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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되기, 하기

  • 작성일 2017-09-01
  • 조회수 3,240

[단편소설]



하기, 되기, 하기



이상희





1


“판다라고요?”
재오는 커다란 눈을 느리게 끔뻑이면서,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불안한 자세로, 비명을 지르듯이 말했다.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는데, 그것은 어떻게 판다일 수 있나, 라는 불신보다는, 판다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막막함 같은 것에 가까웠다.
재오가 계발원을 찾은 것은 노량진 일대에 뿌려진 광고 전단 덕분이었다. 합격을 원하는 자, 내면의 시체를 깨워라. 재오가 그 전단을 받은 것은 9급 공무원 시험에서 세 번째로 불합격 통보를 받은 지 며칠이 지나지 않은 때였다. 재오는 불합격의 이유를 알려고, 그래서 내면의 시체든 뭐든 끌어안으려고 이곳에 오긴 했지만, 판다라는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전형적인 판다입니다. 거울을 보세요. 둥글고 커다란 몸에, 눈 주위에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죠? 또 성생활이 활발하지 않고, 사교적이지 않은 성향에…… 당신이 판다라는 증거는 무수히 많습니다.”
원장은 안경을 고쳐 쓰고 판다를 쳐다보듯 재오를 쳐다보았다.
“그건 수험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 것 같은데요. 살도 찌고 다크 서클도 내려오고…….”
재오는 어떻게 해서든 판다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모든 수험생이 당신 같은 판다는 아니지요.”
원장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말했다. 재오는 수치심을 느꼈다. 지방대를 나와서 취업에 실패하고 공무원 시험에 떨어진 것도 모자라서 판다라니. 재오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좌절할 것 없습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죠? 어떤 의미에서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판다가 되어야 합니다. 축복받으신 거예요.”
원장은 계발원 자체 조사 결과에 따르면 판다다운 지망생일수록 합격 가능성이 높으며, 공무원 중 상당수가 판다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따라서 정말 판다가 된다면, 비로소 합격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원장은 재오에게 계발원 생활을 처방했다. 재오는 자신의 신체를 타인에게 양도하는 계약서에 서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입원 서류에 사인을 했다.


“계발원 생활을 처방받은 원생들은 예외 없이 3단계 프로그램을 이수해야 합니다. 1단계는 진정한 자신이 되기 위한 일상적인 ‘실천’이고, 2단계는 미래에 도래할 자신의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그려 보는 ‘명상’이며, 3단계는 정체성을 찾기까지의 방황을 고백하고 자신을 공중에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3단계 프로그램을 수료하고 나면, 원생들은 꿈꾸던 자신으로 완료됩니다. 재오 님의 경우에는 판다가 되는 것이죠.”
원장은 302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고, 고개를 홱 돌렸다. 원장의 뒤를 따르던 재오가 놀란 듯 제자리에 멈추어 원장을 쳐다보았다.
“물론 그것은 잠정적인 완료일 뿐이에요. 인간은 끊임없이 더 나은 존재로 개선되어야 하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3단계 프로그램은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두고 지속되어야 합니다.”
원장은 말을 마치고 가볍게 미소 지은 후에 302호의 문을 열었다. 재오는 고개를 내밀어 302호 안을 들여다보았다. 대나무 침대가 놓여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노량진 고시원과 다를 것도 없었다. 원장은 주머니에서 <매일의 수행>이라고 적힌 수첩을 꺼내 재오에게 내밀었다.
“일종의 플래너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앞에는 계발원에서 제안하는 생활지침이 적혀 있고, 뒤에는 스스로 계획을 짜고 일기를 쓸 수 있도록 노트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여기 적힌 내용을 꼼꼼히 숙지하세요. 그럼 함께 지내는 동안 필히, 거듭나시길 바랍니다.”
원장은 하얀 가운을 펄럭이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재오는 하얀 가운이 사라지는 모습을 쳐다보면서 <매일의 수행>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302호는 재오가 살던 노량진 고시원에서 합격생을 배출한 호수였다. 그것은 기분 좋은 징후일지도 모른다고, 재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대나무 침대에 기대어 앉아 원장의 권고대로 <매일의 수행>을 펼쳤다.


