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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밤, 저편의 새벽

  • 작성일 2015-06-01
  • 조회수 2,366



세상의 밤, 저편의 새벽




정희선



삽화-세상의-밤,-저편의-새벽



1.
나는 스물한 살까지만 살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죽고 싶다’는 말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에는 그것에 대한 최소한의 욕망이 들어 있다. 나는 죽음을 ‘원하지’도 않았고, 세상이 진저리나게 ‘싫지’도 않았다. 무언가에 대해 그렇게 말할 만한 최소한의 관심마저 나에게는 결여되어 있었다. 나는 그저, 삶을 그때쯤 끝내기로 결정했다. 그때까지만 이어 가기로 했다거나, 그때까지는 살아 있는 상태를 그냥 두어 보자고 생각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겠다. 뭔가를 꼭 절실히 원하지 않아도 선택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저쪽에 더 이상 별 흥미가 남지 않아 관두기로 하다 보니 결론적으로 이쪽을 택한 것처럼 되는 것. 그냥, 그런 것이었다.


산동네의 집들은 기형 버섯처럼 서로 층층이 기대어 돋아나 있었다. 이쪽에서 보면 분명 3층 집의 3층인데 저쪽에서 보면 지면 아래로 반은 파묻힌 층이었다. 도미노 조각들이 쓰러지다 일시 정지한 것 같은, 아니면 실패한 블록 쌓기 같은 집들이 서로를 밀치며 땅을 디디고 있었고 동시에 누구 하나 밑장을 빼기만 해보라는 식으로, 그럼 다 쓰러질 거라는 듯 호전적으로 기대어 있었다. 그런 집들 사이로 시멘트가 깨지고 덧발라진 길이 끊어질 듯 고불고불 뻗어 나갔다. 골목은 끝날 것 같은 지점에서 새로운 골목과 이어졌고 도대체 거기 있다는 게 의아한 계단이 생뚱맞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건 꼭 눈코입이라든가 손발이 신체의 제자리 아닌 곳에 붙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면 한날한시에 약속한 바 없어도 사람들은, 대개는 예측 가능한 방향과 생김새로 건물을 앉히고 길을 내며 살아가는 모양이다. 그렇기에 감각 좋은 사람들은 낯선 장소에서도 길을 찾고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렇듯 통용되는 암묵적인 규칙이란 게 있다면, 이 동네는 규칙이란 규칙은 죄다 어기며 생겨난 것 같았다. 지어졌다기보다는 자생적으로 산 위를 향해 번져 갔다는 인상이었다.
부동산 여자는 막다른 골목으로 나를 안내하는가 싶더니 골목 끝에 나 있는 좁은 틈을 향해 망설임 없이 직진했다. 퉁퉁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잰 몸놀림으로 틈을 빠져나간 뒤 여자는 유연하게 좌회전, 곧이어 우회전을 하고 계단을 올랐다. 여자를 따라가는 길에는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나기도 했는데 다섯 단쯤 내려가면 서른 단은 올라가는 식이어서 우리는 출발 지점보다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미노타우로스도 길을 잃고 말 것 같은 미로였으나 여자는 약도 한 번 보지 않고 씩씩거리며 우회전, 우회전, 그리고 좌회전을 했다. 웬만해서는 길을 잃기 어려운 바둑판식 길에서도 혼자 길을 잃고 빙빙 도는 게 특기인 나는 숨 가쁘게 여자를 따라가며 좌, 우, 우, 우, 좌, 를 외우려 애쓰다가 결국 그만두었다. 어차피 어디서 꺾었는지 기억할 만한 지형지물도 없었다. 대신 나는 여자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는 데 집중했다. 어디선가 재봉틀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골목을 꺾을 때마다 훌쩍 가까워지는가 하면 또 멀어지는 소음은 어느 방향에서 들리는 것인지 감을 잡기 어려워 미로를 완성하는 배경음이 되고 있었다. 누구에게 찾아오라고 할 일도 없겠지만 누가 찾아오려 해도 길을 헤매다 날 저물기 딱 알맞을 이곳은, 그래서 내가 깃들 곳으로 적당해 보였다. 아무도 찾아오지 못하고 나 역시 출구를 찾아 나가지도 않을 곳. 나는 여자의 뒤를 따르며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든 내가 거기에 머물게 될 거라는 것을 알았다.
다시 한 번 골목을 돌았을 때, 멀어질 듯 따라오던 재봉틀 소리가 요란하게 쏟아졌다. 한 대가 아니라 여러 대가 마구 돌아가는 소리였다. 소리는 좁은 골목을 이루는 벽과 창문들에 조각조각 부딪치고 튕기며 증폭되고 있어 진원지가 어디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귀를 막고 얼른 골목을 빠져나가려는데 부동산 여자가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
여기가, 공장이 있거든! 이래봬도 알부자들이 산다구! 학생, 여기 이사 오면은, 기술 배우러 이런 데 다녀도 괜찮아! 그럼! 어지간한 대학 다니는 것보다 그게 훨 낫지!
골목을 빠져나갈 때 어디선가 된장찌개 냄새가 풍겼다. 사람이 살기는 사는구나. 오르내리는 미로로 짜인 세트장에서 집 찾기 게임을 하는 것 같던 홀린 느낌에 허기가 날카롭게 끼어들었다.


