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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수염, 없는 인간

  • 작성일 2019-04-01
  • 조회수 1,690

[단편소설]



콧수염, 없는 인간



이상희




『내용 없는 인간』을 꺼내려고 가방을 열었는데 엉뚱하게도 『콧수염』이 들어 있었다. 파리 행 비행기 안이었다. 두 책 모두 하얀 바탕에 검정 글씨가 적힌 단순한 디자인이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가방에 책을 넣을 때 다시금 제목을 읽은 기억이 있기 때문에 어리둥절했다. 반사적으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눈이 부리부리한 남자였는데 고골의 소설을 읽고 있었다. 그가 어느 틈엔가 『내용 없는 인간』을 가져가고 거스름돈처럼 『콧수염』을 넣어 둔 후에 『고골 단편집』 뒤에 얼굴을 숨기고 있을 리가. 나는 한숨을 내쉬고 멍청히 표지를 쳐다보다가 책을 펼쳤다.
"콧수염을 잃어버리나요?"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얼굴을 들이밀고 말을 걸었다.
"네?"
"내껀 코를 잃어버렸거든요."
부리부리한 남자는 고골의 소설을 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코」를 읽은 모양이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보이고는 다시 『콧수염』으로 돌아왔다. 비행기에서 난데없이 독서토론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주인공은 아내를 웃기려고 콧수염을 밀었는데, 아내도 친구도 아무도 그가 애초에 콧수염을 기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지난 십 년간 줄곧 콧수염을 길러 왔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애쓰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급기야······.
"내가 보니까 소설에서는 죄다 뭘 그렇게 잃어버리더라고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사실 나도 여권을 잃어버렸어요. 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틀림없이 손에 쥐고 있었는데······."
나는 그의 초점 없는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내 반응에는 아랑곳없이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어대던 그는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라고 말을 하더니 어깨를 으쓱하고 고골에게 돌아갔다. 나는 그가 또다시 말을 걸어오기 전에 눈을 감았다. 내 의식은 무의식의 영역으로 기울어 불명료해졌다. 그러는 사이에 비행기는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 파리에 다다랐다. 덜커덩, 비행기 바퀴가 난폭하게 활주로에 부딪쳤다. 그때 머릿속 어딘가에 스파크가 일었고, 예지가 생각났고, 소스라치듯 눈이 번쩍 떠졌다.


입국장에 늘어선 사람들 틈에서 예지가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예지의 인중에는 콧수염이 붙어 있었다. 채플린보다는 숱이 많고 아인슈타인보다는 숱이 적은 콧수염이 예지의 작은 코를 수북이 받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예지를 흘낏거렸고 예지는 턱 밑에 걸려 있던 마스크를 올려 썼다.
"위스키 괜찮아요?"
예지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마스크를 벗어 소파에 던지고 싱크대 위 선반을 뒤적이면서 물었다. 정오의 태양 볕이 거실로 느리게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태양 볕 안으로 몸을 밀어 넣고 좋다고 답했다. 예지는 "싸구려지만 먹을 만해요."라고 말하면서 위스키를 따랐고, "이상해요?"라고 묻고는 자기 콧수염을 가리켰다. 이상하다기보다는 낯설었다. 콧수염이 달린 여자를 본 적은 없으니까. 예지는 내게 위스키를 내밀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해요."라고 말하고는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콧수염을 더듬었다. 예지와 나는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위스키를 마셨다. 뜨겁고 향긋한 기운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예지가 힘없이 웃으면서 손목에 힘을 빼고 기울어진 위스키 잔으로 천천히 작은 원을 그렸다.


