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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캐치볼

  • 작성일 2016-08-01
  • 조회수 5,605


[단편소설]



캐치볼



김남숙



나는 공원에 앉아 있었다. 그것은 내 오랜 습관이었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눈꺼풀 사이로 그리고 눈꺼풀 자체가 마치 얇은 복숭아 껍질이라도 된 것인 양 햇살을 완전히 빨아들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햇살이 어느 때보다 좋았다. 비가 온다고 했는데 여간해서 비 소식이라곤 보이지 않는 날의 연속이었다. 나는 실눈을 뜨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강렬한 햇빛에 시야가 흔들렸다. 여름 햇빛은 자주 죽어 있는 사물들을 성큼성큼 다가오는 사람처럼 보이게 하곤 했다. 누군가 멀리서 운동장을 가로질러 나에게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어차피 누군가 나타나 어깨를 툭 치며, 오래 기다렸냐는 말 같은 걸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나는 이제 그런 걸 기다리지는 않았다.
나는 딱 한 번 누군가를 좋아했다. 그는 지금쯤 일흔은 족히 먹었을 것이었다. 그는 피부에 불이 붙은 것처럼 다른 사람들보다 뜨거운 체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매일 제 열에 못 이겨 뜨겁게 열이 오른 광대뼈와 콧등을 비비적거리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만났을 때 처음으로 온몸이 데워졌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늘 식어빠진 국 같은 내가, 제 온도에 얼어 죽는 모습이나 상상하던 내가, 처음으로 따뜻한 체온을 가진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의 따뜻한 체온이 좋았다. 나는 지금도 그가 입을 굳게 다물고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비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면 가끔씩 온몸이 활활 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그는 말하자면 높은 체온을 몸 안에 잘 간직하고 있는, 털이 무성한 작은 개 같았다. 몸속을 헤집듯이 돌고 있는 냉기 때문에 며칠 잠을 자지 못한 날에도 그만 옆에 있으면 나는 길 위에 있다가도 꾸벅 꾸벅 잠을 잘 잤다. 나는 그런 그가 나의 필요에 의해서도 내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 소식 때문인지 공원엔 사람이 없었다. 떠돌이 개나 고양이들이 의류수거함이나 큰 트럭 밑에 모여 있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공원이 비워진 느낌이 들 때면, 의자나 잘 보이는 나무기둥에 커다란 여자의 성기와 징그럽게 털이 많이 난 람부탄을 그려 넣었다. 내가 여기 있다는 일종의 표식 같은 것이었다. 나는 여러 군데 낙서를 하다 말고 비가 내려 지워진 낙서 때문에 여자의 성기가 아니라 오히려 람부탄을 보고 깜짝 놀라는 누군가의 모습을 상상하며 잠깐 웃기도 했다. 주변의 소음이 점점 그 크기를 키우고 나중에는 완전히 와해되어 이 공간을 아주 작은 분자로만 차지하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그걸 좋아했다. 너무 시끄러우면 금방 피로해졌고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면 숨이 턱턱 막혔다. 나는 눈을 감고 눈앞에 있는 것들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하늘을 테두리처럼 두르고 있는 나무들과 농구골대와 비와 눈에 강한 커다란 시계까지. 이런 풍경은 머릿속에서 십 년 혹은 이십 년이 지난 후에도 그대로 건재할 것만 같았다. 그것들은 잘 잊히지 않았고 여간해서 잘 변하지도 않았다.
멀리서 야구공이 바닥을 찍고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용이였다. 용이는 매일같이 이곳에 와서 캐치볼을 했다. 용이는 자기네 집과 가까운 초등학교 운동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이곳을 찾았다.
용아, 넌 학교도 안 가니.
나는 멀리 있던 용이를 가까이에 불러 세워 놓고 말했다.
응. 난 공부 안 해도 돼. 엄마가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어. 거긴 아는 사람도 없어.
용이가 말했다. 용이는 말을 하는 도중에도 근처 나무에 쉬지 않고 공을 던졌다. 사실 용이가 하고 있는 것은 캐치볼이라고 말하기에도 애매했다. 용이는 혼자서 공을 던졌다가 다시 튕겨 나오는 것을 받는 식이었다. 용이는 주말이면 축구를 하러 온 애들에게 금방 자리를 빼앗기면서도 거의 매일같이 이 공원에 왔다. 나는 그렇기에 그런 용이를 보고 있을 때마다 용이가 자기도 잘 알지 못하는 사이 공원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용이는 고양이들이 부스럭거리는 작은 소리에도 쉽게 고개를 돌렸다. 용이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용이의 옅은 호박색이 감도는 눈동자와 자주 눈이 마주쳤다. 용이는 나처럼 혼자였다.
여긴 놀 것도 많고, 친구도 있고, 그래서 좋아.
용이가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용이가 웃을 때마다 용이의 언청이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나는 용이를 한참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용이가 나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웃겼다.
용이는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이 공원에 있는 나무가 다른 공원의 나무들보다 상처가 잘 나고 잘 파인다며 말을 다시 이어 갔다. 대단한 악인인 것처럼 말했지만 여전히 어설펐다. 용이는 개도 발로 차지 못하는 애였다. 용이는 며칠 전 공원을 떠돌던 개가 자신의 공을 물어갔을 때도 한참을 꽁무니만 쫓을 뿐 개에게 해코지하지 못했다. 결국 침 범벅이 되어 뱉어진 공을 주워 손바닥으로 정성스럽게 닦아낼 뿐이었다.
