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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교본

  • 작성일 2017-01-01
  • 조회수 4,239

[단편소설]



노인 교본



편혜영



뜨거운 걸 잘 마시면 처복이 있다. 국물이나 차를 벌컥벌컥 마시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외할아버지는 속담을 인용해 말했다. 쏘아붙이는 말투여서 듣고 있으면 깜짝 놀랄 정도였다. 외할아버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버지를 몰아세웠고 뭔가 받아야 할 게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아버지는 전전긍긍하거나 비위를 맞추거나 주눅 들지 않았다. 누구를 만나든 아버지의 태도는 비슷했다. 무슨 대화에서건 보일 듯 말 듯 가벼운 미소를 지었고 제 의견을 내세우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성량 변화 없이 단조롭고 침착하게 말했고 의견이 영 다를 때에도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발끈하는 건 엄마였다. 엄마는 처한테는 복이 없다는 뜻이라고 자조하는 투로 되받았다. 외할아버지는 그런 반박이 딸이 똑똑해서라고 생각했고 흐뭇해했다. 엄마가 토를 달아 대꾸하거나 정확치 않은 수치나 표현을 재차 확인하거나 회한과 과장이 담긴 어조를 지적하는 것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런 당당한 태도 역시 외할아버지는 물색없이 어디서나 자랑거리로 삼았다.
나는 고작 아홉 살이었다. 엄마의 성화와 아버지의 부드러운 간섭으로 일찌감치 글을 읽을 줄 알았고, 간혹 서가에서 책을 꺼내 읽다가 이해 못 할 구절을 만나도 읽기를 고집하고, 외할아버지가 한자 섞인 신문을 읽어 줄 때면 제법 경청할 줄도 알았지만, 소년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엄마와 아버지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린다는 걸 알았던 것 같다. 생김새가 닮은 가족이나 취향이 비슷하고 조용한 아버지 친구들, 같은 공부를 하는 엄마 학교 사람들을 보면 그랬다. 아버지에 비하면 엄마는 표정이 다채롭고 어조가 분명하고 성량이 컸으며 어떤 말을 하거나 무슨 동작을 취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충동적이어서 불쑥 일을 벌이기 좋아했고 싫은 소리를 잘 참지 않았는데 그걸 솔직한 것이라 여겨 사과하지 않았다.
한동안 나는 부모의 비슷한 점을 찾는 데 골몰했다. 두 사람이 함께 웃거나 장을 보러 가서 같은 물건을 고를 때, 내가 부모와 닮았다는 말을 들을 때면 안도했다. 모든 가족이 그렇듯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은 결국 어울려 살게 마련이니까. 같은 점을 찾을 수 없을 때면 한동안 상심했다. 결별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는데도 두 사람이 서로 바라볼 때의 담담한 눈빛이나 간혹 엄마가 아버지를 부러 외면하는 태도 같은 것을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아버지는 한가하고 엄마는 늘 바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엄마는 여러 군데 학교로 수업을 다녔고 써야 할 거리들이 언제나 밀려 있었다. 나에게 양해를 구하듯 요즘이 가장 중요한 때라고 자주 말했지만 그 무렵이 지난 후에도 매번 중요한 시기가 닥쳤다. 엄마가 원하는 좋은 일은 결코 생기지 않았다. 그게 나쁜 일이 생겼다는 뜻은 아니라고 아버지가 자주 말했지만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엄마가 중요한 시기를 지나칠 때마다 분위기는 더 아슬아슬해졌다. 엄마는 얼마간 침울하고 무기력한 태도를 이어 갔으며 기분을 나아지게 하려는 아버지와 내 노력에 감동받지 않았고 사람들의 관심을 귀찮아하고 위로를 아니꼽게 여겼다. 그런 형편이니 엄마가 출근하고 나서야 아버지의 표정이 다소 편안해졌다.
