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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초상화 이야기

  • 작성일 2016-09-01
  • 조회수 3,247


[단편소설]



초상화 이야기



김휘



초상화를 체포하란 말인가. 풀어 놓는 이야기가 하도 황당해서 듣는 내내 노파를 뜯어봤지만, 정신이 온전한지 아닌지 섣불리 판단할 수 없었다. 노파는 고령에도 발음이며 언어구사력은 어눌하지 않았다. 내가 손목시계에 눈을 주면서 "초상화를 체포하란 말인가요." 하고 웃자, 노파는 고개를 저었다.
"체포하란 소리는 아니고. 초상화가 범인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어요. 지금 형사 양반도 내 말을 믿지 못하니까 웃고 있는 거 아니오. 초상화가 범인인 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 사건은 해결 안 나. 결국 엄한 사람이 범인으로 몰리거나 미제사건으로 남겠지. 그렇다고 무턱대고 초상화가 범인이니까 체포하겠다고 하면 송 형사만 바보가 될 테고."
"그러니까 할머니 말씀은 저더러 어쩌라는 겁니까."
"몇 번을 말해야 하나. 초상화를 내게 달라는 거 아니오. 사례금도 드리겠다고 했잖아요."
제보할 것이 있다는 말에 순순히 응한 내가 경솔했다. 제보란 일주일 전 발생한 방화 살인사건에 대해서였다. 사건 발생 팔일째, 불이 난 여배우 장미라의 자택에서 노인 시신이 발견된 것 말고는 자살인지 타살인지 화재 발생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진 게 없었다. 장미라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추측만 난무했다. 타죽은 노인이 누구인가를 두고 장미라의 성장 과정에 대한 불분명한 정보에 기대어 빚쟁이일 거다, 장미라의 생모일지 모른다 같은 가능성도 제기됐다.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장미라의 행방을 쫓는 데 중점을 두는 것 말고 매달릴 만한 게 없던 차였으므로 '제보' 소리만 들어도 귀가 솔깃했다.
노파가 말했다.
"귀추가 다 장미라 행방에만 쏠려 있지 어차피 그 초상화에 관심 갖는 사람은 없잖아요. 일전에 화재 현장 근처에 갔었어요. 경찰이 깔려 있어서 가까이 가보지도 못했죠. 담당 형사니까 상황 봐서 초상화를 빼오는 건 어렵지 않을 텐데 말이야."
커피집 안은 소나기로 축축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노파는 기침이 잦았는데 떨리는 손에 쥔 손수건으로 입가를 찍는 모양새가 초조해 보였다. 그런가 하면 입을 오물거리며 말을 이을 때는 미끼를 하나씩 던지면서 상대의 반응을 간 보는 사람처럼 눈빛과 어조에 교활한 데가 있었다. 이 노파를 만난 건 두 시간 전이었다.
나는 사건 발생 이후 며칠째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풀릴 기미 없는 사건 수사에 목이 조였다. 게다가 머릿속에 차오르는 잡념은 견디기 힘들었다. 아내 때문이었다. 아내는 낮부터 늦은 저녁까지 집으로도 핸드폰으로도 연결되지 않았다. 세차게 내리꽂는 비를 창밖으로 멍하니 바라봤고, 생각다 못해 나는 동료에게 몸살 핑계를 대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집 앞에 다 와 갔을 때 노파가 나타났다. 지팡이를 쥔 노파는 검은 우산을 든 채 골목길을 막아서고는 "송기석 형사지요?" 하고 물은 뒤, 대뜸 제보할 게 있다고 했다.
커피집에 들어와 마주 앉자마자 노파가 던진 질문은 뜬금없었다. 사고 관련 기사를 검색하다가 SNS 블로그 기사에 뜬 구체적인 내용을 봤다면서 초상화 이야기를 불쑥 꺼낸 것이다.
"화재 현장의 방바닥 타일이나 벽지는 물론 의자나 탁자까지 아주 참혹하게 다 탔다던데 벽에 걸린 그림만 손상이 없었다고요? 그게 사실인가요?"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떠올려 보니 그랬던 것 같았고, 사건 현장에서 누군가가 그림에 대해 하는 말을 들은 듯했지만, 의미를 두지 않았다. 마지못해 나는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노파는 의뭉스런 시선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결정적인 단서를 놓치고 있어요.” 하고 말했다. 내가 웃으면서 그 단서가 뭐냐고 묻자, 노파는 주위를 한번 살피고는 고개를 내 쪽으로 당겼다.
"그 초상화가 살인범이에요."
나는 노파의 얼굴을 살폈다. 노망든 노파를 상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스친 것이다. 거동도 불편한 노파가 나를 어떻게 알고 집 앞까지 찾아왔는지도 내키지 않았는데, 이어서 노파가 수상한 요구까지 해오자 나는 의자 등받이에 기댔던 상체를 세웠다. "범인이 초상화라는 것이 제보의 전부야."라면서 누구도 이 제보를 곧이듣지 않을 테니 다짜고짜 초상화를 자신에게 빼내 달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표정을 가다듬고 초상화를 빼낼지는 초상화가 범인인 이유를 들어 보고 판단하겠으니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설명해 보라고 추궁 모드로 대응했다. 캐보면 생각지 못한 단서를 얻을지 모른다는 계산이 스친 것이다. 노파의 반쯤 열린 입술에서는 쌕쌕 소리가 들렸다. 무슨 궁리를 하는 것일까. 노파는 망설이는 기색을 비치더니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형사 양반, 장미라는 도망가 잠적한 게 아니야. 초상화를 불태워 없애려 하다가 그 현장에서 불타 죽은 거라니까. 그 노인 시신이 바로 장미라라고. 불을 지른 순간 실제 장미라와 초상화 속 장미라 모습이 뒤바뀐 거야."
노파는 입술 사이로 기침소리 섞인 가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러고는 아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들어 보니 영화나 소설 속에 나올 법한 비현실적인 내용이었다. 나는 노파의 말을 잘랐다.
"이걸 제보라고 하시는 겁니까. 생각해 보세요. 지금까지 어르신이 하신 이야기, 모두 지어낸 이야기라고 해도 어르신은 아니라고 증명할 방법이 없는 겁니다. 이게 어디 현실적으로 가능한 얘깁니까. 그 노인 시신이 장미라라는 얘기도 그렇고요."
"아니지. 증명할 방법이 왜 없나."
노파는 DNA 검사가 있지 않으냐면서 몇 개 안 남은 치아를 보이며 웃었다. 이 또한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장미라는 잦은 스캔들과 나이를 거스르는 동안 미모로 신문연예란에 등장하곤 했다. 염문설 뒤에는 보란 듯이 큰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고, 사회봉사 관련 행사에 홍보대사로 위촉됨으로써 이전의 퀴퀴한 소문과 이미지를 지웠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성장하는 배우로, 놀랍도록 젊어진 모습으로 시선을 끌었다. 현재 나이 58세. 그녀의 동안에 혀를 내두르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최근 유명 영화제 시상식에 나와 수상소감을 말하던 그녀는 20세 때 신인 시절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 그녀가 불에 타죽은 바로 그 노인 시신이라니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형사 양반, 부탁해요. 초상화를 빼내 줘. 나는 빨리 젊어져야 해. 젊어지고 싶다고. 살고 싶다고."
노파의 목소리가 커피 잔 내려놓는 소리에 실려 금속성으로 들렸다.