콧수염의 발생은 말하자면 카프카적이었다. 예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유니폼을 단정하게 갖추어 입고 머리를 말끔하게 말아 올리고 백화점 안내 데스크에 섰다. 예지를 쳐다보며 손가락질을 하고 키득거리는 고객들이 많았지만, 예지는 오늘은 재수가 없는 날인 것 같다고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백화점에서 상식 이하의 행동을 하는 진상들은 언제나 있는 법이고 그들이 시간을 맞추어 한 사람씩 나타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지 씨,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멀리서 예지를 발견한 팀장이 부리나케 달려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예지는 무엇이 문제인지 몰랐다. 어쩌면 머리 망에서 머리카락이 삐져나왔을지도 모른다고 예상할 뿐이었다. 언젠가 블라우스 단추를 잘못 끼웠을 때도 팀장은 큰일이 난 것처럼 달려와 잔소리를 퍼부었으니까. 예지는 팀장이 마음에 쌓인 화를 다 토해 낼 때까지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얼른 떼세요!"
팀장은 검지로 예지의 얼굴을 콕콕 찌르는 제스처를 하고 등을 돌려 VIP 고객에게 달려갔다. 예지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떼어야 할 게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왼쪽 뺨에 유니폼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가느다란 실이 붙어 있었는데 이걸 말하는 건가. 예지는 실을 떼어내고 안내 업무를 계속했다. 중년의 남성이 "이 거지같은 건 뭐야?"라고 삿대질을 하며 행패를 부렸을 때도, 어린 학생들이 "무슨 벌칙 같은 거예요?"라고 물으면서 예지의 주변을 맴돌았을 때도, 다시 돌아온 팀장이 예지를 쫓아내다시피 백화점 밖으로 떠밀었을 때도, 예지는 그들이 말하는 콧수염이 자신의 인중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예지의 눈에는 콧수염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콧수염 때문에 해고를 한다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며칠 후 팀장이 이번 달 월급과 퇴직금을 정산해 주겠다면서 해고를 말했을 때, 예지는 처음으로 팀장을 똑바로 쳐다보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팀장이 내민 해고 사유서에는 콧수염이 아니라 '품위 유지 규정 위반 및 업무 태만'이라고 적혀 있었다. 팀장은 고객들 컴플레인이 대단했다고, 백화점에서 손해배상 청구를 하겠다는 것을 가까스로 막았다고 말했다. 예지는 겁을 집어먹고 떨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예지의 콧수염에는 파운데이션이 허옇게 묻어 있었다. 팀장은 좀 쉬면서 정신과 상담도 받고 마음도 추스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예지의 어깨를 두드렸다.
예지는 꼬박 보름을 집 안에 틀어박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리고 얼마 안 되는 월세 보증금과 퇴직금을 몽땅 털어 여기 프랑스 파리로 왔다. 왜 프랑스였냐고 묻자, 예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프랑스가 똘레랑스의 나라라고들 하잖아요. 그래서 여기에 오면 아무도 콧수염이 난 여자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여기더군요. 생각해 보니 이 나라는 책상이나 사과 같은 것에도 성별을 부여하는 나라잖아요. 이 나라 사람들이 보기에 나는 남성 관사가 붙은 여성 명사 같은 것이겠죠. 문법적 오류 같은 것······. 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 온 거죠?"


파리에 있는 일주일 내내 예지의 집에 머물렀지만 예지와 같이 외출을 한 적은 없었다. 예지는 신생아처럼 잠을 많이 잤고 자정 즈음 일어나 집 안을 어슬렁거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와인 병과 빵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예지의 숨결처럼 집 안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나는 홀로 파리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어느 날은 길을 잃고 한참 동안 거리를 헤맸다. 나는 굶주렸고 그래서 거리에 서서 초콜릿이 잔뜩 묻은 크루아상을 베어 먹으려고 입을 벌렸다. 양손 가득 짐을 든 여자가 분주하게 내 옆을 지나는 것이 곁눈으로 보였는데, 곧이어 그 여자가 들고 있던 짐이 내 팔을 툭 밀쳤다. 그 여자는 소피였고, 내 크루아상은 바닥에 떨어졌다. 소피는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고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황망하게 그녀를 쳐다보는 내 얼굴에 우스꽝스럽게 초콜릿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피는 미안하다고 했고 짐을 바닥에 내려 두고 휴지를 찾았다. 그러나 소피에게는 휴지가 없었고 나 역시 휴지가 없었고 내 가방에 유일하게 들어 있는 휴지 비슷한 것은 『콧수염』밖에 없었다.