여기야, 학생.
공간감각에 시간감각까지 희미해질 무렵 여자가 멈추어 섰다. 산동네의 꼭대기에 닿기 직전, 축대 위로 오르는 계단의 모난 그늘 안쪽으로 문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벽돌 벽에 문짝이 덜렁 달려 있는 모습이었다. 이런 곳에 문이? 의아하게 멈추자, 있는 줄 모르고 지나쳐 버리기 좋겠지, 그래도 어지간히 살 만해, 생각을 읽은 듯 여자가 말하며 문을 잡아당겼다. 위쪽에 유리가 끼워진 얇은 새시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아귀가 잘 맞지 않는지 문을 힘주어 몇 번 흔들어서 연 여자가 안쪽으로 손을 더듬어 불을 켰다. 흙손 지나간 자국이 선명한 시멘트벽에 바닥에서부터 절반쯤 되는 높이까지 흰 타일이 붙어 있는 공간이 드러났다. 공간은 바깥의 계단 때문에 잘려 나간 듯, 한쪽 벽이 안으로 심하게 기울어 있었다. 여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먼저 들어갈래?
그 공간은 부엌이자 현관, 세면장 역할을 하는 곳 같았다. 짧은 고무호스가 끼워진 수도꼭지가 하나, 벽에 붙어 있었고 먼저 살던 사람이 두고 간 것인지 몇 가지 때 묻은 살림살이가 눈에 띄었다. 플라스틱으로 된 분홍색 그릇 건조대 위에 스테인리스 그릇이 두어 개 엎어져 있고 바닥에도 똑같은 그릇이 모로 굴러 있었다.
쓰고 싶으면 써.
이걸요?
여자는 괜히 미안한 듯 웃었다.
아이 뭐, 버리고 싶으면 버려도 되구.
방은 부엌처럼 모로 잘려 나간 모양을 하고 있었다. 축축한 흙냄새가 났다. 창문 하나 없는 방의 공기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갇혀 있었던 듯, 문을 열자 밀폐와 부패의 냄새가 밴 습기를 머금고 스멀스멀 발목에 휘감겼다. 차고 무거운 공기였다. 벽지와 장판이 발라져 있지 않았다면 방이 아니라 굴이라 해도 어울릴 느낌이었다.
새로 한 거 아니네요?
사실 상관없었지만, 벽지를 보며 말해 보았다. 어머니의 어깨 너머로 배운 세상살이의 얕은 수였다. 배추가 덜 싱싱한데? 오백 원 깎아 줘요. 오징어가 그렇게 물이 좋지는 않네, 이거 눈 좀 봐. 어머니는 자잘한 볼일에 나를 자주 데리고 다녔다. 그런 모습을 내게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을 가르치기 위해 데리고 다녔기 때문일 것이다. 잘 봐둬,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돼. 형은 못 하니까 네가 엄마 대신 해야 돼. 알겠지? 어머니가 준비하던 미래는 어떤 것이었을까. 겨우 푼돈 깎는 요령을 가르쳐주려던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지 않는 영리함을 가르쳐주려 했던 거라고 생각해 보지만 사실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부동산 여자는 내 질문을 가볍게 받아냈다.
새로 해도 티도 안 나, 여기는.
이렇게 싸고 조용한 방은 서울 시내 어딜 가도 없다고 몇 번이나 강조한 여자가 나를 남겨 두고 돌아간 뒤, 벽에 발을 올려 기대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기울어진 벽은 발을 대고 있기 안성맞춤이었으나 누워서 보니 마치 쓰러지는 벽을 내가 떠받치고 있는 듯도 했다. 천장에는 덮개 없는 이관 형광등이 날개를 펼친 듯 양쪽으로 달려 있었다. 눈이 부셔 불을 끄자, 문에 붙은 쪽유리에서 들어오는 사각형의 희미한 빛만 남았다. 동굴 같군. 팔베개를 하고 누워 중얼거렸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다른 것이었다.


