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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 작성일 2019-10-01
  • 조회수 3,141

[단편소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화성의 아이 2



김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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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구인인 조 버든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지만, 시작 지점을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몰라 헤엄만 치고 있다. 그러니까 생각이 날 때마다 넓어지고 길어지는 이 얘기는 두서가 없을 것이다. 다섯 나라의 지구 언어를 익혀 왔기 때문에 단어가 모자라거나 문장을 꾸릴 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밀려오는 감정에 맞는 입술의 대문을 열 수가 없었다. 나는 쉼표가 들어간 문장으로 말문을 열었다.
먼저 어머니의 죽음이 있었고, 그다음에 나의 출생이 있었다.
그전에는 우주인의 공격이 있었고, 그전에는 우물이 있었다.
그전에는 쿠키처럼 구워진 별들이 노란 태양을 따라 천천히 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모든 이야기의 끝은 쿠키처럼 바싹 구워지다 부서져 버리는 별의 모습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 속에는 내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내가 들어 있는 이야기뿐이다.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밖에서는 끈질기게 말을 걸어 왔다. 그들은 나직하지만 조바심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재촉했다.
"얘야, 내 목소리 들리니?"
물론이다. 전부터 들어왔으니까. 엄마가 말해 줬고 뱃속에서도 숱하게 들어왔기 때문에 둘의 음성을 구별할 수도 있다.
나는 자궁 속에 있다. 좁지만 웅크려 있기에 충분했고, 내가 원하는 만큼만 어두웠다. 3백년 이상 엄마와 나, 둘뿐이었지만 그런대로 잘 지냈다. 엄마가 나를 가진 채 우주를 가로지르는 동안 나는 죽지 않을 만큼 영양을 섭취했고, 다른 것도 섭취했다. 엄마가 나를 보지 못하고 죽어버린 것이 유감이다. 내가 얼마나 똘똘한지 보여주고 싶었는데 말이다.
내가 태내에서부터 판단이 들어 있는 문장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DNA 조리법에만 기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냉동된 채 우주를 가로지른 시간이 스며들어 영향을 발휘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눈코입이 없는 덩어리였을 때부터, 실핀처럼 가느다란 척추와 콩보다 작은 뇌를 가지고 있던 시절부터 나는 얼지 않은 지성을 인지했다. 생각은 안개처럼 옅고 형체가 없었지만 그래도 예감의 형태로 존재했다. 그래서 이런 순간이 올 줄 알고 있었다.
"제발 좀 나와 보렴."
조심스러운 노크처럼 라이카는 앞발로 배를 톡톡 두드린다.
"힘을 주고 산도를 찾아봐. 내가 이 방향으로 밀어 볼 거다."
데이모스의 연산에 '다정함'이 추가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온기어린 기계음으로 내가 할 일을 지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엄마가 죽은 마당에 태어나야 할까? 이대로 양수 속에 익사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 아닐까? 내 몸은 이 순간에도 엄마의 영양을 흡수하고 있다. 심장이 멈춘 후에도 멈추지 않는 탯줄의 진동. 하지만 곧 침묵하겠지. 나 역시 침묵한다면 익숙한 이 공간은 아늑한 관으로 바뀔 것이다. 쇼펜하우어를 읽기 전부터 나는 염세주의자였다. 죽은 엄마의 자궁 속에 웅크린 몇 분이 그렇게 나를 만들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자살하지 않았고 나 또한 그럴 것이다. 그래도 일단 투덜거려 보았다. 마이크가 없다고 무대에서 떠드는 사람처럼.
"거기에는 하늘이 없잖아."
"있어. 지구처럼 파란색은 아니지만 살구색 하늘이 있지."
"먹을 것도 시원찮고, 물도 없잖아."
"걱정 마라. 먹을 건 충분한 데다 우린 말이지, 우물도 가지고 있단다."
라이카는 재산을 자랑스러워하는 백만장자 같은 말투로 알려주었다. 오케이, 물이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엄마가 없잖아."
"그건 그래, 하지만······."
데이모스가 마지못해 인정한다. 내가 처량한 우주고아 신세라는 것을 말이다.
"거참, 말 더럽게 많네. 그만 나불대고 썩 나오지 못해!"
라이카가 참지 못하고 컹컹거리는 바람에 대화는 중단됐다. 깜짝 놀란 내가 몸을 쭉 폈는데, 그 서슬에 문이 열렸다. 뒤이어 무지막지하게 눌러대는 압력 때문에 몸을 비틀었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첫 걸음은 폭발적이다. 그다음엔 데이모스의 팔에 잡혀 로켓에 탑재된 화물처럼 나머지 몸도 주르륵 밀려 나왔다. 제기랄, 나는 연극무대에서 아기라는 배역을 맡은 것처럼 세상에 등장한다. 저절로 울음이 터졌다. 볼품없고 미숙한 여느 신생아처럼.
"됐다, 정말 잘했어!"
