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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 작성일 2019-04-01
  • 조회수 2,420

[단편소설]



원인



민병훈




너는 옷을 태운다. 밤의 해변에서, 불에 그을린 종아리가 파도에 씻길 때까지, 뛰고, 바닷물을 마시고, 도망치듯,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수평선이 지퍼처럼 열리자, 지금이, 계절이 바뀌는 순간이라고, 창문 하나 없는 호텔을 상상해 보라고, 소리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옥상에서 솟구친 미래가, 널 울게 만들 때, 너는 고동소리를 듣는다.


1999년 3월 24일.
풀이 무성한 운동장. 녹색 빗금 사이를 헤치는 연속적인 감각들. 너는 아득하게 흐려지는 정문 너머의 오르막길. 오르막길 끝의 하얀 집. 너는 동급생들보다 먼저 교실 창문을 열었고 칠판에 번진 흔적을 바라보며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너는 빗속을 거닐듯 얼마 남지 않은 기억 속에서 애가 타지만, 네게는 공포가 없고, 공포에게 네가 있으며, 오르막길 끝의 하얀 집. 하얀 집 너머 길 끊긴 산속. 너는 길을 잃고, 긴긴 밤과 새벽을 그곳에 앉아, 사람들이 찾는 줄도 모르고, 온갖 미신과 소문에서 벗어나려 노력했지만, 절벽을 타고 다니는 파란 동물과, 키가 나무만큼 큰 양복쟁이에 대한 목격담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빈집에서 들려오는 대화소리와, 둑방을 달리는 우비 입은 아이가 스치듯 떠오른다. 너는 눈을 감거나 떠도 같은 장면인 지속 속에서 너의 어떤 모습들을 떨어트린다. 너는 아침이 되자 제 발로 산에서 걸어 나온다. 안심과 탄식과 비명과 희망. 너는 예감에 질린 얼굴로 운동장에 쓰러진다.


너는 Avicii의 멜로디가 느슨하다는 이유로 그의 음악을 싫어했지만 사망 뉴스를 접한 날에는 마이애미가 그를 죽인 거라며 욕을 하고 말끝마다 턴테이블에 침을 뱉었다. 가드는 취한 너를 말릴까 하다가 열에 들뜬 스테이지가 새하얗게 너를 가리켜서 움직이지 않은 채 가만히 무전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같은 트랙만 틀 것 같았고 지시를 받은 바텐더가 술을 가져다주며 귓속말로 무슨 말을 했는데 너는 되묻는 대신 천장을 가리켰다. 문을 열고 나와, 파라솔 아래 모인 사람들에게, 턱이 뻐근하면 아지랑이는 집에 가서 보라고, 그건 엔진이라기보다 엉킨 베이스 소리에 가깝다고 말하며, 그들을 지나쳤다. 쿵, 누가 떨어지지 않았어? 높은 곳은 안 된다니까, 쿵쿵, 튜브를 허리에 두르고 달려간 사람이 아까 걔야? 내가 오줌을 눴는데, 저기 봐, 내 입자들이 무서워진다, 박스를 뜯어 만든 타임테이블 안내판에는 누구의 이름도 적히지 않았다. 테라스 구석에서 칵테일을 팔던 너의 친구는 해머백을 열어 검은 액체를 꺼내는데 너는 모른 체하고, 부스에 두고 온 USB가 떠올랐지만 돌아가진 않았다. 지하로 내려가자 기둥에 기댄 정비공들이 형광봉 대신 스패너를 흔들고 있었다. 붉은 레이저에 비친 금속성이 벽에 무늬를 만들었고 프로젝터에 자신을 반사하던 누군가가 쫓겨나며 시티팝을 부탁했지만 틀어 주진 않았다. 저 새끼는 이제 막 무덤에서 나온 것 같네, 킥킥대는 바텐더들이 관능적으로 보였고, 병자처럼 느껴졌고, 테크노, 프랭키 너클스, 다시 테크노, 그런 구분의 박자가 지겨웠다. 누구도 다르지 않고, 누구도 장르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키나와에서 기다렸습니다. 오키나와 해변의 모래가 아직 신발 밑창에 묻어 있습니다. Blue Poem이라 적힌 간판을 지나서 온다고 들었습니다. 국왕컵 준결승전을 라디오로 들으며 축구공 같은 오리온 전등을 던지라고 말했습니다.
어디서 주웠죠?
기내 화장실에서.
츄라우미 수족관이 폭발하는 상상을 했습니다. 구글 사이트에 좆밥이라고 검색했더니 아는 사람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입버릇 같은 말입니다. 온갖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기억을 찾기 위한 방법을. 구간을 되돌릴 시도를. 나사를 빼는 일을. 내가 물었습니다. 나는 오는 중입니까. 온다면 어디를 경유하는 중입니까. 전망대가 부러졌습니까. 딸깍, 소리가 났습니까. 야자수에 매달린 시간을 들여다봤습니다. 침엽수에 포위당했습니다. 무서운 건 동이 트는 능선뿐이었습니다. 능선을 뚫고 고래들이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 저건 벼입니다. 흔들리는 낙하산입니다. 왜 아무도 오지 않는지 궁금했습니다. 길을 잃고 주저앉은 건 나입니다. 머리를 상투처럼 묶은 술집 사장은 주문을 받고 루어를 보여줬습니다. 문신과 스테이크를 자랑했습니다. 해변으로 자리를 옮겨 서핑 보드를 장작 삼아 불을 지폈습니다. 불이, 작용으로 들어왔습니다. 스즈키 스페이시아가 도로에서 경적소리를 냈지만 몸은 차가워졌습니다. 오키나와에서 기다렸습니다. 호치민에서 기다렸습니다. 바라나시에서 기다렸습니다. 손가락을 입에 넣어 물거품 같은 것들을 게워냈습니다. 물거품. 술집 사장은 불 위를 뛰어다녔습니다. 해변이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1999년 3월 23일.
구조대장은 구조대원들을 좌우로 정렬시킨다. 일일이 장비를 점검하며 지시사항을 전달한다. 의료키트. 없어. 손전등. 저 뒤에. 목표 지점은 산이 아니다. 여기, 지도에는 산으로 표기되어 있는데요. . 이것도. 구조대장은 등고선을 가리킨다.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닌데요. 구조대원들은 로프로 서로의 몸을 연결한다. 다리를 건넌다. 다리는 유연하게 흔들린다. 흔들리는데요. 원래 다리도 없었는데요. 구조대장은 멧돼지를 본다. 이어 엽총소리가 들리고 엎드려! 구조대원들은 엎드리지 않고 다리를 벗어난다. 산길. 산등성이. 산장. 산새. 산짐승. 산을 구성하는 것들. 우뚝 솟은 송전탑. 구조대장은 기호를 찾고 싶다. 바닥이 쩍쩍 갈라진 헬기장에 도착한다. 나무처럼 꽂힌 프로펠러. 녹슨 동체에 이끼가 자라고 있다. 수거했다고 들었는데요. 짐을 풀고 야영을 준비한다. 구조대원들은 서서 잔다. 밤이 오지도 않았는데.


