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중편연재] 누에의 난 ②

  • 작성일 2016-03-01
  • 조회수 834


[중편연재]



누에의 난 (제2화)




김도연




8


이것은 무섭지만 따스한 이야기다.


9


“저쪽 방 시렁 기둥 하나가 아무래도 위험해 보인다.”
누에로 변한 아버지가 건식에게 근심어린 말을 전했다.
“까딱하면 시렁 전체가 무너질지 모르니 빨리 다른 기둥을 깎아 받쳐라.”
“여기 있으면서 그걸 어떻게 아세요?”
행동반경이 고작 잠박 안이 전부인 누에의 특성을 아는 터이기에 물어본 말이었다.
“소리가 들린다.”
그 방에 달려가 보니 과연 아버지의 말대로 나무기둥 하나가 잠박들과 누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금이 간 채 잔뜩 뒤틀어져 있었다. 건식은 서둘러 톱과 낫을 챙겨들고 새 기둥을 만드느라 진땀을 흘렸다. 삐뚤빼뚤한 톱질과 낫질 솜씨로. 아버지가 보면 분명 집어 내던지고 다른 걸로 대체할 게 분명한 기둥으로 기울어진 시렁을 얼추 바로세운 뒤에야 얼굴에 가득한 땀을 훔칠 수가 있었다.
누에들의 귀가 그렇게 예민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버지에게 달려가 임시처방을 마쳤음을 알렸다. 아버지와 엄마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니가 없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오늘은 이만 자고 내일 든든한 걸로 하나 더 받쳐라.”
엄마와 아버지는 건식이 대견하다는 듯 머리를 꿈틀거렸다. 동생들은 뽕잎을 먹느라 바빴다. 건식은 두 손 가득 뽕잎을 집어 가족들 위에 이불처럼 얹어 놓고 잠실을 나왔다. 뭔가 뿌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깨 위에 똑같은 무게의 부담감이 올라앉은 것도 사실이었다. 정말로, 누에들의 가장이 된 기분이었다. 부엌 아궁이 앞에 앉은 건식은 늦은 저녁을 먹으며 목으로 넘어가는 밥보다 더 많은 한숨을 폭폭 뱉어냈다.
“……나도 누에가 되고 싶다.”


알에서 깨어난 누에들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자라났다.
학교에 갔다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막차를 타고 돌아오면 개미누에들은 정확하게 몸통이 배로 불어나 있었다. 엄마는 계속해서 누엣자리를 넓히느라 바빴다. 어린누에들이었기에 뽕잎의 소비량은 아직 얼마 되지 않았다. 먹기 좋게 잘게 썬 뽕잎을 누에들에게 골고루 술술 뿌려 주는 일은 동생들이 맡아서 했다. 그나마 손이 덜 가는 시기라 건식의 손까지는 필요하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는 좀 바빴다. 누에가 자라면 필요할 잠박과 시렁을 미리 만드느라 뒷마당은 늘 어수선했다. 엄마가 누에 양을 늘렸기에 더 많은 잠박과 잠박을 올려놓을 시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가느다란 버드나무 가지와 싸릿가지는 잠박을 만드는 데 쓰였고 껍질을 벗긴 참나무 장대는 시렁을 만드는 데 필요했다. 낮엔 밭농사 일을 하고 밤엔 누에치는 데 필요한 도구들을 만드는 게 아버지의 일상이라면 엄마는 농사일을 하면서도 짬짬이 시간을 내어 뽕을 따고 참을 준비하러 집에 들렀다가 누에를 돌보고 있었다.
“어두운데 그만 하세요.”
어두컴컴한데도 아버지는 조선낫으로 참나무의 껍질을 벗기다가 남포등을 들고 있는 건식을 돌아보았다. 이마엔 땀방울이 가득했다. 술에 취해 있을 때의 아버지완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얼마 안 남았다. 이거 좀 잡아라.”
아버지가 낫날을 앞으로 끌어당기자 마치 얇은 속옷이 벗겨져 나가듯 참나무 껍질이 동그랗게 말렸다가 마당으로 떨어졌다. 건식은 참나무의 끝을 붙잡은 채 아버지에게서 건너오는 단내를 맡았다. 술 냄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옆으로 돌려라.”
건식은 참나무의 위치를 45도쯤 돌렸다. 아버지의 낫은 참나무 위에서 현란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정확히 껍질만 벗겨내고 옹이를 예리하게 도려냈다.
“이제 엄마에게 화 그만 내면 안 돼요?”
“……니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아버지는 낫질을 멈추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요.”
“…….”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요, 나빠요?”
“술?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
“전 어른이 되면 술 안 마실 거예요.”
“……왜?”
아버지가 낫질을 멈췄다. 건식은 침을 삼켰다.
“취하면 자기도 모르게 술주정을 하잖아요.”
“살다 보면…… 술주정이 필요할 때가 있어. 맨정신으론 못 할 얘기도 있거든.”
“그래도…….”
“니가 모르는 게 있어. 그리고 어른이 되면 술 안 마실 거란 얘기, 내가 꼭 기억하마.”
아버지는 낫을 헛간의 나무기둥에 꽂아 놓고 손을 털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예식이가 뒷마당으로 나와 저녁밥상이 다 차려졌다는 소식을 알렸다.
알에서 누에들이 깨어나면서부터 집 안엔 조금씩 평화가 찾아들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주정을 하는 날이 현저하게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게 꼭 애누에들 덕분만은 아니었다. 본격적인 농사철도 함께 시작된 탓이었다. 아무리 엄마가 보증을 잘못 선 게 화가 난다 하더라도 농사꾼인 아버지가 농사일 대신 매일 매일을 술로 낭비하진 않았다. 누구보다 먼저 아직 얼음이 배겨 있는 두엄더미를 파헤쳐 밭으로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지게, 리어카를 사용해서. 술이라야 반주로 마시는 막걸리가 전부였기에 엄마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비로소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만 같아 건식도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게 싫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해가 진 뒤까지 밭에서 일을 거들어야 하더라도.
냉이를 넣은 된장국으로 저녁을 먹은 뒤 건식은 아버지와 함께 잠실로 들어가 시렁을 설치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을 가로지르는 나무에 못을 박고. 건식이 주로 한쪽 끝을 잡고 있으면 아버지는 반대편에서 망치를 이용해 아래서부터 한 칸 한 칸 올라가며 못을 박았다. 도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아파트와 비슷한 구조였다. 5층으로 지어지는 누에들의 아파트. 시렁의 층층마다 올려놓을 잠박들이 바로 누에들이 단체로 거주할 집이었다. 누에들의 학교 같기도 하고 군대 같기도 하고 고아원 같기도 한…….
“언제부터 누에를 쳤어요?”
“……니가 태어나기 전부터 쳤다.”
“잠실을 짓기 전엔 어디에서 쳤어요?”
“방에서 쳤지, 어디서 쳐?”
“그럼 가족들은 잠을 어디서 잤어요?”
“정지바닥에 멍석 깔아 놓고 잤지.”
“……기억이 안 나는데.”
“느들은 아마 고광에서 잤을 거다. 원두막에 비닐 쳐놓고 잤거나.”
“생각이 안 나요.”
“한 해는 아예 건넛마을 고모 집에 간 적도 있을 게다.”
마당 오른편에 자리한 잠실은 건식이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새로 지었다. 누에를 키우는 게 들인 시간에 비하면 꽤 짭짤한 수입이 된다고 엄마에게서 들었다. 하지만 건식은 어렸을 때라 누에의 겉모습만 단편적으로 보아 왔다. 봄이 되면 으레 누에를 치는구나, 생각하는 정도였다. 엄마와 아버지가 뽕을 따는구나, 쓰레받기에 가득 담긴 병든 누에들을 닭장에 뿌려 주면 닭들이 엄청 잘 먹는구나, 풀솜을 모두 제거한 고치를 자루들에 담아 팔고 온 날이면 다른 날과는 달리 맛있는 걸 먹는구나…… 이런 정도의 기억들이 전부였다. 엄마가 선 보증이 문제되지 않았더라면 올해도 그 정도의 기억에서 멈췄을 것이다. 누에치기는 엄마와 아버지의 봄날의 부업일 뿐이었다. 건식에겐 차라리 뽕나무 가지에 줄줄이 매달린 오디를 따먹고 입술과 혀, 손가락이 벌겋고 까맣게 변한 기억이 더 많았다. 뽕나무에서 떨어지면 약도 없다는 어른들의 말이 더 기억에 남았다. 누에는 그저 매년 봄에 찾아와 한 달 반가량 머물다 가는 손님에 가까웠다. 그랬던 누에가…….
“아버지?”
“왜?”
“저는 어른이 되면 정말 술 안 마실 거예요.”
“……왜?”
“……몸에 안 좋을 것 같아요.”
아버지는 망치질을 멈추고 건식을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피는 못 속인다.”
“피요?”


