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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명

  • 작성일 2018-04-01
  • 조회수 2,934

[단편소설]



개명



지혜




회색 가림막 위로 큼지막한 문구가 쓰여 있었다.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정류장 맞은편에 자리 잡은 백화점의 증축 공사 때문인지 도로는 어수선했다. 대기 행렬이 터미널 정문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다. 나는 서둘러 줄을 섰다.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정류장은 북적였다. 백화점은 주변의 야트막한 건물과 달리 높고 화려했다. 가로등마다 지난 시즌의 세일을 알리는 광고 현수막이 펄럭였다. 현수막 너머 ‘좋은’과 ‘모습’이 번갈아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마치 백화점이 시민들에게 크게 잘못한 일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택시 한 대가 정류장에 도착했다. 나는 뒷좌석에 타 식장 주소를 말하고 아진이 일러준 주의사항을 덧붙였다.
새 건물인데, 결혼식장이에요. 간판이 없어서 찾기 어려울 수 있어요.
결혼식장은 터미널에서 차로 이십 분쯤 걸린다고 했다. 택시가 출발하자 나는 좌석에 등을 기댔다. 그 도시는 나와 아진의 고향이 아니었다.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치는 풍경은 온통 회색이었다. 눈에 익지 않은 거리 위로 연기가 솟고 있는 굴뚝이 보였다. 창백한 하늘 위로 번져 나가던 연기가 잠시 후 허공에서 사라졌다. 아진이 어떻게 연고 하나 없는 도시에서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다. 상대가 명훈이 아니라는 것과 나를 결혼식에 부른 것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혹시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 아닐까. 결혼 전에 한 번이라도 만나야 했던 건 아니었을까.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짐작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핀잔을 주는 선배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넌 걱정이 너무 많아. 그렇게 말할 때 선배는 열에 아홉은 반드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선배에게 문자를 보냈다. 잘 도착했어. 끝나고 연락할게. 답장은 없었다. 선배와는 여전히 헤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한 달 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을 때 나는 선배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헤어지자는 말을 들은 게 엊그제였다. 그새 번호를 바꿔 연락할 만큼 변덕이 심한 사람이 아니었다. 선배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낯선 번호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고는 충동적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미연이니? 이거 미연이 전화 아니에요?
수화기 너머 낯선 억양의 여자가 조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기다림의 크기는 생각보다 컸다. 실망은 빠르고 쉬웠다. 목소리는 어딘가 익숙해서, 돌연 오래전 알던 이름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언아진……?
아진은 나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종종 안부전화를 할 만큼 막역한 사이는 아니었다. 내가 아진에게 번호를 알려준 적이 있던가.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런 일을 기꺼이 할 만큼 우리가 가까웠던가. 나는 다소 긴장한 채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 웬일이야?
‘웬’이 아니라 ‘무슨’이라고 물었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아진은 한껏 들뜬 목소리로 오랜만이라고, 놀랐느냐고 했다. 그러더니 대뜸,
나 결혼해.
라고 말했다.
부를 사람이 별로 없어, 그래도 네가 꼭 와줬으면 좋겠어. 아진의 목소리에는 타지의 억양이 반 이상 섞여 있었다.
신랑이 여기서 일하거든. 함 놀러 와라.
응, 그럴게.
나는 아무 기대 없이 대답했다. 돌연 명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오빠가 이제 몇 살이더라. 나보다 두 살이 많으니까 딱 서른이 됐을 터였다. 명훈은 잘 있냐고 물으려는데 아진이 먼저 말했다.
근데 미연아.
응.
나 이름 바꿨다. 아진이 아니고 다미.
다미?
나한테 불이랑 물이 없어서 이게 좋단다. 다미가 나한테 맞다대.
아진의 엄마는 파자점(破字占)을 치는 사람이었다. 한자의 획과 점을 면면히 나눠 뜻을 밝히는 일. 그런 걸로 먹고살 수 있다니,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땐 무척 신기했다. 아진이 어설프게 배운 음양오행으로 나의 사주를 봐준 적도 있었다. 넌 나랑 친할 사주네. 그렇게 말하던 아진의 얼굴은 어떤 예감과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사주와 길일, 궁합을 보며 자신의 불행과 미래를 가늠하는 일은 아진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럼 이제 다미라고 불러야겠네.
아진도 다미도 다 괜찮아. 편한 걸로 불러라.
명훈 오빠는?
그 오빠 성이 뭐였더라, 하고 물으려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수화기 저편에서 당황스런 침묵이 흐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사람 아니야.
명훈은 아진과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둘은 함께였다. 머리카락과 콘돔, 구겨진 양말과 빈 술병이 굴러다니던 원룸이 떠올랐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고 꼭 가겠다고, 결혼식 날 보자고 했다.
아무튼 너 오는 거지? 진짜지?
그럼, 꼭 갈게.
