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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소설_HㆍOㆍTㆍEㆍL ⓛ] 우산도 빌려 주나요

  • 작성일 2015-05-09
  • 조회수 2,303


[기획소설_HㆍOㆍTㆍEㆍL ⓛ]



우산도 빌려 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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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진



삽화-우산도



1

그녀는 엄마를 마중 나가고 싶지 않았다. 날씨가 나쁘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다.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이 하루에 서너 번씩 꼬박꼬박 전해졌다. 기상 캐스터의 말대로라면 주말 안에 기필코 상륙할 예정이었다.
거리마다 혹시 모를 수해에 대비하느라 소란했다. 가게들은 차양을 펼쳤고, 천변에는 통행금지 표지판이 세워졌다. 행인들은 우산을 지팡이 삼아 걸었다. 그녀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 말고 세일 중이라는 문구에 홀려 커다란 의류매장에서 사지도 않을 옷을 고르는 중이었다. 무더기로 쌓여 있는 옷들을 헤집으면서 슬쩍 보이는 가격표에 눈길을 주었다. 여름옷치고는 너무 비싸다 싶으면서도 옷 무더기 속으로 한 손을 깊게 찔러 넣었다가 벨소리에 놀라 얼른 빼냈다.
엄마였다. 수화기 너머에서 엄마는 왜 이리 전화를 늦게 받느냐고 타박부터 해댔다. 그녀가 뭐라 뭐라 대꾸하자 잘 들리지 않는다고 소리를 빽빽 질렀다. 그녀의 귀에도 엄마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매장 안에 음악소리가 너무 컸다. 그녀는 가판대에서 고르던 옷을 팔뚝에 대충 걸치고, 핸드폰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바꾸어 들었다. 엄마가 웅얼거렸다. 아마도 도착 시간을 알려주느라 전화했을 것이다. 그녀는 천장에 매달린 스피커를 피해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탈의실로 향했다. 커튼으로 가려진 탈의실은 매장 크기에 비해 몇 개 되지 않았다. 때마침 구석에 비어 있는 방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커튼을 다시 닫고, 바닥에 옷을 내던지고,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음악소리는 탈의실 안에서도 만만치 않게 컸다. 그녀는 한 손으로 귀를 막고 엄마를 불렀다.
엄마.


여름이 지나간 뒤에 오는 게 어떻겠느냐고, 그녀는 여러 번 물었다. 엄마의 대답은 간단했다. 이번 주 금요일. 그 이후로는 딸을 보러 갈 시간이 전혀 없다고, 자고로 엄마라면 딸이 어떻게 사는지 일 년에 두어 번은 봐둬야 하지 않겠느냐고 투정부리듯 말했다. 시간이 없어. 바빠질 거야, 협박조의 말을 굳이 덧붙였다. 그녀는 엄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어떻게든 엄마의 방문을 늦추고 싶을 뿐이었다. 게다가 엄마는 마땅히 직업이라고 할 만한 일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바빠질 일이라는 게 전혀 없었다.
이번 주는 내가 바빠. 같이 있어 주기 힘들지도 몰라.
말끝을 얼버무리며, 그녀는 엄마의 마음을 돌리려고 거짓말을 줄줄 늘어놓았다. 그 와중에도 다정하게 말하려 애썼다.
차표는 끊은 거야?
벌써 끊었어. 이제는 바꾸지도 못해.
밖에서 누군가 탈의실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거울에 기대어 앉은 몸을 애써 일으켰다. 구겨진 옷을 한 손으로 그러안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탈의실 문을 나섰다. 검은 샌들이 비켜섰다. 발톱에 여러 색깔의 페디큐어를 칠한 맨발이 보였다. 새끼발톱에만 페디큐어가 칠해져 있지 않았다. 가까이 보지 않아서 확실치 않지만 새끼발톱이 아예 없는 것도 같았다.
태풍이 온대잖아.
결국 또 날씨 핑계를 댔다.
아직 안 왔어.
엄마 역시 뉴스를 보았고, 서울의 날씨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음악소리가 조금 전보다 더 커진 듯했다. 그녀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스피커에서 먼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출입구 쪽으로 발을 옮겼다. 엄마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아무 말이나 뱉었다.
알겠어. 그래. 그런데 말이야. 바꿀 수 있어. 쉬워.


출입구 쪽은 매장 안보다 훨씬 시끄러웠다. 입구 양쪽에 대형 스피커 두 대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귀에 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풍은 아직 당도하지 않았지만,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어둔 구름은 빠르게 움직였다. 엄마가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스피커를 지나 멀찌감치 떨어진 정류장까지 내처 걸어갔다. 노랫소리가 서서히 사그라지자 엄마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뭘 바꿀 수 있다는 거야.
그녀는 자신이 못 들은 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묻기 싫었다.
너는 그게 되니?
엄마가 거칠게 쏘아붙였다. 그녀는 자신이 놓쳐버린 말이 뭐건 간에 그것이 그녀에게는 쉽고 엄마에게는 어려운 일임을 짐작했다. 그런 경우는 흔해 빠져서 궁금하지도 않았다. 엄마의 화를 풀어 주는 일이 급선무였다. 더 이상 엄마의 서울행을 만류해 봤자 괜한 의심을 사거나 마음만 상할 게 빤했다. 그녀는 마지못해 내일 역에서 기다리겠다는 말을 꺼냈다.
한 시 반이야.
엄마는 도착 시간을 서둘러 말했다.
나도 최선을 다하는 거야.
엄마가 외치듯 말했다.
내가 엄마니까!
덧붙여 외치고 외쳤다. 그녀에겐 엄마의 말이 모두 협박처럼 들릴 뿐이었다.


