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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15-04-01
  • 조회수 2,066



표본




서현경





나는 박제에서 태어났다.
언제나 그 방문이 열리면서 시작된다. 문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은 단 한 번도 그의 모습을 제대로 비추지 못한다. 그는 거대하고 거칠게 부풀어 오른 채 그림자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다. 문이 닫히고, 어둠 속에서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눈을 감는다. 그것은 끝없는 꿈의 시작이다. 꿈속에서 꿈이 이어지고, 아무리 눈을 뜨고 꿈에서 깨어나려 해도 여전히 나는 겹겹이 쌓인 꿈속이다. 얇은 피부만 남을 때까지 몸속이 다 파내어진다. 넓적한 끌이 긁고 지나간 자리를 솜이나 플라스틱으로 다시 채워질 때까지 밤은 계속된다. 왼쪽 골반 위에서 생생하게 시작된 찢기는 고통은 꿈이 끝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의 방이 두려웠다. 그는 하루 서너 시간만 일을 했지만, 언제나 그에게서는 섬뜩하게 메마른 포르말린 냄새와 비릿한 생명의 기운이 뒤섞여 풍겨 나왔다. 이제는 살아 있지 않은 존재의 살아 있을 적 흔적과 마주친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일인지. 죽음이라는 마침표가 사라진 그의 방은, 그래서 끊임없이 죽음의 순간이 되풀이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아직도 망설이고 있었다. 그가 위독하다는 소식은 한참 후에야 전달되었다. 십 개월 만에 배에서 내린 직후였다. 그는 여전히 살아 있긴 했다. 다행이라는 안도감 대신 떠오른 생각은, 죽음이 허락되지 않는 그의 불길한 방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죽음이 사라진 방에서 그는 아직도 살아 있었다. 문고리에 손을 올리며 나는 숨을 멈췄다. 이제 이 방을 열어야 했다.
“그 방이 아니다.”
어머니가 알려준 방은, 하필이면 내가 사용하던 방이었다. 그가 내 방에 있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죽지 않았다. 이 두 가지 사실을 곱씹으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머무르던 때와 같은 냄새가 났다. 그의 체취는 조금도 맡아지지 않았다. 갑작스레 흉터가 욱신거려 손으로 왼쪽 골반 위를 덮어 눌렀다. 나는 길게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고, 이 행동을 오해한 듯 어머니가 내 어깨를 가만히 토닥여 주었다.
그제야 침대에 누운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눈을 감은 채였는데, 숨을 쉬거나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피부를 온통 뒤덮은 검고 구불거리는 털이 흰 침구와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베개를 베고 이불을 덮은 모습이 어색할 정도였다. 코 밑에 빼곡하게 돋아 있는 털이 미동도 없었다. 그러나 내가 한 발 다가서자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남보다 유독 깊이 자리 잡은 눈동자는, 그래서인지 조금의 변색도 없이 하얗고 깨끗했다. 어두운 갈색으로 빛을 반사하는 둥근 홍채는 크고 선명했다. 자유자재로 확대되고 수축되는 동공의 움직임은 민첩하지만 과정을 고스란히 포착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의 눈은 특별했다. 나는 그의 눈동자에서 단 한 번도 표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서로 다른 종(種)이기에 교감할 수 없는 체계를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그 이유가 그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 믿게 되었던 것 같다. 그의 눈은 아름답고 시선을 끌 정도로 그윽했지만,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달랐다. 하지만 설령 우리가 서로 다른 종이라 하더라도 단 하나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나를 유언집행자로 정했다. 하루 늦게 도착한 형은 그런 결정을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형은 언제나 그랬다. 그와 관련된 일이라면 언제나 내게 우선권이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나는 어째서 내가 그의 죽음에 개입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강제로 그와 가까운 사이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결국은 꼼짝없이 집에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나는 아침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깼다. 집을 떠난 후 사라졌던 증상이었다. 귀에서는 자꾸만 어린 시절 내내 들어오던 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는데도 말이다.


그의 작업은 새벽부터 시작되곤 했다. 무언가 부러뜨리고 긁어내는 소리가 매번 내 잠을 방해했다. 마을 사람들은 사냥 중 귀한 동물이 잡히면 그에게 가져왔다. 그러나 그가 사람들과 직접 만나는 일은 없었다. 그에게 일감을 전달하는 것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일감은 항상 소란을 불러왔다. 찾아오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서커스에서 목격한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를 직접 보고 싶어 고집을 부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그것 자체로 진기한 볼거리라 여겼다. 짐승의 모습을 한 그가 동물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고, 놀라우리만치 섬세한 솜씨로 그것을 완벽하게 복원해 낸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구경거리로 길러진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에 돌아서는 것은 그들이었다. 어머니는 보통의 남자보다 체격이 컸고, 그런 그녀를 이길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이 돌아가면 어머니의 손에는 어김없이 동물의 사체가 들려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손에 들린 사체를 보는 것이 좋았다. 아름다운 털과 빛나는 비늘을 보고 있으면, 어째서 사람들이 이 모습을 영원히 남겨 두고 싶어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특별하고 진귀한 존재는 오직 그였다. 그녀는 그를 완벽하게 보호했다. 울타리를 절대 벗어나지 않는 그를 위해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가족은 그를 위한 우리 안에 함께 살았다.