너는 몸에 솟아나는 돌기들을 바라봤다. 이웃집에 살던 할머니가 느닷없이 방문했고 방에 누워 있던 너를 발견했다. 홍역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사람들은 신내림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다. 너는 아무도 듣지 못하는 소리를 새벽마다 듣고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가족에게 말했다. 개구리를 잡아 학교 담 너머로 던졌다. 테니스를 가르치던 선생은 뒤에서 널 안은 채 까칠한 턱수염으로 정수리를 자꾸 찔렀다. 옥상에 누워 비를 맞았다. 친구들이 전학을 갈 때마다 포옹하는 것이 싫었다. 씨름을 할 때면 전력으로 상대했다. 씨름장 바깥으로 밀려나 넘어진 친구의 표정을 보는 게 좋았다. 화산 폭발 실험을 하지 않았다. 돌기를 혀로 핥았다. 너는 방학이 되면 하루 종일 특촬물을 보고 밤마다 땀을 흘렸다. 하천에서 물놀이를 하던 친구에게 돌을 던졌다. 거대한 개구리를 자주 상상했다. 고르라면 바이오맨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언젠가 외국의 피규어숍을 지나다 그 사실을 떠올렸다. 네가 어딜 가든 아무도 너를 말리지 않았다. 상여를 보관하는 집에서 자고 나면 수국을 찾아 다녔다. 너는 인과라는 말을 벽보 떼듯 떼고 싶었다. 먹지도 않을 과자를 훔쳐 마루 밑에 숨겼다. 간첩 신고 안내 벽보를 챙겨 옷장에 차곡차곡 쌓아 뒀다.


사이키, 눈부셔, HOUSE, 아, Drum And Bass, 말하고, 참고 있던 신비감을, 오늘이라고, 착각되면서, 트랙이 교차하는 음역대의 감상, 볼이 붉어진 댄서가 다가와, 네온사인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말라고, 휩쓸리는 지금, 약지에서 용기가 오기를, 피 번진 입술, 카메라가 초점 흔들며 너를 찍고, 배경과 순간, 스피커 작아지면서, 작년엔 이렇게 놀지 않았는데, 사람도 적었지, 말하네. 마시네. 제발 옷 좀 벗지 마, 삼키란 말이야, 데드마우스가 웃고 있어, 여긴 UMF를 지나, 울트라맨과 괴수는 광장을 향해, 스텝을 밟듯 기억과 멀어지는, 모두 감지에 능한 사람들처럼, 대책 없는 감성으로, 가능한 방식, 방식의 가능성, 어깨를 더 움직이면, 추락하는 기분이 들어, 웃네. Jungle, 궤도를 벗어난 파인 아트.