어머니는 보험을 팔아서 우리를 먹여 살리고 형의 병원비를 댔다. 어디를 돌아다녀야 보험을 팔 수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밤늦게 돌아온 어머니가 부은 다리를 주무르며 힘들어하는 걸 보면 먼 거리를 다녀야 하는 일이라는 것은 알 것 같았다. 어머니는 방 모서리에 엉덩이를 바짝 기대고 벽에 다리를 높이 올리고 누워서 옆눈으로 텔레비전을 보다 그대로 잠이 들곤 했다. 낡은 치맛자락이 흘러내려 허연 다리가 허벅지까지 드러났다. 나는 어머니를 외면하며 이불을 갖다 대충 덮어 주었다.
과부들이 보험을 많이 하지. 자본이 필요 없거든.
사회문화 담당인 담임이 킬킬 웃었다. ‘과부’를 ‘과아부’로 리드미컬하게 당긴 담임의 말이 탄력 있게 교실에 떨어지자 몇몇 아이들이 쓸데없이 킬킬 따라 웃었다. 그게 당신이 파악한 잘난 ‘사회’의 ‘문화’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교과서를 집어던지며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는 대신 고개를 숙이고 교과서의 그래프나 새까맣게 덧칠했다. 그래, 과부는 열심히 보험을 팔아서 등에 업힌 덩치 큰 새끼들을 먹여 살린다구. 그래서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저린 거야. 나는 어머니의 야윈 등에 얹힌 짐짝 중 하나였다. 어머니는 인구 피라미드의 맨 아랫단에 깔려 있는 사람, 피라미드의 돌을 맨몸으로 지고 나르는 자. 허리와 무릎에 만성적인 통증을 호소하면서도 어머니는 정형외과 한 번을 가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가 차를 샀을 때, 나는 어머니가 붓도록 걷지 않고도 세상을 돌아다닐 발이 생겼다는 점이 다행스러웠다. 어머니는 여전히 피곤해 했고 집에 들어오면 말없이 가방을 던져 놓고 형을 들여다본 후 텔레비전 앞에 누웠지만 그래도 최소한, 가방을 ‘들고’ 걸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싣고’ 다닐 수 있으니 좀은 괜찮아진 게 아닐까, 이불을 덮어 주며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은, 그걸로는 괜찮지 않았던 걸까. 어쩌면 어머니는 우리를 등에 지고 계속 터벅터벅 걷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래야 ‘했던’ 거라거나, 우리의 짐짝 같은 무게가 어머니를 그나마 계속해서 걷게 하는 힘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아니면, 아니면…… 아니,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2.
그는 어스름 속에 앉아 있었다.
이곳에 틀어박힌 후 나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가장 조용히 유폐될 수 있는 공간을 찾아왔다고 생각했으나 상상하던 고요는 여기에도 없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구석에 기대 앉아 있다 보면 널뛰는 생각의 파장이 오랏줄처럼 전신을 죄어 왔다. 어떤 순간, 좁은 방의 사방에서 벽이 모두 나를 압사시킬 듯 다가오다가 그다음엔 끝없이 멀어졌다. 건너편의 문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으면 내 걸음으로는 영원히 문에 닿을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낮과 밤이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 어둑신함 속에서 제멋대로 토막 나고 늘어난 시간이 흘러갔다. 그 사이에 꿈이 끼어들었다. 꿈에는 어머니와 형이 있었다. 그들은 내게 시선을 주지 않고 지나쳐 가거나 내게는 들리지 않는 말을 자기들끼리 주고받았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형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형에 대한, 끊어내기 어려운 생각이 빚어낸 형상을.
형.
형은 자기 이름보다 형이라는 말에 언제나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형은 자신이 내 형이라는 사실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형, 하고 부르면 이내 쿵쿵 뛰어와 내 방문을 열고 그 맑은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가 무엇을 요구해도 다 들어줄 작정이라고 적혀 있던 둥근 얼굴을. 그래 봐야 라면을 끓여 달라거나 일어나기 귀찮은데 형광등 좀 꺼달라거나 이따 엄마가 오면 용돈 좀 달라고 말을 꺼내 보라는 따위였지만. 어, 어, 그래, 형아가 해줄게. 형은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형은 착했고 형은 순수했고 형은 아름다웠다. 그러므로 나와는 다른 인간이었다. 어, 엄마아, 오늘도 안녕히 다녀오세요. 어머니가 퇴근할 때쯤엔 자기 방에서 통통한 배를 드러내고 입을 벌리고 잠들어 있을 때가 많았던 형은 아침마다 어머니를 배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현관에 서서 허리를 구십 도로 꺾으며 인사하면, 어머니는 너무 환해 가짜 같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형을 꼭 안았다 놓고 집을 나섰다. 그게 어머니에게는, 뭐라도 되었던 걸까. 어머니의 웃음을 보며 의심을 품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모르겠다. 그런 형이어서 어머니는 그토록 붙들어 두고 싶었던 것일까, 어차피 성년이 될 때까지 살기가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당신이 형보다 오래 살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 마치 그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우리가 순서대로 ‘늙어 죽을’ 미래를 차곡차곡 준비한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아니, 실은 더 궁금한 것은 다른 것이었으나 나는 그것을 생각의 표면으로 끌어내기 두려웠다.
형. 다시 한 번 부르려다가, 그가 형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를 등지고 앉아 있는 실루엣은 형보다 키가 크고 마른 사람이었다. 누구지? 후드득 놀라는 순간 그는 사라졌다. 꿈치고는 너무 생생했고, 무엇보다 나는 넋을 놓고 있었을 뿐 잠들어 있지는 않았다. 뭐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안개 같던 머릿속에 물을 들이부은 듯 몽롱함이 씻겨 나갔다. 둘러보았으나 방 안의 어둠은 말짱하게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그가 다시 나타난 저녁, 나는 다른 날처럼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타인의 기척이 느껴졌다. 기울어진 벽 아래 좁은 공간에 웅크린 그는 잠이 들어 있었다. 이번에는 소리 내어 부르지 않고 숨을 죽였다. 꿈이 아니라면 이건 뭘까. 겁이 났지만, 호기심이 더 컸다. 가만히 지켜보는 사이 이쪽에 등을 돌리고 누운 그의 옆구리가 조금씩 오르내리는 것이 보였다. 왜 저렇게 불편하게 잘까. 문에서 제일 먼 구석에 놀란 벌레처럼 둥글게 웅크리고 나는 남 말 하듯 중얼거렸다. 나중에 일어나면 몸이 쑤실 텐데. 말해 놓고 나니 누구인지 모를 그가 안돼 보였다.
저기요.
흔들어 깨우거나 이불을 덮어 줘야 하지 않을까, 불러 보는데 그가 또 사라졌다. 그럴 거라는 걸 예상이라도 한 듯 별로 놀랍지 않았다. 어머니, 형, 낯선 남자, 형, 남자, 어머니…… 어머니와 형. 시야를 맴도는 그들이 정말 내 곁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부름에 응답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그래도, 어머니. 불러서 불러낼 수 있다면 큰 목소리로 불러내고 싶었다. 왜, 말하지 않았어요? 할 수도 있었잖아요. 말했어야 했잖아요. 왜 지금도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네?
어머니의 자동차가 중앙선을 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우그러져 버린 후, 사고 현장을 조사한 사람들은 다른 피해자가 없는 것이 천운이라고 입을 모았다. 환한 봄, 형이 떠난 지 꼭 일 년이 되는 계절. 나들이 가는 차량도, 거리에 놀러 나온 사람들도 많은 주말이었다. 천운이었을까, 정말. 일 년 중 사람들이 바깥으로 가장 많이 쏟아지는 계절에 교묘하게도 인적이 없는 길에서 가로수를 들이받은 것이. 차량의 손상 정도가 심해 어머니의 몸은 차체를 조각조각 잘라내고 나서야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블랙박스에는 운전을 방해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고 어머니는 평소 과속운전을 절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남긴 것을 정리하자 의외의 것이 드러났다. 못 하나 마음대로 박으면 안 되는 남의 집인 줄 알았던 작은 아파트는 어머니의 명의였고 서류 몇 장으로 내 것이 되었다. 어머니는 생각도 해보지 못한 큰 액수의 예금도 내 앞으로 남겨 놓았다. 그 점이 또한 마음에 걸렸다. 어머니는 왜, 형도 자신도 아닌 내 이름으로만 그 많은 예금을 해둔 것일까.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의문은 의혹으로 자라날 뿐 답이 되어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 나는, 돈은 필요 없어요. 형을 볼 때만 잠깐 웃던 어머니. 좀처럼 웃는 얼굴을 보이지 않던 어머니를 보며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그래서 어머니가 편히 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셀 수도 없는 낮과 밤에 생각했었다. 세상의 모든 길을 다 걸어야 하는 숙명인 것처럼 다니다 돌아와 온몸으로 벽을 떠받치듯 버티고 잠들던 어머니. 내가 돈을 잘 버는 어른이 되면, 어머니가 걷는 뫼비우스의 띠를 끊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어머니, 나는 정말, 돈은 이제 필요 없어요. 이제 내게는 ‘죽을 때까지’ 쓰고도 남을 돈이 있었다. 덕분에, 어머니. 그리고 아무것도 필요 없어져 버렸다. 어머니는 이미 편히 잠들었으므로. 생각이 여기에 도달하면, 길을 잃고 막다른 지점에 몰려 뱅글뱅글 도는 심정이 되었다. 지독하게 고약한 수수께끼, 아무리 해도 납득할 수 없는 무언가가 거기에 있었다. 나는 답이 나오지 않는 생각에 골몰하며 맥락 없이 툭툭 끊어지는 시간의 틈을 떠다녔다.
그리고, 그가 다시 나타났다. 그의 머리맡에는 책이 가득 쌓인 좌식 책상이 놓여 있었다.