일을 끝내면 그는 항상 밖으로 나갔다. 언젠가 그의 뒤를 몰래 뒤따른 적이 있었다. 숨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더운 날씨였다.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노랗게 바스러진 빛이 눈앞을 흐리게 했다. 건조한 열기와 미심쩍게 솟아오르는 습기가 대기 중에 뒤섞여 짓눌려질 것 같은 날이었다. 그는 검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손등을 여유 있게 덮은 셔츠 끝자락으로 구불거리는 검은 털들이 정전기라도 인 듯 거꾸로 타오르고 있었다. 귀를 덮을 만큼 높이 솟은 빳빳한 깃 위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그가 더위를 참아 가며 취한 방식은 별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심하게 굽은 허리와 앞으로 둥글려진 어깨를 어색하게 펴고 걸어가는 그는 두 발로 걷는 법을 배운 네발 동물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그가 향한 곳은 건물을 빙 돌아서 어른 걸음으로 사십 보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뒷마당이었으니 말이다. 그는 뒷짐을 지고 마당을 서성거렸다. 때때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으나,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런 모습이 내게도 제법 사람처럼 보이기는 했다. 움직임 때문은 아니었다. 그 움직임 속에 묻어 나오는 고독감이 그 이유였다. 아니, 그저 고독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었을까. 그가 걷는 중간 중간 하늘을 올려다보며 쏟아내던 한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가끔씩 숨이 막힌다는 듯 셔츠 깃 중앙에 손가락을 걸어 잡아당기는 행동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구부정한 그의 어깨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반 바퀴를 돌아설 때마다 내게 보였던 뒷모습은 다시 반 바퀴를 되돌아올 때까지 그를 보통의 남자로 보이게 했다.
뒷마당에는 둥글게 붉은 흙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맨몸뚱이를 드러낸 땅은 그의 이미지와 상반되면서도 잘 어울렸다. 다른 곳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억센 잡초들이 마구잡이로 올라와 있었지만, 그 부분만은 잡초가 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 매일 수도 없이 밟고 밟았던 땅에는 식물이 자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마치 그의 방 같았다. 무엇도 살아남을 수 없는 곳, 거기, 딱 그만큼이 그가 외출하는 자리였다. 동네를 돌아다니지 못하는 것은 온몸을 수북하게 뒤덮은 검은 털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박제를 핑계로 그의 작업실 안으로 끊임없이 진입을 시도하는 것도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의 방 안에는 바로 그 박제가 있었다.
박제는 그를 많이 닮았다고 했다.


나는 자주 그를 닮은 박제를 상상했다.
박제를 만든 사람은 그의 아버지였다. 그 남자는 전문 박제사는 아니었다. 거실 장식장 중앙에 놓인 사진을 통해 나는 그 미끈한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가끔 사진을 들여다보며 어머니는 형이 유독 남자를 많이 닮았다고 말하곤 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연계성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남자의 특징은 대체 무엇을 거쳐 형에게로 온 것일까. 당장 물을 수도 있었지만 입을 닫았다. 어머니가 알려줄 잃어버린 고리에는 알고 싶지 않은 나의 태생적 시작이 함께 담겨져 있을 것 같았다.
남자는 노름꾼이었다. 지독한 호기심과 비겁한 모험심만 가슴에 가득 들어찬 사내였다. 어쩌다 ‘그’의 어머니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그녀를 결혼이 가능한 대상으로 인식한 것이 바로 그 호기심과 모험심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그렇게 심심한 두 욕망이 만나 만들어진 그는 남자의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결과물이었다. 그를 마치 보험이라도 되듯 이 집에 남겨 두고, 남자는 그녀와 함께 다시 떠났다. 시골 장터를 돌며 그들이 만들어내는 프릭 쇼는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 꾸며진 것인지 모를 공포심으로 사람들을 홀렸다. 지형이 소문을 막아서는 시절이었지만, 언제나 세상은 남자와 그녀의 출연보다 앞서 두 사람을 알고 있었다. 남자의 쇼를 한번 맛본 사람들은 보통의 서커스 따위는 쇼도 아니라고 말했다. 쇼는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녀가 죽은 것이다.
남자는 잠시 고민했다. 그녀는 쇼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었다. 물론 출연자들 중에는 그녀를 넘어서는 외모를 갖춘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사람이었다. 아무리 비극적인 기형을 갖고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들을 두고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자는 없었다. 그녀는 그래서 특별했다.
