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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 더 퍽!

  • 작성일 2017-07-01
  • 조회수 3,519

[단편소설]



왓 더 퍽!



노희준





오랜만에 세상에 나와 보니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싸우고 있었다. 집 앞에서는 두 아저씨가 멱살을 잡고 있었고, 골목 어귀에서는 아줌마와 중딩 남자애가 되지도 않는 씨름을 하며 다소 민망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등산 스틱을 든 할아버지가 생머리 소녀를 추격했다.


초딩들이 나이 지긋한 할머니를 뒤쫓으며 희롱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심각하다거나, 말려야겠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오랫동안 나는 세상에는 없는 기타코드를 연구 중이었는데, 초보일 때는 신기한 코드들이 잘만 생각나더니, 지금은 타락해 있었다. 타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여자가 돌림 빵 당하는 걸 못 본 척할 만큼 타락하지는 않았다. 지하철역이 있는 큰길에서, 둥그렇게 모여선 남녀노소가 여자 한 명을 돌아가며 때리고 있었다. 여자는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다양한 방식으로 얻어맞고 있었다. 참 오랜만에 듣는 박자다 싶었는데 그것은 핀볼 게임의 리듬이었다. 정신없이 부딪치며 슝슝슝슝슝 하다가, 한동안은 구슬 혼자 흘러내리다가, 어느 순간 다시 또 슝슝, 하는 바로 그 템포.


길 맞은편에, 그 광경을 팔짱끼고 구경하는 경찰관만 없었대도.


나는 4차선 도로를 무단횡단하며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소리 질렀다. 경찰은 무관심이 가득 찬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는 그런 종류의 무관심이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릅니까?


내가 모른다고 대답하자 비로소 경찰관의 얼굴에 표정이 생겼다. 표정의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긍정적인 의미가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경찰관은 나를 간단하게 무시하고 다시 길 맞은편을 주시했다.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아직도 안 갔느냐는 듯 돌아보더니 말했다. 타이밍의 뉘앙스, 말투만은 예의발랐지만.


오늘은 그렇게 입고 돌아다니시면 안 됩니다. 귀가하시든지, 노란색, 아니면 초록색, 으로 갈아입고 나오십시오.


그 말을 듣고 보니 길 건너편의 남녀노소는 노란색이었다. 윗옷이거나, 아래옷이거나, 위아래 모두이거나. 동네 중학교 교복은 암녹색이고, 아줌마는 노란색 티를 입고 있었으며, 할머니는 노랑, 초딩들은 초록이었는데…….
또각또각, 하이힐을 신고 걸어오는 아가씨의 미니스커트도 초록이었다. 아가씨는 노출이 심해서 나는 잠시 눈 둘 곳을 몰랐다. 그래도 아가씨가 도도한 눈빛으로 온통 검은색인 나를 위아래로 훑는 것은 보았다. 관심이나 호감의 눈빛이 아니었다. 어떤 놈인지 알 것 같다는 비웃음 반, 동정심 반의반의 눈빛. 나머지 반의반이 무엇인지는 짐작불가였지만. 예쁜 아가씨라는 것과, 발목도 예쁜 아가씨라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저어런 개애새끼!


내가 막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몸을 돌렸을 때 누군가가 외쳤다. 저만치 앞에서 초록색 덩치가 나를 향해 전 속력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초록색 덩치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시간은 느리게 가는 것 같았고, 나는 반짝이는 덩치의 대머리에 시선을 빼앗긴 채 ‘저어런 개애새끼’의 어감을 짓씹고 있었다. ‘이런 개새끼’도, ‘야 이 개새끼야’도 아닌 ‘저어런 개애새끼’라니. 거기엔 노랑보다 검정이 더 나쁘다는 함의가 들어 있었고 따라서 나는 오늘 오랜만에 공연무대에 오르기는커녕 아예 인생무대에서 내려올 운명인 모양이었다. 또오각, 또오각 걸어가던 그녀가, 뜬금없이, 짐작불가의 반의반을 발휘하기 전까지는. 그녀는 오른손을 들어 간단하게 덩치를 멈춰 서게 한 다음 말했다.


남친이에요, 초록색 점퍼 있었는데 씹창 나서 버렸어요.


여자는 사분의 사 박자에 투, 포.


뭐라도 입고 다니시오. 같은 편끼리 피 볼 뻔했네.


남자는 원, 쓰리에 정체불명 사투리였는데,


내가 입었으니까 됐잖아요.