용이가 공원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힐끔 보더니 입술을 움찔거리다 멈췄다.
뭐,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나는 말했다. 용이가 그저 아무 말 없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용이는 매일 변함없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이곳 공원,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그를 떠올렸다. 그 당시에도 그의 턱에는 희끗희끗한 수염이 자라 있었다. 그는 거의 매일 지금의 나처럼 공원 귀퉁이에 앉아 있었다. 맥주를 마시고 있을 때가 많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왼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주무르고 있는 것이 버릇이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런 행동을 자주 했다. 나는 어쩐지 무표정한 얼굴로 자기의 성기를 주무르고 있던 그를 떠올릴 때마다 동시에 그의 옆에서 이를 온통 다 드러낸 채 안절부절 웃고 있는 나를 떠올렸다.
나 다른 사람들보다 이빨이 훨씬 많다. 이것 봐, 무섭지.
나는 그런 장면을 떠올릴 때면 그가 가끔 나처럼 이를 드러낸 채 환하게 웃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는 상상 속에서도 잘 웃지 않았다.
그는 그저 아무 말 없이 공원에 앉아 어딘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것이 그의 절반의 일이었다. 그는 매일 인상을 찡그리며 어떤 사소한 풍경들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아마도 별것 아니겠지만 나무에서 처음 본 아주 작은 흰 벌레나 여간해선 잘 나지 않는데 어떻게 씨를 뿌렸는지 공원 한 귀퉁이에 돋아난 엔다이브 같은 작은 것들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사소하게 보이듯 나 또한 그에게 하나의 정물이나 풍경 같은 것에 다름이 없었다. 그는 그 풍경을 지나치듯 나를 떠났다.
열병 같은 거 앓으면 기억을 완전히 잃는 사람도 있잖아. 귀도 먹고. 눈도 멀고. 좋은 거야. 기억이 너무 많으면 머리에 안 좋아.
나는 아주 옛날 그에게 했던 말이 떠올렸다. 그는 그때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는 열병에라도 걸려 목소리를 잃은 것처럼 말이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가 이 공원과 꽤나 잘 어울렸다고 지금도 생각하곤 한다.


불구가 되면 이상하게 엄청난 생명력을 느낄 거야.
나는 그 말을 떠올린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나의 부모다. 나의 부모는 거의 둘이 동시에 그런 말을 나에게 남겼다. 그렇지만 그들은 불구는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한 사람을 억지로 분리해 놓은 것 같았다. 그들은 늘 붙어 있었고,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떠먹고 같은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고 같은 때에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역겨움을 느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서로의 모습까지도 조금씩 나누어 가졌다. 아버지는 머리를 길렀고 어머니는 머리가 조금씩 돋아날 때마다 곧 바로 미용실로 달려갔다. 나는 그 둘이 지독한 정신병에 걸린 것이라고 여겼다.
불구가 되면 이상하게 엄청난 생명력을 느낄 거야.
나는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내가 그들에게 얼마나 짐짝 같은지 다시금 생각했다. 나는 그 둘 삶에서 짐이었다. 그들은 내가 어서 빨리 불구가 되어 이 집을 떠나, 스스로 자생하길 바라는 것 같았다. 그들 인생에는 딱 이인분의 자리만 필요했다. 나는 그걸 잘 알았다. 나는 그들이 먹다가 남긴 음식이나 옷이 있다면 그것들만 가지고 그들 옆에 붙어살았다. 그들은 서로에게 바빴기에 나에게 부모로서 꼭 알려주어야 할 것들에 대해서 한 번도 일러주지 않았다. 예를 들어 아주 사소하게, 모기를 물린 곳을 계속 긁으면 안 된다든지,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양을 세어야 한다든지 같은 말들을 일절 해주지 않았다. 나는 가려우면 피가 날 때까지 긁었고 잠이 오지 않을 때에는 잠을 자지 않았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타고나길 병약한 체질이라고 말했다. 나는 자주 추위에 몸을 떨었다. 그래도 굶어 죽거나 큰 병에 걸리지 않았다.
나는 그가 떠나고 난 뒤,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살았다. 그가 갑자기 나를, 이 공원을 떠난 이유를 도저히 알지 못했다. 어느 날 잠을 자다가 뜨거운 열 때문에 머릿속 기억들이 한순간 다 타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그 답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온몸이 추위에 떨려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당장이라도 그를 옆에 두고 밀린 잠을 자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나 같은 것은 완전히 잊었다는 듯이 다시 공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서 있다가도 악몽에 시달렸다. 나는 그렇게 나도 모르게 잠깐 잠깐 끔찍하게 잠드는 것이 전부였다.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변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공원은 아무런 변화도 없이 그곳에 있을 것이었고 나는 이제 거기에 혼자 있을 것이었다. 그것은 생각만으로도 넌더리나는 짓이었다. 나는 모든 마음이 소진된 사람처럼 굴었다.
엄청난 생명력, 엄청난 생명력, 나는 그 말이 생각날 때마다 그때처럼 엎드려 중얼거렸다. 나는 아직 그것을 잘 알지 못했다. 매일같이 잠이 쏟아졌지만 몸속 불편한 추위에 완전히 잠에 들지는 못했다.