태어나자마자 서커스단에 팔린 그녀는 대부분의 생을 벗은 채로 지내 왔다. 그런 자신의 상태에 특별히 부끄러움을 느끼지도 않았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검고 굵은 털로 뒤덮인 탓에 어차피 맨살이 드러나지 않기도 했다. 구부정한 자세로 유독 짧은 팔을 앞으로 애매하게 뻗는 것이 그녀가 가장 편하게 취하는 자세였는데, 그 모습은 반대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뻗은 팔이 쉬지 않고 위아래, 혹은 양옆으로 움직이고 있어서 간신히 균형을 잡기라도 한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옷가지나 머리장식을 사용하지 않으면 성별을 알 수도 없었다. 가끔 이빨을 드러내고 웃을 때면, 고르지 않은 치열에 긴 송곳니가 두드러져서 으르렁대는 것 같았다.
특히 눈동자. 짧은 털로 수북하게 덮인 눈꺼풀 아래, 아주 깊숙이 자리 잡은 그녀의 눈동자와 마주하면,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것은 다른 생물의 눈이었다. 나는 그들의 고민을 너무도 잘 이해했다. 내가 그를 바라볼 때마다 느꼈던 괴리감과 알 수 없는 연민을 느꼈을 거다. 그래서 확신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짐승이라고. 사람의 언어를 터득한 보통보다 영리한 짐승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녀가 아이를 낳았다. 남자와의 사이에서. 아이의 존재를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남자가 인정한 일이니 사람들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사람이란 말인가. 종을 분류하는 기준에서 가장 우선하는 것이 바로 번식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으니, 이것에 분명한 답을 한 그녀를 두고 사람들은 그래서, 정말 이것이 사람이란 말인가, 라고 몇 번이나 중얼거렸을 것이다.
남자는 집에 두고 온 어린 그를 떠올렸다. 그의 존재가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아직은 어려서 쇼에 세울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정말로 자신을 위한 보험이 되어 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당장 고민해야 할 것은 그가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여자를 어떻게 활용 할 것인가, 였다.
남자가 찾은 곳은 종로 거리였다. 박제상들이 줄지어 늘어선 거리에 도착했을 때, 아니, 그녀의 사체를 한 박제상에 맡겼을 때, 그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사람들은 소문을 퍼트린 것 역시 남자라고 말했다. 두 달에 걸친 박제 제작이 끝날 즈음, 남자가 새롭게 선보일 박제에 대한 사람들의 기다림은 정점을 찍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그런 인물이었다. 남자의 부모들이 충격과 슬픔을 이겨내고 헌신적으로 어린 그를 돌보는 동안, 남자는 또다시 길을 떠났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할지도 모를 박제를 챙겨서.
남자의 박제는 세상을 끌어 모았다. 박제 옆에는 언제나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반드시 자신을 그녀의 남편이라 소개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단어가 의미하는 관계, 관계에서 시작된 비인간적인 잔인함을 감지하지 못했다. 결국 그렇게 그녀는 죽은 후에도 사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상이 전부 보았다던 그 박제를 내 가족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우리 중 누구도 그의 작업실에 함부로 들어서지 않았다. 가족들은 그를 존중했다. 그리고 그를 사랑했다. 나는 그들의 그에 대한 사랑을 보고 자랐다. 그러나 내 태생적 시작이 물음표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나는 그 사랑 역시 잃어버린 채 태어났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믿어버렸다.
나는 박제에서 태어났다고 말이다.


그의 박제는 최고라 평가받았다. 당연했다. 그에게 박제란 신성한 의식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어머니가 처음 그를 만났을 당시에도 그의 기술은 이미 뛰어났다고 한다. 그녀는 만약 남자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헐값에 그를 넘겨주지는 않았을 거라고 덧붙였다. 처음 그가 죽은 동물의 사체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그가 사냥을 해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후 그는 자신이 만든 박제를 어머니에게 건넸다. 그들의 관계는 바로 그 박제로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쨌든, 비록 사실을 모른 채 그를 떠나버렸지만, 남자는 그를 박제사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남자가 몇 년 만에 그를 찾아왔을 때, 당연히 그 박제도 함께였다. 극단은 점차 쇠락해 가고 있었고, 박제의 약발도 시들해지던 참이었다. 남자는 어린 그에게 박제가 어떤 충격을 줄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겁에 질려 눈물을 흘리는 동안, 남자는 그의 알 수 없는 눈빛을 바라보며 작은 몸 전체에 돋아난 검은 털을 만져 보았다. 그의 얼굴 어디서도 자신을 닮은 구석을 찾아낼 수 없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그는 앞으로 새로운 쇼를 책임질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그와 가까워지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의 털이 손에 닿는 순간, 남자는 예전에 그녀를 안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온몸을 뒤덮은 털이 두 사람의 체온조차 나눌 수 없게 만들었다. 남자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알 수 없는 표정들 사이로 투명한 눈물이 고였다. 그것이 남자를 움직이게 했다. 무방비하고 미개한 생명을 소유한다는 비이성적인 만족감이 남자를 사로잡았다. 남자는 확신했다. 이것으로 세상에 없는 유일한 존재를 영원히 손에 넣었다고. 남자의 만족감은 다음날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으로 반감되었지만, 대신에 그녀의 한결같은 충성심이 그 자리를 채웠다.