말하던 박자 그대로 그녀는 걷기 시작했다. 뒤도 한 번 돌아다보지 않고 걸었다. 골목이 나오자 우회전, 좌회전해서 걷다가 곧장 우회전하고, 큰길은 잠시만 걷다가 다시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냥 직진하면 될 것을, 그녀가 일부러 방향을 이리저리 트는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골목어귀에서 노란색 남자 두 명이 툭, 튀어나오자 그녀는 미니스커트를 위로 홀까닥 뒤집었다. 홀까닥 뒤집힌 미니스커트는 노란색 튜브탑이 되었고, 튜브탑이 있던 곳에는 손바닥만 한 핫팬츠가, 그녀의 엉덩이를 반의반쯤만 드러내고 있었다. 성실해 보이는 핫팬츠였다. 핫팬츠가 성실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엉덩이를 반의반만 드러낸 아가씨는 사분의 사 박자로 걷지. 노랑이었다가 초록이었다가, 꽃잎이었다가 꽃받침이었다가. 꽃, 꽃받침, 꽃꽃, 받침받침. 꽃꽃, 받침, 꽃 받침, 꽃꽃 받침…….


이거 뭔가 리듬이 나쁘지 않은데……. 나쁘지 않은 리듬에 나는 이유 없이 끌리는데…….


끌림의 중심이 나를 향해 돌아섰다. 멱살을 잡아채더니 나를 좁고 막다른 골목 안으로 이끌었다. 가느다란 팔에 어울리지 않는 힘이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다.


야 이 씨발 새끼야 왜 자꾸 따라와?


몰라서 묻니, 옷차림이 검잖아, 하고 생각했으나 나는 애써 존댓말로 바꾸어 말했다. 좀 도와주세요, 공연장까지만 가면 돼요.


언제까지 여자한테 빌붙을 테야? 그 정도 해줬으면 이제 알아서 해야지!


나는 여자가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모른 척했다. 공연을 해야 살 수 있다고, 공연을 해야 이 꼴 저 꼴 안 보고 집에 다시 처박힐 수 있다고, 공연을 하지 않으면 공항 수하물센터 알바를 다시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집어던지는 건 질색이라고…… 나는 집어던질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한다고……. 대꾸야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나는 지난달 생활비처럼 말을 아끼고 아껴서 대답했다.


도와만 주시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집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으면 되잖아!
그게, 집에 검은색 옷밖에 없단 말입니다.


노란색 염색을 지우지 말걸 그랬어요, 술집에 맥주 박스 나르는 일을 했는데 부장이 잘리고 싶지 않으면 검게 해서 다니라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나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는데, 그저 동정심을 사고 싶었을 뿐인데, 그녀는 갑자기 분노해서 허공에 대고 소리 질렀다.


하여간 개새끼들, 노가다는 염색도 못 하냐?!


그녀는 나를 어떤 건물의 뒤편으로 데려갔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공간에 이런저런 물건이 버려져 있었다. 그녀는 버려진 의자에 앉아 담배를 꺼냈다. 적절한 타이밍에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는 그녀가 담배를 두어 모금쯤 피우게 내버려뒀다가 물었다.


대체 오늘이 무슨 날인데요?
싸움의 날.
그게 뭔데요?
말 그대로 싸우는 날이야.
왜 싸우는 건데요?
장난해? 이기려고 싸우지.
이기면 뭐 하는데요?
싸움이 끝나겠지.


그녀는 기껏해야 두 시간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은 점점 늘어나 해가 지면 세상은 연두색으로 변할 것이다. 노란색과 초록색이 촘촘하게 뒤얽혀 한 가지 색만 존재하는 공간은 손바닥만큼도 없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자신의 옷차림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므로 그 전에, 어딘가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어디가 안전한데요?
공연장은 안전하지. 공공장소에서는 못 싸우게 돼 있으니까.
그럼 당신은요?
나? 나는 남친을 만나러가는 길이야.
이런 날에 남친을?


남친이 있다는 말에 나는 상처받은 기분이었으나 그녀의 다음 말은 브라질리안 왁싱 같았다.


이런 날에 죽여야 개 값을 안 물지.


노란색 남자가 등장한 것은 그녀가 막 담배를 끄려던 순간이었다. 남자는 갑자기 나타나 있었고, 그녀는 담배 때문에 옷을 잽싸게 올리지 못했다. 어정쩡한 속도로 바꾼 게 더 나빴다. 초록색이 노란색으로 바뀌는 과정을 목도한 남자는, 내가 웬만하면 여자랑 개는 안 때리는데…… 하더니 말했다.