1. 당신은 억압적인 통치 기구의 희생자이자 패배자로서 자아를 해방시키는 데 실패하였다. 당신은 참담한 심정으로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2. 당신은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이 판다라는 것을 수용해야 한다. 그러나 수동적인 수용은 순응과 복종의 다른 이름이므로, 능동적인 수용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3. 계발원은 당신이 거듭나는 것을 돕기 위한 기본적인 삶의 지침을 제공한다. 그러나 일상의 규율을 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몫이다.
4. 아래와 같은 매일의 수행을 통해서만 당신은 참다운 자신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a) 싱싱한 대나무 잎을 떠올려 보라. 혓바닥 깊은 곳에서부터 침이 차오를 것이다. 대나무 잎을 입에 넣어라. 온몸에 가볍고 싱그러운 에너지가 감도는 것이 느껴질 것이다.
b) 당신은 판다이기 때문에 성욕으로 고통 받지 않는다. 하체에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진다면, 원 내 상담센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c) 당신은 교우관계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애쓴다. 그것은 판다가 대나무에 옹기종기 매달려 회합을 즐기기보다는 홀로 대나무 잎을 씹는 것을 택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d) 판다의 욕구는 대나무 잎을 찾고 그것을 섭취하는 것으로 제한되어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당신의 대나무 숲이 어디이며, 좋은 대나무 잎을 찾는 것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명확히 답할 수 있어야 한다.
[……]


재오가 <매일의 수행>을 읽고 있었을 때, 노크 소리가 났다. 문 밖에는 대나무 잎이 쌓인 식판이 놓여 있었다. 재오는 그것을 집어 들면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매일의 수행>을 떠올리고는 대나무 잎사귀 하나를 조심스럽게 입에 넣었다. 식물 특유의 비리고 쓴 맛이 혓바닥을 적셨다. 예상보다 먹을 만하다고 재오는 생각했다. 그러나 간신히 먹을 만한 수준이어서 대나무 잎에 제육볶음을 얹어 먹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어쩌면 판다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공무원 시험에 영영 합격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쁜 생각들이 줄지어 재오의 머릿속을 떠돌았다.
“어때요? 먹을 만하죠?”
원장이 불쑥 방문 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네. 하지만 아무래도…….”
“판다와 미식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대나무 잎을 사랑해야 해요. 그래야 판다일 수 있고, 그래야 시험에 합격할 수 있습니다. 씹으세요!”
원장은 단호한 말투로 주먹을 불끈 쥐고 방문을 쾅 닫았다. 재오는 굳게 닫힌 방문을 쳐다보면서 절망적으로 대나무 잎을 씹었다.
그날 밤 재오는 <매일의 수행>을 읽으면서 생활 계획을 세웠다. 맨 앞장에는 해야 하면 할 수 있고 할 수 있으면 될 수 있다, 그런 문장을 적었는데, 그러고 나니 마음이 단단해졌고 반드시 합격을 하겠다는 의지가 강해졌다. 그 기세로, 재오는 십오 분 단위로 촘촘하게 나뉜 시간계획표를 채워 나갔다. 그것은 학습계획을 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계발원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제외하면 재오가 해야 할 실천은 수험 공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재오는 수험 생활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계획한 대로 공부를 해나갔다. <매일의 수행>을 읽으면서 마음을 다스렸기 때문인지, 노량진에 있을 때보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겼고 공부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그것은 판다가 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재오에게 있어서 대나무 잎을 찾는 것은 수험 공부에 몰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나무 잎은 칼로리가 너무 낮았고, 대나무 잎을 제외하고도 곡물과 채소 등 채식 위주의 식사가 제공되었기 때문에, 덩치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재오는 흘러내린 바지의 허리춤을 부여잡고 판다성이 훼손된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했다.
“어쩌죠? 살이 빠져서 판다다워 보이지 않아요.”
“그건 걱정거리가 아니에요. 새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판다도 다이어트를 해야 합니다. 오히려 체중을 조금 더 감량하는 게 좋겠어요.”
원장은 재오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았고, 재오 역시 원장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렇다, 아무리 공무원이라도 살이 찐 공무원은 경쟁력이 없다, 재오는 아랫배와 허벅지에 붙은 군살을 쳐다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시험에 붙어 놓고도 면접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도 했다. 재오는 시리얼을 조금씩 남기겠다는 목표를 <매일의 수행>에 적었고, 매일의 학습량과 함께 매일의 식사량을 기록했다.


