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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의 과묵함

  • 작성일 2016-02-04
  • 조회수 1,295



가이드의 과묵함




이채원



삽화-가이드의-과묵함


어머니는 까마득하게 높은 건물의 유리마루 위에서 여든 번째 생일을 맞았다. 높기로 세계에서 순위를 다툰다는 그 건물은 그날 위쪽이 안개에 묻혀 두 동강난 듯 기이해 보였다. 어머니는 차마 그곳을 딛지 못하겠다고 눈을 가리고 물러섰다. 그때 어머니를 유리마루 위로 옮겨 놓은 건 가이드였다. 뒤에서 밀었는지, 번쩍 안아들었는지, 어떻게 옮겨 놓았는지는 순식간이어서 알 수 없었다. 그런 다음 가이드는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다. 말이 가이드지 여행하는 동안 퍽도 몸을 사려 어머니를 그렇게 옮겨 놓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가이드는 지나치게 말이 없었다. 상해에 도착해 여행사 패키지에 묶여 온 사람들이 입국절차를 마치고 피켓을 든 가이드 옆에 모였다. 가이드는 명단과 사람들을 확인한 다음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그냥 서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가이드를 바라보며 옆에 모여 서 있었다. 한참 지나자 사람들은 왜 가이드가 계속 서 있기만 하는지 영문을 알지 못해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사람이 왜 계속 서 있는 거냐고 물었고 가이드는 그때서야 아직 두 팀이 나오지 않아 기다려야 한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도 가이드는 여전히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뚱한 채로 서 있기만 했다. 내가 무슨 일로 나머지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는 건지 알아봐 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막 꺼내려고 하는데 가이드가 입국심사대 쪽으로 향했다. 얼마 뒤 가이드 뒤로 손자들의 손을 잡은 노부부와 울긋불긋한 옷차림의 중년여자들이 따라왔다. 가이드는 말없이 혼자 청사 밖을 향해 걸어갔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그들이 무슨 일로 늦어졌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따라오라든지 하는 말도 하지 않은 채였다. 사람들은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하는 표정으로 짐을 끌고 부랴부랴 가이드 뒤를 따랐다. 다른 여행사의 단체비자와 섞인 탓에 늦어졌다는 사정은 나중에 그들에게서 직접 들어 알게 되었다. 가이드는 청사 밖에 대기하고 있던 한 버스 앞에서 멈춰 섰다. 사람들은 그게 그 버스에 타라는 뜻이라 헤아려 올라탔다. 모두 버스에 올라 자리를 잡자 가이드가 마이크를 들고 제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 저는 하루에 말을 세 마디밖에 안 한다는 경상도 남자보다도 말이 없습네다.
아니나 다를까, 연변 출신이라는 가이드는 스스로 과묵하다고 불었다. 자신이 그런 줄 잘 알고 있으며 과묵함을 자부한다는 투였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러하니 늦게 온 사람들이 무슨 일로 늦었는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아서 납득하라는 건가. 가이드는 일정에 따라 점심식사 장소로 이동한다고 알리고는 제자리에 앉아버렸다. 어머니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가이드 쪽을 바라본 다음 나를 보고는 피식 웃으셨다. 조금 이상하다는 뜻인데 점퍼 색깔 때문인지 그러는 어머니의 얼굴이 상기되어 보였다. 아침에 공항에서 만난 어머니는 빨간 캐리어에 빨간 점퍼 차림이었다. 딸 둘만 동행하게 되어 애초 당신의 바람에는 미치지 못하는 여행이지만 그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기는 모습이었다. 어머니의 바람은 당신 자식 모두와 여행하는 것이었다.
기내식을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점심이라니 내키지 않아 다음 일정과 순서를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가 이륙한 뒤 바로 기내식이 나왔는데 어머니는 음식이 입에 잘 맞는다고 하셨다. 생소한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는 식성이라 어머니와 외식 한 번 하기도 쉽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뜻밖이었다. 기내식을 마다하시지 않는 것만 봐도 어머니가 자식들과 여행 한 번 하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짐작이 되었다. 어머니는 기내식 밥을 다 드신 다음 함께 나온 빵을 가방에 넣었다. 언제 드시려고 빵을 챙기느냐고 묻자 나중에 출출할 때 먹지, 하며 빙긋 웃으셨다.