나는 나무에 세게 맞아 아주 빠른 속도로 튀어 오르는 용이의 공을 쫓고 있었다. 용이의 공은 낡은 것에 비해 아주 잘 튀었다. 그런 공으로 캐치볼을 하고 있는 용이를 보고 있을 때마다 나는 문득 문득 부모의 말이 떠올랐다. 용이는 혼자서도 공을 나무에 잘 때려 박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언청이 입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웃는 얼굴이 아주 잘 보였다. 나는 어쩌면 용이의 저런 모습 자체가 그의 생명력을 대변해 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멍청하게 반복되는 일들.
용아, 계속해. 계속 공을 던져.
나는 잠깐 쉬며 복숭아뼈를 만지고 있는 용이에게 말했다. 용이가 천천히 일어서서 보란 듯이 공을 나무에 세게 던졌다. 공이 긴 포물선을 그리며 용이의 한참 뒤로 날아갔다.
어, 어, 멀리 간다.
용이가 말했다. 언청이 입술 사이로 흰 이가 드러났다.
해가 지고 있었다. 비 소식 때문인지 공원에는 나와 용이뿐이었다. 나무 의자에 낙서한 커다란 람부탄이 더위에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나는 뻑뻑한 눈을 비비적댔다. 용이가 멀리서 던진 공이 다시 숲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나는 공이 사라진 쪽을 쳐다보다가 풀숲 아니면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누군가 나타나면 좋겠다고 잠깐 생각하다가 이내 생각을 지웠다.


숙아. 어제 엄마한테 전화가 왔어. 요즘은 여름이라 꽤 바쁘대. 그리고 베란다에 쥐가 나와서 농약을 우유에 섞어서 놓았는데 그걸 먹고 오늘 아침에 쥐가 세 마리나 죽어 있었대.
용이가 자신의 팔을 치켜 올리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째 소식만 있을 뿐, 내리지 않는 비 때문에 공원이 한산했다. 부모는 매일 아침 날이 점점 무덥고 습해진다며 숨이 막힐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말을 떠올리며 공원에 앉아 차갑게 굳은 딱딱한 손마디를 접었다가 폈다. 조용했다. 누군가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나무 밑은 무서운 풍경이라고 말했는데.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 말은 정말로 그 말을 떠올리는 동시에 아무도 없는 나무 밑을 무섭게 만들었다. 누가 한 말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나처럼 여간해서 공원을 벗어나지 않는 사람일 것만 같았다.
용이는 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뛰어가 한참 동안 사라진 공을 찾더니 다시금 내 앞에 서서 여전히 바짝 마른 동물의 가죽 같은 야구공을 엄지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게 꼭 죽은 쥐를 쓰다듬는 그의 엄마와 닮았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용아, 너는 너네 엄마를 닮았어? 그것도?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그런 말을 했다. 용이의 말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아니. 우리 엄마는 예뻐. 나처럼 안 이래. 우리 엄마는 하얗고 입술도 예뻐.
용이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곤 그렇게 수줍은 듯 말하는 용이에게서 짜증이 났다. 용이는 거의 매일같이 자신의 부모에 대해서 떠들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자기 엄마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했다. 재미는 없었다. 그들의 부모는 한 달에 세 번쯤 그에게 전화를 했고 그가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돈을 줬다. 나는 그걸 잘 알았다. 용이는 부모에게 돈을 받을 때마다 나를 햄버거 가게에 데려다주었다. 차라리 결벽증에라도 걸렸으면 좋겠는 그 가게에. 그 가게는 햄버거를 한 입씩 베어 물 때마다 아르바이트생의 노란 머리카락이 하나씩 딸려 나왔다. 용이는 그럴 때마다 아무 말 없이 말려 올라간 자신의 입술 사이로 그것을 자연스럽게 쭈욱 빼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곤 용이가 어쩐지 습관처럼, 특히 엄마 이야기를 할 때도 그러하듯이, 공을 던지다 말고 간간이 주위를 돌아보는 것이 꼭 얼굴이 하얗고 예쁘다던 그의 엄마가 갑자기 나타날 것 같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거 나무에 상처 난 거, 엄마가 보면 웃겠지? 내가 이렇게 한 걸 보면 웃을 거야. 내가 아무것도 못 하는 줄 아는데. 잘했다고 하겠다.
나는 간간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보며 그런 말을 하던 용이가 생각났다. 그들은 용이가 그들을 기다리는 만큼이나 용이에게 오지는 않았다. 가끔 전화를 하고 햄버거를 사먹을 수 있는 돈을 주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들의 삶에도 용이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젖은 나무 냄새가 밴 공을 쥐고 서 있는 용이를 쳐다보았다. 용이는 전생이 있기에는 너무 잔인할 정도로 뜨거운 무언가로 살을 지져서 고정시켜 놓은 것처럼 엉성하고 짓눌려 있는 입술을 매달고 있었다. 나는 용이의 시선이 텅 빈 운동장을 가로지를 때마다 간간이 용이의 눈 속에서 반짝거리는 그 호박색 빛을 느꼈다.


넌 그게 재밌니. 어차피 던져 주는 사람도 없는데. 심심하잖아.
나는 말했다. 더위 때문에 금방 달아오른 용이의 얼굴에 땀이 흥건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별로 좋지 않았기에 어쨌거나 비라도 내리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재밌거든. 어차피 누가 던져 줘도 똑같거든.