왜 말 안 했어요?
부동산 여자는 밥을 먹는 중이었다. 문을 벌컥 열고 묻자, 여자는 나를 힐끗 보더니 먹는 일만큼 중요한 건 없다는 듯 김치찌개 백반에 집중했다.
대답해 줄 때까지 나, 안 가요, 아줌마.
나는 문간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 동작을 딱 멈춘 여자의 입에서 밥알과 함께 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 뭘 말을 안 해?
거기서 살던 사람, 뭔 일 있었잖아요. 맞죠. 거기 원래 키 큰 남자 하나 살았죠, 그쵸?
나는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그 남자가 누구든, 그에 대해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여자밖에 없었다. 여자는 한숨을 푹 쉬고 숟가락으로 쟁반을 탁탁 쳤다.
학생, 거기 앉아 봐. 그게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니까?
뭐가 아닌데요? 저 아직 별 말 안 했거든요.
여자는 물 컵을 집어 요란하게 입을 헹구고 그걸 꿀꺽 삼켰다.
아이, 그래, 별 말 했고 안 했고 간에 내가 알어, 안다고. 말 안 해도 알지, 왜 몰라? 집이 좀 답답하고 그렇지? 응? 뭐 나올 것 같고, 아니야?
여자가 흘깃흘깃 내 얼굴을 살폈다. 나는 팔짱을 풀지 않고 여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래, 거기, 공부하던 총각 하나 살았어, 맞어. 근데,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여자는, 그 방에 살던 사람에 대한 얘기를 해주었다. 처음 이사 올 때부터 끝까지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었던 남자에 대해. 그러나 남자가 죽은 뒤 짐 정리를 하러 온 사람들을 보니 가족도 멀쩡히 있고 여자 친구도, 있었다고 했다. 여자는 남자가 그곳에서 죽은 게 아니라는 점을 애써 강조했다.
아니, 이쁜 애인도 있으면서 왜 그랬나 몰라. 시험에 한두 번 안 될 수도 있는 거지, 그렇다고 젊은 사람이 마음을 그렇게 먹어, 그래. 부모님 가슴에 대못 박고. 그럼 못쓰는 거야, 학생. 아, 내 말이 틀려?
남자는 준비하던 시험에 떨어진 걸 비관해 한강에 투신했다고 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워낙 외진 곳이어서 세가 잘 나가지 않는 그 방에, 어쩌다 세입자가 들어도 얼마 가지 않아 다들 서둘러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뭔가가 나타난다는 말을 공통적으로 하면서.
그…… 학생도 그래? 뭐, 그런 게 보여?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 왔죠.
여자는 뭐라고 구시렁거리며 책상 서랍 속을 팍팍 뒤졌다. 아이고, 갈 거면 곱게 좀, 이게 다 무슨, 짜증나게, 따위를 입속으로 웅얼거리는 것이 드문드문 들렸다. 한참 뭔가 찾던 여자가 구겨진 메모지와 볼펜을 책상 위에 탁 꺼내 놓았다.
여기다가 그 뭐냐, 계좌번호랑, 적어. 내, 방 빼줄게.
……아니에요.
그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뭐가 아니야?
안 나간다구요, 거기.
여자는 의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정말? 왜?
그냥요.
아이구, 그래애, 잘 생각했어. 뭐가 좀 보여도, 눈 딱 감고 안 보인다아, 생각하면 또 안 보이고 그럴 거야. 거기가 좀 외져서 그렇지, 학생이 찾던 딱 그런 데잖아. 조용하고, 응? 싸고 조용하고 그런 데 찾는다고 안 그랬어? 그랬잖아?
싼 곳을 찾는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피식 웃음이 났다. 얼마나 벌어야 이 집을 살 수 있을까를 가늠해 보며 집주인을 속으로 부러워했던, 어머니의 아파트. 그 집에는 보이지 않는 먼지가 엷게 내려앉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밤마다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먼지 위에 사뿐히 발자국이 생겨나고 있을지 모른다. 어머니는 텔레비전 앞에 누워 잠들고, 형은 나를 찾아 방문을 열어 보며 이 방 저 방 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어, 형아가, 어, 라면 끓여 줄까? 그러나 내가 현관을 들어서면, 그들은 사라지고 나는 다시 혼자 남을 것이다. 불러 볼 수 없이 자취를 감추는 뒷모습, 내게만 들리지 않는 대화. 코앞에서 문을 닫아거는 견고한 적막을 나는 견디고 싶지 않았다.
으이그……. 아무리 혼자 사는 총각이어도 밥 좀 잘 챙겨 먹고 세수도 좀 하고 그래. 꼴이 그게 뭐야? 학교는 안 다니나 봐? 전에 학생이라고 안 했나?
여자는 큰 손바닥으로 친한 체 내 등을 쓸며 나를 문 쪽으로 솜씨 좋게 몰아냈다. 사람의 손이란 건, 따뜻하구나. 나는 깜짝 놀라 움츠러들었다.