지난봄 아버지 제삿날이었다. 형제들이 모두 모인 자리여서 어머니의 여든 생신을 어떻게 보낼지 의논했었다. 일흔 때 변변치 않게 보냈으니 여든 때는 잘 준비해 보자는 생각이 형제들 모두에게 있었다. 언제인가부터 어머니 생일상을 한 집에서 차리지 않고 형제들이 돌아가며 부담해 음식점에서 모이는 식으로 치러 왔다. 어머니는 그냥 집에 모여 한 끼 먹으면 되지 뭘 밖에 나가 부산을 떠느냐고 내키지 않아 하다가 바깥바람을 쐬는 기회로 삼아 이끄는 대로 따라 주었다. 그날 형제들의 의견은 해외여행으로 모아졌다. 처음에는 어머니 몸으로 비행기 여행을 견디시겠느냐는 염려가 있었는데, 비행시간이 짧은 중국 지역이라면 문제가 없으리라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어머니는 중년에 수술한 다리가 말썽을 부리는 것 말고는 같은 연령대 노인들보다 정정한 편이다. 정신이야말로 다른 노인들보다 또렷해 옛날 모눈종이에 설계도를 그릴 때 못지않다. 어느 지역이 어머니가 여행하기에 마땅할지 두런대고 있는 우리에게 어머니가 갑자기 당신의 바람을 밝혔다.
- 내 자식들하고만 여행 한 번 하고 싶다.
평생 처음으로 밝힌 당신이 받고 싶은 생일선물이었다. 어머니가 말한 자식이란 며느리와 사위를 뺀 당신 몸으로 낳은 자식들만 뜻했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라 형제들은 어리둥절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모두 기꺼이 그 여행에 동참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막상 날짜가 다가오자 형제들의 말이 바뀌기 시작했다. 일이 너무 바빠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다거나 아이 대학입시 때문이라거나 전세금 인상으로 여유가 없어서라며 함께 여행할 수 없는 이유를 댔다. 나는 아이가 또 취업시험에 통과하지 못해 심란한 와중이지만 말을 바꾸지 않기로 했다. 결국 팔순 기념 여행에 동행한 자식은 다섯 남매 중 미연과 나, 딸 둘뿐이었다. 처음 여행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대학입시는 예정되어 있었고, 직장 일은 바빴고, 전세금은 오르고 있었다. 그럴 줄 예상했다는 듯 어머니는 서운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동행하지 못하는 자식들 사정을 염두에 두어서인지 어머니는 여행을 앞두고도 어딘지 미진한 모습이었다.
그 한 번이 참 힘들구나. 비행기에 탑승한 뒤 어머니는 그 한 마디로 당신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못한 아쉬움을 동행한 미연과 나에게 넌지시 전했다. 우리는 그 아쉬움의 큰 부분이 큰아들과 동행하지 못한 서운함이리라고 어머니의 속마음을 짐작했다. 어머니는 전부터 큰아들을 돌보며 말년을 보내고 싶다는 뜻을 비쳤다. 고향 근처에 작은 집이라도 얻어 큰아들과 흙을 일구며 살고 싶다고 했다. 며느리와 별거 중인 큰아들을 당신이 거둬야겠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처음부터 큰며느리가 저만 아껴 큰아들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큰아들이 사업에 실패해 집을 날리자 며느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따로 지내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작은아들네로 옮겨 지내게 되었다. 큰아들이 날려버린 그 집은 어머니 손으로 지은 마지막 집이었다. 당신의 분신 같은 집이었다. 그런데 그 집조차 날아간 마당에 그렇게 만든 장본인인 큰아들을 돌보며 말년을 보내겠다니.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비행기는 출출할 새도 없이 상해 공항에 도착했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얼마쯤 달리다가 흙먼지가 날리는 길옆의 식당 앞에 멎었다. 가이드가 차에서 내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식당 쪽으로 걸어갔다. 일행은 서둘러 내려 가이드 뒤를 따랐다. 식당에 들어가 정해진 자리에 앉자마자 종업원들이 국그릇을 들고 와 회전식탁 위에 놓았다. 중년여자들이 국그릇을 들여다보더니 상추로 된장국을 다 끓였다고 반겼다. 된장국 맛이 한국 것과 같다며 한국에서 고작 두 시간 날아왔을 뿐인데도 오랫동안 이국을 떠돈 여행자처럼 된장국을 탐했다. 기내식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도 잊은 듯했다. 그것 말고 식탁에 놓인 음식은 무슨 시퍼런 채소볶음과 볶은 달걀 접시가 다였다. 종업원들은 음식을 날라다 주고는 식당 가장자리에 죽 서서 일행이 식사하는 모습을 구경하며 키득거렸다. 기내식이 소화되지 않아 입맛이 없었지만 어머니가 권해 마지못해 된장국을 한 숟갈 뜨는데 늘어진 상추 잎 사이로 애벌레가 허옇게 뻗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나는 조용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한창 된장국 맛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왜 먹지 않느냐고 물어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고 둘러댔다. 그러자 어머니가 가방에서 기내식 빵을 꺼내 건네며 이거라도 먹으라고 하셨다. 나중에 먹을 때가 지금이었네. 어머니란 늙어 여행지에 나와서도 자식의 먹이를 챙기는 사람인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입맛이 없었지만 종업원에게 차를 더 달라고 해 어머니가 주신 빵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가며 가이드에게 벌레가 들어간 된장국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말았다.