*


아내는 남자가 있다. 전화 통화 상대가 남자인 게 분명한데 누구냐고 물으면 학교 친구, 어떨 때는 아는 동생이라고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런 식의 대답에는 맡고 싶지 않아도 맡게 되는 냄새라는 게 있다. 그 냄새가 일상에 균열을 만들었고, 나는 묻고 싶은 게 늘었다. 다그쳐 묻지는 않았다. 의처증 환자로 오해받을 수 있었다.
나는 아저씨였다. 열세 살 연상인 나를 아내는 연애 시절부터 그렇게 불렀다. 그 호칭은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다. 그걸 나는 문제 삼은 적은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아저씨라는 호칭은 몸에 맞지 않는 외투처럼 느껴졌다. 이제 오십 중반. 동료들 사이에서 소심하지만 성실하고 우직한 게 장점이라는 칭찬 같지 않은 모호한 평을 듣는 나. 십 년 전은 고사하고 일 년 전과 비교해도 확연히 늙었다. 손질이 필요 없는 스포츠머리는 정수리와 이마 쪽으로 하얀 서리가 내려앉았고 탄력을 잃어 축 처진 피부는 얼굴선을 무너뜨리며 거미줄 같은 잔주름을 이마와 눈가에 퍼뜨렸다. 형사 생활을 하면서 다반사로 터지는 골치 아픈 일들에 나는 그렇게 마모되고 소모됐다.
처음엔 아내가 변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우울해하던 아내가 얼굴 몇 군데를 성형하고 싶어 했을 때만 해도 그랬다. 아내는 코와 턱을 고치더니 이후 다이어트 프로그램과 몸매관리에 효과적이라고 소문난 요가원을 찾아다니며 몸매 가꾸기에 공을 들였다. 그즈음이었나. 나를 대하는 태도가 부자연스러워진 건. 내 직감이 사과라도 단번에 자를 만큼 날카로워지기 시작한 시점 말이다. 아내의 건조하고 어색한 미소 속에서, 말과 말 사이에 끼어든 심해 같은 침묵 속에서 나는 아내에게 남자가 있다고 느꼈다. 그런 순간들은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곡예 하듯 내게 왔다.
아내는 내가 떠보는 말에 둘러대는 솜씨를 발휘했다. 그 솜씨는 날이 갈수록 발전했고, 나의 직감도 예민해졌다. 결국 내가 못 참고 사사건건 살피며 물어본 게 잘못이었는지 모른다. 아내는 그나마 지켰던 선마저 무시하기 시작했다. 집 안에서도 남자와 통화를 했다. 거리낌이 없었다. 그 남자가 아내보다 서너 살쯤 연하라는 것과 에이스라는 닉네임으로 불린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될 정도였다.
아내는 내가 맡았던 살인사건의 미망인이었다. 의지처가 없었던 그녀는 나를 아저씨라고 불렀고 나의 계속된 구애에 미지근하게 반응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청혼을 받아들였다. 나는 아내가 원하는 것, 약속해 달라고 요청한 것 모두 들어주고 싶었으므로 내 삶을 아내 위주로 바꾸어 살아왔다. 그렇게 위했던 아내에게 무시당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맨정신으로 설명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랬다간 한순간 나는 무너질 테니까. 이젠 살의가 솟을 때가 많아졌다. 내 머릿속에는 칼들만 많아졌다. 우습게도 그것들은 죄다 무딘 날을 가진 칼들이다.