“……나도 누에가 되고 싶다.”
일요일 아침 일찍 지게를 짊어지고 뒷산 골짜기 속으로 지게작대기를 질질 끌며 걸어가던 건식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푸념이 쏟아졌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월요일이 되어도 누에로 변해버린 식구들을 남겨 놓고 학교에 갈 수는 없었다. 동생들은 그렇다 치고 엄마와 아버지가 잠박 속의 누에로 변해 있으니 집에서 일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밭에 곡식을 심는 일은 다행히 끝마쳤지만 역시 문제는 누에였다. 소와 개 닭들이야 아침저녁으로 한 번씩 챙기면 되었지만 누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우선 하루 세 번 뽕을 주어야 하고 또 누에들이 먹을 엄청나게 많은 뽕을 따야만 했다. 그 일을 하려면 학교에 가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엄마 아버지의 일이라고, 공부하러 학교에 가는 게 내 일이라고 고집을 부려 학교에 간다 해도 마음이 편할 까닭이 없었다. 어떤 변명을 대더라도 네 마리의 누에로 변해 있는 가족들이 눈에 밟힐 게 분명했다. 연두색으로 물들어 가는 봄날의 산골짜기를 터벅터벅 걸으며 건식은 한숨만 푹푹 토해 냈다.
“……다시 사람으로 돌아올까?”
전날 식구들이 따놓은 뽕을 가지러 가는 아침 산길에서 건식은 새로운 걱정에 잠겼다. 누에로 변한 가족들이 언제 다시 사람으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루가 걸릴지, 이틀이 걸릴지, 일주일이 걸릴지, 아니면 한 달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영영? 설마…… 그럼 나 혼자 어떻게 살아…… 이제 겨우 중학교 3학년인데…….
“이걸 나더러 믿으라고? 꿈일 거야! 내 말이 맞지?”
건식은 깊은 산골짜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찔레나무 덤불에 있던 장끼 한 마리가 퍼덕거리며 날아갔다. 먼데서 고라니의 울음소리가 골짜기를 타고 내려왔다. 그러나 이내 정적이 찾아들었다. 밤새 짝을 찾아 울던 소쩍새도 지쳐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아니면 짝을 찾아 어디론가 떠났거나.
골짜기의 계곡 옆 묵밭엔 버드나무와 산뽕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화전민들이 살다 떠난 곳이었다. 너럭바위와 그 가운데를 돌아나가는 물이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 곳이 바로 엄마가 말한, 참을 먹고 낮잠을 청했던 장소였다. 건식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조심조심 그곳으로 다가갔다. 우람한 산뽕나무 아래를 빠져나간 뒤 허리를 펴자 뽕잎을 가득 담아 불룩한, 커다란 자루가 보였다. 그 옆엔 참을 담았던 종다래끼가 놓여 있었다. 너럭바위 위에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리어카가 보이지 않았고 당연히 낮잠을 자는 가족들도 찾을 수 없었다. 바위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만 가득했다. 지게를 벗어던진 건식은 너럭바위 위에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엄마―?”
메아리가 울렸다.
“예식아―?”
산비둘기가 울다 멈췄다.
아무도 건식이 부르는 소리에 화답하며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뽕이 담긴 자루와 종다래끼를 지게에 싣고 걸은 뒤 건식은 너럭바위에 주저앉았다. 온갖 고민들이 순서 없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되풀이했다. 그러던 중에 리어카가 눈에 들어왔다. 폭포 아래, 나뭇가지들 사이로, 뽕 한 자루를 실은 채 부서져 있는 리어카가. 심장이 쿵쾅거렸다. 건식은 허겁지겁 산비탈을 에돌아 폭포 아래로 내려갔다.
“나도…… 누에가 되고 싶다.”
물에 젖어 무거운 뽕 자루를 지게에 진 건식은 넘어지지 않으려 애를 썼다. 지게 작대기에 의지를 했지만 다리는 계속해서 후들거렸다. 다행히, 리어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 가족들은 너럭바위 위에 누워 잠을 자다가 누에로 변해버린 것일까. 잠을 자다 꿈속에서 누에로 변해 집으로 휙 날아왔단 말인가. 나도 믿기지가 않는데 이 얘길 하면 대체 누가 믿겠는가. 모두 미쳤다고 할 게 틀림없다. 하지만…… 잠실의 그 누에 네 마리는 사람의 말을 하지 않는가. 엄마라고. 아버지라고. 하식이라고. 예식이라고. 사람들을 불러와 누에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게 하는 수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방법밖에 없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골짜기를 빠져나오니 저 아래 집이 보였다. 집은 이전에 보던 집과는 외양은 같았지만 전혀 다른 집처럼 보였다. 건식은 골짜기 아래서 잠시 쉬고 다시 지게를 지려다가 무릎이 꺾여 뽕 자루를 실은 지게와 함께 앞으로 꼬꾸라졌다. 지게와 두 개의 무거운 뽕 자루는 넘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건식의 등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에이, 씨. 왜 나만 사람인 거야―!”
욕을 내뱉는 건식의 입에서 흙이 튀어나왔다.
“일부러 짠 거 아니야―!”
건식은 겨우, 간신히, 비틀거리며, 다시 지게를 지고 일어났다. 만약 월요일이어서 학교에 갔으면 1교시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건식의 상태는 6교시나 7교시가 끝난 뒤인 것만 같았다. 오늘 하루가 얼마나 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뽕이고 누에고 뭐고 다 팽개쳐 버리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지만 걸음은 갓난아기나 다름없었다.