용이가 말했다. 용이는 요즘 틈만 나면 사춘기 아이들이 하는 소심한 반항처럼 일부러 말끝을 기분 나쁘게 올리며 대답했다. 그리고 용이가 그런 말투로 말을 뱉을 때마다 공원의 조용함이 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용이는 이 공원과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용이가 던지는 공을 막무가내로 받아내느라 홈이 팬 나무를 보았다. 공원 테두리에 심어진 여러 개의 나무에는 한 번씩은 야구공으로 맞아 팬 자국이 있었다.
넌 너네 엄마가 좋아? 너네 엄마는 너 안 좋아하는데. 그러니까 너도 너네 엄마 좋아하지 마라. 안 그럼 혼자만 병신이 되는 거래. 학교 가면 그런 것도 가르쳐주는데 넌 학교를 안 가서 잘 모르겠다.
나는 말했다. 용이의 공이 나무에 맞아 높게 튀어 올랐다.
아니거든. 우리 엄만 나 좋아하거든. 제일 좋다고 했거든. 난 엄마 좋은데……. 엄만…… 진짜로…… 입술도…… 예쁘거든.
나는 손가락을 치켜들고 용이의 입술처럼 내 입술을 비죽 위로 말아 올렸다. 그러곤 용이가 말할 때처럼 입술을 움찔거리며 용이의 말을 따라했다.
아닌데. 우리 엄마는 나 좋아하는데. 세상에서 제일 예쁜데. 근데 난 나 혼자 이렇게 병신이래요.
나는 용이가 엄마를 이야기할 때 부끄러운 듯이 말하는 것이 마치 애인 대하듯 말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용아, 넌 너네 엄마랑 잤지? 그런 거지?
용이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귀부터 시작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상한 말 하지 마.
용이가 나에게 야구공을 던졌다. 이번엔 정확한 캐치볼이었다. 나는 한 손으로 용이가 던진 야구공을 잡았다. 더러운 짐승을 만진 것처럼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낡은 공이 다시금 튀어 오르는지 신기했다. 나는 기분 나쁜 것이라도 만진 듯 공을 다시 용이에게 던져 주었다. 용이는 내가 던져 준 공을 다시 정확히 받아냈다. 그러곤 누군가 자신에게 공을 던져 주었던 것이 아주 오랜만인 것처럼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용이가 공을 받은 뒤, 뒤꿈치를 조금 들어 올려 몸을 들썩였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가끔 잘못 튕겨져 나온 공을 용이에게 던져 줄 때면 용이는 저런 식으로 몸을 들썩이곤 했다. 나는 용이가 자기에게 공을 던져 줄 누군가를 찾는다면 분명 지금보다 조금은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용아, 친구를 좀 사귀어 봐.
나는 말했다.
싫거든. 난 이미 친구 있잖아. 그리고 어차피 누가 던져 주나 안 던져 주나 똑같거든.
용이가 재차 말했다. 거짓말.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용이는 거의 같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마치 자기 공을 던져 줄 누군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용이는 엄마에 대해, 엄마가 지내는 시골 풍경과 생활에 대해, 그리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튀어 오르는 공에 대해서만 떠들 뿐이었다. 나는 그런 용이가 짜증이 났다.
용아. 너네 엄마가 널 아주 예전에 버린 걸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엄마, 엄마, 하지 말고 너도 나처럼 좀 어른답게 굴어 봐.
나는 말했다. 용이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지 나무에 맞아 다시 튕겨져 나온 공을 주우러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나는 여전히 한쪽 입술이 비죽 올라간 채 공을 주우러 다가오는 용이에게서 조금 징그러운 기분을 느꼈다. 용이가 이 공원에서 영원히 같은 모습으로, 공을 던지며 누군가를 기다릴 것만 같았다.


나는 누워서 아주 오래전 그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것은 하루에도 몇 번씩 되새기는 일이었지만 그리 오래 지속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딱 그 정도까지였다. 그의 인상은 쉽게 무너졌다. 나는 말이 없다는 것이 그의 인상을 더 빠르게 무너트린 이유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섹스 같은 걸 하세요? 나는 그를 떠올릴 때마다 그런 질문을 생각했다. 궁금했다. 그 질문이 왜 궁금한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를 제일 잘 드러낼 수 있는 대답은 그것뿐이었다. 우리는 가끔 그대로 공원에서 몇 번 했다. 나는 옛날 그것들이 생생하게 떠올라 조금 웃었다. 그러곤 그가 아주 돼먹지 못한 계모 같은 여자에게 갔을 것이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싸구려 비누 냄새가 나는, 하루에 적어도 세 번 정도 샤워를 하는 결벽증에 가까운 여자. 나는 그런 상상을 질릴 때까지 하고 그만두었다. 나는 무엇인가 그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을 때마다 심각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것이 그가 가고 난 뒤의 습관이었다. 나는 혼자 말하고 혼자 중얼거리는 말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런 중얼거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내 귀에 점점 더 이질적으로 변해 갔다. 나는 무엇인가 누군가의 대답이 참을 수 없이 듣고 싶을 때마다 용이를 찾아갔다. 그리고 용이는 언제나 그렇듯 거의 똑같은 자리에서 캐치볼을 하고 있었다. 용이는 그때마다 단색 계열의 옷을 주로 입고 있었는데 나는 그게 꼭 아주 어린아이를 세워 둔 것만 같았다.
용아, 넌 날 좋아했지.