예정대로라면 내일은 애인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그녀의 애인은 군인이었다. 느닷없이 휴가를 나온다고 했다. 짧은 휴가였다. 이박삼일 동안 애인은 그녀의 집에서만 머무르겠다고 알려왔다. 일방적인 통보였지만 그녀는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거절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 역시 오랫동안 애인을 기다려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엄마마저 막무가내로 딸의 집에 오겠다고 알려온 것이다. 문제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엄마는 딸에게 애인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녀는 먹먹해진 귀를 어루만지며 뒤돌아섰다.
같이 가시죠.
남자 세 명이 그녀의 뒤를 가로막았다. 어리둥절해진 그녀는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남자 둘이 그녀의 양옆에 섰다. 마주 보고 서 있는 남자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옷들을 가리켰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그녀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거리낄 게 전혀 없었는데, 입은 잘 떨어지지 않았다. 남자가 그녀에게서 옷을 빼앗았다.
따라오세요.
남자의 표정이 험악했다. 그녀는 순순히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옆을 지키고 있던 두 남자가 그녀에게 바짝 몸을 붙여 왔다. 조금 귀찮은 일이 생겼을 뿐이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떤 누명이라도 쉽사리 벗어날 수 있을 거였다. 별일 아니야. 오해는 늘 일어나는 일에 불과해.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이 그런 짓을 저지를 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았다. 사람이 모질지를 못해. 서울에서 이직을 거듭하는 동안 그녀가 제일 자주 들은 말이었다. 모질지 못한 사람이 제대로 완수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많지 않았다. 타고나기를 모질지 않은 사람처럼 생겨먹었으니 어떻게 해야 다르게 살아갈 수 있을지 그녀로서는 영영 오리무중이었다. 사람들은 엄마를 닮아서라고 말했다. 거울을 보면 그녀 자신이 보아도 모진 짓과 거리가 먼 사람처럼 생겼다는 말에는 저절로 수긍되었지만 엄마를 닮았다는 말에는 좀처럼 동의할 수 없었다.


예상과 달리 그들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전화를 받느라고 그랬어요. 엄마 때문이에요.
그들은 그녀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도 않았다. 다만 그녀를 좁은 사무실로 데려가 CCTV 영상만 반복 재생해서 보여주었다. 흑백 화면 속 그녀는 영락없는 도둑이었다. 주위를 살피며 북적이는 쇼핑객들 사이를 유유자적 헤집고 나갔다. 흑백 영상 때문인지 엄마와 통화 중인 그녀의 모습은 제법 모질어 보였다. 그녀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생경해서 화면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았다. 훔치다 적발 시 20배 보상. 그들은 출입구 옆쪽과 계산대 뒤쪽에 붙어 있는 종이를 그녀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CCTV 영상을 한 번 더 보겠다는 그녀의 시야를 얇은 종이 한 장으로 아주 가려버렸다.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세요?
그녀가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보다 앞장서서 걸었던 남자 직원이 계산기를 두드리며 그녀가 훔친 옷의 값을 더했다. 그녀는 남자 직원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녀보다 서너 살 어려 보였다.
다 해서 이십삼만 팔천 원이고.
그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계산했다. 꽤 잘생긴 얼굴이었다.
곱하기 이십을 하면.
그녀는 계산대 위에 쌓인 옷들을 쳐다보았다. 전부 헌옷 같았다.
총 사백십육만 원. 사백십육만 원 내고 가시면 돼요.
그녀는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제가 그만한 돈이 있는 사람으로 보여요?
그러니 훔쳤겠죠.
남자 직원이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돈 없어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두 눈을 치켜떴다.
카드 됩니다.
제 카드 한도가 얼만지 아세요?
말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그럼 지금 경찰 부를까요?
경찰 오면 어떻게 되는데요?
일단 연행이죠.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엄마를 생각했고, 뒤이어 애인을 떠올렸다. 월요일이 되면 어떻게든 이 상황에 대해 제대로 된 해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지갑을 열었다. 신용카드를 건넸다.
일단 이백만 원이요. 나머지는 월요일에 해결할게요.
직원이 카드를 긁었다. 그녀가 사인을 하자마자 직원이 덧붙였다.
월요일은 안 돼요. 내일 오세요.
그녀는 더 이상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묵묵히 카드와 영수증을 되돌려 받았다.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직원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녀는 직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사인을 했다. 속으로는 남자 직원 또한 이 모든 일이 그저 어떤 수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녀의 결백 또한 인정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녀를 몰아붙이는 거라고 이해했다. 게다가 각서는 법적 효력이 없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듯도 했다. 그녀는 사인한 종이를 되돌려주면서 잘생기기까지 한 남자 직원에게 조곤조곤 말했다.
사람이 참 모지시네요.