명훈 오빠를 만난 건 고등학교 연합 동아리에서였다. 고등학교 문예부 학생들만 가입할 수 있는 연합 동아리에서 나는 삼 년 내내 총무를 맡았다. 동아리 활동에 열정이나 애정이 있어서 시작한 건 아니었다. 가산점 때문이었다. 당시 동아리 학생들 사이에는 수시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조급함이 흐르고 있었다. 별 볼일 없는 성적에 높은 자존감을 가진 학생이라면 학교가 아닌 어딘가에서 자신의 판을 짜길 원했다. 그렇게라도 인정과 애정을 받고 싶어 하는 부류, 내가 바로 그런 학생이었다. 자아는 성적처럼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타인의 눈과 입이 아니고서는 나를 증명할 수 없다는 불안, 그게 연합 동아리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이었다. 처음 연합 동아리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뭐 그런 곳이 다 있나 싶었다. 학교 안에서도 모자라 밖에서도 동아리 활동을 한다니, 시간이 남아도는 아이들이 창의적으로 놀 거리를 찾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한 학기가 지나기도 전에 나는 연합 동아리에 가입했다.
수능이 끝난 11월의 마지막 토요일, 연합 동아리에서 엠티를 갔다. 새로 뽑힌 임원들과 선배, 신입 회원 간의 친목 도모를 위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연합 동아리 부원이었던 대학생 선배 몇 명이 저녁에 합류했다.
너 명훈이라고 알아? 이따 걔도 올 거야.
명훈이가 누군데요. 나는 일찍 취했다. 집에서 몇 번 술을 마신 적이 있었지만 집 밖에서 마시는 술은 더 달았다. 맥주캔과 소주병이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 때쯤 일부는 집으로 돌아갔다. 일부는 이불을 펴고 잠을 잤다. 나는 마실수록 말짱해졌다. 무언가, 무슨 일이 일어나면 좋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명훈이 방으로 들어왔을 때 막 술이 떨어진 참이었다.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겨 입으며 말했다. 지갑 못 봤어? 내 지갑. 대학생 선배였다. 잠에 든 신입 몇 명과 나를 제외하고 여자 부원들은 모두 집에 돌아가고 없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들어왔다. 둘 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명훈이 왔구나.
함께 술을 먹던 선배가 남자를 보며 말했다. 명훈은 키가 크고 마른 몸에 피부가 흰 남자였다. 볼에 수두처럼 핀 붉은 흉터들은 모두 여드름이었는데, 제멋대로 곪거나 회복한 흔적들이 마치 핏자국 같았다. 여자는 체구와 키가 작아 남자 뒤에 서면 완전히 몸이 가려질 정도였다. 남색 후드를 뒤집어쓴 채 말없이 서 있더니 명훈이 앉자 따라 앉았다. 어디서 많이 본 애라고 생각했다. 아진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아진이 나와 동창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명훈이 들고 온 검은 봉지를 내려놓았다. 봉지 안에는 소주병과 맥주캔, 과자가 들어 있었다.
이쪽으로 와. 거긴 여자 친구?
전 회장이 명훈을 보며 말했다. 아진이 명훈 뒤에 앉아 물끄러미 무릎을 모으고 오징어를 씹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아진을 알아봤다. 이과 반의 말없는 아이. 그게 아진에 대한 내 인상이었다. 아진과 나는 고등학교 내내 같은 반이었던 적이 없었다. 나는 문과, 아진은 이과였다. 문예반 활동을 하며 일찍이 진로를 4년제 대학 국문과나 문예창작과로 정한 나와 달리 아진은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학교생활에도 협조적이지 않았다. 동아리 활동을 하지도 않았고 소풍이나 현장학습에도 종종 빠졌다. 그렇다고 해서 노는 아이들과 무리를 지어 다니거나 말썽을 일으키는 부류도 아니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 아진이 학교에 와서 하는 일의 대부분은 새 책이나 다름없는 교과서에 얼굴 한쪽을 대고 자는 것이었다. 점심시간에 일어나 밥 한술을 뜨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다시 교실로 돌아와 잠을 청하고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 친한 친구도, 신경 써주는 어른도 없는, 반에 한두 명은 반드시 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아이. 그게 바로 아진이었다.
안녕? 나 알지?
나는 아진의 곁에 앉아 말을 걸었다. 아진은 내 얼굴을 보더니 대답 없이 마른 오징어를 마저 씹었다. 날 씹나. 평소였더라면 똑같이 무시했을 텐데, 그날따라 오기가 생겼다. 나를 돌아보게 만들고 싶다는 오기. 나는 아진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애꿎은 안주를 부스럭거렸다. 손에서 땅콩 껍질이 잘게 부서졌다.
명훈은 선배들과 술자리가 익숙한 듯 금세 어울렸다. 명훈 또한 연합 동아리의 부원이었으나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자연스레 멀어졌다고 했다. 그런데도 명훈이 선배들과 친했던 건 그의 동창인 전 회장 덕분이었다.
얘가 보기보다 똑똑하거든.
술이 올라 불콰한 얼굴의 전 회장이 명훈을 보며 말했다. 명훈은 잠자코 술을 마시며 그 말에 동의도 반대도 않는 표정이었다. 이 친군 누구야? 전 회장이 아진을 보며 물었다. 아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후드를 눌러 썼다.
얘가 낯을 좀 가려.
