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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공행진

  • 작성일 2016-10-01
  • 조회수 2,201


[단편소설]



고공행진



전석순



결과는 불안 47%에 긴장이 26%, 두려움이 19%, 불쾌가 6%다. 나올 때 스캔한 것과 별다를 건 없다. 구성 비율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이 정도면 작업에 무리는 없을 것이다. 다만 뒤에 붙은 기타 2%가 걸린다.
기타로 나오는 건 정확하게 스캔할 수 없는 감정이다. 기준치를 넘으면 경보음이 울리고 가까운 병원이 안내된다. 일정 시간이 지나도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으면 위급한 상태로 판단하고 위치를 추적해 구급차를 호출한다.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구급차가 도착하기 전까진 경보음이 멈추지 않는다. 특정 감정이 80% 이상일 때도 마찬가지다. 한 번이라도 구급차에 실려 가면 기록에 남았다. 기록은 어디서든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건강과 범죄예방을 위해서라도 기록은 필요했다.
몇 년 전부터 개인별 표준감정 상태에서 벗어난 날도 따로 기록되었다. 정상 범위는 나이와 직업 그리고 거주지역이나 재산 상태, 결혼유무, 가족관계 등을 분석해서 결정되었다. 누적된 스캔 결과를 보면 감정 변화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연말이 되면 일 년간의 감정을 정리해 감정진단서를 발급받았다. 그것을 바탕으로 새해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내년엔 좀 덜 흥분해야지, 아직 더 증오해도 괜찮겠구나, 하는 식이었다.
감정진단서를 요구하는 회사는 점점 늘었다. 비리로 얼룩졌던 회사는 모든 직원의 감정진단에서 기쁨을 2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발표하기도 했다. 장난삼아, 하지만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결혼 전 감정진단서를 교환하는 것도 유행처럼 번졌다. 사랑이 높은 수치로 나와서 결혼했는데 그 대상이 엉뚱한 사람인 경우도 더러 있었다. 남자는 자신과 함께 있을 때 나온 결과이라 의심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람들은 체지방처럼 감정의 비율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불안이나 우울이 끼어 있으면 제거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약물복용이나 호르몬 조절이 가장 효과적이었지만 번거로웠고 무엇보다 비쌌다. 그래서 어지간한 감정은 단말기에서 흘러나오는 색채와 음악만으로 조절하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모든 사람이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보급형이 나오긴 했지만 여전히 기초생활수급자에게 단말기 구입은 큰 부담이었다.
프로그램을 마치고 스캔해 보면 확연히 안정된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 단말기가 나왔을 때 전문가들은 섣불리 감정을 봉합하려는 시도를 경고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표준 감정에서 벗어날수록 사회생활은 엉망이 되었다.


나는 업체에서 정해 준 기준 감정에 도달하지 못할 때가 잦았다. 번번이 조금 부족하거나 넘쳤다. 이번에도 일을 하기엔 아슬아슬한 수치이다. 하지만 남아 있는 사람이라곤 나와 남자뿐이다. 현장으로 가는 동안 기준에 맞추는 수밖에 없다. 더는 작업을 미룰 수 없다. 그들이 버틸수록 공사는 늦춰졌고 공사비는 점점 불어났다. 하루라도 빨리 밀어버려야 했다.
남자가 내 결과를 힐끔거리더니 피식 웃는다. 웃으려다 마는 것 같은 웃음이다. 등에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달라붙는다.
“이래서야 오늘 일할 수 있겠어?”
남자는 내 옆을 비껴가면서 혼잣말처럼 속살거린다. 가래가 들끓는 목소리이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해.”
그사이 불안이나 긴장이 줄어든다. 대신 불쾌가 그 자리를 메운다. 어느새 음악이 흘러나온다. 박자가 더 느려진 듯하다. 화면에 흘러나오는 색에서 푸른빛이 돈다. 사이사이 연분홍색이 번진다. 진동은 한층 약해진다. 신경 쓰고 있지 않으면 모를 정도이다. 아무래도 기타 2% 때문인 것 같다. 음악과 색채와 진동은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감정을 희석시켜 줄 것이다. 쾌속 모드를 실행한다. 작업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도착하기 전까지 기준 감정을 만들어 놔야 한다. 결과에 안정이나 즐거움이 전혀 없다는 건 위험신호이다. 지나치게 안정 수치가 높은 것도 문제이지만 아예 없는 건 더 큰 문제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괜히 불안 수치가 높아질까 싶어 재빨리 화면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미 밤은 단단하게 여물었다.