도망치듯 그녀는 매장을 빠져나왔다. 곧장 은행으로 달려갔다. 통장에 남아 있던 현금을 모두 찾았다. 육십만 원이 조금 안 되는 돈이었다. 갑자기 지갑이 두둑해졌다. 가방 깊숙한 곳에 지갑을 숨겼다. 백팩을 앞으로 메고 임신부처럼 가방을 감싸 안고 걸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청소를 했다. 엄마도 애인도 이 집에는 한 번도 온 적 없다는 사실이 그제야 떠올랐다. 손으로 꼽아 보니 이사한 지 육개월 남짓 지났다. 엄마한테 이사한다고 말하긴 했었나, 곰곰 돌이켜보았지만 확실히 기억나지 않았다. 며칠 전이었다. 애인이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너 이사했어? 간간이 보내는 편지 봉투의 주소는 읽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원래부터 편지의 두께에만 집착하는 그였다.
해가 질 때까지 그녀는 애인의 전화를 기다렸다.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함께 있을 수 없는 사정을 대충 이야기하고 열쇠를 숨길 만한 마땅한 곳을 알려주기라도 해야 하는데 큰일이었다. 주소만 가지고 혼자서 잘 찾아올지도 의문이었다. 그녀는 좁은 방의 일인용 침대에 엎드려 누워 눅눅한 이불 위에서 버둥거리다 이불깃을 입에 물고서야 겨우 잠에 들었다. 금요일도, 월요일도 오지 않았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보다 엄마도, 애인도 오지 않았으면 하는 게 더 정직한 마음이었다.



2

딸이 금방이라도 자신을 부를 것 같아서 그녀는 누구보다 먼저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일부러 주위를 둘러보지 않으려 애썼다. 바지의 먼지를 털어내는 시늉을 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부터 딸은 고향에 자주 내려오지 않았다. 그즈음부터 딸에게 용돈을 보내지 않았다. 딸이 그러기를 원했다. 그녀는 머지않아 딸이 용돈을 보내올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이제 딸의 차례라고 여겼다. 하지만 딸은 그러지 않았다. 아직 그럴만한 형편이 안 되는 것인지 아예 그럴 마음이 없는 것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섭섭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인기척이 느껴져 옆을 바라보았다. 딸이 코앞에 서 있었다. 엄마, 라는 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딸은 잠자코 가방을 빼앗아들었다. 원래부터 무뚝뚝한 딸이었는지 돌이켜보았으나 잘 기억나지 않았다. 갓난아이였을 때도 딸은 또래보다 울지 않는 편이었다. 키우기 편하겠다고 남들이 부러워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걱정이 더 컸다. 엄마인 그녀와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이라는 게 아주 어릴 적부터 티가 났다.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역 앞 광장에서 딸이 물었다.
일단 집에 가자.
그녀는 지하철역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지 말고.
딸이 그녀의 팔꿈치를 잡았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랜만에 서울 왔는데 구경 가자.
그녀는 딸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진심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다. 딸이 엄마의 팔을 흔들며 재촉했다. 그녀는 딸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딸은 지하철역을 지나쳐 택시 승강장으로 엄마를 잡아끌었다. 택시에 타자마자 호텔 이름을 댔다. 그녀는 마치 어딘가로 끌려가는 기분에 사로잡혔고, 저도 모르게 허벅지 위에 올려 둔 가방을 세게 끌어안았다.
목적지는 멀지 않았다. 택시 요금이 기본요금을 넘지 않았다. 운전수의 표정이 내내 마뜩치 않아 보이던 이유가 뒤늦게 짐작되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그녀의 입에서 저절로 잔소리가 튀어나왔다.
지하철을 타지, 뭣 하러 택시를 탔어?
딸은 지갑에 잔돈을 넣으며 궁시렁거렸다.
그 돈이나 이 돈이나 별 차이 없어.
그녀는 딸의 계산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마디 더 하려는데 딸이 방긋 웃으며 팔짱을 꼈다.
우리 오늘 호텔에서 자자. 여행 온 것처럼 말이야.
그녀는 가방 끈을 목에 걸면서 딸의 팔을 풀어냈다.
집에 가자고 했잖아.
엄마, 호텔에서 자본 적 없잖아.
왜 없어? 네 아빠랑 신혼여행 가서 잔 적 있어.
그게 언제 적 이야기야. 요즘 모텔도 그보단 나아.
그녀는 딸의 말본새가 영 버르장머리 없게 느껴졌다. 집에 남자라도 숨겨 두었느냐고 호되게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억지로 참았다. 딸은 아랑곳하지 않고 호텔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입구를 지키던 호텔 직원이 허리를 숙이며 문을 열었다. 딸은 고개를 까닥이며 프런트로 향했다. 그녀는 딸의 뒷모습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남편이 아직 살아 있었다면 딸의 머리채를 붙잡고 온종일 매질을 했을 터였다. 십 년이 넘는 결혼 생활 동안 그녀가 남편에게 가진 불만은 그것뿐이었다. 당신은 지나치게 보수적인 아버지야. 우리 아버지랑 뭐가 달라? 남편이 죽고 난 뒤에도 보수적인 부모가 되고 싶지 않다는, 보다 세련된 엄마이고 싶다는 그녀의 결의는 더욱 단단해졌다. 과부라는 소리가 무서워 근본을 운운하는 홀어미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려면 일단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고, 여태껏 그래 왔다.