라이카는 정신없이 꼬리를 들까불며 까끌한 혀로 나를 핥았다. 간신히 눈을 뜨자 검은 털에 뒤덮인 라이카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뒤이어 데이모스의 금속 팔이 탯줄을 잘랐고, 냅킨 같은 흰 천으로 내 몸을 둘둘 감았다. 춥다. 화성이 춥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살벌하게 추울 줄은 몰랐다. 방금 전까지 죽을 궁리를 하던 내가 이제는 얼어 죽을까 봐 걱정하고 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목욕통 안에 들어 있었다. 온도가 어찌나 안성맞춤으로 따뜻한지 잠시 양수 속으로 돌아왔나 착각했을 정도다. 그러나 엄마는 없고 처음 보는 실내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우주선 창문들은 왜 다 동그란 것일까?
"너희에게 가장 부러운 게 뭔 줄 알아?"
내 몸을 씻겨 주면서 데이모스가 말을 걸었다. 나는 처음부터 말을 잘했고 로봇은 그런 나를 제대로 대우해 주었다. 차차 알게 될 사실이지만 데이모스는 나를 어린애 취급 하지 않아서 좋다. 반면 라이카의 장점은 다 커버린 다음에도 여전히 나를 어린애처럼 돌봐준다는 데 있다. 둘 다 피부는 맘에 들지 않는다. 하나는 털이 너무 많고 다른 하나는 차가운 금속이니까.
"전능한 로봇께서 나 같은 핏덩이에게 부러울 게 뭐가 있담."
최대한 비꼬는 말투로 대답했다. 아무리 건방지게 굴어도 데이모스는 언성을 높이거나 화내는 법이 없다. 반면 라이카는 무섭다. 무례하게 굴면 콱 물어버릴 거라고 으르렁거리니까. 까불고 싶으면 데이모스에게만 까불어야 한다는 것을 첫날부터 깨달았다.
"여기."
데이모스는 탯줄이 떨어져 나간 내 몸 한가운데를 살짝 눌렀다.
"배꼽?"
"그래, 배꼽. 엄마와 이어져 있던 증거. 꼭 쉼표처럼 생겼네."
"너에게도 케이블 콘센트가 있잖아."
"그건 탯줄과 달라. 자, 받아.
"이게 뭐야?"
"어린 돌. 네가 태어난 날 같이 태어난 돌이야. 하늘에서 떨어졌지."



어린 돌은 내 동생 같은 거라 지금도 목걸이로 만들어 걸고 있지만 말은 하지 못한다. 나에게는 개와 로봇뿐이었다.
나는 쑥쑥 컸다. 군장을 하고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아테네처럼 태어날 때부터 목을 가누고 의사표현을 했으며 한 달 만에 직립해 걸었다. 나는 가르쳐주는 것을 잘 익히는 학생이었고 발육 속도가 남다른 아이였다.
"화성에 인구수를 늘리기 위해 유전자를 조작했을 거야."
라이카는 내 성장 속도에 반쯤은 감탄하고, 반쯤은 시기하는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말 안 듣는 말괄량이에 얼굴도 못생겼지만 냄새만은 그런대로 괜찮다고 했다. 라이카는 뭐든지 나에게 주고 싶어 했다. 자기가 기르는 네 마리의 애완벼륙까지도.
나는 거절했다.
화성에서의 유년은 짧았다. 마야 ― 바로 내 이름이다 ― 는 두 살부터 식물을 돌보고 '태고수프'에 물을 갈아 주었으며 홈스쿨링을 하고 수영도 배워야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즐거운 것은 화석 발굴 여행이다. 우리는 종종 캠핑을 떠났다. 데이모스가 지도에 표시해 둔 지점까지 이동해 며칠을 머무르면서 땅을 파헤치는 것이다. 이걸 왜 하는지 모르겠지만 뼈들이 넘쳐나는 황무지를 헤매다 보면 여기가 화성이 맞나 싶다. 하긴, 물도 나오는 마당이니 엄마가 알고 있던 별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데이모스는 나에게 화석을 찾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일단 화석을 찾을 수 있게 자전거를 탈 줄 아는 사람처럼 영원히 잊지 못하는 법이지."
알아듣기 힘든 비유다. 자전거를 타본 적은 없지만 낚시라면 해본 적이 있다. 우물에서 피라미를 잡는 수준이었지만. 화석을 찾는 일은 낚시와 비슷하다.
다섯 번째 여행에서 월척을 낚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내가 예사롭지 않은 돌을 발견한 것이다. 거꾸로 처박혀 있던 이 암석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색과 촉감을 가지고 있었다. 데이모스에게 보여주자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줄 알았다. 우주선으로 돌아온 즉시 실험실에 틀어박혀 살던 데이모스가 마침내 엄숙하게 선언했다.
"이건 진화의 비밀이 담겨져 있는 카탈로그야."
그는 60cm쯤 암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표면은 먼지 한 톨 없이 손질되어 있었다.
"우물이 있으니까 우린 다윈식으로 시작할 수 있어. 잘하면 조물주가 될지도 모르겠군. 마야가 굉장한 걸 찾았어."
"잘난 척 그만 하고 알아듣게 말해 줄래?"