*


노파가 들려준 말들이 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나는 시간만 낭비했다고 자책하며 카페를 빠져나왔다. 노파는 이틀 뒤, 경찰서 앞으로 또 날 찾아왔다. 내가 화를 내며 따돌려 버리자, 삼일 뒤 다시 집 근처에 나타나 초상화를 빼내 주면 사례금을 섭섭지 않게 주겠다는 말을 또 했다. 노파가 제시한 금액은 첫날 제시한 것보다 컸다. 도시 외곽에 적지 않은 평수의 브랜드 아파트를 사고도 남을 돈이었다. 돈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지만, 사람이 무언가에 쫓겨 현실감각을 상실하면 말로 못할 장담이나 약속이란 없는 것이므로 나는 더는 노파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단지 이해할 수 없는 건 초상화가 뭐기에 노파는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가였다. 초상화는 평범한 물건이었다. 화재로 인한 손상이 거의 없었다는 것 말고는 장미라의 신인배우 때 모습을 그린 그림이라는 것, 검은색 금속으로 두텁게 마감된 액자틀에선 오래된 물건에서 풍기는 기품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정도 시선을 끌 뿐이었다. 때문에 처음 만난 날 노파가 그 초상화에 악마가 깃들어 있다고 속삭였을 때 웃음이 나오는 걸 겨우 참아야 했다.
"선물 받게 되면 초상화 뒷면 액자틀에 자신의 이름을 남겨야 한다오. 일종의 서명날인을 하는 셈이지. 액자틀이 금속으로 되어 있으니 날카로운 송곳으로 이름을 파야 해요. 다 새기면 그 음각 서명에다 뜨뜻한 피를 떨어뜨려요. 그러고 나면 초상화는 비로소 그 피 주인의 얼굴로 바뀌게 되는데, 소유자가 된 이후엔 매달 음각 서명에 피를 공양하는 의식을 지켜야 한다오. 이런 규칙과 과정을 다 듣고도 젊어지고 아름다워지고 싶어 초상화를 원한다면, 또 들은 내용을 믿고 은밀히 지킬 수 있다면 초상화 선물을 수락하는 거요."
노파가 세 번째 찾아왔을 때, 나는 자리를 먼저 뜨는 척하고는 숨었다가 노파 뒤를 밟았다. 지팡이를 쥔 노파는 천천히 걸었고, 불안과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내를 미행했을 때와 달랐다.
한껏 치장한 아내는 걸음이 빨랐고,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길 때의 표정은 곧 있을 만남에 대한 기대로 상기되어 있었다. 에이스는 젊고 매력적인 남자였다. 예상한 대로였다. 가까운 거리에서 확인하니 그가 어깨가 넓은 다부진 체격과 백팔십은 족히 넘는 훤칠한 키를 가졌으며 세련된 옷차림이 제 피부인 양 잘 어울리는 남자인 걸 알 수 있었다. 신장이 백육십팔 정도에다 땀에 찌든 와이셔츠와 잠바때기 하나 걸친 나 같은 중늙은이 사내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에이스와 마주 앉은 아내는 행복해 보였다. 내가 지금껏 보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사랑에 빠져든 사람의 표정이란 게 저런 거구나 싶었다.
노파가 담 높은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자, 나는 곧바로 주민센터를 찾았다. 경찰 신분증을 제시하며 협조를 요청해 그 집 주소에 누가 거주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노인은 없었다. 90세는커녕 70대 노인도. 어떻게 된 일일까. 대신 십 년 전 광고모델로 잘나가던 여성 앵커 백송이 씨가 그 집 소유자라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노파는 백송이 씨와 어떤 관계일까. 노파는 그 집에 잠시 들른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그 집 앞 골목에 몸을 숨긴 채 노파가 출입문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들른 것이라면 몇 시간 안에 문 밖으로 나올 거였다. 시간이 갈수록 출입문은 앙다문 입처럼 나를 지치게 했다. 동료로부터 전화를 받고 경찰서로 돌아갈 때까지 노파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아내는 또 밤 2시를 넘겨서 들어왔다. 은빛 중형차 조수석에서 내린 아내가 에이스와 포옹하는 모습을 나는 베란다 창문으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내는 주방에서 물을 잔에 따라 들이켠 뒤, 내게 물었다.
"아직 안 자고 있었네? 뭐야. 나 기다린 거야?"
아내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따라 들어가 옷장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요즘 어때? 행복해?"
아내는 블라우스에서 팔을 빼다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내의 눈빛에 나는 바싹 마른 낙엽이 누군가의 발에 밟혀 부스러지듯 내 존재가 으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


노인 시신은 장미라였다. 노파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국과수에서 도착한 DNA 검사 결과가 그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장미라를 용의자로 보고 추적했던 수사의 방향은 수정이 불가피했다. 검사 결과를 접한 수사팀원의 표정마다 시침과 분침을 잃어버린 문자반 같았는데, 거기다 대고 노파가 들려준 이야기를 팀원들에게 재방송하며 놀랍지 않으냐고 흥분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을 사람은 없었다.
나는 노파가 한 말들을 떠올리며 두근거리는 심장소리에 귀 기울였다. 낯선 세계로 통하는 숨겨진 통로를 나만 알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며칠째 잠도 오지 않았다. 초상화를 손에 넣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그럴수록 두려움도 커졌다. 몸을 떨 정도였는데, 초상화가 미끼를 던지고 기다릴 줄 아는 교활한 생명체인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기 때문이었다.