남자는 그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떠나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를 달래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이야기가 필요했다. 잠시 고민하던 남자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너는 사람이다. 그 말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던 그는 박제로 눈을 돌렸다. 누구도 그에게 이렇게 말해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 왜냐면, 너는 내 아들이기 때문이지. 그는 고집스럽게 자신과 닮은 박제만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남자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남자는 그녀가 사람이라는 것을 세상에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모든 사람이 그녀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까지 그녀의 모습을 남겨 놓아야 했다고. 그녀가 죽은 후 소문으로만 떠돌게 될 것이 두려웠다는 말과 함께, 남자는 다시 한 번 힘주어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사람이니까.
그의 시선이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왔을 때, 남자는 자신의 이야기가 제대로 먹혀들었음을 확신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오래전 마주했던 그녀의 것과 같았다. 남자는 그의 손에 넓적한 끌 하나를 쥐어주었다. 박제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남자가 할 법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남자가 들려준 이야기만은 제법 그럴싸해, 그는 결국 남자가 쥐어준 그 끌을 이용해 최고의 박제를 만드는 박제사가 되었다.
그런데 사회의 정서가 변하기 시작했다. 죽은 짐승의 사체로 집 안을 장식하는 것이 불편해진 세상이 되었다. 개인적인 의뢰가 뜸해지자, 뒤따르던 소란도 줄어들었다. 그래도 일은 한동안 이어졌다. 주로 박물관 일이었는데, 특히나 표본 상태가 좋지 않을수록 그를 더 필요로 했다. 대부분 개체수가 줄어 포획이 금지된 종들이었다. 박제로 남길 가치가 그만큼 높아졌다. 이미 죽어 있는 상태로 발견된 것들이라, 표면의 훼손 정도가 덜해야 제작이 가능했다. 일이 줄었지만 일의 흔적은 더 짙어졌다. 냄새는 문틈 사이로 서서히 집 안을 잠식해 갔다.
그러나 이런 일이 언제까지나 이어질 수는 없었다. 낯선 종이 발생해 새로운 표본이 필요하지 않는 한, 일감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항상 같은 일상적 리듬을 유지해 갔다. 오전에는 일을 하고, 점심을 먹은 후 뒷마당을 서성였다. 더 이상 돈을 벌지 않아도, 생계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었을 때도 그는 여전히 일을 했다. 나는 박제를 멈추지 않는 그가 혐오스러웠다. 집 안 전체에 밴 냄새는 뒷마당의 좁은 원이 선명해지는 것만큼이나 그를 더 뚜렷하게 느끼게 했다.


그와 나의 거리는 잘 유지되고 있었다. 내가 그날 그 방에 들어가기 전까지 말이다. 형이 그가 말하는 걸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고 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 말에 자랑이라도 하듯 난 들은 적이 있다고 받아쳤는데, 사실 아직도 이게 어린아이의 거짓말이었는지, 실제 경험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찌 됐든 당시의 나는 확인해 보고 싶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 음성이 정말로 그의 것이었는지 말이다. 만약에 내가 정말로 들었다면, 그건 그의 작업실 안에서였을 것이다. 그 방. 어떻게 거길 들어가게 되었는지, 언제 일어난 일인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난 그의 작업대 옆에 서 있었다. 그때의 내 눈높이가 그의 작업대를 아주 살짝 웃돌 정도였는데, 덕분에 작업 대상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것은 여우였다. 방 안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고, 불빛이라고는 작업대가 놓인 벽면 중앙에 설치된 조명이 전부였다. 조광이 어찌나 낮던지 불빛이 여우의 귀와 한쪽 눈, 주둥이 일부만 간신히 비췄다. 적은 광량은 강제로 나를 여우에게 집중하게 했다. 빛이 닿는 곳을 오랫동안 주시하도록. 여우는 검은 물속에 일부가 잠긴 듯 그렇게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한 올 한 올 섬세하게 돋아 있는 털은 손을 대지 않아도 부드러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여우와 나의 입장이 바뀌었다.
여우의 한쪽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박제가 되어 멈춰 있는 쪽이 내가 되기라도 한 듯 그렇게 얼어붙었다. 날렵한 근육마다 잔뜩 힘이 들어찬 여우는 당장이라도 내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을 것처럼 도약하기 직전이었다. 웃고 있는 듯 옆으로 벌어진 주둥이 사이로 뜨겁고 축축한 입김이 닿는 것 같았다. 여우는 생기가 넘쳤다. 움직임을 빼앗긴 채로 죽은 듯 멈춰 있는 나를 찬찬히 훑어보는 표정은, 슬펐다. 살아 있는 자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죽음에 대한 강렬한 부정은, 살아 있는 것보다도 더 생생하게 남겨져 나를 짓눌렀다. 그때 그가 입을 열었다. 아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너를 많이 사랑한다. 나도 언젠가는 너를…….”
