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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뒤에

  • 작성일 2019-10-01
  • 조회수 3,422

「2019 청년예술가 생애 첫 지원/단편소설」



어둠 뒤에



김멜라




옥상정원이 있다. 정원이지만 나무는 한 그루뿐이다. 아주 오래전 나무에서 레몬이 열리면 그 레몬이 레몬을 낳고 레몬이 레몬을 낳고 레몬을 낳고 낳고 낳았다. 때때로 장님 레몬도 낳았다.
내가 구름 밑을 만났을 때 그는 나에게 자기의 레몬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을 믿었다. 구름 밑도 내가 하는 말을 믿었다. 나는 두더지와 장님 레몬에 대해 말했고 구름 밑은 잎사귀에 대해 말했다. 잎사귀는 불에 타 재가 되어 날아갔다. 나는 옥상정원 의자에 앉아 레몬을 가득 실은 헬리콥터가 나타나고 사라질 때까지 구름 밑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옥상정원에 올라간 것은 계단을 잘못 들어서였다. 계단과 계단 사이의 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문은 한번 닫히면 다시 열리지 않았고 한번 계단에 들어서면 오직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계단이었다.
나는 반나절쯤 계단을 올라갔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한 시간 동안 계단을 올랐을 것이다. 계단에는 창문이 없었고 층수를 표시해 놓지도 않아 나는 몇 층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계속 오를 수밖에 없었다. 어딘가 계단의 끝, 옥상정원이 있을 거라 믿으며.
온몸이 땀에 젖고 손끝이 덜덜 떨릴 때쯤 나는 계단 끝에 다다랐다. 믿음대로 옥상정원이 있었고 회색 철문이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철문에는 거울이 달려 있었다. 크고 투명한 거울이었다. 옥상에 들어가기 전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라는 듯 어느 누구도 거울을 보지 않고서는 그곳을 지나쳐갈 수 없었다. 나는 있는 힘껏 거울 속 내 모습을 피해 옥상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구름 밑을 만났고 강아지 밥그릇을 알게 되었다.


강아지 밥그릇은 포대자루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 온 후 본래의 자기 이름을 버리고 강아지 밥그릇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했다.
"원래 이름은 뭐였는데?"
내가 물었다.
"마음의 울타리."
강아지 밥그릇이 말했다. 나는 강아지 밥그릇이란 이름에서 밥그릇을 빼고 강아지라 불렀다. 강아지는 사촌오빠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고가도로 아래로 떨어졌다고 했다. 사촌오빠는 술에 취해 있었지만 강아지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했다.
"넌 고백할 거 없어?"
강아지가 물었다. 나는 강아지의 턱과 아랫입술을 가로지르는 상처를 바라보았다. 강아지의 입술이 작고 얇아서 흉터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강아지는 눈도 작고 코도 작았다. 얼굴도 작고 키도 작았지만 목소리는 나보다 컸다.
"어릴 때 열병을 앓았는데 후유증이 남아서 약간 마비 증세가 있어."
내가 말했다.
"진짜?"
"여기, 왼쪽."
나는 내 말을 증명하기 위해 내 왼쪽 팔을 주물렀다.
"거짓말 아니지?"
강아지가 쪼그려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거짓말 아니지?"
강아지가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그게 강아지의 습관인 모양이었다.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거짓말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
"사실은……."
나는 머뭇거렸다. 그리고 턱과 아랫입술을 가로지르는 강아지의 상처를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벌레 한 마리가 입으로 기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몽유병이 있어. 어제도 분명 침대에 누워 잠들었는데 눈 떠보니 욕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어. 내가 왜 욕실에 갔는지 기억이 안 나."
나는 왼쪽 무릎을 매만졌다. 왼쪽 무릎이 아프다는 내 말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강아지가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올려놓았다.
"우리 엄마는 왼쪽 귀가 잘 안 들려. 어릴 때 장난으로 귀에 완두콩을 넣었는데 그게 안 빠져서 그렇대."
강아지가 말했다. 강아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뻣뻣했다.
"근데 난 거짓말 같아. 원래 잘 못 듣는데 엄마가 이유를 지어낸 거야. 안 그래?"
강아지가 포대자루에 등을 기댄 채 연기를 내뿜었다. 포대자루에는 '유리코팅인쇄'라고 쓰여 있었다. 강아지는 강아지처럼 웃으며 마치 자신의 비밀 상자를 열어 보이듯 포대자루를 열었다. 그리고 자루 안에 담긴 물건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은색으로 빛나는 납작한 물건이었다. 내 눈에는 캔 뚜껑을 따는 손잡이처럼 보였지만 강아지는 한사코 캔 뚜껑 손잡이가 아니라고 했다. 강아지가 말하길 처음엔 재미 삼아 그것을 모으기 시작해 이제는 포대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아졌다고 했다. 아무리 봐도 내 눈엔 캔 뚜껑 따개로 보였다.