“매 순간 우리는 저마다 독특한 예술작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매일, 수많은 선택을 반복함으로써 만들어내는 자아와 인생이 바로 그것이지요. 지금 여기,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낸 작품을 발표하고 또 감상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모쪼록 해방과 창조의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원장은 영성 어린 미소와 함께 무대 밑으로 내려갔고, 무대 뒤에서 류가 걸어 나왔다. 재오는 표현 프로그램에 참석한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낯설었고, 또 괜히 공부할 시간을 빼앗기는 것은 아닌가 싶어 단어장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러나 표현 프로그램은 매일의 실천을 계속할 수 있게 해주는 자극제라고 원장이 강조했기 때문에 단어장을 펼치지는 않았다.
류가 무대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자, 재오는 단어장 같은 것은 잊어버린 채,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훤칠한 키, 고양잇과 동물을 연상케 하는 날씬하게 단단한 몸, 균형 잡힌 이목구비와 그 균형의 지루함을 허무는 개성적인 표정. 저런 육체로 사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재오는 자신의 얼굴과 몸뚱이에 굴욕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매일의 수행>을 기억해 내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재오의 육체는 판다에 적합했고 그것은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류는 무대 위를 어슬렁거렸다. 그러다 문득 자리에 멈추어 섰고, 그러자 리드미컬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 음악은 류가 만든 것이었다. 류는 다시 리듬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오는 류의 육체가 만들어내는 단속적인 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류는 그저 걸었을 뿐이지만, 그의 움직임은 난해하고도 아름다운 무용처럼 보였다. 류는 낮은 목소리로 랩을 읊조리듯이, 혹은 1인극을 하듯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했다.
재오는 류의 이야기가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류는 단어를 나열하거나 짧은 구절을 이어붙이는 식으로 말을 했을 뿐이었는데도, 낯선 리듬 위에 얹힌 언어들은 흉내 낼 수 없이 특별하게 들렸다. 또 발화에 동반된 몸짓은 단순한 단어조차 그 의미를 풍부하게 만들어줄 만큼 우아하고도 과감했다. 리듬과 몸짓을 발라내고 남은 뼈대는 류가 여섯 살 때 스폰지밥이었고, 열네 살 때 조커였으며, 열여섯 살 때는 사드 후작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류는 자신이 고정된 형체 없이 흐르는 에너지, 크프우프크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재오는 크프우프크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류의 이야기를 온전히 다 듣지 못해서 그런지도 몰랐는데, 그것은 미영 때문이었다.
미영은 재오의 옆자리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끊임없이 내뱉었다. 재오가 류의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려 애쓸수록 미영은 더 맹렬히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게다가 미영은 의자에 배를 깔고 엎드린 기괴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치 의자 위에 의자를 포개 놓은 것과 같은 자세였다. 재오는 미영에게 좀 조용히 해달라고 말을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미영의 머리통이 저기 의자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어디에 대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그녀가 말을 알아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류는 크프우프크, 다섯 음절이 반복되는, 노래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것을 부르면서 천천히 무대를 내려갔다. 재오를 비롯한 원생들은 반쯤 홀린 상태로 류의 리듬에 맞추어 몸을 흐느적거렸다. 류가 그 무의미한 음절들을 발음하는 리듬이 독특했기 때문인지, 재오는 중독된 듯 크프우프크를 따라 불렀다. 재오의 입술이 크프우프크의 진동을 음미하고 있을 때, 원장이 다시 무대에 올랐다.
“경이롭게도, 우리는 방금 미래를 경험했습니다. 크프우프크는 우리에게 변화하기 위해 애써야 하고, 또 애써야 하며, 한순간도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럴 때만이…….”
원장이 감탄어린 표정으로 자신이 하는 말에 심취해 있을 때, 어디선가 웅얼대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원장은 하던 말을 멈추었고 원생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재오는 미영의 반대편으로 몸을 움츠린 채 단어장을 움켜쥐었다.