방 안에는 그와 내가 있었다. 나는 확신했다. 내가 예전에 들은 그 소리는 분명 그의 것이었다. 기억은 여기서 갑작스럽게 끊어졌다. 내 몸에는 흉터가 남았다. 그의 작업 도구를 만지다가 생긴 흉터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방에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처음부터 집 안에 숨어살다시피 한 것은 아니었다. 초라한 극단을 끌고 이곳에 이르렀을 때, 남자에게 남겨진 것은 그와 박제, 그리고 몇 마리의 동물이 전부였다.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의 주머니를 열기 위해 남자가 그에게 요구한 일들은 차마 입에 올리기 힘든 수준이었다. 남자는 그를 길들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굳이 길들여질 필요가 없었다. 남자는 그의 아버지였다. 그는 그저 아비의 말을 따를 뿐이었다. 그러나 남자의 말에 감춰진 의미는 그를 위험하고 야만적인 존재로 비추게 했다. 저 낯설고 위험스러운 짐승이 무엇보다도 사람을 닮았다는 사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더 큰 공포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를 마음대로 부리는 남자에게 절대적 힘을 부여했다.
그가 어떻게 어머니의 시선을 사로잡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어머니에게도 무모한 모험심과 호기심이 존재했던 것 같다. 남자는 극단을 미련 없이 처분하고 떠났다. 남겨진 그는 평생 처음으로 자신과 같은 종의 상대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가 처음 그를 거둬들였을 때, 사람들은 환호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유희거리 중 하나를 마을에 유치했으니 반기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환호는 두려움과 배척으로 변해버렸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그래서 세대가 변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변심하기까지는 채 두 해도 필요치 않았다.
마을에서 그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더 이상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그즈음 되니 사람들은 새로운 자극을 원했다. 그들의 관심은 그 박제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와 똑같은 모습의 낯선 생명체가 하나 더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들은 그가 과연 어디서 생겨난 것인지 알고 싶어 했다. 그가 틀림없이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떠벌려 줄 남자는 이제 없었지만, 그래도 사람인 남자와의 사이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아이를 낳았다는 존재가 그들은 궁금했다. 스스럼없이 박제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제 사람들은 박제가 박물관에 전시된 공공재라도 되는 양 굴었고, 그것을 공개하지 않는 그에게 분노했다. 애초에 박제를 만든 이유가 바로 세상에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는가.
호기심은 갈수록 광폭해졌다. 아무것도 내보이지 못하는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미묘하게 변해버렸다. 그는 보호자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그들에게 학대당했다. 분명하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주기적이지도 않아서 쉽사리 처벌할 수 없는 정도에서 사람들의 학대는 이어졌다. 단지 그 박제를 공개하지 않았을 뿐인데, 그는 자신의 정체성도, 안전할 권리도 모두 잃어버렸다. 그때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어머니가 이 모든 소란을 잠재울 변화 하나를 가져왔다. 임신이었다.
어머니의 임신이 사람들이 기대하던 무언가를 증명해 준 것은 아니었다. 그 임신으로 태어난 이가 바로 형이었기 때문이었다. 미끈한 외모 어디서도 그의 종을 증명해 줄 단서는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사람들로부터 안전해졌다. 집 안으로 완전히 숨어들기 전에도 그들은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못했다. 그는 ‘제 어미의 박제를 가진 자’였기 때문이었다. 그간 깨닫지 못했던 진실을 사람들은 어느 한순간 눈을 뜨기라도 한 것처럼 집단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어미의 박제를 집 안에 두고 있었으며, 그것은 바꿔 말하자면 사람의 시신과 함께 지낸다는 의미였고, 그 역시 박제사였다. 사람들은 어머니가 불러들인 저 기이한 존재가 더 두렵고 거북해졌다. 그가 자신들 앞에서 모습을 감출수록 그들은 집요해졌다. 반드시 눈으로 보고 그가 사람인지, 혹은 안전한지 확인하려 했다.
나는 그가 집 안에 은거하게 된 이유가 결국 외로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때 그는 마을 모두가 주목하는 뜨거운 관심사였다. 그에게 쏟아지는 감정은 그것이 두려움이든, 우월감이든, 무엇에서 기인했든 간에, 난폭할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무엇도 언젠가는 자신에게서 돌아서는 그 발걸음을, 결국 남겨지게 될 고독의 시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감정의 배출을 끝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그를 배척하는 것뿐이었다.
가족들이 견뎌야 했던 것은 사람들의 시선뿐만이 아니었다. 주기적으로 집 안을 수색하는 경찰들의 방문이 더 큰 문제였다. 만약 그 박제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쉽사리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사안이었다. 집은 불시에 검문을 받았다. 어느 정도 자주였냐면, 기온이 높아져 그 방에서 새어 나오는 악취가 집 앞 골목까지 흘러들 즈음에는 일주일에 세 번도 경찰이 찾아왔다. 그들은 신고가 들어오면 어쩔 수 없이 조사를 해야 한다며 미안해했지만, 번번이 문제의 박제를 찾아낼 수 없게 되자 바짝 약이 올라 돌아가곤 했다.