- 임시정부로 갈 겁니다.
모두 차에 오르니 가이드가 한 마디를 던졌다. 임시정부에 도착하자 가이드는 입구에서 표만 끊어 일행에게 나눠주고는 사라졌다. 비좁은 골목 사이에 끼어 있는 임시정부 건물에 들어가 내부를 둘러보았다. 다리가 불편하신 어머니는 2층까지 간신히 올라간 다음 더 이상 가파른 계단을 오르지 못했다. 사무실 앞에서 어머니를 기다리게 하고 미연과 나는 독립운동을 하는 데 여러 용도로 쓰였던 방과 집기들을 둘러보았다. 한 나라의 독립에 쓰였던 물건들 치고는 퍽 왜소해 보였다. 건물 안은 비좁은 데다 미로 같았다. 비좁고 가파른 미로를 달리는 옛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어머니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숨 가쁘게 돌아 나와 보니 입구와 출구가 달라 바로 어머니가 계신 2층으로 갈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우리가 찾으러 갈 때까지 그곳에서 마냥 기다리고 계실 터였다. 다급해져 입구로 들어가려고 하자 직원이 막고 나섰다. 어머니가 2층에서 기다리고 있어 들어가 모시고 나와야 한다, 고 말했지만 직원은 내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고 나는 공격적인 그들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둘러봐도 가이드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고 근처에 있던 다른 여행사의 가이드가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 가이드가 직원에게 그들의 언어로 사정을 설명해 어머니를 모시고 나오게 도와주었다. 가이드는 어디서 무얼 하는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직원과 함께 내려온 어머니는 조금 지쳐 보였다.
가이드는 어디 있었는지 일행이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다 탄 뒤에야 나타났다. 그러고는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출발하더니 어느새 버스가 고속도로에 접어들어 달리고 있었다. 일정표에는 상해 시내 관광이라고 적혀 있는데 왜 고속도로를 타는지 알 수 없었다. 미연이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여기가 시내인데 고속도로 너머에 상해시가 더 이어지는 걸까.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을 때에야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았다. 상해에서의 오후 일정을 다음으로 미루고 항주로 가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항주까지는 3시간이 걸리며 중간에 휴게소에서 한 번 정차할 거라고 했다. 여행사에서 나눠준 일정표에는 시내관광을 마친 뒤 저녁에 황포 강 유람선을 타기로 되어 있었다. 가장 기대했던 게 유람선인데 빼먹을 모양이네. 도둑놈. 미연이 흥분했다.