그는 점점 더 자주 나타났다. 책을 들고 뭔가를 외우는 듯 서성거리기도 했고 책상 앞에서 오래 공부를 하기도 했다. 보였다가 몇 분도 안 되어 사라지기도 하고, 어느 날은 반나절 넘게 머물렀다. 좀 이상하지만, 그가 무언가 열심히 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쯤 되는 기분이었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다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공부에 열중했다.
무슨 공부 해요?
…….
재미있어요?
…….
열심히 하네요.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에게 한두 마디씩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대답을 기대해서는 아니었고 당연히 그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보다 그가 곁에 있을 때, 나는 현실에 좀 더 발을 붙이고 있는 듯 느껴졌다. 그를 본다는 것은 내가 확실히 깨어 있다는 뜻이었고, 그를 볼 때는 꿈과 현실의 흐릿한 경계에서 오고가던 어머니와 형의 환영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왜 떨어졌어요?
그의 어깨가 움찔, 한 것처럼 보인 것은 망상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미안해졌다.
미안해요.
…….
진짜 미안해요.
그가 나타나지 않는 동안,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봐 내가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형, 나 돌았나 봐. 그의 책상이 놓여 있던 쪽을 보며 웅얼거려 보았다. 형, 그 형 보면 미안하다고 전해 줘. 형, 그런데, 내가 그렇게 잘못했어? 다들 왜 그러는 거야? 응? 어둠 속에서는 아무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가슴 속에서 물결 같은 것이 일다가 가라앉고, 좀 더 거세게 일다가 가라앉았다. 말하고 싶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것들, 묻고 싶지만 물을 수 없는 것들. 내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감싸 쥔 얼굴은 보송하게 말라 있었다. 그 후 나는 한동안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내가 그러든 말든, 그는 나와 무관하게 서성였고 자기 할 일을 했다. 나는 다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방 안에 있는 듯 없는 듯, 그의 공부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의지로 충만하여 구석에서 그를 지켜보았다. 사실, 내가 무엇을 했다 한들 그를 방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란하게 드나들거나 분주하게 생활했어도, 그는 어쩌다 우연히 겹친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사는 나에게 전혀 방해받지 않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끝나지 않은 할 일을 묵묵히 지속했을 것이다. 그럴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있을 때 나는 숨소리마저 죽이려 노력했다.
공부, 방해 안 할게요.
…….
그가 잠이 들면 나는 그에게 조금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팔짱을 끼거나 무릎 사이에 두 손을 찌르고 벽에 바짝 기대어 잠든 그의 모습은 내버려두기엔 마음 쓰이는 것이었다. 침구라고는 없이 벽을 향해 웅크려 자는 뒷모습. 그는 이 방에서 그렇게 지냈던 것일까.
왜 그렇게 자요.
전신에서 딱딱한 긴장이 느껴지는 그는 자는 게 아니라 뭔가를 견디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인지 잠든 그는 깨어 있을 때보다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런 그를 나는 외면할 수도, 뭔가 해줄 수도 없었다.
저기요, 뭐라도 좀 덮고 자요. 왜 그렇게 자요. 추울 것 같아요.
…….
잠들었을 때라도 편안해야 하잖아요. 편하게 담요에, 바로 누워 자면 좋지 않아요? 우리 어머니도 만날 불편하게 잤어요.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대답을 제대로 안 해 줬구요. 아, 이런 말을 한 적은 있어요. 꼭 그렇게 자려고 하는 건 아니고 ‘잠깐만 자야지’, 하다가 깊이 잠드는 거라고. 하지만 누구라도 잠은 자야 하고, 쉴 때는 쉬고 잘 때는 자야 다음날 또 살아갈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왜, 잘 때까지 그렇게 긴장해야 해요? 어머니는 한숨을 쉬면서 그랬어요. 편히 누우면 너무 깊이 잠들 수도 있고, 그러면 못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그럼 안 된다고, 큰일이라고. ‘너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거’라고요.
그런데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면, 말을 안 해 주는 게 맞는 거예요? 네? 그걸로 그냥 되는 거냐구요. ‘나중에’ 말해 준다고 했지만 이것 봐요,‘나중’이 없어졌잖아요. 이럴 줄 몰랐다고 말할 수 있어요? 왜 그랬어요, 네? 왜요, 왜 그랬냐구요. 안 그럴 수도 있었잖아요. 꼭 그러지는 않아도 됐잖아요.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어요?
어느새 나는 빈 벽을 향해 소리치듯 말하고 있었다. 그래요, 당신의 깊은 바닥에 무엇이 있었는지, 안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말이죠, 내 마음엔 무엇이 남아 있는지, 당신은 알아요? 네? 신기하게도 난, 그렇게 슬프지도 절망스럽지도 않아요. 실행해야 할 것들을 차근차근 생각하고 있을 뿐이죠. 생각은 생명이 있는 것처럼 차곡차곡 자라나요. 결국, 그런 게 사람을 끝까지 몰아가는 거예요. 비장한 결심 같은 건 필요 없는 거였어요. 나는 이걸 당신한테서 배웠어요, 어머니. 정말 깊은 구덩이에는 큰 소리로 울던 사람이 뛰어드는 게 아니라는 것을. 가장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사람이 어느 날 문득, 한 걸음 내딛고는 그 안으로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거란 걸.
하지만 어머니.
어머니에게는, 내가 있었잖아요.