너는 손잡이를 잡으며 생각한다. 이들은 혹시 범법자가 아닐까. 문을 열자마자 나를 제압하고 내 눈과 입을 막으면 어쩌지. 너는 주위를 둘러본다. 벽에 건 촛대에서 초가 타들어가고 있다. 밤이고, 커튼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범법자가 아니라면 이 시간에, 이 산 가장자리에, 이 산장에 올 리가 없지. 너는 속옷만 입은 채다.
다시 모포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리다가, 혹시 길을 잃은 건 아닐까, 조난자가 많은 시기지, 내가 모른 척하면 밖에 있는 저들은 어쩌지, 춥겠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로 엉덩이만 벅벅 긁어대고 있다. 그러다,
문 좀 열어 주세요.
노크 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너는 황급히 문을 연다. 고개가 뒤로 젖혀질 만큼 매서운 바람이 안으로 파고든다. 너는 곁눈질을 한다. 재채기를 하며 들어오는 여자가 먼저 보이고, 이어서 키가 작은, 정수리가 기껏해야 자기 허리에나 닿을 법한 난장이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산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너는 난장이의 걸음걸이를 보고 웃음이 새어 나오지만, 옷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커튼에 몸을 숨긴다. 머리만 내민 채로 여자를 바라보는데 여자는 화로에 다가가 언 몸을 녹이는 것 같다.
방 있습니까.
너는 고개를 내려 난장이를 바라본다.
식사도.
난장이는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는다. 어쨌든 이들은 산을 통과했다. 산을 사선으로 가로질러 오셨겠군요. 대답은 들리지 않는다. 난장이가 화로 쪽으로 갔기 때문이다. 너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곤 주방으로 가며 혼잣말을 한다. 난장이라는 말은 이상하군, 난장이가 아니라 아이가 아닐까, 아이라고 하기엔 얼굴에 주름이 많던데, 그럼 난장이지, 혹시 혼잣말이 들린 건 아닐까 거실을 슬쩍 바라보는데, 둘은 대화에 열중하느라 너에게는 관심이 없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소시지를 굽는다. 산에는 둥그런 공터가 있고 하늘이 휑하니 뚫려 있다. 너는 검게 탄 소시지를 씹으며 주방을 빠져나온다.
전부 거기에 있다니까. 산에.
여자가 소리친다. 난장이는 뒤로 돌아 너를 바라본다. 커튼이 다시 흔들린다.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짓고 싶지만 실패하고 어깨를 으쓱한다. 난장이는 다가와 방 열쇠를 달라고 말한다. 아침에 산으로 갈 심산이야. 너는 생각한다. 결국 이들의 정체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둘은 계단을 쿵쿵 밟으며 방으로 향한다.
너는 방으로 돌아와 곧바로 편지를 쓴다. 너에게.
잠든 너에게.


단지 꿈같은 것들.


309 Aerospace Maintenance and Regeneration Group. 이런 당연한 게토에 너는 갈 수 없다.


기억이라고 생각했던 꿈들.


방아쇠를 당기는 소리였습니다. 딸깍. 웃기지 않습니까. 듣고 싶은 곡은 알아서 들으면 되는 일입니다. 시끄러운 와중에도 그 소리가 들렸습니다. 총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소화기를 난사했습니다.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난동을 부렸습니다. 그는 에어셔틀 소속 기장이었습니다. 선베드에 누워 있던 보안관 출신의 윌셔가 재빠르게 대응하지 않았다면 모니터용 스피커와 함께 분말을 뒤집어썼을 겁니다. 그는 다른 세대의 사람이었고 회한에 젖은 표정으로 곡을 신청했지만, 틀었다간 다시는 일거리를 구할 수 없을 정도로 세월이 지난 곡이었습니다. 그런 건 알아서 추억으로 남기면 됩니다. 이 바닥이 그렇습니다. 감 떨어진 선곡을 하는 순간 펍에 모인 인간들의 놀림거리가 됩니다. 씨발, 좆같긴 한데, 시대감이 왜 여기서 나옵니까. 그가 잘못한 일이라곤 하필 내 플레이타임이었다는 것뿐입니다. 전날 착륙을 거칠게 해서 다른 기장에게 혼났다는 것뿐입니다. 어쩐지 스테이지가 한산해 보이긴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모그로 착각한 것 같았습니다. 비명인지 환호인지 모를 소리들이 들려오고, 스테이지 가운데에 서서 사방으로 호스를 겨냥하는 그가 퍽 흥겨워 보였습니다. 수영장으로 몸을 던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끌려 나갔습니다. 물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삿대질을 했는데 미래를 축복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VJ는 전광판 뒤에 숨어 한동안 나오지 않았습니다. 회색 배경의 화면이 반복되고 그 안에서 누군가 러닝머신을 뛰듯 달리고 있었습니다. 운동장이 되어 가는 화면 안에서.


1999년 3월 23일.
어둠으로 꽉 찬 골목은 낮을 반사하는 강가처럼 하염없이 넋을 놓게 만들었고, 그들은 골목을 벗어나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발자국을 쫓아갔고, 손목에 줄을 감아 대문과 연결한 아이들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시간이 지체되는 것에 묘한 설렘을 느끼며, 아침이 오면 모두 편한 잠에 들기를 바랐지만, 가시덤불로 뒤덮인 길을 지날 때, 하필 그곳에서 지그재그로 찍힌 발자국을 발견했다. 왜 이곳에 발자국이 있는지, 이곳에서 반대편까지는 사람이 드나든 시절이 없는데, 하지만 발자국은 너무 명확해서 아닌 척 돌아갈 수 없었고, 그들 중 조경 도구를 챙기러 간 누군가가 덤불로 돌아오는 골목에서 비슷한 사람을 봤다고 말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덤불을 통과하는 사이 옷이 찢어지고 팔에서 피가 흘렀지만 여의치 않았고, 모두 덤불을 통과하자마자 곧바로 이어지는 발자국을 발견했는데, 그들은 의문을 갖는 대신 마치 수색을 자주 경험한 사람들처럼 대형을 넓게 벌렸다. 발자국을 계속 쫓아갔다간 돌이킬 수 없는 풍경을 마주칠 것 같아 점점 걸음이 느려졌고 선두에 선 자가 말하길, 사실 우리는 전부 같은 예감을 하는 게 아닐까요, 어제는 불 꺼진 수도원을 지나는데 건물 창가에서 누군가 제게 손짓하고 있었어요, 한 달 전에는 안개 자욱한 운동장에서 꼬마를 좇다가 내가 누굴 따라가고 있는 건지 무섭기도 했고요, 장마가 오면 한두 명씩 물 아래로 가라앉아 나타나질 않거든요, 그러니까 제 말은 구렁이를 봤다는 뜻이에요, 제 허벅지만 한 구렁이가 큰 원을 그리며 빙빙 돌았고 그 아이는 지금쯤 오로지 자신뿐이겠죠, 왜 산에 들어갔을까요, 자신을 찌르면서 살아왔던 걸까요, 누가 데려다 놓은 건 아니겠죠, 이대로 계속 걸어가면 발자국이 사라지고 오르막길 끝에 하얀 집이 나올 거예요, 그곳에 상여가 있던가요, 가야금 소리를 들으며 야구 시합을 구경해 본 적 있나요, 그 속도와 결과를 새벽 내내 기다려 본 적이 있나요, 자꾸 소리에 민감해지지 마세요, 기도합시다. 그들은 발자국이 나 있는 방향으로, 산을 향해 걸었다.