검문의 결과는 한결같았다.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를 제외한 누구도 그 방 안에 들어설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매번 박제가 발견될까 봐 노심초사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두려움을 더 키웠다. 그리고 매번 기이할 만큼 발견되지 않는 박제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것은 내게 작은 의심 한 터럭을 남겨 두었다. 그것이 자리 잡고 무성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춘기가 되고 인중과 턱이 거뭇해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울었다. 나에게 몸에 털이 무성해진다는 것은 공포였다. 이 감정은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나를 괴롭혔다. 아침저녁으로 면도를 해야 하는 나는, 그때마다 습관처럼 두려움을 가진 채 벗은 몸을 찬찬히 살폈다. 구불거리는 검은 털이 가슴팍과 배, 배꼽을 지나 사타구니까지 이어졌다. 사실 두려움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더 괴로웠다. 나는 스스로에게 들켜버린 것이다. 단 한 번도 그의 상태를 전염병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내 몸에 돋아나는 체모의 흔적에 기겁한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대답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온 지 두 주가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간신히 숨만 붙어 있을 뿐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또다시 들으며 나는 멀미약을 씹어 삼켰다. 뱃사람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증상이었다. 육지 멀미는 배를 타야만 비로소 가라앉았다. 다시 배를 타려면 몇 달은 지나야 했다. 보통 육 개월 배를 타면 육 개월은 육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나는 주로 조선소 안에 지어진 선원들을 위한 숙소에서 시간을 보냈다. 육 개월 단위로 배를 타면 한 해는 두 걸음으로 지나갔다. 삼 개월 단위일 때는 네 걸음, 이런 식으로 뱃사람들의 시간은 너무하다 싶을 만큼 빠르게 흘렀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후로 시간이 멈춰버렸다. 나는 이틀에 한 번 내 방에 들어가 그를 들여다보았다. 혹시라도 호전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의사가 아니라 수의사의 도움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는 사후 정리를 내게 부탁했지만, 그의 사후는 영영 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내가 방에 들어가면 그는 눈을 떠 내 모습을 확인했다. 얼굴을 빼곡하게 덮은 털은 전체적으로 바랜 느낌이었다. 마치 생기를 잃기라도 한 듯이 톤이 한층 옅어져 있었다. 털 사이로 그의 맨살이 보이는 듯도 했다. 그러나 밀도가 워낙 높아 좀처럼 피부색을 확인할 수 없었다.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홍채가 찬찬히 나를 훑더니 한참을 한 곳에 머물렀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이 쑤시는 것 같아 나는 조금 뒤로 물러섰다. 나도 모르게 그 부위를 손으로 덮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시선이 내 행동을 따라 움직였지만, 눈빛은 놀라울 정도로 무표정했다. 입 꼬리가 아래로 조금 흘러내리고, 약하게 고개를 젓는 것으로 보아 미안하거나 후회하는 정도일 거라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가 다시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떼며 이제 괜찮다고 말했다. 그 말에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표정이 없는 눈동자 위로 순식간에 물기가 들어찼다. 그는 눈을 꼭 감았고, 틈새를 가린 털이 아마도 흘러내렸을 그의 눈물을 순식간에 감춰버렸다.
그가 아직도 이 흉터를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내가 지금 느끼는 것은 감동이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전에 다른 집으로 보내버린 개가, 몇 년이 지나 찾아갔을 때도 나를 알아보고 반겨 줄 때의 기분과 비슷했다. 흉터는 왼쪽 골반에서 배꼽을 향해 비스듬히 그어져 있었고, 크기가 제법 컸다. 지금도 종종 이것이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인 듯 쑤시거나 아팠다. 그래서 급작스레 그의 손가락이 흉터를 건드리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손바닥은 유일하게 맨살이 드러난 부위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언제나 두 손을 맞잡거나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는 방식으로 손바닥을 감추곤 했다. 그 맨살이 지금 내 흉터에 닿아 있었다. 순식간이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더니 내 몸을 붙들었다. 그러더니 엄지손가락이 흉터를 사정없이 파고 들어왔다. 당장 살을 뚫고 들어가 양옆으로 흉터를 벌릴 기세였다. 노랗고 두꺼운 손톱은 끝이 뭉툭해 실제로는 전혀 상처를 낼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막연한 나의 추측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무표정한 눈과 마주한 지금 새삼 깨달은 것은, 눈앞의 존재는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짐승이라는 사실이었다.
등 뒤로 문이 벌컥 열리고, 어머니와 형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제야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멈췄다. 나는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으면서 상처를 두 손으로 꾹 눌렀다. 안으로부터 무언가 흘러내릴 것 같아 몸을 잔뜩 구부렸다. 그는 다시 침대에 누워 손등을 이마 위에 붙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드러난 손바닥은 고목처럼 짙고 어두웠다. 딱딱하고 건조한 살과 닿았던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어머니가 애처로운 듯 그의 머리를 쓸어 주는 동안, 형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나와 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형의 눈에 떠오른 감정을 읽어냄과 동시에 내 입에서도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사람이 아니야.”