잠실에 뽕잎 냄새가 진동했다. 누에들이 뽕잎을 갉아먹는 소리만 요란할 뿐 갓 뿌려 준 뽕잎에 덮인 누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건식은 잠실의 통로에 베개를 베고 모로 누운 채 자장가처럼 들려오는 누에들의 합창에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와 동생들은 뽕을 먹는지 보이지 않았고 엄마만 뽕잎 위로 나와 네 개의 방에 나뉘어져 있는 누에들에게 뽕을 주느라 녹초가 된 건식을 애처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힘들지?”
“……아냐.”
“누에 때문에 공부도 못 하고. 조금만 견디면 모든 게 잘 될 거야.”
“엄마, 난 괜찮아. 근데…… 언제쯤 사람으로 되돌아올까?”
엄마는 고개를 쳐든 채 잠시 잠실의 천장만 바라보았다. 건식도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천장의 쥐 오줌은 세계전도를 보는 것 같았다.
“아마도…… 우리 가족을 시험하는 것 같다. 이 사태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보려고.”
“누가요?”
“누구든.”
이번엔 건식이 막막한 눈빛으로 천장의 세계전도에 시선을 매달아 놓았다. 어디쯤이 한국인지 찾으려고 했지만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당분간 우리 가족이 누에로 변했다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하지 마라.”
“누가 찾아와 물으면 뭐라 얘기해요?”
“낮에 오면 산에 뽕 따러 갔다 그러고 밤에 오면 친척집에 일이 생겨 갔다고 해. 니가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대답하면 될 게다.”
“……왜요?”
“이건 우리 집안의 일이다. 남들이 알면 웃음거리밖에 안 돼.”
납득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또 어떤 면에선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말이었다. 하지만 건식은 내색하지 않았다. 비록 누에로 변하지 않아 혼자서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하지만 누에로 변한 엄마 아버지의 위신을 생각하면 남들에게 쉽게 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사실이 동네에 알려지면 동물원 원숭이 구경 가듯 마을사람들이 찾아올 게 틀림없었기에.
“엄마는 뽕을 안 먹어요?”
“배고프지 않다.”
다른 누에들은 실로 맹렬하게 뽕잎을 갉아먹고 있었다. 배가 고프지 않다고 했지만 엄마의 얼굴과 몸은 많이 야위어 있었다.
“니가 며칠만 더 고생하면 된다. 며칠 뒤면 누에들이 먹기를 끝내고 고치를 지을 거야.”
며칠 동안 혼자서 뽕을 따야 한다는 얘기였다. 꽉꽉 눌러 담아서 하루에 두 자루씩. 오전에 지게에 지고 내려온 가마니만 한 크기의 자루에다가.
“누에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모르는 게 있음 꼭 내게 물어보고.”
“……나도 누에가 되고 싶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마라! 너마저 없음 누가 누에를 돌봐!”
아버지와 동생들이 뽕잎 줄기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뽕을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살이 통통하게 올라 있었다. 건식은 화가 났다. 엄마의 뽕잎까지 모두 먹어버린 게 틀림없었다. 생각 같아선 엄마의 방을 따로 마련해 드리고 싶었지만 엄마가 그걸 수락할 리가 없었다. 사람이었을 때나, 누에가 되었을 때나 변함없이 희생을 하는 건 엄마밖에 없었다. 게다가 어느 누구도 엄마의 희생을 모른 척하는 것 같았다. 동생들이야 아직 어려서 모른다 하더라도 아버지는 좀 너무한다 싶었다. 자기 아내가 아니란 말인가.
“너, 대낮에 왜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어. 소여물은 제때 챙겨 줬냐?”
아니나 다를까. 뽕잎을 다 먹은 아버지 입에서 귀에 익숙한 말이 흘러나왔다.
“챙겨 줬어요!”
건식은 엄마 누에를 오므린 왼손바닥에 올려놓고 잠실을 나왔다.
“엄마 데리고 어딜 가는 거야?”