"이걸로 닦으려고요?"
소피는 책을 집어 들더니 그렇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걸 어떻게 더럽힐 수 있겠어요?" 소피는 미소를 머금고 자기 옷소매로 내 얼굴을 쓱 닦아 주었는데, 그녀가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가벼운 비명을 질렀다. 무언가 망쳐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소피는 초콜릿이 묻은 블라우스 소매를 두어 번 접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웃었고, 크루아상도 엉망이 됐는데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소피와 함께 파리 외곽에 위치한 고급 주택 단지에 들어섰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을 지나 현관문을 열자, 어떤 남자가 담배를 피우면서 거실을 어슬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우리가 들어온 것도 모르는지 창문 앞에서 담배를 빨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한눈에 그가 『콧수염』의 작가, 에마뉘엘 카레르라는 것을 알았다. 책날개에 인쇄된 그의 사진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할 수 없었다. 맙소사, 카레르의 집이라니. 소피는 놀란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에마뉘엘, 집 안에서 담배 피우지 않기로 했잖아."
소피가 짐을 내려놓으면서 날카롭게 말했고, 카레르는 얼른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당혹스러운 듯 담배꽁초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카레르에게 당신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카레르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소피를 쳐다보았다. "길에서 우연히 부딪쳤는데, 당신 책을 가지고 있지 뭐야. 그것도 한국어판으로!" 소피가 나와 카레르를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카레르는 한국어판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고, 나는 책을 꺼냈고, 카레르는 한글에 대해 물었고, 나는 세종대왕과 우랄알타이어에 대해 적당히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그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콧수염』 말고도 카레르가 쓴 책을 몇 권 더 읽었던 터였다. 『콧수염』이 가정법과 상상력에 의존해서 쓴 작품이라면 『적』이나 『러시아소설』은 실존인물을 취재한 르포르타주와 같은 서술 방식이라 『콧수염』과는 다른 경향의 작품이었다.
"글쎄요. 『겨울아이』는 그것들과 확실히 다르지만, 『콧수염』은······. 『콧수염』의 주인공 역시 실존인물이고 이 근처에 살아요. 그런 면에서 보면 『적』이나 『러시아소설』과 비슷한 면도 있지요."
카레르가 말했다. 나는 좀 당혹스러웠는데, 『콧수염』이 어째서 르포르타주일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던 데다가 팬을 자청해서 집까지 방문해 놓고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은 것이 창피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버버거리자 카레르는 인자한 침팬지처럼 웃었다.
"물론 후반부 몇 페이지는 말 그대로 소설이에요. 그 남자, 그러니까 조르주는 두바이에 가지 않았거든요. 홍콩에서 다시 파리로 돌아왔지요. 물론 목숨을 끊지도 않았습니다. 좀 우울하고 괴팍하긴 하지만 멀쩡히 살아 있답니다. 이 근방에서 말이지요."
나는 과장된 제스처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대해 달리 할 말이 없어서였다. 소피가 장난스럽게 카레르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말을 덧붙였다.
"덕분에 에마뉘엘은 아네스에게 지독히 미움을 받고 있어요. 조르주의 아내 말이에요. 가엾은 그 여자가 소설을 읽고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아요. 면도칼로 인중과 턱을 난도질하는 장면은 정말······. 이 사람은 종이 위에서는 사이코패스처럼 군다니까요."
그리고 오랜 식사가 이어졌다. 카레르가 만들었다는 요리들은 평범했지만 그가 내놓은 와인들은 하나같이 훌륭했다. 식사가 거의 끝나 갈 때쯤 초인종이 울렸다. 소피가 카레르에게 좀 나가 보라고 했고 카레르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여기 누가 왔는지 좀 봐."
카레르는 와인 때문인지 방문객 때문인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문 밖에는 어떤 여자가 서 있었는데, 밖이 어두운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소피는 그녀가 바로 아네스라고 내 귀에 조그맣게 속삭였고 아네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식사 중에 실례인 것 같지만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요. 다른 게 아니라 누군가 당신 차에 끔찍한 낙서를 해놔서 말이죠. 빨간색 페인트로 덕지덕지······."