3.
그는 왜 나를 보지 못하는 걸까.
그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뭐든 좋다. 떠났어야 할 그가 무슨 이유로든 떠나지 않고 맴도는 거라면, 그에게도 자기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온 내가 보여야 하는 게 아닐까. 몇 번인가 확인을 시도했으나 그런 낌새는 없었다. 그는 지켜보는 사람이 먼저 지칠 만큼 공부만 했다. 이제 와 그렇게 열심히 해서 뭘 하겠다는 것인지 오로지 책장을 넘기고, 다 본 책을 한쪽에 차곡차곡 쌓고, 쌓은 책을 처음부터 다시 헐어서 보았다. 이곳에 나타나지 않는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가 세상의 다른 곳을 헤매고 다니는지 뭘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이곳에서의 그는 공부를 하거나, 잠이 들 뿐이었다.
이제 그만 해도 되지 않아요?
…….
그만 해요, 해도 소용없잖아요.
…….
아니, 내 말은……. 안 해도 된다는 거예요. 모르는 것 같아서.
그를 둘러싼 침묵의 벽은 단단했다. 그는 그때까지 알았던 누구보다도 나와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었다. 모르는 게 아니었으면서, 어쩐지 자꾸 섭섭해졌다.
쉬어도 되잖아요. 그러면 좋을 텐데. ……난 말이죠, 죽으면 모든 게 끝인 줄 알았어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껏 종착지까지 갔는데 되돌아와야 한다면, 그게 중간지점 정도라 해도 되게 맥 빠지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보니까, 사람마다 다른가 봐요. 형은, 후회되는 거예요? 더 열심히 안 해서?
답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왔다.
그날, 며칠 동안 안 보이던 그는 한밤중이 다 되어 가물거리며 나타났다. 그런데 다른 날과는 다르게 벽에 기대 앉아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좀 이상하네, 생각하는데 그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한 번도 열지 않았던 우리 방의 조그만 문을 열고 한 걸음, 밖으로 나섰다. 나는 어어, 하고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망설일 틈도 없이 그를 뒤따라 나갔다. 밤공기가 싸늘했다. 그는 저만치 골목의 초입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의 구부정한 어깨에 매달린 커다란 노란색 가방이 어둠 속에서 두드러졌다.
그는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걷는 것 같으면서도 시야에서 자주 사라졌다. 거의 뛰다시피 걸어도 이상하게 그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골목의 모퉁이마다에서 그를 놓쳤고, 잃어버렸구나 생각하는 순간 그는 저만치에 나타났다. 나는 왜 따라가는지도 모르면서 길을 눈에 새겨 두려 부지런히 사방을 둘러보며 그를 허둥지둥 따라갔다.
동네를 빠져나가자 곧 한강이었다. 한강이 이렇게 가까웠구나. 다리 위에 늘어선 가로등이 집어등처럼 물 위에 어른거렸다. 검푸르게 얼룩진 구름 뒤에 달이 숨어 있었다. 꿈속인 듯, 모든 것이 느리고 조용하고 둔탁했다. 그는 등에 멘 가방을 무겁게 한 번 추스르더니 목적지가 분명한 사람의 태도로 동호대교 쪽을 향했다. 나는 주춤, 두려워졌다. 다리로 연결된 터널에서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그는 어느새 다리 위로 멀리 걸어 나가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등으로 차가운 땀이 흘렀다.
그는 한참 동안 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시각각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시간이 나를 내리치듯 지나갔다. 그가 무엇을 하려 하는지 알겠다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았다. 사람이 곧 죽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니. 어떻게 말려야 할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를 불러 세우고 싶지만, 벙어리가 된 것 같았다. 하지 마요, 죽지 마요. 내 귀에조차 들리지 않는 말이 입속에서만 굴러다녔다. 그는 곧 뛰어내릴 것이다. 그렇게, 전에 그랬던 대로 죽어버릴 것이다. 그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이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이미 일어난 일이기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일어나려는 일을 보고만 있을 수도 없다. 112에 신고라도 해야 할까? 뭐라고 해야 할까. 죽은 사람이 지금 또 죽으려 한다고 신고한단 말인가?
지나다니는 차량도, 사람도 없이 다리는 텅 비어 있었다. 나는 꼼짝 못 하고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힘들게 가방을 벗어 난간에 얹었다. 얇은 천으로 된 가방은 돌이라도 잔뜩 든 것처럼 원래의 모양을 잃고 여기저기 모나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모서리에 걸려 안 열리는 지퍼를 억지로 당겨 열었다. 가방에는 책이 가득했다. 그는 한 권, 한 권 책을 꺼내 좁다란 난간 위에 아슬아슬하게 쌓아올렸다. 한 권을 집어 후르륵 넘겨보던 그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다가 책을 든 팔을 투수처럼 뒤로 한껏 젖혔다. 던지려는 건가, 하는데 다시 눈앞으로 가져오더니 이번에는 강물 위로 쭉 내밀고는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책이 미끌, 그의 손을 빠져나갔다.
어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가 책을 향해 황급히 상체를 내밀며 다른 손을 뻗었다. 기우뚱. 몸이 허공에 뜨는가 싶더니, 곧 강물 쪽으로 곤두박질쳤다. 쌓아 둔 책들이 그 서슬에 우르르 강물로 쏟아졌다. 나는 뻣뻣하게 잘 놀려지지 않는 다리로 달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건드린 걸까. 마지막 한 권이 떨어져 그의 머리를 때렸다. 허우적대는 그의 주위에 각종 수험서들이 날개를 펼치고 너울너울 떠 있었다. 그는 구명구나 되는 것처럼 그것들을 어떻게든 잡아 보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훨훨 날아오를 듯 양 날개를 펼친 책들은 그를 떠받쳐 주지 못하고 잡는 족족 가라앉았다. 나는 꿈에서 깨어난 듯, 꿈속인 듯 소리쳤다.
여기요! 누구 없어요? 사람 살려요!
있는 힘껏 소리치는데도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가 정신없이 팔을 저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나를 보는 걸까.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내 목소리를 듣고 나를 쳐다본 것 같았다.
거, 건져 줄게요, 조금만 참아요, 조금만!
어둑어둑한 다리의 남단 쪽에서 교통경찰이 뛰어왔다.
학생, 무슨 일이야?
나는 난간을 붙들고 경찰에게 마구 손을 휘저었다.
사람이 빠졌어요!
어디, 어디?
저기요, 저기 바로 아래요!
가리키는 쪽을 향해 교통경찰이 난간을 잡고 몸을 기울였다. 검고 깊은 물이 가로등 빛을 반사하며 넘실거렸다. 경찰은 허리에 찬 손전등을 뽑아 아래를 휘휘 젓듯이 비추었다. 그마저 아래로 떨어질까 봐 와락 뒤로 끌어당기고 싶었다. 경찰은 평화로운 강물을 꼼꼼히 훑더니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아무도 없는데? 학생, 뭐 잘못 봤나 봐.
손전등으로 내 얼굴을 비추어 보고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
학생, 신분증 있어? 신분증 좀 줘봐.
저, 저 이 근처 살아요. 산책 나오면서 누가 그런 거 가지고 나와요.
여기서 산책을 한다고? 지금 이 시간에?
경찰은 나를 한 번 보고, 매연이 새까맣게 앉은 좁은 보행자 통로에 힐끗 눈길을 주었다. 거짓말이 하도 허술해서 따지기도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하품을 하며 말했다.
이봐, 학생. 오늘은 내가 봐줄 테니까, 이런 장난 치지 말고 빨리 집에 가, 오밤중에 돌아다니지 말고. 위험해.
나는 터널 쪽으로 몇 걸음 옮기다 도로 난간으로 다가섰다. 그가, 저 아래에 있을 텐데. 건져 줘야 하는데. 내려다보고 싶었지만 돌아보니 경찰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냥 걷다가, 나는 뛰었다. 빨리 가면 늦지 않게 끌어올릴 수 있을지도, 그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길눈 어두운 내게 어둡고 낯선 강가로 내려가는 길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헤매다 겨우 찾아 내려가 보니, 강은 바다처럼 넓고 막막했다. 강가를 오르내리며 귀 기울여 보아도 들리는 것이 없었고 어디쯤이 그가 물에 빠지던 자리였는지 알 수 없었다. 물은 멀고 어둡고, 흐르는 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나는 강을 바라보다가 힘없이 말해 보았다.
……알겠어요.
대체 뭘 알았단 말인가. 그저, 적막의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어 보고 싶었다. 조금 더 큰 소리로 말해 보았다.
그랬던 거예요?
그랬던…… 거죠?
알았어요. 나는…… 나라도 알고 있을 게요…… 이제.
남의 것 같은 목소리가 쩍쩍 갈라지며 무거운 공기 속으로 흔적 없이 빨려 들어갔다. 가슴이 무언가로 꽉 막혀 답답했다. 발에 채는 돌멩이를 주워, 수상하게 잠잠한 강 복판을 향해 힘껏 던졌다. 돌멩이는 소리를 내지 않고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그랬다는 거죠, 알겠어요, 어쨌거나……. 그러니까, 이젠. 아무 말이나 되는 대로 중얼거리고 있었으나 어떤 말도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돌아가는 길은 모두 생경하고 의심스러웠다. 어느 길이 내려왔던 길인지 찾아보려 해도 올 때와 반대 방향에서 본 골목은 눈에 익은 구석이 없었다. 나는 왔던 길을 찾는 걸 단념하고,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위로 통할 듯한 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그러나 족족 틀린 길을 선택하는 모양이었다. 이쪽일 거라 생각하고 접어들면 벽이 막아섰고, 돌아 나와 다른 길을 찾다 보면 아래로 이어진 낭떠러지 같은 계단이 나타났다. 확신 없이도 가다 보면 의외로 맞는 길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당장 영 아닌 것 같은데 선뜻 발을 내딛게 되지는 않았다. 이 길이 틀린 방향이면 얼마나 멀리 헤매야 할까. 아니라는 걸 깨닫고 돌아오기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밤은 깊고, 기이할 만큼 깜깜했다. 실낱같은 골목으로 구석구석 누벼진 기우뚱한 집들에는 불 켜진 창문 하나 없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곳, 잊힌 미로에서 혼자 헤매는 듯했다. 나는, 살아 있는 걸까? 깨어 있기는 한 것일까? 그마저도 의심을 품어 보는 사이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걸어도 알 만한 길이 나타나지 않았고 아무래도 골목은 헤매는 내 등 뒤에서 죽죽 늘어나거나 몰래 움직여 다른 골목과 만나고 꼬이는 것 같았다.
어디쯤인지 모를 곳에서 나는 지쳐 주저앉았다. 동네의 중턱쯤에는 왔는지, 아니면 더 아래로 내려왔는지…… 도무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뒷모습이라도 있어 준다면, 내려올 때처럼. 보이다 말다 하던 모습이라도 있다면 뒤따라갈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이제 그는 없다. 떠나버렸다. 나는 그를 잡지도, 도와주지도 못했다. 어쩌다 그의 마지막, 혹은 마지막의 재연을 무력하게 목격했을 뿐이다. 아마도 그가 내 앞에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불현듯, 아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사실을 떠올렸다. 내가 다시 혼자가 되었다는 것을. 그 무덤 같은 방 안에서조차. 나를 찾아올 사람은 이제 정말로,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점에 생각이 미치자 고통, 같은 것이 파도쳐 왔다. 어디선가 다친 짐승의 흐느낌 같은 소리가 들렸다. 내게서 나는 소리였다. 나는 왜, 울고 있는 것일까.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왜 울어? 형이 죽었을 때도 눈물 안 흘렸잖아. 어머니가 죽었을 때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렸던 나잖아. 왜 울지? 왜 울어? 물기 하나 없는 내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냉랭하게 질문을 던졌으나 한번 터진 눈물은 쉽게 멎지 않았다. 나는 턱으로 목덜미로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떨구며 어딘지 모를 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때 내가 중얼거린 말들은 가지 마, 라거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라거나…… 그래, 아닐 수도 있었겠지…… 몰랐어요, 그런 말들이었던 것 같다.