아버지는 오보에를 불었는데, 소속되어 있던 오케스트라가 경영난을 이유로 해체되면서 가장 좋아하던 일자리를 잃었다. 오보에를 부는 것 말고 피아노도 치고 바이올린도 연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케스트라를 떠난 후 아버지는 한동안 아는 사람이 운영하는 음악학원에서 입시 지도를 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 오래 하지 못했다. 엄마는 화도 잘 내지만 잘 웃는 사람이어서 아버지의 잦은 실직에도 개의치 않고 쾌활함을 이어 갔다. 아버지는 오보에도 잘 불지만 음식도 잘했고 나도 잘 돌보았다. 아버지가 차린 저녁 식탁에 마주 앉을 때면 두 사람은 사소한 얘기를 나누었고 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웃었고, 웃고 나서는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보며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이유를 알기 전까지 웃지 않겠다는 다짐을 누그러뜨리는 웃음이어서 결국 나도 함께 웃었다. 두 사람은 나를 웃기려고 그랬다는 듯 만족스러워했고, 나는 행복감을 느끼며 그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짧은 순간의 충만감을 나는 오래도록 기억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결코 웃지 않게 된 이후에도 나는 그 장면을 떠올리며 웃음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충만한 공기가 어째서 희박해졌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외할아버지의 간병으로 인한 갈등이나 혹은 그보다 오래 지속되어 온 두 사람의 직업적 소양과 불균형한 경제적 부담 따위가 원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고작 내린 결론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공기가 소멸하면 저절로 연소하는 촛불처럼 그저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오랜 추궁이나 격앙어린 질문, 논쟁이나 다툼도 없이 그들이 조용히 소원해지고 무관심해지다가 어떤 날은 나를 매개로 해야만 겨우 의사 전달이 가능해지고, 아예 그마저도 피하는 상황을 맞았다는 것을 나로서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한 끝에 엄마는 한 지방정부의 관공서에 경력직으로 입사하기로 결심했다. 외할아버지가 반대했다. 어머니의 재능과 시간이 아깝다고 했다. 날마다 집으로 와서 아버지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아버지도 신중히 결정하라고 충고했으나 매번 중요한 시기를 놓쳐 온 엄마의 남다른 조바심을 이기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엄마는 아버지의 오랜 실직으로 경제적 위기감을 느꼈던 것 같다. 외할아버지는 이제 대놓고 아버지에게 호통을 쳤고 무능하다고 비아냥거렸으며 쓸모없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날선 공격 앞에서 아버지는 자주 당황했다. 버릇 같던 미소와 평소의 온화함을 잃고 피로와 우울이 물든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조금도 돕지 않았다. 좌절의 막바지에 이른 선택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려는 듯 풀죽고 체념한 표정으로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엄마가 출근을 시작한 즈음, 아버지는 피하는 게 상책이라 여겼는지 가급적 외할아버지를 방문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외할아버지도 유일하게 자랑으로 삼던 딸의 선택이 영 못마땅한지 집에 찾아오는 횟수를 부쩍 줄였다. 잠깐이지만 평화롭고 안전한 생활이 이어졌다. 주말에 홀로 외할아버지 집에 다녀온 엄마가 돌아오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는 것으로 소박한 평화는 오래가지 않아 깨졌다.
외할아버지를 돌보는 몫은 자연스럽게 아버지에게로 넘어갔다. 부모님은 외할아버지가 아프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기는커녕 쉴 새 없이 뭔가를 먹고 간혹 소리를 지르고 멍하니 앉아 두리번거리거나 같은 자리를 맴도는 등 활기가 넘쳤다. 아버지를 욕하거나 때리려 들 때도 있었다. 실패에 물든 시절의 엄마처럼 우울해 보일 때도 많았다. 어느 때건 외할아버지는 나를 안아 주거나 내 이름을 다정히 부르며 신문을 읽어 주는 일을 완전히 포기했다. 숫제 나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굴 때도 있었다. 아버지를 보며 누구냐고 물을 때도 있었고 나를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를 두렵게 한 것은 외할아버지가 갑자기 바닥에 납작 엎드려 총을 쏘는 자세를 취하고 매서운 눈길로 아버지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처음 그 장면을 본 아버지는 울었다. 얘기를 들은 엄마도 울었다. 내게는 어떤 설명도 해주지 않았는데, 외할아버지의 행동이 전혀 장난처럼 보이지 않아서, 또래 아이들의 놀이와는 너무 달라서, 무서웠다. 냉소적이고 학식 있던 예전의 모습과 겁을 먹어 몸을 움츠리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의 간극을 나는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다.
한참 그러고 있다가 외할아버지는 두 팔을 움직여 아버지를 향해 총을 쏘는 시늉을 했고 아버지가 다가가면 아이처럼 몸을 둥그렇게 말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공격하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잘못했다고 빌기도 했다. 아버지가 기어이 다가가 끌어안으면 한 막의 공연을 끝낸 듯 외할아버지는 탈진을 했다. 취한 듯 잠에 빠졌다가 몇 시간 후 일어나서는 닥치는 대로 음식을 먹어댔다. 내가 그렇게 먹었다면 엄마에게 크게 혼이 났을 게 분명했다. 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고도 울었다. 얇은 주름이 잡힌 눈가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전적으로 외할아버지에게 매달리는 것에 대해, 외할아버지의 기괴한 장난에 대해 전혀 호소할 수 없었다. 외할아버지가 투정이 심한 어린아이 같은 상태가 되었다는 걸 굳이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알아차렸다.