이런 개만도 못한 년을 봤나.


남자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검은색은 세상에 없는 색깔이라는 듯 그녀에게로 걸어가 원, 투, 를 날렸다. 피투성이가 될 줄 알았던 그녀는 남자와 똑같은 리듬으로 남자의 주먹을 피한 다음 뒤로 빠지는 척 파고들어 어퍼컷을 날렸다. 점 박으로 얻어맞은 남자는 잠시 박자감각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녀는 그사이 남자가 하려던 원, 투, 를 모두 성공시켰다. 바닥에 주저앉은 남자의 얼굴을 롱 킥으로 후려차기까지 했다. 잠시이지만 남자는 죽은 것 같았다. 남친을 죽이겠다는 그녀의 말은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는 다시 일어섰다. 이미 박자를 익힌 듯 그녀의 연이은 발차기를 모두 피했다. 남자의 해머 같은 주먹질이 이어졌다. 남자는 주먹을 사리지 않고 휘둘렀다. 그녀가 용케 피할 때마다 쌓아 놓은 와인 박스가 부서졌다. 파라솔대가 둔중하게 댕, 하는 소리를 냈다.


뭐 해, 이 새끼야.


아무래도 나에게 기타를 휘두르란 얘기 같았다. 내가 고개를 흔드는 동안 그녀가 휘두른 나무의자가 두 동강이 났다.


주먹이라도 써!
기타는 뭘로 치고.


천장재가 쪼개지고, 철판이 우그러졌다.


발이라도 날려!
이펙터 밟아야 돼.


머리를 빗맞은 건데도 그녀는 쓰러졌다. 그녀가 밟힐까 봐 걱정했으나 남자는 돌아섰다. 남자는 아무 말도 없었으나 나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내가 웬만하면 검은색은 안 때리는데…….)


나는 눈으로 박자를 읽으면서도 맞았다. 한 번 맞을 때마다 음소거가 잇달았다. 퍽, 찰싹, 퍽퍽, 하는 경쾌한 소리는 사라지고 낮게 둥, 둥둥, 하는 진동만 전해졌다. 그때마다 나는 깊은 심해에 빠진 기분이었다. 심해에 빠졌다가, 물 위로 나왔다가, 공간 점프를 반복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심해에서는 아무것도 못 느끼다가, 물 밖으로 나오면 비로소 통증이 밀려오며 청각이 되살아났다. 남자는 내가 물 밖에 있을 때를 노려 짧게, 짧게 말했다.


씹새끼야, 좆같은 새끼야, 너 같은 새끼 때문에, 너 같은 새끼도 남자…….


끝없이 이어지는 욕설 사이로, 땡!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것은 땡! 이 아니라 땡? 에 훨씬 더 가까운 소리였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그녀가 손에 쇠파이프를 들고 있었다. 남자는 심해에 천천히 가라앉았다. 한동안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무릎을 꿇고 나서야 자신의 뒤통수를 한 번 쓸어 보았다. 나는 그의 눈동자 속에 잿더미가 이는 것을 보았다.


튀어.


남자가 완전히 쓰러지자 그녀가 말했다.


오늘은 죽여도 되는 날이라며.
무기는 불법이란 말이야.


우리는 이미 튀고 있었다. 튀면서 말하고 있었다.


아까는 기타로 치라며?
내가 언제?


나는 얼굴과 몸의 일부를 심해에 두고 온 기분이 들었다.


눈짓으로 말했잖아?
그랬으면 쳤어야지?!


거리에는 그새 사람들이 늘어 있었다. 그녀는 나를 어떤 건물의 입구로 데려갔다. 그녀가 지문감식기에 손을 대니 문이 열렸다. 그녀는 나를 비상구 계단으로 잡아끌었다. 이층에 있는 남자 화장실의 끝 칸에 데려가 문을 잠갔다. 끝 칸의 한쪽은 전면유리여서 밖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가슴 높이까지는 밖에서 안 보이게 래핑이 되어 있었다.


공연장부터 가지 여긴 왜…….
각개전투일 때가 제일 위험해. 전선이 생겨야 묻어가지.