라이카가 핀잔을 주자 데이모스는 과학적 설명을 곁들어 자기의 계획을 말해 주었다.
"미생물이 나왔다고. 더 중요한 것은 표본이 될 만한 화석들이 케이크처럼 층층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지. 이걸 물에 담그면 뭔가 나올 것 같아. 티백을 물에 넣어 차를 우리는 것처럼 암석을 물에 넣고 가공해 주면 더 많은 미생물들이 나올 거야. 이 돌은 행성 간 여행에서 미생물이 살아남도록 처리한 것처럼 보여. 친절하게 사용법까지 곁들여서."
"그걸로 뭘 한다는 거야?"
"화학물질 칵테일에 미생물을 더해서 배양하는 거지. 재료를 모아 가열하고, 건조시키거나 냉동하다 보면 무생물이 생물로 변할 거야. 여기 표본을 참조해서 이렇게······."
"잘 안 될 것 같은데."
라이카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데이모스는 국자로 냄비를 젓는 듯한 시늉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한테는 '병 속에 든 편지'가 있잖아."
그가 허황된 꿈에 부푼 것은 내가 맨손으로 태어나지 않은 탓이다.
엄마의 주검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데이모스는 두 가지의 놀라운 작업을 해두었다. 하나는 엄마의 인격을 백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태반에서 나온 캡슐(이것을 '병 속의 편지'라고 불렀다)을 분석한 것이다. 캡슐 안에서 균사와 씨앗, 물고기 알을 찾아낸 데이모스는 신중하게 실험을 진행해 왔다. 물고기들을 부화시켜 우물에 풀어 놓고 균사에서 자라난 버섯을 애지중지 키우고 있다. 씨앗이 담긴 스무 개의 화분 중에 오직 두 개만이 푸른 잎을 달고 자라났는데 데이모스는 이것으로 과수원을 만들어 보겠다는 포부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제 과수원과는 비교도 안 될 원대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라이카는 태고수프 운운하는 데이모스의 계획이 허황된 것이라고 여겼지만('무슨 연금술사 같이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과학자가 저래도 돼?') 우주선 안에 수조를 설치하는 일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벼룩 한 마리 키워내지 못한다 해도 내 장난감은 되겠다 싶던 모양이다.
"두고 봐, 내가 제대로 된 생태계를 만들고야 말 테니."
데이모스가 실험실에서 나오지 않자 나를 가르치는 일은 라이카의 몫이 되었다. 늙은 시베리아허스키는 주로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다 내가 하품을 하자 놀이인지 수업인지 알쏭달쏭한 '냄새 공부'를 시작했다.
라이카가 물고 온 냄새 키트는 요술 상자 같았다. 화면에 맞춰 뚜껑을 하나씩 열었는데 난생처음 맡아 보는 냄새들이 풍겨 나왔다. 팝콘 화면이 나오면 버터에 튀겨진 팝콘 냄새가 났고, 딸기 화면이 나오면 새콤한 야생딸기 냄새가 나는 식이다. 후추 향을 처음 맡던 날에는 재채기를 연거푸 하다가 눈물까지 흘렸지만 어떻게 이 수업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땅콩과 참깨의 고소함을 구분하고, 이국적인 난초 향을 종류별로 맡아 볼 수 있으며, 발사믹 식초 냄새를 맡으면 저절로 침이 고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말이다. 개에게서 후각 수업을 받는 것은 로봇에게 철자법을 배우는 것보다 까다로웠지만 그럼에도 즐거웠다. 모든 뚜껑을 열어 혼합된 냄새를 맡던 순간은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교향곡을 듣는 것 같았다. 내가 너무 황홀해하자 라이카가 대포소리 같은 방구를 뿌뿌뿌뿡 뀌며 산통을 깼다.
"내가 뭐 먹었는지 맞춰 볼래?"
"우웩. 너무한 거 아냐? 진짜 심해!"
"미안, 이제 눈을 감아 봐."
손사래를 치고 질색을 하자 라이카는 아무 화면도 없이 작은 병 하나를 열었다. 미심쩍었지만 시키는 대로 눈을 감고 코를 킁킁거렸다. 매우 옅지만 기묘하고 달콤한, 엄마의 살 냄새 같은 향이 퍼졌다.
"너한테서 났던 냄새야. 샘플도 너한테 얻은 거고."
라이카는 씩 웃으며 윙크를 했다.
"갓난아기의 숨골에서 나는 냄새. 생명의 냄새지. 만약 내가 신이 되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꽃을 창조해야 한다면 난 이 냄새로 할 거야."
가슴이 뭉클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향기가 내 어린 시절의 냄새라니, 이런 좋은 친구가 있어 내가 이렇게 잘 자라는 것이다.
냄새 수업을 하는 날에는 반드시 신기루가 나타났다. 나타난 게 아니고 '보였다'고 해야 할 테지만 황야 위로 피어오르는 풍경이 너무도 생생해서 냄새가 불러온 착시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을 정도다. 신기하게도 우리 중에 데이모스만 신기루를 보지 못했다. 원하는 풍경을 '내부에서' 불러올 수 있는 로봇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안됐다. 신기루를 보는 것은 화성에서 누리는 가장 큰 행운이니까.