원래 그런 것인지 카레르에 대한 불만 때문인지 아네스는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카레르는 현관문을 채 닫지도 않고 급히 밖으로 나갔고, 이내 흥분에 휩싸여 거센 욕설을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예지와 함께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예지가 만취한 채로 토사물 위에 얼굴을 부비고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본 탓에 그녀를 프랑스에 두고 올 수 없었다. 예지는 한국으로 돌아가자는 내 제안에 선뜻 그러자고 했지만, 아무 의욕도 없어 보였고 비행기 안에서는 기내식도 거른 채 내내 잠만 잤다.
한국에 돌아온 뒤 예지는 괜찮아진 것처럼 보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한강변으로 산책을 가기도 했고 요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예지는 화장실에서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다. 콧수염에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예지는 콧수염을 밀려던 것뿐이었다고 했다. 언제까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채로 숨어서 살 수는 없지 않느냐면서. "하지만 없는 콧수염을 어떻게 밀어버릴 수 있겠어요?" 예지는 따지듯이 소리를 지르며 흐느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다녀올 데가 있다는 메모를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다.
예지가 다시 나타난 것은 몇 달쯤 지난 후였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현관문 앞에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젖어 있었고 창백한 얼굴에서는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예지를 깨웠고 들어가지 않고 왜 이러고 있느냐고 물었다. 예지는 현관 비밀번호를 잊어버렸다고, 하지만 그리 오래 기다린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나는 예지를 데리고 집에 들어갔고 따뜻한 차를 끓였다.
예지는 두 손으로 찻잔을 쥐고 바닥 어딘가를 응시한 채 수술을 받고 왔다고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대체 무슨 수술을? 예지는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콧수염 때문에 여자일 수 없다면 남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러니까 없는 콧수염을 깎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없는 페니스를 붙이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예지는 전보다 야위었을 뿐, 그래서 콧수염이 난 괴이한 여자로 보일 뿐, 남자로 보이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수술이 잘못된 것 같아요." 예지는 내 시선을 의식한 듯 그렇게 말했다.
수술이 실패했다는 것을 안 것은 대중목욕탕에서였다. 예지는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보고 싶었고 그래서 대중목욕탕에 갔다고 했다. 남탕에 들어가서 남자들과 목욕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남자로서 사회적이고도 생물학적인 승인을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대중목욕탕에서 예지는 주변을 살피면서 나체로 탈의실을 걸어 다녔다. 처음에는 타인의 시선에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남탕에서 서로가 서로와 주고받는 보편적인 시선이라는 것을 알았다. 서로의 나체를, 정확히는 페니스를 확인하고 동물적인 위계를 정하는 것. 예지는 그때 심리적인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꼈다. "하지만 탕이 너무 뜨거웠을까요? 아니, 탕이 너무 뜨거웠다고 해도 그럴 수가 있을까요?" 예지는 찻잔에 입술을 바싹 붙이고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목욕을 마친 예지는 탈의실에서 옷을 입기 전에 거울 앞에 섰다. 남성으로서의 자신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기 위해서였는데, 그 작업은 완수되지 못했고 예지는 괴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페니스가 사라졌더군요. 감쪽같이요."
예지는 아주 허탈한 얼굴을 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예지는 상상을 말하고 있는 걸까, 그게 아니면 정말 페니스가 뜨거운 물에 녹아 흐물흐물 사라졌을까, 탕 안에 녹아든 예지의 페니스는 다른 남자들의 페니스에 엉겨 붙었을까. 그 남자들은 어쩐지 전보다 조금 더 커진 페니스를 휘두르면서 탈의실을 천천히 누볐을지도 모른다.
"혹시 말이에요. 집에 위스키 없나요? 보드카도 괜찮고요."