전쟁놀이가 끝나고 먹기에도 지치면 외할아버지는 눈치를 보며 아버지를 피해 숨었다. 나 역시 숨고 싶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외할아버지는 내가 방으로 들어가 버리면 느닷없이 비명을 지르면서 아버지의 강압적인 제지를 받을 때까지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귀를 틀어막고 두려움에 침대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내가 보이면 외할아버지는 그제야 안심한 듯 아버지에게 대들었고 간혹 아버지를 때렸고 욕을 퍼부었다. 아버지는 외할아버지의 닦달과 잔소리와 멸시를 참았던 것처럼 이제는 무자비한 폭력과 이상 행동을 참아냈다.
엄마와 아버지는 어느 날 외할아버지와 나를 차에 태웠다. 외할아버지가 병실에 들어간 후 엄마는 내게 안아 드리라고 했다. 외할아버지가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먼저 두 팔을 내밀었다. 집에서는 내내 소리를 지르고 뭔가 때려 부수거나 화를 내거나 겁먹은 듯 굴었는데, 그게 이곳에 오려는 연기였던 것처럼 얌전히 굴었고 내게 다정하게 대했다. 집을 떠나자 외할아버지는 비로소 안도하는 듯했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부모님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무거웠는지 나는 곧 잠이 들었고 눈을 떴을 때는 주차장이었다. 아버지 혼자 어두컴컴한 차에서 심포니를 듣고 있었다. 아버지는 부드러운 말투로 잠에서 깼는지 물었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천천히 음악을 껐다. 순전히 내 짧은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듯이. 아버지는 나를 안고 집으로 올라갔다. 나는 이상한 불안감과 허공에 뜬 느낌에 사로잡혔다. 울음이 나올 것 같았는데, 아버지의 침묵이 무서워서였는지 잠이 덜 깨서였는지 외할아버지와 영영 이별한 것 같은 슬픔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별은 오래가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는 요양원에서 잘 견디지 못했다. 전쟁 시절로 돌아가지 않을 때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정을 유발할 만큼 유순한 목소리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울먹였다. 전쟁 시절에 머물 때면 환자와 보호자를 대상으로 총을 쏘고 벌벌 떨며 몸을 숨기고 비명을 내질렀다. 같은 병동 환자와 보호자들의 거듭된 항의, 의료진의 은근한 설득과 엄마를 괴롭히는 자책으로 인해 외할아버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눈에 띄게 다정함을 잃어 가던 어느 날, 아버지는 전쟁놀이에 빠져 엎드려 총 쏘는 시늉을 하는 외할아버지를 빤히 쳐다보다가 장 일병, 하고 중얼거렸다. 핏기 없는 그 이름이 외할아버지를 가리킨다는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다행히 듣지 못했고 여전히 아버지를 쏘아보았다. 아버지는 외할아버지를 일으키려다가 그가 완강히 버티자 장 일병, 하고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놀랍게도 외할아버지가 몸을 움츠리고 두려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이번에는 일어섯, 하고 명령했다. 아버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외할아버지는 벌떡 일어나 젊은 군인처럼 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섰다.
아버지 얼굴에서 외할아버지를 달랠 좋은 방법을 알아냈다는 안도감이나 희열, 의기양양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는 제 눈치를 보고 있는 깡마른 외할아버지를, 오래전 참전한 다른 나라의 전쟁에서 한낱 병사에 불과했을 외할아버지를 슬프고 울적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외할아버지가 겪은 전쟁을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장난감으로 흔한 비행기나 총, 폭탄, 탱크 같은 것들이 전쟁에 동원된다는 걸 알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에 대해서는 짐작도 못 했다. 외할아버지가 기나긴 인생에서 하필이면 왜 그 시기로 되돌아갔는지, 그 시기가 할아버지에게 어떤 두려움을 남겼는지,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가 전쟁에서 진흙 바닥을 엎드려 기고 소나기를 맞고 추위에 떨고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고 누군가에게 총을 쏘고 자신에게 날아드는 총알을 피하기 위해 몸을 아이처럼 구부렸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모든 말을 명령조로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애를 써서 그렇게 했지만 차츰 편하게 했다. 외할아버지가 잠깐 정신이 돌아와 아버지를 사위로 대하면 오히려 힘들어했고 상대하지 않으려 들었다. 외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상사로 착각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해도 그 기억조차 일관되지 않아서, 아버지를 상사로 알 때와 사위로 알 때, 아예 모르는 사람으로 알 때가 공존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음은 말할 것도 없다. 아버지는 상사 역할을 가장 편하게 여겼고, 그 일이 반복되자 외할아버지가 사위로 인지할 때에도 상사 역할을 해서 외할아버지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엄마와 아버지는 그 문제로 많이 얘기를 나누었다. 엄마는 몹시 반대했으나 아버지의 완강한 태도에 암묵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외할아버지를 돌보는 것은 아버지였으니까. 