나는 태어나서 줄곧 그래 왔던 자세로 라이카의 등을 베고 벌렁 드러누워 황야를 바라보았다. 삼나무 냄새를 맡았기 때문인지 크리스마스 트리가 나타났다. 반짝거리는 전구로 장식된 삼각뿔 모양의 나무 꼭대기에는 황금별이 달려 있다. 나는 조바심을 내며 하나라도 더 보려고 눈을 부릅떴다.
"저 화려한 천을 두른 도자기 인형은 뭐야, 우주인인가?"
"동방박사. 동쪽에서 별을 보고 따라온 사람들이지."
"그럼 푹신푹신한 방석 위에 누운 아기는? 혹시 나야?"
라이카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아기예수라고 말해 주었다. 예수에 대해 듣는 동안 신기루는 모래그림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안타까워 손을 뻗어 보았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라이카는 꼬리를 몸통에 붙이고 느긋하게 말했다.
"이런 날은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하는 거야."
"메리 크리스마스, 라이카."
"메리 크리스마스, 마야."
로켓을 발사하기 전에 외치는 카운트다운 소리처럼 들리는 주문이다.
'화성은 얼어붙은 사막, 금성은 타오르는 지옥.'
오래전에 지구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살아가는 이 땅은 그렇게 춥지만은 않다. 아늑한 우주선과 간헐천이 솟아오르는 우물, 무엇이든 가르쳐주는 데이모스와 모닥불처럼 따뜻한 라이카의 등이 있으니까.



열두 살이 될 무렵 우리의 재산은 눈부시게 늘어났다.
자라난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간헐천이 솟아오르는 우물은 아담한 호수로 변했고 주위에는 무릎까지 오는 풀들이 에워쌌다. 초록은 위대한 색이다. 화성의 붉은색에 맞서 싸우는 풀잎은 승리의 깃발이었다. 우물은 호수만큼 커졌지만 우리는 습관이 되어 여전히 '우물'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나는 우물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했는데 어릴 때는 헤엄치고 놀던 곳에서 점점 더 어려운 기술을 익혀야 했기 때문이다.
"15분 4.5초."
물에서 나오자 데이모스가 기록을 알려주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나는 들고 있던 돌을 던져버렸다. 금세 수면으로 떠오르는 나를 보고 데이모스가 고안한 방법은 무거운 돌덩이를 들고 가라는 것이다. 호수 바닥에 앉아 아가미로 호흡하는 법을 계속 익히라고 했다.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으라는 소리처럼 들렸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은데 "한 번 더."라는 말을 들으니 돌아버릴 것 같다.
"그만 하면 안 돼? 15분을 넘긴 건 처음이잖아."
"한 시간은 버텨야 한다고 봐."
데이모스는 항상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껏 지구에 살았던 종들의 99%가 멸망했으니 성장이 끝나기 전에 뭍과 물, 양쪽에서 살아갈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말이다.
"너에게 아가미와 폐가 둘 다 있다는 걸 명심해. 성장하면서 진화해야 해. 한쪽 문을 여느라 다른 쪽 문이 완전히 닫혀버리기 전에 양쪽 다 드나드는 법을 익혀 놔야 한다고."
"나는 태어나는 데도 3백 년이 걸렸어. 그런데 이제 또 다른 몸으로 바꾸는 연습을 하라고? 난 열두 살이야. 아직 어린애라고."
"우리가 지켜줄 수 없을 때를 대비해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해야 해. 외계인이 오면 다행이지, 그만한 고등 생물체가 여기까지 날아와서 시비를 걸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지구인들이 나타난다면?"
순간 엄마의 무덤이 떠올랐다. 뒤이어 지구에 끌려가 갈기갈기 해부되는 내 모습이 지나갔다. 잠깐 떠올려 본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물에서는 숨 쉬는 거, 먹고 싸는 거, 이동하는 거 전부 달라져야 해. 잠과 휴식조차 다른 형태가 되겠지. 새로운 몸으로 살아가는 감각을 익혀야 해."
"나더러 인어공주가 되라는 거야? 인어공주는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잖아."
"너는 인어가 아니야. 하지만 우리에게는 언제까지나 공주님이지. 소중한 우리 공주."
"여기에는 영원히 우리밖에 없을 거야, 나는 뭐, 그것도 괜찮아."
라이카에게는 통할 어리광이었지만 데이모스는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텅 빈 전자레인지 같은 얼굴. 이럴 때 건드려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속사포 같은 잔소리가 쏟아졌다.
"네가 똑똑하기는 해. 하지만 어떤 종류의 똑똑함이지? 지능과 습득이 빠르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살아남으려면 똑똑해지는 것보다 몸의 감각을 익히는 게 훨씬 더 중요해."
그러나 열두 살의 나는 잠수하는 것보다 달리는 것이 훨씬 더 좋았다.