내가 강아지를 따라 캔에서 캔 뚜껑 손잡이를 떼고 있으면 구름 밑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구름 밑은 내가 옥상정원에 오는 걸 좋아했다.
"유리는 좋은 이름이야. 불에 타지 않지."
구름 밑은 몇 번이나 내 이름을 칭찬했다. 구름 밑의 딸이었던 잎사귀는 불에 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잎사귀는 밤에 혼자 산에 올라 자기가 그린 그림을 모두 태운 후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캄캄한 산에 도깨비불처럼 빛났을 거야."
구름 밑이 말했다. 사람들은 잎사귀가 그린 그림을 좋아했다. 구름 밑도 잎사귀가 그린 그림을 좋아했다. 하지만 이젠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것은 잎사귀와 잎사귀의 그림이 탄 재 위에 싹튼 덤불이었다. 덤불은 검고 고불거리는 모양으로 자라 있었고 덤불 한가운데 있는 빨갛고 오목한 돌기는 덤불의 심장이었다. 헬리콥터에서 덤불을 내려다보면 마치 누운 여자의 덤불처럼 보일 것 같았다.
"다시 딸을 낳으면 이름을 메아리로 지을 거야. 메아리는 다시 돌아오니까."
구름 밑이 말했다.


옥상정원에는 사람이 많았다. 구름 밑은 오래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한산한 편이라고 했지만 나는 지금도 많다고 생각했다. 정원을 오가는 이들은 자신의 일부가 사라진 사람들이었다. 누군가는 귀가 없고 누군가는 기억이 없고 누군가는 눈물이 없었으며 토끼는 시간이 없었다. 케이크 위에 올려놓기 위해 반으로 자른 딸기처럼 몸의 반쪽이 잘려 나간 사람도 있었다. 가장 흔한 것은 강아지처럼 한쪽 손이 없거나 나처럼 한쪽 다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걸 사라진 레몬이라 불렀다.
우리는 사라진 레몬을 되찾기 위해 옥상정원에 왔다. 한쪽 다리로 옥상정원까지 오는 건 쉽지 않았지만 언제 레몬이 열릴지 모르기에 나는 하루도 거를 수 없었다. 옥상정원의 단 한 그루뿐인 나무에서 레몬이 열렸다. 강아지는 그 나무를 강아지 목걸이 나무라 불렀다. 강아지 목걸이 나무에서 레몬이 열리면 나무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레몬을 하나씩 따갔다. 누군가는 깨물고 누군가는 냄새를 맡고 누군가는 레몬에 구멍을 파서 그 안에 대고 무언가를 말했다. 그건 어떻게 해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나무에서 열린 레몬이 사라진 것을 되찾아 준다는 것이었다.
구름 밑이 말했다.
"사라진 것이 무엇인지 반드시 기억해야 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졌다는 사실마저 잊으면 레몬을 얻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다. 구름 밑은 그런 사람을 빗소리가 내는 음울함이라 불렀다. 빗소리가 내는 음울함은 빗방울이 모여드는 웅덩이와 함께 구름 밑이 경계하는 존재들이었다. 강아지가 레몬 안에 옷이나 신발, 월급봉투 따위가 있느냐고 물으면 구름 밑은 '그런 건 빗방울이 모여드는 웅덩이에 널려 있으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빗방울'이라 소리 내며 누군가 자기 발을 밟고서 사과도 안 하고 가버릴 때 짓는 표정을 지었다.