프런트의 직원이 더블 침대가 있는 방을 추천했다. 십삼만 원이라고 했다. 딸은 지체 없이 트윈 룸을 달라고 했다. 십오만 원이라고 했다. 참다못한 그녀가 둘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더블로 주세요.
딸이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면서 엄마의 말을 정정했다.
아니에요. 트윈으로 주세요.
그러곤 곧장 직원에게 십오만 원을 들이밀었다. 그녀가 딸의 손목을 잡아챘다.
너 왜 이러니?
편하게 자면 좋잖아.
말문이 막혔다. 좀 더 편하게 자고 싶어서 나를 호텔로 데려온 건가 싶어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순식간에 두 뺨이 벌게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딸의 지갑을 흘깃 쳐다보니 사는 형편도 그리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만 원짜리 지폐가 수십 장이었다. 한창때인 남편도 지갑에 그만큼의 지폐를 넣어 다닌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딸의 무덤덤하고 무관심한 태도가 오로지 마음의 문제였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내 딸 같지 않아. 나는 너를 이렇게 키우지 않았어.
그녀가 가슴팍을 어루만지며 할 수 있는 말은 겨우 그뿐이었다.



3

엄마에게 창가 침대를 내어주고 그녀는 벽에 붙은 침대의 끝에 걸터앉았다. 이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두 손으로 이불을 쓰다듬었다. 푹신하고 부드러웠다. 한 번도 덮어 본 적 없는 값비싼 이불이었다. 그녀는 곁눈질로 엄마를 살펴보았다. 엄마 역시 이런 이불을 처음 보았을 텐데, 엄마는 방 구경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고개를 돌린 채 창밖만 내다보는 중이었다.
커다란 유리창에 거무튀튀한 하늘이 가득 비쳤다. 방은 십오 층에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문득 현기증이 일었다. 이마를 짚으려다 엄마가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두 손을 허리춤으로 옮겼다. 엄마의 말이 맞았다. 엄마는 절대로 그녀를 도둑으로 키운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왜 각서에 서명을 하고 순순히 신용카드를 내어준 거지, 의심하는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그녀는 방을 나가서 전화를 받고 싶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대신 화장실에 들어갔다. 엄마의 시선이 따라왔다.
손목시계를 보니 얼추 애인이 집에 도착했을 시간이었다. 그녀는 당연히 발신자가 애인인 줄로만 알았다. 변기에 앉아 목소리를 한껏 낮춰 받았다. 여보세요? 상대가 그녀의 이름을 물으며 본인이 맞는지 거듭 물었다. 그녀는 아차 싶었다. 분명 애인이 아니었다. 어제 의류 매장에서 그녀를 협박하고 추궁하던 직원이었다. 그는 여전히 성난 말투였다.
분명히 오늘 중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을 텐데요.
엄마가 화장실 문 앞에 서 있는 것 같아서 그녀는 더욱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알아요.
그녀는 또다시 그에게 해명해야 될 필요를 느꼈다. 많은 말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지만 문 밖에서 귀를 세우고 있을 엄마 때문에 간신히 말을 삼켰다. 엄마 때문에 일이 점점 꼬여 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수화기 너머 직원은 그녀를 나무라고 비난하는 내용의 말을 줄줄 이어 갔다.
이백십육만 원이에요. 오늘 중으로.
그녀는 더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변기의 레버를 눌러 물을 내렸다. 쭈뼛거리며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엄마는 여전히 침대 맡에 앉아 있었다.
봐라, 비 온다.
엄마가 고갯짓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굵은 빗줄기가 유리창 위로 흘러내렸다.
우산부터 사야겠네.
엄마의 목소리에는 힘이라곤 전혀 실려 있지 않았다.
프런트에서 빌리면 돼.
그녀의 목소리에도 힘이 쭉 빠져 있었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엄마가 그녀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벨소리가 멈출 때까지 그녀의 아래위를 아주 느긋하게 반복해서 올려다보고 다시 내려다보았다.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엄마가 물었다.
너 요즘 애인 생겼어?
단번에 아니라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근데 왜 전화를 몰래 받아?
그녀는 화가 났다. 몰래, 라는 말 때문이었다.
몰래 받은 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엄마는 벽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눈 밑을 스윽 닦아냈다. 엄마는 다 이해해, 그런 표정이었다.
애인은 그녀보다 나이가 어렸다. 아직 상병이었다. 이박삼일의 휴가는 일종의 유예 기간 같은 거였다. 애인은 야외훈련 중에 병장을 구타했다. 야전텐트를 설치하는 데 꾸물거리는 모습이 짜증나서였다. 애인은 병장을 텐트 안으로 끌고 들어가 발길질을 했다. 다른 소대원들이 그를 뜯어 말렸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코피가 날 때까지 주먹을 내갈겼다. 주먹을 내처 휘두르면서 병장의 코뼈가 부러진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더 크게 혼을 내줘야 했다고,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에게 애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훈련이 끝나자마자 위원회가 소집되었다. 결국 위원회가 그의 행동에 알맞은 판결을 내릴 때까지 부대 내 안전을 위해 짧은 휴가를 내주었다. 말이야 부대 내 안전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병장의 심신안정과 자존심을 세워 주기 위한 처사였고, 애인은 그게 마뜩치 않아서 병장이야말로 근무태만이라고, 당장 영창에 보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로 휴가가 끝나면 영창에 가야 할지도 모를 판국이었다. 애인은 큰소리를 치다가도 집에서 알면 큰일이라고 벌벌 떨었다. 별수 없어. 너희 집에 틀어박혀 있는 수밖에. 이틀 전에 애인은 그렇게 말하고 여태 깜깜무소식이었다.