무슨 말인지는 몰랐지만 바깥의 인구밀도는 그녀의 꽃, 꽃받침 스킬로 지날 수 있는 한계는 확실히 넘어서 있었다. 노랑을 속이는 순간 초록의 눈에 띄고, 초록을 넘기는 순간 노랑의 공격을 받겠지. 하긴 리허설은 여덟 시이고, 지금은…… 생각하자마자 태양이 눈부시게 날아 들어왔다. 등에 멘 기타 때문에 그녀와 나 사이에는 가까스로 악수를 할 만한 공간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데는 어떻게…….


그녀는 아, 하더니 대답했다.


옛날에 여기서 근무할 때…….


그녀는 내 쪽으로 돌아서려다 어깨가 걸리자,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햇빛 때문에 눈이 부실 텐데도 그녀는 밖을 열심히 내다보고 있었다.


여자 화장실 꽉 차서 급하면 썼어요. 전망이 좋아서 기억에 남네.


그녀는 처음으로 존댓말을 섞어서 말했다. 머리카락에 감싸인 오른쪽 광대가 심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얇은 끈 나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관자놀이였다. 나는 그녀를 굽어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녀는 지금 초록색. 꽃 없는 꽃받침. 꽃잎이 있던 곳에서는 말랑말랑한 냄새가……. 나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렇지, 무기는 불법일 수밖에 없지. 너도 나도 무기를 들면, 일본도나 사냥총을 갖고 나오는 사람도 생기겠지. 화염병이나 사제 폭탄을 제조하는 사람도 나오겠지. 하지만 왜?


처음부터 안 나오면 되잖아요?
안 나오는 사람들도 많아요. 내 엑스처럼. 그러다가 습격당하겠지. 내 엑스처럼.
아니면 아침부터 나오든지. 왜 늦게 기어 나오는 거야?


그녀는 몸을 억지로 돌려 나를 마주 보더니 말했다.


너 같으면 일찍 나오겠니?
왜 뭣 때문에 안 돼?
나중에 지쳐서 맞아죽으려고?
그러는 당신은 왜 일찍 나왔는데?
내가 싸우러 나왔니? 죽이러 나왔지?


그녀는 내 배를 밀고 다시 창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잽싸게 배에 힘을 주어 복근이 있는 척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녀는 약간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으로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을 덧붙였다.


조금 여유 있게 죽이러 가고 싶어서 그랬다. 왜?


나도 조금 여유 있게 공연에 가고 싶어서 그랬다 왜. 오랜만에 좀 걷고, 책방에도 들르고, 커피나 맥주는 공연장에서 줄 테니까 참을 거지만 편의점 앞 파라솔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도 좀 하고 싶어서 그랬다 왜. 하지만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무서워하게 될 줄은 몰랐다.


지금이야.


그녀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내 손을 잡음과 동시에 화장실 문을 열고 승마장의 경주마처럼 뛰어나갔다.


왜 이렇게 뛰는 건데.
밤이 되면 춥단 말야. 그리고 바지가 싸우기 편해.


그녀의 말을 이해한 건 나의 눈이었다. 거리에는 그새 대열이 생겨 있었다. 그녀는 노랑 대열에 들어가기 위해 노랑 대열이 지나가기 전에 건물을 빠져나온 것이었다. 대열에 들어가면 싸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한 건 나의 섣부름이었다. 그녀는 나를 데리고 대열의 중앙으로 파고들어갔는데, 중앙으로 들어갈수록 사람들은 밀집해 있었고 틈을 내주려 하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뭐 하는 짓이냐고 욕을 하거나 밖으로 나가라고 밀쳐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몸을 흔들어 들어오지 못하게 퉁겨내고, 어깨에 각을 세워 찌르고, 실수인 척 발로 걷어차고, 다른 사람에게 안 보이게 꼬집거나 때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나 그녀에게 길을 열어 주는 남자는 있게 마련이었다. 핑계 김에 그녀와 닿고 싶어 하는 남자들 같았다. 그녀는 다른 남자에게는 아무렇게나 닿으면서 나에게는 조심하는 티를 냈다. 그녀 주변에서 몇 번이나 남자의 비명소리가 터졌다. 힐로 발등을 찍히거나 팔꿈치로 코를 얻어맞으면 어떤 심연을 만나게 될지 나는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안전한 곳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기타 뒤로 한쪽 팔을 집어넣어 내 옆구리를 깊이 끌어안았다. 두 번째로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


오해하지 마. 좀 지쳐서 그런 거니까.