한국사를 정리하다 헐레벌떡 대강당에 도착한 재오는 또다시 미영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미영은 코르셋을 착용하거나 깁스를 감는 것처럼 여전히 의자에 배를 깔고 엎드려 체형을 교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재오가 판다인 만큼이나 미영은 의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재오는 미영의 옆자리에 앉는 것이 꺼림칙했다. 미영의 앙상한 몸이 불쾌하게 느껴졌는데, 그 불쾌감에는 알 수 없는 죄책감 같은 것이 녹아 있었다. 재오는 빈자리가 없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때마침 조명이 꺼져 그대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낮고 단조로운 음악이 흘렀고, 대강당 가장자리에 일렬로 비치된 향초에 은은하게 불꽃이 타올랐다. 재오는 눈을 감고 천천히 명상에 빠져들었다.
재오는 자신의 몸이 판다로 변하는 상상을 했다. 피부가 두꺼워지는 감각에 정신을 집중하고, 그 위로 하얗고 까만 털이 돋아나는 모습을 천천히 떠올리면, 머리 위로 햇볕이 쏟아졌다. 그러면 재오는 이빨 사이에 대나무 잎을 끼운 채로 천천히 서류 더미 사이를 거닐었다. 서류가 한 장 젖혀지면, 집 앞에 들어선 쇼핑몰 때문에 일조권을 침해받았다고 항의하는 목소리가 들렸고, 재오는 머리 위에 햇볕을 떼어 서류를 비추었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내딛으면 다른 서류가 또 다른 고충을 털어놓았고, 재오는 그 문제를 해결해 주기 바빴다. 왜냐면 재오는 공무원이기 때문에, 조금 더 좋은 대나무 잎을 찾는 것과 같은 사사로운 일에 골몰하는 것보다는, 보다 공적이고 사회적인 일에 몰두하는 것이 옳았기 때문이다. 저기 멀리, 서류가 펄럭였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재오는 걸음을 멈추고 대나무 잎을 씹지도 않고 귀를 기울이다가 천천히 소리쳤다. 뭐라고요?
“제 등에 앉아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요.”
미영이 재오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말했다. 재오는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미영은 자신의 등을 보여줄 요량으로 엉덩이를 좌우로 두어 번 흔들었다. 재오는 인상을 찌푸렸고 몸을 미영의 반대편으로 기울여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미영의 손이 스친 옆구리에 오소소 소름이 돋으면서 정신이 온통 옆구리에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부담 갖지 말고 앉아 보세요. 저는 등받이 없는 의자지만 익숙해지면 이런 의자가 오히려 편하답니다. 허리 건강에도 좋고요.”
미영이 재오가 만든 거리를 다시 좁혔다. 재오는 땀을 훔치면서 속으로 <매일의 수행>을 뇌까렸다.
“쉿! 자기 자신에 오롯이 집중하세요!”
원장은 미영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고는 미영과 재오 사이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재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재오는 다시 서류 더미 사이를 천천히 거닐었다. 따뜻한 바람이 재오의 털을 보드랍게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서류가 펄럭였고, 제 등에 좀 앉아 보시겠어요? 미영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재오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젓고 바삐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는 오로지 재오밖에 없었고 아무도 그를 방해해서는 안 되었다. 서류가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가 달콤하게 재오의 귀를 간질였다. 그 소리는 아주 먼 대륙, 재오가 현실에서 가닿을 수 없는 환상적인 곳에서 날아든 멜로디처럼 들렸다. 그 멜로디를 따라 재오는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2