예지가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예지는 술에 취해 잠이 들었고 나는 그녀의 콧수염을 검지로 살짝 쓸어내렸다. 콧수염을 밀어버리지도 페니스를 붙이지도 못하게 되었다면 예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문득 조르주가 생각이 났다. 조르주는 잘 지내고 있을까. 콧수염을 길렀을까. 지난 십 년 동안 콧수염을 길렀다는 기억이 착오였다고 받아들였을까. 카레르는 왜 조르주의 이야기를 썼을까. 콧수염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런 의문들이 두서없이 머릿속을 휩쓸었고 나는 카레르에게 이메일을 썼다. 혹시 이 질문들에 대해 답을 해줄 수 있느냐고. 카레르에게 답을 들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예지가 어째서 콧수염을 얻게 되었는지, 이게 다 무슨 의미인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후 카레르로부터 답장이 왔다.
"안타깝게도 제가 답을 할 수 있는 부분은 없습니다. 저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썼을 뿐, 콧수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닙니다. 콧수염에 의미가 있다면, 제가 아니라 조르주에게 있을 것이고, 그래서 콧수염에 대해 묻고 싶다면, 저보다는 조르주가 좋은 대화 상대일 것 같군요. 조르주의 이메일 주소를 남깁니다. 조르주에게는 이야기를 해두었습니다."
카레르가 보낸 답장은 내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조르주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나는 조르주에게 이메일을 썼다. 예지가 콧수염 때문에 겪고 있는 곤란을 말했고, 당신에게 콧수염이 어떤 의미냐고, 어째서 그깟 콧수염 때문에 삶을 망가트렸냐고 물었다. 며칠 후 조르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콧수염은 그깟 콧수염이 아니오. 한 마디로 정의될 수 있는 것도 아니오. 예지라는 인물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 서울행 비행기 표를 끊을 생각이오. 표를 구하는 대로 비행기 편명과 도착 시간을 알려주겠소."
나는 이메일을 읽고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조르주는 화가 난 듯 단호한 문장을 썼는데 서울에 오겠다고 하니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조르주가 온다면, 그래서 예지와 만난다면, 그렇게 된다면······. 조르주는 예지의 인중에 돋아난 콧수염을 어떻게 바라볼까. 예지는 조르주가 십 년간 콧수염을 길렀다는 사실을 믿을까. 두 사람은 콧수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까. 그래서 콧수염이 뭐라고 생각할까. 콧수염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괜스레 가슴이 뛰었다. 나는 들뜬 기분을 감추지 않고 예지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예지는 숙취로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침대에 누워 머리통을 부여잡고 황당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기쁘지 않아요?"
"뭐가요? 내가 왜 그 사람을 만나야 하는 거죠?"
예지는 날선 반응을 보였다. 나는 좀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는 예지에게 조르주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고 그를 만나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은 적도 없었다. 나는 조르주에 대해서, 파리에서 카레르를 만난 일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보낸 이메일에 대해서 소상히, 그러나 의미를 조금 부풀려서 이야기했다. 예지는 내 말을 듣는 도중에 몇 번이나 화장실로 달려가서 구토를 했다. 내가 한 말 때문이 아니라 숙취 때문이었다. 예지는 차가운 물을 크게 들이켜고 가슴을 쓸어내린 다음에 한숨 섞인 말투로 말했다.
"좋아요. 하지만 그가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몰라요. 나는 그걸 참지는 않을 거고요."


나는 조르주의 이름을 쓴 종이를 들고 입국장 앞에 서 있었다. 피로하고도 설레는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단연 심술궂어 보이는 남자가 보였다. 다혈질에, 알코올중독자처럼 보이는, 인중이 매끈한 남자는 내 앞에 멈추어 섰고, 손을 내밀었다.
"내가 조르주요."
나는 얼떨결에 그의 손을 맞잡고 인사를 나누었다. 비행은 피곤하지 않았느냐, 묵을 호텔은 정했느냐,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색한 기운을 떨치려 애쓰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잠시 실례하겠소." 조르주는 한 걸음 떨어져서 전화를 받았다. 나는 호텔을 검색했다. 우리 집과 멀지 않으면서 저렴한 가격에 시설이 좋은 그런 호텔은 없었고, 다시 검색을 시도하고 있을 때 조르주의 휴대전화에서 성난 목소리가 울렸다. "당신 제정신이야? 거기까지 왜 간 거야? 카레르도 당신도 모두 미쳤어!" 아네스였다. 조르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전화를 툭 끊어버렸다.