외할아버지가 장 일병이 되어 상사인 아버지의 명령을 즉시 이행하는 걸 볼 때면 눈물을 흘리거나 탄식을 뱉었지만, 기이한 방식의 제압에 아무런 이견을 달지 못했다.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그 일이 벌어졌다. 현관문을 여는데 누군가 맞는 소리가 났다. 얼마 전부터 외할아버지 방을 멀찍이 돌아갔지만 그날은 그럴 수 없었다. 어떤 경우라도 외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때리는 일을 참을 수 없었다. 나에게도 전쟁놀이에 빠진 외할아버지에 대한 동정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방문을 열었을 때 내가 잘못 알았음을 곧 알아차렸다. 외할아버지는 엎드려 있었다. 정신을 잃을 때면 소총인 줄 알고 늘 부둥켜안는 총채가 반듯하게 한쪽에 놓여 있었다. 아버지는 오케스트라 단원이던 시절 사용하던 오보에로 외할아버지의 엎드린 몸을 마구 때리고 있었다. 견디지 못하고 자세가 헝클어지면 아버지는 똑바로 엎드려, 하고 딱딱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고 그러면 외할아버지는 다시 기를 쓰고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는 나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외할아버지가 기운을 잃고 쓰러진 후에도 오보에를 휘두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단박에 그간 외할아버지의 복종이 단순한 명령어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자 무서워졌다. 오보에가 사용되고 있어서였다. 비로소 내가 그동안 아버지로부터 격리되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아버지의 다정함만을 믿고 의지해 왔다. 아버지가 볼까 봐 조용히 문을 닫았고 집에서 빠져나와 늦게야 돌아갔다. 아버지는 늦은 귀가에 대해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교였다. 내가 돌아오리라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아버지가 그 일에 푹 빠져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어머니와 나는 아버지 혼자 외할아버지를 돌보는 일이 어떤 것인지 완전히 무심했다. 외할아버지 못지않게 아버지가 일그러졌음을, 외할아버지를 상대하느라 아버지의 정신이 산산조각 나고 있음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얼마 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쇠약함으로 미루어 준비하고 있었음에도 그 일은 우리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어머니는 염할 때 외할아버지의 깡마른 몸에 남은 검은 얼룩들에 충격을 받았고 오랫동안 자책과 괴로움에 시달렸다. 나로서도 아버지 때문이라는 의심에 괴로웠다. 아버지는 모든 일이 끝났음에도 어떤 후련함이나 아쉬움도 없어 보였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아버지는 한 번도 울지 않았고, 피로한 얼굴로 손님들을 상대했다.
외할아버지의 죽음이 뒤에 벌어질 사건의 인과라도 된다는 듯 차례로 많은 일이 일어났다. 우선 아버지는 애지중지하던 오보에를 부러뜨려 내다버렸다. 집에 있는 레코드판도 다 버렸다. 그걸 모두 지켜본 내게 아버지는 뭔가 설명하고 싶어 했다. 여러 번 말문을 고치고 적당한 말을 고르는 도중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금세 알아차린 것 같았다. 아버지는 손짓으로 멀리 가라고 했고, 내가 알아듣지 못하자 작은 목소리로 꺼져,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끝으로 아버지는 말문을 닫았다. 내게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정확한 설명이 아니라 다정함이었지만, 그것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제 겨우 마흔여섯인 아버지는 누구와도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방에만 틀어박혔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자주 다가갔지만, 아버지의 완강한 거부에 부딪혀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는 무척 약해 보였다. 가족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에 시달리는 사람은 모든 것이 위축된다는 걸, 불안만큼 사람을 왜소하게 만드는 건 없다는 걸, 그때 알게 되었다. 늘 당당하던 엄마는 흔들렸고 아버지에게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려고 노력했으며 나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나로서는 엄마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늘 내 손을 잡고 싶어 하는 엄마의 모습은 내가 바라던 것 중 하나였다. 엄마는 한숨을 쉬었고, 절대로 나를 방임하지 않았고, 안아 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버지는 방에서 잘 나오지 않았고 나올 때면 술을 마셨고 술에 취하면 어머니를 때리기 시작했고 미안하다며 울었고 면목 없어 집을 나갔고 한참만에 폐인이 되어 돌아오기를 반복하다 간암을 얻어 투병 끝에 쉰도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그러는 중에도 나는 자랐다. 예의 바르고, 다른 사람의 애정에 민감하고, 타인의 의지를 끔찍이 두려워하는, 이기적이고 무뚝뚝한 아이로 자랐다. 아버지의 인생에 전쟁놀이에 빠진 외할아버지가 없었더라면 어떤 삶을 살았을지 전혀 짐작할 수 없지만 아버지가 오보에와 미소, 엄마를 완전히 잃은 게 외할아버지 때문이라는 생각이 점차 굳어졌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어머니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아버지의 고통을 무심히 대한 어머니에게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다.