그 노래는 표현 프로그램에서 류가 부른 것이었는데, 가사는 류의 것이 아니었고, 재오가 무엇을 읊조리고 있는지는 불분명했다. 그 알 수 없는 가사의 노래를, 재오는 계속해서 불렀다. 그러니까 명상에서 깨어난 원생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그들에게 원장이 주의를 주고, 내가 명상용 음악과 향초를 끄고 조명을 밝힐 때까지도.
“그게 가사라기보다는 그날 외운 행정법이었어요. 지금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요. 막상 쓸 일이 없더라고요.”
재오는 피로에 찌든 양복 재킷을 벗으면서 커다란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그가 계발원을 다시 찾은 것은 오 년 만이었다. 나는 세미나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운 원장을 대신해 계발원 재입원 수칙에 따라 지난 계발원 생활에 대하여 질문을 하고 답을 들었다. 재오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재오는 아마 나를 본 적이 있었던가, 떠올리려 할 테지만, 떠올릴 수 없을 것이다.
“별걸 다 기억하는군요.”
재오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별걸 다 기억하는 것도 내 일의 일부였는데, 재오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정말 별스러운 기억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계발원 뒤뜰이나 대강당 인근 복도 구석에서 재오가 미영의 등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다. 또 퇴원할 때 재오와 미영이 같은 버스를 타고 가던 것도 생각이 났다.
“의자 말인가요?”
재오가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재오는 눈썹을 찡긋 올렸다 내리고는 말을 이었다.
“의자는 한동안 내 고시원에서 지냈어요. 마침 나는 의자가 필요했고, 의자는 갈 곳이 없었으니까요.”
미영은 돌아갈 집이 없으니 공원 의자가 되어야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했다. 회사에서도 잘렸고 모은 돈을 다 털어서 이곳에 왔기 때문에 어찌할 수가 없다고. 미영의 입장에서는 재오의 고시원에서 지내는 것이, 공원 의자가 되는 것보다 딱히 나을 게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쁠 것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재오의 말을 재입원 차트에 간단히 기록한 후에 다음 질문을 했다.
“그런 걸 다 이야기해야 하나요?”
재오가 시계를 흘낏거리면서 물었다. 재오와 이야기를 나눈 지 벌써 한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차트 기록은 처음이라 속도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야 할 질문을 하지 않고 넘어갈 수도 없었다.
“퇴원 후에 노량진으로 돌아갔어요. 대나무 잎을 씹으면서 공부를 했는데, 이전과는 확실히 느낌이 달랐어요. 내가 누구인지 알고 공부를 하는 것이니까요. 나는 판다고,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판다고, 그래서 단순히 안정된 직장을 찾으려고 공무원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판다로서의 정체성을 실현하기 위해 공무원이 되려는 것이었으니까요. 그해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어요. 그리고 판다로, 또 공무원으로 오 년을 산 것이지요.”
재오는 그것 이외에 더 무슨 이야기가 있겠냐는 듯이 입을 다물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원하던 공무원이 되었는데, 어째서 재입원을 하려는 것이냐고 물었다. 재오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답했다.
“자기 개선은,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나 차트에 기록해야 하는 것은 자기 개선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 같은 것이었다. 재오는 생각에 잠긴 듯 멀뚱히 허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몇 달 전에 우연히 류의 공연 영상을 봤어요. 류는 여기, 1층 대강당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대 위를 어슬렁거리더군요. 화려한 의상을 입어서인지 특별한 사람처럼 보였어요. 조명에 따라 또 동작에 따라 너무 다르게 보여서 한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어요. 류는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그 위로 악기소리가 덧입혀졌어요. 아니, 그것도 류의 목소리였을까요. 모르겠어요. 분명한 것은 수만 명의 관객들이 류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었다는 거예요.”
새삼스러운 이야기였다. 류는 데뷔한 지 삼 년도 넘었고, 한국은 물론 아시아 곳곳에서 인기를 끌었다. 류의 데뷔는 여러 면에서 화제를 모았는데, 잘생기고 재능이 많은 데다 데뷔하자마자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도 그러했지만, 그가 미국의 유명 사립대학에 다니고 있었던 데다가 명문가의 자제라는 점에서도 그러했다.
재오가 어째서 몇 달 전에야 류의 영상을 보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꽤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자신이 본 류의 무대에 대해 소상히 설명을 덧붙였는데, 신기루를 보는 듯 텅 빈 눈빛이었다. 가만히 두었다가는 언제까지고 무대에 대한 묘사를 늘어놓을 것 같아서 나는 중간에 말을 자르고 다시 물었다. 어째서 재입원을 결심하게 되었느냐고.
“글쎄요. 그러니까 그건…….”
재오는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류의 노래를 흥얼대다가 점차 목소리를 줄였고 소리를 내지 않은 채 입술만 달싹이다 입을 다물었다.
나는 물을 따라서 재오에게 내밀었다. 재오는 물을 겨우 한 모금 마셨다. 나는 재오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면서 차트에 기록한 내용을 훑어보았다. 미영이 재오의 고시원에서 한동안 지냈다는 기록에 시선이 머물렀다.