엘리베이터가 7층에서 멈췄다. 우비를 입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우르르 탔다.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로 보이는 네 명이 문 앞에 나란히 섰다. 그녀와 엄마는 옆으로 물러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가 딸로 보이는 여자의 풀어헤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딸이 무릎을 살짝 구부리며 키를 낮췄다. 어머니가 손을 재게 놀리며 기다란 머리카락을 촘촘히 땋아 내렸다. 딸이 까만 고무줄을 어깨 너머로 내밀었다. 어머니가 고무줄을 입에 물고 있다가 꽁꽁 땋은 머리카락 끝을 묶었다. 그녀는 중국인 모녀가 하는 짓이 어쩐지 궁상맞아 보여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근데 호텔에서 우산도 주니?
엄마가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의 시선도 중국인 모녀에게 향해 있었다.
주긴 뭘 줘. 빌려주는 거지.
그녀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엄마 때문이 아니었다. 어린 애인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가 언제 올지 몰라서 현관문을 잠그지 않고 나온 게 영 꺼림칙했다.
너는 어쩜 그렇게 사는 게 밋밋하니?
느닷없이 엄마가 물어 왔고 그녀는 엄마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것은 그녀가 엄마한테 수년 동안 던진 질문이었다. 그때마다 엄마는 밋밋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거라고 확신에 찬 대답을 해대곤 했다. 엄마가 다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거울에 비친 엄마는 예전보다 퍽 마르고 피부도 꽤 거칠어 보였다. 입가가 움푹 팬 엄마의 얼굴 뒤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중국인의 딸이 비쳤다. 그녀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툭 튀어나왔다.
지랄하네.



4

그녀는 딸이 프런트 직원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있기가 싫었다. 로비의 기다란 소파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았다. 프런트에 몸을 기대어 선 딸의 뒷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로비의 한쪽 벽면은 유리였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 때문인지 로비는 어두웠다. 바닥에는 로비를 드나드는 사람들의 검은 발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녀는 딸에게 단 한 번도 걸레질을 시킨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했다. 그 누구도 자신을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죽은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딸이 잘못 자랐다면 그건 단연코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날씨는 계속 흐렸다. 점점 더 어둑해졌다. 기상예보가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딸에게 여러 번 말했다. 여기 날씨는 좋다고. 네가 태어나고 자란 이곳의 날씨는 터무니없이 맑기만 하다고, 통화 중에 수시로 말했지만 딸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잠시라도 내려올 생각이 전혀 없는 게 분명했다. 딸에게 꾸준히 용돈을 보냈더라면, 그랬더라면 결코 참지 않을 순간들 중 하나였다.
로비의 한쪽 구석에서 한 여자가 밀대로 발자국을 지우며 다가왔다. 그녀와 비슷한 또래처럼 보였다. 그녀는 문득 여자에게도 딸이 있는지 궁금했다. 서울에서 자식을 키우는 일과 다 자란 자식을 서울에 보내는 일이 얼마나 다른지 물어보고, 재보고,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소파를 짚으며 일어섰다. 여자에게 말이라도 걸어 볼 참이었다.


그 순간 또 딸의 벨소리가 들려왔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자주 딸의 핸드폰이 울렸다. 도대체 누가 자꾸 딸에게 전화를 걸어오는 것인지 그녀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불안한 마음도 적지 않았다. 그녀는 여자를 뒤로 하고 가방을 바짝 움켜쥔 채 프런트 쪽으로 빠르게 걸었다. 밀대를 들고 있던 여자가 그녀의 뒤에 바짝 붙었다. 그녀의 발자국을 남김없이 지워 가며 따라왔다. 그녀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그녀는 뛰다시피 다가가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딸의 옆에 섰다. 딸이 황급하게 핸드폰을 등 뒤로 숨겼다. 벨소리가 계속 들렸고 그녀는 한쪽 귀를 긁으며 거슬리는 기색을 드러냈다.
때마침 프런트의 직원이 활짝 웃으며 우산을 건넸다. 두 개였다. 그녀는 민망해서 손사래를 쳤다.
하나면 돼요. 뭘 두 개씩이나 주고 그래요.
그녀는 기다란 우산을 슬쩍 밀쳐냈다. 벨소리가 뚝 끊어졌다. 딸이 재빨리 핸드폰의 벨소리를 진동으로 바꾸었다. 바지 뒷주머니에 핸드폰을 꽂아 넣자마자 두 손을 프런트 위로 길게 내밀었다.
두 개 다 주세요.
프런트 직원이 우산의 방향을 딸에게로 틀었다. 그녀는 딸의 옷자락을 잡아끌면서 프런트 직원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하나, 하나면 돼요.
그녀의 한 손은 여전히 딸의 티셔츠 자락을 꽉 붙잡고 있었다. 그 바람에 딸의 가슴이 두드러졌다. 딸이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그녀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아픈 팔목을 어루만지며 딸의 몸을 돌려세웠다.
너 왜 이렇게 못됐니?
딸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되물었다.
누가 날 키웠는데?
따지듯이 그녀를 몰아세웠다. 그녀는 딸에게서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딸의 얼굴이 시뻘겠다. 그녀는 딸의 처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어쩌면 딸은 사는 게 밋밋한 정도가 아니라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을지도 몰랐다.
오래전이었다. 딸이 중학교를 다니던 무렵이었다. 중2 때였는지 중3 때였는지는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느닷없이 폭우가 쏟아지던 여름날이었다. 기상예보가 번번이 틀리던 시절이었다. 그녀의 퇴근 시간은 딸의 하교 시간보다 일렀다. 폭우 때문에 딸은 여느 때보다 일찍 하교했다. 그녀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는 일이었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이미 그녀는 딸의 하교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갈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도 죄책감이 들었다.
그녀가 재빨리 비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안방에서 나왔을 때, 딸은 막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중이었다. 딸의 교복이 홀딱 젖어 있었다. 귀밑을 겨우 가리는 짧은 머리카락이 딸의 머리통에 찰싹 달라붙어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딸은 메고 있던 가방을 거실 안쪽으로 내던지며 왜 날 혼자 집에 오게 만드느냐고, 악을 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왜 날 혼자 오게 해. 왜 혼자 오게 해.