명훈이 선배를 보며 말했다. 명훈의 목소리에는 그게 자랑스러운 일이라는 듯 약간의 뿌듯함이 묻어 있었다. 아진은 아예 몸을 돌리고 앉아 봉지에서 과자를 꺼냈다. 먹을 생각이 없는 건지 봉지 입구만 만지작거리는 손이 매우 작았다. 선배가 안녕? 하고 인사했지만 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선배와 명훈이 아진을 보며 웃었다. 그게 재미있다는 듯이, 낯가리는 성격이 흥미로운 농담이라는 듯이. 금세 아진의 숫기 없음을 두고 선배들이 말했다. 그럼 말도 잘 안 해? 얘기는 어떻게 해? 와서 한잔 해. 싫어? 대학 가면 그런 성격 힘들 텐데. 명훈이가 잘해 줘? 아진아, 이리 좀 와봐.
아진은 마치 그렇게 불리기 위해 온 사람인 것처럼 몇 번이고 선배와 명훈의 입에 오르내렸다. 정작 본인은 익숙한 듯 잠자코 오징어만 질겅거렸다. 질기고 비린 마른안주를 입에 넣고 손가락을 빠는 아기처럼 아진은 말이 없었다.
아진아, 오빠가 부르잖아.
명훈이 아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진은 오징어를 입에 물고 명훈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돌연 명훈이 아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선밴 뭐 하는 사람이에요?
나는 명훈에게 물었다. 아진이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명훈은 술잔을 내려놓고 피식거리더니 회장을 보며 말했다. 내가 아니라.
얘 재밌네. 나 몰라?
난 너 처음 봤거든.
그를 도발하려는 의도가 없지는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취해 있었다. 알코올로 몸과 머리가 온통 제멋대로였다. 명훈과 전 회장이 그렇게 낄낄거리지만 않았어도 가만히 있었을지도 몰랐다. 불쾌함에 취기와 치기가 섞이자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 우명훈이야. 너 글 좀 쓰니?
그 질문에는 그의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나는 명훈이 고등학교 문예반이었다는 것, 학교를 그만두었지만 여전히 그쪽 세계에 관심이 많다는 것, 그리하여 처음 본 후배에게 그런 낯간지러운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았다. 글 좀 쓰냐는 물음은 사실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이라는 걸, 누군가 자신에게 그렇게 물어봐 주길 바란다는 걸. 만약 누군가 자신에게 묻는다면 몇 시간이고 대답해 줄 만큼 그는 그 질문에 목마른 사람이라는 것을 그 한 마디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덥석 그가 던진 미끼를 받아 물었다. 나는 언제고 미끼를 뱉어낼 자신이 있었다. 술이 몸속에서 화약고처럼 쌓여 가며 금방이라도 터질 듯 팽창했다.
오빠는요? 오빤 글 좀 써요?
전 회장과 명훈, 앉아 있던 다른 몇 명의 선배가 큰 소리로 웃었다. 웃기지? 얘 진짜 골 때리지 않냐? 나는 실없이 웃는 무리를 쏘아보며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아진은 잠자코 앉아 침으로 흥건해진 오징어 몸통을 입에 물고 무릎에 턱을 기댄 채 명훈과 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나는 손에 든 캔을 한 번에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글 좀 쓰러요.
다시 선배들이 웃었다. 짜증의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어 나는 밖으로 나갔다. 몸속에서 술이 출렁거렸다. 아진은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통화를 끝내고 축의금으로는 얼마를 내야 할지 생각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고등학교 동창에게는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교통비까지 하면 십오, 아니 이십 만원은 필요하지 않을까. 내가 꼭 가야 할까. 이대로 연락을 끊고 영영 아진의 전화를 받지도 만나지도 않는 방법도 있었다. 결혼식은 내달 첫 번째 토요일이라고 했다.


택시는 어느새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도로 양옆으로 아파트 단지가 펼쳐져 있었다. 아파트와 도로 사이에 나무들이 무성했다. 뾰족한 잎이 돋아난 커다란 활엽수들은 마치 도시의 먼지와 소음으로부터 아파트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었다. 산을 깎아 만든 단지는 컴퓨터 배경화면처럼 인공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러나 평화로운 풍경과 달리 주변에는 사람이나 차가 보이지 않았다. 도로는 지나치게 깔끔했다. 차도와 인도 사이에 설치된 펜스가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모델하우스가 아니라 모델로드가 있다면 이런 길일까 싶은 모습이었다. 언젠가 방문했던 신도시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떠올랐다. 공사가 한창인 단지는 대부분 입주 전이었는데, 투자용으로 구매한 후 오랫동안 비워 두는 곳이라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어딘가에서 물건이라도 떨어뜨리면 온 동네 전체에 소음이 날 것 같은 적막이 단지에 가득했다. 택시가 지나는 길은 그런 적요가 가득해서, 유령 도시를 방문한다면 이런 곳일까 싶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이제 아진은 이런 곳에서 사는 걸까. 인적도 소음도 없는 잘 가꾸어진 동네에서. 무성한 나무가 집을 지켜주는 그런 곳에서. 나는 아진의 최근 몇 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때 선배로부터 문자가 왔다.