나는 도망치듯 밖으로 뛰쳐나갔다. 문득, 정말로 그 박제가 진짜 있기나 한 것인지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그가 정말로 사람인가, 라는 의문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내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사실 이런 게 아니었다. 거울 앞에 서서 수없이 되물었던 질문이 있었으니까. 해묵은 질문은 스스로 많은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완벽하게 해결되지는 않았다. 답은 그 방에 있었다. 이제는 문을 열어야 할 때였다.


방을 향해 달려갔을 때, 한동안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 감을 잡지 못했던 형과 어머니가 뒤늦게 쫓아왔다. 그러나 이미 문은 열린 후였다. 문 너머는 가라앉은 심연처럼 어두웠다. 대체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덮치듯 밀려든 것은 바로 냄새였다. 그것은 그의 냄새였고, 그리고 그 방의 냄새였다. 치밀어 오르는 신물을 몇 번이나 삼켰다. 방에는 애초에 형광등이 없었다. 나는 더듬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가 커튼을 걷었다. 그리고 곧바로 노출된 방 안의 광경에 현기증이 일 것 같아 눈을 감았다. 어머니와 형의 반응 역시 나와 비슷했다.
방 안 곳곳에 살아 움직이는 박제들이 가득했다. 바닥, 벽, 천장 할 것 없이 자리 잡은 그들은 그 수가 엄청났다. 사방에서 나를 향해 달려들 것만 같은 박제들 틈에서 나는 두려움마저 느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으로 공간 전체가 꿈틀거렸다. 죽음이 허용되지 않는 공간, 그래서 끝없이 죽음이 되풀이된다고 믿었던 그 방은, 넘쳐나는 생동감으로 폭발할 것 같았다. 나는 압도적인 그들 앞에 얼어붙었다. 그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날의 여우처럼 슬픈 눈으로 나를 가엽게 바라보았다.
“이거 다 죽은 거 맞아?”
형은 문 앞에서 한동안 방 안을 살피기만 했다. 박제들의 움직임이 더욱 위협적인 이유는, 모두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레 등장한 우리를 보기 위해 호흡을 멈춘 듯 보였다. 밀려드는 거대한 파도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참았던 에너지가 일순간 터져 나와 우리를 덮칠 것 같았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서로에게 달라붙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짊어진 고독의 무게이자 상처의 깊이였다. 상처 입으면서도 결국은 그리워했던 것이다. 자신을 바라봐 주는 타자의 시선을. 그는 이런 시선으로 인해 인생이 얼마나 부당하게 흘러갔는지 잘 알았을 터였다. 그런데도 만들고 또 만들어서, 구부정하게 앉아 있는 자신의 등 뒤로 쏟아지도록 채워 넣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그런 그의 삶이 박제되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팔을 붙들고 한참을 소용돌이치는 움직임 속에서 헤매다 간신히 구석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이제 막 먼지가 쌓이기 시작한 오래된 박제였다. 그와 꼭 닮은, 여자라고 해야 옳을 테니, 여자였다. 박제는 한 자리에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것을 조금 이동시키자 바닥에 선명한 자국이 났다. 그녀가 그간 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짧은 시간 이뤄지는 탐문에서 제대로 된 공무를 수행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들은 그저 버티는 것도 버거웠을 것이다.
어머니는 문제의 박제를 발견한 순간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몇 번이나 정말 있었구나, 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런 태도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 박제를 눈으로 확인한 것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검은 털로 뒤덮인 얼굴이 내 쪽을 향해 있었다. 고르지 못한 치열을 드러낸 채 울부짖는 듯 인상을 쓰고 있는 표정이 공격적이었다. 의도가 다분한 연출이었다. 흡사 그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러한 착각이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도저히 그 박제를 다른 박제들과 같은 마음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저것은, 아니, 그녀는 나의……. 나는 이쯤에서 더 이상의 생각을 멈추었다.
눈길이 가는 것은 그녀의 옷차림이었다. 지금 당장 거리에 나간다 해도 전혀 어색할 것 없어 보였다. 박제는 살아 있는 상태의 모든 것을 최대한 생생하게 재현해 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어떤 한 지점, 그 존재가 살았던 시간 중 단 한 점을 골라 멈춰 놓은 것에 불과했다. 한번 만들어진 박제는 그렇게 영원을 버텨내야 했다. 그는 여자에게 무엇을 주고 싶었던 것일까.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의 옷차림만은 박제되지 않고 시간을 쫓아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문득 표정이 사라진 그의 눈을 떠올렸다. 그 눈이 무엇을 닮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이었다. 유리로 만들어진 의안.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방 안에 살아 존재하는 박제들마다 박혀 있는 제각각의 의안들은 하나같이 그의 눈빛을 닮았다. 그는 정말로, 박제에서 태어났다.