"저기 죄 없는 무리가 오는군."
구름 밑이 옥상정원의 문을 가리켰다.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 눈엔 아무것도 안 보여요."
내가 말했다.
"당연해. 그들은 죄가 없으니 몸이 없어. 그러니 누구도 볼 수 없지."
구름 밑은 죄 없는 무리가 오면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다며 강아지와 나를 옥상 위의 옥상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커다란 물 저장고가 있어 조금만 가까이 가도 눅눅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나는 옥상 위의 옥상은 처음 가보는 터라 긴장했지만 물 저장고를 둘러싸고 있는 회색 벽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 벽은 물 저장고에서 새어 나온 물 때문에 덧바른 회반죽이 흘러내린 채 굳어 있었다. 나는 뭉개진 회반죽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구름 밑은 그런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구름 밑은 그 이유를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했지만 내가 그 이유를 들은 건 나무를 둘러싼 물거품 기둥이 사라지고 구름 밑이 빗소리가 되어 그가 그토록 경계하던 떨어지는 빗방울로 빈 강아지 밥그릇을 투둑 투둑 두들기고 난 후였다.


우리는 옥상 위의 옥상에 앉아 죄 없는 무리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죄 없는 무리는 벌거벗은 무리와 물거품 기둥을 놓고 신경전을 벌였다. 내 눈엔 정면을 노려보는 벌거벗은 무리만 보였지만 그 반대편에 죄 없는 무리가 있다고 했다. 벌거벗은 무리는 죄 없는 무리가 보라는 듯 자신들의 사라진 레몬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당신은 어떻게 볼 수 있죠?"
강아지가 구름 밑에게 물었다.
"믿음의 눈으로."
구름 밑이 말했다. 나는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구름 밑이 믿는 것을 믿었다.
"죄 없는 무리가 머물 곳은 없어. 옥상정원도 마찬가지야."
구름 밑은 죄 없는 무리가 곧 옥상정원을 떠날 거라 말했고 그들은 떠났다.