두려웠지만 오지 않을 수 없었다. 두려움과 욕망은 한편이 되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거대한 짐승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으로 나는 폴리스라인이 쳐진 장미라의 집 현관 안으로 몸을 들였다. 가시지 않은 탄내와 짙은 어둠이 나를 감쌌다. 거실을 지나 작고 노란 손전등 빛으로 앞을 가늠하며 이층 드레스룸으로 올라갔는데, 걸을 때마다 사방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싹한 느낌에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사건 발생 초기에 현장 조사를 위해 여러 차례 왔지만, 밤에 혼자 오기는 처음이었다. 불에 탄 흔적이 고스란한 드레스룸은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나는 그림 앞에 멈춰 섰다. 손전등으로 그림 구석구석을 비췄다. 사각 액자 안에 장미라가 거만한 자세로 들어앉아 있었다. 20대 초반 신인배우 시절의 모습이었다. 내가 이곳에 나타나길 기다렸다는 듯 오만하고 자극적인 미소를 물고 있었다. 초상화 얼굴을 바라볼수록 주위의 공기가 차가워지면서 노파가 들려준 이야기들이 귓가에 되살아났다.
“내 말이 헛소리로 들리나 보군요. 그 안에 악마가 살아요. 악마는 자신의 얼굴이 없지. 수시로 바뀌는 소유자의 모습을 하고 있죠. 악마는 초상화를 소유한 사람의 말을 따르는데, 말만 하면 악마가 초상화 주인이 원하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갖게 해준답니다. 이 초상화는 아주 나이가 많은데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요.
최초로 이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는 알 수 없어요. 설만 무성하지. 단 이 초상화는 시간처럼 끝없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는 거죠. 여러 세기 동안 젊음과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수많은 사람을 거쳤거든. 믿거나 말거나지만 놀라지 말아요. 영원한 젊음을 원했던 클레오파트라도 이 그림을 소유했답니다. 역시 웃는군요. 이해해요. 제정신으로 이런 이야기 믿기 힘들 거예요. 아무튼, 알다시피 클레오파트라는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진주를 녹여 마시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별별 방법을 동원했던 인물인데 그 초상화를 소유했다는 게 뭐 이상한 일도 아니지. 결국, 뱀에 물리면 영원한 젊음을 얻는다는 전설을 믿고 뱀에 물려 사망한 여자잖아요. 아! 오스카 와일드도 그 초상화를 소유했지요. 그 작가에 대한 기록엔 드러나 있지 않지만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라는 유명한 장편소설은 그 초상화에서 받은 영감으로 완성된 겁니다. 그러니까 그 소설은 오스카 와일드의 전적인 상상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소리예요.”
장미라의 젊고 고혹적인 모습에서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볼은 살아 있다는 착각이 들 만큼 발그레하게 홍조를 띠었는데, 만지면 부드럽게 피부 결이 느껴질지 몰랐다. 물기 어린 흰자위를 떠다니는 검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며 속삭이는 듯했다.
나를 가져. 나를 가져.


*


내가 자는 작은 방 벽에 초상화를 기대 놓고 바라봤다.
'노인이 초상화에 대해 한 말이 사실이라면…… 시험해 봐야겠어.‘
나는 그림을 돌려 뒷면을 살펴보았다. 검은색 금속으로 두텁게 마감된 액자틀 뒷면은 매끈한 앞면과 달리 우둘투둘하고 지저분한 얼룩이 가득했다. 눈을 가까이 대어 보니 액자틀 좌우 위아래에 파인 글자들이 빼곡했는데 놀랍게도 그건 노파가 말한 음각 서명이었다. 노파 말마따나 아주 오래된 물건이어선지 마모되어 무슨 글자인지 못 알아볼 정도로 흐려진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음각된 이름마다 남아 있는 검붉은 얼룩이었다. 한눈에 나는 핏자국인 걸 알아챘다. 그 얼룩들을 시선으로 훑어 내렸다. 이 흐릿한 서명들과 검붉은 핏자국 중에 클레오파트라와 오스카 와일드의 것도 있다는 노파의 말이 사실일까. 그 외에 어떤 이들이 이것을 소유했을까. 상상할수록 머릿속으로 까마득한 우주가 펼쳐졌고, 이 흐릿하고 어지러운 흔적들이 자기들끼리 은밀한 암호를 속삭인다고 느껴졌다.
이윽고 나는 서랍을 뒤져 송곳을 찾아들고 액자 앞에 앉았다. 숨을 몰아쉰 뒤, 송곳을 손에 꼭 쥐고 액자틀 뒷면 빈 곳에 내 이름을 팠다. 송기석. 손바닥이 땀으로 끈적거렸다. 나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른 뒤 송곳을 쥐고 마저 더 깊고 선명하게 팠다. 이제 노파가 한 다른 말도 사실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손끝에 소독 솜을 막 대려는 순간이었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하는 목소리가 내 안에서 들려왔다. 칼까지 준비해 놓고 나는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가. 내가 미친 건 아닐까.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혈서를 쓰려는 사람처럼 비장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래 이건 가벼운 실험일 뿐이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칼을 들어 손끝에 상처를 냈다. 스윽 붉게 배어 나오는 핏방울을 음각 서명에 떨어뜨렸다. 두 눈을 의심했다. 파인 홈이 입술이 오물거리는 것처럼 움직이며 피를 흡수하는 게 아닌가. 나는 거듭 침을 삼키며 액자틀을 만져 보았다. 분명히 단단한 금속이었다. 금속이 스펀지가 물을 먹듯 핏방울을 빨아들인 것이다. 지체 없이 초상화를 세워 앞면으로 돌려 보았다.
초상화 속 인물은 바뀌어 있었다. 현재의 나였다. 이것이 과연 실제인가. 나는 그림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요? 왜 그렇게 넋을 놓고 있는데?”
아내가 물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림을 슬며시 벽 쪽으로 돌려놓았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뭐야, 대체, 그거."
아내는 내 손에서 그림액자를 낚아채고는 그림 정면이 앞으로 오도록 돌려놓았다.
"당신 모습이네. 진짜 똑같은걸. 누가 그려 준 거야?“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누가? 별일이네. 이봐 아저씨. 지금 맡고 있는 사건이 안 풀리니까 한가하게 그림 모델로 나선 거야. 웃겨. 아주 누드모델로 나서지 그래요."
아내는 재미있다는 듯 웃음소리를 뿌리고는 방에서 나갔다. 나는 아내가 사라진 방문을 바라보았다. 가슴 속에서는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왔다. 나는 초상화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젊어지고 싶어. 젊어지고 싶어.'