나는 용이를 보면서 말했다. 용이가 내 나무 의자 옆으로 바짝 다가와 앉은 채, 입술 사이로 무언가를 오물오물 씹었다. 아마도 자기의 손톱 끝이나 거스러미를 뜯어 입안에서 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용이는 꼭 이로 손을 정리했다. 오물거리는 입 때문인지 용이의 언청이 입술이 더욱더 눈에 잘 들어왔다. 용이는 손톱을 뜯다가도 감지 않은 머리가 가려운지 가끔씩 들쑥날쑥한 손톱을 세워 머리에 상처를 내듯 박박 긁었다.
용아, 넌 날 좋아하고 있지. 아주 옛날부터. 이 공원에서 나를 만나기 전부터. 그렇지?
용이가 입을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그 사이로 말을 뱉었다.
응, 좋아. 너는…… 맨날 여기 있잖아. 어디 가지도 않고……. 난 니가…… 맨날 여기 와서 좋아. 앞으로도 맨날 올 거지? 약속한 거다.
용이는 별로 길지 않은 그 말을 아주 길게 말했다. 나는 용이의 말에 대답하지는 않았다. 용이는 무언가를 뱉어내는 사이에도 바짝 올라간 입술 때문인지 여전히 웃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움찔거리고 있는 용이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어떤 말이든 웃는 모습인 용이를 보면서 가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나를 굉장히 미워하고 있는지도 모를 것 같았다.
용이는 캐치볼을 쉴 때마다 자신의 눈 속 초점을 풀었다. 나는 용이의 그런 눈을 보며 예전에 그 남자가 자신의 바지에 손을 넣고 공원 구석에서 성기를 주무르고 있는 모습을 잠깐 떠올렸다. 그가 왜 항상 공원에서 그 짓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절정이 올 때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짧은 숨을 뱉어냈다. 그러곤 습관처럼 한참 초점을 이상하게 흐트러트렸다. 나는 그런 눈을 본 날이면 며칠이고 묘하게 슬픈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은 별 장면은 아니었지만 공원 구석에 아주 오랫동안 남아서 나를 따라다녔다. 그가 사정하기 직전에 짓는 표정이 나를 꽤 슬프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눈의 초점이 맞지 않는 용이를 자세히 보았다. 그와는 다르게 용이는 까까머리가 잘 어울리는 기껏 해봐야 청소년기쯤 되었을 정도의 남자 아이 같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용이에게서 이제 막 청소년기 남자 아이들에게 나는 퀴퀴하고 찐득한 냄새가 났다.
용아, 넌 언제 어른이 될 거야? 넌 아는 게 아무것도 없지. 그렇지.
용이가 초점이 흐려진 멍청한 눈을 하고는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용이의 흐린 눈 속, 그 호박색 빛이 여전히 떠돌고 있었다.
내가 왜 몰라! 난 다 아는데. 다 물어봐, 다.
그래? 너네 엄마가 비밀이라고 그랬는데. 니가 무지 싫대. 징그럽대. 그러니까 자길 좋아하지 말래. 그것도 알고 있었어?
나는 기세가 등등한 바보 같은 용이의 모습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거짓말. 아니거든. 엄마는 나 좋아하거든. 며칠 전에도 전화했거든. 괜히……. 난 너랑 다르거든. 질투하는 거지. 우리 엄마는 날 좋아하고 돈도 줘서. 넌 아니니까.
용이는 화가 난 듯, 습관적으로 말끝을 올리는 그 말투를 한 번 더 꺼내 보였다. 나는 화가 난 채로, 공을 꽉 쥐고 있는 용이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용이의 물어뜯은 손톱이 엉망이었다. 손톱은 잇자국으로 들쑥날쑥 파여 있었고 어떤 것은 잘못 뜯어낸 것처럼 대각선으로 깊게 잘려, 손톱 밑의 붉은 살이 통통하게 올라와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가만히 내려다본 다음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용이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언젠가 반드시 다시 올 사람들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혼자 분주하게 만들진 않았다. 용이는 공을 던지다가도, 이렇게 조용히 눈의 초점을 풀 때에도 가끔씩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모습의 용이가 싫었다. 용이는 오히려 더 반대로만 생각했다. 멍청하게 시간을 유예하는 사람처럼. 나는 그렇기에 용이가 모르는 것이라면 앞으로도 차라리 아무것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평생 공원에서 바보처럼 공만 던지며 절대 오지 않을 이들이나 끝없이 기다리도록 내버려두고 싶었다. 그리고 공을 던지는 단순히 반복적인 그 일만으로도 엄청난 생명력을 느껴 그곳에 늘 혼자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조차 없는 공원에서 람부탄이 아니라 나무에 상처나 내며 자기를 표시하고 있을 용이를 잠깐 생각했다.
응, 그래. 맞아. 우린 달라. 너네 엄마는 널 사랑하고 난 아무도 사랑해 주지 않지. 넌 그래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난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아.
나는 말했다. 용이가 미안하거나 혹은 단지 가려운 것일 수도 있는 머리를 긁적였다. 바보 같았다. 나는 그런 용이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마음속에서 무언가 끓어올랐다. 용이의 공을 당장 개에게라도 던져 주고 싶었다. 나는 그런 기분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웃었다.
용아, 니 말이 맞아. 넌 나처럼 고아는 아니지. 널 버린 사람도 없고. 근데 그렇다고 너가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야. 난 니가 바지에 손을 넣고 이렇게 하는 게 보고 싶어. 그럼 너가 어른이라고 생각해 줄게. 나중에 너네 엄마가 왔을 때, 니가 조금이라도 어른이 된 걸 보여줘야 하지 않아? 엄마가 분명 자랑스러워할 텐데.