조르주를 호텔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조르주와 두 시간 정도 함께 있었을 뿐인데 아주 피곤했다. 예지는 거울 앞에 서서 이런저런 원피스를 몸에 대보고 있었는데, 기분이 좋은 듯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예지는 유명한 사진작가에게 모델 제의를 받았다고 했다. 패션 매거진의 어글리 뷰티 섹션에 실릴 거라는 것이었다. "내가 세상을 변화시킬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보다 나는 내 가치를 키우고 싶어요. 내가 아름다울지도 모르잖아요?" 예지는 그렇게 말하면서 책 한 권을 옆구리에 끼고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그 책은 내가 프랑스에 갈 때 챙겨 넣었다고 생각한 『내용 없는 인간』이었다. 예지는 그 책을 어디에서 찾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침대에 기대어 앉아 책을 펼쳤다. 온몸이 노곤했고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꿈속에서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무언가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끝이 나지 않는 작업이었고 나는 내가 무엇을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을 만들고 있나 생각하려 애썼는데 그럴수록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아 뇌신경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듯했다. 멍청한 꿈이었다. 어스름한 저녁 기운이 느껴졌다. 머리맡에는 책이 아무렇게나 펼쳐진 채 나뒹굴고 있었다.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마른세수를 하고 몸을 일으켰다.
"일어났군요. 어쩌죠? 잔이 깨졌어요. 미안해요."
예지가 식탁 옆에 어정쩡하게 서서 말했다. 조르주는 깨진 유리잔을 신문지로 감싸고 있었다.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예지와 조르주를 번갈아 보았다. 조르주는 유리 파편이 떨어지지 않도록 신문지 모서리를 모아잡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잔을 깬 건 나요. 변상하겠소."
조르주가 식탁 앞에 앉으면서 말했다. 나는 유리잔은 마트 오픈 기념으로 받은 싸구려 사은품이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기는 했는데, 지금 중요한 게 유리잔은 아니었다. 예지는 내가 잠든 사이에 조르주에게 전화가 걸려왔고 그래서 조르주를 집으로 초대했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조르주와 헤어지면서 저녁을 함께하자고 말한 기억이 났다.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고 술을 마셨다. 조르주와 예지는 경쾌하고 빠른 템포로 술잔을 비웠고 한 토막의 침묵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사는 자정이 될 때까지 이어졌고, 오랜만에 술을 마셨기 때문인지 나는 꽤 취해 있었다. 식탁에 팔을 괴고 꾸벅꾸벅 졸다 일어나 술을 마셨고,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자 머릿속은 점점 더 뿌옇게 흐려졌다.
"당신 코 밑에 달린 그 수염은 내 것이요. 지난 십 년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손질한 거요. 알아보지 못할 수가 도저히 없소."
조르주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잠을 깨웠다. 그런데 조르주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그러니까 예지의 콧수염이 조르주의 것이라는 것인데, 어째서 예지의 콧수염이 조르주의 것인가. 조르주는 콧수염을 밀지 않았나. 아니 애초에 기른 적이 없다고 아네스는 말했는데 아니 카레르가 썼는데 그러나 그것은 아네스가 한 말을 썼을 텐데······. 나는 그런 의미 없는 사고 회로에 갇혀 있다가 잠이 들었고, 그래서 예지가 조르주에게 무슨 대답을 했는지는 들을 수 없었다.


조르주는 매일같이 우리 집에 드나들었다. 예지를 돕는다는 이유에서였는데, 그가 무엇을 돕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은 한나절이 넘게 붙어 있었다. 때때로 언성이 높아질 때도 있었지만 웃음소리가 들릴 때가 더 많았고, 예지는 조르주를 대신해 아네스에게 줄 선물을 사기도 했다.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낄 자리는 없어 보였음에도, 나는 그 사이에 낀 채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그 대화가 예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 상황을 만든 것은 나였기 때문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그들과 거리를 두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나는 사촌동생 결혼식 때문에 지방에 내려가야 한다는 핑계로 짐을 쌌고, 발길이 닿는 대로 차를 몰았다.