야간작업은 일찍 말해 주는 법이 없었다. 오늘처럼 퇴근 직전 생각났다는 듯이 슬쩍 알려주는 건 최악이었다. 소장은 매번 미안해서 미루고 미루다가 겨우 내뱉는 거라고 했다. 표정을 뜯어보면 딱히 미안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감정을 스캔해 봐야 객관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결과에 슬픔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으면 화가 덜 날 것도 같았지만 이제껏 소장은 한 번도 자신의 감정진단서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소장은 불평이 이어질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들으나 마나 한 주의사항이었다. 두어 번만 더 들으면 통째로 외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소장이 세 번째 주의사항에서 막히면 내가 “마스크요, 마스크!”라고 일러줄 때도 있었다. 소장이 내게 처음 건네준 것도 마스크였다. 현장에서 얼굴이 노출되면 곤란했다. 마스크는 얼굴뿐만 아니라 얼굴에 드러난 감정도 숨겨 줬다.
소장은 끝까지 어떤 사람이 버티고 있는 건물인지, 몇 명이나 버티고 있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 어떨 땐 차라리 모르는 게 감정 조절에 유리했다. 특히 밤에 작업하는 경우엔 더 그랬다. 아무도 모르게, 날이 밝기 전에 완전히 끝내 달라는 추가 주문이 이어질 때는 더더욱. 이번에도 의뢰인은 익명이었다. 용역의 기준 감정이 엄격하게 적용되는 건물인 게 분명했다. 방이 촘촘하게 박혀 있는 건물일 것이다. 어떻게 이 많은 방이 들어가 있는지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 이럴 땐 어떤 사람이 버티고 있는지가 중요했다. 그에 따라 준비해야 할 도구도 조금씩 달라졌다. 물론 가격에도 차이가 났다. 노파나 미취학 여자 아이가 가장 싸게 먹혔다. 건장한 사내가 여럿이 버티고 있다면 소장은 일당에 웃돈을 조금 얹어 주었다.
소장은 정확한 얘기 대신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라고만 하고 얼버무렸다.
“차라리 오늘 같은 작업이 낫지. 저번에 뚱보 형제 처리하던 거 생각하면…….”
남자가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소장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작업 사실을 입 밖으로 내는 일은 어디서든 주의해야 했다. 그사이 남자는 두 번째 하품을 이어 나갔다. 군내가 내 쪽까지 슬금슬금 몰려왔다. 이제 주소만 입력하면 됐다. 소장은 떠듬떠듬 주소를 부르다 말고 눈을 치켜떴다.
“입력 안 하고 뭐 해?”
부랴부랴 단말기를 꺼냈다. 도로 이름을 입력하다가 멈칫했다. 기억에 남아 있는 주소와 거의 일치했다. 마지막 번호가 좀 애매하긴 했지만 최소한 그 근처인 건 확실했다.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소장을 쳐다봤다. 소장의 입에선 중앙시장 뒷골목이 나오다가 칠성국밥집이나 오로라문구사 같은 이름이 줄줄이 나왔다. 설명은 두서없고 장황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장면은 또렷해졌다. 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소장은 기지개까지 켜는 남자를 노려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이 무슨 말을 더 주고받았다. 목소리는 누가 꾹 밟고 있는 것처럼 뭉개졌다.
주소를 입력하니 지도 위에 위치가 찍혔다. 화면 속에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내 몸도 깃발을 따라 출렁이는 것 같았다. 단말기를 본 남자는 귓가에 속삭였다.
“좀 헤맬 수도 있겠는데?”
소장은 등을 돌려 나갔다. 문이 열리자 바깥바람이 안을 기웃거리다 후다닥 들이닥쳤다. 그 틈으로 소장의 목소리가 꽂혔다. 딱히 누구를 향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한 번에 성공하면 연락해. 소주에 삼겹살이나 뜯게…….”
문이 닫히는 바람에 뒤를 잇던 말이 잘려 나갔다. 남자는 한 번 더 기지개를 켜고 찔끔찔끔 쏟던 하품을 한꺼번에 게워냈다. 옹색한 사무실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우렁찬 하품이었다. 이어서 두툼해진 군내가 퍼졌다. 군내가 좀 잦아들자 남자가 느릿느릿 움직였다. 장비를 챙기러 창고로 가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내 옆을 스쳐가면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잠깐 눈이 마주쳤다. 시선은 이내 흐트러졌다.
그녀는 아직 그곳에 살고 있을까.


교묘하게 언덕이 이어진다. 평지인가 싶으면 어느새 완만한 경사가 늘어선다. 평평한 것 같아도 희미한 경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동네이다. 거의 야트막한 산 하나는 넘었겠다 싶어 뒤돌아본다. 언덕 아래에 있는 건물의 꼭대기가 정면으로 보인다. 고개를 조금 드니 옥탑까지 드러난다. 건물 높이를 가늠하는 사이에도 남자는 끈질기게 앞으로 나아간다. 멀어지는 남자의 등을 보며 걸음을 재촉한다.
어둠은 점점 끈끈해진다. 손전등을 켠다. 건전지가 거의 닳았는지 빛이 야무지지 못하다. 빛이 닿는 자리마다 보이는 게 시원찮다. 그래도 남자는 성큼성큼 잘 걷고 있다.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 빛이 닿지 않는 자리를 지날 땐 정말 그럴 것도 같았다. 하지만 남자의 등은 매번 느릿느릿 드러났다. 그때만 잠깐 걸음을 늦추는지도 몰랐다. 남자가 잠깐 사라졌던 자리를 지나간다. 지날 때마다 진동의 간격이 벌어진다. 한쪽에만 꽂은 이어폰에서 나오는 음악도 표정을 바꾼다. 이름 모를 악기가 불쑥 끼어든다.
언제부턴가 뒤에 숨소리가 따라붙는 것 같다. 어쩌면 남자와 나를 노리는 무리일지도 모른다. 슬쩍 돌아보니 보이는 게 마땅찮다.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 고인 어둠이 수상쩍다. 금방이라도 누군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그새 숨소리는 잦아들어 거의 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긴장이나 불안을 가라앉히려고 단말기에서 나오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내 것일 수도 있다.
더는 오를 곳이 없을 만큼 올라왔다. 멀리 야경이 보인다. 뭉쳐 있지 않고 띄엄띄엄 흩어진 빛이 제법 선명하다. 예전보다 빛이 더 많아진 것도 같다. 끄트머리 쪽을 보니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던 빛이 몽땅 사라진 자리도 있다.
“다 올라왔네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남자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남자가 단말기를 켜자 그제야 군데군데 얼굴이 드러난다. 그렇다고 표정이 읽힐 정도까진 아니다. 웃고 있다고 해도 찡그리고 있다고 해도 그런대로 다 믿을 수 있을 만큼만 보인다. 남자는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화면을 들여다본다. 나는 이번에도 지도를 보지 않을 생각이다. 그저 남자가 가는 대로 따라가는 게 낫다. 남자는 내가 지도를 보며 뒤따르는 게 못마땅한 눈치였다. 언젠가는 자기를 못 믿는 거냐고 따져 묻기도 했다. 서로 감정을 망쳐서 좋을 건 없다. 기준에서 벗어나면 누구도 작업에 투입될 수 없다. 그럼 오늘 일당은 받지 못할 것이다.
오는 동안 여기서 꺾어지겠지, 세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겠지, 이제 이 길로 쭉 들어가겠지 했던 짐작은 다 들어맞았다. 앞으로도 짐작은 많이 남았다. 그중 하나만, 딱 하나만이라도 틀리면 된다.
바람이 몸을 핥듯 쓰윽 지나간다. 그사이 발밑으로 뭔가 풀썩거리며 스친다. 아래를 내려다봐도 보이는 건 없다. 시선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도 헛갈린다. 다시 손전등을 켜본다. 빛은 아까보다 더 무르다. 주변을 휘둘러본다. 딱히 눈여겨볼 만한 건 없다. 야경의 불빛이 몇 개 사라졌을 뿐이다.
남자는 여전히 길을 찾을 수 없는 모양이다. 화면을 한 번 보고 고개를 돌리다가 다시 화면을 본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자못 신경질적으로 들린다. 현재 위치가 잘못 표시된 것일 수도 있고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아까 두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야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상하네. 여기가 운교동이 맞긴 한데.”
남자의 목소리에 진동이 강렬해진다. 악기 몇 개는 소리를 죽인다. 화면에 서서히 노란색이 번진다.