비 온다. 언제 와?
나는 선배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낀 반지를 떠올렸다. 그 반지와 세트인 다른 하나는 내 것이 아니었다. 선배에게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 나도 선배의 사람 중 하나였다. 둘 중 누군가를 선택하라고 할 만큼 나는 선배에게 간절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손가락에 낀 반지를 벗어버리고 나를 선택한다면, 다음번 버려지는 반지가 내 것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나는 답장을 할 생각도 않고 휴대폰만 들여다봤다.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건 나였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그만 하자고 말한 것도 나였다. 생각해 보겠다던 선배는 며칠 후 정말 헤어지자고 했다. 나는 그때 마음이 바뀌어 있었다. 변덕이 심한 것도 감정의 기복이 큰 것도 모두 내 쪽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이 관계의 지독함을 혼자 곱씹었다. 어쩌면 내가 즐기는 걸지도 모른다고, 내가 처음부터 이런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마음속에서 차올랐다. 선배는, 정말 어쩌고 싶은 걸까. 수백 번 마음속으로만 물어봤던 질문을 해야 할 때가 왔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기사님 이쪽 맞아요?
나는 스마트폰 지도를 켜고 택시가 가는 방향을 확인했다. 현재 위치를 알 수 없다는 알림이 뜨며 어플은 먹통이었다.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은 점점 컴컴해져 갔다. 그때 기사가 백미러로 날 보며 말했다.
이쪽이 더 빠르죠. 아가씨 초행이지?
나는 잠자코 뒷좌석에 등을 기댔다. 기사는 위협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초행의 외지인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래야 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면 저렇게 말하지 않겠지. 정말 이상한 사람은 아예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불현듯 휘어지는 눈웃음을 짓던 마르고 긴 얼굴을 떠올랐다. 누가 할퀴고 간 것처럼 붉은 기가 가득한 강퍅한 볼을 가진 사람. 명훈이었다.
수능이 끝나고 이듬해 나는 대학에 진학했다. 1지망에서 떨어진 후 추가 합격을 기다렸다. 긴 두 달이었다. 그사이 아무도 만나지 않고 방에 틀어박혔다. 엠티 이후 명훈과 아진, 둘에게서 종종 문자가 왔다. 어디야? 놀러와. 우리 이사했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왜 좀 더 절실하지 않았을까, 왜 더 노력하지 않았을까. 만약의 사태에 심각하게 걱정하는 버릇도 그때부터 시작됐다. 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지. 어떻게? 잘.
추가 합격 공지가 뜰 때까지 나는 종종 두 사람과 문자를 주고받았다. 둘은 거의 같이 있거나 같이 있을 예정이 많았으므로 결국 한 사람과 연락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진에게 말한 것은 명훈이 알고 있었고, 명훈은 아진이 나와 주고받은 모든 문자메시지를 읽었다. 둘이 한집에 살기 시작했다는 문자를 받은 오후, 추가 합격 문자가 왔다. 긴 겨울이 끝나 가는 2월의 마지막 주였다.
산을 가로지른 아파트 단지를 지나자 공장과 인공 숲, 중소 쇼핑 단지가 차례로 나타났다. 이윽고 택시는 팔차선 국도로 진입했다. 대형 탑차와 용달 트럭 사이로 택시는 빠르게 달렸다. 길은 순식간에 끝났다. 논밭 사이의 좁은 도로로 들어서더니 잠시 후 황량한 벌판이나 다름없는 공터가 나타났다. 그곳은 신도시로 한창 개발 중인 아파트 부지였다. 짓다 만 가림막과 철근, 현수막이 어수선하게 자리 잡은 공사장 사이로 번쩍거리는 건물이 보였다.
다 온 것 같은데.
기사가 말했다. 속도를 줄이더니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보여요? 길 끝에.
양옆으로 공사 자재와 목재가 놓여 있는 벌판 한가운데 사층짜리 신식 건물이 있었다. 건물은 한눈에 봐도 일반 주택이나 상가가 아니었다. 전면이 마치 선팅 한 차창처럼 불투명한 짙은 남색 유리로 되어 있어 각도에 따라 빛을 내며 번쩍였다. 간판은 없었다. 결혼식이 아니라면 무엇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건물이었다.
저기 세워 주세요.
나는 건물이 보이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택시는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건물 앞에는 여러 대의 승용차가 주차돼 있었다. 하객들이 서성이며 소란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공터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결혼식장 주위로 습한 공기가 떠다녔다. 일순간 하객들이 정문으로 쏟아져 나와 나는 다른 입구를 찾아 헤맸다.