대학 진학은 어머니에게 실망을 안겼지만 내게는 다른 도시로 옮겨가는 기회가 되었다. 기숙사에 짐을 풀어 놓고 오는 길에 어머니는 도시에서 가장 번화한 곳의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어머니와 오랫동안 관청에서 함께 근무한 나이 든 남자가 나와 있었다. 어머니는 부끄러워하며 남자를 소개했다. 안정된 보수와 지위를 오랫동안 누려 온 사람답게 권위적이면서도 여유가 깃든 표정의 남자였다. 그는 대뜸 반말을 했고, 친근함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변명하지 않았고, 대학 생활에서 집중해야 할 공부에 대해 줄창 애기했다. 그 많은 충고에도 불구하고 그날 가장 인상적인 것은 남자가 후식으로 나온 뜨거운 커피를 단숨에 마시는 장면이었다. 뜨거운 걸 잘 마시면 처복이 있다는 오래전 외할아버지 말이 느닷없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집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진학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학과 공부에는 별 흥미가 없었고 진부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돈이 떨어지고 결국 어머니가 보내주는 학비와 생활비를 유용하는 쪽을 택하고, 별로 절실하지 않던 학업을 포기하는 수순을 밟고, 아르바이트로 주거와 생활비를 해결해야 하는 처지에 내몰렸다. 내가 근근이 단기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동안 동기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진로를 고민하다 공무원 입시 학원으로 몰려갔다.
집에는 아예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무조건 이해한다는 태도를 보이고, 남자는 충고를 하고 생색을 내며 거절하기 힘든 액수의 용돈을 쥐어줬기 때문이다. 그 돈이 어머니의 저축에서 나온 것이며 남자가, 경제적 지원을 거부하려는 내 고집이 인생에서 누구나 거쳐야 하는 단계라고 어머니에게 얘기하는 걸 듣고는 미련 없이 발길을 끊었다. 그런 형편이어서 학과 동기가, 누나가 간호사로 근무하는 요양원의 아르바이트를 추천했을 때 마다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밤에는 숙직실에 묵을 수 있다고 했고, 다른 일자리에 비해 제법 급여가 높았다.
면접을 보러 갈 때만 해도 나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취해 외할아버지를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간단한 교육 후 담당 병실을 배정받자마자 줄곧 외할아버지와 함께하게 될 것을 확신했다. 추억이나 그리움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두려웠다. 내가 아버지처럼 될까 봐. 울분만 남은 노인들을 참지 못하게 될까 봐. 한편으로는 자만했다. 이미 한 명의 노인으로 인해 벌어지는 참혹한 일을 겪었으니 노인들이 나를 망치게 놓아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간병인을 보조하는 것이 내 일이었다. 간병인 혼자 못 하는 일, 예를 들면 식사 보조나 시트갈이, 간이침대로의 환자 이동, 목욕이나 머리 감기는 일을 했다. 배변을 위해 화장실에 데려가거나 보행을 보조하고 변기를 깔아 주었다. 대개 간병인은 여자였기 때문에 나 같은 남자 간병인이 해야 할 일이 은근히 많았다. 노인들은 자주 여자 간병인에게 지분덕거렸다. 염치없는 노인들은 대놓고 간병인을 만졌다. 몸이 아픈 노인들에게는 손이 많이 갔고, 몸이 멀쩡한 노인들에게는 마음이 상했다. 떼를 쓰고 자다 깨서 소리를 지르고 먹을 것이 적다고 투정하고 요구를 받아 주지 않으면 화를 냈다. 하루 종일 누구에게든 욕설을 퍼부었고 자신에게 소홀한 의료진에게 울분을 쏟아내고 함께 병실을 사용하는 노인들과 틈만 나면 싸웠다. 그런 활력도 드물어서, 대개는 휠체어나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환자를 쉽게 다루려고 약물을 세게 처방한 탓이라고 했다. 노인들을 보고 있으면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서로 다른 젊은 시절을 보냈을 텐데, 세계를 겪은 방식과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이 달랐을 텐데, 나이가 들자 똑같은 생을 겪은 듯 모두 비슷해졌다. 웃지 않았고 눈빛이 멍했고 울분에 사로잡히고 회한만 남았다.
노인들 중에는 각자의 간병인이 따로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었다. 가족이 자주 찾아오는 사람도 있고 전혀 오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가족이 오지 않는 노인을 돌보는 일이 차라리 나았다. 가족이 오는 날이면 몹시 피곤했다. 가족들이 제 부모만 생각해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고 항의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족이 있으면 눈치를 보게 되어 감시를 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따져 물었다.
조용한 가운데 날마다 소동이 일어났다. 밥그릇을 엎거나 의사 표현 없이 침대에 누워서 혹은 선 채로 용변을 치르는 건 가벼운 일이었다. 늘 다니던 길이 막혔을 때 서로 양보하지 않으려고 티격태격하다 몸싸움이 벌어졌다. 참지 않았고 화를 내고 소리를 질렀다.