나는 그렇게 말했다. 멍청한 용이를 완전히 바보처럼 대하고 싶었다. 용이는 잠깐 당황하는가 싶더니, 한참을 앉아서 생각했다. 조금 부끄러워 보이는 듯했지만 용이는 그 부끄러움을 스스로 참는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했다.
용아, 너는 진짜 남자다. 그렇지?
나는 말했다. 멍청한 용이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용이는 내가 앞에 있어서인지 쉽게 사정하지는 못했다. 혹은 한 번도 제대로 자위를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용이는 한참을 사정하지 않은 채, 멀뚱멀뚱 눈을 끔뻑였다. 주변에 매미 울음소리가 찌르르 울리고 있었다. 나는 그 소리가 너무 커서 귀가 먹어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용이의 축축한 바지를 내려 그에게 했던 것처럼 그의 팽팽한 성기에 입술을 가져다대고 입을 맞춰 주었다.
용아, 넌 이제 어른이네. 여자랑 이런 짓도 하고. 나중에 엄마한테 꼭 자랑하렴.
나는 말을 마친 뒤 곧장 일어나 집으로 걸었다. 사정없이 울어대는 매미 탓에 몸이 피로했다. 등 뒤에서 용이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설픈 말투로 사랑한다거나, 나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식의 말이었다. 나는 용이의 말을 그대로 무시한 채 걸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그대로 엎드렸다. 방을 반 갈라 들어오던 뜨거운 햇빛 그림자가 차츰차츰 작아지고 있었다.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비는 지겹도록 내리지 않았다.
정말 좆같이 안 내리잖아.
나는 누구라도 들으라는 식으로 중얼거렸다. 모두에게 장난을 치고 있는 텔레비전 속 그 여자에게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다. 나는 베개를 가져다가 얼굴을 파묻었다. 어지러웠다. 그리고 아까 전 사정을 하지 못한 채 눈을 끔뻑이고 있던 용이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나는 그런 용이를 생각할 때마다 어쩐지 불편해지는 마음을 언제나 똑같은 공원 속 풍경을 떠올리며 지웠다. 희미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넌 아직도 이러고 있니. 언제까지 이럴 작정이야. 도대체가. 우린 차라리 니가 젊은이다웠으면 좋겠다. 밖에 나가 봐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누군가 말했다. 나는 누군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건 어머니 혹은 아버지 그것도 아니면 그 둘의 입에서 동시에 나오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몰라요. 모르겠어요. 전 못 해요. 너무 추워요.
나는 얼굴을 베개에 묻은 채로 웅얼거렸다. 그러곤 정말로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엄청난 생명력, 그런 걸 가진 불구가 아니었다. 나는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이 생활에 활력 같은 걸 느끼지 못했다. 나는 차라리 모든 게 끝나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공원이 무너져 버리거나 더 이상 용이가 공을 던질 수 없는 순간이 오거나 그가 아주 노쇠해져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죽어버렸다는 소식을 누군가에게라도 전해 듣고 싶었다. 나는 오랜만에 그가 나를 만져 줄 때처럼 얼굴에 따듯한 열기가 차올랐다. 나는 조용히 울었다. 그런 열기에 묻혀 잠이라도 들고 싶었는데 지독하게 잠이 들지는 않았다.
그들은 나를 한참 쏘아보다가 문을 닫았다. 나는 좀 더 고개를 묻고 싶었지만 얼굴을 들뜨게 하는 열 때문에 숨이 차 그만두었다. 나는 기도쯤에 걸린 침을 바닥에 뱉어냈다. 그러곤 벽에 기대서 빛의 그림자가 점차 어두운 그림자로 변하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나는 갑자기 이런 사소한 장면 하나 하나 기억하려고 애쓰던 그가 비겁하다고 느껴졌다. 그는 절대로 이런 아름다운 것을 머리로 오랫동안 기억하며 자신을 치장할 수 없는 구리고 쉰내가 나는 노인이 되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는 자기밖에 몰랐다. 그리고 지금 이것이 그가 남긴 모든 질문의 이유가 될 것도 같았다. 그는 여전히 어딘가에 숨어서 자위나 하며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고독하게 노후를 장식하고 있을 게 뻔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다운 것과는 늘 거리가 멀었다.