화성의 모든 언덕이 나의 놀이터였다. 전속력으로 비탈길을 내려가는 게 얼마나 즐거웠던가. 몸 구석구석까지 전달되는 활력, 근육이 팽팽해지는 긴장감, 온몸으로 퍼지는 심장박동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숨이 찰 때까지 달리다 햇볕에 달구어진 바위에 기대어 쉬고 있으면 내 앞에 펼쳐진 대지는 시간만큼이나 넓고 끝이 없었다.
"우리는 모두 별-물질로 만들어졌어."
언젠가 라이카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누구의 말이냐고 묻자 '칼'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칼 누구?' '세이건. 칼 세이건 말이야.' 라이카는 유명인을 잘 아는 친구처럼 불러대는 버릇이 있다. 나는 물을 끼얹기 위해 호수에 다가갔다가 내 얼굴을 본다. '잡종.' 어느 영화에선가, 지구인들이 외계인에게 이런 말을 한다. 그 말에 담긴 모욕감이 어찌나 강한지 사전을 찾기 전부터 저절로 알아들었을 정도다. 물갈퀴가 달려 있는 손발, 등지느러미가 돌기처럼 튀어나온 척추. 지구인들이 나를 보면 틀림없이 잡종으로 보일 것이다. 이런 몸이 아니라면 잠수훈련 따윈 하지 않아도 될 텐데.
"태고수프인지 뭔지 빨리 성공하는 게 좋을 거야. 쟤 먹성을 감당하려면 말이야."
달리기를 마친 후 이 인분씩 먹어치우는 나를 보며 라이카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식사'는 어른들의 골칫거리다. 내가 태어나면서 남은 식량을 축내기 시작했으니까. 태양전지로 충전하는 데이모스나, 한번 죽었기 때문에 유령 신세인 라이카는 하지 않아도 될 고민이었지만 생물체인 나는 달랐다. 물에 갠 비스킷을 이유식처럼 먹고 자란 나는 이빨이 나온 후부터 맹렬하게 건조식을 먹어치우고 있다. 내 수명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평생을 지내기에 여분의 식량이 충분치 않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드물게 물고기를 먹는 날도 있지만 아직까지 맘 편히 먹기에는 크기도 작고 개체수도 적다. 어쨌거나 우리의 재산은 늘어 가고 있다. 풀숲에서 거미줄을 발견한 순간은 승리의 날이었다. 비단결처럼 곱고 정교한 거미줄과 거기에 대롱대롱 매달린 곤충 몇 마리를 본 데이모스는 양서류와 파충류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고생대를 참조해 새로운 레시피를 만드는 거지. 그 편이 유전자 스위치를 켜기에 유리하니까."
새로운 생물종이 발견될 때마다 데이모스는 극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를 냈다. 그때마다 라이카가 '침도 없고 목구멍도 없는 게 이상한 효과음 좀 내지 마라'고 핀잔을 줬지만, 데이모스는 휙 돌아서서 보이지 않는 문이 쾅 닫히는 소리를 냈다. 그들은 이런 콩트의 합을 맞출 때마다 즐거워했다. 자기들처럼 머리 좋고 고등한 존재들이 유치한 개그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게 일종의 거드름 피우기처럼 여겨지는 모양이다. 나는 하나도 안 웃겼다.
"다들 비웃는데 언젠가는 그럴 수 없을걸. 실험이 성공한다면 마야의 엄마를 부활시킬 수도 있으니까."
"정말?"
"네가 충분히 기다려준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야."
데이모스는 유한한 생명체인 나에게 '죽음'이라는 개념을 절대로 쓰지 않는다. 그저 '충분히 자란다면' '기다려준다면' '지내다 보면' 같은 말들로 내 시간을 표현한다. 오래 살고 싶다. 오래 살아서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엄마를 만나고 싶다.
"넌 아빠에 대한 미련은 통 없는 거냐?"
라이카가 물었을 때 즉답을 피했다. 인간과 유사한 실험동물을 만든 후에 임신을 시킨 것은 지구의 과학자들이다.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는 지구 그 자체다. 당시의 가장 진보된 과학기술이 엄마를 임신시켰으니까. 나는 오직 몸에만, 신체에만 관심이 있다. 유전자를 혼합해 만들었을 정자 따위는 궁금하지 않다.
내가 그리운 것은 엄마의 품이지 유전자가 아니니까······. 우주선 안에는 엄마와 나 둘뿐이었다. 언젠가 엄마의 백업 인격을 담을 '그릇'을 만든다면, 그걸 엄마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언젠가 호수가 바다만큼 커지고 실험체들이 생태계를 이룰 정도가 되면, 그중에서 엄마의 몸을 고를 수 있다면 혹등고래가 좋겠어. 바다에서 가장 길고 복잡한 노래를 부른다는 혹등고래 말이야. 나는 노래를 불러 주는 엄마를 갖고 싶어."