옆구리에 깃들인 그녀의 감촉이 파도 위에 떠 있는 섬 같았다. 갖가지 종류의 감각들이 주변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들은 부대낌이나 통증으로 존재했다. 경멸이나 적대감이나 무관심으로 존재했다. 그들에게는 얼굴이 없었다. 주변에 가득한 사람 중에 얼굴을 가진 건 그녀뿐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다 잊게 되리라는 게 이상했다. 대열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에게는 표정이 있었고 눈빛이 있었다. 그들은 그녀와 나에게 대열에 어서 들어오라고 길을 열어 주기까지 했었다. 나는 그들 중 몇 명의 얼굴을 기억하게 될 것 같았다.
공중에서 희뿌연 물체 하나가 대열을 향해 내려왔다. 꽤 컸는데 날개도 없고, 소리도 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것은 붕어에 흡사한 모양으로 변해 갔다. 어깨를 감싸 안은 내 손에서 긴장을 느꼈는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저 새?
물고기잖아.
나한텐 새로 보여.
날개가 없잖아.
나한텐 날개가 보여.
그럴 리가.
쟤는 원래 그래.
쟤가 뭐길래?
쟤는 머신이야.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
그래서 뭔데?
안 싸우는 사람 잡아먹는 기계.


아무리 봐도 붕어 모양인 비행체를 바라보며 나는 물었다.


근데 나는 왜 안 잡지?
너를 왜 잡지?
검은색이니까.
쟤한텐 똑같아.
뭐가?
쟤는 색깔 신경 안 쓴다고. 안 싸우는 사람만 잡아간다고.


그녀의 말이 옳았다. 비행체는 대열을 떠났다. 대열 안에만 있으면 싸우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비행체는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동물의 형상이 홀로그램처럼 여기저기에 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일일이 가리키며 그녀에게 저건 무엇으로 보이냐고 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제 나가야 해.
어째서?
대열은 직진할 거야. 공연장은 저쪽으로 가야잖아.


나는 침을 꾸욱 삼킨 다음 말했다.


그럼 너는 여기 남아. 나 혼자 갈게.
어째서?
나가면 위험하니까.


그녀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


공연장이 놀이터 근처라고 하지 않았어?
응, 놀이터에서 가까워.
나랑 비슷하네.
뭐가?
내 엑스 집은 놀이터 바로 앞이야.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내 기타를 함께 멨다. 두더지가 흙을 파내듯 사람들의 지층을 뚫고 나가기 시작했다. 대열은 들어오는 것보다 나가는 게 더 힘들었다. 사람들이 자꾸 안쪽으로 움직이고 있어서인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대기권을 이탈하는 로켓처럼 점점 더 빨라졌다. 커다란 사거리 직전에 있는 골목으로 날카롭게 꺾어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골목 초입의 작은 주차장으로 나를 몰아넣었다. 기타를 내 등에서 벗겨내더니 어느 틈에 슬쩍했는지 노란색 셔츠를 건넸다.


빨리빨리.
근데 이거 입음 당신은 색 못 바꾸는 거 아냐?
천만에, 더 쉽지.
어째서?
다 입었으면 기타나 메.


그녀는 고삐마냥 내 기타 멜빵을 잡더니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우리는 생각보다 한가했는데, 아무도 우리를 공격할 만큼 한가하지 않아서였다. 띄엄띄엄 서 있는 경찰관들도 잔뜩 몸을 사리느라 맡은 바 임무에 관심 가질 시간이 없어 보였다. 어떤 여자가 킬 힐로 쓰러진 남자의 배에 구멍을 냈다. 쿵푸를 하는 것 같은 수술복 차림의 남자도 있었다. 낮은 자세로 팔을 한 번 휘둘렀을 뿐인데, 상대의 허벅지에서 피가 왈칵, 왈칵, 쏟아져, 나왔다. 가로등 불빛에 남자의 두 손 끝이 차갑게 빛났다. 메스였다. 속이 울컥, 울컥, 거렸다. 말도 띄엄, 띄엄, 나왔다. 날카롭게 갈린 젓가락이 있었고 말더듬이가 있었다. 온갖 무기 아닌 무기가 난무했고 그걸 알고도 모른 척하는 것 같은 비행체가 있었다. 비행체한테는 싸우지 않는 것만 문제인 모양이었다. 비행체는 우리를 보더니 알록달록 빛을 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더 작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는데도 주변에 알록달록한 빛이 비치자 그녀가 딱, 멈춰서더니 말했다.