초상화에서 변화를 감지한 건 보름 뒤였다. 그 사이 장미라 방화사건은 미제사건으로 처리되었다. 사라진 초상화에 대해서는 얼마간 수사팀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크게 문제되지 않고 넘어갔다. 나는 노파가 또 찾아오면 시치미 떼고 초상화를 빼내는 일이 불가하다고 말할 작정이었다. 노파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나는 잘 된 일이라고 여겼다. 그 섬뜩한 노파를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나는 막 발생한 다른 사건에 배치되어 사건 현장을 돌며 증거 확보에 집중하고 있었다.
탐문수사를 마친 뒤 나는 동료와 근처 국밥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동료가 수저를 입에 넣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요즘 좋은 일 있나 봐? 대체 뭐야? 얼굴이 훤해졌어. 이마에 자글자글했던 주름도 안 보이고, 피부도 탱탱하고. 거참 해괴하네."
나는 남은 국물을 그릇째 들어 마시면서 "훤해지긴. 사람 싱겁게 밥 먹다가 별소릴 다 하는군." 하다가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동그래진 눈을 동료의 웃음기 묻은 얼굴에 고정한 채 움직일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옷장 속에 숨겨 둔 초상화를 꺼냈다. 보자기를 풀어 그림을 살펴보았다. 방 안의 불빛 때문인지 초상화 속 얼굴은 처음 봤을 때와 달랐다. 흰머리가 더 많아졌고, 눈가와 이마에 주름이 짙어진 것이다. 나는 옷장 문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 보았다. 대조의 효과 때문일까. 국밥집 화장실에서 거울을 들여다봤을 때와 느낌이 달랐다. 오! 이럴 수가. 나는 눈을 비볐다. 동료 말마따나 내 얼굴은 말끔해진 게 사실이었다. 초상화와 반대로 이마의 주름이 옅어졌고, 피부도 탄력이 느껴졌다.
'초상화가 정말 나 대신 늙고 있는 건가.'
기쁨이 솟았다. 아직은 주름이 옅어지고 흰머리가 줄어든 정도지만 기대라는 게 생긴 것이다. 빠른 시간 안에 젊음을 되찾게 될지 몰랐다. 기왕이면 매력적으로 젊어지기를 원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느꼈다. 바보들이나 할 짓을 해볼 참이었다. 초상화 주인이 원하는 대로 젊음과 아름다움을 갖게 해준다는 게 사실인지 실험해 보고 싶었다.
인터넷에 접속해 젊은 남성들의 사진을 모니터에 띄웠다. 케이, 와이, 에프…… 저런 외모로 다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한두 번쯤 생각했던 배우, 가수, 모델들이었다. 모니터 가득 뜬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닮고 싶어. 닮고 싶어.'
이틀 뒤, 나는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가 동료로부터 회춘하는 약을 밀수해 먹는 건 아니냐는 말까지 들었다. 동료는 손가락으로 내 옆구리를 찔러대며 눈을 찡긋거렸다.
"아무래도 자네 수상하다니까. 점점 멋있어져. 이 피부 좀 봐. 비결이 뭐야."
"비결은 무슨. 난 모르겠는데. 별소릴 다 듣겠군."
난 그렇게 얼버무렸지만, 입가에 미소가 피어나는 것을 느끼며 세면대 거울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다음날 인터넷 뉴스 창에서 믿을 수 없는 소식 하나를 접했다. 보이 그룹 멤버인 아이돌 스타 에프가 지난밤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오토바이 사고였다. 나는 모니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다음날에는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벽걸이 티브이에서 뮤직차트 1위를 달리고 있는 케이가 해외 공연 도중 열광한 여성 팬이 던진 술병에 머리를 맞아 중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에 이어 또 이틀 뒤에는 모델 출신 배우 와이가 스턴트맨의 도움 없이 고난도의 액션 장면을 시도하던 중 사망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저녁 무렵 사무실에서 사건 파일을 검토하다가 집어 든 신문에서였다. 나는 이마가 시리도록 식은땀을 흘렸다.
’틀림없어. 이건 악마의 짓이 분명해. 초상화 때문이야. 난 그들의 불행을 원한 적이 없다고. 아냐. 아냐. 이건 우연일 뿐이야. 나 때문이 아니라고. 아 빌어먹을…….‘
모두 퇴근한 적막한 사무실 안을 한 번 더 살핀 뒤, 나는 안쪽 파티션에 걸린 거울 앞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거울 속 얼굴을 보는 순간 내 안에 어떤 변화를 감지했다. 긴장과 두려움이 내게서 사라진 것이다. 대신 흡족함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거울 속 남자는 며칠 전보다 더 매끈하고 근사하게 보였다. 분명히 나였지만, 이전의 늙수그레하고 볼품없는 몰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뚫어지게 거울 속을 들여다보다가 알아보았다. 거울 속 내 모습에는 에프, 케이, 와이에게서 부러워했던 젊음, 그리고 그들 외모의 매력적인 일면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는 것을.