벙어리, 물론 그게 정말 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토록 말이 없던 그가 그랬던 것처럼 별로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지금쯤 어쩌면 그때보다 훨씬 늙어버린 그가 꾸준히 말을 줄여 가, 정말로 완전한 벙어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아직 살아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그가 벙어리이고, 불구인 탓일 것이었다. 여름은 언제나 지독했고 겨울은 악랄했다. 나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나는 누구나처럼 불구가 되어 엄청난 생명력, 그런 걸 느끼고 싶었다. 나는 말을 조금씩 줄이기로 했다. 그리고 못 견디게 말을 하고 싶을 때는 말 대신 입 속에 과자를 마구 우겨넣었다. 과자를 한참 씹다 보면 주변이 어떤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기분이 들곤 했다. 나는 그것에 작은 위안을 느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입에 무언가를 가져다 넣었다. 입천장이 까져서 음식을 도저히 못 삼킬 때는 초콜릿이나 캐러멜을 혀에 녹여서 꿀떡꿀떡 삼키기도 했다. 나는 그런 소리를 들으며 말을 잘 줄여 갔다. 그것은 나만 아는 비밀처럼 천천히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소리를 들었다. 분명한 함성소리였다. 퇴각 나팔 불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동네 공원에 모여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폭우가 내릴 거라는 일기예보를 더 이상 믿지 않았다. 주말이었다. 나는 최대한 말을 줄이기 위해 이틀에 한 번 혹은 삼일에 한 번 꼴로 공원에 나가 용이와 잠깐씩 말을 했다. 용이는 나에게 요새는 왜 자주 오지 않느냐며 투덜댔다. 나는 소음 때문에 공원 귀퉁이에 앉아 귀를 틀어막았다. 용이는 공원 귀퉁이로 밀려난 뒤에도 여전히 한구석에서 캐치볼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용이를 보고 욕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저 용이가 영원한 바보가 됐으면 좋겠다고 한 번 더 생각했다. 나는 용이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용이의 눈 속, 가만히 빛나는 그 호박 빛이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용이의 눈은 하루가 다르게 호박색으로 천천히 채워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런 용이의 눈을 보고 있으면 용이가 나를 엄청나게 미워해서 나중에 나를 꼭 죽이러 올 것만 같았다. 어쩐지 나를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그 눈빛이 싫었다.
나는 공원 한구석에서 물고 있던 용이의 성기를 놓고 입술을 닦았다.
요즘 왜 잘 안 와?
용이가 말했다. 용이는 이제 예전처럼 부끄러워하거나 긴장감에 사정을 못 하지도 않았다.
이틀 전에 왔잖아. 고작 이틀인데. 앞으론 더 안 올 수도 있어.
나는 용이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용이의 눈 속에 길고 흐릿한 상으로 내가 담겨 있었다. 못생겼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용아, 넌 나중에 나를 죽이러 올 거지. 그렇지. 나중에 나한테 꼭 복수를 할 거지.
나는 말했다. 용이는 이제 부끄러운 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허공을 보며 더러운 손으로 자신의 귓바퀴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용이는 그 말이 들리지 않는지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용아, 넌 나중에 내가 없어져도 날 찾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야 돼. 알았지? 넌 그런 걸 잘하잖아. 그럼 내가 늙어서 죽기 전엔 꼭 올게.
나는 멍하니 앉아 있는 용이에게 말했다. 그러곤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을 하며 추위에 조금씩 떨고 있는 내가 한심했다.
무슨 말이야? 어디 가? 거짓말. 안 갈 거잖아.
용이가 귓바퀴를 만지던 손을 멈추고 화들짝 놀라 말했다.
몰라, 용아. 나도 몰라. 나도 너처럼 아무것도 모를 거야. 아니다, 죽기 전엔 알 수도 있나.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용이의 눈 속에 차오른 내 얼굴을 잠깐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용이에게 손을 뻗었다. 용이가 자기를 만지지 못하도록 내 팔목을 꽉 잡았다. 처음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팔목을 잡은 용이에게서 강한 힘을 느꼈다. 나는 조금 놀랐다. 용이의 힘이 뼈에 직접 맞닿는 것처럼 아팠다.
악마. 넌 진짜 악마 같아.
용이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좀 더 말을 철저히 아끼기로 했다. 나는 공원이 아닌 방에 앉아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부모는 나를 더 이상 들여다보지 않았다. 나는 그게 편했다. 둘은 가끔씩 깔깔깔 웃거나 티브이를 보면서 환호성을 질러댔다. 나는 방에 틀어박혀 나조차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게 여러 가지를 떠올리며 시간을 잘 보냈다. 아마도 노인이 된 그와 마지막으로 섹스를 한 번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거나 용이가 나를 꽉 잡았던 그 느낌이 가끔씩 떠올라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 전부였던 것 같다. 나는 가끔 초콜릿이나 캐러멜을 혀에 녹여 꿀떡 꿀떡 소리 나게 삼켰다. 그 소리 때문에 방이 그다지 조용하지가 않아서 나는 잘 적응했다.
나는 일주일 간격으로 공원에 나갔다. 멀리서 용이가 한 손에 무언가를 든 채, 여전히 서 있었다. 나는 나무 그늘 밑에서 자꾸만 엇갈리는 시야, 아마도 그건 아지랑이 때문이겠지만 그것을 도로 맞춰 놓기 위해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공원이 휘어질 때마다 타악기 소리를 냈다.
용이가 앉아 있는 나를 보고 멀리서 한달음에 뛰어왔다. 매일 웃고 있던 용이가 그때는 왠지 웃고 있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것 봐.
용이는 다짜고짜 나에게 흰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얼굴에 맞닿듯 가까이 있는 그 봉투를 치워버리고 싶었다. 그 봉투가 무엇인지 궁금하지가 않았다. 흰 봉투에 손때가 타 거뭇거뭇한 지문들이 묻어 있었고 촌스러운 무궁화 우표가 붙어 있었다. 용이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봉투를 내 앞으로 조금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하도 만지작거려서 종이가 거의 닳다시피 했지만 봉투를 아직 뜯어보지는 않은 듯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봉투를 다시 용이에게 내밀었다. 용이가 나를 한 번 더 방해한다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심산이었다.
왜 이렇게 안 왔어. 기다렸잖아. 요즘 왜 이렇게 안 와? 맨날 온다고 약속했잖아.