가이드는 일정을 변경한 데 대해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패키지에 포함되지 않은 상품을 팔기 시작했다. 마사지와 평양식당 식사를 추가할 건데 비용이 70달러라고 말했다. 가이드는 일행에게 추가 일정을 원하는지 않는지 의견을 묻지도 않고 그렇게 진행할 거라고 선언했다. 미리 알리지도 않고 오후 일정을 제멋대로 미룬 채 고속도로에 접어들더니 상품을 파는 것도 막무가내 식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가이드의 강요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가이드가 과묵하다고 선언한 순간부터 모두 과묵해지기로 한 것 같았다. 노부부는 아들이 보내준 여행이니 그냥 다 누리겠다는 생각일 테고, 중년여자들은 첫 해외여행이라니 까짓 몇 만 원 더 지출되는 게 대수냐, 뭐든 좋다는 분위기인 듯했다. 나머지 한 팀인 대가족 쪽에서 마사지를 받을지 말지를 두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이드가 진짜 제 마음대로네. 엄마 기분 좋게 여행하셔야 하는데. 진짜 빼먹으면 가만 두지 말아야지. 미연이 어머니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가이드는 바로 돈을 걷겠다고 나섰다. 나는 그전에 일정과 상품 가격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달라고 청했다. 가이드는 내 질문에 이상하리만치 당황하며 어제 계산할 때 그 금액을 더 받아야 하는 걸로 나왔는데, 수첩에 적어 두었는데, 라며 더듬었다. 그러고는 수첩을 확인해 보겠다며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가이드는 뒤져도 수첩이 나오지 않는지 휴게소에서 쉬는 동안 찾아보고 답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때 대가족 팀 사람이 나와 같은 의견을 말하자 가이드는 더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휴게소에 도착하자 가이드가 우리와 대가족 팀을 불러 일정을 상의 없이 진행한 건 미안하지만 마지막 날로 미뤘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그리고 추가 되는 비용 70달러는 맞춰 줘야 하니 무조건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버스가 출발할 시간이 되어 이야기는 거기서 중단되었다. 언니, 저렇게 사정하니 그냥 따라 줄까. 미연이 아까 흥분할 때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항주에 진입하면서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항주에서는 저녁식사를 한 뒤 송성가무쇼라는 걸 관람하기로 되어 있었다. 무슨 일로 차가 막히는지 궁금했지만 가이드는 공항에서처럼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도로에 꽉 차 있는 차들도 모두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일정표를 보니 쇼를 시작하는 시간까지 남아 있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알아봐 달라고 하려는데 가이드가 느릿느릿 차 문을 열고 나갔다. 이상하게도 가이드는 내가 기다리다 못해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면 움직였다. 한참이 지나도 가이드는 돌아오지 않았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돌아온 가이드는 인상을 쓴 채 아무 소식도 알리지 않고 자리에 앉아버렸다.
- 무슨 일인가요?
- 사고라도 났나요?
모두들 궁금해 물었다.
- 운전을 못 한대요.
가이드는 누가, 왜, 운전을 못 한다는 건지, 그게 지금 길이 막히는 것과 무슨 관계인지, 아무 맥락이 닿지 않는 말 한마디를 볼멘소리로 던질 뿐이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제대로 대답을 해줘야지. 어머니가 조용히 다그쳤다. 가이드가 멈칫했다.
- 나도 모릅네다.
모르다니요? 내가 말했다.
- 더 이상 말하지 마십쇼. 더 뭐라고 말하면 나를 무시하는 걸로 알고 나도 무시하겠습네다.
가이드가 처음보다 말을 길게 하며 마이크를 제자리에 던져버렸다. 미연이 내 옆구리를 툭 치며 모른 체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가이드의 난데없는 행동에 대가족 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내일부터 가이드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겠으니 그리 아십시오.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던 가이드가 일어나 마이크를 주워들더니 선언했다. 버스 안이 갑자기 고요해졌다. 여행 중에 가이드에게 듣는 말 중에 이런 종류도 있었나. 참으로 이상한 가이드였다. 사람들에게서 긴장한 기색이 퍼지며 버스 안 공기가 팽창할 것 같았다. 미연이 내게 속삭였다. 언니, 그냥 가만히 가이드 하자는 대로 따르자. 엄마 생신 기념 여행인데 얼마 안 되는 돈 문제로 기분 상하게 하지 않는 게 좋겠어. 나는 그렇게 말하는 미연을 무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두드러지게 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은 한 시간 반이나 막혀 있다가 풀렸다. 쇼 시작 시간이 촉박해 서둘러 이동해야 했다. 공항에서부터 일행의 뒤를 살피지 않고 앞장섰던 가이드는 쇼 시간에 대려고 더 내달렸다. 미연과 나는 다리를 절룩이는 어머니를 부축하고 일행의 꽁무니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극장 건물은 장애가 있는 사람에 대한 생각이라고는 없이 전부 계단으로 통하게 되어 있었다. 간신히 자리를 잡고 앉았으나 쇼는 부를 과시하는 한바탕 법석에 지나지 않아 실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일행에게서 처질까 봐 기를 써 달려온 게 후회스러웠다. 차라리 그 시간에 찻집에 들어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 게 훨씬 나았으리라고 여겨졌다. 10시가 넘어서야 하루 일정이 끝나 호텔에 도착했다. 로비에서 방 배정을 받으려고 기다리는데 중년여자들이 가이드를 둘러싸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 아유. 가장이 일을 놓치면 어떡해. 가이드님, 다른 가이드로 바꾸지 말고 계속 있어 줘요.