10


옛날 옛날에, 그러니까 치악산 고갯길에서 구미호가 아리따운 여인으로 변해 밤길을 가는 나그네를 홀리던 시절에 벌어진 누에들의 옛이야기야. 1) 임금님은 백성들에게 농업과 양잠을 권장하는 글을 내려 보냈지. ‘옛날 임금이 농사를 짓고 왕후가 누에를 기르는 의식을 직접 행한 것은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려 한 것이다. 그 이후 들에는 밭을 가는 남자들이 넘쳐나고 집에서는 베를 짜는 여자들이 많아졌다. 이로 인해 곡식과 포백이 날로 쌓여 가니 거룩한 일이 아니겠는가.’ 즉 누에를 치는 일이 나라에서 중점적으로 육성했던 사업이었단 얘기야. 그런데,
아빠, 포백이 뭐죠?
아들은 누에처럼 고개를 쳐든 채 건식에게 물었다. 녀석의 눈동자도 누에처럼 동글동글했다. 나름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얘기를 한다고 했는데 걸리고 말았다. 건식은 휴대폰으로 포백을 검색했다.
포백(布帛)은 베와 비단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베는 삼이라는 식물에서 나오는 거고 비단은 알다시피 누에고치에서 나오는 거다. 알겠어? 그러니까 임금이 이런 소리까지 하는 걸 보면 전국적으로 누에 기르는 일이 대단히 활발해졌다는 얘기겠지? 왜? 고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걸 백성들이 알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몇 가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어. 무슨 문제냐? 비단이 많이 생산되다 보니 중간에서 그걸 사서 되파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거야. 장사꾼들이 생겨났다는 얘기야. 그땐 상업을 말업(末業)이라 부르며 천시했는데 그게 아닌 거야. 농사보다 힘들지도 않고 수입도 만만찮거든. 더군다나 비단은 고가의 물품이다 보니 더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었던 거야. 그러니 나라에서는 고민이 깊어진 거지. 세금을 받을 수 있는 농민들이 점점 줄어드니까 말이야. 그땐 장사하는 사람들에겐 세금을 물리는 게 쉽지 않았던 모양이야.
하여튼 고가의 상품인 비단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는데, 여기서 예상하지 못했던 두 번째 문제가 발생한 거야. 그 시대는 신분제 사회였는데 어떤 옷을 입느냐가 곧 신분을 알려주는 거였어. 신분에 따라서 각종 옷과 옷감, 옷감의 양, 옷의 색깔이 제한돼 있었거든. 그 사람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보면 즉시 그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있는 세상이었지. 그런데…… 사람들이 잘살게 되니까 슬슬 욕심이 나는 거야. 돈이 있는데 왜 입고 싶은 비단옷을 못 입느냐 이거지. 훔치는 것도 아니고 내 돈 주고 내 옷 해 입겠다는데 신분제가 웬 말이냐, 이런 불평들이 하나둘 싹텄던 거지.
신분제가 뭔데요?
……신분제?
건식은 뜨끔했다. 막상 아들에게 설명을 하려고 생각하니 의외로 막막했다. 할 수 없이 또 휴대폰을 꺼내들고 검색을 해야만 했다. 이럴 땐 휴대폰이 정말 필요한 물건인 것 같았다. 어떨 땐 족쇄 같았지만.
음…… 간단하게 말해서 그 사람의 계급이 무엇이냐, 또 양반이냐, 평민이냐, 상민이냐, 천민이냐…… 뭐 이런 걸로 이해하면 돼. 하여튼 신분에 따라서 입을 수 있는 옷과 옷감 등등이 엄격하게 서로 달랐는데 백성들이 슬슬 반기를 든 거야. 불합리하고 납득할 수 없는 제도라 생각했거든.
아빠,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래요! 그런데 이건 누에 이야기가 아니라 비단 이야기잖아요?
처음에 누에 한 마리가 없었으면 태어나지도 않을 이야기니까 다 누에 이야기의 연장이야. 하지 말까? (아들이 고개를 저었다.) 좋아. 하여튼 백성들의 불만이 고조됐고 능력만 되면 하나둘 비단옷을 지어 입기 시작했어. 옷만 지어 입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색으로 염색까지 하는 거야. 게다가 비단의 종류도 여러 가지인데 당시엔 중국의 사라능단을 최고로 쳤어. 사라능단은 수입할 수 없도록 법으로 금지했는데도 불구하고 장사꾼들이 몰래 들여왔지. 들여오기만 하면 이익이 엄청났거든.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옷에 대해선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예민하잖아. 당시에도 그랬어.
아빠, 요즘엔 남자들도 옷에 굉장히 민감해요.
그래? 나도 남잔데?
우리 친구들 보면 웬만한 메이커 아니면 옷으로 취급도 안 해요.
말세다, 말세! 남자가 옷을 밝히다니.
아빠, 남자 여자를 구별하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소리 들어요. 누에 이야기, 아니 비단 이야기나 계속 들려줘요.
건식은 아들과 함께 누에들이 집을 짓고 있는 잠실에서 베개를 베고 드러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쥐가 오줌으로 그렸던 어린 시절의 세계전도는 천장 어디에도 없었다. 쉬지 않고 실을 토해 내는 누에들은 조금씩 스스로의 모습을 지워 가고 있었다. 누에로 변한 동생들과 엄마,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잠실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잠실이었다. 건식은 짧은 한숨을 내뱉고 다시 누에들의 옛이야기를 이어 갔다.
바야흐로 비단의 시대가 열린 거야. 여자들은 비단에 화려한 물을 들였고 농가에서는 그 색을 조달하기 위해 곡식 대신 염료를 만들 수 있는 식물인 쪽을 더 많이 심을 정도였어. 나라에서 금지를 해도 소용이 없었지. 여자들은 쪽으로 물들인 초록빛 옷이 없으면 창피해서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는 나가지도 않았대. 그뿐만이 아니야. 자식이 결혼을 하는데 신부 쪽에서 사라능단을 적게 가져왔다고 혼인을 파기시킬 정도였어. 혼인을 성사시키려면 신부 쪽에서는 비싼 값을 지불하는 한이 있더라도 밀무역을 하는 장사꾼들에게 사라능단을 가져오게 했고. 잘사는 사람들부터 점점 사치에 물들기 시작한 거야. 심지어 양반집에서는 잔치가 벌어지면 여자들은 하루에도 서너 번씩 휘황찬란한 비단옷을 갈아입으며 멋도 내고 잘산다는 자랑질도 같이 한 거지. 지금도 그렇지만 그 옛날에도 패션의 중심지는 한양, 서울이었던 모양이야. 사람들은 궁궐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유행하는 거라면 뭐든지 따라하느라 바빴어. 지금 말로 하면 궁궐 스타일! 서울 스타일! 심지어는 치악산 고개고개에서 지나가는 나그네를 유혹하던 구미호도 서울 스타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나그네들이 돌아보지도 않았대.
에이, 거짓말!
거짓말 아냐. 너라면 유행 지나간 지 한참 지난 촌스런 옷을 입고 있는 구미호에게 끌리겠냐?
……그건 아니지만.
구미호야말로 첨단 유행을 따라가야만 하룻밤에 한 명이라도 홀릴 수 있는 거야. 나그네들도 세상 보는 눈이 있을 거 아니냐.
아빠, 얘기가 엉뚱한 쪽으로 흘러가는 거 같지 않아?
뭐…… 그렇기도 하지만, 결론은 그 모든 덕분에 농촌에선 누에치기가 성황을 이뤘다는 거야. 집집마다 빈 공간만 있으면 무조건 누에를 쳤으니까.
밤이 깊었다. 건식은 옆에서 잠든 아들에게 담요를 덮어 주고 잠실에서 나왔다. 아내는 불도 켜지 않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홀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안주는 마른오징어가 전부였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온 건식은 거실에서 잠시 망설였다. 잠실로 다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아내 옆으로 갈 것인가. 아내는 건식을 돌아보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소주 한잔 해.”
“……누에는 술 냄새 싫어하거든.”
“그럼 마시지 마.”
상도 없이 술병 앞에 앉아 있는 아내의 구부러진 등을 건식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시고 밖에서 자지 뭐.”
건식은 아내 옆에 앉았다.

1) 소설 곳곳에 들어가는 누에들의 옛이야기는 『조선시대 양잠업 연구』에 나오는 각각의 조선왕조실록에서 많은 부분을 취하였다.