“합격 발표가 나고 고시원에서 짐을 뺄 때 고시원 앞에 내놓았어요. 그게 그녀가 원하는 일이었고요.”
재오가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고, 의자를 잡아끌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왜 그러는 거죠? 알다시피 그녀는 의자였어요. 쓰지 않는 의자를 건물 앞에 내놓으면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고, 그런 것은 노량진에서 흔한 일이에요. 고시원 앞에 내놓기 전에 그녀가 원하는 대로 등에 ‘합격 의자’라고 써 붙였어요.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가지고 갔을 거예요.”
재오가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고시원 앞에서 의자 자세로 엎드려 있는 미영을 떠올렸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계발원 홍보 책자에 싣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이미지였다.
“의자가 의자가 아니면 무엇이겠어요?”
재오는 격앙된 톤으로 물었다.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동의를 구하는 질문이었는데, 언젠가 미영이 재오에게 그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미영이 표현 프로그램의 발표자로 무대에 선 날이었다. 미영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부터 콜센터 상담원으로 일했는데, 서비스 해지를 막는 부서에서 일했던 터라 상시적으로 욕설과 폭언에 시달렸다. 미영은 은행나무처럼 그 모든 것을 견디기로 했다. 은행나무는 도로가에서 취객의 욕설과 발길질, 방뇨까지도 묵묵히 견뎠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은행나무로 살 수는 없었다. 한 고객이 미영에게 사지를 절단 내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다. 미영은 사지가 절단난다면, 그렇다면, 그렇게 무엇이라도 되어야 했기 때문에 의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재오는 발표를 마친 미영에게 판다라면 공무원이 될 수 있는데 의자라면 무엇이 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미영은 최소한의 기능만 수행하는 것 같은, 하나같이 작은 눈, 코, 입을 기묘하게 일그러뜨리면서, 의자가 되겠다는 것은 그저 의자가 되겠다는 것인데, 의자가 되지 않으면 무엇이 될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런데 재오는 의자를 순전히 의자로 사용했을까. 나는 뒤뜰에서 재오가 미영에게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의자에 앉는 것과 같은 행동이 아니었고, 그러니까 성욕이 적은 판다에게도, 사물에 불과한 의자에게도,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의자 위에 등을 곧게 펴고 앉아서 공부를 했어요. 의자 말대로, 그렇게 바른 자세로 공부를 하는 것이 허리에도 좋고 집중도 더 잘 되더라고요. 물론 공부를 하다가 지칠 때는 의자에 엎드려 쉬기도 했어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그녀는 단지 의자일 뿐이었으니까요.”
재오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나는 가만히 재오를 쳐다보았다. 재오는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물론 가끔은 나도 모르게 사정을 할 때가 있었어요. 하지만 그건 에로틱하다거나 섹슈얼하다거나, 하는 그런 일이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그건 자연발생적인 일에 가까워요. 마찰력이나 압력, 신경 자극, 뭐 그런 물리적인 일 있잖아요. 설마 판다가 의자를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나는 이 이야기를 재오의 차트에 적어야 하나, 미영의 차트에 적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게 아직 남아 있기는 한가, 고민하다가 무엇도 마땅하지 않아서 그만두었다. 그리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려 했을 때, 재오가 별안간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요. 의자가 될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재오는 얼굴을 붉혔고,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니까 김 주임이, 됐다는 데도 굳이, 승진 턱을 낸다고 해서 저녁을 먹는 중이었어요. 텔레비전에서는 빌어먹을 류가 나오더군요. 멀끔한 수트를 차려입고서 활동을 중단한다나 뭐라나, 3년간의 활동은 인생에 더없는 유희였다고 하더군요. 그러더니 이제 크프우프크는 엔터테이너가 아니라 법인이라고 하면서 브랜드를 런칭한다고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유희라고요? 그 모든 게 그저 유희일 뿐이었다고요? 그 자리가 어떤 자린데 활동을 그만 한다는 거죠?”