너는 309로 시작되는 구역의 이름을 외우지 않았다. 항공기의 무덤이라는 곳에 가보지 않았다. CD를 모으지 않았다. CD를 팔아 CD를 사지 않았다. 뉴델리 공항에서 입국 심사를 받지 않았다. 갠지스 강 근처 계단에서 맥주를 마시다 어깨에 앉은 박쥐를 보고 놀라지 않았다. 서리가 내린 논에서 앨범을 태우지 않았다. 이게 다 누구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너를 알아보지 않았다. 만화 주제가를 부르며 썰매를 타지 않았다. 신태풍 형과 싸우지 않았다. 이름이 태풍이 뭐냐고 놀리지 않았다. 전학을 가지 않았다. 기억상실증에 대해 들어 보지 않았다. 대관람차와 미러볼이 찍힌 사진을 모으지 않았다. 클럽 사장의 심부름으로 술집 전단지를 돌리지 않았다. 물 축제에서 음악을 틀다 감전당하는 상상을 하지 않았다. 어떤 것에든 취하지 않았다. 괴롭지 않았다. 해외 공연 일정이 잡히면 화장실에서 토하지 않았다. 너덜너덜한 여권을 재발급 받지 않았다. 꿈에 난장이가 나타날 때마다 얼굴을 그려 두지 않았다. 짙은 눈썹과 여우같은 귀와 손가락보다 긴 손톱을 기억하지 않았다. 구조되지 않았다. 주파수를 미국 라디오 방송으로 맞추고 열에 들뜬 표정으로 춤추지 않았으며 체념하지 않았다. 굿을 할 때 졸지 않았다. 멧돼지 머리에 칼을 꽂지 않았다. 그 무엇도 돌아오지 않았다. 트랙이 섞이는 지점에서 고개를 까닥거리지 않았다. 기억이 섞이는 순간마다 의심하지 않았다. 왜 산에 가라고 하는 건지 되묻지 않았다.


형은 가봐, 한다. 갈게, 대답한다. 라면 봉지를 뜯어 끓여 먹거나, 그냥 먹거나, 집으로 찾아가면 형은 방구석에 놓인 라면 박스부터 연다. 베개 옆에는 설탕이 담긴 통이 있고 그건 형만 퍼먹는 거라 달라고 한 적은 없다. 먹으면 태풍이 형처럼 학교에 나가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분해된 로봇들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다. 천장에는 허물 벗은 뱀이 모빌처럼 흔들린다. 너는 고개를 까닥까닥 움직인다. 형도 가본 거야? 자주. 주먹바위까지? 거길 지나서 깊숙이. 말벌집이 있어. 돌아서 가야 돼. 그거 먹어 봤는데 내 병이 낫진 않더라. 신발을 빌려 달라 말하고 싶지만 말하지 않는다. 오늘은 덜 익혀서 먹을래? 과자 같잖아. 이불을 끌어다 다리를 덮는다. 과자 먹고 싶다. 형은 안 돼. 먹으면 병원 가야 돼. 너는 괜히 섭섭해진다. 나한테만 알려주는 거지? 아무도 안 가봤지? 물이 끓기도 전에 라면 냄새가 난다. 다음에 올 땐 비디오테이프 좀 가져와. 우리 집에 온다곤 하지 말고. 형에게선 항상 라면 냄새가 난다. 창문을 닫았는데 뱀이 계속 흔들린다. 저녁에는 푹 익혀서 먹자. 너는 겨우 기억한다. 기억 속에서 너를 등진 형과 대화하는 중이다. 형은 열네 살에 죽었잖아. 또, 가봐, 한다. 갈게, 대답한다. 형은 숟가락으로 라면을 먹는다. 숟가락으로 설탕도 먹는다. 숟가락 말고는 사용하지 않는다. 너는 당연히 젓가락을 쓴다. 하나씩만 있다. 냄비도 그릇도. 학교에서 우유를 갖다 주면 형은 토를 한다. 너는 비디오테이프만 가져온다. 가면 진짜 볼 수 있어? 형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나는 못 봤어, 뭘 보고 싶은데?