이튿날 가이드는 일행이 버스에 타고 한참 기다린 뒤에야 인상을 잔뜩 쓰고 나타났다. 그러고는 인사도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다른 가이드로 바꿀 거라더니 어떻게 된 건지 궁금했지만 아무도 묻지 않았다. 얼마쯤 달린 뒤 가이드가 앉은 채 마이크를 들고 말하기 시작했다. 듣다 보니 일정과 상품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한 걸 빗대 비아냥거리는 내용이었다. 여행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는 게 그 질문을 했던 내 탓인 것처럼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중년여자들의 온정을 확인한 뒤라선지 묘하게 거들먹거리는 기색이었다. 궁금해서 물었는데 그게 불만이어서 이러나 보네요. 내가 말했다.
- 여기서 더 이야기하지 마쇼. 나중에 개인적으로 이야기합시다.
가이드는 야유하는 듯한 표정으로 엄포를 놓았다. 무슨 말 더 했다가 해코지 당할지도 몰라. 가만히 있자. 미연이 내 손을 잡으며 제 입에 손가락을 댔다. 희한한 놈이다. 어머니가 중얼거리셨다. 가이드는 툭하면 마이크를 잡고 추가 일정과 비용만 이야기할 뿐 관광지를 돌면서도 설명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 마음이 편치 않겠다 싶어 바라보니 아닌 게 아니라 표정이 밝지 않았다. 네 오빠는 언제쯤이나 자리 잡으려는지 원. 역시 버스 안 분위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여행 와서도 어머니는 큰아들 걱정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큰아들을 보살피며 지내고 싶다니. 작은아들에게서 지내며 당신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처지에 큰아들을 어떻게 거두겠다는 건지 답답한 노릇이었다. 어머니에게 큰아들과 며느리의 일이니 그들에게 맡기고 지켜보기만 하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맞는 말이라고 끄덕였지만 마음속에 그게 왜 그들 일이기만 하냐는 불만이 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큰아들만 생각하면 불안하다니 당신의 바람을 접을 마음은 없어 보였다. 어쨌거나 그 바람을 이루자면 집이 있어야 했고, 어머니는 그 바람을 미연이 이뤄 줄 것으로 믿고 있었다. 다른 자식들은 앞가림을 하기에도 급급하지만 미연은 남편이 꽤 잘 버는 변호사이니 그런 기대를 품게 되었을 것이다. 미연이 아파트에 투자하고 싶다는 말을 한 적도 있어 머지않아 그 바람이 현실로 이루어지리라 기대하고 계셨다.
여행에 동행하기는 했어도 미연은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날이 재수한 아이의 수능성적이 나오는 날이었다. 여행 떠날 형편이 아니라는 걸 그럴수록 기분전환이라도 하자고 설득해 간신히 동행한 것이다. 미연은 마지못해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자식들이 모두 동행하지 않아 서운할 심정까지 헤아리며 어머니를 살뜰히 챙기고 있었다. 식사시간에는 입에 맞을 만한 음식을 따로 덜어 옆에 놓아 드리고 바람이 불면 옷깃을 여며 드렸다. 그래선지 미연을 바라보는 어머니 표정이 출발할 때보다 느긋해 보였다. 이 여행이 딸 둘뿐이라 허전할 줄 알았는데 미연의 그런 모습 때문인지 오히려 오붓했다. 미연은 아이가 제 기대만큼 성적을 내지 못한다고 늘 속을 끓였다. 특별한 아이들로 키우려고 들인 노력만큼 아이들이 특별해지지 않는 게 미연의 근심거리였다. 특별해지지 않자 성적이라도 뛰어나야 한다고 방향을 틀어 아이들을 몰았다. 형제들은 유난히 자식 일에 예민한 미연 앞에서 미연의 아이들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점심식사를 마친 뒤 쉬고 있는데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던 가이드가 우리와 대가족 팀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가이드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대가족 팀이 여행사에 신고를 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는 여행사 지사장의 당부로 계속 남아 있기로 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지금부터 열심히 일할 테니 제 실수를 용서해 주고 협조를 부탁한다고 간청했다. 가이드의 과묵함은 가욋돈을 챙기기 전까지만 지켜지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가욋돈벌이에 그렇게 목을 매는 가이드는 처음이었다. 제 입으로 전하는 말이니 당부지 혼찌검을 당했을 거라고 어머니가 중얼거렸다. 대가족 팀 대표가 이쯤에서 가이드의 사과를 받아들이자고 우리에게 청했고 우리도 그러기로 했다.
- 혹시 공산당원입네까.