빨리 날 때려.
뭐라고?
주먹으로 까라고 빨리.
우린 같은 편이잖아?
난 분명 먼저 기회 줬다?


알록, 달록한 빛이 이번에는 머릿속에서 틔었다. 뚜앙, 따앙, 왼쪽 턱과 오른쪽 관자놀이에 심해 두 송이가 피었다. 내가 고개를 흔들어 심해를 털어내는 동안 그녀는 노랑이 아니라 초록이 돼 있었다. 어쩌면 비행체가 쫓아올 때부터 초록이었을까? 나는 무언가를 묻는 심정이 되어 한껏 낮게 다가온 비행체를 올려다보았는데,


쳐다보지 마 바보야 죽고 싶어?


그녀가 내 명치에 알록,


이래도 안 때려? 이래도?


달록을 박으며 말했다. 나는 앉는 것도 아파서 천천히 앉으며 말했다.


여자를 어떻게 때려?
네가 때려야 쟤가 간다고.


나는 할 수 없이 그녀의 어깨를 톡, 쳤다. 그녀가 내 이마에 잽을 날리더니 말했다.


제대로 안 해? 이러다 나도 잡혀간다고.


나는 할 수 없이 그녀의 이마를 툭, 쳤다.


이 새끼가 진짜.


그녀가 내 정강이를 깠다. 다리에서부터 솟아오른 불꽃이 머릿속에서 퍼벙, 퍼버벙 하고 터졌다.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그녀의 뺨을 쳤다. 뺨을 쳤는데 감촉이 좋았다. 나는 여자를 때렸다는 죄책감과 또 때려 보고 싶다는 욕구 사이에서 갈등했다. 갈등하는 사이에 정강이 폭죽이 또 터졌고 이번에는 주먹이 발사되었다. 얼굴을 가격하려다가 갑자기 마음이 약해져서 궤도를 수정한다는 게 가슴을 스친 다음 배에 불시착했고, 그곳이 급소라는 생각은 그녀가 스테이플러마냥 접히고 나서야 났다. 그녀는 비행체가 떠나고 나서야 한바탕 기침을 했다. 한동안 숨을 못 쉬었다는 뜻이었다. 내가 남자라는 사실에 자부심이 밀려왔다. 나에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없는 자부심을 가르친 그녀를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시킨 거잖아.
누가 뭐래?
이제 정말 혼자 갈게.
누구 맘대로?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내 기타 멜빵을 잡았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니? 하더니 멜빵 한쪽을 비끄러매었다. 나는 견인차에 매달린 사고 차량처럼 끌려가며 거리에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보았다. 지구의 지난 몇 세기를 파노라마로 구성한 영상 같다고 생각했다. 초록과 노랑이 빈틈없이 찍혀 있는 거리가 연두색 모자이크 같다고 생각했다. 대체 이곳을 무슨 수로 통과하나 싶었는데 그녀가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초록과 만나면 초록이 되어서 나를 때리고, 노랑과 만나면 노랑이 되어서 나를 부축했다. 때렸다, 부축했다, 때렸다, 때렸다, 부축했다, 부축하는 척했다, 때렸다, 때렸다, 부축하는 척했다, 때렸다, 하면서 그녀는 길을 무사히 관통해 가고 있었다. 나는 담금질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생고기 무두질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존재의 허무함을 고통스럽게 터득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노랑이건 초록이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지. 나는 맞기만 하면 되니까. 내가 맞기만 하면, 그녀는 아무와도 싸우지 않고 길을 지날 수 있으니까. 내가 맞기만 하면, 내가 맞기만 하면…….
내가 부처가 되어 갈 즈음 그녀는 나를 모래바닥 위에 내던졌다. 정확히 말하면 멜빵을 벗은 것인데 내가 기타와 함께 벗어진 거였다. 그녀는 나를 부축해 앉히며 더럽게 왜 땅바닥에 눕느냐고 말했다. 주위에는 땅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땅바닥을 안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땅바닥과 씨름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놀이터였다. 우리는 놀이터에 와 있었다. 놀이터에는 싸우는 사람이 없었다. 경찰들이 놀이터를 감싸고 있었다. 그렇지, 놀이터는 공공장소랬지. 공공장소에서 싸우는 건 금지돼 있댔지.


이해가 가지 않아.


나는 엉망인 채로 말했다.


뭐가?


그녀는 예쁜 채로 물었다.


