오르막이 나오기도 했고 내리막 다음에 내리막이 나오기도 했다. 아이의 손을 잡은 손이 땀 때문에 미끌거렸다. 아이의 땀인지 내 땀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이의 집에 도착할 쯤에는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작은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병원이라니. 건물 꼭대기에 달린 십자가는 영락없는 교회의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라고 하기에도 어딘가 이상했다. 희미하지만 향냄새가 났고 외벽에는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작은 코끼리. 아니면 큰 사자일까. 어떤 것은 작은 새나 커다란 나비 같기도 했다.
뭐 해, 안 들어와?
내가 한참을 밖에서 서성이자 아이가 다시 나와 내게 물었다. 옷이 너무 길어 발이 보이지 않는 아이가 서서히 다가왔다. 나는 멀뚱히 서서 건물 입구에 붙은 현수막을 바라보았다.
'신자(信者) 모집. 함께 믿을 사람을 구합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 안을 확인해야 하는데. 저기에 선명이 있다고 했는데.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때 안쪽에서 속을 게워내는 소리가 들렸다. 선명의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묽은 피 냄새도 났다. 선명의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어느새 다가온 아이가 내 손을 잡아 건물 쪽으로 당겼다. 나는 다시 한 번 건물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서 있었고 너무 어두워 실루엣만 보였다. 선명인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누구세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명인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선명에 관해 그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선명이라고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세상에는 너무 많았다.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선명을 찾고 있을까. 어차피 선명과는 이게 마지막인데. 이미 도착했는데. 이게 끝일 텐데. 향냄새가 점점 더 진해지고 있었다.
누구시냐니까요?
안쪽에서 선명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아까보다 더 가까이에서 들렸다. 길고 좁은 복도를 걸어오는 발소리도 들렸다. 나는 내 손을 꼭 잡은 아이의 손을 뿌리쳤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선명의 그 무엇도 믿을 수 없는 사람. 선명의 믿음조차 믿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자 선명을 찾는 일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일. 아까까지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는데도 한순간에 그렇게 됐다. 원래 그런 거야. 날마다 다르다고. 그런 말을 했는데, 누군가가. 그게 누구였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몸을 돌려 온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올 때는 아주 멀다고 느꼈는데 돌아갈 때는 전혀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가까웠다. 같은 길이었고 같은 거리인데도, 그 잠깐 사이에 왜 그렇게 변해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


선명의 집을 찾아간 것은 여수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나는 기억하고 있던 비밀번호를 눌렀고 다행히 번호는 바뀌지 않은 채였다. 선명의 짐을 현관에 두고 안으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는 말끔히 치워진 채였고 선명의 방에는 선명이 없었다. 단지 복원이 잘 되지 않는 침대의 한쪽이 푹 꺼져 있었다. 익숙한 형체였고 크기였지만 내 것인지 선명의 것인지는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짐을 두고 집에도 선명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는 이제는 정말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배가 고파 왔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내가 정말로 찾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선명이 말했던 해산물집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문을 열기도 전에 비린내가 나는 식당. 문을 열자마자 다가오는 남자와 가게 내부의 수조. 나는 남자에게 낙지볶음을 먹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남자는 산 것과 죽은 것 중 어떤 것으로 볶을지를 묻지도 않고 수조에서 낙지를 몇 마리 건져냈다. 나는 남자가 안내해 준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펼쳤다. 메뉴판에는 낙지볶음이 냉동과 생물로 분리되어 있었고 둘 모두 가격이 적혀 있었다. '시가'라는 단어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남자를 불러 물었다. 원래 생물은 시가로 판매하지 않느냐고. 산 것이니까, 매일 가격이 달라지니까 그게 맞지 않느냐고. 남자는 그런 가게도 있겠지만, 하고 덧붙였다.
애매하잖아요, 시가라는 게. 사는 입장에서는 진짜 그 가격이 맞는지 확인하기도 힘들고 파는 입장에서는 매일매일 가격을 확인해야 하고. 그냥 정해 두고, 손해 보는 날도 이득 보는 날도 있을 만큼만 정해 두고 팔아요. 어떤 날은 손해를 보면서, 어떤 날은 이득을 보면서. 적어도 우리는 시가라고 써서 판 적이 없어요.
나는 선명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선명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남자가 거짓말을 했을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보려는 사람만 볼 수 있는 것은 어디에나 있다. 내게는 같고 선명에게는 다른 매일이 있는 것처럼. 안정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저 안전하고 싶은.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이원석

작가소개 / 이원석

201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소설 부문. 문학레이블 공전.


《문장웹진 202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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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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