재오는 더운 숨을 몰아쉬면서 눈을 부라렸다. 그리고 내 대답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듯 자신이 하던 말을 이어서 내뱉었다.
“류가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는데도, 김 주임은 그 자식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더군요. 류는 야근수당이나 인사고과 같은 것은 모르고 살 거라고, 승진 시험에 목을 매는 게 어떤 기분인지도 모를 거라고, 저런 게 진짜 인생 아니겠느냐고요. 그래서 나는 나에 대해서 말했어요. 여기서 류를 만난 이야기도 했고요. 그는 크프우프크가 되었고 나는 판다가 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모두 꿈을 이룬 거라고요. 류가 한때는 스폰지밥이었다는 이야기도 했어요. 알아요, 표현 프로그램에서 들은 내용을 밖에서 말하는 것은 규율에 어긋난다는 것을요. 하지만 조금이라도 류가 우습게 보이길 바랐어요. 그런데 김 주임은 뭐 그런 싱거운 이야기를 하느냐는 듯이 건성건성 고개를 끄덕이고는 맥주를 들이켜지 않겠어요?”
재오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테이블에 컵을 쾅 내려놓았다. 나는 빈 컵에 다시 물을 채워주었다.
“그러고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면서 말하더군요. 이렇게 거칠거칠해서야 어떻게 판다일 수 있겠느냐고요. 판다보다는 그러니까, 의자가 어울린다고요. 어차피 하루 종일 앉아 있으니까 의자랑 혼연일체가 되지 않았느냐고, 그게 공무원 아니겠느냐고 말하면서 씁쓸하게 웃더군요. 그때 미영이 떠올랐어요. 내가 고시원 앞에 두고 온 의자 말이에요. 끔찍한 기분이 들었어요. 어떻게 내가, 의자일 수가 있겠어요?”
재오는 그렇게 묻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이 의자라니, 말도 안 된다는 호들갑 섞인 반응을 원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뻣뻣하게 굳은 팔 다리와 폭신한 쿠션처럼 튀어나온 아랫배는 재오를 미영과는 다른 형태의 의자라고 상상하게 만들기도 했다. 물론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차트에 판다라고 적었다.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재오는 조금 더 완연한 판다로 회복되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다른 일을 하고 싶어요. 공무원처럼 따분한 일 말고 조금 더 예술적인 일이요. 자기 표현적이고, 창조적이고, 그런 거.”
내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재오가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패션이나 디자인, 그런 거요.”
나는 재오의 차림새를 훑어보았다. 그러니까 조금 작은 듯한, 그래서 두 번째 단추가 떨어져 나간 와이셔츠와 자른 지 한참은 되어 보이는 너저분한 헤어스타일을 다시금 체크하면서, 그것에 혹시 모를 아름다움의 파편이 숨어 있지 않은지 찾아보려 애썼다.
“나도 알아요. 지금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요. 당장 공무원을 그만두겠다는 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사람은 끊임없이 거듭나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온 거고요. 내 생각에는 일단 게이가 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게이라니, 나는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호모요. 그 왜 남자끼리…….”
재오는 곤란한 표정으로, 그러나 그와 반대로 굉장히 외설적인 손동작을 취하면서 말했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게이가 무엇이냐가 아니었다.
“좀 알아봤는데, 패션이나 디자인 계통에서 유명한 사람은 죄다 게이라고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그쪽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일단은 게이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재오는 두서없이 말을 이었다. 나는 차트를 펼쳐서 판다라고 적은 것에 두 줄을 긋고 게이라고 적었다. 재오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적합한 말을 찾지 못하고 다시 물을 들이켰다.
“하라, 되라, 그리고 또 하라.”
하이 톤의 과장된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원장이었다. 재오는 밝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원장과 포옹을 했다. 나는 재오의 컵에 물을 채우고 차트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조용히 상담실을 나왔다.