11


“고마워.”
“뭐가?”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말해 준 거?”
“내가? 언제?”
“엊그제 밤 차 몰고 나갔을 때.”
“……그냥 한 말이야. 고마워할 것까진 없어.”
“새벽까지 차를 몰고 다니는 동안 그 말이 계속 떠올랐어.”
“상황이 바뀌었다면 당신도 내게 같은 말을 했을 거야. 우린…… 가족이잖아.”
“왜 새 직장 알아보라고 채근하지 않아?”
“채근한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그보다…… 아, 아냐.”
“응?”
건식은 망설임이 가득한 아내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내는 건식의 시선을 피해 텔레비전 화면에 눈을 맞췄다.
“뭔데?”
“……쉬는 동안 누에와 얽힌 어떤 기억들을 잘 정리했으면 싶어.”
“……그래.”
“정리되면 내게 말해 줘야 돼.”
자리에서 일어난 아내는 잠깐 비틀거리더니 안방으로 들어갔다. 대답도 듣지 않고. 건식은 닫힌 안방 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나지막한 음악소리만 거실을 물들이고 있는 밤이었다. 닫힌 안방 문 앞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아내가 가느다랗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건식은 문의 동그란 손잡이를 반 바퀴 돌렸다가 제자리로 갖다 놓았다. 아내가 잠들어 있는 방에 들어가기가 왠지 꺼려졌다. 부담스럽다고 해야 하나. 그러고 보니 실직 이후 안방에 들어가 잠든 적이 없었다. 거실의 소파나 대부분 잠실로 만든 방에서 보냈다. 건식은 아내가 앉아서 술을 마셨던 자리로 돌아왔다.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반쯤 누워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았다. 졸음이 밀려왔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왔다가 다시 무겁게 올라가기를 되풀이했다. 심야의 음악방송은 끝났다. 다시 몇 차례 눈꺼풀이 내려왔다가 올라갔는데…… 텔레비전 화면은 온통 누에들로 가득했다. 건식은 꿈을 꾸고 있는 거라 여기며 누에들이 꿈틀거리는 화면을 나른한 눈길로 응시했다. 누에들은 일제히 머리를 쳐든 채 잠박 밖의 어딘가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아빠?”
누에들 중 한 마리가 건식을 부르는 것 같았다. 건식은 어느 누에가 자신을 부르는지 찾으려고 눈을 찡그렸다.
“아빠, 무서워요.”
하지만 많은 누에들 중 어느 누에가 아들의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지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아들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 있는 거야?”
건식은 화면 가까이 다가가 눈을 부릅떴다.
“아빠?”
꿈이었다. 눈을 뜨자 아들은 화면 속이 아닌 거실에 서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화면 속의 누에는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건식은 텔레비전에서 나온 것만 같은 아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아들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왜 우냐?”
“누에가…… 엄청 큰 누에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했어요.”
눈물을 흘리는 아들은 한 뼘쯤 문이 열린 어두운 잠실을 가리켰다. 그 안에서 금방이라도 괴물 누에가 방문을 무너뜨리며 나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떨고 있었다. 건식은 아들을 품에 안았다. 아들의 심장이 콩닥거리는 게 가슴으로 전해졌다.
“누에가 얼마나 컸는데?”
“공룡만 했어요.”
아들은 어둠이 흘러나오는 잠실 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자세히 말해 봐.”
“……처음엔 손가락만 하던 누에가 계속 커지는 거예요. 눈에 보일 정도로 쑥쑥 커지더니 어느새 나보다 커졌어요. 그러고도 멈추지 않고 계속 커지는데 이번엔 아빠보다 더 커졌어요. 마침내 공룡만큼 커진 누에가 입을 쩍 벌리고 나한테로 슬금슬금 다가왔어요. 잡아먹으려고.”
“누에는 뽕잎밖에 먹지 않는다고 했잖아.”
“그렇게 말했더니 이젠 몸이 너무 커져서 뽕잎 갖곤 배가 부르지 않다고 했어요.”
“누에가 네게 그렇게 말을 했다고?”
아들이 고개를 끄떡였다.
“누에가 어떻게 말을 하니. 꿈을 꾼 거야. 아빠도 옛날에 비슷한 꿈을 꾼 적이 있어.”
“꿈이 아냐. 어마어마하게 큰 누에가 진짜 말을 했어요.”
“……그다음엔 어떻게 했는데?”
“무서워서 도망치려고 했는데…… 발이 바닥에 딱 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어요. 시커먼 누에 입속으로 막 빨려들려고 할 때 간신히 도망쳤어요.”
“그래?”
“누에의 왕이었어요!”
건식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들의 손을 잡고 잠실 앞으로 다가갔다. 조금 열린 문 너머의 잠실은 평소와 달리 유달리 캄캄한 편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들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건식은 문을 열고 손만 디밀어 불을 켰다.
“자…… 봐라.”
“아빠, 봐요!”
아들이 건식의 몸 뒤로 숨었다. 불이 켜진 잠실엔 아들의 말대로 다른 누에들은 보이지 않고 잠실 전부를 다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누에 한 마리가 입을 벌린 채 엎드려 있었다. 누에가 잠실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건 작은 문 때문이었다. 건식은 아들의 손을 잡은 채 뒷걸음질을 쳤다.
“제 말이 맞잖아요!”
“언제 저렇게 큰 거야!”
공룡처럼 커져 있었지만 다행히 누에는 그리 사나워 보이진 않았다. 건식과 아들은 거실에서 누에를 바라보고 누에는 잠실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바깥의 소동에 잠이 깨었는지 안방에서 나온 아내까지 거실로 나왔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 건식과 아들의 등 뒤에 숨었다. 세 식구의 눈이 한 마리 거대한 누에의 눈앞에서 한동안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누에도 문 밖의 세 사람을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당신이 데려온 누에잖아. 어떻게 좀 해봐.”
“아빠, 배가 고픈 거 같아요.”
아내와 아들이 옆구리와 등을 손가락으로 찔렀지만 건식의 머릿속엔 마땅한 대처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손가락만 하던 누에가, 실을 토해 내며 고치를 짓던 누에가 갑자기 커져버린 상황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감감할 뿐이었다. 누에가 직접 입을 열어 말하지 않는 이상 누에의 의중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커져버린 터라 집 밖으로 내보낼 수도 없었다. 집 밖은 고사하고 잠실 밖으로의 이동도 쉽지 않았다. 아들이 다시 건식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빠, 배가 고픈 게 맞아요. 아까 나한테 말했다니까요.”
“말을 했다고?”
“했어요!”
건식은 누에 앞으로 딱 반걸음 다가갔다. 누에의 축구공만 한 눈동자가 건식을 따라 약간 움직였다. 누에의 눈동자가 선해 보인다는 것을 확인한 건식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배고프니?”
턱을 방바닥에 붙이고 있던 누에가 건식의 말에 힘겹게 머리를 들더니 천천히 끄덕거렸다. 그 말에 건식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저렇게 거대한 누에가 먹을 뽕잎의 양은 엄청날 게 틀림없었기에. 한 자리에서 쌀 한 자루만큼의 뽕을 먹어도 먹었다는 기별조차 없을 것 같았다. 건식은 한 걸음 더 다가가 다시 물었다. 물어볼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말을 할 줄 아니?”
누에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듣기만 한단 말인가.
“어떻게 하다 그렇게 덩치가 커졌지?”
누에는 힘이 다 떨어졌는지 다시 턱을 방바닥에 붙이고 힘없는 눈으로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배가 고파 거의 아사지경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조금만 참아. 밖에 나가 뽕을 구해 볼게.”
감기려던 누에의 눈꺼풀이 올라갔다가 셔터처럼 스르르 내려왔다.
“누엘 돌보고 있어. 금방 갔다 올 테니.”
아내와 아들에게 누에를 부탁한 뒤 건식은 손전등과 낫을 들고 집 뒤편 야트막한 뒷산으로 올라갔다. 재래시장에서 누에를 샀을 때 다행히 뒷산의 뽕나무가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알아 놓은 터였다. 누에가 다 컸기에 손으로 일일이 뽕잎을 딸 필요는 없었다. 건식은 뽕나무 가지를 낫으로 툭툭 잘라 한쪽에다 쌓았다. 왜 갑자기 누에가 커졌을까 생각하며. 땀을 뻘뻘 흘리며 손에 잡히는 뽕나무 가지를 모두 자르니 양이 제법 많았다. 건식은 뽕나무 가지를 노끈으로 묶을 새도 없이 가슴에 한 아름 안고 집을 향해 내리막길을 뛰었다. 그사이 공룡처럼 커버린 누에가 아사하지나 않았을까 걱정하며.
“아빠, 누에가 눈을 안 떠요!”
건식은 현관문을 닫지도 못한 채 뽕나무 가지를 누에의 입 앞에 들이밀었다. 방바닥에 주름 잡힌 턱을 붙인 채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던 누에의 눈이 조금씩 올라갔다. 건식과 아내, 그리고 아들은 숨을 죽이고 있다가 누에가 첫 뽕잎을 갉아먹기 시작하자 비로소 탄식을 뱉어냈다.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현관 입구의 뽕나무 가지를 가져와 누에 앞에 쌓기 시작했다.
“배가 많이 고팠나 봐요.”
아들이 중얼거렸다.
“걸신들린 거 같다.”
아내의 첫 논평이었다.
“덩치가 있잖아.”
건식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누에는 마치 생선을 발라먹는 것 같았다. 뽕잎을 다 갉아먹은 뽕나무 가지는 살점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생선의 가시처럼 차곡차곡 쌓여 갔다. 건식은 그 위에 새 뽕나무 가지를 계속 올려 주었다. 한 아름의 뽕나무 가지에 매달린 뽕잎은 정말이지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꺼억―!”
뽕잎을 모두 먹어치운 거대한 누에가 트림을 내뱉자 거실은 이내 뽕잎 냄새로 진동했다. 역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누에의 표정도 한결 밝아져 있었다. 눈에서 생기가 도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건식은 누에 가까이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
“……더 갖다 줄까?”
먹을 만큼 먹었다는 듯 누에는 고개를 젓고 난 뒤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덩치가 너무 커서 좁은 잠실에서 움직이기조차 버거운데도 불구하고. 마치 줄에 묶인 개가 똥 누울 자리를 찾아 맴을 도는 것만 같았다. 누에가 왜 그러는지 몰라 의아해하던 건식은 잠시 뒤에야 그 의도를 눈치 채고 고개를 끄떡였다. 아니나 다를까.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는 누에의 입에서 가느다란 실이 술술 흘러나왔다. 희고 가느다란 실이.
“고치를 지으려는 거야!”
“이렇게 큰 누에가요?”
아들의 입이 벌어졌다.
“고치가 엄청 크겠네!”
아내도 거들었다.
“우리 식구가 평생 옷을 지어 입어도 남을 비단이 생길 거야.”
웃는 건식의 입 꼬리가 귀에 걸렸다.