*


아내 뒤를 밟았다. 에이스에게 아내를 만나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매력적으로 젊어진 뒤로 자신감이 솟았다. 두 사람이 마주 앉은 테이블에서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아 그들을 주시했다. 창 넓은 레스토랑 홀은 시야가 시원할 정도로 넓었으므로 기둥 뒤의 내 위치가 눈에 띌 염려는 없었다. 아내는 내가 유도한 대로 급한 전화를 받고 막 자리에서 일어나 레스토랑을 나갔다. 혼자 남겨진 에이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더니 서빙 직원에게 마시던 커피 잔에 리필을 주문한 뒤, 스마트폰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에이스를 향해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내 발소리가 심장소리와 겹쳐지는 한순간 나는 멈춰 섰다. 창가의 햇빛 한 줄기가 그의 머릿결을 긋고 있었는데, 언젠가 보았던 아름다운 그림을 마주한 듯했다. 우두커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에이스. 먼발치서 엿보고 막연히 상상했던 그가 다른 느낌으로 내 감각에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계속 다가간다면 나는 그가 존재하는 저 그림 속으로 녹아들지도 몰랐다. 이윽고 호흡을 가다듬고 그에게 다가갔다. 오래전 친구를 우연히 만난 것처럼 그의 어깨를 쳤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밝히고 경고하려던 생각을 까맣게 잊은 채 연기를 시작했다.
세 번째 만났을 때, 에이스와 나는 그의 침대 위에 함께 있었다. 두 사람 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에게 스며든 것이다. 나는 나도 몰랐던 내 안의 나를 만났다는 흥분에 사로잡혔다. 내 안의 나는 에이스의 눈빛과 표정과 목소리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에이스는 내게 이렇게 속삭였다. "거대한 미지의 행성과 부딪친 것 같아. 넌 내 영혼을 가져가 버렸구나.“ 그건 내가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우리는 거울을 보듯 서로를 바라봤다.
체조선수 출신인 에이스는 방향을 요가로 돌린 뒤 요가원을 운영하면서 뷰티요가를 아이템으로 앱 프로그램 개발까지 계획 중인 젊은 사업가였다. 내면으로의 여행이라고들 말하는 요가의 영향일지 모르겠다. 에이스는 젊은 나이이지만 이백 살 먹은 인도 노인의 초탈한 미소와 깊은 시선을 지녔다. 그의 그런 분위기는 쉽게 상대의 마음을 여는 힘이 있었다. 요가원을 다니던 아내가 그에게 처음 마음을 뺏긴 건 어떤 순간이었을까.
아내는 내가 에이스를 만난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아내에게 초조해하는 기색이 드러나기 시작한 건 그와 내가 만난 지 보름도 못 가서였다. 아내는 스마트폰을 손에 든 채 몇 시간째 누군가에게 통화를 시도했다. 연결되지 않는 모양인지 표정이 회색빛이었다. 내가 거실에서 신문을 보다가 "무슨 일 있어?" 하고 무심히 묻자, 아내는 신경질적으로 "상관 마. 티브이나 봐요." 하고는 큰 소리를 내며 방문을 닫아걸었다.