강아지는 나를 따로 불러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강아지는 이곳이 정원이 아니라고 했다. 주변을 둘러봐도 정원이라고 할 만한 꽃은 없고 누군가 버린 깡통뿐이라 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강아지의 등 뒤로 초록색 지붕의 집들이 있고 옆으로는 포대자루가 있었으며 땅에는 강아지가 버린 꽁초가 널려 있었다. 좀 더 멀리 보면 난간을 따라 작은 화분들이 있었지만 그 안의 흙은 검게 메말라 있어 아무것도 자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옆으로 긴 나무 의자가 있고 그 옆으로 앞바퀴가 빠진 자전거, 그 옆으로 녹슨 트럼펫과 은색 사다리, 그 옆으로 초록 곰팡이가 핀 여행 가방이 있었다. 나는 좀 더 멀리 보기로 하고 좀 더 멀리 보았다. 좀 더 먼 곳에는 구름 밑의 소중한 덤불이 있었다. 그 옆으로 레몬 향이 나는 아주 큰 양초가 땅속에 박혀 있었다. 그 양초는 물거품 기둥을 제외하고 옥상정원에서 가장 큰 존재였다. 양초 전체에 투명한 심지가 있어 아무 곳에나 불을 붙여도 잘 붙었다. 양초는 밤이 된 옥상정원의 유일한 빛이었다. 구름 밑은 그 양초 밑에서 덤불을 어루만지며 물거품 기둥을 지켜보았다. 나는 더 더 더 멀리 보았고 그러자 문에 달린 투명한 거울이 보였다. 옥상정원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누구나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봐야 했다. 나는 그것이 옥상정원의 유일한 단점이자 위대한 점이라고 생각했다.
"저기 나무가 있잖아."
나는 레몬이 열리는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눈엔 물거품뿐이야."
강아지가 말했다. 나는 강아지에게 구름 밑이 믿는 걸 믿으라고 했다. 강아지는 콧방귀를 꼈다. 보이지도 않는 나무를 어떻게 믿느냐고 했다. 나는 옆에 놓인 화분에서 작은 돌 하나를 집었다.
"자, 여기 내 손에 돌이 있지? 그런데 내가 이렇게 등 뒤로 감췄어. 돌이 보여?"
강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 여기 내 손에 돌이 있잖아. 봤지? 하지만 이렇게 뒤로 감추면?"
강아지가 얼굴을 찌푸렸다. 더 이상 내 말을 듣지도 않는 것 같았다.
"강아지, 넌 돌이 안 보여. 그래도 내 손에 돌이 있지? 이게 바로 믿음이야."
내가 말하자 강아지는 우산의 빗물을 제대로 털지도 않은 채 버스에 올라 의자에 앉는 사람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자꾸 밥그릇을 빼고 부르는 거야?"
강아지가 말했다. 강아지는 이제껏 내가 자기 이름을 올바르게 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그런 사람이 믿음 어쩌고 하는 것에 실망을 감출 수 없고 그런 사람에게 돌아서지 못하는 자신에게도 화가 난다고 했다. 나는 미안해, 미안해, 두 번 사과했다. 강아지는 내 손에 든 돌을 집어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옥상정원은 옥상정원이기 전에 공장이었다. 공장에서는 유리투명인쇄를 만들었다. 그전에는 공장 부지였으며 그전에는 폐허였고 그전에는 산이었다. 잎사귀는 산에서 불탔다. 그리고 지금 이곳은 무덤이라 했다.
"여긴 내 무덤이야."