방은 예닐곱 명이 누우면 남는 공간이 없을 것 같았다. 그나마 주방을 겸한 거실과 화장실이 따로 있는 게 다행이었다. 방에선 조금만 움직여도 그녀와 부딪혔다. 팔꿈치와 옆구리가 스쳤을 땐 그녀가 흐리멍덩하게 웃었다. 깜짝 놀라거나 눈을 흘기는 것도 지쳐서 나오는 웃음 같았다. 옆방에는 세 명이서도 불편함 없이 산다고 했다. 나는 우리가 언제쯤 방 안에서 부딪히지 않을 수 있을지 짐작해 봤다. 짐작이 더 이어지기 전 그녀가 나를 밖으로 이끌었다. 일단 월세만 보태는 식으로 몇 달만 지내 볼 생각이었다.
그녀와 함께 동네를 둘러봤다. 딱히 정해 놓은 길 없이 무작정 돌아다녔다. 그래서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계속 같은 자리로 돌아왔다. 세 번째로 같은 자리로 돌아왔을 때 평지처럼 보여도 어딜 가나 경사가 있다는 걸 알았다. 어느 방향으로 걷든 결국 하나로 이어진 골목이었다. 처음 본다 싶으면 아까 봤던 식당이 나왔고 뒷길이 낯설어지면 눈여겨봤던 전봇대가 보였다. 그 와중에 큰길로 나가는 방법만은 잊지 않으려고 일부러 여러 번 오갔다. 그제야 골목의 폭이 조금씩 달라진다는 걸 눈치 챘다.
눈을 감고도 큰길에 나갈 수 있겠다 싶을 때쯤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기서부턴 사뭇 다른 동네 같았다. 여기에 문구사가 있었나 싶으면 우체국이 튀어나왔다. 이대로 가다 보면 해변이나 공장지대도 나올 것 같은 길이었다. 느닷없이 동물원이 튀어나온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어둠이 번지자 길은 더 생소해졌다. 괜히 걸음이 빨라졌다. 거의 뛰다시피 걷기 시작했을 때 그녀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표정을 살피기도 전에 목소리부터 들렸다.
“더 가봐야 별거 없을 것 같은데.”
우체국 너머는 도로포장도 제대로 안 되어 있었다. 멀리 주차장 같은 게 보일 뿐이었다. 그나마도 차가 두어 대 세워져 있어서 든 생각이었다. 얼핏 보면 그냥 벌판이었다. 벌판 끝을 가늠하다가 왔던 길을 되짚어 왔다. 내내 말이 없던 그녀는 골목에 들어서자 입을 열었다.
“운교동이 무슨 뜻인 줄 알아?”
“글쎄.”
“구름을 걷는 다리란 뜻이래. 웃기지? 그저 언덕이 많은 동네일 뿐인데.”
“동네 이름을 예쁘게도 지어 놨네.”
“그러게. 누가 내 이름도 예쁘게 지어 줬으면 좋겠다.”
그녀의 이름은 시설의 원장이 멋대로 붙인 것이었다. 원래는 다른 것이었는데 부르기 어렵다는 이유로 바뀐 이름이었다. 이제껏 그녀에게 붙여진 이름은 많았다. 원장이 바뀔 때마다 이름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자기 조카와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나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언젠가는 숫자로 불린 적도 있었다. 이제껏 불려 왔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는 기어이 부모를 찾아내 처음으로 주어졌던 이름을 꼭 알아낼 거라고 했다.


주말엔 무늬 없는 벽지로 도배를 했다. 그녀가 직접 고른 벽지였다. 나는 너무 밋밋하다고 툴툴거렸다. 그녀는 무늬가 화려하면 더러워져도 안 보여 찜찜하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보니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배를 마치고 나선 화분을 크기별로 사다가 세워 놓았다. 아무것도 심을 게 없는데도 그랬다. 언젠간 뭐라도 심을 생각이었지만 헤어지기 전까지 쭉 빈 화분이었다.
청소는 그녀가 거의 도맡았다. 그녀가 청소로 종일 쌓인 감정을 누그러뜨린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어느 날은 그릇을 죄다 꺼내 다시 씻고 이불까지 빨아 널었다. 오늘 밤 덮고 잘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리진 못했다. 평소보다 훨씬 더 강한 모멸과 수치 같은 게 있을 거란 짐작이 앞섰다.
감정 스캔이 가능해지면서 그녀의 입장은 좀 달라지는 듯했다. 종일 웃으면서 상냥한 목소리를 내는 게 얼마나 고된 노동인지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을 하기 전보다 모욕이나 슬픔, 불쾌가 높아진 감정진단서를 센터에 제출했다. 하지만 뚜렷한 외상이 아니라면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게다가 꼭 일할 때 생긴 감정이라고 단정 짓긴 어렵다고도 덧붙였다. 사원을 뽑을 때 유쾌함이나 긍정이 높게 나온 사람을 우선 선발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입사 후에도 센터에서는 건강한 감정을 가진 사원을 강조하며 수시로 감정 스캔을 실시했다. 센터에서 말하는 건강의 기준은 그녀의 생각과 좀 달랐다. 그때마다 복종심을 따로 스캔해 본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단말기는 회사에서 지급한 것이었으므로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소문을 들은 누군가가 사원에게도 매니저의 감정진단서를 공개하라고 요구했지만 허사였다.
고객이 모욕을 줬을 때 바로 감정을 스캔할 순 없었다. 어쩌면 고객도 그 자리에서 감정을 스캔할지도 몰랐다. 그러곤 객관적인 불쾌감을 센터에 제출할 것이었다. 그러면 그녀는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었다.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감정을 스캔해 보자는 건 그녀의 생각이었다. 다른 점원이 손님에게 “그 나이 먹도록 마트에서 냄비나 파는 주제에……”라는 말을 듣자마자 뒤에서 재빠르게 감정을 스캔했다. 그사이 그녀는 손님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계속 말을 붙였다. 결과에는 유쾌함이 조금 높게 나왔다. 이상하다 싶어 한 번 더 스캔했을 땐 연민이 새로 등장했다. 그녀는 그것이 손님을 향한 것인지 자신을 향한 것인지 긴가민가했다.
냉장고 청소까지 마친 그녀는 내 옆에 누웠다. 그녀의 감정 스캔 결과를 건너다봤다. 묽어지긴 했어도 여전히 모멸과 수치가 단단히 버티고 있었다. 마지막 결과에는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사랑 1%였다. 1%의 감정이 다른 모든 감정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때까지 사랑은 나에게 한 번도 나오지 않은 결과였다. 내 표정을 살피던 그녀는 돌아누웠다. 그사이 실망이나 분노 수치가 좀 높아졌을 것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일어섰다. 그사이 그녀의 몸에 조금도 닿지 않았다. 한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부딪히지 않을 수 있었다.