음각 서명을 한 뒤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 내 안의 숨어 있던 불안의 목소리였을까. 피 공양 의식을 어기면 도로 늙어버린다는 노파의 이야기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늦은 저녁 막 들어온 집에 아내는 없었다. 나는 옷장 속에서 초상화를 꺼냈다. 초상화 얼굴의 눈가와 이마와 미간에 주름 선들이 뚜렷해진 걸 알 수 있었다. 순간 불쾌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초상화 얼굴의 표정이 잔인하고 섬뜩하게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사악해진 초상화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나는 그림을 돌려 뒷면이 위로 가도록 바닥에 엎어 놓았다.
나는 손끝에 칼로 상처를 내 소주잔 반 잔 분량쯤 피를 담았다. 서명의 파인 틈 사이로 한 방울 두 방울씩 천천히 떨어뜨렸다. 내 이름 송기석 세 글자는 오물거리며 떨어지는 핏방울마다 흡수했다. 볼수록 신기하고 섬뜩했는데, 서명의 파인 틈 사이로 붉은 혓바닥과 가지런한 흰 치아가 보일 것만 같았다. 쓰레기통 안과 방바닥 여기저기 피 묻은 솜과 티슈들이 그득했다. 상처를 내는 과정에서 출혈이 심했고 지혈하는 데 애를 먹었던 탓이다. 그래도 피 공양이라는 의식을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은 컸다. 그 안도감은 희열로 바뀌었다. 거울 속 내 모습은 살이 쏙 빠진 데다 낯빛이 창백했지만, 더 젊고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순간 에이스와 일전에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술이 한두 잔 들어갔고, 얼근히 취한 나는 입이 근지러웠다. 초상화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물론 그대로 말하지는 않았고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언급하면서 이야기에 변형을 가해 상상인 척했다. 에이스는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이 변한다니 재미있는 상상인걸. 사실 초상화라는 거 의미심장한 물건이지. 자신의 아름다운 한순간의 모습을 박제하듯 사각 캔버스 안에 가둬 넣은 거잖아. 거기까지는 일반적인 의미의 그림일 뿐이지. 한데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란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그런 신비한 힘이 있는 초상화라면 섬뜩하겠는걸. 대신 늙어 주고 대신 죄의식을 흡수해 주는 초상화라. 마치 금연 공익광고처럼 처음에는 멋지고 폼 나게 담배 피워 무는 미남 미녀를 보여주다가 뒤에 가서는 그들의 썩어들어 가는 시커먼 폐를 보여주는 식이잖아. 그 시커먼 폐가 대신 늙고 죄의식으로 추악해진 초상화인 셈이거든.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라고 말할 때 그의 목소리가 낮고도 은밀해졌고, 촉촉해진 눈가가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그게 유혹적인 거란 말이지. 메피스토의 혓바닥만큼이나 유혹적인 거야. 죄의식이나 양심과 같은 내면적 굴레와 노쇠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거잖아. 욕망이란 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말이야, 거래의 흥정에서 불리하고 치명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어. 위험한 걸 알면서 거래를 한단 말이지."
"그런 초상화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내가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렇게 질러 물었다. 에이스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설마 그런 게 있겠어."
"설마 했다가 맙소사를 외치게 되는 일 많잖아. 안 그래?"
에이스는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뽑아 입술 끝에 물었다.
"하긴, 소설이나 영화에 나올 법한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는 세상이니 모르는 거겠지. 아무튼 말이야, 만약 그런 게 있다면 대박이겠지."
에이스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길게 빨았다.
"대박이라고?"
"당연히 대박이지. 대신 늙어 주는 대체물이라는 게 있다면, 연구해서 원인과 원리를 알아내면 되는 거야. 신비스러운 건 없어. 단지 우리가 그 뒤에서 작동하는 태엽장치의 원리를 모를 뿐이야. 보톡스도 처음엔 얼마나 신비했어. 주름 없애고 피부 탱탱하게 만들고, 그걸 그전엔 상상이나 했겠냐고."
그는 입가에 미소를 물고는 쉬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동안 치료 프로그램이나 안티 에이징에 주력하는 기능성 화장품에 대해, 보톡스 같은 약물에 대한 수요가 얼마나 끝이 없는지 설명했는데 내가 중간에 끼어들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자신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의 설명을 듣다 보면 그 초상화가 지닌 신비한 현상이란 것도 과학적으로 분석 가능하고 자본 창출에 유용한 아이템으로 정리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초상화가 있다면 게임 끝이야. 안 그래? 그야말로 떼돈을 버는 거라고. 어떻게 그런 신비스런 효과를 내는지 원인 분석하고 연구해서 대량생산을 할 수 있게만 된다면 말이야.“
그때 그가 꺼냈던 ’대량생산‘이란 말은 아직 내 귀에 매달려 있었다. 대량생산이라니. 사업가인 에이스의 머리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그의 말마따나 그런 초상화가 상품으로 개발만 되면 게임 끝일 게 분명했다. 젊음과 아름다움을 상품화하는 비즈니스 분야에서 일거에 혁명이 될 테니까. 에이스는 그런 초상화의 대량생산화가 현실화된다면 돈만 있으면 그걸 누구나 소유하게 될 것이고, 사람들은 그들이 사랑하게 된 연인이 이십 세인지, 백 세인지 이백 세인지 알 수 없게 될 거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혐오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 순간 나는 온몸이 찰나적으로 얼었다가 해동된 듯 차갑고도 뜨거운 느낌 속에서 헤매야 했다. 나는 거울 속 젊은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느낌을 애써 지웠다.