12


“드세요.”
정지로 들어온 건식은 운두가 낮은 싸리나무 소쿠리에 엄마 누에를 올려놓고 싱싱한 뽕잎을 듬뿍 뿌려 주었다. 엄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잠실에서 엄마 누에만 손바닥에 올려놓고 나올 때부터.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잠실에 있음 배고파도 뽕잎을 잘 안 드시잖아요. 혼자 있을 때 빨리 드세요.”
“……배 안 고파.”
“얼굴이 엄청 홀쭉해졌단 말이에요! 거울 갖다 드릴까요?”
“알았다, 알았어!”
“모자라면 얘기하세요.”
부뚜막 위에 소쿠리를 올려놓고 건식도 아궁이 앞에 밥상을 놓고 앉아 점심을 먹었다. 건식이 냄비에다 직접 지은 밥이었는데 불 조절을 잘못해 밑은 타고 위는 거의 생쌀이나 다름없는 밥이었다. 쌀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보리쌀이 대부분인 잡곡밥이었다. 그 밥을 주걱으로 골고루 섞었지만 입 속의 간사한 혀와 어금니는 삼층밥의 각 부위를 정확하게 구별해 내고 있었다.
“……국도 없이 맨밥을 먹는구나. 닭장에 알이 많을 텐데 계란프라이라도 해서 먹지.”
뽕잎을 먹던 엄마가 소쿠리 너머로 얼굴을 내민 채 초라한 밥상을 훑어보았다. 반찬은 총각김치와 고추장이 전부였다. 건식은 총각김치를 우적우적 씹으며 대꾸했다.
“저녁에 해먹을게요.”
다행히 엄마는 삼층밥을 지은 건 눈치 채지 못했다. 건식은 일부러 밥에 고추장을 비벼 숟가락에 잔뜩 퍼 담아 입에 넣었다. 볼이 불룩 튀어나오도록.
“체하겠다. 천천히 먹어.”
“빨리 먹고 뽕 따러 가야 돼요. 참, 어디로 가는 게 좋아요?”
“너머골 마가리 뽕이 많아 자랐을 거야. 거기 돌배나무 알지?”
건식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 돌배나무에 올라가 나뭇가지를 흔들어 돌배를 떨어뜨린 적도 많았다. 돌배나무 아래는 자그마한 늪이 있는데 아주 자그마한 조개 같은 산골이 많아서 진흙을 파헤쳐 찾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산골은 뼈가 부러진 사람이 먹으면 뼈가 잘 붙는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렇게 찾아낸 산골을 몇 번 먹어 봤는데 역시나 아무 맛도 없었다. 그냥 약일 뿐이었다. 그 돌배나무 주변에 산뽕나무가 많다는 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하기야 관심이 없으면 아무리 옆에 가까이 있어도 모르는 법이었다.
“학교 못 가서 서운하지 않아?”
“오늘은 학교 안 가는 일요일이야!”
“그래? 누에로 변하니 이젠 시간 가는 거도 잘 모르겠다.”
“뽕 더 드세요.”
건식은 뽕 한 줌을 소쿠리에 뿌렸다. 뽕잎 아래서 엄마가 소리쳤다.
“아냐, 아냐! 이제 배부르니 니 동생들 갖다 줘.”
“엄마, 걔들은 더 먹으면 배 터져요!”
“누에가 뽕잎 먹고 배 터져 죽었다는 소린 첨 듣는다!”
건식과 누에로 변한 엄마는 아궁이 앞과 부뚜막 위에서 한참을 웃었다. 그 소리를 듣고 정지 옆 외양간에 있던 소가 화답하듯 길게 울었고 외양간 옆 닭장의 암탉이 때 맞춰 알을 낳았는지 요란하게 울며 위세를 떨었다. 마지막으로 대문 옆 삽사리가 영문도 모른 채 컹컹 짖었다. 잠실에 있는 아버지와 두 동생들은 아마 궁금해서 잠박 밖으로 목을 길게 내민 채 밖으로 나간 엄마가 빨리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게 틀림없었다.
건식은 손바닥에 엄마 누에를 다시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잠실로 향했다. 엄마 누에는 잠실에서 나올 때와 달리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었다.