어떻게 여기 이렇게 사람이 없을 수 있지? 어떻게 저렇게 다들 열심히 싸울 수 있지?
안 싸우면 싸움이 안 끝나잖아.
나와서 싸우면, 그러면 싸움이 끝나?


그녀는 담배를 물고 있었지만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우리는 놀이터에 있었으니까. 해는 이울어지고, 가로등은 아직 들어오지 않은 시간에 머물러 있었으니까. 하루 중 도시가 가장 어두운 때에, 온 세상이 물 빠진 티셔츠처럼 너그러워지는 무렵에, 갓 구워지는 식빵처럼 마음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려는 즈음에. 낮밤이 완전히 바뀐 채 살아가는 나는 이맘때쯤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온 세상이 무채색이 되어버리는, 사람들이 모두 강아지의 눈을 갖게 되는 한동안.


여전히 예쁜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아저씨 노래 좋아?


나는 그녀에게 공연장에 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공연을 본 다음 엑스를 죽이는 것도, 엑스를 죽인 다음 공연을 보는 것도 기분이 별로이긴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그냥 죽이는 건 괜찮겠지. 술 한 잔 마시며 12시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밖으로 나오는 건, 뭔가 깔끔한 기분일 것 같아. 월식을 보는 기분이랄까. 우주와 내가 연결돼 있는 기분. 모든 것에 이유가 있는 것 같은 기분. 공연장까지의 거리를 나는 그녀의 리듬으로 뛰었다. 사람들은 모르는, 그녀만의 고유한 박자로, 한 대도 맞지 않고.


혼자 뛰는데도 그녀와 함께 뛰는 기분이었다.


혼자 비틀거리고 있는데도 그녀에게 맞고 있는 기분이었다.


근육 덩어리 여러 명이 공연장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음악의 역사에 관한 아주 어려운 질문에 답하고 나서야 계단을 통과할 수 있었다. 미로가 있는 전시장이었다. 미로의 벽에 사진과 그림과 작품이 전시돼 있었다. 미로를 나가자 홀이 있었고 홀에서는 희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의 퍼포먼스가 한참이었다. 심연의 무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 공연이었다. 느리고, 고요하고, 기괴했다. 벽에는 선과 색으로만 구성된 영상이 뿌려지고 있었고, 전자음악에 맞추어 가사 없는 즉흥 노래를 부르는 보컬이 있었고, 그리고 무용수들이 있었다. 무용수들은 한데 얽혔다가, 엉킨 끈처럼 풀렸다가, 떨어진 채로 평행하다가, 고립되어 몰입하는 장면을 반복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세상에는 없는 동작을 연구해 온 사람들 같았다. 절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몸짓들을 개발해 온 사람들인 것 같았다. 사회자는 퍼포먼스가 <싸움의 날>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 행사는 <싸움의 날>에 반대하기 위해서 계획된 것이라고도 했다. 문득 몽유병의 반대말이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어릴 때부터 나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동안에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병에 걸려 있었다. 의사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으나 정작 그것이 무슨 병인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는 습관이 생긴 건 그때부터였다. 모두가 다 잠든 고요한 밤에만 생각하는 습관이 생긴 건 그때부터였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공연을 하려면 생각하지 않는 수밖에. 관객들은 피투성이가 된 나를 탐탁찮게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오늘 나에게 있었던 일들을, 그녀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말했다. 아까 전, 그녀에게 맞으면서 작곡한 노래를 지금, 즉흥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초록과 노랑 사이에서 나는 검정. 꽃과 꽃받침 사이에서 너는 긍정. 너와 함께라면 검정이어도 괜찮아. 나는 맞기만 하면 되니까. 내가 맞기만 하면, 그녀는 아무와도 싸우지 않고. 내가 맞기만 하면, 내가 맞기만 하면……. 재밌어할 줄 알았는데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떴다. 미로에 들어가 버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삼삼오오 구석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는 계속하는 수밖에. 혼자서라도 계속하는 수밖에.


너무 배배꼬아서 어려운 얘기인 줄 알았지. 너무 부드럽고 유연해서 아름다운 얘기인 줄 알았지.