뭘 보고 싶은 건데. 너는 동료의 질문에 인상을 쓰면서 일어난다. 하루 종일 직선 도로만 달리는 버스 차창 너머로 사막이 이어진다. 다음 공연장까지는 이틀을 가야 한다. 사막엔 환각이 있거나 환각으로 오해되는 기억이 있거나 신기루를 확인할 수 있겠지. 동료는 그런 건 다른 도움을 받아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 사는 애들이 괜히 맛이 갔겠어. 다른 동료가 말한다. 동료들이 웃으며 동시에 차창을 연다. 너는 운전사에게 잠깐 차를 세워 달라고 부탁한다.
짓다 말았거나 반쯤 무너진 건물들이 도로 옆에 이제 막 생겨난 것처럼 즐비하고 그 사이를 걸을수록 두통이 심해진다. 동료가 트렁크를 열고 스피커를 꺼낸다. 사지를 흔든다. 춤을 추며 옷을 전부 벗는다. 다른 동료들도 흥에 겨운 얼굴로 너를 바라본다. 오늘은 Beyond the MIX, 듣다가 Zedd로 넘어가도 좋아. 너는 선인장을 찾지만 보이지 않는다. 아지랑이도 보이지 않는다. 동료들과 떨어져 사막으로 계속 걸어간다. 관자놀이가 터질 것 같다. 음악소리와 멀어지면서 혼자라는 생각이 든 순간 나무들이 솟아난다. 나무는 모래알을 흩날리며 너를 잡아당긴다. 공중으로 솟구친 너는 나무의 시선 혹은 사막의 시선으로 버스와, 동료들과, 스피커와, 사라진 뮤지션들과, 너를 구경한다. 너는 건축되면서 동시에 허물어진다. 삼등석 기차 칸에 앉아 심드렁한 얼굴로 배낭을 뒤진다. 둘러앉은 승객들이 너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너를 담기 위해 눈꺼풀도 깜빡이지 않고, 자꾸 간섭한다. 문을 열고 신과 제일 가깝다는 사람들이 들어와, 승객들과 입을 맞추고, 포옹하고, 손을 잡고, 근육이 도드라진 팔로 아이들을 안고, 너의 볼을 꼬집는다. 너는 놀라지만, 맞은편에 앉은 노인이 괜찮다는 말을 하고, 뭐가 괜찮다는 건지, 볼이 욱신거리는데, 그래도 괜찮으니 앉아 있으라고, 다시 출발하는 기차, 일등석에서 들려오는 말다툼 소리, 모래바람이 차창으로 스며들어 승객들은 벗겨져 나가며, 창문으로 거짓말을 만들고, 자맥질, 번개를 실은 물살, 냄새나는 발목, 분수쇼, 어깨를 자꾸 던지며, 사막에서 모래알을 모아도 기억은 뚜렷해지지 않는다. 신기루에 떨어져 나간 동료들이 버스 바퀴에 기대 손짓한다. 담배를 피우던 운전사가 팔을 네 어깨에 두르며 천연적인 표정으로 지평선을 바라보고 사막은 네게 아무것도 데려다주지 않았다. 운전사는 양 갈래로 묶은 머리를 매만진다. 너는 투어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지만, 운전사는 이 미친 새끼가 배가 불렀구나, 라고 말하지 않고 외투를 벗어 건네준다. 너는 버스로 돌아가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낸다. 그러곤 널브러진 동료들에게 다가가 필름도 없는 카메라를 들이댄다.


상점에 앉아 있습니다. 가격을 물으면 답하고 비닐에 물건을 담아 주거나 거스름돈을 건네줍니다. 어디에 앉아 있든 검은 장막 같은 하루가 잠에 들기 직전까지 구체적으로 짙어집니다. 셈은 도움이 됩니다. 상점에서 파는 물건들은 항상 똑같고 부모님이 상점의 주인이지만 우두커니 상점을 지키는 건 언제나 나입니다.
방과 후에 찾아온 주번이 문을 열고 쭈뼛쭈뼛 인사를 합니다. 나는 그것을 지겹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살 물건도 없으면서 얼른 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주번은 곧 소풍이라고 합니다. 운동회라고 합니다. 수학여행이라고 합니다. 졸업식이라고 합니다. 시간이 계속 흐릅니다. 나는 연결되지 않지만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중입니다. 지도가 그려진 손수건으로 목덜미를 자주 가립니다. 침받이가 아닙니다. 효자손을 소매에 넣고 반대쪽으로 악수를 합니다. 말린 버섯은 맛이 없습니다. 잘 팔리지도 않습니다. 거긴 왜 간 거냐고 들었습니다. 버섯을 따러 간 게 아닌데, 하필 제철이어서. 사람들의 생각이 이렇습니다. 버섯은 아무 연관도 없습니다. 버섯이 무슨 상관입니까. 버섯에 환장하지 않았습니다. 버섯으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어쩐지 식탁에 버섯 요리가 자주 올라왔습니다. 옆집 할머니는 나를 산신에게 데려가야 한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가보고 싶었지만 아무도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산신이라면 가끔 난장이로, 거인으로, 멧돼지로, 잉어로, 자라로, 송진으로, 주차장으로, 북소리로, 약수터로, 헬기로, 꿈에 나타났습니다. 어느 날부터는 꿈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과 모든 곳과 모든 현상과 모든 장면과 모든 말들에서, 왜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자꾸 나를 뒤졌습니다.
상점에는 물건들이 있습니다. 제자리에 있습니다. 그뿐입니다. 의사는 공포가 나를 바꿔 놓았다고 말했습니다. 압도적인 공포. 무서웠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말입니다. 감각, 그런 건 없었습니다. 애초에 무엇을 느꼈는지도 나는 모릅니다. 알면 어떻게 됩니까. 아는 것은 그저 아는 것으로 남습니다.
음악이 흐릅니다. 하루 종일 흐릅니다. 상점을 닫고, 밤이 찾아와도 흐릅니다. 누가 재생 버튼을 눌렀을까요.
녹색의 포말은 산을 지우는 일에 열심입니다.