모자를 벗는다. 누군가 머릿속에 바람을 불어넣는 것만 같다. 머리를 짧게 잘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발밑에서 일렁이던 바람은 벌떡 일어나 몸을 덮친다. 몸이 우수수 떨린다. 키득거리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리다가 조금씩 가까워진다. 귓가에 거의 다다랐을 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파고든다.
“거봐, 별수 없지?”
이어지던 웃음은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멈춘다. 예전에도 비슷한 웃음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첫 작업에 나갈 때였다. 나는 신발을 벗고 들어섰다. 곧 비명이 솟구쳤다. 울퉁불퉁하다가 이내 물렁해지는 무언가를 밟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무심히 “뭐 하러?” 하고는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안전화에 덧신을 신은 채였다. 방 안에 발자국이 남아선 안 됐다. 아무도 침입한 흔적이 없어야 했기 때문이다. 장갑을 끼고 모자를 쓰는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지문이나 머리카락은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었다. 남자가 덧신을 신지 않고 작업장에 들어설 경우는 하나뿐이었다. 그럴 땐 모자나 장갑도 착용하지 않았다. 도구도 간단했다. 어떨 땐 망치 하나만 들고 나서는 남자를 본 적도 있었다. 세입자를 완전히 제거하고 건물을 밀어버리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그런 현장에 투입된 적은 없었다. 일당이 더 세서 탐나긴 했지만 소장은 나를 내보내지 않았다. 소장이 말하는 때는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한동안 발뒤꿈치를 들고 지칫거렸다. 신발에 비닐봉지를 씌우고 나서야 겨우 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한 달째 수도가 끊겼으니 사방에 오물이 넘쳐났다. 특히 변기나 싱크대 근처는 악취가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근처로 한 발자국씩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악취는 내 콧속에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남자는 내가 코를 감싸 쥘 때에도 키득거렸다. 그땐 차라리 조금이라도 빨리 악취에 무뎌지는 게 낫다는 걸 몰랐다.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 근처에 있는 건 확실하다. 군내가 풍긴다. 사무실에서보다 더 지독해진 것 같은 군내다. 그래도 작업장에서 나는 악취보단 낫다. 아무리 씻어도 악취는 빠지지 않았다. 거기에 건물 한쪽이 무너지면서 번지던 먼지까지 엉겨 붙었다. 서너 번 샤워를 해도 꺼림칙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제 좀 괜찮아졌나 싶으면 어느새 또 악취가 번졌다. 여기저기 킁킁거려 봐도 어디서 나는지 알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머리카락에서 난다는 걸 알았다. 냄새는 머리카락 사이사이 단단히 쌓여 있었다. 여러 번 감아도 깊숙이 고인 것까지 끄집어낼 순 없었다. 물이 닿으면 두피 아래에 숨어 있다가 마르는 순간 다시 기어 나오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제야 일하는 사람들이 왜 모두 짧은 머리를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저 험악한 인상을 풍기기 위한 것인 줄만 알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현장에 머리카락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짧은 머리가 편했다. 남자는 뭐든 미리 일러주는 법이 없었다. 몸에서 냄새와 먼지가 잘 안 빠진다는 말도 낄낄거리며 흘려들을 뿐이었다.
눈앞에서 화면이 켜진다. 남자의 얼굴이 드러나는가 싶더니 금세 사라진다. 멀리서 화면이 다시 반짝인다. 한 바퀴 도는가 싶더니 또 꺼진다. 한참이 지나 바로 옆에서 남자 얼굴이 환해진다. 말을 걸 틈도 없이 멀어진다. 아까보다 더 먼 곳에서 빛이 보인다. 너무 멀어서 남자의 것인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남자가 아니라면 빛을 낼 사람은 없다. 남자와 내가 찾는 건물 말고는 사람이 살지 않는 동네이다.
아무래도 그쪽으로 오라는 신호인가 싶어서 몸을 튼다. 가방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청소 도구끼리 부딪히는 소리일 것이다. 세입자는 끌려 나간 게 아니라 보상금을 넉넉히 받고 제 발로 걸어 나간 것이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방 안이 정갈해야 했으므로 빗자루나 쓰레받기 정도는 가져가야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남자는 따로 청소 도구를 챙긴 것 같지 않다. 청소는 또 내게만 맡길 모양이다. 빛이 있던 쪽으로 걸음을 떼려는데 다시 컴컴해진다. 가만히 서서 여기저기 반짝이는 화면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어둠에 얼룩처럼 작은 빛이 생겼다 스며들고 다른 자리에 또 생긴다. 남자는 내 주위를 돌면서 길을 찾고 있는 것 같다. 아직 내가 아는 쪽으론 가지 않았다. 한동안 어떤 불빛도 보이지 않는다.