아진은 대체 누구와 결혼하는 걸까. 결혼이란 건, 그러니까 남은 인생을 평생 같이 살겠다는 약속을 할 만한 사람이란 건 대체 누구일까. 명훈이 남편으로 그리 좋은 자질이 없었다는 건 둘째치고서라도, 아진에게 결혼에 대한 열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사실 그것뿐만이 아니더라도 나는 아진에 대해 뭐든 깊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아진의 사주에는 관이 없어서, 그러니까 입신양명 남자 뭐 그런 것들이 부재하기 때문에 결혼을 하더라도 안 하느니만 못 할 것이라고, 아진은 스스로의 미래를 예견한 적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식장 근처에는 편의점이나 은행, 커피숍 같은 일체의 편의시설이 보이지 않았다. 끝도 시작도 없는 허허벌판 가운데 번쩍이는 건물이 주변의 빛을 반사하며 서 있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식장을 찾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아, 그 순간에도 멀리서 승용차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나는 주차장과 이어진 후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지하와 지상 삼층의 식당, 일층과 이층, 그리고 삼층 일부가 식장이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포기하고 비상구의 계단으로 올라갔다. 어딘가에서 잔잔한 배경음악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이층에 다다르자 식장 한쪽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의 아름다운 신부를 기다리며, 신랑이 하객들을 위해 준비한 영상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층 왼쪽 식장에서 결혼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하객들이 식장 밖까지 나와 서성였다. 푸른색의 조도가 낮은 조명과 흰 새틴, 레이스, 장미꽃으로 장식된 결혼식장은 잘 꾸며진 연극 무대 같았다.
영상이 끝나자 사회자가 자리에 앉으라고 말했다. 하객 일부가 빠져나와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식을 보지 않고 피로연장에 가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초대받은 하객도 아니면서 눈앞의 화려한 예식을 조금 더 구경하고 싶었다. 어두컴컴한 하객석에 서 있자 나도 그곳의 일원이 된 기분이었다.
양측 부모와 주례, 사회자의 소개가 끝난 뒤 신부 입장이 시작됐다. 익숙한 바그너의 멜로디가 아니라 가사가 있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찬송가였다. 하객 몇 명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식장 입구는 활짝 열려 있었지만 서 있는 하객들로 어수선했다. 웬일인지 사람들은 웨딩로드가 시작되는 식장 입구가 아니라 무대를 보고 있었다. 그때 불이 꺼지며 핀 조명이 화려하게 번쩍거렸다. 조명은 잠시 후 무대 한쪽에 고정되더니 큰 소리의 축하음과 함께 요란하게 흔들렸다. 조명에 맞춰 새로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드럼, 브라스, 일렉트로닉 기타 소리로 편곡된 바그너의 행진곡이었다. 그때 곤돌라에 탄 신부가 무대 귀퉁이에서 등장했다.
곤돌라, 그건 정말 곤돌라였다.
여기저기서 소란스런 박수가 터져 나오며 환호성이 났다. 그래서 식장 바깥까지 사람들이 꽉 차 있었구나. 밖에서 웨딩로드를 따라 걸어 들어오는 일은 이제 하지 않는구나. 결혼이라는 거, 정말이지 곤돌라를 타고 시작해도 되는 거였구나. 최신의 결혼 문화를 눈앞에서 목격한 나는 잠자코 다음 장면을 기다렸다. 뒤에서 노를 젓는 사공도, 흔들리는 강물도 없었지만 곤돌라는 신부를 태우고 무대 바닥으로 조심스럽게 착지했다. 선체 앞머리를 이동식 레일에 설치해 신부의 입장을 극적으로 연출하기 위한 장치였다. 면사포를 쓴 신부의 얼굴은 조명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흰옷을 입은 창백한 석상처럼 보였다. 문득 아진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아진도 곤돌라를 타고 입장하는 걸까. 그럼 조금 웃길 것 같았다. 나는 식장을 빠져나와 반대편으로 이어진 복도를 걸어갔다. 아진의 결혼식도 곧 시작할 터였다.


대학 2학년 여름방학, 나는 내내 고향에 머물렀다. 조금이라도 학교와 학교가 있던 도시에 있고 싶지 않았다. 종강하는 날 모든 짐을 싸고 기숙사를 나오며, 당장이라도 휴학계를 내고 싶었다. 그날, 집을 나와 구립 도서관으로 향하며 나는 언제까지 고향에 머무를 수 있을지 생각했다. 도서관은 학교와 집을 빼고 중고등학교 내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었다. 도서관에는 매점도 있었고 다리가 낡아 삐걱거리는 의자와 오래된 책상, 끝이 없는 장서 먼지, 책 냄새 그리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었다. 무언가 알고 싶지만 방법을 몰라 깊고 긴 도서관 속으로 숨어든 사람들. 나는 그들 곁에 있는 게 좋았다. 그러면 내가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도서관은 휴관이었다. 휴일은 고작 한 달에 한두 번이었다. 나는 하릴없이 도서관 근처를 돌아다녔다. 아침 아홉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도서관 주변에는 유명한 사립 고등학교가 있었다. 중학교, 초등학교까지 있는 사립 학원을 지은 사람의 손자가 이사장으로 있는 곳이었다. 연합 동아리에도 사립학교의 학생이 있었다. 그는 삼학년이 되자 더 이상 모임에 나오지 않았다. 그가 졸업 후 무엇을 하는지 들은 적은 없었다.
나는 도서관 근처의 24시간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카페는 도서관 서고에 쌓인 책만큼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24시간 카페가 많이 없던 시절에도 카페는 밤새 공부하는 학생들의 독서실 같은 역할을 했다. 핫초코나 캐러멜 마끼아또 같은 음료를 한 잔 시키고 날이 밝을 때까지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아이들이 그곳을 찾았다.