1999년 3월 24일.
오전 7시에 울려 퍼지는 하산 안내 방송.
309 노후 전투기 보관소. 5,500여 대의 항공기 무덤.


너는 포말을 바라보고 있다. 발등을 적시는 포말을 방치하고 있다. 순간이 있다. 해변 끝에 자리한 호텔에 불이 들어오고 있다. 해가 뜨고 있다. 모닥불이 점점 꺼져 가고 있다. 압도당하고 있다. 어떤 기약에. 지나치고 있다. 입을 반쯤 벌리고 있다. 접이식 의자가 점점 기울고 있다. 의자 주인이 화장실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멀어지고 있다. 순간이 있다. 육지가 밀려오고 있다. 이미지가 몰려오고 있다. 사막의 모래와 해변의 모래가 뒤섞이고 있다. 모래폭풍이 휘몰아치고 있다. 가까워지고 있다. 재가 된 외투를 허공에 걸고 있다. 캐리어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다운타운에서 본 불빛들을 생각하고 있다. 원인들을 생각하고 있다. 순간이 있고, 라이터가 있다.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다. 길어지고 있다. 레코딩을 바라고 있다. 재현이 시도되고 있다. 주저앉고 있다. 낙엽 쌓인 바닥에서 한기가 올라오지만 개의치 않고 있다. 해가 능선으로 넘어가기 시작하면서 너를 감싸는 풍경이 점점 색을 잃어 가고 있다. 완전한 어둠에 잠길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방해 받고 있다. 그렇게 믿고 있다. 육박하는 기억을 모르는 척 방치하고 있다. 너는 있다.


这里没有洗手间, 经常有海鸥坠落. 你要回到原来的地方, 在那里安顿重拾自己.
배낭이 옆으로 고꾸라졌다. 정지된 야자수들. 너는 동료들에게 고동소리를 들려준다며 콜라를 빨리 마셔 놓곤 연거푸 트림만 했다. 호스트를 찾으러 간 담당 직원은 오랜 시간 돌아오지 않았고 땀이 입안으로 흘러들었다. 일행을 맞이한 건 카운터 모니터 위에 꽂힌 종이 한 장뿐이었는데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Wang Xiao는 중국인이겠지, 순간 뉴델리에서 아그라로 향하던 기차가 떠오르고, 아마도 비슷한 이름의 중국인과 같은 칸을 쓴 것 같았다. 아니면 갠지스 강이 보이는 계단에 앉아 맥주를 나눠 마신 게 그 이름 같다고, 그러다 박쥐가 날아와 어깨에 앉았다고 말하자, 동료는 스무 번도 넘게 들은 얘기지만 들을수록 재미가 없다고 말했다. 꽃을 든 꼬마가 울면서 다가왔다. 회전하는 야자수들. 좌판대를 끌고 가는 사람들이 일행을 보며 곧 비가 올 거라고 소리쳤다. 직원이 돌아왔던가. 네가 찾으러 갔던가. 로비 소파에서 모두 잠깐 잠들었고 한낮이 계속될 것 같았는데.
비에 젖은 Wang Xiao는 역시 중국인이었고 뭔가에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너는 그가 서둘러 안내를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일부러 안달 나게 하려는 건지 굼뜬 동작으로 예약을 확인했다. 얼마나 굼뜨게 행동을 했냐면, 모니터 앞에서 안경을 찾다가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한동안 나오지 않다가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들렸고, 나오다가 친구와 통화했고, 통화를 마친 후에는 비가 새는 바닥을 바라보더니 직원에게 양동이를 가져오라 소리쳤고, 양동이에 물이 차는 과정을 턱을 괴고 바라봤고, 그제야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예약자 이름을 물어봤다. 누군가 너의 이름을 말했고 Wang Xiao는 중국말로 대답했는데, 남경에서 온 동료가 고개를 갸웃하며 이 새끼 지금 뭐라는 거야, 말했고, 누군가 뭐라는데, 물었다. Wang Xiao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시치미를 떼듯 다시 영어로 주의사항을 안내했고 너와 일행은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방으로 향했다. 너는 등이 간지러운 기분이었고 서둘러 씻고 싶었다. 욕실에서 나오자 누군가 메모를 남겼고, 굵은 빗줄기가 창문을 계속 두드렸다.
이곳에는 화장실이 없습니다, 갈매기가 자주 추락합니다, 당신은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곳에서 사라진 당신을 찾아야 합니다.
너는 그날 밤 깊은 꿈에 빠졌다.