문을 열면 일단 불부터 껐다. 그러면 악취와 소음이 동시에 몸을 부풀렸다. 이때다 싶어 진득한 액체를 뿌려대는 사람도 있었다. 고작 간장이나 식초였다. 좀 더 독하게 맘을 먹은 사람은 고춧가루를 뿌리기도 했다. 뒤에는 어김없이 프라이팬을 들고 있는 사람이 버티고 있었다. 그럴 때 나는 남자의 밋밋한 얼굴만 보려 애썼다. 그러면 모든 게 다 헛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시적으로 감정이 흐트러질 수 있어 단단히 주의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때만 잘 넘기면 작업은 수월해졌다. 남자는 시범을 보이듯 쿵쾅거리며 앞으로 달려갔다. 그쯤이면 식칼을 들고 있던 사람이라도 주저앉았다. 남자는 한 손에 세입자의 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남자는 작업할 때 피 묻히는 것을 질색했다. 뭐든 피가 묻으면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텔레비전이든 매트리스든 냉장고든. 피가 묻어서 좋을 건 없었다. 세입자를 끄집어내고 난 다음에도 작업은 끝나지 않았다. 중고시장에 내놓을 것을 물색하는 것부터가 진짜였다. 가끔은 일당보다 더 짭짤할 때도 있었다. 남자와 나는 이런 식으로 소장 몰래 이득을 챙겼다. 오래 전부터 이런 물건만 따로 맡는 업자가 있었다. 업자는 형태가 온전하고 오물이 덜 묻을수록 값을 잘 쳐줬다. 하지만 야간작업에서는 괜찮은 물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분명 세입자를 곱게 끌어냈다고 생각했는데 냉장고 여기저기 피가 묻어 있었을 때도 있었다.
며칠 동안 야간작업이 이어지는 날이면 누군가 잡아끄는 것처럼 몸이 늘어졌다. 바닥에 늘어져 있으면 그녀는 까슬까슬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차피 나갈 거 깔끔하게 나가면 너도 덜 힘들 텐데.”
나는 그녀 쪽으로 얼굴을 파묻으며 대답했다. 절반쯤은 웃음에 뒤섞여 농담 같은 대답이었다.
“그러면 내가 할 일이 없지. 내쫓는 게 아니라 아예 없애는 작업이 더 쉽대. 돈도 더 많이 주고. 난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그런 작업까진 나가지 마.”
그때 그녀의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늘어졌던 몸이 곧추세워지는 기분이었다. 혹시나 싶어 감정을 스캔해 봤다. 기대하던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멀리 불빛이 다가온다. 또 남자인가 싶은데 불빛의 형태가 좀 다르다. 요란한 엔진소리가 바람에 섞인다. 불빛이 거의 나를 덮칠 만큼 커졌을 때 오토바이 한 대가 바짝 비껴간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불빛 하나가 쌩하니 지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 불빛에 예전에 자주 드나들던 골목이 슬쩍 드러난다. 손전등으로 훑었을 때는 닿지 않던 곳이다. 남자는 아직 못 본 것 같다.
골목 입구가 완전히 드러난 순간 오토바이가 멈춘다. 누군가 내려 뭔가를 싣는다. 거기까지만 알 수 있을 뿐 뭘 싣는지 몇 살쯤 먹은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헬멧이 지나치게 크다는 것까지 봤을 때 남자의 목소리가 울린다.
“여기네, 여기! 어우, 도통 뭐가 보여야 말이지.”
남자는 화면을 세차게 흔든다. 그쪽으로 가려는데 공중인 듯 걸음이 뒤틀린다. 몇 걸음 더 내디뎌 보지만 다부지지 못하고 내내 겉돈다. 건물 꼭대기가 눈에 들어온다. 건물 아래는 누군가 지워 놓은 것처럼 검다. 시선이 뒤틀린다. 한 걸음도 떼기가 어렵다. 고공에 뜬 사람처럼 허둥댄다. 몸에 닿는 건 아무것도 없다. 조금만 몸을 틀어도 그녀와 닿을 것만 같은데 그럴수록 손에 잡히는 건 없다. 어느 순간 남자가 어깨를 친다. 내가 남자에게 밀려간 건지 남자가 내게 온 건지 헛갈린다.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남자인 줄도 몰랐을 것이다.
“손전등은?”
손전등을 켜보니 허약하던 불빛마저 스르르 사그라진다. 여분 배터리는 아껴 뒀다가 현장에 가서 써야 한다. 남자는 화면에서 나오는 불빛을 바닥에 비춘다. 그럭저럭 쓸 만한 빛이다. 남은 길은 그걸 따라가야 할 것이다. 그새 야경이 좀 엉성해졌다. 골목 안으로 들어서니 그마저도 보이지 않는다.
앞서 가는 남자가 빛을 다 막고 있다. 바닥을 딛는 소리로 남자와의 거리를 가늠한다.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면서도 너무 떨어지진 않도록 걸음을 조절한다. 적당한 거리가 유지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용케 넘어지진 않는다. 휘청거리거나 어딘가에 부딪히는 건 남자이다. 나는 어디에 전봇대가 있는지 쓰레기를 어디에 쌓아 두는지 다 알 것 같다. 짐작은 매번 맞아떨어진다. 아무래도 그 골목이 맞는 것 같다. 이대로라면 현장에 도착했을 때 기준 감정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남자가 말이라도 걸어 주면 좀 나을 것 같다. 목소리를 낮춰 말을 걸어 보는 게 낫겠다. 그때 남자가 먼저 말을 꺼낸다. 뒤돌아 얘기하는 것처럼 선명하다.
“오늘은 모자랑 장갑 벗고 들어가도 돼.”
“……왜요?”
“세밀하게 작업할 필요 없어. 무연고자야. 무슨 말인지 알지?”
돌연 음악이 바뀐다. 진동의 리듬도 변한다. 화면을 보니 오묘한 색이 나오고 있다. 너무 많은 색이 뒤섞여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색이다.
“건질 만한 물건은 없겠어. 그래도 일당이 두 배쯤 될 거야.”
입술을 달싹여 보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곧 새로 스캔한 결과가 뜬다. 기타 감정이 7%로 늘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허공을 딛고 있었다. 내 감정은 환멸이 절반을 넘어섰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벌거벗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누군가 조금만 밀면 그대로 굴러 떨어질 것 같은 몸이었다. 몸 안에서 어떤 짐승이 맹렬하게 울고 있었다. 울음소리가 내 쪽으로 달려드는 동안 할 말을 골랐다. 그사이 울음은 날카로운 경보음으로 변했다. 그녀의 단말기를 살펴봤다. 그사이에도 경보음은 멈추지 않았다. 슬픔이 83%였다. 거기에 증오가 9%, 경멸이 6% 섞여 있었다. 순간 그녀와 나는 감정을 감추려는 사람처럼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옷을 다 챙겨 입은 그녀는 내가 붙잡을 틈도 없이 달아났다. 금방이라도 손목을 낚아챌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면 감정은 슬픔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채워질 것이었다. 사랑이나 기쁨 같은 게 아니더라도 적어도 슬픔은 안정적인 수준까지 떨어질 줄 알았다. 슬픔이 덜어진 자리엔 뭐가 고여도 괜찮았다.