용이가 말했다. 용이는 내가 했던 말도 기억하지 못한 채, 매일 저런 식의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긋나긋 말하는 용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반짝이는 그 호박 빛을 마주할 때마다 고개를 돌렸다.
용이가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사실 손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입술이 더 자주 오물거리고 있었다. 그러고는 쭈뼛쭈뼛 다시금 그 편지를 나에게 내밀었다.
너 올 때까지 안 뜯었는데……. 이거, 너가 대신 읽어 줘.
용이가 말했다. 이제 나는 말을 초콜릿이나 캐러멜을 삼키듯 자연스럽게 삼키고 있었다.
부탁할게.
용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호박색 눈동자가 그 눈 주위를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몸을 조금 떨었다. 추위 때문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나는 조금 무서웠다. 용이가 그런 눈을 한 채 나를 속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바보 같은 모습으로 나를 속이며, 내 얄팍한 마음을 자기는 이미 안다는 듯이, 그 빛나는 눈으로 나를 간간이 놀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편지의 윗머리를 뜯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내가 그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얼마나 많이 쥐었는지 조금 축축해진 봉투가 소리도 없이 찢겼다. 나는 편지 속의 글자들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편지의 내용은 거의 용이에 관한 안부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에 관한 지루하고 따분한 이야기가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죽은 쥐나 여름에 맛있다던 찰옥수수 얘기나, 며칠 전 발견한 머리가 두 개인 작은 실뱀을 보고 놀란 사소한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굳이 왜 이런 편지를 보냈는지에 대해서 의아했다. 그들은 한 달에 딱 세 번 통화를 했고 용이가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돈을 보내주었다. 용이가 나에게 편지를 줄 때의 무서움과 반대로 그 편지 속 내용은 아무런 특별한 점이 없었다. 무엇인가 힘들다거나 아프다거나 더 이상 돈을 보내줄 수 없다거나 하는 말은 없었다. 나는 별것 없는 그 편지를 여러 번 읽었다. 하지만 나는 이 편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아마 이것이 용이의 마지막 편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편지지가 많이 구겨져 있었고 글씨가 번져 있었다. 어떤 것들은 대개 마지막이라는 구색을 갖추지 않고 한순간 떠나버렸다. 그때는 어느 때보다 차분했고 오히려 잔잔했다. 나는 그게 얼마나 오랫동안 남아 있는 사람을 차분하고 잔잔하고,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 시간 속에 살게 만들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용이가 앞에 서서 입을 움찔거리며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공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어쩐지 용이가 나에게 이것을 대신 읽히는 것으로 나를 붙잡아 두는 것만 같았다. 나는 알 수 없었다. 내가 그런 용이의 마음을 무시한 채 용이를 떠난다면 그 호박색 눈을 한 채로, 용이가 나를 죽도록 미워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렇다면 나는 한편으로 용이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싶었다. 용이가 언젠가 나를 찾아와 꼭 죽여 줬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나는 어쩌면 매일 매일 예감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몇 십 년 동안 그대로인 공원과 매일 주말이면 밀려오는 똑같은 사람들과 그 입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소리와 도저히 떨쳐지지 않는 추위가, 앞으로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절대 완전한 불구는 되지 못한 채, 얇지만 끊어지지 않는 생명력으로 하루 하루를 무력하고 권태롭게 보내다 밤이면 적응되지 않는 지독한 침묵에 눈을 끔뻑거릴 것이었다. 나는 편지를 쥐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용이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짙은 호박 빛 눈동자가 나를 자꾸만 짓누르는 것 같았다. 용이가 양손으로 공을 이리저리 굴렸다.
뭐라고 해?
용이가 말했다.
너를 곧 보러오겠대.
나는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
용이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인상을 찡그린 채 용이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용이의 눈 속에서 못생긴 내 얼굴이 일렁거렸다.
날 못 믿는 거야? 날 믿어야지. 날 좋아한다며. 그게 거짓말이구나.
나는 일부러 그런 말을 계속했다.
정말…… 온대? 그런 말은 없었는데……. 요즘은 전화도 잘 못했어…….
용이가 말했다. 나는 한참 동안 해진 야구공의 가죽을 쳐다보았다. 상처가 많았다.
널 놀라게 해주고 싶은가 보지. 언제 온다고는 말 안 했어. 그런데 곧 올 거야. 그렇게 쓰여 있어. 기다려. 어차피 넌 그런 걸 잘하잖아, 용아.
나는 말이 끝나자마자 용이의 편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그 밑으로 생기는 텁텁한 공기를 다리에 잔뜩 비볐다. 하지 못한 말이 걸린 것처럼 목이 이따금 따끔거렸다. 용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용이의 표정을 상상할 수는 없었지만 계속해서 번뜩이는 것 같은 용이의 눈동자가 자꾸만 떠올랐다.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곤 뒤를 돌아 속으로 용이에게 마지막 안녕을 했다. 용이는 그대로 멈춰 서서 완전히 빛나는 그 눈으로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뒤돌아 걸었다.
굵은 빗방울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 빗소리는 마치 어딘가 간헐적으로 튕겨져 나오던 야구공 소리와 비슷했다.







소설가 김남숙

작가소개 / 김남숙 (소설가)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장호원에서 태어났다. 《문학동네》 2015년 신인상 단편소설 부문으로 등단.


《문장웹진 2016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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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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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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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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