1999년 3월 24일.
구조대는 사람들과 합류해 그들에게 의견을 묻고 조를 나눠 구역을 할당하고 인상착의를 듣고 나침반, 손전등, 로프, 호각, 야광조끼 등을 배분하며 줄을 맞춰 헙헙 혹은 착착 유난을 떠는데 깨우지 않아도 될 것들이 구조대와 그들에게 집중되며 구조대장의 체면을 우습게 생각할 때 조각공원은 그런 적 없이 고요하고 야영장 관리인의 마지막 목격담이 단서 됨을 알고 있지만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은 석교 아래 몰래 피운 불장난처럼 새벽 내내 요기를 느끼게 하고 마음이 급한 것과는 다르게 다리는 무거워지고 혼령기념비에서 숨을 고르던 구조대원들 허겁지겁 서리에 젖은 떡을 챙겨 등반하자 아무것도 안 보여 이렇게 안 보이는데 오히려 눈을 감는 게 묘책이지 않을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신고전화 같은 허공들 방금 누구야 누가 내 뒷덜미를 만졌는데 뒤로 전달 뒤로 전달 예정한 듯 느끼며 예감하지 말자던 기합은 그들이 산 깊숙이 들어갈수록 옅어지기만 하고 이러다간 모두 같은 꼴을 면하지 못할 것 같다는 왕 씨 성을 가진 이의 말을 신호로 내려가는 길에 필요한 일정량의 잠언 회수하는 죄책감 계곡 사이에 다리를 설치한 노인의 말인즉슨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네 내 얘기를 들어 보겠나 어르신 여기 곶감 드세요 환해지거나 어두워지거나 서늘하고 저기 보이는 절벽으로 파란 털을 감싼 동물이 달려가는 모습을 봤네 절벽을 타고 오르더라니까 공포를 넘어선 걸까 산의 초입에서 인원을 확인하는 구조대원 오르막길 끝의 하얀 집 운동장에서 걸어가던 아이 안개 속으로 사라져 수위는 눈을 비비네 요즘 더 많이 봤다는데 징조 기미 혹시 설마 산은 아침을 갖추고 공을 갖고 노는 너의 모습 TV를 보는 너의 모습 넘어져 무릎이 쓸린 너의 모습 입학식에서 누군가를 찾는 너의 모습 토를 하는 너의 모습 대문 앞에서 가로등을 보는 너의 모습 너를 두고 온 너의 발자국.


남자는 다가와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어 입술에 가져다댔다. 받을 게 있는 사람처럼 서성였지만 멀어지라고 부탁했다. VINASUN 택시가 사람들을 이곳으로 실어 날랐고, 피부색이 계속 달라져서 기억을 미리 보는 것 같았다. 줄지은 오토바이들 경적소리 깜빡이는 가로등, 클럽에서 조금 벗어난 주택의 대문 앞에 앉아 땀으로 젖은 셔츠를 말리는 동안 헤어밴드 속이 가려워 이마에 피가 나도록 긁었다. 샌드위치 재료를 실은 수레가 지나가고 색 바랜 횡단보도를 건너는 노란 눈썹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러 맥주병을 흔들어 줬다. 일행에게 소식이 없어 조금 걷기로 했다. 그들이 건너온 쪽으로 걸었는데 시멘트로 덮인 도로가 군데군데 포격을 맞은 것처럼 휑했고 출입금지 안내판을 못 본 척 걸어갔다. 귓속을 꽉 채우던 소리들과 대기 중인 택시와 오토바이와 사람들이 멀어지자 그곳이 조금 낯설어졌고 바지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을 무시한 채 길을 잃을 때까지 걸었다. 골목 모퉁이에서 코끼리가 휘적휘적 걸어 나오면 좋을 것 같았지만 무리 지어 속삭이던 사람들이 경계하는 눈초리로 바라봤고 뒤따라오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는 척 핸드폰을 꺼내 아무 말이나 했다. 셔터 내려진 은행에서 비둘기가 날아올랐다. 칠흑을 생각했다. 손을 눈앞에 갖다 대도 보이지 않던 산중의 캄캄함을. 클럽에 도착할 때까지 눈을 감고 걸었는데 불규칙적으로 엇나가는 BPM이 가깝게 거슬려 더 혼란스러웠다. 그제야 왜 밖으로 나왔는지 이유를 알아차렸는데 계속 서성이다간 아무나 따라갈 것 같았고 사실 따라가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았지만 일행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항공기에서 잠들면 항공기가 떼로 추락하는 꿈을 꿨다. 구글 사이트에 항공기 무덤이라고 검색했더니 실제로 있어서 당황했다. 그곳에서 저스티스의 음악을 틀겠다고 우겼다가 웃음거리가 됐다. 오키나와 선술집 사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다음에 가면 타다 만 장작 같은 스테이크 요리 말고 편의점에서 파는 걸 먹겠다고 썼다가 지웠다. 겨울에 가겠다고만 했다. 서울은 몇 시일까, 떠나온 마을에선 누가 더 죽지 않았을까, 빌딩과 마을회관, 가로등과 연등, 누가 사라졌거나 나타났다가 돌아왔거나 떠났을 덩어리 모양의 풍경. 의문이 생기면 의문으로 남기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음악의 천장을 지나 시가지로 이어지는, 마을 어귀로 돌아가는 사라진 나의 모습들. 도로에서 차가 충돌했다.