구름 밑이 말했다. 구름 밑은 예전엔 누구나 산을 보며 무덤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땐 다 그렇게 믿었고 믿지 않는 게 믿는 것보다 훨씬 바보 같은 일이라 믿었다. 그렇게 말하며 구름 밑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구름 밑은 구름을 올려다보는 듯 고개를 들고 눈꺼풀을 깜박였다. 구름 밑의 눈물이 눈물의 샘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구름 밑의 눈물을 흐르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런 일은 건방진 일이기 때문에 두 손을 얌전히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다. 나는 내 건방진 태도와 기분을 떨쳐버리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나 걸었다. 걸을수록 몸이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강아지에게 왼쪽 팔이 마비되었다고 말한 뒤부터 몸 왼쪽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았다. 구름 밑이 왼쪽으로 쓰러지는 나를 붙잡았다.
"초조하니?"
구름 밑이 물었다. 내 손은 땀으로 축축했다. 구름 밑은 말없이 나를 물거품 기둥 앞으로 데려갔다.
"내가 밤마다 보고 있어."
구름 밑이 말했다. 도적같이, 물거품 기둥은 도적같이 허공으로 흩어져 그 자리에 레몬이 열리기 때문에 누군가는 밤에도 물거품 기둥을 지켜봐야 했다. 구름 밑은 옥상정원에 오는 사람 중 가장 잠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옥상정원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은 건지도 몰랐다. 내가 그에게 언제 잠을 자느냐고 물으면 구름 밑은 자기는 한숨도 자지 않는다고 했다. 그건 약간 거짓말이었다. 구름 밑은 밤에 자지 않는 대신 낮에 꾸벅꾸벅 졸았다. 강아지는 구름 밑이 노인이기 때문에 그런 거라 했다. 그가 정원지기를 하는 것도 나이가 많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내 생각에 구름 밑이 정원지기를 맡은 이유는 그가 식물과 곤충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구름 밑이 추억하는 옥상정원에는 나비와 꿀벌이 가득했다. 많은 종류의 꽃이 피어 있었고 새와 벌레도 많았다.
"두더지는요?"
나는 구름 밑에게 물었다.
"두더지는 아주 능숙한 일꾼이지. 손이 삽처럼 납작하고 단단해."
구름 밑이 말했다. 나는 구름 밑이 해주는 오래전 옥상정원 이야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강아지는 내 귀에 대고 구름 밑이 하는 말은 몽땅 거짓말이라고 했다. 그게 강아지의 방식이었다. 나는 내 방식이 있었고 얼마 동안 그 방식을 따르기로 했기 때문에 구름 밑이 하는 말을 믿었다. 구름 밑도 내가 하는 말을 믿었다. 언젠가 레몬을 가득 실은 헬리콥터가 날아와 날 계단으로부터 들어 올려 줄 거라 말하면 구름 밑은 으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밤이 되면 더 이상 헬리콥터만 믿고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또다시 계단을 짊어져야 했다. 한쪽 다리로, 나는 옥상정원을 짊어졌다. 구름 밑은 내가 떠나기 전 레몬 향을 풍기는 초에 불을 붙였다. 성냥도 컸고 초도 컸고 불꽃도 컸다. 불꽃이 어른거리는 구름 밑의 눈동자는 회색빛이었다.
"초조한가요?"
내가 물으면 구름 밑은 이제 기억은 어렴풋하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기억은 메아리라는 것을.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푹 잘 잤다.