가이드가 굽실거리며 다가오더니 갑자기 내게 물었다. 무슨 그런 말을. 어이가 없어 가이드를 바라보았다.
- 우리는 공산당원이라면 그저 기를 못 폅네다.
저는 가이드다운데 내가 여행객답지 않다는 뜻일까. 우리는 가이드가 제시한 추가 상품에서 평양식당 상품을 선택했다. 가이드가 어머니에게 달라붙어 애걸복걸한 탓도 있지만 우리도 어머니에게 평양 음식은 맛보게 하고 싶어서였다. 나머지 일정은 보통 여행처럼 두드러지는 일 없이 지나갔다. 중년여자들은 가이드에게 더 친근하게 대했고 노부부와 어머니도 말문을 터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마지막 관광지인 전망대에 올라 미연과 나는 손을 잡고 유리마루에 발을 디뎠다. 간신히 발을 디디고는 있으나 금방이라도 바닥이 갈라져 추락할 것처럼 위태로웠다.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유리 바닥을 딛지 못하는 건 큰아들을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짐작되었다. 그런 짐작으로 걸음을 옮기자니 더 아슬아슬했다. 옆에서 중국 어린아이들이 유리 바닥을 뒹굴며 떠들고 있었다.
- 꼭 네 아이들 어렸을 때 같구나.
아이들을 바라보던 어머니가 미연에게 말했다.
- 우리 아이들이 언제 저렇게 소란스러웠다고 그래? 엄마는 우리 아이들 흉만 보이나 봐.
미연이 팩 쏘아붙였다. 어머니가 놀라 미연을 바라보았다. 나도 놀라 미연을 바라보았다. 짓궂게 노는 아이들을 보자 미연의 아이들 어릴 적 모습이 떠올라 무심코 한 말일 텐데 미연은 그냥 흘려듣지 않았다. 어머니의 표정이 당혹스러움과 실수했다는 자책으로 복잡하게 변했다. 미연은 다른 일에는 너그럽지만 제 아이들 일이라면 선선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렇더라도 생신 기념 여행인데 지나치다 싶었다. 어머니는 벌써 기색이 편치 않아 보였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저녁식사 장소인 평양식당으로 옮겼다. 평양식당은 현대식 구조로 널찍했다. 상차림도 제법 푸짐했고 맛도 깔끔했는데 어머니는 상추를 많이 드셨다. 아이 참, 왜 이렇게 상추만 드셔! 미연이 어머니의 팔을 잡아채며 타박했다. 병간호에 지친 자식처럼 짜증스런 모습이었다. 그러자 어머니 모습이 금세 구박에 치인 노인네로 변해 보였다. 앞자리의 중년여자들이 미연의 심상치 않은 기색에 힐끔 건너다봤다가 모른 체했다. 자신들이 오히려 무안한 듯 고개를 들지 않았고 어머니는 민망해하며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미연은 아까 일로 상한 기분 탓인지 밥을 먹는 동안 줄곧 눈길과 손길이 거칠었다. 어머니는 상추는 더 드시지 않았다.
호텔로 이동해 방에 들었다. 그사이에 마음이 바뀌었는지 미연이 어머니에게 커피를 타드리고 잠옷을 챙겨 놓으며 다시 상냥하게 굴었다. 팔순 기념 여행 마지막 밤을 저 때문에 서먹하게 보내서는 안 되겠다고 여긴 듯했다. 세 모녀가 누워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를 나누고 미연과 나는 어릴 때처럼 간지럼을 태우며 장난도 쳤다.
여행 마지막 날 아침 어머니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일어나 짐을 꾸렸다. 미연과 나는 조금 뒤에 일어나 짐을 싸기 시작했다.
- 이거 이제 엄마 캐리어에 넣으셔.
미연이 꾸러미 하나를 어머니 앞으로 홱 밀어 놓았다. 목소리가 싸늘했다. 다른 형제가 부탁해 기내에서 양주 한 병을 샀었다. 그걸 여행 다니는 동안 제 캐리어에 넣고 다녔다. 왜 또 이러냐? 기색이 심상치 않은 걸 느끼고 어머니가 미연을 돌아보았다. 내 것도 아니고, 어차피 그 애가 엄마한테서 찾아갈 거니까 이제 엄마 짐에 넣으라고요. 미연의 목소리가 더 날카로워졌다. 지난밤에는 상냥하더니 밤사이에 왜 또 변했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엄마 생신 기념 여행이니 진정하라고 달래자 미연은 상관 말라고 쏘아붙였다. 어머니가 미연을 바라보며 무엇 때문에 성질을 부리는 거냐고 물었다. 미연이 참으려고 했는데 말하지 않을 수 없다며 여행지에서까지 제 아이들 흉을 잡아야 하느냐고, 저는 한 번도 어머니의 관심을 받은 적이 없다고 퍼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 내가 왜 오빠 집을 구해 줘야 하는지 모르겠어. 나 그러고 싶지 않아.