프런트의 직원이 둘의 말다툼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저희 호텔에는 우산이 많아요.
그러고는 프런트 위에 놓인 검은 장우산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많아도,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혀를 달싹거렸다.
아끼시는 게 좋아요. 우리한테 이렇게까지 잘해 주지 않으셔도 돼요.
그녀는 곁눈질로 딸을 흘깃거렸다. 딸이 지금 그녀가 하는 말들을 듣고 있는지, 그냥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잘 새겨듣고 있는지 반드시 알아야만 했다. 아무리 혼자라도 타인에게 신세를 지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어느새 밀대를 밀던 여자가 가까이 다가와 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가씨, 엄마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예요?
딸이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기분이 언짢아진 쪽은 오히려 그녀였다. 그녀는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여자 역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여자의 시선이 온순하다 못해 따뜻했다. 그녀는 맥이 빠졌다.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간신히 삼켰다. 여자에게 퍼부을 소리가 아니었다. 화가 났다기보다 견딜 수 없이 슬퍼졌을 뿐이라는 걸,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괜찮아요, 우리 딸은 원래 그런 딸이 아니에요.
그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여자는 밀대를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옮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울상이 되어버린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자는 뒤돌아서서 다시 밀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좀 전보다 훨씬 기운에 찬 몸짓으로 밀대를 죽죽 밀며 앞으로 나아갔다. 연신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 로비의 안쪽으로 빠르게 멀어져 갔다.


그녀는 도저히 우는 딸과 함께 시내 구경을 나서고 싶지 않았다. 왜 날 혼자 오게 만드느냐고 소리치던 어린 딸 앞에서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고함을 질러대는 딸에게서 등을 돌리는 순간, 딸이 아주 오랫동안 나를 원망하겠다는 걱정이 앞서며 참담하기까지 했다. 몇 년 후 남편이 죽었을 때, 그녀는 문상객들의 위로 담긴 말들 앞에서 수시로 딸을 쳐다보았다. 이제 혼자서 어떻게 살아갈 계획이세요? 혼자가 되어버려서 얼마나 힘드세요? 그녀는 건성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딸의 표정을 살폈다. 딸이 혼자 서울에서 살아 보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도 그녀는 되묻고 싶었다. 하지만 혼자라거나 누가 누구를 내버려두는지 따위의 말들을 입에 올리면서까지 딸이 곤란해질 만한 질문을 던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자칫 딸마저 죄책감을 가질 확률이 컸다. 그녀는 딸의 자립을 지지하고 부추기면서 딸이 스스로 깨우치길 바랐다. 그동안 자신이 엄마에게 얼마나 모진 딸이었는지를 말이다.