동해바다가 보였다. 해수욕장 앞에 자리한 펜션에 짐을 풀었다. 바다가 내다보이는 커다란 창문 앞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 반복적인 파도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자니 머릿속이 질서정연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상태라면 책도 잘 읽힐 것이고 생각도 정리가 될 것이다. 가방을 열었다. 이번에는 『내용 없는 인간』이 들어 있었다. 책을 펼쳤다. 그러나 몇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초인종이 울렸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강한 중력이 내 몸을 잡아당기는 듯했다. 천천히 책을 덮고 찌뿌듯한 몸을 겨우 일으켜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카레르가 서 있었다. 그는 신경질적인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카레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어째서 저런 표정을 짓는 건가. 카레르는 무작정 방 안으로 밀고 들어와 다짜고짜 이유를 말하라고 다그쳤다. 나는 영문을 몰라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물었다. 카레르는 자기 차에 끔찍한 낙서를 한 사람이 바로 나라고 했다. 그것도 모자라 내가 자신을 무시하고, 자기 차를 가로채 아무렇게나 몰고 다녔다고도 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는 카레르의 차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내 차를 몰라? 내 차를 여기까지 몰고 와놓고 모른다고?" 카레르는 그렇게 소리치면서 창밖을 가리켰다. 펜션 앞마당에는 내 차가 주차되어 있었는데, 그게 카레르의 차였던가. 아니 그것은 카레르의 차인 것만큼이나 내 차이기도 했다. 카레르는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내 관자놀이에 가져다댔다. 아찔한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권총은 흐물흐물 녹아내렸고, 나는 발등 위로 뚝뚝 떨어지는 검은 액체를 보고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발등이 아려 왔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바닥에는 『내용 없는 인간』이 나동그라져 있었고, 책 모서리에 찍힌 발등은 발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나는 발등에 침을 발라 쓱쓱 문질렀다. 그리고 구겨진 책장을 펼치면서 무의미를 획득하기 위한 분투라는 말을 떠올렸으나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속이 쓰려 왔다. 배를 움켜쥐었다. 그제야 나는 내 위가 텅 비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현관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예지를 불렀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문을 열어 놓고 어딜 나간 걸까. 예지가 돌아오면 서울의 치안이 좋은 편이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좋은 것은 아니라고 말해 주어야겠다. 나는 옷을 갈아입었다.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인지 집 안에 냉기가 도는 듯했다. 문득 예지가 냉장고에 넣어야 할 것을 싱크대에 늘어놓고 싱크대에 담가 놓아야 할 것을 냉장고에 처박아 두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서둘러 싱크대를 확인하고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싱크대와 냉장고는 모두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났다. 현관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는데, 문을 연 사람은 예지가 아니었고 조르주였다. 조르주는 난처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 탓을 할 수는 없을 거요."
조르주는 어쩌겠느냐는 듯이 소파에 걸터앉았다. 나는 조르주의 코 밑에 어정쩡하게 매달린 콧수염을 쳐다보면서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맞은편 소파에 앉으려다 소파 옆에 쓰러져 있는 예지를 발견했다. 네모나게 도려내진 인중에는 피가 고여 있었고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조르주는 목을 가다듬고 말을 할 듯하다가 입맛을 다셨다.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나는 조르주가 예지의 콧수염을, 예지의 피부를 날카로운 면도칼로 도려내는 장면을 떠올렸고,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수염은 내 것이었소. 나는 내 콧수염을 되찾았을 뿐이오."
조르주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가락 끝으로 콧수염을 매만졌다. 나는 예지의 얼굴을 생각했다. 그러나 예지의 얼굴이 생각이 나지는 않았고 얼굴 중앙에 잘려 나간 공백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그래서 예지가 잃어버린 것이 단지 콧수염이 아니라 얼굴 전체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원한 일이었소. 그 콧수염이 내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순수한 기쁨이 차올랐소. 당신이 그 표정을 봤다면 내 말을 부정할 수 없을 거요."