어머니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그러고 있던 어머니가 미안하다, 내가 참 잘못 생각했다고 중얼거리며 돌아앉았다.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어쩔 줄 모르고 캐리어만 뒤적거렸다. 미연의 기분을 상하게 했으니 큰아들과 함께 지내겠다는 바람은 날아가 버린 거다. 기대 볼 자식이라고는 미연뿐이었는데 이제 다 틀렸다. 그렇게 여기는 모습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어머니가 뒤적거리는 캐리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짐이 맞나 싶게 캐리어 안이 뒤죽박죽이었다. 함께 여행하면서도 눈여겨보지 않아 몰랐는데 지금 보니 이상했다. 어머니의 단정한 평소 모습과 다르게 겉옷과 속옷, 세면용품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여행하는 동안 따로 쓰려고 챙겨 오셨는지 수건도 하나 끼어 있었다. 어머니는 어쩌다 내게 와서 주무실 때도 꼭 당신 수건을 챙겨 왔다. 그랬던 어머니가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어머니에게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지도 몰랐다. 치매. 나는 얼른 그 생각을 물리치고 파우치라도 사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은 못 사드려도 그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어머니의 측은한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어머니는 평생 당신의 한 세계를 되찾지 못한 걸까.
집을 잃는 건 누군가의 한 세계가 지는 일이다. 그건 어머니의 한 세계가 지는 일이기도 했다. 살던 집을 그 자리에 고스란히 놓아 둔 채 온 가족이 떠났었다. 어머니는 다시 집을 장만하기 위해 집을 지었다. 집을 짓기 전까지 밤낮으로 설계도를 그렸다. 그 푸른 줄 모눈종이가 기억난다. 어느 날 나는 방구석에서 도형이 그려진 모눈종이를 발견했다. 거기에는 점선과 겹친 선, 부채꼴과 격자무늬들이 그려져 있었다. 칸이 나뉘고 문과 창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건 집 설계도였다. 부채꼴은 문이 열리는 방향을, 격자무늬는 바닥이 타일이라는 것을 나타냈다. 어머니의 필체임을 알아보았지만 왜 어머니가 설계도를 그렸는지 의아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언제, 어디서 설계도 그리는 법을 배웠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중년 주부가 혼자 설계도를 그린다는 말은 어디서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일은 남자 어른들이 하는 거라고 알았다. 힘들게 장만한 집을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잃더니 어머니가 어떻게 된 것만 같았다. 맨 처음 어머니가 어떤 모습으로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했는지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생각나지 않았다. 식구들이 모두 밖에 있는 동안 혼자 집에 있던 어머니는 잃은 집을 다시 찾을 방법을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들 책상에서 모눈종이와 컴퍼스를 보았고 거기서 설계도를 떠올렸던 거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어머니의 설계도는 내가 보기에도 정교했다. 창문에 가로로 그어진 선과 그것을 나눈 선들이 이중 창문과 일반 창문을 구분해 주었다. 모눈종이 위에 직선과 부채꼴과 격자무늬들로 이루어진 집. 실제로 그 집을 이루기까지 얼마나 많이 설계도를 그렸을까. 빚을 내 지어야 했고 나날이 빚이 불어날 테니 길게 끌 수 없을 것이었다. 어머니는 매일 방바닥에 엎드려 모눈종이에 설계도를 그렸고, 나는 그 설계도를 들여다보며 집이 일어서는 장면을 상상했다. 방구석에 모눈종이가 쌓여 갔다. 동네 사이를 흐르던 개천이 덮이더니 그 위에 길이 뚫리고 집들이 속속 들어섰다. 개천을 덮기 시작하며 동네는 다른 세상으로 변했고, 가족은 가장의 사업실패로 한 세계를 잃게 되었다. 마침내 어머니가 직접 그린 설계도를 움켜쥐고 거친 남자들이 휘젓는 공사판 한 귀퉁이로 집을 지으러 나갔다.