다음날 나는 강아지와 함께 계단을 올랐다. 강아지는 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계단을 잘 올랐다. 나는 계단에 앉아 몇 번이나 쉬어야 했다. 옥상정원에 다다르자 먼저 도착한 강아지가 자기의 신체 부위 중 한 곳을 거울에 대고 문지르고 있었다. 나는 강아지의 그런 모습을 못 본 척 해주었다. 강아지는 날 보더니 옥상정원 안을 가리키며 이렇게 소리쳤다.
"저것 봐라, 저것 봐! 구름 밑이 하는 말은 다 가짜야!"
강아지가 나에게 두 눈으로 똑똑히 보라고 했다. 구름 밑은 유리코팅인쇄 포대자루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나는 구름 밑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자기가 조는 걸 모를 거라 생각했다. 구름 밑이 깨지 않게 강아지를 멀리 가버리게 한 후 나는 구름 밑 곁에 앉았다. 잠든 구름 밑의 손바닥이 펼쳐져 있었다. 손에는 여러 장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꾸불꾸불한 선이 미로처럼 그려진 그림이었다. 나는 구름 밑이 깨지 않게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로 말했다.
"뭘 그린 건지 통 알 수가 없네."
그러자 구름 밑이 말했다.
"구름이 움직이는 걸 스케치한 거야."
구름 밑은 자면서도 나와 말을 잘했다. 그는 나에게도 손을 내밀어 보라 말했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구름 밑은 내 손에 적힌 글자들을 읽었다.


「내 이름은 일곱 글자다. 어떤 사람은 성만 부르고 어떤 사람은 앞에 두 글자만 부르고 또 어떤 사람은 뒤의 두 글자만 부른다. 그게 내 삶이다. 아무도 내 이름의 처음과 끝을 모두 부르지 않는다. 그건 시간과 관련된 일이고 시간은 기억의 다른 말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이름을 만들었다. 오직 부르는 사람 말고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거울.
나를 낳고 기른 사람은 두더지다. 두더지는 자신이 나를 낳고 길렀다고 했다. 남자가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고 물으니 사실 낳은 건 아니고 캤다고 했다. 두더지가 사는 땅굴에서 나를 캤다고 했다. 두더지 말에 따르면 갓난아기였던 나는 흙 묻은 감자들 사이에서 벌거벗은 채 울고 있었다. 나는 두더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두더지는 땅을 팠다. 땅속에서 감자를 캐고 당근을 캤다. 두더지는 삽자루처럼 손이 넓적하고 단단했다. 그 손으로 땅을 파서 감자와 당근을 캤고 나는 그걸 먹고 자랐다. 무럭무럭 자랐다. 내가 두더지에게 도대체 나는 어디에서 온 거냐고 물으면 두더지는 땅에서 왔다고 했다. 언제나 그 말뿐이었다. 나는 두더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두더지가 집에 백과사전을 들고 왔다. 앞으로는 바쁜 아버지를 괴롭히지 말고 궁금한 걸 여기서 찾아보라고 했다. 나는 백과사전의 맨 앞장과 끝장을 펼쳐 보았다. 그다음 끝장부터 읽었다. 백과사전 뒤에는 색인이 있었다. 나는 감자와 당근을 찾고 부모와 거짓말을 찾았다. 감자와 당근은 설명이 있었지만 부모와 거짓말은 없었다. 있긴 했지만 없는 게 나았다.」