나는 캐러멜 마끼아또를 시키고 자리를 잡았다. 평일 오전의 카페는 한적하면서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조용함이 느껴졌다. 돌연 아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적막이 카페 안에 가득했다.
음료를 받고 자리에 앉았을 때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자 거짓말처럼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어, 안녕?
언아진이었다. 목욕탕이라도 다녀왔는지 뽀얀 볼에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새 머리카락이 길게 자라고 살이 빠져 있었다. 원체 작은 체구였는데 2년 사이에 아이 같던 외모가 조금은 어른스럽게 변해 있었다. 나는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아진의 얼굴을 바라보며 적당한 인사말을 머릿속으로 골랐다. 잘 떠오르지 않았다.
오랜만이다. 언제 내려왔어?
아진은 자연스럽게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마치 그제 헤어졌다 다시 만난 친구를 본 것처럼 익숙한 동작이었다. 테이블 위의 마끼아또에서 캐러멜 향이 났다. 나는 아진의 갑작스런 등장에 반가움과 어색함을 동시에 느꼈다.
얼마 안 됐어. 뭐 좀 마실래?
아진은 너랑 같은 거, 라고 말했다. 나는 마끼아또를 한 잔 주문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아진은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들여다보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불투명한 흰색의 방수 스포츠 백이었다. 달라진 아진의 인상이 낯설어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잘 지냈어? 좋아 보인다.
너는 좀 삭았네. 힘들었나 봐.
나는 아진의 직설적인 말에 놀랐다. 내가 알던 언아진이 맞나, 혹은 원래 이런 애였던 걸까. 대학 입학 전 몇 달간 시간을 보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 같았다. 사실 그간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진이 모르는 것처럼 나도 아진의 지난 시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런 사이였다.
음료가 나오자 아진이 뚜껑을 열고 컵을 흔들었다. 나는 아진이 하는 일을 잠자코 지켜봤다. 무언가 골똘하게 집중하는 얼굴은 아진에게서 보기 드문 것이었다.
이거 봐라, 시럽점(占)이다.
음료 위에 뿌려진 캐러멜 시럽을 보며 아진이 말했다. 마끼아또 위에 올라간 흰 우유 거품을 휘젓자 단내가 나는 캐러멜이 제멋대로 모양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얼마간 버티다가 일회용 컵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모양을 낸 시럽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자 거품 위에는 무언가의 흔적 같은, 죽은 벌레의 사체를 연상시키는 찌꺼기가 남았다. 그건 어떤 의미나 특징이 있다고는 할 수 없는 형태였다. 나는 우유 거품을 골똘히 바라보는 아진에게 물었다.
뭐가 보여?
아진은 한참 동안 우유 거품을 보다가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래.
아진은 24시간 찜질방의 야간 세신사로 일하고 있었다. 졸업 후 아진은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일을 하며 명훈과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잠시 후 아진이 물었다.
우리 집 갈래?
너네 집?
응. 여기서 가까워.
다 마르지 않은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빙 꼬아 돌리며 아진이 말했다. 아진은 약간 부끄러움이 남은 사람처럼 내 얼굴 너머 카페 입구에 시선을 던졌다. 그제야 아진의 얼굴에는 내가 알던 언아진, 교실 구석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꽂고 잠을 청하는 언아진, 선배들 사이에서 애매한 희롱을 못 들은 척 무시하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나는 충동적으로, 그러나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가자.
조금 있으면 오빠도 퇴근이야. 명훈은 집 근처 피시방에서 야간 알바 중이었다.
학교는 어때? 재밌어?
글쎄…… 그냥 다니는 거지.
아진의 집은 도서관에서 멀지 않은 원룸 단지에 있었다. 신축 빌라의 2층에는 아진네 말고도 세 가구가 더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희미한 담배 냄새와 화장실 하수구 냄새가 났다. 베란다에 놓인 빨래건조대에 속옷과 양말이 잔뜩 널려 있었다. 커튼이 달리지 않은 창에서 빛이 들어와 방 안은 아주 밝았다.
덥지? 에어컨이 고장 나서.
아진이 섀시를 열고 선풍기를 틀었다. 싱크대 앞에 서서 컵과 접시를 꺼내며 콧노래를 불렀다. 어딘가 달라졌는데 정확히 그게 뭔지 알 수 없어, 나는 아진의 뒷모습만 멀뚱히 쳐다봤다.
오빠 금방 온대. 맥주 마실래?
아니, 괜찮아.
나는 바닥에 앉아 둘이 살고 있는 작고 환한 방을 둘러봤다. 방 하나와 일체형 부엌, 베란다, 문 열린 화장실이 집의 전부였다. 창밖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집 근처 학교에서 나는 소리였다. 아진이 베란다와 부엌을 분주히 오가며 무언가를 꺼내고 다시 들여놓았다. 베란다에는 생수며 휴지, 맥주병과 세제가 정리되지 않은 채 쌓여 있었다.