*


아내는 내가 에이스의 침대에 있을 때 들이닥쳤다. 나와 에이스를 번갈아 보던 아내는 소리를 지르며 내 이름을 불렀고, 이윽고 울부짖으며 달려 나갔다. 아내는 차도에서 달려오는 차를 피하지 못해 즉사했다. 아내의 장례를 치르고 보름 뒤, 나는 에이스를 찾아갔다. 에이스가 그리웠고, 내가 그녀의 남편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에이스와 나의 관계가 깨질까 봐 전전긍긍했다. 시간도 없었지만, 사고 이후 그녀의 남편인 내가 어떻게 그와 연인이 될 수 있었는지 아직 나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했다. 그래서 에이스에게 달려오는 동안 나는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궁리했다. 늘 만나던 카페에서 우린 마주했다. 다행히 에이스는 처음에는 황당해했지만, 나의 해명을 가로막지 않고 들어주었다. 단, 그는 내가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커플인 것 같다고, 그녀가 어떤 문제로 내게 냉담을 보인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에 대한 설명을 피했다. 더는 아무것도 털어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를 향한 그의 눈빛이 어색하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할 뿐이었다. 그런데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에이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나저나 상 치르느라 고생해서 그런가. 그사이에 어떻게 이렇게 늙어버린 거야? 맙소사. 아까 봤을 때 말이야, 몰라볼 뻔했어. 누가 보면 우리가 부자지간인 줄 알걸."
나는 화장실로 가 세면대 거울을 보았다. 비명을 지를 뻔했다. 나는 늙어버렸다. 어떻게 된 일인가 생각하는 순간 깨달았다. 매달 지켜야 할 피 공양 의식을 놓친 것이다. 아내의 장례식 때문에 경황이 없었다. 나는 에이스에게 급한 일이 있었는데 깜박했다고 핑계를 댄 뒤, 집으로 달려갔다.
옷장에서 그림을 꺼내 보자기를 풀었다. 초상화의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파릇하게 젊어진 얼굴은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나는 순간 내가 추격하던 흉악범에게 무기를 빼앗기고 되레 숨이 차도록 쫓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칼을 찾아들었다. 주저 없이 손가락에 상처를 냈는데 허둥대서일까. 상처는 생각보다 컸고 피는 소주잔에 담기도 전에 너무 많이 흘려버렸다. 상처에서 피가 계속 배어 나왔다.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손이 떨렸다. 잔에 담긴 피를 음각 서명에 한두 방울씩 떨어뜨렸지만 스며들지 않았다. 잔에 남은 피를 부어버렸다. 음각 서명은 토라져 입을 꼭 다문 것처럼 피를 삼키지 않았다. 피는 액자틀 밑으로 뚜르르 흘러 방바닥에 싯붉은 피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오, 안 돼!‘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노화는 빨라질 것이다. 멈춰야 한다. 그러려면 초상화를 가능한 한 빨리 넘기는 수밖에 없을 텐데. 그런데 누구에게? 나는 그 생각으로 며칠 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음식도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을 정도였는데 노파를 겨우 떠올리고서야 답답했던 명치가 거짓말처럼 뚫리는 것 같았다. 그 노파라면 초상화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이 건네주기만 하면 된다. 잘하면 사례금까지 받아낼 수도 있다. 문제는 노파를 어디 가서 찾느냐는 것이다.
복잡하게 궁리할 것 없이 그 백송이 씨 집에 가서 직접 확인해 보고 다음 방법을 찾아도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가능성 하나가 스쳤다. 왜 그 생각을 미처 못 했던 걸까. 백송이 씨가 그 노파일 수 있지 않나. 내 경우에 비추어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만약 이 추론이 맞는다면 노파는 초상화를 소유한 적이 있다는 얘기가 된다. 나는 인터넷에서 백송이의 사진을 검색해 모니터에 띄웠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노파의 얼굴을 떠올렸다.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을 사실로 인정하는 데는 사진 몇 장이면 충분했다. 두 얼굴을 하나로 꿰어 놓은 바늘머리처럼 코 옆의 까만 점을 발견한 것이다. 노파는 그러니까 현재 그 집에 살고 있었다.


문이 열린 건 초인종을 일곱 번쯤 간격을 두어 눌렀을 때였다. 이십대로 보이는 여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내가 백송이 씨를 만나러 왔다고 계시냐고 묻자, 여자는 어두운 얼굴이 되더니 머뭇댔다. 재차 만나고 싶다는 나의 말에 여자는 마지못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셨어요."
나는 순간 무릎이 흔들렸다. 정신을 수습하고 언제, 어떻게 돌아가신 거냐고 캐물었다. 여자는 돌아가신 건 한 달 전이고, 급성 폐렴을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고, 어떤 관계냐는 내 물음에는 자신은 백송이 씨의 딸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백송이 씨가 몇 차례 찾아와 초상화 이야기를 하며 초상화를 사건 현장에서 빼내 달라고 부탁한 사실을 들려주고는 백송이 씨가 초상화를 소유했느냐고 슬그머니 떠봤다. 딸은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억지로 불러내는 듯 입술을 꾹 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백송이 씨가 초상화의 소유자였다는 내 짐작은 맞았다. 그게 십 년 전의 일이었고, 그 초상화 덕분에 젊어지고 아름다워진 그녀는 뉴스앵커 출신 광고모델로 인생의 전성기를 달렸다. 하지만 그녀는 초상화의 피 공양 의식을 놓친 뒤로 빠른 속도로 늙어 갔다. 초상화의 새 소유자를 찾지 못한 상태로 시간만 흘려보낸 것이다. 그사이 노화는 백송이의 신체를 끔찍한 속도로 허물어뜨렸다. 그녀가 초상화의 새 소유자를 만난 건 실제 나이 오십오 세였지만 팔십 세 정도의 노화가 진행됐을 때였다. 급격한 노화로 사람들 앞에 나서길 꺼리던 그녀는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한층 부풀어 오르는 젊음과 생에 대한 욕망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그 끔찍한 초상화를 다시 손에 넣고 싶어 했을 때는 악몽이 되살아날 것 같았다고 딸은 우울한 얼굴로 회상했다. 딸은 내 질문에 답을 다 한 뒤, 거대한 철문을 슬그머니 닫아걸었다. 닫힌 철문 앞에서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빨리 젊어져야 해. 젊어지고 싶다고. 살고 싶다고.” 노파의 말이 들려왔다. 그 말은 이제 나의 절규가 되었다. 나는 늙어 가는 중이다.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남은 걸까. 초상화를 넘겨야 한다. 그런데, 누구에게? ■






소설가 김휘

작가소개 / 김휘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학교 철학과 불어불문학을, 동 대학원에서 불문학을 공부했다. 200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등단작인 중편소설 「나의 플라모델」을 통해 “젊고 역량 있는 신인, 한국 소설의 신영토를 개척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펴낸 책으로 장편소설 『해마도시』, 『퓨어바디』와 소설집 『눈보라 구슬』 등이 있다. <2015 아르코 주목할 만한 작가 창작지원>대상으로 선정되어 창작지원금을 받았다.


《문장웹진 2016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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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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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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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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