구름 밑은 손바닥에서 눈을 떼고 나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유리란 이름이 가짜야?'
그러나 구름 밑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선 모두 가명을 써."
구름 밑은 나의 다른 쪽 손바닥을 펼쳐 거기에 써진 글자들을 읽었다.


「레몬을 처음 알게 된 건 백과사전이다. 평화로운 동산의 이야기였다. 동산은 작은 정원처럼 아담했지만 그곳에서 열리는 레몬은 신비한 능력이 있었다. 한 마디로 레몬은 먹으면 눈 뜨게 하는 과일이었다. 무엇에 눈 뜨는지는 먹어 봐야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무엇에 눈 뜨는지 확실하지 않다며 레몬을 먹지 않았다. 동산에 레몬이 흘러넘쳤지만 아무도 레몬을 먹지 않았다. 어느덧 레몬은 동산 전체를 뒤덮었다. 사람들은 레몬을 밟지 않으려 조심해야 했다. 혹여 풀밭에 누워 낮잠을 잘 때 입속으로 레몬이 떨어질까 입을 꾹 다물고 자야 했다. 두려움이 많은 사람은 아예 잠을 자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레몬의 번식력은 대단해서 동산의 내부까지 파고들었다. 감자 뿌리에도, 당근 뿌리에도 레몬이 열렸다. 사람들은 레몬을 먹고 눈 뜨지 않으려 동산을 떠났다. 두려움은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동산 밖은 사막과 얼음뿐이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용기를 냈다. 레몬을 먹고 눈 뜨지 않기 위해 서로의 용기를 북돋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레몬의 손바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땅과 바다, 하늘과 구름이 레몬으로 뒤덮였고 공기마저 레몬이 되었다. 사람들은 숨 쉴 때마다 레몬을 마셨다. 레몬은 차곡차곡 사람들 몸에 쌓여 갔다. 레몬을 마신 사람들은 피부에 작은 반점이 돋아났다. 붉게 부푼 반점은 점점 커졌고 그들은 몸이 가려워 하루 종일 팔다리를 긁어댔다. 어떤 사람은 팔 한쪽이 떨어져 나갈 만큼 긁어댔다. 어떤 사람은 다리 한쪽이 떨어져 나갈 만큼 긁어댔다. 세상에 팔 한쪽, 다리 한쪽인 사람이 늘어 갔다. 떨어져 나간 신체 부위에서 작은 레몬이 돋아났다.
사람들은 놀라 몸에 돋아나는 레몬을 잘라냈다. 도끼로 찍거나 송곳으로 도려내기도 했다. 떼어낸 레몬들은 모두 모아 불 태웠다. 하지만 다음날이면 같은 자리에 또 레몬이 돋아났다. 레몬을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다는 걸 안 누군가 차라리 레몬을 신으로 받들자고 제안했다. 오랫동안 증오하고 피해 다닌 레몬을 어떻게 신으로 섬기느냐며 거부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레몬을 소중히 대했다. 매일 다섯 번씩 레몬을 씻고 문지르며 입을 맞추고 가장 향기로운 향유를 뿌리고 다른 사람이 자기 몸의 레몬을 해치지 못하게 천으로 감쌌다. 사람들은 몸에 난 레몬을 감싸기 위해 옷을 입기 시작했다. 몸 전체를 검은 천으로 꽁꽁 싸매기도 했다. 그러나 레몬은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이 레몬을 천으로 덮기 시작하자 레몬은 점점 줄어들었다. 땅과 바다, 산과 하늘, 공기에 스민 레몬도 점점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자기의 레몬이 작아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며 더욱 열심히 닦고 입을 맞추고 향유를 뿌리고 몇 겹씩 천을 둘렀지만 레몬은 점점 줄어들었다. 태산 같던 레몬은 바위로, 바위 같던 레몬은 돌로, 돌 같던 레몬은 자갈로, 자갈 같던 레몬은 모래로, 먼지로 줄어 마침내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이제 소수만이 몸에 레몬을 지녔으며 그들의 레몬도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소수의 레몬을 갖기 위해 싸웠다. 누군가는 가짜 레몬을 만들어 팔았다. 소수의 레몬조차 점점 줄어들고 줄어들어 완전히 사라졌다. 사라진 자리에 검지만 한 상처가 생겼다. 상처 사이로 외로움이 들어왔다. 뒤이어 허무가 들어왔고 후회와 죄책감이 파고들었다. 마지막은 언제나 슬픔이었다. 사람들은 찢겨진 살 틈에 손을 넣어 그것들을 빼내려 했지만 상처만 더욱 깊게 할 뿐 빼낼 수 없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상처 속에 그 무엇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덤불을 심었다. 덤불은 레몬의 그림자였고 아직 덤불의 심장은 그 무엇도 닮아 있지 않았다.」