누에들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뽕잎을 따는 일이 엄마의 하루 일과 중 대부분을 차지했다. 미처 양을 채우지 못하면 아버지가 밭일이 끝난 저물 무렵 산으로 가 산뽕나무를 가지째 잘라 지게 가득 싣고 돌아왔다. 정지에 깔아 놓은 멍석 위에 앉아 그 뽕나무 가지에 매달린 뽕잎들을 따는 건 건식과 동생들 몫이었다. 뽕잎을 따는 것도 요령이 필요했다. 그냥 잡아당기면 가지의 질긴 껍질이 함께 벗겨지기 때문에 끊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뽕잎의 목을 똑, 소리 나게 꺾어야 하는 게 중요한데 손재주가 야무져야 하는 일이었다. 막내 하식이는 아예 가위를 들고 뽕잎의 목을 잘랐다. 반면 예식이는 여자여서 그런지 맨손으로도 톡, 톡, 잘도 땄다. 그렇게 한 바구니 가득 뽕잎이 쌓이면 엄마가 뽕칼로 썩썩 썰어서 누에들이 있는 잠실로 가져갔다. 밤을 새워 뽕을 따도 누에들의 배를 채우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사람보다 훨씬 많이 먹는 걸 보니 돼지를 닮았나 봐.”
“마릿수가 많아서 그렇지 사람보다 훨씬 적게 먹어. 그리고 누에가 어떻게 돼지랑 닮았냐!”
하식이의 투정에 예식이가 대꾸를 했다. 둘의 손가락은 연둣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직도 따야 할 뽕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마치 뽕과의 전쟁을 치르는 것 같았다. 엄마는 누에들에게 뽕을 주느라 바빴고 아버지도 정지 한쪽에서 잠박을 만드느라 분주했다. 건식도 중간고사 시험공부를 밀쳐 놓고 뽕 따는 일과 아버지가 잠박 만드는 일을 번갈아 거들었다. 식구들 모두 여태 저녁도 먹지 않은 상태였다. 누에들에게 뽕을 주는 일이 끝나야 사람들의 저녁식사 시간이 돌아올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하식이가 소리쳤다.
“배고파!”
“참아. 너만 배고프냐!”
“점심도 조금밖에 못 먹었단 말이야.”
“너는 조금 늦게 먹어도 상관없지만 누에들은 제때 뽕잎을 먹어야만 나중에 좋은 고치를 지을 수 있단 말이야.”
“나는 누에만도 못한 인생이야!”
“인생? 너, 인생이 뭔지 알아?”
건식이 끼어들었다.
“알아. 인생은…… 인생은― 나그네길― 어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야, 그건 노래 가사잖아!”
건식과 예식이가 동시에 소리쳤다. 하식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최희준의 ‘하숙생’을 불렀다.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었지만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노래를 부르는 얼굴만은 인생을 여러 번 살아 본 것처럼 노숙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잠박을 만들던 아버지가 따라 부르자 건식도 나지막한 소리로 노래를 따라갔다. 예식이는 손뼉을 치며 박자를 맞췄고. 누에들에게 뽕을 주고 정지로 들어온 엄마는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이더니 이내 박꽃처럼 환해졌다.
“이번엔 예식이가 한번 불러 봐라.”
낮 동안 소를 부려 감자 심을 뒷밭을 갈았다는 아버지는 하식이의 노래에 피곤이 풀렸다며 한바탕 웃고 난 뒤 예식이를 지목했다. 예식이의 얼굴이 금세 발개졌다. 건식이 등을 두드려 주자 고개를 끄덕이곤 곡목을 고르느라 잠시 망설였다.
“누나, 그 노래 불러!”
“무슨 노래?”
“낮에 뽕 따면서 불렀던 노래!”
“그거…… 어려워.”
엄마는 부뚜막에 걸어 놓은 솥에 쌀을 안치고 아버지는 엄마가 가져다준 막걸리 한 대접을 단번에 들이켜고 다시 잠박을 엮었다. 아궁이에 마른 솔가지가 들어가자 불은 화르르 피어올랐고 알불을 담은 화로 위에 올려놓은 냄비에선 구수한 된장 냄새가 흘러나와 군침을 돌게 만들었다. 하식이의 채근을 몇 차례 더 듣고서야 예식이는 앉은 채로 뽕잎들이 매달린 뽕나무 가지에서 뽕을 따며 노래를 시작했다. ‘남쪽 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날면 / 뒷동산에 동백꽃도 곱게 피는데 / 뽕을 따던 아가씨들 서울로 가네 / 정든 사람 정든 고향 잊었단 말인가’ 예식이의 노래는 초등학생답지 않게 애잔했다. 건식은 노래를 부르는 예식이가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누나처럼 느껴져 깜짝 놀랐다. 아버지도 흥이 나는지 엄마에게 빈 막걸리 대접을 내밀었다. 한 대접 더 달라는 뜻이었다. 엄마는 아버지 몰래 예식이에게 눈을 흘겼다. 그것을 눈치 챈 예식이의 목소리가 한풀 가라앉았지만 오히려 더 구슬퍼졌다. 예식이는 2절까지 모두 부른 뒤에 노래를 끝마쳤다. 아버지와 하식이가 소리를 치며 박수를 쳤고 보꾹의 거미줄에 매달려 있던 왕거미가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재빨리 숨는 저녁이었다. 예식이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돼 있었다.
“아직 어린애가 무슨 노랠 그리 청승맞게 부르냐.”
“노랜 그렇게 불러야 맛이 있지!”
아버지가 예식이를 두둔했다.
“앞으론 어른들 노래 부르지 마라. 애들은 애들 노랠 불러야지.”
“엄마, 애들 노랜 재미가 없어요!”
하식이가 툴툴거렸다. 예식인 고개를 숙인 채 뽕만 땄다.
“나중에 어른 돼서 불러도 안 늦어.”
“집에서 부르는 건데 뭐 어때. 애들 배고플 텐데 빨리 밥상이나 차려.”
“미처 밥이 돼야 차리지요.”
다섯 식구는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정지의 아궁이 앞에 깔아 놓은 멍석 위에서 저녁을 먹었다. 부뚜막에 올려놓은 남포등이 등을 구부린 채 저녁을 먹은 다섯 식구의 밥상을 비춰 주는 저녁이었다. 보꾹에 숨어 있던 왕거미가 줄을 타고 다시 슬슬 내려오고 있었다. 누구보다 먼저 밥그릇을 다 비운 하식이가 가마솥 근처로 내려오는 왕거미를 발견하곤 재빨리 외쳤다.
“내려오면 사람이고, 올라가면 귀신이다!”
왕거미는 그 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깜짝 놀라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며 망설이는 밤이었다.


돌배나무는 시퍼런 돌배를 줄줄이 매달고 있었다. 아직 익지도 않았는데 바람에 떨어진 돌배도 더러 있었다. 돌배를 바라보기만 했는데도 입속으로 시큼한 침이 가득 고였다. 돌배나무 아래의 늪은 물이 마른 채 풀만 무성했다. 누가 진흙을 퍼내 산골을 찾은 흔적도 없었다. 예전만큼 산골이 나오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은 것도 같았다. 건식은 돌배나무 그늘에 앉아 땀을 식혔다. 집에서 돌배나무까지 지게를 지고 빠른 걸음으로 왔는데도 삼십여 분은 걸렸다. 다행히 건식보다 먼저 와서 뽕을 따간 사람도, 뽕을 따는 사람도 없었다. 돌배나무 주변의 산뽕나무들엔 붉고 검은 오디들이 보석처럼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가지째 잘라라. 니 혼자 이 많은 누에가 먹을 뽕을 따려면 세월일 테니.”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면 어떡해요?”
“지금은 비상시국이야. 그리고 걱정 안 해도 돼. 누에들이 곧 고치 지을 때니까 뭐라 할 사람도 없다. 산뽕나무에 임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얼마만큼 따야 돼요?”
“내가 지게에 바소구리 얹어 꼴 베어올 때 봤지. 뽕나무 가지 덩치가 그 정도는 나와야 누엘 하루 먹일 수 있을 게다. 무겁진 않을 거야.”
건식은 지게 작대기에 기대 놓은 빈 지게를 바라보며 아버지 누에의 말을 떠올렸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마냥 한숨만 쉬고 있을 순 없었다. 주루목에 넣어온 주먹밥 한 덩이를 서둘러 삼킨 건식은 낫을 들고 꽤 큰 뽕나무 위로 올라갔다. 뽕나무 줄기는 위로 올라갈수록 당연히 가늘어졌고 건식의 몸무게가 실리자 휘청거렸다. 게다가 그때까지 잠잠하던 골짜기에 바람까지 슬슬 불어오기 시작했다. 건식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 손으론 뽕나무 줄기를 잡고 낫을 쥔 다른 손은 잘라낼 가지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하필 계곡의 낭떠러지 옆에 뽕나무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까딱 잘못하면 계곡 아래로 처박힐 위험이 다분했기에 가지를 밟은 두 다리가 후들후들 춤을 췄다. 뽕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건식만 바라보는 누에들을 생각하니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특히 사람이었다가 누에로 변한 가족들을 떠올리니…….