골목이 꺾이는 순간마다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정말 사라진 건가 싶었지만 방향을 틀면 여지없이 뒷모습이 일렁였다. 큰길에서 건물로 들어오는 골목은 점점 좁아지는 형태였다. 이제 더는 좁아질 수 없을 것 같을 때쯤 방으로 들어가는 쪽문이 나왔다. 그러니 쪽문에서 나가는 길은 반대로 점점 넓어졌다. 그녀와 나는 아직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골목에 있었다. 골목 안은 경보음으로 빼곡했다. 내가 기대하는 건 반대 방향에서 누군가 나타나는 것뿐이었다. 마주 선 사람과 실랑이하는 동안 그녀는 멈출 것이었다. 하지만 큰길에 나올 때까지 반대편에서 나타나는 사람은 없었다. 그사이 거리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 그녀는 우뚝 멈춰 섰다. 예전에 동네를 돌아봤을 때 더 가봐야 별거 없을 것 같다던 자리였다. 그녀는 슬며시 뒤돌아보는 듯했다. 나는 감정 결과를 확인했다. 정확한 결과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이제껏 왜 그녀를 따라왔는지 헛갈렸던 기억만은 선명했다. 그녀도 감정 결과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한동안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던 그녀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그러더니 아까보다 더 빠르게, 멈춘 만큼 더 나아갈 생각인 것처럼 뛰었다. 나는 누가 꽉 움켜쥐고 있는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흘러나오던 경보음은 언제부턴가 멈춰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확인한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방에선 혼자 움직여도 자꾸 어딘가에 부딪혔다. 서랍장에 무릎이 부딪혔고 돌아서면서 행거에 머리를 찧었다. 몸에 멍이나 긁힌 상처가 늘어 가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새 그녀와 부딪혀서 생긴 자국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자 문득 내가 남아 있어서 들어오지 못하고 있을 거란 생각에 휩싸였다. 다음날 짐을 챙겨 나갔다.
방을 떠난 후부터 알 수 없는 감정이 스며들었다. 그때부턴 결과에 빠지지 않고 기타가 나왔다. 겨우 잦아들다가도 다시 스캔하는 순간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다 보니 새로 일을 찾는 건 어려워졌다. 몇몇 업체에서는 대놓고 기타 감정에 대해 따지듯 물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거나 같이 일하기엔 부적절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내쫓겼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소장은 이력서를 받자마자 뒤에 붙어 있는 감정진단서부터 훑어봤다. 소장의 표정은 조금 뒤틀렸다. 평균보다 높은 긴장과 불안 수치 때문인 것 같았다. 여전히 기타로 분류된 감정 때문일 수도 있었다. 여러 업체를 전전하다 받아 주지 않아 왔다는 것을 쉽게 알아챘을 것이다. 소장은 나 같은 사람을 싼값에 부려먹었다.
“나쁘지 않은 진단서네.”
그 말에 불안이나 초조가 좀 더 높아진 것 같았다.
“일당은 온전히 줄 순 없어. 알고 온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표정을 살피던 소장은 이런 일을 해도 원래 가지고 있던 감정이 크게 달라지진 않을 거라고 했다. 옆에 선 남자는 뒤에 꺼끌꺼끌한 웃음을 섞어 말했다.
“미칠 것 같다고 하는 사람들만 득시글하지. 정작 미친놈은 드물어.”
소장은 헛기침을 보태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감정 상태를 수시로 체크하는 거지.”
남자를 힐끗거리던 소장은 자세를 고치며 말했다.
“여기선 스캔할 수 없는 감정이 있어도 상관없네. 적어도 감정이 없는 사람은 아니란 거지. 모든 감정의 합이 100%가 안 되는 사람이 더 골치 아프거든.”
나는 뒤로 조금 물러났다. 소장은 그만큼 앞으로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사람들은 죄다 예의가 없지. 대체 한 사람 때문에 몇 명이 고생하는지 몰라. 적어도 우리는 안에 들어갈 때 덧신이라도 신지. 걔네들은 자기네 방인데도 신발 신고 버티고 있어. 그게 무슨 뜻이겠어?”
어느새 나는 벽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소장은 새삼스레 내 얼굴을 힐끔거렸다. 그게 신호가 된 것처럼 남자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나가야 할 방이라는 거 알면서 버티는 거지. 계속 거기서 살고 싶다는 말 다 개소리야. 결국 돈 뜯어내려는 수작일 뿐이지. 원래 가난한 것들이 더 길길이 날뛰는 법이야. 돈이 없으니 주기적으로 감정 측정을 할 수 없고 그러니 조절할 수도 없지. 길거리에서 함부로 고함지르고 웃고 떠드는 것들은 다 그런 사람들이야. 매일 감정을 체크하면서 조절하는 중산층은 그러지 않지.”
나는 소장에게 따지고 싶은 게 있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괜히 가난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진 않았다. 입술을 깨물어 봤지만 옆구리 쪽이 묵직해지면서 날선 목소리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 작업을 시작하면 스캔은 물론 감정 조절 기능까지 있는 단말기가 무료로 지급되니까. 좀 지켜보다가 때가 되면 제대로 된 일당을 받을 수 있는 작업에도 투입시켜 주지. 그땐 미리 얘기해 주지 않는 게 낫겠지? 괜히 긴장하거나 겁먹으면 곤란하니까.”
소장의 말에 남자는 나를 보며 한쪽 입가를 슬쩍 올렸다.