내 노래를 끝까지 들어준 건 사회자였다. 사회자는 열광적으로 박수를 친 다음 무대에 올라오더니 오늘의 모든 행사는 10시 50분에 끝이라고 말했다. 내 음악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늦어도 11시 전까지는 한 명도 빠짐없이 나가 주시기 바란다는 말만 반복했다. 사회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미로는 일사불란하게 해체되기 시작했다. 나는, 무대에서 내려갈 새도 없이, 왜 12시에 문을 닫으면 안 되느냐고 항의했는데, 사회자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도 나가서 싸워야죠!
싸움의 날에 반대한다면서요?
그러니까 나가서 싸움의 날 찬성론자들을 처단해야죠!


하지만 그들 중 입고 있던 대로 거리에 나서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제일 먼저 의자에서 일어난 아저씨의 점퍼는 양면이었고,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던 여자의 가방에서는 비옷이 나왔으며, 개중 내 노래를 오래 들은 대머리께서는 노란색 가발을 꺼내어 썼다. 사회자는 노랑인 양 초록인 듯 각도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신기한 점퍼를 입고 나왔는데 다짜고짜 앞을 향해 뛰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에게도 오늘 내로 죽여야 할 여친이 있는 모양이었다.
일찍 나오면 손해라는 그녀의 말은 옳았다. 그녀는 사라지고 난 후에도 옳았다. 거리에 사람들은 더 늘어나 있었으나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이 더 많았다. 놀이터는 피투성이들의 탑이 되어 가고 있었다. 경찰은 놀이터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길바닥에 누워 정신을 잃은척하는 사람이 있었다. 정신을 잃은 사람 밑으로 기어 들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허리춤에 묶어 둔 노란색 셔츠를 풀어서 내던져 버렸다. 검은색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데는 검은색만 한 색이 없었으나, 나는 곧 비행체의 방문을 받게 될 운명이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는, 붕어의, 눈.


쟤한텐 똑같아.


언제나 옳은 그녀가 머릿속에서 말했다. 공연은 끝났고, <싸움의 날>은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에게는 이제 기타가 필요 없었고, 녀석에게는 색깔 따위 의미 없다지. 싸우는 사람은 다 똑같이 모범 시민이라지. 나는 천천히 기타를 꺼내어 자세를 잡았다. 기타를, 마치 총검처럼 휘두르며, 싸우는 양, 싸우지 않는 듯, 세상에는 없는 동작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초보의 연구는 아직 타락하지 않아서, 초보일수록 타락하기가 쉬워서, 나는 주변 사람들을 헛갈리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싸우는 사람인지, 싸우지 않는 사람인지, 노랑과 싸우고 있는지 초록과 싸우고 있는지, 둘 다와 싸우고 있다면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하는지, 오랫동안 궁금해 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딱 몇 초간만 그 자리에서 서 있다가 다른 적을 향해 달려갔다. 채 몇 초 서 있지도 못하고 다른 적의 공격을 받았다. 싸우자고 달려오는 사람에게는 살벌하게 한번 휘둘러 주는 거지. 너는 계속 싸웠고, 나는 두 시간이나 쉬었고, 이건 졸라 단단한 일렉트릭 기타이고, 네 두개골을 쪼개 놓기 전에는 무기가 아니니까, 나는 싸우지만 않으면 되니까, 무사히 집에 처박힐 수만 있으면 되니까,


왜 자꾸 따라와 이 새끼야.


나는 박자와 박자의 중간에, 박자가 존재하지 않는 타이밍에 기타를 하늘로 한 번씩 휘두르며 소리 질렀다. 붕어는, 몇 번이나 정통으로 내 기타에 얻어맞았지만, 나에게서 떠나지도, 나를 잡아먹지도 못하고 있었다. 녀석에게도 생각을 할 때는 움직이지 못하는 병이 생긴 모양이었다. 잠깐 시계를 보아하니 이제 오 분이 지나 있었다. 오 분이 지났으니 이제,


오십오 분만 버티면 될 거였다.


오십오 분만 더 버티면, 그때가 되면.














작가소개 / 노희준

1999 《문학사상》 신인상. 2005 제2회 《문예중앙》 소설상: 『킬러리스트』. 2016 SF어워드 장편소설 부문 대상: 『깊은 바다 속 파랑』. 창작집 『너는 감염되었다』, 『X형 남자친구』, 장편 『킬러리스트』, 『오렌지리퍼블릭』, 『넘버』, 『깊은 바다 속 파랑』.


《문장웹진 2017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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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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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비굿

    와우! 잘 읽었습니다. 가슴이 뻥 뚫리는 듯.. 시원한 걸 보니 제 속에 몹쓸 본능! 이런 ^^::

    • 2017-07-02 16:49:56
    비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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