잠시 후 명훈이 집으로 돌아왔다. 명훈은 한 손에 커다란 비닐을 들고 있었다. 마트 이름이 적힌 흰 봉투 안에는 또 다른 검은 봉지가 들어 있었다.
이것 좀 받아.
봉지의 매듭이 묶여 있어 내용물은 보이지 않았다. 이게 뭐예요? 명훈이 말없이 발로 바닥에 놓인 물건들을 치웠다. 바닥에는 머리카락과 고무줄, 콘센트, 빗, 화장품, 리모컨, 휴대폰 배터리 그리고 빈 콘돔 상자가 널려 있었다. 아진이 구석에 놓여 있던 이불을 치우고 상을 폈다.
방어.
방어요?
사장님이 낚시 갔다 잡아왔대.
그러고 보니 봉지에서 희미하게 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냉장고를 열어 방어가 든 비닐을 넣었다. 그러자 명훈이 도로 냉장고 문을 잡고 말했다.
놔둬, 아진이가 할 거야.
잠시 후 아진이 방어를 손질해 회를 쳤다. 아진의 마른 등을 바라보며 나는 무언가 둘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는 걸 알았다. 오래 사귄 연인의 피치 못할 지겨움, 그런 종류의 긴장이었다.
잠시 후 아진과 나, 명훈이 술상 앞에 마주 보고 앉았다. 맥주와 소주, 대충 썬 방어회가 푸짐했다. 연거푸 몇 잔을 마시고 나자 몸에 술이 돌았다. 명훈은 더 빨개진 얼굴로, 아니 어쩌면 원래부터 그런 검붉은 얼굴로 태어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취해 갔다.
학교 재밌어?
그저 그래요.
표정이 영 아닌데? 재미없으면 때려치워.
그 정도는 아니고요. 내가 어떻게 들어간 학굔데.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밤을 새워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뽀얀 얼굴의 아진과 달리 명훈은 눈에 띄게 초췌하고 피곤해 보였다. 붉게 충혈 된 눈 주위로 희미하고 얇은 주름이 져 있었다. 2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명훈은 적어도 열 살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방 한구석에 놓인 행거와 토퍼. 담배, 콘돔, 여자 속옷, 양말, 트렁크, 보스턴백, 그리고 경마지가 폐차장의 버려진 부품처럼 성의 없이 놓여 있었다. 전면 가득 말 사진이 인쇄된 총천연색 정보지 위로 조잡한 글자가 가득했다. 우리는 연거푸 맥주와 소주를 마셨다. 방어는 비렸지만 실했다. 우리는 별 말도 없이 술을 마셨다. 잠시 후 아진이 눈을 감고 상 앞에 앉아 졸았다. 명훈은 어느새 혼자 소주 두 병을 비운 터였다.
너 요즘도 글 쓰냐?
아니요.
왜 안 써. 작가 되면 최고지.
글이라니. 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오빠, 요즘 아무도 그런 거 중요하게 생각 안 해요. 나는 속으로만 대답했다. 언제까지 글 얘기만 할 거야? 그렇게 하고 싶으면 네가 하든가. 나는 하고 싶은 말을 술과 함께 들이켰다.
너 꼭 글 써라. 나처럼 되지 말고.
나는 그때 그 집을 나가고 싶었다. 먼지가 구르는 방도, 명훈도, 아진도 더 이상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그곳은 둘의 보금자리가 아니라 어떤 이유로 함께 지낼 수밖에 없는 두 타인의 비루한 숙소 같았다. 편안하지도 쾌적하지도 않은 그 방은 어쩌면 내 과거일지도 몰라, 나는 일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남은 술로 입안을 헹구고 컵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때 잠든 줄 알았던 아진이 고개를 들고 소리쳤다.
조용히 좀 해!
아진은 여전히 술에 취한 얼굴로 명훈을 쏘아보며 말했다.
맨날 똑같은 소리만 하지 말고, 너나 잘해.
명훈이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아진을 바라봤다. 아진이 가늘게 실눈을 뜨고 명훈을 노려봤다. 주사인지 잠인지 알 수 없는 상태가 아진의 얼굴에 가득했다. 그건 처음 보는 아진의 표정이었다.
좆도 아닌 게.
아진이 뭉개지는 발음으로 그러나 똑똑히 들리도록 명훈을 쳐다보며 말했다. 명훈은 한참 동안 아진을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명훈은 오래도록 방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진이 방어 한 점을 입에 넣고 나를 봤다. 다시 언젠가의 표정으로, 아무 생각 없다는 듯이 혹은 모든 걸 잠자코 보고 있었다는 듯이. 싱긋 웃으며 입안의 생선 살점을 오래도록 물고 있었다. 마치 사탕인 것처럼, 녹여 먹을 듯이.
나는 돌연 아진에게 물었다.
아까 미래, 어땠어?
응?
시럽점 말이야.
나는 젓가락을 들어 방어회 한 점을 입에 넣었다. 밍밍하지만 달짝지근한 살점이 혀 위에서 젤리처럼 미끈거렸다. 방 안으로 한낮의 뜨거운 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상 위에 펼쳐진 방어회처럼 흐물흐물하게 녹아 사라지는 나와 아진의 미래를 떠올렸다. 아진이 머리카락을 높게 올려 묶으며 대답했다.