3


벌써 오후 세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원생들이 식사를 마치고 방문 앞에 식판을 내놓았을 텐데, 벌레가 꼬일지도 몰랐다. 나는 카트를 끌고 입원실을 돌면서 서둘러 식판을 챙겨 담았다. 식판을 말끔히 비운 원생도 있었지만 잔반을 남긴 원생도 있었고 코를 푼 휴지 같은 것을 올려놓은 원생도 있었다. 과거에 재오는 꾸준히 다이어트를 했기 때문에 잔반을 남기는 원생 중 하나였다. 나는 카트를 끌고 지하에 있는 주방으로 내려와 식판을 닦았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했는데, 대다수의 원생들은 채식 위주의 식사를 했지만, 원생들마다 제공해야 하는 식사가 달라서 손이 바빴다. 또 빨래를 돌리고 널어야 했다. 아침까지 빨래가 마르지 않으면 입을 옷이나 수건이 없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원생들이 있었다. 그리고 화단을 손봐야 했는데, 웃자란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보기 싫다는 이야기를 벌써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대강당과 복도 바닥을 닦는 일이 남았고, 종로로 나가 광고전단도 뿌려야 했다. 예정에 없이 상담 차트를 썼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피로했다. 그러나 미룰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세탁기를 돌리고, 마대 걸레와 물 양동이를 챙겨서 1층 복도로 올라왔다. 잔소리를 피하려면 원장의 눈에 띄기 쉬운 곳부터 치우는 것이 좋았다. 마대 걸레에 물을 묻히려는데, 복도 한쪽에 길게 놓인 나무 벤치에 잡지 한 권과 찌그러진 음료수 캔 두 개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쓰레기통이 있지만, 누군가는 꼭 벤치나 계단 구석에 쓰레기를 버렸다. 나는 마대 걸레를 한쪽에 세워 두고 잡지와 음료수 캔을 집어 들었다.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류였다. 류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잡지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나는 음료수 캔을 재활용 쓰레기통에 버리고, 벤치에 앉아 류가 나온 페이지를 찾아 펼쳤다. 류는 크프우프크의 경영자로서 브랜드를 소개했고, 브랜드와 무관해 보이지만 분위기 있는, 류의 육체를 멋지게 담은 사진들이, 이어지는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사진 속에서 류는 스폰지밥과 사드 후작의 간극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변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프우프크는 엔터테이너가 되었다가 법인이 되었고, 재오는 판다가 되었다가 게이가 될지도 모르고, 미영은 의자가 되었는데, 그렇게 오 년 전과는 모든 것이 달라졌는데, 어쩌면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적어도 중요한 것은 달라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다면, 바닥을 닦는 일에 대해 말하고 싶다. 매일같이 바닥을 닦아도, 바닥은 그저 바닥인 것에 대해서 말이다. 마대 걸레를 밀 때만 해도 무언가 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먼지가 제거된 가공의 자연 상태가 유지될 뿐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것은 빨래를 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잡지를 둥글게 말아서 바지 뒷주머니에 끼웠다. 언제까지고 잡생각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다시 마대 걸레를 들었다.
1층 복도 바닥을 거의 다 닦았을 무렵, 그러니까 숨을 돌리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쳤을 무렵, 재오가 상담을 마치고 나왔다. 재오는 원장과 악수를 하고, 배정받은 방의 열쇠를 흔들면서 걸음을 옮기려다 멍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그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계발원 내부는 구조가 복잡해서 원생들은 배정받은 방과 1층 대강당을 제외하고는 어디로도 가지 않았다. 권고하는 행동이 아니기도 했거니와 길을 잃을 것이 빤했고 원생들은 나름의 이유로 모두 바빴다. 원장이 <매일의 수행>을 들고 앞장을 섰다. 재오가 그 뒤를 따랐다. 재오는 다시금 반복되는 원장의 3단계 프로그램 소개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계단을 올랐다. 그러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재오는 나를 보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나를 통과하여 벽에 걸린 커다란 거울에 머물렀다. 재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나는 오 년 전에 그러했듯이, 그리고 다른 모든 원생들에게 그러하듯이, 다시 그의 눈에 띄지 않았다. 마치 깨끗이 세탁된 빨래 사이, 혹은 먼지도 없이 반들반들한 복도 바닥, 혹은 말끔히 분리된 재활용품 더미 틈 어딘가로, 뿌옇게 흩어져 형체를 잃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작가소개 / 이상희

1983년 태백 출생. 2017 《세계일보》 신춘문예 「래빗쇼」로 등단.


《문장웹진 2017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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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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