13


자그마한 잠실에 자리를 잡은 거대한 누에는 실을 뽑아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마치 거미줄을 치는 것만 같았는데 시간이 흐르자 모양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처음엔 친 거미줄 같은 것은 일종의 거푸집 같은 거였다. 그 거푸집을 토대로 안쪽에서 둥글게, 둥글게 실을 뽑아 자신이 거처할 집을 짓고 있었다. 또 처음에 얼기설기 친 거미줄 같은 것은 고치를 지을 동안 천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도 무척 용이해 보였다. 그렇게 누에는 자신을 가운데 놓고 입에서 토해 내는 하얀 실로 집을 짓는 중이었다. 한 달가량 뽕잎만 먹고 만든 가느다란 실로 집을 짓다니…… 건식은 잠실 입구에서 베개를 베고 모로 누워 거대한 누에가 짓고 있는 집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누에의 모습은 촘촘해지는 실의 장막 너머에서 점점 지워져 가고 있었다. 함께 지켜보던 아내와 아이는 거실에서 한 이불을 덮은 채 잠들어 있었다. 건식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내려가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마치 누군가를 끝까지 기다리려는 듯이. 아니, 잠들지 않고 있다가 누군가를 마지막으로 배웅하려는 듯이.
“……왜 잠을 자지 않는 거야?”
건식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내와 아들은 번갈아 코를 골고 있었다. 건식은 잠실의 누에를 바라보았다. 누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내가 물은 거야.”
“……네가 어떤 고치를 지을지 궁금해서. 너처럼 큰 누에는 처음 보거든.”
“내가 사람 말을 하는 게 놀랍지 않은 모양이네?”
“……오래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어.”
건식은 자세를 바꿔 잠실 앞에서 스님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고치를 짓고 있는 누에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고치가 궁금한 게 아니라 누에의 말을 기다린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누에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에서 실을 토해 냈다. 처음 토해 낸 실에서 한 번도 끊어지지 않는 실을. 거대한 누에가 실을 모두 토해 내면, 그래서 고치가 완성되면 그 길이는 대체 얼마나 될까. 초록의 뽕잎이 누에의 몸속으로 들어가 가느다랗고 하얀 실로 변한다는 게 새삼 믿기지 않았다. 누에는 마치 살아 있는 제사(製絲) 공장 같았다. 아마 악덕 공장장이 있었다면 누에들이 고치를 짓지 못하게 하고 입으로 토해 내는 실을 곧바로 실패를 이용해 감아버릴 거란 생각도 들었다. 수만, 수억 마리의 누에들이 실을 토해 내고 그 앞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실패들…… 엄마, 아버지, 동생들은 아직도 그런 실 만드는 공장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까지도…….
“그렇진 않아.”
“……무슨 소리야?”
“아직도 누에로 살고 있는 건 아니라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 생각을 읽은 거야?”
누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공에서 하늘거리는 리본처럼 실을 토해 내며.
“그럼 우리 가족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데?”
“거기까진 모르는데 하여튼 누에로 살고 있진 않아. 너도 알다시피 누에는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하잖아. 길어야 두 달이지.”
그러고 보니 그랬다. 건식은 마치 중학생이었던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자신의 몸을 훑어보았다. 당연히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었다. 아내와 아들은 거실에서 잠들어 있었고 자신은 어른의 몸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였다. 그런데도 왠지 그 시절로 되돌아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니가 우리 가족들 얘길 어떻게 알지?”
“사람이 누에로 변했잖아. 누에들 세계에선 유명한 얘기야.”
“왜 갑자기 누에로 변했는지 알아?”
“그건 누에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일 때문에 벌어진 거 같은데.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잘 모르겠어.”
“하기야 수수께끼 같은 일이긴 하지.”
다시 떠올려도 거대한 수수께끼 같은 사건이었다.
건식은 변해 가는 잠실 풍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스스로 토해 낸 실의 그물망 속으로 자취를 감춰 가는 누에는 이제 희미한 머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마치 안개 속 같은 곳에 둥그런 고치 한 채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밖에서 안으로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실. 시간이 흐르면 누에는 완벽하게 자신의 몸뚱이를 고치 속에 감출 것이다. 실을 다 토해 냈기 때문에 몸뚱이는 쪼그라들어 번데기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잠들 것이다. 날개 달린 누에나방이 되기 위한 잠이었다. 그 잠에서 깨어나면 고치를 뚫고 나와 교미를 하고 알을 낳으면 끝이었다. 알에서 깨어나 대략 45일의 삶을 살다 가는 것이다. 45일의 삶. 건식으로선 납득하기 힘든 삶이었다. 누에로 변한 엄마와 아버지, 동생들도 결국 그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건식만 남겨 놓고 그렇게 모두 떠나버렸다.
“넌 어쩌다가 그렇게 몸뚱이가 커졌냐? 가만…… 너도 전에 사람이었어?”
“기억이 없는 걸 보니 사람은 아니었어. 그냥 막 잠에서 깨어났더니 이렇게 변해 있는 거야. 배는 엄청 고프고.”
“그러면 어떻게 사람 말을 하는 거지?”
“실은…… 나도 그걸 잘 모르겠어. 네게 무슨 말을 전하라는 누군가의 부탁이 머릿속에서 어렴풋이 맴돌긴 하는데 잘 떠오르지가 않아.”
“그게 뭔데?”
건식은 무릎걸음으로 누에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겹겹이 쳐진 실 때문에 더 이상의 접근은 불가능했다. 그물망 너머에서 누에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가족들이 모두 누에로 변해버려 힘들었겠네?”
“……뭐, 조금.”
“그래도 지금껏 잘 살아온 걸 보니 대단해.”
“……잘 살아온 건지는 잘 모르겠어.”
건식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눈 주변이 뜨거워지고 방울방울 솟아난 눈물이 방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곳에서 여기까지 참 먼 길을 걸어온 것만 같았다.
“아마…… 힘내라는 말을 전하라고 나를 이리로 보낸 거 같아.”
“누가?”
거대한 누에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누에를 감싸 안은 커다란 고치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건식이 지금까지 본 고치 중에 가장 큰, 희고 둥근 고치였다. 건식은 눈물이 멈추지 않는 눈으로 그 고치를 바라보다가 스르르 누워 잠들었다. 꿈속에서도 건식은 누에로 변한 가족들이 보이지 않아 섭섭함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 눈물을 흘렸는데 그 꿈의 끝자락에서 선물 하나를 받았다.


아름다운 비단 한 필을. 그러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눈물에 통곡까지 겹쳐서 꿈을 적시고 또 적셨다.


<계속>



작가소개 / 김도연(소설가)

- 강원도 평창 출생. 《강원일보》,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0년 중앙신인문학상. 소설집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십오야월』, 『이별전후사의 재인식』, 장편소설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삼십 년 뒤에 쓰는 반성문』, 『아흔아홉』, 『산토끼 사냥』, 『마지막 정육점』, 산문집 『눈 이야기』, 『영』 등이 있음.


《문장웹진 2016년 3월호》


추천 콘텐츠

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