걸핏하면 시비를 거는 노인에게 머리채를 잡혔을 때 나는 아픔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욕을 내뱉었다. 그래도 머리를 놓지 않아 이번에는 되는 대로 발길질을 했다. 간병인과 간호조무사가 달려들어 노인을 나로부터 떼어내기도 전에 머리채를 잡은 노인의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그 즉시 아버지가 떠올랐다. 오래전 아버지의 잘못이 무엇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버지가 외할아버지를 제압하는 방식으로 상사인 척했다는 것이다. 일단 상사가 되고 나면 더 이상 부하 노릇을 하기 싫어지는 법이니까. 외할아버지를 견디려고 고안해 낸 방법이 결국 아버지를 좀먹었다. 나를 향해 미소 짓던 아버지와 오보에를 불던 아버지, 외할아버지에게 매질하던 아버지가 한 인물이라는 것도 단번에 이해했다. 다정함과 체념과 분노와 협잡이 뒤섞인 얼굴이 한데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나는 노인을 슬금슬금 피했다.
그러던 중 남자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남자는 예의를 차린, 공손하고 점잖은 목소리로 집으로 방문해 주기를 청했다. 당연히 가지 않았다. 남자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포기하지 않을 기세였다. 요양원 앞으로 나를 데리러 오기도 했다. 남자가 집요하게 굴었기 때문에 결국 어머니가 걱정되어 그러마고 했다.
어머니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허둥지둥하고 어머니답지 않게 엉뚱한 말을 늘어놓았다. 소파에 앉히지도 않고 세워 둔 채로 계속 얘기했다. 종종 말을 고르느라 나를 뚫어지게 보았지만 그럼에도 예전과 다름없이 쾌활한 투로 말했고, 웃기지 않는 농담을 간혹 했고, 먹고 싶은 게 뭐냐고 되풀이해서 물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환하게 웃었다. 어머니가 환심을 사고 싶어 한다는 게 나를 안심시켰다. 한마디로 어머니는 여전했다.
식구라도 되는 듯 남자와 함께 식탁에 앉은 나를 보자 어머니는 긴장한 것 같았다. 그 탓에 손을 조금 떨기도 했고 하려던 말을 잊고 멍하니 나를 봤고, 그걸 의식한 듯 종종 얼굴이 굳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걸 보고 나도 조금 놀랐다. 조금도 친밀해 보이지 않아서였다. 남자를 대하는 어머니의 태도는 상냥했지만, 짐짓 안정을 가장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 두 사람을 보았을 때 확연했던 나이 차이가 지금은 전혀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것도 놀라웠다.
식사를 마친 어머니가 차를 준비하러 간 사이, 남자가 잠깐 이야기를 나누자며 서재로 데리고 갔다. 나는 당연히 남자가 어머니와의 관계를 법적인 가족 형태로 바꾸려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뜻밖에도 남자는 어머니의 평소 태도를 털어놓았다. 남자의 말에 의하면, 어머니가 식사를 하면서 밥알을 흘리거나 흘린 줄도 모르거나 말이 어눌해지거나 말을 제대로 잇기 위해 잠시 멍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게 긴장해서가 아니라 질병 탓이라고 했다. 남자는 내 기분은 아랑곳없이 계속 이야기했다. 양치질하는 방법을 잊어 칫솔을 들고 멍하니 서 있는 어머니에 대해, 슈퍼마켓에 나갔다가 길을 잃어 한참만에 돌아오거나 경찰에게 보호 조치를 받은 어머니에 대해,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마루를 서성이는 어머니에 대해, 그러다가 남자와 마주치면 무턱대고 잘못을 비는 어머니에 대해. 그렇게 하지 않을 때가 더 많아서 어머니는 오랫동안 방치되었고 그 탓에 악화된 것 같았다. 남자는 건망증이나 노화, 잠버릇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넘겨버렸을 것이다. 어머니의 친구가 방문했다가 남자에게 그 사실을 지적해 주고 인지 능력 이상에 대해 강하게 주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남자는 노화의 증상으로 여겼다. 경도 인지장애는 그 나이라면 흔하니까.
남자가 유감이라고 했다. 나는 버릇처럼 고개를 끄덕였지만 믿을 수 없었다. 농담이라고 말해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단호한 남자의 표정은 일말의 희망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신의 외로움 때문에 나마저 외롭게 만들지 않으려 애썼고 고통 속에서도 웃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줘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자립심이 강해서 누구에게도 의지하거나 의탁하지 않고 자존감을 유지했다. 그러느라 아버지와 나로부터 멀어졌지만 동시에 그 때문에 슬프고 괴로울 때에도 품위를 지켰다. 이제 그 모든 노력은 헛것이 되었다. 앞으로 어머니는 똑같은 기억과 시간과 추억을 매번 처음 겪는 일인 듯 상대해 나가야 할 것이다. 어머니에게 시간은 멈춰 서고 중단되고 유예될 것이다. 앞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저 과거의 잔해와 일부 기억 속을 돌처럼 무표정하게 맴돌다가 기어이 자기 자신을 잊을 것이다.