5


혼자 있고 싶어.
엄마가 함께 방으로 돌아가자고 했을 때, 그녀는 울먹이며 엄마를 혼자 엘리베이터에 태웠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마자 그녀는 호텔 밖으로 뛰쳐나왔다. 프런트 직원이 쫓아와 그녀의 손에 우산을 들려주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직원이 우산 든 손을 그녀 쪽으로 더욱 길게 내밀었다. 두 눈을 끔벅이며 제발 사양하지 말아 달라는 눈빛을 간곡히 보냈다.
그녀는 직원의 기다란 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까만 재킷의 소매 끝에 달린 둥근 단추와 손목을 가리고 있는 하얀 셔츠의 소맷자락을 마치 진기하고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듯이 눈여겨보았다. 쭈뼛거리며 그녀는 우산을 받아들었다.
나무 손잡이가 달린 우산은 길고 묵직했다. 직원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그녀를 걱정스런 눈길로 쳐다보며 말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갑자기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겨우 네, 라고 대답했다. 오늘처럼 폭우가 쏟아지던 옛날이 떠올랐다. 엄마는 그녀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엄마를 노려보았다. 엄마의 손에 버젓이 차키가 쥐어져 있는 걸 보면서도 악에 받힌 말들을 서슴없이 쏟아냈다. 속으로 이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억지를 부리며 엄마에게 함부로 굴었다. 엄마가 안방 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 난 뒤에야 제멋대로 나불대던 혀가 멈췄다. 어떻게든, 뭐든, 혼자서 잘 해봐야겠다는 결심이 선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순전히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에서 비롯된 결심이었고 그것은 아직도 유효했다.
참, 그 우산 가지셔도 돼요.
그녀가 잡을 새도 없이 직원은 부리나케 호텔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녀는 더욱 부끄러워져서 우산을 펼쳐 얼굴을 가렸다. 둘이 쓰기에도 꽤 큰 우산이었다. 고개를 뒤로 젖혀 우산의 안쪽을 살펴보았다. 새것이었다. 사백십육만 원, 그녀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다시 우산을 접고 지하철역을 향해 달렸다. 손에 검고 기다란 우산을 쥐고 뛰니 더 속력이 붙는 것만 같았다. 집에 다녀오는 데 한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그녀는 얼른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몸이 흠뻑 젖어 있었지만 차라리 개운하기만 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텅 빈 집에 들어가 포스트잇에 짧은 메모를 휘갈겼다. 문 밖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현관문 손잡이에 그녀가 원래 쓰던 우산을 걸어 두었다. 지체 없이 호텔을 향해 움직였다. 벨소리가 끊임없이 울렸지만 애인에게서 걸려온 전화는 아니었다. 그녀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핸드폰을 가방 안에 쑤셔 넣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프런트 쪽을 휘 살펴보았다. 그녀에게 우산을 준 직원은 보이지 않았다. 한낮에 근무했던 직원들은 모두 퇴근한 모양이었다. 얼추 저녁 시간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방으로 올라갔다.
방은 어두웠다. 커튼이 모두 닫혀 있었다. 베개를 모로 베고 구부정하게 누워 있는 엄마의 머리 위로 침대 등만 은은한 빛을 냈다. 그녀는 짐짓 밝은 체하며 말을 걸었다.
엄마, 호텔에 누워 있으니 어때?
엄마가 남은 베개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신혼여행 온 것 같아서 좋아.
그녀는 형광등의 스위치를 켰다. 방 안이 확 밝아졌다. 시트와 베개가 가지런하게 정돈된 자신의 침대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한낮에 그녀가 잠시 머물렀던 침대는 아무도 다녀간 적이 없었던 것처럼 말끔했다.
아직도 비 와?
엄마가 나른하게 물었다. 그녀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젖은 몸을 가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한 손에는 기다란 우산마저 쥐고 있어서 더욱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더 많이 와.
거 봐라. 누가 날씨를 자기 맘대로 바꿀 수 있겠니.
그제야 그녀는 어제 엄마가 통화 중에 했던 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건 엄마와 그녀, 둘 중 어느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비가 와도.
엄마는 말을 하다가 멈추었다.
네가 오지 않으니까 내가 데리러 와야 하지 않겠니.
엄마가 천천히 등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 홀딱 젖은 그녀를 보곤 뒤늦게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서 뜨거운 물에 씻으라고, 그러지 않으면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라고 호들갑을 떨며 그녀를 욕실로 몰아넣었다. 그녀는 못 이기는 척 욕실에 들어가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욕실 문 앞에 모아 두었다.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금세 욕실에 뿌연 김이 가득 찼다. 그녀는 꼼꼼히 비누칠을 하고 얼굴을 세게 문질렀다.


반지르르 윤기가 흐르는 몸에 커다란 샤워 타월을 몸에 두르고 욕실 문을 열었을 때였다.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강경하고 단호한 어투로 엄마는 수화기 너머 사람에게 또박또박 일렀다.
우리 딸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녀는 온몸이 굳은 듯 욕실 문턱에 서서 꼼짝하지 않았다. 타월이 흘러내리지 않게 팔짱을 단단히 끼고 엄마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그렇게 키운 적이 없어요. 설령, 내가, 그렇게 키웠다고 해도, 우리 딸은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엄마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녀는 아주 오래전부터 엄마가 자신을 가르치던 방식이 지금 이 순간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그 말인즉슨 엄마가 단 한 번도 그녀를 제대로 혼낸 적이 없었다는 뜻에 다름 아니었다. 엄마는 어떤 경우에도 딸인 그녀에게 실망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녀는 뒷걸음질 치며 도로 욕실에 들어갔다. 살며시 욕실 문을 닫고, 김이 서린 거울을 지나 욕조로 향했다. 수도를 틀었다. 수도를 좌우로 움직여 흐르는 물의 온도를 손끝으로 가늠했다. 서서히 욕조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여태 연락이 오지 않는 걸 보니 애인은 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의 걱정과 달리 일이 잘 해결되었을지도 모르고, 벌써 영창에 끌려갔을지도 몰랐다. 집에 문을 잠갔으니, 어차피 그녀가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늦게 도착하더라도 호텔 주소를 적어 두었으니 만나려고 들면 방법은 많았다. 우산도 하나 받아 두었으니, 엄마와 외출도 별 무리가 없을 터였다. 그녀는 욕조에 걸터앉은 채로 크게 소리 질렀다.
엄마, 엄마도 씻어.
문 밖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녀는 따뜻한 물이 가득한 욕조에 한 손을 깊숙이 넣었다가 빼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엄마.




작가소개 / 황현진(소설가)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명지대 문예창작 박사 수료.
2011년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 장편소설 『죽을만큼 아프진 않아』가 있음