어느 결엔가 눈앞이 환했다. 마른 우물 바닥에 달빛이 스미듯, 깨진 가로등 위로 뜬 달이 구부러진 골목 안쪽을 비추고 있었다. 은빛 달은 표면의 얼룩이 보일 만큼 가까웠다. 나는 젖은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고 천천히 일어섰다. 위쪽을 올려다보니 못생긴 블록을 되는 대로 던져 놓은 듯한 동네의 모습이 달빛 아래 한눈에 들어왔다. 그렇게나 헤맸는데 아직 동네 초입이었다. 나는 어딜 헤매고 다녔던 것일까. 그래도 달빛이 비추니, 다시 길을 찾아가면 이 밤 안으로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땅 속으로 끌려 내려가는 듯 묵직한 다리를 끌고 걷기 시작했다. 막다른 골목처럼 생긴 길 끝에 좁은 틈이 있었다. 틈을 빠져나왔다.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서 우회전을 했다. 길을 따라가다 위로 오르는 계단을 만났다. 계단 위에는 이차선 도로가 있었다. 도로를 건너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섰다. 누구 하나 깨어 있지 않은 밤, 사방은 괴괴했고 골목을 굽어보듯 기울어진 집마다 다닥다닥한 검은 창문은 내게 호의를 품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그 사이를 걷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한 걸음씩 계속 걸었다. 어쨌든, 길은 어디론가 이어져 있을 것이고 밤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었다. 그것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새벽이 오면, 그때도 지금과 같지는 않을 거라는 걸. 우무질처럼 귓가에 엉기는 침묵을 헤치며 나는 계속 걸었다. 서서히, 졸음이 덮쳐왔다. 얼굴을 손바닥으로 때리며 졸음을 쫓아 보려 해도 손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졸음이었다. 무릎이 자꾸만 꺾였다. 다리에서 힘이 빠져 발이 비틀거리며 허방다리를 짚었다. 나는 어느 골목의 끝에서 벽에 간신히 기대섰다. 이 길은 또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리며 애써 고개를 들었다. 아귀가 맞지 않는 것이 분명한, 얇은 새시 문이 건너편에 보였다. 아…… 다 왔구나. 다 왔는데, 너무 졸려 한 발짝도 더 갈 수 없었다. 너무 졸려요, 어머니. 이런 데서 자면 안 되는데. 자도 잔 것 같지 않아 낮에도 졸릴 텐데 말이에요. 어머니, 이렇게 자면 안 돼요. 이불을, 얇은 거라도, 덮고 주무세요…….