따로 살 집을 두고 집을 지어 팔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족은 다 지어지지 않은 건물로 옮겨 다니며 지냈다. 아직 집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건물들이었다. 전기와 난방은 간신히 끌어다 쓸 수 있는 공간. 친구들에게 집이라고 말할 때 목이 움츠러드는 장소. 짓고 있는 집이 팔리면 집을 산 사람이나 세를 든 사람이 이사 올 때까지 그 집에 머물렀다. 새 집에서 새 집으로 이사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자식들을 살리고 가르쳐야 하는 일보다 더 무서운 일이 있어 어머니는 더욱 집 짓는 일에만 매달렸다. 그건 아버지의 빚이었다. 어머니는 집을 지어 팔고 빚을 갚고 또 지어 팔아 갚았다. 가족은 반지하집, 2층집, 3층집, 연립주택 등 여러 집을 옮겨 다녔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집을 지을 시간은 마냥 주어지지 않았다. 골조공사 중에 철근을 잘못 디뎌 2층에서 떨어졌다. 어머니는 골절로 몇 해에 걸쳐 여러 번 수술을 했고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몸을 추스를 만하게 되어 다시 집을 지으려고 할 무렵에는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그 뒤로 어머니는 당신이 지은 마지막 집에서 아버지를 돌보며 늙었다. 그 집을 큰아들이 날리고 말았다. 집을 잃는 건 한 세계가 지는 일이다. 그 집을 잃으며 어머니의 세계도 졌다.
그 집들을 떠올리니 호텔 방인데도 그때의 시멘트 냄새가 난다. 시멘트 냄새가 밥 냄새처럼 자연스러웠다. 장판도 깔지 않은 방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이부자리를 폈다. 벽과 창이 형체만 갖췄을 뿐인 집은 콘크리트 기둥들이 방과 화장실을 구분해 주고 있었다. 미연과 나는 그런 집을 그리스 신전이라고 불렀다. 지내다 보면 차츰 창과 기둥이 제 모양을 이뤄 갔다. 방바닥이 노르스름해지고 흰 벽이 콘크리트 기둥을 덮었다. 그런 엉거주춤한 거주나마 가능해진 건 두 번째 집을 지을 때부터였다. 그건 근사한 거주였다. 더 이상 천막생활을 안 해도 되었으니까. 그 무렵 저녁마다 그 엉성한 집 기둥 사이에서 미연과 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 그곳이 그냥 구조물이 아니라 집으로 여겨졌다. 저녁인 데다 아직 전기가 연결되지 않아 어두웠다. 미연도 그 시절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유리마루에 올라오지 못한 채 고개를 들어 전망대 유리 밖을 바라보고 계셨다. 더는 집을 지을 수 없이 늙어버린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인 것 같았다. 어머니는 평생 당신의 한 세계를 되찾지 못한 걸까.
- 다음에 또 같이 여행 가요, 엄마.
미연이 다가와 어머니와 내 팔짱을 꼈다. 어머니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마지못해 짓는 웃음이었다. 한 세계를 이루어 살아온 당신이 그 세계 안에 있던 자식에게 거부당한 뒤다. 큰아들만 아니었다면 당신의 세계를 그렇게 잃지도, 다른 자식에게 거부당하는 일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연은 어머니의 표정을 보지 않은 채 이런저런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놓았다. 나는 미연을 바라보며 우리가 왜 이 여행에 동행하고 있는지 생각했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형제들이 모두 동행했다면 달랐을까.
가이드는 어머니를 유리마루 위로 옮겨 놓은 뒤 사라졌다. 볼수록 알 수 없는 가이드였다. 어쩐지 가이드가 어머니의 바람이 덧없다는 걸 보여주려고 나타난 것만 같았다. 유리마루 밑 허공으로 곤두박질친 내 시선이 지상의 한 사람에게 멎었다. 카메라 줌 기능을 당긴 듯 그 상이 점점 확대되어 다가왔다. 어머니였다. 지팡이를 짚고 광장 한 귀퉁이에 우두커니 서 있는 어머니. 나는 흠칫 놀라 옆에 계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작가소개 / 이채원(소설가)

- 2010년 현대문학 장편소설 당선. 2012년 장편<나의 아름다운 마라톤> 우수문학도서 선정. 2013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상. 2014년 소설집 <사라사 양장점> 출간. 펴낸 책, 장편소설<나의 아름다운 마라톤> 청소년소설<달려라, 벽화> 소설집 <사라사 양장점> 에세이 <파란 도시락 가방을 든 사람><우리는 공부하는 가족입니다>


《문장웹진 2016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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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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