"어이구 우리 꼬마, 자장가가 그리운 모양이구나. 라이카 이모가 불러 줄까? 하울링 소리도 근사하다고. 얘가 사춘기가 왔나, 왜 울고 그래?"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나는 다 자란 느낌과 덜 자란 느낌 사이에서 훌쩍훌쩍 잘 울었다. 느닷없이 힘이 솟구치다가 다음 순간 맥이 풀려버렸다.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 무엇인지도 모른 채 간절해지기만 하는 마음. 나는 십대였다. 지구의 철딱서니 없는 십대들과 다를 바 없는.



키나는 별똥별이 떨어지던 밤에 왔다.
우리는 '오페라 관람석'이라고 부르는 앞뜰 벤치에 앉아 쏟아지는 불꽃쇼를 감상하던 중이었다. 라이카와 내가 맨눈으로 별똥별을 세는 동안 데이모스는 전파망원경으로 하늘을 쭉 훑고 있었다. 별다른 기대 없이 어느 먼 은하에서 보낼지도 모르는 메시지를 수신하는 것이다. 건초 더미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려운 일이라지만 데이모스는 탐사로봇 시절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이따금 전파망원경 앞에 앉곤 한다. 데이모스의 목은 미세하게 기우뚱한데 라이카는 지구 쪽을 하도 많이 올려다보아서 그런 것이라고 놀리곤 했다.
"꼭 무슬림 같다니까. 하루에 세 번 메카를 향해 절을 하는······."
데이모스를 놀려먹는 재미로 사는 라이카가 갑자기 말을 뚝 그치더니 낮게 으르렁거렸다. 어둠 속을 노려보며 컹컹 짖자 그 소리가 신호라도 되는 양 사람 하나가 풀썩 쓰러졌다.
내 또래와 비슷한 여자 아이다. 외계인은 아닌 것 같지만 지구인치고는 이상한 차림이다. 지구인이라면 액냉식 의복에 어항같이 둥근 헬멧을 쓰고 있어야 하는데 이 애는 반 벌거숭이에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다. 소금색 머리카락에 눈동자는 석류처럼 붉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눈꺼풀이 없는 것이다. 반투명한 옅은 막 같은 것이 깜박거리는 동안에도 그 너머 붉은 눈이 또렷이 보였다.
"넌 만날 전파망원경을 끼고 살면서 외부인이 이 별에 오도록 몰랐어? 어떻게 네가 모를 수가 있어?"
외부인이 나타난 것이 데이모스 탓이라도 되는 양 나는 화를 벌컥 냈다. 무섭다. 포유류가 뱀에게 반응하듯, 내게는 인간에 대한 공포심이 새겨져 있는 것 같다.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것밖에 두려움을 감출 방법이 없었다.
"네 생각만큼 전능한 로봇은 아닌가 보지. 일단 옮기자."
"미쳤어! 누군지 알고 안으로 들인단 말이야? 그러다 공격받으면?"
"맥이 아주 약해. 밖에서 죽게 하느니 정신을 차린 다음 정보를 얻는 편이 낫지 않겠어? 그리고 넌 지구의 공상과학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 같아. 거기선 화성인이 지구를 침공한다고."
그렇지만, 현실은 반대일 수도 있잖아.
여자 아이는 사흘 동안 의식을 찾지 못했다. 눈꺼풀이 없는 눈을 들여다보기가 거북해서 나는 안대를 둘러 주었다. 물에 적신 거즈를 입에 올려 주자 조금씩 빨아먹는 것으로 보아 죽지는 않을 것 같다.
"가장 큰 사건이 가장 나쁜 사건일 수도 있지."
라이카는 침대 맡에 앉아 한숨을 토해 냈다. 마침내 정신을 차린 아이는 입술을 달싹이며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너무 작은 소리라 데이모스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이 있어. 나쁜 소식은 더 이상 이 별에 우리만 있지 않다는 것이고 좋은 소식은 인간들의 기지는 여기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거야. 거의 반대쪽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근데 얘는 여기까지 왔잖아. 그 사람들이 여길 발견하면 어떡해? 우물이며 식물 때문에 우린 탄로 날 거야. 지금 한가롭게 이런 말 주고받을 때가 아니지 않아? 대책을 세워야 할 것 아냐!"
"소리 좀 그만 질러. 널 보면 십대 애들이 외계인보다 더 외계인 같다는 생각이 들어."
데이모스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다시 여자 아이에게로 몸을 숙였다. 잠수 연습을 열심히 해둘 걸 그랬다. 유령인 라이카와 로봇인 데이모스에 비해 나의 생존 가능성이 가장 떨어지니 말이다. 그러나 물속이라고 안전할까? 호수의 수심은 제법 깊어졌지만 그 정도가 나의 안전을 보장해 줄 리 없다. 간헐천이 솟아오르는 구멍, 그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다. 지금껏 물살이 세서 얼씬도 안 했지만 말이다.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 때문에 나는 실내를 왔다 갔다 하고 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라이카와 데이모스가 정성껏 여자 아이를 간호하는 것이 보였다.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묘했다. 지금껏 외동딸로 살아오다 갑자기 동생이 나타난 것 같은 기분이랄까.
"자기 이름이 '키나'라고 말하네."