《문장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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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마음 없이 김지연 안지는 이른 결혼을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아니, 그걸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이혼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안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그때 이혼한 일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더 행복해졌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늘 그에 대해 변호하고 싶은 여러 말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은 안지의 비밀은 아니었지만 먼저 나서서 밝히지도 않았다. 어릴 때 안지는 무척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그런 표현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속해야 하는 집단에서 튀지 않는 사람, 아주 평균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다. 찬반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서 좋아하고 친구의 것과 비슷한 브랜드의 신발을 사서 신었다. 친구들이 싫어하는 선생을 따라서 싫어했다. 사실 안지는 그 선생에게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떡볶이를 먹다가 술술 흘러나온 그 선생에 대한 욕을 듣고 재빨리 노선을 바꿔 함께 욕을 했다. 한동안 안지는 수학 시간마다 왜 애들은 저 선생을 싫어할까? 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더 열심히 선생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수학을 가르친다는 점만 빼면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이 쉽게 답할 수 없는 내용을 골리듯 물어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학생들한테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뭔가 잘못 알고 섣불리 화를 냈을 때, 그러다 결국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선생들은 그러게 헷갈릴 만한 짓을 왜 하고 다니느냐고 도리어 짜증을 부렸는데 그 선생은 재빨리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알았어. 미안해. 가끔 안지는 머릿속으로 그 목소리를 재생해 보곤 했다. 그 때문에 선생이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싫어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나?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안지는 대학에 갔고 연애를 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결혼도 했다. 아주 평균적인 삶이었다. 조금씩 빠르기도 했다. 조바심이 나 있었으므로. 자신도 남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도 올리기 전 임신을 해 낳은 아이가 막 돌을 지난 참이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결혼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계속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낙태를 밀어붙이지 않은 것을, 시간을 끌다가 영영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 것을, 어떤 결단력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을 때는 안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혼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겨우 육 개월을 만났을 뿐

  • 관리자
  • 2024-07-01
소금 샹들리에

소금 샹들리에 정한아 호주에 사는 김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4명이 만나는 건 대략 7년여 만이었다. 방을 잡고 밤새 보자고 해서 오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남편이 등을 밀었다. 정민이와 자신에게도 내가 없는 날이 필요하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정말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친구들과는 대학 동기였다. 전공은 문예 창작이었는데, 나는 2학년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가 된 사람은 나뿐이라고 친구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십 수 년 전 내가 낸 단 한 권의 책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세 명 모두 미혼이었고,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철 지난 옷차림에 좀처럼 대화에도 섞이지 못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술자리도 즐거웠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7년 전 정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울어 줬고, 이후에도 종종 아이의 간식과 선물을 집으로 보내 줬다. 서서히 연락을 거둔 것은 내 쪽이었다. 애써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에 부쳤을 뿐, 그들에게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들 술에 취해서 침대로 간 뒤에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cctv 속 거실은 엉망이었다. 엎어진 식판, 사방에 흩어진 블록 조각, 길게 늘어진 옷가지들. 남편은 불도 끄지 않고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나는 정지화면 같은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해 뜰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맛집마다 대기가 길어 종로의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앞장서 구글 맵을 보며 걷던 김이 갑자기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책을 사야겠다고 말했다. 지난 이사 때 내 책을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책을 다시 보내 주겠다고 김을 달랬다. 다섯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그 작은 서점에 내 책이 있을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김은 막무가내로 서점에 들어갔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가 전면 책장에 전시된 내 책을 발견했다. 죽은 친구를 만났다고 해도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애 씨!”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우아한 노부인이었다. 린넨 바지에 화이트 셔츠, 큼지막한 호른 목걸이를 한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반장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안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래전 나와 함께 공부했던 문우였다. H 백화점 문화센터 소설 창작 교실의 반장. 친구들이 책을 구경하는 사이 나는 그녀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ldqu

  • 관리자
  • 2024-07-01
그동안의 정의

그동안의 정의 최예솔 작정하고 사라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윤정수를 작정하고 찾지 않았다. 보통의 남매 사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정수와 나를 그냥 보통 남매, 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을까. 윤정수는 나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그리 적지도, 그리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 차이 덕분에 윤정수와 나는 딱히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수는 중학교에 갔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윤정수는 고등학교에 갔다. 물론 윤정수와 내가 영 친해지지 못한 건 우리의 나이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윤정수는 내게 없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수도 없고 센스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고 돈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나? 아무튼 남매 사이에 정이라도 있었다면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이유조차 없었다. 쥐뿔도 없는 윤정수니까. 특이사항이라곤 개그맨 윤정수와 동명이인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는. 그러니 윤정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지. 뭐 내가 찾는다고 윤정수가 나타났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나는 막연히, 어련히 때 되면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정수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윤정수가 죽었다.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니까, 윤정수는 서른넷에 죽었다. 이제 내게 남은 혈육은 없다······ 아닌가? 고모.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낯설어. 저도 고모가 낯설어요. 윤현수는 맹랑하다. 윤정수와 장현아의 딸이라고 해서 윤현수. 그거 좀 유치하지 않니? 물었을 때 윤현수는 뭐 어때요 엄마아빠말곤 모르는데, 하고 대답했다. 이제 나도 아는데? 하니까 이젠 고모도 모르는 척해 달라고 했다. 참 나 어디서 이런 게 굴러왔는지. 현수야. 네. 네 엄마 입국 날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아직 한참 남았네. 고모도 고모 할일을 해요. 시간 금방 갈걸요. 알겠다 그래. 윤현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장현아다. 이제는 나흘쯤 됐으려나.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가 봤더니 장현아가 윤현수의 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장현아는 다짜고짜 윤정수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오랜만에 듣는 윤정수의 이름에 잠깐 벙쪘다가 네, 저희 오빠네요, 하고 대답했다. 조카입니다. 그날 장현아의 대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도저히 내가 아는 사람이 뱉을 만한 말이 아니어서 대사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직도 문득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윤현수가 정말 나의 조카가 맞고 장현아가 정말 나의 새언니가 맞을까. 가족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는 거라면 이제까지 윤정수와 나는, 또 윤정수와 나와 우리의 부모는, 왜 이렇게 흩어지거나 죽거나 혼자 남을

  • 관리자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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