남자의 목소리가 떨린다. 잘 따라오고 있느냐고 묻는 간격은 골목처럼 점점 좁아진다. 다닥다닥 붙은 낮은 건물이 이어진다. 창문 틈으로 빛이 새어 나오기도 하지만 골목을 밝힐 정도는 아니다. 겨우 건물의 윤곽 정도만 알 수 있다. 어쩌면 아직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더 있는지도 모른다. 이 건물이어도 괜찮고 다음 건물이어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남자는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양쪽에 늘어선 건물 사이는 줄기차게 좁아진다. 터덕터덕 바닥을 딛는 소리만 도드라진다. 소리가 멀어지면 걸음을 재촉하고 가까이에서 들리면 천천히 걷는다. 아직 남자와 부딪히지 않았다.
갑자기 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가느다란 목소리로 남자를 부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남자가 방향을 꺾을 때 놓쳤을 수도 있다. 어디서 엇갈렸는지 따져 보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걸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평평한지 울퉁불퉁한지도 알 수 없는 바닥이 소리를 다 먹어치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눈을 부릅뜬다. 남자의 윤곽이라도 보며 따라가야 한다. 몇 걸음 떼지 않아 무언가와 부딪힌다. 남자가 짧고 굵은 비명을 내지른다. 부딪힌 게 남자의 등인지 가슴인지 팔인지 알 수 없다. 오늘 밤 작업할 건물에 다 온 모양이다.
“여기야.”
남자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린다. 숨소리까지 또렷하다. 남자는 단말기를 눈앞에 내민다. 눈이 부셔서 화면에 나타난 글씨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긴장이나 흥분이 일정 수치 이상 나오면 일을 할 수 없다. 소장은 법적 기준을 넘어선 감정으로 일하면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긴다는 걸 마지막 주의사항으로 넣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어느 정도 기준에서 벗어나는 건 눈감아 줬다. 단속업자에게 주기적으로 뒷돈을 쥐어주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도 기준에서 너무 멀어져 버리면 손쓸 방법이 없었다. 기준에 맞추는 게 버거운 사람들이 모인 업체였다. 그러니 일하는 날에는 감정 조절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다들 약물을 투여하면 감정이 쉽게 잡힌다는 걸 알았지만 꺼렸다. 여전히 약물은 거의 일당과 맞먹을 만큼 비쌌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복제약이 나돌았다. 복제약에는 중독성이 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감정 스캔은 일을 마칠 때까지 주기적으로 이뤄졌다. 진행 상황을 감안해서 불안이나 두려움 같은 기준 수치가 조금씩 달라졌다. 중간에라도 감정이 허용 범위를 넘어서면 즉시 일을 중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면 일당의 절반도 받을 수 없었다. 끝까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선 긴장을 놓쳐선 안 됐다. 지금 내 결과는 여전히 아슬아슬하다. 일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돌아가야 할 수도 있다. 남자 혼자서 작업하기엔 무리다. 둘 다 일당을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일당을 못 받는 건 상관없지만 감정 조절이 안 되는 사람에게 또 일이 주어질지는 알 수 없다. 이 도시만 해도 감정이 정확하게 표준에 맞춰진 구직자들이 차고 넘쳤다.
해가 뜨기 전에 끝내야 하는 작업이다. 감정을 조절할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남자가 우물거리면서 손을 내민다. 두툼한 손바닥 위에 반으로 쪼개진 알약이 있다. 나는 남자의 얼굴을 힐끔거리고 다시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색과 음악에 몰두한다. 가장 높은 비율을 나타낸 것은 설렘이다. 정말 설레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이제 와서 정말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 건지도 알 수 없긴 마찬가지이다. 어쨌든 작업을 하려면 설렘을 3% 아래로 떨어뜨려야 한다. 누르스름한 색과 끊어질 듯 계속 이어지는 선율이 온몸을 감싼다. 호흡을 조절하는 사이 남자의 손이 가면처럼 내 얼굴을 뒤덮는다. 호흡이 가빠지고 뺨이 눅눅해진다. 그때 입술 사이로 뭔가 덜그럭거린다. 날카로운 면이 입천장을 긋고 그대로 식도를 타고 넘어간다. 쪼개진 알약이다. 나는 남자를 향해 눈을 부라린다.
“오늘 작업 망칠 셈이야?”
남자의 목소리에 몸이 늘어진다.
감정이 겨우 기준에 맞춰진다. 남자는 늦어진 작업이 불만인 눈치이지만 아무 소리 하지 않는다. 다잡은 감정이 흐트러지면 작업을 할 수 없다. 문을 열어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힐끔거린다. 끈적끈적한 어둠이 고인 안쪽과 쿡쿡 찔러대는 악취와 뭔가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차례차례 마주한다. 돌연 코끝이 날아가는 것처럼 맵고 시리다. 일단 손전등에 배터리부터 넣는다. 그사이 남자는 도구를 챙긴다. 나는 감정이 기준을 벗어날까 봐 시선을 틀고 호흡을 조절한다.
쪽문 안으로 들어선다. 구조가 익숙하다. 이것만으론 확신할 수 없다. 주변에 있는 건물은 한꺼번에 똑같은 모양으로 지어졌다. 그러니 옆 건물이나 앞 건물일 수도 있다. 그때 줄 맞춰 늘어서 있는 화분이 눈에 들어온다. 여전히 아무것도 심지 않았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길게 울린다. 몸이 약간 기운다. 평평한 것처럼 보여도 희미한 경사가 이어진다. 이미 기계로 건물을 조금 밀어낸 모양이었다. 그게 마지막 경고였다. 처음에는 폭죽을 터뜨리거나 문 앞에 오물을 두는 정도로 가벼웠을 것이다. 그래도 나가지 않으면 창을 깨거나 새벽에 문을 두드렸다. 그다음에는 전기와 수도를 끊었다. 대부분 이쯤에서 며칠 못 버티고 떠났다. 이제껏 내가 맡은 작업은 대부분 이 정도였다. 모두 밤에 이뤄지는 작업이었다. 낮에는 격렬하게 몸싸움을 하고 그들이 던지는 거라면 뭐든 받아내야 했지만 밤에는 숨소리를 죽이고 사뿐사뿐 움직여야 했다.
그래도 해결이 되지 않으면 소장은 용역들을 몰아붙였다. 그때 지시하는 게 불을 내는 것이었다. 건물의 한쪽 귀퉁이만 타도록 내버려둔 다음에 적당할 때 불을 꺼야 하는 작업이었다. 시간을 못 맞추면 안에 있던 사람들이 질식사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불이 번지기 전에 꺼버리면 아무 소용 없었다. 안쪽에서 비명이 들리는 순간은 감정 조절에 특히 조심해야 했다. 자칫 작업만 다 해놓고 일당은 못 챙길 수도 있었다. 그래도 버틴다면 건물을 조금 기울였다. 밖에서 보면 티가 나지 않지만 안에서는 확연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다음 지시를 내릴 때면 소장은 알약을 한 움큼 집어 삼켰다. 새벽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끄집어내라는 지시였다. 그중 무연고자가 있다면 완전히 제거하는 게 원칙이었다. 그래야 다음에 맡을 작업이 수월해졌다. 용역이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소문은 어둠보다 더 넓게 이 도시를 뒤덮었다.