2018년 12월. 겨울. 눈 내리는 광경을 자주 보지 못했다. 뭔가 멈춘 걸까.
의사는 떠올리지 말라고 했다. 나는 오는 중입니까. 온다면 어디를 경유하는 중입니까. 떠올려도 떠오르지 않는 잃어버린 시절들. 물어보면 딴청을 피우는 것 같았다.
일정이 없는 날에는 작업실에도 나가지 않고 거실을 빙빙 돌았다. 창문 너머로 반대편 건물 옥상에서 일광욕을 하는 노인들이 가끔 손을 흔들었다. 방음벽을 설치했지만 스피커는 두지 않았다. 공원으로 가는 계단에 앉아 있을 때면 빌딩 유리에 반사된 세계가 타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함께 농담을 나누던 경비원이나 스케이트보드에서 자꾸 넘어지는 아이들, 군무를 연습하는 댄서 모두가 매일 새로 만나는 사람들 같았다. 홈리스들에게 종종 돈을 줬지만 고맙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가끔은 그들이 일정하게 기운 각도로 보인다. 어두운 곳을 피해 다니던 습관도 버렸지만 갑작스러운 정전은 피하고 싶었다. 가방에서 흘러내린 악보를 줍는 심정으로 견뎠다. 캐리어나 배낭에 짐을 싸고 다시 풀 때면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았다. 꿈을 꾸는 박자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자주 만들었다. M-Audio Keyrig 49를 중고로 샀다. 새 컨트롤러도 사야 하는데 돈이 부족했다. Wang Xiao와 메일을 주고받으면 중국어를 배우고 싶긴 했지만 번역기를 돌리는 편이 오히려 대화를 이롭게 하는 것 같았다. 욕실을 빙빙 돌았다. 사거리 카페테라스에 앉아 모조로 조성된 잔디밭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손을 높게 들고 열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손가락들 사이로 새어 나온 조명이 나를 비껴갔다. 노란 벽돌로 지은 우체국 앞에서 멱살을 쥐고 싸우는 배달부와 택시기사를 구경하다가 불똥이 튀어 도망갔다. 운동장까지 가고 싶었지만 없어진 지 오래였다. 운동장을 감싼 철조망 너머로 뛰어가는 다리, 너머에서 기다리는 실루엣. 나는 운동장을 벗어나 철조망을 통과한다.


컨트롤러의 LOAD 버튼을 두 번 누르면 반대편의 선택된 덱에 로드된 트랙이 해당 덱에 로드됩니다. 트랙이 동일한 위치로부터 재생됩니다. CUE 버튼을 눌러 일시적인 큐 포인트를 설정합니다. EQ를 컨트롤할 때에는 다른 채널에 대해 주파수를 증폭하거나 차단합니다. 헤드폰을 터미널에 연결합니다. 퍼포먼스 패드를 눌러 큐 포인트를 설정합니다. 배정된 비트수를 가진 루프 롤을 재생할 수 있습니다. 슬립 모드를 사용하면 리듬을 중단하지 않고도 각종 플레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모든 트랙은 동일한 위치로부터 재생돼야 합니다.


너는 옷을 벗는다.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다. 바닷물이 물러나고 있다. 모닥불은 꺼졌고 너는 옷을 태우지 못한다. 턱을 딱딱 주억거리며 꺼져 가는 불길을 바라보고 있다. 날아갈 것 같다. 동이 트기 시작한다. 사위가 밝아진다. 어둠이 물러난다. 해변이 환해지고 있다. 모래를 파내 그 안에 눕고 싶다고 생각한다. 모래무덤을 만들어 죽은 척을 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아침 일찍 해변을 찾은 누군가에게 발견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누가 봐도 죽음을 결심한 사람으로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옷을 왜 벗었는지 모르겠고 밤새 마신 술병도 보이지 않는다. 왜 이곳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해변에서 갑자기 솟아나는 상상을 한다. 호텔 객실에서 마지막 담배를 태우고 침대에 누운 기억만 남아 있다. 간절기가 그립다고 생각한다. 호텔 쪽을 바라보자 옥상 난간에 누가 서 있다. 서 있다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공기 빠진 발리볼이 날아간다. 반쯤 찢어진 그물에 갈매기가 엉켜 있다. 바다를 바라본다. 수평선이 명확해지고 있다. 너는 갈치나 구워먹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모래알이 눈과 코와 입에 달라붙는다. 점점 몸 안에 쌓인다. 너는 몸이 무거워지는 걸 느끼지만 여전히 제자리다. 주변이 환하다. 꼴이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설레는 기분이다. 난장이가 지나간 것 같다. 우비 입은 아이가 방파제로 뛰어간다. 해머백이 떠내려간다. 헬기가 지나가고 엽총소리가 들린다. 헬기의 수직꼬리 옆면에 해상구조대 마크가 그려져 있다. 돌기가 하나둘 터진다. 고름이 흐른다. 등대가 안개에 가려진다. 그곳에서 태풍이 형이 라면을 끓이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갈게, 하지 않는다. 모래가 자꾸 쌓여 몸 안에 사막이 펼쳐지는 것 같다. 상점으로 들어가는 문이 생기는 것 같다. 经常有海鸥坠落. 갈매기가 자주 추락한다는 말을 곱씹어 본다. 입이 텁텁하다. 코가 막힌다. 눈이 간지럽다. 호텔 쪽에서 쿵 소리가 났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모든 것이 원인이다.
















작가소개 / 민병훈

1986년 대전 출생. 2015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수상.


《문장웹진 2019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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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 관리자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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