조르주는 그렇게 말하고 예지의 표정을 음미하듯이 허공을 쳐다보았다. 나는 조르주가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조르주는 소매를 접어 올려 팔뚝에 난 긁힌 상처 같은 것을 보여주었다. 그 상처들은 모두 예지가 만든 것인데 얼른 콧수염을 가져가라고 울부짖는 와중에 생겼다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콧수염을 가져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소. 말했다시피 그 콧수염은 내 것이니 말이오."
조르주는 피치 못할 일이었다는 듯이 눈썹을 내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예지는 다시 일을 시작하는 것에 들떠 있었고 그러려면 반드시 콧수염이 필요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콧수염을 가져가 달라고 했을 리가.
"그런 건 그저 구경거리가 되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아. 알다시피 그녀는 콧수염을 믿지 않았소. 자신이 믿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은 명백한 자기학대요."
조르주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예지를 해친 것이 자신이 아니라 나이기라도 한 것처럼 책임을 추궁하는 눈빛이었다. 조르주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권을 두고 간 것 같소. 그걸 찾으러 돌아온 거요." 그는 테이블 아래에 떨어진 수첩을 집어 들었다. 그 수첩을 여권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으나, 그것은 여권이 아니었고 자질구레한 것들이 적힌, 여백이 얼마 남지 않은 수첩일 따름이었다.
"어찌 되었든 반가웠소. 당신 때문에 여길 왔고 그래서 콧수염을 되찾았으니 고맙다고 말해야 하겠지."
조르주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덜렁거리는 콧수염을 꾹 눌러 고정시켰다. 나는 창밖으로 멀어져 가는 조르주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그가 내 낡은 수첩을 들고 프랑스로 돌아가지도 한국에 정착하지도 못한 채 영원히 거리를 떠돌 거라는 것을 알았다.


예지를 잡아 일으켜 소파에 앉혔다. 예지의 몸은 종잇장처럼 얇았고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소파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예지를 바라보았다. 예지는 눈을 감지 않았는데 죽은 눈동자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예지의 얼굴 중앙에 난 공백을 들여다보았다. 그 심연 속으로 예지가 빨려 들어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책들을 끄집어 내렸다. 그리고 그것들을 찢어서 예지의 공백을 가렸다. 그러나 힘없는 종이는 붉은 피로 물들었고, 상처 난 피부는 종이를 집어삼켰다. 다시 종이를 찢어 공백을 메우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공백을 메울 것을 찾아 서재로 향했다. 책장을 훑어보았지만 마땅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책상 서랍을 뒤졌다. 마침내 적당한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다 쓴 원고지 묶음이었는데 표지가 제법 두껍고 단단했다. 이 정도 두께라면 구멍 안으로 밀려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옆구리에 끼고 서랍에서 문구용 칼과 자, 볼펜을 꺼내 거실로 나왔다.
먼저 예지의 벌어진 공백을 자로 쟀다. 아무래도 측정을 정확하게 하는 쪽이 여러모로 좋을 것이다. 그리고 측정값을 원고지 표지에 옮겨 그려서 예지의 인중을 덮을 콧수염을 만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구용 칼로 그것을 오려냈다. 제법 그럴 듯한 콧수염이었다. 원고지 표지가 흰색이었기 때문에 예지는 흰색 수염을 달게 되었다. 예지의 콧수염은 검정색이었지만 어쩌면 흰 콧수염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예지의 얼굴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묶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예지의 공백을 벌려서 종이 콧수염을 아귀가 꼭 맞게 끼워 넣었다. 하얀 콧수염은 테두리부터 붉게 물들기 시작했지만 제자리를 찾은 양 예지의 빈곳을 말끔히 메우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예지를 쳐다보다가 콧수염이 잘려 나간 원고지 표지에 볼펜으로 '콧수염, 없는 인간'이라고 꾹꾹 눌러 적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피에 젖어 점차 허물어져 가는 콧수염을 바라보았다.(*)
















작가소개 / 이상희

1983년생. 한양대학교,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회학 전공. 201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래빗쇼」로 등단.


《문장웹진 2019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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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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