나는 그 애가 싫었다.



키나는 완벽하게 예쁜 인간여자다. 눈꺼풀이 없는 것만 빼면. 몇 가지 문제는 있지만 아프다기보다 영양실조로 탈진한 것에 가까웠다. 정신을 차리자 키나는 아는 정보를 모두 털어놓았다.
"우리는 테라포밍을 위해 14개월 전에 지구를 떠나왔어요. 말이 좋아 개척사업이지, 사실 버려진 거나 다름없어요. 저를 포함한 30명 중에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남자가 21명, 여자는 7명인데 절반 이상 죽었죠."
"기지는 얼마나 크지? 안에는 뭐가 있어? 우주선도 있어?"
"우리만 착륙시키고 떠났어요. 다른 별로, 금성의 위성 중 하나로 간다고 했어요."
"그런데 왜 여기에 30명이나 놓고 갔지?"
"연료가 모자라서······. 처음에는 몰랐는데 식량이며 장비가 너무 열악하니까 어른들이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더라고요. 5년 후 귀환선이 온다고 했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아요. 그때까지 살아남을 사람도 없을 것 같고요."
"그래도 무리 속에 있는 게 안심이 될 텐데. 너는 왜 도망쳐 나왔지?"
그때까지 듣고만 있던 내가 끼어들었다. 침묵. 눈꺼풀이 있다면 몇 번이고 깜박거렸을 시간이 흘렀다. 키나는 망설이다가 내 쪽을 똑바로 바라보며 내뱉듯이 대답했다.
"강간당하지 않으려고."
"눈은 왜 그래?"
사이도 두지 않고 연거푸 묻자 라이카가 나를 노려본다. 나는 물러서지 않고 대답을 기다렸다. 긴 이야기가 이어졌다.
키나의 고향은 MOJO라고 불리는 도시빌딩이다. 양극화가 심해지고 빌딩이 노후되자 상류층들은 새로운 빌딩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다. 비밀이 새어 나가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고, 진압됐고, 도시는 쪼개졌다. 조부와 부모 모두 반란군에 가담한 탓에 키나는 네 살 때 눈꺼풀제거술에 처해졌다. 성장기에 키나는 올드타운에서 자기가 보고 있는 모든 광고를 노출하는 살아 있는 광고판으로 살아왔다. MOJO에서는 누구나 눈을 깜박거릴 때마다 스치는 지나가는 광고를 보게 되어 있지만, 키나와 같이 눈꺼풀이 없는 사람은 특수한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
모든 광고는 소비자의 관심에 맞춰 선택되는 것이기에 무슨 광고를 보는지는 그 사람의 현재적 욕망을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 성인용품이나 포르노 사이트의 광고를 내 눈꺼풀 안에서 보는 것은 민망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눈꺼풀이 없는 사람들, 반란자들, 본보기들, 사상검열을 끝없이 당해야 하는 자들은 아무것도 감출 수 없다.
"붕어새끼. 그게 내 별명이야. 테라포밍 지원자를 받을 때 가장 먼저 신청했어. 일 분 일 초라도 광고를 보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으니까. 우주에 나왔을 때 처음으로 깊이 잘 수 있었어."
나와 동갑인 이 여자 아이는 상상도 못할 일을 겪은 것이다. 그러자 적의가 조금 누그러졌다.
키나의 눈동자는 늘 발갛게 충혈 되어 있다. 눈을 보호하기 위해 수면시간 외에도 수시로 안대를 하고 있어야 했다. 빽빽한 눈에서는 늘 눈물이 흘렀기 때문에 키나는 울고 싶을 때 울어도 창피하지 않을 수 있었다.
키나의 등장으로 라이카와 데이모스는 바빠졌다. 우주선을 방어용 요새로 만드는 것과 아예 다른 곳에 은신처를 만드는 방법 중에 뭐가 나을지 끊임없이 토론했다. 두 가지 다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오자 둘은 설계에 돌입했고, 나와 키나는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심심한테 우리 수영하러 갈까?"
호수에 가자고 하자 키나는 머뭇거렸다. 그러고는 자기는 수영을 할 줄 모른다고 털어놓았다. 초고층빌딩 MOJO에서 수영은 최상류층만 즐길 수 있는 스포츠였다나. 나는 개의치 않고 키나의 팔짱을 꼈다. 그동안 학생 역할만 해오다 선생 노릇을 할 기회였다.
호수에 도착해서 옷을 대충 벗어 놓고 물에 뜨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처음에 발만 담그던 키나는 차츰 나를 따라 물에 들어오다가 나흘째 되는 날 마침내 배영에 성공했다.
"이것 봐, 마야, 내가 물 위에 떠 있어!"
키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고 그러자 즉시 가라앉았다. 나는 큰 소리로 웃었다. 물속에서 펼쳐지는 키나의 머리카락이 일몰에 물들어 아름답게 보인다. 진홍빛 석류 같은 눈동자에 화성의 하늘이 담겨 있는 모습도 그림 같았다. 수영을 가르쳐준 보답으로 키나는 나에게 노래를 가르쳐주었다. 키나의 노래는 신기루만큼이나 풍부하고 다채롭다. 같은 노래라도 똑같이 부른 적이 한 번도 없기에 키나의 노래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너한테 가장 부러운 게 뭔 줄 알아?"