꿈을 꾸었다. 어머니는 기울어진 벽 아래 반듯하게 누워 잠들어 있었다. 뭐라도 덮을 게 없나 둘러보았으나 마땅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입고 있는 재킷을 벗었다. 내 옷이 아닌 듯 헐렁하고 컸다. 살짝 덮어 주려는데 어머니가 눈을 떴다.
어머니, 편히 주무세요.
어머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거, 너 잘 때 형이 덮어 준 거다.
어머니, 잠을 제대로 못 자면 큰일 나요.
엄마는 괜찮다. 너 입으렴.
밖에서 형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신나서 부르는데 음정, 박자가 전혀 맞지 않는 형 특유의 노래였다.
어머니, 형이 있어요.
그래, 형이 저기 있지. 나도 안다.
하지만 형은 여기 오래 있지 않겠죠, 그렇죠?
어머니는 말이 없었다.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재킷으로 어머니의 야윈 몸을 덮었다.
그래도, 편하게 주무셔야 해요.
형의 큰 재킷은 한 줌도 되지 않을 어머니의 몸을 폭 싸고도 남았다. 어머니는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어머니, 저는 괜찮아요, 이제는. 그러니까…… 어머니.
형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멀어져 갔다. 나는 그 멜로디에 오래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기억에 새겨 두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멜로디, 꿈이 깨자마자 잊힐 노래. 어느 잠결엔가 다시 떠올라 베갯잇을 적시게 할, 그러나 지금 들으면서도 따라 부를 수 없는. 그 노래가 그런 노래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잘 가, 형. 작게, 입안으로 뇌어 보았다. 잘 가요. 그때 소리로 되어 나오지 않았던 말이, 어디쯤 가고 있을지 모를 그들에게 닿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네모진 쪽유리 너머로 희부옇게 빛이 어른거렸다.
새벽,
세상으로 돌아갈 나의 시간이었다.




작가소개 / 정희선(소설가)

서울 출생. 2014 중앙신인문학상에 단편 「쏘아올리다」로 등단.



《문장웹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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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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