박제의 검은 털은 탐스럽고 부드러웠다. 한때 그도 이런 검은 털로 뒤덮인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그는 더 젊고, 때로는 보통의 남자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끝이었다. 나는 그에게 끝을 주고 싶었다. 실체가 없는 소문은 붙들릴 수 없었다. 제멋대로 부풀려지다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출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내 태생의 고리 역시 영원히 사라지길 바랐다.


그날 밤, 봉인되어 있던 기억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방에 들어가 있었다. 작업대 위를 살피기 위해 다가가는데 방문이 열렸다. 돌아보는 사이 문은 다시 닫혔다. 방 안에 불빛이라고는 작업대 위를 비추는 작은 조명이 전부였고, 문 근처는 완전한 어둠에 감춰져 있었다. 나는 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문을 전부 가릴 듯 크고 위협적으로 부풀어 있는 그의 모습은 평소 내가 몰래 뒤를 밟던 조용하고 소극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유연하게 움직였다. 온몸으로 이 공간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하고 있었다.
그가 곧장 나에게 다가왔다. 두 손으로 내 어깨를 잡아 번쩍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나는 작업대 위에 놓이게 되었다. 털이 무성한 얼굴이 다가오더니, 나와 눈이 마주쳤다. 소름끼치게 무표정한 눈동자였다. 낯선 종에 대한 공포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을 무렵,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의 목소리나 어투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놀랐다. 그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말들을 내뱉었다. 그리고, 내게서 지워졌던 마지막 말이 분명하게 들려왔다.
“너는 내 아들이다.”
그리고 곧바로 왼쪽 아랫배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순식간에 파고드는 고통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까무러쳤다.
나는 기억을 되짚는 동안 흉터를 손으로 강하게 누르고 있었다. 마치 이 모든 기억이 흉터에서 기어 나오기라도 하는 듯 압박했다. 그러나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그의 말은 기어코 손가락 틈으로 빠져나오고야 말았다.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닦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어차피 누구도 이 눈물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니 말이다.


그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의사는 그가 간신히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고 덧붙이고 의사가 돌아간 후, 나는 다시 내 방에 들어섰다. 내 인기척을 느끼고도 지난 며칠간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코 밑의 털들이 호로록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그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러나 눈에 띄게 털의 윤기가 사라졌다. 수북하게 돋아 있던 털이 모두 가라앉아서인지, 그의 몸 전체가 줄어든 것 같았다. 그는 결국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가 죽은 후 공개된 유언장에는 충격적이지만 너무도 그다운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는 자신을 박제해 주길 원했다. 사후 모든 정리를 나에게 일임하겠다던 그의 요구에 나는 당연히 통상적인 장례 절차를 구상했었다. 그런데 박제라니! 대체 누가 그를 박제한단 말인가!
변호사가 떠난 후, 방 안에는 죽은 그와 우리 가족이 남았다.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말이 안 돼요. 사람을 어떻게 박제를 해요, 어머니. 그리고 이 말을 꺼내는 내 얼굴은 달아올랐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그 말만 되풀이했다.
어머니는 완고했다. 고인의 유지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뜻을 꺾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히자 당황스러웠다. 이런 상황에서도 형은 언제나 그렇듯 어떤 의견도 내놓지 않았다. 그와 거리를 제대로 유지한 것은 결국 내가 아니라 형이었던 것이다. 나머지 박제에 대한 처분은 모두 어머니에게 맡길 테니 그와 ‘그분’의 박제는 화장을 하자고 말을 꺼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이것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정말 중요한 건 그들의 박제야!”
‘그들의 박제’라는 말에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입 밖으로 어떤 말이 터져 나올 것 같았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나조차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격앙된 얼굴로 입을 열려던 어머니는 내 얼굴에 떠오른 두려움을 보았는지 맙소사, 라고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어머니는 후회하고 있는 걸까. 평생을 감춰 온 속내를 들키게 된 이 상황을 말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그와 함께하며 겪었던 무수한 고충들을 보상받길 원했다. 그는 오랫동안 최고의 박제사로 손꼽혔다. 남겨진 박제들은 아마도 가치가 엄청날 것이다. 이제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가 생겼는데, 그걸 쉽게 포기하기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지금까지 지켜 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끝내 어머니의 허락을 얻지 못했다.
삼일장이 치러지는 동안, 그를 찾아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마저 참석하지 않은 초라한 장례식이 끝나고, 화장을 했다. 그들을 태우는 일은 쉬웠다. 말라붙은 박제는 거대한 연료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여자는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는 듯, 자신과 자신을 꼭 닮은 아들의 몸뚱이를 순식간에 태워버렸다. 그들은 그렇게 소문보다도 빨리 사라졌다.


항해 일정이 앞당겨졌다. 조만간 배에 오르면 오랫동안 땅을 밟을 일이 없을 것이다. 나는 멀미약을 씹어 삼켰다. 며칠 잠잠하던 육지 멀미가 다시 시작되었다.




작가소개 / 서현경(소설가)

1982년 서울 출생. 서울여자대학교 언론영상학과 졸업. 2011년 《문화일보》에 단편소설 「나비」로 등단.



《문장웹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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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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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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