남자는 덧신을 신지 않고 들어선다. 남자를 따라 깊숙이 들어서자 더운 바람이 얼굴에 끼얹혀진다. 악취가 칼날을 품고 스멀스멀 몰려온다. 더 깊이 파고들기 전 숨을 멈춘다. 숨을 내뱉자 한껏 날을 세운 악취가 한꺼번에 달려든다. 악취는 머리를 팽팽하게 잡아당긴다. 그사이 비린내 같은 게 희미하게 번진다. 헛기침을 하는 사이 남자는 방 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돌아다닌다. 씹어 뱉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내가 여전히 발뒤꿈치를 든 채 머뭇거리는 걸 봤을 수도 있다. 화면으로 눈을 돌린다. 안정감이 조금 높아지고 긴장이 수그러든다.
바닥을 딛을 때마다 요란한 소리가 퍼지는 것 같다. 게다가 미끄럽기까지 하다. 뭐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양팔을 벌려 균형을 잡아 보지만 신통찮다. 남자와 달리 내 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그사이에도 남자는 더 깊이 파고든다. 어두워서 그런지 방은 한없이 웅숭깊어 보인다. 그녀와 살던 방보다 더 넓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소장에게선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다. 감정은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때 무릎이 뭔가에 부딪힌다. 아무래도 서랍장인 것 같다.
방에는 아무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다. 어쩌면 방이 기울기 시작한 날 바로 짐을 챙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오늘 작업은 싱거울 것이다. 소장 말대로 소주 한 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화장실에서 쇠꼬챙이 같은 비명이 들린다. 비명은 어둠을 반으로 갈라놓고 끊어진다. 비명이 들리는 쪽으로 움직이고 싶지만 방향을 가늠할 수 없다.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우는 사이 남자가 씩씩거리면서 나타난다.
“작업이 좀 복잡해졌어.”
남자는 내게 눈짓한다. 나는 남자의 시선을 따라 몸을 움직인다. 손전등에서 흘러나오는 빛으로 벽부터 훑는다. 생각보다 벽이 훨씬 가까이 있다. 화려한 벽지 무늬가 드러난다. 짐작하는 방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 걸음 더 들어서니 바닥이 끈적거린다. 신발에 무언가 달라붙어 걸음이 엉킨다. 남자는 숨을 고르며 어기적거리고 있다. 그쪽으로 손전등을 내려놓는다. 묽던 빛이 바닥에 닿자 선명해진다. 아무래도 바로 굴삭기를 불러 건물을 싹 밀어버려야 할 것 같다. 그사이 눈에 어둠이 완전히 익은 듯하다. 내부가 조금씩 드러난다. 내가 나올 때와 그다지 변한 게 없다. 벽지 무늬는 화려한 게 아니다. 무늬처럼 피가 튄 것이다. 벽지가 원래 어떤 무늬였는지 알 것 같다. 이러니 피가 선명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한쪽 얼굴이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 든다. 비명만으로는 그녀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나는 한 번도 그녀의 비명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안으로 들어간 남자는 몸뚱이 하나를 어깨에 짊어지고 나선다. 어두워서 그런지 꼭 그림자를 짊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그녀가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녀가 이사를 갔을 수도 있고 여전히 방에 돌아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사이 새로운 세입자가 살고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떨어져 있는 동안 가족을 찾진 않았을까. 내 감정을 읽은 것처럼 남자가 나를 빤히 노려본다.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은데도 표정을 알아볼 수 없다. 남자가 내 쪽으로 조금 더 걸어온다. 어둠에 파묻혀 남자의 몸은 절반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자 남자가 다가오는 것인지 멀어지는 것인지 헛갈린다. 그럴수록 그림자는 점점 형태를 갖춰 간다.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얼굴도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다. 곧 남자와 그림자가 겹쳐진다. 그림자는 벽 속에 스며든다. 남자를 찾아 사방에 시선을 던진다. 방 안에 켜켜이 쌓인 물건이 눈에 들어온다. 남자 말대로 오늘은 건질 만한 물건이 없겠다. 업자는 헐값에 사려고 할 것이다. 바닥뿐만 아니라 가구나 텔레비전에도 피가 튀었다. 그때 단말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귓속을 들쑤신다. 언제부터 울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걸음을 뗄 때까지도 경보음은 멈추지 않는다.
화면을 끈다. 음악과 진동도 차단시킨다. 소장의 격앙된 목소리가 뚝 끊긴다. 방 한쪽에 벌거벗은 채 몸을 웅크리고 있는 짐승이 보이는 것 같다. 이제껏 뭐 때문에 콧김을 내뿜고 으르렁거리는지 알 수 없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건 오로지 내 몫이 된다. 어느새 악취가 무뎌진다. 곧 방 안 전체가 뒤흔들린다. 벌써 남자가 굴삭기를 불렀는지도 모른다. 내 몸은 버티지 않고 흔들림에 맞춰 리듬을 탄다. 그사이 아무것에도 부딪히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희미하게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전석순 소설가
작가소개 / 전석순 (소설가)

- 2008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회전의자」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2011년 장편소설 『철수 사용 설명서』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다. 장편소설로 『거의 모든 거짓말』이 있다.


《문장웹진 2016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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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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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익명

    감정단말기, 참 좋은 발상이군요. 그렇게 시대가 달라져도 70년대 개발 때와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생각하면 희망이 없네요....

    • 2016-11-01 09:19:23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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