완전 좋은 미래.


그 후에도 종종 아진의 소식을 들었다. 별 볼일 없는 남자와 여전히 동거한다거나 2년제 대학의 미용관리학과에 입학했다든가 하는 것들이었다. 나는 소문 속의 남자가 항상 명훈이라고만 생각했다. 아진이 명훈에게서 점점 멀어지더라도 둘은 한 세트로 묶여 영영 헤어지기 어려운 뭔가가 있다고, 그런 줄로 알았다. 특별히 예쁘거나 잘난 데도 없고 나와는 조금의 취향이나 가치관도 겹치지 않는 그 애를 왜 무시하지 못할까. 그게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는 알았다. 어쩌면 저 애는 나일지도 몰라. 내가 되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일지도 몰라. 스스로의 삶을 방기한 건 아진 자신이라고, 그런 위안이 나를 움직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을, 아진의 무엇을. 무슨 아진의 무엇이 나에게.
다미와 아진, 그 이름 사이에 놓인 거대한 강 위로 불길이 솟은 다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복도를 건너 아진의 결혼식이 열리는 곳으로 갔을 때는 한창 준비 중이었다. 식장 앞의 알림판에 손 글씨로 신랑과 다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언다미. 한껏 흘려 쓴 그 이름은 언뜻 보기에 ‘다다’처럼 보였다. 어쩌면 다미가 아니라 다다의 결혼식이 열리는 곳일지도 몰랐다. 내가 알던 아진 아니 다미는 여기 없고 이미 멀고 먼 미래, 완전 좋은 미래로 떠났을지도 몰랐다.
신부 측 하객이십니까?
나는 신부의 축의금 함에 봉투를 넣었다. 아진과 비슷한 인상의 남자가 양복을 입고 서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방명록을 써달라는 말에 펜을 잡고 망설이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그러다 다시 펜을 들어 결혼을 축하합니다, 라고 커다랗게 적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중년의 여자가 복도를 지나 식장 바깥으로 걸어갔다. 화장실이 있는 복도 끝에 신부 대기실이 있었다. 나는 여자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반대쪽 식장과 달리 그곳에는 식이 있는 줄도 모를 정도로 하객이 보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신부 측 손님으로 나밖에 없을지도 몰라, 나는 어느새 신부 대기실로 들어갔다.
아진은 어깨가 드러난 웨딩드레스를 입고 카메라를 바라보다가 나를 발견했다. 그간의 공백이 어색할 정도로 우리는 반갑게 인사했다. 왔어? 전체적으로 살이 오른 뽀얀 얼굴에 분홍색으로 물들인 색조 화장이 무척 잘 어울렸다.
다미야.
아진이 돌연 코를 훌쩍거렸다. 나는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아진, 아니 다미에게 건넸다. 언젠가 보았던 아기 같기도 하고 얼빠진 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아진이 심각하게 말했다.
나 너무 배고파.
밥은 먹었어?
아니, 아무것도. 아무것도 먹으면 안 된대.
몸에 알맞게 달라붙은 드레스 위로 레이스가 달린 면사포가 물결처럼 흔들렸다. 나는 다미의 곁에 앉아 레이스의 주름을 고쳐 잡았다. 아진의 둥근 왼쪽 어깨 위에 자그마한 세 개의 점이 삼각형의 꼭짓점처럼 돋아나 있었다. 나는 문득 손가락으로 그 점을 쓰다듬고 싶었다. 만지면 오돌토돌할 것 같은 검붉은 점이 나에게 어떤 신호를 줄 것만 같았다.
꼭 파자(破字) 같다.
백지 위에 낱알처럼 그려진 한자의 획을 들여다보며 주문처럼 중얼거리던 아진의 모습이 돌연 머릿속에 떠올랐다. 따로 떼어 놓고 보면 나쁠 게 없는데 왜 하나로 합쳐지면 나쁜 글자가 있는 걸까. 마치 이름을 바꾸듯 사주도, 삶도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진은 지금도 그 글자를 기억할까. 나는 그게 어떤 한자였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진은 자신의 불행과 고통을 모두 기억하고 있을까. 아주 어릴 적 기억과 목소리, 나를 괴롭히던 누군가의 얼굴 같은 것.
잠시 후 우리는 손을 잡고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플래시가 다미와 나를 향해 팡 하고 터지더니 사진사가 말했다. 한 장 더 찍겠습니다. 아진이 카메라를 향해 웃으며 속삭였다. 이따 꼭 봐. 밥도 다 먹고 가. 나는 아진의 손에 들린 노란 부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혼식이 끝나면 선배에게 반드시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오래도록 미뤄 왔던 이별을 고하겠노라고 마음먹었다.
















작가소개 / 지혜

201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당선. 식물교.


《문장웹진 2018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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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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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타이완

    감각적이고 미려한 글이네요. 오늘 여성 권리와 힘의 무게감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 2018-04-01 20:51:18
    타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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