"이제 내려갈 시간이다."
구름 밑은 내 손바닥을 덮고 말했다.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레몬은 레몬일 뿐이야."
구름 밑은 레몬에 대한 생각을 너무 많이 하면 잠을 잘 수 없고 잠을 자지 못하면 몸이 허약해지고 허약한 몸에는 레몬에 대한 생각이 침입하니 내려가서 잠이나 자라고 했다.
"이건 옛날이야기일 뿐이에요."
나는 단정하듯 말했다.
"단정하듯 말하지 마. 난 기억이 없어졌다고 단정했지만 기억은 메아리처럼 되돌아왔어."
나는 구름 밑의 말을 믿었다. 메아리에는 심지가 있었고 거기에 붙은 불은 밤이고 낮이고 꺼지지 않았다.


다음날 옥상정원이 소란스러웠다. 간밤에 물거품 기둥이 눈에 띄게 투명해졌다고 했다. 나는 구름 밑에게 달려갔다.
"드디어 오늘인가요?"
나는 좋아서 북이라도 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디선가 담배 냄새가 났다. 강아지가 나를 향해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드디어 오늘이라지?"
강아지도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지들 말고 좀 앉아."
구름 밑이 말했다. 구름 밑은 물거품 기둥이 완전히 투명해지려면 시간이 더 걸린다고 했다. 한 시간이 걸릴 때도 있지만 며칠씩 걸리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물거품 기둥이 투명해지면 나무가 보이는 건 시간문제였다. 나는 배낭을 내려놓고 그 안에서 토마토 한 무더기를 꺼냈다.
"무덤가에서 먹기 좋은 과일이군."
구름 밑이 토마토를 집어 입에 물었다. 나에게도 권했다. 그러나 나는 먹으려고 가져온 게 아니라 던지려고 가져온 것이라 말했다.
"사과는 폭탄이 아니야."
"이건 사과가 아니에요."
"이건 사과잖아. 이건 멜론이고 이건 복숭아."
구름 밑은 내가 들고 온 토마토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한 입 더 깨물었다. 강아지는 끝내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날은 아무 일 없이 해가 졌다. 구름 밑은 나에게 오늘 밤은 옥상정원에 있으라고 했다.
"역시, 오늘 밤이군요."
나는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내가 레몬이 열리는 나무는 어떻게 생겼냐고 묻자 구름 밑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나무는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생겼고 그건 레몬도 마찬가지지만 분명한 건 나무를 보고 레몬을 손에 쥐는 순간 이건 나무고 이건 레몬이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거라 했다.
다리 없는 사람과 손 없는 사람, 코 없는 사람과 시간이 없는 토끼, 죄 없는 무리와 벌거벗은 무리가 모였다. 그들은 모두 레몬을 기다렸다. 나무가 드러나면 먼저 레몬을 가지려고 물거품 기둥의 앞자리로 몰려들었다. 강아지도 앞으로 가려 하자 구름 밑이 막았다. 레몬은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 하나씩 돌아가고도 남을 만큼 많을 거라 했다. 나는 구름 밑이 하는 말을 믿었다. 조금씩 투명해지던 물거품 기둥은 내가 구름 한 번 올려다보는 사이에 유리처럼 맑아졌다. 나는 나무가 드러날 거라 믿었다. 나는 구름 밑이 믿는 것을 믿었으니까. 그러나 구름 밑이 믿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구름 밑은 내게 물었다. 무엇이 보이느냐고. 나는 저건 나무가 아니라고 했다. 비가 왔고 강아지가 소리쳤다.


강아지가 소리치는 소리는 이제 막 태어난 아기의 화내는 울음소리 같았다. 강아지는 확신에 찬 사람의 얼굴로 내게 물었다.
"넌 왜 여기 왔지? 무얼 잃어버린 거야?"
강아지가 나에게 이제 거짓말은 하지 말라고 했다.
"넌 왜 여기 있지? 여기 왜 온 거야?"
강아지는 만약 내가 거짓을 말한다면 나의 남은 한쪽 다리마저 못쓰게 만들어 빗방울이 모여드는 웅덩이에 내던져 버리겠다고 했다. 그곳에 가면 사라진 자신의 한쪽 팔이 있을 거라 했다. 자신이 이렇게 된 건 사촌오빠의 입에서 나는 술 냄새보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더 믿었기 때문이지만 후회는 없다고 했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했다. 내가 구름 밑을 만났을 때 그는 나에게 자기의 레몬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을 믿었다. 구름 밑도 내가 하는 말을 믿었다. 강아지 너는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너는 이렇게 말했으니까.
"두 번 다시 밥그릇을 떼고 부르지 마."
나는 미안해, 미안해, 두 번씩 세 번 사과했다. 알루미늄 조형물을 포대자루에 수집하는 너의 믿음을 믿었으니까. 이제 물거품 기둥은 사라지고 레몬은 납작해지고 뜯겨져 누군가의 포대자루에 담기겠지만 내 손 안엔 아직 씨앗 세 개가 남아 있었다. 내가 이렇게 주먹을 쥐고 등 뒤로 감추면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믿음.


나는 씨앗 하나를 화분에 심고 손가락을 흙 속에 박았다. 마치 물을 주듯이. 그리고 나머지 두 개의 씨앗을 들고 옥상을 내려갔다. 입으로 헬리콥터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소리를 내면서. 골목을 따라 마음의 울타리에게 갔다. 강아지는 잠을 잘 땐 여전히 마음의 울타리였다. 씨앗 하나를 그녀의 귓속에 넣었다. 마지막 하나는 내가 삼켰다. 그날 밤 나는 나의 아래에서 무언가 커다랗고 단단하게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바지와 속옷을 내리고 보니 까마득한 어둠이 있었다. 어둠 뒤에 무엇이 올지 알 수 없었다.




* 본 작품은 2019 청년예술가 생애 첫 지원사업에 선정된 작가의 작품입니다.















김멜라

작가소개 / 김멜라

2014년 단편소설 「홍이」로 제6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수상.


《문장웹진 2019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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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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