남자는 치료에 대해 물었다. 내 판단에 따르겠노라고 했다. 자신은 어머니가 겪는 질환에 아는 바가 적지만, 나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남자로부터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요양원에서 만나는 환자 보호자에게 얘기하듯이, 초기 환자의 경우 가족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말문을 텄다. 남자가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넬 부른 걸세. 남자가 상냥한 표정으로, 명백히 선을 긋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그제야 남자가 말한 가족이 나라는 걸 알아차렸다. 남자는 상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의탁하기 위해서 나를 불렀다.
주간보호센터 같은 곳도 있다고 말해 주자 남자는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그런데 야간에는 어떻게 할 건가. 센터에서 돌아오면 말이야. 남자가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어떻게 할지 결정을 해둔 상태였고 나는 아니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남자가 유리했다. 자네 월급이 얼만가. 남자가 틈을 주지 않고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이번에는 다행히 연금이 있어, 라고 말했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실수했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말실수 때문에 나는 어머니와 내게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걸 실감했다.
의도했건 아니건 연금 얘기를 꺼내고 나서 남자는 한층 여유로워진 듯했다. 내 결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 투였다. 남자는 요양원에서 간병인이나 도우며 산다면 내게 미래가 없으리라고 일갈했다. 나는 엄청난 자기 확신에 빠진 남자를, 비꼬기를 잘하고 계산이 빠른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어머니를 돌보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보라고 충고했다. 늙어서 가장 든든한 게 뭔 줄 아나. 대단한 위트라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연금이야. 가족도 다 소용 없어. 자네 어머니만 봐도 그렇지. 연금이 있어서 자식한테 당당히 의지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나는 남자가 하는 말 가운데 옳은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려주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로부터 배운 습관이었는데, 남자는 자신의 말에 동의해서라고 생각한 듯 말을 이었다.
인생의 성취는 보통 직업적 성취와 가정적 성취로 나뉠 수 있네. 직업적 성취는 노후에 나타나지. 가정적 성취는 자식들의 직업과 결혼을 보면 알 수 있고 말이야. 자네 어머니는 직업적 성취는 거뒀지만 안타깝게도 가정적 성취는 영 엉망이야. 내가 늘 타일렀는데도 자네를 이렇게 무능하게 방치했다는 게 그 증걸세.
남자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고는 자신의 가정적 성취에 대해서, 다시 말해 자식들의 성공에 대해 늘어놓았다. 사위의 안정적 직업과 사돈댁의 경제적 위상에 대해서, 아들의 촉망된 장래와 그에 걸맞은 며느리에 대하여.
목선이 정갈한 흰색 셔츠에 라운드 넥 스웨터를 입은 남자는 단정하고 점잖아 보였다. 앞으로도 인지 장애는 절대 겪지 않을 듯 건강해 보였다. 남자는 상처하자마자 부하 직원이던 어머니와 지냈다. 장성한 자식들을 떠나 어머니의 동거인으로 지내면서 홀로 된 육신의 보살핌을 받았다. 어머니가 앓기 시작하자 무관함을 강조하면서 내게 자식 된 도리를 다하라고 다그쳤다. 남자는 반듯한 가르마와 단정하고 깔끔한 차림새가 어머니의 손길과 보살핌 때문이라는 걸 모르는 척했다. 어머니가 없다면 차림이 추레하고 후줄근해질 것이며 손쓸 수 없이 살비듬이 끼고 찌든 냄새를 풍길 것이다. 자식들이 알아주지 않아 분노를 느낄 것이며 모든 것을 다 가졌으나 속절없이 늙어 가는 것에 대한 허망함으로 아직 늙지 않은 모든 것을 시기하고, 증오하고, 어리석다 꾸짖으려 할 것이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남자가 응답하기를 기다려 문을 열더니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남자 앞에 찻잔을 내려놓으려던 어머니는 컵받침에 물이 조금 쏟아진 것에 당황하여 소매로 닦으려다가 남자가 아량을 베풀 듯 휴지를 건네주자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받았다. 어머니는 남자를 동지나 친구, 반려자나 동거인이 아니라 상사로 여기는 듯했다. 오래 전부터 그랬는지, 어머니의 질환에서 비롯된 일시적 착란인지 알 수 없었다. 남자의 태도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의 관계가 원래 그러했던 것도 같았다. 어머니는 내 앞에도 찻잔을 놓았는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손을 떨었다. 드디어 할 일을 마치자 남자를 향해 목례를 하고는 마치 상사의 손님을 대하듯 내게도 가볍게 고개를 숙이더니 문을 닫고 나갔다. 어머니를 붙잡고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묻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 대답을 원하는 대로 듣지 못한다면 나는 엉망이 될 게 분명했다.