노래를 하다 뚝 그치고 키나가 갑자기 물었다. 당연히 눈꺼풀이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라고 한다.
"속눈썹."
키나가 내 쪽으로 바싹 얼굴을 들이대더니 손끝으로 내 속눈썹을 살짝 건드렸다. 감기지 않는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쳐보였다. 순간 등줄기의 지느러미 돌기가 쭈뼛 섰고 있지도 않은 꼬리가 도르르 말리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감으면 속눈썹이 치마처럼 펼쳐지거든. 그게 아주 예뻐."
"난 네가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웅얼거리자 키나는 한바탕 웃더니 "이거 받아."라며 손에 낀 반지를 빼서 준다. 커다란 모조보석이 박혀 있는 반지였다.
"구조신호를 보내는 장치야. 버튼을 누르면 할아버지의 동지들이 데리러 올 거라고 했어.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비장의 카드지."
이런 게 있다면 왜 써먹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키나는 두 번 다시 지구는커녕 그 근처로도 가지 않을 거라고 했다. "전파가 잡히니까. 그럼 또 지긋지긋한 광고를 봐야 해. 우주에서 내가 뭘 깨달은 줄 알아? 광고가 없으니까 생각이 중단되지 않는다는 거야. 생각이 중단되지 않는 자유를 한번 맛본 사람은 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어."
키나는 오늘 자기 얘기를 많이 한다. 완벽한 인간이면서도 날 부러워한다. 속눈썹 말고 다른 것도.
"라이카와 데이모스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금방 알겠더라. 네 털끝 하나 건드려도 난리 날 사람들이야."
"사람 아닌데, 개랑 로봇인데."
나는 얼굴을 붉히면서 무심코 반지를 끼어 보았다. 물갈퀴에 걸리는 통에 도로 빼어 탄생석 목걸이에 걸기로 한다. 이걸 사용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태어나 두 번째로 받는 선물이다. 그리고 키나는 자기가 가진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을 나에게 준 것이다. 그러자 내가 기다려 온 존재가 친구였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기다려 봐. 나도 줄 게 있어!"
나는 벌떡 일어나 데이모스가 보면 질색할 일을 해버렸다. 귀하디귀한 양귀비 꽃잎 두 장을 떼어내 돌을 베고 누워 있는 키나의 눈 위로 조심스레 꽃잎을 올려놓은 것이다.
"눈꺼풀. 내 선물이야."
꽃잎에 눈이 가려진 키나의 입술이 벌어지면서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미소를 만들었다. 얼굴에서 꽃이 핀 것 같아. 나는 홀린 듯이 몸을 굽혀 입을 맞췄다. 귀환로켓이 화성을 떠나는 순간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도 이 모습이다. 꽃잎을 덮은 채 웃고 있는 키나. 나의 친구, 나의 연인. 영원히 붉은 별 키나.


*


수조 옆에 조 버든이 의자를 가져와 앉아 있다. 한번 터지자 끝없이 밀려 나오는 말들을 조금 더 잘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다시 꽃이 피는 데 3년이나 걸렸어요. 덕분에 난 데이모스에게 무지하게 야단맞았죠. 데이모스가 화를 내는 건 처음 봤어요. '반드시 화를 낼 것―' 이런 명령어라도 떠올렸을까요? '호수에 처박혀 나오지 마!' 그가 소리쳤어요.
잘 됐구나 싶어서 얼른 호수로 달려가 뛰어들었죠. 키스를 한 후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그렇지 않아도 숨을 곳을 찾던 참이었거든요. 그날 처음으로 한 시간 이상 기록을 세웠어요. 보다 못한 라이카가 물속에 뛰어들어 끌어낼 때까지 바닥에 가만히 가라앉아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단숨에, 단번에 아가미로 호흡하는 법을 터득한 거예요.
나는 물속에서 두 팔로 몸을 감싸 안은 채, 호수가 내 심장소리로 진동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죠. 그 순간 몸속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기쁨들이 잘 쓰지 않는 창문을 애써 열어젖힌 것처럼, 귀 뒤의 잘 보이지도 않던 아가미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물결에 따라 천천히 열고 닫히는 아가미의 감각은 뭐랄까, 다정했어요. 이내 물속에 녹아 있는 산소가 전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죠.
나는 숨을 쉴 수 있게 된 거예요. 마침내 물속에서 말이죠! 키스가 열어 준 호흡 때문에 나는 새로운 몸으로 건너갈 수 있었어요. 말하자면 진화죠. 뭍과 물에서 살 수 있는 가능성."


수중청음기를 든 조 버든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김성중

작가소개 / 김성중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창작집 『개그맨』, 『국경시장』, 중편소설집 『이슬라』를 펴냈다. 2010~2012년 젊은작가상·2018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문장웹진 2019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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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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