남자가 결단을 촉구하듯 바닥에 놓여 있던 커다란 가방을 책상 위로 올렸다. 그러고는 다른 도시에 사는 아들과 자신이 통학을 도와야 하는 손자 얘기를 꺼냈다. 남자가 차를 입에 가져다대고 단숨에 마셨다. 뜨거운 걸 잘 마시면 처복이 있다는 외할아버지의 말이 다시 떠올랐고 그러자 단숨에 외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내 삶에 끼어들었다. 남자는 내 두려움에 아랑곳없이 어린 손자 자랑을 늘어놓았다. 손자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양육과 간병과 늙음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하는 아이의 표정은 해맑았다. 남자는 다시 준엄한 얼굴로 지속적인 연락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방임해 온 나를 악랄하고 배은망덕하고 가학적이라며 나무랐다.
어머니의 연금에 대해 생각했다. 어머니에게는 공무원 연금과 약간의 저축이 있고, 치매 판정을 받기는 했으나 살아 있는 동안 계속 연금을 받을 것이다. 나 같은 처지라면,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는 처지라면 어머니의 연금을 오래 유지하는 것이 생계를 지탱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나는 결국 어머니를 돌보게 될 것이다. 기어이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게 될 어머니에게 애원하고 명령하고 호통치고 밤이면 수면유도제에 의지해 잠들 것이다. 간혹 참지 못해 어머니를 향해 죽어버려, 하고 소리칠 수도 있을 것이다. 진심은 아닐 것이다. 연금을 위해 최대한 어머니의 죽음을 유보하고 가급적 은폐하려 들 것이다. 그리하여 어머니와 함께 사는 건지 죽는 건지 알 수 없는 채로 살아갈 것이다.
남자가 시계를 힐끔거렸다. 저녁 기차로 자식들이 사는 도시로 이동할 것이라고 했다. 남자는 내가 방문하는 날을 제가 떠나는 날로 삼았다. 내가 달아나 버릴까 봐, 숨어 버릴까 봐 시간을 많이 주지 않았다. 나보다 먼저 이 집에서 떠날 작정을 했다. 배신을 더 악화시킬까 봐 남자를 붙잡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남자와 십 년 가까이 함께 지냈다는 것 때문에 혼란스러워졌다. 어머니는 내가 거의 아는 것이 없는 남자에게 의지해 왔다.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이제껏 남자에 대한 혐오를 억누르고 판단을 유보하고 그가 나와는 영 다른 세계 사람이라고 받아들이려 애썼다. 그 세계란 우월감을 감추지 않고 알아봐 주지 않으면 울분을 터뜨리고 가진 것을 으스대며 상대를 제 뜻대로 움직이게 하려는 곳이었다. 짐을 꾸리는 남자를 보자 그 세계에 대한 분명한 혐오감이 솟구쳤고, 하루아침에 백 살 먹은 노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남자가 어머니 책을 가방에 챙겨 넣는 것 같아서였다. 아니었다. 가방 둘 자리를 확보하려고 책상 한쪽으로 화집을 밀어 둔 것이었다. 어머니가 오래전 여행에서 사온 마를린 뒤마의 화집이었다. 처음 뒤마의 그림을 보았을 때 몹시 충격을 받았다. 학대받는 아이를 그린 그림인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설명을 통해 그게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얻어맞아 붓고 멍든 것 같은 소녀의 얼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남자는 조금이라도 짐을 더 챙기기 위해 가방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분풀이를 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화집으로 남자의 머리를 내리쳤다. 만약 아버지처럼 오보에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것을 휘둘렀을 것이다. 남자가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비애가 나를 사로잡았다. 고작 이 순간을 위해서 부단히 살아온 것 같았다. 그 생각을 오래 하지 못했다. 나는 곧 바닥을 나뒹굴었다. 남자가 그렇게 만들었다.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오랫동안 체력단련을 해온 것인지 남자는 단단한 근육질의 팔뚝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무기로 잡지 않은 남자에게 주먹으로 얻어맞았다. 몸을 작게 구부렸지만 그렇게 한다고 주먹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비로소 오래 전부터 두려워하던 일, 내가 아버지나 외할아버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둘 중 한 사람이 아니라 동시에 두 사람 모두가 됨으로써 그렇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노인에게 배운 유일한 것이었다. –끝-









편혜영
작가소개 / 편혜영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소설집 『아오이가든』 『사육장 쪽으로』 『저녁의 구애』 『밤이 지나간다』, 장편소설 『재와 빨강』 『서쪽 숲에 갔다』 『선의 법칙』 등을 출간했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문장웹진 2017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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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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